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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8일 08시 41분 등록


장애와 영웅

10기 김정은

 

 

전국 이백오십만의

오천만 인구의 5퍼센트

백 명 중 다섯 명

스무 명 중 한 명

서른 명 교실엔 한두 명

천 명 사업장엔 오십 명쯤 있어야 할 사람들

모두의 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

학교 직장의 진열대에 올리지 못한

지하철 버스도 선택하지 못한

인간 자본주의의 상품가치를 잃은

임무 해제된

보이지 않는 사람들

21세기 우생학주의

거리에 없는 사람들

육면체 안으로

안으로

안으로

최소한의 육면체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세상에 없는 존재로

뜨겁게 불타오르던 날

사랑하는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을

꿈을 이루었습니다

 

-  김정은 ‘대한민국 나치즘’  -


 

‘대한민국 나치즘’은 분신 자살한 지체장애인들의 장례식을 보고 쓴 자작시이다. 작년 광복절,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역사에서, 지체장애인 세 명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숨진 장애인들의 유가족이 벌이는 농성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유가족들은 장애인 부양의무제를 폐지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안전망이 전무한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의 부양 의무는 전적으로 그 가족에게 있다. 세 명의 지체장애인의 분신자살은 부양가족이 ‘밥벌이’를 하느라 그의 곁을 지키지 못한 사이에 발생했던 것이다.

 

각자의 방에서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지핀 세 명의 지체장애인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들은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삶 속에서 발목잡고 있었던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을 놓아주고 싶었을 것 같다. 장애인 자신과 긴밀히 연결된 의무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버림으로써 가족이 부양의무와 빈곤에서 벗어나기를 바랬을 것 같다. 이처럼, 장애와 빈곤이 겹친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장애인을 돌보느라 가족 중 누군가는 ‘밥벌이’를 할 수 없게 되어, 장애로 인한 빈곤의 골은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거리에 없는 사람들’, 지체장애인들을 죽음으로 내 모는 우리 사회가 나치의 아우슈비츠를 연상케 했다.



 

장애인의 죽음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장애인들, 그들의 죽음을 들여다 보자.

•1984년 9월 9일, 휠체어 지체장애1급 김순석씨는 도로의 턱을 없애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시청 앞에서 음독자살하였다. 이것이 신문 기록상 첫 항의성 자살이었다. 84년도에는 장애인들이 운동권을 형성하여 이동권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던 시기이다.
•1992년 5월 15일 태백시 규폐환자 남일준씨가 투신자살하였는데, 자살이란 이유로 후에 산재처리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1992년 7월 1일 노점상 박성학씨가 소나무에 목을 매어 상일동 야산에서 자살하였는데, 단속이 너무 심하다는 유서를 남겼다. 이때부터 장애인의 직종이었던 노점상이 사회에서 퇴출되면서 장애인의 수난이 시작된다.

•1995년 3. 8일 노점상 최정환씨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척수장애인이 되자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시설에서 살다가 자립한 장애인인데, 서초구청 앞에서 분신자살을 하여 노점단속에 항의했다. 이런 일이 생기자 장애인 노점상 단속을 관변 장애인단체에 맡겨 용역하는 일을 벌이게 된다.

•1995년 11월 28일, 인천시 연수구청의 노점단속에 저항하였던 지체장애인 이덕인은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회원으로, 아암도 망루농성을 하다가 해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어 장애인 운동에서의 첫의문사자가 되었다.

•1997년 5월 6일 영동대교에서 뇌성마비 이경빈씨가 지하철 신문가판대 실직을 비관하여 자살하였다. 당시 306명의 지하철 가판대 장애인 일터가 없어졌으며, 서울시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장애인을 실업자로 몰아냈다.

•2003년 7월 8일 지적장애인 하모씨가 전동차에 치어 죽자, 장애인이란 이유로 자살동기가 충분하다며 경찰은 자살로 결론짓는다.

•2003년 11월 18일 참사랑낙원 정신지체 김모씨가 자살하였다는 보도가 있는데, 원인미상으로 실족사인지 알 수가 없으나 장애인이 죽으면 자살로 보는 것 같다.

