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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8일 07시 17분 등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2014.04.28 이동희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 (1954-2013)

 

무엇보다 익숙하지 않은 학문의 소유자료서 신비감마저 갖게 하는 그의 저서와 말들은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별을 보여주는 듯 큰 길잡이가 되고 있다. 내가 조셉 캠벨을 처음 접한 것은 변화경영연구소의 단군의 후예 프로그램에서였다. 단군의 후예 프로그램은 조셉 캠벨의 영웅의 여정을 모델로 삼아 300일간의 새벽 활동 프로그램이었다. 새로운 환경 또는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각성과 실천에서 우리는 영웅이 되고 이 영웅의 임무를 완수 하기 위해 먼 여정을 떠난다는 것이다. 그 당시 조셉 캠벨의 그러한 통찰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으며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주는 새로운 문이었다.

 

그는 미국의 유명한 신화종교학자이자 비교신화학자이다.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다. 소년 시절 북미대륙 원주민의 신화와 아더왕 전설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콜롬비아 대학과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다.

 

 

 

1904~1920

1904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고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면서 신화에 관심이 많았다

1910년 가족과 함께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보면서 아메리카 인디언에 푹 빠져 버린다

뉴욕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방문하면서 그 곳에 수집된 토템 기둥들에도 매료된다이후에도 수녀 선생님에게 들은 것과 똑같은 모티브가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에 있다는 사실과 여러 민화들이 아더왕 전설의 상징체계가 유사한 것을 발견한다

1921~1928

1921년 코네티컷 주 뉴 밀포드의 캔터베리 학교를 졸업하고 콜롬비아 대학교에 진학

1925년에 영문학사 학위취득

1927년에는 중세 문학을 전공하고 석사 학위를 받는다그 후 콜럼비아 대학교로부터 유럽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연구원 장려금을 받았고 프랑스 파리대학과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배운다또한 이 시기에 그는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의 작품을 즐겨 읽었고모던 아트를 접하게 되면서 폴 클레앙리 마티스파블로 피카소에 매료된다그리고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칼 융(Karl Jung)의 작품에 빠져들었다.

1929 ~ 1937

1929년 미국으로 돌아온 캠벨은 영문학 대신 인도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려 했지만 컬럼비아대학 측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박사학위취득을 포기하고 학교를 떠났다.

1934년까지 5년 동안 혹독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진다그는 뉴욕 우드스톡의 작은 오두막에 살면서 하루 9시간 동안 책을 파고 들었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캘리포니아를 여행하면서 작가 존 슈타인벡(John Steinbeck)과 해양 생물학자인 에드 리켓츠(Ed Ricketts)와 교류한다.

1933년에는 캔터베리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자신의 소설을 출간하려 하기도 했다.

1934년 캠벨은 사라 로렌즈 대학의 교수 제의를 받아 들인다그는 이후 38년간 이 대학 문학부에 재직한다

1938 ~ 1987

1938년에 자신의 옛 제자이고마사 그레이엄 무용단 단원이었던 진 어드먼과 결혼한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의 신화이야기는 학문뿐만 아니라 영화 매트릭스나 스타워즈처럼 문화예술 등의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신의 가면>을 펴냈다

그는 83세의 나이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던 본인의 자택에서 암으로 타계했다대표적인 저서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의 가면> <신화의 힘>등이 있다

사후

그의 사후에 아내진 에드먼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조셉캠벨 재단을 설립했다. 캠벨의 유고와 대담집 그리고 강의 록 등을 정리하여 출간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캠벨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pbs방송국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 <신화의 힘>이었다. 그의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결국 사후에 방영되었다. <신화의 힘>은 저명한 방송인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정리한 책이다.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를 주제로 하여 대담한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신화의 힘>은 오늘날까지도 신화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캠벨은 대담을 하면서여기 있는 나는 여든을 헤아립니다. 그런데도 나는 몇 권은 족히 될 책을 쓰고 있어요. 이 일을 마칠 때까지 살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내게는 일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거예요. 책을 완성해야 한다는 욕망이 없다면 죽는거야 언제 죽어도 좋아요.”라고 말했다.

 

저서로는 『신의 가면 the Masks of God(4), 『신화의 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의 가면 1~4,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야생 수거위의 비행』, 『신화 이미지 1~5』 『세계신화지도』 등이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P5

아이는 알아듣지 못한다. 아이는 우리가 말하는 내용 중 변형된 부부만을 알아듣고는 속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른에 대한 아이들의 불신과 면역성이 종종 이러한 부정적 인상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진리의 상징적 분식을 피하고 아이들의 지적 수준에 맞추어 사건의 진상을 알게 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P6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옛 현자들은 말을 하되 언외의 뜻을 거기에다 실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따라서 그분들의 상징적 언어를 거듭 읽되 그 가르침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고문집 편집자의 재주쯤은 갖추고 있어야 할 듯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징의 문법을 터득해야 할 터인데, 저자가 알기로는 이 문을 여는 열쇠로 정신분석학만한 현대적 길잡이는 따로 없을 듯하다. 이 말을 금과옥조로 삼지 않고는 정신분석학의 안내를 받기 어렵다. 다음 단계는, 세계 각처에서 채집된 신화와 민간 전설을 한곳에 모아놓고 보면 그 유사성이 한눈에 두드러져 보이고,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오랜 세월 삶의 길잡이로 삼아온, 방대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일정한 상태로 보존된, 바탕되는 진리와 만나게 된다.

 

P6

이 책이 다루는 것은 상사성이지 상이성은 아니다. 일단 이런 상사성을 이해하면 상이성은 일반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믿어지는 정도만큼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리라 믿는다. 저자가 바라기로는, 이러한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를 통합을 결실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 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P13

재미 삼아 귀를 기울여보는 콩고 주술사의 잠꼬대 같은 주문이나, 점잖은 취미로 읽어보는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노자 경구집의 얇은 번역본이나, 이따금씩 깨뜨리고 보는 견고하기 그지 없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법이나, 기괴한 에스키모 요정 이야기의 빛나는 의미나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별로 다른 것이 없다. 즉 변화 무쌍한 듯하지만 실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야기의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도전적이리만치 끈질긴 암시를 던진다. 말하자면, 아무리 읽고 들어도 이런 이야기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는 암시다.

 

P14

신화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활동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살아있는 영감을 불어넣었다. 신화는, 다함 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종교, 철학, 예술, 선사 인류 및 유사 인류의 사회적 양식, 과학과 기술의 으뜸가는 발견, 바닥째 흔들어 수면을 엎어버리는 꿈, 신화의 불가사의한 고리…… 모두가 이 은밀한 통로를 지나 인류의 문화로 현현한 것들이다.

 

P14

신화학의 상징은 꾸며낸 것도 아니고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을 수도, 발명될 수도, 억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신간을 초월한 이 환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어느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신화는 왜 어느 곳에서 채집된 것이든 그 다양한 의상 아래로는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신화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P15

프로이트와 융과 그 후계자들은 영웅과 신화의 행적이 현대로 계승되었음을 여지없이 증명해 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일반 신화학은 없어도, 사사롭고 드러내어 인정받지 못한 미성숙 단계에 있다 뿐이지, 그래도 우리의 내부에는 속으로 알찬 꿈의 판테온이 있다. 최신형 오이디포스의 화신, 미녀와 야수의 속편이 오늘 오후에도 뉴욕의 42번가와 50번가 모퉁이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P17

유아가 최초로 적의를 갖는 대상은 최초로 애정을 투사하는 대상과 일치하고, 유아가 최초로 갖는 이상은 (이때부터 유아는 축복, 진리, 아름다움, 완전함이라는 이미지를 무의식 기저에다 간직한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Madonna and Bambino라는 이원일체 상황이다. 불행한 아버지는 다른 현실로부터, 자궁 안에서와 똑 같은 상태로 재현된 이 지상의 천국을 침범한 최초의 틈입자다. 따라서 유아는 아버지를 적으로 체험한다.

 

P21

무섭다고 하는 까닭은, 이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 질서의 바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 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 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P21

의사는 갑자기 나타나, 무서운 용을 죽일 수 있는 빛나는 마법의 칼이 어디 있는지 일러주고, 영웅을 기다리는 신부와 보물이 쌓여 있는 성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며, 영웅의 치명적인 상처에다 고약을 발라주고, 마침내 원수를 물리치고는 어느 황홀한 밤에 모험을 떠난 길을 되짚어 정상적인 생활이 기다리는 세계로 돌아오게 한다.

 

P22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적 삶의 패턴은 몰론, 무의식적 삶의 패턴까지 변화를 요구하는 변형의 문턱을 넘게 하려는 데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그런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원시 사회 생활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른바 통과 제의는 이런 단계의 마음가짐이나, 애착이나, 생활 패턴으로부터 심적으로 단절된다는 의미에서 형식상으로 특이하고 극히 가혹한 단절의 체험이 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P23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있는 타락의 길을 버리고 영험적인 정신의 도움을 따르게 하는 우리 내부의 고차원적인 신경증인지도 모르겠다.

 

P24

남편들은 소년 시절이라는 이름의 신전에서, 아들에 대한 부모의 소원이던 법률가, 실업가, 혹은 지도자를 섬기고 있는가 하면, 아내들은 결혼한 지 14, 두 아이를 낳아 길러놓고도 여전히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다.

 

P24

우리는 뱀에 물리는 꿈에서 알 수 있듯이, 아득한 옛 비의의 상징이, 여기에서 해방되는 순간에 놓인 환자들에게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비의적 이미지는 우리 심성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만일 이 이미지들이 신화와 제의를 통해 외부에서 들어오지 않으면, 꿈을 통해 내부에서 나타나게 된다. 그래야 우리의 에너지가 심해의 바닥이나 진부하고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유아의 놀이방의 동화책에서 풀려날 수 있는 것이다.

 

P25

우리는 자궁이라는 이름의 무덤에서 무덤이라는 이름의 자궁까지 완전한 순환 주기를 산다. 그 것은, 꿈의 본질처럼 눈앞에서 곧 녹아버릴, 견고한 물질의 세계를 향한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흐름이다. 나 개인을 괴롭혔던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모험에의 두려움을 돌이켜볼 때, 결국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유사 이래 이 세계 방방 곡곡, 그리고 문면의 갖가지 위장 아래서 남녀가 더불어 경험한 일련의 상투적인 변신이야기 standard metamorphoses일 뿐이다.

 

P26

사회에서는 왕비를 몹시 비난했다. 그러나 왕은 자기에게도 자기 몫의 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문제의 수소는 옛날 미노스가 형제들과 왕위를 겨울 당시 해신 포세이돈이 보내준 것이었다. …… 그는 자기가 소유한 가축 중 가장 잘생긴, 하얀 수소 한 마리를 포세이돈의 제단에 바치고 바다에서 온 수소는 자기 소유로 가무렸다.

 

P27

고대 전설에 따르면, 더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왕비가 아니라 왕 쪽이었다. 그는 자기 허물을 알고 있던 참이어서 왕비를 비난할 수 없었다. 왕이 된 이상 개인일 수 없는데도 그는 공적인 사건을 개인적인 이익으로 취했던 터였다. 수소의 재등장은, 맡은 역할의 기능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상징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이를 자기 소유로 하는 행위는 이기적인 자기 강화에의 충동을 나타낸다. 이렇게 해서 <신의 은총을 입고 즉위한> 왕은, 자기 자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위험한 폭군이 되었다. 전통적인 통화 제이가 개인에게 과거를 향해서는 죽고 미래를 향해서는 거듭 날 것을 가르쳤듯이, 저 왕위 서임 의식은 그의 개인적인 성격을 벗기고 신명이라는 망토를 입혀주었다. 이것은 장인에게나 왕에게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제의를 거부하는 신성 모독 행위로 개인은 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조직으로부터 하나의 단위로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이 하나가 부서져 여럿으로 분열하면서 각개 충돌(서로 자신을 억제할 수 없는)로 치달았다. 이렇게 되면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길을 힘뿐이다.

 

P28

권력 망자 (세습에 의하지 않고 힘으로 정권을 잡은 참조)는 세계의 신화, 민간 전승, 전설, 심지어는 악몽에도 익히 등장하는데 그 특징은 어디서건 동일하다. 그는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다. 그는 <내 것>이라는 탐욕스러운 권리에 걸신들린 괴물이다. 그가 저지른 황폐의 참상은 그의 세력권 안에 두루 널려 있는 것으로 신화와 동화는 한결같이 그리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집안,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심성, 우정과 도움을 빌미로 내민 그의 손길에 시들어버린 생명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가 구축한 문명의 넓이를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만에 빠진 폭군의 자아는, 그의 사업이 제아무리 번창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 그의 말에 저주를 내린다. 대개는 제어하기 어려운 자신의 충동적 소유욕의 그림자인, 예상했던 주위의 공격에 스스로 놀라고 겁을 집어먹고, 만나는 족족 싸우고 격퇴시키는 이 입지전적인 독제자의 에고는, 아무리 세상에선 성공을 거두었을지라도 사실은 자신과 이 세계에 종말을 고하는 사자다. 그의 손길이 미치는 곳에는 절규가 있다 (담 너머로 들리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서 들리는 비참한 절규다). 빛나는 칼을 든, 일격으로, 일거수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땅을 자유롭게 할 대속자인 영웅을 부르는 절규다.

 

P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P29

오직 탄생 (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P29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는 길뿐,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길뿐이다.

 

P30

창조 작업의 회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을 위한 위기가 따르는데, 토인비 교수는 이 위기를 묘사하는 데 <해탈 detachment> <변용 transfigur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 단계, 즉 해탈 혹은 물러섬 withdrawal 과정은, 외적인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옮김으로써, 황무지의 절망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히 평화로운 영역으로 물러섬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황금의 씨앗을 마르는 법이 없다. …… 우리는 더 높이 솟아야 한다.

 

P30

우리는 저 위대한 천품의 시혜자, 시대의 문화 영웅(한 나라뿐만이 아닌 세계 역사상의 귀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영웅이 첫 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나가되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 (즉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유아기 악마에게 싸움을 걸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G. 융의 소위 <원형 심상>과의 동화 작용을 시도한다. 힌두와 불교 철학에서는 이 과정을 <비베카>, 즉 분리 discrimination의 과정이라고 한다.

 

P32

우리가 찾고, 동화해 나아가야 할 원형은, 인류 문화의 연대기를 통해 제의, 신화, 그리고 상상력의 기본적인 이미지를 촉발해 온 기폭제다. 이러한 <영원한 꿈들>은 악몽이나, 고통받는 개인의 광기에서 나타나는, 마구잡이 상징적 형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P33

따라서, 영웅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가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그런 사람의 상상력과 이상과 영감은 태고적부터 인간의 생명과 사상의 원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두 번째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 (토인비가 주장하고, 인류의 모든 신화가 보여 주듯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해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P35

이 의미 심장한 위험과 장애와 도정에서 겪는 행운의 모티프는 갖가지 양태로 굴절하게 되는데, 바로 이 책에서 우리는 수백 가지로 굴절된 모티프와 만나게 된다.

 

P37

사람들은 비교적 무의식적으로 시민 및 종족으로서의 정례를 따름으로써 대부분 위험 부담이 적은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 역시 구원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대속자들에 의해 아득한 옛날, 인류에게 주어져 수천 년가 계승되어 온, 사회의 상징적 도움이라는 미덕, 통과 제의, 은총으로 입은 성사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다.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내부의 소명도 외부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다. 오늘날의 우리 대부분은 가슴 안팎으로 이 미궁을 안고 있다는 이야긴데 아, 미노타우로스와 맞설 용기를 심어주는 미궁 탈출의 단서와 괴물을 만나 도륙한 다음 우리를 자유의 길로 이끌어줄 안내자, 저 아름다운 처녀 아리아드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P38

그런데도 우리는 혼자서는 이 모험 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면,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면,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P39

해피 앤딩은 허위 진술로 경멸을 당하는데, 이는 우리가 알고 보아온 한, 이 세계에는 하나의 종말, 즉 죽음, 붕괴, 의절,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던 형태가 사위어감에 따라 일어나는 우리 마음의 십자가가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P40

<연민이란,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고통받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보이지 않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P40

비극적 카타르시스 번역판 서문에서 지적했듯이 비극적 카타르시스 tragic catharsis: 즉 연민과 공포의 체험을 통한 비극 관람자 감정의 <순화 purification> 혹은 정화 purgation, 손발이 잘린 우두신 디오뉘소스를 위한 축제와 비의적 연극의 기능이었던 초기의 제의적 카타를시스 (ritual catharsis: 과거의 오점과 독소, 죄악과 죽음의 오염으로부터의 사회의 순화)에 상응한다. 비의적 연극에서, 명상하는 정신은, 죽을 팔자를 타고 태어난 육체가 아니라, 한동안 육체에 깃드는 영속적인 생명의 원리와 합일하며, 실재가 허깨비로 분장 (고통 받는 자와 보이지 않는 원인으로)하고 있을 동안, <인간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던 비극> 이 우리 필멸의 육체를 찢고 해체할 때, 우리들 자신은 바로 그 밑바닥으로 녹아 들어간다.

 

P41

시공의 제약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의 하찮은 논리와 정서적 집착으로 찾아 드는 죽음, 우리들이 흙으로 돌아가려 할 때 비로소 온몸을 흔들면서 승리의 찬가를 부르는 보편적 생명에 대한 이러한 재인식, 이 생명을 향한 우리의 가파를 중심 이동, 그리고 <운명에의 사랑 amor fati>, 즉 필멸의 운명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비극적 예술의 체험을 구성한다. 그 기쁨, 구원의 황홀은 바로 그 안에 있다.

 

P42

거기에는 마왕에의 공포를 덜어줄 천국, 내세의 천복, 보상에 대한 핑계 대신 오직 자궁에서 하릴없이 튀어나온 생명을 받아 먹어 치우는 무위의 공허, 절대적인 어둠이 있을 뿐이다.

 

P42

동화, 신화, 그리고 영혼의 신곡에 나오는 해피앤딩은 모순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비극의 초절정으로 읽혀야 한다. 객관적 세계는 과거의 형태 그대로이나 주관이 강조되면서부터는 변형된 것처럼 보인다.

