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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7일 21시 23분 등록

4월 신화, 내 원형을 찾아서

2014. 4. 27 정수일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 이윤기 옮김 / 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1904. 3. 26~1987. 10.30)

미국 뉴욕주 출생,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


저자에 대한 내용은 앞서 ‘신화의 힘’ 힘에서 리뷰 한 바 있음으로 생략



2.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5.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종교 교의에 녹아들어 있는 진리는 대개가 변형된 데다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로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아이를 상대로 갓난아기는 황새가 물어다 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황과 흡사하다. 우리는 이 큰 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따라서 이 경우, 우리는 상징으로 분식된 진리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이는 알아듣지 못한 다. 아이는 우리가 말하는 내용 중 변형된 부분만을 알아듣고는 속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른에 대한 아이들의 불신과 면역성이 종종 이러한 부정적 인상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진리의 상징적 분식을 피하고 아이들의 지적 수준에 맞추어 사건의 진상을 알게 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4. 어느 시대,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인간의 신화에는 끊임없이 살이 붙어왔고, 이러한 신화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활동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살아있는 영감을 불어넣었다.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27. 전통적인 통과 제의가 개인에게 과거를 향해서는 죽고 미래를 향해서는 거듭 날 것을 가르쳤듯이...


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 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는 길뿐,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길뿐이다.


33.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


33. 그래서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라 아니라 사회 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두 번째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해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 아는 대로 말하는 삶이 아니라 삶대로 쓰고 쓴 대로 살며 삶대로 말하는 삶을 살 것이다.


39.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 미궁을 빠져나올 실을 전해줄 아리아드네. 우리의 아리아드네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이 고작 실이었다니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그러나 이나마 없으면 미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 모험에 지나지 않는다. 


42. 그러나 행복을 다루는 동화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하늘의 신화가 삶의 발자국을 뒤로 남기고 밤의 문턱에 설 준비가 된 노인의 것이듯, 동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나라의 것이며, 현실로부터 보호받고 있기는 하나 조만간에 거덜 날 운명에 놓여있다. 


44.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이러한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삶은 더 이상 도어에 도사린 재앙의 가혹한 단죄와 시간에 의한 마손이나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 받는 일이 없게 된다. 뿐인가, 공포는 눈앞에 여전히 보이고 고뇌의 울부짖음은 여전히 귀에 들리나, 삶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는 힘의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 행복한 가정이 다 그렇듯이. 소생한 신화와 세계는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44.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 프로메테우스, 이아손, 아이네이아스 등의 떠남과 모험과 귀환의 이야기.


50.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 그들이 관심이 어디에 있건 진정한 창조 행위는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세상으로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행위로 표현되며 ... 


54. 돌이켜보면, 모험적인 여행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하다.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왕의 아들이고 그는 이로써 자기의 실제적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신의 아들은 이 이름이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55. 이 둘(영웅과 그의 궁극적인 신, 찾는 자와 찾아지는 자)은 결국 이 세계의 신화에 다름 아닌 단일한 유형적 신비의 표리로 받아들여진다. 위대한 영웅은 위대한 행적을 통해, 이 다양한 얼굴이 사실은 하나임을 알고, 또 남들에게 알리게 된다.


55. 영웅의 성공적인 모험의 의미는 생명의 흐름을 풀어 다시 한번 세계의 몸속으로 흘러들게 하는 데 있다. 이 흐름의 기적은 물리적으로 음식물의 순환, 역학적으로는 에너지의 흐름, 영적으로는 은총의 현현을 나타내는 듯하다. 


58. 신의 화신으로서의 영웅은 영원의 에너지가 시간성 안으로 흘러드는 배꼽, 즉 세계의 배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연속적인 창조의 상징, 모든 사물 안에서 약동하는 소생의 연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세계 보존의 신비인 것이다.


60. 한 문화가 신화 안에서 인간 존재의 면면이나 그 문화의 면면을 키워나갈 때, 그 문화는 상징적인 암시와 함께 싱싱하게 살아난다.


