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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8일 11시 58분 등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10기 김정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 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 1904~1987


1) 생애

조셉 캠벨은 1904년 뉴욕 주 화이트플레인스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로마가톨릭 신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에 큰 관심을 갖고 관련서적을 탐독했다. 다트머스 대학에서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지만, 나중에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서 중세 영문학으로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한다.


1927년 캠벨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고 유럽으로 건너가, 이후 2년 동안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공부한다. 1929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영문학 대신 인도 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려 하지만, 대학 측의 반대로 결국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다. 때마침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가 불황을 맞이한 상황에서, 캠벨은 이후 5년 가까이 칩거하며 독서와 사색, 그리고 습작에 몰두한다.


1934년에 캠벨은 미국의 사라 로렌스 칼리지에 문학 담당 교수로 부임하고, 1972년 퇴직하 FEO까지 38년 동안 재직한다. 그리고 그 사이인 1938년에 제자였던 현대무용가 진 에드먼과 결혼한다.


캠벨은 어려서부터 관심사였던 인류학과 민속학을 바탕으로, 비교종교학과 분석심리학 등의 이론을 이용하여 신화와 종교 연구를 지속해 명성을 얻는다. 그의 대표작인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1949)은 세계 각지의 신화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영웅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주목을 받았다.


조셉 캠벨이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PBS 빙송국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 ‘신화의 힘’(1988)이었다. 그의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결국 사후에 방영된 이 프로그램에서, 캠벨은 저명한 방송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통해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에 관해 설명했다. 이 프로그램을 토대로 한 대담집<신화의 힘>은 오늘날까지도 신화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조셉 캠벨은 1987년 10월 30일,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에 아내인 진은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조지프 캠벨 재단을 설립하고, 캠벨의 유고와 대담, 그리고 강의록 등을 정리, 출간하고 있다.


2) 저서
- 신화의 힘 1988
- 신의 가면 (4부작) 1959-1968
- 신화와 함께 하는 삶 1972
- 신화의 이미지 1974
- 세계신화지도 총 2부 5권 1983-1989
- Where the Two Came to Their Father: A Navaho War Ceremonial (1943). with Jeff King and Maud Oakes, Old Dominion Foundation
- The Flight of the Wild Gander: Explorations in the Mythological Dimension (1968). Viking Press
- Myths to Live By (1972). Viking Press
- Erotic irony and mythic forms in the art of Thomas Mann (1973; monograph, later included in The Mythic Dimension)
- The Mythic Image[61] (1974). Princeton University Press
- The Inner Reaches of Outer Space: Metaphor As Myth and As Religion (1986). Alfred van der Marck Editions
- Transformations of Myth Through Time (1990). Harper and Row
- A Joseph Campbell Companion: Reflections on the Art of Living (1991). editor Diane K. Osbon
- Mythic Worlds, Modern Words: On the Art of James Joyce[62] (1993). editor Edmund L. Epstein
- The Mythic Dimension: Selected Essays (1959–1987)[63] (1993). editor Anthony Van Couvering
- Baksheesh & Brahman: Indian Journals (1954–1955)[64] (1995). editors Robin/Stephen Larsen & Anthony Van Couvering
- Thou Art That: Transforming Religious Metaphor (2001). editor Eugene Kennedy, New World Library ISBN 1-57731-202-3. first volume in the Collected Works of Joseph Campbell
- The Inner Reaches of Outer Space[65] (2002)
- Sake & Satori: Asian Journals — Japan[66] (2002). editor David Kudler
- Myths of Light: Eastern Metaphors of the Eternal[67] (2003). editor David Kudler
- Pathways to Bliss: Mythology and Personal Transformation[68] (2004). editor David Kudler
- Mythic Imagination: Collected Short Fiction of Joseph Campbell[69] (2012).


2.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머리말
5
종교 교의에 녹아 들어 있는 진리는 대개가 변형된 데다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로 알아보지 못한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6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데 있다. 옛 현자들은 말을 하되 언외의 뜻을 거기에다 실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따라서 그분들의 상징적 언어를 거듭 읽되 그 가르침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고문집 편집자의 재주쯤은 갖추고 있어야 할 듯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징의 문법을 터득해야 할 터인데, 저자가 알기로는 이 문을 여는 열쇠로 정신분석학 만한 현대적 길잡이는 따로 없을 듯하다. 이 말을 금과옥조로 삼지 않고는 정신분석학의 안내를 받기 어렵다. 다음 단계는 세계 각처에서 채집된 신화와 민간전설을 한곳에 모아놓고 상징으로 하여금 스스로 입을 열게 하는 일일 듯 하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면 그 유사성이 한눈에 두드러져 보이고,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오랜 세월 삶의 길잡이로 삼아온, 방대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일정한 상태로 보존된, 바탕되는 진리와 만나게 된다.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프롤로그
원질 신화

13
아무리 읽고 들어도 이런 이야기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는 암시다.

14
어느 시대,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인간의 신화에는 끊임없이 살이 붙어 왔고, 이러한 신화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활동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살아 있는 영감을 불어넣었다.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종교, 철학, 예술, 선사 인류 및 유사 인류의 사회적 양식, 과학과 기술의 으뜸가는 발견, 바닥째 흔들어 수면을 엎어버리는 꿈, 신화의 불가사의한 고리…… 모두가 이 은밀한 통로를 지나 인류의 문화로 현현한 것들이다.
놀라운 것은 심원한 창조적 중심을 촉발하고 고무하는 특징적인 효과가 아이들 놀이방에서 굴러다니는 하찮은 동화책에도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한 방울의 바닷물이 바다의 본질을 고스란히 대표하고, 하나의 벼룩 알에 생명의 신비가 두루 깃들여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이는 신화학의 상징은 꾸며낸 것도 아니고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을 수도, 발명될 수도, 억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시간을 초월한 이 환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어느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신화는 왜 어느 곳에서 채집된 것이든 그 다양한 의상 아래로는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신화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15
최신형 오이디푸스의 화신, 미녀와 야수의 속편이 오늘 오후에도 뉴욕의 42번가와 50번가 모퉁이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21
꿈을 읽는 현대 과학인 정신분석학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이 같은 비현실적 이미지에 유념하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정신 분석학은 이러한 이미지가 스스로 기능하게 하는 방법도 발견했다.

의사는 갑자기 나타나 무서운 용을 죽일 수 있는 빛나는 마법의 칼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며, 영웅의 치명적인 상처에다 고약을 발라주고, 마침내 원수를 물리치고는 어느 황홀한 밤에 모험을 떠난 길을 되짚어 정상적인 생활이 기다리는 세계로 돌아오게 한다.

22
원시 사회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른바 통과 제의는 이런 단계의 마음가짐이나, 애착이나, 생활 패턴으로부터 심적으로 단절된다는 의미에서 형식상으로 특이하고 극히 가혹한 단절의 체험이 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한 차례의 통과 제의가 있는 다음에는 다소 느슨한 휴지 기간이 뒤따르는데, 이 기간에는 인생을 살아갈 당사자를 새로운 시대의 형식과 적절한 감정 상태로 유도하는 절차가 있다. 그래서 마침내 정상적인 생활로 되돌아 올 때가 되었을 때 입문자를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제의적 시련과 이미지가, 정신분석을 의뢰한 환자가 유아기 고착 상태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하는 순간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24-25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저작에서 인간이 사는 삶의 순환 주기 중 전반부의 통과와 그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는 태양이 천정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시기인 유아기와 사춘기까지 이 시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C. G. 융은 후반기의 위기를 강조했다. 즉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 빛나는 태양이 마침내 그 고도를 떨어뜨리고 무덤이라고 하는 밤의 자궁 속으로 사라지기 위해 기를 꺾어야 하는 시기를 말한다. 우리는 욕망과 공포의 정상적인 상징이 인생의 오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도전해 오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인간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궁이 아니라 남근이다. 그렇지 않다면 삶의 염증이 이미 심장을 죄고 있었을 테고 한때 사랑이 유혹이었던 지복의 약속으로 부르는 것은 삶이 아니고 죽음일 터이다. 우리는 자궁이라는 이름의 무덤에서 무덤이라는 자궁까지 완전한 순환 주기를 산다.

