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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5일 09시 27분 등록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

2014.05.05 이동희

 

1. 저자에 대하여 - 구본형(1954-2013)

 

매일 새벽 4시 방에는 불이 켜지고 컴퓨터를 켜는 소리가 들린다. 그 방에 주인은 매일 읽고 매일 쓰는 사람으로 스스로에게 혁명을 일으킨 작가인 구본형이다. “읽지 못하면 쓸 수 없다. 쓰지 못하면 깊이 알 수 없다. 깊지 못하면 사이비다.” 그분의 간단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다독, 다작, 다상량을 통해 다양한 고전을 현대의 삶에 끌고 와서 새로이 역어 창조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그분의 글의 특징이다. 그분의 글은 자기 경영에 대해 다루면서 그 기반을 고전과 인문학에 두고 있다. 그분의 글을 읽을 때면 세상의 모든 고전과 소통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표면적으로 알고 있던 고전과 인문학 서적의 내용을 심도 있게 때로는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분에게 43세 나이는 스스로 변화하여 새로운 인생으로 뛰어드는 시작점이 되는 해이다. 글쓰기를 통해 1998년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저술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46세에 20년 동안 경영 혁신 총괄 전문가로 활동하였던 IBM을 퇴사하고 1인 기업가로서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구본형의 명함에는 ‘변화경영 전문가’라고 적혀 있다. 마흔 여섯 살에 직장에서 나와 스스로의 정체성이 필요할 때 그를 지탱해준, 스스로 명명한 직업의 이름이다. 쉰 살의 중반을 맞아 그분은 ‘변화경영 사상가’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불렀다. 말 그대로 기술적 전문인에서 변화에 대한 철학과 생각을 일상에 녹여내는 사상가로 진화하고자 한 것이다. 그분은 10년 동안 100명의 변화 경영 연구원들을 양성하고, 500명의 꿈벗 커뮤니티를 구성하여 더불어 '시처럼 산다‘(Life as a Poem)는 꿈을 가지고 있다. 이후의 모습에 대해서는 그분은 스스로 이렇게 적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변화경영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죽고 싶다. 시는 젊음의 그 반짝임과 도약이 필요한 것이므로 아마도 그 빛나는 활공과 창조성을 따라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시처럼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시처럼 아름답게 살 수는 있지 않겠는가. 자연과 더 많이 어울리고, 젊은 이들과 더 많이 웃고 떠들고, 소유하되 집착이 없는 자유로운 행보가 가능할 것이다.

 

삶의 모든 것들로부터 배우고 글을 쓰고 아름다운 영향력을 전하던 그는 2013 4,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구본형은 17편의 KBS FM 라디오 고전읽기를 방송하였으며, 604편의 구본형 칼럼, 375편의 마음 편지를 남겼다. 유고집을 포함하여 22권의 저서가 출간되었다.

 

년도

주요 활동

1954

1월 충남 공주에서 태어남

1980

서강대학교 역사학과 대학원 졸업

1980

한국IBM에서 근무하면서 경영혁신의 기획과 실무 총괄

1991

IBM 본사의 말콤 볼드리지(Malcolm Baldrige) 국제 심사관

1992

한국능률협회로부터 제1 '경영혁신대상' 개인 공로자상 수상

1998

익숙한 것과의 결별출간

Ÿ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글 쓰기를 시작했고 자신의 혁명을 끝까지 지속할 수 있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저자는 본인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중 하나로 회고하였다.

Ÿ  전문가가 뽑은 '90년대의 책 100'에 선정

1999

낯선 곳에서의 아침출간

Ÿ  인문학과 경영학의 결합을 시도한 경영 서적으로 사람 중심의 자신의 생을 사는 변화 이야기를 기술하였다.

2000

월드 클래스를 향하여출간

Ÿ  21세기 무한 경쟁 시대의 인문적 소양과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경영 기법을 제시하였다.

떠남과 만남출간

Ÿ  20년간 근무한 직장에서 퇴사한 직후 한달 반 동안의 남도 여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과거의 추억을 더듬어보고 돌아온 여행기이다.

1인 기업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설립

2001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출간

Ÿ  저자는 책을 통해 더 이상 고용자에게 매달리지 말고 독자 스스로의 브랜드와 뜨겁게 재회하라고 주문한다.

Ÿ  동아일보가 뽑은 '2001년 전반기 읽어야 할 책 10'에 선정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출간

Ÿ  평사원에서 CEO까지 도약을 위한 삶의 경영 철학과 지침을 제시하였다.

Ÿ  2004년 리드앤리더 자문위원단이 뽑은 국내외비즈니스 명저 40’에 선정

2002

사자같이 젊은 놈들출간

Ÿ  자유로운 전문가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자기 재능 발견법부터 전문직 종사자의 직업윤리까지 현실감을 담아 조언해준다

2003

내가 직업이다출간

Ÿ  즐길 수 있는 '나의 일'을 찾도록 도와주는 9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2004

나 구본형의 변화이야기출간

Ÿ  자신의 기록에 기초한 자서전으로 독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한 개인의 역사로 인식하기 바랬다. 이를 나의 이야기 프로젝트 (Me-story Project) 라 했다.

일상의 황홀출간

Ÿ  자신의 일상을 일기형식을 빌어 기록한 것으로 소박한 일상에서 시작되는 변화를 이야기하며 일상의 여유가 함께하는 즐거운 상상과 자기성찰을 보여준다.

2005

2005년부터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을 선발 연구원의 저서 출판을 도왔으며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돕는 일에 힘썼다.

코리아니티출간

Ÿ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차별성을코리아니티(Coreanity)’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정의하고, 한국인 기질과 특성에 맞는 한국형 경영모델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업경영론을 전개하였다.

Ÿ  경영2005년 저서코리아니티 경영은 한국의 문화적 DNA를 바탕으로 제 2의 성장을 가능케 하는 차별적 경영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 받음

2005년 삼성 SDS e캠퍼스는 활동 중인 3,000명의 강사 중에서 최고의 강사로 선정

2006

공익을 경영하라출간

Ÿ  공익분야의 경영혁신을 '현미경을 들여다 보듯 깊이 있게 성찰한 책'으로 평가 받았다.

2007

사람에게서 구하라출간

Ÿ  중국 고대의 리더십을 현대적 경영언어로 재해석해 놓은 인간중심경영의 교본

2008

세월이 젊음에게출간

Ÿ  젊은 직장인들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처럼 따뜻한 경력관리에 관한 조언이다.

2009

‘The Boss-쿨한 동행 출간출간

Ÿ  직장인이 가장 어려워하는 상사와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2010

필살기 출간출간

Ÿ  직장인이 자신을 차별적 전문가로 계발하는 원칙과 방법을 집중 탐구한 책이다.

2011

깊은 인생 Deep Life’ 출간

Ÿ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특별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 그 도약의 순간과 과정을 집중 조명하여 포착한 책으로, 우리 내면에 잠재한 위대함의 발아를 돕기 위해 구상되었다.

2012

신화 읽는 시간출간

Ÿ  신화에서 찾은 인간 독법과 자기경영의 지혜를 신화 속에 숨겨진 의미를 다채로운 시각으로 풀어내어, 독자들에게 신화 속 인간 모습의 성찰을 통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2013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출간

Ÿ  신화를 걷어내고 서양 철학과 문명의 전범典範 된 고대 그리스인의 이야기를 역사의 시선으로 읽는다. 그리스 유적을 답사하면서 신화 속에 가려진 영웅들의 역사에 주목하고 지혜롭고 도전적인 그리스인 이야기를 담아냈다

4월 별세 (향년 59)

유고집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출간

Ÿ  2009년부터 2012년해까지 월간지에 연재했던 '구본형의 편지'를 정리해 엮은 유고집이다. 고단한 현실 속에서 꿈을 잃고 사는 사람들과 신의 재능을 발휘해 프로로 나아가고 싶지만 두려워 망설이는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준다.

유고집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출간

Ÿ  <구본형 칼럼〉으로 남긴 604편의 글 가운데 60편을 가려 뽑아 묶은 것이다. 인생의 새로운 길을 찾는 이들을 위한 변화경영의 교훈이 집약되어 있다

2014

유고집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출간

Ÿ  암 투병 과정에서도 마지막까지 방송했던 EBS FM 라디오고전읽기를 엮은 책이다. 그에게 변화경영의 화두를 안겨준 동서양 문학과 철학 고전 17편을 소개한다. 고전들을 통해 내면을 일깨우고, 어제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독자들을 안내한다.

 

 

나는 2012년 시칠리로 떠난 변화경영연구소 하계 연수를 따라가면서 그분을 처음 대면하게 되었다. 그분은 느린 사람이지만 빠른 사람이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역설이 삶에 녹아 있는 사람이었다. 매우 열려 있으면서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그분에게는 그분의 인생에 맞는 고독이 있었고 그 크기는 가늠해볼 수가 없었다. 마냥 즐거운 여행이었기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시칠리를 여행하며 그분이 들려주었던 신화에 대한 이야기는 그분이 더 이상 사상가가 아닌 시인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고단한 여행길을 그렇게 절실히 즐기고 그 즐거움을 제자들과 나누는 것을 보면서 그분에게 행복이 무엇인가요?”라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그분은 삶이 시가 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시가 되고 노래가 되었다. 모두들 그 분을 노래하고 있었다.

 

글쓰기의 고뇌와 황홀을 느껴야 하느니 뽕 맛 같은 황홀을 못 느끼면 삶이 별로니라. 불완전해야 사랑스러우니 너무 완벽해 지려 하지 마라. 하나님은 완벽하여 두렵고 그래서 사랑할 수 없지만 예수는 불쌍하여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랑이 바로 신의 마음이다. 좋은 책은 그런 마음으로 써야 할 것이니 고통을 사랑하고 방황을 안쓰러워 하고 길 없음에 절망하면서 쓰거라. 자신을 위한 등불이라 여기고 달려 들어야 하는 것이다. 좋은 글쟁이는 자신의 내면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내면에서 자기 운명의 실마리를 찾아 낼 수 있는 힘이 생길 때 그 사람의 글이 훌륭한 것이다. “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P12

앙드레 보나르 같은 문학가는 진정한 원시는 문명 속에 있다고 말한다. ‘자유를 위한 숭고한 투쟁으로 일컬어지는 살라미스 해전은 강력한 전제주의 국가인 페르시아에 대항한 그리스 민족의 독립 전쟁이었다. 이 해전이 벌어지던 역사적인 날 아테네의 총사령관 테미스토클레스는 인간의 생살을 뜯어먹는 신 디오니소스에게 세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금빛 보석으로 치장한 잘생긴 이들은 아테네 최고 집정관의 친조카들이었다. 테미스토클래스는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세 사람의 목을 졸랐다. 그들은 산 사람을 제물로 보내고 싸움길에 올랐던 것이다. 문명은 이렇게 원시와 몸을 섞으면서 자라왔다.

 

피를 모으기 위한 마중물 피가 필요하다. 고대는 죽음을 요하는 전쟁에서 두려움과 자발적 전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그 죽음의 의미를 일깨우고 두려움을 걷어내며 죽음을 눈으로 봄으로써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그와 같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통치자나 전쟁을 주도하는 리더들은 이 죽음의 마중물이 절실하였다. 그것은 희생물을 요하였고 그 중 최고의 희생물은 지도층의 희생이었다. 그들의 삶은 평화 시에는 호화롭지만 전쟁 시에는 제물로 바쳐질 운명인 것이다. 아니면 전쟁의 선봉에서 죽는 것이다. 폴란드의 귀족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귀족의 자녀들로 구성된 선발대가 제일 선봉으로 나가 싸우다 죽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귀족으로서의 삶에 의미와 그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였다. 이 시대도 제물을 요하는 지 모른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수많은 제물들이 희생되고 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돈이라는 교환 가치를 통해 그 희생이 치환되고 있다. 제대로 된 책임 있는 희생을 찾아보기 어려운 점은 돈으로 모든 것이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생명이 무엇을 선택하는지? 우리 사회는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지 제대로 봐야 할 시점이다.

 

P12

그리스 문명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에게 해를 중심으로 사지사방에 퍼져 있는 그리스 식민 도시들이다. 그들은 그 당시에 이미 그리스 본토에 갇혀 있는 대신 세계의 끝까지 나가보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가난이 그들을 떠나게 했고 적당한 도전이 그들을 성공하게 했다.