62.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르기를,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

(......)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면,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71.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의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73. 따라서 모험에의 소명을 알리는 전령관, 혹은 고지자는 어둡고, 징그럽고, 무섭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존재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길을 따르면 길은 낮의 벽을 통해 보석이 빛나는 밤으로 열린다. 


80. 이 신화적 여행의 첫 단계(우리는 이를 모험에의 소명으로 불렀다.)는 운명이 영웅을 불렀고, 영웅의 영적 중심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82. 세계 전역의 신화와 민화는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제 이득으로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 신성이 그 자신의 적이 된 것이다.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즉 자신의 자기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 인간은 밤이고 낮이고 자신의 어지러운 심성의 폐쇄된 미궁 안에 있는 살아있는 자기의 이미지인 신적인 존재에 쫓긴다. 문을 나가는 길은 막힌 지 오래다. 출구는 없다. 인간은 사탄처럼 죽자고 자기 자신에게 매달린다. 이때 그가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혹자는 그러다 신 안에서 마침내 파멸하기도 한다.

-> 미노스의 미궁은 우리 마음이며 그 안에 가두고자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는 우리 맘속에 갇힌 괴물이다. 우리는 그 괴물에게 늘 쫓긴다. 왜 쫓기는지도 모른다. 늘 불안하고 조마조마 할 뿐이다. 괴물에게 매달려도 보지만 그 괴물은 공물로 잡혀온 선남선녀를 더 요구할 뿐이다. 마음속에 괴물을 죽이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 테세우스를 보내야 한다. 하찮은 실 조각이라도 들려서 괴물과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89. 한 가객은, 여자를 일러 물으니 대답하겠노라. 내 일찍이 여자의 글에서 명문을 본 바 없고, 사내의 머리가 희어지고, 주머니가 빌 때면,, 사내에겐 나누어줄 사랑의 몫도 없다더라.


96.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조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대자연은 항상 위대한 임무를 지원한다. 영웅의 행동이 그 사회가 예비하고 있는 것과 일치될 때 그는 흡사 역사적 변화의 리듬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105. 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수호자는 영웅의 현재 상황, 혹은 삶의 지평의 한계를 상징하면서 사방에서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수호자 뒤로는 어둠이며, 미지의 세계이며, 위험이다. 부모의 감시 밖이 아이들에겐 위험 지역이고, 사회의 보호 밖이 종족의 구성원들에겐 위험 지역인 것과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들이면 여기에서 만족한다. 심지어는 표시된 경계선 안에 안주하는 데 만족하기까지 한다. 집단의 보편적 믿음이 미지의 땅으로 첫 발을 내딛으려 하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111. 모험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나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 


120. 마법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이, 곧 재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관념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래의 배라는 자궁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영웅은 그 관문을 지키는 세력을 정복하거나 그 세력과 화해하는 대신, 그 미지의 힘에 빨려들어 겉보기엔 죽은 것으로 나타나고는 한다.


123. 그렇다면 비유적으로 보아,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고래의 입을 향한 영웅의 돌진은 같은 모험인 셈이다. 즉 회화적 언어로 말하면 둘 다 생이 구심화 행위, 거듭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143. 시련은 첫 관문의 문제를 심화시키고 질문은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자아가 스스로를 죽음에 내어맡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주위에 있는 것은 머리가 많은 휘드라이기 때문이다. 절단한 곳에다 비방을 쓰지 않는 한 하나를 자르면 두 개의 머리가 나타난다. 원래 시련의 나라를 향한 출발은 초보적인 정복과 예언의 힘을 얻기 위한 길고 험한 여로만을 표상했다. 이제 영웅은 용을 죽여야 한고 몇 번이고 위험한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그 동안 영웅은 몇 차례의 예비적인 승리를 거두고, 일시적이긴 하나 무아의 경지를 체험하며 이상향을 엿보게 된다.


145. 잠자는 여성은 동화나 신화에 곧잘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조기 중의 본보기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 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에 해당한다. 


