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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1일 01시 48분 등록


Book Review


강종희


2014. 4.20

 


  1. 저자 만나기


 


Z


 


오비디우스, Publius Ovidius Naso는 기원전 43년 중부 이탈리아의 술모나에서 출생, 서기 17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사랑의 기술, 여류의 편지 등 당대에 대단한 인기를 누린 시인이었으며, 대표작 ‘Metamorphoses(변신, 기원전 8)’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정리한 최고의 역작으로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다. 


 


오비디우스는 버질, 호레이스와 더불어 라틴 문학사상 3대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활동한, 로마를 대표하는 최초의 시인으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본디 이탈리아 술모나의 부유한 기사 집안에서 태어난 오비디우스는 로마에서 관리가 되기 위해수사학과 웅변술, 법학 등을 교육받고 그리스 유학을 다녀와서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법률 공부보다는 시작이나 화려한 사교를 즐겨, 법정변론을 하려 해도 "말이 저절로 시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하의 팍스 로마나가 절정이던 시기로, 문화와 예술을 후원하는 메살라와 마케에나스(메세나의 기원) 활동을 통해 재능있는 문학지망들을 후원하고 있었고, 오비디우스는 타고난 재능을 발휘해 문단에 진출, 시인이자 사교계의 총아로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됐다고 한다.


 


그는 넘치는 문학적 재능과 기지를 발휘하여 당시의 연애 풍속도와 다양한 기술을 소재로 한 ‘Amres(사랑의 기술)’이라는 연애시 및 Heroides(여류의 편지)’를 발표,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특히 사랑의 기술은 이성을 유혹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등 파격적인 내용을 담아 로마의 풍속을 단속하려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기조와 어긋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황제의 딸과 손녀와 차례로 염문을 뿌린 것이 결정적 원인이 되어, 오늘날 루마니아의 콘스탄티아라는 벽지로 유배를 당해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다산 정약용이 그러하였듯, 이 평생에 걸친 유배는 오비디우스 본인의 입장에서는 불행한 일이었으나, ‘변신이라는 걸작을 남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유배를 당한 오비디우스는 그리스 신화를 기반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다양한 신화(이집트 신화, 인도 등)를 차용하고 트로이 전쟁사와 로마의 건국신화 등을 모두 엮어 로마의 정통성을 신화와 연결시키는 방대한 서사시를 집필하게 되었다. ‘변신은 오비디우스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두 개의 문학적 축 중 하나인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고전으로 오늘날까지 사랑 받고 있다.


 


여기서 잠깐, <오비디우스의 유쾌한 경망스러움>이라 이름한 역자 이윤기의 후기를 들여다보자.


 


Z340. 중세를, <기독교와 오비디우스의 시대>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이 말은 오비디우스가 그려낸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체계가 작가와 시인과 화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들 의 붓끝에 세례를 베풀고 끊임없이 그 시대로 돌아가게 했다는 뜻일 겁니다.


 


오비디우스의 <명쾌한 경망스러움은 주신 유피테르의 위대한 난봉을 연상시킵니다. 이 세상의 인간과 문화와 문명의 살림살이를 지어내고 온갖 개념을 시운전해낸 유피테르에게 난봉기가 필요했듯이, 신들의 세계를 엿보고 이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려 했던 오비디우스에게 약간의 명쾌한 경망스러움은 어쩌면 필요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불핀치의 그리스로마신화도 모두 원전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을 인용한 것이며, 암흑시대라 불리었던 중세에도 근근히 살아남아 중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텍스트로서 오비디우스의 저작들이 이 그토록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또 반갑다.


 


진정한 고전을 무자비한 시간의 횡포에 굳건히 이겨내어,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감동을 주는 문화유산이라고 할 때, 무려 2천년이 넘게 이어져 온 <변신>의 힘, 무엇보다 그런 책을 써낸 저자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물론, 답은 모르겠다. 그가 유배를 당했다는 사실이 오비디우스의 천재성을 한 곳에 집중하게 만든 계기는 되었을 것이다. 원래 오비디우스는 변신을 집필하기 전까지는 당대의 현실을 잡아내는 탁월한 감수성이 돋보이는 대중적 작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넘치는 재능을 하나의 주제로 모으고 집중하여 담아낸 작품, 가장 비참한 시절에 가장 절실한 이유, 오로지 아우구스투스의 분노를 풀고 로마의 정통성을 살려낸 작품으로 로마에 복귀하겠다는 일념으로 몰두한 이 작품 <변신>이 그의 대표작으로,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남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결국 현실에서 그가 바라던 화려한 복귀는 이루지 못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로마로 돌아가지 못했다. 당대에 그 결실을 보지는 못 한 것이다. 그러나 시인으로서, 문학가로서 한 사람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경지, 불멸의 작품을 남겼고 중세 시대를 살아남아 현재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영감이 되는 작품을 남겼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오비디우스라는 탁월한 시인이 완성한 자신만의 신화가 아닐까. 


 


오비디우스는 그렇게, 신화가 되었다.


 


(두산백과, 인명사전, Wikipedia, 변신(이윤기 저, 민음사) 역자 후기에서 발췌, 요약)


 


9k=


 


 


  1. 마음에 들어온 글

 


15.


  1. 서사


마음의 원()에 쫓기어 여기 만물의 변신(變身) 이야기를 펼치려 하오니, 바라건대 신들이시여, 만물을 이렇듯이 변신하게 한 이들이 곧 신이시니 내 뜻을 어여쁘게 보시어 우주가 개벽할 적부터 내가 사는 이날 이때까지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풀어갈 수 있도록 힘을 빌려주소서.


 

변신, metamorphosis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는 두 개의 문단이 여기 저자 오비디우스의 서사에, 그리고 역자 이윤기의 후기에 등장한다. 


 

341. 이 책의 원제인 <메타모포시스(변형(變形), 변신(變身)>는 사물이 비롯되는 정황을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에는 창조설이 있듯이 많은 문화권의 신화나 설화는 나름의 창조설과 전신설(轉身設)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원숭이의 원덩이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빨갛게 되었다느니, 게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게걸음을 걷게 되었다느니, 수수 대궁이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피가 묻게 되었는데 그래서 수수대궁이는 빨갛다는 식입니다.


 

물론 순진한 신화해석학에 속하는 이 <메타모포시스>리는 개념은 과학적으로는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한 개념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개념이 <시적 메타모포시스>라는 표현으로 바뀌면 그 성격은 사뭇 달려져서 오비디우스의 시대에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조금도 다름없이 유효한 개념이 됩니다. 따라서 오비디우스의 메타모포시스는 그 시대 사람들의 시적 상상력이 투사된 <시적 메타모포시스>쯤으로 이해되면 좋을 듯 합니다. 사실 <메타모포시스>라는 개념은, 세계의 모든 민족이 나름의 신화와 전설의 체계에서 자연과 인간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는 하나의 만병통치약 노릇을 해온 듯 합니다.


 

만물이 어떻게 기원하였는가, 그리고 어떻게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다. 만물이 매일의 생존, 즉 먹을 것을 구하고 추위와 더위와 온갖 자연적인 위험요소로부터 직접 자신을 구하는 행위에 긴밀하게 연관되었던 고대에 있어서 가차 없는 자연과 통제하기 힘든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였을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다른 민족들보다 좀 더 열심히 소구하였거나 보다 잘 보존해온 그리스로마권의 신화를 들여다보는 일은, 문명화와 인류의 기원을 들여다 보는 것 같은 의미와 재미가 있다.