 

부족한 것은 늘 채움을 원한다. 웅덩이에 물이 고이듯이 부족함을 아는 것이 채움의 시작이다. 가간을 이기고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은 사람을 세상에 내몬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무엇으로 가난을 이기고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인지? 그러면 현실을 보게 된다.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나은지? 무엇을 가질 수 있는지?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 등 질문을 쏟아내고는 하나씩 답하는 시간을 거치다 보면 그 시대를 이기는 힘을 얻게 된다. 현실에서의 소망, 희망, 갈망, 욕망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제일 우선이다. 이는 현실 수긍이 아니라 현실 부정에서 비롯될 수 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닌 현실을 넘어선 이상을 꿈을 현실화 하고자 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꿈을 여러 사람의 꿈으로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 좁고 척박한 그리스 땅에서 그만 그만하게 먹고 살자 하였을 것이고, 누구는 더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찾아 나서자고 하였을 것이다. 주여진 여건에서 싸움을 하면 번성할 수 없고 다만 유지할 수 있도록 통제해야 한다. 특히, 공급이 한정이니 수요인 사람을 제한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도시는 생산 능력의 한계 수준에 맞게 유지되고 더 클 수가 없다. 그러면, 외침을 받았을 때 대항할 힘이 제약을 받게 된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사라질 운명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더 큰 힘을 가져야 하고 이를 계속 키우기 위해서는 그 도시 혹은 지역의 생산 능력 이상의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을 유지할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쉽게 말해 벌어먹고 살아야 한다. 그 여분의 사람은 결국 도시 밖으로 나가 먹고 살 방도를 찾아와야 한다. 다른 도시를 털어서 약탈하고 교역을 통해서 남는 것을 주고 없는 것을 얻어 오게 된다. 이는 도시를 그 생산 능력 이상으로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게 한다. 발전은 이와 같이 안에서 이루어질 수 없고 밖에서 찾아야 한다. 현대의 개인의 삶도 우리나라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은 반도 국가에서 세계를 호령하는 대한민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대한 민국 건국 이후 70년이 흘러가고 있다. 몇 세대가 지나가고 지금의 시대가 왔다. 우리는 질문한다. 다시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곳곳에 물들어 있는 타성들에게서 사람을 어떻게 깨워야 하는지? 사람들을 어떻게 일으켜 세워 앞으로 보게 하고 나아가게 만들 수 있는지? 오늘날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P13

그렇다. 이 시대는 신사적이고, 관대하고, 절제하고, 근면하고, 정직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단순하고 용감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었다. 술고래에 거짓말을 하고 살인을 하고 배신을 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비겁하고 소심하며 나약한 인간이 나쁜 사람이었다. 최고의 미덕은 용맹이고 무자비한 지능이며 남자다움이었던 것이다. 초기 그리스인들에게 해적 질은 생계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니체가 태어나기 한참 전인 이 미숙한 야만의 시대에 이미 니체주의자들이 그리스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트로이 전쟁은 조직화된 해적들끼리의 약탈과 전쟁과 세력 다툼이었다. 여기에 그들이 만들어낸 신들까지 편을 갈라 두 패로 나뉘어 쌈박질을 했다. 이렇게 인류의 문명은 야만과 원시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모든 문명은 원시를 품고 있는 것이다.

 

P14

모든 나그네와 거지들은 신들이 변장하고 찾아온 것이기 때문에 아카이아인들은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선물까지 하면서 친절하게 대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늘 나오는 나그네와 거지들은 신의 변신이라 함부로 대했다가는 신의 노여움을 받게 된다. 왜 나그네와 거지일까?

 

P14

발밑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하는 자가 하늘의 일을 알려 하다니!”

얼마나 그럴 듯한 비난인가! 플라톤이 탈레스를 두둔하고 나섰다.

이런 비웃음은 철학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진 것이다. 철학자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이 무엇을 하는지, 자기가 인간인지 다른 존재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웅덩이뿐만 아니라 법정에서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웃음을 살 것이다. 웅덩이뿐만 아니라 온갖 어려움에 빠질 정도로 서툰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철학자란 인간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P16

무엇이 가장 어려운가?” “당신 자신을 아는 것

그럼 무엇이 가장 쉬운가?” “조언하는 것

신은 무엇인가?” “시작도 끝도 없는 존재

가장 가치 있고 정의로운 삶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을 비난할 때 그 비난 당한 삶을 스스로 살지 않는 것.”

아폴론 신전이 있는 델포이에는 그가 했다는 말이 기둥에 새겨져 있다. 바로 너 자신을 알라

 

다른 사람을 비난할 때 그 비난 당한 삶을 스스로 살지 않는 것이 말의 무거움을 깨닫는다. 우린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지경인가? 아니면 모두 스스로 정의로운가? 작금의 세상은 마녀 사냥 중이다. 아니다,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세상 다시 들여다보기를 하는 중이다. 나의 세대는 이제 더 이상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안 되는 나이에 있다. 이 세상에 책임 있는 세대가 되어 있다. “너 자신을 알라나는 무엇인가? 이 질문 자체에 빠지지 말고 이 세상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 나는 많이 아는 것보다 적게라도 제대로 알고 이를 실천하는 삶을 바란다. 명징한 것들은 단순하다. 행복한 것들도 단순하다. 그러니 단순한 것들을 위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도 그런 단순함이다. 명징한 것들을 하루 하루에 녹여 내는 일이 내가 할 일이다. 명징한 것들은 내가 알고 있는 정의로운 것들이다. 탈레스의 말처럼 내가 비난하는 것을 스스로 살지 않는 것만큼 명징한 기준도 없어 보인다. 오늘 이후로 내 인생의 거울로서 이 말을 쓸 것이다. 내가 비난한 것의 삶을 살지 않는 것.

 

P17

나는 그리스인의 신화를 읽으면서 내가 동양인도 서양인도 아닌, 인류의 한 사람임을 절감했다. 진정한 글로벌 인간인 셈이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든 우리 안에는 인류의 원시와 고대 그리고 중세가 이 시대와 공존한다. 오늘 그리스인의 이야기에서 그 행간을 읽어낼 수 있다면 우리 안에서 가장 위대한 힘을 이끌어내 스스로의 삶을 영웅의 행적으로 끌어올릴 용기와 방법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끊임없이 우리를 끌어올리는 힘, 엑셀시어 Excelsior의 정신은 우리를 도약하게 한다.

 

엑셀시어 (더욱 더 높이). 우리의 삶은 비참하다. 고통스럽고 휩쓸리고 어디 붙들 나무조차 없다. 바람에 이리 저리 떠도는 배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주어진 삶, 주어진 선택, 주어진 대가, 주어진 기회 모든 것이 주어진 것들 투성이다. 만들어진 삶이란 이런 것일까? 나의 세대는 내 앞 세대의 실험실 같다. 내 세대는 스스로를 실험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삶을 녹이는 연금술을 만들지 않았다. 만들어진 유리관을 통과하며 세상이 기대하는 세상이 가게 만든 길로 그저 빠져들고 있다. 지금도 어제도 그랬다. 나는 왜 이 느낌을 오래 전부터 갖게 되었을까? 왜 갖게 되었을까? ‘엑셀시어의 정신으로 나를 도약한다라고 한다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용기와 방법? 영웅의 행적. 영웅? 현실. 지금. 내가 인정하는 것을 찾아야겠다. 만들어야겠다. 내 세상을 만들어야겠다. 더는 못 봐주겠다. 나의 이 초라한 하루를 더는 못 봐주겠다.

 

P17

하나의 기업을 만들어내는 것은 하나의 나라를 세우는 것과 같다. 하나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나의 세계 하나를 창조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내 기업을 만들어보겠다. 나로부터 비롯되는 세상을 하나 만들어 보겠다. 이 세상에 공헌할 수 있는 내 방식대로의 나라를 세워보겠다.

 

P18

나의 신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나의 세계가 없는 평범한 삶에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세계 하나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자주적 삶의 방식도 없고 정신적 독립성도 없는 대중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삶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마침내 세상에 자신의 작은 왕국 하나를 건설해나가는 이야기다. 성공과 실패가 하나의 물결처럼 서로를 교환하는 것,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모멸이 온몸을 휩싸는 일에 뛰어드는 것, 모든 신화는 바로 이 무수한 모험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신화 읽기를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그런 류의 책들은 너무도 많다. 이 책은 모험의 선동을 위해 쓰였다. 모험에의 초대,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다.

 

2013 1월에 이 책을 갑상선 암 수술 후 읽었다. 그리스 신화를 읽어 본적이 없는 나로써는 우선 그리스 신화에 대한 내용에 휩싸였다. 프롤로그를 이렇게 자세하게 뜯어 읽어보질 못했다. 구본형 선생님의 이 마지막 말씀이 그 때는 뭔지 몰랐다. 지금 새 삶을 살고 있는 나로서 그리고 연구원으로 첫 발을 내 딛는 지금으로서 나에게 가장 필요한 조언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세계를 하나 창조해내라는 말씀을 다시 상기해본다. 나의 세계, 내 세상, 나의 삶 이 모든 것은 모험을 통해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모험이란 미지의 세계로 나를 던지는 두려움을 극복하여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셨듯이 실패도 감수해야 하고 패배의 모멸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한다. 죽어야 한다. 죽어야 한다. 그래야 한 발 나아갈 수 있다.

 

 

P24

생명은 심연 속의 어둠, 즉 지하 세계의 죽음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은 신화의 중요한 모티프다. 이것은 죽음, 지하 세계로의 하강 그리고 재탄생의 농업적 주기를 상징화한 것이다. 하나의 씨앗이 죽어 썩어지니 땅속의 암흑에서 수십 배, 수백 배의 낱알이 싹터 부활한다. 그리니 알로 상징된 생명이 밤과 어둠의 결합으로부터 탄생되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알리 부화하여 껍질을 깨고 황금의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니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은 존재하는 것들끼리 짝짓게 만들었다. 사랑이 태어나자 암흑의 혼돈을 거두어가기 시작했다. 사랑은 빛과 함께 낮을 만들어냈다. 이윽고 대지가 만들어지고 하늘이 생겨났다.

 

사랑이 천지 세상을 만드는 가장 기본으로 생각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알게 된 것은 세상 모든 흐름의 뒤에는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의 배신이 있고 그 배신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것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사랑이 이루어 지면 그 사랑으로 세상의 선물이 만들어지고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만큼의 애증이 생기는 것이 이 세상의 흐름을 좋게도 혹은 나쁘게도 만드는 것이다. 또한, ‘무엇을 사랑하느냐도 중요한 문제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이기적인 모습의 사람을 만들었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이타적인 사람과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실체 없는 자신을 위해 세상을 살다 보면 결국 허무해 진다. 자신의 욕망도 허무해 진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삶은 결국 무로 돌아갈 존재인 자신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끝없는 욕망의 허상에 사로잡히고 말기 때문이다. 그저 세상의 나 아닌 것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작용이 생기고 결과로 다양한 많은 창조가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창조적이지 못한 이유는 사랑이 부족해서 이고 특히, 남을 사랑하지 못해서이다. 자신을 사랑하면 창조성이 떨어진다. 나는 하나지만 남은 무수히 많기 때문에 그만큼 창조성을 발휘할 일이 많은데 자신만 붙들고 있으면 모든 것이 혼돈인 자신 안에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화에서도 사랑은 자신을 사랑하라고 되어 있지 않다. 모두 둘 사이에 사랑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점점 넓게 크게 깊게 되어 세상 만물이 태어나고 번성해지는 것이다.

 

P24

그리스인들에게 천지창조의 신화는 없다. 신이 우주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주가 신들을 만들어냈다. 하늘과 땅이 남편과 아내가 되어 신들을 만들어 냈으니 삼라만상이 모두 의인화된 크고 작은 신들이 되었다.

 

신적 존재들, 모든 것들은 신의 뜻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 그것은 내가 대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귀히 보게 만드는 중요한 믿음이다. 종교적인 문제를 떠나서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랑하는 마음의 결정체이고 이 사랑은 신의 뜻이라는 것이 나의 세상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니 이 세상 모든 물건을 비롯한 존재들은 나에게 모두 사랑이다. 그런데 하물며 사람은 큰 사랑의 요체다. 복잡하지만 그 바닥에는 아주 큰 사랑이 있는 사랑을 부리는 특별한 존재이다. 어쩌면 신의 사랑을 이 세상에 구현하기 위한 신의 사랑의 전령사이며 구현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사랑 이 단어는 만고의 진리이다.

 

P28

프로메테우스는 신처럼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고귀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태양으로부터 불을 훔쳐와 인간에게 주었으니 인간을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구해주는 요긴한 무기로 불만 한 것이 없었다. 천상의 신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지나친 인간 편애에 분노했다.

