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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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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4일 23시 24분 등록

“모든 것은 카오스에서 시작되었다. _ 오비디우스”


2014. 5. 4


일부러 떠들고 웃어도 보지만 벌컥 벌컥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다 또 문득 의기소침해졌다가 분기탱천했다가를 반복했다. 시도 때도 없이 울컥대다가 급기야 빈방에 들어서는 펑펑 울었다. 마음이 말을 듣지 않는다. 


지난 보름여동안 나는 불쌍했다가 안타까웠다가 슬펐다가 억울했다가 미웠다가 분노했다가 결연했다가 무서웠다가 무기력했다가 좌절했다가를 반복했다. 기껏 한마디 뱉어낸 말이 “잊지 않겠습니다.” 그대들을 잊지 않겠다는 것인지 그것들을 잊지 않겠다는 것인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쌍한 나를 잊지 않겠다는 것인지 주어를 찾지 못한 동사는 둥둥 떠다니다가 이리 부딪치고 저리 차이기를 반복했다. 


실천되지 않는 다짐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이제는 정말 안 되겠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내 막막하고 막연해서 또 울었다. 속수무책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왜 우리를 이렇게 되도록 방치했던 것일까? 나는 왜 나를 직심(直心)으로 섬기지 못하는가! 심연(深淵)의 고통으로 불면의 밤이 찾아왔다. 뒷목은 뻣뻣하고 어깨는 뭉쳐서 팔을 들 수가 없다. 깨어있지도 잠을 자지도 못했다. 종일토록 아래로 쏟아냈다. 먹은 것 보다 쏟은 것이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들을 또 그 누구를 힐난할 자격이나 있는 것인가! 슬픔과 무기력은 배가 되었다. 방기하고 방조한 자가 조장하고 저지른 죄를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며 대통령의 두 손 모은 사진이나 게재하던 어떤 이에게 ‘기적이 아니라 상식이 일어나야 할 때’라며 독기를 뿜던 것이 고작이었으나 이 또한 가한 일은 아니었다.


이윽고 사악함이 세상을 뒤덮고 세상은 고통과 슬픔에서 하루도 벗어날 수 없었다. 부와 권력만이 정의가 되었고 선량한 사람은 약한 자가 되어 더욱 살기 어려워졌다. 범죄를 보고도 분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힘없고 가여운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 않는다. 세상은 탐욕으로 가득 차고 갈수록 사악해졌다. 인간은 순결, 정직, 성실성 같은 덕목을 기피하고 오로지 기만과 부실(不實)과 배반과 폭력과 탐욕만을 좇았다. 사람은 사람에게서 안전하지 못했다. 그때,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해서 신이 아흐레 밤 아흐레 낮 동안 비를 뿌려 세상을 쓸어 버렸던 그때가 바로 지금이었을까! 그때처럼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오랫동안 조직의 향상과 최적화를 위해 일해 왔다. 조직의 여러 가지 문제를 발견하여 그 원인을 제거하고 이런 문제가 다시 생기지 않도록 시스템을 만들고 구성원들에게 알려 정착시켜서 에러와 부적합을 줄이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의 근간이다. 혁신을 도모하는 일을 해오면서 수많은 실패와 좌절 가운데 뼈저리게 깨달은 단 한 가지는 ‘사람의 質’이다. 윤이 나고 찰기가 있는 조직에는 여지없이 또랑또랑한 사람들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리 돈을 쳐 바르고 쌈빡하게 시스템을 만들어 놓아도 이것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다. 나는 여러 조직과 함께 일을 해 오면서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었을 때 벌어진 참담함을 수 없이 목격하였다. 원칙과 기준이 그리고 이것을 준용하여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 개인 또는 집단의 사사로운 이익에 부역하거나 또는 그 이익을 위하여 배척당하는 참담한 상황을 목도하면서 무너지고 좌절했다. 혁신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는 것’이다. ‘상식이 상식으로 통하는 것’을 말한다. 땅을 딛지 않고 나를 수 없으며 항구에서 출발하지 않고 대양을 건널 수 없다. 세상에 ‘용가리 통뼈’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뼈가 녹을 것 같은 참담함 가운데서 깨달았다. 


