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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8일 11시 49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조셉 캠벨:1904~1987)

1904년에 미국의 뉴욕에서 태어나 1987년에 생을 마감한 조셉 캠벨은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라는 다소 낯선 이름으로 불린다. 그는 어렸을 때 아메리칸 인디언의 민담을 듣고 감명을 받아 맨하탄의 자연사 박물관을 즐겨 찾았으며, 그 중 토템기둥에 매료되었다고 하니 이때부터 천복의 길이 시작된 행운아 중의 행운아이다. 캠밸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로마카톨릭 신앙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인디언 문화의 관련서적을 탐독했다고 한다.

캠벨은 대학을 졸업하고 영문학 석사 과정을 수료하는 동안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과 아서왕의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는 파리대학과 뮌헨대학에서 신화를 공부했다. 1929년 미국으로 돌아온 캠벨은 영문학 대신 인도철학과 미술쪽의 공부를 하기를 원했으나, 대학 측의 반대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 후 5년 가까이 칩거하면서 독서, 사색, 습작에 몰두하며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하게 된다. 누구나 부러워 하는 이 시간이 캠벨 인생에서는 불편했을지 모르지만, 그가 신화학자의 길을 가는데 밑거름을 만들어 주었을 것은 분명하다.

 1934년 미국의 명문 여자대학 새러 로렌스대학에 문학담당 교수가 되었으며, 1938년 그의 제자였던 현대무용가 진 에드먼과 결혼하여 일생을 해로한다. 그리고 이 대학에서도 38년을 재직하고 퇴직하였으며 1987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캠벨의 저서로는 세계 각지의 신화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영웅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1949)을 집필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그 후 <신의 가면>(1959-1968)을 비롯하여 <신화와 함께 하는 삶>(1972), <신화의 이미지>(1974), 그리고 최후의 역작인 총 25권의 <세계신화지도>(1983-1989) 등을 펴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중에게 어필되지 못했다. 그가 대중에게 각인된 것은, 저명한 방송인 빌 모이어스와 죽기 전에 한 대담이 사후 1988년 미국의 PBS 방송국을 통해 방송되면서 신화가 현대에 미치는 영향을 알려주면서 이다. 이것이 <신화의 힘>(1998)을 탄생시켰다.

 캠벨은 영웅의 삶을 살았다.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라고 한 그의 말처럼 캠벨은 진정한 이 시대의 영웅이다. 아무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천복을 발견하고 평생을 매진할 수 있었으며 캠벨이 노력한 신들과의 통역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이 어려운 책을 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놀랍게도 1949년도에 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1980년대 후반이었지만, 대중과의 언어에 맞추는 노력을 조금 더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캠벨의 책을 2권 읽어보았지만 그의 책이 왜 사후에 대중에게 어필되었는지 알 것도 같다. 하지만 캠벨의 상징성은 스스로 영웅이 되었고 그것을 동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의 영웅이 될 것을 어필하였기에 더 호소력이 짙게 느껴진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프롤로그: 원질신화>

1 신화의 꿈

13 즉 변화 무쌍한 듯하지만 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야기의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중략) 말하자면, 아무리 읽고 들어도 이런 이야기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는 암시다.

14 한 방울의 바닷물이 바다의 본질을 고스란히 대표하고, 하나의 벼룩 알에 생명의 신비가 두루 깃들여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이는 신화학의 상징은 꾸며낸 것도 아니고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을 수도, 발명될 수도, 억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누구라도 아무리 작은 미물도 신화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없으며 개체는 전체를 나타내기도 한다.

14 시간을 초월한 이 환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어느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신화는 왜 어는 곳에서 채집된 것이든 그 다양한 의상 아래로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신화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16~17 인간이 가진 심성 중에 가장 끈질기게 남는 성향은, 동물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어머니 젖가슴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중략) 따라서 유아가 최초로 적의를 갖는 대상은 최초로 애정을 투사하는 대상과 일치하고, 유아가 최초로 갖는 이상은 (이때부터 유아는 축복, 진리, 아름다움, 완전함이라는 이미지를 무의식 기저에다 간직한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Madonna and Bambino라는 이원일체 상황이다.

 

19 무의식은 꿈을 통해서, 혹은 벌건 대낮에, 아니면 정신 착란을 이용하여 갖가지 부질없는 몽상과 기이한 상념과 공포와 정신을 어지럽히는 허상을 마음으로 올려보낸다.

 

21 그러나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자기발견이란 과거를 파멸하고 미래를 재건하는 신화적 영역을 말하며 이것을 공포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했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21~22 이런 이미지에 유념하고 원시 종족 사회나 과거에 융성했던 문명 세계로부터 보고된 갖가지 제의를 검토해 보면, 우리는 이러한 제의의 목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적 삶의 패턴은 물론, 무의식적 삶의 패턴까지 변화를 요구하는 변형의 문턱을 넘게 하려는 데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그런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22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제의적 시련과 이미지가, 정신 분석을 의뢰한 환자가 유아기 고착 상태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하는 순간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참으로 놀랍다. 그렇다면 건강한 성인으로 가기 위해서는 언젠가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유아기의 상처를 돌아보아야 하는 걸까?

 

23 신화의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24 그래서 남편들은 소년 시절이라는 이름의 신전에서, 아들에 대한 부모의 소원이던 법률가, 실업가, 혹은 지도자를 섬기고 있는가 하면, 아내들은 결혼한 지 14, 두 아이를 낳아 길러놓고도 여전히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다.

