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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8일 13시 17분 등록

Book Review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강종희

2014. 4.27

 

  1. 역자 만나기

 

이윤기(소설가·번역가·에세이스트·신화전문가. 1947~2010) 1947 경상북도 군위에서 태어나 2010 8 27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1977 단편소설 「하얀 헬리콥터」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며 문단에 나왔고, 이후 번역을 생업으로 삼아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그리스인 조르바』, 『변신 이야기』 200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기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번역가로 자리매김했다. 1994 장편소설 『하늘의 문』을 출간하며 문단으로 돌아온 그는 중단편과 장편을 가리지 않고 활발한 창작 활동을 했다.

 

그의 소설은 풍부한 교양과 적절한 유머, 지혜와 교훈을 두루 갖추고 있어어른의 소설또는지성의 소설 평가받았다. 2000 권이 출간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 5) ‘21세기 문화 지형도를 바꾼 이라는 찬사와 함께 신화 열풍을 일으키며 200 이상의 독자와 만났다. 1998 동인문학상(숨은 그림 찾기1-직선과 곡선), 2000 대산문학상(두물머리), 2000 한국번역가상(한국번역가협회) 수상했다.

 

 

1999 번역문학 연감 『미메시스』에서 시행한 설문조사에서 이윤기는 한국 최고의 번역가로, 『장미의 이름』(1992) 해방 이후 가장 번역이 작품으로 선정됐다. 장편소설 『하늘의 문』, 『뿌리와 날개』, 『내 시대의 초상』 등과 소설집 『하얀 헬리콥터』, 『두물머리』, 『나비 넥타이』 등을 펴냈고, 밖에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의 교양서와 『어른의 학교』, 『꽃아 꽃아 열어라』 등의 산문집을 펴냈다.

 

풍부한 인문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한 세련된 번역으로 국내 영문번역의 일인자로 꼽혀온 난해하기로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번역을 통해 번역의 진수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고인은 번역에 대해 가혹하리만큼 완벽주의적 성향을 보여,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잡아 개역판을 내 국내 번역계에 귀감이 됐다. 92년 독자들의 지적을 반영해 <장미의 이름> 전면 개역판을, 95년에는 6개월간의 번역작업 끝에 <푸코의 추>를 처음부터 다시 번역해 <푸코의 진자>로 제목을 바꿔 내놓았다. 당시 고인은 첫 번역에서 완벽을 기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죽다가 살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교보문고 저자 소개 경향신문 기사에서 발췌)

 

  1. 마음에 들어온 글

     

40. <연민이란,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고통 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보이지 않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 - 28. James Joyce,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공포의 정의는 모르겠으나, 연민의 정의는 알겠다. 전국민이 슬픔과 연민과 공포와 죄의식과 분노로 허우적거린 2주일이 지났다.

 

42.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양자를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eogks 거역)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Katharsis, purgatorio)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 kathodos and anodos인 것이다.  

43. 이 몸은 죽어 없어지지만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실재 self는 영원하며, 불멸이며, 무한이니라. (– Bhagavad Gita, 2:18)


48. 38. 중요한 것은 Buddhahood, 즉 정각은 말로써 전할 수 없고 (不立文字) 오직 정각에의 방법 Way만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과 형태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진리의 불립 문자 교리는, 플라톤 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양 전통의 근간을 이룬다.  과학의 진리는 관찰할 수 있는 사실에 근거해서 논리적으로 세워진 논증할 수 있는 가설이기 때문에 전달이 가능하지만 제의, 신화, 그리고 형이상학은 초월적인 조명 가까이까지 인도받는 것은 가능하나 거기에 접근하는 마지막 단계는 개인의 조용한 체험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산스크리트어에서는 현자는 Muni, <조용한 자>라고 한다. Sakyamuni(고타마 부처의 다른 이름) Sakya족의 조용한 자, 혹은 현자 muni>란 뜻이다. 부처가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종교를 세웠지만 그 가르침의 궁극적인 요체는 침묵 속에서만 전수된다.


50. 대양을 방불케 하는 동양의 광대한 이미지로 표현되든, 그리스의 웅장한 서사시로 표현되든, 아니면 장엄한 성서의 이야기로 표현되든,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동양 전체는 고타마 부처가 깨친 은총(참 법의 놀라운 가르침)의 축복을 받았듯이, 서양은 모세의 십계명의 축복을 받아왔다. 그리스인들은, 인류 문명에 대한 최초의 지원으로서 불과 프로메테우스의 초월적인 행적을 전했고, 로마인들은 세계적인 그들 도시의 창건에 관련된 아이네이아스를 떠올리며 트로이아를 떠나 무서운 사자(死者)의 나라 저승으로 따라나섰다. 장소가 어디 건, 그들의 관심(종교적, 정치적 혹은 개인적)이 어디에 있건 진정한 창조 행위는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세상으로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행위로 표현되며, 영웅의 부재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가 거듭난 자, 위대한 자, 창조력을 얻어 돌아오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류 역시 한 목소리가 된다. 이러한 작업은 당대의 삶과 관련된 이미지의 의미 뿐만 아니라, 야망, 권력, 영고 성쇠, 그리고 지혜로서의 인류정신의 단일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지금부터, 개개인의 운명을 담는 세계의 상징적 그릇인 수많은 이야기를 복합적인 모험의 형태로 소개해 보겠다. 첫 번째 단계, <분리>, 혹은 <출발>의 단계는 제 1, 1장에서 다섯개의 소제목으로 나뉜다. ,

  1. <모험에의 소명>, 혹은 영웅 소명의 표적

  2. <소명의 거부>, 혹은 신으로부터의 우매한 도주

  3. <초자연적인 조력>, 즉 어느 수준까지의 모험에 도전한 사람에 대한 뜻밖의 도움

  4. <첫 관문의 통과>, 그리고

  5. <고래의 배>, 혹은 밤의 영역으로의 여행이다

<시련과, 입문의 성공>은 제2장에 6개의 소제목으로 소개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시련의 길>, 혹은 신들의 위험한 측면

  2. <여신 Magna Mater과의 만남>, 혹은 다시 찾은 유아기의 행복

  3. <유혹자로서의 여성>, 오이디푸스 고뇌의 체득

  4. <아버지와의 화해>

  5. <신격화>, Apothesis

  6. <궁극적인 홍익(弘益)>이다.

