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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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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7일 21시 26분 등록

. 저자에 대해서

지난번 신화의 힘에서 저자에 대해 이미 다룬 바, 역자인 이윤기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1947년 경북 군위에서 태어난 이윤기는 그 당시 명문이던 경북고에 진학했으나 들어간 지 3개월 만에 그만뒀다고 한다. 영화관 다니기를 좋아하고, 그 시절 이미 막걸리 마시기를 즐겼던 그에게 학교는 오히려 공부를 방해하는 곳이었다. 그렇게 학교를 나온 뒤 그는 독학으로 공부했다. 클래식 음악감상실에서 하루 종일 바흐와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헤밍웨이와 오 헨리 작품을 영어로 읽었다.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키 등은 중학교 3학년 때 공부해둔 일본어로 읽었다. 관심있는 영역에 대해서는 공부하다 코피가 나면 사전 모서리로 쓱 닦고 공부를 계속했을 정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검정고시로 대학 진학 자격을 얻어 1967년 성결교 신학대 기독교학과에 진학한다.  갑작스럽게 신학대학에 들어간 이유는 홀로 사전을 찾아가며 공부한 영문학에 매료되었고 이러한 영문학의 근간인 기독교와 고전어를 배우고 싶어서였다고 하니 일찍부터 본인의 가슴이 시키는대로 천복을 따르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으로 들어간 신학대학에서 그는 기대와 달리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하지를 못했고 그렇게 다시 대학도 그만 두게 된다.

 

이후 그는 군에 입대해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지, 자신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베트남전에 참전하기도 하였고, 제대 후에는 공사판을 전전하기도 하며 방황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던 1975년 학원>지의 기자가 됐었고, 그곳에서 미술 전공 편집기자를 하던 아내를 만났다. 서른 살에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그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번역 일을 시작하였다.

 

이후 30세가 되던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베트남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단편소설 하얀 헬리콥터가 입선되어 등단했다. 그러나 그는 문단에 집중하기 보다는 본격적인 번역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베스트 셀러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외 우리에게 익숙한 변신 이야기, 그리스인 조르바 등 200여권의 책을 번역했으며 2000 9월 한국번역가상을 수상했다. 단어 하나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는 치밀하고 정확한 번역가로, 또한 우리나라에서 신화에 대한 것을 가장 많이 번역한 소설가로 더 잘 알려져 있을 정도라니 대단하게 여겨진다.

 

1991 8월부터는 미국으로 건너가 2000년까지 미국 미시건주립대학교 국제대학 초빙연구원(종교사) 및 동 대학교 사회 자연과학 객원 교수(비교 문학)로 지내기도 하였다.

 

40대 이후에는 소설가로서의 활동에도 힘을 쏟아 1998숨은 그림찾기1-직선과 곡선으로 동인문학상을, 2000년 소설집두물머리로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번역작업에 오래 종사하면서 언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깊이 천착해 온 작가답게 그의 문체는 가장 우리말다운 표현을 잘 구사하며, 동시에 보편적인 상징과 은유체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깊이 있는 서술구조를 지닌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우리 소설가들이 이야기의 서술에는 많은 공을 들이고 있지만 인물들의 대화를 재현하고 생동감 있게 만드는 데 다소 부족하다는 일반적인 경향을 감안할 때, 그의 작품들은 늘 살아 있는 인물들이 직접 대화에 참여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의대화로 구성되어 무척 신선한 인상을 준다. 그러면서도 대화의 구조가 간명하면서도 깊이 있는 메시지를 주고받는 장면을 연출하는 힘은 오랜 습작기와 다수의 외국 문학 작품의 번역을 통해 얻은 작가수업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들 모두가 읽어보았을 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신화를 쓰기도 했다. 아버지가 일찍(역자의 돌 무렵) 돌아가셨던 역자는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신화의 패턴을 자주 보게 되면서 신화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었다고 한다. 그렇게 신화 관련 책들을 번역하게 되었고, 결국은 본인의 관점으로 재구성하여 신화 이야기를 출간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2010 8, 향년 63세를 일기로 영원한 신화의 세계로 떠났다.

 

그가 남긴 말 중 한 구절을 공유하고 싶다. 밑바닥 인생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온 이윤기의 내공이 들어나는 말인 것 같다. 그리고 여지껏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편안하게만 살아온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지금도 각자 자기가 택한 분야에서 착실히 내공을 쌓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게 도리어 위태로워 보여요. 고등학교는커녕 대학 중퇴도 안 해 본 녀석들이 뭘 하나 하는 거예요. 저렇게 만사가 편안해서야 과연 향내 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거예요. 자기강화 프로그램은 오직 자기 안에서만 나오는 건데, 그건 부모가 대신 해 줄 수도 없는 일인데.

 

.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5. 아이는 알아듣지 못한다. 아이는 우리가 말하는 내용 중 변형된 부분만을 알아듣고는 속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른에 대한 아이들의 불신과 면역성이 종종 이러한 부정적 인상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진리의 상징적 분식을 피하고 아이들의 지적 수준에 맞추어 사건의 진상을 알게 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6.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옛 현자들의 말을 하되 언외의 뜻을 거기에다 실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따라서 그분들의 상징적 언어를 거듭 읽되 그 가르침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고문집 편집자의 재주쯤은 갖추고 있어야 할 듯 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원 상징의 문법을 터득해야 할 터인데, 저자가 알기로는 이 문을 여는 열쇠로 정신분석학만한 현대적 길잡이는 따로 없을 듯 하다. 다음 단계는 세계 각처에서 채집된 신화와 민간 전설을 한곳에 모아놓고 상징으로 하여금 스스로 입을 열게 하는 일일 듯 하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면 그 유사성이 한눈에 두드러져 보이고,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오랜 세월 삶의 길잡이로 삼아온, 방대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일정한 상태로 보존된, 바탕되는 진리와 만나게 된다. 

이 책이 다루는 것은 상사성이지 상이성은 아니다. 저자가 바라기로는, 이러한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결실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13. (신화는) 변화 무쌍한 듯하지만 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야기의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도전적이리만치 끈질긴 암시를 던진다. 말하자면, 아무리 읽고 들어도 이런 이야기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는 암시다.

