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어니언
  • 조회 수 3902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4년 4월 28일 11시 31분 등록

1.    저자에 관하여

  조셉 캠벨에 관해서는 그의 인생 중 가장 인상적인 세 가지 장면을 돌이키는 것으로 그를 기억하고 싶다.

그 첫 번째 모습은 뉴욕 자연사 박물관의 인디언 전시 앞에서 오랜 시간 꼼짝도 하지 않고 서있는 꼬마다. 뉴욕의 중산층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전생애를 뒤흔들어 놓은 오랜 신화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그는 부모님을 졸라 당시에 출간된 아메리칸 인디언에 관한 책을 모두 읽었다. 그는 수많은 요소들과 신화에 정통해졌고, 카톨릭 집안에서 자라 어렸을 때 수녀님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인디언 신화와 상당히 비슷한 점이 만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궁금했고 신화 가닥의 지도를 완성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두 번째는 5년 동안 숲에서 공부하던 그의 집중 공부 기간의 장면이다. 그가 교육기관에서 지원하는 공부과정을 모두 마쳤을 때,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캠벨은 그 이후의 5년(1929-1934)동안 그의 인생을 무얼하며 살 것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집중적이고 혹독하게 독립적인 공부의 시대를 시작했다. 캠벨은 이 시기를 ‘영웅의 여정’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보냈다. 그는 이 시기에 대해 하루를 4시간씩 4번 나누었다. 그중 3번은 책을 읽었고, 나머지 1번은 자유롭게 보냈다. 그는 하루에 9시간 정도를 순수하게 책을 읽으면서 지냈다. 그리고 5년동안 한결같이 그렇게 했다.

 마지막은 그가 옆 테이블에서 발견했던 바비트의 화신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그가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였다. 그는 결혼하기 전엔 점심과 저녁 식사를 마을 음식점에서 했다. 특히 목요일 밤에는 많은 가족이 브롱크스빌의 음식점으로 저녁을 먹으러 나오곤 했다. 어느 날 밤, 그는 여느 때처럼 좋아하는 음식점에 들어갔는데, 마침 그의 옆자리에 한 가족이 앉아 있습디다. 아버지, 어머니, 열 두어살 되는 아들, 이렇게 왔었다. 그는 그도 모르게 그 가족의 대화를 가만히 듣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

"네 몫의 토마토 주스는 네가 마시거라."

그러자 아들이 대답했다.

"마시고 싶지 않은걸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좀 전보다 조금 더 큰 소리를 내어 명령조로 "네 몫의 토마토 주스는 마시라니까"하고 말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먹기 싫다는데 뭘 그래요? 싫다는 건 하게 하지 말아요."

이 말을 들은 아이 아버지가 자기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랬다.

"저 좋은 것만 하고 인생을 살 수는 없는 법이야. 저 좋은 것만 하고 세상을 살려고 했다가는 굶어죽어. 나를 봐! 나는 하고 싶은 일은 평생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어."

 캠벨은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세상에, 여기에 바비트의 화신이 있었군"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신화의 힘이란 책에서 이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저렇게 말하는 것이 대단히 불행하다는 것을 생생하게 깨달았다. 캠벨의 책들은 우리가 인생의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이게끔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은 우리가 너무도 쉽게 스스로의 인생을 포기해 버린다는 데에 경각심을 갖게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2. 마음을 무찔러 들어오는 구절

6.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데 있다.

6. 신화와 민간 전설을 한곳에 모아놓고 상징으로 하여금 스스로 입을 열게 하는 일일 듯하다.

 

14. 어느 시대,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인간의 신화에는 끊임없이 살이 붙어왔고, 이러한 신화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활동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살아 있는 영감을 불어넣었다.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종교, 철학, 예술, 선사 인류 및 유사 인류의 사회적 양식, 과학과 기술의 으뜸가는 발견, 바닥째 흔들어 수면을 엎어버리는 꿈, 신화의 불가사의한 고리… 모두가 이 은밀한 통로를 지나 인류의 문화로 현현한 것들이다.

14. 놀라운 것은, 심원한 창조적 중심을 촉발하고 고무하는 특징적인 효과가 아이들 놀이방에서 굴러다니는 하찮은 동화책에도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한 방울의 바닷물이 바다의 본질을 고스란히 대표하고, 하나의 벼룩 알에 생명의 신비가 두루 깃들여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이는 신화학의 상징은 꾸며낸 것도 아니고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을 수도, 발명될 수도, 억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4. 시간을 초월한 이 환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어느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신화는 왜 어느 곳에서 채집된 것이든 그 다양한 의상 아래로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신화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16. 동물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어머니 젖가슴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16. 미완성인 상태, 세상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17. 어머니의 속박을 받아도 유아는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

17. 유아가 최초로 적의를 각는 대상은 최초로 애정을 투사하는 대상과 일치하고…

17. 유아는 아버지를 적으로 체험한다.

 

19. 무의식… 알라딘의 동굴이 뚫려 있다.

19. 일상의 삶으로 통합하지 못했던… 억압당한 심리적인 힘…

 

21. …무서운 사신으로 우리 머릿속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무섭다고 하는 까닭은, 이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 질서의 바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 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23.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며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25. 이 시기에 도전해 오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인간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궁이 아니라 남근phallus이다.

25. 자궁이라는 이름의 무덤tomb of the womb에서 무덤이라는 이름의 자궁womb of the tomb까지 완전한 순환 주기를 산다.