<회귀와 사회와의 재통합>은 정신에너지가 세계로 흘러 들어오는 연속적인 순환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과정이고, 영웅이 속한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영웅의 오랜 후퇴에 대한 변명이 되나, 영웅 자신에게는 가장 어려운 필요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웅이 부처처럼 승리를 거두고 완전한 정각상태(正覺狀態)에 들어버린다면 이 경험의 만족감이 세상의 슬픔에 대한 그의 기억과 희망과 흥미를 없앨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경제적인 문제에 발목을 잡힌 사람들에게 이 깨달음을 전하기가 너무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웅이 입문의 모든 시련을 향해 차례로 올라가는 대신, 프로메테우스처럼 단도직입적으로 목표를 향해 돌진하고(폭력이나 기지로써, 혹은 운에 힘입어), 그가 의도하던 세상을 위한 홍익을 손에 넣어버린다면 그가 지닌 힘의 불균형이 부작용을 일으켜, 프로메테우스가 자기의 불경스러운 무의식이라는 바위에 갇혔듯이, -외적인 시련을 당하게 된다. 또 한편, 영웅이 자신의 뜻으로 안전하게 사회로 귀환하면 그가 도우려던 사람으로부터 오해 받고 무시당하게 되어 결국 그의 행적은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세 번째 장에서는 6개의 소제목으로 이런 측면의 논의에 결론을 내릴 것인데, 6개의 소제목은 다음과 같다

  1. <회귀의 거부>, 혹은 버림받은 세계

  2. <불가사의한 도주>, 혹은 프로메테우스의 도주

  3. <외부로부터의 원조>

  4. <회귀 관문의 통과>, 혹은 일상의 세계로의 회귀

  5. <두 세계의 주인>, 그리고

  6. <살기 위한 자유>, 즉 궁극적인 홍익의 성질과 기능이다

52. 42. 홍수설화의 영웅은, 대재앙과 죄악이 창궐하는 가운데서도 살아남는 인간의 근원적 생명력의 상징이다.


53. 2, <우주발생적 순환>은 성공한 영웅에게 계시로 하사된 세상의 창조와 멸망의 엄청난 환상을 펼쳐보인다. 1, <유출(流出, Emanation)>은 무()에서 비롯되어 나오는 우주의 형상을 다룬다. 2 <처녀 잉태(혹은 단성 생식)>에서 여성적인 힘의 창조적, 보상적 역할을 일별하되, 먼저 만유의 어머니Mother of Universe로서의 우주적 스케일, 이어서 영웅의 어머니로서의 인간적인 단계를 다룬다. 3, <영웅의 변모>는 인간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 갖가지 형태로 영웅이 등장하는 전형적 단계를 통해 인류의 선사적 역사 과정을 추적한다. 그리고 제 4 <소멸>, 처음에는 영웅의 예언된 종말, 이어서는 드러난 세계의 예언된 종말을 그린다.


54. 우주발생적 순환은 모든 나라의 신성한 문헌에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고, 그것은 영웅의 모험에 새롭고 흥미로운 전기를 부여한다. 돌이켜보면, 모험적인 여향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 하다.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찾아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왕의 아들>이고 그는 이로써 자기의 실제적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신의 아들>, 이 이름이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여웅은, 우미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肉化)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상징이다.

 ….

55. “나는 본질적으로 인간이며 신의 은총을 입음으로써 신이라.” - 성자 시므온 Saint Symeon (서기 949-1022)

….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네가 어디로 가건 나는 거기에 있다. 나는 없는 곳이 없으니 원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으라. 나를 찾는 것이 곧 너를 찾음이다.” <이브의 복음Gospel of Eve>

이 둘(영웅과 그의 궁극적인 신, 찾는 자와 찾아지는 자)은 결국, 이 세계의 신화에 다름아닌 단일한 유형적 신비의 표리로 받아들여진다. 위대한 영웅은 위대한 행적을 통해, 이 다양한 얼굴이 사실은 하나임을 알고, 또 남들에게 알리게 된다.

찾는 자와 찾아지는 자가 결국은 하나다. 그러므로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라. 구본형 선생의 자기변화경영이 캠벨에 많은 부분 의지하고 있구나. 종교에 대해 비판을 위한 독서를 제외하곤 어떤 생각도 두어본 적 없으나 종교의 원시적인 core가 어디에 있음인지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물론, 신화와 종교는 발생은 같았을 지 모르나 양상은 다르다. 


64. 도덕군자가 의분을 금치 못할 대목에서, 비극 서사시인이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느낄 대목에서, 신화는 장엄하고 무시무시한 신곡(神曲)을 향해 온전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신화의 제신(諸神)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 즉 창조자의 무자비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 하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비극적인 자세를 신경질적인 것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근시안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란 무자비하면서도 공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요컨대 제때에 나고 죽는, 자기 중심적이며,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 불명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93. 서남 아메리카 인디언 종족의 민담에서 이런 인정 많은 보호자의 역할을 맡은 인물은 지주녀(蜘蛛女, spider woman), 즉 지하에 사는 거미 노파다. 나바호족의 쌍둥이 군신(軍神)이 아버지인 태양의 집을 찾아나서자마자 성도(聖道, holy trail)에서 만난 것도 바로 이 기이한 꼬마 노파다. 