 

14. 어느 시대,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인간의 신화에는 끊임없이 살이 붙어왔고, 이러한 신화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활동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살아있는 영감을 불어넣었다.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놀라운 것은 심원한 창조적 중심을 촉발하고 고무하는 특징적인 효과가 아이들 놀이방에서 굴러다니는 하찮은 동화책에도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한 방울의 바닷물이 바다의 본질을 고스란히 대표하고, 하나의 벼룩알에 생명의 신비가 두루 깃들여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이는 신화학의 상징은 꾸며낸 것도 아니고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을 수도, 발명될 수도, 억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

 

시간을 초월한 이 환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어느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신화는 왜 어느 곳에서 채집된 것이든 그 다양한 의상 아래로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신화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15. 정신분석학자들의 대담하고도 획기적인 저술은 신화학도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자료하다. … 프로이트와 융과 그 후계자들은 영웅과 신화의 행적이 현대로 계승되었음을 여지없이 증명해 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부에는 속으로 알찬 꿈의 판테온이 있다. 최신형 오이디포스의 화신, 미녀와 야수의 속편이 오늘 오후에도 뉴욕의 42번가와 50번가 모퉁이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9. 무의식은 꿈을 통해서, 혹은 벌건 대낮에, 아니면 정신 착란을 이용하여 갖가지 부질없는 몽상과 기이한 상념과 공포와 정신을 어지럽히는 허상을 마음으로 올려보낸다.

 

23,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있는 타락의 길을 버리고 영험적인 정신의 도움을 따르게 하는 우리 내부의 고차원적인 신경증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직도 남아 있는 유아기의 이미지에 발목이 잡혀 있고, 따라서 어른으로 가는 길을 애써 좇으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전후가 도착된 슬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삶의 목표가 어른이 되는 데 있지 않고 청년으로 머물러 있는 데 있으며,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데 있지 않고, 어머니와 유착되는 데 있다고 믿는 현상이 그것이다. 그래서 남편들은 소년 시절이라는 이름의 신전에서, 아들에 대한 부모의 소원이던 법률가, 실업가, 혹은 지도자를 섬기고 있는가 하면, 아내들은 결혼한 지 14, 두 아이를 낳아 길러놓고도 여전히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다.

 

27. 전통적인 통과 제의가 개인에게 과거를 향해서는 죽고 미래를 향해서는 거듭날 것을 가르쳤듯이, 저 왕위 서임의식은 그의 개인적인 성격을 벗기고 신명이라는 망토를 입혀주었다.

 

28. 권력망자는 세계의 신화, 민간 전승, 심지어는 악몽에도 익히 등장하는데 그 특징은 어디서든 동일하다. 그는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다. 그는내 것이라는 탐욕스러운 권리에 걸신들린 괴물이다. 그가 저지른 황폐의 참상은 그의 세력권 안에 두루 널려 있는 것으로 신화와 동화는 한결같이 그리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집안,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심성, 우정과 도움을 빌미로 내민 그의 손길에 시들어버린 생명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가 구축한 문명의 넓이를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만에 빠진 폭군의 자아는 그의 사업이 제아무리 번창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 그의 말에 저주를 내린다. 대개는 제어하기 어려운 자신의 충동적 소유욕의 그림자인, 예상했던 주위의 공격에 스스로 놀라고 겁을 집어먹고, 만나는 족족 싸우고 격퇴시키는 이 입지전적인 독재자의 에고는, 아무리 세상에선 성공을 거두었을지라도 사실은 자신과 이 세계에 종말을 고하는 사자다. 그의 손길이 미치는 곳에는 절규가 있다. 빛나는 칼을 든 일격으로, 일거수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땅을 자유롭게 할 대속자인 영웅을 부르는 절규다.

 

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죽음이 승리하는 날이 오면 죽음이 다가 온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는 길뿐,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길뿐이다.

 

30. (유아기의 무의식) 우리는 이 영역을 평생토록 우리 내부에 간직한다. 우리 유아기의 도깨비들과 은밀한 협력자들, 어린 시절의 마법이 모두 여기에 있다. 뿐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어른이 되어도 의식할 수 없는 삶의 잠재력, 우리들 자신의 또 한 부분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 황금의 씨앗은 마르는 법은 없다. 우리가 상실해 버린 이 전체성의 일부라도 나날의 현실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우리의 능력은 놀라운 수준까지 신장될 것이며, 아울러 생기 넘치는 재생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는 더 높이 솟아야 한다.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 세대, 나아가서는 우리의 문명 시대가 잊어버리고 있던 것들을 얼마간이라도 건져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저 위대한 천품의 시혜자, 시대의 문화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영웅이 첫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나가되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G.융의 소위 원형심상과의 동화 작용을 시작한다.

 

33,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따라서 영웅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간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그래서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 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두번째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해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34. 우리는 어둡고 궂은 길을 가야 마침내 평화의 강, 혹은 우리 영혼의 목적지로 통하는 탄탄대로를 발견하게 되는 모양이지요.

 

37. 사람들은 비교적 무의식적으로 시민 및 종족으로서의 정례를 따름으로써 대부분 위험 부담이 적은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 역시 구원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대속자들에 의해 아득한 옛날, 인류에게 주어져 수천 년간 계승되어 온, 사회의 상징적 도움이라는 미덕, 통과 제의, 은총으로 입은 성사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다.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내부의 소명도 외부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다.

 

미궁으로 들어가는 영웅이 한 끝을 미궁의 입구에다 매어놓고 들어가면서 풀어야 하는 실타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이 얼마나 하찮은 물건인가! 그러나 이나마 없으면 미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 모험과 다름 없는 것이 아닌가.

 

37-38. 그런데도 우리는 혼자서는 이 모험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39.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레오 톨스토이 백작은 이 예언적인 말을, 현대적 여주인공 안나 카레니나의 정신적 의절을 그린 소설의 서두고 삼았다.

