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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7일 05시 34분 등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_구달리뷰#3

조셉캠벨

이윤기 옮김

 

I.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해서'를 쓰라고 했을까?> 의 화두를 가지고 고민해 본다. 고민의 결과는 저자의 인생이었다. 그가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행한 것이 무엇이며, 저자에게서 배울 점이 무엇인가? 라는 관점에서 이 글을 써 보자.

 

이야기꾼 조셉캠벨

캠벨에게서 우선 본 받을 점은 그가 이야기꾼이라는 것이다. 평생을 독서하고 탐구하여 수많은 이야기를 알아 왔고, 이들을 하나의 주제로 꿰어낸 점이다.

 

그는 일찍 이야기의 힘을 알았고, 이를 믿었으며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야기의 세계를 섭렵했다. 그에게 책은 이야기를 포장하는 좋은 매체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일생 동안 채집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담아 후대에 전했다. 책뿐만 아니라 비디오테이프, 방송, 강연 등 수많은 미디어들을 통해서도 그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캠벨만큼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원시 사회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열린 하늘이라고 하는 거대한 지붕 밑에서 펼쳐진 광막한 들판으로 나가거나, 수목에 묻혀 있는 숲속의 동굴로 들어가는 느낌을 맛보고는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신들의 이야기가 왜 바람 속에서, 천둥 속에서 울려 나올 수 있는지, 어째서 산자락의 시내라는 시내는 다 하나님의 육성을 내는지, 어째서 세상이 다 성소 일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신화의 힘, 18p)>

 

스토리텔링 능력이 최대의 자산이 아닐까

 

천복을 지속해 나가는 힘

지금 하는 일을 흔들림 없이 죽을 때까지 하는 것,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좋고 일도 어렵고 힘들 때 포기하기 일쑤다. 특히 먹고 사는 일은 거의 모든 경우 꿈보다 우선한다. 그러나, 켐벨은 달랐다.

 

조셉캠벨이 살던 시대는 대공황 시대였다. 먹고 살기 힘든 때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직장도 없이 오로지 책만 읽었다. 본인은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미래에 대한 불안, 당장 먹고 살 걱정이 태산이었을 텐데, 어떻게 책만 팔 수 있었을까여기에 켐벨의 위대성이 있다. 그는 먹는 것 보다 책을 우선순위에 두고 그것을 실행한 사람이었다.

 

<하늘이 우중충하여 맑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달려가 그대의 거주지를, 이름을 그리고 직업을 바꾸어라. 무엇이든 바꾸어라. 영원히 변함없이 고정되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다. _조셉캠벨>

 

그는 밥 위에 빛나는 별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별을 좇아 일상을 도전으로 바꾸고 오직 자신의 천복을 따라 산 사람이었다.

 

살아있음의 황홀'을 느낄 줄 아는 사람
조셉 캠벨은 '살아있음의 황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의 꿈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좇아, 자신의 마음의 길을 따라 거대한 신화의 세계에 들어섰고, 그 기나긴 여정과 인생이란 모험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찾았다그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살았던 현대의 영웅 이었다.

 

II. 마음의 장절

 

6. 이 책의 목적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에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세계 각처에서 채집된 신화와 민간 전설을 한곳에 모아놓고 상징으로 하여금 스스로 입을 열게 하는 일일 듯 하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면 그 유사성이 한눈에 두드러져 보이고, 방대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일정한 상태로 보존된, 바탕 되는 진리와 만나게 된다.

 

7. 베다경

진리는 하나 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

 

19-20. 무의식

의식이라고 비교적 깔끔하고 비좁은 처소의 밑바닥으로는 뜻밖에도 알라딘의 동굴이 뚫려있다. 여기에는 보물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꼬마정령,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불편한 혹은 억압당한 심리적인 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 것 감지되지 않고 도사리고 있다가, 혹 한마디 말, 주위의 냄새, 차 한 잔의 맛, 또 어떤 사람의 시선에 촉발되면 무서운 사신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기도 하다.

 

23.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24.

비의적 이미지는 우리 심성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만일 이 이미지들이 신화와 제의를 통하여 외부에서 들어오지 않으면, 꿈을 통해 내부에 나타나게 된다. 그래야 우리의 에너지가 심해의 바닥이나 진부한 유아의 놀이방에서 풀려날 수 있는 것이다.

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죽음이 승리 하는 날이 오면 죽음이 다가온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에 달려 다가 부활 하는 길뿐 갈갈이 해체 되었다가 재생 하는 길뿐이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테세우스는 융성하는 그리스 문명의 상징과 권화로 외부에서 크레타로 들어 왔다.

 

33.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한 꿈이다.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두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데 견 주어, 꿈 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37.
미궁을 빠져나올 해법으로 다이달로스는 아드리아네에게 실을 한 타래 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이 얼마나 하찮은 물건인가!

 

39.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우리는 혼자서는 모험 길에 나서지 않는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 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 간다고 생각하는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39. 비극과 희극
현대의 소설도 의절(義絶) 의 비의를 찬양 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 속에 있는 인생이다 해피엔딩은 허위 진술로 격멸을 당하는데, 이는 우리가 알고 보아 온 한, 이 세계는 하나의 종말, 즉 죽음, 붕괴, 의절,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던 형태가 사위어 감에 따라 일어나는 우리 마음의 십자가가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43.
이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지만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실재는 영원하며 불멸이며 무한이니라.