 

인간은 불을 이용하여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되었고 짐승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무기를 갖게 된다. 이런 인간이 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이 시점에서 인간들은 오만해졌을 것이다. 일부는 신의 지위와 권능을 넘봤을 것이고 신에 대한 경이로움에 경배하지 않고 업신여겼을 것이다. , 자연에 대해 만물에 대해 오만한 생각들을 품고 감사하는 마음과 경외하는 마음이 천박하고 경박하며 겸손을 잃었을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 않았을 것이나 그러한 행태는 점점 퍼져나가 인간들의 무리는 신을 섬기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곧 신인 것처럼 무리 지어 신들에 대항하였을 것이다. 이 것이 신을 분노케 하였을 것이다. 분노, 분노는 자연의 신의 감춰진 본 모습을 보지 못한 인간에게 자연과 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세상에 오만하고 자만하는 인간들은 자연의 큰 변화와 신들이 부리는 조화를 예측할 수 없고 변화에 대비할 수 없다. 지금 보이는 상황이 전부이고 그 상황을 지배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측하지 못한 경험해 보지 못한 자연과 신의 조화에 인간은 결국 꼼짝없이 그 본색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참으로 무참한 결과가 뒤따르게 된다.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그 많은 사고와 자연 재해는 인간의 그 오만과 자만심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벌을 받게 된다. 사랑하는 자 오만을 멀리하고 자연과 신을 섬기는 데 부족함이 없어야 하고 늘 겸허히 세상을 대해야 하는 절대적인 교훈을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일 먼저 언급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니 이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P30

판도라는 모든 선물이라는 뜻이다. 판도라는 신들로부터 모든 것, 즉 강점과 약점, 저주와 축복 모두를 받은 여자가 되었다. 제우스는 한 사람 안에 너무도 많은 대립적 요소들을 넣어두면 그것들이 서로 부딪치고 갈등해서 하루도 고통과 번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모순, 갈등, 패러독스, 딜레마가 바로 태초의 인간의 조건이 되었다.

 

판도라는 모든 선물이다. 결국 모든 것은 선물로 받은 것이다. 그러니 받은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할 것이다. 신은 이렇듯 사랑도 주고 축복도 주시지만 고통도 같이 주셨다. 이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 갈 수 있게 만든 정말 소중한 선물일 것이다. 생과 사를 관통하는 인생의 참 의미는 무엇인가? 결국 삶을 통해 아름답게 한 세상 살아보라는 것이다. 고통도 맛보고 즐거움도 맛보고 그러면서 세상에 복된 것 하나 만들고 떠나는 것이다. 인류는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신의 뜻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 온 천지에 신의 뜻이 깃들어 있듯이 우리 한 인간에게도 신의 뜻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그 신의 뜻을 조금씩 알아가고 그것을 이세상에 구현해 나가고 있는 기나긴 인류의 여정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 것을 인식하고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세상과 삶은 축복으로 넘쳐날 것이다. 어쩌면 판도라는 그 세상으로 가기 위해 인간이 걸어가야 할 멀고 먼 여정의 이정표들이고 하나 하나 알아야 하고 겪으면서 우리 마음에 하나씩 드러내어 볼 수 있게 만든 것일 것이다. 우리 마음의 혼란을 구체화해서 보여주는 것이 판도라의 상자가 아닌가 한다. 보지 못하고 알 수 없는데 혼란만 일으킨다면 결국 혼란을 벗어날 아드리아드네의 실타래를 찾을 길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판도라의 상자는 우리가 그 혼란을 벗어날 진실된 길잡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봐라! 네 마음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그러니 잘 보고 잘 다듬어서 자 사용해서 신들이 빚어 놓은 이 세상을 진정 너희들의 세상으로 만들어 보라는 신들이 만들어 놓은 큰 숙제가 아닐까 한다.

 

P31

상자에 담겨 있던 모든 불행과 저주가 세상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오직 희망만이 그 상자 속에 남아 있게 되었다. 이후 악과 불행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도 인류는 희망만은 버리지 않으며 살게 되었다.

 

희망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늘 미소 짓게 된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절망하지만 그 절망 안에는 희망이 숨겨져 있다. 끝까지 희망을 머리지 못한다. 그 희망이 우리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어쩌면 그 희망이 우리가 이 힘든 세상의 고통을 감내하도록 우리에게 그 고통에 둔감해지도록 만드는 마약 같은 작용을 하는지도 모른다. 고통을 받으면서도 고통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 희망은 그렇게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다. 희망은 때로는 마약 같아서 현실을 잊게 만드는 부작용도 있다. 그저 희망 하나만 붙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으니 말이다. 희망은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 길을 걸어가기를 그리고 행동하기를 요구한다. 희망은 그 부름으로 우리에게 답하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써 희망마저도 거부한다. 고행을 힘든 현실을 뚫고 빛이 있는 세계로 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많은 실패를 해본 세상의 고통에 찌든 사람들은 이 희망 때문에 더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헛된 희망을 갖지 말라고 말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희망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희망은 거창한 고통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쩌면 작은 감사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하루를 살아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하게 만든 것이 희망이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하게 만드는 것이 희망이다. 사람은 무수히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어느 순간 어느 장소 누구라도 무언가 할 수 있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수 있고 미소로 같이 있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할 수도 있고 몸을 움직여 작은 일들을 매일 같이 해낼 수도 있다. 희망은 이렇듯 신기루가 아닌 작은 실천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희망이라 것을 거부하며 삶의 실의에 빠진 사람들, 희망마저도 고통이라며 애써 거부하는 사람들은 희망이 아니라 허망한 욕망에 사로 잡인 것이다. 희망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게 신이 우리 마음에 꼭꼭 심어둔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P33

우리의 무의식 속에 인류의 모든 과거가 살아 숨 쉬고 있다가 어떤 야생의 순간에 원시의 순수한 힘으로 우주적 교감을 이루게 될 때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정신적 시선은 의식의 혁명을 겪게 된다.

 

내 세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내 머리의 뇌 세포가 무엇을 기억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의 몸이 반응하고 전율하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다. 나의 머리가 무언가 상상해 내는 것을 나는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내 몸과 머리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나에게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이 무의식이었든 오랜 인류의 역사의 기억이었든 말이다. 우리는 그 오랜 혁명의 역사를 몸과 머리에 축적해 놓고 애써 과거를 찾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몸과 머리에 남아 있는 것과 우리 마음이 이미 느끼고 있는 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 결국 세상을 한 삶을 살아 내는 것이고 그 일이 곧 나를 경험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삶은 태어나서 시작되고 죽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인류의 역사 속의 고통과 환희 그리고 혁신을 몸 안에 간직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은 나에게 매 순간 매 대상마다 교감을 느끼게 마음의 길을 열어주고 그 통로를 통해 우주의 선지식과 무의식 속에 있는 인류의 기억 속으로 다가가게 된다. 이러한 생각과 마음의 전환은 세상을 대하는 나의 몸과 마음의 태도를 바꿀 것이고 이 세상이 갖는 의미 또한 새로울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의식의 혁명을 가져다 줄 것이다.

 

P36

페르세우스는 자신을 격동시킨 폴리덱테스에게 속아 목숨을 건 모험을 떠나지 않으면 아 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쳤으나 이미 늦고 말았다. 영웅은 몸을 일으켜 고르곤을 죽이기 위해 모험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평민 페르세우스는 이 지점에서 영웅 페르세우스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영웅의 길은 사실 자의 반 타의 반 이렇게 떠밀려 시작하는 듯하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페르세우스의 경우도 그 근본이 미천하지 않고 그의 마음 안에 큰 영웅의 포부와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선물을 약속하기에 이른 것이다. 자신을 새로운 운명에 던진 것이다. 이 것은 단순한 폴리덱테스의 잔꾀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찾는 자에게 방아쇠 역할을 한 것이고 페르세우스는 그 방아쇠를 본 순간 운명적으로 타고난 영웅의 기질이 그 방아쇠를 당기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페르세우스는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 우리의 운명은 어쩌면 결정 지워져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혹은 어떤 상황이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운명의 방아쇠는 영웅이 알아봐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페스세우스처럼 운명의 순간이 왔을 때 자신을 던지라 그러면 운명이 영웅의 길을 열어 주리라. 그리고 그 영웅의 길에 필요한 능력 또한 주었으니 스스로를 이기고 그 운명의 길 끝에 있는 영웅의 소명에 집중하고 마음을 다잡아 먹어야 할 것이다. 영웅의 여정은 삶과 죽음이 같이 있는 날 선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으니 한치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P43

메두사의 목은 페르세우스에게 잘려 페르세우스의 영광을 기리는 장식물이 되고 말았지만 메두사의 영혼은 죽는 순간 하늘의 별이 되어 되살아났다. 아테나가 벌한 것을 포세이돈이 보상해준 것이다. 신화 속의 메두사는 두 개의 대극적 가치를 모두 붙들어 품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메두사는 괴물이면서 동시에 매혹적인 여인이다. 죽음이면서 또한 부활이다. 희생된 자이면서 죽인 자와 결코 다르지 않은 동질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메두사에게 페르세우스는 어떤 존재가 되는가? 결국 메두사의 운명의 굴레를 풀어 해체해준 사람이 페르세우스이다. 아테네 신전에서의 포세이돈과의 정사로 인해 저주받은 운명은 페르세우스에 의해 그 종국을 맞았고 이 틈에 포세이돈은 새로운 운명을 부여할 기회를 얻게 되어 그녀를 천마 페가소스롤 거듭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의 세계에서는 어떤 신이 한 것을 다른 신이 바꿀 수 없기 때문에 포세이돈도 그 동안 메두사의 운명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운명을 다시 열어 주었으니 어쩌면 메두사에게 페르세우스는 은인이 되는 것이다. 메두사의 모습은 결코 자신이 원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현재 모습은 어떤가 우리는 정말 메두사와 뭐가 다른가? 정말 아름다움 본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세상의 온갖 추한 것들로 몸과 마음을 더럽혀 어느덧 스스로도 보기 역겨운 메두사가 되어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거울을 똑바로 보고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결국 이 대목에서도 우리의 현재의 추한 모습을 죽이지 않고는 거듭날 수 없다는 교훈을 다시 주는 것이다. 운명을 바꾸는 것은 신의 은총을 받는 것도 현재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P48

페르세우스는 자신이 제우스의 아들임을 밝히고 새벽의 여신이 태양 수레를 끌어내는 아침까지 쉬어가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틀라스는 차갑게 거절했다. 왜냐하면 제우스의 아들 하나가 이 황금 사과를 훔쳐갈 것이라는 신탁을 들은 아틀라스가 황금 사과를 지키기 위해 제 땅에 오는 길손은 누구나 그 사과나무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거대한 뱀더러 지키게 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지키기 위해 자신을 걸어야 한다면 그 무엇은 당연히 사람일 것이다. 아니면 그 사람과 동일시 되는 무엇이여 한다. 황금 사과는 아틀라스에게 무엇이었을까? 황금 사과는 황금과 사과로 대변될 수 있다. 사과라는 과일이 주는 이미지는 성서의 죄업이고 또한 신들의 과일이라 귀히 여겨져 특별히 관리되었던 신화 속의 과일이다. 또한, 황금은 인간의 탐욕을 상징하면서 귀한 존재를 대변하고 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갖고 있는 황금 사과는 어쩌면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신들의 과일로서 신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 귀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니 아틀라스는 그것을 지키고자 애를 썼는지 모른다. 물론, 제우스가 이 황금사과 나무를 이 곳에 심고 라돈이라는 머리가 100개인 괴물을 시켜 지키게 했지만 그 땅의 주인은 아틀라스이므로 그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귀한 물건에 대한 집착은 사람이나 신의 운명을 그 물건에 휩쓸리게 만든다. 무수한 인간의 역사에서 이러한 집착과 욕망은 결국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고 대부분은 사욕에 의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아틀라스는 결국 이 황금사과를 지키겠다는 생각 때문에 페르세우스의 메두사 머리를 보게 되고 돌이 된다. 운명이란 이렇듯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에 의해 결정 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느냐가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과 맥이 통하는 이야기 대목이다.