27
(미노타우로스 신화) 고대 전설에 따르면, 더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왕비가 아니라 왕 쪽이었다. 그는 자기 허물을 알고 있던 참이어서 왕비를 비난할 수 없었다. 왕이 된 이상 한 개인일 수 없는데도 그는 공적인 사건을 개인적인 이익으로 취했던 터였다. 수소의 재등장은, 맡은 역할의 기능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상징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이를 자기 소유로 하는 행위는 이기적인 자기강화에의 충동을 나타낸다. 이렇게 해서 <신의 은총을 입고 즉위한> 왕은, 자기 자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위험한 폭군이 되었다. 전통적인 통과 제의가 개인에게 과거를 향해서는 죽고 미래를 향해서는 거듭 날 것을 가르쳤듯이, 저 왕위 서임 의식은 그의 개인적인 성격을 벗기고 신명이라는 망토를 입혀주었다.

28
권력망가(세습에 의하지 않고 힘으로 정권을 잡은 참주)는 세계의 신화, 민간 전승, 전설, 심지어는 악몽에도 익히 등장하는데, 그 특징은 어디서건 동일하다. 그는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다. 그는 <내 것>이라는 탐욕스러운 진리에 걸신들린 괴물이다. 그가 저지른 황폐의 참성은 그의 세력권 안에 두루 널려 있는 것으로 신화와 동화는 한결같이 그리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집안,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심성, 우정과 도움을 빌미로 그의 손길에 시들어버린 생명일지도 모른다. 오만에 빠진 폭군의 자아는, 그의 사업이 제아무리 번창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 그의 말에 저주를 내린다. 대개는 제어하기 어려운 자신의 충동적 소유욕의 그림자인, 예상했던 주위의 공격에 스스로 놀라고 겁을 집어먹고, 만나는 족족 싸우고 격퇴시키는 이 입지전적인 독재자의 에고는, 아무리 세상에선 성공을 거두었을 지라도 사실은 자신과 이 세계에 종말을 고하는 사자다. 그의 손길이 미치는 곳에는 절규가 있다. (담 너머로 들리지 않다면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서 들리는 비참한 절규다). 빛나는 칼을 든, 일격으로, 일거수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땅을 자유롭게 할 대속자인 영웅을 부르는 절규다.

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토인비 교수가 A Study Of History에 달하는 문명의 영고 성쇠의 법칙에 관한 연구서에서 지적했듯이, 영혼의 분열, 사회적 무리의 분열은 세월 좋던 시대로 돌아간다는 계획(회고주의)으로도, 이상적으로 설계된 미래를 보증하는 예정표(미래주의)로도, 심지어는 악화된 요소를 다시 접합시키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작업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는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우리가 이 땅에서 오래 잔존하게 되어 있다면)이 있어야 한다.

죽음이 승리하는 날이 오면 죽음이 다가온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는 길뿐,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길뿐이다.

30
창조작업의 회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을 위한 위기가 따르는데, 토인비 교수는 이 위기를 묘사하는데 <해탈>과 <변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단계, 즉 해탈 혹은 물러섬 과정은, 외적인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옮김으로써, 황무지의 절망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히 평화로운 영역으로 물러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이 영역이 바로 유아기의 무의식이다. 우리가 잠잘 때 들어가는 곳이 바로 이 영역인 것이다. 우리는 이 영역을 평생토록 우리 내부에 간직한다. 우리 유아기의 도깨비들과 은밀한 협력자들, 어린 시절의 마법이 모두 여기에 있다. 뿐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어른이 되어도 의식할 수 없는 삶의 잠재력, 우리들 자신의 또 한 부분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 황금의 씨앗은 마르는 법이 없다. 우리가 상실해 버린 이 전체성의 일부라도 나날의 현실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우리의 능력은 놀라운 수준까지 신장될 것이며, 아울러 생기 넘치는 재상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는 더 높이 솟아야 한다.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 세대, 나아가서는 우리의 문명 시대가 잊어버리고 있던 것들을 얼마간이라도 건져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저 위대한 천품의 시혜자, 시대의 문화 영웅(한 나라뿐만 아닌 세계 역사상의 귀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영웅이 첫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나가되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즉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유아기 악마에게 싸움을 걸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G. 융의 소위 <원형 심상 Archetypal images)>과의 동화 작용을 시도한다.

31
잠잘 때나 꿈속에서 우리는 인간성의 사고를 꿰뚫어 체험한다. 내 말은, 수 천년 전에 인간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꿈속에서 사유한다는 것이다. 꿈은 우리를 인류 문화의 이런 상태로 데려가고, 그때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 것이다.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중에서

동양 종교와 서양 종교에서 더러 발견되는 유사성은 다른 나라, 다른 하늘 아래에서도 인간의 마음은 유사하듯이 유사한 동기에서 비롯한, 우리가 줄잡아 유연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름아니다. – 제임스 프레이저 <황금가지> 중에서

33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두번째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 (토인비가 주장하고, 인류의 모든 신화가 보여주듯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해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35
꿈을 꾼 사람은 유명한 오페라 여가수인데, 이정표가 있는 대낮의 고속도로뿐만 아니라, 귀가 안팎으로 열린 사람에게만 들리는 희미한 소명의 모험 길로도 들어설 뜻을 세운 사람에게, 예사롭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초라하고 질척한 거리>를 홀로 가야 한다. 이 여가수는 영혼의 어두운 밤, 단테의 <우리 삶의 도정에 도사린 어두운 숲> 그리고 지옥과 같은 구렁텅이의 비애도 알고 있었다.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
나를 지나면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길,
나를 지나면 길 잃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
- 단테 신곡 지옥편, 지옥문에 씌인 글

36
건너기 어려운 날카로운 칼날
시인은 노래했거니, 이것이 험로라고
- 오의서(奧意書, Katha Upanishad) 우파니샤드는 인성과 우주에 관한 힌두의 철학서인데, 정통파 후기 언어사유파는 주로 이 철학서를 근간으로 이루어진다. 그 기원은 기원전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7
사람들은 주로 무의식적으로 시민 및 종족으로서의 정례를 따름으로써 대부분 위험 부담이 적은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 역시 구원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대속자들에 의해 아득한 옛날, 인류에게 주어져 수천 년간 계승되어 온, 사회의 상징적 도움이라는 미덕, 통과 제의, 은총으로 입은 성사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다.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내부의 소명도 외부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다. 오늘날의 우리 대부분은 가슴 안팎으로 이 미궁을 안고 있다는 이야긴데 아, 미노타우르스와 맞설 용기를 심어주는 미궁 탈출의 단서와, 괴물을 만나 도륙한 다음 우리를 자유의 길로 이끌어줄 안내자, 저 아름다운 아리아드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38
재미있는 것은 죄 많은 왕을 섬기는 바로 이 장인이, 미궁의 공포를 연출한 장본인인 동시에 자유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영웅은 우리로부터 먼 데 있지는 않을 것 같다. 수세기 동안 다이달로스는 장인 및 과학자, 기이할 정도로 냉담하고, 거의 악마적인 현상의 상징, 사회정의의 정상적인 경계를 넘어 자기 시대의 도덕률이 아닌, 자기 예술의 도덕률에만 봉사하는 인간 유형을 대표해 왔다. 그는 단순하고 용기에 차 있으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영웅이다.