 

40. 연민이란,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고통받는 사람과 하나게 되게 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보이지 않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41. 시공의 제약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의 하찮은 논리와 정서적 집착으로 찾아드는 죽음, 우리들이 흙으로 돌아가려 할 때 비로소 온몸을 흔들면서 승리의 찬가를 부르는 보편적 생명에 대한 이러한 재인식, 이 생명을 향한 우리의 가파른 중심 이동, 그리고 운명에의 사랑(Amor fati), 즉 필멸의 운명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비극적 예술의 체험을 구성한다. 그 기쁨, 구원의 황홀은 바로 그 안에 있다.

 

42. 하늘의 신화가 삶의 발자국을 뒤로 남기고 밤의 문턱에 설 준비가 된 노인의 것이듯, 동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나라의 것이며, 현실로부터 보호받고 있기는 하나 조만간에 거덜날 운명에 놓여 있다.

 

동화, 신화, 그리고 영혼의 신곡에 나오는 해피앤딩은 모순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비극의 초절성으로 읽히어야 한다.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까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양자를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과 죽음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인 것이다.

 

43.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나, 아무것도 죽지는 않는다. 영혼은 여기 저기를 방황하다 마음에 드는 뼈대를 취한다……따라서 한번 존재한 것은 다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존재하게 되니, 모든 운행의 주기는 반복한다.

  

신화나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신화나 동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환상적이며 비실재적이기 때문에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심리적인 승리지 육체적 승리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땅 위에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기 전에 보다 중요하고 보다 본질적인 것이, 우리가 알고 있고 더러 꿈 속에서 찾아가기도 하는 미궁 안에서 일어났어야 했다는 것이다.

 

44.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 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 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이러한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삶은 더 이상 도처에 도사린 재앙의 가혹한 단죄와 시간에 의한 마손이나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받는 일이 없게 된다. 뿐인가, 공포는 눈앞에 여전히 보이고, 고뇌의 울부짖음은 여전히 귀에 들리나, 삶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는 힘의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45,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45-48.영웅 과업의 어려움, 계획이 원대하고, 수행이 신성할 경우 이 영웅 과업의 숭고한 의미를 장엄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부처의 고행에 대한 전설에 잘 나타나 있다. 젊은 왕자 고타마 싯타르타는 사랑하는 백마 간타카를 타고 은밀히 아버지의 궁전에서 경비병들이 지키는 성문을 무사히 빠져나가 24만의 신위에 밝혀진 횃불 사이를 지나고, 너비가 1 224큐빗이나 되는 신성한 강을 건너서는 칼을 뽑아 단숨에 머리 타래를 잘랐다. 그러고는 손가락 두 개 넓이의 길이로 남은 머리카락을 오른쪽으로 꼬아 머리에다 붙였다. 이어 승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행자가 되어 세계를 방황하는데 그는 이동안 여덟 단계에 걸치는 명상의 과정을 넘어섰다. 이윽고 그는 은자로 물러앉아 6년 동안 고행하면서 처절한 금욕 생활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으나 다시 일어났나. 다시 일어난 그는 수행 방법을 바꾸어 보다 온건한 탁발승의 수행 방법으로 돌아섰다.

 …….부처는 그의 말에 승복, 자신이 깨친 도리를 전파하기로 작정하고는, 자신의 속인들과 함께 살던 도시로 돌아가 정도의 법이라는 귀한 은혜를 두루 전파했다.

 

50. 대양을 방불케하는 동양의 광대한 이미지로 표현되든, 그리스의 웅장한 서사시로 표현되든, 아니면 장엄한 성서의 이야기로 표현되든,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52. 원질신화의 복합적인 영웅은 예외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이 영웅은 사회의 존경을 받기도 하고, 무시당하거나 경멸을 당하기도 한다. 영웅과 (혹은) 그가 속한 세계는 어떤 장애로 고통을 받는다. 동화일 경우 이러한 장애는 금반지 하나가 사라졌다는 등 가벼운 것이지만, 묵시록적인 이야기에서는 온 세상의 심리적, 정신적 삶이 나락으로 떨어졌거나 떨어진 판국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대게 동화 속의 영웅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소우주적 승리를 거두고, 신화의 영웅은 세계사적, 대우주적 승리를 거두는 게 보통이다. 또 전자는 자신이 압제하던 상대를 이겨내는 데 그치는 반면, 후자는 모험을 통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 전체의 소생에 필요한 수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황제, 모세, 혹은 아즈텍의 테까틀리포카 같은 종족적, 혹은 국지적 영웅은 한 종족에게만 그 선물의 은혜를 베풀지만 모하멧, 예수, 부처 같은 우주적 영웅은 전세계에 넉넉히 한 소식을 전해 준다.

 

54, 우주 발생적 순환은 모든 나라의 신성한 문헌에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고, 그것은 영웅의 모험에 새롭고 흥미로운 전기를 부여한다. 돌이켜보면, 모험적인 여행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 하다.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왕의 아들이고 그는 이로써 자기의 실제적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신의 아들은 이 이름이 얼마나 의미 심장한지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시작에서 보면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55, 위대한 영웅은 위대한 행적을 통해, 이 다양한 얼굴이 사실은 하나임을 알고, 또 남들에게 알리게 된다.

 

영웅의 성공적인 모험의 의미는, 생명의 흐름을 풀어 다시 한번 세계의 몸 속으로 흘러들게 하는 데 있다. 이 흐름의 기적은 물리적으로 음식물의 순환, 역학적으로는 에너지의 흐름, 영적으로는 은총의 현현을 나타내는 듯하다. 이러한 이미지는 단일한 생명력의 세 단계에 걸친 압축을 나타내면서 다양하게 변한다.

 

60. 한 문화가 신화 안에서 인간 존재의 면면이나 그 문화의 면면을 키워나갈 때, 그 문화는 상징적인 암시와 함께 싱싱하게 살아난다.

