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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8일 09시 12분 등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

 

Joseph Campbell, 이윤기 옮김 / 민음사, 1999.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Joseph John Campb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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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캠벨

 

 

<사진:조셉 캠벨 재단

http://www.jcf.org>

 

출생/사망

1904.3.26.. 미국 뉴욕 / 1987.10.30. 하와이 호놀루루(83)

 

활동분야

미국 신화학자, 종교학자, 작가, 교수, 20세기 최고의 신화해설자

 

발 자 취

1910.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관람.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에 관심

 

 

1913~1918. 인디언 신화에 관한 책 섭렵. 14세 병으로 집안에서 자연과학 공부

 

 

1919. 뉴로셀 집 화재로 할머니 사망. 수집한 인디언 책과 유물 불에 탐

 

 

1921. 다트머스 칼리지에서 생물학수학 공부. 2학년, 콜럼비아 대 영문과로 전입

 

 

1924~1926. 육상팀 주자로 경주에서 기록 세움. 재즈 밴드에서 색소폰 연주. 배를 타고 유럽으로 가는 길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 동양철학의 세계에 이끌림

 

 

1926. 콜럼비아대 중세문학 공부. 성배에 관한 석사 논문가슴 아픈 일격

 

 

1927~1928. 컬럼비아 대 장학금 제공으로 파리 및 뮌헨 대학 수학.

 

 

1929. 귀국 후 인도철학미술 공부를 하려 하나 박사학위 취득 못하고 떠남

 

 

1929~1934. 우드스탁에 칩거하며 독서, 사색, 습작에 몰두

 

 

1931~1932. 친구로부터 존 스타인벡 부부, 생물학자 에드 리켓과 만나 교류

 

 

1933. 켄터베리 예비학교 취직. 연말 퇴직하여 우드스탁으로 돌아와 독서 및 집필

 

 

1934~1972. 미국 여대 새러 로렌스 칼리지 문학 담당 교수로 부임하여 재직

 

 

 

1938. 결혼(제자 현대무용가 진 애드먼)

……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

 

 

1941. 하인리히 침머와 만나 교류. 침머 사망(1943) 후 그의 유작 편집 출판함

 

 

1954. 안식년에 인도, 스리랑카, 타이, 미얀마, 홍콩, 일본 등 여행

 

저 서

1941. 그 두 사람이 아버지에게 온 곳:나바호족의 전쟁의례 주석본

 

 

1942. 스미 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우파니샤트 번역 및 편집

 

1944. 피네간의 경야를 여는 곁쇠(헨리 모튼 공저.)

 

1949.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1957. 편집 회보, 의미없는 상징

 

1959. 원시시대 사냥꾼과 농부의 재생 신화와 의례

 

1959~1968. 신의 가면

-1959 원시신화, 1962 동양신화, 1964 서양신화, 1968 창작신화

 

1969. 야생 수거위의 비행:신화적 차원의 탐험

 

 

1972. 신화와 함께하는 삶

1974. 신화의 이미지

1983~1989. 세계신화의 역사지도

1987. 신화의 힘 PBS반영(캠벨과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

 

 

조셉 캠벨

 

전세계 수많은 나라의 탄생이야기, 그 나라의 신화와 전설과 민담, 그리고 각 종교들을 읽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비슷하구나!

 

어릴 적의 기억에서부터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란 책의 기본적 토대를 잡아낸 조셉 캠벨은 이름 따라 포도 향기가 나는 신맛나는 느낌에서 영특한 이미지까지 첨가된다. 영특이란 말은 성인보다 어린이에게 더욱 더 잘 어울린다. 그는 그렇게 영특한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였구나.

신화의 힘을 읽으면서 맛과 향기가 강한 캠벨 포도를 삼키며 캠벨이 그의 생에서 신화라는 강한 맛과 향기를 좇았고 살아내었구나 싶어 놀랍고 놀라웠다. 그리고 다시, 영웅이다. 그의 생에 역시, 신화로 흘러가고 집약되기까지 영웅의 여정과, 천복을 좇는 삶이 드러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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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e as a young man at the University of Paris (1928)

Working on A Skeleton Key to Finnegans Wake (1944)

At home in Hawaii (1985)

 

At the National Arts Club receiving Medal of Honor (1985)

 

  뉴욕에서 태어난 캠벨의 유년 시절은 나쁘지 않았다. 상위 중산층에 가톨릭 가정이었고 아버지는 그를 늘 믿었고 자랑스러워한 듯하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어린 캠벨은 아버지와 함께 미국자연사박물관을 구경갔다가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해 매료된다. 이후 인디언에 관한 신화와 민담들을 섭렵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신화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던 그는 14세 때에는 병으로 집안에 머물며 자연과학을 공부하였고 대학에서도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하였다.

 그의 인디언에 대한 매혹은 어쩌고 이과계 공부를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즈음, 그가 대학 2학년에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서 중세 영문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했다는 것을 라았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어릴 적 그토록 인디언에 매료되었던 그의 공부의 방향이 다르게 흘러가는 듯 보였으나 그는 그의 천복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가 학사와 석사 공부를 하는 동안 어릴 적 읽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과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이에 대한 공부를 지속한 것이다. 그리고 콜롬비아 대학을 비롯한 파리 및 뮌헨의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섭렵하고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배에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게 되면서 힌두교와 인도 신화에도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에 의견에 따르자면 그가 천복을 좇자 자연스레 그에게도 천복의 삶이 맞닥뜨려 지는 것이다.

콜롬비아 대학의 지원으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캠벨은 영문학 대신 인도 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고자 하나, 대학 측의 반대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다. 1929, 대공황의 시기였고 사회 전체가 경제적 불황으로 침체된 그 때, 캠벨은 우드스톡의 오두막집에 칩거하며 5년 동안을 독서와 사색, 습작에 몰두한다. 물론, 이 시기 많은 이들과 교류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 캠벨은 소설가 존 스타인벡을 만났고 해양생물학자 에드워드 플랜더스 로브 리케츠와 교류하였다.

우드스톡의 시기를 보내게 되는 캠벨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다시 저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야만 할까?”였다. 그가 여행을 하며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힌두교, 융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의 그 느낌은 강렬하였던 모양이다. 그는 대학으로 가서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고, 학위 취득을 위한 필수과목을 모두 이수한 상태였고 논문만 쓰면 끝이었지만 학교는 다른 곳으로 옮겨 공부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는 이까짓 것 개나 줘 버리자라고 생각하며 우드스톡으로 들어갔다고. 그리고 박사학위를 얻지 못했지만 덕분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고 아무런 책임질 일도 없이 경이로운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책만 읽었다. 그리고 돈은 없었지만 당시 뉴욕의 큰 서점에서 책을 주문해 있었고 책값을 지불하지 않았다 한다. 대공황의 시기에는 다 그랬다고 하니, 뭐 특별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서점은 그에게 돈을 재촉하지 않고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캠벨은 일자리를 구하고 나서 책값을 냈다고 한다. 우리나라 IMF 시기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를 한번 생각해본다. 자연스레 부정적인 답이 뒤따른다. , 캠벨은 배짱도 운도 좋았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드스톡의 칩거는 세라 로런스 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끝이 났다. 그는 1934년 이 학교에서 문학 담당 교수로 임용된 후 38년 동안을 재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학교에서 교직 제안이 들어왔을 때에도 일자리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일자리를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것이 그의 독서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 그러나 그 학교에 가서 예쁜 여학생들이 와글거리는 것을 보자, 이것도 나쁘진 않겠다라고 생각했다 한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이 학교에서 제자였던 현대 무용가 진 에드먼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들에게 아이는 없었다. 캠벨이 그의 강연과 저서에서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듯 그는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무언가 들떠 있는 느낌, 이끌림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난 후 캠벨이 졸업선물로 그녀에게 슈펭클러의 <서구의 몰락>을 전하며 그의 마음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캠벨의 아내 진 해드먼은 그의 사후에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조셉 캠벨 재단을 설립하고, 캠벨의 유고와 대담, 그리고 강의록 등을 정리, 출간하고 있다.