 


15.


  1. 천지창조

    바다도 없고 땅도 없고 만물을 덮는 하늘도 없었을 즈음, 자연은, 온 우주를 둘러보아도 그저 막막하게 퍼진 듯한 펑퍼짐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 막막하게 퍼진 것을 카오스라고 하는데, 이 카오스는 형상도 질서도 없는 하나의 덩어리에 지나지 못했다. 말하자면 생명이 없는 퇴적물, 사물로 굳어지지 못한 모든 요소가 구획도 없이 밀치락달치락하고 있는 상태일 뿐이었다….

     

    만물은 서로 반목하고 방해만 했을 뿐이었다. 한 가지 질료 안에 있으면서도 추위는 더위와, 습기는 건기와, 부드러움은 딱딱함과, 무거움은 가벼움과 싸우고 있었다.

     

    16. 이 같은 반목에 종지부를 찍은 이는, 이런 요소들보다는 훨씬 빼어난 자연이라는 신이었다. 신에 다름아닌 이 자연은 하늘로부터 땅을, 땅으로부터 물을, 무주룩한 대기로부터는 맑은 하늘늘 떼어놓았다. 자연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지경에서 이들을 떼어내고는 서로 다른 자리를 주어 평화와 우애를 누리게 했다.   

     

    자연을 유일신이 창조하고 인간이 정복할 대상으로 보느냐, 세상을 있게 한 창조주 자체로서의 신과 동일한 것으로 보느냐는 기독교와 그리스신화의 근본적인 차이다.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한 자연, 존재 그 자체로서의 자연, 자연의 일부인 인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신의 존재를 하나로 보는 논리는 기독교라는 독특한 한 민족의 생존논리이자 권력논리로 기능한 종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자연발생적 신화나 종교에서 공유하는 부분이다. 자연스럽게, 인간=자연=신이 분리되지 않고 반목하지 않는 관계로 함께 존재한다.

     

    19. 그러나 이 짐승들보다는 신들에 가깝고, 또 지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다른 생물을 지배할 만한 존재는 없었다. 인류가, 인간이 창조된 것은 이즈음이었다. 이 인간은 세계의 시원이자 만물의 조물주인 신이, 신의 씨앗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고, 이아페토스의 아들 프로메테오스가 천공에서 갓 떨어져 나온, 따라서 그때까지는 여전히 천상적인 것이 조금은 남아있는 흙덩어리를 강물에다 이겨, 만물을 다스리는 조물주와 그 모양이 비슷하게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렇게 만들어진 인간은, 다른 동물들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늘 시선을 땅에다 박고 다니는 데 비해 머리가 하늘로 솟아 있어서 별을 향하여 고개를 들 수도 있었다. 이로써 모양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흙덩어리였던 대지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 품 안에 거느리게 된 것이었다.  

     

    , 즉 매일의 생존에 붙잡힌 현재만을 볼 수 있는 짐승들과 하늘, 즉 생존을 넘어선 문제, 신의 존재, 존재의 이유를 생각할 수 있었던 인간들의 차이를 참 쉽게 설명한 부분이 별을 향하여 고개를 들 수 있었다는 표현이다. 멋지다.

     

    21. 사투르누스(/크로노스) <시간>을 상징한다. 그리스어 <크로노스> <시간>이라는 뜻이다. 크로노스는 자식을 낳은 족족 잡아먹는 것으로 전해지는 데, 크로노스의 이러한 속성은 태어난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시간 자체의 속성을 상징한다. 사투르누스는 자기 자식인 유피테르 6남매도 모조리 삼켰다가 다시 토해낸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는 유피테르 5남매가 이로써 시간을 극복했음을 상징한다.

     

    자식을 잡아먹는 타이탄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이런 의미가 숨어있을 줄이야. 태어난 모든 존재,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곧 죽는다, 소멸한다는 것을 고대인들은 이렇게 설명하였구나. 시간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신의 존재를 크로노스를 굴복시킨 유피테르로 또 상징하는구나. 인간이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시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이라는 존재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30. 그는 이 순간, 언젠가는 바다와 땅과 창궁이 불덩어리가 되고, 엄청나게 큰 우주가 내려앉아 땅은 물론 천궁까지 폐허가 될 날이 올 것이라던 <운명의 서>에 기록된 예언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는 퀴클롭스가 만들어 바친 무기를 거두고는 다른 방법으로 인류를 벌하기로 마음먹었다. 즉 하늘 하나 가득 비를 쏟아, 물로써 인류를 멸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다

    31. 이 엄청난 물결에도 흔들리지 않고 온전히 서 있던 건물도, 제 키보다 더 큰 파도에는 첨탑 꼭대기 하나 남기지 못하고 물 속에 잠겼다. 이제 바다와 땅이 따로 없었다. 도처가 바다였다. 바다에는 해변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33. 고삐에서 풀려난 바다는 고삐에 묶인 산을 유린했고 파도는 그런 산의 봉우리를 어루만졌다. 일찍이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진경이었다. 인류의 대부분은 물에 빠져 죽었다. 요행히 홍수에서 살아난 인간도 오래 계속된 기근을 견디지 못하고 아사했다.

     

    물로써 인류를 멸망시키는 주제가 왜 여러 신화와 종교에서 반복되는 것일까.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더 이상 구원의 여지가 없는 인류를 벌하기 위해,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대홍수를 일으키는 것은 그리스신화와 성경이 완벽하게 동일한 논리와 전개로 따라간다.

     

    33. 물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을 즈음 데우칼리온이라는 사람과 그의 아내 퓌라는 조그만 배를 타고 이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데우칼리온은 그 많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바르고 의롭게 살아온 사람이었고 퓌라는 그 많은 세상 여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믿음이 깊은 여자였다. 데우칼리온 부부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코뤼토스의 여정들과 산신들과 테미스 여신에게 기도했다. 테미스 여신은 일찍이 신탁전에서 인류의 미래가 그렇게 될 것임을 예언한 적이 있는, 더할 나위 없이 현명한 여신이었다.

     

    유피테르는 물바다가 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피테르는 그 많던 사내들 중에서 오직 하나, 그 많던 여자들 가운데서 오직 하나만 살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둘에게는 지은 죄가 없다는 사실을, 이 둘 이야말로 직심스럽게 신들을 섬겨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아와 그 아내를 가리키는 표현과도 일치하는 듯. 가장 믿음이 깊고 바른 사람. 데우칼리온과 퓌라.

     

    38. 두 사람은 여신이 맡긴 뜻이 이른 대로, 산을 내려가면서 옷으로 머리를 가리고 띠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다음 돌을 주워 어깨 너머로 던져보았다….

     

    잠시 뒤 습기가 있는 부분, 돌 중에서도 눅눅한 흙이 분은 부분은 살이 되기 시작했고 딱딱한 부분은 뼈가 되기 시작했다. 돌의 결은 이름이 같은 베인<혈관>으로 변했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은혜로워라, 신들의 뜻이여.  지아비가 던진 돌은 남자의 형상을 얻었고 지어미가 던진 돌은 여자의 형상을 얻었다. 우리가 힘드는 일도 수나롭게 해내는 강인한 족속인 까닭은 이로써 설명이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가 우리의 근원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므로.