 

62. 세계의 배꼽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세상의 하고 많은 선과 악을 두루 산출한다. 추한 것, 아름다운 것, 죄악과 미덕, 쾌락과 고통이 모두 이 세계의 배꼽의 공평한 산물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르기를,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은 옳다고 한다고 했다. 세계의 사원에서 섬김을 받는 대상은 늘 아름다운 것도, 늘 자비로운 것도 아니며, 덕이 높을 필요도 없다.

 

초월적인 힘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 안에 사는 자, 모든 것 안에서 훌륭한 자,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섬김이 타당한 자에게 감득되는 것이다.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헤라클레이토스)

 

65. 신화는 비극적인 자세를 신경질적인 것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근시안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란 무자비하면서도 공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요컨대 제때에 나고 죽는, 자기 중심적이며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 불명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71.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것이긴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이 주름의 골은 매우 깊다. 영혼 그 자체만큼이나 깊다.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72. 운명의 힘을 전하는 전령관은 혐오감을 주는, 참으로 하찮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77. 꿈에서든, 신화에서든 갑자기 한 사람 생애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면서 이런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80. 신화적 여행의 첫 단계(우리는 이를 모험에의 소명으로 불렀다), 운명이 영웅을 불렀고, 영웅의 영적 중심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81. 현실 생활에서는 자주, 신화나 민간 전승에서도 드물지 않게 소명에 응하지 않는, 조금은 답답한 경우를 우리는 만난다. 다른 데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소명에 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명에의 거부는, 모험을 부정적이게 한다. 타성이나, 힘에 겨운 일, 혹은문화의 장벽 때문에, 모험의 주체는 의미 심장한 긍정적 행동력을 잃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험의 주체가 누리던 화려한 세계는 메마른 돌멩이가 구를 뿐인 황무지가 되고, 그의 삶은 무의미해진다. 그렇긴 하나, 미노스 왕처럼 이 모험의 주인공 역시 초인적인 노력으로 예사롭지 않은 제국을 건설하는 데엔 성공할지 모른다. 그러나 무슨 집을 짓건, 그가 짓는 것은 죽음의 집이다. 자기의 미노타우로스를 숨기는 퀴클롭스 식 미궁일 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면서 파멸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82. 세계 전역의 신화와 민화는,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제 이득으로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래란 생과 사의 부단한 연속만은 아니다. 개인이 가진 현재의 이상과, 미덕과, 목적의 체계가 어떻든 이득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이고 또 보장되어 있다.

 

87. 고의적인 내향성은 창조적인 정신의 고전적인 방편 중의 하나이고, 이를 효율적인 장치로 응용할 수도 있다.

 

인격이 이 새로운 힘을 흡수하고 통합할 수 있으면 당사자는 자기 의식의 초인간적인 단계 및 완전한 통제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93. 소명을 거부하지 않은 모험 당사자는 영웅적인 편력 도중 첫번째 보호자를 만난다. 노파나 노인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 보호자는 모험 당사자가 곧 만나게 되는 용과 맞설 호부를 준다.

 

96.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대자연은 항상 위대한 임무를 지원한다. 영웅의 행동이 그 사회가 예비하고 있는 것과 일치될 때, 그는 흡사 역사적 변화의 리듬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98. 그런 조력자를 맞는 영웅은, 소명에 응답한 영웅일 경우가 보통이다. 실제로 소명은, 통과 제의의 사제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는 첫번째 통고다. 그러나구원할 수 있는 분은 알라 신뿐이라는 말에서 보았듯이, 영혼을 닫은 자들에게도 초자연적인 안내자가 오는 예가 있다.

 

105. 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112.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 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

 

120. 태양 문을 통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123. 침입자가 이 성전을 제대로 거치지 못하는 한 얻은 것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 보아,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고래의 입을 향한 영웅의 돌진은 같은 모험인 셈이다. 즉 회화적 언어로 말하면 둘 다 생의 구심화 행위, 거듭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128. 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정도로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와 모험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루는 부분도 바로 이 국면이다.

 

어쩌면 모험 당사자가 자신의 초인간적 여행 도정의 도처에 자비로운 권능이 있어서 자기를 도와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인지도 모른다.

 

132., 우리는 모든 원시 종족에서 주술사가 사회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주술사가 신경증적, 혹은 정신병적이거나, 아니면 그의 주술이 신경증이나 정신병과 같은 메카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확인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133. 이 유아기 상태란 성장의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수정되고 역전되다가 현실에 적용될 필요가 있을 때 재수정된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 충동의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이 유대가 없다면 인간의 집단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주술사는 그 사회 성인들의 심성에 내재하고 있는 상징적 환상 체계를 출몰시키는 역활을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주술사란, 이러한 유아적 놀이를 주도하고, 공통의 근심거리를 밝혀내는 지도자인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방에서 성공하고 현실적인 어려움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잡귀와 대리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어떤 사회에 속하는 사람이든지, 고의적으로든 타의에 의해서든 자기 정신의 미궁이라는 미로로 내려가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저 시베리아의 푸닥과 성산에 못지않는 상징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신비주의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자기 정화에 이르는 길의 두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즉 감각이 정화되고 스스로를 낮추어 모든 에너지와 관심이 초월적인 것에 집중될 때인 것이다.

 

143. 영웅은 적대자를 발견하고 삼키거나 그에게 삼켜짐으로써 이 적대자(뜻밖에도 그 자신의 자아)를 동화시킨다. 하나씩 하나씩 장애는 차례로 사라진다.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시련은 첫 관문이 문제를 심화시키고 질문은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자아가 스스로를 죽음에 내어맡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왜그런가 하면, 주위에 있는 것은 머리가 많은 휘드라 이기 때문이다. 절단한 곳에다 비방을 쓰지 않는 한 하나를 자르면 두 개의 머리가 나타난다. 원래 시련의 나라를 향한 출발은 초보적인 정복과 예언의 힘을 얻기 위한 길고 험한 여로만을 표상했다. 이제 영웅은 용을 죽여야 하고 몇 번이고 위험한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그 동안 영웅은 몇 차례의 예비적인 승리를 거두고, 일시적이긴 하나 무아의 경지를 체험하며, 이상향을 엿보게 된다.