 

P48

메두사의 눈과 눈이 마주치자 이 엄청난 거인은 서서히 돌로 굳어갔다. 머리는 산의 꼭대기가 되고 팔다리는 산의 절벽이 되고 뼈는 바위가 되었다. 그렇게 신체 각 부위가 점점 굳어져 마침내 거대한 산이 되고 말았다. 신들은 기뻐했다. 천상을 받치는 거대하고 안전한 받침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네가 죽어라. 뭐 이런 좀 비참한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이지만 그 희생을 기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기뻐하는 자는 결국 그 대가를 받을 수 있다. 고마움을 늘 갖고 항상 감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만해지고 오만함은 그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가 없다. 죽음과 파멸 외에는. 회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일 중에도 꼭 필요하긴 한데 어떤 발전이나 변화하는 일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지는 않은 일들이 있다. 이런 일들은 점점 더 계약직이 담당하거나 외부 회사에 맡겨 나가는 추세이다. 하지만 회사의 일을 외부에 맡길 때 위험 부담이 커지는 것은 감수해야 할 점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그에 적합한 인물을 물색해서 그 일을 전담시키는 것이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은 발전에 제약을 받지만 자리는 보장받는 좀 특수한 상황에 놓인다. 그 일이 본인에게 맞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이 된다.

 

P50

딸 안드로메다를 바다 괴물에게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다. 신탁의 내용을 알게 된 백성들은 왕에게 신탁을 따를 것을 종용했다. 그리하여 어미의 오만으로 빚어진 빚을 딸이 갚아야 할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오만은 늘 응징된다. 오만은 상대를 무시하고 멸시하게 되며 경쟁을 부추긴다. 오만은 결국 시험대에 자신을 올려 놓게 되는데 그 시험은 기존에 오만함을 얻은 무대가 아닌 새로운 무대가 되어 오만함을 가진 사람을 자멸하게 만든다. 새로운 차원이 열리면 오리를 오만하게 만들었던 모든 자랑거리들은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늘 가진 것을 감사해야 하며 새로운 경지 더 높은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만을 버리고 새롭게 거듭나야만 비운 그릇에 새물을 채우듯이 새로운 운명의 길을 갈 수 있다. 오만은 우리의 생이 발전으로 향하지 않고 돌아서 과거의 유물을 바라 볼 때 생기는 것으로서 우리의 의식이 발전을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미 죽음을 의미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멸망은 오만의 당연한 귀결이 될 수 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속에 품은 본성을 따르게 되어 있다. 그 안에 무엇을 품었느냐에 따라 그 외형과 생명이 그에 따라 생성 변화 발전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53

그 아이를 위한다면 그 아이의 목숨이 명재경각이었던 그 순간에 그 절벽에서 구했어야 하지 않았느냐? 그때 네가 나서서 그 아이의 약혼자라고 주장했어야 했다. 신들이 내 딸에게 괴물의 제물이 되는 기구한 운명을 선언했을 때 인간의 약속은 취소되었다. 죽음에 의해 모든 약속이 취소되듯이 말이다. 아무도 무서워 나서지 않았을 때 페르세우스가 나섰다. 그 사람이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그 아이의 목숨이 살아났다. 그래서 남편으로 선택된 것이다. 물러가라. 창피하지 않느냐?” 피네우스는 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분노와 부끄러움이 솟아오르자 그는 있는 힘을 다해 페르세우스를 향해 창을 던졌다.

 

페르세우스에게는 능력이 있었고 피네우스에게는 능력이 없었다. 페르세우스는 이길 방도가 있었꼬 피네우스는 이길 방도가 없었다. 그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런 피네우스가 나서서 내 약혼녀이니 제발 살려달라고 한들 안드로메다가 그 절벽에서 내려 질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하지만 피네우스는 백성들을 설득하거나 같이 죽음을 택하는 것은 가능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피네우스의 안드로메다에 대한 감정을 생각을 봐야 한다. 그는 이렇게 하지 못했다. 쉽게 볼 때 불가항력에 굴종하고 만 것이다. 거기에 더해 안드로메다에 대한 그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 안드로메다의 아름다움을 소유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저 전리품인 것이다. 그러니 싸움에서 이길 가망이 없는데 전리품만 탐이 난 것이고 전쟁이 끝나고 전리품이 온전하니 이제 해볼만한 싸움이라 판단하여 싸움을 걸어 보는 것이다. 소유나 나를 내어 줌이냐의 문제이다. 사랑은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줌이다. 그러니 피네우스는 안드로메다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최소한 안드로메다의 미안한 마음 조차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P54

싸우기 전에는 페르세우스에게 가장 위험했던 메두사의 머리가, 일단 페르세우스가 승리하여 그의 전리품이 되자 적들을 물리치는 결정적이고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그 머리는 페르세우스의 영광이 되었다. 위험이 명예가 되고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된 것이다.

 

위험, 그것은 늘 우리를 불안하게 하며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리하여 위험을 두려움으로 포장하고 겹겹이 싸서 도저히 그 위험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든다. 위험은 실체다. 실체는 늘 불안하다. 모든 존재는 온전히 보전할 수 있는 시간과 상황이 필요하다. 즉 여건이 맞아줘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건이 변하면 그 힘을 잃는다. 마찬가지로 위험의 대상도 그 실체를 유지 하기 위한 여건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험을 제대로 보면 실체가 보이고 그 실체가 의지하고 있는 여건이나 근본이 보이게 된다. 그러면 그 위험이 자리잡고 있는 그 기반을 흔들면 위험 자체도 흔들려 버린다. 결국 위험도 실체를 잃고 힘을 잃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만이 그 위험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권투에서도 날아오는 주먹을 마주할 용기가 있어야만 피할 수 있다. 우리는 수 많은 역경을 뚫고 살고 있다.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그 위험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제대로 된 역경은 우리 삶에 큰 흔적을 남긴다. 몸에 또는 마음에 흔적이 남는다. 그 것은 삶의 토대를 만들어 주고 내가 서있는 자리를 튼튼하게 만들어 둔다. 결국 고난과 역경은 더 큰 도전을 위한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그 도전에서 고난과 역경을 뚫으며 얻은 것은 새로운 도전의 발판이요 무기가 되는 것이다. 메두사의 머리는 그러한 도전의 결과물로서의 훌륭한 상징이 되고 있다. 페르세우스가 한 것은 결국 결심밖에 없다. 나머지는 신들이 도와준 것이다. 이 부분도 잘 봐야 한다. 인간에게 요구 하는 것은 한 발을 내 딛는 용기이다. 나머지는 신이 도와준다는 것이다. 막연한 믿음과 준비 없이 덤비는 만용을 이야기 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실된 용기를 갖게 되면 난관을 직시할 수 있는 눈을 얻게 되고 그 실체를 제대로 봄이 결국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무기를 얻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실된 용기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이 진실된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믿음이다. 그리고 사랑이다. 그 도전이 향하고 있는 그 끝에 있는 사랑이고 그리고 그 과정을 이겨내리라는 믿음이다. 그리면 그 첫 발을 내디딜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P61

맥박 치는 변광성들을 모두 케페이드 (Cepheid)라고 부르게 되었다. 처음 발견한 것을 기념하여 변광성 모두에 케페우스 왕의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아내의 안색에 따라 인생이 밝아지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하는 변광성 같은 여린 남자들은 모두 케페우스의 후손들이다.

 

어느 남자가 아내의 안색에 따라 인생이 밝아지고 어두워지지 않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도 이상한 것이다.

 

P61

안드로메다의 별자리 바로 옆에 페가소스의 별자리가 있다. 두 별자리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페가소스의 가장 밝은 별 세 개와 안드로메다의 가장 밝은 별 한 개가 합쳐져서 페가소스의 사각형 Square of Pegasus을 형성하고 있다. 거칠고 야망이 큰 고대의 영웅들은 안드로메다와 같이 아름답고 조신한 아내를 얻는 것과 더불어 페가소스 같은 씩씩한 야생의 말을 타보는 것이 평생의 로망이었다. 페가소스의 사각형은 바로 그런 고대 남자들의 로망을 결합시켜둔 별자리가 아니었을까?

 

좋은 아내를 얻는 것과 좋은 말을 타는 것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기 몸과 같은 존재들이고 늘 같이 있는 존재 아닌가? 남자들이 아직도 자기 차에 약간의 집착을 갖는 것도 이와 다르지는 않지만 사치가 아닌 수준이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P65

그리스인들이 만든 최고의 신 제우스는 끊임없이 여인들과 사랑에 빠지고 아내에게 자신의 부정을 파렴치한 거짓말로 무마하는 신으로 묘사된다. 최고의 위엄을 갖춘 신이 왜 그런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게 된 것일까? 학자들은 제우스의 바람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지배신이 이미 있는 도시에 그리스인들이 들어가 영향력이 커지면 제우스 숭배도 함께 퍼지게 되면서 원래의 토속신과 하나로 융화하게 된다. 그러면 그 토속신의 아내 역시 제우스에게 양도된다. 이 과정이 바로 제우스의 끝없는 외도 행각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영웅들은 자신들의 계보를 신에 닿게 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다른 신들보다도 제우스의 아들이 되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웠다. 그렇게 반시반인이라는 특별한 혈족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문화는 늘 섞이어 혼합되고 분화되어 발전하는 것이다. 특히, 인류 문화의 서막인 고대에는 이는 더더욱 활발히 일어 났을 터이다.

 

P69

해결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더 악화되는 문제나 조건‘hydria-headed’라고 표현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네소스의 셔츠 (a shirt of Nessus)라는 관용구가 한 사람의 명예나 미래를 파멸시키는 치명적 선물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이유 또한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적에서 얻은 것은 그 것이 무엇이 되었든 나를 괴롭힐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물론 잘 쓰면 나의 또 다른 무기요 영광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잘못 다루면 되려 나를 공격하는 잠재된 위험이 된다. 여기서 적에서 얻은 것을 자신이 능수능란하게 다루어 자신 몸같이 사용한다면 커다란 무기가 되지만 관리를 소홀히 하거나 잊어버리거나 하면 뒤에 그 것이 나의 위험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특히 네소스의 셔츠를 보면 헤라클레스가 히드라의 독을 사용하여 죽이고 네소스가 자신의 피가 묻은 셔츠를 데이아네이라에게 주어 후환이 되게 하였다. 데이아네이라는 여기에 생각을 했어야 한다. 왜 네소스가 자신에게 그렇게 좋은 것을 남겨 주었겠느냐는 것이다. 자신을 죽인 남자의 여자에게 당장 겁탈하려고 했던 여자에게 말이다. 그러니 데이아네이라가 이 부분에 있어서 생각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적에게 뇌물을 비롯하여 온갖 선물로 유혹을 받아 넘어가는 많은 배신자들을 봐왔고 지금도 있다. 그들은 늘 상황이 종료되면 버려지게 된다. 그 만큼 배신은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좋지 않은 뜻을 가진 사람이 주는 선물은 결코 좋은 일을 하는 법이 없으므로 그 사람의 마음이 담긴 것이면 더더욱 받을 것이 못 된다.  

 

P70

키마이라 혹은 키메라는 하나의 생물체 안에 서로 다른 유전형질을 가진 동종의 조직이 함께 공존하는 현상을 뜻하는 생물학 용어로 쓰인다. 이 명칭은 하이브리드 괴수인 키마이라의 신화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동양에서는 십이지간지를 이용해 태어난 해의 십이지 동물을 자신의 다른 모습으로 투영하는 오래된 관습이 있다. 나의 경우는 쥐띠이다. 그래서 그런지 늘 바쁘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한다. 그리고 뭐든 챙겨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더 그 모습에 익숙해져 가는 것도 같다. 이렇듯 사람들은 본인의 알 수 없는 자아는 어떤 것을 비유하여 형상화해서 다시 자신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즐긴다. 이는 무형의 자아를 어떤 형태로 자신에게 보여주고 그 모습으로 삶을 꾸리기 위함일 것이다. 그 것이 쉬울 것이고 스스로에게 길을 쉽게 보여 줄 것이다. 키메라와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이렇듯 사람은 자신 안에 어떤 동물 혹은 어떤 인간을 자신의 모습으로 만들어 그와 같이 행동하기를 원한다. 그 것이 여러 가지의 모습을 갖고 있고 특히 이질적인 것이 같이 있으면 정신병적인 문제로 발전하겠지만 때로는 상황에 맞게 잘 운용하여 멋진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다양한 모습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면 말이다.

 

P74

그것은 오히려 늘 크레타의 지축을 흔드는 화산과 지진의 신을 형상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황소를 바라보았다. 동양에서처럼 그들은 황소와 하나가 되고 싶어 했고, 또 그리스인들처럼 황소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했다. 그들의 황소 의식은 황소를 죽이지 않고 더불어 함께 희롱하며 지내는 것이었다.