 

27. 왕이 된 이상 한 개인일 수 없는데도 그는 공적인 사건을 개인적인 이익으로 취했던 터였다. 수소의 재등장은, 맡은 역할의 기능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상징했던 것 같다.

27. 전통적인 통과 제의 개인에게 과거를 향해서는 죽고 미래를 향해서는 거듭 날 것을 가르쳤듯이, 저 왕위 서임 의식은 그의 개인적인 성격을 벗기고 신명이라는 망토를 입혀주었다.

 

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29. 영혼의 분열, 사회적 무리의 분열은 세월 좋던 시대로 돌아간다는 계획(회고주의)으로도, 이상적으로 설계된 미래를 보증하는 예정표(미래주의)로도, 심지어는 악화된 요소를 다기 접합시키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작업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30. 토인비 교수는 이 위기를 묘사하는데 <해detachment>과 <변transfigur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단계, 즉 해탈 혹은 물러섬withdrawal 과정은, 외적인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옮김으로써, 황무지의 절망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히 평화로운 영역으로 물러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이 영역이 바로 유아기의 무의식이다. 우리가 잠잘 때 들어가는 곳이 바로 이 영역인 것이다. 우리는 이 영역을 평생토록 우리 내부에 간직한다. 우리 유아기의 도깨비들과 은밀한 협력자들, 어린 시절의 마법이 모두 여기에 있다. 뿐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어른이 되어도 의식할 수 없는 삶의 잠재력, 우리들 자신의 또 한 부분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 황금의 씨앗은 마르는 법은 없다. 우리가 상실해 버린 이 전체성의 일부라도 나날의 현실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우리의 능력은 놀라운 수준까지 신장될 것이며, 아울러 생기 넘치는 재생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도 가능하다.

 

33.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33. 영웅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간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그런 사람의 상상력과 이상과 영감은 태고적부터 인간의 생명과 사상의 원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 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영웅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가장 차분한 답이라고 생각된다.

 

34. 조그맣고 단단한 집들이 늘어선 초라하고 질척한 거리를 지나며 거대한 도시 위쪽 변두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알지 못했지만,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나는 하수도로 통하는 듯한, 몹시 질퍽거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오두막집들 사이로 걷다가 조그만 강을 하나 발견했는데, 강은 나와 포장된 길이 있는 좀 높고 단단한 땅 사이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보기에도 상쾌한, 풀 위를 흐르는 강이었습니다. 물 밑으로 살랑거리는 풀이 보였습니다. 건너는 길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조그만 집으로 달려가 배를 빌릴 수 없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거기에 있던 남자는 물론 나를 건너게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조그만 나무 상자를 하나 내와 강가에다 띄웠는데, 순간 나는 그 상자르 딛으면 건너뛸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위험한 일은 다 겪었다고 생각하고 나니 그 사람에게 후하게 값을 치르고 싶었습니다.

이 꿈을 돌이켜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집니다. 꿈속에서와 같은 길을 택할 필요가 없었으니, 포장도로를 따라 기분 좋게 걸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나는 모험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저분하고 질퍽거리는 곳으로 갔던 곳이고, 일단 시작한 것이어서 계속 가야했던 것입니다. 꿈속에서 곧장 앞으로만 갔던 걸 생각해 보니, 당시에는 앞으로만 가면 풀밭을 흐르는 아름다운 강을 건널 수 있고 건너편에 있는 안전하고 높은 포장도로를 만날 수 있겠거니 여겼던 모양이지요. 이런 뜻에서 되씹어 보니, 영적인 의미에서 무슨 탄생의 징조, 아니, 어쩌면 재생의 징조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둡고 궂은 길을 가야 마침내 평화의 강, 혹은 우리 영혼의 목적지로 통하는 탄탄대로를 발견하게 되는 모양이지요.

 

35. 꿈을 꾼 사람은 유명한 오페라 여가수인데, 이정표가 있는 대낮의 고속도로 뿐만 아니라, 귀가 안팎으로 열린 사람에게만 들리는 희미한 소명의 모험길로도 들어설 뜻을 세운 사람답게, 예사롭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초라하고 질척한 거리>를 홀로 가야 했다. 이 여가수는 영혼의 어두운 밤, 단테의 <우리 삶의 도정에 도사린 어두운 숲> 그리고 지옥과 같은 구렁텅이의 비애도 알고 있었다.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

나를 지나면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길,

나를 지나면 길 잃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

 

37.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는, 미노타우로스의 제물이 될 아테나이의 선남 선녀를 실은 배가 도착한 순간, 미남자 테세우스에게 반하고 말았다. 아리아드네는 어찌어찌해서 테세우스에게 접근하고, 크레타에서 자기를 데리고 나가 아내로 삼아준다면 미궁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일러주겠다고 말한다. 테세우스는 그렇게 할 것을 맹세한다. 아리아드네는 장인 다이달로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다이달로스는 미궁을 만든 장본인이고, 이 미궁에 사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은 여자는 바로 아리아드네의 어머니다. 다이달로스는 아리아드네에게 실을 한 타래 준다. 미궁으로 들어가는 영웅이 한 끝을 미궁의 입구에다 매어놓고 들어가면서 풀어야 하는 실타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이 얼마나 하찮은 물건인가! 그러나 이나마 없으면 미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 모험과 다름 없는 것이 아닌가.

 

38. 미궁의 공포를 연출한 장본인인 동시에 자유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38. 사회정의의 정상적인 경계를 넘어 자기 시대의 도덕률이 아닌, 자기 예술의 도덕률에만 봉사하는 인간 유형을 대표해 왔다.