 

P42

시간의 우유성에 대해 무심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양자를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 (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 (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 (catharsis, purgatorio)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 kathodos and anodos인 것이다.

 

P43

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P43

이 땅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기 전에 보다 중요하고 보다 본질적인 것이, 우리가 알고 있고 더러 꿈속에서 찾아가기도 하는 미궁 안에서 일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 내적인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전에 잊여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P44

삶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는 힘의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P44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의 핵심 nuclear unit라고 할 수 있다. ,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P50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P50

진정한 창조 행위는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세상으로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행위로 표현되며, 영웅의 부재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가 거듭난 자, 위대한 자, 창조력을 얻어 돌아오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류 역시 한 목소리가 된다.

 

P50

이러한 작업은 당대의 삶과 관련된 이미지의 의미뿐만 아니라 야망, 권력, 영고 성쇠, 그리고 지혜로서의 인류 정신의 단일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P54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왕의 아들>이고 그는 이로써 자기의 실제적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P54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P55

이 둘(영웅과 그의 궁극적인 신, 찾는 자와 찾아지는 자)은 결국, 이 세계의 신화에 다름 아닌 단일한 유형적 신비의 표리로 받아들여진다. 위대한 영웅은 위대한 행적을 통해, 이 다양한 얼굴이 사실은 하나임을 알고, 또 남들에게 알리게 된다.

 

P58

이 분류(奔流)는 보이지 않는 원천, 우주라는 상징적 원의 중심인 입구, 불교에서 말하는 부동의 자리에서 흘러나오는데, 세계는 이곳을 중심으로 순환한다고 일컬어진다. 이 자리 밑에는, 심연의 물을 상징하는 용, 즉 우주적인 뱀의 머리가 있는데, 심연의 물은 생명을 창조하는 신적인 에너지이며, 불멸하는 존재의 세계 형성자인 데미우르고스(造物主). 생명나무, 즉 우주 자체는 바로 이곳에서 자라난다. 생명나무, 즉 우주는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에 뿌리내리고 있다.

 

P58

왜냐하면 신의 화신으로서의 영웅은, 영원의 에너지가 시간성 안으로 흘러드는 배꼽, 즉 세계의 배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연속적인 창조의 상징, 모든 사물 안에서 약동하는 소생의 연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세계 보존의 신비인 것이다.

 

P61

완전한 중심을 나타내고 고취시키기 위해 거기에 사원이 세워지기도 한다. 까닭인즉, 이런 곳은 풍요를 향한 돌파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어떤 사람은 영원을 깨닫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곳은 보람 있는 명상의 촉매가 될 수도 있다.

 

P61

이 참배자의 목표는, 생명 지향, 생명 부흥 양식의 기억을 내부로부터 환기시키는 한 수단으로서의 보편적인 패턴을 연습하는 것이다.

 

P62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세상의 하고 많은 선과 악을 두루 산출한다. 추한 것, 아름다운 것, 죄악과 미덕, 쾌락과 고통이 모두 이 세계의 배꼽의 공평한 산물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르기를, <신에게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고 했다.

 

P62

직관은 짝짝으로 된 상대적 반대 개념을 초월한다. 미덕은 자기 중심적인 자아를 완화시켜 범개인적 (汎個人的) 중심성을 지향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이 가능했다면 고통이나 쾌락, 미덕이나 악덕, 우리의 자아 혹은 남들의 자아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초월적인 힘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 안에 사는 자, 모든 것 안에서 훌륭한 자,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섬김이 타당한 자에게 감득되는 것이다.

 

P62

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P64

신화는 장엄하고 무시무시한 신곡을 향해 온전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신화의 제신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 즉 창조자의 무자비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비극적인 자세를 신경질적인 것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근시안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요컨데 제때에 나고 죽는, 자기 중심적며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 불명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P71

이 동화는, 모험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다.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것이긴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이 주름의 골은 매우 깊다. 영혼 그 자체만큼이나 깊다.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이 동화에서 황금 공이 사라진 사건은, 공주에게 닥칠 운명의 첫 번째 조짐이고, 개구리는 두 번째, 무심결에 한 약속은 세 번째 조짐이다.

 

P72

전령관의 등장은, <자아의 각성 the awakening of the self>이라고 불리는 단계를 암시하고 있다. 동화에 나오는 공주의 경우, 전령관의 등장은 사춘기의 도래를 뜻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크든 작득, 삶의 단계나 정도가 어디에 이르러 있던, 완성되면 곧 죽음과 탄생에 이르는, 정신적 통과 의례 혹은 순간을 개막한다. 지금까지의 삶의 지평은 이제 너무 웃자라, 낡은 개념과 정서 패턴은 몸에 맞지 않는다. 바야흐로 또 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P72

이러한 소명을 받는 장소로 전형적인 곳은 깊은 숲 속, 큰 나무 아래, 샘가 …… 운명의 힘을 전하는 전령관은 혐오감을 주는, 참으로 하찮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세계의 배꼽에 대한 상징으로 인식한다.

 

P73

프로이트는, 불안한 순간은 어머니로부터 분리될 때의 고통 (탄생하는 순간의 숨이 막히고, 피가 응어리지는 등의)을 상기시킨다고 지적한 바 있다. 거꾸로 말하면, 분리와 탄생의 순간은 불안을 야기시킨다. 부왕과 함께 누리던 특권과 행복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려는 왕의 자식의 경우든, 에덴 동산의 낙원을 떠날 만큼 성숙한 신의 딸 이브의 경우든, 사바 세계의 마지막 지평을 뛰어넘는 수간의 전심 전력하는 미래 부처의 경우든 위험, 안심 인명, 시련과 극복, 그리고 탄생이라는 신비의 기이한 신성을 상징하는 원형 이미지는 똑같다.

 

P73

이 징그러운 뱀이나 개구리, 즉 징그러운 동물은 무의식 심층 (<하도 깊어서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을 상징한다. 여기엔 징그럽고, 사랑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미지의 혹은 지진한 요소, 원리, 그리고 생존의 본질이 우글거리고 있다.

 

P73

그러나 이 길을 따르면, 길은 낮의 벽을 통해 보석이 빛나는 밤으로 열린다. 혹 전령관은 우리 내부의 억압된 본능적 다산성의 상징인 야수 (동화에서처럼), 또는 미지의 베일에 가려진 신비스러운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P77

꿈에서든, 신화에서든 갑자기 한 사람 생애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면서 이런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 이때, 주인공은 이전에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던 사물이 이제 무가치하게 되어버리는 상황을 경험한다. … 이러한 소명은 마침내 부정하지 못할 국면에 이른다.

 

P80

이 신화적 여행의 첫 단계(우리는 이를 <모험에의 소명>으로 불렀다), 운명이 영웅을 불렀고, 영웅의 영적 중심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P80

그러나 이곳에는 항상 변환 자재하는 존재, 다형태를 취하는 존재, 뜻밖의 고통, 초자연적인 행위, 그리고 초현실적인 환희가 있다. 영웅은 자신의 의지력으로 모험을 완성할 수 있는데, 테세우스가 아버지의 도시 아테네에 도착하여, 미노타우로스의 놀라운 역사를 듣게 되는 상황이 이에 해당한다.

 

P81

현실 생황에서는 자주, 신화나 민간 전승에서도 드물지 않게 소명에 응하지 않는, 조금은 답답한 경우를 우리는 만난다. 다른 데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소명에 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명에의 거부는, 모험을 부정적이게 한다. 타성이나, 힘에 겨운 일, 혹은 <문화>의 장벽 때문에, 모험의 주체는 의미 심장한 긍정적 행동력을 잃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험의 주체가 누리던 화려한 세계는 메마른 돌멩이가 구를 뿐인 황무지가 되고, 그의 삶은 무의미해진다. 그렇긴 하나, 미노스 왕처럼 이 모험의 주인공 역시 초인적인 노력으로 예사롭지 않은 제국을 건설하는 데엔 성공할지 모른다. 그러나 무슨 집을 짓건, 그가 짓는 것은 죽음의 집이다. 자기의 미노타우로스를 숨기는 퀴클롭스 식 미궁일 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면서 파멸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P82

예수의 길을 두렵게 여겨라,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이다.

 

P82

세계 전역의 신화와 민화는,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제 이득으로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래란 생과 사의 부단한 연속만은 아니다. 개인이 가진 현재의 이상과, 미덕과, 목적의 체계가 어떻든 이득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이고 또 보장되어 있다. 미노스 왕은, 그가 속한 사회의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의미로 희생을 드려야 하는 신의 수소를 사유물로 취했다. 그는, 자기 상상력보다는 경제적 이득을 앞세웠다. 때문에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생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 실패했고, 우리가 보았듯이 엄청난 불운을 겪어야 했다. 신성이 그 자신의 적이 된 것이다.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즉 자신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P82

인간은 밤이고 낮이고, 자신의 어지러운 심성의 폐쇄된 미궁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자기의 이미지인 신적인 존재에 쫓긴다. 문을 나가는 길을 막힌 지 오래다. 출구는 없다. 인간은 사탄처럼, 죽자고 자기 자신에게 매달린다. 이때 그가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혹자는 그러다 신 안에서 마침내 파멸하기도 한다.

 

P85

정신분석학 보고서에는 이런 위험한 유아기 고착의 사례가 얼마든지 나온다. 이러한 사례들은, 당사자가 유아기적 자아 그리고 유아기적 정서 관계 및 이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당사자는 유아기의 벽에 갇혀 있다. 이 경우 아버지나 어머니는 문턱을 지키는 사람으로 버티고 있어서, 그들의 징벌을 두려워하는 소심한 영혼은 문을 열고 외부 세계로 나오는, 재생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P87

희생자의 일부는 (우리가 들은 대로) 영원한 저주에 묶이지만 일부는 구원을 받게 되어 있다. 브린힐트는 적절한 영웅의 출현으로 보호를 받았고, 덩굴장미 아가씨는 왕자의 구원을 받았다. 나무로 변했던 청년 역시 길을 가리키는, 미지의 길을 안내하는 신비스러운 안내자인 미지의 여인을 꿈꾸었다. 주저한다고 다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많은 비밀을 여축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비밀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명의 거부에 따르는 부정적인 상태가 뜻밖의 해방의 원리에 대한 행운의 계시일 수도 있다.

 

P87

실제로 고의적인 내향성은 창조적인 정신의 고전적인 방편 중의 하나이고, 이를 효율적인 장치로 응용할 수도 있다. 이 방편은 심적 에너지를 심층으로 몰아 무의식적 유아기의 이미지 및 원형적 심상이라는 잃어버린 대륙을 활성화시킨다. 그 결과 의식의 분열이 다소간 일어날 수 있음도 물론이다(신경증, 정신병, 겁을 집어먹은 다프네의 혼비백산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격이 이 새로운 힘을 흡수하고 통합할 수 있으면 당사자는 자기 의식의 초인간적인 단계 및 완전한 통제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P87

오히려 특정 사상에의 반응을 교묘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거부하되, 내적인 공허를 기다리는 미지의 요구에 심층적으로, 고도로, 그리고 풍부하게 응하는 것이다. 일종의 주어진 삶의 방식에 대한 철저한 파업 혹은 폐기라고나 할까, 그 결과 변형의 힘은 문제를 새로운 자장으로 끌어내는 수가 있다. 이 자장에서 문제는 어느 한 순간 마침내 풀릴 수 있는 것이다.

 

P88

신경증적인 유형과 생산적인 유형을 비교해 보면 전자는 자기 자신의 충동적인 삶에 대한 과도한 관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양자는 평균적인 유형과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자기를 현재 그래도 받아들이는 평균적인 유형은, 의지력으로써 자기 자신을 새로운 형태로 다듬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있다. , 자기 자아를 자신해서 다시 다듬는 이 작업에 있어서 신경증적인 유형은 파괴적인 예비 작업을 거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작업을 자의적인 창조 과정은 분리시키고 이를 이념적인 추상성으로 변용시키지 못한다. 창조적인 예술가 역시…… 자신의 재창조 작업에서 시작, 이념적으로 자아를 구축한다. 그러나 이 경우, 이 자아는 자기 속의 창조적인 의지력을 그 자신의 이념적인 추상으로 변화시켜, 객관화시키는 입장에 서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의 내적인 문제에 국한되며, 건설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파괴적인 측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생산적인 작품치고 <신경증적> 성격의 병리적 위기가 없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P93

소명을 거부하지 않는 모험 당사자는 영웅적인 편력 도중 첫 번째 보호자를 만난다. 노파나 노인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 보호자는 모험 당사자가 곧 만나게 되는 용과 맞설 호부를 준다.

 

P96

이러한 존재는 자비로운 힘, 즉 숙명적인 보호 세력을 표상하고 있다. 영웅이 빠져드는 환각은 곧 안식처이며, 낙원의 평화에 대한 약속이다. 모태 안에서 처음으로 경험했던 이 낙원의 평화에 대한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 약속은 현재를 지탱케 하고 과거와 미래까지 주관한다(따라서 알파이자 오메가다). 이러한 약속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여러 단계에 이르는 삶의 문턱을 넘으면서, 그리고 삶을 자각하면서 무산의 위기를 겪지만 보호 세력은 항상 영혼의 지성소에, 심지어는 이 세상의 낯선 사건에 내재하거나 그 배후에 존재한다.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대자연은 항상 위대한 임무를 지원한다. 영웅의 행동이 그 사회가 예비하고 있는 것과 일치될 때, 그는 흡사 역사적 변화의 리듬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P98

보호자인 동시에 위험한 적이며 모성적이기도 하고 부성적이기도 한 이 후견과 방향제시의 초자연적 원리는 그 내부에서 무의식의 모든 다의성을 통합한다. 따라서 의식적인 개성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체계 및 우리가 따르는 안내자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한 후원은 우리의 이성이 헤아리지 못하는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P98

그런 조력자를 맞는 영웅은, 소명에 응답한 영웅일 경우가 보통이다. 실제로 소명은, 통과 제의의 사제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는 첫 번째 통고다. 그러나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알라 신뿐>이라는 말에서 보았듯이, 영혼을 닫은 자들에게도 초자연적인 안내자가 오는 예가 있다.

 

P105

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수호자는, 영웅의 현재 상황, 혹은 삶의 지평의 한계를 상징하면서 사방에서 (위 아래까지)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수호자 뒤로는 어둠이며, 미지의 세계이며, 위험이다.

 

P106

이렇게 네가 나를 만났으니 마땅히 싸워야 한다.” 만약 사람에게 지면, 이 괴물은, “나를 죽이지 마십시오. 의술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하고 애원한다. 이렇게 되면 이 괴물과 싸워 이긴 사람은 용한 의사가 된다. 그러나 이 반인 반수의 괴물 (<이상한 것>이란 뜻인 <치루위>라고 불리어진다)이 이기면, 진 사람은 죽음을 당한다.

 

P109

판은, 실수로 자기 영역을 침범한 인간을 괴롭히는데 이때 인간이 판에 대해 갖는 감정은, <당환 Panic>, 공포, 그리고 엄청난 경악 같은 것이다. 하찮은 실수 (나뭇가지를 꺾는다든지 잎을 나부끼게 하는 따위의) 때문에 침입자의 마음속에는 가상적인 위험에 대한 자각이 싹튼다. 이때 침입자는, 공황 상태에서 자신의 무의식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한다. 그러나 판은, 자기를 섬기는 인간에게 자비를, 즉 자연의 건강법이란 은혜를 베풀기도 한다. 첫 소득을 바치는 농부, 목동, 어부에겐 풍요를, 자기의 성역에 제대로 접근한 인간에겐 불로장생의 은혜를 베풀기도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옴팔로스 Omphalos, 즉 세계의 배꼽에 대한 지혜를 내리기도 한다. 이 관문을 지나면 우주적 근원이라는 성역에  한 발을 들여 놓게 되는 것이다. 아폴론이 델포이 신전에서 여자 예언자를 통해 신탁을 내렸듯이, 뤼카이온 Lykaion에서는 판의 사주를 받은 요정 에라토가 신탁을 주재했다. 플루타르코스는 퀴벨레의 황홀경, 디오뉘소스의 바카스적 광란, 무사이(뮤즈)에 의한 시적인 광란, 아레스 (Ares = Mars)의 전투적인 광란, 그리고 이성을 뒤집어엎고 파괴적, 창조적 비밀을 방출하는 신에 대한 <열광>의 실례 가운데서도 가장 격렬한 사랑의 광란을 열거하는데, 이 판 밀의의 황홀경도 그 중의 하나로 꼽고 있다.

 

P112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 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

 

P112

그러나, 이 뱀, 즉 메는 참으로 무서운 존재다. 섬 사람들은 이 뱀은 자기를 본 사람의 친척으로 변한다고 믿는다. 자기 생활권이라는 벽에서 한 발이라도 밖으로 나가는 영웅은 반드시 이런 괴물 (몹시 위험하면서도 때로는 마법의 권능을 베푸는)과 만나야 한다.

 

P113

영웅이 겪는 복잡한 관문 통과의 다의성과, 영웅의 공포는 완전한 정신적 무장 앞에서 사라지겠지만,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무모한 영웅이 이 관문 통과에는 실패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P114

어리석은 대상 우두머리는 도깨비의 말을 좇아 항아리는 모조리 부숴버리고 수레의 짐을 덜어준 다음 앞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앞길에서는 물 한 방울 구경할 수 없었다.

 

P118

이제 독자들도, 다석 가지 무기를 지닌 태자의 말 뜻을 헤아렸으리라. 그가 자기 뱃속에 있다고 한 무기는 다름아닌 <지혜>라는 무기였다. 실제로 이 젊은 영웅은 전생의부터, 바로 그분이었다.