>사랑 타령은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으며 이 말대로라면 나는 아직도 소녀시절의 신전에서 벗어나오지 못한 것이 아닌가.

.

24 이 비의적 이미지는 우리 심성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만일 이 이미지들이 신화와 제의를 통해 외부에서 들어오지 않으면, 꿈을 통해 내부에 나타나게 된다. 그래야 우리의 에너지가 심해의 바닥이나 진부하고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유아의 놀이방의 동화책에서 풀려날 수 있는 것이다.

>유아의 놀이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나는 무엇일까?

 

28 이 입지전적인 독재자의 에고는, 아무리 세상에선 성공을 거두었을지라도 사실은 자신과 이 세계에 종말을 고하는 사자다.

 

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여지껏, 영웅은 세계사적으로 뭔가 큰 업적을 세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영웅도 자기 극복을 하지 않은 자가 없으며, 평범한 사람도 자기 극복을 통해서 자신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자기 극복이라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의미한다. 자기를 극복하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니이를 영웅이라 표현한 조셉 캠벨의 말이 천 번이라도 맞다.

 

30 영웅의 첫 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도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나가되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즉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유아기 악마에게 싸움을 걸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G. 융의 소위 <원형의 심상>과의 동화 작용을 시도한다.

>영웅은 자기만의 문제 해법을 가지고 있다.

 

33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33 따라서 영웅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간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중략) 그래서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 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사회 재생에 대해 이상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 또한 영웅의 조건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영웅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

 

37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내부의 소명도 외부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다.

>나의 소명은? 나는 소명을 찾았는가? 소명에 대해 마음을 바칠 준비를 마쳤는가? 지금 소명을 위해 잘 가고 있는가?

 

37 미궁으로 들어가야 하는 영웅이 한 끝을 미궁의 입구에다 매어놓고 들어가면서 풀어야 하는 실타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이 얼마나 하찮은 물건인가! 그러나 이나마 없으면 미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 모험과 다름 없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이 존재의 이유를 갖고 있으며, 귀함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38 아리아드네가 그랬듯이 우리도 이 사람에게 달려가 보자. 그는 실타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아마를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들판에서 거두었다. 수세기에 걸친 경작, 수십 년에 걸친 채집, 수 많은 가슴과 손의 힘겨운 작업

>어느 것이든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는 것은 없다. 겸손한 마음으로 그 동안의 노력과 기술을 배운다면, 다이달로스가 될 수 있을가? 우리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갖을 수 있을까?

 

39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나 자신을 죽이고 넘어서야 자신의 신을 만날 수 있으며 나의 중심을 볼 수 있으리라.

 

2 희극과 비극

39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그렇구나! 성공의 이유에 공통분모가 있듯이, 실패의 이유에는 항상 여러 가지 핑계가 앞서기 마련이다. 행복과 불행도 같은 색깔을 하고 있었구나.

 

41 <운명에의 사랑 amor fati>, 즉 필멸의 운명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비극적 예술의 체험을 구성한다. 그 기쁨, 구원의 황홀은 바로 그 안에 있다.

 

42 하늘의 신화가 삶의 발자국을 뒤로 남기고 밤의 문턱에 설 준비가 된 노인의 것이듯, 동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나라의 것이며, 현실로부터 보호받고 있기는 하나 조만간에 거덜날 운명에 놓여 있다.

 

42~43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양자를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 kathodos and anodos,인 것이다.

>사람이나 사물에 애착이 있지 않으면 비극이란 없을 것이다. 지나친 욕심이 항상 화의 근원이 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 가지 사건, 사고가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희극은 꺼지지 않는 희망에서 보여진다. 삶은 이 비극과 희극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극이 없을 수는 없을까? 잠깐 생각을 해보지만 삶의 비극이 없다면, 희극도 없어지는 운명을 갖고 있기에 이 둘의 조화가 원망스러운 시점이다. 너무 큰 비극은 사람을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또 절망과 좌절의 늪을 주기도 하기에 주저앉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옆에서 보기에도 버거운 슬픔을 갖은 사람은 어떤 삶의 이유와 노력으로 자신의 영웅을 만날 수 있을까? 아마도 보통 사람의 곱절의 노력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43 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44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 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 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이러한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삶은 더 이상 도처에 도사린 재앙의 가혹한 단죄와 시간에 의한 마손이나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받는 일이 없게 된다.

>우리가 위인이라 부르는 이순신장군이나 세종대왕, 에디슨 등 수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외부보다는 내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한계를 넘어선 사람들이다. 자신과의 싸움을 극복한 사람들이 무엇이 두렵겠는가?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것은 자신을 극복하는 일이지만 성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에 성공의 열매를 맛본 사람을 신이라 부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수 있겠다.

3 영웅과 신

 

44 시간은 영광의 승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세계는 더할나위없이 천사적인, 더할나위없이 단조롭고 요정의 노래처럼 매혹적인 하늘의 노래를 부른다. 행복한 가정이 다 그렇듯이, 소생한 신화나 세계는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44~45 ,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출발-à입문-à회귀의 순환 고리를 말해준다.

 

50 장소가 어디 건, 그들의 관심(종교적, 정치적, 혹은 개인적)이 어디에 있건 진정한 것으로부터 세상으로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행위로 표현되며, 영웅의 부재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가 거듭난 자, 위대한 자, 창조력을 얻어 돌아오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류 역시 한 목소리가 된다.

 

4 세계의 배꼽

 

58 왜냐하면 신의 화신으로서의 영웅은, 영원의 에너지가 시간성 안으로 흘러드는 배꼽, 즉 세계의 배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연속적인 창조의 상징, 모든 사물 안에서 약동하는 소생의 연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세계 보전의 신비인 것이다.