 

44.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삶은 더 이상 도처에 도 사린 재앙의 가혹한 단죄와 시간에 의한 마손이나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 받는 일이 없게 된다 뿐인가, 공포는 눈앞에 여전히 보이고, 고뇌의 울부짖음은 여전히 귀에 들리나, 삶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는 힘의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44-45. 원질신화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 판이다.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45-48. 부처 vs 예수

부처의 고행에 대한 전설에 따르면 젊은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사랑하는 백마 간타가를 타고 은밀히 아버지의 궁전을 빠져 나온다신성한 강을 건너서는 칼을 뽑아 단숨에 머리카락을 잘랐다. 승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행자가 되어 세계를 방황하는데, 이 동안 8단계에 걸치는 명상의 과정을 넘어섰다. 은자로 물러앉아 6년 동안 고행하면서 처절한 금욕생활로 쓰러질 것 같았으나 다시 일어났다. 다시 일어난 그는 수행 방법을 바꾸어 보다 온건한 탁발승의 수행 방법으로 돌아섰다.
어느 날, 그는 나무 아래에서 이 세계의 동쪽 하늘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는데 나무가 그의 광채를 받아 환하게 빛났다. 그는, 그 아래에서 만상의 이치를 깨칠 보리수 쪽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정각을 이루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굳게 결심하고 그 보리수 아래, 부동의 자리에 앉았다.

 

곧 사랑과 죽음의 신 카마 마라가 다가왔다. 만상을 지키는 신들은 모두 도망쳐서 미래의 부처는 나무 아래서 움직이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윽고 마라는 그를 공격하여 정신을 흐트러놓으려 했다 돌개바람, 바위, 천둥과 불길, 연기를 뿜는 날이 선 무기, 불 덩어리, 뜨거운 재, 끓는 진흙, 따가운 모래와 칠흑 어둠 등으로 적대자는 구도자를 공격했으나, 이 많은 공격무기들은 고타마의 성도의 법력에 의해 천상의 꽃과 티끌로 화했다. 이렇게 되자 마라는 세 딸, 즉 욕망과 괴로움과 욕정을 관능적인 시녀와 함께 풀어 놓았으나 존자의 마음은 흐트러지지 아니 했다.

 

해지기 전에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존자는 초저녁에 자기 전생을 알았고, 한밤중에는 사물을 두루 꿰뚫는 혜안을 얻었으며, 새벽에는 인과를 깨쳤다. 그는 날 샐 무렵에 완전한 정각을 얻었던 것이다.

 

부처는 이윽고 이레 동안 네 번째 나무 아래서 해탈의 기쁨을 만끽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얻은 소식을 남들에게 전할 수 있는지 가늠해보다가 당분간은 홀로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 브라마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에게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부처는 그의 말에 승복해 자신이 깨친 도리를 전파하기로 작정하고는 자신이 속인 들과 함께 살던 도시로 돌아가 정도의 법이라는 귀한 은혜를 두루 전파 했다.

47-48. 
이것은 서양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상태에 대응하는 동양 신화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정각수(보리수) 아래의 부처와 십자가 나무(구원의 나무) 위의 그리스도는 유사한 것으로, 원형적인 세계의 구원자와 태고의 유물인 세계수 모티프를 통합한다. 이 테마의 변형은 앞에서 소개 하는 이야기에서 자주 발견될 것이다. 부동의 자리갈보리 산세계의 배꼽World Navel 혹은 세계 축World Axis의 이미지다

 

중요한 것은 Buddhahood, 정각은 말로써는 전할 수 없고 오직 정각에의 방법만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과 형태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진리의 불립문자(不立文字) 교리는 플라톤 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양 전통의 근간을 이룬다. 과학의 진리는 관찰할 수 있는 사실에 근거해서 논리적으로 세워진 논증할 수 있는 가설이기 때문에 전달이 가능하지만, 제의, 신화 그리고 형이상학은 초월적인 조명 가까이까지 인도받는 것은 가능하나, 거기에 접근하는 마지막 단계는 개인의 조용한 체험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산스크리스트어에서는 현자를 Muni, 즉 조용한 자라고 한다. 부처가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종교를 세웠지만 그 가르침의 궁극적인 요체는 침묵 속에서 만 전수 된다

 

50.
영웅의 모험은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로마인들은 세계적인 그로 도시의 창건에 관련된 아이네이아스를 떠올린다. 그는 폐허가 된 트로이아를 떠나 무서운 사자의 나라 저승으로 따라 나섰다. 장소가 어디건 그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건, 진정한 창조 행위는 죽어 가는 것으로부터 세상으로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행위로 표현된다.

 

51. 영웅의 단계
개인의 운명을 담는 세계의 상징적 그릇인 수 많은 이야기를 복합적인 모험의 형태로 소개해 보겠다

 

첫번째 단계 <분리> 혹은 <출발> 단계는 제1부 제 1장에서 5개의 소제목으로 나뉜다
1 <
모험의 소명>, 영웅소명의 표적

2 <
소명의 거부>, 신으로부터의 우매한 도주 
3 <
초자연적인 조력>, 어느 수준까지 모험에 도전한 사람에 대한 뜻밖의 도움
.
4 <
첫 관문의 통과

5 <
고래의 배>, 밤에 영역으로의 여행이다.