156. 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기가 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왕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왕도란 싸움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지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159. 영웅의 문제는 일반인의 삶과 무관해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삶의 상황을 수습하는 데 대한 실패는 결국 의식의 제약으로 나타나는 수밖에 없다. 싸움이나 짜증은 무식한 자들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후회는 때늦은 각성일 뿐이다. 세계 도처에 널린 영웅 신화에 나오는 영웅의 모험은 일반적인 양식으로 어떤 계층에 속하는 사람에게든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여기에 광의의 술어로 공식화시켜 본 것이다. 우리는 이 일반적인 유형과의 비교에서 우리 자신의 입장을 밝혀내야 하고 이것을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는 제약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데 필요한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


160. 참으로 까다롭고 재미있는 것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 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를 윤색하고 회칠을 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름에 빠진 파리, 우리가 먹을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누군가 다른 불유쾌한 사람의 허물로 돌리려 한다.


170. 아버지의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피해자의 에고가 투영된 것이다. 


192.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영웅은 영혼의 문을 열어 공포를 극복하고 이 광대무변하고 무자비한 우주의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을 존재의 존엄성 속에서 완전하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영웅은 자기 몸에 박힌 가시(약점)을 통해 삶을 초원하여 한순간이나마 그 근원을 투시한다. 그는 여기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와 자기가 화해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는다. 


194. 아들이 아버지를 알 나이가 되면 시련의 고뇌가 이미 그의 내부에 태동해 있다. 세상은 더 이상 눈물의 골짜기가 아닌 행복이 기다리는 현존의 완전한 현현이다.


210. 은하계 건너 은하계, 우주의 세계 건너 세계, 별의별 존재의 세계에서 무한한 공(空)의 바다를 헤치고 생명을 얻었다가 거품처럼 사라지는 무량 겹으로 묶이고 족쇄에 채인 의식의 중심 시간과 시간 수많은 생명 때리고 죽이고 미워하고 승리 이상의 평화를 바라며 더 자신의 팽팽한 고리 속에 갇힌 채 고통 받는 군상 이 모두가 만상을 한눈에 보고 공의 본질을 본질로 삼고 대자대비로 굽어보시는 주의 자식이며 무한히 계속되는 무상의 허상이며 긴 꿈의 세계다 그러나 이분의 이름은 ‘내면에서 보이는 주’이기도 하다.


280. 이제 우리는 이 여행의 마지막 고비에 이르렀다.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모험은 서곡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신화 영역에서 일상 현실로 귀환하는 영웅의 역설적이고 험난한 관문 통과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구조를 받든, 내적 충동에 따라 살아나든 신들의 안내를 받든 영웅에게는 오래 잊고 있던 곳으로 애써 얻은 전리품(홍익)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단계가 남는다. 뿐만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재생의 영약을 가지고 돌아가 원래 속해 있던 사회와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신문과 서릿발 같은 증오와 맞서야 한다.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282. (......) 오로지 감각의 배타적 증거에만 급급하는 일반인에게 어떻게 저 만유의 근원인 공을 설명한단 말인가? (......)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첫 번째 문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이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왜 그런 세상으로 되돌아와야 할까?

-> 인간은 땅을 딛고 살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고귀한 생각과 뜻을 품고 그리고 이것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하루하루 먹고 싸고 자야한다. 필멸의 인간이 겪어야 하는 형벌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매일 간을 파 먹히던 프로메테우스나 바위를 밀어 올리던 시지포스의 형벌 같은 것 말이다. 영웅의 삶은 인간이 신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신선이 인간을 사는 삶이다.


306. 이제 의미는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종교적 관행이 쫓고 있는 바다.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 됨, 즉 자기 화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동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307. 자기 삶을 영위하려면 죄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참으로 구역질나는 것이다. (......)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319.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만이 빈사 상태에 빠진 성화는 그 영원히 인간적인 의미를 다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 인식 너머의 세계에 대하여 실체적 진실 즉 현상계 혹은 형이하학의 세계로 끌어내리려는 시도는 오랫동안 시도되어 왔다. 신의 영역에 다가가고 싶은 인간의 욕구는 항상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이카로스가 하늘에서 떨어지던 순간과 다르지 않다. 듣고 보고 만질 수 있는 너머의 세계는 그 세계의 언어로 읽어야 한다. 굳이 의식세계의 언어로 읽어야 할 이유도 읽어 낼 수도 없는 것이다.