센 놈이 약한 놈을 먹는 것은 짐승이 하는 짓이다. 세상에 어느 짐승도 동족을 죽여 제 삶을 영위하는 족속은 없다. 능력 있는 놈이 벌어서 필요한 놈이 쓰는 것이 정의다. 남는 놈이 모자란 놈을 채우고 센 놈이 약한 놈을 거두는 것이다. 이것이 인지상정인 것이고 사람살이의 정의다. 지킬 것을 정했으면 지켜야 하고 움직일 것을 정했으면 움직여야 한다. ‘시장’과 ‘경쟁’과 ‘효율’ 따위가 최선이어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옳은 일’이다. 가라앉은 곳에서 다시 시작하려면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다운 몇 분의 승무원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서로를 격려하면서 질서정연하게 희망을 놓지 않았던 아이들에게서 나는 아직 우리에게 남은 한 가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생의 씨앗을 발견한 것이다. 재생이란 어제를 죽이고 오늘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넘어진 그곳에서 다시 딛고 일어서는 것이다. 타락한 그곳에서 나를 죽여 나를 내게로 돌려놓는 것이다. 강의 범람이 대지를 비옥하게 하고 모조리 태울 것만 같던 화마가 지나간 자리에서 알뜰하게 새싹을 틔우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렇듯 좌절과 고난과 역경은 희망의 씨앗이다. 죽음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이것이 자연이 부리는 재생의 비급(備急)이다. 빛은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마음이 원할 때까지 실컷 슬퍼할 것이다. 그리곤 거리로 나가야지. 곧 때가 이르러 희망은 눈물을 거름삼아 싹을 틔울 것이고 이 때 먼저 간 안타까운 주검들은 별이 될 테지. 그때까지 터덜터덜 묵묵히 가련다. 안타까운 주검들 앞에 죄인 된 삶을 살 것이다. 내 아이들에게는 망연자실의 공허한 공포와 무기력을 물리지 않을 것이다. 



또 다시, 

“그대들의 어른이어서 미안합니다.”


또 한번,

“잊지 않겠습니다.”

IP *.182.5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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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5 00:08:30 *.70.48.56
며칠전 아이들과 함께 추모제를 다녀왔습니다. 충분히 공감합니다.
글이 사람의 마음을 뛰게하는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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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5 20:44:32 *.255.177.78

글을 읽고 느낀점으로 '전국민 당원되기 운동을 하면 어떨까' 생각하였습니다. 지금의 정당들은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당원들이 정해져 있고 그 당원들 조차도 지역적으로 먹이 사슬로 서로 연결된 조직의 형태를 갖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으로서 정치적 소견과 목소리를 내는 방법은 정당을 통해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고 이를 키우는 것이 정당의 설립 목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정당은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 입니다. 정당에 참여하여 정당의 활동을 감시하고 자신의 정치적 바람을 실현 시킬 도구로 활용하지 않습니다. 결국 국민은 정치를 버렸고 그 버린 정치를 정치인과 정당이 제멋대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우리를 이렇게 되도록 방치했던 것일까?

이 질문의 해답을 찾아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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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5 23:39:46 *.65.153.118
아이들의 죽음이라.... 분노가 가라앉질 않네요....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 일에 대해선 머리가 움직이질 않습니다... 단 한마디도, 단 한줄도, 어떤 행동도... 나오질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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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7 23:36:12 *.144.167.98

나는 그들을 또 그 누구를 힐난할 자격이나 있는 것인가!


이 글에서 자유로워 지지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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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9 16:05:57 *.153.23.18

남자가 빈 방에 들어가서 펑펑 울었다는데 저는 멋지다 생각했어요.

화낼 수 있고, 울 수 있어서요.

저희도 오늘 분향소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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