 

태어난 곳, 살아가는 곳, 늘 바라보는 것, 같이 뒹굴고 생을 꾸미는 곳 그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다. 그리하여 그 곳의 자연에 맞는 삶의 방식을 갖고 그 곳에서 나는 산물을 즐기며 산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들에게 생명이다. 그러니 생명을 주는 것을 경외하고 또한 상징을 통해 일상에 녹여 잊지 않게 하는 것이다. 황소는 크레인들에게 그러한 존재인 것이다. 같이 해야 할 자연이며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할 가축이고 극복해야 할 현실의 삶인 것이다. 그러니 황소와 마주하여 물러섬이 없어야 하고 이를 넘어서는 삶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P83

신이 보내준 황소는 너무도 매혹적이었다. 미노스는 이 위풍당당한 황소에게 반하고 말았다. 그는 황소를 너무도 아끼는 마음에 바다의 신이 보내준 이 걸물 하나쯤은 자신이 챙겨도 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당당한 황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지 않고 종자를 퍼트리기 위해 자신의 가축우리에 가두어 두었다. 그 대신 그 우리의 소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흰 소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쳤다. 포세이돈은 약속을 어기고 신을 모독한 미노스에게 분노했다. 그리하여 미노스 왕이 전쟁을 위해 바다로 나가 있을 때 그 왕비 파시파에가 이 수소에게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느끼게 했다.

 

공물, 제물이란 신성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신에게 약속으로 바친 제물은 신에 대한 신성한 약속의 이행을 믿음의 징표인 것이다. 그 징표를 자신의 마음대로 소유하려 했으니 신은 응당 그에 대한 벌을 내리실 것이었다.

 

P92

크레타인은 결코 황소를 죽이지 않지만 아테네인 테세우스는 황소를 죽이고 말았다. 크레타인은 황소와 더불어 살지만 아테네인은 황소를 죽임으로써 황소로부터 해방되었다.

 

미노스의 크레타의 지배로부터 아테네의 독립과 번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황소를 죽임으로써 황소로부터 해방되었다. 어쩌면, 크레타의 핵심 역량이 더 이상 소용이 없는 세상이 되었는지 모른다. 철기가 들어온 아테네쪽에 청동기 시대 왕국의 잔재인 트레타가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른다. 이때 사용된 보검은 철기의 신무기였을 것이다. 다이달로스가 아리아드네를 통해 보검을 테세우스에게 전달하게 되는 신화는 결국 다이달로스로 대변되는 기술 발전에 힘입어 크레타의 핵심 역량을 누를 수 있는 기술 발전을 아테네쪽에서 갖고 있었다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P93

테세우스도 그 실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미궁을 벗어났다. 살았다. 그리하여 그는 아리아드네와 젊은이들을 데리고 아테네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도중에 그들을 낙소스 섬에서 잠시 쉬었다. 여기서 테세우스는 잠든 아리아드네를 버리고 몰래 아테네로 돌아가 버렸다. 생명의 은인을 저버린 것이다.

 

테세우스는 실을 놓지 않았다. 미로에서 믿을 것은 실뿐이었다. 그것도 적국의 공주인 아리아드네를 믿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랑이란 말을 해도 한 순간 보고 느낀 감정에서 생긴 이 사랑이 주는 실타래를 믿고 그 미궁 속으로 걸어갔다 온 것이다. 결국 사랑에 믿음이 있으면 어떠한 난관도 이겨낼 수 있지만 의심이 자리하면 미궁에 갇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이미지를 준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랑을 누구나 믿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랑이 어려운 것이다. 사랑의 감정은 광풍처럼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지만 그 안에는 의심도 같이 있어 미궁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때 오직 그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만이 그 사랑의 빛 줄기를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와 같이 미궁을 벗어날 길을 알려줄 것이다.

 

아테네는 크레타와 화해할 수는 없었다 여겨진다. 결국, 크레타를 극복하고 새로운 강자로 등극하는 아테네로서 크레타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테세우스의 입장에서 아테네를 지배하는 일에 향후 아리아드네의 영향력이 생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크레타에서 젊은이들을 구해왔지만 아리아드네를 데려가게 되면 되려 크레타를 대변해야 할 입장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를 아테네에서 보호할 수 없는 테세우스의 입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이 순수했다면 테세우스가 크레타에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테세우스에게 여자는 그리 존재가치가 크지 않았다. 제우스가 그랬든 테세우스도 바람둥이였으니 그에게 진실로 사랑할 여자라는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리아드네를 아테네로 대려가 아내로 맞으면 그 아내를 지키기 위해 크레타를 대변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을 애써 피한 것으로 보인다.

 

P97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의 미로를 밝혀준 여인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미궁 속에 길이 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삶이라는 슬픈 미궁을 미워하지도 저주하지도 않는다. 운명이 주어지면 그것을 따른다.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한다. 그녀는 인생이라는 미로를 사랑했기에, 그 속에 길이 있기에 그 길이 고통스러워도 버리고 파괴하지 않는다. 니체가 디오니소스의 입을 통해 아리아드네에게 전하고 싶은 말 한마디는 사랑한 것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배신하고 떠나는 사랑을 어찌 미워하지 않으리. 그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니 인간은 복잡하고 율배반적이며, 패러독스이고 스스로에게 딜레마인 것이다. 나는 너의 미로인 것이다. 아리아드네야 말로 미로 탐험 전문가가 아닌가! 아리아드네야말로 사랑이 미로이며, 삶이 미궁이며, 스스로가 미궁임을 잘 알고 있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여기서 니체는 외친다. 아모르 파티 (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이왕 버려진 마당에 아리아드네는 무엇을 해야 하나. 자신의 사랑은 배신을 당했는데 말이다. 그냥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넘기기에는 너무도 비통한 일이다. 여기서 삶에 대한 태도가 힘을 발휘한다. 이 것 또한 지나갈 것이고 이 것 또한 나의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시련일 것이고 이를 통해 나의 삶은 더 빛나는 곳으로 갈 것이다.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운명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 아리아드네를 통해 사랑의 배신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교훈적으로 가르치고 있는지 모른다. 사랑의 배신 앞에 의연할 것.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할 것. 사랑한 것은 영원히 마음속에서 미워하지 말 것. 사랑한 것으로 끝날 것. 모든 것을 자신의 삶의 한 부분으로 아름답게 간직할 것 그래서 아모르 파티.

 

P99

아비가 소리쳐 불렀으나 아들은 섬들이 점점이 떠가고 바람이 싱그러운 그 장쾌한 비상에 빠져들었다. 이내 밀랍이 녹아들기 시작했고, 이카로스의 날개는 산산이 흩어져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검푸른 바다 속으로 덜어지고 말았다. 그 후 바다는 이카로스의 바다라 불리게 되었다. 다이달로스는 무사히 시칠리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의 아폴론 신전에 그의 날개를 헌납하여 걸어두었다.

 

이카로스는 어떤 아이일까? 날개를 아버지로부터 받았지만 그 한계를 몰랐다. 그래서 무모하게 하늘 높이 날다가 밀랍이 녹아 날개가 부서지는 바람에 떨어졌다. 도구나 기구는 그 용도에 맞게 설계되고 개발된다. , 용도를 벗어 났을 때 그 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이 명제는 우리가 기계를 대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 용도와 한계를 잘 알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스마트 기기들이 시장에 출시되고 있는 요즈음 만능인 것처럼 기기들을 선전하고 판매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한계와 위해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기기를 접하고 사용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정신이 팔려서 무엇 때문에 그 기기가 필요했고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맞는지는 생각하지 않는 채 기기에 빠져들고 있다. 무엇을 더 알겠다고 하는 것인지?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고 쏟아지는 정보들이 모두 가치 있는 것처럼 들여다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전 지구적으로 정말 많은 에너지들이 이 기기를 통해 소모되고 있다. 충전에 소요되는 전기는 물론이고 사람들이 이를 이용하면서 쏟는 시간과 에너지는 정말로 대단하다. 그러니, 이카로스도 처음 접하는 날개를 이용할 수 있게 되자마자 그 한계를 스스로 느껴보고 싶었을 것이다. 젊은이들은 늘 한계를 돌파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그들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이전 세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세상 만들기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카로스도 이러한 한계돌파에 빠져 자신을 잃게 된 것이다.

 

아버지인 다이달로스의 입장에서 물건이 잘못 만들어진 부분이 있다. 물건을 만들 때는 실 사용자를 고려해서 안전성을 확보해야 한다. 물건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그러므로 이카로스의 성정을 알고 이에 맞게 만들었어야 한다. 실로 꿰어 밀랍의 녹는 것을 보완해 준다던지 등의 보완책이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요즘은 이와 같은 안전 설계는 기본이다. 세상의 기술들이 많이 사람을 향하고 있고 그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이 대목은 그리스 신화에서 중요한 몇 장면 중의 하나다. 나는 이 대목에서 기술자의 생각 없음을 거론하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 나 자신이 기술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술자들은 늘 사람을 생각하고 물건을 만든다. 기술의 잘못된 사용은 결국 인문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 기술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지 기술을 만들어 놓은 것이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잘못 사용되면 큰일이 나기 때문에 기술을 만들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이 살아갈 수 없는지도 모른다. 만약 기술자가 요구된 기술을 만들지 않으면 기술자는 가치가 없으므로 인간들은 그 기술자의 기술이 다른 상대편에 넘어갈까 염려되어 죽여 버린다. 기술자의 생명과 기술의 사용은 결국 그 기술을 운용하고 사용할 사람의 문제이지 그 기술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다이달로스의 전체적인 맥락도 이와 같아서 기술자체를 문제삼지 말고 그 사용에 주의하라는 점을 시사한다고 본다.

 

P104

다이다로스 역시 전형적인 장이이었다. 그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오직 주문받은 것을 가장 잘 만들어내는 기예의 1인자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그가 아테나 여신의 저주를 받아 평생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벌을 받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왜라고 묻지 않는, 생각 없음이 만들어낸 죄때문이다.

 

나의 생각은 다르다. 벌이라고는 하지만 이 것은 기술자의 숙명이다. 왜냐하면 기술의 발전은 그 요구의 발전과 맥이 닿아 있다. 요구가 없으면 기술 개발의 요구가 현저히 낮기 때문에 필요가 도구를 낳듯이 요구가 없으면 기술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정 지역에서는 그 지역에 필요한 기술이 그 문화와 더불어 한계를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즉 사람들의 요구는 늘 아우성인 것 같지만 그것은 기술적 요구라기 보다 수요적인 차원의 요구가 많다. 개선의 여지를 묻는 질문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변화를 추구하는 선지자만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지역에서 지속적인 요구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기술자는 발전을 위해서는 요구를 찾아 떠도는 것이 숙명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쓰일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그것이 기술자의 업이요 숙명이라고 본다. 아테네에게 벌을 받았다고 하지만 나는 기술자인 다이달로스를 통해 기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본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술자는 기술발전에 노력해야 함을 다른 면으로 강조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누구나 시간은 한정 없이 쓸 수 없다. 한정된 인간의 삶을 같이 사용하지 않는다. 기술자는 그 시간을 세상에 도움되는 기술 발전을 위해 늘 수요를 찾아 떠나게 되어 있는지 모른다.

 

P106

동물은 종종 신이 변장한 모습으로 인식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동물이 바로 소였다.

 

소는 농경시대 농업 수확의 핵심 역량이었다. 밭을 갈고 수확하는 과정에서 소에 대한 의존은 가의 절대적이다. 또한, 목축업 관점에서도 소는 우유를 비롯하여 고기까지 버릴 것이 없는 신성한 존재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소를 만난 것은 잉여 식량 생산 시대를 맞게 되는 중요한 만남인 것이다. 소를 통한 농업과 목축업은 잉여 음식을 만들었고 이를 교환하는 것이 무역의 가장 기본이었을 것이다. 먹을 것이 남으니 그것을 먹고 딴 일을 하는 사람이 생겼고 그 것은 문화를 이루는 다양한 물건에서부터 놀이, 사치 행각에 필요한 다양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생겼다. 무엇보다 정치를 하는 사람과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더 잘 살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문명의 시작은 잉여 식량과 이의 교환 또는 약탈 방법의 발전이었으므로 잉여 식량 생산에 지대한 공을 세운 소가 신성시 된 것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P106

허물을 벗고 새로워지는 뱀은 죽지 않는 동물로 신성시되었다.

 

뱀은 두려움과 지혜를 동시에 상징하는 특이한 동물이다. 그 생김새와 독은 그 특징을 잘 표현한다. 또한, 허물을 벗는 다는 것이 주는 변신과 새로운 삶으로 거듭난다는 의미가 주는 신성함이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앞의 소가 생명과 관련된 것이라면 뱀은 지혜로서 사람이 사는 방법에 대한 많은 질문을 담당한다고 본다. 사람은 거듭나야 한다. 농경 사회의 일꾼에서 문명사회의 문화인으로서 거듭나듯이 말이다. 그러려면 먼저 과거 일꾼의 모습을 벗어야 하고 지혜를 갖추어야 하고 언제든지 빠져나갈 궁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발이 없는 뱀은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빠져나간다는 말처럼 표나지 않게 이동하는 생각과 유사한 것이다.

