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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1일 00시 10분 등록

사랑이란

10기 김정은

 

 

대학교 1학년은, 카오스 즉, 혼돈의 시간들이었다. 갑자기 누리게 된 무한 자유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남자 형제가 없었고, 여중, 여고를 다니면서 여자 친구들과 관계 맺는 법은 자연스레 터득했다. 하지만 남학생들이 많은 과에 얼마 안 되는 여학생 몇 명 중 한 명이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큰 키에 큰 덩치, 거기다 짧은 헤어 스타일을 한 나와, 그 많은 남학생들과의 사이에 우정으로든, 사랑으로든 제대로 가까워질 수 없는 어정쩡한 거리가 있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카오스 속에서 나는, 박쿠스 신이 재림한 듯 술을 마시고 다녔다. 평소엔 과에 몇 명 안 되는 여학생들 중 한두 명 예쁜 여학생들에게만 관심을 갖는 남학생들이었지만, 술자리에서는 언제나 나를 찾았다. 술 마실 때, 마치 차력쇼를 벌이듯 몸 사리지 않고 마셨던 나는, 그들의 젊음과 사랑에, 또 캠퍼스의 낭만에 기꺼이 뜨거운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이다. 졸업한 지 한참 된 선배가 행사 때 나를 찾는 걸 보면, 나는 캠퍼스에서 박쿠스의 신으로 꽤나 유명세를 탔던 것 같다.

 

대학교 1학년, 끝도 없는 혼돈 속에서, 내겐 친구가 된 남학생들이 몇 차례씩 사랑을 경험했을 무렵, 찬 바람이 불고 낙엽이 한 닢 두 잎 떨어지던 날, 나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학과 사무실로 핑크 빛깔 손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수신인은 다름 아닌 나! 학과 사무실이 떠들썩 했을 만큼 난리가 났다. 편지 봉투를 뜯었다. 당시 인기를 누렸던 홍콩 배우를 연상시키는 잘생긴 남학생 한 명이 떡 하니 서 있는 사진 한 장과 정성스런 손글씨가 감동적인 편지 두 장이 들어있었다. “당신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로 시작하는 그 편지엔 한 남자의 신상이 낱낱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는 박쿠스의 여신인 나를 실제로 한번 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나는 중성적인 매력으로 여중과 여고 시절엔 꽤 인기를 날렸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이후로, 특히 남학생이 많은 과에서, 내게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나에게 학과 사무실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의 관심을 보인 이는 그가 처음이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던 날, 우리는 만났고, 나는 그만 감정의 카오스에 푹 빠지고 말았다. 나에게 찾아온 사랑의 감정은 내가 기대했던 아름다운 감정이 아니었다. 프로크리스를 사랑하는 케팔로스처럼, 나는 갖가지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렸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에 나는 늘 불안해했고, 그가 보이는 관심이 진심이 아니라고 의심하며, 나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이라도 전수 받아야 했던 것일까. 사랑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불신,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했던 내 첫 사랑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했다. 그에게 이별을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만의 동굴로 들어갔다. 그와 함께 한 시간 동안, 부정적인 감정들로 얼룩진 내 가슴을 통째로 꺼내어 비우고 싶었다. 나 혼자 너를 차지하겠다는 이성간의 사랑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를 잊는 것으로 내 대학 생활의 절반을 썼다.

 

햇살이 화사했던 대학교 4학년의 어느 봄날, 또 다시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나를 불안하게 했고, 믿지 못하게 했던 원인은 모두 자신에게 있으며,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들어달라고 했다. 우리는 만났고, 그는 고백했다. 나를 처음 만났을 당시에 그는 대학생이 아니었으며, 그 사실을 밝히지 못해 속이고, 또 숨기느라, 진심으로 나를 대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그는 나와 비슷한 스펙을 쌓게 되었단다. 그러니 다시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 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나만큼 진실하고 순수한 사람은 만날 수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나는 내 미숙했던 첫 사랑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내 나름대로 정의 내릴 수 있었다. 사랑은 환상이 아니다. 사랑은 기다림도 그리움도 아니다.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다. 사랑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사랑은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가 내게 진실을 털어 놓고, 나와 함께 성장해 갔다면, 우리의 사랑은 아름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나 사이에, 불신으로 인한, 불안과 의심이 자리잡았었기에, 우리는 진실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의심이 낳은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있다. 바로 케팔로스와 프로크리스의 이야기이다. 신화 속 케팔로스와 프로크리스는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했고, 결혼했으며, 행복한 신혼 부부였다. 두 사람은 상대방을 존중하며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벽의 여신인 에오스가 케팔로스에게 반하게 되어 그를 유혹한다. 하지만 프로크리스를 향한 케팔로스의 사랑이 변하지 않자, 에오스는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이라는 자주와 함께 케팔로스, 프로크라스 부부 사이에 '의심'을 불어 넣는다. 의심에 사로잡힌 케팔로스는 프로크리스의 정절을 시험했고, 프로크리스는 그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상처받은 부부는 서로 더 이해하기로 결심하고 화해하지만, 사냥을 나간 케팔로스를 의심한 프로크리스는 남편이 던진 창에 맞아 죽는 비운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나의 첫 남자 친구는, 스스로 치부라고 생각하는 것을 내게 말하면, 내가 그를 떠날 것이라고 내 사랑을 의심했던 것 같다. 나는 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심하는 것은 고통스러웠고, 우리는 곧 이별했다. 그는 다시 나를 찾아 왔지만, 한번 깨진 신뢰를 회복할 수 없었다. 우리가 다시 만났다 해도 행복해지지 못 했을 것 같다. 한번 신뢰를 잃은 사랑은 케팔로스와 프로크리스처럼 서로 의심하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다. 사랑한다면, 진실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하는 것, 함께 가는 것,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미숙했던 사랑으로 깨달은 나의 사랑에 대한 정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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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1 00:41:49 *.104.9.186