39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할 것이다.

40
연민이란,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고통 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보이지 않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 제임스 조이스

41-42
현대 문학은 우리들 앞에, 우리들 주위에, 우리들 내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참담하게 부서진 형체를 직시할 용기와 눈길을 부여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대학살의 참상에 불만을 토로하는 자연스러운 충동을 억압당한 곳에서, 비난도, 만병 통치약을 외칠 수도 없는 곳에서 비극 예술의 중요성은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유효하다.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던 비극은, 신들이 파국을 맞는 대신전에서는 물론, 채찍에 찢긴 얼굴들이 들어 앉은 평범한 가정에서까지 십자가에 매달리는, 현실적이고, 본질적이며 흥미 본위의 민주주의의 비극이다. 거기에는 마왕에의 공포를 덜어줄 천국, 내세의 천복, 보상에 대한 핑계 대신 오직 자궁에서 하릴없이 튀어나온 생명을 받아 먹어 치우는 무위의 공허, 절대적인 어둠이 있을 뿐이다.

43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양자를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인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나, 아무것도 죽지는 않는다. 영혼은 여기저기를 방황하다 마음에 드는 뼈대를 취한다……. 따라서 한번 존재한 것은 다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ㅇ낳았던 것은 존재하게 되니, 모든 운행의 주기는 반복한다.

이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지만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실재 self는 영원하며, 불멸이며, 무한이니라.

44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즉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47
해 지기 전에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정복자는 초저녁에 자기의 전생을 알았고, 한밤중에는 사물을 두루 꿰뚫는 혜안을 얻었으며, 새벽녘에는 인과를 깨쳤다. 그는 날샐 무렵에 완전한 정각을 얻었던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십자가에 못박히는 상태에 대응하는 동양 신화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정각수(보리수) 아래의 부처와 십자가 나무 위의 그리스도는 유사한 것으로, 원형적인 세계의 구원자와 태고의 유물인 세계수 모티프를 통합한다. 이 테마의 변형은 앞으로 소개하는 이야기에서 자주 발견될 것이다. 부동의 자리와 갈보리 산은 세계의 배꼽, 혹은 세계의 축의 이미지다. 대지의 여신에게 자신의 권리를 확인시키는 모습은 전통적인 불교 예술의 불상에 나타나 있다. 고전적인 부처의 좌상은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손가락은 가볍게 땅에다 대고 있다.)

50
동양 전체는 고타마 부처가 깨친 은총 (참 법의 놀라운 가르침)의 축복을 받았듯이, 서양은 모세의 십계명의 축복을 받아왔다.

이러한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모험의 고전적 단계를 두루 꿰는, 수많은 영웅적인 인물을 따라가 보아야 할 듯하다. 이러한 작업은 당대의 삶과 관련된 이미지의 의미뿐만 아니라 야망, 권력, 영고 성쇠, 그리고 지혜로서의 인류 정신의 단일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51
지금까지 개개인의 운명을 담는 세계의 상징적인 그릇인 수많은 이야기를 복합적인 모험의 형태로 소개해 보겠다. 첫번째 단계, 즉 <분리>, 혹은 <출발>의 단계는 제1부, 제1장에서 다섯 개의 소제목으로 나뉜다. 즉,
1) 모험에의 소명, 혹은 영웅 소명의 표적
2) 소명의 거부, 혹은 신으로부터의 우매한 도주
3) 초자연적인 조력, 즉 어느 수준까지의 모험에 도전한 사람에 대한 뜻밖의 도움
4) 첫 관문의 통과, 그리고
5) 고래의 배, 혹은 밤의 영역으로의 여행이다.

<시련과 입문의 성공>은 제2장에 6개의 소제목으로 소개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시련의 길, 혹은 신들의 위험한 측면
2) 여신 Magna Mater 과의 만남, 혹은 다시 찾은 유아기의 행복
3) 유혹자로서의 여성, 오이디포스 고뇌의 체득,
4) 아버지와의 화해
5) 신격화 Apotheosis
6) 궁극적인 홍익 弘益 이다.

<회귀와 사회와의 재통합>은 정신 에너지가 세계로 흘러 들어오는 연속적인 순환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과정이고, 영웅이 속한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영웅의 오랜 후퇴에 대한 변명이 되나, 영웅 자신에게는 가장 어려운 필요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웅이 부처처럼 승리를 거두고 완전한 정각 상태에 들어버린다면 이 경험의 만족감이 세상의 슬픔에 대한 그의 기억과 흥미와 희망을 없앨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53
대개 동화 속의 영웅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소우주적 승리를 거두고, 신화의 영웅은 세계사적, 대우주적 승리를 거두는 게 보통이다. 또 전자(젊은이, 아니면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경멸 당하는 아이)는 자신을 압제하던 상대를 이겨내는데 그치는 반면, 후자는 모험을 통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 전체의 소생에 필요한 수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54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55
비슷한 환상은 묵시적인 <이브의 복음>에도 등장한다.

나는 높은 산 위에 서서 거인과 난장이를 보았다. 천둥 소리 같은 음성이 들려 나는 자세히 들으려고 다가갔다. 그 분은 나에게 이르셨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네가 어디로 가건 나는 거기에 있다. 나는 없는 곳이 없으니, 원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으라. 나를 찾는 것은 곧 너를 참음이다.’

이 둘(영웅과 그의 궁극적인 신, 찾는 자와 찾아지는 자)은 결국, 이 세계의 신화에 다름 아닌 단일한 유형적 신비의 표리로 받아들여진다. 위대한 영웅은 위대한 행적을 통해, 이 다양한 얼굴이 사실은 하나임을 알고, 또 남들에게 알리게 된다.

58
신의 화신으로서의 영웅은 영원의 에너지가 시간성 안으로 흘러드는 배꼽, 즉 세계의 배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연속적인 창조의 상징, 모든 사물 안에서 약동하는 소생의 연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세계 보존의 신비인 것이다.

59
세계의 배꼽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세상의 하고 많은 선과 악을 두루 산출한다. 추한 것, 아름다운 것, 죄악과 미덕, 쾌락과 고통이 모두 이 세계의 배꼽의 공평한 산물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르기를,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고 했다. 세계의 사원에서 섬김을 받는 대상은 늘 아름다운 것도, 늘 자비로운 것도 아니며, 덕이 높을 필요가 없다. <욥기>에 나오는 신처럼, 기들은 인간의 가치척도를 저만큼 앞지른다. 마찬가지로, 신화도 위대한 영웅을 위대한 도덕가로는 다루고 있지 않다. 미덕 역시, 최고의 직관 앞에서는 케케묵은 훈장의 읊조림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직관은 짝짝으로 된 상대적 반대개념을 초월한다. 미덕은 자기 중심적인 자아를 완화시켜 범개인적 중심성을 지향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이 가능했다면 고통이나 쾌락, 미덕이나 악덕, 우리의 자아 혹은 남들의 자아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초월적인 힘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 안에 사는 자, 모든 것 안에서 훌륭한 자,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섬김이 타당한 자에게 감득되는 것이다.