 

61~62 결국, <전체>는 도처에 있으며, 도처가 권능의 자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화에서는 한 자락 풀잎도 구제자의 모습을 가릴 수 있고, 이 방랑하는 구도자를 구도자 자신의 가슴에 있는 지성소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1부 영웅의 모험>

 

1장 출발

 

71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것이긴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이 주름의 골은 매우 깊다. 영혼 그 자체만큼이나 깊다.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우연도 필연의 이름을 가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지도 않은 우연이 빚어내는 삶의 빛깔을 많이 보았다. 왜 하필이면 그때 그런 우연을 만났을까? 생각해보면 잘은 모르지만 어느 부분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의 외침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의식도 정리가 안 되는데 무의식의 세계를 어떻게 장담하고 관리할 수 있겠는가?

 

82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즉 자신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83 당사자는 유아기의 벽에 갇혀 있다. 이 경우 아버지나 어머니는 문턱을 지키는 사람으로 버티고 있어서, 그들의 징벌을 두려워하는 소심한 영혼은 문을 열고 외부 세계로 나오는, 재생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87 그러나 인격이 이 새로운 힘을 흡수하고 통합할 수 있으면 당사자는 자기 의식의 초인간적인 단계 및 완전한 통제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95 네 발을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네 손을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네 머리를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그럼 네 발은 꽃가루, 네 손은 꽃가루, 네 몸은 꽃가루. 네 마음은 꽃가루, 네 음성도 꽃가루. 길이 참 아름답기도 하고, 잠잠하여라.

>나에게도 이런 주문이 하나 정도 있었으면 좋겠다.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라는 말이 묘하게 사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105 이렇게 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삶을 거부하던 카마르 알 자만의 운명은 의식적인 의지의 협력이 없이도 완성되기 시작했다.

>삶의 곳곳에 놓여 있는 경이로움은 인간의 혀로는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7 도깨비여, 왜 내가 두려워하겠는가? 태어나면 어차피 한번은 죽게 되어 있는데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더구나 내 뱃속에는 벼락이라는 무기가 하나 더 있다. 그대가 나를 먹는다고 하더라도 벼락은 삭이지 못할 것이다. 이 벼락은 그대 뱃속에서 그대를 갈가리 찢어 필경은 그대 목숨을 빼앗을 것이다. 결국 그대가 나를 먹으면 우리는 둘 다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오무기 태자의 배짱과 용기가 부럽다. 자기 지혜에 대한 확신도 부럽다.

 

120 한 짝을 이루는 대립물(즉 존재와 비존재, 생과 사, 미와 추, 선과 악, 희망과 공포의 기능을 통합하고 방어와 습득 행위를 일으키는 기관을 연계시키는 그 밖의 양극성)은 여행자를 향해 서로 부딪쳐 오는 바위Symplegades이며, 영웅은 항상 이 길을 지난다.

 

120 태양 문을 통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122 굉장한 숲과, 큰 강과 높은 고원을 보았다. 한쪽에는 바위가 많았는데 여기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건설하고 있었다. 개도 많았고, 가축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이 코끼리의 뱃속에 들어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코끼리는 어쩌면 선입견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실지의 공포가 아닌 내 마음 속의 공포이며 두려움인지도 모르겠다.

 

124 자아에의 집착을 끊은 영웅은 왕이 자기 궁궐에서 방방을 드나들 듯이, 삶의 지평을 넘나들거나 용의 뱃속을 드나들 수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은 여기에 있다. 그의 죽음과 회귀는, 모든 현상계의 대립물이 창조되지 않은 불멸의 존재임을 들어내는데 여기에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자아에의 집착을 끊는다는 것이 과연 범인으로서 가능한 일일까?

 

126 미노스 왕이 지내기로 되어 있는 수소의 희생제는 8년 주기의 마지막 해에, 전통에 따라 미노스 왕 자기 자신이 희생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대용물로 아테네의 선남 선녀를 바친 듯하다. 미노스가 괴수 미노타오로스가 되고, 자기를 희생시켜야 하는 왕이 폭군이 되고, 모두가 왕의 역할을 수행하던 제정 일치 국가가 사리 사욕만 아는 상업 국가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원전 3천년대에서 2천년대까지, 그러니까 초기 제정 일치 시대 말기의 고대 국가에서는 이러한 대속물의 희생제가 관례였던 듯하다.

>그렇구나! 그 시발점이 미노스왕이었구나. 삶의 모습이 이렇게 같을 수가.

 

2장 입문

 

139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의 낙원에 들어가려 하느냐.

 

143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영웅은 이 적대자를 통하여 진정한 자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143 시련은 첫 관문의 문제를 심화시키고 질문은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자아가 스스로를 죽음에 내어맡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154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지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이 될지 말지는 나의 선택이다. 혜안이 필요한 부분이다.

 

156 ‘…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기가 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왕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왕도란 싸움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지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왕도가 그렇다니? 아니, 인생이 그렇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생이 이리도 치열한 것인가 보다. 하지만 외부적인 치열이 아니라 내부적인 치열에 더 집중해야 자신이 원하는 왕도를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양자의 조화로움이 필요할 것 같다. 현실 속에서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을 최고로 아는 물질만능주의에서 이 조화는 영원한 미궁일지도 모른다.

 

160 참으로 까다롭고 재미있는 것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 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를 윤색하고, 회칠을 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름에 빠진 파리, 우리가 먹을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누군가 다른 불유쾌한 사람의 허물로 돌리려 한다.