 

조셉과 진.jpg  Joe and Jean on their honeymoon in Woodstock, NY (1938)

 

 

 캠벨에 대해 그가 신화에 관한 책을 썼고 대공황의 시기에 실업자로서 우드스톡에 들어가 칩거하며 살던 시절만을 알았을 땐, 나는 그의 성정이 조금은 우울적 기질이 다분한 조용한 학자로서니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조금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는 오히려 미국식 사고방식이 다분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미국식 사고방식이라 말하면서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약간은 난감하지만 쿨함과 유쾌함이 조합된 코믹적 느낌이 조금씩 들고 있다. 게다가 그는 색소폰을 연주했고 육상 선수로 달리기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샌님같은 학자 스타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더 많이 알게 되면 달라질까. 어쨌든 경제적인 좌절감으로 인한 칩거가 아니라 오로지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에서 오는 칩거임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의지대로 신념대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참고 자료

조셉 캠벨,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조셉 캠벨, 신화의 이미지, 살림, 2006

위키피디아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머리말

 

P6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p6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 -베다 경

 

프롤로그 원질 신화(The Monomyth)

 

1. 신화와 꿈

 

P14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종교, 철학, 예술, 선사 인류 및 유사 인류의 사회적 양식, 과학과 기술의 으뜸가는 발견, 바닥째 흔들어 수면을 엎어버리는 꿈, 신화의 불가사의한 고리…… 모두가 이 은밀한 통로를 지나 인류의 문화로 현현(顯現)한 것들이다.

왜 신화는 어느 곳에서 채집되어도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이것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 이 책의 출발이며 목적이다.

p19 무의식은 꿈을 통해서, 혹은 벌건 대낮에, 아니면 정신 착란을 이용하여 갖가지 부질없는 몽상과 기이한 상념과 공포와 정신을 어지럽히는 허상을 마음으로 올려보낸다. 인간이라는 왕국에서 우리의 의식이라고 부르는, 비교적 깔끔하고 비좁은 처소의 바닥 밑으로는 뜻밖에도 알라딘의 둥굴이 뚫려 있다. 여기에는 보물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꼬마 정령, 그리고 우리로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거나 감히 우리 일상의 삶으로 통합하지 못했던, 불편한 혹은 억압당한 심리적인 힘이 도사리고 있다.

예고없이 닥치니, 그야말로 무의식이 아니겠는가. 자신도 모르게 심리적인 기저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그 의식.

P21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 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설렘이기도 하고.

p22 한 차례의 통과 제의가 있은 다음에는 다소 느슨한 휴지 기간이 뒤따르는데, 이 기간에는 인생을 살아갈 당사자를 새로운 시대의 형식과 적절한 감정 상태로 유도하는 절차가 있다. 그래서 마침내 정상적인 생활로 되돌아 올 때가 되었을 때 입문자를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일종의 체험에 대한 이야기인 모양이다. 누구나 어떤 제례, 의식을 접하게 되면 분명 변화되는 인식과 마음가짐이 있을 것이다.

p23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있는 타락의 길을 버리고 영험적인 정신의 도움을 따르게 하는 우리 내부의 고차원적인 신경증인지도 모르겠다.

P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토인비 교수가, 6권에 달하는, 문명의 영고 성쇠의 법칙에 관한 연구서에서 지적했듯이, 영혼의 분열, 사회적 무리의 분열은 세월 좋던 시대로 돌아간다는 계획(회고주의)으로도, 이상적으로 설계된 미래를 보증하는 보증표(미래주의)로도, 심지어는 악화된 요소를 다시 접합시키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작업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palingenesia)>(우리가 갱생하지 않는다면 오래 잔존하게 되어 있다면)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갱생하지 않는다면 응보 천벌여신 Nemesis의 복수만이 우리가 얻게 되는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며, 파멸은 우리 미덕의 껍질부터 깰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화는 올가미다. 전쟁은 올가미다. 변화도 올가미이며, 항구 불변성이라는 것도 올가미다. 죽음이 승리하는 날이 오면 죽음이 다가온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는 길뿐,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길뿐이다.

p33 영웅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간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그런 사람의 상상력과 이상과 영감은 태고적부터 인간의 생명과 사상의 원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두 번째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토인비가 주장하고, 인류의 모든 신화가 보여 주듯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해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웅은 현실인식보다는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주어야 한다는 것인가.

p38 사소한 것일수록 손쉬운 법이다. 재미있는 것은 죄 많은 왕을 섬기는 바로 이 장인이, 미궁의 공포를 연출한 장본인인 동시에 자유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케 할 수 있다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영웅은 우리로부터 먼 데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수세기 동안 다이달로스는 장인 및 과학자, 기이할 정도로 냉담하고, 거의 악마적인 현상의 상징, 사회정의의 정상적인 경계를 넘어 자기 시대의 도덕률이 아닌, 자기 예술의 도덕률에만 봉사하는 인간 유형을 대표해 왔다. 그는 단순하고, 용기에 차 있으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영웅이다.

 

2. 비극과 희극

 

p44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地上的)일지 모르나, 근본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 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이러한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삶은 더 이상 도처에 도사린 재앙의 가혹한 단죄와 시간에 의한 마손(磨損)이나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받는 일이 없게 된다. 뿐인가, 공포는 눈앞에 여전히 보이고, 고뇌의 울부짖음은 여전히 귀에 들리나, 삶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는 힘의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여느 때에는 막막한 물질로 뒤덮인 생명의 심연에서 보이지 않게 타오르던 불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빛이 되어 비치기 시작한다. 저 무서운 단죄의 손길은, 그제서야 우리들 마음속의 불멸하는 우주의 그림자로 비친다. 시간은 영광의 승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세계는 더할나위없이 천사적인, 더할나위없이 단조롭고 요정의 노래처럼 매혹적인 하늘의 노래를 부른다. 행복한 가정이 다 그렇듯이, 소생한 신화와 세계는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신화적 영웅의 길은 근본적으로 내적인 길이다. 그래서 모든 영웅은 여행을 떠나지만 그들은 여행에서 돌아오면 그들은 내적으로 더욱 성장하여 있다.