 

P119

이 여섯 번째 무기가, ()과 형()이라는 현상계 너머의 존재라는 초월적인 원리의 지혜라는 천상적 벼락인 것이다. 여기에서 상황은 일전한다. 태자에게 도깨비는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 손에서 풀려난다. 이제 그는 영원히 자유로워진 것이다. 뿐만 아니다. 현상계의 마력이 무너지자 그는 자기를 부정하게 된다.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그는 신 (보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신적인 정령)이 된다. 종국적인 이름과 형태가 아닌, 마음속의 이름과 형태를 초월한 단순한 이름과 형태를 알게 될 때 세상이 그렇게 되듯이 그 역시 신적이 존재가 된 것이다.

 

P119

쿠사의 니콜라스는, 인간의 시야로부터 하느님을 가리는 <낙원의 벽> <짝짝의 대립물의 일치>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문에는 <극도로 이성적인 정령>이 지키고 있어서 <이 이성적인 정령이 종복당할 경우에만 빗장이 풀린다>고 쓴 바 있다. 한 짝을 이루는 대립물(즉 존재와 비존재, 생과 사, 미와 추, 선과 악, 희망과 공포의 기능을 통합하고 방어와 습득 행위를 일으키는 기관을 연계시키는 그 밖의 양극성)은 여행자를 향해 서로 부딪쳐 오는 바위 Symplegades이며, 영웅은 항상 이 길을 지난다.

 

P120

태양 문을 통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P120

마법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이, 곧 재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관념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대의 배라는 자궁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영웅은, 그 관문을 지치는 세력을 정복하거나, 그 세력과 화해하는 대신, 그 미지의 힘에 빨려 들어, 겉보기엔 죽은 것으로 나타나고는 한다.

 

P122

관문의 통과가 자기적멸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P123

이러한 괴수들은, 한 차원 심화된 내적 침묵과 만날 준비가 되지 않는 자들을 지켜주는 관문의 수호자들이다.

 

P123

사람들 가운데엔 그저 물리적으로 신전 수호자 앞을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귀물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될 수는 없다. 침입자가 이 성전을 제대로 거치지 못하는 한 얻은 것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P123

회화적 언어로 말하면 둘 다 생의 구심화 행위, 거듭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P124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P124

자아에 집착을 끊은 영웅은 왕이 자기 궁궐에서 방방을 드나들 듯이, 삶의 지평을 넘나들거나 용의 뱃속을 드나들 수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은 여기에 있다. 그의 죽음과 회귀는, 모든 현상계의 대립물이 창조되지 않은 불멸의 존재임을 드러내는데 여기에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P124

세계 전역에서, 용을 죽임으로써 삶을 비옥하게 하는, 신비스러운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들은 오시리스처럼 그 뭄을 난자당하는 등, 세계를 개혁하는 위대한 상징적 행위까지 그 몸으로 짊어졌다.

 

P125

이것은 미노스 왕이 포세이돈의 소를 자기 것으로 만들 당시에 치르기를 거부했던 희생제다. 프레이저가 지적했듯이 의식으로서의 국왕 가해는 고대 사회의 일반적인 관례였다.

 

P126

우리는 매 8년마다 미노스 왕에게 바쳐지기로 되어있는 아테네의 일곱 청년과 일곱 처녀는 다음 8년 주기를 위한 왕의 재생과 관련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미노스 왕이 지내기로 되어 있는 수소의 희생제는 8년 주기의 마지막 해에, 전통에 따라 미노스 왕 자기 자신이 희생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대용물로 아테네의 선남 선녀를 바친 듯하다. 미노스가 괴수 미노타오로스가 되고, 자기를 희생시켜야 하는 왕이 폭군이 되고, 모두가 왕의 역할을 수행하던 제정 일치 국각가 사리 사욕만 아는 상업 국가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원전 3천 년대에서 2천 년대까지, 그러니까 초기 제정 일치 시대 말기의 고대 국가에서는 이러한 대속물의 희생제가 관례였던 듯하다.

 

P128

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정도로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 남지 않으면 안 된다.

 

P128

어쩌면 모험 당사자가 자신의 초인간적 여행 도정의 도처에 자비로운 권능이 있어서 자기를 도와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인지도 모른다.

 

P133

이 유아기 상태란 성장의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수정되고 역전되다가 현실에 적용될 필요가 있을 때 재수정된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 충동의 유대 libidinal tie를 강화하고 있다. 이 유대가 없다면 인간의 집단은 존재할 수가 없다.

 

P133

그러니까 어떤 사회에 속하는 사람이든지, 고의적으로든 타의에 의해서든 자기 정신의 미궁이라는 미로로 내려가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저 시베리아의 <푸닥>과 성산에 못지 않는 상징적인 것들(능히 여행 당사자를 삼켜버릴 수도 있는)에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신비주의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자기정화>에 이르는 길의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즉 감각이 <정화되고, 스스로를 낮추어> 모든 에너지와 관심이 <초월적인 것에 집중될> 때인 것이다. 굳이 현대적인 의미의 어휘를 쓰자면, 우리 개인이 가진 과거의 유아적 심상이 분리, 초월, 변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의 꿈에는 아직까지도 시대를 초월한 위험, 괴물, 시련, 정체불명의 조력자, 그리고 우리에게 유익한 인물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들의 형태에서 우리는 현재 상태의 모든 현상뿐만 아니라, 그 현상을 이기기 위해 우리가 취할 행동의 단서도 굴절되고 있음을 본다.

 

P139

우리의 선조들이 신화적 종교적 유산의 상징적 정신적 의식에 힘입어 극복해 왔던 심리학적 위험들을 오늘날 우리가(비신자인 경우, 아니면 신자라고 하더라도 계승 받은 믿음으로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납득할 수 없을 경우) 혼자서 혹은 시험적, 즉흥적으로, 더러는 도움이 될 만한 지침도 없이 맞서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모든 신들과 악마들의 존재를 이성의 이름으로 부정한 <개화된> 현대인인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어받고 있고, 세계 각처에서 수집된 신화와 전설에서, 우리는 우리가 이직은 인간임을 보여주는 조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감청하기 위해서는 자기 정화를 감수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다.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의 낙원에 들어가려 하느냐.>

 

P143

고대의 상징 체계에 따르면 빛과 어둠을 표상하는 자매, 즉 이난다와 에레쉬칼은 두 얼굴의 한 여신이다. 그리고 그들의 반목은 어려운 시련의 길을 의미한다. 신이든 여신이든, 남자든 여자든, 신화의 등장인물이든 꿈을 꾸는 사람이든, 영웅은 적대자를 발견하고 삼키거나 그에게 삼켜짐으로써 이 적대자(뜻밖에도 그 자신의 자아)를 동화시킨다. 하나씩 하나씩 장애는 차례로 사라진다.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P143

자아가 스스로를 죽음에 내어 맡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P144

모든 장애물이 극복되고 도깨비가 퇴치되었을 때 영웅이 치르는 마지막 모험은, 승리한 영웅과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스러운 혼례로 표상된다. 이로써 영웅은 천저, 천정, 혹은 땅 끝, 우주의 중심점, 신전의 성소, 혹은 마음속의 가장 어두운 방 속에서 위기를 맞는다.

 

P145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 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혹과 약속은, 이 세상의 도시나 숲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찾아온다. 왜 찾아 왔을까? 그녀의 존재가 바로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때 인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볼 은혜이기 때문이며, 위안과 자양, 그리고 우리가 아득한 옛날에 그 사랑을 받던 <좋은> 어머니 (젊고 아름다운)이기 때문이다. 세월은 우리와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았지만, 그녀는 영원한 잠에 빠져든 미녀처럼, 아직 우리의 속 영원의 바다 밑바닥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P148

어머니 중에는, 성인의 유아기 기억이라는 은밀한 곳에 숨어 있다가 때로는 엄청난 힘을 행사하는 <나쁜> 어머니도 있다. 이런 어머니는 아르테미스처럼 우아하면서도 고약한 여신으로 존재한다. 아르테미스(디아나))가 젊은 사냥꾼 악타이온을 철저하게 파멸시킨 예는 정신과 육체의 차단된 욕망의 상징 안에 얼마나 엄청난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지 확연히 보여준다.

 

P150

만유의 어머니의 신화적 표상은 우주에 대해, 그 우주의 존재를 윤택하게 하고 지켜주는 최초의 여성적 속성을 부여한다. 환상이란 원래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에 대한 어린아이, 주위의 물질 세계에 대한 성인의 자세에는 밀접하고도 노골적인 상응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종교 전통에는 자신을 정화하고, 안정을 유지하고, 마음을 가시적 세계의 자연 속으로 입문시킬 목적으로, 이러한 원형적 심상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교육적인 이용 방법이 전해져 왔다.

 

P150 ()

<한편으로는 마음, 정신, 혹은 영혼의 개념과 아버지, 혹은 남성이라는 관념, 또 한편으로는 육체 혹은 물질 (material, 즉 어머니에게 속하는)의 개념과 어머니 혹은 여성적 원리라는 관념은 극히 보편적인 관련을 갖는다. 이 관련성에 미추어볼 때, 어머니 (우리 유대-기독교의 유일신교에 있어서)에 관련된 정서나 감정이 억압당하면, 이간에 대한 것이든 일반적인 사상(사상)에 대한 것이든 영적 요소를 과대평가하거나 강종하는 경향과 더불어, 인간의 육체, , 그리고 물질적 우주에 대한 혐오, 경멸, 염증 혹은 호전적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경향을 창출하는 수가 있다. 모르긴 하나, 철학에 있어서의 지나친 이상주의적 경향은 어머니에 대한 이러한 반응의 이상화 현상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이며, 물질주의의 교조적이고 편협한 양식은, 원래 어머니와 관련된 억압된 감정에의 회귀인 방향전환 때문인 듯하다.

 

P151

여신은 생의 불길로 늘 붉다. 지구, 태양계, 먼 우주의 은하까지 이 여신의 자궁 안에서 팽창한다. 왜냐하면 이 여신의 세계의 창조자, 영원한 어머니, 영원한 처녀이기 때문이다. 이 여신은 포옹하는 것을 포옹하고, 자양하는 것을 살지게 한다.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생명이다.

 

P152

여신은 또 때가 되면 죽는 모든 것의 죽음이기도 하다. 나서 사춘기, 성년기, 장년기를 거쳐 무덤에 들어가기까지 전 존재의 순환은 여신의 지배 아래서 이루어진다. 여신은 자궁이며, 무덤이며, 제 새끼를 먹는 돼지다. 이렇게 해서 여신은, 개인적인 어머니는 물론 우주적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두 유형을 드러내면서 <> <>을 통합한다. 여신의 숭배자는 이 두 유형의 어머니를 똑같이 조용히 묵상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 숭배자의 정신은 유치하고, 어울리지 않는 감상과 증오로부터 스스로를 정화하고, 유치한 인간이 자신의 행, 불행에 연결지어 멋대로 가른 <> <> 따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본성의 법()과 상()으로 존재하는 불가해한 실재를 향해 그 마음을 열게 된다.

 

P152

이 여신은 다름아닌, 절대 절멸의 공포와, 비인격적이지만 모성적인 평화를 하나로 조화시키는 우주적인 권능, 우주의 전체성, 대립물의 조화였다. 시간의 강이 사람의 흐름으로 바뀌면 여신은 순식간에 창조하고, 보존하고, 파괴한다. 이 여신의 이름은 <검은 존재 the Black One>, 즉 칼리 Kali. 별명은, <존재의 바다를 건네주는 나룻배>.

 

P153

고도의 이해력을 갖춘 천재만이 이 숭고한 여신의 계시를 읽을 수 있다. 이해의 정도가 낮은 사람을 위해 여신은 그 신통력의 정도를 낮추어, 그들의 지진한 능력에 알맞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여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엄청난 재앙일 수 있다. 수사슴이 된 악타이온의 예에서 우리는 이미 이런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악타이온은 성자가 아니었다. 정상적인(유치한) 욕망이나, 놀라움이나, 공포에 반응하는 인간으로서 엿보아서는 안 될 계시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일개 사냥꾼에 지나지 않았다.

 

P153

신화학의 심상 언어에서 여자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알게 되는 존재가 곧 영웅이다. 영웅이 삶의 다른 형태인 입문의 과정을 진행함에 따라 여신의 형상은 그에게 일련의 변형 과정을 체험하게 한다. 여신은 항상 영웅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할 수 있지만 영웅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여신은 그를 유혹하고, 인도하고, 그의 발목에 채인 족쇄를 깨뜨리게 한다. 그리고 만일 영웅의 능력이 여신에 미치면 이 양자, 즉 아는 존재와 알려지는 존재는 갖가지 제약에서 해방된다. 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열등한 눈으로 보면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이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P155

마지막으로 니알이 그 우물에 이르렀다. 니알은 노파에게 말했다. “여인이여, 물을 떠가게 해주시오노파가 대답했다. “물을 드리겠소, 대신 나에게 입맞춰주시오” “입맞춤이 대수요? 그대를 껴안을 수도 있소왕자는 노파를 껴안고 뺨에다 입을 맞추었다. 왕자가 입을 맞추고 물러서려는데 보라, 화용월태, 세상 어디에 그같이 아름다운 여자가 있음랴 싶은 미녀가 바로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결은 백설 같았고, 팔은 포동포동하면서도 여왕의 기품을 갖추고 있었고, 손가락은 가늘었으며, 다리는 곧고 길었다. 부드러운 흰 발과 땅 사이의 구두는 하얀 구리로 만든 것이었고, 입고 있는 망토는 진홍색의 가장 질이 좋은 양털로 만든 것, 가슴엔 하얀 은제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진주 같은 이빨, 제왕의 풍모에 값하는 눈, 딸기 같이 붉은 입술….., 왕자가 탄복한 나머지 중얼거렸다. “, 아름다운 이 은하를 이루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하고 여인이 대답했다. “그대는 누구신가요?” 그러나 여인은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왕도라고 합니다. 타라(아일랜드)의 왕이시여! 내가 바로 왕도입니다. 가십시오. 물을 떠서 형제들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대와 그대의 자손에게 왕위와 왕권이 영원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기가 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왕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왕도란 싸움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지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P156

영웅에게, 저 중세의 음유 시인이나 궁정가인이 말하던 이른바 <온유한 마음>을 요구한다. 여신은, 악타이온의 동물적 욕망으로도, 퍼거스의 절벽에 가까운 도사림으로도 파악되지 않았다. 오직 니알의 부드러움에 의해서만 그 정체가 드러났다. 이 부드러움이 일본의 10-12세기의 낭만적인 궁정시에서는 <아와레>라고 했다.

새들이 초록빛 숲 그늘에 깃들이듯

사랑은 온유한 마음속에 깃들인다.

이치로 보면

사랑 이전에 온유한 마음이 없었고

온유한 마음 이전에 사랑도 없었다.

태양이 솟을 때 빛도 발할지니

태양에 앞서 빛은 있을 수 없다.

불길 속이 가장 뜨겁듯

사랑은 부드러움 속에서만 뜨겁게 타오른다.

여신(모든 여성에게 현현되는)과의 만남은 사랑의 은혜(자비, 즉 운명에의 사랑)를 얻기 위해 영웅이 맞는 마지막 재능의 시험 단계다. 이 사랑의 은혜는 바로 우리 삶이 누리는 영원성의 그릇과 같은 것이다.

 

P160

우리는 이 일반적인 유형과의 비교에서 우리 자신의 입장을 밝혀내야 하고 이것을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는 제약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데 필요한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 도깨비란 대체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도깨비들이란, 자기 인간 성의 미해결 수수께끼가 투영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개인이 자기 삶을 파악하는 징후인 것이다.

 

P161

왕비를 차지했을 때 오이디포스가 맛보았던 순진한 기쁨이, 그 왕비의 정체를 알고부터는 심한 정신적 고뇌로 바뀐다. 햄릿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아버지의 도덕적 이미지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햄릿과 마찬가지로 오이디포스도 이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에 등을 돌리고, 그 근친 상간의 악몽을 주는 사치스럽고, 교정 불가능한 어머니의 세계보다 훨씬 어두운 왕국을 향하는 모험가로 변한다. 삶의 배후에 있는 삶을 찾아나서는 모험가는 그녀의 유혹을 물리치고, 현실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에테르 속으로 날아들어가야 한다.

 

P162

오이디포스 햄릿의 부정적 흥분 상태가 영혼을 유혹하고 있는 동안은 세계, 육체, 그리고 특히 여성은 더 이상 승리의 상징이 아닌 패배의 상징 노릇을 한다. 금욕적, 청교도적,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윤리 체제는 즉시 극단적인 모든 신화 이미지로 변용된다. 이렇게 되면 영웅은 육욕의 여신과 더 이상 순진한 평화에 안주할 수 없게 된다. 여신이, 이 시점에 이르러 죄악의 여황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P162

자기의 시체 같은 육신을 조금이라도 의식하면 그는 이제 순수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생, , 사뿐만 아니라 자기 적들로부터도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을 순수한 존재, 선의 정수, 부동의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순간, 그는 자유로워진다……, 원래 타성적이고 추악한 존재인 이 육체의 모든 제약을 떨쳐버리라! 육체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 한번 속에서 토한 것을(그대 육체를 토해내듯) 다시 생각하면 혐오감만 더해지느니

 

P164

약속의 땅으로 갈 때 거쳐야 하는 광야에는 불길 같은 비사가 득시글거린다. 그러나 하느님이 보우하사, 아직까지 우리 앞길을 막고 우리 기를 완전히 꺾을 수 있는 놈은 없었다. 천국에 이르는 길에는 사자의 소굴과 표범의 산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끔찍한 마귀떼도 있다……. 우리는, 마귀의 무대이며 마귀의 목표이기도 한 이 땅, 시온을 향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마귀가 도둑 무리와 은거하고 있는 이 땅의 초라한 나그네다.

 

P168

죄인을 화살에서, 홍수에서, 불길에서 지켜주는 <하느님의 의지>는 전통적인 기독교 용어에 따르면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의 <은혜>인 심정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성령의 위대한 권능>이다. 대부분의 신화에서 자비와 은혜의 이미지는 정의와 분노로 표현된다. 이렇게 해서 이 정의와 분노 사이에 균형이 생기고, 인간은 파멸을 겪는 대신 어려움을 근근히 이겨나간다. 시바는, 신도 앞에서 우주적 파멸의 춤을 추면서도 손으로는 <두려워 말라>는 시늉을 한다.