>그래서 내가 하는 남의 험담이 대부분 자신을 향한 험담일 때가 많은가 보다. 나와 똑 같은 모습이 튀어나온 못처럼 눈과 마음에 거슬려 그것을 참아내지 못하는가 보다. 어떤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관대해지기 때문에 줄어드는데, 어떤 부분은 더 확고해지면서 참지 못하는 부분이 생기는 것 같다.

 

187 죽음의 주인 지하 세계의 태양은, 날을 내리고 날을 다스리는 빛나는 왕의 다른 면이다.

 

192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영웅은 영혼의 문을 열어 공포를 극복하고, 이 광대무변하고 무자비한 우주의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을 존재의 존엄성 속에서 완전하게 해소할 수 잇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영웅은 자기 몸에 박힌 가시(약점)을 통해 삶을 초월하여, 한순간이나마 그 근원을 투시한다. 그는 여기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와 자기가 화해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는다.

 

194 아들이 아버지를 알 나이가 되면 시련의 고뇌가 이미 그의 내부에 태동해 있다. 세상은 더 이상 눈물의 골짜기가 아닌, 행복이 기다리는 현존의 완전한 현현이다.

 

198 즉 영원의 보석이 탄생과 죽음의 연화 속에 들어 있다는, <옴 마니 밧메 홈>인 것이다.

 

203 영웅은 의식을 통하여 남성이상의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다.

 

207 우리는 일단 세계의 원형들에 대한 편협스런 교회적, 종족적, 국가적인 해석의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게 되면, 우리가 전수받아야 할 최상의 도리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서슴없이 이웃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만 자애스런 아버지의 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게 가능해진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사람들의 경지가 마땅히 이러해야 할 것이다.

 

213 열반이라는 말은,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겹의 불을 끈다>는 뜻이다.

 

215 마지막 <미망과 욕망과 적의의 적멸>(즉 열반)과 더불어 마음은, 생각이 실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참된 경지에 들어간 마음은 안식을 얻는다. 상태는 육체가 사윌 때까지 계속된다.

 

223 이러한 명상의 촉매를 보는 전통적인 시각 중의 한 시각에 따르면, 여성적 형상, 즉 티베트 어의<yum>은 찰나로, , <yab>은 영원으로 보아야 한다. 이 양자의 결합은 이 세계를 창출한다. 이 안에서는 만물이 찰나적인 동시에 영원하며, 만물이 스스로를 아는 남성과 여성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다.

 

224 <말씀이 곧 육신이다> <보석이 연화 속에 있다>인 것이다.

 

232 우리 모두가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는 유아기적 환상은, 불멸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신화와 동화와 교회의 가르침에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현상은, 마음이 이러한 이미지와 더불어 안식을 찾는다는 뜻에서, 그리고 예부터 익히 알려져 있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의미에서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온통 경건하게 만들어버리는, 유치한 행복에서 젖어 있는 무리와 진정으로 자유로운 무리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상징은 무너지고 초월당한다.

>이 글을 읽으니 나는 확실히 유치한 행복에 젖어 있는 무리와 진정으로 자유로운 무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존재인 것을 알겠다. 아직도 어떤 환상을 갖고 있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이 깨져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이런 것이 사람한테 투영된 적이 많았기에 상처도 또한 많이 받았다. 이것을 나는 대책 없는 긍정이라 생각했는데, 내 안에 아직 유아기가 많이 남아있음을 알겠다.

 

3장 귀환

 

256 인간으로 살고 업을 쌓을 때 저는 닥치는 대로 살고 닥치는 대로 업을 쌓았습니다. 인간이 나고 죽기를 여러 번 할 동안 저는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어디에서 쉬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저 뛰고 괴로웠습니다. 저는 근심을 기쁨으로 잘못 알았습니다. 사막 위로 나타나는 신기루를 시원한 샘물로 알았습니다. 제가 기쁨을 잡으면 손 안에 남는 것은 고통뿐이었습니다. 왕의 권능, 지상의 소유, 부와 권력, 벗과 자식들, 아내와 추종자들 이 모든 존재는 제 오감을 홀렸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것이 되는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은 그 본성을 벗고 불길이 되었습니다.

>욕망은 그렇게 욕망을 먹고 사나 보다. 이런 삶도 별로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욕망을 쫓아본 사람만이 내려놓는 의미도 알 테니까. 그곳의 유혹을 끝내 뿌리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길게 머물 곳은 되지 못한다. 

 

263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다. 동양에서는, 엄격한 지도와 감독 없이 심리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에서의 요가 수련은 몹시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수련자의 명상은 그 발전 단계에 따라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수련자의 상상력은 데바타(devata: 수련자의 수준에 알맞은 신성)에 의해 각급 단계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 정신을 수련한 다음에야 수련자에게 홀로 초월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 온다.

>무릇 요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닌 듯 하다. 모든 것은 적정한 때가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269 두 세계의 상호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소한 실수, 즉 인간의 약점이라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증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소한 일만 피하면,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269 그러나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귀환의 문턱에 도사리고 있는 위기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80 외부로부터 구조를 받든, 내적 충동에 따라 살아나든, 신들의 안내를 받든, 영웅에게는 오래 잊고 있던 곳으로 애써 얻은 전리품(홍익)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단계가 남는다. 뿐만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재생의 영약을 가지고 돌아가 원래 속해 있던 사회와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신문과 서릿발 같은 증오와 맞서야 한다. 뭐가 뭔지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282 빛이 있는 세상의 언어로, 언어가 무용한 저 암흑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2차원의 평면으로 3차원의 형상을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한 쌍의 대립물에 대한 정의의 시도가 무의미한데, 어떻게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말로 이를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오로지 감각의 배타적 증거에만 급급하는 일반인에게 어떻게 저 만유의 근원인 공을 설명한단 말인가?