 

<시련과 입문의 성공>은 제2장에서 6개의 소제목으로 소개된다
1 <
시련의 길>, 신들의 위험한 측면
 
2 <
여신과의 만남>, 다시 찾은 유아기의 행복
 
3 <
유혹자로서의 여성>, 오이디푸스 고뇌의 체득

4 <
아버지와의 화해
5 <
신격화
 >
6 <
궁극적인 홍익

회귀와 사회와의 재통합은 정신 에너지가 세계로 흘러 들어오는 연속적인 순환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과정이다.

 

54. 영웅은 우리 내부에 있다.
영웅이 애써 찾아 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왕의 아들이고, 그는 이로써 자기의 실제적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신의 아들은, 이 이름이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55. 세계의 배꼽
영웅의 성공적인 모험의 의미는, 생명의 흐름을 풀어 다시 한번 세계의 몸 속으로 흘러 들게 하는데 있다. 이 흐름의 기적은 물리적으로 음식물의 순환, 역학적으로는 에너지의 흐름, 영적으로는 은총의 현현을 나타내는 듯하다

 

58.
신의 은총은 영혼의 양식이다. 번개를 풍요를 약속하는 비의 전조인 동시에 신이 방출하는 에너지의 현현이다. 은총, 양식, 에너지... 이런 것들은 나날의 삶이 있는 이 땅으로 내려오는데, 이것들이 내게 오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들은 죽을 뿐이다.
이 분류는 보이지 않는 원천, 우주라는 상징적 원의 중심인 입구, 불교에서 말하는 부동의 자리에서 흘러나오는데 세계는 이 곳을 중심으로 순환한다. 이 자리 밑의 심연의 물은 생명을 창조하는 신적인 에너지이며, 불멸하는 존재의 세계 형성자인 조물주다. 생명나무, 즉 우주 자체는 바로 이곳에서 자라난다. 생명나무, 즉 우주는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에 뿌리 내리고 있다
.
영원의 에너지가 시간성 안으로 흘러 드는 배꼽,  세계의 배꼽은 연속적인 창조의 상징, 모든 사물 안에서 약동하는 소생의 연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세계 보존의 신비인 것이다.

 

59.
높은 산에 올라 주의를 둘러보면 하늘이 사방에서 땅을 감싸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인즉, 바로 하늘이 감싸준 이 둥근 공간 안에 사람이 사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신 원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늘의 둥근 돔은 땅의 네 모서리에 놓이는데, 때로는 네 개의 왕상주인 난장이, 거인, 코끼리 거북이가 이를 버티고 있다고 했다.

 

77. 단절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주인공이 필연적으로 맞서야 하는, 무의식적으로는 상당히 익숙해져 있는 (의식적으로는 알지도 못할뿐더러 놀랍고 무서운 존재로 여겨지는) 이 인물은 자기 정체를 밝힌다. 그리고 이 때 주인공은 이전에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던 사물이 이제 무가치하게 되어 버리는 상황을 경험 한다. 주인공은 잠깐이나마 일상 생활로 되돌아 오지마는 생의 의미는 느끼지 못한다. 젊은 고타마 샤카무니 왕자는 노(), (), () 혹은 승려 생활에 대한 지식과 단절된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78.
생각보다 빨리 이 젊은 왕자는 육체적 쾌락에 진력을 내고 다른 경험에 목말라 했다. 왕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찾아 나설 준비가 되는 순간, 적당한 전령관이 때 맞추어 나타났다.

 

80. 모험에의 소명
운명이 영웅을 불렀고 영웅의 영적 중심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82. 소명의 거부
인간은 밤이고 낮이고, 자신의 어지러운 심성의 폐쇄된 미궁 안에 있는 살아있는 자기의 이미지인 신적인 존재에 쫓긴다. 문을 나가는 길은 막힌 지 오래다. 출구는 없다. 인간은 사탄처럼, 죽자고 자기 자신에게 매달린다. 이때 그가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89.
사내의 머리가 희어지고 주머니가 빌 때면 
사내에겐 나누어 줄 사랑의 몫도 없다더라

여자는 요상한 새 노리개를 찾을 때면 사내를 구박하게 마련이니 
사내는 하릴없는 학문에 천 년 세월을 허송 세월 하는구나

 

96.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대자연은 항상 위대한 임무를 지원한다. 영웅의 행동이 그 사회가 예비하고 있는 것과 일치될 때, 그는 흡사 역사적 변화의 리듬을 타고 있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97. 조력자
고급 신화에선 조력자는 스승, 나룻배 사공, 영혼을 내세로 안내하는 안내자로 발전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있어 이런 안내자는 헤르메스 와 메르쿠리우스이고 에집트에서 토트 (따오기 비슷한 신)이며 기독교 문화권에선 성령이다.

98.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남성 안내자로 메피스토펠레스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 경우처럼 사자(使者), 즉 메르쿠리우스적 인물의 위험한 측면이 강조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 사자가 순진한 영혼을 꼬여 시련을 받게 하는 유혹자여서 위험한 것이다. 단테에서는 베르길리우스가 이 역할을 맞는다. 방향제시의 초자연적 원리는 그 내부에서 무의식의 모든 다양성을 통합한다. 우리가 따르는 안내자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한 후원은 우리의 이성이 헤아리지 못하는 영역에 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110.
<
정신차려,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래!>
여기서 경비병은 내적 자아일 뿐이다. 의식은 위험한 소망이나 비도덕적 행위의 틈입을 미리 막는 구실을 한다. 꿈에 나타나는 경비병, 경찰관, 관리는 대체로 이런 의미로 해석되어야 마땅 하다

 

모험 당사자는 특정 구역의 수호자에게 도전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살아서든 죽어서든 새로운 경험 영역을 지나려면 같은 세력의 파괴적 측면을 극복하고 이 특정 구역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112.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 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

 

자기 생활권이라는 벽에서 한발이라도 밖으로 나가는 영웅은 반드시 이런 괴물(몹시 위험하면서도 때로는 마법의 권능을 베푸는)과 만나야 한다.