[2부]


326. 신화는 전통적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적 언어로 기능한다.


330. 신화는 부수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현상계 저쪽 세계(공, 혹은 범주를 초월한 존재)로 들어가 적멸에 드는 것이다. 따라서 신, 혹은 신들은 편의적인 방편, 즉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을 잘 나타내고도 그것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는 하나, 신 혹은 신들 자체는 어디까지나 편이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과 형식을 통하여 이 세계의 얼개를 설명하는 성질이 부여되어 있을 뿐, 이들은 결국 세계를 설명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깨우며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의식세계와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이해, 동양철학에서 이야기 하는 ‘참 나’의 개념과 닮아 있다. 


331. 영웅은 살아 있을 동안에 창조 과정 중에는 지각되지 않는 초의식의 요구를 알고 이를 대리하는 자다. 영웅의 모험은, 그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나타낸다. 이 순간은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의 살아 있는 죽음의 어두운 벽 너머의 빛의 길을 발견하고 이 길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348. 회임에서 생산이, 생산에서 생각이, 생각에서 기억이, 기억에서 의식이, 의식에서 욕망이

-> 존재하지 않는 것은 ‘無’ 즉, ‘空’이다. 존재하는 것은 ‘무’에서 태어났다.


355. 한 처음의 우주는 인간의 형상을 한 자아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내가 마로 그다.> 하고 소리쳤다. 여기에서 나라는 이름이 생겼다. 오늘날에도 누가 말을 건네 오면 <응, 나>라는 말로 서두로 삼은 연후에야 자기가 만난 다른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422. 폭군은 자만한다. 그리고 자만은 바로 폭군이 파멸하는 씨앗이다. 폭군은 자기 힘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만한다. 

-> 힘을 가진 이는 자만한다. 가진 힘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458. 놀랄 만한 권능을 가진 막강한 영웅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다. 거울에 비추어 볼 수 있는 육체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내재하는 왕으로 서다.


482. 그러나 이러한 호칭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는 가르쳐주지 못한다. 이러한 호칭은 단지 지리적인 우연, 생년월일이 다르고 수입이 다른 우연을 나타낼 뿐이다. 우리의 핵심은 무엇일까? 우리라고 하는 존재의 기본적인 성격이란 어떤 것일까?


484. 이제 신들에겐 망원경과 현미경에 의한 탐색으로부터 숨을 곳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한때 신들이 섬김을 받던 그런 사회도 이제는 없다. 사회의 구성단위는 이제 종교적 내용물의 전달자가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조직이다. (......) 오늘날 집단 속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계도 그렇다. 모든 것은 개인에 귀착된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란 완전히 무의식적이다. 인간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어떤 동인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의 심성의,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의 교류 통로는 단절되고 우리는 둘로 찢기고 말았다.


486.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 표한다.


488. 감히 소명에 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화해시켜야 하는 존재의 거처를 찾아내는 현대적 인간인 현대의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려서도 단 된다.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 너는 왜 아버지의 집을 떠나왔느냐? 고통을 찾아 서지요.