거미여인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영화, ‘거미여인의 키스를 통해서다. 아르헨티나의 독재정권 치하, 정치범과 미성년자추행혐의의 게이가 한 감방에서 생활하면서 펼쳐지는 스토리가 그렇게 시적일 줄, 슬플 줄 몰랐다. 영화를 보면서도 울고, 뮤지컬을 보면서도 울었다. 그 거미여인이 라틴아메리카 문화권의 거미여인이라는 신화를 차용한 제목일 지 알 수는 없지만, 연관 관계를 찾고 싶었다. 발렌틴을 사랑하여 자신을 다 내주고 가버린 몰리나가 거미여인 같은 존재라는 의미였을까? 소설을 다시 읽어야겠다. 생각만 해도 눈물난다.  이 참에 거미여인의 존재에 대해 살짝 서치해두자. 


Navajo Spider woman

Spider Woman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deities of traditional Navajo religion. Unlike the Hopi Spider Grandmother, the Navajo Spider Woman is not considered the creator of humans, but she is their constant helper and benefactor. Spider Woman was the advisor of the heroic twins Monster-Slayer and Born-for-Water, taught the people the arts of weaving and agriculture, and appears in many legends and folktales to "save the day," protect the innocent, and restore harmony to the world.


Teotihuacan Spider Woman

The Great Goddess of Teotihuacan (or Teotihuacan Spider Woman) is a proposed goddess of the pre-Columbian Teotihuacan civilization (ca. 100 BCE - 700 CE), in what is now Mexico. The Great Goddess is thought to have been a goddess of the underworld, darkness, the earth, water, war, and possibly even creation itself. To the ancient civilizations of Mesoamerica, the jaguar, the owl, and especially the spider were considered creatures of darkness, often found in caves and during the night. The fact that the Great Goddess is frequently depicted with all of these creatures further supports the idea of her underworld connections.[citation needed]

  • Wikipedia에서 발췌.

97. “나는 미지의 종국으로 떠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그곳에 이르는 순간, 내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 나를 갈가리 찢는 데는 한 입자의 원자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류가 힘을 모두 합치더라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 - 나폴레옹  


125. 프레이저가 지적했듯이 의식으로서의 국왕가해(國王加害)는 고대사회의 일반적인 관례였다. 프레이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남부 인도의 경우, 왕의 통치 기간과 생명은, 목성의 태양 공전주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에서는 왕의 운명은 매 8년 주기의 마지막 해에 달린 것으로 보인다…. 지나친 억측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매 8년마다 미노스왕에게 바쳐지기로 되어있는 아테네의 일곱 청년과 일곱 처녀는 다름 8년 주기를 위한 왕의 재생과 관련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미노스왕이 지내기로 되어있는 수소의 희생제는 8년 주기의 마지막 해에, 전통에 따라 미노스왕 자기 자신이 희생되는 8년 주기의 마지막 해에, 전통에 따라 미노스왕 자기 자신이 희생되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대용물로 아테네의 선남선녀를 바친 듯 하다. 미노스가 괴수 미노타우루스가 되고, 자기를 희생시켜야 하는 왕이 폭군이 되고, 모두가 왕의 역할을 수해하던 제정 일치 국가가 사리 사욕만 아는 상업 국가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원전 3천년대에서 2천년대까지, 그러니까 초기 제정일치시대 말기의 고대국가에서는 이러한 대속물의 희생제가 관례였던 것이다.


그렇구나. 미노타우르스는 결국 미노스 자신이라고 할 수 있구만. 그 마누라가 수소에 정욕을 느꼈다는 부분은 자기 희생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수소 수준으로 제물로 자신을 격하시킨 미노스 왕에 따른 것에 다름 아닌가.


139.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노희는 지복의 낙원에 들어가려 하느냐.” – 코란


145. 잠자는 여성은, 동화나 신화에 곧잘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우리는 이미 브린힐트와 <덩굴장미 아가씨>라는 형태로 등장하는 이런 여주인공을 만난 바 있다.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주의 본보

기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豫兆)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혹과 약속은, 이 세상의 도시나 숲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찾아온다. 왜 찾아왔을까? 그녀의 존재가 바로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때 인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보 은혜이기 때문이며, 위안과 자양, 그리고 우리가 아득한 옛날에 그 사랑을 받던 <좋은> 어머니(젊고 아름다운)이기 때문이다. 세월은 우리와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았지만, 그녀는 영원한 잠에 빠져든 미녀처럼, 아직 우리 속 영원의 바다 밑바닥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잠자는 미녀, 침대 위의 여자란 결국 영원한 로망이고 자궁으로의 회귀로구만. 이런 남성 중심의 신화같으니라구, 여성인 나한테는 전혀 그런 흥취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데 말이지.  기껏해야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누워있는 여자의 이미지란 누워있는 어머니이고, 이 그림은 결국 아파서 나를 돌봐주기는커녕 버거워하거나 밀어내고 도리어 내가 돌봐주어야 존재가 아니냔 말이다, 이런 젠장. 여자에게 유년기라는 것이 대체 허용되는 개념이란 말인가?


150. 만유의 어머니의 신화적 표상은 우주에 대해, 그 우주의 존재를 윤택하게 하고 지켜주는 최초의 여성적 속성을 부여한다. 환상이란 원래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에 대한 어린아이, 주위의 물질 세계에 대한 성인의 자세에는 밀접하고도 노골적인 상응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종교 전통에서는 자신을 정화하고, 안정을 유지하고, 마음을 가시적 세계의 자연 속으로 입문시킬 목적으로, 이러한 원형적 심상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교육적인 이용 방법이 전해져 왔다.


31) 플뤼겔 ㅅ교수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마음, 정신 혹은 영혼의 개념과 아버지, 혹은 남성이라는 관념, 또 한편으로는 육체 혹은 물질(material, 즉 어머니에게 속하는)의 개념과 어머니 혹은 여성적 원리ㅏ는 관념은 극히 보편적인 관련을 갖는다.