 

117-118. 도깨비 vs 부처
도깨비는 감히 잡아 먹을 생각은 못하고 태자에게 물어 봤다
<
젊은이여 왜 두려워하지 않는가? 죽음이 목전에 이르렀는데 어찌해서 겁을 먹지 않는 것인가? >

<도깨비여, 왜 내가 두려워하겠는가? 태어나면 어차피 한번은 죽게 되어 있는데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더구나 내 배 속에는 벼락이라는 무기가 하나 더 있다. 그대가 나를 먹는다고 하더라도 벼락은 삭이지 못할 것이다. 이 벼락은 그대 배속에서 그대를 갈갈이 찢어 필경은 그대 목숨을 빼앗을 것이다. 결국 그대가 나를 먹으면 우리는 둘 다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그가 자기 배 속에 있다고 한 무기는 다름아닌 지혜라는 무기였다. 실제로 이 젊은 영웅은 전생의 부처 바로 그 분이었다.

 

119.
우리가 오감으로 집착하고 있는 세계의 상징, 그리고 육체적인 어느 기관에 의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상징인 그 도깨비는 미래의 부처가 덧없는 이름과 물리적인 성격의 5가지 무기로 더 이상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름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여섯 번째의 무기로 바꾸어 대항하자 조복한 것이다. 6번째 무기가 명() 과 형()이라는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논리의 지혜라는 천상적 벼락인 것이다. 여기에서 상황은 일전한다. 태자에게 도깨비는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 손에서 풀려난다. 이제 그는 영원히 자유로워 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상계의 마력이 무너지자 그는 자기를 부정 하게 된다.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그는 신이 된다.

 

120.
태양 문을 통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 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 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120. 고래의 배
마법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이, 곧 재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관념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래의 배라는 자궁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영웅은 그 관문을 지키는 세력을 정복하거나 그 세력과 화해하는 대신, 그 미지의 힘에 빨려 들어 겉보기에 죽은 것으로 나타나고는 한다.

122.
헤라클래스는 괴물의 목구멍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배 안을 난자 하여 마침내 괴물을 죽이고 말았다. 세계 도처에서 채집되는 이런 모티프는 관문 통과가 자기적멸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123.
신도는 그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신전 안, 고래의 배, 세계라는 한정된 공간 건너 위 아래로 보이는 천상적 공간은 결국 하나다. 모두가 같은 것이다.

 

비유적으로 보아,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고래의 입을 향한 영웅의 돌진은 같은 모험인 셈이다. 즉 회화적 언어로 말하면 둘 다 생의 구심화 행위, 거듭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124.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자아에의 집착을 끊은 영웅은 왕이 자기 궁궐에서 방 방을 드나 들 듯이 삶의 지평을 넘나들거나 용의 뱃속을 드나들 수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은 여기에 있다.

 

129. 입문, 프쉬케
어려운 임무라는 모티프의 실례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가장 매력적인 것은 잃어버린 애인 쿠피도(에로스)를 찾는 프쉬케의 경우일 것이다.

 

시기심 많은 어머니인 베누스가 신부로부터 자기 아들 쿠피도를 감추려고 전전긍긍 하는 것이다. 프쉬케가 베누스에게 아들 있는 곳을 가르쳐 달라고 애원하자 베누스는 프쉬케의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땅에 다 사정없이 메치고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밀, 보리, 기장, 양귀비 씨, 완두, 렌즈 콩, 그리고 붉은 콩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어두워지기 전까지 종류별로 골라내라고 명했다. 프쉬케는 개미 군단의 도움을 받아 명령대로 했다. 베누스는 이번에는 위험한 숲의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계곡에 사는 야생양의 금모를 모아 오라 했다. 이 양은 뿔이 날카롭고 이빨은 독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초록빛 갈대가 그 방법을 일러줬다. 그 양이 지나는 길목, 갈대에 묻은 금모를 모으면 된다고 한 것이다. 베누스는 잠들 줄 모르는 양이 지키고 있는 바위 꼭대기, 얼어 있는 샘에서 물 한 항아리를 길어오라고 했다. 이번에는 독수리가 다가와 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을 도와 주었다. 마지막으로 프쉬케는 명계의 심연으로 내려가 초자연적인 아름다움을 한 상자 가져 오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높은 탑루가 프시케에게 명계로 내려 가는 길을 가르쳐 주고 카론에게 줄 동전과 케로베로스에게 줄 뇌물까지 주어 그 길을 다녀오게 했다.

 

133-134. 우리의 꿈
우리의 꿈에는 아직까지도 시대를 초월한 위험, 괴물, 시련, 정체불명의 조력자 그리고 우리에게 유익한 인물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들의 형태에서 우리는 현재 상태의 모든 현상뿐만 아니라 그 현상을 이기기 위해 우리가 취할 행동의 단서도 굴절되고 있음을 본다.

 

139.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의 낙원에 들어 가려 하느냐?