•2004년 부천역 시각장애인 추락사 역시 안전사고가 분명하나 초기 지하철 사고들은 거의 자살로 간주하였다.

•2006년 5월 전업인 안마업에 대한 위헌판결에 광주 여성 시각장애인이 투신 자살하였고, 6월 20일에는 울진군 죽변면 시각장애 여성이 집에서 분신자살하였다.

•2007년 5월 10일 부산 동삼동에서 지적장애 1급으로 무직을 비관하여 집에 불을 지르고 자살을 시도하였는데, 실패하자 방화범으로 구속되었다.

•2007년 9월 11일 계양구 우모씨가 중복장애를 가진 딸과 동반 투신하였는데, 남편실직 후 노점상을 하려 하였으나, 24시간 케어가 필요한 딸로 인하여 삶을 비관한 것이다.

•2012년 9월 15일 수원 산업단지 건물에서 장애인공무원이 투신, ‘소통 2012’ 프로그램에 의해 업무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해직된 박모씨가 자살하였다. 


실제로 많은 장애인들이 죽음을 선택했다. 장애인 중 자살을 시도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의 비율은 41%로 거의 절반에 이른다. 빈곤과 의지할 곳 없음, 차별과 그나마 가지고 있던 직업의 상실, 투사로서의 항의성 자살, 노동시장 변화에 대한 적응의 어려움 등이 자살 원인이 되고 있다. 심지어 사고사로 목숨을 잃어도, 그 죽음을 자살로 간주하기도 한다. 분신자살에 실패하면 방화범으로 몰리고, 직업 현장에서 죽으면 자살로 간주하여 산재처리도 받지 못한다. 현재, 보건복지부가 보급하는 자살예방 프로그램의 대상자에도 장애인은 빠져 있다.

 

도대체 왜, 장애인들이 죽어야 하나. 수많은 장애인들의 죽음 앞에서 나는 뭘했나.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이 전무한 대한민국은 장애인들을 자살로 몰고 가는 사회, 나와 ‘다른’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공감하지 못하는 사회인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대한 민국 사회 전체가 집단 사이코패스 또는 집단 소시오패스를 앓고 있다고 할 만하지 않나. 이 사회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장애인들을 모두 ‘영웅’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 많은 장애인들은 다 어디로 갔나

 

동료였던 일본 장기 파견 근무자의 이야기이다. 엄마의 파견 근무로, 당시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녀야 했던 그녀의 딸은 궁금해 했단다. “엄마, 이 나라(일본)에는 왜 이렇게 장애인이 많아?” 그러고 봤더니 일본의 거리에서 자주 장애인들을 접할 수 있었단다. 딸이 다녔던 일본의 초등학교에도 장애 친구들이 꽤 있었단다. 일본 파견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그 딸은 또 궁금해 했단다. “엄마, 우리 나라엔 왜 장애인이 한 명도 없어?”

 

그 많은 장애인들은 다 어디로 갔나?


나도 미국에서 일하면서 같은 경험을 했다. ‘이 나라(미국)에는 왜 이토록 장애인이 많지?’ 1990년 대, 자녀 조기 유학 열풍으로 ‘기러기 아빠’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기러기아빠’라는 용어는,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독특한 가족형태를 보여준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 엄마와 자녀는 교육이 용이한 해외에서, 아빠는 자녀교육비를 지원하기 위해 직장이 있는 국내에서 기거하면서,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상당 기간 가족이 떨어져 지내는 가족 형태를 말한다. 나는 미국에서 ‘기러기 부부’로 살아가기를 자처한 가족들의 삶을 지켜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자녀의 교육이 뭐길래 기러기 아빠라는 희생을 감수해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과 가까워지면서, 기러기 아빠의 희생 뒤에는 장애를 가진 자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러기 가족 전체가 장애 아동을 둔 것은 아니지만, 장애 아동을 둔 가정의 가장이라면 자녀의 유학을 꿈꾸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사랑하는 자녀가 ‘거리에 없는 사람’이 되어, 하루하루 갇혀 지내기를 바라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자녀의 장애가 크든 작든, 등록 장애 아동이건 아니건, 장애 자녀를 둔 부모는 경제적 지원 능력이 있다면, 희생을 감수하고 ‘기러기 부부’가 되어서라도, 자녀를 사회적 안정망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는 외국에서 키우고 싶어했다.