152. 여신은 또 때가 되면 죽는 모든 것의 죽음이기도 하다. 나서 사춘기, 성년기, 장년기를 거쳐 무덤에 들어가기까지 전 존재의 순환은 여신의 지배 아래서 이뤄진다. 여신은 자궁이며, 무덤이며, 제 새끼를 먹는 돼지다. 이렇게 해서 여신은, 개인적인 어머니는 물론 우주적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두 유형을 드러내면서 <> <>을 통합한다. 여신의 숭배자는 이 두 유형을 드러내면서 <> <>을 통합한다. 여신의 숭배자는 이 두 유형의 어머니를 똑같이 묵상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 숭배자의 정신은 유치하고, 어울리지 않는 감상과 증오로부터 스스로를 정화하고, 유치한 인간이 자신의 행, 불행에 연결지어 멋대로 가른 <> <>따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본성의 법()과 상()으로 존재하는 불가해한 실재를 향해 마음을 열게 된다.    


156.

새들이 초록빛 숲 그늘에 깃들이듯

사랑은 온유한 마음 속에 깃들인다

이치로 보면

사랑 이전에 온유한 마음이 없었고

온유한 마음 이전에 사랑도 없었다

태양이 솟을 때 빛도 발할지니

태양에 앞서 빛은 있을 수 없다

불길 속이 가장 뜨겁듯

사랑은 부드러움 속에서만 뜨겁게 타오른다

36) Guido Guinielli di Magnano(1230-1275?), Of the Gentle Heart, Danta Gabriel Rosetti, Dante and his Circle(London: Ellis and White, 1874), p291

  

157. 여신(모든 여성에게 현현되는)과의 만남은 사랑의 은혜(자비, 즉 운명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영웅이 맞는 마지막 재능의 시험 단계다. 이 사랑의 은혜는 바로 우리 삶이 누리는 영원성의 그릇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보면, 모험 당사자가 청년이 처녀일 경우에는, 그 재능이나 아름다움이나 욕망으로 보아 불사신의 배우자가 되기에 마땅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천상의 남편은 그녀에게 하강하여,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를 자기와 동침하게 한다. 만일 이 여자가 배우자를 싫어하면,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 그녀의 편견은 바로잡히게 되고, 그녀가 바라던 존재하고 생각되는 경우 그녀의 욕망은 평화를 성취한다.

 

170. 아버지의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피해자의 에고가 투영된 것이다. 즉 지난날 존재했던 예민한 유아기의 장면이 전면으로 투사됨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교육적으로 백해무익한 이러한 우상숭배에 집착한다는 것은 당사자로 하여금 죄의식에 빠지게 하고 잠재적인 정신을 아버지,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세상에 대한 온전하고 현실적인 견해로부터 당사자를 봉쇄하게 된다. <화해 atonement>, <하나되기 at-one-ment>란 스스로 만들어낸 두 마리의 괴물((초자아)로 보이는 용과 죄악(억압된 이드)으로 보이는 용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자면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이게 예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사자는 아버지가 자비로우며, 이 자비를 믿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믿음의 중심은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신의 족쇄 바깥으로 이동하고, 믿음의 중심이 이동하면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사라진다.

 

영웅이 조력자인 여성에게서 희망과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다. 여성의 마법(꽃가루라는 호부, 중재의 능력)덕분에 영웅은, 자아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하는 아버지의 무서운 입문 의식 경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영웅은, 아버지의 끔찍한 얼굴을 믿을 수 없으며 그 믿음을 다른 곳에다 기울인다. (즉 지주녀, 혹은 성모). 지원을 보장받은 영웅은 위기를 견디어 나가고, 결국에 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투영하고 있지만 사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93. 말하자면, 인간의 범주 밖에 있는 중심에서 비롯되는 하느님의 의지는 인간의 힘으로는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범주야말로 <욥기>, 전지전능한 야훼에 의해 완전하게 부서져, 끝까지 부서진 형체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에게는, 야훼의 계시가 자기 영혼을 만족시켜주는 것처럼 보인다. 욥은, 끔찍한 불가마 안에서 견디는 용기와 전지전능한 신의 성격에 대한 일반적 개념 앞에서 결코 파괴나 굴복당하지 않음으로써, 친구들을 만족시키는 것 이상의 위대한 계시에도 맞설 수 있음을 증명한 영웅이었다…. 그의 말은 자기합리화의 한 방편으로 예언된것을 능가하는 그 뭔가를 목격한사람의 말이다.

…..

아들이 아버지를 알 나이가 되면 시련의 고뇌가 이미 그의 내부에 태동해 있다. 세상은 더 이상 눈물의 골짜기가 아닌, 행복이 기다리는 현존의 완전한 현현이다.

 

아버지와의 화해, 적과의 일체화, 시련은 이미 나의 것으로 내재화하여 세상은 이제야 나와 일체화되고 완벽해진다.

 

237. 이렇게 해서 신들과 여신들은 원초적인 상태의 궁극적인 존재가 아닌 불로불사 영약의 화신이나 그 수호자로 파악된다. 따라서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영웅이 얻으려는 것도 그들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영광, 말하자면 그들의 불로 불사적 존재를 가능케하는 권능이다. 이 기적적인 에너지 본질만이 불멸적인 존재이며, 도처에서 이 에너지를 현현시키고 나누어주고 표상하는 신들의 이름과 형상은 가변적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제우스와 야후와 부처의 궁극적인 벼락, 비라코챠의 비가 내리는 풍요의 은혜, 성별식(聖別式) 미사의 방울이 고지하는 덕목히며, 성자와 현자가 도달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의 광명이다.

 

241. 157. 길가메쉬의 모험에 대해선 T.H 가스터의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이용찬 역, 평단문화사, 1985)

 

249.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차례로 용을 쓰러뜨리고, 관문과 관문을 차례로 지남에 따라, 영웅이 고도로 갈망하는 신의 모습은 점점 커져, 이윽고 우주 전체에 가득 차게 된다. 영웅의 마음은 마침내 우주의 벽을 깨뜨리고 모든 형상(모든 상징, 모든 신성(神性)의 경험을 초월하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불변의 공()에 대한 자각이다.