 

282 왜 그런 세상으로 되돌아와야 할까? 헛된 정열에 소진된 범상한 남자와 여자에게 왜 초월적인 은혜의 체험을 그럴싸한 것, 혹은 흥미로운 것으로 보이게 해야 하는 것일까?

 

294 카마르 알 자만의 기나긴 이야기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운명이 일상의 삶으로 구체화되는 완만하면서도 놀라운 역사다. 그러나 이 운명이 모든 이에게 다 구체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체험하고, 반지를 얻어 다시 현실로 귀환한 영웅에게만 가능하다.

 

297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말하자면 시간을 초월한 세계인 저승과, 일상적인 세계인 이승을 두루 돌아다니는 자유(그것도 한 세계의 원리로 다른 세계를 오염시키지 않되, 한 세계의 선으로써 다른 세계의 존재를 깨우치면서)는 거장들의 재능에나 어울리는 자유다.

>말만 들어도 멋지다.

 

299 지금 우리가 관심 갖는 것은 상징 체계이지 역사성은 아닌 것이다.

>역사성에 초점이 가려는 것을 상징성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호 같은 부분들이 많이 있다.

 

306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at-one-ment>, <자기 화해 self-atone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법Law은 그 안에서 거침새가 없다.

>나를 잊고 나를 버리면 그곳에서 나의 신을 만나는 것이다.

 

307 이러한 자기 합리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인간과 우주에 대한 본질에 이르기까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313 탈리에신은 마귀를 두려워했지만, 바로 그 마귀에 의해 삼켜졌고, 그래서 재생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자아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313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서 피타고라스가 생각난다.

 

4장 열쇠

 

<2부 영웅의 모험>

 

1장 유출

 

326 신화 체계란 전기나 역사, 그리고 우주론으로 오독되어온 심리학이다.

 

333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러한 상징이 인간의 운명, 인간의 희망, 인간의 믿음, 인간의 어두운 신비의 메타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333 개인의 의식이 잠이 들어 밤의 바다로 하강하고, 다시 거기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신화의 메타포에서도 우주는 시간을 초월한 배후에서 떠오르고, 원기를 회복하다 다시 소멸된다.

 

333 우주 발생적 순환은 우주 자체의 반복, 즉 끝없는 세계로 표상된다. 각 순환의 주기 안에는 소멸의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삶이 잠과 깨어 있음의 주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338 우주 발생적 순환에 의해 설명되는 철학적 공식이란, 존재의 세 단계를 통한 의식의 순환을 말한다. 그 첫 단계는 깨어나는 체험의 단계, 즉 태양의 조명을 받고, 만물에 공통된 외계 우주의 험난하고 총체적인 사실들을 인식하는 단계다. 두 번째 단계는 꿈 체험의 단계, 즉 꿈을 꾸는 당사자와는 본질상 도일한 개인적 내부 세계의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를 인식하는 단계다. 세 번째 단계는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 꿈을 꾸지 않는 지복의 단계다. 첫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삶에 관한 교훈적인 체험과 만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소화되어 꿈을 꾸는 당사자의 내적인 힘에 동화되며 세 번째 단계에서는, 내부적 통제자가 들어앉은 방 안, 모든 것의 근원이자 끝인 상태, <마음속에 있는 공간>안에서 모든 것을 즐기고 의식할 수 있게 된다.

 

340 오래된 이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었고, 미지의 존재 중에서도 가장 미지의 존재인 그에겐 형상이 있되 형상이 없다. 그분은 우주를 보존하므로 형상이 있으나, 감지될 수 없다는 뜻에서 형상이 없다.

 

342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368 세계의 정돈, 인간의 창조, 운명의 결정은 모든 원시 창조자 이야기의 전형적인 주제들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물음은 인간 본연의 관심사인가보다.

 

373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 신화들은 인간의 상황을 평가한다는 본질적인 점에 있어서 위대한 신화들과 차이가 없다. 이런 신화 체계의 상징적인 등장인물은 의미상(특징 및 행적에서도) 고급 종교의 성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치하며, 이 등장인물이 넘나드는 불가사의한 세계는 위대한 계시의 세계, 즉 깊은 잠과 깨어 있는 의식 사이에 놓인 세계와 시간, 하나가 여럿으로 갈라지고, 여럿이 하나와 화해하는 지대와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다.

>신기할 뿐이다. 어쩌면 지구촌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지구가 태어나고 그곳에 인간이 정착하면서 생겨나지 않았을까.

 

2장 처녀의 잉태

 

380 우주적 여신은, 여러 가지 가면을 쓴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창조의 결과란 다양하고 복잡한 데다, 창조된 세계의 관점에서 경험할 때면 상호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어머니는 동시에 죽음의 어머니다. 이 어머니는 기근과 질병이라는 추악한 마귀의 가면을 쓴다.

 

389 이제 문제는 인간이 사는 세계다. 열왕의 실제적인 심판과, 천상적 계시의 주사위인 사제들의 가르침에 주눅이 든 나머지 의식의 장은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인간의 이야기라는 대서사시는 목적이 서로 모순되는 분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인간의 시야도 이제는 좁아져 오직 가시적이고, 손에 잡히는 존재의 표피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심연을 투시할 전망은 이제 사라졌다. 인간 고뇌의 의미 심장한 형상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다. 사회는 오류와 재난 속으로 빠져든다. <소자아> <대자아>의 재판석을 강탈했다.