 

3. 영웅의 신

 

p45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p50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4. 세계의 배꼽

 

p58 신의 화신으로서의 영웅은, 영원의 에너지가 시간성 안으로 흘러드는 배꼽, 즉 세계의 배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연속적인 창조의 상징, 모든 사물 안에서 약동하는 소생의 연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세계 보존의 신비인 것이다.

p62 세계의 배꼽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세상의 하고 많은 선과 악을 두루 산출한다. 추한 것, 아름다운 것, 죄악과 미덕, 쾌락과 고통이 모두 이 세계의 배꼽의 공평한 산물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르기를,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고 했다. 세계의 사원에서 섬김을 받는 대상은 늘 아름다운 것도, 늘 자비로운 것도 아니며, 그들은 인간의 가치 척도를 저만큼 앞지른다. 마찬가지로, 신화도 위대한 영웅을 위대한 도덕가로 다루고 있지 않다. 미덕 역시, 최고의 직관 앞에서는 케케묵은 훈장의 읊조림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직관은 짝짝으로 된 상대적 반대 개념을 초월한다. 미덕은 자기 중심적인 자아를 완화시켜 범개인적(汎個人的) 중심성을 지향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이 가능했다면 고통이나 쾌락, 미덕이나 악덕, 우리의 자아 혹은 남들의 자아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초월적인 힘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 안에 사는 자, 모든 것 안에서 훌륭한 자,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섬김이 타당한 자에게 감득되는 것이다.

신화는 영웅을 위대한 도덕가로 다루지 않는다. 영웅은 신과 마찬가지로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다. 자아의 욕망을 실현한 자이다.

p62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헤라클레이토스

p65 신화의 제신(諸神)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 즉 창조자의 무자비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비극적인 자세를 신경질적인 것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근시안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란 무자비하면서도 공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요컨대 제때에 나고 죽는, 자기중심적이며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불명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신화에서 인간들이 살아내는 삶은 신들에 의해 무자비해진다.

 

 

1부 영웅의 모험

 

1. 출발(Departure)

 

1. 영웅에의 소명The Call to Adventure

 

p71.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것이긴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이 주름의 골은 매우 깊다.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결국엔 예정된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그것을 운명이라 할 것이다.

p80 운명이 영웅을 불렀고, 영웅의 영적 중심(重心)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낙원일 수도 있고 위험의 도가니일 수도 있는 이 운명적인 영역은 여러 가지 형태로 다양하게 표상된다. 가령 오지, , 지하 왕국, 해저, 천상, 비밀의 섬, 험한 산꼭대기, 혹은 꿈꾸는 상태로 표상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항상 변환 자재하는 존재, 다형태를 취하는 존재, 뜻밖의 고통, 초자연적인 행위, 그리고 초현실적인 환희가 있다. 영웅은 자신의 의지력으로 모험을 완성할 수 있는데, 테세우스가 아버지의 도시 아테네에 도착하여, 미노타우로스의 놀라운 역사를 듣게 되는 상황이 이에 해당한다.

운명이 모두를 영웅으로 부르는가. 정해진 영웅의 운명만을 부르는 것은 아닌가. 결국 모험을 떠나는 이들은 영웅이 되기 위해 모험을 떠나지만, 그들이 모험을 떠나게끔 하는 것은 이미 영웅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같은 이유로 모험을 떠난다고 다른 이가 영웅이 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2. 소명의 거부 Refusal of the Call

 

p81 현실 생활에서는 자주, 신화나 민간전승에서도 드물지 않게 소명에 응하지 않는, 조금은 답답한 경우를 우리는 만난다. 다른 데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소명에 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명에의 거부는, 모험을 부정적이게 한다. 타성이나, 힘에 겨운 일, 혹은 <문화>의 장벽 때문에, 모험의 주체는 의미심장한 긍정적 행동력을 잃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험의 주체가 누리던 화려한 세계는 메마른 돌멩이가 구를 뿐인 황무지가 되고, 그의 삶은 무의미해진다.

소명에의 거부는, 그것이 소명인지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 햄릿형 인간이거나....그래두 먼길 가는데 생각이란 것은 필요하니까.

 

3. 초자연적인 조력 Supernatural Aid

 

p98 조력자를 맞는 영웅은, 소명에 응답한 영웅일 경우가 보통이다. 실제로 소명은, 통과 제의의 사제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는 첫 번째 통고다.

영웅이든 주인공이든 늘 조력자가 힘을 더해 주지 않으면 영웅의 길로 가는데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한 조력자를 두는 것도 영웅의 힘이자, 소명이겠지.

 

4. 첫 관문의 통과 The Crossing of the First Threshold

 

p105 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수호자는, 영웅의 현재 상황, 혹은 삶의 지평의 한계를 상징하면서 사방에서(위 아래까지)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p111 모험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5. 고래의 배 Belly of The Whale

 

p120~121 마법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이, 곧 재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관념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래의 배라는 자궁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영웅은, 그 관문을 지키는 세력을 정복하거나, 그 세력과 화해하는 대신, 그 미지의 힘에 빨려들어, 겉보기엔 죽은 것으로 나타나고는 한다.

가끔은 너무 자궁이미지를 부각하는 것이 식상하다. 도대체 자궁이미지, 우리 모두 그 안에 있다가 나왔지만, 정말로 기억하는가?

124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박사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고 썼다. 어쩌면 영웅의 육신은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구세주 오시리스처럼 정말 죽고, 해체되고, 땅이나 바다 위로 뿌려지는지는 모른다. ~ 자아에의 집착을 끊은 영웅은 왕이 자기 궁궐에서 방방을 드나들 듯이, 삶의 지평을 넘나들거나 용의 뱃속을 드나들 수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은 여기에 있다. 그의 죽음과 회귀는, 모든 현상계의 대립물이 창조되지 않은 불멸의 존재임을 드러내는데 여기에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존재...죽어야 살리라...죽음의 경험이 필요하다...

 

 

2. 입문(Initiation)

 

1. 시련의 길The Road of Trials

 

p128 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정도로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p132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理想)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집단의 이상이란 말에서는 고차원적 가치의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둔다는 말에서 그 이상이, 보다 고차원적인 느낌이 아닌 욕망과 연관된 느낌도 든다.

p133 유아기 상태란 성장의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수정되고 역전되다가 현실에 적용될 필요가 있을 때 재수정된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 충동의 유대 libidinal tie를 강화하고 있다. 이 유대가 없다면 인간의 집단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주술사는, 그 사회 성인들의 심성에 내재하고 있는 상징적 환상 체계를 출몰시키는 역할을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주술사란, 이러한 유아적 놀이를 주도하고, 공통의 근심거리를 밝혀내는 지도자인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방에서 성공하고 현실적인 어려움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잡귀와 대리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주술사란 그 사회 성인들의 심성에 내재하고 있는 상징적 환상 체계를 출몰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는다..주술사는 심리사, 결국 미래의 것을 예언하기보다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구를 이끌어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p139 C.G. 융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전() 세대 사람들이 모두 이런저런 형태의 신을 믿고 있었으니만큼 새삼스러운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심적 인자, 즉 무의식의 원형으로서의 신을 재발견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상징체계의 철저한 붕괴뿐이다.……하늘은 우리를 위해 물리학자의 우주 공간이 되어주었고, 신이 사는 천상계는 과거지사를 돌이켜보는 추억의 장()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마음은 자라고> 은밀한 불안은 우리 존재의 뿌리를 갉아먹고 있다>(집단적 무의식의 원형)

상징체계의 붕괴..내 자신이 세운 상징체계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상징화 되어 있는 것. 이것은 아마도 고정관념과 신념으로도 이어지겠지.