60
한 문화가 신화 안에서 인간 존재의 면면이나 그 문화의 면면을 키워 나갈 때, 그 문화는 상징적인 암시와 함께 싱싱하게 살아난다.

64
도덕 군자가 의분을 금치 못한 대목에서, 비극 서사시인이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느낄 대목에서, 신화는 장엄하고 무시무시한 신곡을 향해 온전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신화의 제신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 즉 창조자의 무자비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비극적인 자세를 신경질적인 것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근시안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란 무자비하면서도 공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요컨대 제때에 나고 죽는, 자기 중심적이며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 불명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제 1 부 영웅의 모험

81
미노스 왕처럼 이 모험의 주인공 역시 초인적인 노력으로 예사롭지 않은 제국을 건설하는 데엔 성공할 지 모른다. 그러나 무슨 집을 짓건, 그가 짓는 것은 죽음의 집이다. 자기의 미노타우로스를 숨기는 퀴클롭스 식 미궁일 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의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면서 파멸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82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서 신의 의지, 즉 자신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87
소명의 거부에 따르는 부정적인 상태가 뜻밖의 해방의 원리에 대한 행운의 계시일 수도 있다.

92
영웅을 도와주는 노파나 요정 노파는 유럽의 민담에 자주 등장한다. 기독교의 성인전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이 역할을 맡는다. 성모의 주선으로 성자는 천주의 자비를 얻는 것이다. 지주녀는 그 줄로써 태양의 운행을 통제할 수 있다. 우주 태모의 보호를 받는 영웅은, 어떤 가해도 받지 않는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테세우스가 미궁의 모험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은 단테의 작품에서 베아트리체와 성모라는 여성의 모습으로, 그리고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그레첸, 트로이아의 헬렌, 그리고 성모로 나타나는, 영웅의 보호령이다. 삼계의 위난을 안전하게 두루 거친 끝에 단테는 이렇게 기도한다.

성모여, 당신은 살아있는 희망의 원천입니다. 성모여 당신은 하도 크시고 은혜로우시어, 그 은총을 입되 당신을 거스르지 않는 자는 날개 없이도 나는 소원을 이루겠습니까. 당신의 자비는, 구하는 자는 물론, 미처 구하지 못하는 자에게까지 두루 미칩니다. 당신의 자비, 당신의 연민, 당신의 품위, 당신의 온갖 미덕 안에서 모든 피조물은 모두 하나가 됩니다. (단테., 신곡)

이러한 존재는 자비로운 힘, 즉 숙명적인 보호 세력을 표상하고 있다. 영웅이 빠져드는 환각은 곧 안식처이며, 낙원의 평화에 대한 약속이다. 모태 안에서 처음으로 경험했던 이 낙원의 평화에 대한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 약속은 현재를 지탱하게 하고 과거와 미래까지 주관한다. 따라서 알파이자 오메가다. 이러한 약속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여러 단계에 이르는 삶의 문턱을 넘으면서, 그리고 삶을 자각하면서 무산의 위기를 겪지만 보호 세력은 항상 영혼의 지성소에, 심지어는 이 세상의 낯선 사건에 내재하거나 그 배후에 존재한다.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하는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대자연 Mother Nature은 항상 위대한 임무를 지원한다. 영웅의 행동이 이 사회가 예비하고 있는 것과 일치될 때, 그는 흡사 역사적 변화의 리듬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110
최초의, 혹은 보호적인 관문 수호자의 정체를 밝혀주는 꿈이다. 모험 당사자는 특정 구역의 수호자에게 도전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살아서든 죽어서든 새로운 경험역을 지나려면 같은 세력의 파괴적 측면을 극복하고 이 특정 구역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안다면 제도의 피그미 족 언어에서 <오코주무 – 꿈꾸는 자, 꿈을 통하여 말하는 자>라는 단어는,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동류들과는 달리 대단한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를 일컫는다. 이들이 가진 초자연적 능력은 정글에서나 꿈속에서 정령을 만나거나 죽음과 재생의 체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112
자기 생활권이라는 벽에서 한 발이라도 밖으로 나가는 영웅은 반드시 이런 괴물 (몹시 위험하면서도 때로는 마법의 권능을 베푸는)과 만나야 한다.

118
(오무기) 그가 자기 뱃속에 있다고 한 무기는 다름아닌 <지혜>라는 무기였다. 실제로 이 젊은 영웅은 전생의 부처, 바로 그분이었다.

120
태양 문을 통하여 연기가 피어 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123
영웅이 외부로의 관문, 즉 가시적 세계의 한계를 넘는 대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이 들어감은 신도가 신전 안에서 들어가는 것과 일치한다. 신도는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신전 안, 고래의 배, 세계라는 한정된 공간 건너 위, 아래로 보이는 천상적 공간은 결국 하나다. 모두가 같은 것이다. 신전에 접근하거나 들어가는 자들이 기괴한 괴수, 즉 용, 사자, 마검을 든 괴물 살해자, 욕지기나는 난장이, 날개 달린 소에 의해 보호를 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괴수들은, 한 차원 심화된 내적 침묵과 만날 준비기 되지 않는 자들을 지켜주는 관문의 수호자들이다. 이들은 인습 세계를 특징짓는 신화적 도깨비, 혹은 두 줄로 난 고래의 이빨과 일치하는 존재들로서 존재의 위험한 측면을 보여주는 예비적인 경고의 화신이다. 이들은, 신자가 신전으로 들어가는 순간 변형을 체험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인다. 이 순간 신도는 세속적 성격은 사라진다. 그는 뱀이 허물로 싸여 있듯이 이 신전을 허물로 삼는다. 신전 안에서 신도는, 시간적으로는 이미 죽어 세계의 자궁, 세계의 배꼽, 지상의 낙원으로 돌아갔다는 암시를 받는 수도 있다. 사람들 가운데엔 그저 물리적으로 신전 수호자 앞을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괴물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될 수는 없다. 침입자가 이 성전을 제대로 거치지 못하는 한 얻는 것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러한 괴수들을 그저 괴물로만 본다. 따라서 그들은 이 괴수들 손에 접근부터 거부당한다. 그렇다면 비유적으로 보아,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고래의 입을 향한 영웅의 돌진은 같은 모험인 셈이다. 즉 회화적 언어로 말하면 둘 다 생의 구심화 행위, 거듭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124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박사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적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고 썼다.

자아에의 집착을 끊은 영웅은 왕이 자기 궁궐에서 방방을 드나들듯이, 삶의 지평을 넘나들거나 용의 뱃속을 드나들 수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은 여기에 있다. 그의 죽음과 회귀는, 모든 현상계의 대립물이 창조되지 않은 불멸의 존재임을 드러내는데 여기에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125
프레이저가 지적했듯이 의식으로서의 국왕 가해는 고대 사회의 일반적인 관례였다.

132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133
신비주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자기 정화>에 이르는 길의 두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즉 <감각이 정화되고 스스로를 낮추어> 모든 에너지의 관심이 <초월적인 것에 집중될> 때인 것이다.