 

P111

아무리 애를 써도 글라우코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자 키르케는 연적인 스킬라가 목욕하는 연못에 독초 즙을 풀어 그녀를 괴물로 변하게 해버렸다. 스킬라는 상반신은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허리 아래는 짖어대는 여섯 마리의 개로 변해버렸다. 스킬라는 시칠리아 해협의 험준한 바위 동굴에 살면서 지나가는 배를 난파시켜 선원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었다.

 

여자들의 질투는 정말 무섭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스킬라는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글라우코스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와 같은 경우 스킬라는 본인의 죄는 마음에 들지 않는 글라우코스를 거부한 죄밖에 없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보면 많은 요정들과 인간들이 사랑을 거부할 경우 참혹하게 변하거나 잘못된 운명으로 빠져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랑은 어쩌면 스스로는 물론이고 상대방도 또 다른 운명으로 밀어 넣는 변신의 관문인 것 같다. 운명적이란 참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왜 그 시점에 그 장소에 있어서 그렇게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던가? 그 모든 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이지만 말이다. 특히 능력있는 여자의 질투는 많은 드라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복수를 자행하게 하고 잔혹하게 파괴하는 무서운 운명의 장난을 부리게 한다. 스스로도 버리게 되고 그와 그녀도 그 불행의 운명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P113

모든 이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또한 잔인한 사냥꾼이기도 한 디오니소스는 고통을 체험한 유일한 신이다. 그는 포도나무처럼 매년 가지치기를 당하고 추운 겨울 갈래갈래 껍질이 찢어진 죽은 나무둥치처럼 매년 부활한다. 기쁨에 가득 차서 다시 살아나며, 죽어야 할 자들에게 죽음이 희망이라는 믿음을 준다. 그는 불멸의 신인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테베의 왕녀 세멜레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간의 여인이 낳은 유일한 신이다.

 

디오니소스는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신이다. 우선 박카스라는 이름을 같이 사용하는 것으로 우리의 박카스 제품과 연계되어 그 친근감을 더한다. 우선 포도주로 대변되는 그의 이미지이다. 글에서 볼 수 있듯이 포도주는 포도로부터 얻는 술이다. 포도라는 정체성을 잃고 숙성의 가정을 거친 후 포도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술은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중요한 촉매제 역할을 해왔다. 마음의 경계를 풀어 진실함에 다가가게 하고 가질 수 없던 용기를 갖게 하며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무의식에 깔려 있던 욕구를 끌어올려 표현하게 한다. 이렇듯 술을 통해 사람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술을 먹게 되면 신과 가까워질 수 있다. 디오니소스가 신와 인간의 아들로 태어났듯이 인간이 디오니소스의 술을 이용하면 신의 경지에 잠깐이라도 머물 수 있는 평안과 즐거움을 자질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 같다.

 

P116

디오니소스는 환희의 불꽃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자신을 비웃는 자들을 먹잇감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것은 술의 이중성이기도 하다.

 

술은 지나치면 정신을 잃게 하여 금수 같은 행동을 하게 만든다. 술이란 것은 알다가도 모르는 참으로 무언가이다. 술을 많이 마셔본 나로서도 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 제대로 정리가 안된 것 같다. 술이란 뭐냐? 그러니 술을 어떻게 마시고 어떻게 즐기고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말이다. 늘 경계하고 즐겨야 할 것이 술이다. 자칫 죽음으로 가는 티켓이 되어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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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0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그는 이미 씩씩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어미니 아이트라는 그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고 바위를 들어 그 밑에 숨겨진 칼과 신발을 찾게 했다. 테세우스는 아버지의 나라 아테네를 향해 떠났다. 젊은 테세우스의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 그는 처음으로 찾아가는 아버지에게 악당들의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칼과 신발을 아들의 징표로 가져가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에게 아버지는 늘 찾아야 할 정체성이다. 그리고 화해해야 할 대상이고 세상을 향해 나갈 때 가장 먼저 통화해야 할 관문이다.

 

P123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종종 회자되는 이 짧고 유명한 이야기는 자기가 세운 일방적 기준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꿰맞추고 제단하는 독선과 편견을 뜻하는 관용구가 되었다.

아직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위에서 고정관념이라는 철제 침대에 맞춰 살고 있는 우리, 그대로 되먹여 치기를 당하듯이 우리가 세상을 보는 그대로 세상도 우리에게 보답하나니 자기 혁명은 현실보다 우리가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줄 때만 이루어지는 것.’

 

독선과 편견은 결국 자신을 망친다. 독선과 편견을 살찌우는 것은 대부분 사리사욕이다. 자신을 위한 일을 하다 보면 그 어떤 것도 뺏길 수 없고 남이 갖는 것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불화가 끝이 없으며 늘 독선과 편견은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떨어뜨려 놓는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나부터 나의 독선과 편견에 빠져있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특히, 상사가 되면 독선과 편견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짐을 느낀다. 더 열려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더 나아가서 열려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어렵다. 단순히 들어준다고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랫사람들의 제안을 들어보면 제대로 적용할 수 없는 수준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 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그러니 다 듣지를 못하고 알고 있는 바대로 추진하기를 바라면서 강하게 이야기 하게 된다. 우선 끝내놓고 보자는 조급함이 아랫사람들 눈에는 독단과 편협함으로 보일 수 있다.

 

P126

아버지는 아들을 떠나보낸 다음부터 아크로폴리스의 언덕에서 바다를 응시하곤 했다. 여러 날이 지난 다음 드디어 저 멀리 아들을 싣고 크레타로 떠났던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배에는 검은 돛이 걸려 있었다. 아들이 죽었다고 믿은 아버지는 절망했다. 아들을 읋은 아버지는 높은 절벽에서 바다로 몸을 날려 죽고 말았다. 아이게우스가 빠져 죽은 그 바다는 그 후부터 에게 해라 불리게 되었다.

 

연로한 왕은 믿는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죽을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같이 있던 아내인 메데이아도 떠나고 그의 아들도 축출된 상황에서 축출된 팔라스와 50아들들의 위협은 계속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홀로 이 상황을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고 이를 극복할 방법은 죽음뿐이었는지도 모른다.

 

P132

이아손과 결혼한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위해 무슨 일이든 다하는 헌신과 열정을 보여주었다.

 

아내들이 이러한 헌신을 하면 남편들은 이를 가벼이 여기고 당연히 여긴다. 그 사랑함을 이렇게 지극히 표현하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남편들은 자신을 세우는 일에 신경을 쓴다. 그러다 보면 아내에게 소홀하게 된다. 그러면서 서서히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모른다. 아내가 없이 자신이 옳게 서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P137

금방 증오가 찾아와 사랑을 덮어버린다. 모성애와 복수의 악마가 긴 결전을 치른다. 사랑이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잠시 후 증오가 승리한다. 사랑이 그리고 다시 증오가 되풀이되며 번갈아 메데이아의 마음을 움켜쥔다. 결국 메데이아는 아주 유명한 다음의 시구로 자신의 갈등을 정리한다. 그것은 마음속에 깃든 악마의 분노였으며, 살인적인 증오였다. 나의 분노는 나의 결심보다 강하다네.”

 

분노는 모든 이성과 사랑의 마음을 송두리째 뽑아 낙아 채 갔다. 남은 것은 분노의 명령에 따르는 수 밖에 없다. 분노를 일으킨 사람은 타자인데 분노는 당사자가 느낀다. 이 부분이 참으로 원통한 것이다. 생을 망치는 것도 분노를 일으킨 사람이 아닌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다. 현재의 사회도 그렇고 고대의 사회도 그렇다. 사람은 타자에 의해 분노를 느끼게 된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 믿었던 사람의 배신은 더 큰 분노를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그 분노를 만든 사람이 죄인이고 그 분노를 느끼는 사람은 사실 죄인이 아니다. 응징자로서 분노하게 된다. 하지만 분노하는 사람은 이성을 잃고 행동을 제어할 수 없으며 이로 인해 자기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이는 분노를 일으킨 사람의 저주스런 행동에 의해 분노한 사람의 인생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리아드네의 경우처럼 사랑한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결국 분노를 일으키는 사람의 잘못으로 나의 삶을 망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분노를 일으킨 그 원인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 응징의 수단으로 나의 삶을 바쳐 나를 망치는 일은 결코 분노 이전과 이후를 다르게 만들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분노의 원인과 나의 태도는 약간의 분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마음의 배신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마음의 배신으로 촉발된 분노는 결국 그 마음으로 맺어준 관계를 파괴하고 서로 파멸의 길을 걷도록 만든다. 한쪽의 잘못이지만 이미 하나로 운명 지워진 관계는 서로를 파괴하고 결국 모두 파멸로 막을 내린다. 그러므로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서로를 계속 바라봐야 한다. 사람을 보고 대해야 하며 막연한 믿음도 갖지를 말아야 한다. 상대를 보고 나의 마음도 계속 고쳐 먹어야 한다. 더불어 나의 마음을 보이고 계속 관계가 상승작용을 할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하여 신뢰를 쌓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 쪽의 생각과 마음만으로 관계는 어떤 신뢰를 갖지 못하고 가식적인 또는 한쪽은 눈감고 있는 관계로서 더 이상 발전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지경에서 예상치 못한 선택은 결국 자기 파멸로 귀결될 수 있다. 사랑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그 사랑 앞에 인생을 던지는 것인가? 왜 인생을 던져야만 사랑을 얻을 수 있고 사랑을 지킬 수 있는가? 정작 자신의 인생에는 두려움에 움츠려 들면서 아무것도 못하면서 말이다.

 

P141

나는 메데이아가 아이들을 죽이는 순간, 복수에 성공하는 순간, 철저히 파괴되는 순간 괴테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승리의 기쁨에 충만한 순간 외치는 멈추어라 시간아, 너 참 아름답구나는 여기서도 등장한다. 바로 이때 악마는 우리의 영혼을 넘겨받게 되어 있다. 악마에게 영혼이 넘어가는 순간 신은 영혼을 악마의 손에서 구원한다. 그레첸 역시 그랬다. 파우스트에게 버림받고 미쳐서 제 손으로 제 자식을 죽이고는 가장 비참한 나락에 떨어졌을 때 신은 그녀를 구원해주었다. 신은 인간의 바닥에 존재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달콤한 죄악 오 펠릭스 쿨파 (O felix culpa)”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의 동물적 존재가 죽고 영적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의 시선으로 보면 옛 아담이 새 아담으로 바뀌는 것이다. 바로 원죄다. 인간은 영원한 기쁨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타락한다. 그러나 그 타락이 없었다면 구세주도 없었을 것이다. 이때 이 승화는 그냥 낙원에 머물 때의 의식보다 더 높은 의식의 수준에 도달하게 한다. 그 타락이 없었다면 더 높은 영혼으로의 승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죄악이 얼마나 달콤한 타락인가! 죄악, 바로 육체의 죽음 없이는 정신적 존재로의 재생도 없다. 선불교의 스승 육조 혜능은 그리하여 기간 막힌 명언 하나를 남겨두었다. “우리의 순수한 정신은 타락한 정신 속에 있다.”

 

이 대목에서 타락이란 것이 무엇인가? 질문해야 한다. 인간성의 타락이란 말인가? 타락의 조건은 무엇인가? 인간이 해서는 안될 죄를 짓는 것을 말하는가? 그 죄는 누가 정하였는가? 죄라는 것은 어떤 것을 이야기 하는가? 타락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인가? 아니면 이 생의 이 몸인가? ‘누군가 하지 말라하는 것을 하는 것인가? 죄와 타락은 도대체 무엇인가 말이다. 타락한 정신 속에 어떻게 순수한 정신이 있다는 말인가? 스스로를 타락으로 알고도 몰아가는 그 무엇이 순수한 정신인가? 타락은 구원으로 가는 또는 순수함으로 가는 과정인가? 굳이 그렇게 타락이나 죄를 통해서만이 그 순수함에 도달할 수 있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는 순수한 자인가? 아닌 자인가? 타락함의 끝은 어디인가? 인간의 타락은 어디까지 인가? 그럼 이 타락한 사회는 순수한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 우리는 도대체 타락한 우리 자신을 볼 수는 있는가? 알고는 있는가? 그럼 그 반대의 삶 또한 알고 있는가? 알아 볼 수 있는가? 항상 깨어 있어서 타락하지 않는 것이 순수해 지는 것인가? 순수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인간의 본연의 삶인가? 어디까지가 순수한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죄악을 저지른 인간인가? 하느님은 누구를 구원하는가? 순수한 인간? 죄악을 저지른 타락한 인가? 죄악과 타락 속에 순수함은 도대체 어떻게 존재하는가?