 

39.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39.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42.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44.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44.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차난 양식, 즉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45.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하늘로 올라간 신들로부터 불을 훔쳐 지상으로 내려왔다. 이아손은 바위가 서로 부딪치는 험로를 지나고 불가사의한 바다로 항해하여 황금 양털을 지키던 용을 꺾고는 양털과 찬탈자로부터 왕위를 빼앗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귀향했다. 아이네이아스는 저승으로 내려가 죽음의 강을 건넌 다음 삼두구 케르베로스에게 미끼를 던져 환심을 사고는 죽은 아버지의 망령을 만났다. 그는 모든 것, 가령, 사람들의 운명, 개국 직전에 있던 로마의 운명, 그리고 <무거운 짐을 피하거나 견딜 수 있는 방법>까지도 알게 된다. 그는 상아문을 통해 다시 이승의 삶으로 돌아왔다.

 

52-53. 대개 동화 속의 영웅은 자신의 속한 문화권의 소우주적 승리를 거두고, 신화의 영웅은 세계사적, 대우주적 승리를 거두는 게 보통이다. 또 전자(젊은이, 아니면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경멸당하는 아이)는 자신을 압제하던 상대를 이겨내는데 그치는 반면, 후자는 모험을 통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 전체의 소생에 필요한 수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52. 42)홍수 설화에서는 힘은 영웅이 젖는 것이 아니고, 영웅에 대해 작용하며, 영웅은 여기에서 좌절한다… 설화의 영웅은… 생명력의 상징이다.

 

54.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58. 은총, 양식, 에너지… 이러한 것들은 나날의 삶이 있는 이 땅으로 내려오는데, 이것들이 내려오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들은 죽을 뿐이다.

 

62.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르기를,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

62. 신화도 위대한 영웅을 위대한 도덕가로는 다루고 있지 않다.

62.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71.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이 주름의 골은 매우 깊다. 영혼 그 자체만큼이나 깊다.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73. 불안한 순간은 어머니로부터 분리될 때의 고통

73. 분리와 탄생의 순간은 불안을 야기시킨다.

73. 징그러운 동물은 무의식 심층(하도 깊어서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을 상징한다.

73. 생존의 본질이 우글거리고 있다.

73. 모험에의 소명을 알리는 전령관… 세상의 버림을 받은 존재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길을 따르면, 길은 낮의 벽을 통해 보석이 빛나는 밤으로 열린다.

 

77. 주인공은 이전에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던 사물이 이제 무가치하게 되어버리는 상황을 경험한다. 막내 공주의 세계에서처럼, 황금 공이 샘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81. 소명에의 거부는, 모험을 부정적이게 한다.

 

82. 결국 제 이득으로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82. 미노스 왕은, 그가 속한 사회의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의미로 희생을 드려야 하는 신의 수소를 사유물로 취했다. 그는, 자기 상상력보다는 경제적 이득을 앞세웠다.

 

83-84. 똑같이 숨막히고, 신비스러운 소리는 그리스의 신 아폴론에게서도 들을 수 있다. 아폴론은 평원에서 도망치는, 페네우스 강의 딸인 처녀 다프네를 뒤쫓는다. 그는 동화에서 공주가 개구리에게 그랬듯이 이렇게 외친다.

“오, 여정이여, 페네우스의 딸이여, 멈추시오! 그대를 좇는 나는 그대의 원수가 아니오. 그대는 내가 누군지 모르오. 그래서 도망치는 것이오. 원컨대 걸음을 늦추시오. 그래야 내가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 아니오? 어서, 걸음을 멈추고 그대를 사랑하는 이 몸의 정체를 물어보아 주시오.”

이야기는 이렇게 계속된다.

아폴론 신에게는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지만 처녀는 계속해서 달아났다. 아폴론은 할말도 다 하지 못했다. 달아나는 모습까지도 그에겐 아름답게 보였다. 바람이 다프네의 사지를 드러나게 했고, 맞바람이 다프네의 옷깃을 물결처럼 흐르게 했다. 다프네의 아룸다움은 도망치고 있어서 차라리 돋보였다. 그러나 추격전도 오래는 계속될 수 없었다. 사랑의 말을 전하는 데 시간을 낭비할 뜻이 없던 젊은 신은 오직 사랑으로 뜨거워져 전속력으로 달렸기 때문이었다. 고을 족 사냥개가 평원에서 토끼를 만난 형국이었다. 사냥개는 나는 듯이 달렸으나 토끼도 만만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따라 잡아 이빨로 토끼의 뒷발을 물어뜯을 것 같았다. 그러나 토끼는 잡혔는지 안 잡혔는지 모르는 채 죽자로 달리기만 하니, 덕분에 다리는 날카로운 이빨을 피하고 뒤따르던 사냥개 입은 하릴없이 허공을 물었다. 신과 처녀는 이렇게 달렸다. 신은 희망에 차서 달렸고, 처녀는 공포에 질려서 달렸다. 그러나 신이 사랑의 날개로 몰아치니 쉴 틈을 주지 않고 쫓으며, 도망치는 처녀의 어깨를 잡고 어깨에 치렁한 머리카락에 숨결을 쏟았다. 힘이란 힘은 모두 빠져 공포에 질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처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가까이 있는 아버지 강물을 보며 외쳤다.