P143 신이든 여신이든, 남자든 여자든, 신화의 등장인물이든 꿈을 꾸는 사람이든, 영웅은 적대자를 발견하고 삼키거나 그에게 삼켜짐으로써 이 적대자(뜻밖에도 그 자신의 자아)를 동화시킨다. 하나씩 하나씩 장애는 차례로 사라진다.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의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2. 여신과의 만남 The Meeting With the Goddess

 

P153~154 신화학의 심상 언어에서 여자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알게 되는 존재가 곧 영웅이다. 영웅이 삶의 다른 형태인 입문의 과정을 진행함에 따라 여신의 형상은 그에게 일련의 변형 과정을 체험하게 한다. 여신은 항상 영웅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할 수 있지만 영웅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여신은 그를 유혹하고, 인도하고, 그의 발목에 채인 족쇄를 깨뜨리게 한다. 그리고 만일 영웅의 능력이 여신에 미치면 이 양자, 즉 아는 존재와 알려지는 존재는 갖가지 제약에서 해방된다. 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열등한 눈으로 보면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여신, 영웅을 영웅이도록 이끌어 줄 수는 있으나 그 자신 영웅이 될 수는 없는 존재. 그리고 그 여신의 존재를 알아봐주는 자는 영웅,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주는 영웅에 의해 여신은 그를 영웅답게 이끌어 준다.

 

3. 유혹자로서의 여성 Woman as Temptress

 

P159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적인 결혼은 영웅의 삶 전체가 완성되었음을 상징한다. 즉 여성이 곧 삶인데, 영웅은 이 삶을 알게 되었고, 이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웅의 궁극적인 체험과 행위의 예비 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의 시련은, 자각의 위기를 상징한다. 이 자각의 위기를 통해 영웅의 의식은 증폭되고, 어머니 상의 파괴자, 즉 천생연분의 신부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시련을 받는 당사자는 자기와 아버지가 동일하다는 사실과, 자기가 곧 아버지의 입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이건 오이디푸스 신화의 이야기를 적용하는 것인가.

P159~150 싸움이나 짜증은 무식한 자들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후회는 때늦은 각성일 뿐이다. 세계 도처에 놀린 영웅 신화에 나오는 영웅의 모험은 일반적인 양식으로, 어떤 계층에 속하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적용된다.

, 정몽준 아들의 미개한이란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내가 종종 미봉책으로 인생을 살아왔던가.

P160 도깨비들이란, 자기 인간성의 미해결 수수께끼가 투영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상(理想)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개인이 자기 삶을 파악하는 징후인 것이다.

P161 삶의 배후에 있는 삶을 찾아나서는 모험가는 그녀의 유혹을 물리치고, 현실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에테르(精氣) 속으로 날아들어가야 한다.

 

4. 아버지와의 화해 Atonement with the Father

 

P168 대부분의 신화에서 자비와 은혜의 이미지는 정의와 분노로 표현된다. 이렇게 해서 이 정의와 분노 사이에 균형이 생기고, 인간은 파멸을 겪는 대신 어려움을 근근히 이겨나간다. 시바는, 신도 앞에서 우주적 파멸의 춤을 추면서도 손으로는 <두려워 말라>는 시늉을 한다.

P171 영웅이, 조력자인 여성에게서 희망과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다. 여성의 마법(꽃가루라는 호부, 중재의 능력) 덕분에 영웅은, 자아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하는 아버지의 무서운 입문 의식 경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영웅은, 아버지의 끔찍한 얼굴을 믿을 수 없으며 그 믿음을 다른 곳에다 기울인다(즉 지주녀, 혹은 성모). 지원을 보장받은 영웅은 위기를 견디어 나가고, 결국에 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투영하고 있지만 사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의 변화나 도전에 대해서 든든한 조력자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존재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도움을 주는 존재. 그러니 혼자보다는 여럿이 낫다고 보는 건가.

P177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신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때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어머니가 그때까지 <><>을 표상하고 있었듯이, 지금부터는 아버지가 그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이 경우는 조굼 복잡하다. 여기엔 새로운 경쟁자적 요소가 틈입한다. 즉 아들은 세계를 섭렵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를 경쟁 상대로 삼고 달은 섭렵된 세계 자체가 되는데 있어서 어머니를 경쟁자로 삼는 것이다.

저 오이디푸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 상징은 너무 오래 들어와서 일견 그냥 습관적으로 쓰게 된다. 그러나, 깊게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도 구체적인 사례들을 생각하면 맞는 듯도 싶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이미 강한 작용을 하는 이론이기에 거기에 맞게 내 생각을 조절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P191 불멸의 존재가 내뿜는, 망상을 쫓는 빛은, 창조하는 빛과 동일하다는 뜻이다. 자연계의 부수적인 양극성으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즉 이글거리는 태양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폭풍을 일으키기도 하고, 한 쌍의 대립적인 원소인 불과 물의 배후 에너지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5. 신격화 Apotheosis

 

p196 인간에게 알려진 신들 가운데 관세음보살만큼 많은 기도를 가납(嘉納)하는 신도 없을 것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즉 그는 인간으로 이 땅에 살다가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는 순간(이 순간 넘어서면, 이름붙여지고 경계지어진 우주의 헛된 망상을 초월한 공()의 무량 세계가 열린다)에 이를 작파해 버리고, 모든 중생을 정각에 이르게 한 연후에야 공()에 들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p196~197 부처 자신처럼, 이 신과 같은 존재는 인간적인 영웅이 마지막 무지의 공포를 초월하고 획득하는 신적인 상태 divine state의 본보기다. <의식의 외피가 벗겨져 나가, 모든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고 변화의 경계를 넘어서게 된> 상태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 있는 해탈의 상태이며, 영웅들이 됨으로써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상태다. <만물에는 불성(佛性)이 있으니>, (같은 말을 달리 하자면) <일체의 존재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부처는 인간에서 출발. 비록 그가 왕의 아들이었다는 위엄을 가지고 있었지만.

p211~212 양성적인 신의 요체가 바로 이것이다. 양성적 신은, 입문 의식이라는 주제의 궁극적 요체다. 우리는 어머니 품에서 끌려나와 조각 조각으로 촌단(寸斷)된 다음 세계를 적멸시키는 도깨비의 몸 안으로 동화된다. 이 도깨비에게 있어서 고귀한 모든 형상과 존재는 오직 제물일 뿐이다. 그러나 이어서 우리는 기적적으로 재생한다. 이때의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아닌, 그 이상의 존재다.

p213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란 여신과의 만남, 그리고 아버지와의 화해다. 여신과의 만남의 과정에서, 입문자는(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에서 이르고 있듯이) 남성과 여성은 둘이 아니라 <쪼개진 완두의 두 쪽>임을 깨닫고, 아버지와의 화해 과정에서는, 아버지는 성()을 선행하며, <>라는 대명사는 말의 방편이고, 지도적 원리로 확립된 부자 관계의 신화는 말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p215~216 보살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생각을 초월하는 진리(이는 언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라고만 불린다>의 안쪽에서 다시 바깥의 현상계를 바라보면서 보살은 이미 안에서 깨달은 동일한 존재의 바다를 바깥에서도 지각한다.