     

    종으로서 인간의 생존력과 번식력에 초점을 맞춘다면 인류가 타 생물 종에 비해 강인한 종인 것은 분명하리라. 강인하고 끈질기고 가차없는 종.

     

    48. 다프네는 이 기도를 채 끝마치기도 전에 사지가 풀리는 듯한, 정체 모를 피로를 느꼈다. 다프네의 부드러운 젖가슴 위로 얇은 나무껍질이 덮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나뭇잎이 되고 팔은 가지가 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힘있게 달리던 다리는 뿌리가 되고, 얼굴은 이미 나무꼭대기가 되고 있었다. 이제 다프네의 모습은 거기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랑을 느낀 신에게서 달아나다 궁지를 몰린 처녀가 최후의 방어를 위해 나무로 변신하거나 또 다른 사물로 변신하는 이야기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패턴이고, 다프네 이야기는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신의 사랑을 거부하는 여자는 어떤 심리적인 또는 자연적인 역동을 나타내는 상징인가. 나무가 되는 사람의 이야기는 또 뭐고. 공부가 부족하여 아쉽다.

     

    58. 이제 이오는 어엿한 여신이 되어, 흰 옷 입은 신관들을 거느린다. (: 이오와 이집트 풍요의 여신 이시스는 동일한 여신으로 믿어진다) 후일 이오는 에파포스라는 아들을 낳는데, 사람들은 이 에퐈포스가 유피테르의 씨를 받아 이오가 지어낸 아들이라고 믿는다. 이 아이귑토스(: 이집트) 땅의 신전에는 이오 신전과 에퐈포스 신전이 나란히 서 있다. 

     

    신화의 기원을 따질 때, 연대와 문화적인 영향력을 고려하였을 때도 그리스로마신화가 형성되던   당대에는 이미 강력한 도시문명을 구축한 이집트 문화가 몇 길은 위였을 것이다. 오비디우스가 한 일이든 또는 당대의 자연스런 문명의 전파 과정에서 이뤄진 일이든 이미 강력하게 자리잡은 타국의 신화를 자국의 막 형성되기 시작한 신화에 접목시켜 그 정당성과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이겠지. 유피테르가 그토록 많은 여인 또는 여신들과 바람을 피우고 자식을 낳는 것은 강력한 국가의 신이 정복하는 작은 나라의 토착신을 자국의 신화체계에 끌어드리려는 시도라 해석한 내용을 구본형 선생의 책에서도 읽은 기억이 있다. 맞을 것이다.

     

    128. 테이레시아스라는 사람이 양성을 경험한 내력은 이렇다. 어느 날 산길을 가던 이 테이레시아스는, 굵은 뱀 두 마리가 사랑을 나누고 잇는 것을 보고는 별 생각 없이 지팡이로 때려주었다. 남자였던 테이레시아스는 이 때부터 여자가 되어 7년간을 여자로 살았다. 8년 째 되는 해의 어느 날 똑같은 뱀이 또 뒤엉켜 있는 것을 본 그는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너희들에게, 때린 사람의 성을 바꾸어 버리는 기특한 권능이 있는 모양이니 내 다시 한번 때려줄 수 밖에….”

    테이레시아스는 뱀을 때리고는 원래의 성, 그러니까 남자로 되돌아왔다.

     

    양성을 경험한 인간. 성이라는 것이 자연적인 조건이면서 또한 얼마나 사회적인 조건인지. 이를 생각해본다면 이 둘을 다 경험한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다. 어슐러 르귄의 대표작 <어둠의 왼손>에서 시기에 따라 성을 달리하는 인류가 거주하는 혹성이 나온다. 그러면서 사회적인 성의 역할에 대한 고찰은 물론,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데 있어 성의 구분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상상하기 힘든 통찰을 보여준다. 테이레시아스는 이렇게 양성을 경험할 뿐 아니라, 신체적인 눈이 멀면서, 마음의 눈, 즉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 또한 의미심장하기 이를 데 없다. 남성이면서 여성이었고 인간이 볼 수 없는 미래를 보는 인간이라.

     

    136. , 그랬었구나. 내가 지금껏 보아오던 모습은 바로 나 자신이었구나. 이제야 알았구나., 내 그림자여서 나와 똑같이 움직였던 것이구나. 이 일을 어쩔꼬,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구나.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의 불길에 타고 있었구나. 나를 태우던 불길, 내가 견디어야 했던 그 불그 불을 지른 자는 바로 나였구나. , 이 일을 어쩔꼬. 사랑을 구하여야 하나? 사랑받기를 기다려야 하나? 사랑을 구하여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이냐? 구하는 것이 내게 있는데…. 내게 넉넉한 것이 나를 가난하게 하는구나.

     

    나에 대한 사랑이 파괴적이라는 것이구나. 사랑이던 뭐던 심리적인 기조가 나로 집중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 나를 들여다 보고, 멀리 또 떨어져서 관찰할 줄 알고, 어울리고 일하면서 바깥으로 집중의 대상을 정하여 에너지를 분출할 줄도 알아야 한다.

     

    148. 이러한 기적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이 에키온의 아들 펜테오스는 박쿠스에 대한 박해의 손길을 늦추려 하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을 보내는 대신, 몸소 키타이론 산으로 갔다. 신성한 축제 마당으로 선택된 이 산에는 신도들의 노랫소리와 외마디 고함소리가 하늘 땅을 올리고 있었다….

     

    맨 먼저 펜테오스를 알아보고 미친 듯이 달려 내려와 지팡이를 휘두른 사람은 바로 이 펜테오스의 어머니였다. 펜테오스의 어머니는 지팡이로 아들을 두들기면서 외쳤다.

    얘들아, 너희 둘 다 이리 와서 나를 도와다오. 이 멧돼지, 우리 밭을 들쑤셔놓은 이 커다란 멧돼지를 창으로 찔러 죽여야 겠다.”

     

    노파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열광해있던 무리들이 쏜살같이 이 기겁을 하고 서있는 펜테오스 왕쪽으로 돌진해왔다….

     

    펜테오스가 이렇게 비는데도 아우토노에는 이 펜테오스의 오른팔을 잘라버렸고, 또 한 이모인 이노는 그의 왼팔을 잘라버렸다

     

    무리가 몰려와 눈 깜짝할 사이에 펜테오스왕의 사지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가을바람이, 늦서리를 견디며 간신히 가지에 매달려 있던 잎을 떨어뜨리는 듯한 형국이었다.

     

    이 무서운 사건이 있고 나서 테바이 여자들은 무리지어 이 새로운 의식을 받아들였고, 앞다투어 제단에 향을 피워 이 신을 섬겼다.