  

153. 여신은 향상 영웅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할 수 있지만 영웅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여신은 그를 유혹하고, 인도하고, 그의 발목에 채인 족쇄를 깨뜨리게 한다. 그리고 만일 영웅의 능력이 여신에 미치면 이 양자, 즉 아는 존재와 알려지는 존재는 갖가지 제약에서 해방된다. 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154.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157. 여신과의 만남은 사랑의 은혜를 얻기 위해 영웅이 맞는 마지막 재능의 시험 단계다. 이 사랑의 은혜는 바로 우리 삶이 누리는 영원성의 그릇과 같은 것이다.

 

159.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적인 결혼은 영웅의 삶 전체가 완성되었음을 상징한다. 즉 여성이 곧 삶인데, 영웅은 이 삶을 알게 되었고, 이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웅의 궁극적인 체험과 행위의 예비 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의 시련은, 자각의 위기를 상징한다. 이 자각의 위기를 통해 영웅의 의식은 증폭되고, 어머니 상의 파괴자, 즉 천생연분의 신부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삶의 상황을 수습하는 데 대한 실패는 결국 의식의 제약으로 나타나는 수밖에 없다. 싸움이나 짜증은 무식한 자들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후회는 때늦은 각성일 뿐이다.

 

160. 참으로 까다롭고 재미있는 것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 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행하는 것에는 어차피 육욕의 냄새가 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 깨우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예외 없이 낭패의 순간을 경험한다. 삶 사는 행위, 삶의 구조, 특히 삶의 괄목할 만한 상징인 여성은 더없이 순수한 영혼을 차마 상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178.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입문의 영광을 입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다. 그는 끊임없이 삶의 싸움판에 나서야 하고 입문의 사제, 안내자, 태양을 향한 문 노릇을 해야한다. 요컨대 선악에 대한 유아기 환상을 떨치고, 희망과 공포에서 놓여나 평화롭게 존재의 계시를 이해하고 우주 법칙을 엄숙하게 경험하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입문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192. 창조의 역설, 영원으로부터의 시간이라는 양식의 도래는 아버지가 지니는 근원적인 비밀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가 없다. 따라서 모든 신학 체계에는 배꼽, 즉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킬레우스 건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확히 그곳을 뚫고(그가 속한 세계와 함께)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영웅은 영혼의 문을 열어 공포를 극복하고, 이 광대무변하고 무자비한 우주의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을 존재의 존엄성 속에서 완전하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영웅은 자기 몸에 박힌 가시를 통해 삶을 초월하여, 한순간이나마 그 근원을 투시한다. 그는 여기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와 자기가 화해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는다.

 

196-197. 부처 자신처럼, 이 신과 같은 존재는 인간적인 영웅이 마지막 무지의 공포를 초월하고 획득하는 신적인 상태의 한 본보기다. ‘의식의 외피가 벗겨져 나가, 모든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고 변화의 경계를 넘어서게 된상태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 있는 해탈의 상태이며, 영웅들이 됨으로써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상태다. 즉 만물에는 불성이 있으니, 일체의 존재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라고 하는 존재, 그의 형상, 혹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희망이다.

 

200,. 신화는 창조의 신비를 상징하는 기본적인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영원성이 시간성으로 발전하고, 하나가 둘에 이어 다수로 분열하며, 둘의 재결합으로 새 생명의 세대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우주 발생적 순환의 시작에 해당하는데, 영웅의 모험이 막바지에 도달하여 낙원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신의 형상은 다시 나타나고, 지혜는 다시 원상으로 회복된다.

 

203. 영웅은 의식을 통하여 남성 이상의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다.

 

피가 흘러 내린다는 것은 곧 피를 흘린 아버지가 삶의 원천과 자양을 내부에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204. 위대한 아버지 뱀의 부름은 아이를 놀라게 했고, 어머니는 아이의 보호자였다. 그러나 이윽고 아버지가 왔다. 그는 미지의 신비로 아이를 인도하는 안내자이자, 비의의 전수자였다. 어머니와 누리던 유아기라는 아이의 낙원에 침입한 아버지는 원형적인 것이다. 이때부터 아이에게 있어서 평생토록 모든 적은 아버지를 상징한다.

  

211. 우리는 모두 보살 이미지의 그림자다. 우리 내부의 고통은 바로 저 신적인 존재다. 우리와 저 보호자인 아버지는 한몸이다. 이것은 구원의 통찰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우리 보호자인 아버지다. 그러니 이 무지하고, 유한하고, 자위적이고, 고통받는 육신이 다른 육신()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에도 그 적 또한 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도깨비는 우리 기를 꺾지만, 유능한 후보자인 영웅은 사나이답게 입문한다. 보라, 그 도깨비가 바로 아버지였다. 우리는 그의 안에 있고, 그는 우리 안에 있다.

 

214-215.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적으로 빗나간 욕망과 적의 때문에 비현실적인 공포와 애증의 이중 감정에 시달리는 환자를 치료해 주는 기술이다. 이러한 증상에서 놓여난 환자는 보다 현실적인 공포나 적의, 육욕적 종교적 관행, 전쟁, 유희, 가사 등 그가 속한 문화가 베푸는 일을 비교적 만족스럽게 대처해 나갈 수 있다.

 

종교적인 가르침의 목적은 개인을 일반적인 미망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그 미망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종교는 욕망, 에로스와 적의 즉 죽음을 바로잡는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저 유명한 불교의 팔정도의 가르침에 따라 충동을 뿌리째 꺼버리는 방법을 통해서 그 목적을 달성한다.

 

217. 절대의 마음으로 만유 안에 있는 나를 우러러 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속의 삶이 어떠하든 신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223. 우리는 어머니 안에서 배태되어, 아버지로부터 격리된 채 산다. 그러나 우리가 때가 와서 그 시간의 자궁을 빠져나오면 우리는 아버지의 손으로 넘어간다. 현명한 자는 그 자궁 속에서도,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안다. 그보다 더 현명한 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의 본체 안에 있다는 것까지 안다.