보살은 중생 구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p222 나무, 바위, , , 이 모든 것이 살아 있다. 이러한 무정물(無情物)은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없을 때, 문득 그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무정물들이다. Moris Edward Opler, Myths and Tales of the Jicarilla Apache Indians, p.110.

p223 신적인 차원의 언어로 일컬을 때 시간의 세계란 곧 위대한 어머니의 자궁이다. 아버지에 의해 끼쳐진 생명은 그 안에서 어머니의 어둠과 아버지의 빛으로 합성된다.

p223 입문자는 명상을 통해 자기 내부에 있는 이 형상들 중의 형상yab-yum에 대한 기억 속으로 끌려든다. 어쩌면 남성상은 입문의 원리와 방법의 상징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경우 여성상은 입문 의식의 목적이 된다. 그러나 이 입문 의식의 목적은 열반(영원)이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 양자가 번갈아 찰나와 영원으로 마음 속에 그려져야 한다. 말하자면 이 양자는 같은 것이고, 각자가 그 둘이며, 이원적인 형상yab-yum으로 보이는 것은 환상 때문이지만 이것이 또한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6. 홍익(弘益) The Ultimate Boon

 

p226 영웅이 모험을 쉽게 끝내는 예는, 여러 동화나 육화(肉化)한 신의 행위에 관한 전설에 자주 등장한다. 보통 영웅 같으면 모진 시련을 겪을 터인데도 선택된 자는 별 방해도 받지 않고, 또 실수도 저지르지 않는다. 샘은 세계의 배꼽이고, 불타는 물은 파괴할 수 없는 존재의 본질이며, 돌고 있는 침대는 세계의 축이다. 만상이 잠드는 성(), 꿈속에서 의식이 도달하는 궁극의 심연이다. 꿈은 개인의 삶이 미분화(未分化) 에너지 속으로 해소되는 지점이다. 해소되어 버리면 곡 죽음이다.

p248 천상적인 것이 도다. 도는 영원이다. 여기에 이르면 육체가 썩는 것도 두려워할 바 아니다.-노자, 도덕경

p249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정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차례로 용을 쓰러뜨리고, 관문과 관문을 차례로 지남에 따라, 영웅이 고도로 갈망하는 신의 모습은 점점 커져, 이윽고 우주 전체에 가득 차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변의 공()에 대한 자각이다.

. 성숙한 자아를 핍박하고 방해하는 모든 것들.

 

 

3. 귀환(Return)

 

1. 귀환의 거부Refusal of the Return

 

p253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원질신화의 규준인 완전한 순환 체계는 영웅에게 지혜의 시문(詩文), 황금 양털, 혹은 잠자는 미녀를 인간의 왕국으로 데려오는 또 한번의 수고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이 은혜가 사회, 국가, 그 천체,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시키는 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웅은 귀환을 함으로써 완성된다. 그것도 영웅의 시련인 것이다.

 

2. 불가사의한 탈출The Magic Flight

 

p263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다. 동양에서는, 엄격한 지도와 감독 없이 심리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에서의 요가 수련은 몹시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수련자의 명상은 그 발전 단계에 따라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수련자의 상상력은 데바타(devata:수련자의 수준에 알맞은 신성)에 의해 각급 단계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 정선을 수련한 다음에야 수련자에게는 홀로 초월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 온다.

심연의 바다에서는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된다. 보다 더 절제하고 생각하며 이를 헤쳐나가는 것이 필요. 그러나 더 깊이 잠기지 않도록 주의!

p269 그리스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신화, 그리고 세계 전역에서 채집되는 수백 가지의 비유적 전설들은, 영웅에게 실패의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무서운 관문 건너쪽에서 애인과 함께 귀환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두 세계의 상호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소한 실수, 즉 인간의 약점이라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증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소한 일만 피하면,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사소한 것들을 피하는 것도 넘 힘든데, 그보다 더한 것들도 해결해야 하는 길이라면 인간적 약점을 가진 사람으로서 더욱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3. 외부로부터의 구조 Rescue from Without

 

p269 영웅은 외부의 지원을 빌려 초자연적 모험에서 귀환하는 수가 있다. 말하자면 이 세계가 합세하여 그를 도울 수도 있는 것이다. 외부 세계가 이렇게 하는 것은, 지칠대로 지친 영웅에게, 힘겹게 도달한 지복의 땅을 포기하는 것은 쉬운 노릇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쉬이 영웅의 조력자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이 영웅이고 싶어 한다. 만약 영웅이 정해져 있다면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이들과 늘 다투어야 할 것이고. 영웅이고자 하나 영웅이 되지 못하는 자는 영웅의 반대편에 설 것인지, 조력자가 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4. 귀환 관문의 통과The Crossing of the Return Threshold

 

p281 두 세계, 곧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삶과 죽음, 밤과 낮처럼 서로 다르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영웅은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 암흑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암흑의 세계에서 영웅은 그 모험을 완성할 수도 있고, 거기에 갇힘으로써 우리들로부터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엄청난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기꺼이 일을 맡든, 어쩔 수 없어서 맡게 되든, 우리가 영웅의 행위를 이해하자면 이 잊혀진 부분의 탐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생활에서 중요하게 보이던 두 세계의 가치나 차이는, 지금까지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하던 <타자><자아>를 동화시키는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p288 천국에서의 1년이 지상에서의 백 년에 해당한다는 등식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백 년이라는 주기는 전체성을 의미한다. 360도라는 원의 중심각도 전체성을 뜻한다. 힌두교의 푸라나에 따르면, 신들의 1년은 인간의 360년에 해당한다. 올림포스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의 역사는 순환 주기의 조화로운 형상을 드러내 보이면서 영겁토록 흘러갈 뿐이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세계는 변화와 죽음으로 보이고, 신들의 눈으로 보면 불변하는 형상, 곧 끝없는 세계일뿐이다.

 

5. 두 세계의 스승 Master of Two Worlds

 

p297 두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말하자면 시간을 초월한 세계인 스승과, 일상적인 세계인 이승을 두루 돌아다니는 자유(그것도 한 세계의 원리로 다른 세계를 오염시키지 않되, 한 세계의 선으로써 다른 세계의 존재를 깨우치면서)는 거장들의 재능에나 어울리는 자유다. 니체는, 우주적인 춤의 신(Cosmic Dancer), 한곳에 붙박혀 있지 않고 이곳저곳을 가볍게 떠돌아다닌다고 주장한다. 물론 한 관점에서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관점에서의 통찰이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다.

p305~306 <베다(經典)>를 공부한다 하더라도, 무서운 고행을 한다 하더라도, 보시(布施)를 행한다 하더라도, 또 의식을 행한다 하더라도 네가 본 나의 이 최고의 모습은 볼 수 없느니라. 그러나 오직 믿는 마음이면 나를 알 수 있고 참답게 볼 수 있으며 내게 들어와 하나가 될 수 있느니라. 항상 나를 위해 일하고 오직 나만을 목적으로 알고, 진실로 나를 정성으로 믿으며,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악의를 품지 않는 자, 그런 자가 내게 오느니라. -바가바드기타

p306 이제 의미는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종교적 관행이 좇고 있는 바다.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at-one-ment>, <자기 화해 self-atone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법 law은 그 안에서 거침새가 없다.

진정한 자기화해는 해탈?

 

6. 삶의 자유Freedom to Live

 

p307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세상의 예외적인 존재로서 자기 입장을 합리화하고 허위적인 자기 이미지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말하자면, 자기는 선한 자를 대표하고 있다고 간주하고, 죄악을 불가피한 것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부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합리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인간과 우주에 대한 본질에 이르기까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데 있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허위적인 자기이미지도 결국 자기의 모습 아닌가하는 생각이..그냥 그런 사람인 것이다.