 

143. 상징체계
고대 상징체계에 따르면 빛과 어둠을 표상하는 자매, 즉 이난나와 에레쉬키갈는 두 얼굴의 한 여신이다. 그리고 그들의 반목은 어려운 시련의 길을 의미한다. 신이든 여신이든, 남자든 여자든 신화의 등장인물이든, 꿈을 꾸는 사람이든, 영웅은 적대자를 발견하고 삼키거나 그에게 삼켜 짐으로써 이 적대자(뜻밖에도 그 자신의 자아)를 동화 시킨다. 하나씩 장애는 차례로 사라진다.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152. 여신
여신은 또 때가 되면 죽는 모든 것의 죽음이기도 하다. 나서 사춘기 성년기 장년기를 거쳐 무덤에 들어가기까지 전 존재의 순환은 여신의 지배 아래서 이루어진다. 여신은 자궁이며, 무덤이며, 제 새끼를 먹는 돼지다. 이렇게 해서 여신은 개인적인 어머니는 물론 우주적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두 유형을 드러내면서 선과 악을 통합한다.

 

153-154.
여신은 그를 유혹하고 인도하고, 그의 발목에 채인 족쇄를 깨뜨리게 한다. 그리고 만일 영웅의 능력이 여신에 미치면 이 양자, 즉 아는 존재와 알려지는 존재는 갖가지 제약에서 해방된다. 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 다 열등한 눈으로 보면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156. 온유한 마음
인생이 그렇다는 뜻이다. 마르지 않는 샘을 지키는 수호 여신은 영웅에게, 저 중세의 음유 시인이나 말하는 이른바 온유한 마음을 요구 한다. 여신은 악타이온의 동물적 욕망으로도, 퍼거스의 결벽에 가까운 도사림으로도 파악되지 않는다. 오직 니알의 부드러움에 의해서만 그 정체가 드러났다. 사랑은 온유한 마음 속에 깃들인다.

 

157.
여신(모든 여성에게 현현되는)과의 만남은 사랑의 은혜(자비, 즉 운명에의 사랑)를 얻기 위해 영웅이 맞는 마지막 재능의 시험 단계다. 이 사랑의 은혜는 바로 우리 삶이 누리는 영원성의 그릇과 같은 것이다

 

165. 유혹자로서의 여성
유혹이 가까이 와 있다고 생각한 베르나르는 <도둑이야, 도둑이야!> 외쳤다. 정말 나는 도둑에게 당한 뻔 했네 안주인은 한번 잃으면 다시 찾을 수 없는 내 보물을 노린단 말일세

오 은자여, 아름다운 은자여!... 그대 내 어깨에 손을 얹어 보아요. 불 같은 화살이 그대 핏줄을 타고 지나는 것 같으리니. 아니, 내 몸의 더 비천한 곳을 점유하시면, 제국을 정복한 것 이상의 격렬한 기쁨을 맛보시리니. 그대 입술을 더 가까이.

 

177. 아버지와의 화해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파이톤 아버지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 사람들의 생각을 확인시켜 준다. 아이는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의 남편의 상징이다.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때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아들은 세계를 섭렵하는데 있어서 아버지를 경쟁상대로 삼고, 딸은 섭렵된 세계 자체가 되는데 있어서 어머니를 경쟁자로 삼는 것이다
입문의 영광을 입은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 당하고 비 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다.

 

194.
욥의 말은 자기 합리화의 한 방편으로 예언된 것을 능가하는 그 무언가를 목격한 사람의 말이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알 나이가 되면 시련의 고뇌가 이미 그의 내부에 태동해 있다. 세상은 더 이상 눈물의 골짜기가 아니라 행복이 기다리는 현존의 완전한 현현이다.

 

207.
우리가 일단 세계의 원형들에 대한 편협한 교회적, 종속적, 국가적인 해석의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 던지게 되면, 우리가 전수 받아야 할 최상의 도리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서슴없이 이웃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만 자애스런 아버지의 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게 가능해진다.

 

211.
어머니가 준 필멸의, 현실적인 육체는 그의 무서운 힘 안으로 빨려 들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새 생명, 새로운 탄생, 새로운 존재의 지식이(따라서 우리는 이 몸 만으로 사는 게 아니고, 보살처럼 모든 몸, 세상의 모든 육신으로 산다) 우리에게 주어졌다. 저 아버지가 바로 어머니, 즉 재생의 자궁이었던 것이다.

 

213.
열반이란 말은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음이라는 삼 겹의 불을 끈다는 뜻이다.

 

215.
미망과 욕망과 적의의 적멸(열반)과 더불어 마음은 생각이 실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다.

 

216.
형상은 빈 것이며 빈 것은 즉 형상이다. 빈 것은 형상과 다르지 않고 형상은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형상이라 하는 것, 그것은 빈 것이며 빈 것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형상이다. 관념, 이론, 개념, 그리고 지식 역시 마찬가지다.

 

222. 무정물에 대한 설법
나무, 바위, , , 이 모든 것은 살아 있다. 이런 무정물은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없을 때, 문득 그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무정물들이다.

 

222.
임제가 어릴 적에 밖에 나가기가 무서워 법당에서 방뇨하자 스승이 몹시 꾸짖었다. 어째서 거룩한 부처님 계신 곳에서 방뇨하는가꾸중을 듣자 임제가 물었다. 그럼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을 가르쳐 주십시오. 거기에 가 누겠습니다.