 

입문 의식의 목적은 열반이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 양자가 번갈아 찰나와 영원으로 마음 속에 그려져야 한다. 말하자면 이 양자는 같은 것이고, 각자가 그둘이며, 이원적인 형상으로 보이는 것은 환상 때문이지만 이것이 또한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235-236. 문학적이고 감상적인 신학의 분위기에서와는 달리, 익살은 철두철미 신화적인 것의 심금석이다. 우상으로서의 신들의 존재는 존재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연출하는 유쾌한 신화는 그들 수준의 마음과 정신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나 그 배후의 무에 이르게 한다. 이 무의 경지에서 보면 산엄한 신학적 교리는 교육적인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신학적 교리의 기능은 무능한 지성을, 구체적인 사실과 사상의 덩어리로부터 비교적 순화된 공간으로 이행시킨다. 

 

237. 그러나 신들은 지나치게 잔혹하고 지나치게 조심스러울 때가 있다. 이럴 경우 영웅은 그 불로불사의 영약을 손에 넣기 위해 속임수를 써야 한다. 포르메테우스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최고 신이라도 심술궂고, 생사 여탈권을 쥔 도깨비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신을 속이거나 죽이거나 이 신과 화해하는 영웅은 구세주로 칭송을 받는 것이다.

 

248.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아니다. ‘천상적인 것이 도다. 도는 영원이다. 여기에 이르면 유체가 썩는 것도 두려워할 바 아니다

 

일본에는 인간이 재물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면 신들이 웃는다 는 속담이 있다. 신도에게 내리는 은혜는 그 신도의 처지와 그가 발원한 소망에 준하여 내려진다. 은총이란, 특수한 경우의 발원에 내려지는 삶의 에너지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은총을 입고 있는 영웅이 완전한 깨달음의 은총을 구한다면 몰라도 그가 장수의 은혜와, 이웃을 시해할 무기, 혹은 자식의 건강 등을 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249.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든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250. 생명의 원천은 개인의 핵이며, 인간은 자기 내부에서 그것을 찾아낸다.

 

253.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환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영웅이 이 책임을 회피한 예는 너무나 많다….실제로 많은 영웅들이, 불로 불사 여신의 축복받은 섬에 아예 영원히 눌러앉아 버린 것으로 전해진다.

  

269. 두 세계의 상호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소한 실수, 즉 인간의 약점이라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증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소한 일만 피하면,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 도망에 실패하는 신화는 우리에게 있어서 비극이지만, 성공하는 신화는 신용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귀환의 문턱에 도사리고 있는 위기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82.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첫번째 문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이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왜 그런 세상으로 되돌아와야 할까?

 

288. 천국에서의 1년이 지상에서의 백 년에 해당한다는 등식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백 년이라는 주기는 전체성을 의미한다. 360도라는 원의 중심각도 전체성을 뜻한다. 힌두교의 푸라나에 따르면, 신들의 1년은 인간의 360년에 해당한다. 올림포스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의 역사는 순환 주기의 조화로운 형상을 드러내 보이면서 영겁토록 흘러갈 뿐이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세계는 변화와 죽음으로 보이고, 신들의 눈으로 보면 불변하는 형상, 곧 끝없는 세계일 뿐이다.

 

291. 자기 모험을 완성하기 위해서, 귀환한 영웅은 세계의 충격을 견디어야 한다.

 

카마르 알 자만은 깨어 있는 채로 깊은 잠이라는 천복의 은혜를 체험했고, 믿어지지 않는 모험이라는 튼튼한 액막이를 지니고 빛의 세계로 귀환했기 때문에 일상의 엄연한 환멸에 직면하고도 자기 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294. 덧없는 만남과 헤어짐,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사랑의 고통이 아닌가. 한 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때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위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힘이다.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런 이야기를 한 곳에 모아보면 일치하는 하나의 필연적인 공통 분모가 엿보인다. 기억 속에서 자기 영혼의 다른 부분과 만났음을 상기시키는 신비스러운 반지는 영웅이 그곳에 간 적이 있음을 시사한다이 반지는, 두 세계를 통합하려는 영웅의 희망을 상징한다.

카마르 알 자만의 기나긴 이야기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운명이 일상의 삶으로 구체화되는 완만하면서도 놀라운 역사다. 그러나 이 운명이 모든 이에게 다 구체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체험하고, 반지를 얻어 다시 현실로 귀환한 영웅에게만 가능하다.

 

298. 예수는 안내자이며, 길이며, 초월적인 세계, 귀환의 동반자다. 제자들은 그의 비의 전수자들이다. 그러나 그 신비를 통달한 자들이 아니라, 두 세계를 일거에 수렴하는 역설적 체험으로 안내받는 자들이다.

 

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즉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성격, 혹은 일련의 성격을 최종적인 의미로 읽거나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307. 영웅이 지난 전장은 모든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의 희생으로 삶을 영위하는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 자기 삶을 영위하려면 죄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참으로 구역질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세상의 예외적인 존재로서 자기 입장을 합리화하고 허위적인 자기 이미지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말하자면, 자기는 선한 자를 대표하고 있다는 간주하고, 죄악을 불가피한 것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부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합리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인간과 우주에 대한 본질에 이르기까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데 있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317. 구조가 단순한 원질신화가 보이는 다양한 변화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마모와 손상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신화나 옛 이야기의 윤곽은 원래 애매한 법이다. 고대의 흔적은 배제되거나 무시되는 게 보통이다. 유입되는 신화는, 이를 유입하는 지방의 풍경과 관습과 신앙에 따라 윤색되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의 틀거리가 빗나가게 되기도 한다. 더구나 이런 이야기들이 무수히 재연되다 보면 고위적이든, 우연히든 와전과 전위가 불가피하다.

 

319-320.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이러한 오류는 성경이나, 많은 기독교 의식에 대해서도 자행되어 왔다.