>이쯤에 이르니 광활한 우주와 전세계를 돌아보고 드디어 인간 세계에 발을 붙인 느낌이다. 그런데 인간의 세계는 또 다른 신이 필요하겠구나.

 

3장 영웅의 변모

 

396 유출은 이제 그 극점에 이르렀고 의식의장은 이제 좁아질 대로 좁아졌다. 전에는 사상의 실체가 보였지만 이제는 그 부수 효과만 인류의 눈, 작고 현실적인 동공의 초점 앞에 모일 뿐이다. 따라서 이제 우주 발생적 순환은, 보이지 않게 된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갖춘 영웅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세계의 숙명은 바로 이 영웅들을 통해 실현된다.

 

398 영웅적인 업적이나, 인류 문화의 기초 작업은 다 이런 시대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러한 업적은 원형적 인간 및 초인간에 의해서만은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가 도래한다. 말하자면, 정열의 절제, 예술의 폭발적인 발달, 경제 구조의 태동, 문화적인 기관의 대두를 통한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월우의 화신이나, 운명의 팔괘라는 초월적 지혜가 아니라, 자신의 필요와 희망에 따라 행동하는 완전한 인간 정신이었다.

>자신의 필요와 희망에 따라 행동하는 완전한 인간정신….생각만 해도 소름끼칠정도로 황홀하다.

 

400 그러나 전설을 만든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위대한 영웅들을 단순한 인간에 국한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들을 제한하는 지평을 넘어갔다가, 보통 사람에게서도 볼 수 있는 신념과 용기로 선약을 얻어 돌아오는 인간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전설을 만든 사람들에겐 탄생의 순간, 심지어는 잉태의 순간에 영웅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웅의 생애는, 그의 모험을 절정으로 하는 엄청난 장관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관점은, 영우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지워진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402 실제 역사적 인물의 행위가 영웅적인 것이었다면, 이 전설을 만드는 사람은 그를 위해 영웅의 모험과 그 심도가 유사한 정도의 모험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모험이 바로 초자연적인 영역으로의 여행인데 이 여행이 독자에 의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라는 밤바다로의 여행,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의 삶으로 구체화라는 인간의 운명의 측면, 혹은 영역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409 문제의 숙명적인 아기는 기나긴 암흑의 기간을 견디어야 했다. 이 기간은 극히 위험하고, 장애물이 많은 상황이며, 치욕을 당하는 기간이다. 그는 자기 내부로 깊이, 혹은 미지의 세계로 던져졌다. 어느 경우든 그를 당혹케 하는 것은 미지의 암흑이다.

 

414 늪에 이르는 내리막길에는 바위가 하나 있었다. 거기에 부딪히자 물항아리가 깨어지면서 소년이 나왔다. 그는 자기 껍질이 부서지고 비로소 소년, 아주 크고 잘생긴 소년이 된 것을 몹시 기뻐했다. 소년은 진주 목걸이에, 옥 귀걸이까지 걸고 무도회용 치마, 가죽신, 가죽 저고리 차림을 하고 있었다. 여러 마리의 토끼를 잡아 외조부에 바치니, 외조부는 의기양양 소년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소년의 용기가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물항아리가 깨질 때 고통도 느껴졌지만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신한 소년에게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고 싶었다. 진정으로 아름답다.

 

422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이다. 영웅은 암흑에서 일어서지만, 적은 힘이 세고 권능 또한 엄청나다. 적은 자기 지위의 권위를 자신을 위해 행사하기 때문에 적이며, 용이며, 폭군이다. <과거>를 옹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옹호>한다는 이유에서 그가 바로 사슬이다.

>쇠사슬, , , 폭군과거의 옹호자를 나타내는 말이다. 과거를 단절하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나게 해주는 단어들이다. 나도 번번이 과거의 습관에 발목을 잡힐 때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고개가 숙여졌었다. 자신을 넘어서는 사람을 왜 신이라고 표현하는지 충분히 공감이 간다.

 

428 적과 싸워서 장악하는 주도권, 괴물과 싸워서 획득하는 자유, 폭군의 족쇄에서 풀려난 에너지는 여성으로 상징된다. 이 여성은, 수많은 용을 죽인 영웅의 애인이며, 질투심이 강한 아버지로부터 유괴되어 온 신부며, 부정한 애인으로부터 구출된 처녀다. <영웅과 영웅의 상대역인 여성은 곧 하나>이기 때문에, 처녀는 영웅 자신의 <다른 한쪽>이다. 영웅이 세계의 군주라면, 처녀는 세계이며, 영웅이 전사라면 처녀는 명예다. 처녀는, 영웅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 영웅 자신의 운명의 이미지다. 그러나 영웅이 자기 운명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사상에 현혹될 때, 영웅은 아무리 노력해도 장애물을 극복할 수 없다.

>영웅 옆에 있는 여자의 존재의 이유를 알겠다. ‘영웅이 세계의 군주라면, 처녀는 세계이며, 영웅이 전사라면 처녀는 명예다.’ 둘은 하나이며 따로 존재한다면 영웅으로서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432 그러나 최고의 영웅이란 우주 발생적 순환의 원동력을 추진시키는 영웅이 아니라, 눈을 다시 뜨고서 오고 가며 기쁨과 고뇌가 교차되는 세계의 파노라마를 통해 하나의 실재가 다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깨치는 영웅이다. 이러한 영웅이 되려면 보다 깊은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심장한 개념 작용의 결과로 나타난다. 첫번째 영웅의 상징이 명검이라면 두번째 영웅의 상징은, 권위의 홀장, 혹은 율법서다. 첫번째 영웅의 특징적인 모험이 신부(신부는 곧 삶이다)를 얻는 것이라면, 두번째 영웅의 특징적 모험은 아버지를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이 아버지는 곧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다.