     

    디오니소스를 모시는 이 신비한 의식을 고대 그리스를 비롯한 다양한 문명에서 최초의 영적인 신앙의 발현으로 보는 견해를 여러 책에서 접한 바 있다. 처녀의 몸, 혹은 신을 접한 몸으로 수태한 여성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이자 신인 영적인 존재가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부활하여 진정한 신으로 자리잡는 이 일련의 과정은 농경 문화에서 더 없이 중요한 식물의 죽음 - 씨앗의 분출 - 씨앗의 발아 새로운 식물의 성장 과정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다양한 고대 문명의 신비교로서 자리잡았다. 이는 그리스신화의 디오니소스, 이집트의 오시리스, 페르시아의 미트라, 시리아의 아도니스가 모두 같은 신화를 가진 신으로써 동일한 영적 존재이자 신앙으로 자리잡았다고 <예수는 신화다(티모시 프리크, 피터 갠디 )>는 전하고 있다. 이러한 죽음-부활의 과정을 경험하기 위한 신비체험을 연출하기 위한 의식은 광란의 상태를 의도적으로 연출하거나 종종 진짜 광란의 폭력 사태로 발전하여 흥분한 신도들의 손에 갈가리 찢겨 죽은 디오니소스의 죽음을 재현하듯 신을 상징하는 나 인간을 찢어 죽이는 상황이 이 <변신>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펜테오스의 이야기 역시 이러한 신비의식 도중에 벌어질 법한 일이다.

     

    176. 남성이라고 할 수도 없고 여성이라고도 할 수도 없는 하나의 육체, 남성이 아니라고도 할 수도 없고, 여성이 아니라고도 할 수도 없는, 그러니까 양성을 고루 갖춘 하나의 육체가 되었던 거야.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어. 그러고는 물에 들어올 때는 남성이었던 자신의 육체가 반남성, 반여성의 육체로 변해 있는 걸 알았어.

     

    남성을 경험하고 다시 여성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아예 두 성을 한 몸에 지닌 양성인이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자식인 헤르마프로디토스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헤르메스가 누구인가. 경계의 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신이 아닌가. 구본형 선생은 그리스인 이야기에서 헤르메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경계를 나타내는 경계석에서 확장된 헤르메스는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라는 상징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신들 사이에 제우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령이며, 영혼의 인도자다. 그러니 이승과 저승, 천상과 지상 어디가 되었든 아주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전령의 상징이 된 헤르메스의 지팡이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숨어 있다. 지팡이는 우주의 축을 의미하며 헤르메스는 이 축을 타고 하늘과 땅을 왕래한다. 손잡이 부분에 날개가 달려 있는 이 지팡이를 두 마리의 뱀이 휘감고 있다. 두 마리의 뱀은 궁극적으로 통합되는 이원적 대립물을 상징한다. 뱀 한 마리는 독을 뜻하고 또 한 마리를 치료를 의미한다. 따라서 두 마리의 뱀은 질병과 건강을 상징한다. 이것은 유사 요법, 자연은 자연으로 물리친다는 고대의 사유체계를 반영한 것이다.  우주에 작용하여 대립하는 두 가지 힘의 상호 보완적 성격을 보여준다. 두 마리의 뱀은 결합과 해체, 선과 악, 불과 물, 상승과 하강, 남성과 여성 등 대립적 요소를 상징한다. 그러니 헤르메스는 공간을 넘나들 뿐 아니라 대극적 가치의 쌍방을 넘나들어 조화를 이루게 하는 신이기도 한 셈이다. (p361,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중에서)

     

    대립적인 두 세계, 남성과 여성, 이승과 저승, 선과 악 등 대립적인 요소를 상징하는 두 마리의 뱀이 엉겨붙은 지팡이를 들고 다녔던 헤르메스는 세계가 곧 이런 대립적인 요소들의 결합과 넘나듦으로 이뤄질 수 밖에 없음을 상징하는, 가장 현실적인 깨달음이면서도 가장 신비로운 삶의 측면을 보여주는 신이었을 수도.

     

    198. 페르세오스가 걷은, 그때까지도 살아있던 이 해초는 이 괴물의 권능을 줄기 안으로 빨아들였다. 이 해초는 메두사의 머리에 닿는 순간부터 굳어지기 시작했다. 잎도 줄기도 돌처럼 굳어진 것이다. 바다의 요정들은 이 해초를 걷어다가 이 메두사의 머리에 대어보고는 같은 일이 일어나자 이를 몹시 재미있어 했다. 요정들은 이 해초의 씨앗을 파도에 실어 보내어 이 같은 식물의 종자를 퍼뜨렸다. 오늘날까지도 산호는, 대기에 닿으면 돌이 되는, 이러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물 속에서는 식물인데 수면 위로 나오면 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현재의 상태로 한 이유, 그 유래를 설명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오비디어스가 Metamorphosis라는 제목으로 이름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면서 원래 그냥 있었어라는 맥없는 설명 대신 신의 분노를 사서’, 혹은 신의 축복을 받아서등등의 그럴싸한 이유를 붙여 이해하는 것이 사물을, 상황을 받아들이기에 훨씬 용이한,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을 것이다. 여튼 산호는 메두사의 머리에 닿은 해초가 돌처럼 굳어진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니. 이 얼마나 그럴싸한가. 

     

    248. 겨루기 상대의 솜씨가 인간의 도를 넘은 데에 격분한 이 금발의 여신은 신들의 비행을 낱낱이 폭로한 이 베폭을 찢어버리고는, 들고 있던 퀴크로스 간 회양나무 북으로 아라크네의 이마를 서너 번 때렸다. 아라크네는 그제서야 여신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얻은 줄을 알고는 들보에 목을 메었다. 여신은, 제 손으로 들보에 목을 멘 아라크네를 가엾게 보고 그 끈을 늦추어 주면서 이렇게 일렀다.

     

    이 사악한 것아, 네가 누구 마음대로 네 목숨을 끊으려 하느냐? 목숨을 보존하라. 보존하되 늘 이렇게 매달려 있어야 한다. 이것은 벌은 벌이나 겁벌이어서 끝이 없을 것인즉, 네 일족, 네 후손들까지 이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 말끝에 여신은 헤카테의 약초즙을 한 방울 이 아라크네의 몸에 뿌렸다. 이 독초즙이 묻자 아라크네의 머리에서는 머리카락이 빠지면서 코와 귀가 없어졌다. 머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만큼 줄어들었다….

     

    이때 거미가 된 아라크네는 지금도 옛날과 다름 없이 실을 내어 공중에다 걸고는 거기에 매달려 산다.

     

    신의 권위를 우습게 본 자,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에 도전한 자의 말로가 다 이 모양이다. 왜 그랬을까? 이겨먹은 자가 없다. 신이 곧 자연이자 초자연적인 힘이라 할 때 이를 거스르려는 시도는 그저 헛될 뿐이다. 자연은 가차없다. 신도 가차없다.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적용되는 자연의 법칙 앞에 자비나 선과 악의 구분이 무소용하며 어찌할 수 없는 힘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신을 인간 스스로 어찌하기 힘든 거대한 감정, 심리의 기저를 상징하는 존재라 할 때, 이를 거스르려는 자 역시 크나큰 부작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사장 또는 상사를 이겨먹으려는 부하 직원이 잘 되는 꼴을 찾아보기 힘들며 본인만 다칠 뿐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기분 나쁘게 떠오른다…. 물론 그들이 신이나 자연과 동급일 수는 천부당 만부당하나 부하 직원에게 있어상사라는 존재가 곧 환경인 것이다. 어찌할 도리가 별로 없는.

     

    257. 그러나 니오베의 호소도 보람없이 이 아이 역시 땅바닥에 꼬꾸라졌다. 니오베는, 이제 아무도 돌보아주는 이 없는 혈혈단신이 되어 죽은 자식들 사이로 무너져 내렸다. 참을 길 없는 슬픔이 니오베의 몸을 돌로 화하게 했다. 산들바람도 이 때부터는 니오베의 머리카락을 흩날리지 못했다….