 

223.
우리는 어머니 안에서 배태되어, 아버지로부터 격리된 채 산다. 그러나 우리가 때가 와서 그 시간의 자궁을 빠져 나오면 (영원으로의 탄생이다) 우리는 아버지 손으로 넘어간다. 현명한 자는 그 자궁 속에서도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안다. 그보다 더 현명한 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의 본체 안에 있다는 것까지 안다.

 

250.
나의 눈이 점점 밝아지면서저 지존의 빗줄기 속으로 자꾸만 빨려 들어 갔다 이때부터 내가 본 환상은 말로 할 수 없었으니, 말이 그 나타난 바에 승복하고 기억 또한 압도 당했다.

253.
귀환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또 어떤 조력자의 도움으로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256. 무추쿤다의 기도
내 주님이신 신이여 인간으로 살고 업을 쌓을 때 저는 닥치는 대로 살고 닥치는 대로 업을 쌓았습니다. 인간이 나고 죽기를 여러 번 할 동안 저는 어디서 멈춰야 할지, 어디서 쉬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저 뛰고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근심을 기쁨으로 잘못 알았습니다. 사막 위로 나타나는 신기루를 시원한 샘물로 알았습니다. 제가 기쁨을 잡으면 손안에 남는 것은 고통뿐이었습니다. 왕의 권능, 지상의 소유, 부와 권력, 벗과 자식들, 아내와 추종자들의 모든 존재는 제 오감을 홀렸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것이 되는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은 그 본성을 벗고 불길이 되었습니다. 이제 원하옵건데 당신의 실제(끝없고 자비로운)를 피난처로 삼아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298. 성경 변화 산 이야기
신화란 신화는 이 한 순간의 이야기 속에 모두 들어 있다. 예수는 안내 자이며, 길이며, 초월적인 세계, 귀환의 동반자다. 제자들은 그의 비의 전수자들이다. 그러나 그 신비를 통달한 자들이 아니라, 두 세계를 일거에 수렴하는 역설적 체험으로 안내 받는 자들이다.

 

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생각이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신다는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셈이다.

예수의 변모는, 개인적 의지를 소각시켜 버린 추종자들, 즉 스승에 대한 철저한 자기 부정에 의해 인생, 개인적인 팔자, 숙명이 제거된 지 오래인 사람들에 의해 목격되었다는 사실이다.

 

306.
<
오직 믿는 마음이면 나를 알 수 있고 참답게 볼 수 있으며, 내게 들어와 하나가 될 수 있느니라.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자기화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 버린다.

 

313.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 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352. 우주란()
한 체험이 세상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세계는 존재했다. 세계는 발전하여 알이 되었다. 이 알은 일년을 기다렸다. 그러다 이윽고 갈라 졌다. 갈라진 두 부분의 알 껍질 중 하나는 은이 되고 또 하나는 금이 되었다. 은이 된 알 껍질 은 땅이고 금이 된 알 껍질은 하늘이다. 바깥의 막 이었던 것은 산이고, 안의 막이었던 것은 구름이고 안개다. 핏줄이었던 것은 강이며, 그 안의 액체는 곧 바다다. 그 안에서 생겨는 것이 저 하늘의 태양이다.

 

357.  
남녀간의 사랑의 신비에 따르면, 애정의 궁극적인 경험은 곧 이원성이라는 환상의 배후에 <둘은 곧 하나> 라는 등식의 깨달음이 있다. 이 자각은, 우주의 만상 (인간, 동물, 식물, 심지어는 광물까지도) 하나라는 생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애정의 체험은 우주적 체험으로 확산되고, 이 자각에 이르게 한 애인은 창조의 거울로 확대된다. 즉 우주적 합일의 노래를 부르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431.
쿠훌린의 모험에서 가장 모험적이고 가장 극적인 것은, 바퀴와 사과가 구르면서 영웅에게 내어주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길이다. 이것은 운명적인 기적의 상징이며 교훈으로 해독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니체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구르는 바퀴>인 사람) 앞으로는 어려움이 비켜가고 뜻밖의 탄탄대로가 나타나는 법이다.

 

443. 성자로서의 영웅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고, 엄격하게 자아를 통제하고, 소리와 빛과 맛 같은 세계에 집착하지 않고, 애증을 버리고, 고독 안에서 살고, 소식하고, 말과 몸과 마음을 삼가고, 명상과 정신집중에 전심 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데 힘쓰고, 이기심과 권세, 자만심과 색욕, 분노와 편견을 떨치고, 마음 안에서 정일을 얻고, 자아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사람, 이런 사람은 능히 불멸의 존재에 답하는 사람이라 일러 무방하다.

 

445. 영웅의 죽음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 할 수 있어야 한다. 마무레 상수리 나무 밑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은, 어디에선가 빛 줄기가 번득이고 향긋한 냄새가 풍겨 나오는 걸 알고는 주위를 둘러 봤다. 곧 그는 죽음이 아름답고 빛나는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죽음이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아브라함이여 이 아름다움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또 내가 모든 사람에게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다 고도 생각지 말라 상대가 그대 같이 의로운 사람이면 나는 이같이 관을 쓰고 찾아 가지만, 상대가 죄인이면 나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454-457. 부처의 열반
이야기는 꽤 유머러스 하면서도 의식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까지 깨어 있다
<
아난다여, 수고스럽지만 내 자리를, 저 사라쌍수 아래에다, 머리가 북쪽으로 향하도록 마련해다오피곤해서 좀 눕고 싶구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은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사자처럼 누워 두 발을 포갠 뒤 명상에 빠져 들었다. 그러자, 그럴 계절이 아닌데도 사라수가 꽃을 피웠다. 꽃잎은 여래의 몸 위로 떨어 졌다. 여래를 경배하느라고 사라수가 꽃잎은 뿌렸던 것이었다. 하늘에서 여래를 찬양하는 음악이 들려 왔다.