 

441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 시험자, 무섭고 잔인한 왕)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양이 될 생명의 에너지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과업은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서도 성취될 수 있고, 그 의지를 거스르고도 성취될 수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아니 어쩌면 신이, 그에게 스스로 자식을 위한 제물이 되라는 의지를 심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중략) 어쨌든 용(아버지)은 어디에든 있다. 소산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치 탈환으로 늘어만 간다. (아버지)은 우리 삶이 걸린, 죽음이다. <죽음은 하나인가, 여럿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그가 거기에 있는 한 그는 하나지만, 여기 자식들 안에 있을 때는 여럿이다.” 어제의 영웅은, 오늘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내일의 폭군이 된다.

 

442 아들은 아버지를 시해하지만,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은 원초적인 혼돈 속으로 해소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 종말 그리고 재개의 비밀이다.

>아버지에 의해서 아들은 진정한 아들일 수 있으므로.

 

4장 소멸

 

458 놀랄 만한 권능을 가진 막강한 영웅(손가락으로 고바르단 산을 들어올릴 수 있고, 자기 몸을 우주의 엄청난 영광으로 채울 수도 있는)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다. 거울에 비추어볼 수 잇는 육체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내재하는 왕으로서다. 크리슈나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모든 피조물의 가슴 안에 있는 실재다. 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468 여보게들, 십만 년이 흐르면, 우주 순환 주기가 다시 시작된다네. 이 세계는 파멸에 들 것이고, 바다는 마를 것이네. 이 넓은 땅, 산들의 왕인 수메루 산이 불에 타, 브라마의 세계는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될 것이네. 그러니 여보게들, 선의를 이 땅에 넘치게 하소. 연민과, 기쁨과, 평등이 여기에 넘치게 하소.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고, 집안 어른들을 섬기소.

>나의 삶이 10만년 만에 재생된 삶이라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고귀한 선물인가.

 

469 인간으로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기간 동안, 보다 작은 단위의 주기들은 결국에 가사 종말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이 오랜 세월에서 몇 년 정도의 차이가 난들 어떠랴?

 

472 그때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잡아 법정에 넘겨 갖은 고통을 겪게 하고, 마침내는 사형에 처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 서로 배반하고 서로 미워할 것이며 거짓 예언자가 여기저기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또 세상은 무법 천지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요즘 사회를 보면 언제인지 모를 그때가 가까이 와 있는 느낌이다.

 

473 무화가 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 알아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484 현대인은, 나비가 고치에서 나오듯, 새벽의 태양이 어머니 밤의 자궁을 빠져나오듯이, 현대인은 고대의 무지로부터 빠져나왔다.

 

488 인간은 아득한 존재와 더불어 끝나야 하고, 이 아득한 존재를 통해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해야 하며, 이 사화의 이미지 전체가 개선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러나 <>가 아닌 <>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기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아 있는 불멸의, 놀라운 신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488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이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장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작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신에 대한 세 번째 책이고, 조셉 캠벨에 대한 두 번째 책이라 조금 쉬울 것이라는 착각을 한 것이 대단한 오판이었다. 원작자가 잘못인지 번역자가 잘못인지, 해석되지 않는 문구를 만날 때마다 누군가를 탓하기 바빴다. 저자도 이야기 하듯이 이차원의 세계를 살면서 어찌 3차원의 세계를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으랴. 이 책을 읽고 난 느낌은 10만년만다 온다는 우주의 순환주기를 처음부터 현대까지 시간여행과 공간여행을 한 느낌을 준다. 겨우 40년 남짓 산 나로서 그 광대한 시공간을 보여준다 하여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로 구성된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 들었던 좌절을 위로로 바꾸어 가며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해독할 수 없는 부호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책의 목차와 전체적인 뼈대>

 

<프롤로그: 원질신화>

1 신화의 꿈

2 비극과 희극

3 영웅과 신

4 세계의 배꼽

 

<1부 영웅의 모험>

  1. 출발

    1 영웅에의 소명

    2 소명의 거부

    3 초자연적인 조력

    4 첫 관문의 통과

    5 고래의 배

     

  2. 입문

    1 시련의 길

    2 여신과의 만남

    3 유혹자로서의 여성

    4 아버지와의 화해

    5 신격화

    6 홍익

     

  3. 귀환

        1 귀환의 거부

        2 불가사의한 탈출

        3 외부로부터의 구조

        4 귀환 관문의 통과

        5 두 세계의 스승

        6 삶의 자유

  4. 열쇠

     

    <2부 영웅의 모험>

  1. 유출

    1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2 우주의 순환

    3 허공에서-공간

    4 공간의 내부에서-생명

    5 하나에서 여럿으로

    6 창조의 민화

     

  2. 처녀의 잉태

    1 어머니 우주

    2 운명적 모태

    3 구세주를 낳는 자궁

    4 미혼모의 민화

     

  3. 영웅의 변모

    1 최초의 영웅과 인간

    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3 전사로서의 영웅

    4 애인으로서의 영웅

    5 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

    6 구세주로서의 영웅

    7 성자로서의 영웅

    8 영웅의 죽음

     

  4. 소멸

    1 소우주의 끝

    2 대우주의 끝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1 변신 자재자

        2 신화, 제의, 명상의 기능

        3 오늘날의 영웅

     

    프롤로그에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하였다. 이 부분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면 책 전체가 보이지 않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부분은 필사를 하며 몇 번을 곱씹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필사의 맛과 내 손으로 활자화 하는 순간 의미가 마음에 새겨지는 진기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모호한 부분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 책은 제1, 2부의 제목이 <영웅의 모험>이다. 1부는 영웅의 구원적인 행적을 검토한 것이고, 2부 영웅의 행적은, 형이상학적 비의의 상징을 나타냈다. 즉 영웅 자신의 행적이 재발견되고 재해석되어야 하는 대목이었다.