139
우리에게 심적 인자, 즉 무의식의 원형으로서의 신을 재발견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상징 체계의 철저한 붕괴뿐이다. 하늘은 우리를 위해 물리학자의 우주 공간이 되어주었고, 신이 사는 천상계는 과거지사를 돌이켜보는 추억의 장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마음은 자라고 은밀한 불안은 우리 존재의 뿌리를 갉아먹고 있다. – C.G.융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

143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148
우리의 심상이 기억해 낸 어머니가 항상 자비로운 것만은 아니다.
1) 우리가 공격적인 환상을 투사하고 그러면서도 반격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무심하거나, 이르기 어려운 어머니도 있고,
2) 구속하고, 금지하고, 벌주는 어머니도 있고
3) 자기에게 묶어두기 위해 아이의 성장을 싫어하는 어머니도 있고,
4)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위험한 욕망을 일으키게 하는 (거세 콤플렉스) 바라던 어머니이긴 하나 가까이해서는 안 될 어머니도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따라서 어머니 중에는, 성인의 유아기 기억이라는 은밀한 곳에 숨어 있다가 때로는 엄청난 힘을 행사하는 <나쁜> 어머니도 있다. 이런 어머니는 아르테미스처럼 우아하면서도 고약한 여신으로 존재한다. 아르테미스(디아나)가 젊은 사냥꾼 악타이온을 철저하게 파괴시킨 예는 정신과 육체의 차단된 욕망의 상징 안에 얼마나 엄청난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지 확연히 보여준다.

153-154
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열등한 눈으로 보면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 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여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155
입맞춤이 대수요? 그대를 껴안아줄 수도 있소.

157
여신(모든 여성에게 현현되는)과의 만남은 사랑의 은혜(자비, 즉 운명에의 사랑)를 얻기 위해 영웅이 맞는 마지막 재능의 시험 단계다. 이 사랑의 은혜는 바로 우리 삶이 누리는 영원성의 그릇과 같은 것이다.

192
창조의 역설, 영원으로부터의 시간이라는 양식의 도래는 아버지가 지니는 근원적인 비밀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가 없다. 따라서 모든 신학 체계에는 배꼽, 즉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킬레우스의 건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 곳을 뚫고(그가 속한 세계와 함께)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193-194
말하자면 인간의 범주 밖에 있는 중심에서 비롯되는 하느님의 의지는 인간의 힘으로는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범주야말로 <욥기>의 전지전능한 야훼에 의해 완전하게 부서져, 끝까지 부서진 형태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에게는 야훼의 계시가 자기 영혼을 만족시켜 주는 것처럼 보인다. 욥은 끔찍한 불가마 안에서 견디는 용기와 전지전능한 신의 성격에 대한 일반적 개념 앞에서 결코 파괴나 굴복 당하지 않음으로써, 친구들을 만족시키는 것 이상의 위대한 계시에도 맞설 수 있음을 증명한 영웅이었다. 우리는 그가 한 말을, 그저 두려움에 떠는 자가 한 말로만 해석할 수가 없다. 그의 말은 자기 합리화의 한 방편으로 <예언된> 것을 능가하는 그 뭔가를 <목격한> 사람의 말이다.

196
보살은 불성의 경계에 든 귀인이다. 소승 불교의 견해에 따르면, 환생하면 부처가 대성이고, 대승 불교의 견해에 따르면, 우주적인 대자대비의 원리를 표상하는 일종의 구세주다. 산스크리트어의 <보살>은 <존재와 본질이 정각에 이른 자>란 뜻이다.

200
눈먼 선견자 테이레시아스는 남성이자 여성이었다. 그의 눈은 대립물이 쌍을 이루는 빛의 세계의 형상에 대해서는 멀어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자기의 어둠 속에서 오이디포스의 운명을 읽었다.

207
우리가 일단 세계의 원형들에 대한 편협스런 교회적, 종족적, 국가적인 해석의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 던지게 되면, 우리가 전수받아야 할 최상의 도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서슴없이 이웃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만 자애스런 아버지의 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게 가능해진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윽박지르거나 약탈하거나 속권에 넘기지는 말라고 일렀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마태 10:16)

207-208
자질구레한 신조, 예배의 방법, 교회 행정조직의 설립 같은 비교적 사소한 문제들(서양신학자들은 여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를 무슨 중요한 종교 문제인 양 덤빈다)은 지켜지지 않을 경우 가르치는 일 자체에 부수적인 문제가 생기는 정도의 현학적인 올가미에 지나지 않는다.

<신은 각기 다른 신도, 시대 국가에 맞추느라고 서로 다른 종교를 만들었다. 그 교리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그러나 길은 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전심 전력으로 어느 길이든 따라가면 누구든 신에 이를 수 있다. …. 얼음 과자를 가로로 먹든 모로 먹든 무슨 상관인가! 어떻게 먹든 달콤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208
세계 종교 (우주적 사랑의 교리)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현대인은 마땅히 다른 위대한(그리고 훨씬 오래된) 우주적 친교 universal communion로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근원적인 말씀이 평화, 모든 존재에 대한 평화를 지향하는 부처의 우주적 친교에 관심해야 하는 것이다.

211
우리는 모두 보살 이미지의 그림자다. 우리 내부의 고통은 바로 저 신적인 존재다. 우리와 저 보호자인 아버지는 한몸이다. 이것은 구원의 통찰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우리 보호자인 아버지다. 그러니 이 무지하고 유한하고 자위적이고 고통 받는 육신이 다른 육신(적)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에도 그 적 또한 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도깨비는 우리 기를 꺾지만, 유능한 후보자인 영웅은 <사나이답게> 입문한다. 보라, 그 도깨비가 바로 아버지였다. 우리는 그의 안에 있고, 그는 우리 안에 있다.

217
삶에서 자유로워진 사람, 욕심이 없고 대자 대비하고 현명한 사람이 요가로 자아를 통일하고 만사 평등하게 보면 일체 만유 속에서 자아를 보고 자아 속에서 일체 만유를 본다. …… 절대의 마음으로 만유 안에 있는 나를 우러러 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속의 삶이 어떠하든 신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어느 유학자가 불조법통의 28대 조사인 달마에게 <마음을 편케 해주십시오>하고 청했다. 달마는,
<좋아, 그러마, 너의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고 대답했다. 유학자는,
<그게 문젭니다.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달마는,
<너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고 했다. 유학자는 그 말귀를 알아먹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218
영원한 생명이 그들 안에 깃들여 있음을 알 뿐만 아니라 그들과 만물이 사실은 영원한 생명임을 아는 사람은 소원을 성취시키는 나무 숲에 거하며 불사의 영주를 마시고, 들리지 않는 도처의 영원한 화음을 듣는다. 이들을 일러 신선 이라고 한다. 중국과 일본의 도교 신봉자들이 그린 풍경화는 이 천상적인 경계를 즐겨 나타낸다. 네 종류의 자비로운 동물, 즉 봉황, 알각수, 거북이, 그리고 용이 성역에서 가까운 성산의 버들숲, 대숲, 오얏나무숲의 안개 속을 노니는 그림이다. 등은 굽었지만 정신만은 영원히 젊은 선인들은 산 봉우리에서 명상하거나, 이상한 상징적인 동물을 타고 불사의 흐름을 건너거나, 란차이호의 피리소리를 들으며 담소하다 말고 홍소를 터뜨린다.

222
<나무, 바위, 불, 물, 이 모든 것은 살아 있다. 이러한 무정물은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없을 때, 문득 그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무정물이다>

작년 암흑의 수용소에서 이 체험을 했다. 나에게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될 때 자연은 그 존재를 드러내고 말을 걸어 온다.

222
보살 신화의 세번째 경이로움은, 첫번째 경이로움(양성적인 형상)이 두번째 경이로움(찰나와 영원의 동일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신적인 차원의 언어로 일컬을 때 시간의 세계란 곧 위대한 어머니의 자궁이다. 아버지에 의해 끼쳐진 생명은 그 안에서 어머니의 어둠과 아버지의 빛으로 합성된다.

