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2014년 4월 15일 14시 09분 등록

추억여행 (구달칼럼#1)                                                                                  김종호

(우리의 성소를 찾아서...)                                                                                             2014.4.14.

 

3월의 마지막 날, 봄이 오는 전초병의 날이자 아버지의 기일이기도 하다. 노인들이 세상을 버리기에 좋은 날인가? 유독 모진 겨울의 터널이 끝나고 기다리던 꽃피는 봄날을 코앞에 둔 이 즈음에 사람들이 많이 세상을 떠나간다. 우리 아버지도 4년전 그렇게 세상을 뜨셨다.

 

해마다 이 맘 때가 되면 찾는 고향 부산이지만 이번에는 감회가 좀 새로웠다. 아내가 이번에는 좀 일찍 가서 우리의 결혼할 무렵 우리의 추억의 장소를 돌아보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25년 만에 우리 추억의 장소를 찾아 보았다. 때마침 이른 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 옛날 우리가 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던 광복동의 한 허름한 찻집. 일직선으로 이어진 3층까지 오래된 나무계단을 오르노라면 삐거덕 거리는 소리가 우리만의 밀실로 향하는 길을 재촉하듯 야릇한 기분을 북돋우곤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통차에 향초 내음이 가미된 그윽하고 아련한 향이 먼 나라로 우리를 안내하듯 했다. 그곳은 소화방이라 불리던 전통찻집으로 대낮에도 촛불을 켰다. 그 촛불 덕에 우리는 만나면 해가 지는 것도 몰랐다. 창이 거의 없고 촛불로만 조명을 한 탓에 훤한 대낮도 밤처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린 만나면 서로 읽은 책 이야기로 시간을 잊었다. 어떤 때에는 저녁 먹는 것 조차도 잊고 몰두하다가 늦은 저녁을 먹고는 헤어지기를 못내 아쉬워하기도 했다. 어떤 장소는 그 장소,  공간에 서려있는 어떤 기운이 있기 마련이다. 그곳이 그랬다. 그 곳에 들기만 하면 우린 우리도 모르게 현실을 까맣게 잊고 책의 바다를 유영하는 두 마리 물고기가 되곤 했다.

 

이 곳은, 말하자면 책을 매개로 한 우리 부부의 사랑이 태동한 우리만의 성소(聖所)인 셈이다. 그런데 이번에 가보니 이 찻집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 당시도 삐걱거리는 계단이 있을 정도로 낡은 건물인지라 헐리고 휘황한 새 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여기가 어딘가, 부산의 명동이 아니던가? 장소가 곧 돈인데 추억의 성소인들 그 긴 세월 속에 온전할 수 있으랴! 우린 쓸쓸한 가슴을 안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사라졌지만, 이 곳은 아내와 나에게는 단지 찾아가는 기쁨만으로도 선물이 되었다. 우리는 추억으로 풍요로워졌다. 이제 사라진 소화방은 우리 가슴 속에 추억의 성소(聖所)로 자리 잡았다. 우리의 추억이 이 곳에서 영적 차원으로 승화한 것이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때 그 곳에서 우리가 시간을 잊고 책 이야기를 나눈 것이 <신화의 힘>에 나오는 행운의 바퀴의 굴대를 잡고 있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 그곳에서의 우리의 이야기는 혼인서약이나 다름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때 사실상 우리의 진정한 결혼은 이루어 졌으며 그 곳은 둘 만의 신화가 태동한 성소가 된 것이다.

 

바퀴는 굴대가 있고 바퀴살도 있고 테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성할 때나 아플 때나, 넉넉할 때나 가난할 때 나, 올라 갈 때나 내려올 때나... 나는 그대를 중심으로 맞아 들이고 그대를 천복으로 좇는다.”

 

우리는 그렇게 소화방의 촛불 덕에 혼인을 했다. 왜 결혼을 화촉을 밝힌다고 표현하는지 그때 실감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준비 안된 신랑과 신부였다. 결혼이 진정으로 무얼 의미하는 건지 모르고 있었다. 환경과 문화가 전혀 다른 화성녀와 금성남이 만나 결혼이란 걸 했으니(그때 아내는 간호사, 나는 항해사 출신이었다) 어찌 잡음이 없었겠는가? 결혼과 동시에 나의 직장을 따라 서울로 이주를 했으니(아내는 이걸 결혼 호조건으로 생각했겠지만) 생면부지의 땅에서 30년의 세월을 서로 모르고 지내던 남남으로 만나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항상 부딪치는 문제의 핵심은 내가 결혼했음에도 결혼이란 관계에 헌신할 자세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결혼이 뭔지 제대로 몰랐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해석일 게다.  매번 일을 핑계 삼아 이틀이 멀다 하고 고주망태가 되어 들어오기 일쑤고, 직장도 1, 2년이 멀다 하고 옮기다가 공부한다고 1년을 허송하기도 했으니, 부산 새댁이 서울에 와서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겠나 가히 짐작이 간다.

 

내가 그때, 결혼의 의미를 알았더라면, 아니 <신화의 힘>이라도 읽었다면 아내가 보따리도 싸지 않았을 것이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빌어 스타일 다 구기지도 않았을 텐데…… 여하튼 그 명문을 여기 공개한다.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반쪽이 다시 재회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고 분리된 생활을 접고 하나로써 사는 것이다. 결혼은 결국 자기와 자기의 만남이다결혼은 시련이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진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다.

 

IP *.196.54.42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52 [16] 나도 무엇이 되고 싶다. [8] 써니 2007.07.02 2991
1251 자연으로... [1] 희산 2009.08.02 2991
1250 웬만한 과일나무 다 있다 [2] 정야 2013.09.12 2991
1249 쌀과자_#34 개구리동영상 [2] 서연 2012.12.24 2993
1248 [칼럼 23] 한 놈만 팬다. file [1] 송창용 2007.09.10 2994
1247 (39) 할 일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 [11] 박승오 2008.01.07 2994
1246 [23] 최선이 아닌 최선의 선택 [7] 최지환 2008.10.12 2995
1245 [삶을 바꾸는 가족여행] 서문4th_가족여행을 권함 file [7] 양경수 2011.12.04 2995
1244 [칼럼16] 불편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 [8] 余海 송창용 2007.06.29 2998
1243 또 다른 자신의 모습 - 아바타 [1] 정야 2010.01.25 2998
1242 '놓아버림'이 전환을 줄수 있을까? [5] 박경숙 2010.10.31 2998
1241 웅변학원의 변천사 - 스피치 전성시대 file [1] 샐리올리브 2012.12.31 3000
1240 <7월 과제- 아빠, 남편 그리고 아이가 없는 그녀> [6] 수희향 2009.07.14 3002
1239 [2-19] 첫 명절 풍경 [1] 콩두 2013.10.13 3002
1238 (27) 젊은이의 특별한 권리 [6] 박승오 2007.10.09 3004
1237 [15] 두 눈에 흐르는 이 눈물의 의미는 무얼까? [9] 정야 2009.07.20 3006
1236 오리엔탈 펜싱 마스터9 -훌륭한 코치의 조건은 없다 백산 2009.11.27 3006
1235 [18] < 타임머신 2탄> [2] 먼별이 2009.08.24 3007
1234 짬뽕은 역사다 [8] 종종 2014.06.02 3007
1233 혼자놀기-신이 숨겨둔 장난감 찾기놀이 우제 2007.10.21 3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