491. 거의 대부분의 영웅이 공유하는 경험인, 비정상적인 탄생, 어린 시절의 고난, 방황, 조력자와의 만남, 기적적인 권능의 획득, 귀환의 도식이 캠벨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492. 오랜 세월, 우리 숨줄이 닿아 잇던, 우리 육즙이 층층이 묻어 있던 문화는 이제 이 땅에 남아 있되, 오직 하나의 질투하는 신학에 가려져 있다. 신화나 종교를 보는 눈이 병적인 교조주의와 경직된 흑백의 논리에 길들어 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걸핏하면 조상이 우상으로 단죄되고, 하나의 신학을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오랜 역사 살림을 꾸려온 민족까지 우상의 자식들로 치부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 시대, 기댈 곳 없던 민중의 문화가 미신으로 업어치기를 당하고, 충정에서 우러난 비판 정신과 각자의 자유를 겨눈 정신적 편력의 간증이 사탄의 소리 수작으로 간주되는 이 시대에 모든 민중의 문화와 종교를 고루 짚어보며, 그 바른 뜻을 더듬는 이 책을 우리 글로 옮긴 뜻은 그러므로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믿음, 다른 이들의 종교라면 듣도 보도 않고 흰 눈을 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체로운 종교 정신을 곧추세우는 데 밑바탕 삼을 수 있다면, 남의 집(종교)도 좀 기웃거려 보는 데 인색해서야 되겠느냐는 뜻에서다.



3. 내가 저자라면


세상은 넓지 않으나 영웅은 많다는 말은 옳은 말이다. 켐벨은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이야기를 시작한 것인가! 그의 상상력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이며 비교 신화학이란 독창적 영역을 발굴하고 우뚝 세운 에너지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그는 그가 발견한 영웅의 여정과 모험을 스스로 체험하고 실증하였다. 그 스스로 영웅의 삶을 산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다. 그가 말한 수많은 영웅들은 그 자신이며 우리 모두다. 그는 스스로 영웅의 삶을 살아 실증하였고 우리는 이제 그가 그려놓은 길을 떠나야 한다. 지도가 밝혀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켐벨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 예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고 이 책의 저작 목적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입장을 원용하면서 다양한 영웅 전설을 통해 인간의 정신 운동을 규명하는 한편 현대 문명에 대해 하나의 재생 원리까지 제시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이를 위하여 저자는 신화, 옛이야기, 동화, 민간전승, 역사적인 기록, 학술 조사서를 가리지 않고 영웅의 무대면 무엇이든 종횡무진으로 이 책에다 등장시킨다. 


캠벨은 무대가 다르고 사건이 다르고 의상이 다르지만 인간의 무의식이 투사된 영웅, 말하자면 인간의 집단이 그려낸 영웅 신화는 거의 일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리뷰어의 내공이 딸려서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없으나 동양의 우주론에 관한 짧은 지식으로 비춰볼 때 서양의 우주론적 사고(하나님, 우주, 절대자, 신)의 큰 맥락은 역시 동양철학에서의 그 것(천리, 도, 이치, 성, 본성, 참나, 적멸, 해탈 등)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겠다.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 는 말은 함축적이고 직접적이다.


켐벨은 신화, 민담, 전승 등 전해져 오는 영웅의 이야기를 은유와 암시로 읽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 이야기들의 표면적인 내용은 전쟁, 살인, 폭력, 재난, 사건, 사고 등 잔혹하고 비정한 날들의 이야기다. 한 시도 편할 날이 없다. 사바세계가 그때나 지금이나 엉망진창인 것도 매 한가지였다.


변신이야기에 이어 이 책도 여전히 미궁이다. 그가 하려는 이야기의 맥락은 놓치지 않겠는데 그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데려온 이야기는 한마디로 무궁무진이다. 펼쳐놓는 이야기가 너무도 방대하여 단번에 삼킬 수 없다. 할짝할짝 핥아서 될 성 싶지가 않다. 그가 펼쳐놓은 방대한 이야기에 오히려 함몰되어 길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읽자마자 책꽂이에 꽂혀질 책이 아니라 곁에 두고 영감이 새벽과 함께 찾아올 때면 때때로 펼쳐봐야 할 책이다. 단락별로 짧게 끊어서 씹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데려온 이야기들의 원전을 살펴봄직도 하다. 적어도 이 정도는 더듬거려본 다음 캠벨의 이야기에 대한 견해가 생길 것이다.


이 양반은 도대체 어쩌자고 이렇게 이런 이야기를 시작한 것인가!

시작을 했으면 계통을 세워서 좀 추려놓아 주던가! 독자들이 어찌 다 당신만 하겠소.