 

P170

아버지의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피해자의 에고가 투영된 것이다. 즉 지난날 존재했던 예민한 유아기의 장면이 전면으로 투사됨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교육적으로 백해무익한 이러한 우상 숭배에 집착한다는 것은 당사자를 죄의식에 빠지게 하고, 잠재적인 성인의 정신을 아버지,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세상에 대한 온전하고 현실적인 견해로부터 당사자를 봉쇄하게 된다. <화해 atonement>, <하나되기 at-one-ment>란 스스로 만들어낸 두 마리의 괴물((초자아)으로 보이는 용과 죄악(억압된 이드))으로 보이는 용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자면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이게 예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사자는 아버지가 자비로우며, 이 자비를 믿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믿음의 중심은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신의 족쇄 바깥으로 이동하고, 믿음의 중심이 이동하면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사라진다.

 

P171

영웅이, 조력자인 여성에게서 희망과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다. 여성의 마법 (꽃가루라는 호부, 중재의 능력) 덕분에 영웅은, 자아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하는 아버지의 무서운 입문 의식 경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영웅은, 아버지의 끔찍한 얼굴을 믿을 수 없으며 그 믿음을 다른 곳에다 기울인다(즉 지주녀, 혹은 성모). 지원을 보장받은 영웅은 위기를 견디어 나가고, 결국에 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투영하고 있지만 사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P173

갖가지 시련을 다 치른 자를 집안으로 용납하는 아버지 입장이 얼마나 어려우며, 얼마나 주의를 요하는가는, 그리스의 유명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파에톤의 불행한 행적이 잘 그려내 보이고 있다.

 

P177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모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확인시켜 준다.

 

P178

입문에 대한 전통적 인식은, 부모의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관련성을 철저하게 바로잡아주면서 그가 살아갈 삶의 기술과 의무와 특권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수렴하고 있다. 비법 전수자(아버지 혹은 아버지를 대신하는 사람), 유아기의 부적당한 카텍시스 cathexes, 리비도가 특수한 사람, 물건, 또는 관념을 향하여 집중 발현되는 현상)로부터 놓여난 입문자에게만 의식의 상장을 베풀게 되어 있다. 이런 입문자라야 자기 강화라는 무의식적(혹은 의식적,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동기나 개인적인 선호나 혹은 증오 때문에 정당하고 비개인적인 힘을 오용할 가능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입문의 영광을 입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다. 그는 끊임없이 삶의 싸움판에 나서야 하고 입문의 사제, 안내자, 태양을 향한 문 노릇을 해야 한다. 요컨대, 선악에 대한 유아기 환상을 떨치고, 희망과 공포에서 놓여나 평화롭게 존재의 계시를 이해하고 우주 법칙을 엄숙하게 경험하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입문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P185

죽음을 당했다 부활한 디오뉘소스의 비문이기도 한 이 <디튀람보스>라는 말을, 그리스인들은 <두 문을 지난 사람>, 즉 재생의 무서운 관문을 통과한 사람을 뜻하는 말로 이해했다. 그리고 우리는 신(식물의 재생, 달의 재생, 태양의 재생, 영혼의 재생과 관련되어 있고, 새해의 신이 부활하는 계절에 섬김을 받던)을 찬양하는 주신의 송가와 어둡고 피비린내 나는 의식의 고전적인 비극의 제의적 시작을 상징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P186

입문의 권능을 비추는 이들 불사의 이미지에 합류한다. 이 땅에 살기 시작한 이래로 인간은 이러한 신성한 절차를 통하여 현상계에 대한 공포를 이기고 불사의 존재를 향한 초월의 희망을 획득할 수 있었다.

 

P191

이러한 사실은, 태양의 문을 통해 우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은혜는, 다른 존재를 징벌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벼락의 에너지와 동일함을 뜻한다. 불멸의 존재가 내뿜는, 망상을 쫓는 빛은, 창조하는 빛과 동일하다는 뜻이다. 자연계의 부수적인 양극성으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즉 이글거리는 태양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폭풍을 일으키기도 하고, 한 쌍의 대립적인 원소인 불과 물의 배후 에너지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멋지게 각색이 된 페루 판 만유의 신인 비라코차의 특징 가운데서도 가장 독특하고 감동적인 대목은, 비라코차 고유의 것인 저 눈물이다. 생수(生水)는 신의 눈물이다. 여기에서 <모든 생명은 슬프다>는 비관적인 어느 수도승의 통찰은, <과연 생명>이라고 찬탄하는 아버지의 낙관적인 확신 속으로 수렴된다. 자기 손이 창조한 생명의 고뇌를 익히 자각하고 혹심한 고통, 머리를 터뜨리는 듯한 미망의 불길, 자기가 창조한 자기 참해적이고, 쾌락적이고, 분노에 떨고 있는 우주를 생생하게 의식하는 이 신은 삶이 삶을 점화시키는 행위를 승인한다. 정액의 사출을 보류하는 것은 멸종을 초래할 뿐이다. 그러나 이를 사출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세계를 창조하기 위함이다. 시간의 본질은 유동하며, 한 순간 존재하던 것의 흐름이다. 그리고 생명의 본질은 시간이다. 신의 자비, 시간이라는 양식에 대한 그의 애정을 통해, 이 데미우르고스(조물주)적 인간 중의 인간은 저 고해로 몸을 내맡긴다. 그러나 자기의 행위를 완전히 자각하고 있는 경우, 그가 사출하는 정액은 곧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다.

 

P192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곳을 뚫고(그가 속한 세계와 함께)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영웅은 영혼의 문을 열어 공포를 극복하고, 이 광대무변하고 무자비한 우주의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을 존재의 존엄성 속에서 완전하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영웅은 자기 몸에 박힌 가시(약점)를 통해 삶을 초월하여, 한 순간이나마 그 근원을 투시한다. 그는 여기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와 자기가 화해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는다.

 

P194

욥기, 전지전능한 야훼에 의해 완전하게 부서져, 끝까지 부서진 형태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에게는, 야훼의 계시가 자기 영혼을 만족시켜 주는 것처럼 보인다. 욥은, 끔찍한 불가마 안에서 견디는 용기와 전지전능한 신의 성격에 대한 일반적 개념 앞에서 결코 파괴나 굴복당하지 않음으로써, 친구들을 만족시키는 것 이상의 위대한 계시에도 맞설 수 있음을 증명한 영웅이었다. 우리는 그가 한 말을, 그저 두려움에 떠는 자가 한 말로만 해석할 수가 없다. 그의 말은 자기 합리화의 한 방편으로 <예언된> 것을 능가하는 그 뭔가를 <목격한> 사람의 말이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P196

부터 자신처럼, 이 신과 같은 존재는 인간적인 영웅이 마지막 무지의 공포를 초월하고 획득하는 신적인 상태 divine state의 한 본보기다. <의식의 외피가 벗겨져 나가, 모든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고 변화의 경계를 넘어서게 된> 상태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 있는 해탈의 상태이며, 영웅들이 됨으로써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상태다. <만물에는 불성이 있으니>, (같은 말을 달리 하자면) <일체의 존재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P198

관음은, 범인과 현자에게 두루 신성한 존재다. 왜냐하면 관음이 세운 맹세에는, 세상을 구제하고 세상을 버티는 심오한 직관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간(결코 끝나지 않는)이 끝나는 순간까지 앞서서 잔잔한 영원의 강으로 뛰어들겠다는 각오로 열반의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었다는 것은, 겁과 찰나의 구별에 대한 자각을 표상한다. 합리적인 마음에 의해 작가된 이 구별은, 한 쌍의 대립물을 초월한 마음에 대한 완전한 지식 안에서 용해되어 버린다. 이때 체득되는 것은, 찰나와 영원이, 같은 경험에 대한 두 가지 측면들, 즉 동일의 비이원적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 가지 층면들이라는 사실이다. 즉 영원의 보석이 탄생과 죽음의 연화 속에 들어 있다는, <옴 마니 밧메 훔>인 것이다.

 

P199

<찬양할지라, 거룩하신 이께서 첫 사람을 지어내실 때, 그를 양성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여성을 다른 형태로 후퇴시켰다는 사실은 완전성에서 이원성으로의 타락을 상징한다. 이어서 선악의 이원성이 나타내고, 하느님이 걸으시던 낙원에서의 추방과 낙원의 울타리가 세워졌다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낙원은 <대립적인 것이 공존> 하는 곳이었는데, 이제 인간은 이 낙원의 울타리에 의해 하느님에 대한 환상과 하느님 형상에 대한 회상으로부터 단절되었다.

 

P200

즉 영원성이 시간성으로 발전하고, 하나가 둘에 이어 다수로 분열하며, 둘이 재결합으로 새 생명의 세대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우주 발생적 순화 cosmosgonic cycle의 시작에 해당하는데, 영웅의 모험이 막바지에 도달하여 낙원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신의 형상은 다시 나타나고, 지혜는 다시 원상으로 회복된다.

 

P203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하례 다음해에, 완전한 남성이 되고자 하는 입문자는 두 번째의 제의적 수술을 받는다. 이 두번째 수술은 절개 수술이다. (성기의 밑부분을 요도 속까지 절개하여 흉터를 만드는 것이다). 이 흉터는 <페니스 자궁 pennies womb>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남성의 질을 상징한다. 영웅은 의식을 통하여 남성 이상의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다.

 

P205

종족 및 인종적 토템과, 공격적인 집단 행위를 겨냥한 제의는 사랑으로 증오를 정복하는 심리적 문제의 부분적인 해결책만을 나타낸다. 여기에서는 부분적으로밖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에고는 이러한 토템과 제식으로 소멸되지 않는다. 오히려 강화된다. 무리의 구성원들은 자기 자신의 문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헌신할 길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는 사잉에 세계의 나머지 부분(그러니까 인류가 사는 세계의 대부분), 그 구성원들의 동정과 보호와는 상관없는 세계로 밀려난다. 왜냐하면 나머지 세계는 그들이 믿는 신의 보호권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이어서 사랑과 증오의 두 원리가 서로 헤어지는 극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인류의 역사에는 이러한 예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 마음을 정화하는 대신 세계를 정화하고 싶어진다. 성도의 율법은 이제 구성원의 집단(종족, 교회, 국가, 계층)에만 적용되고, 이윽고, 재수가 없어서 이웃이 된 할례받지 않는 자, 야만인, 이교도, 토인, 혹은 이방인에 대한 성전의 기치가 오른다(양심에 거리끼기는커녕 경건하게 예배라도 드리는 기분으로 기치를 올리는 것이다).

 

P208

세계 종교(우주적 사랑의 교리)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현대인은 마땅히 다른 위대한 (그리고 훨씬 오래된) 우주적 친교 universal communion로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근원적인 말씀이 평화, 모든 존재에 대한 평화를 지향하는 부처의 우주적 친교에 관심해야 하는 것이다.

 

P210

무한한 사랑이며, 전능한 보살인 관세음이 지각 있는 모든 존재를 포용하고, 굽어보고, 또 그 존재 안에 거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마음 안에는 평화가 있다. 오래 써서 부서져 버린 벌레의 섬약한 날개도 그는 굽어 본다. 그는 날개의 온전성과 붕괴 자체이기도 하다. 희미한 미망의 그물 안에서 자기를 고문하고, 자기를 속이고, 그 그물에 엉김으로써 부단히 일어나는 인간의 번뇌, 해탈의 비밀이 제 속에 있는데도 이를 깨닫지도, 제 것으로 만들지도 못해 좌절하는 인간의 번뇌, 그는 그것도 굽어본다. 그리고 그는 그것 자체이기도 하다. 중생보다 나은 천사, 중생보다 못한 야차와 불행한 사자들, 이들 모두가 보살의 보석 손에서 나오는 빛살에 끌려 보살에게로 간다. 그리고 그들이 보살이고, 보살이 그들이다.

 

P210

은하계 건너 은하계, 우주의 세계 건너 세계, 별의별 존재의 세계(은하수를 경계로 한 지금의 이 우주뿐만 아니라 공간 끝까지 뻗어 있는)에서 무한한 공의 바다를 헤치고 생명을 얻었다가 거품처럼 사라지는, 무량 겹으로 묶이고 족쇄에 채인 의식의 중심, 시간과 시간, 수많은 생명, 때리고, 죽이고, 미워하고, 승리 이상의 평화를 바라며 더 자신의 팽팽한 고리 속에 갇힌 채 고통 받는 군상. 이 모두가 만상을 한눈에 보고, 공의 본질을 본질로 삼고, <대자대비로 굽어 보시는 주>의 자식이며, 무한히 계속되는 무상의 허상이며, 긴 꿈의 세계다. 그러나 이분의 이름은 <내면에서 보이는 주 The Lord Who is Seen Within>이기도 하다.

 

P211

우리는 모두 보살 이미지의 그림자다. 우리 내부의 고통은 바로 저 신적인 존재다. 우리와 저 보호자인 아버지는 한몸이다. 이것은 구원의 통찰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우리 보호자인 아버지다. 그러니 이 무지하고, 유한하고, 자위적이고, 고통받는 육신이 다른 육신()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에도 그 적 또한 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도깨비는 우리 기를 꺾지만, 유능한 후보자인 영웅은 <사나이답게> 입문한다. 보라, 그 도깨비가 바로 아버지였다. 우리는 그의 안에 있고, 그는 우리 안에 있다.

 

P211

우리의 보호자인 사랑하는 어머니는 우리를 저 위대한 아버지 뱀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준 필멸의, 현실적인 육체는 그의 무서운 힘 안으로 빨려 들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새 생명, 새로운 탄생, 새로운 존재의 지식이 (따라서 우리는 이 몸만으로 사는 게 아니고, 보살처럼 모든 몸, 세상의 모든 육신으로 산다) 우리에게 주어졌다. 저 아버지가 바로 어머니, 즉 재생의 자궁이었던 것이다.

 

P211

양성적인 신의 요체가 바로 이것이다. 양성적 신은, 입문 의식이라는 주제의 궁극적 요체다. 우리는 어머니 품에서 끌려나와 조각조각으로 촌단된 다음 세계를 적멸시키는 도깨비의 몸 안으로 동화된다. 이 도깨비에게 있어서 고귀한 모든 형상과 존재는 오직 제물일 뿐이다. 그러나 이어서 우리는 기적적으로 재생한다. 이때의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아닌, 그 이상의 존재다. 신이 종족적, 인종적, 국가적, 혹은 분파적 원형이라면 우리는 그 신에 의해 사역당하는 전사들이다. 그러나 신이 우주 자체의 주인이라면, 우리는 전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존재, 즉 모든 인간이 한 형제임을 깨달은 존재다. 어느 경우든 유아기의 부모 상과 선악에 대한 관념이 억압받는 것은 마찬가지다. 재생한 우리에겐 욕망도 공포도 없다. 우리 자체가 곧 욕망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모든 신들, 보살, 부처가 우리에게, 세상이라는 연화를 든 우리의 후광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P213

보살에 대한 첫 번째 경이로움은 바로 이것, 즉 보살이라는 존재의 양성구유적 성격이다. 이 보살과 만남으로써 분명히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 서로 만난다.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란 여신과의 만남, 그리고 아버지와의 화해다. 여신과의 만남의 과정에서, 입문자는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에서 이르고 있듯이 남성과 여성은 둘이 아니라 <쪼개진 완두의 두쪽>임을 깨닫고, 아버지와의 화해 과정에서는, 아버지는 성을 선행하며, <>라는 대명사는 말의 방편이고, 지도적 원리로 확립된 부자 관계의 신화는 말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살 신화에서 주목해야 할 두 번째 경이로움은, 보살이 삶과, 삶으로부터 해탈의 차이를 없애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보살이 열반을 단념한다는 사실로 상징되고 있다. 열반이란 말은,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겹의 불을 끈다>는 뜻이다.

 

P215

저 유명한 불교의 팔정도의 가르침에 따라 충동을 뿌리째 <꺼버리는> 방법을 통해서 그 목적을 달성한다. 불교의 팔정도는, 이치를 올바르게 보는 정견, 정견으로 본 이치를 올바르게 생각하는 정사유, 진실한 지혜로 구업을 닦는 정어, 잘못된 행동이 없게 하는 정업, 정당한 법으로 살아가는 정명, 꾸준히 매진하는 정정진, 진실한 지혜로 정도를 생각하는 정념, 진실한 지혜로 선정에 드는 정정이다. 마지막 <미망과 욕망과 적의의 저멸>(즉 열반)과 더불어 마음은, 생각이 실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참된 경지에 들어간 마음은 안식을 얻는다. 상태는 육체가 사윌 때까지 계속된다.

 

P216

<형상은 빈 것이며, 빈 것은 즉 형상이다. 빈 것은 형상과 다르지 않고 형상은 비 것과 다르지 않다. 형상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빈 것이며, 빈 것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형상이다. 관념, 이름, 개념 그리고 지식 역시 마찬가지다.> 기존의 자기 확신, 자기 방어, 자기 중심적 에고의 미망을 억눌렀기 때문에, 그는 같은 적멸의 안팎을 안다. 그는 밖에서, 방대한 생각을 초월하는 공의 시각적인 측면을 본다. 에고, 형상, 지각, 언어, 개념, 지식에 대한 체험은 그 위에서 전개된다. 그는 제 악몽에 쫓기며 스스로 거에 질린 존재를 자비로이 여긴다. 그는 일어나 그들에게로 돌아와 에고를 초월한 중심으로서 그들과 함께 거한다. 에고를 초월한 그를 통하여 <>은 자체를 현현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위대한 <대자대비로운 행위>다 왜냐하면 이 행위로 인해 중생은 자신의 욕망과 적의와 미망이라는 세 겹의 불을 끄고, 이 세상이 바로 열반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모든 이의 자유를 위해 <선물의 물결>을 쏟아낸다. 이러한 속세의 삶이 곧 열반이 겨냥하는 바다. 이 양자는 털끝만큼도 다를 바 없다.