 

277. 나무는 열매를 맺고 소원을 성취시킨다는 의미에서 <세계의 축>이다. 이 나무는, 기독교도들이 동지(冬至, 크리스마스)에 가정에 장식하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동지는 태양의 귀환하는 순간 혹은 재생하는 순간이다. 동지에 집안에 나무를 장식하는 풍습은, 현대 독일어로는 여성 명사인 <태양Sonne>를 섬기던 게르만 이교도들 제사에서 유래한 유쾌한 풍습이다. 우즈메의 춤과 신들의 환성은 사육제에 해당한다. 최고신의 은거로 뒤죽박죽이 되었던 세계가, 바로 그 최고신의 재등장으로 활기를 되찾게 된 것이다. 다시 나타난 여신 뒤에 친 금줄 <시메나와>는 빛의 귀환이라는 기적의 자비로움을 상징한다 이 <시메나와>는 일본 민간 종교의 전통적 상징 중 가장 중요하고 의미심장하고 또 웅변적인 상징이다. 사원이나 신사의 입구에 걸리고, 설날이면 거리에 내걸리는 이 시메나와는, 귀환의 문턱에 있는 세계의 원기 회복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십자가가 죽음의 심연을 향한 신화적 통로를 뜻하는 웅변적인 상징이라면 <시메나와>는 부활의 소박한 상징이다. 십자가와 시메나와는 두 세계, 즉 존재와 비존재 세계를 구획하는 경계의 신비를 상징하는 것이다. 

 

306.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제 의미는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종교적 관행이 좇고 있는 바다.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at-one-ment>, <자기 화해 self-atone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 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법 Law는 그 안에서 거침새가 없다.

 

307. 영웅이 지난 전장은, 모든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의 희생으로 삶을 영위라는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 자기 살을 영위하려면 죄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구역질나는 것이다. 이를 깨달은 영웅은 햄릿이나 아르쥬나처럼, 불가피한 죄악의 거부를 시도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세상의 예외적인 존재로서 자기 입장을 합리화하고 허위적인 자기 이미지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말하자면 자기는 선한 자를 대표하고 있다고 간주하고, 죄악을 불가피한 것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부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합리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인간과 우주에 대한 본질에 이르기까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313. 영웅은 생성된 것의 투사가 아니라, 생성되는 것의 투사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는 시간 속의 영원한 불변성을, 존재의 영속성으로 오해하지 않는다. 변화가 영속성을 파기할 때도, 다음 순간(혹은 다른 사물)을 두려워 하지도 않는다.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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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원래 살던 오두막이나 성에서 떠난 신화 속 영웅들은 꾐에 빠지거나, 납치당하거나 자진해서 모험의 문턱에 이른다. 여기에서 영웅은 길을 안내할 그림자 같은 부정적인 존재를 만난다. 영웅은 이를 퇴치하거나 이 권능을 지닌 존재와 화해하여 산 채로 암흑의 왕국으로 들어가거나 (골육상잔, 용과의 싸움: 제물 헌납, 혹은 호부에 의지하여), 적대자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의절, 고난). 이 문턱을 넘어선 영웅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친숙한 힘에 이끌려 이 세계를 여행하는데, 경우에 따라 위협을 받기도 하고 (시련),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기도 한다(조력자). 신화적인 영역의 바닥에 다다르면, 영웅은 절대한 시험을 당하고, 그 시험을 이긴 보상을 받는다. 이 승리는 세계의 어머니인 여신과의 성적 결합(신성한 결혼), 창조자인 아버지에 의한 인정(아버지와의 화해), 그 자신의 신격화, 혹은 적대적인 능력이 그의 힘에 벅찰 경우에는 전리품의 가로채기(신부 훔치기, 불 훔치기)로 나타난다. 원래 이 승리는 자기의식의 확장이며, 존재와의 합일이다. (깨달음, 변모, 자유) 마지막 단계는 귀환이다. 영웅이 그 권능의 축복을 받은 경우 전리품은 영웅을 보호한다(使者). 그렇지 못할 경우, 영웅은 도망치고, 부정적인 세력의 추격을 받는다(모습을 바꾸며 도주하기, 장애물을 피하며 도주하기). 귀환의 관문에서 초월적인 권능의 소유자는 뒤에 남아야 한다. 영웅은 혼자서 그 무서운 왕국에서 귀환한다(귀환, 부활). 그가 가져온 전리품(홍익)은 세상을 구원한다(불사약).           

 

319.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일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왕성하게 살아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이러한 오류는 성경이나 많은 기독교 의식에 대해서도 자행되어 왔다.

 

348. 우주발생적 유출Emanations의 첫번째 결과는 이승적 단계의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고 두번째 결과는 이 틀 속에서 생명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즉 생명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원적 형태 아래 자가 생산을 위해 양극화했다는 것이다. 이 전 과정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성적인 용어로 나타낼 수가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마오리족의 또 하나의 형이상학적 족보에 놀라울 정도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회임(懷妊)에서 생산이,

생산에서 생각이,

생각에서 기억이,

기억에서 의식이,

의식에서 욕망이,

 

언어가 풍성해졌다.

언어는 어렴풋한 인식 안에 있었다.

언어가 밤을 만들었다.

큰 밤, 긴 밤,

낮은 밤, 아주 높은 밤,

두껍게 느껴지는 밤,

만져지는 밤,

보이지 않는 밤,

죽음과 더불어 끝나는 밤.

 

무에서 출산이,

무에서 생산이,

무에서 풍요가,

생산의 힘,

살아 있는 숨결,

숨결은 빈 공간에서, 우리 위에 있는 대기를 생산했다

 

대지 위에 떠 있는 대기,

우리 위에 있는 거대한 창공은

새벽과 동거했다.

그리고 달이 생겨났다.

우리 위의 대기는

빛나는 하늘과 동거했다.

이어 태양이 생겨났다

달과 태양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하늘의 큰 눈처럼

이어 하늘은 빛이 되었다.

이른 새벽과 이른 낮이 되었다.

한낮, 하늘에서 쏟아지는 한낮의 빛이 되었다.