 

<세존이시여 무슨 연유, 무슨 이유로, 세존께서 우파바나 존자에게, <비구여 내앞에서 비켜 나거라>고 말씀 하셨습니까?>

 

<우리는 멀리서 여래를 친견 하러 오지 않았던가. 성인이시며 최고의 부처이신 여래는 참으로 드물게 이 세상에 태어나신다고 해서 이렇게 먼 길을 오지 않았는가. 오늘 밤 그 여래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이고 열반에 든다. 그런데 저 비구가 세존의 앞을 가로 막아 최후의 순간이 가까워 왔는데도 우리는 여래를 친견할 수가 없구나> 아난다여, 그래서 신들이 화가 난 것이다.

 

<세존이시여 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세존께선 저들을 무엇으로 보십니까?>

 

아난다여 몇몇 신들은 하늘에 있되, 마음은 세상에 있도다 그들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울부짖고 두 팔을 내저으며 울부짖고 땅바닥에 거꾸로 처박혀 이리저리 구르면서 소리를 지른다 
<
세존이 너무 빨리 열반에 드는구나 세상의 빛이 너무 빨리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는구나>

 

<재행이 무상 하구 나 태어난 것 모습을 나타낸 것 죽기로 만든 것들이 어찌 이를 피할 수 있겠는가? 어쩔 수가 없구나
비구들아, 내 이제 너희들을 떠난다 존재의 제법은 무상 하다 정진하여 해탈에 이르도록 하여라

 

여래의 마지막 말은 일하다 
<
축복받은 자는 첫번째 무아에 이른다. 첫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두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두번째 무아에 이른 자는 세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 네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무한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한 의식에서 일어난 그는 무한 공간의 영역으로 들어 간다. 무한 공간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무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영역으로 들어간다.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지각과 감각의 휴식 상태에 이른다.>

 

480.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 (성직자든, 매춘부든, 여왕이든, 노예든)에 충실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481.
의무의 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회에서 추방된 자는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추방은, 탐색 모험의 첫 단계 일 수 있다.

 

482. 명상
우리의 핵은 무엇일까? 우리라고 하는 존재의 기본적인 성격이란 어떤 것일까?

 

중세의 성자들 및 인도의 요기들, 헬레니즘 문화의 비의, 고대 동양과 서양의 철학은 개인의 의식적인 관심을 그 외부적 의상에서 돌리는 기술이다. 명상에 드는 입문자는 준비 작업으로써 자기 마음과 정신을 세속적인 사건에서 분리 시키고 자신의 존재를 핵으로 몰고 간다. 그는 이렇게 명상 한다
나는 저것이 아니다. 조금 전에 죽은 내 어머니도 아니고 내 아들도 아니다. 내 몸은 병들거나 나이를 먹는다. 내 팔 내 눈 내 머리 이 모든 것을 합한 것도 아니다 나는 내 감정이 아니다 내 마음이 아니다 내 직관력이 아니다

이런 명상을 통한 입문자는 자기의 심층에 이르고, 마침내 그 껍질을 뚫고 엄청난 자각에 이른다.

 

목표는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떤 상태 <있는가>, 즉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484-485.
현대 영웅의 위업은 영혼이 균형을 이루고 있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의 불을 다시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현대 세계에 정신적인 의미를 부여 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현대 생활이라는 상황을 통하여 남자와 여자를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 수가 없다면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다.

 

490.

시인적 본성은 심리학적 관심과 무관하지 않고, 심리학적 관심은 신화에의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_토마스 만

 

491.

모든 신화는 꿈과 동일한 문법을 갖는다. 거의 대부분의 영웅이 공유하는 경험인, 비정상적인 탄생, 어린 시절의 고난, 방황, 조력자의 만남, 기적적인 권능의 획득, 귀환의 도식이 켐벨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켐벨은 무애, 사건, 의상이 다르지만, 인간의 무의식이 투사된 영웅, 말하자면 인간의 집단이 그려낸 영웅신화는 거의 일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정한 영웅의 사이클을 따른다. 영웅의 상징체계를 분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 중에서 하나의 영웅, 그러니까 모든 영웅 신화에서 본(원형)이 되는 하나의 영웅을 떠올린다.

 

492.

오랜 세월, 우리 숨줄이 닿아있던, 우리의 육즙이 층층이 묻어있던 문화는 이제 이 땅에 남아 있되, 오직 하나의 질투하는 신학에 가려져 있다.

다른 이들의 믿음, 다른 이들의 종교라면 듣도 보도 않고 흰 눈을 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체로운 종교 정신을 곧추세우는데 밑바탕 삼을 수 있다면, 남의 집(종교)도 좀 기웃거려 보는 데 인색해서야 되겠느냐?

 

 

III. 내가 저자라면

 

스스로의 삶을 신화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이 책의 독자가 되기 쉽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삶의 누추한 이야기를 '영웅'의 이야기로 바꾸어 삶의 전환을 모색한다면 이 책은 좋은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우선 이 책은 예화가 풍부하고, 독자가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나름의 해석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491)”는 점에서는 동의한다. 동서고금을 총 망라하여 수많은 성경, 경전, 전설, 신화, 설화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어, 고대 이야기 책을 읽는 듯한 재미는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아쉬운 점도 그에 못지 않았다.