 

 

4. 열쇠 The keys

 

p322 세례에 대한 일반의 해석은 <원죄를 씻는 의식>으로 되어 있다. 즉 재생이라는 측면보다는 정화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차적인 해석이다. 또 설혹 전통적인 탄생의 이미지가 기억되고 있다 해도 이에 선행하는 결혼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신화적 상징은 그 함축적인 의미 그대로 계승되어야 한다. 즉 수천 년에 걸친 영혼의 모험을 유추에 의해 표상해 온 만큼 그 대응 관계의 전 체계를 섣불리 펼쳐보이기 이전에 그것이 지닌 모든 함축적 의미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2부 영웅의 모험

 

 

1. 유출(Emanations)

 

1.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p330~331 신 혹은 신들 자체는 어디까지나 편이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과 형식을 통하여 이 세계의 얼개를 설명하는 성질이 부여되어 있을 뿐, 이들은 결국 세계를 설명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깨우며,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나 변신이야기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들을 보다 구체화시킨 생생한 묘사로서의 신을 탄생시켰다. 그렇게 탄생시킨 신에 되려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p332 신은 인간의 삶을 떠맡고, 인간은, <대립물이 합일하는> 순간, 즉 신과 인간의 서로의 먹이로 각각 하강하고 상승하는 길목으로서의 태양의 문턱에서 만나는 순간에, 제 내부에 있는 신을 방면한다.

내 내부의 신을 방면할 시간, 마주침 합일의 순간을 기다리며.

 

2. 우주의 순환

 

p338 우주 발생적 순환에 의해 설명되는 철학적 공식이란, 존재의 세단계를 통한 의식의 순환을 말한다. 그 첫 단계는 깨어나는 체험의 단계, 즉 태양의 조명을 받고, 만물에 공통된 외계 우주의 험난하고 총체적인 사실들을 인식하는 단계다. 두 번째 단계는 꿈 체험의 단계, 즉 꿈을 꾸는 당사자와는 본질상 동일한 개인적 내부 세계의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를 인식하는 단계다. 세 번째 단계는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 꿈을 꾸지 않는 지복의 단계다. 첫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삶에 관한 교훈적인 체험과 만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소화되어 꿈을 꾸는 당자자의 내적인 힘에 동화되며, 세 번째 단계에서는, 내부적 통제자가 들어앉은 방 안, 모든 것의 근원이자 끝인 상태, <마음속에 있는 공간> 안에서 모든 것을 즐기고 의식할 수 있게 된다.

통제자가 들어앉은 방안에서도 모든 것을 즐기고 의식할 수 있는 경지란! 의식이란 순환되고 정화되고 통제되고, 또 발산되는 것.

p339~340 신화는 이 순환 속에 머문다. 그러나 신화는 이 순환을 침묵에 둘러싸인 형태, 순환과 침묵이 서로 삼투하는 형태로 드러낸다. 신화는, 존재하는 원자 안팎에 충만해 있는 신의 계시록이다. 신화는, 고도로 세련된 형상화 작업을 통하여 마음과 가슴을, 모든 존재를 채우고 둘러싸고 있는 궁극적 신비로 향하게 하는 풍향계다.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 보여도 신화 체계는 마음을, 가시(可視)의 세게 너머에 존재하는 비현현의 세계로 향하게 한다.

오히려 너무나 생생한 현실이라 놀라게 된다. 신화의 세계는.

 

3. 허공에서-----공간

 

p342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창조 신화는, 모든 피조물은 그들의 모태가 된 불멸의 존재와 닿아 있음을 상기시키는 파멸 의식과 함께 고루 퍼져 있다. 모든 피조물은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으나 필경은 극점에 이르러 파멸하고 그리고 회귀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신화는 비극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참 존재를, 파멸하는 형상이 아닌 다시 태어나는 불멸의 존재라는 측면에서 보면 신화 체계는 그리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신화 체계의 문법을 숙지하고 나면 비극적이란 표현은 천만부당하게 느껴진다. 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존재는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꿈으로 존재한다.

육체적, 생물적으로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불멸의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영혼, 예술혼.

 

4. 공간의 내부에서----생명

 

p356 신화 체계에 따르면, 우주에 있어서는 개체이든 창조적인 어버이든 그 영속적인 근본은 하나이며 따라서 동일하다. 그래서 이 신화에서는 조물주를 자아라고 부른 것이다. 동양 신비주의자는 자기 내부로 명상해 들어감으로써, 원초적인 양성 상태인 이 심오하고 영속적인 존재를 만난다.

진정한 모험은 내면적인 것.

 

5. 하나에서 여럿으로

 

p358 신화는 두 가지 양식으로 나뉜다. 하나의 양식에 따르면 조물주의 능력은 스스로 기능해 나간다. 다른 한 양식에 따르면, 조물주는 주도권을 포기하고 우주 순환의 다음 단계에서 등을 돌려버린다. 후자의 신화 양식에서 나타난 어려움은, 오랜 원초적 암혹이 계속될 동안, 창조된 자식이 우주적 어머니의 품 안에 있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

 

6. 창조의 민화

 

p366 미개한 종족의 신화들 가운데 단순한 기원 설화는 우주 발생적 순환을 깊이 암시하는 신화와 대조를 이룬다.

 

2. 처녀 잉태(The virgin birth)

 

1. 어머니 우주

 

p374 세계를 생성시키는 아버지의 정기는, 변용하는 매체(세계의 어머니)를 통해 다수의 지상적 체험으로 변한다. 이 세계의 어머니는, <‘물 위에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고 창세기 12절에 언급된 원초적 요소의 화신이다.

 

2. 운명적 모태

 

p380 우주적 여신은, 여러 가지 가면을 쓴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창조의 결과란 다양하고 복잡한 데다, 창조된 세계의 관점에서 경험할 때면 상호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어머니는 동시에 죽음의 어머니다. 이 어머니는 기근과 질병이라는 추악한 마귀의 가면을 쓴다.

이러한 대극적 가치를 신화는 늘 즐겨 쓴다. 캠벨도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의 존재가 하나이면서 또 다른 반대적 상징을 내포하는 것.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을 동시에 존재케 하는 것.

 

3. 구세주를 낳는 자궁

 

p389 사람들은 이 영혼과 육체가 더불어 뒤틀린 세계에서 다시 한 번 화신(化身)한 심상의 시가를 읊어줄 사람을 목마르게 기다린다. 우리는 우리의 전승신화에 버릇 들여져 있다.

우리는 전승신화, 영웅신화에 버릇 들여져 있다. 누군가 이미 정해져 있는 존재가 세상에 나와 구원해주리라는 기대, 믿음. 그 누군가는 꼭 있어야 한다는 것.