“아버지여, 도와주소서. 아버지 강물에 아직 신성이 모자라지 않는다면, 원컨대 제가 자랑하던 이 아름다움을 변케 하든지 없이하여 주소서.”

기도가 끝나는 순간 다프네의 사지는 굳어졌고, 부드럽던 옆구리는 보드라운 나무껍질로 덮였다. 이어 머리카락은 잎이 되고, 팔은 가지가 되었다. 그처럼 날래던 두 발엔 뿌리가 뻗어나고 머리는 나무 꼭대기가 되었으나 그 아름다움만은 여전했다.

 

97. 나는 미지의 종국으로 떠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그곳에 이르는 순간, 내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 나를 갈가리 찢는 데는 한 입자의 원자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류가 힘을 모두 합치더라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101. 회교도들이 믿기로는 대부분의 진은 마호멧 교의 참 믿음을 받아들였는데, 받아들인 진은 선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진은 악하다는 것이다. 악한 진은 타락한 천사와 손을 잡고 있는데 이 타락한 천사의 두목이 이블리스(절망한 자)인 것이다.  - 절망한 자가 가장 타락한 것이다.

 

105. 이 수호자 뒤로는 어둠이며, 미지의 세계이며, 위험이다. 부모의 감시 밖이 아이들에겐 위험 지역이고, 사회의 보호 밖이 종족의 구성원들에겐 위험 지역인 것과 마찬가지다.

 

107. 미지의 땅(황야, 밀림, 심해, 타향 등)은 무의식의 내용물이 자유롭게 투사되는 무대다.

 

110. 플루타르코스는 퀴벨레의 황홀경, 디오뉘소스의 바카스적 광란, 무사이(뮤즈)에 의한 시적인 광란, 아레스(Ares=Mars)의 전투적인 광란, 그리고 이성을 뒤짚어 엎고 파괴적, 창조적 비밀을 방출하는 신에 대한 <열광>의 실례 가운데서도 가장 격렬한 사랑의 광란을 열거하는데, 이 관 밀의의 황홀경도 그 중의 하나로 꼽고 있다.

 

112.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112. 만드시 이런 괴물(몹시 위험하면서도 때로는 마법의 권능을 베푸는)과 만나야 한다.

 

122-123. 관문의 통과가 자기적멸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123. 영웅이 외부로의 관문, 즉 가시적 세계의 한계를 넘는 대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123. 이러한 괴수들은, 한 차원 심화된 내적 침묵과 만날 준비가 되지 않는 자들을 지켜주는 관문의 수호자들이다.

 

124.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124. 자아에의 집착을 끊은 영웅은 왕이 자기 궁궐에서 방방을 드나들 듯이, 삶의 지평을 넘나들거나 용의 뱃속을 드나들 수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은 여기에 있다.

 

125. 비슷한 예로서 남 인도 킬라카레 지역에서는 왕이 20년 치세를 마무리짓는 해에 날을 잡아 엄숙한 제삿날로 삼는다. 이 날에는 나무로 노천 무대를 꾸미고 위에는 비단 천 조각을 늘어뜨린다. 성대한 의식과 음악에 맞추어 목욕 재계한 왕은 신전으로 나아가 신을 경배한다. 이어서 노천 무대로 올라간 왕은 백성들 앞에서 칼을 꺼내고 코, 귀, 입술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신체 기관으로부터 되도록이면 많은 양의 살을 베어낸다. 그는 베어낸 살점을 던지며 노천무대를 도는데, 이런 행위는 출혈이 지나쳐 혼절할 때까지 계속된다. 혼절하기 직전, 그는 즉석에서 자기 목을 딴다.

이것은 미노스 왕이 포세이돈의 소를 자기 것으로 만들 당시에 치르기를 거부했던 희생제다. 프레이저가 지적했듯이 의식으로서의 국왕 가해는 고대 사회의 일반적인 관례였다. 프레이저는 이렇게 쓰고 있다.

 

126. 미노스가 괴수 미노타오로스가 되고, 자기를 희생시켜야 하는 왕이 폭군이 되고, 모두가 왕의 역할을 수행하던 제정 일치 국가가 사리 사욕만 아는 상업 국가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원전 3천년대에서 2천년대까지, 그러니까 초기 제정 일치시대 말기의 고대 국가에서는 이러한 대속물의 희생제가 관례였던 듯하다.

 

132.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133. 여전히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 충동의 유libidnal tie를 강화하고 있다.

133. 주술사란, 이러한 유아적 놀이를 주도하고, 공통의 근심거리를 밝혀내는 지도자인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방에서 성공하고 현실적인 어려움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잡귀와 대리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133. 우리 개인이 가진 과거의 유아적 심상이 분리, 초월, 변화하는 과정인 것…

 

139. 신화적 종교적 유산의 상징적 정신적 의식에 힘입어 극복해 왔던 심리학적 위험들을…

139. 혼자서 혹은 시험적, 즉흥적으로, 더러는 도움이 될만한 지침도 없이 맞서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모든 신들과 악마들의 존재를 이성의 이름으로 부정한 <개화된> 현대인인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다.

139. 심적 인자, 즉 무의식의 원형으로서의 신

 

143. 빛과 어둠을 표상하느 자애, 즉 이난나와 에레쉬키갈은 두 얼굴의 한 여신이다.

143. 하나씩 하나씩 장애는 차례로 사라진다.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시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145.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 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잠자는 여성.