 

P217

삶에서 자유로워진 사람 jivan mukta, 욕심이 없고 대자 대비하고 현명한 살마이 요가로 자아를 통일하고 만사 평등하게 보면 일체 만유 속에서 자아를 보고 자아 속에서 일체 만유를 본다….. 절대의 마음으로 만유 안에 있는 나를 우러러 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속의 삶이 어떠하든 신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P222

<나무, 바위, , , 이 모든 것은 살아 있다. 이러한 무정물은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없을 때, 문득 그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무정물들이다.>

 

P222

보살 신화의 세 번째 경이로움은, 첫 번째 경이로움(양성적인 형상)이 두 번째 경이로움(찰나와 영원의 동질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신적인 차원의 언어로 일컬을 때 시간의 세계란 곧 위대한 어머니의 자궁이다. 아버지에 의해 끼쳐진 생명은 그 안에서 어머니의 어둠과 아버지의 빛으로 합성된다.

 

P223

이것이 바로 부처와 보살이 각기 그들이 가진 여성적 측면으로 통합되어 있는 티베트의 이미지가 주는 의미다. 이 이미지는 많은 기독교 비평자들에겐 망측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던 듯하다. 이러한 명상의 촉매를 보는 전통적인 시각 중의 한 시각에 따르면, 여성적 형상, 즉 티메트 어의 < yum>은 찰나로, , < yab>은 영원으로 보아야 한다. 이 양자의 결합은 이 세계를 창출한다. 이 안에서는 만물이 찰나적인 동시에 영원하며, 만물이 스스로를 아는 남성과 여성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다. 입문자는 명상을 통해 자기 내부에 있는 이 형상들 중의 형상 yab-yum애 대한 기억속으로 끌려든다. 어쩌면 남성상은 입문의 원리와 방법의 상징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경우 여성상은 입문 의식의 목적이 된다. 그러나 이 입문 의식의 목적은 열반(영원)이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 양자가 번갈아 찰나와 영원으로 마음 속에 그려져야 한다. 말하자면 이 양자는 같은 것이고, 각자가 그들이며, 이원적인 형상 yab yum으로 보이는 것은 환상 때문이지만 이것이 도한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P226

샘은 세계의 배꼽이고, 불타는 물은 파괴할 수 없는 존재의 본질이며, 돌고 있는 침대는 세계의 축이다. 만상이 잠드는 성은, 꿈속에서 의식이 도달하는 궁극의 심연이다. 꿈은 개인의 삶이 미분화 에너지 속으로 해소되는 지점이다. 해소되어 버리면 곧 죽음이다. 불이 꺼진다는 것 역시 죽음을 상징한다.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 음식은 끊임없이 생명을 부여하고 형체를 만드는 우주적 근원의 권능을 상징한다.

 

P227

유아의 초기 발전 단계에서는, 세월의 흐름과 무관한 상태의 <신화적인 징후>가 관찰되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이러한 징후는, 어머니의 품을 떠날 즈음 아이를 괴롭히는, 자기 육체가 파괴당할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대한 반작용과 끊임없는 저항으로 나타난다.

 

P228

<주술사의 첫째 신조는 환상 중에 감정을 정호하고(나의 배누가 이미 파괴당했다), 이어 이에 대한 반응을 형성하는 (이제 내 안에는 썩을 만한 것도, 배설물도 없고 오직 썩지 않는 수정만 있을 뿐이다) 것이다. 주술사의 두 번째 신조는 이를 투사하는 것이다. 너의 몸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사람들 몸 속에 병원체를 쏘아넣은 다른 마법사라는 것이다. 세 번째 신조는 복원이다. 나는 사람들의 내부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고 복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온, 귀중한 육체적 내용물의 원초적 요소가 이 치료 행위에 도입된다. 즉 빨아내거나, 문지름으로써 환자로부터 무엇인가를 끌어낸다는 것이다.> 불가괴성에 관련되는 또 하나의 이미지는 신령한 <생령 double>에 대한 민간의 관념에도 나타나 있다. 즉 외적인 영혼은 현재의 육신이 손상되더라도 시달림을 받지 않고,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안전하게 존재한다

 

P232

우리 모두가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는 유아기적 환상은, 불멸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신화와 동화와 교회의 가르침에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현상은 마음이 이러한 이미지와 더불어 안식을 찾는다는 뜻에서, 그리고 예부터 익히 알려져 있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의미에서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온통 경건하게 만들어버리는, 유치한 행복에 젖어 있는 무리와 진정으로 자유로운 무리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상징은 무너지고 초월당한다. 천국을 떠나면서 단체는 이렇게 쓰고 있다.

듣고 싶은 마음 간절하여 작은 쪽배에 있는 그대들이여. 노래를 부르며 저어가는 나의 배를 뒤따르라. 그리고 돌아서서 그대들의 물가를 굽어보라. 나를 잃으면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 바다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가지 마시라.

내가 지나는 물은 일찍이 아무도 건넌 바 없다.

미네르바가 나에게 영감을 주고, 아폴로는 내 길을 인도하며,

아홉 뮤즈는 내게 북두칠성을 일러준다.

 

이것이 바로 생각이 무용해지고, 이곳을 지나면 모든 느낌이 죽는 경지다.

 

P233

상상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말로 다할 길 없는 천복의 가르침은, 어린 시절에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옷으로 위장하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동화는 다분히 황당하다. 그리고 심리학에 대한 독서가 위험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P235

문학적이고 감상적인 신학의 분위기에서와는 달리, 익살은 철두철미 신화적인 것의 시금석이다. 우상으로서의 신들의 존재는 존재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연출하는 유쾌한 신화는 그들 수준의 마음과 정신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나 그 배후의 무에 이르게 한다. 이 무의 경지에서 보면 삼엄한 신학적 교리는 교육적인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신학적 교리의 기능은 무능한 지성을, 구체적인 사실과 사상의 덩어리로부터 비교적 순화된 공간으로 이행시킨다. 이 공간에서는, 궁극적인 은혜로 모든 존재 (천상적, 지상적, 혹은 악마적인 것까지)는 덧없고 주기적인, 단순한 행복과 불안의 유아적 꿈과 비슷한 상태로 변해 보인다.

 

P237

이렇게 해서 신들과 여신들은 원초적인 상태의 궁극적인 존재가 아닌, 불로불사 영약의 화신이나 그 수호자로 파악된다. 따라서,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영웅이 얻으려는 것도 그들 자체가 아니라 그 들의 영광, 말하자면 그들의 불로 불사적 존재를 가능케 하는 권능이다. 이 기적적인 에너지 본질만이 불멸적인 존재이며, 도처에서 이 에너지를 현현시키고 나누어주고 표상하는 신들의 이름과 형상은 가변적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제우스와 야훼와 궁극적인 부처의 벼락, 비라코챠의 비가 내리는 풍요의 은혜, 성별식 미사의 방울이 고지하는 덕목이며, 성자와 현자가 도달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의 광명이다. 그러나 신들은 지나치게 잔혹하고 지나치게 조심스러울 때가 있다. 이럴 경우 영웅은 그 불로불사의 영약을 손에 넣기 위해 속임수를 써야 한다. 프로메테우스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최고 신이라도 심술궂고, 생사 여탈권을 뒨 도깨비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신을 속이거나 죽이거나 이 신과 화해하는 영웅은 구세주로 칭송을 받는 것이다.

 

P248

육체의 불로불사를 구하는 것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눈동자를 크게 해서, 육체와 그 종자인 개성이 더 이상 시야를 가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로불사는 현실로서 체험된다. <그것이 여기에 있다. 그것이 여기에 있다.>의 경지인 것이다. 만물은 나아가고, 일어나고, 되돌아온다. 나무는 꽃을 피우나 오직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다. 뿌리로 되돌아감은 정일을 찾음이다. 정일을 찾음은 천명으로 합일함이다. 천명에 합일함은 영원에 합일함이다. 영원을 아는 것은 깨달음이요, 영원을 깨닫지 못하면 혼란과 마가 인다.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아니다.

<천상적인 것이 도다. 도는 영원이다. 여기에 이르면 육체가 썩는 것도 두려워할 바 아니다.>

 

P249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차례로 용을 쓰러뜨리고, 관문과 관문을 차례로 지남에 따라, 영웅이 고도로 갈망하는 신의 모습은 점점 커져, 이윽고 우주 전체에 가득 차게 된다. 영웅의 마음은 마침내 우주의 벽을 깨뜨리고 모든 형상(모든 상징, 모든 신성의 경험을 초월하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변의 공에 대한 자각이다.

 

P250

<눈이, 말이, 마음이 하릴없다.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한다. 이를 남에게 가르칠 방도도 알지 못한다. 이는 이미 알려진 바와도 같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것까지 초월해 있다.> 이것은 최고의, 그리고 궁극적인 시련이다. 영웅의 시련일 뿐만 아니라 신 자신의 시련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성자와 성부가 동시에 적멸에 든다. 이는 인격과 가면이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격이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어는 환자의 삶의 에너지로부터 끌어낸 허구적인 꿈이 그러하듯이 지상적인 것이든 천상적인 것이든 이 세상의 모든 형체는 불가해한 신비, 즉 원자를 조립하고 별들의 궤도를 통제하는 권능을 가진 우주적 힘을 반영한다.

 

P251

보리수 아래에서 얻었던 부처의 승리는 이러한 행위의 동양적인 일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마음의 칼로 우주의 거품을 찌르자 거품은 흩어져 무화됐다. 대륙, 하늘, 전통 종교 신앙의 지옥 같은 자연적 경험 세계는 그 신들과 마귀의 개념과 함께 일거에 폭발했다. 그러나 기적 중의 기적은 폭발한 뒤에도 재생되고 부활하여 참 존재의 광휘로 영광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실재로 부활한 하늘의 신들은 그들을 꿰뚫고 그들의 생명이자 근원인 무에 이르렀던 영웅 인간을 목청을 드높여 찬양했다.

 

P253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원질신화의 규준인 완전한 순환 체계는 영웅에게 지혜의 시문, 황금 양털, 혹은 잠자는 미녀를 인간의 왕국으로 데려오는 또 한번의 수고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이 은혜가 사회, 국가, 그 전체,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시키는 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P256

내 주님이신 신이시여, 인간으로 살고 업을 쌓을 때 저는 닥치는 대로 살고 닥치는 대로 업을 쌓았습니다. 인간이 나고 죽기를 여러 번 할 동안 저는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어디에서 쉬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저 뛰고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근심을 기쁨으로 잘못 알았습니다. 사막 위로 나타나는 신기루를 시원한 샘물로 알았습니다. 제가 기쁨을 잡으면 손 안에 남는 것은 고통뿐이었습니다. 왕의 권능, 지상의 소유, 부와 권력, 벗과 자식들, 아내와 추종자들 이 모든 존재는 제 오감을 흘렸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것이 되는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은 그 본성을 벗고 불길이 되었습니다.

이윽고 저는 제 길을 찾아 신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분들은 저를 동아리로 맞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 끝납니까? 안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신들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모두, 주님이신 신이시여, 당신의 손으로 꾸미신 계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피조물들이 태어나고, 고통을 받고, 나이를 먹고, 죽는 헛된 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살아  있을 동안 그들은 죽음의 주재자와 맞서다 갖가지 정도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 모두가 당신에게서 온 것입니다.

내 주님이신 신이시녀, 저 역시 당신의 희롱에 말리어 이 세상의 제물이 되고, 허물의 미로를 방황하고 자아 의식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렸습니다. 이제 원하옵건대, 당신의 실제(끝없고 자비로운)를 피난처로 삼아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P257

승리한 영웅이 여신이나 신의 축복을 획득하고, 그가 속한 사회를 구원할 불사약을 가지고 원상 복귀할 대목이 되면, 영웅 모험의 이 최종 단계에서 초자연적인 후원자에 의한 지원이 따르는 범이다. 그러나 만일 전리품이 그 수호자의 의지에 반한 상태에서 영웅의 손에 들어갔거나, 영웅의 귀환 의사가 신이나 악마의 찬성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이 신화 주기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격렬한, 때로는 익살스러운 추격전이 벌어진다. 마법의 장애물이 신비스러운 것이면 신비스러운 것일수록, 영웅의 도피가 교묘하면 교묘할수록 이 탈출과 저지의 양상은 그만큼 복잡해진다.

 

P261

영웅의 도망에서 흔히 사용되는 것은 뒤에 남은 다른 사물들이 영웅 대신 대답하여 추격을 지연시키는 수법이다.

 

P262

영웅이 도망치는 대목에서 또 하나 자주 등장하는 방법은, 도망치는 영웅이 끊임없이 장애물을 던져 추격을 지연시키는 수법이다.

 

P263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다. 동양에서는, 엄격한 지도와 감독 없이 심리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에서의 요가 수련은 몹시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수련자의 명상은 그 발전 단계에 따라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수련자의 상상력은 데바타 (devata: 수련자의 수준에 알맞은 신성)에 의해 각급 단계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 정신을 수련한 다음에야 수련자에게는 홀로 초월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 온다.

 

P269

이 극동의 전설이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신화, 그리고 세계 전역에서 채집되는 수백 가지의 비유적 전설들은, 영웅에게 실패의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무서운 관문 건너 쪽에서 애인과 함께 귀환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두 세계의 상호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소한 실수, 즉 인간의 약점이라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증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소한 일만 피하면,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P269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귀환의 문턱에 도사리고 있는 위기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P269

영웅은 외부의 지원을 빌려 초자연적 모험에서 귀환하는 수가 있다. 말하자면 이 세계가 합세하여 그를 도울 수도 있는 것이다. 외부 세계가 이렇게 하는 것은, 지칠대로 지친 영웅에게, 힘겹게 도달한 지복의 땅을 포기하는 것은 쉬운 노릇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옛말마따타 <세상을 버린 자가 이 땅에 다시 돌아오려 하겠는가? ‘거기에 남아 있으려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지, 그가 살아 있는 한, 생명은 그를 부른다. 그가 속해 있던 모듬살이는 그 모들살이를 떠나 있는 자를 질투하여, 영웅이 안주하고 있는 집 문을 두드리기 마련이다. 만일 영웅 (무추쿤다 같은)이 거부하면, 문을 두드린 무리는 영웅의 거부를 배신으로 여기고 반격하는 것도 사양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웅이, 어떤 장애물 때문에 문을 두드리는 무리들의 요구에 응하지 못하는 경우(이 경우에도 죽음과 유사한, 절대적인 상태의 행복을 누리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문을 두드린 자들은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고, 영웅은 이들의 행동을 통하여 원래 속해 있던 모듬살이로 귀환한다.

 

P276

거울과 칼과 나무의 의미는 분명하다. 여신의 모습을 반영시켜, 비현현의 은거 상태에서 밖으로 이끌어낸 거울은 세계, 곧 반영된 형상의 장을 상징한다. 거울을 통하여 신은 자신의 영광을 보고 기뻐하는데 이 기쁨은 현현 혹은 <창조>의 행위를 유발시키는 자극제가 된다. 칼은 벼락에 해당한다. 나무는, 열매를 맺고 소원을 성취시킨다는 의미에서 <세계의 축>이다.

 

P280

서로 멀리 떨어진 문화권에서 채집한 이 세 가지 예화(라벤, 아마데라스, 그리고 아난나)의 외부로부터의 구조 상황을 충분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세 예화에서 초자연적인 힘은 주인공의 시련에 끝까지 동참하다 마지막 단계에 나타난다. 영웅은 의식을 잃고 무의식의 상태에서 원래 그가 살던 세계로 되살아난다. <불가사의한 도망>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웅은 자아를 지키는 대신 자아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조력자의 은혜로 영웅은 자아를 되찾는다.

 

P281

두 세계, 곧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삶과 죽음, 밤과 낮처럼 서로 다르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영웅은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 암흑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암흑의 세계에서 영웅은 그 모험을 완성할 수도 있고, 거기에 갇힘으로써 우리들로부터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엄청난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P281

일상 생황에서 중요하게 보이던 두 세계의 가치나 차이는, 지금까지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하던 <타자> <자아>를 동화시키는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P281

그러나 정상 상태로 깨어 있는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심층에서 솟아난 지혜와, 속세에서 유용한 분별 사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한다. 그래서 미덕에서 득실 계산이 파생하고, 그 결과 인간의 존재는 타락한다. 순교는 성자나 하는 것이지만, 범인에게도 그들 나름대로 중요한 것은 있는 법인 바, 이런 것들을 들의 백합처럼 멋대로 자라게 버려둘 수는 없다.

 

P282

인류가 약삭빠르면서도 우매했던 몇 천 년 세월을 통해 수십만 번 제대로 가르쳐지기도 했고, 그릇 가르쳐지기도 했던 것을 어떻게 다시 가르친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영웅의 궁극적인 숙제다. 빛이 있는 세상의 언어로, 언어가 무용한 저 암흑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2차원의 평면을 3차원의 형상을 나타낼 것이며, 다차원의 의미를 3차원의 이미지로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한 쌍의 대립물에 대한 정의의 시도가 무의미한데 어떻게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말로 이를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오로지 감각의 배타적 증거에만 급급하는 일반인에게 어떻게 저 만유의 근원인 공을 설명한단 말인가?

