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앨리스
- 조회 수 1839
- 댓글 수 13
- 추천 수 0
10기 김정은
대학교 1학년은, 카오스 즉, 혼돈의 시간들이었다. 갑자기 누리게 된 무한 자유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남자 형제가 없었고, 여중, 여고를 다니면서 여자 친구들과 관계 맺는 법은 자연스레 터득했다. 하지만 남학생들이 많은 과에 얼마 안 되는 여학생 몇 명 중 한 명이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큰 키에 큰 덩치, 거기다 짧은 헤어 스타일을 한 나와, 그 많은 남학생들과의 사이에 우정으로든, 사랑으로든 제대로 가까워질 수 없는 어정쩡한 거리가 있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카오스 속에서 나는, 박쿠스 신이 재림한 듯 술을 마시고 다녔다. 평소엔 과에 몇 명 안 되는 여학생들 중 한두 명 예쁜 여학생들에게만 관심을 갖는 남학생들이었지만, 술자리에서는 언제나 나를 찾았다. 술 마실 때, 마치 차력쇼를 벌이듯 몸 사리지 않고 마셨던 나는, 그들의 젊음과 사랑에, 또 캠퍼스의 낭만에 기꺼이 뜨거운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이다. 졸업한 지 한참 된 선배가 행사 때 나를 찾는 걸 보면, 나는 캠퍼스에서 박쿠스의 신으로 꽤나 유명세를 탔던 것 같다.
대학교 1학년, 끝도 없는 혼돈 속에서, 내겐 친구가 된 남학생들이 몇 차례씩 사랑을 경험했을 무렵, 찬 바람이 불고 낙엽이 한 닢 두 잎 떨어지던 날, 나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학과 사무실로 핑크 빛깔 손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수신인은 다름 아닌 나! 학과 사무실이 떠들썩 했을 만큼 난리가 났다. 편지 봉투를 뜯었다. 당시 인기를 누렸던 홍콩 배우를 연상시키는 잘생긴 남학생 한 명이 떡 하니 서 있는 사진 한 장과 정성스런 손글씨가 감동적인 편지 두 장이 들어있었다. “당신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로 시작하는 그 편지엔 한 남자의 신상이 낱낱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는 박쿠스의 여신인 나를 실제로 한번 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나는 중성적인 매력으로 여중과 여고 시절엔 꽤 인기를 날렸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이후로, 특히 남학생이 많은 과에서, 내게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나에게 학과 사무실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의 관심을 보인 이는 그가 처음이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던 날, 우리는 만났고, 나는 그만 감정의 카오스에 푹 빠지고 말았다. 나에게 찾아온 사랑의 감정은 내가 기대했던 아름다운 감정이 아니었다. 프로크리스를 사랑하는 케팔로스처럼, 나는 갖가지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렸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에 나는 늘 불안해했고, 그가 보이는 관심이 진심이 아니라고 의심하며, 나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이라도 전수 받아야 했던 것일까. 사랑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불신,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했던 내 첫 사랑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했다. 그에게 이별을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만의 동굴로 들어갔다. 그와 함께 한 시간 동안, 부정적인 감정들로 얼룩진 내 가슴을 통째로 꺼내어 비우고 싶었다. 나 혼자 너를 차지하겠다는 이성간의 사랑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를 잊는 것으로 내 대학 생활의 절반을 썼다.