 

152. 어머니의 두 유형을 드러내면서 <선>과 <악>을 통합한다. 여신의 숭배자는 이 두 유형의 어머니를 똑같이 조용히 묵상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 숭배자의 정신은 유치하고, 어울리지 않는 감상과 증오로부터 스스로를 정화하고… 존재하는 게 아니라 본성의 법과 상으로 존재하는 불가해한 실재를 향해 그 마음을 열게 된다.

 

153. 고도의 이해력을 갖춘 천재만이 이 숭고한 여신의 계시를 읽을 수 있다.

153.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여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엄청난 재앙일 수 있다. 수사슴이 된 악타이온의 예에서 우리는 이미 이런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욕망이나 놀라움이나, 공포에 반응하는, 인간으로서 엿보아서는 안 될 계시에 대해 전혀 준비다 되어 있지 않은 일개 사냥꾼에 지나지 않았다.

153. 신화학의 심상 언어에서 여자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154.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156. 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기가 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왕도란 싸움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156. 왕도가 그렇다니? 아니, 인생이 그렇다는 뜻이다.

 

157. 태양이 솟을 때 빛도 발할지니

태양에 앞서 빛은 있을 수 없다.

 

159. 삶의 상황을 수습하는 데 대한 실패는 결국 의식의 제약으로 나타나는 수밖에 없다. 싸움이나 짜증은 무식한 자들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후회는 때늦은 각성일 뿐이다.

 

160. 자신의 입장을 밝혀내야 하고 이것을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는 제약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데 필요한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

160. 도깨비들이란, 자기 인간성의 미해결 수수께끼가 투영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개인이 자기 삶을 파악하는 징후인 것이다.

160. 참으로 까다롭고 재미있는 것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 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를 윤색하고, 회칠을 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름에 빠진 파리, 우리가 먹을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누군가 다른 불유쾌한 사람의 허물로 돌리려 한다.

160.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행하는 것에는 어차피 육욕의 냄새가 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177.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때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200. 낙원은 <대립적인 것이 공coincidence of opposite>하는 곳이었는데, 이제 인간은 이 낙원의 울타리에 의해 하느님에 대한 환상과 하느님 형상에 대한 회상으로 부터 단절되었다.

200. 창조의 신비를 상징하는 기본적인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200. 하나가 둘에 이어 다수로 분열하며, 둘의 재결합으로 새 생명의 세대가 나타나는 것이다.

200. 우주 발생적 순cosmogonic cycle의 시작에 해당하는데…

 

203.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할례 다음해에, 완전한 남성이 되고자 하는 입문자는 두번째의 제의적 수술을 받는다. 이 두번째 수술은 절개 수술이다(성기의 밑부분을 요도속까지 절개하여 흉터를 만드는 것이다). 이 흉터는 <페니스 자penis womb>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남성의 질을 상징한다. 영웅은 의식을 통하여 남성 이상의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다.

 

 

204. 어머니와 누리던 유아기라는 아이의 낙원에 침입한 아버지는 원형적인 것이다. 이때부터 아이에게 있어서 평생토록 모든 적은 아버지(에 대한 무의식)를 상징한다. 그래서 <살해당한 것은 모두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머리를 자르는 습속이 있는 사회(가령 뉴기니아에서처럼)에서는 단순한 복수전이 아닌, 머리 자체를 숭배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뿐만 아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싶은 충동도 여기에서 비롯되고,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은 끊임없이 집단 폭력으로 발전한다. 그런 사회나 종종 집단에서 노인들은 토템 의식이라는 심리적 마법으로 자라나는 아들 세대로부터 자위를 도모한다. 그들은 도깨비 같은 존재로서의 아버지를 연출하는 한편,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임을 아들들에게 보여준다. 새로운 대규모 낙원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낙원은, 아직도 조직적인 공격 계획이 세워지고 있는 전통적으로 적대하던 종족이나 인종은 끼워주지 않는다. 아버지, 어머니적인 모든 <선한> 요소는 집단의 평화로 수렴되고 <악한> 모든 것은 외부로 투사된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라.

“저 할례받지 않은 불레셋의 녀석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거느리시는 이 군대에게 욕지거리를 하는 겁니까?”

 

205. 무리의 구성원들은 자기 자신의 문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헌신할 길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는 사이에 세계의 나머지 부분(그러니까 인류가 사는 세계의 대부분)은, 그 구성원들의 동정과 보호와는 상관없는 세계로 밀려난다.

 

206. 그러나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누가 뺩을 치거든 다른 빰마저 돌려대 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마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가 만일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것을 알면서 꾸어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것이다.

 

207. 우리가 일단 세계의 원형들에 대한 편협스런 교회적, 종족적, 국가적인 해석의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게 되면…

207. 구세주가 전해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듣고, 기뻐하고, 힘써 전파했지만 실천만을 끝내 꺼렸던 복음은 하느님은 사랑이며…

207. 자질구레한 신조, 예배의 방법, 교회 행정조직의 설립 같은 비교적 사소한 문제들…(종교 문제인 양 덤빈다)

 

209. 그대와 남이 다르지 않음을 알면

남을 섬길 수 있으리라.

남을 능히 섬겨 내면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나를 만나면 불성에 이르리라.

 

215. 생각은 실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다.

215. 별, 어둠, 등잔, 환영, 이슬, 거품, 꿈, 섬광, 그리고 구름. 이런 것들을 마땅히 보이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217. “좋아, 그러마. 너의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고 대답했다. 유학자는, “그게 문젭니다.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달마는, “너의 소원은 이루어졌다.”고 했다. 유학자는 그 말귀를 알아먹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223. 이 안에서는 만물이 찰나적인 동시에 영원하며, 만물이 스스로를 아는 남성과 여성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다.