 

4. 미혼모의 변화

 

p393 잉태하는 능력은 도처에 널려 있다. 종착없는 생각, 혹은 시대의 숙명이 구세주인 영웅이나 세계를 파멸시키는 악마를 잉태케 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3. 영웅의 변모(Transformations of the Hero)

 

1. 최초의 영웅과 인간

 

p396 이제 우리는 두 단계를 거쳐왔다. 즉 첫째는, 비실재적 실재의 직접적인 유출에서 신화적 시대의 유동적이나 시간을 초월한 존재에 이르는 단계, 둘째는, 이 실재적 실재에서 인류 역사의 영역에 이르는 단계다. 유출은 이제 그 극점에 이르렀고 의식의 장은 이제 좁아질 대로 좁아졌다. 전에는 사상(事象)의 실체가 보였지만 이제는 그 부수 효과만 인류의 눈, 작고 현실적인 동공의 초점 앞에 모일 뿐이다. 따라서 이제 우주 발생적 순환은, 보이지 않게 된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갖춘 영웅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세계의 숙명은 바로 이 영웅들을 통해 실현된다.

 

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p400 전설을 만든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위대한 영웅들을 단순한 인간에 국한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들을 제한하는 지평을 넘어갔다가, 보통 사람에게서도 볼 수 있는 신념과 용기로 선약(仙藥)을 얻어 돌아오는 인간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전설을 만든 사람들에게 탄생의 순간, 심지어는 잉태의 순간에 영웅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웅의 생애는, 그의 모험을 절정으로 하는 엄청난 장관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관점은, 영웅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지워진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마크툽. 그렇게 귀결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운명.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존재.

p400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神性)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3. 전사로서의 영웅

 

p419 영웅이 탄생하는 곳, 혹은 영웅이 도피 또는 추방당했다가 보통 인간들 사이에서 성인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오는, 머나먼 땅은 세계의 중심, 혹은 세계의 배꼽이다. 물결이 물밑의 바닥에서 번져나오듯, 우주의 형상도 이 근원에서 둥글게 퍼져나간다.

p422 폭군은 자만한다. 그리고 자만은 바로 폭군이 파멸하는 씨앗이다. 폭군은, 자기 힘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만한다. 따라서 그는 그림자를 본질로 오인하는 광대역을 맡고 있는 셈이다. 그 시대 본연의 모습이 근원인 암흑에서 다시 나타난 신화적 영웅은 폭군을 파멸로 몰아넣은 비밀을 알고 있다. 단추 하나 누르는 듯한, 참으로 간단한 몸짓으로 그는 이 무서운 형상을 지워버린다. 영웅의 행적은 순간의 결정화(結晶化)에 대한 끊임없는 파괴 행위다. 이야기는 순환한다. 신화의 초점은 발전하는 단계에 모인다. 변모, 유동성, 일정하지 않은 무게는, 살아 있는 신의 특징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형상은 부서지고, 토막나고, 이윽고 흩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요컨대 도깨비-폭군은 불길한 사상(事象)의 옹호자이며, 영웅은 창조적인 삶의 옹호자이다.

 

4. 애인으로서의 영웅

 

p428 적과 싸워서 장악하는 주도권, 괴물과 싸워서 획득하는 자유, 폭군의 족쇄에서 풀려난 에너지는 여성으로 상징된다. 이 여성은, 수많은 용을 죽인 영웅의 애인이며, 질투심이 강한 아버지로부터 유괴되어 온 신부며, 부정한 애인으로부터 구출된 처녀다. <영웅과 영웅의 상대역인 여성은 곧 하나>이기 때문에, 처녀는 영웅 자신의 <다른 한쪽>이다. 영웅이 세계의 군주라면, 처녀는 세계이며, 영웅이 전사라면 처녀는 명예다. 처녀는, 영웅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 영웅 자신의 운명의 이미지다. 그러나 영웅이 자기 운명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사상(事象)에 현혹될 때, 영웅은 아무리 노력해도 장애물을 극복할 수 없다.

자기 운명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거부하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장애물을 극복할 수 없다면 영웅이 아닌 것, 그렇기에 영웅은 이미 정해져 있는 그대로, 마크툽!

 

5. 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

 

p432 최고의 영웅이란 우주 발생적 순환의 원동력을 추진시키는 영웅이 아니라, 눈을 다시 뜨고서 오고 가며 기쁨과 고뇌가 교차되는 세계의 파노라마를 통해 하나의 실재가 다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깨치는 영웅이다. 이러한 영웅이 되려면 보다 깊은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미심장한 개념 작용의 결과로 나타난다.

최고의 영웅이란 힘차게 전진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고뇌하고 각성하고 생각하는 이미지다. 나에게 영웅이란.

 

6. 구세주로서의 영웅

 

p440 모두들 슬퍼하지 말아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일 뿐입니다.

 

7. 성자로서의 영웅

 

p444 삶이 너머에 존재하는 이런 영웅은, 신화를 초월한 영웅들이기도 하다. 그런 영웅들은 이 삶의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다루려 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을 신화도 다룰 수 없다. 그들의 전설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하나, 경건한 자세와 그들의 전기가 전하는 교훈은 진부한 상투적 문구에서 더 나을 것이 없다. 그들은 형상의 영역을 떠나 고귀한 존재의 화신이 하강하는 곳, 보살이 머물렀던 곳, <거대한 얼굴>의 옆모습이 <현현하는> 영역으로 들어갔다. <신비에 싸여 있던> 옆얼굴이 드러나면, 신화는 부차적인 언어이며, 침묵이 궁극적인 언어가 된다. 정신신비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남는 것은 오직 침묵뿐이다.

 

8. 영웅의 죽음

 

p445 말할 필요도 없이 죽음에 겁을 먹는다면 그 영웅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영웅은 무덤과 화해할 필요가 없다. 영웅은 무덤과 소원한 적도 싸운 적도 없다. , 가까이 있었다.

 

 

4. 소멸(Dissolutions)

 

1. 소우주의 끝

 

p458 놀랄 만한 권능을 가진 막강한 영웅(손가락으로 고바르단 산을 들어올릴 수 있고, 자기 몸을 우주의 엄청난 영광으로 채울 수도 있는)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다. 거울에 비추어볼 수 있는 육체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내재하는 왕으로서다.

 

2. 대우주의 끝

p468 개인이라는 창조된 형상이 결국은 소멸되고 말듯이 우주 역시 소멸된다.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Myth and society)

 

1. 변신 자재자(變身 自在者)

 

p478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이니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르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2. 신화, 제의(祭儀), 명상의 기능

 

p479 삶의 양태에서, 개인은 인간의 전체 이미지의 단편이며 일그러진 형상일 수밖에 없다.

 

3. 오늘날의 영웅

 

p488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영웅이란 말, 보통명사화되어 자주 노출되고 있지만, 지금 이 시점, 영웅은 나타나야 한다. 제발!