 

P282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첫 번째 문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이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왜 그런 세상으로 되돌아와야 할까? 헛된 정열에 소진된 범상한 남자와 여자에게 왜 초월적인 은혜의 체험을 그럴싸한 것, 혹은 흥미로운 것으로 보이게 해야 하는 것일까? 밤에 꿈으로 꿀 때엔 중요하게 보이다가도 밝은 대낮에 생각하면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시인이나 예언자는 맨정신으로, 전날 밤에 했던 기도를 후회한다. 사회를 악마에게 넘겨버리고, 저 자신은 천상의 바위 굴에서 문을 닫고 은거하는 편이 쉽기는 쉽다. 그러나 어느 정신적 산과의가 <시메나와>를 쳐놓고 퇴로를 차단한다 해도, 시간 속에서 영원을 표상하고, 시간 속에서 그 영원을 지각하는 작업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P288

천국에서의 1년이 지상에서의 백 년에 해당한다는 등식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백 년이라는 주기는 전체성을 의미한다. 360도라는 원의 중심각도 전체성을 뜻한다. 힌두교의 푸라나 Purana에 따르면, 신들의 1년은 인간의 360년에 해당한다. 올륌포스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의 역사는 순환 주기의 조화로운 형상을 드러내 보이면서 영겁토록 흘러갈 뿐이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세계는 변화와 죽음으로 보이고, 신들의 눈으로 보면 불면하는 형상, 곧 끝없는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직접적인 지상의 고통과 기쁨을 무릅쓰고 어떻게 이 같은 우주적 관점이 유지되겠느냐는 것이다. 속세의 지식이라는 과일 맛은 정신의 집중점을 영검의 세계에서 말초적 위기의 순간으로 옮겨놓는다. 이렇게 되면 균형은 무너지고 정신은 비트적거리며 이윽고 영웅은 타락하고 만다. 영웅과 땅의 직접적인 접촉을 절연 수단으로서의 백마는, 초자연적인 권능을 가진 자가 설정하는 금기의 생생한 실례라고 할 수 있다.

 

P289

<신성성, 주술력, 터부, 혹은 신성한 인물, 또는 터부가 되어 있는 인물에게 충만하다고 믿어지는 신비스러운 힘의 성질에 대해, 고대 철학자들은, 그 명칭이 무엇이든 간에 라이든 병에 전기가 충만해 있듯이 신성한 인물에 충만해 있는 물질적 실체 혹은 액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라이든 병의 전기가 양도체와 접촉하는 경우에 방전하는 것처럼, 신성한 인물 속에 충만한 이 신성성, 주술력도, 훌륭한 양도체와 다름없는 대지와의 접촉으로 방전, 고갈되어 버린다고 믿는 것이다.

 

P291

많은 민요는, 반지를 파기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노래한다. 그리고 신화(가령 오비디우스가 변신 이야기라는 개론서에 모아둔 수많은 신화 같은)는 고도로 집적된 전력의 중심과, 주위 세계의 비교적 낮은 전압의 전력장 사이의 허술하던 절연체가 갑자기 무력해질 때 생기는 충격적인 변화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상기시키고 있다.

 

P291

카마르 알 자만은 그 중에서도 가장 다행스러운 경우에 속한다. 그는 깨어 있는 채로 갚은 잠이라는 천복의 은혜를 체험했고, 믿어지지 않는 모험이라는 튼튼한 액막이를 지니고 빛의 세계로 귀환했기 때문에 일상의 엄연한 환멸에 직면하고도 자기 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P294

덧없는 만남과 헤어짐,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사랑의 고통이 아닌가. 한 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때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위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힘이다.

 

P294

카마르 알 자만의 기나긴 이야기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운명이 일상의 삶으로 구체화되는 완만하면서도 놀라운 역사다. 그러나 이 운명이 모든 이에게 다 구체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체험하고, 반지를 얻어 다시 현실로 귀환한 영웅에게만 가능하다.

 

P299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상징 체계이지 역사성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립 반 윙클, 카마르 알 자만,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여부에 대해 관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다 더구나 이런 이야기는 세계 도처(수많은 영웅과 함께)에 깔려 있기 때문에, 보편적 테마인 이러저러한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는지 여부는 부수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서 역사성을 강조하면 혼란이 생길 뿐이다. 즉 암시적 메시지를 어지럽게 할 뿐인 것이다.

 

P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성격, 혹은 일련의 성격(3원적이든, 2원적이든, 1원적이든, 다신론적이든, 유일신론적이든, 단신론적이든, 회화적이든, 언어적이든, 문서로 기록된 사실이든, 묵시적 환상이든)을 최종적인 의미로 읽거나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P305

하느님이, 인간의 생각이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신다는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셈이다.

 

P305

아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요, 알지 못하는 것은 아는 것이다.

 

P305

의미를 실어 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로 오해하면 헛된 잉크뿐만 아니라 헛된 피까지 흘리게 된다.

 

P306

오직 믿는 마음이면 나를 알 수 있고 참답게 볼 수 있으며 내게 들어와 하나가 될 수 있느니라. 항상 나를 위해 일하고 오직 나만의 목적으로 알고, 진실로 나를 정성으로 믿으며,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악의를 품지 않는 자, 그런 자가 내게 오느니라

 

P306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제 의미는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종교적 관행이 좇고 있는 바다.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at-one-ment>, <자기 화해 self-atone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법 Law은 그 안에서 거침새가 없다.

이러한 무애적 존재의 궁극적인 상태를 표상하는 것이야말로 신화적 존재의 대종을 이룬다. 특히 동양의 사회적 신화적 문맥에서 그러하다. 은자의 숲에 은거하는 현자와 운수행각의 탁발승은 동양의 삶과 전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P307

<때로는 바보로, 때로는 현자로, 때로는 왕관에 미친 자로, 때로는 방랑자로, 때로는 예언자처럼 부동하는 존재로, 때로는 자비로운 얼굴로, 때로는 귀인으로, 때로는 폐덕자로, 때로는 무명인으로…… 깨달은 자는 이런 상태에서도 지복의 극락을 산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P307

영웅이 지난 전장은, 모든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의 희생으로 삶을 영위하는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 자기 삶을 영위하려면 죄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참으로 구역질나는 것이다. 이를 깨달은 영웅은 햄릿이나 아르쥬나처럼, 불가피한 죄악의 거부를 시도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세상의 예외적인 존재로서 자기 입장을 합리화하고 허위적인 자기 이미지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말하자면, 자기는 선한 자를 대표하고 있다고 간주하고, 죄악을 불가피한 것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부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합리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인간과 우주에 대한 본질에 이르기까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P308

<사람이 마치 계절에 따라 헌 옷을 벗고 새 것을 입는 것처럼,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그 실재도 낡은 몸뚱이를 버리고 새 것으로 옮겨가신다. 칼이라고 해서 이를 벨 수 없고, 불이라고 해서 이를 태울 수 없으며, 물이라고 해서 이를 적실 수 없고, 바람이라고 해서 이를 시들게 할 수 없다. 벨 수 없는 것이 이것이요, 태울 수 없으며, 물이라고 해서 이를 적실 수 없고, 바람이라고 해서 이를 시들게 할 수 없다. 벨 수 없는 것이 이것이요, 태울 수 없고, 적실 수 없고, 시들게 할 수 없는 것이 이것이니, 이것은 모든 존재의 심연에 두루 퍼져 불변이요, 부동이다. 따라서, 실재는 언제나 하나이니라>

영원의 원리 안에서 집착하지 않는 이승 세계의 인간이 만일 자기 행위의 결과에 초연해하고, 이를 살아 있는 신의 무릎에다 올려놓을 수 있다면, 그는 이 제물에 의해 죽음의 고해에서 풀려날 수 있다.

<그러므로 애착을 떠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 너의 모든 일을 나에게 맡기고, 네 생각을 가장 높은 자아에 모으고, 원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되, 흐트러지지 말고 나가 싸우라.>

 

P313

이 시인의 노래 중 대부분은 자기에게 내재하는 불멸의 존재에 다 바친 것이다. 자기의 개인적인 내력을 밝힌 것은 마지막 한 연에 지나지 않는다. 듣는 자들은 자기 내부에 있는 불멸의 존재에게 눈을 돌리고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P313

영웅은 생성된 것의 투사가 아니라, 생성되는 것의 투사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는 시간 속의 엄연한 불변성을, 존재의 영속성으로 오해하지 않는다. 변화가 영속성을 파괴할 때도, 다음 순간 (혹은 <다른 사물>)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P319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왕성하게 살이 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이러한 오류는 성경이나, 많은 기독교 의식에 대해서도 자행되어 왔다.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만이 빈사 상태에 빠진 성화는 그 영원히 인간적인 의미를 다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P322

정말 잘 들어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

 

P322

정말 잘 들어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P325

동화와 신화의 패턴 및 논리가 꿈의 패턴 및 논리와 일치한다는 발견과 더불어 오랫동안 의혹의 대상이 되어왔던 고대적 인간의 기괴한 환상은 극적으로 현대인 의식의 표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P327

따라서 우리에게 전승된 신화학적 표상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이 무의식의 징후(사실은 모든 인간의 생각과 행동)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적 원리의 통제되고 의도된 진술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정시적 원리는 인간의 육체의 형태 및 신경 구조처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류에 유전된 것이다. 간단하게 공식화한 이 보편적인 교리는, 이 세계의 가시적인 모든 구성물(사물과 존재)은 편재하는 힘에 의한 결과라고 가르친다. 즉 이 힘은 모든 구성물의 생성 원리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 현현해 있을 동안 그들을 지탱하고, 그들을 채우며, 궁극적으로 그들이 돌아갈 귀소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에서는 에너지라고 부르고, 멜라네시아인들은 <마나 mana>, 수우족 인디언들은 <와콘다 wakonda>, 힌두교도들은 <샤크티>, 기독교도인들은 <하느님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신분석가들은, 심성에 나타나는 이 존재를 <리비도 libido>라고 부른다. 이 존재의 우주적 현현이 바로 우주 자체의 구조며 우주의 변화인 것이다.

분화되지 않았으면서도, 도처에서 개체화된 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은, 바로 이를 인식해야 하는 기관에 의해 좌절당한다. 인간이 지닌 감각 능력의 형식과 인간이 지닌 생각의 범주는 이 권능의 현현 그 자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마음의 기능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다채롭고 유동적이고 변화 무쌍하고 복잡한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제의와 신화의 기능은, 유추작용을 통해 이를 볼 수 있게 하고 이를 촉진시키는 기능이다. 마음과 감각이 감지할 수 있는 형상과 관념은 초월적인 진리와 개방성을 암시하도록 제시되고 조정되다. 이어서 명상의 조건이 완비되면 개인은 홀로 남는다. 신화는 부수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현상계 저쪽 세계(, 혹은 범주를 초월한 존재)로 들어가 적멸에 드는 것이다. 따라서 신, 혹은 신들은 편의적인 방편, 즉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을 잘 나타내고 또 그것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는 하나, 신 혹은 신들 자체는 어디까지나 편이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과 형식을 통하여 이 세계의 얼개를 설명하는 성질이 부여되어 있을 뿐, 이들은 결국 세계를 설명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깨우면,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331

구원은 초의식으로의 귀환과, 이에 따른 세상의 소멸에 있다. 이것은 우주 발생적 순환, 세계 현현의 신화적 이미지, 그리고 비현현 상태로의 회귀를 나타내는 중요한 테마 및 공식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탄생, , 죽음은 무의식으로의 하강 및 회귀로 볼 수 있다. 영웅은, 살아 있을 동안에, 창조 과정 중에는 지각되지 않는 초의식의 요구를 알고 이를 대리하는 자다. 영웅의 모험은, 그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나타낸다. 이 순간은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의 살아 있는 죽음의 어두운 벽 너머의 빛의 길을 발견하고, 이 길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P332

물론 현대의 종교학도들은 이러한 상징을, 다른 인간의 무지의 소치로 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의 징후, 즉 형이상학에서 심리학에, 혹은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에 이르는 축도로 볼 수 도 있다. 전통적인 방법에 따르면, 상징에 대한 명상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러한 상징이 인간의 운명, 인간의 희망, 인간의 믿음, 인간의 어두운 신비의 메타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P333

신화에서도 우주 질서의 연속성은 근원으로부터의 통제된 힘의 흐름이 있어야 가능하다. 신이란, 이 흐름을 통제하는 법칙의 상징적 구현체다. 신들은 세계의 새벽과 더불어 태어나 석양과 더불어 소멸된다. 신들은, 밤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의미로 영원한 것은 아니다.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우주 발생적 시간의 회전이 영원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우주 발생적 순환은 우주 자체의 반복, 즉 끝없는 세계로 표상된다. 각 순환의 주기 안에는 소멸의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삶이 잠과 깨어 있음의 주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P337

동양 철학의 기본 개념은 이러한 회화적 양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화가 원래 철학적 공식의 설명인지, 아니면 철학이 신화로부터의 추출물인지 지금으로서는 말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신화가 지금부터 아득히 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며, 이 점은 철학도 마찬가지다. 신화를 창조하고 이를 보배로이 가꾸어 전승시킨 옛 현인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고대 상징의 비밀을 분석 및 투시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인 철학사의 관념은 잘못된 가정 위에 세워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가령 추상적 형이상학적 사상은, 그런 사상이 역사상 현존하는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데서 시작된다는 그릇된 가정이 그렇다.

 

P338

우주 발생적 순화에 의해 설명되는 철학적 공식이란, 존재의 세 단계를 통한 의식의 순환을 말한다. 그 첫 단계는 깨어나는 체험의 단계, 즉 태양의 조명을 받고, 만물에 공통된 외계 우주의 험난하고 총체적인 사실들을 인식하는 단계다. 두 번째 단계는 꿈 체험의 단계, 즉 꿈을 꾸는 당사자와는 본질상 동일한 개인적 내부 세계의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를 인식하는 단계다. 세 번째 단계는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 꿈을 꾸지 않는 지복의 단계다. 첫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삶에 관한 교훈적인 체험과 만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소화되어 꿈을 꾸는 당사자의 내적인 힘에 동화되며, 세 번째 단계에서는, 내부적 통제자가 들어앉은 방 안, 모든 것의 근원이자 끝인 상태, <마음속에 있는 공간> 안에서 모든 것을 즐기고 의식할 수 있게 된다.

 

P339

우주 발생적 순환은, 비현현의 숙면 영역에서 비롯, 꿈을 통하여 깨어나 있는 대낮, 그리고 다시 꿈을 통하여 시간을 초월한 어둠에 이르는 보편적 의식의 통로로 이해되어야 한다. 살아 있는 존재의 일상적 실제 체험이나 살아 있는 우주의 광대한 양상은 같은 것이다. 잠의 심연 속에서는 에너지가 재충전되지만 일을 하다보면 이 에너지는 고갈된다. 우주의 생명도 고갈되면 재생되어야 한다.

 

P339

보이지 않고, 말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추정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고, 그릴 수도 없다. 의식 상태에 있는 만물이 공유하는, 자기 인식의 본질. 현상계는 이 안에서 소멸한다. 이는 평화요, 행복이요, <둘이 아닌 것>이다.

 

P339

신화는 이 순환 속에 머문다. 그러나 신화는 이 순환을 침묵에 둘러싸인 형태, 순환과 침묵이 서로 삼투하는 형태로 드러낸다. 신화는, 존재하는 원자 안팎에 충만해 있는 침묵의 계시록이다. 신화는, 고도로 세련된 형상화 작업을 통하여 마음과 가슴을, 모든 존재를 채우고 둘러싸고 있는 궁극적 신비로 향하게 하는 풍향계다.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 보여도 신화 체계는 마음을, 가시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비현현의 세계로 향하게 한다.

 

P342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창조 신화는, 모든 피조물은 그들의 모태가 된 불멸의 존재와 닿아 있음을 상기시키는 파멸 의식과 함께 고루 퍼져 있다. 모든 피조물은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으나 필경은 극점에 이르러 파멸하고 그리고 회귀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신화는 비극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참 존재를, 파멸하는 형상이 아닌 다시 태어나는 불멸의 존재라는 측면에서 보면 신화 체계는 그리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오리려 신화 체계의 문법을 숙지하고 나면 비극적이란 표현은 천만부당하게 느껴진다. 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존재는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꿈으로 존재한다.

꿈 속에서 그런 것처럼 신화에서는 이미지가 최상의 경지에서 우스꽝스러운 상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넘나든다. 신화 속에서 마음은 정상적인 가치 체계에 안주하지 못하고 뜻밖의 각성 체험을 통하여 끊임없이 모욕을 당하거나 충격을 받는다. 마음이 정상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 마음이 좋아하는 이미지나 전통적인 이미지에 안주하려 할 때 신화 체계는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이미지가 메시지 자체라고 옹호하면 안 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눈이 미치니 못하고, 말이 무용하고, 마음이나 신앙이 좇지 못하는, 저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던져진 그림자로 파악되어야 한다. 평범한 꿈이 그렇듯, 이러한 신화도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이다.

 

P353

물리학자들이, 태양의 쇠잔과 우주의 극단적인 고갈과 더불어 온다고 주장하는 세계의 파멸은, 탕가로아의 방화가 남기 상처로 예고되고 있다. 결국 세계의 창조자-파괴자에 의한 세계 파괴의 효과는 점진적으로 늘어나 마침내 모든 것이 지복의 바다에 귀속하게 되는, 우주 발생주기의 제2단계에 돌입한다는 것이다.

 

P356

이 세상에 현현하기 전의 각 영혼과 정신은 한 덩어리로 똬리진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땅에 내리면서 두 부분은 서로 나뉘어 서로 다른 몸에 살게 된다. 결혼할 때가 되면, 찬양할진저, 영혼과 정신을 아시는 거룩하신 이께서는 이를 예전대로 묶어주시니, 이 둘은 다시 하나의 몸, 하나의 영혼이 되어, 한 인간의 오른편과 왼편이 된다…… 그러나 이 결합은 남자의 행위, 그가 세상을 사는 방법의 영향을 받는다. 그가 정결하고, 그의 행동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으면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짝이었던 영혼의 여성적인 부분과 제대로 짝하게 된다.

 

P357

남녀간의 사랑의 신비에 따르면, 애정의 궁극적인 경험은 곧 이원성이라는 환상의 배후에 <둘은 곧 하나>라는 등식의 깨달음이 있다. 이 자각은, 우주의 만상(인간, 동물, 식물, 심지어는 광물까지도)은 하나라는 자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애정의 체험은 우주적 체험으로 확산되고, 이 자각에 이르게 한 애인은 창조의 거울로 확대된다. 이러한 것을 체험한 남성이나 여성은 쇼펜하우어의 이른바 <도처에 널린 아름다움에 대한 앎>을 손에 넣은 셈이다. 바야흐로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고, 원하는 모습으로 둔갑해서 이 세상을 한유하며>, <오 놀랍도다, 놀랍도다>로 시작되는 우주적 합일의 노래를 부르는 경지인 것이다.