 

226. 꿈은 개인의 삶이 미분화 에너지 속으로 해소되는 지점이다.

 

232. 세상을 온통 경건하게 만들어버리는, 유치한 행복에 젖어 있는 무리와 진정으로 자유로운 무리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상징은 무너지고 초월당한다.

 

269. 언제나 사소한 실수, 즉인간의 약점이라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증세이다.

 

280. <불가사의한 도망>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웅은 자아를 지키는 대신 자아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조력자의 은혜로 영웅은 자아를 되찾는다.

280. 외부로부터 구조를 받든, 내적 충동에 따라 살아나든, 신들의 안내를 받든, 영웅에게는 오래 잊고 있던 곳으로 애써 억은 전리품(홍익)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단계가 남는다. 뿐만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재생의 영약을 가지고 돌아가 원래 속해 있던 사회와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신문과 서릿발 같은 증오와 맞서야 한다. 뭐가 뭐지 영문을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281.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281. 이 잊혀진 부분의 탐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 생활에서 중요하게 보이던 두 세계의 가치나 차이는, 지금까지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하던 <타자>와 <자아>를 동화시키는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281. 정상 상태로 깨어 있는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심층에서 솟아난 지혜와, 속세에서 유용한 분별 사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한다. 그래서 미덕에서 득실 계산이 파생하고, 그 결과 인간의 존재는 타락한다.

 

282. 빛이 있는 세상의 언어로, 언어가 무용한 저 암흑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282.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첫번째 문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이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왜 그런 세상으로 되돌아와야 할까? 헛된 정열에 소진된 범상한 남자와 여자에게 왜 초월적인 은혜의 체험을 그럴싸한 것, 혹은 흥미로운 것으로 보이게 해야 하는 것일까? 밤에 꿈으로 꿀 때엔 중요하게 보이다가도 밝은 대낮에 생각하면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시인이나 예언자는 맨정신으로, 전날 밤에 했던 기도를 후회한다.

 

300. 일찍이 인간이 보지 못했던 수많은 경이로움을 볼지어다. 바로 오늘, 너는 나의 이 몸안에서, 살아 있는 것들과 살아 있지 않은 것들이 모두 하나로 이루어져 있는…

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305. 의미를실어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로 오해하면 헛된 잉크뿐만 아니라 헛된 피까지 흘리게 된다.

306. 예수는 똑 같은 것을 훨씬 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제 의미는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종교적 관행이 좇고 있는 바다.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정항을 ㅂ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at-one-ment) 즉 자기 화해(self-atone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307. 이 세상의 예외적인 존재로서 자기 입장을 합리화 하고 허위적인 자기 이미지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말하자면, 자기는 선한 자를 대표하고 있다는 간주하고, 죄악을 불가피한 것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부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합리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인간과 우주에 대한 본질에 이르기까지 오해를 불러일으키낟.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308. 영원의 원리 안에서 집착하지 않는 이승 세계의 인간이 만일 자기 행위의 결과에 초연해하고, 이를 살아있는 신의 무릎에다 올려놓을 수 있다면, 그는 이 제물에 의해 죽음의 고해에서 풀려날 수 있다.

313. 자기에게 내재하는 불멸의 존재에다 바친것이다.

313. 영웅은 생성된 것의 투사가 아니라, 생성되는 것의 투사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는 시간 속의 엄연한 불변성을, 존재의 영속성으로 오해하지 않는다.

313.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331. 우리가 우주적 능력의 근원은 보지 못하고 그 능력에서 투사된 현상계의 형태만 볼 수 있는 것은 의식이 응축되었기 때문인데, 이 의식의 응축 현상은 초의식을 무의식으로 바꾸어 놓는다.

331. 영웅은, 살아 있을 동안에, 창조 과정 중에는 지각되지 않는 초의식의 요구를 알고 이를 대리하는 자다.

332. 삶은 공주의 잠이고 죽음은 공주의 깨어남이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영웅은, 그 자신이 자기 소멸의 편의 수단일 뿐이다. 영혼을 깨우는 신은, 그 영웅과 죽음을 함께 한다.

422.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오호자다. 영웅은 암흑에서 일어서지만, 적은 힘이 세고 권능 또한 엄청나다. 적은 자기지위의 권위를 자신을 위해 행사하기 때문에 적이며, 용이며, 폭군이다. 과거를 옹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옹호한다는 이유에서 그가 바로 사슬이다.

422. 폭군은 자만한다. 그는 그림자를 본질로 오인하는 광대역을 맡고 있는 셈이다.

422. 영웅의 행적은 순간의 결정화에 대한 끊임없는 파괴 행위다.

422. 변모, 유동성, 일정하지 않은 무게는, 살아 있는 신의 특징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형상은 부서지고, 토막나고, 이윽고 흩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428. 처녀는, 영웅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 영웅 자신의 운명의 이미지다.

442. 어제의 영웅은, 오늘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내일의 폭군이 된다.

445.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445. 향긋한 냄새가 풍겨나오는 걸 알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그는, 죽음이 아름답고 빛나는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 걸 보았다.

458. 놀랄 만한 권능을 가진 막강한 영웅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다. 거울에 비추어볼 수 있는 육체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내재하는 왕으로서다.