우리 위의 하늘은 하와이키와 동거하여

땅을 낳았다.

 

회임(懷妊)에서 생산이, 생산에서 생각이, 생각에서 기억이, 기억에서 의식이, 의식에서 욕망이쩐다! 원시 부족인 줄만 알았던 마오리족이 이토록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전승시를 갖고 있다니원시 시대의 조상들은 다 철학자였던 건가? 이런 수준 높은 전승시를 다들 공유했단 말인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인류는 물질적으로 발달해왔으나 정신적으로는 끊임없이 퇴보하고 있구나.

 

398. 그의 뒤를 이은 지제(地帝)  센눙(神農: 기원전 2838-2698)은 키가 약 2.6미터에 이르는 거인으로, 몸은 사람이되, 머리는 소 머리였다센눙은 하루 만에 70여 가지의 독초와 그 해독약을 발견했다.  그는 또 풀을 자기 배에다 대어봄으로써 그 풀이 독초인지 익초인지 알았다. 여기에서 그는, 오늘날까지도 사용되는 약전을 만들었다. 센눙은 지금도 중국인 사이에서 <곡물의 왕>으로 섬김을 받는다. 그는 16세에 신의 반열에 들었다.

 

곡물의 왕은 중요하지. 빵과 국수와 밥의 왕, 주식의 왕, 사람을 먹고 살리는 일을 주관하는 신. 궁극에 가서 배고픔을 해결하는 신이 하루 하루의 삶, 가장 본질적인 생명의 유지를 가능케 해주는 신인 거 아닌가.

 

402. 영웅의 첫번째 과업은, 우주 발생적 순환의 그 전단계를 의식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출emanation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과업은 심연에서 일상의 삶으로 귀환하여 조물주적 잠재력을 가진 인간적인 변환자재자가 되는 것이다.

 

422.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現狀, status quo)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이다. 영웅은 암흑에서 일어서지만, 적은 힘이 세고 권능 또한 엄청나다. 적은 자기 지위의 권위를 자신을 위해 행사하기 때문에 적이며, 용이며, 폭군이다. ‘과거를 옹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옹호한다는 이유에서 그가 바로 사슬이다.  

 

폭군은 자만한다. 그리고 자만은 바로 폭군이 파멸하는 씨앗이다. 폭군은, 자기 힘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만한다. 따라서 그는 그림자를 본질로 오인하는 광대역을 맡고 있는 셈이다. 그 시대 본연의 모습의 근원인 암흑에서 다시 타나난 신화적 영웅은 폭군을 파멸로 몰아넣는 비밀을 알고 있다….

영웅의 행적은 순간의 결정화(結晶化)에 대한 끊임없는 파괴 행위다. 이야기는 순환한다. 신화의 초점은 발전하는 단계에 모인다. 변모, 유동성, 일정하지 않은 무게는, 살아있는 신의 특징이다.  한 시대의 형상은 부서지고, 토막나고, 이윽고 흩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요컨대 도깨비-폭군은 불길한 사상의 옹호자이며, 영웅은 창조적인 삶의 옹호자다.

영웅의 기본적인 임무는, 그러한 괴물과 폭군을 퇴치하고 그 인간의 삶의 무대를 정화하는 것이다.

 

과거를 옹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옹호한다는 것 자체가 사슬, 폭군, 퇴치해야 할 용이라고. 자꾸 한국사회가 생각나는 이유가 뭐냐. 변화를 원치 않는 것들, 지금 이대로를, 혹은 과거 그때로를 외치는 세력의 배경에는 다 석연치 않은 용의 잔재가 숨어 있다.

 

431. 이 다채로운 쿠훌린의 모험에서, 가장 웅변적이고 가장 극적인 것은, 바퀴와 사과가 가 구르면서 영웅에게 내어주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길이다. 이것은 운명적인 기적의 상징이며 교훈으로 해독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니체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구르는 바퀴>인 사람) 앞으로는 어려움이 비켜나고 뜻밖의 탄탄대로가 나타나는 법이다.  

 

자기본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가 되려는 자. 변화경영연구원의 공통분모이겠지.

 

436. 29) 페르시아 신화는, 아랄 카스피 평원에서 흘러나와 인도, 이란, 그리고 유럽으로 들어간 인도 유럽 신화 체계에 뿌리내리고 있다. 페르시아 고대 성전 Avesta에 기록된 주요 신들은 인도의 성전 Veda에 등장하는 신들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두 지류는 각각 전개된 곳에서 엄청나게 다른 영향을 끼쳤다. 즉 베다 경전은 점차 드라빗 인도의 세력권으로, 페르시아 경전은 수메르 바빌로니아 세계권 속으로 흡수되었다.

 

일찍이 페르시아들의 신앙은 예언자 차라투스투라 Zarathustra(=Zoroaster)에 의해,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 빛과 어둠 천사와 악마의 엄격한 이원론에 따라 재확립되었다. 이 위기는 페르시아 뿐 아니라 히브리의 신앙, 그리고 나아가서는 (몇 세기 뒤) 기독교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재편성은 선악에 대한 통상적 해석, 즉 선악이 양극성을 초월하고 화해시키는 존재의 유일한 근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결과라는 해석으로부터의 극단적 이탈을 의미했다.

 

그래서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지들끼리도 싸우고 서로 또 싸우는 것인가 보다. 나 아니면 악마인 세상이라니.

 

441. 무섭고 잔인한 폭군은 한 가지 편견에 고착된 인간을 표상한다. 시간의 순간순간이 이전의 순간순간의 족쇄에서 해방되듯이, 이 괴룡과 압제자는 그 전세대, 즉 구세주를 맞던 그 이전 세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 시험자, 무섭고 잔인한 왕)의 부정적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양이 될 생명의 에너지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과업은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성취될 수도 있고, 그 의지를 거스르고도 성취될 수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아니 어쩌면 신이, 그에게 스스로 자식을 위한 제물이 되라는 의지를 심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역설적인 논리가 아니라 한 이야기, 같은 이애기를 다른 방법으로 한 것일 뿐이다. 실제로 용의 살해자와 용, 제관과 제물은 뒤집어보면 결국 하나다. 이 하나인 세계에서는, 대립물의 양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과 서인이 끊임없이 싸우는 세계는 이쪽 세계인 것이다. 어쨌든 용(아버지)은 어디에든 있다. 소산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은 우리 삶이 걸린, 죽음이다. ‘죽음은 하나인가, 여럿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그가 거기에 있는 한 그는 하나지만, 여기 자식들 안에 있을 때는 여럿이다.”