 

P365

우주 발생적 순환의 초기에 <신은 관여하지 않으나>, <신은 창조자이자 수호자이며 파괴자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여럿으로 나뉘는 이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운명은 <우연히> 그러나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근원적인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존재하고, 폭발하고, 해소되는 형식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덧없는 피조물들이 경험하는 것은 전쟁 구호와 고통의 비명이다. 신화는 이 고뇌(시련)를 부정하지 않는다. 신화는 안으로, 뒤로, 그 주변으로 본질적인 평화(천상의 장미)를 거느리고 있다.

 

P372

이 어리석음 뒤로는 단일한 원인(제 자신의 살을 찢는 둔한 자)이 세계의 이원적 결과(선과 악)의 틀에 그 자리를 양보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야기란, 외양만큼은 순진하지 않다. 더구나 상어라는 플라톤적 원형의 형이상학적 선행 존재 pre-existence는 마지막 대화의 기묘한 논리에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모든 신화에서 계승되어 내려오는 사고 방식이다. 우주 역시 악의 대리자인 반항자를, 광대의 역할로 조형해 낸다. 악마(탐욕스러운 돌머리이자 예리하고 영리한 사기꾼인)는 언제나 이런 광대다. 이러한 광대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는 승리하나, 그들 자체나 그들의 업적은 무대가 초월적인 차원으로 옮겨지면 간단히 사라지고 만다. 그들은 그림자를 본질로 오해한다. 그들은 그림자 영역에서의 필연적인 불완전성을 상징하는데, 우리가 이곳에 남아 있는 이상 장막은 걷힐 수 없다.

 

P374

다소 추상적으로 이해하자면, 그녀는 세계의 경계를 이루는 틀, 즉 우주적 알의 껍질인 <공간, 시간, 그리고 인과>다 조금 더 추상적으로 말하면, 그녀는 자가번식하는 절대자를 움직여 창조의 행위를 유발하는 유혹자인 것이다.

창조자의 부성적 측면보다는 모성적 측면을 강조하는 신화 체계에서 이 원초적 여성은 태초의 세계를 지배하면서, 남성에게 맡겨졌을 법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 원초적 여성은, 배우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이기 때문에 처녀다.

 

P380

우주적 여신은, 여러 가지 가면을 쓴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창조의 결과란 다양하고 복잡한 데다, 창조된 세계의 관점에서 경험할 때면 상호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어머니는 동시에 죽음의 어머니다. 이 어머니는 기근과 질병이라는 추악한 마귀의 가면을 쓴다.

 

P388

월인의 아내들과 딸들은, 월인 자신의 운명의 화신이며 참전물이다. 세계를 창조하는 의지의 진화와 함께 여신인 어머니의 미덕과 외모는 변형되었다. 사대적 (四大的) 자궁에서 태어난 첫 아내, 두 번째 아내는 전인간적 (全人間的), 초인간적이었다. 그러나 우주 발생의 순환이 진행되고, 원초적인 형태에서 인류사적 형태로 성장 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우주적으로 탄생한 여왕들은 물러가고, 무대는 여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조물주는 자기 사회 속에서 형이상학적 구닥다리 존재로 타락했다. 결국 그가 단순한 인간인데 넌더리를 내고 윤택했던 아내에게로 돌아가고 싶어하자. 세계는 그의 충격적인 반응 대문에 한 차례 몸살을 앓았지만 곧 여기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다. 주도권은 아이들의 사회로 넘어갔다. 상징적이고, 몽상적이었던 부모의 모습은 원초의 심연으로 함몰했다. 풍요한 대지에는 오직 인간만 남았다. 순환은 계속 진행되었다.

 

P389

이제 문제는 인간이 사는 세계다. 열왕의 실제적인 심판과, 천상적 계시의 주사외인 사제들의 가르침에 주눅이 든 나머지 의식의 장은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인간의 이야기라는 대서사시는 목적이 서로 모순되는 분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인간의 시야도 이제는 좁아져 오직 가시적이고, 손에 잡히는 존재의 표피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심연을 투시할 전망은 이제 사라졌다. 인간 고뇌의 의미 심장한 형상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다. 사회는 오류와 재난 속으로 빠져든다. <소자아> <대자아>의 재판석을 강탈했다.

 

P393

부처는 하얀 우윳빛 코끼리 형상으로, 하늘에서 어머니의 자궁으로 하강했다. <뱀을 누빈 치마를 입은 여성>인 아즈텍의 코아틀리쿠 Coatlicue, 신에 의해, 깃털덩어리 형상으로 하강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의 각 장에 우글거리는, 신들이 창조한 요정들은 아예 가면 무도회를 방불케 한다. 유피테르(제우스)는 황소, 거위, 그리고 황금의 비로 변신하기도 한다. 우연히 삼킨 잎사귀 한 장, 호도 한 알, 아니면 바람 한 점이, 만반의 준비가 끝난 자궁 안에서는 생명으로 잉태할 수 있다. 잉태하는 능력은 도처에 널리 있다. 종작없는 생각, 혹은 시대의 숙명이 구세주인 영웅이나 세계를 파멸시키는 악마를 잉태케 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P396

이제 우리는 두 단계를 거쳐왔다. 즉 첫 째는, 비실재적 실재의 직접적인 유출에서 신화적 시대의 유동적이나 시간을 초월한 존재에 이르는 단계, 둘 째는, 이 실재적 실재에서 인류 역사의 영역에 이르는 단계다. 유출은 이제 그 극점에 이르렀고 의식의 장은 이제 좁아질 대로 좁아졌다. 전에는 사상의 실체가 보였지만 이제는 그 부수 효과만 인류의 눈, 작고 현실적인 동공의 초점 앞에 모일 뿐이다. 따라서, 이제 우주 발생적 순환은, 보이지 않게 된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갖춘 영웅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세계의 숙명은 바로 이 영웅들을 통해 실현된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추방당한 뒤로 창세기가 그러했듯이, 창조 신화가 전설에 자리를 물려주어야 할 대목이 바로 이 대목이다. 형이상학은 선사학에 자리를 물린다. 이 선사학은, 처음에는 모호하고 불분명하나 차츰 그 형태가 자세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웅은 점차 우화적인 성격을 일탈하다가 다양한 지방적 전승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마침내 전설은, 기록되는 시대라는 빛의 세례를 받게 된다.

 

P398

황제가 특별한 세계 창조, 세계 수호의 권능을 가지고 있던 과거를 말하고 있다. 이들의 권능은, 정상적인 인간의 육체가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훨씬 앞질렀다. 영웅적인 업적이나, 인류 문화의 기초 작업은 다 이런 시대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러한 업적은 원형적 인간 및 초인간에 의해서만은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가 도래한다. 말하자면, 정열의 절제, 예술의 폭발적인 발달, 경제 구조의 태동, 문화적인 기관의 대두를 통한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월우의 화신이다, 운명의 팔괘라는 초월적 지혜가 아니라, 자신의 필요와 희망에 따라 행동하는 완전한 인간 정신이었다. 따라서, 우주 발생적 주기는, 다가오는 시대의 인군의 전형이 될 인간의 형상을 한 황제의 손으로 넘어갔다.

 

P400

초기 우두사신의 문화 영웅은 자연계의 창조 능력을 타고 났다. 그의 형상이 초자연적인 것은 바라 이런 능력 대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적인 영웅은, 후세 인간과의 관계를 재정리하기 위해 <하강>해야 한다.

 

P400

이러한 관점은, 영웅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지원진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이러한 관점은, 영웅의 전기와 그 고유한 성격과의 관계에 문제를 제기한다. 가령 예수는, 엄격한 고행과 명상으로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강한 신이라고 믿어질 수도 있다. 전자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와 같은 초월적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 그 행적을 글자 그대로 흉내내는 수가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 예수라는 영웅은 글자 그대로 본이 되는 전형이라기보다는 묵상해야 할 하나의 상징이다.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P401

영웅의 행적은, 형이상학적 비의의 상징이 된다. 말하자면 이 대목에서 영웅 자신의 행적이 재발견되고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P402

실제 역사적 인물의 행위가 영웅적인 것이었다면, 이 전설을 만드는 사람은 그를 위해 영웅의 모험과 그 심도가 유사한 정도의 모험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모험이 바로 초자연적인 영역으로의 여행인데 이 여행이 독자에 의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라는 밤바다로의 여행,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의 삶으로 구체화하는 인간의 운명의 측면, 혹은 영역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P409

문제의 숙명적인 아기는 기나긴 암흑의 기간을 견디어야 했다. 이 기간은 극히 위험하고, 장애물이 많은 상황이며, 치욕을 당하는 기간이다. 그는 자기 내부로 깊이, 혹은 미지의 세계인 외부로 던져졌다. 어느 경우든 그를 당혹케 하는 것은 미지의 암흑이다. 이곳은 의외의 존재, 자비로운 동시에 심술궂은 존재의 영역이다. 천사가 나타나기도 하고, 아기를 도와주는 동물, 어부, 사냥꾼, 쪼그랑 할머니, 혹은 농부가 나타나기도 한다. 동물들 차이에서 자라거나, 혹은 지그프리트처럼 생명의 나무 뿌리를 파먹는 땅귀신 사이에서 자라거나, 혹 작은 방에서 혼자 자라면서 (이런 이야기는 도처에 널려 있다.) 이 어린 세상의 신참자는, 헤아리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권능이 있음을 배운다.

 

P410

신화는, 그러한 체험을 견디고, 거기에서 살아나오는 데는 범상하지 않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이런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대개가 힘이 세고, 영리하고, 또 지혜롭니다.

 

P412

그제서야 신은, 자시 상대가 근원적인 존재의 화신임을 깨달았다. 다음날 크리슈나가 에전처럼 소를 몰고 나가 풀을 먹게 하면서 피리를 불자, 하늘의 왕은 아이라바타라는 흰 코끼를 타고 내려가, 조용히 웃고 있는 청년의 발등에다 얼굴을 대고 자비를 구했다.

 

P413

유아기 이야기는 영웅의 귀한 혹은 그의 정체가 드러남으로 그 결론에 이른다. 즉 오랫동안 묻혀 지내던 영웅의 암흑기가 끝나고 그의 진정한 성격이 노출되는 것이다. 여기에도 상당ㅇ한 위기가 따른다. 영웅의 권능이, 인간 사회에서 소외, 축출을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양상은 토막나거나 사람들 기억에서 해소되어 버리고, 재난이 몰려온다. 그러나 재난이 지나가면 새로운 권능의 창조적 진가가 드러나고 세계는 다시 영광의 새 형상을 얻는다. 이러한 십자가 위에서의 고난과 부활의 주제는, 영웅 자신의 몸, 혹은 그가 속한 세계가 맞는 효과로 나타날 수 있다.

 

P419

영웅이 탄생하는 곳, 혹은 영웅이 도피 또는 추방당했다가 보통 인간들 사이에서 성인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오는, 머나먼 땅은 세계의 중심, 혹은 세계의 배꼽이다. 물결이 물밑의 바닥에서 번져나오 듯, 우주의 형상도 이 근원에서 둥글게 퍼져나간다.

 

P422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이다. 영웅은 암흑에서 일어서지만, 적은 힘이 세고 권능 또한 엄청나다. 적은 자기 지위의 권위를 자신을 위해 행사하기 때문에 적이며, 용이며, 폭군이다. <과거>를 옹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옹호>한다는 이유에서 그가 바로 사슬이다.

폭군은 자만한다. 그리고 자만은 바로 폭군이 파멸하는 씨앗이다. 폭군은, 자기 힘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만한다. 따라서 그는 그림자를 본질로 오인하는 광대역을 맡고 있는 셈이다. 그 시대 본연의 모습의 근원인 암흑에서 다시 나타난 신화적 영웅은 폭군을 파멸로 몰아넣는 비밀을 알고 있다. 단추 하나 누르는 듯한, 참으로 간단한 몸짓으로 그는 이 무서운 형상을 지워버린다. 영웅의 행적은 순간의 결정화에 대한 끊임없는 파괴 행위다. 이야기는 순환한다. 신화의 초점은 발전하는 단계에 모인다. 변모, 유동성, 일정하지 않은 무게는, 살아 있는 신의 특징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형상은 부서지고, 토막나고, 이윽고 흩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요컨대 도깨비-폭군은 불길한 사상의 옹호자이며, 영웅은 창조적인 삶의 옹호자다.

 

P427

고대의 전사인 왕은 괴물의 퇴치를 자기 임무로 생각했다. 용과 대적한다는 빛나는 영웅의 신조는, 모든 군사 행동에 대한 자기 합리화의  한 방편이 되어주었다.

 

P428

적과 싸워서 장악하는 주도권, 괴물과 싸워서 획득하는 자유, 폭군의 족쇄에서 풀려난 에너지는 여성으로 상징된다. 이 여성은, 수 많은 용을 죽인 영웅의 애인이며, 질투심이 강한 아버지로부터 유괴되어 온 신부며, 부정한 애인으로부터 구출된 처녀다. <영웅과 영웅의 상대역인 여성은 곧 하나>이기 때문에, 처녀는 영웅 자신의 <다른 한쪽>이다. 영웅이 세계의 군주라면, 처녀는 세계이며, 영웅이 전사라면 처녀는 명예다. 처녀는, 영웅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 영웅 자신의 운명의 이미지다. 그러나 영웅이 자기 운명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사상에 현혹될 때, 영웅은 아무리 노력해도 장애물을 극복할 수 없다.

 

P431

이 다채로운 쿠훌린의 모험에서, 가장 웅변적이고 가장 극적인 것은, 바퀴와 사과가 구르면서 영웅에게 내어주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길이다. 이것은 운명적인 기적의 상징이며 교훈으로 해독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니체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구르는 바퀴>인 사람) 앞으로는 어려움이 비켜나고 뜻밖의 탄탄대로가 나타나는 법이다.

 

P432

최고의 영웅이란 우주 발생적 순환의 원동력을 추진시키는 영웅이 아니라, 눈을 다시 뜨고서 오고 가며 기쁨과 고뇌가 교차되는 세계의 파노라마를 통해 하나의 실재가 다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깨치는 영웅이다. 이러한 영웅이 되려면 보다 깊은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심장한 개념 작용의 결과로 나타난다. 첫 번째 영웅의 상징이 명검이라면 두 번째 영웅의 상징은, 권위의 홀장, 혹은 율법서다. 첫 번째 영웅의 특징적인 모험이 신부(신부는 곧 삶이다)를 얻는 것이라면, 두 번째 영웅의 특징적 모험은 아버지를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이 아버지는 곧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다. 두 번째 모험의 유형은 종교적인 성인전의 패턴과 일치 한다. 아무리 단순한 민화라도 사생아가 어느 날 문득 자기 어머니에게, 내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면, 이 민화는 갑자기 의미 심장해진다. 이 질문은 인간과 불가시적인 존재의 문제를 건드린다. 이어서 우리에게는 익숙해진, 아들과 아버지의 화해하는 신화 모티프가 전개된다.

 

P434

영웅 모험의 목표가 미지의 아버지를 찾는 것일 때, 여기에 등장하는 기본적인 상징 체계는, 시험 및 정체 고백의 상징 체계다. 위의 경우에서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시험은 되풀이되는 같은 질문과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나타난다. 대합 아내의 이야기에서는, 아버지가 대나무 칼로 위협함으로써 아들을 시험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영웅의 모험에서 아버지의 시험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보아왔다.

 

P436

왕이니, 신하가 복종함은 당연하나 그 왕이 신의 예배에 소홀하면 그 집 안에는 적막이 깃들이는 법백성의 무례를 깨닫는 순간, 그는 두려움에 몸둘 바를 몰랐다. 하늘의 진노가 시작되었음을 알고.

 

P437

자기 치적의 은총을 초월적으며 근원적인 존재의 은혜로 돌리지 않고 황제는 마땅히 자기가 누릴 바를 누린다는 입체적인 환상을 품는다. 이런 자는 더 이상 두 세계의 중재자일 수 없다. 인간의 시각이 평형 상태의 인간적 측면으로 기울어질 때, 천상적 능력의 체험은 그것으로 끝난다. 한 사회를 관류하던 사상도 사라지고, 오직 힘만이 그 사회를 동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황제는 도깨비 같은 폭군(헤롯, 니므롯)이 되며, 세계는 이 손 안에서 구원되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P437

아버지의 집에서는 두 단계의 이니시에션이 구분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 아들은 사자가 되어 귀환하지만, 두 번째 단계에서는 <나와 아버지는 결국 하나>라는 통찰과 함께 귀환한다. 이 두 번째의 보다 높은 자각에 이른 영웅은 구세주, 한 차원 높은 의미에서의 이른바 지고한 존재의 화신이다. 그들의 신화는 우주적인 조화를 지향한다. 그들의 언어는, 권위의 홀장과 율법서의 영웅이 뱉어낸 어떤 말 이상의 권위를 갖는다.

 

P438

고귀한 존재의 화신은 그 실재로서 무섭고 잔인한 폭군의 주장을 반박해야 한다. 폭군은 제한된 인격의 그림자로써, 성총의 근원을 가로막아 왔다. 그러한 자아 의식에서 자유로워진, 고귀한 존재의 화신은, 율법의 직접적인 현현이다. 광대무변한 무대에서 신의 화신은 영웅의 생애를 실천한다. 다시 말해서 영웅의 과업을 수행하고 괴물을 퇴치하는 것이다. 영웅의 행위가 위대한 것은,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나 할 수 있으리라고 헤아리던 일을 현실적으로 바로 눈앞에서 해치우는 데 있다.

 

P440

모두들 슬퍼하지 말아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일 뿐입니다.”