458. 나는 모든 피조물의 가슴 안에 있는 실재다. 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459. 개인은, 생전에 자기 가슴에 반영되어 있던, 세계를 창조하는 신에 대한 근원적인 깨달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459. 허약해지면 (늙음으로든, 병으로든) 사람은 망고나 무화가나 딸기가 가지에서 놓여나듯, 그렇게 사지에서 해방된다.

463. 나는 저 비밀의 땅에서, 알에서 나온다. 죽음과 재생을 동일시하는 관념의 선언이다.

468. 개인이라는 창조된 형상이 결국은 소멸되고 말듯이 우주 역시 소멸된다.

477. 신화의 해석에는 최종적인 체계가 있을 수 없고, 앞으로도 그런 것은 있을 것 같지 않다. 신화 체계는 진실만 말하는 고대의 해신 프로테우스와 같다. 이 해신은 땅에서 기는 모든 생물, 물 속에 사는 모든 생물, 심지어는 타오르는 불꽃에게도 말을 시킬 수 있고, 그와 똑같이 변신할 수도 있다.

 프로테우스로부터 배우기를 바라는 삶의 항해자는, 그에게 바싹 달라붙어 그를 조여야 한다. 그러면 그는 온전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교활한 신은 아무리 재주 있는 질문자에게라도, 그 질문자에게 자신의 지혜의 전부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하늘 높이, 태양의 궤도 위에 솟아 있는가 하면, 문득 바닷물 속에서 이 해신은 솟아난다. 그의 말을 진실하다. 그는 서풍의 숨결을 거느리고 나타나는가 하면, 바다의 짙은 빛깔의 물결을 쓰고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게 나타난 그는 동굴 깊은 곳에 누워 잠을 잔다. 그의 주위에서 짜디짠 바닷물의 땅인 물개들이, 회색빛 바닷물 속에서 몰래 빠져나와 무리지어 잠을 잔다. 고약한 것은, 물개들이 토해내는 짜디짠 바다 밑의 냄새다.

478.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튈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으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479. 삶의 잉태에서, 개인은 인간의 전체 이미지의 단면이며 일그러진 형상일 수밖에 없다. 개인은 남성으로서, 혹은 여성으로서 제약을 받고 있다. 주어진 수명의 한도내에서 개인은 다시 유아로서, 청년으로서, 성인으로서 노인으로서의 제약을 받는다. 더구나 살면서 맡는 역할상 개인은 다시 기술자, 상인, 하인, 혹은 도둑, 성직자, 지도자, 아내, 수녀, 혹은 매춘부로 전문화한다. 개인은 이 모두일 수가 없다. 따라서 개인의 전체성은, 개별적인 구성 인자로서가 아닌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개인은 한 구성 요소일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은 이 집단으로부터 삶의 기술, 사유의 바탕인 언어, 삶의 자양인 이상을 빚졌다. 그의 육체를 이루는 유전자도 그 사회의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개인이 실제든, 상상이나 느낌을 통해서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의 절연을 의미할 뿐이다.

479. 출생, 세례, 결혼, 장례, 취임 등의 종족적인 제의는, 개인의 삶의 위기 및 행위를 표준적이고 비개인적 형식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제의는 개인의 정체를 그 자신에게 보여준다. 인격체로서의 개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사로서, 신부로서, 과부로서, 성직자로서, 추장으로서의 개인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일한 제의를 통하여, 개인이 속하는 사회는 원형적 무대에서 옛 현인의 가르침을 시연할 수 있다. 모든 구성원이 자기 지위의 기능에 따라 이 제의에 참가한다. 전체 사회는 이 제의를 통하여 마모되지 않은, 살아 있는 단위로 참가자들의 눈앞에 전개된다.

480. 이제 인간의 시야는 넓어졌다. 맡는 역할이 비록 하찮다고 하더라도 개인은 이 인간의, 아름다운 축제의 이미지에서 자기 역할이 바로 자기의 본질이었음을 깨닫는다.

481. 그러나 다른 길도 있다. 즉 사회적인 의무와 대중적 제의와는 정반대로 향하는 다른 길이 있는 것이다. 의무의 길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에서 추방된 자는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추방은, 탐색 모험의 첫 단계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이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길은 자기 내부에서 탐색되고 또 발견되어야 한다. 성별, 연령별, 직업별 차이는, 우리 인간의 특질상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어느 단계에서 우리가 한동안 입고 있는 옷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482. 이러한 명상을 통해 입문자는 자기의 심층에 이르고, 마침내 그 껍질을 뚫고 엄청난 자각에 이른다.

482. 자기 자신을 위대한 인간으로 발견한 아무개 씨는 내성적이며 초연한 인간이 된다.

482.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즉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484. 인간의 심성의,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의 교류 통로는 단절되고,… 현대 영웅의 위업은 영혼이 균형을 이루고 있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의 불을 다시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488. 현대의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491. 캠벨은, 무대가 다르고 사건이 다르고 의상이 다르지만, 인간의 무의식이 투사된 영웅, 말하자면 인간의 집단이 그려낸 영웅 신화는 거의 일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캠벨의 주장에 따르면 아폴로든, 동화 속의 왕자든, 듀톤의 신 오딘이든, 부처든, 모든 영웅은 일정한 영웅의 싸이클을 따른다. 그는, 서로 접촉이 없는 세계 각 문하권의 무수한 영웅 신화와 심층 심리학의 꿈 해석에서 재발견되는 영웅의 상징 체계를 분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 가운데서 하나의 영웅, 그러니까 모든 영웅 신화의 본이 되는 하나의 영웅을 떠올린다.

