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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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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7일 21시 47분 등록

“너는 왜 아버지의 집을 떠나왔느냐?”     “불행을 찾아서지요.” _ <율리시스>


2014. 4. 27



‘딩동’ 웨이신이 울었다. 오랜만이다.

“선생님! 항상 꼼꼼하게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올해 진행하려고 했던 에이치 빔. 진행이 어려울 것 같아요. 한국으로 정책이 좀 바뀌는 것 같아요. (……)”


작년 말부터 지금까지 공을 들이던 몇 건의 큰 프로젝트들이 모두 미뤄지거나 엎어졌다. 회사 형편이 갑자기 나빠졌거나, 실무선에서 니즈가 없는데 위에서 내려 눌렀거나, 기업의 외부 환경이 바뀌었거나, 경쟁 PT에서 졌다. 이번 중국 건은 마지막으로 기대하던 큰 프로젝트였다. 한해 먹거리였고 앞으로 수년 동안 파먹고 살 요량이었다. 심란해 졌다. 입에 풀칠할 정도의 일거리야 있을 것이지만 이런 상태라면 상황에 코가 꿰여서 휘둘리는 모양새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아니지, 오히려 상황이 모질게 나빠진 것이다. 영혼이 없기도 매 한가지다. 소름이 돋는다. 숨통을 조여 오는 압박감이 상당한 무게로 짓누른다. 불면의 밤이 다시 찾아오고 뒷목이 뻣뻣해 지며 심장이 벌렁거린다. 다시 돌아 제자리란 말인가! 


두 번의 겨울이 가고 두 번의 봄을 맞았다. 일상의 삶을 살다가 내 삶은 내가 쓰겠다는 일념으로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부유한 노예의 삶을 버리고 풍찬노숙의 길로 나선 것이다. 지난 삶 동안 제법 따뜻한 보금자리가 있었고 그럭저럭 살았다. 배고프지 않았지만 먹었고 행복하지 않았지만 웃었으며 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살았다. 울타리 넘어 다른 세상으로 나가보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따듯하게 먹여주던 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꼬박 그렇게 16년을 살았다. 


마흔이 넘어서면서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간절하게 근심하였다. 켜켜이 쌓였던 불안과 불만과 질문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지만 목구멍을 넘어오지 못하고 걸려서 삼키지도 뱉지도 못했다. 토해내고 싶었다. 전전긍긍하는 고통의 날들이었다. 고민하는 날들이 깊어질수록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뚜렷하게 잡히지 않았지만 버릴 것은 너무나 선명하였다. 선택은 취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었다. 마흔 셋에 이르러 일상의 삶을 버리고 사바나를 찾아 떠났다. 참 건달의 삶을 통하여 오늘의 빛나는 삶을 살아 보려 한 것이다. 운명이 나를 불렀고 가슴은 뜨겁게 화답하는 것, 풍찬노숙이란 이런 것이었다. 


오늘 이 불면의 밤에 다시 생각해 보았다. 짓누르는 무거운 압박은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 것인가. 옥죄는 공포는 나를 다시 그 자리로 데려놓고야 말 것인가.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관성을 정녕 이겨내지 못하는 것인가. 신은 나의 신성을 깨워 놓고 아직 조력자를 보내지 않은 것인가. 아니며 내가 쪼그라들어 웅크리는 사이 그를 보지 못하는 것인가. 춥고 외로운 밤이다.


미노스의 미궁은 내 마음이며 그 안에 가두고자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는 내 맘속에 갇힌 괴물이다. 괴물은 불면의 밤토록 온통 헤집고 돌아다닌다. 쫓아내려 하지만 나가는 길은 막혔다. 죽자고 매달려도 보지만 괴물은 신선한 선남선녀의 피를 더 요구할 뿐이다. 이 놈을 죽이지 않고서는 지옥을 벗어날 길이 없다. 구원은 요원하다. 나의 테세우스를 보내야 한다. 하찮은 실타래의 끝이라도 잡고 미궁을 향하여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실체도 없이 창궐하는 두려움과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무한히 증식 할 즈음 캠벨의 충고를 떠올렸다. “너는 스스로를 죽음에 내어맡길 수 있느냐?” 지금 실체도 없이 창궐하여 괴롭히는 것들은 히드라다. 하나를 자르면 그 자리에서 두개의 머리가 다시 자란다. 비방을 쓰지 않는 한 자르면 자를수록 더욱 창궐할 뿐이다.


나는 지금 이쪽의 세계에서 저쪽의 세계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다. 춥고 외로운 불면의 밤이 이 경계에 놓인 협곡이라면 외줄을 놓고라도 건너야 한다. 경계 너머 저쪽은 여전히 어둠이며, 미지의 세계이고, 위험이다. 집단의 보편적 믿음이 머무는 곳에서 그 경계를 침탈하려는 첫 번째 시도가 이 따위 두려움에 저지된다면 어차피 나는 이쪽에서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통수란 이런 것이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지 못하면 죽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소명임을 알고 대자연의 운율에 몸을 맡길 것이다.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상황을 장악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다. 


나는 내가 쓴 역사가 ‘먹고 싸다가 죽었다.’ 라는 한 줄의 역사이길 바라지 않는다. 수단과 방편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를 쫓아 매일을 살기로 하지 않았던가. 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말한 대로 살며, 산대로 쓸 것이다.


목구멍에 걸린 것은 아직 그대로 있다. 삼키지도 뱉어 내지도 못해 아프고 답답해 미칠 지경이지만 나는 이것을 삭여서 여의주로 뱉어 낼 작정이다.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참 맛은 ‘쓴 맛’이라 했으니 삶 가운데 자연스럽게 닥치는 치욕을 기꺼이 감당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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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8 12:27:29 *.94.41.89

외통수 참 어려운 상황입니다.

바둑 둘 때 사석 작전이 있지 않습니까?

때론 버려버리는 과감함도 좋은 것같습니다.

이미 여의주를 물고 계신데 더 삭여 뭤합니까?

지금 뱉어 보시지요. 저희가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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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8 13:35:32 *.198.29.159

상황을 몰라도 공감이 갑니다... 마흔은 역시 질풍노도, 변하거나 죽거나 둘 중의 하나! 힘들어요...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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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8 15:01:10 *.218.176.39

"의미와 가치를 쫓아 매일을 살기로 하지 않았던가. 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말한 대로 살며, 산대로 쓸 것이다."


어려운 결심을 하셨네요.

따라가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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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9 16:24:26 *.113.77.122

선택은 취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었다. 마흔 셋에 이르러 일상의 삶을 버리고 사바나를 찾아 떠났다. 참 건달의 삶을 통하여 오늘의 빛나는 삶을 살아 보려 한 것이다. 


선택잘하셨습니다!

앞으로 데카상스와 함께 정진해나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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