 

322. 신화적 상징은 그 함축적인 의미 그대로 계승되어야 한다. 즉 수천 년에 걸친 영혼의 모험을 유추에 의해 표상해 온 만큼 그 대응 관계의 전 체계를 섣불리 펼쳐 보이기 이전에 그것이 지닌 모든 함축적 의미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326. 신화와 꿈은 같은 근원에서 유래하고 그 문법도 동일하다. 그러나 이 신화가 수면의 산물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신화의 패턴은 의식적으로 통제된다. 그리고 신화는 전통적인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적 언어로 기능한다.

 

327. 이러한 상징적 심상들은 인간의 삶을 버티고 철학, , 그리고 예술의 영감을 자극해 왔다. 노자, 부처, 조로아스터, 그리스도 혹은 모하메드에 의해 거론된 전승적 상징 덕분에 우리는 암흑이 아닌 깨어 있는 의식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전승된 신화학적 표상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이 무의식의 징후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적 원리의 통제되고 의도된 진술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 원리는 인간의 육체의 형태 및 신경 구조처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류에 유전된 것이다. 간단하게 공식화한 이 보편적인 교리는, 이 세계의 가시적인 모든 구성물은 편재하는 힘에 의한 결과라고 가르친다. 즉 이 힘은 모든 구성물의 생성 원리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 현현해 있을 동안 그들을 지탱하고, 그들을 채우며, 궁극적으로 그들이 돌아갈 귀소라는 것이다. (에너지, 리비도, 하느님 능력…)

  

332. 영웅의 모험은, 그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나타낸다. 이 순간은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의 살아 있는 죽음의 어두운 벽 너머의 빛의 길을 발견하고, 이 길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337. 동양 철학의 기본 개념은 이러한 회화적 양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화가 원래 철학적 공식의 설명인지, 아니면 철학이 신화로부터의 추출물인지 지금으로서는 말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신화가 지금부터 아득히 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며, 이 점은 철학도 마찬가지다. 신화를 창조하고 이를 보배로이 가꾸어 전승시킨 옛 현인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339-340. 신화는 이 순환 속에 머문다. 그러나 신화는 이 순환을 침묵에 둘러싸인 형태, 순환과 침묵이 서로 삼투하는 형태로 드러낸다. 신화는 존재하는 원자 안팎에 충만해 있는 침묵의 계시록이다. 신화는, 고도로 세련된 형상화 작업을 통하여 마음과 가슴을, 모든 존재를 채우고 둘러싸고 있는 궁극적 신비로 향하게 하는 풍향계다.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 보여도 신화 체계는 마음을, 가시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비현현의 세계로 향하게 한다.

 

342.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창조 신화는, 모든 피조물인 그들이 모태가 된 불멸의 존재와 닿아 있음을 상기시키는 파멸 의식과 함께 고루 퍼져 있다. 모든 피조물은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으나 필경은 극점에 이르러 파멸하고 그리고 회귀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신화는 비극적이다.

 

392. 가난뱅이인지는 모르나 그분은 부의 원천입니다. 무서운 분인 동시에 자비의 근원이십니다. 뱀으로 만든 옷이든 보석으로 수놓은 옷이든, 입는다면 마음대로 벗기도 할 것입니다.

 

396. 우리는 두 단계를 거쳐왔다. 즉 첫째는, 비실재적 실재의 직업적인 유출에서 신화적 시대의 유동적이나 시간을 초월한 존재에 이르는 단계, 둘째는, 이 실재적 실재에서 인류 역사의 영역에 이르는 단계다. 유출은 이제 그 극점에 이르렀고, 의식의 장은 이제 좁아질 대로 좁아졌다. 전에는 사상의 실체가 보였지만 이제는 그 부수 효과만 인류의 눈, 작고 현실적인 동공의 초점 앞에 모일 뿐이다. 따라서 이제 우주 발생적 순환은, 보이지 않게 된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갖춘 영웅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세계의 숙명은 바로 이 영웅들을 통해 실현된다.

 

400. 가령 예수는, 엄격한 고행과 명상으로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강한 신이라고 믿어질 수도 있다. 전자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와 같은 초월적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 그의 행적을 글자 그대로 훙내내는 수가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 예수라는 영웅은 글자 그대로 본이 되는 전형이라기보다는 묵상해야 할 하나의 상징이다.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432. 최고의 영웅이란 우주 발생적 순환의 원동력을 추진시키는 영웅이 아니라, 눈을 다시 뜨고서 오고 가며 기쁨과 고뇌가 교차되는 세계의 파노라마를 통해 하나의 실재가 다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깨치는 영웅이다. 이러한 영웅이 되려면 보다 깊은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심장한 개념 작용의 결과로 나타난다.

 

458 놀랄 만한 권능을 가진 막강한 영웅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다. 거울에 비추어볼 수 있는 육체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내재하는 왕으로서다. 크린슈나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모든 피조물의 가슴 안에 있는 실재다. 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이것은 바로 개인이 소멸되는 순간, 사자의 머리맡에서 둘려주는 기도다. 즉 개인은, 생전에 자기 가슴에 반영되어 있던, 세계를 창조하는 신에 대한 근원적인 깨달음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478.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퀼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479. 삶의 양태에서, 개인은 인간의 전체 이미지의 단편이며 일그저린 형상일 수밖에 없다. 개인은 남성으로서, 혹은 여성으로서 제약을 받고 있다. 주어진 수명의 한도내에서 개인은 다시 유아로서, 청년으로서, 성인으로서, 노인으로서의 제약을 받는다. 더구나 살면서 맡는 역할상 개인은 다시 기술자, 상인, 하인, 혹은 도둑, 성직자, 지도자, 아내, 수녀, 혹은 매춘부로 전문화한다. 개인은 이 모두일 수가 없다. 따라서 개인의 전체성은, 개별적인 구성 인자로서가 아닌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개인은 한 구성 요소일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은 이 집단으로부터 삶의 기술, 사유의 바탕인 언어, 삶의 자양인 이상을 빚졌다. 그의 육체를 이루는 유전자도 그 사회의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개인의 실제든, 상상이나 느낌을 통해서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의 절연을 의마할 뿐이다.