     

    몸속의 장기는 남김없이 돌이 되었다. 그런데도 니오베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문득 일진광풍이 불어와 돌이 된 니오베를 감아올려 고향 땅으로 데려갔다. 돌이 된 니오베가 내린 곳은 산꼭대기였다. 돌이 된 니오베는 오늘날까지도 여기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신을 업수이 여기다가 일곱 아들, 일곱 딸을 동시에 잃은 어미가 돌로 변하여서도 눈물을 흘리는 샘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 역시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 처절히 응징당하는 이야기다. 태양을 상징하는 의술과 음악의 신 아폴론, 달을 상징하며 사냥을 사랑하던 처녀신 아르테미스의 어머니 레토 여신을 모욕하다 이 지경이 된 니오베. 그런 전후사정과는 아무런 연관성 없이, 돌이 되어서도 눈물을 멈출 수 없는 슬픈 어머니의 이야기가 자꾸 세월호 사건의 참사와 겹친다. 무슨 일이 되었건 자식을 앞세운 부모는 이런 것이겠지. , 정말 있어서는 안 될 일인데

     

    304. (주석43) <퀴크노스>라는 말은 <백조>라는 뜻이다. 신화에는 퀴크노스라는 동명이인이 많이 등장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거의 대부분 동성연애와 관련되어 등장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동성애자를 의미하는 queer 가 아마도 여기에서 유래한 듯.

     

    335. , 아버지만 계시지 않는다면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저 자신의 신이 되어 저 자신의 뜻을 집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운명의 여신은, 행동하는 인간을 돌보실 뿐, 기도만 하고 있는 인간은 돌보지 않는다.

     

    , 자기계발서에 넣어도 그대로 써먹을 수 있을 듯한 진리의 경구가 아닌가. 신이 있든 없든 간에 나를 좌지우지할 존재라야 나 뿐이지 않은가. 그러니 나는 나의 신이다. 너무 불경한가? 신같이 중요한 존재다?라고 할까.

     

    337. 어디로 가느냐? 내가, 내 조국보다 내 아버지보다 사랑하던 그대가 나를 두고 어디로 가느냐? 그대에게 승리를 안겨준 나를 두고, 그대를 정복자로 만들어준 나를 두고 어디로 가느냐? 무정한 이여, 나로 인하여 승리를 얻고, 조국을 배신한 죄업을 나에게만 떠넘기고 대체 어디로 떠난다는 말이냐? 내가 바친 것들이 그렇게도 마음에 들지 않던가? 내 사랑도 그대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말인가? 내가 온 마음을, 온 소망을 다 바쳤는데도 그대에게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인가?

     

    온 희망과 나라의 운명까지 건 사랑이 이렇게 배신당했을 때 여자의 마음은 이럴 것이다. 사랑인지 광증인지 모를 이런 감정의 폭발 속에서 스퀼라가 내린 결정은 오직 자신의 사랑과 욕구에만 충실할 뿐 부모와 온 백성을 저버린 폐륜이기도 하였다. 그녀에게는 그러나 끝까지 그런 자각이 없다. 또는 애써 외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극은 비극이다. 미노스에게 외면당한 스퀼라는 결국 아버지 니소스가 죽어서 화한 물수리에게 영원히 쫓기는 새가 되었다.

     

    340. 다이달로스는, 통로를 분간하는 표지가 될 만한 것은 모두 뒤헝클어 버리고, 수많은 우회로와 굴곡으로 사람들의 눈을 홀리는 아주 이상한 미궁(: 라비륀토스, /라비린스)을 지었다.

     

    미궁,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고 앞과 뒤를 구분할 수 없는 우회로와 굴곡으로 결국은 방향을 잃게 만드는 미로. 삶이 이렇듯 미궁인 때가 있다. 내가 잘 가고 있는 것인지, 빠져나올 길은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미궁 같은 상황. 그래도 가야 한다. 멈춰 설 수는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놓아서는 안도는 실낱 같은 희망,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같은 심지를 하나 가슴에 얹고 그것을 의지해 나아가야 한다.

     

    343. 버림받은 공주 아리아드네의 운명.

     

    자신이 목숨을 구해준 테세우스에게 버림을 받고 디아섬(: 낙소스섬)에 홀로 남겨진 공주는 바쿠스신에게 구원을 받고 사랑의선물로 별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사람 팔자 모른다. 지금 쪽박난 운명이 나중에 이렇게 대박으로 바뀔 지 또 모른다. 그래서 인생이란 안심할 것도 없고 낙심할 것도 없는, 여튼 인생이란 것이 결국 포기하면 안 되는 내 운명이어서, ‘내 운명을 사랑하라고 니체는 강조하였나 보다.

     

    344. 이카로스, 내 아들아. 내 단단히 일러두거니와 하늘과 땅의 한 중간을 겨냥하여 반드시 그 사이로만 날아야 한다. 너무 올라가면 태양의 열기에 깃이 타버릴 것이요. 너무 낮게 날면 바닷물에 젖어 깃이 무거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꼭 하늘과 바다 한 중간을 날도록 하여라.

     

    너무 높이 오르면 태양의 열기에 타버리고 너무 날면 바닷물에 젖어 그 무게로 익사할 것이다삶에 있어서도 그러할 것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중도를 유지하는 것이 그렇게 위태롭고 어려운 일일 것이다.

     

    359. 징벌을 주관하시는 에우메니데스 세 여신이시여. 제가 드리는 이 기이한 제물을 받으소서. 저는 이로써 아우들의 죽음을 복수하고 아들을 죽이는 죄를 지으려 합니다. 죽음은 죽음을 통해서 화해를 이루게 하고, 사악한 죄악은 사악한 죄악을 통하여 씻기어야 하며, 살육은 살육을 통하여 갚음이 이뤄지게 하소서.        

     

    사적인 복수를 정의로 여기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내가 당한 것을 누구의 손에도 맡기지 않고 내 손으로 갚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 국가 기관이 개인을 대신하여 죄를 정의하고 벌하고 사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진정한 국가의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일 터. 신화는 그런 문명의 체계가 완벽하게 자리잡기 전, 인간의 기본적인 역동을 들여다 볼 ㅅ 있게 해준다.

     

    370. 바우키스와 필레몬.

    바우키스는 필레몬의 몸에서 잎이 돋아나는 것을 보았고, 필레몬은 바우키스의 몸에서 잎이돋아나는 것을 보았네. 이윽고 머리 위로 나무가 뻗어 올라가기 시작하자 이들은 마지막 인사를 서로 나누었네. 말을 할 수 있을 때 마지막 인사를 해두어야 했던 것이네.

    잘 가게, 할미.”

    잘 가요, 영감.”

    이들이 이러는데 얼굴이 나무껍질로 덮이면서 이들의 입을 막아버렸지.

    신들을 사랑하는 자는 신들의 사랑을 입고, 신들을 드높이는 자는 사람들로부터 드높임을 받는 법이거니.”

     

    한날 한시에 죽기를 희망하였던 노부부는 신들의 축복 속에 한날한시에 죽어, 하나의 나무로 화하였다. 어릴 적에도 이 장면을 읽을 때는 참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생각을 했다.

     

    62. 처녀로서 약속드렸던 이피스의 제물을,

    청년이 된 이피스가 드리나이다.