[책의 구성]


1부는 영웅의 모험에서 신화, 옛이야기, 동화, 민간전승, 역사적인 기록, 학술 조사서 등 가리지 않고 인용하여 나타나는 영웅의 공통적 패턴을 밝히고 영웅의 여정을 주로 다룬다. 아울러 이야기 속에 내재된 모티프와 은유, 암시 따위를 다루고 있다. 영웅의 여정은 대체로 출발→입문→귀환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1부의 마지막편인 4장. 열쇠 편에서 이상의 전 과정에 대한 키워드와 구조를 정리하였다.


2부는 우주 발생적 순환 편에서 우주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그 안에서의 인간을 자각하게 한다. 결국 우리는 우주의 일부이면서 개인 모두는 우주의 본질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을 자각하여 우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내 안의 신성’을 깨워 우리가 신의 일부(아들)라는 것을 깨우치게 한다.


이 책의 본문은 아래와 같이 구성(특별히 목차의 순서가 의미가 있기에 별도로 정리하였다.)되어 있다.

-프롤로그, 원질 신화 : 신화와 꿈, 비극과 희극, 영웅과 신, 세계의 배꼽

-제1부 영웅의 모험 : 

1. 출발(영웅에의 소명→소명의 거부→초자연적인 조력→첫 관문의 통과→고래의 배)

2. 입문(시련의 길→여신과의 만남→유혹자로서의 여성→아버지와의 화해→신격화→홍익)

3. 귀환(귀환의 거부→불가사의한 탈출→외부로부터의 구조→귀환 관문이 통과→두 세계의 스승→삶의 자유)

4. 열쇠

-제2부 우주 발생적 순환

1. 유출(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우주의 순환, 허공에서 공간, 공간의 내부에서 생명, 하나에서 여럿으로, 창조의 민화)

2. 처녀의 잉태(어머니 우주, 운명적 모태 구세주를 낳는 자궁, 미혼모의 민화)

3. 영웅의 변모(최초의 영웅과 인간,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전사로서의 영웅, 애인으로서의 영웅, 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 구세주로서의 영웅, 성자로서의 영웅, 영웅의 죽음)

4. 소멸(소우주의 끝, 대우주의 끝)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 변신 자재자, 신화?제의?명상의 기능, 오늘날의 영웅



[감동적이었던 장과 절]


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 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는 길뿐,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길뿐이다.


488. 감히 소명에 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화해시켜야 하는 존재의 거처를 찾아내는 현대적 인간인 현대의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된다.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보완점]


탁월한 한 사람의 일생을 고스란히 바친 한권의 책을 며칠에 걸쳐 읽으면서 콩이야 팥이야 할 깜냥이 되지 않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례를 범하지 않을 수 없으니 늘 삼갈 따름이다.


- 쪼가리 이야기의 비애

그렇지 않아도 어렵고 헷갈리고 생소하고 어수선한데 각 단락별로 인용되어 설명되고 있는 이야기들이 소제목의 주제에 합당한(해당되는) 부분만 발췌하여 게재하고 있다. 이로써 이야기도 아니고 이야기가 아닌 것도 아니니 읽는 내내 불만이다. 오히려 이야기 전체를 풀어 놓고 주제를 모두 나열하는 방법이었으면 어땠을까 싶기는 한데....그러려니 목차가 안나온다. 몇 단락이 지나서 앞서 이야기한 개구리 이야기가 다시 언급되고 숲 속의 잠자는 공주가 몇 백 페이지를 넘어 나바호 인디언과 함께 등장한다. 황당하다.


- 전술한 지적과 중복되는 사항이지만 한 번 더 언급한다면 인용된 이야기가 너무 풍부해서 오히려 계통을 잡기가 어렵다. 북유럽에 있다가 예수를 만나고 갑자기 아즈텍으로 갔다가 석가모니를 만나면서 단락을 맺는다. 어쩌라고.


- 제2부 우주 발생적 순환의 이야기를 1부의 해당되는 각 장에서 설명되었으면 우매한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는데 조금 더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 목차 오류

제2부 영웅의 모험 → 제2부 우주 발생적 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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