223
우리는 어머니 안에서 배태되어, 아버지로부터 격리된 채 산다. 그러나 우리가 때가 와서 그 시간의 자궁을 빠져나오면(영원으로의 탄생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손으로 넘어간다. 현명한 자는 그 자궁 속에서도,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안다. 그보다 더 현명한 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의 본체 안에 있다는 것까지 안다.

248
만물은 나아가고, 일어나고, 되돌아온다. 나무는 꽃을 피우나 오직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다. 뿌리로 되돌아감은 정일을 찾음이다. 정일을 찾음은 천명으로 합일함이다. 천명에 합일함은 영원에 합일함이다. 영원을 아는 것은 깨달음이요, 영원을 깨닫지 못하면 혼란과 마가 안다.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 아니다.
<천상적인 것이 도다. 도는 영원이다. 여기에 이르면 육체가 썩는 것도 두려워할 바 아니다>

일본에는 <인간이 재물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면 신들이 웃는다>는 속담이 있다. 신도에게 내리는 은혜는 그 신도의 처지와 그가 발원한 소망에 준하여 내려진다. 은총이란, 특수한 경우의 발원에 내려지는 삶의 에너지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은총을 입고 있는 영웅이 완전한 깨달음의 은총을 구한다면 몰라도 그가 장수의 은혜와, 이웃을 시해할 무기, 혹은 자식의 건강 등을 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249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253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원질 신화의 규준인 완전한 순환 체계는 연웅에게 지혜의 시문, 황금 양털, 혹은 잠자는 미녀를 인간 왕국으로 데려오는 또 한번의 수고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이 은혜가 사회, 국가, 그 전체,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시키는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256
내 주님이신 신이시여. 인간으로 살고 업을 쌓을 때 저는 닥치는 대로 살고 닥치는 대로 업을 쌓았습니다. 인간이 나고 죽기를 여러 번 할 동안 저는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어디에서 쉬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저 뛰고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근심을 기쁨으로 잘못 알았습니다. 사막 위로 나타나는 신기루를 시원한 샘물로 알았습니다. 제가 기쁨을 잡으면 손 안에 남는 것은 고통뿐이었습니다. 왕의 권능, 지상의 소유, 부와 권력, 벗과 자식들, 아내와 추종자들 이 모든 존재는 제 오감을 올렸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것이 되는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은 그 본성을 벗고 불길이 되었습니다.

257
무추쿤다는 회귀하는 대신 이 세상으로부터 한 차원 더 떨어진 곳으로 불러서기로 마음먹었다. 누가 감히 그의 결심이 무분별하다고 할 것인가?

승리한 영웅이 여신이나 신의 축복을 획득하고, 그가 속한 사회를 구원할 불사약을 가지고 원상 복귀할 대목이 되면, 영웅 모험의 이 최종 단계에서 초자연적인 후원자에 의한 지원이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만일 전리품이 그 수호자의 의지에 반한 상태에서 영웅의 손에 들어갔거나, 영웅의 귀환 의사가 신이나 악마의 찬성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이 신화 주기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격렬한, 때로는 익살스러운 추격전이 벌어진다.

261
영웅의 도망에서 흔히 사용되는 것은 뒤에 남은 다른 사물들이 영웅 대신 대답하여 추격을 지연시키는 수법이다.

262
영웅이 도망치는 대목에서 또 하나 자주 등장하는 방법은, 도망치는 영웅이 끊임없이 장애물을 던져 추격을 지연시키는 방법이다.

263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다. 동양에서는, 엄격한 지도와 감독 없이 심리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에서의 요가 수련은 몹시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수련자의 명상은 그 발전 단계에 따라 통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269
이 극동의 전설이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의 오리페우스와 에우뤼디케 신화, 그리고 세계 전역에서 채집되는 수백 가지의 비유적인 전설들은, 영웅에게 실패의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무서운 관문 건너 쪽에서 애인과 함께 귀환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두 세계의 상호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소한 실수, 즉 인간의 약점이라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증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소한 일만 피하면,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269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귀환의 문턱에 도사리고 있는 위기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81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기꺼이 이 일을 맡든, 어쩔 수 없어서 맡게 되든, 우리가 영웅의 행위를 이해하자면 이 잊혀진 부분의 탐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282
밤에 꿈으로 꿀 때엔 중요하게 보이다가도 밝은 대낮에 생각하면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시인이나 예언자는 맨 정신으로, 전날 밤에 했던 기도들 후회한다. 사회를 악마에게 넘겨버리고, 저 자신은 천상의 바위굴에서 문을 닫고 은거하는 편이 쉽기는 쉽다. 그러나 어느 정신적 산과의가 <시메나와>를 쳐놓고 퇴로를 차단한다 해도, 시간 속에서 영원을 표상하고, 시간 속에서 그 영원을 지각하는 작업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294
카마르 알 자만의 기나긴 이야기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운명이 일상의 삶으로 구체화되는 완만하면서도 놀라운 역사다. 그러나 이 운명이 모든 이에게 다 구체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체험하고, 반지를 얻어 다시 현실로 귀환한 영웅에게만 가능하다.

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즉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성격, 혹은 일련의 성격(3원적이든, 2원적이든, 1원적이든, 다신론적이든, 유일신론적이든, 단신론적이든, 회화적이든, 언어적이든, 문서로 기록된 사실이든, 묵시적 환상이든)을 최종적인 의미로 읽거나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305
의미를 실어 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로 오해하면 헛된 잉크뿐만 아니라 헛된 피까지 흘리게 된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예수의 변모는, 개인적 의지를 소각시켜 버린 추종자들, 즉 스승에 대한 철저한 자기 부정에 의해 <인생>, <개인적인 팔자>, <숙명>이 제거된 지 오래인 사람들에 의해 목격되었다는 사실이다.

306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즉 <자기 화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313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제2부 우주 발생적 순환

325
동화와 신화의 패턴 및 논리가 꿈의 패턴과 논리와 일치한다는 발견과 더불어 오랫동안 의혹의 대상이 되어왔던 고대적 인간의 기괴한 환상은 극적으로 현대인 의식의 표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326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이를 적절한 의미로 재해석하여 오늘날의 세계에, 인간의 특징적 심층에 관한 풍부하고 웅변적인 자료를 장만해 주고 있다. 여기에 하나의 투시경으로 소개하는 예화들은 동양과 서양, 미개인 및 문명인, 현대 및 고대 <호모 사피엔스>의 수수께끼에 관해 지금까지 묻혀 있던 사실을 밝혀준다. 그 전경은 우리 앞에 있다. 우리는 이를 읽고, 그 일정한 패턴을 연구하고, 그 다양성을 분석함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의 운명을 조형해 왔고, 앞으로도 우리 사적, 공적인 삶을 주관해 나갈 그 무서운 힘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326
신화와 꿈은 같은 근원(즉 환상이라는 무의식의 샘)에서 유래하고 그 문법도 동일하다. 그러나 이 신화가 수면의 산물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신화의 패턴은 의식적으로 통제된다. 그리고 신화는 전통적인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적 언어로 기능한다.