 

P441

무섭고 잔인한 폭군은 그가 폐위시킨 예전의 세계 군주나 그를 제거할 영리한 영우뿐 아니라 아버지까지도 표상한다. 영웅이 변화를 가져오듯이, 무섭고 잔인한 폭군은 한 가지 편견에 고착된 인간을 표상한다. 시간의 순간순간이 이전의 순간순간의 족쇄에서 해방되듯이, 이 괴룡과 압제자는, 그 전세대, 즉 구세주를 맞던 그 이전 세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P441

이제 이렇게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 시험자, 무섭고 잔인한 왕)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양이 될 생명의 에너지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과업은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서도 성취될 수 있고, 그 의지를 거스르고도 성취될 수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아니 어쩌면 신이, 그에게 스스로 자식을 위한 제물이 되라는 의지를 심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역설적인 논리가 아니라 한 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법으로 한 것일 뿐이다. 실제로, 용이 살해자와 용 제관과 제물은, 뒤집어보면 결국 하나다. 이 하나인 세계에서는, 대립물의 양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과 거인이 끊임없이 싸우는 세계는 이쪽 세계인 것이다. 어쨌든 용(아버지)은 어디에든 있다. 소산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치 탈환으로 늘어만 간다. (아버지)은 우리 삶이 걸린, 죽음이다. <죽음은 하나인가, 여럿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그가 거기에 있는 한 그는 하나지만, 여기 자식들 안에 있을 때는 여럿이다.”

 

P442

어제의 영웅은, 오늘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내일의 폭군이 된다.

 

P443

즉 성자, 고행자, 출가자로서의 영웅이다.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고, 엄격하게 자아를 통제하고 소리와 빛과 맛 같은 색에 집착하지 않고, 애증을 버리고, 고독 안에서 살고, 소식하고, 말과 몸과 마음을 삼가고, 명상과 정신 집중에 전심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힘쓰고, 이기심과 권세, 자만심과 색욕, 분노와 편견을 떨치고, 마음 안에서 정일을 얻고,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사람, 이런 사람은 능히 불멸의 존재에 값하는 사람이라 일러 무방하다>

 

P444

삶의 너머에서 존재하는 이런 영웅은, 신화를 초월한 영웅들이기도 하다. 그런 영웅들은 이 삶의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다루려 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을 신화도 다룰 수 없다. 그들의 전설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하나, 경건한 자세와 그들의 전기가 전하는 교훈은 진부한 상투적 무구에서 더 나을 것이 없다. 그들은 형상의 영역을 떠나 고귀한 존재의 화신이 하강하는 곳, 보살이 머물렀던 곳, <거대한 얼굴>의 옆모습이 <현현하는> 영역으로 들어갔다. <신비에 싸여 있던> 옆얼굴이 드러나면, 신화는 부차적인 언어이며, 침묵이 궁극적인 언어가 된다. 정신이 신비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남는 것은 오직 침묵뿐이다.

 

P445

영웅의 전기 마지막 장은 영웅의 죽음, 혹은 (저승을 향한) 떠남의 장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전생애가 요약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죽음에 겁을 먹는다면 그 영웅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P456

축복받은 자는 첫 번째 무아에 이른다. 첫 번째 무아에서 일어나 그는 두 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두 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세 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세 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네 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네 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무한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한 의식에서 일어나 그는 무한 공간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한 공간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무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영역으로 들어간다.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지각과 감각의 휴식 상태에 이른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가 아누룻다 존자에게 말했다. “아누룻다 존자여, 세존께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아니오, 아난다 존자여, 세존께서는 아직 열반에 드신 것이 아닙니다. 이제 지각과 감각의 휴식 상태에 드시었습니다.

 

P458

놀랄 만한 권능을 가진 막강한 영웅(손가락으로 고바르단 산을 들어올릴 수 있고, 자기 몸을 우주의 엄청난 영광으로 채울 수도 있는)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다. 거울에 비추어볼 수 있는 육체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내재하는 왕으로서다. 크리슈나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모든 피조물의 가슴 안에 있는 실재다. 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이것은 바로 개인이 소멸되는 순간, 사자의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기도다. 즉 개인은, 생전에 자기 가슴에 반영되어 있던, 세계를 창조하는 신에 대한 근원적인 깨달음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P466

신들은 영혼이라는 존재 자체가 투사된 것이다. 이 영혼이 참 상태로 돌아갈 때 신들도 모두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명계의 대기를 마시고, 명계의 물을 지배하는 장>에서 영혼은 스스로를, 우주적 알의 수호자라고 선언한다.

 

P466

나는 어제이며, 오늘이며, 또 내일이다. 나에게는 다시 태어나는 능력이 있다. 나는 신들을 창조했고, 아멘테트 Amentet의 명계 및 천상의 피조물들에게 제사밥 sepulcharal meals을 먹여 주는, 비밀의 장막에 가려진 신적인 영혼이다. 나는 동쪽의 방향타이며, 두 개의 거룩한 얼굴의 소유자다. 이 얼굴들은 환히 빛나고 있다. 나는 되살아난 인간의 주이며, 암흑에서 현현한 주다. 내 존재의 틀은, 사자가 거하는 집이다. , 그대의 휴식처에 홰를 치고 있는 두 마리 매여! 그대들은 나의 말을 듣고 사자의 관을 은밀한 곳으로 안내하며, Re 를 인도하고, 나를 따라 천상에 있는 성역의 지성소로 들어간다. , 땅 한복판에 있는 성역의 주, 그가 바로 나고 내가 바로 그다. 그리고 프타는 수정으로 그 하늘을 가렸다.”

 

P468

십만 년이 지나면, 우주의 순환 주기는 다시 시작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가 되면 육감적인 쾌락에 빠진 천상의, 로카비유아스 Loka Byuas라는 신들은, 머리를 풀어 바람에 흩날리고, 손등으로 흐르는 누물을 닦으며, 빨갛게 물든 옷을 어지럽게 입은 채 세계를 방랑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보게들, 십만 년이 흐르면, 우주 순환 주기가 다시 시작된다네, 이 세계는 파멸에 들 것이고, 바다는 마를 것이네. 이 넓은 땅, 산들의 왕인 수메루 산이 불에 타, 브라마의 세계는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될 것이네, 그러니 여보게들, 선의를 이 땅에 넘치게 하고 연민과, 기쁨과, 평등이 여기에 넘치게 하소.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고 집안 어른들을 섬기소

 

P473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 알아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P478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 Durkheim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음,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P479

삶의 양태에서, 개인은 인간의 전체 이미지의 단편이며 일그러진 형상일 수밖에 없다. 개인은 남성으로서, 혹은 여성으로서 제약을 받고 있다. 주어진 수명의 한도 내에서 개인은 다시 유아로서, 청년으로서, 성인으로서, 노인으로서의 제약을 받는다. 더구나 살면서 맡는 역할상 개인은 다시 기술자, 상인, 하인, 혹은 도둑, 성직자, 지도자, 아내, 수녀, 혹은 매춘부로 전문화한다. 개인은 이 모두일 수가 없다. 따라서 개인의 전체성은, 개별적인 구성 인자로서가 아닌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개인은 한 구성 요소일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은 이 집단으로부터 삶의 기술, 사유의 바탕인 언어, 삶의 자양인 이상을 빚졌다. 그의 육체를 이루는 유전자도 그 사회의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개인이 실제든, 상상이나 느낌을 통해서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의 절연을 의미할 뿐이다. 출생, 세례, 결혼, 장례, 취임 등의 종족적인 제의는, 개인의 삶의 위기 및 행위를 표준적이고 비개인적 형식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제의는 개인의 정체를 그 자신에게 보여준다.

 

P480

이제 인간의 시야는 넓어졌다. 맡는 역할이 비록 하찮다고 하더라도 개인은 이 인간의, 아름다운 축제의 이미지(잠재적이긴 하나 필연적으로 그의 내부에 깃들여 있는 이미지)에서 자기 역할이 바로 자기의 본질이었음을 깨닫는다.

 

P480

입문 의식이나 취임식은 개인과 집단은 어쩔 수 없이 하나라는 교훈을 베푼다. 계절적인 축제는 인간의 지평을 넓힌다. 개인은 사회의 구성 요소(우주라는 거대한 집합체의 한 측면인, 종족이나 어떤 도시) 그리고 인간성 전체의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P480

그러나 진정으로 종교적인(순전한 주술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제의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피할 길 없는 운명에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동기는 계절적 축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P480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연의 계절에 합당한 노동을 권면한다. 의식은, 견디기 어려운 계절과 풍요의 계절을 함께 거느린 이 놀라운 한 해의 주기를 함께 찬미했고, 일 년의 주기는 인간 집단의 계속되는 삶의 순환을 표상한다. 이러한 계속성의 상징 체계는, 신화 체계적인 전승을 통해 지식을 전달하는 사회면 어느 곳에서든, 얼마든지 발견된다.

 

P481

그러나 다른 길도 있다. 즉 사회적인 의무와 대중적 제의와는 정반대로 향하는 다른 길이 있는 것이다. 의무의 길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에서 추방된 자는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추방은, 탐색 모험의 첫 단계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이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길은 자기 내부에서 탐색되고 또 발견되어야 한다. 성별, 연령별, 직업별 차이는, 우리 인간의 특질상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어느 단계에서 우리가 한동안 입고 있는 옷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부에 있는 인간의 이미지는 의상과 아무 상관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손을 미국인이며, 20세기인이며, 서양인이며, 기독교 문명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선한 사람일 수도 있고, 죄 많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지 못한다. 이러한 호칭은 단지 지리적인 우연, 생년월일이 다르고 수입이 다른 우연을 나타낼 뿐이다. 우리의 핵은 무엇일까? 우리라고 하는 존재의 기본적인 성격이란 어떤 것일까?

 

P482

이것이, 나르키소스가 호수를 내려다보는 단계이며, 부처가 보리수 아래 앉아 명상하는 단계다. 그러나 이 단계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필요한 단계이지 목적은 아닌 것이다. 목표는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즉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이 단계가 끝나면 입문자는 본질 자체처럼, 고삐에서 풀려나 세상을 떠돌게 된다. 뿐인가? 세계라는 것 역시 그 본질이다. 개인의 본질, 세계의 본질…… 이 둘은 하나다. 이때부터 은거, 은둔은 필요없다. 영웅이 어디를 떠돌든, 그가 무슨 짓을 하건 그는 자기의 본질적 실재에 머문다. 그에겐 세상을 보는, 완전성에 이른 눈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엔 분리 및 은둔이 있을 수 없다. 사회적 참여가 결국에는 개인의 내부에 있는 전체를 깨닫게 하듯이 추방으로 인한 유랑이 영웅을 전체에 내재하는 자아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 표적의 중심에 이르면, 이기주의나 이타주의의 문제는 사라진다. 개인은 율법 안에서 자기를 잃고, 우주의 전적인 의미와 동일하게 재생한 것이다. 세계는 그를 위해, 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신은 이렇게 말했다.

오 모하메드여, 네가 없었으면, 내 저 하늘도 만들지 않았으리라

 

P484

오늘날 집단 속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계도 그렇다. 모든 것은 개인에 귀착된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란 완전히 무의식적이다. 인간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어떤 동인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의 심성의,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의 교류 통로는 단절되고, 우리는 둘로 찢기고 말았다.

오늘날에 이루어져야 하는 영웅의 업적은, 갈리레오의 세기에 이루어졌던 업적이 아니다. 그때는 암흑 시대였지만 지금은 광명의 시대다. 그러나 빛이 있었던 곳이 지금은 어둠에 싸여 있다. 현대 영웅의 위업은 영혼이 균형을 이루고 있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의 불을 다시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P486

차라리 그것보다 필요한 것은 전체 사회 질서의 진화다. 그래야 세속적인 삶의 의무와 행위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실제로 내제하고 또 그만큼 효과적인, 보편적인 신인의 이미지에 생명력을 부여하여, 이를 의식화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P487

오늘날에는 이 모든 비의가 그 힘을 잃었다. 이 비의의 상징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심성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한다. 모든 존재가 섬기고, 인간 자신도 그 앞에서 무릎을 꿇어 마땅한 우주적 법칙이라는 관념도 고대 점성술에 나타난 초보적인 상징의 무대로 넘어간 지 오래며, 이제는 물리적인 용어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 서양 학문의, 하늘에서 땅으로의 하강 (17세기 천문학에서 19세기 생물학으로의),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 집중(20세기 문화 인류학과 심리학에서의), 인간의 경이라는 초점의 놀라운 이동로를 닦았다. 동물의 세계도 아니고, 식물의 세계도 아니고, 천체의 기적도 아닌, 이제는 오직 인간만이 결정적인 수수께끼다. 인간은 아득한 존재와 더불어 끝나야 하고, 이 아득한 존재를 통해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해야 하며, 이 사회의 이미지 전체가 개선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러나 <>가 아닌 <>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기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아 있는 불멸의, 놀라운 시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P488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은 모진 시련 (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의 역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융파 심리학의 입장 (인간은 무의식 속에다 고대적 경험의 잔존물인 집단 무의식을 공유하는데, 꿈의 구조물인 원형 패턴은 곧 고대의 잔존물인 신화 상징을 나타낸다는)을 원용하면서 다양한 영웅 전설을 통해 인간의 정신 운동을 규명하는 한편 현대 문명에 대해 하나의 재생 원리까지 제시하려는 야심적인 작품이다.

 

저자 켐벨은, 신화에 나오는 주요한 이야기를 예화로 이용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간적접으로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때로는 직접적인 설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하여 책의 목적을 구체화하고 있다. 또한, 옛이야기, 동화, 민간 전승, 역사적인 기록 등 영웅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채집하여 분류하고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영웅의 여정의 다양성과 일관된 패턴을 동시에 보여주는데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본 책은 원질 신화에 부분에서 신화의 구성에 대해 신화와 영웅과 신 그리고 영웅의 여정에 대해 소개하고 영웅의 여정 모델에 맞춰 제1부 영웅의 모험 과정을 출발, 입문, 귀환, 열쇠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2부에서는 신화에서의 영웅의 면모와 의미 및 그 장이 되는 다양한 공간과 의미들을 다시 설명하고 있다. 켐벨은 신화자체에 머물지 않고 이를 어떻게 현대에 살려내고 이를 통해 이 사회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에필로그로 신화와 사회를 정리하였다.

 

독자의 입장에서 많은 예화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접적으로 받아 들이는 작업이 좋았다. 어쩌면, ‘갤러리에서 그림을 보면서 이 그림은 무엇을 표현한 것입니다라고 설명을 듣는 기분이었다. , 약간의 모호성을 내포하고 있으면서 주관적인 이해를 더해 회화적으로 또는 포괄적으로 이해하도록 한 점이 매우 인상 깊은 책이었다. 힘들었던 면은 켐벨이 설명하는 내용 자체에 대한 이해의 시도가 어쩌면 신화 자체의 이해의 시도와 같이 무모한 것이지도 모르겠다. 읽어나가면서 이해하고자 멈춰서 열심히 사유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림을 감상한 듯 느낌을 갖고 계속 나아가야 할지 어려움이 있었다.

 

이 책은 한 번 읽어서 무엇인가를 알아내기는 어려운 것 같다. 내용이 우선 낯설고 신화라는 일상적이지 않은 주제이고 더 나아가 신화 자체를 분석하는 그리고 그 속에서 영웅의 본질과 여정을 풀어내는 책이므로 단박에 알아채기가 어렵다. 머리로 이해하는 문제보다 영웅이란 심성을 여정을 느끼고 이를 어떻게 생활에서 육화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많이 남는다. 켐벨이 에필로그에 남겼듯이 21세기는 20세기 보다 더욱더 개인화된 사회에서 살아간다. 집단의 문제는 사회라는 어떤 무형의 시스템으로 굳건히 구축되어 있고 나약한 개인 만이 그 안에서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외침으로 들려 다소 힘없는 외침이 될까 두렵다. 하지만 모든 것은 개인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모든 영웅의 여정은 개인의 각성과 그 결과를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는 가장 기본적인 여정을 매일의 생활에서 어떻게 실천해 나가야 하는가의 문제가 나의 숙제이다.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오늘날에는 이 모든 비의가 그 힘을 잃었다. 이 비의의 상징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심성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한다. 모든 존재가 섬기고, 인간 자신도 그 앞에서 무릎을 꿇어 마땅한 우주적 법칙이라는 관념도 고대 점성술에 나타난 초보적인 상징의 무대로 넘어간 지 오래며, 이제는 물리적인 용어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 서양 학문의, 하늘에서 땅으로의 하강 (17세기 천문학에서 19세기 생물학으로의),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 집중(20세기 문화 인류학과 심리학에서의), 인간의 경이라는 초점의 놀라운 이동로를 닦았다. 동물의 세계도 아니고, 식물의 세계도 아니고, 천체의 기적도 아닌, 이제는 오직 인간만이 결정적인 수수께끼다. 인간은 아득한 존재와 더불어 끝나야 하고, 이 아득한 존재를 통해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해야 하며, 이 사회의 이미지 전체가 개선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러나 <>가 아닌 <>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기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아 있는 불멸의, 놀라운 시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의 구성에 대해 신화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모든 영웅의 여정은 이미 많은 동화, 소설, 신화집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의 주제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패턴을 보여주고 의미를 드러내는 데는 본 책과 같이 구성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고 판단된다. 다만, 책을 저술 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는 방대한 자료에 대한 이해와 분류가 선행되어야 하고 이를 다시 엮어서 묶는 작업이 대단히 어려운 일로서 이 부분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싶다.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을 청소년 문고판으로 만들고 싶다. 중 고등학생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초등학교 때 동화책으로 대부분 접하게 된다. 하지만 그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나이가 이때가 아닌가 싶다. 초등학생 때는 환상이 어느 정도 있는 나이이므로 신화는 동화의 일부로 어떤 환상이야기 중의 하나 일뿐이다. 하지만 중 고등학생의 입장에서는 사회로 나가기 전에 사회를 미리 알 수 있는 그 뒷면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터전이 될 수 있는 것이 신화이야기라고 본다. 실제 많은 학생들이 기본적으로 신화를 많이 읽고 있다. 하지만 그 나이의 관점에서 신화 이야기를 켐벨의 의도와 깊이와 관점을 갖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학생은 극히 드물 것이다. 따라서, 켐벨의 관점을 빌어오고 그의 노고로 정리된 영웅의 여정을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재구성하고 예화도 학생들의 시각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를 토대로 설명해 나간다면 신화에 대한 새로운 읽기가 가능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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