492. 오랜 세월, 우리 숨줄이 닿아 있던, 우리 육즙이 층층이 묻어 있던 문화는 이제 이 땅에 남아 있되, 오직 하나의 질투하는 신학에 가려져 있다. 신화나 종교를 보는 눈이 병적인 교조주의와 경직된 흑백의 논리에 길들어 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걸핏하면 조상이 우상으로 단죄되고, 하나의 신학을 옹호하기 이해서라면 오랜 역사 살림을 꾸려온 민족까지 우상의 자식들로 치부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 시대, 기댈 곳 없던 민중의 문화가 미신으로 업어치기를 당하고, 충정에서 우러난 비판 정신과 각자의 자유를 겨눈 정신적 편력의 간증이 사탄의 소리 수작으로 간주 되는 이 시대에, 모든 민중의 문화와 종교를 고루 짚어보며, 그 바른 뜻을 더듬는이 책을 우리글로 옮긴 뜻은 그러므로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믿음, 다른 이들의 종교라면 듣도 보도 않고 흰 눈을 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체로운 종교 정신으로 곧추세우는 데 밑바탕삼을 수 있다면, 남의 집도 좀 기웃거려 보는데 인색해서야 되겠느냐는 뜻에서다.

 

3. 내가 저자라면

 좋은 책은 몇 번을 읽어도 늘 새롭다. 예전에는 눈여겨 보지 않았던 꽃병이나 벽지에 적힌 글귀 하나가 훨씬 중요하고 무거운 표지였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예전에 적어두었던 코멘트나 줄 친 부분에서도 감상을 새로이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좋은 책을 곁에 놓고 자주 읽으면 자신의 성장을 가장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잘된 점 네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영웅으로부터 세계의 탄생과 소멸까지 겪어내는 신화의 세계를 통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표지를 찾을 수 있다. 영웅신화의 은유와 상징을 통해서 우리는 쓰레기 더미 같은 내면과 무의식의 바다에서 비슷한 조각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통해 나의 영웅 이야기는 무엇인지, 내가 지금 현재 처한 상황이 무대이며, 나의 일이 소품과 핵심 에피소드가 되고 그 안에서 내 영웅 이야기가 벌어지는 광경을 인식하게 된다.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안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를 통해 부정적인 에너지를 제대로 된 방향으로 흘려보내 도움이 되도록 변화 시킬수도 있고, 내가 지금 어떤 단계에 있는지를 깨닫고 적절하게 대처를 바꿀 수도 있다.

두 번째, 영웅의 여정을 차례로 보여준 뒤, 2부에서 더 넓은 차원의 우주 발생적 순환을 보여준 목차 또한 아주 절묘했다. 우리는1부에서 영웅의 여정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뼈대에 대해 아는 수준을 맞추었고, 그 다음에 이 여정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우주의 순환을 확인한다. 현대에서 신화가 집단무의식보다 개인의 실현에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목차는 더욱 현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더욱이 처음부터 다짜고짜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독자입장에서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중요하고 단순한 원리부터 말하고 그 다음에 응용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나의 책에도 도입해보아야겠다.

세 번째, 세계의 모든 영웅신화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은 인류의 한 끄트머리에서 모든 인류의 공통 핵심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지금 전세계 인류가 대략 60억명쯤 있다고 한다. 나는 나를 제외한 59억 9천 9백 9십 9명의 사람과 비교했을 때 아주 개성적이고 무척 중요한 사람인가? 나는 같은 인간 종족의 다른 개체들과 무엇이 다른가?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이것은 그다지 현명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 모여사는 이 세상에 뭐 그리 다르고 새로운 인간이겠는가? 게다가 전세계 인구까지 가지 않더라도 전국 모의고사나 취업준비를 해보면 내가 무척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그게 나쁘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인간이란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면의 세계에서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자기자신을 찾아가는지, 모든 인간은 그렇게 성장한다는 프로세스를 알고 나자, 나는 인류의 일원이라는 것. 아주 먼 뿌리로부터 나에게 이르는 하나의 물줄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매우 안도했다. 세상은 본질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한 법이다.

번째, 대극의 합일에 관한 개념을 전해주었다. 전혀 섞일 수 없는 것들이 사실은 같은 것이었다는 깨달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황금 같은 안식을 주는지 알게 되었다. 보통 인간이 소심해지는 이유는 두려워하는 것이 있거나, 바라는 것이 있을 경우이다. 이 두 가지에서만 놓여날 수 있다면 훨씬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수 있게 될 것이다. 다만, 이 경우, 내 삶 속에서 합일의 경험은 현재진행형이다. 목표로 세울 수 있는 상태를 신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네 번째 장점이다.

네 가지 잘된 점을 모두 모아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절은 이것이다.

21.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 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의지다.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다. 꿈틀거리는 의지는 어머니의 품처럼 안전한 곳에서는 발현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에서 나와 거친 세상에 홀로 남겨져있을 때에는 그 의지를 이 땅과 현실에 불러오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그 실현된 힘이 영웅의 능력이며, 단순히 힘을 활용하게 된 것뿐 아니라, 보다 더 큰 존재에 자신을 바쳐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얻어내는 과정이 영웅의 여정이다. 나는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가장 큰 숙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것을 나의 현실에 불러오는 방법을 많이 찾아두어야겠다. 

IP *.50.21.2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