 

P145

파이드라는 절망했다. 그녀는 스스로 그 사랑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랑이 증오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녀는 죽음으로 히폴리토스를 파멸시키고자 했다. 그녀가 죽고 테세우스의 손에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가 쥐어져 있었다. 유서에는 히폴리토스가 자신을 유혹하고 겁탈했기에 자결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테세우스는 절규한다. “이 편지가 크게 외치는구나. 낱말들이 말을 하고 그것들에게도 혀가 달려 있구나. 내 아들이 내 아내를 범했구나. , 포세이돈이시여, 아들을 저주하는 제 말을 들으소서. 이 저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격분한 테세우스는 히폴리토스를 추방했다. 억울한 분노와 쫓겨난 침울함으로 히폴리토스는 마차를 몰고 아테네를 떠났다. 그 때 갑자기 바닷속에서 물결이 산처럼 일어나고, 그 꼭대기가 갈라지면서 홀연 거대한 황소가 나타나더니 커다란 콧구멍으로 바닷물을 토해냈다.  말이 기겁을 하고 놀라 뛰자 마차는 바위에 산산이 부서지고, 히폴리토스는 온몸이 거대한 상처가 되어 죽고 말았다.

 

왜 사랑 받은 사람이 그 사랑을 받아 들이기를 거부하면 이렇듯 고난을 겪거나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히폴리토스는 어쩌면 축출되었는지도 모른다. 파이드라 또한 죽임을 당했을지 모른다. 그 어떤 이면의 이야기를 만든다면 테세우스가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내었을 수도 있다. 왜 하필 미노스의 딸을 데려와 후처로 삼았을까? 그리고 그녀는 죽음으로 스스로의 삶을 끝냈을까? 아마도 미노스의 크레타는 볼모로 파이드라를 아테네에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그녀를 사랑해주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파이드라는 고통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냈을 것이라 추측된다. 파이드라는 나이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안티오페가 죽고 히폴리토스가 성장하였다면 테세우스도 나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은 추측이다. 권력의 중심에는 테세우스가 있었으므로 그 둘은 어쩌면 테세우스에 의해 축출되는 수순을 밟은 것은 아닐까? 크레타가 더 이상 아테네에 효용이 없어진 후라면 파이드라는 더 이상 테세우스에게 존재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에 아프로디테와 아르테미스가 나오는 것도 사실 이 모든 개연성을 뒷받침해준다. 히폴리토스의 아르테미스 숭배와 아프로디테 멸시는 결국 신의 뜻이고 신의 뜻은 어쩌면 지도자의 뜻의 간접적인 반영이 될 수 있다. 그냥 이야기 자체로 보면 파이드라의 타락한 사랑이 이 둘을 불행으로 몰아 넣었고 그 이전에 히폴리토스의 아프로디테에 대한 비웃음이 이런 결과를 낳은 동인이 된 것이다. 아 그러면? 우리는 모든 신을 존경해야 하나? 모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나? 최소한 그 존재 자체를 흔드는 부정은 하지말고 받아들여야 하나? 존재에 대한 존중 그건 다름에 대한 존중인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상대도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상호주의를 이야기 해야 하나?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는 너무도 서로를 배척하려 한다. 서로는 서로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대의 자리를 무시하고 그 자리의 존재 의의를 저버리면 나의 자리도 곧 흔들린다는 것을 실감해야 하고 내가 존중 받고자 한다면 상대도 존중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나의 편협한 세상 보기로 인해 그 세상 밖에 있는 것들이 존중 받지 못한다면 그들이 화내는 것 또한 나의 입장에서 어찌 탓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파멸로 귀결 되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 나오는 것이다.

 

P149

신들은 분노했다. 영원한 생명은 인간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림포스의 계율에 따라 어느 신이 한 것을 다른 신이 되돌려놓을 수 없기 때문에 아르테미스에 의해 살아난 히폴리토스를 다시 죽일 수는 없었다. 그 대신 제우스는 벼락을 내리쳐 하늘의 법을 어긴 아스클레피오스를 죽여버렸다. 다른 사람을 살려냈다는 이유로 자신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시인 핀다로스 (Pindaros)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 나의 영혼이여, 불멸의 삶을 갈구하지 마라. 그 대신 너에게 주어진 운명에 지치도록 탐닉하라. 어찌하여 불가능한 일을 탐하는가? 발 앞에 일을 직시하라. 발 앞에 놓인 인간의 운명, 죽어야 할 우리의 조건을 잊지 마라.”

 

어쩌면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신의 지팡이를 들고 다니다 벼락을 맞은 것은 아닌가? 참 유치한 상상이다. 아르테미스가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찾아가 다시 살려달라고 했을 때 아스클레피오스는 무어라 해야 할까? 그리고 다시 살아난 비르비우스는 아스클레피오스를 어떻게 기려야 할까? 제우스는 신의 영역에 있는 불사의 힘 그리고 부활의 힘을 부리는 아스클레피오스를 시기한 것인가? 정작 자신의 재생을 이루지 못하는 아스클레피오스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왜 기술자들은 이렇게 무시당하는 것인가? 세상의 의도는 왜 기술을 이용하고 버리는가? 기술이 그렇게 미운가? 필요한 기술을 잘 사용했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왜 그 기술을 벌하는가? 난 이해할 수 없다. 불경을 저지른 것은 아스클레피오스가 아니라 아르테미스이다. 그녀가 살려달라고 한 것이고 그녀도 신이므로 아스클레피오스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왜 아스클레피오스는 벌하고 아르테미스는 벌하지 않는가? 그리고 비르비우스는 어찌 살아간단 말인가? 이 신들의 세계에서 기술을 대하는 이 이미지는 신화를 통틀어 헤파이토스와 다이달로스 그리고 아스클레이피오스를 대하는 태도로 보아도 알 것 같다.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온갖 기술은 다 누리면서 정작 그 기술을 만드는 사람은 대우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사회라서 그런가? 점점 기계의 사회가 오고 있다. 그러면 영화에서처럼 기계화 싸우는 인간이 나온다. 기술은 그 기계에 투사되고 사람은 그 기계와 싸우는 정의로운 사도가 되며 순교자가 된다. 기술은 결국은 그 사람이 만들고 그 사람이 부리고 그 사람에 의해 오용되는 되는데도 말이다. 생각 없음이 아닌 생각 많은 기술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래야 기술 자체가 기술 없는 사람들에게 버림 받지 않고 기술 있는 자가 생각을 같이하는 사회가 되는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이 존중 받고 제대로 사용되는 사회가 필요하다.

 

P150

그녀는 언제나 모르는 사람들에게 반했다. 특히 인간이라는 피조물 중에도 가장 허영심이 많은 자, 그러니까 시인 핀다로스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 앞에 있는 것을 돌보지 않고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을 좇아 유령을 따라다니는 자들에게 반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뱃속에 순수한 신의 씨앗을 품고 있으면서도 바람처럼 라리사를 지나가는 테살리아의 젊은이를 더 사랑하여 잠자리를 같이했다.

 

신이 되고 싶은 인간의 처절한 욕망 자체를 사랑한 것인가? 어쩌면 인간의 삶 자체가 꿈인데 우리는 생계라는 노예 짓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결국 꿈인데? 그 꿈을 진정한 꿈으로 바꾸지 못하고 한낱 꿈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정작 현실이 아닌가? 어쩌면 현실을 넘어서야만 꿈을 볼 수 있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인간으로서 할 바를 다한다는 말에 인간으로서의 자격과 정작 인간으로서 넘보지 못할 꿈과의 거리는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말할 수 있는 꿈의 영역을 표현하면 무엇이 될까? 신의 사회 그 사회에 있는 인간은 모두 같은 생각일까? 그냥 이상이라는 누구나 뻔하게 생각하는 이상적이라는 상투적인 말이 붙어 버리는 이상의 꿈은 정말 없는 것인가? 왜 그 고귀한 이상들이 작금의 시대에서는 존경 받지 못하고 단지 불가능한 어떠한 것으로 버림을 받는 것일까? 아폴론이 활을 쏘아 죽인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본분을 지키라는 것인가? 왜 인간은 아폴론을 배신하면 안 되는가? 사랑한다는데 왜 그 사랑은 존중 받을 수 없는 것인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인가? 그냥 착하게 살라는 것인가? 타락한 정신 속에 순수한 정신이 있다는 말은 무엇인가? 타락은 그 순수함의 절정에 있을 때 인간의 기준을 넘어서 버린다. 그것이 타락일 지라도 순수함 만은 그 극치를 달리는 것이다. 그 순수한 사랑의 극치로 가고 있는 코로니스는 그 순수함의 극치에서 인간을 넘어서는 신의 세계로 들어간 것인지도 모른다. 그 순수함의 극치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추구할 바는 그 순수함의 극치인지? 인간의 조건으로서 타락하지 않은 영혼을 간직하는 것인지 자못 헷갈리는 순간이 온다.

 

P160

나는 약의 신이며, 모든 약초의 효능을 알고 있소, 그러나 아, 나는 내가 앓고 있는 이 병을 어떠한 약으로도 고칠 수 없구려.

 

신도 사랑 앞에서는 상사병에 걸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나 보다. 상사병에 걸리면 그 사람 말고는 약이 없다. 사랑은 사랑으로 치유할 도리 밖에 없다. 사랑은 무엇인가? 왜이리 고통과 환희를 같이 주는가? 약도 없는 이 병은 이 세상에 무엇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가? 사랑 없는 세상과 사랑이 충만한 세상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P161

아폴론은 그리스인들에게 가장 널리 숭상된 영향력 있는 신이었다. 그들은 아폴론을 사랑하여 포이보스(Phoebos)라고 부르기도 했다. ‘밝다또는 순수하다라는 뜻이다. 오직 제우스와 레토만이 태양신 아폴론의 존재를 견딜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두려움과 그의 권위는 그가 가지고 다니는 활로 나타났고, 그의 부드러움은 리라로 표현되었다. 그가 음악과 시와 의술의 신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세 가지 기능의 불가분성 때문인 것 같다. 시인이자 의사인 존 암스트롱은 이 연결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음악은 온갖 기쁨을 드높이고 모든 슬픔을 진무한다. 모든 병을 몰아내고 고통을 어루만져주니, 예부터 고대의 현자들은 의술과 음악과 시가를 떼놓지 못하고 함께 숭상했다.”

 

부드러움과 활의 직진성은 시와 음악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유연하지만 콕 집어서 드러내는 시의 본질과 그것을 늘 따라 부르면 음미하는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고치는 최고의 약이었을 것이다. 물론 몸을 고치는 약의 존재도 있지만 말이다. 의술도 병을 콕 집어서 낫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병이 도지거나 커진다. 태양의 신이므로 모든 것을 밝히고 세상을 노래하며 아픈 것을 치료할 수 있는 신인 아폴론은 사랑 받고 존경 받을 많은 것들을 가진 신이다.

 

P164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헤겔에게 철학은 앞날을 예측하게 하는 새벽의 학문이 아니다. 이미 이루어진 역사적 조건 아래서 비로소 그 뜻이 분명해지는 저녁의 학문이다. 자유는 모든 것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며, 진리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사물을 파악하는 사유다. 국가의 권위나 종교적 도그마에 얽매인 사유로는 진리에 접근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유는 자유로운 사유가 아니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다. 진리란 무지와 몽매와 왜곡과 편견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는 우리를 묶어두는 역사적 조건이 사라진 다음에야 찾아온다. 철학은 이미 일어난 일을 해석하여 지혜를 얻는 것이므로 발걸음이 늦을 수밖에 없다. 대략 이런 뜻이 아닐까?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해선만 해왔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철학자의 사명은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것이다. 혁명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철학이 삶을 바꿀 수 있다고 하나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만이 목적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에 메여서 해석만 한다고 될 일도 아닐 것이다. 어제의 지혜를 오늘의 문제에 어떻게 접목해서 새로운 지혜를 창출해 내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어떤 면에서는 과거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미래적인 이 과거의 지혜를 등불 삼고 미래의 앞길을 더듬어 가는 일을 나는 철학하는 자라고 부르고 싶다. 철학은 단순히 지혜를 사랑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실천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실천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살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혁명도 가능해 진다. 과거의 지혜는 많은 역사적인 사실들과 해석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또한 다양한 관점을 통해 해석을 달리하고 다양한 해석을 통해 통합적이고 입체적인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를 바로 보는 관점도 다양화 하여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다차원적으로 하여 문제를 입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많은 과거의 철학적 사조와 학문의 토대를 갖고 있으며 그 시대를 풍미했던 실천적 결과도 갖고 있다. 하지만 현재는 그 때와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의 철학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철학을 더욱더 현실에 천착해서 지금 문제 지금 사람의 문제에 더 골몰하고 고민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철학은 너무나 이 문제를 소홀히 다루고 있고 문제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너무나 일천한 것이 문제다.