     

    당시에도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있었던 것이 아닐까? 몸이 여자이되 정신은 남성인 사람에 대한 우화가 아닐까? 여자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논을 피해 남자로 살았던 여성이 사랑하는 여인과 혼인하기 위해 여신에게 소원을 빌어 남성이 되었다는 신화의 의미란.

     

    67. 오르페우스는 아내의 손을 잡으려고 자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의 손 끝에 와닿는 것은 싸늘한 바람 뿐이었다. 두번째로 죽어가면서도 에우리디케는 남편에게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하기야 그같이 극직한 사랑을 받았는데 불평할 까닭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구본형 선생은 <그리스인 이야기>에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의 신화를 예술에 대한 사랑으로 해석한 바 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영원히 목마른 예술의 어떤 경지를, 결코 잡히지 않는 에우뤼디케로 해석하였다.

     

    69.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여자보다는 오히려 나이어린 소년이나 청년들에게 사랑을 기울이는 것을 좋아했다. 말하자면 이들이 어른이 되기까지의 인생의 봄과 갓 핀 인생의 꽃을 사랑한 것이었다. 오르페우스는 트라키아 사람들에게 이런 풍습을 맨 처음 전한 사람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예술인 중에 동성애자가 많다고 하는 것인가

     

    82. 그가 손가락을 대자, 이 처녀의 몸 속에는 뛰는 맥박이 선명하게 손 끝에 느껴진 것이다. 파포스 사람 퓌그말리온은 수다스럽게 베누스 여신에게 감사기도를 드렸다. 처녀는 수줍은 듯이 눈을 뜨고는 사랑하는 사람과 날빛을 동시에 올려다보았다. 이들의 혼례식에는 이 혼례식을 있게 한 베누스 여신이 친히 임석했다.

     

    이 상아처녀의 이름이 갈라테이아라고 했다. 피카소의 여인이자 뮤즈였던 갈라테아, 또 수많은 예술가의 여인들이 갈라테아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107. (64) 이런 의식과 함께 베풀어지는 제사가 바로 <아도니스 제()>. 매년 7, 아도니스상과 베누스 여신상을 모셔놓고 드리는 이 제사는 아도니스의 죽음과 베누스의 슬픔, 그리고 아도니스의 소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의식이다. 원래 소아시아의 농사신이었던 아도니스의 운명은 식물의 발아와 생육과 겨울 동안의 사멸을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아도니스 역시 외래의 신을 그리스로마신화에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었구나. 아도니스, 디오니소스, 오시리스로 이어지는 식물의 생장과 관련된 농경의 신들은 역시 소멸, 부활의 통과의례를 모두 거친다. 사지를 찢기어 죽음을 맞고 다시 부활하는 신의 이미지는 결국 죽어서 땅에서 썩고 다시 싹을 틔우는 식물의 그것을 그대로 닮았다.  이는 저승을 다녀온 오르페우스의 최후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되는 이미지다.

     

    111. 여자들은 오르페우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는 그의 몸을 갈가리 찢었다. 오르페우스의 숨결은, 바위의 마음을 움직이던 그 입. 들짐승의 마음도 누그러뜨리던 그 입을 통해 빠져나가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오르페우스의 사지는 갈기 찢긴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또한 오르페우스를 공격해 갈가리 찢은 일단의 여자들이 박쿠스를 따르던, 그리하여 아마도 신비의 의식, 광란의 상태에 빠져있던 신도들이었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하다. 그들에게 오르페우스의 살해는 바쿠스의 죽음과 부활을 재현하는 행위에 다름 아닐 수 있지 않을까?

     

    118. 미다스 왕의 귀는 당나귀 귀.

     

    미다스 왕이 당나귀귀가 된 사연은 음악의 신 아폴로의 음악이 판의 가락보다 못 하다는 곧이곧대로 말한 때문에 아폴로의 노여움을 산 벌이다. 아마도 직접 신에 도전한 본인이 아니어서였겠지만, 그래도 비교적 가벼운 벌로 끝난 사례가 아닌지. 신한테는 직접 대들면 죽는 거고 대드는 1인의 편을 들어서도 봉변을 당한다. 잘 알아두자.

     

    121. 언제인가 연로한 프로테오스가 테티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물의 여신이여, 아이를 가지세요. 그 아이는 장차, 아버지의 명예를 저만치 앞지르는 영웅이 될 게고, 아버지보다 더한 칭송을 받게 될 게요.”

     

    유피테르 역시, 프로테오스의 이러한 예언을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바다의 여신에게 뜨거운 마음이 일어도 아비 될 자기 이상의 영웅이 태어날까봐 자제해오던 터였다.

     

    이런 묘한 아버지의 마음. 뛰어난 자식은 자랑이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자식은 원치 않는 마음이라니. .

     

    138. “만물을 쉬게 하는 잠의 신이시여, 신들 가운데서도 가장 평화로운 신이시여. 산 것들 것들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시고, 산 것들의 마음을 근심으로부터 구하시는 신이시여, 산 것들의 모양을 고스란히 흉내낼 수 있는 꿈을 보내소서.

     

    잠의 신 솜누스에게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가 하는 대답은, 잠의 속성과 미덕을 참 멋지게 표현하였다. 위대한 잠의 효과.

     

    207. 아이아스는 분노로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슬픔과 분노가 어느 누구도 정복하지 못하던 아이아스를 정복한 것이었다.

     

    분노의 노예가 된 아이아스는 너무나 어이없이 자신을 버렸다. 메디아가 분노에 자기 자식의 목숨을 바친 것이나, 아이아스가 제 목숨을 버린 것이나 대체 누구를 위한 비극이란 말인가. 분노에 휩쓸려 자신을 잃은 자는 눈 먼 칼잡이처럼 결국 제 목을 친다.

     

    250. 이제 인생의 황금기는 나를 떠나고, 황혼이 비틀거리며 내게로 다가옵니다만 나는 이런 채로 오래오래 더 살아야 합니다….

     

    오래 오래 살다보면 언젠가는 내 몸이 한 움큼도 목 되게 오그라지고 내 사지 역시 오그라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날이 오겠지요….

     

    언젠가는 내 모습도 사라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모습만은 사라질지언정 목소리만은 이 땅에 남겨야 하는 팔자를 타고 났습니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목소리를 듣고 그게 내 목소리인 줄 알게 되겠지요.

     

    한줌의 흙 속에 든 입자만큼 오랜 수명을 약속 받았으나 그에 상응하는 젊음은 보장받지 못한 시뷜레는 결국 목소리, 아마도 신탁을 의미하는 목소리로만 남아서도 사라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261. (41.) 야누스.

    로마의 고대신. 원래는 문()의 신이다. 문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종점인 동시에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신에게는, 서로 반대쪽을 향하는 두 개의 얼굴이 있다. 이 상징적 성격 때문에 제의(祭儀) 때는 늘 신의 선두를 차지한다. 지나간 해와 새해를 동시에 접하고 있는 달인 1월을 <야누리우스(.재뉴어리)>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야누스의 달>이라는 뜻이다.