 

이 책의 매력은 거장의 붓으로 우리에게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를 일반인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고 있으며(491)”

 

상기 인용문과 같이 역자는 이 책의 매력을 역자후기에서 밝히고 있는데, 내가 읽은 바로는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오히려 쉬운 문장을 어렵게 표현하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저자나 역자 같은 대가라면 이런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표현들을 삼가고 쉬운 말로 신화를 충분히 재미있게 이야기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저자가 쓴 신화의 힘같은 책은 비교적 쉽게 이해가 되었는데, 이는 저자 말년의 TV 대담집이라 그런지, 일생의 작업을 꿰뚫어서 신화의 진수를 정말 일반인이 알아듣도록 쉽게 풀어서 얘기했다. 이에 반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초기 작품이라 그런지, 그때는 저자가 말년의 완숙한 대가가 아니어서 그랬던지, 너무 전문용어가 난립하는 현학적인 책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나는 소통의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배웠다. 어려운 것은 풀어서 쉽게, 복잡한 것은 비유 등으로 단순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은 책을 쓰는 방법임을 깨달았다.

 

<영웅이 애써 찾아 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왕의 아들이고, 그는 이로써 자기의 실제적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신의 아들은, 이 이름이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54p)>

 

이 책을 제대로 소화해 내기 위해서는 신화의 상징체계뿐만 아니라, 융파 심리학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는 알고 나서 읽어야 될 것으로 보이나, 이 책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핵심은 비교적 단순해 보인다. 영웅의 여정은 무언가를 새롭게 얻기 위한 것이 아니고, 본래의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영웅은 이미 우리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진리의 단순함과 이야기가 주는 서사의 풍요로움이 한데 어우러진 이야기 책이라고 하겠다.

 

저자가 이 책에 풀어놓은 온갖 형태의 영웅 이야기는 이야기가 담긴 판도라 상자나 도깨비 방망이에서 쏟아져 나온 이야기들 같다. 이들 신들이 연출하는 무수한 드라마는 훗날 인간세상에서 그대로 되풀이 되었으며, 지금도 되풀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신화를 아는 일은 인간을 미리 아는 일이다여기에 신화의 가치가 있다 하겠다.

 

영웅들은 용기 있게 집을 떠나, 고난과 시련의 세월을 거쳤으며, 귀한 전리품(, , 진리 등)을 얻어 금의환향한다. 이 책은 이러한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여기 이 영웅의 자리에 나를 앉히고 본래의 나를 찾아가는 영웅의 여정을 꿈꾸어 본다.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1영웅의 모험은 출발-입문-귀환의 영웅의 여로가 선명하고, 여기에 제시된 신화들도 단계별로 나누어 각 부분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영웅이라면 앞으로 어떻게 내 길이 펼쳐질까?’ 생각하며 기대감을 가지고 읽을 수 있어 좋았다.

 

2부 제목이 우주 발생적 문화로 몀명되어야 할 것이 영웅의 모험으로 잘못 타이핑된 듯하다. 체계적인 1부에 비해, 2부는 키워드 중심으로 풀어가면서 관련된 예화들도 토막치지 않고 전체적으로 설명하려 했으나, 적합성 여부가 의심되는 예화들이 많아 어렵고 혼란스러웠다.

 

더욱이 어처구니 없는 것은 1부와 2부의 연계이다. 2부가 어떻게 1부와 연결되는지를 모르겠다. 프롤로그에서 밝힌 내용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내가 저자라면, 1부의 차례, 출발-입문-귀환으로 이어지는 영웅의 여로를 나의 전환 이야기로 대치하여 한번 써 보고 싶다.

 

내게 와 닿는 장절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54. 영웅은 우리 내부에 있다.
영웅이 애써 찾아 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왕의 아들이고, 그는 이로써 자기의 실제적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신의 아들은, 이 이름이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120. 고래의 배
마법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이, 곧 재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관념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래의 배라는 자궁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영웅은 그 관문을 지키는 세력을 정복하거나 그 세력과 화해하는 대신, 그 미지의 힘에 빨려 들어 겉보기에 죽은 것으로 나타나고는 한다.

122.
헤라클래스는 괴물의 목구멍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배 안을 난자 하여 마침내 괴물을 죽이고 말았다. 세계 도처에서 채집되는 이런 모티프는 관문 통과가 자기적멸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222. 무정물에 대한 설법
나무, 바위, , , 이 모든 것은 살아 있다. 이런 무정물은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없을 때, 문득 그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무정물들이다.

 

443. 성자로서의 영웅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고, 엄격하게 자아를 통제하고, 소리와 빛과 맛 같은 세계에 집착하지 않고, 애증을 버리고, 고독 안에서 살고, 소식하고, 말과 몸과 마음을 삼가고, 명상과 정신집중에 전심 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데 힘쓰고, 이기심과 권세, 자만심과 색욕, 분노와 편견을 떨치고, 마음 안에서 정일을 얻고, 자아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사람, 이런 사람은 능히 불멸의 존재에 답하는 사람이라 일러 무방하다.

 

482.
목표는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떤 상태 <있는가>, 즉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영웅은 우리 내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고래의 배 같은 흡사 죽음처럼 보이는 곳에 스스로 뛰어드는 자기적멸(자아를 죽임)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영웅은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자신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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