 출생, 세계, 결혼, 장례, 취임 등의 종족적인 제의는, 개인의 삶의 위기 및 행위를 표준적이고 비개인적 형식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제의는 개인의 정체를 그 자신에게 보여준다. 인격체로서의 개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사로서, 신부로서, 과부로서, 성직자로서, 추장으로서의 개인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제의를 통하여, 개인이 속하는 사회는 원형적 무대에서 옛 현인의 가르침을 시연할 수 있다.

 

480. 이제 인간의 시야는 넓어졌다. 맡는 역할이 비록 하찮다고 하더라도 개인은 이 인간의 아름다운 축제의 이미지에서 자기 역할이 바로 자기의 본질이었음을 깨닫는다.

 

483.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개인의 민주적 이상, 동력으로 움직이는 기계의 발명, 과학적인 연구 방법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변형시킨 나머지 저 유서 깊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상징의 우주는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신화라고 하는 꿈의 집은 이제 무너지고 없다. 마음은 깨어 있는 의식 쪽으로만 열려 있다. 현대인은, 나비가 고치에서 나오듯, 새벽의 태양이 어머니 밤의 자궁을 빠져나오듯이, 현대인은 고대의 무지로부터 빠져나왔다.

 

484. 그 당시엔, 모든 의미는 집단적인 것에, 위대한 익명의 형식에 귀착되었으며 스스로를 드러내는 개인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오늘날 집단 속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계도 그렇다. 모든 것은 개인에 귀착된다. 그러나 여기에 의미란 완전히 무의식적이다. 인간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485. 오늘날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세계적 종교도 일반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 이러한 종교들도, 전전과 자화자찬의 도구로서, 갖가지 도당짓기의 요인과 결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국가의 보편적인 승리는 모든 종교 조직을 부수적인, 필경은 무익한 위치로 끌어내려, 오늘날에는 종교적 무언극이 일요일 아침에 벌이는, 경건한 체하는 종교 놀음에서 더도덜도 아니게 되고 말았다. 나머지 6일간은 물론 기업 윤리니, 애국심이니 하는 것들이 판을 친다.

 

486. 우리는, 갖가지 상징을 통해 동일한 구원이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고, 또 알아야 한다.

 

인간이 되려면,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인간의 얼굴로 바뀌어 있는 신의 얼굴을 알아보아야 한다.

  

488. 감히 소명에 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화해시켜야 하는 존재의 거처를 찾아내는 현대적 인간인 현대의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 던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된다.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을 통해 동서양의 다양한 신화 이야기를 알게 되고, 또 그 안에 숨겨진 뜻을 저자와 함께 찾아나가는 과정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 속에 비슷한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더욱더 책에 빠져들 수 있는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저자의 말에 몰입되어 나중에는 나의 종교관까지 되돌아보게 되었을 정도니 말이다.  

 

또한 나는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고, 영웅의 여정 중 문제를 해결하는 힘도 바로 그 영웅 안에 내재되어 있으며,

또 영웅의 여정 중에는 반드시 조력자가 있다는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왠지 모를 위안과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영웅의 여정에서 필연적인 것이고 결국

내가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며, 또 이러한 어려움을 돕는 힘이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신화의 힘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내게는 너무나 어렵게 느껴졌다. 특히 책을 시작하는 프롤로그부분은

심오하게만 느껴지고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질 않아 며칠간 한 페이지를 가지고 책을 폈다 덮었다 씨름하곤 했다.

하지만 영웅의 모험으로 나아가는 1부부터는 물론 여전히 어렵긴 했지만 예로 든 신화들이 재미나게 다가오면서 여전히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책을 넘겨볼 수가 있었다. 특히 내가 알고 있는 예화의 경우,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한국의 도깨비 이야기 등도 포함되었더라면 더욱 재미났을 것이다)

이에 내가 저자라면 프롤로그를 좀더 짧게 다루거나 쉽게 요약하고, 못다한 이야기는 원질신화에 대한 section을 따로 만들어 정리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생경하게 느껴지는 어려운 단어들도 나의 책장 넘김을 방해하는 요소들 중의 하나였다. 정말 죠셉 캠벨이 이런 말을 쓴 것인지, 아니면 똑똑한 역자가 어려운 말을 갖다 쓴 것인지, 왠지 원서를 읽으며 확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로 이해가 안 되는 단어들이 종종 보였다. (역자의 말 부분도 어렵게 느껴졌던 것을 보면, 역자 자체가 뛰어난 작가이기에 나같은 무지렁이 독자가 이해하기에 책이 더 어려워 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에 일반 독자들의 리뷰를 통해 어렵다고 여겨지는 단어들에 대해 주석에 그 뜻을 간략히 소개해준다면,

혹은 영화 번역을 하듯 의역을 통해 조금 저급하더라도 쉽게 와닿게 만들어주면 더욱 쉽고 재미나게 읽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나에게 너무 떠먹여주는 것만을 바라는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신화를 잊음으로서 직면하는 생활 속의 문제들을 예시로 많이 들어 반드시 일깨워야 할 신화의 의미들,

또한 영웅의 여정을 따라가기 위한 개인이 기울여야 할 노력 등에 대해 조금 더 많은 기술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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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4 16:44:43 *.160.136.124

1. '영웅의 여정 중에는 반드시 조력자가 있다는 저자의 이야기'

: 1년의 과정동안 여러 일들이 발생 됩니다. 시간내 쓰지 못할 상황, 몸 상태의 힘겨움, 업무의 과중, 집안 대소사 등.

 그 과정속 혼자만의 힘이 아닌 누군가의 조력이 일어 납니다. 당신 간절함의 애원만큼.

 

2. '우리가 신화를 잊음으로서 직면하는 생활 속의 문제들을 예시로 많이 들어...'

: 좋은 아이디어네요. 현대 직장인들이 부닥치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신화의 예시로 모색하는 방법.

  시도해 보심이.

 

3. 동일 저자에 대해 검색하는 경우 중복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아는지요.

   왜 역자가 아닌 저자에 대해 조사를 하라는 것일까요.

  중복될 경우 다른 시각으로서 모색하는 방법론은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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