     

    274. 신이 된 아이네이아스

     

    트로이아의 유민이었던 아이네이아스는 오디세우스 못지 않은 어마어마한 모험 끝에 신탁에서 말한 라티움 땅에 도달하여 지역의 왕녀인 라비니아와 결혼하여 왕조를 세웠고 결국은 로마의 시조가 된다. 그런 그를 신으로 승격시킨 것은 신라의 시조를 알에서 나온 박혁거새로 승격시키는 것과 다름없는 용비어천가의 일환일 것이다. 여하튼 신이 된 영웅의 일대기로서 손색이 없는, 모든 것을 잃은 패국의 장군이 온갖 모험을 거쳐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결국은 자신을 패망시켰던 국가보다 더 오래 이름을 떨치고 어이질 위대한 왕국의 시조가 됐다는 것은 충분히 신화가 될만하다. 

     

    288. 로물로스와 헤르실리아

     

    로마의 사조가 된 로물루스와 그의 아내 헤르실리아 역시 사후 아버지인 마르스의 간청을 방아들인 유피테르가 이 둘을 천상으로 불러 올려 신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이 역시, 로마의 건국신화르 굳건히 하려는 후대의 작업이겠지.

     

    295. 피타고라스의 가르침

     

    오늘날 위대한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알려진 피타고라스는 이집트와 동방의 다양한 신비주의를 접한 영적인 지도자로서, 영혼의 윤회설을 주창했다고 한다. 변신에서도 피타고라스가 최초로 자신을 <현자>라 일컬은 사람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육식을 금하는 그의 논리는 종교적이기도 하고 자연주의자의 면모가 엿보이기도 한다. 


296. 그대들이여, 죄많은 식물(食物)로 그대들 육체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곡식이 있고, 가지가 휘어지도록 달린 과실이 있고, 포도덩굴에서 부풀어오르는 포도가 있습니다


298. 인간은, 대지가 베풀어주는 곡식을 먹을 자격도 없는, 참으로 배은망덕한 동물이 아닙니까? 소의 목에다 쟁기 띠를 매어 굳은 재지를 갈고, 여기에서 곡식을 수확한 인간이, 이번에는 그 쟁기 띠를 벗기고 그 벗긴 자리를 도끼로 내려칩니다. 이런 인간이 배은망덕한 동물이 아닙니까?


299. 그대들이여, 차가운 저승땅을 두려워하고 있는 그대들이여. 왜 스튁스의 땅을 두여워 하십니까? 빈 이름 뿐인 어둠의 땅, 시인들의 망상에나 존재하는 땅,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 땅을 왜 그렇게 두려워합니까? 그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육체라는 것은 화장단에서 재로 화하든, 땅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썩어 없어지건, 한번 없어지면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영원합니다. 이 영혼이라는 것은, 원래 있던 곳을 떠나면 다른 집을 찾아 들어가 거기에 다시 거합니다.


피타고라스의 영혼윤회설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기술한 저승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그대로 소개한 것을 보면, 확실히 오비디우스는, 그리고 아마도 당대의 사람들은 신화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에 어긋나는 부분을 용납하지 못하는 종교적인 도그마로서 받아들였다기 보다는 상징과 은유로서의 신화의 의의를 알고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300. (퓌타고라스의 가르침) 모든 것은 변할 뿐입니다.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혼은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알맞은 형상이 있으면 거기에 깃들입니다. 짐승의 육체에 있다가 인간의 육체에 깃들이기도 하고, 인간의 육체에 있다가 짐승의 육체에 깃들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고 돌 뿐, 사라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드러난 것은 단지 찰나적인 형상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항상 흐릅니다. 강처럼 흐릅니다. 강물에, 어디 가만히 정지해 있는 순간이 있던가요? 물결은 다른 물결에 밀립니다. 그 다른 물결은 또 다른 물결에 밀리면서 앞에 있는 물결을 밀어냅니다….


302. 탐욕스런 미식가인 세월은 모든 것을 부수고 갉아 마침내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303. 처음의 모양대로 영원히 있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무궁무진한 자연의 조화는 끊임없이 이 물건으로 저 물건을 지어냅니다. 내 말을 믿으십시오. 이 우주에 소멸되는 것은 없습니다. 변할 뿐입니다. 새로운 형상을 취할 뿐입니다. ‘태어남’이라는 말은, 하나의 물상이 원래의 형상을 버리고 새 형상을 취한다는 뜻입니다. ‘죽음’이라는 말은, 그 형상대로 있기를 그만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변하여 저것이 되고 저것이 변하여 이것이 될지언정 그 합은 변하지 않습니다.


335. 신이 된 율리우스는 아들을 내려다 보다가, 아들이 하는 일이 자기를 앞서고 아들의 영광이 자기 영광 이상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는 흡족해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백성들이, 자기의 이름을 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 앞에 세우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온갖 장를 누리며 살던 백성인지라 이 점에 관한 한 그의 뜻을 따라주지 않고 그의 이름을 카에사르의 이름 이상의 위대한 이름으로 기억했다.


이 부분은 좀 애처롭다. 오비디우스를 추방한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함으로써, 다시 로마로 복귀하고픈 시인의 솔직한 속내가 이 위대한 신화의 끝을 살아있는 황제의 신격화로 끝마무리하게 되는 무리수로 이어졌으리라.


336. 결사


이제 내 일은 끝났다. 유피테르의 분노도, 불길도, 칼도, 탐욕스런 세월도 소멸시킬 수 없는 나의 일은 이제 끝났다.


내 육체 밖에 앗아가지 못할 운명의 날은 언제든 나를 찾아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이승의 삶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나 육체보다 귀한 내 영혼은 죽지 않고 별 위로 날아오를 것이며 내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마가 정복하는 땅이면 그 땅이 어느 땅이건, 백성들은 내 시를 읽을 것이다.


시인의 예감이 그르지 않다면 단언하거니와, 명성을 통하여 불사를 얻은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그의 예감은 맞았다. 2천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은 그의 시를 읽고 새로운 영감을 받고 있으니. 당대의 신화를 인류의 유산으로 바꾸어 놓은 위대한 작품을 남김으로써, 그는 자신만의 신화를 써내려간 것이다. 문자 그래도, 신화로 신화가 된 시인. 오비디우스의 신화다.


 


  1. 저자의 입장에서 다시


 


신화는 이야기 보따리로서만 바라볼 때 더없이 즐겁지만, 해석과 이해의 영역으로 넘어서면 만만치가 않은 텍스트다. 어릴 적부터 그리스신과 로마신의 이름을 매치시켜 외우는 것도 좋아하였고, 다프네와 피그말리온의 아프고 사랑스런 이야기를 즐겨 읽었던 바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의 취향에 불과하였다. 성인이 되어 읽는, 단어 그 너머, 에피소드 너머에 존재하는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신화는 난해하다. 그래서 엄청 긴장했다. 그러나 읽고 난 후 오비디우스의 <변신>은 비교적, 독자에게 친절한 버전이었겠구나 싶었다. 그러므로, 오비디우스의 변신이 암흑시대인 중세를 넘어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의 상상력에 꽃을 피우게 해준 서양문학 최고의 텍스트로서 그 생명력을 유지했겠구나 싶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하나다. 이 조각난 파편 같은 이야기들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목차만 봐서 알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읽다 보면 알겠다.