어제의 영웅은 오늘 스스로를 십자가 에 매달지 않으면 내일의 폭군이 된다. 

….

아들은 아버지를 시해하지만,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은 원초적인 혼돈 속으로 해소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 종말 그리고 재개(再開)의 비밀이다.

 

478.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시대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패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참 다양한 정의가 있구나. 나 혼자 내렸던 신화는 고대인의 로고테라피이라는 정의는 다양한 석학들의 정의들을 접하니 내가 황금가지’(프레이저)신화의 힘’(캠벨)에 영향을 받았음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군….

 

480. 계절적인 축제가 통상, 자연을 통제하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도어 왔다. 이것은 어림없는 해석이다. 인간의 갖가지 행동, 특히 비구름을 부르고 병을 낫게 하고, 홍수를 막는 주술적 의식에 통제의 의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종교적인(순전한 주술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제의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피할 길 없는 운명에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동기는 계절적 축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486. 우리는, 갖가지 상징을 통해 동일한 구원이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고, 또 알아야 한다. ‘베다의 말씀처럼,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 즉 하나의 노래가 인간이라는 합창대의 갖가지 음색으로 들리는 것이다. 따라서 국부적인 문제의 해결책에 대한 선전이 난무하는 것이다. 난무하는 정도가 아니라 협박에 가깝다고 보아도 좋다. 인간이 되려면,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인간의 얼굴로 바뀌어 있는 신의 얼굴을 알아 보아야만 한다.

 

역자 후기 4 92. 오랜 세월, 우리 숨줄이 닿아 있던, 우리 육즙이 층층이 묻어 있던 문화는 이제 이 땅에 남아 있되, 오직 하나의 질투하는 신학에 가려져 있다. 신화나 종교를 보는 눈이 병적인 교조주의와 경직된 흑백의 논리에 길들어 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결핏하면 조상이 우상으로 단죄되고, 하나의 신학을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오랜 역사 살림을 꾸려온 민족까지 우상의 자식들로 치부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 시대, 기댈 곳 없던 민중의 문화가 미신으로 업어치기를 당하고, 충정에서 우러난 비판 정신과 각자의 자유를 겨눈 정신적 편력의 간증이 사탄의 소리 수작으로 간주되는 이 시대에, 모든 민중의 문화와 종교를 고루 짚어보며, 그 바른 뜻을 더듬는 이 책을 우리 글로 옮긴 뜻은 그러므로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믿음, 다른 이들의 종교라면 듣도 보도 않는 흰 눈을 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체로운 종교정신을 곧추세우는 데 밑바탕 삼을 수 있다면, 남의 집(종교)도 좀 기웃거려 보는데 인색해서야 되겠느냐는 뜻이다.     

 

동감 동감. 이 정도는 설명해줘야, 후기라 할 수 있지. 그러나 이 책 번역하고 왠지 이윤기 선생도 테러 당한 건 아닌 지 걱정이 슬며시 된다…. 캠벨도 사후 반유대주의자로 몰렸다 하던데

 

  1. 저자의 입장에서 다시

 

재미있고 어려웠다. 저자가 아닌, 역자와 편집자의 입장에서 먼저 비판하자. 귀한 책인데 편집은 있을 수 없는 실수가 눈에 띈다. 글이 죽죽 나가지 못하고 곳곳에서 걸렀다. 일단 목차의 제목조차 본문 제목과 일치하지 않다니, 참 보기 드문 엄청난 typo. 중간중간 한심한 오타도 눈에 띈다. 초판도 아니고, 개정판을 내면서 편집부는 뭘 한 건가 싶다. 이윤기 선생이 이 책으로 그 해의 번역상을 받았다던가? 그런데 번역에도 아쉬움이 생긴다. 이런 어려운 단어들을 써야 했을까? 안 그래도 난해하고 낯선 내용이 교차 편집되어 정신 없이 왔다갔다하는 책인데,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어휘들이 읽는 흐름을 자꾸 끊었다. 아마도 내용의 정확성이 문제가 아니라, 난이도로 인한 한계였으려나.    

 

내용과 구성은, 귀하다. 특히 구성은 충분히 난해할 내용에 대해 프롤로그에서 미리 설명을 해준 것도 좋았다. 목차 자체가 이 책의 이해에 있어 워낙 중요한 힌트들을 던지는지라, 제목과 순서 하나하나 의미가 만만찮다.  죽 훑어봐야 한다.

 

프롤로그

원질 신화

  1. 신화와 꿈

  2. 비극과 희극

  3. 영웅과 신

  4. 세계의 배꼽

     

1부 영웅의 모험 

1. 출발

  1. 영웅에의 소명

  2. 소명의 거부

  3. 초자연적인 조력

  4. 첫 관문의 통과

  5. 고래의 배

     

2. 입문

  1. 시련의 길

  2. 여신과의 만남

  3. 유혹자로서의 여성

  4. 아버지와의 화해

  5. 신격화

  6. 홍익

     

3. 귀환

  1. 귀환의 거부

  2. 불가사의한 탈출

  3. 외부로부터의 구조

  4. 귀환 관문의 통과

  5. 두 세계의 스승

  6. 삶의 자유

     

4. 열쇠

 

2부 우주 발생적 순환

1장 유출

  1.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2. 우주의 순환

  3. 허공에서 공간

  4. 공간의 내부에서 생명

  5. 하나에서 여럿으로

  6. 창조의 민화

 