돌이켜 보면 늘 자격지심이나 열등감 따위로 누구에게 진심으로 다가가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나, 저 무렵엔요.

때문에 혼자 설레이다 말거나 어쩌다 관계가 맺어지더라도 늘 한발을 빠져있었던 것 같아요.

글을 읽으면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맛있는 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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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1 17:02:40 *.65.153.234

그 때는 그랬군요... 피울님도 추억담이 많으실 듯 하네요~~

부럽기는요^^;;; 맛있다고 하시니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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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1 01:33:44 *.124.78.132

이제는 신화가 되어 버린 첫사랑 이야기! 글을 읽는 내내 설레임을 감출 수가 없었답니다 ^^

사랑 때문에 많이도 울고 잠못 이루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네요. 다 지금은 한바탕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추억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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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1 17:03:58 *.65.153.234

녕이~~ 설레였어?? ㅋㅋ 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는 것 같아~~

녕이의 예쁜 사랑 이야기도 듣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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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1 08:27:55 *.50.21.20

완전히 나를 내보인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그때쯤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겉에 걸치고 있던 이성의 갑옷을 전부 벗어제꼈다고 느꼈던 순간도 지나고 보면 그 안의 더 깊은 벽은 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곤 했죠.  특히 저처럼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정말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게다가 자의식은 넘치는데 돈을 벌지 못해 아직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자격지심이 있던 시절에는 저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설익은 마음들로 혼란스럽고 생생한 빛깔로 빛나던 날들이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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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1 17:10:02 *.65.153.234

해언~~ 그지?? 나를 내보인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인 것 같아.... 이번에도 나를 안 들어내는 칼럼을 쓰려고 작정했었는데... 글쓸 땐 또 나를 안 드러내는 것이 어렵네....^^ 언젠가... 드러내는 것, 안 드러내는 것 고민없이 드러내든, 안 드러내든 아름다워질 날을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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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1 12:49:23 *.94.164.18

박쿠스

나만큼 진실하고 순수한 사람은 만날 수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사랑한다면, 진실로 사랑해야 한다.


박쿠스가 여자였구나. ㅋㅋ

나도 한번 그 타이틀 갖고 싶지만 그것은 플루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결심을 해야 가능할것 같은 단어.

다음 세상을 기약해야겠다.


추억을 가졌다는 것은 두고두고  놀 수 있는 놀이터를 하나 장만한거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웃고, 울고,  배우며, 성장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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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2 11:43:01 *.65.152.79

이성간에 우정을 맺는 것이 어색해서 술을 마셨었는데.... 덕분에 친구들은 많이 생겼지만.... 너무 마셨던 것은 역시 후회가 남네요^^

신화 읽으면서 잊고 살았던 엣 추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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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2 09:49:39 *.23.235.60

사랑이 환상이 아니라니 ㅠㅠ

그래도 환상이라고 말해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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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2 11:44:10 *.65.152.79

신비주의 당신에겐 사랑이 환상이기를~~~~^^

리얼리스트인 나는 사랑도 '리얼'이어야 하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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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2 11:01:49 *.252.144.139

이래서 부부연구원이 좀 그래.

앨리스의 과거가 낱낱히 알려지잖아.

형선씨가 그런건 다 이해해줄것 같긴해서 다행.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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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2 11:51:29 *.65.152.79

이 글 올리면서 머뭇머뭇 했답니다....

어찌 하다보니 이번주에 완성도 떨어지는 칼럼 3개를 쓰게 되었는데....

나머지 2개는 '아우구스투스'를 염두에 둔 '오비디우스'처럼 남편과의 사랑 이여기를 썼더라구요 하하^^

멋진 선배로 '변신'한 남편 덕분에, 쓰고 싶은대로 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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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7 14:34:24 *.160.136.230

연구원 해외 여행 수업. 테마는 사랑 이야기. 왜 많고 많은 주제중 그 귀한 시간 해외까지 가서

사랑 이야기를 나눌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었습니다.

비몽사몽간 동기들의 숨겨왔던 속살들이 펼쳐질 때 판도라의 상자속 보물들이 터져 나옴에,

그때서야 느꼈습니다.

 

사랑은 자신의 전존재를 감싸고, 성장 시키며, 끝내 나아가게 하는 투영의 그림자구나.

사랑함에 당신이 있음에 엘리스가 속해 있음에 10기는 행복 하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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