햇살이 화사했던 대학교 4학년의 어느 봄날, 또 다시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나를 불안하게 했고, 믿지 못하게 했던 원인은 모두 자신에게 있으며,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들어달라고 했다. 우리는 만났고, 그는 고백했다. 나를 처음 만났을 당시에 그는 대학생이 아니었으며, 그 사실을 밝히지 못해 속이고, 또 숨기느라, 진심으로 나를 대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그는 나와 비슷한 스펙을 쌓게 되었단다. 그러니 다시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 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나만큼 진실하고 순수한 사람은 만날 수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나는 내 미숙했던 첫 사랑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내 나름대로 정의 내릴 수 있었다. 사랑은 환상이 아니다. 사랑은 기다림도 그리움도 아니다.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다. 사랑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사랑은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가 내게 진실을 털어 놓고, 나와 함께 성장해 갔다면, 우리의 사랑은 아름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나 사이에, 불신으로 인한, 불안과 의심이 자리잡았었기에, 우리는 진실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의심이 낳은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있다. 바로 케팔로스와 프로크리스의 이야기이다. 신화 속 케팔로스와 프로크리스는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했고, 결혼했으며, 행복한 신혼 부부였다. 두 사람은 상대방을 존중하며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벽의 여신인 에오스가 케팔로스에게 반하게 되어 그를 유혹한다. 하지만 프로크리스를 향한 케팔로스의 사랑이 변하지 않자, 에오스는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이라는 자주와 함께 케팔로스, 프로크라스 부부 사이에 '의심'을 불어 넣는다. 의심에 사로잡힌 케팔로스는 프로크리스의 정절을 시험했고, 프로크리스는 그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상처받은 부부는 서로 더 이해하기로 결심하고 화해하지만, 사냥을 나간 케팔로스를 의심한 프로크리스는 남편이 던진 창에 맞아 죽는 비운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나의 첫 남자 친구는, 스스로 치부라고 생각하는 것을 내게 말하면, 내가 그를 떠날 것이라고 내 사랑을 의심했던 것 같다. 나는 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심’하는 것은 고통스러웠고, 우리는 곧 이별했다. 그는 다시 나를 찾아 왔지만, 한번 깨진 신뢰를 회복할 수 없었다. 우리가 다시 만났다 해도 행복해지지 못 했을 것 같다. 한번 신뢰를 잃은 사랑은 케팔로스와 프로크리스처럼 서로 의심하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다. 사랑한다면, 진실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하는 것, 함께 가는 것,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미숙했던 사랑으로 깨달은 나의 사랑에 대한 정의이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3992 |
첫 책 출간기획안 - 욕망과 에로스 ![]() | 미스테리 | 2014.04.21 | 2288 |
3991 | 욕망의 끝 [15] | 왕참치 | 2014.04.21 | 1905 |
3990 | 신화, 고대인의 로고테라피 [6] | 종종걸음 | 2014.04.21 | 2779 |
3989 | #2. 더 나은 모습으로의 변신 [6] | 녕이~ | 2014.04.21 | 2061 |
3988 | 칼리스토를 위하여 [5] | 에움길~ | 2014.04.21 | 2178 |
3987 | 나만의 지도 이야기_구달칼럼#2 [6] | 구름에달가듯이 | 2014.04.21 | 1956 |
3986 | 석류의 추억_구해언 [5] | 어니언 | 2014.04.21 | 2264 |
3985 | #2 그대에게 날개가 돋아나길 [4] | 희동이 | 2014.04.21 | 1874 |
3984 | #칼럼2_그대 마음속 영웅을 가졌는가?_찰나 [11] | 찰나 | 2014.04.21 | 2346 |
3983 | 첫 책 출간 기획안 [3] | 유형선 | 2014.04.21 | 1994 |
» | 사랑이란 [13] | 앨리스 | 2014.04.21 | 1839 |
3981 | #2 아구병에 걸린 인간에 대하여_정수일 [4] | 정수일 | 2014.04.20 | 2135 |
3980 |
추억여행 (구달칼럼#1) ![]() | 구름에달가듯이 | 2014.04.15 | 2160 |
3979 | 간절함에 대하여... [4] | 정산...^^ | 2014.04.15 | 2442 |
3978 | 3-1. 결혼기념일 여행 주간 [7] | 콩두 | 2014.04.15 | 3194 |
3977 | 그 겨울, 지리산 [5] | 장재용 | 2014.04.15 | 1885 |
3976 | 10기 페이스메이커 함께 해요 [5] | 유형선 | 2014.04.15 | 1875 |
3975 | 우리들의 다정한 장례식 - 강종희 [2] | 종종걸음 | 2014.04.14 | 1963 |
3974 | 나의 장례식 _찰나 | 찰나 | 2014.04.14 | 2311 |
3973 | 아직 죽지 못했습니다-장례식 후기 | 에움길~ | 2014.04.14 | 19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