 

경기도 파주, 운정 신도시, 신도시라는 명칭에 걸맞게 계획적으로 잘 지어진 도시이다. 구 시가지에서는 상상이 안 될 만큼 길이 잘 깔려 있어 휠체어가 다니기에 불편함이 없다. 하지만 이 곳의 거리에서도 장애인을 만나기 쉽지 않다. 작년 광복절 즈음, 이 도시에 ‘치유의 은사’를 받아 교황이 수여하는 상까지 받았다는 분이 방문한 적이 있었다. 성당을 가득 메운 장애인들, 이 도시에 그렇게 많은 장애인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 장애인들을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에서도, 도서관에서도,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도 그들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장애인, 영웅이 되기 위해서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 조셉 캠벨은 만능 이야기꾼이다. 그는 신화 속 영웅 이야기를 풀어, 현대인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영웅’이 되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읽으며, 스스로의 삶에서 영웅이 되고자 했다.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는 내내 나는 궁금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장애인이 영웅이 될 수 있을지. 헬렌 켈러나, 닉 부이치치도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그들의 영웅성을 드러내기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회에서 극소수의 특별한 장애인이 아니라, 대다수의 평범한 장애인이 영웅이 될 수 있을까? 자기 대소변도 못 가려서 하루하루 가족에게 짐이 되어, 죽지 못해 살아가는 장애인들이 과연 영웅이 될 수 있을까?

 

조셉 캠벨은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환희 속에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은 ‘저 바깥’의 어떤 다른 곳이나,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굳이 다른 어딘가로 가거나, 어떤 무언가를 또는 어느 누군가를 굳이 소유함으로써 삶의 환희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의식의 전환’뿐이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는 조셉 캠벨의 말 속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인식의 전환’이다.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장애인이 영웅이 되려면, 먼저 그저 ‘다름’에 기인한 장애를 장애라고 인식하지 않는,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미국 뉴잉글랜드 보스턴 남부에 있는 마서즈 비니러드라고 불리는 섬에서는 17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유전적 요인과 한정된 집단 내 결혼으로 높은 청각장애인 인구 비율을 가지고 있다. 청각 장애인과 소통하기 위해, 이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수화를 배웠고, 이 섬의 제 2외국어로 수화를 선택했다. 이 섬에서는 청각 장애로 불편함을 겪는 사람이 없었기에, 누구도 청각 장애를 장애로 인식하지 않았다.

 

사회가 하루 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장애인 천국인 미국에서도 수세기가 걸려 장애를 장애로 인식하지 않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 인식 전환의 시작에는 단 한 명의 ‘영웅’이 있었을지 모른다. 대한민국 장애인, 스스로 거리로 나와야 한다. 그들, 스스로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 내야 한다. 그렇게 한 명 한 명의 ‘영웅’이 모여, 사회 전체의 인식 전환은 이루어 지는 것이다.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이야기 한다. 이미 ‘영웅’이 된 것처럼 살아보자. 먼저, 구원하여야 할 대상은 ‘나’이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나, 창조적 영웅이다. 일단 한번 그렇게 살아보자. 장애인 각자가 영웅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이상이 일상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IP *.65.1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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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8 09:52:29 *.104.9.186
고맙습니다. 일깨워 주셔서...!
계속해서 물만난 고기 같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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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8 12:32:39 *.94.41.89

"이상이 일상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

오늘이 그날입니다.

그분은 당신입니다.

지금입니다.

그리고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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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8 14:35:00 *.218.176.39

이렇게 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는지 몰랐네요. 이 또한 부끄러움이네요.


"바로 ‘인식의 전환’이다.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


우리 나라에서도 닉 부이치치가  나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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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9 16:36:32 *.113.77.122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이야기 한다. 이미 ‘영웅’이 된 것처럼 살아보자. 먼저, 구원하여야 할 대상은 ‘나’이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나, 창조적 영웅이다


남이 먼저 시작하기를 바라지 말고 자기가 먼저 시작할 수 있을 때 자신도 구하고, 사회도 구할 수 있는것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하는것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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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4 18:23:57 *.160.136.124

저도 각성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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