327
그들은 불합리하게 신경증적 투사라는 방법을 통해 무의식을 실제 행위에다 연관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완숙하고, 온당하고 실재적인 이해를, 엄격한 통제 아래 유아기적 원망이나 공포로 되돌려 놓는 것일 뿐이다. 이 말이 비교적 단순한 민간의 신화 체계(원시적인 수렵 종족이 의지하는 신화 및 제의 체계)에도 해당된다면, 호메로스의 서사시, 단테의 <신곡>, <창세기>, 그리고 동양의 시간을 초월한 사원이 반영하고 있는 우주적 메타포는 어찌된 일인가?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상징적 심상들은 인간의 삶을 버티고 철학, 시, 그리고 예술의 영감을 자극해왔다. 노자, 부처, 조로아스터, 그리스도, 혹은 모하메드에 의해 거론된 전승적 상징(도덕적, 형이상학적 가르침을 전교한 위대한 정신적 스승들에 의해 채용되었던) 덕분에 우리는 암흑이 아닌 깨어 있는 의식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331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깨우며,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31
현대의 심리학적 해석 체계의 열쇠는 바로 <형이상학적 영역 = 무의식>이라는 등식이다. 이 문을 여는 또 하나의 열쇠가 있다면 전후항을 바꾼, 즉 <무의식 = 형이상학적 영역>이라는 등식이다.

342
우리의 참 존재를, 파멸하는 형상이 아닌 다시 태어나는 불멸의 존재라는 측면에서 보면 신화 체계는 그리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신화 체계의 문법을 숙지하고 나면 비극적이란 표현은 천만부당하게 느껴진다. 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존재는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꿈으로 존재한다.

348
생명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원적 형태 아래 자가 생산을 위해 양극화했다는 것이다. 이 전 과정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성적인 용어로 나타낼 수 있다.

365
여기에 신화의 근본적인 모순, 즉 이중 초점의 모순이 있다. 우주 발생적 순환의 초기에 <신은 관여하지 않으나>, <신은 창조자이자 수호자이며 파괴자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여럿으로 나뉘는 이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운명은 <우연히> 그러나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00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428
적과 싸워서 장악하는 주도권, 괴물과 싸워서 획득하는 자유, 폭군의 족쇄에서 풀려난 에너지는 여성으로 상징된다.

440
형제는 경기장 한복판으로 나아갔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각기, 크리슈나에게서 자기의 모습을 보았다. 씨름꾼은 크리슈나를 씨름꾼으로 보았고, 여자들은 그를 보석상자로 생각했다. 신들은 그를 자기네 최고신으로 알아보았고 칸스는 그를 죽음의 화신인 마라로 보았다. 칸스는 씨름꾼들을 보내어 그를 대적하게 했으나 크리슈나는 그 중 가장 힘센 자를 죽여 버리고는 왕좌로 뛰어올라 폭군의 머리채를 거머쥐고는 한 주먹에 때려죽였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 신들, 성인들은 모두 기뻐했으나 왕비와 후궁들은 앞으로 나와 남편의 죽음을 슬퍼했다. 크리슈나는 애곡하는 그들을 보고, 존재의 뿌리 되는 지혜로 그들을 위로했다.
“모두들 슬퍼하지 말아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일 뿐입니다.”

441
영웅이 변화를 가져오듯이, 무섭고 잔인한 폭군은 한 가지 편견에 고착된 인간을 표상한다. 시간의 순간순간이 이전의 순간순간의 족쇄에서 해방되듯이, 이 괴룡과 압제자는, 그 전 세대, 즉 구세주를 맞던 그 이전 세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프롤로그

신화와 사회

480
이제 인간의 시야는 넓어졌다. 맡는 역할이 비록 하찮다고 하더라도 개인은 이 인간의, 아름다운 축제의 이미지(잠재적이긴 하나 필연적으로 그의 내부에 깃들여 있는 이미지)에서 자기 역할이 바로 자기의 본질이었음을 깨닫는다.

480
사회라는 단위에서 볼 때 그 단위에서 단절된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쓰레기다.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성직자든, 매춘부든, 여왕이든, 노예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480
진정으로 종교적인(순전한 주술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제의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피할 길이 없는 운명에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동기는 계절적 축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484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문제는 바로, 신화 체계(이제는 거짓으로 알려진)가 위대한 조정 수단으로 통영되던 비교적 안정되어 있던 시대 사람들이 안고 있던 문제와는 정반대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 당시엔, 모든 의미는 집단적인 것에, 위대한 익명의 형식에 귀착되었으며 스스로를 드러내는 개인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오늘날 집단 속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계도 그렇다. 모든 것은 개인에 귀착된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란 완전히 무의식적이다. 인간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어떤 동인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의 심성의,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의 교류 통로는 단절되고, 우리는 둘로 찢기고 말았다.

486
우리는 새로운 상징이 보이게 됨에 따라, 이 상징이 지구의 갖가지 요소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한 민족 특유의 생활환경, 인종, 그리고 전통이 유효한 형식으로 화해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갖가지 상징을 통해 동일한 구원이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고, 또 알아야 한다. <베다>의 말씀처럼,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 즉 하나의 노래가 인간이라는 합창대의 갖가지 음색으로 들리는 것이다.

488
인간은 그러나 <내>가 아닌 <너>를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기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아있는 불멸의, 놀라운 신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488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신화의 힘>으로 ‘흰종검글(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이다)’의 맛을 보게 해 준 조셉 캠벨!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집어 들고 미처 읽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연히 발견한 다음의 일화를 읽고, 다행히 용기를 조금 내 볼 수 있었다.


그의 방대한 지식과 다양한 어학 실력 앞에서는 모두가 혀를 내둘렀는데 신기하게도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잘 깨닫지 못했다. 캠벨이 로렌스 대학에서 재직할 당시에. 한 여학생이 캠벨에게 질문을 했다.


“우리는 그 분께서 내어 주시는 일 주일 분의 독서량에 기가 막혔답니다. 결국 우리 중 누군가가 벌떡 일어서서 그 분과-사라 로렌스 대학식으로-맞섰습니다. 그 학생이 그랬지요.
‘선생님께서 이시다시피 저는 이 과목만 듣는 게 아니고 다른 세 과목을 함께 듣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다른 과목 선생님들도 독서량을 할당하십니다. 도대체 이걸 일 주일에 어떻게 다 읽으라는 것입니까?’
그러자 캠벨 선생님께서 웃으시면서 이러시더군요.”
“해보기는 했다니 놀랍군,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일 주일에 읽으라는 것이 아니고 평생 읽으라는 것이네.”


‘조셉 캠벨! (일주일이 아니라)평생토록 파악해 보자’라는 심정으로 책을 펼쳤다. 무엇인가 캐내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 이해 안되는 부분은 넘기고, 이해 되는 부분은 받아들이는 물 흐르듯 욕심내지 않은 독서를 했다. 그랬더니 <신화의 힘>을 읽을 때와 달리, 조셉 캠벨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이젠 <신화의 힘>도 다시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 조셉 캠벨은 만능 이야기꾼이다. 그는 신화 속 영웅 이야기를 풀어, 현대인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영웅’이 되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읽으며, 스스로의 삶에서 영웅이 되고자 했다.


조셉 캠벨은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환희 속에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은 ‘저 바깥’의 어떤 다른 곳이나,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굳이 다른 어딘가로 가거나, 어떤 무언가를 또는 어느 누군가를 굳이 소유함으로써 삶의 환희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의식의 전환’뿐이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조셉 캠벨의 이야기 속에서 영웅이 되는 여정의 첫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인식의 전환’이다.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내가 쓰고자 하는 책의 첫 시작을 어떻게 잡아야 하나 늘 고민이었는데, 실마리를 찾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내 책의 1부 제목은 ‘인식의 전환’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쓰고자 하는 대한민국 장애인이 영웅이 되는 과정을 정리하기 위해 조셉 캠벨을 더 파야 할 것 같다. 조셉 켐벨의 영웅 이야기에 더욱 경청해야 한다.