2. 처녀의 잉태

  1. 어머니 우주

  2. 운명적 모태

  3. 구세주를 낳는 자궁

  4. 미혼모의 민화

     

3. 영웅의 변모

  1. 최초의 영웅과 인간

  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3. 전사로서의 영웅

  4. 애인으로서의 영웅

  5. 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

  6. 구세주로서의 영웅

  7. 성자로서의 영웅

  8. 영웅의 죽음

     

4. 소멸

  1. 소우주의 끝

  2. 대우주의 끝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1. 변신 자재자

  2. 신화, 제의, 명상의 기능

  3. 오늘날의 영웅

 

역자후기

찾아보기

 

대부분의 옛날 이야기와 거기서 파생한 수많은 작품들에서, 주인공이 거하던 곳에서의 출발, 낯선 세계로의 입문, 새로워진 주인공의 귀환, 구원 또는 깨달음의 열쇠를 획득하는 구조는 매우 익숙하다. 이것이 제 1부 영웅의 모험의 목차와 일치한다. 신화가 오랜 인류의 시적 상상력의 축적이라 한 것이 뮐러였던가? 누가 됐든, 현재까지 이어지는 신화의 용도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을 해주는 정의인 듯 하다. 이 익숙한 구조가 잭과 콩나무에서, ‘스타워즈에서, ‘한스의 모험에서, ‘월터 미티의 은밀한 사생활에서 줄기차게 발견되고 음미되는 것이다. ‘스토리메이커라는 스토리작법의 방법론으로서 신화 구조의 분석을 먼저 접하는 바람에, 아무래도 이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야기 구조로서의 신화 이해하기에 매우 도움이 되는 1장이다. 그러나 각개 내용으로 들어가면 상황은 녹록하지가 않다. 이 책이 학자들이 아닌 일반 독자들을 위한 텍스트라 한 것은 좀 너무 했다. 많이 어렵단 말이다. 번역의 문제도 조금은 있을 듯 하지만, 그 내용이 쉬이 번역될 내용이 아님도 짐작은 된다.

 

제목부터 틀려 안타까웠던 2부 우주발생적 순환은, 구조와 기능으로서의 신화에서 넘어가 신화의 존재 의미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던지는 장이다. 특히 영웅의 임무, 미노스 왕의 타락에 대한 장절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422.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現狀, status quo)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이다. 영웅은 암흑에서 일어서지만, 적은 힘이 세고 권능 또한 엄청나다. 적은 자기 지위의 권위를 자신을 위해 행사하기 때문에 적이며, 용이며, 폭군이다. ‘과거를 옹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옹호한다는 이유에서 그가 바로 사슬이다.  

 

폭군은 자만한다. 그리고 자만은 바로 폭군이 파멸하는 씨앗이다. 폭군은, 자기 힘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만한다. 따라서 그는 그림자를 본질로 오인하는 광대역을 맡고 있는 셈이다. 그 시대 본연의 모습의 근원인 암흑에서 다시 타나난 신화적 영웅은 폭군을 파멸로 몰아넣는 비밀을 알고 있다….

영웅의 기본적인 임무는, 그러한 괴물과 폭군을 퇴치하고 그 인간의 삶의 무대를 정화하는 것이다.

 

적은 자기 지위의 권위를 자신을 위해 행사하기 때문에 적이며, 용이며, 폭군이라고. 유사 이래 제 것을 지키려고 힘을 휘두른 자가 옳았던 적은 없다. 영웅의 임무는 그런 폭군을 퇴치하고 세상을 정화하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이 선사 시대의 원질 신화에서 이제 역사 시대에 들어선 신화의 기능으로 와 닿았다. 개인적인 기능을 넘어, 사회적인 목적으로서 영웅의 임무를 일깨워 주려고 신화는 아직도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최종장에서, 변신자재자(變身自在子, warg)로서 신화의 모습을 설명한 부분은 친절했다. 신화와 사회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이 정의는 중요하다.

 

477. 프로메테우스로부터 배우기를 바라는 삶의 항해자는 그에게 바짝 달라붙어 그를 조여야 한다. 그러면 그는 온전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교활한 신은 아무리 재주 있는 질문자에게라도, 그 질문자에게 자신의 지혜의 전부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478.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패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신화를 역사로 바꾸려 할 때 수많은 부작용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보아왔다. 상징의 바다, 신화의 다원성에 대해 설명하려 할 때, 변신자재자라는 용어는 적절하였다. 그리고 재미난 상상들을 불러 일으켰다. 변신자재자가 등장하는 장르소설과 영화와 만화를 탐독한 덕에 의미가 더 직접적으로 와 닿았다. 역사상 최대의 스케일과 어마어마한 공력을 자랑하는 판타지 소설이자 미드로도 제작된 ‘Game of Throne’을 들여다 보면, 일곱 개의 가문이 왕이 되려 전쟁을 벌이는 그 환상과 권력의 세계에서 최종 구원자로 일어설 두 주인공이 각각 용의 어머니와 변신자재자라는 설정은 신화적으로 의미심장하다. 세상의 악을 상징하는 용을 다스릴 궁극의 어머니와 신화 속의 존재이자 신화 그 자체를 의미하는, 변신자재자의 피가 흐르는 가문의 서자가 결국 최후의 악에 맞서 세상을 구할 존재들이라는 것은.

 

생각이 자꾸 딴 데로 새는 통에 저자 입장에서 다시 보기는 난항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니 그간 재미로만 들여다 봤던 신화와 관련된 책들이 의미를 얻어 되살아난다. 나는 이런 책을 안 쓸 것이다. 못 쓸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입장에서 다시 쓰기와 같은 지적은 할 수 없다. 그냥 감사하다. 안 친절해도 괜찮다. 이런 시도를 해준 조셉 캠벨 덕에 나는 이제 온갖 영화와 소설과 수많은 책들을 더욱 더 꿀재미로 만나게 될 것이다. 더욱 더 머리 아프게 고민하게 될 것이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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