     

    전체적으로 내용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목차와 어울림이 없어 보인다. 활자에 집중하다 보면 목차를 잊게 되어 몇 번씩 확인을 하며 읽어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1권의 책에 너무 많은 양을 담으려다 보니 어지럽고 혼미한데, 이것을 테마별로 나눈다면 읽기가 훨씬 편했을 것 같다.

     

    <감동적이었던 장과 절>

     

    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37 미궁으로 들어가야 하는 영웅이 한 끝을 미궁의 입구에다 매어놓고 들어가면서 풀어야 하는 실타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이 얼마나 하찮은 물건인가! 그러나 이나마 없으면 미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 모험과 다름 없는 것이 아닌가.

     

    83 당사자는 유아기의 벽에 갇혀 있다. 이 경우 아버지나 어머니는 문턱을 지키는 사람으로 버티고 있어서, 그들의 징벌을 두려워하는 소심한 영혼은 문을 열고 외부 세계로 나오는, 재생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95 네 발을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네 손을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네 머리를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그럼 네 발은 꽃가루, 네 손은 꽃가루, 네 몸은 꽃가루. 네 마음은 꽃가루, 네 음성도 꽃가루. 길이 참 아름답기도 하고, 잠잠하여라.

     

    232 우리 모두가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는 유아기적 환상은, 불멸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신화와 동화와 교회의 가르침에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현상은, 마음이 이러한 이미지와 더불어 안식을 찾는다는 뜻에서, 그리고 예부터 익히 알려져 있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의미에서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온통 경건하게 만들어버리는, 유치한 행복에서 젖어 있는 무리와 진정으로 자유로운 무리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상징은 무너지고 초월당한다.

     

    282 빛이 있는 세상의 언어로, 언어가 무용한 저 암흑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2차원의 평면으로 3차원의 형상을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한 쌍의 대립물에 대한 정의의 시도가 무의미한데, 어떻게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말로 이를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오로지 감각의 배타적 증거에만 급급하는 일반인에게 어떻게 저 만유의 근원인 공을 설명한단 말인가

     

    422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이다. 영웅은 암흑에서 일어서지만, 적은 힘이 세고 권능 또한 엄청나다. 적은 자기 지위의 권위를 자신을 위해 행사하기 때문에 적이며, 용이며, 폭군이다. <과거>를 옹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옹호>한다는 이유에서 그가 바로 사슬이다.

     

    488 인간은 아득한 존재와 더불어 끝나야 하고, 이 아득한 존재를 통해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해야 하며, 이 사화의 이미지 전체가 개선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러나 <>가 아닌 <>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기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아 있는 불멸의, 놀라운 신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려웠지만 본문의 내용 중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어 좋았다. 긍정적인 나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유치한 유아기적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멀리 있는 남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영웅을 고대 신화들의 영웅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오늘도 5번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으로 일상에서의 영웅을 추구하고 찾게 하는 것은 대단히 큰 일이다. 어쩌면 캠벨은 이것을 사명처럼 느끼고 실현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저자라면>

    -일단은 이렇게 어렵게 표현하지 않겠다. 하지만 역자는 이런 표현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는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지 않고…’ 어느 장면은 부호인지 글자인지 구분이 안 가기도 했다. 진정한 고수는 어려운 것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너무 자기 세계에 갇혀있고 자기만의 언어를 고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과 소통하기 힘든 책은 현실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삽화와 글과 어우러지지 않는다. 삽화에 주석이 없고 삽화 앞뒤의 내용과 연결 지어지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여러 페이지를 건너뛴 것들도 많았다. 편집의 오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삽화의 의미는 책의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함인데, 그렇지 못한 것들이 눈에 띄었다.

     

    -어떤 해석은 도저히 연결성이 없어 보인다. 물론 저자는 사실성보다는 상징성에 초점을 두고 표현했다고 하였지만 저자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교육과 사고를 하고 있는 우리 세대로서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아주 힘든 부분들이 있었다. 억지로 작가의 관점에 맞추어진 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와 같은 독자가 없으려면 더 자세한 안내가 필요할 것 같다.

     

    -카마르 알 자만왕자와 가주르 왕의 공주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세 부분에 나뉘어 나오는데, 이것을 한 눈에 표현하고 부연설명을 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

     

    -신화, 옛이야기, 민간전승영웅의 이야기면 너무 종횡 무진하다 보니 읽는 사람이 정신이 없고 기운이 빠졌다. 현재의 시점으로 다시 대대적인 편집을 하여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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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4 19:05:47 *.160.136.124

잭 제목 그대로 신화란 녀석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인듯 합니다.

그러하기에 하나의 생각과 시각만으로 받아 들이기에는, 난해함의 동반됨이 당연한 것이겠죠.

당시 책을 읽고난후 저의 한줄 느낌은 이러하였습니다.

조셉 캠벨님의 내공.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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