 


목차


 


1부 모든 것은 카오스에서 시작되었다


2부 신들의 전성시대


3부 박쿠스의 탄생 외
4부 페르세오스와 메두사 외

5부 무우사의 탄생 외

6부 신들의 복수


7부 영웅의 시대


8부 인간의 시대


9부 헤라클레스 외


10부 오르페우스의 노래 외


11부 미다스의 귀는 당나귀 귀 외
12부 트로이 전쟁 외
13부 유민의 시대
14부 로물루스와 레무스 외
15부 카에사르의 승천 외


역자 후기-오비디우스의 유쾌한 경망(輕妄)/이윤기


 

그리고 난해하기만한 목차 역시 곰곰히 읽다 보면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적어도 순차적으로 신화의 기원, 세상과 신, 인간의 창조에서 시작해 그 무게 중심이 신에서 영웅으로, 인간으로 내려오다가 마지막에는 가장 최근의, 현존하는 왕의 신격화로 이어지는, 당시로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목적으로 옮겨가는 구성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리고 참으로 도움이 되었던 역자 후기. 일단 그리스로마 신화라는 것이 맨 사람이 독수리 됐다가, 나무도 됐다가, 신이 바람피운답시고 짐승으로 둔갑도 했다가 하며 매양 변신하는 내용이라 제목을 그리 붙였나 하는 어림짐작 밖에 할 수 없었던 이 독자의 무지를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길잡이를 아래와 같이 넣어주었다.


 

341. 이 책의 원제인 <메타모포시스(변형(變形), 변신(變身)>는 사물이 비롯되는 정황을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에는 창조설이 있듯이 많은 문화권의 신화나 설화는 나름의 창조설과 전신설(轉身設)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원숭이의 원덩이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빨갛게 되었다느니, 게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게걸음을 걷게 되었다느니, 수수 대궁이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피가 묻게 되었는데 그래서 수수대궁이는 빨갛다는 식입니다.


 

물론 순진한 신화해석학에 속하는 이 <메타모포시스>리는 개념은 과학적으로는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한 개념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개념이 <시적 메타모포시스>라는 표현으로 바뀌면 그 성격은 사뭇 달려져서 오비디우스의 시대에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조금도 다름없이 유효한 개념이 됩니다. 따라서 오비디우스의 메타모포시스는 그 시대 사람들의 시적 상상력이 투사된 <시적 메타모포시스>쯤으로 이해되면 좋을 듯 합니다. 사실 <메타모포시스>라는 개념은, 세계의 모든 민족이 나름의 신화와 전설의 체계에서 자연과 인간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는 하나의 만병통치약 노릇을 해온 듯 합니다.


 

이런 불멸의 고전을 만났을 때 내가 저자라면, 이라는 가정을 세워 내용적인 측면을 분석한다는 것이 영 얼토당토않은 일로 여겨진다. 아마도 나라면, 용비어천가스러운 마지막 부분들, 케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부분을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로마의 건국신화를 굳건히 하기 위한 노력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분명 이 부분 역시 후대에 그 역사적, 문학적 의의를 전하고 있는 것이리라. 피타고라스가 등장하는 부분 역시 흐름상 조금은 난데없다는 생각이 들긴 하였어도, 당시 그리스 로마신화를 바라보는 당대 석학의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치있었다.


 

아마도 별도의 해설서로서, <변신>에 담긴 갖가지 상징과 의미를 해설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의 수많은 학자와 문학가들이 이미 시도하였고, 우리는 조셉 캠벨이라는 걸출한 문학가이자 신화학자의 노력 덕분에 고대 신화의 신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바 있다.  


 

가장 감동적인 장절은, 사실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야기 한 덩어리 전체를 통해 다양한 상징을 해석해야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신화라는 텍스트에서, 골라 쓰기 좋은 한 구절을 집어내는 일은 매우 난해한 작업이었다. 아마도 이 방대한 작업의 시작과 끝을 가장 기억에 남는 장절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1. 서사


마음의 원()에 쫓기어 여기 만물의 변신(變身) 이야기를 펼치려 하오니, 바라건대 신들이시여, 만물을 이렇듯이 변신하게 한 이들이 곧 신이시니 내 뜻을 어여쁘게 보시어 우주가 개벽할 적부터 내가 사는 이날 이때까지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풀어갈 수 있도록 힘을 빌려주소서.


336. 결사


이제 내 일은 끝났다. 유피테르의 분노도, 불길도, 칼도, 탐욕스런 세월도 소멸시킬 수 없는 나의 일은 이제 끝났다.


내 육체 밖에 앗아가지 못할 운명의 날은 언제든 나를 찾아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이승의 삶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나 육체보다 귀한 내 영혼은 죽지 않고 별 위로 날아오를 것이며 내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마가 정복하는 땅이면 그 땅이 어느 땅이건, 백성들은 내 시를 읽을 것이다.


시인의 예감이 그르지 않다면 단언하거니와, 명성을 통하여 불사를 얻은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만물의 이야기, 만물을 있게 한 신의 이야기를 펼치기 위해 신의 도움을 기원하며 시작하는 서사. 그리고 자신의 일을 마친 작가의 결연한 의지, 자신의 작품이 영원을 얻으리라는 결사는 매우 대조적이다. 신의 도움을 갈구하는 데서 시작해 모든 것을 바친 자신의 작품으로 신화가 될 것임을 예견하는 작가의 종언이라니. 논지에서는 벗어나지만, 이것이 기독신앙과 같은 절대신을 믿는 종교적인 산화였다면, 가능할 리 없는 종결이라는 점에서도 나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대한 당대의 이해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시인의 예감은 그르지 않았다. 변신이라는 작품을 통해 오비디우스의 이름은 불사를 얻었고, 시인으로서 오비디우스는 영원히 남게 되었다. 한 개인이 신화를 완성한다는 것의 의미, 스스로 신화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이토록 명쾌하게 보여주는 예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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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1 02:08:34 *.164.43.54

이렇게 저렇게 궁리를 해보아도 공간과 폰트 배치 등이 자꾸 원문 그대로 옮겨지지 않고 깨지네요. ^^; 파일도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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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1 10:46:47 *.228.119.26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아폴로와 관계가 있습니다. 아폴로의 화살에 맞아 죽은 괴물 뱀 피톤(Python)과 이름이 비슷합니다. 아폴로는 피톤이 지키고 있는 가이아의 신전을 빼앗고 예언의 힘을 발휘합니다. 델포이의 신탁은 아폴로가 전하는 예언입니다. Pytho는 델포이를 말하며, 델포이의 무녀를 피티아(Pythia)라고 합니다. 아폴로의 예언 능력을 이어받은 사람이 피타고라스입니다.

피타고라스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과 볼변론을 내세운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이 혼재된 느낌입니다. 피타고라스는 모든 것이 변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수학적 진리는 불변입니다. 현실은 변하지만 이상(이데아)의 세계는 불변입니다. 변신을 통해 현실적 몸이 변하지만 그들의 본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본성으로 인해 끝없이 괴로움을 당할 뿐입니다.

신화는 은유와 상징을 통해 그 의미를 감추어(implicit) 버리지만 철학은 논리를 통해 의미를 명확(explicit)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의미는 서로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변하는 존재(ephemeral)와 변하지 않는 존재(immortal)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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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1 15:20:03 *.134.61.77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관계,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관계, 필멸의 존재와 불멸의 존재의 관계...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쇠퇴하고 소멸한다는 자연의 섭리와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간절한 불멸의 존재, 또는 불멸의 가치에 대한 인간의 염원이 만나 탄생한 최고의 발명으로서 신화를 바라보는 것도 유효한 시각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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