 

역자후기

p490 시인적 본성은 심리학적 관심과 무관하지 않고, 심리학적 관심은 신화에의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토마스 만

 

 

3. ‘내가 저자라면

 

 

신화의 힘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머리말

 

프롤로그 원질신화

1 신화와 꿈

2 비극과 희극

3 영웅과 신

4 세계의 배꼽

 

1부 영웅의 모험

1장 출발

1 영웅에의 소명

2 소명의 거부

3 초자연적인 조력

4 첫 관문의 통과

5 고래의 배

 

2장 입문

1 시련의 길

2 여신과의 만남

3 유혹자로서의 여성

4 아버지와의 화해

5 신격화

6 홍익(弘益)

 

3장 귀환

1 귀환의 거부

2 불가사의한 탈출

3 외부로부터의 구조

4 귀환 관문의 통과

5 두 세계의 스승

6 삶의 자유

 

4장 열쇠

 

 

2부 우주발생적 순환

1장 유출

1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2 우주의 순환

3 허공에서 - 공간

4 공간의 내부에서 - 생명

5 하나에서 여럿으로

6 창조의 민화

 

2장 처녀의 잉태

1 어머니 우주

2 운명적 모태

3 구세주를 낳는 자궁

4 미혼모의 민화

 

3장 영웅의 변모

1 최초의 영웅과 인간

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3 전사로서의 영웅

4 애인으로서의 영웅

5 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

6 구세주로서의 영웅

7 성자로서의 영웅

8 영웅의 죽음

 

4장 소멸

1 소우주의 끝

2 대우주의 끝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1 변신 자재자

2 신화, 제의, 명상의 기능

3 오늘날의 영웅

 

 

  이 책은 비교신화학자로 널리 알려진 조셉 캠벨의 신화와 관련된 초기 저서이다. 캠벨은 이 책의 저술 목적을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캠벨은 전세계 각 나라의 신화와 전설의 구조가 동일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여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한마디로 캠벨은 이를 신화의 원형이라 명명했으며 융과 심리학의 이론들을 인용하여 각 나라의 영웅전설을 분석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영웅이란 신화와 전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도 인류의 무의식속에서 나타나는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영웅은 본질적으로 영웅을 위한 모험을 떠나게 되는데 그러한 영웅의 모험과정에서 통일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영웅은 출발입문귀환의 3단계를 거치며 영웅으로 변모한다.

출발단계에서 영웅은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던 중 모험에의 소명을 받고 이 소명을 거부하다가 초자연적인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첫 관문을 통과하여 성서의 요나처럼 어두컴컴한 고래의 뱃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입문단계에서는 시련을 겪고 여신을 만나 도움을 받거나 영웅을 유혹하는, 즉 방해하는 여성을 만나게 된다. 이런 시련을 통해 원만하지 못한 관계에 있던 아버지와 정신적 화해를 하게 되고 신격화의 경지에 이르거나 궁극의 공을 깨닫는 경지에 이른다. 귀환단계에서의 영웅은 귀환을 거부하고 그 세계에 머물러 있거나 그 세계를 어렵게 탈출하거나 외부로부터 구조되고 영웅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 그리고는 다시 일상생활로 귀환하여 두 세계의 스승이 되어 삶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내용을 캠벨은 1부 영웅의 모험이란 제목 아래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2부는 우주발생적 순환으로서 다양한 형태의 영웅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각 나라의 신화, 전설, 민담을 찾아 영웅의 공통 요소를 추출하여 구조를 세우고 심리학적 이론을 토대로 하여 체계를 정립하면서 그가 찾아낸 사례들을 예화로 보여주는 형태로 글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한 예화가 더욱 방대한 분량으로 나타나 있다.

 

감동적이었던 장절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구는 이것이다.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地上的)일지 모르나, 근본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영웅이 모험을 떠나고 스펙타클한 여정을 겪는 과정은 흥미롭다. 그러나 그들의 모험에 관한 이야기, 실제적인 예화들보다 캠벨이 이들 이야기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하고 주장하는 부분에 마음이 간다. 명확하지 않은 이미지들을 명료하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p44 ,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 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이러한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삶은 더 이상 도처에 도사린 재앙의 가혹한 단죄와 시간에 의한 마손(磨損)이나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받는 일이 없게 된다. 뿐인가, 공포는 눈앞에 여전히 보이고, 고뇌의 울부짖음은 여전히 귀에 들리나, 삶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는 힘의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여느 때에는 막막한 물질로 뒤덮인 생명의 심연에서 보이지 않게 타오르던 불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빛이 되어 비치기 시작한다. 저 무서운 단죄의 손길은, 그제서야 우리들 마음속의 불멸하는 우주의 그림자로 비친다. 시간은 영광의 승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세계는 더할나위없이 천사적인, 더할나위없이 단조롭고 요정의 노래처럼 매혹적인 하늘의 노래를 부른다. 행복한 가정이 다 그렇듯이, 소생한 신화와 세계는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P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palingenesia)>(우리가 갱생하지 않는다면 오래 잔존하게 되어 있다면)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갱생하지 않는다면 응보 천벌여신 Nemesis의 복수만이 우리가 얻게 되는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며, 파멸은 우리 미덕의 껍질부터 깰 것이기 때문이다.

 

p33 영웅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간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그런 사람의 상상력과 이상과 영감은 태고적부터 인간의 생명과 사상의 원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두 번째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토인비가 주장하고, 인류의 모든 신화가 보여 주듯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해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보완점

 

만화의 주인공은 참 부러워

거인 나라, 요정 나라, 별나라 다 가보고

나도 가고 싶어, 나도 가고 싶어

우주의 왕자 히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배트맨, 아쿠아맨.....히맨.

 

어릴 적부터 익숙하게 봐왔던 영웅 만화는 노래 가사처럼 못하는 것이 없다. 못 가는 곳도 없이 심지어 초능력, 마술을 부려가며 그 존재를 보여준다. 세상에 수많은 만화영화 속의 영웅들이 이 세계를 구해주리라는 믿음에 익숙해져 영웅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만 한편 만화영화 속의 영웅은 이미 그 나라의 왕이나 왕자들이었다. 2014년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현실에서 영웅은 없다.....사회를 지키고 구원해야 할 창조적 영웅의 역할은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다.

 

이미 어린이들도 영웅의 모험에 익숙해져 있다. 만화영화 속의 영웅들 역시도 캠벨이 말하듯 영웅의 여정을 고스란히 겪는다. 이와 같이 익숙한 패턴에 대해서 체계적이고 명확한 이론으로 각인시켜 흩트려진 이야기들을 정리해 주었다는 점에서 캠벨의 직관과 노력이 현재까지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있다. 특정한 나라의 신화 이야기는 분명 접하지 못할 이야기들일 것인데 이 책을 통해 그런 이야기들을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그러나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하는 토대를 심리학, 정신분석에서 가져와서 설명함으로써 이 책이 신화를 이야기하는가 정신분석을 이야기하는가 하는 생각이 약간은 들었다. 이미 정신분석은 인간의 외현적인 행동을 무의식의 작용으로 간주하여 끊임없이 무의식의 기저에 숨겨진 과거의 이야기를 찾아낸다. 궁극적으로 캠벨이 말하는 영웅도 내면탐험이라는 점에서 결국 정신분석학적인 이야기를 길게 서술한 느낌도 없지 않다.

몇 번을 읽으면 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읽혀지겠지만 번역의 문제로 봐야 할지 어색한 문체가 독해에 방해를 하는 점은 아쉬웠다. 또한 작가가 서술한 다른 신화 책에 비해서 이론의 흐름을 설명하는데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매끄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아마도 (오타의 향연과 함께 한) 1999년 출판을 읽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 책이 작가의 처음 책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문장 하나 하나를 떠나서 전체적인 맥락에서의 이 책을 보자면 그 주제, 메시지는 확실히 전달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하나 더, 거의 모든 신화와 종교에서 나타나는 여성이미지가 폄하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영웅이야기에서 여성은 영웅이 아니라 영웅의 방해꾼으로 나타난다. 전세계 그 많은 나라에서 정말로 영웅의 여정을 따르는 여성은 없었던가? 유혹자로서의 여성 이야기도 좋다. 다양한 영웅의 분류에 여성 영웅이야기를 한꼭지 첨가시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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