1) 전체적 뼈대와 목차


목차를 구조적으로 보면, 원질 신화로 시작하여, 신화와 사회로 맺음을 하고 있다. 조셉 캠벨은 원질 신화를 들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영웅’으로 거듭 태어나기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부를 들여다 보면, 1부 ‘영웅의 모험’은 고대 신화를 구전하듯, 영웅 이야기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고, 2부 ‘우주 발생적 순환’은 심리학, 형이상학, 정신분석학 등을 들어 1부의 영웅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으나, 1부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다. 곱씹어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내가 쓰려는 ‘장애인 영웅 이야기’도 아래 목차를 고대로 따라도 좋을 것 같다. 프롤로그는 현 대한민국의 장애인의 실제 이야기로 구성하고, 에필로그는 ‘영웅’으로 거듭 태어난 장애인의 이야기로 구성한다. 제 1부 영웅의 모험의 여정을 구성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하지만 제 2부 학문을 빌어 설명하는 것을 내가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원질신화
1. 신화와 꿈
2. 비극과 희극
3. 영웅과 신
4. 세계의 배꼽
 
제1부 영웅의 모험
제1장 출발
1. 영웅에의 소명
2. 소명의 거부
3. 초자연적인 조력
4. 첫 관문의 통과
5. 고래의 배
 
제2장 입문
1. 시련의 길
2. 여신과의 만남
3. 유혹자로서의 여성
4. 아버지와의 화해
5. 신격화
6. 홍익
 
제3장 귀환
1. 귀환의 거부
2. 불가사의한 탈출
3. 외부로부터의 구조
4. 귀환 관문의 통과
5. 두 세계의 스승
6. 삶과 자유
 
제 4장 열쇠
 
제2부 우주 발생적 순환
    제 1 장 유출
1.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2. 우주의 순환
3. 허공에서-공간
4. 공간의 내부에서-생명
5. 하나에서 여럿으로
6. 창조의 민화
 
제2장 처녀의 잉태
1. 어머니 우주
2. 운명적 모태
3. 구세주를 낳는 자궁
4. 미혼모의 민화
 
제3장 영웅의 변모
1. 최초의 영웅과 인간
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3. 전사로서의 영웅
4. 애인으로서의 영웅
5. 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
6. 구세주로서의 영웅
7. 성자로서의 영웅
8. 영웅의 죽음
 
제4장 소멸
1 소우주의 끝
2. 대우주의 끝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1. 변신 자재자
2. 신화, 제의, 명상의 기능
3. 오늘날의 영웅
 
역자후기
찾아보기


2) 감동적인 정절


30
우리가 상실해 버린 이 전체성의 일부라도 나날의 현실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우리의 능력은 놀라운 수준까지 신장될 것이며, 아울러 생기 넘치는 재상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는 더 높이 솟아야 한다.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 세대, 나아가서는 우리의 문명 시대가 잊어버리고 있던 것들을 얼마간이라도 건져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저 위대한 천품의 시혜자, 시대의 문화 영웅(한 나라뿐만 아닌 세계 역사상의 귀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9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할 것이다.


44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즉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51
지금까지 개개인의 운명을 담는 세계의 상징적인 그릇인 수많은 이야기를 복합적인 모험의 형태로 소개해 보겠다. 첫번째 단계, 즉 <분리>, 혹은 <출발>의 단계는 제1부, 제1장에서 다섯 개의 소제목으로 나뉜다. 즉,
6) 모험에의 소명, 혹은 영웅 소명의 표적
7) 소명의 거부, 혹은 신으로부터의 우매한 도주
8) 초자연적인 조력, 즉 어느 수준까지의 모험에 도전한 사람에 대한 뜻밖의 도움
9) 첫 관문의 통과, 그리고
10) 고래의 배, 혹은 밤의 영역으로의 여행이다.

<시련과 입문의 성공>은 제2장에 6개의 소제목으로 소개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7) 시련의 길, 혹은 신들의 위험한 측면
8) 여신 Magna Mater 과의 만남, 혹은 다시 찾은 유아기의 행복
9) 유혹자로서의 여성, 오이디포스 고뇌의 체득,
10) 아버지와의 화해
11) 신격화 Apotheosis
12) 궁극적인 홍익 弘益 이다.


53
대개 동화 속의 영웅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소우주적 승리를 거두고, 신화의 영웅은 세계사적, 대우주적 승리를 거두는 게 보통이다. 또 전자(젊은이, 아니면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경멸 당하는 아이)는 자신을 압제하던 상대를 이겨내는데 그치는 반면, 후자는 모험을 통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 전체의 소생에 필요한 수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120
태양 문을 통하여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217
삶에서 자유로워진 사람, 욕심이 없고 대자 대비하고 현명한 사람이 요가로 자아를 통일하고 만사 평등하게 보면 일체 만유 속에서 자아를 보고 자아 속에서 일체 만유를 본다. …… 절대의 마음으로 만유 안에 있는 나를 우러러 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속의 삶이 어떠하든 신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어느 유학자가 불조법통의 28대 조사인 달마에게 <마음을 편케 해주십시오>하고 청했다. 달마는,
<좋아, 그러마, 너의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고 대답했다. 유학자는,
<그게 문젭니다.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달마는,
<너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고 했다. 유학자는 그 말귀를 알아먹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253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원질 신화의 규준인 완전한 순환 체계는 연웅에게 지혜의 시문, 황금 양털, 혹은 잠자는 미녀를 인간 왕국으로 데려오는 또 한번의 수고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이 은혜가 사회, 국가, 그 전체,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시키는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342
우리의 참 존재를, 파멸하는 형상이 아닌 다시 태어나는 불멸의 존재라는 측면에서 보면 신화 체계는 그리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신화 체계의 문법을 숙지하고 나면 비극적이란 표현은 천만부당하게 느껴진다. 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존재는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꿈으로 존재한다.


488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3) 보완점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으로 나는 우주에 풍덩 빠지는 경험을 했다. 여전히 허우적거리고 있지만, 굳이 보완점을 찾아야 한다면, 저서의 문제가 아니라, 고전의 바다에서 제대로 수영하는 법을 몰라 허우적거리는 내가 문제인 것 같다.


조셉 캠벨은 내게 가슴이 우주같이 넓은 이야기꾼 할아버지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제 2부 ‘영웅의 모험’은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여정을 잘 정리된 순서도로 보여주는 것 같다. 내가 살아가고자 작정했던 삶이 곧, 영웅의 삶이었던 것 같다. 아직 출발하기 전, 준비 운동을 하는 단계이지만. 일단, 조셉 캠벨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고 싶다.


굳이 보완점을 찾자면, 눈에 훤히 들어나는 오탈자들! 신뢰하고 좋아하는 출판사 민음사에 이런 허술함이 있었단 말인가! 인간적이라고 해야 하나, 꼼꼼하지 못한 편집이 눈에 거슬렸다. 게다가 좋아하는 번역가, 이윤기 선생님! 쉬운 단어로, 짧은 문장으로 번역해 주셨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 편집과 번역에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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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4 17:44:18 *.160.136.124

당신이 꿈꾸는 영웅이라는 귀결.

그 여정의 초입 과정 잘 들어서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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