 

P172

모든 생명은 자신의 운명을 따를 것이니 단지 성패를 아직 모를 뿐

오만한 자들은 스스로 승리를 쟁취했다 여기겠지만 승리와 패배 모두 미리 예견된 것.

어려움이 닥치면 무너지지 마라. 환희가 가득한 기쁨 앞에서도 자만하지 마라.

인간이 해야 할 몫이 있고 하늘이 정해준 길이 있으니

오직 땅에 발을 댄 겸허함으로 온 힘을 다할 뿐

 

대학원 때의 일이다. 교수님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연구실에 너무도 많은 과제가 몰려 대학원 생들이 공부를 못하고 과제 수행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정장 논문의 질은 올라가기는커녕 논문 한편 쓰기조차 벅찬 시절이 있었다. 한 날은 교수님 앞에 가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과제가 많고 하고자 하는 것도 많은 것 좋습니다. 다만 현실을 고려해서 추진하면 좋겠습니다. 발은 땅에 딛고 눈은 높이 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지금 저희는 저희 능력에 맞는 현실에 맞는 과제를 수행해야 맞는 것 같습니다. 과제 수와 제안을 적절히 조절하고 연구 시간을 더 할애하는 것이 맞아 보입니다. 대략 이런 정도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교수 입장에서 참 당돌한 말일 것 같다. 스물 일곱 정도의 나이의 연구원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뭔가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말이다. 물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 당시 참 어려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교수님은 아끼던 제자가 논문을 표절하는 바람에 같이 공동저자로 되어 있다가 호되게 그 대가를 치르고 겨우 학교에 복직하는 우여곡절을 치렀다. 겸허하게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것은 고금을 넘어 오늘의 명제인 것 같다. 

 

P175

나의 잘못이 너무 크기에 인간들 중에서 그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자는 없다. 오직 나를 빼고는.”

결백하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니 죄를 지은 것은 바로 신이다. 두 눈을 찔러 신 대신 스스로 벌을 주니 신 대신 심판함으로써 자신에게서 신을 몰아내고 슬픔이 너무도 지독하여 오히려 성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구나.

 

오이디푸스는 정말 무슨 죄란 말인가? 그 또한 운명의 피해자인 것을. 그가 선택한 것은 의로운 것들뿐이었는데, 그에게 세상은 거짓이었다. 그러니 그의 선택이 결국 잘못으로 이어졌다. 운명 또한 자신의 것이니 그는 그 운명을 받아 들였다. 그는 모든 운명의 장난을 알고 난 뒤 어머니의 시신을 붙들고서 오열하며 그의 눈의 어머니의 장신구로 찔러 스스로 장님이 되었다. ? 죽음을 택하지 않고 장님을 택하였을까? 팔을 자른 것도 다리를 자른 것도 아니고 왜 눈을 멀게 했을까? 그가 무엇을 잘못보고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지 않은가? 세상이 보기 싫어서? 일단 그는 장님이 된 후 자신의 목숨을 테베 사람들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 모든 진상을 알렸다. 그리고 그는 잘못을 스스로 고백하고 그와 같은 잘못 산 사람이 나오지 않기를 바랬다. 오이디푸스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모든 일을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신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삶을 그 운명을 극복하는데 쓰게 되었다. 그는 산 사람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P179

오이디푸스는 미약한 존재로서의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우주가 전하는 부름을 받고 가장 불운한 삶의 길을 견뎌갔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거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이 불행에 협력하여, 스스로 두 눈을 찌르고 고국에서 추방당함으로써 그 불행을 정점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불행의 절대적 의미를 완성했던 것이다. 더 이상 그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게 되자 그를 그렇게 몰아세웠던 운명의 수레바퀴는 멈춰 섰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그 너머로 들어선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신을 느끼게 되면서 비로소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체는 아테네와 그리스 전체를 수호하는 성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하라. 이제 한 인간이 기나긴 고난을 지나온 후 자신의 지독한 운명을 용서하고 화해하게 되었다.

 

글로 읽어 그의 삶을 추측하지만 실로 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인가? 그는 신에게 인간으로서 신탁에 따라 변화된 한 인간의 운명을 오롯이 살아 보임으로써 좌절하지 않는 운명을 받아들이되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삶을 보여준 것인가? 그리하여 신을 감동시키고 신으로 하여금 그 운명을 넘어선 신탁을 내려 그와 화해하고 그를 신의 반열에 올리는 것인가? 그런데 왜? 하필 그였는가? 신은 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여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그리스 신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의 문제를 파고든다. 신의 문제에서 인간의 문제로 그 대상이 집중되면서 인간의 다양한 고뇌와 삶 속으로 파고든다. 이 오이디푸스는 그 인간이라는 삶의 주인은 자신이며 아무리 운명이 그를 흔들어 놓더라도 인간은 스스로를 지키며 인생을 운명을 승화시켜 나가야 함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운명을 선택할 수 없다. 그 동안의 역사가 그렇고 지금의 현재도 그렇다. 운명적인 만남에서부터 운명적인 사건을 통해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날려간 삶들이 무수히 많다. 최근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산 자들의 운명은 이전과 많이 달라질 것이다. 나 또한 달라질 것이다. 우리 모두의 운명이 달라 질 것이고 대한민국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그 결과는 또 무엇이 될지 알 수야 없지만 우리는 그 운명을 받아드리고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넘어선 우리의 삶과 미래와 국가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P184

안티고네는 비유컨대 구부러지지 않고 곧게 뻗은 길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녀의 판단이 옳고 그르고는 중요하지 않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 뜻을 굽히지 않는다. 스스로에 대한 충절이 대단하다. 이 충절을 굽히게 되면 그녀의 세상은 단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만다. 그녀에게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말로만 하는 사랑을 증오한다. 안티고네는 오직 하나의 사랑, 여기서는 오빠 폴리네이케스에게 모든 것을 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극이 발생한다. 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다. ‘전부를 바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P185

자신의 믿음에 절대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비타협과 불관용이 필수적이고 또한 효과적이다. 물러서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고귀함은 배타적이다. 안티고네의 고귀함은 고독을 감수해야 한다.

 

P185

비극이란 주인공의 극적인 투쟁을 담고 있다. 투쟁을 통해 인간 본성이 지닌 힘을 확장하여 한계의 벽까지 밀어붙인다. 그러므로 모든 비극은 평범한 인간을 영웅으로 끌어올리는 투쟁과 모험을 담고 있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시속 300킬로미터로 질주하는 카레이서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궤도를 탄환처럼 달린다. 그리고 벽에 부딪혀 충돌하고 파멸한다. 그 벽 너머에는 인간 세상이 아닌 신의 영역이 존재한다.

 

P185

신은 인간이 자신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 신들은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그리스 비극의 위대함은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용기와 믿음으로 스스로를 넘어섬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저 멀리 밀어낸 사람들의 추락과 파멸을 다룬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지평은 바로 이런 영웅들의 부딪힘에 의해 알려진다. 어느 영웅이 넓혀놓은 경계는 다른 영웅이 나타남으로써 다시 조금 더 확장된다. 모든 영웅의 공통점은 그때까지 알려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척후병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의 변방을 넓혀왔다. 끝까지 간 사람들, 그들이 영웅들이다. 그들은 원래 평범했으나 삶을 통해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어간다. 그러므로 물로는 비극을 쓸 수 없다. 비극은 눈물과 피로 쓰일 수밖에 없다.

 

P186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은 두 개의 법이 부딪히고 두 개의 가치가 부딪히고 두 개의 문화가 부딪히고 두 개의 종교가 부딪힐 때마다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투쟁의 이야기다. 고대의 이야기 하나가 오늘날까지도 깊은 감흥과 사라지지 않는 숨결로 우리에게 속삭이는 이유는 그것이 먼지 낀 과거로 죽어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극은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극은 끝나는 법이 없다. 비극이 태어나게 된 조건들이 존재하는 한 비극은 오늘을 사는 인간들에게도 여전히 열려 있다. 열려 있는 그 문은 인간의 미래를 향한다.

 

안티고네의 사랑법과 그 실천 방법은 자신의 소신에 따랐다. 이미 아는 사람의 소신은 물러설 수 없는 존재의 이유가 된다. 신의 뜻과 천륜을 지키고자 하는 안티고네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 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물러설 수 없는 존재의 이유를 갖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과연 어떤 사람이 존재의 이유를 가슴에 품고 그 존재의 이유를 위해 삶을 다하며 살고 있는가? 이 것이 안티고네를 읽으면서 내가 품은 질문이다. 무수한 교환이 가치로 자리 잡은 현대에 모든 것은 저울에 올려지고 그 대가로 우리는 삶을 누리고 있다. 교환 가치의 절대화라고나 할까? 돈 지상주의가 얼마나 큰 문제인지 모르고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나부터 세상에 떠밀려 이 곳까지 와서 살고 있다. 무엇이 나의 존재를 지켜주는 것인지? 가족을 위한 나의 책임 이외에 무엇이 나를 지켜주고 있는가? 그 가치는 무엇인가? 계속된 질문이 우리를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영웅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자신의 자리의 지평을 얼마나 넓혀가느냐의 문제일까? 내 자리를 가족의 일원으로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직장의 일원으로서 국가의 일원으로서 지구인의 일원으로서 나의 삶의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마땅히 해야 할 것들에 대한 그러해야 하는 것들은 어디서 구해야 하는가? 막연히 찾아 그러그러해야 한다고 나에게 위안 삼아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있음으로써 없을 때와 달라야 한다. 그것이 우선 존재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 어느 곳에서든 이는 드러나야 한다. 내가 있음으로써 달라야 한다. 무엇이? 어떻게? 내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더 친근해지고 더 따뜻하고 더 밝아지고 더 허심탄회하고 더 푸근하고 더 자유롭고 더 열심히 매진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싶다.

 

P188

앙드레 보나르는 이 두 사람을 닮은꼴 성격, 상반된 영혼이라고 표현한다. 기질과 성격은 판박이지만 지향점은 서로 반대라는 것이다. 굽힐 줄 모르고, 강인하고, 잔인할 만큼 지독하고,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타협할 줄 모르는 두 사람은 자신에 충성하는 광신자들이다.

 

P189

신들의 법칙이란 오늘 만들어진 것도 어제 만들어진 것도 아니야. 언제나 그렇게 있어왔지…… 내가 때 이른 죽음을 맞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알 수 있어. 그 죽음이 나에게는 좋은 일이라는 것을…… 죽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고통일 뿐이야. 내 어머니의 아들을 무덤도 없이 버려두는 것이 고통이지. 그게 바로 불행이지.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아.”

 

P189

판박이 크레온의 영혼은 안티고네가 바라보는 곳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도 백성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그를 위해 죽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독재자다. 백성은 그의 자아를 충족시켜주는 도구이며 권력이기 때문에 필요할 뿐이다. 크레온은 백성들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그들을 잃을 때 상처를 입을 뿐이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그래서 이기적이다. 그는 사랑을 모른다. 그의 삶은 사랑에 닫혀 있다.

 

P190

그는 사랑을 증오하고 경멸한다. 또한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부조리의 가능성을 두려워한다. 그에게는 권력이 모든 것이다. 그는 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고 불안해하면서 편협하고 고집스럽게 변해갔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를 모든 사람으로부터 유폐시키기 시작했다.

 

P192

제발 날 데려가라. 이 쓸모 없는 인간을. 아아, 아들아, 내가 너를 죽였구나. 그리고 아내까지도, 이 저주를 어찌하랴. 얼굴을 돌릴 데도 의지할 사람도 없구나. 내 손에 있는 것들은 다 빗나가고, 견딜 수 없는 운명의 벼락으로 머리 위에 떨어졌구나.”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관계를 보면 결국 그 지향점이 보편적으로 수용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믿음은 누구나 있을 수 있고 그 충돌과 갈등 또한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상대편의 의견을 내가 수용할 자세는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인가? 아닌가? 과연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인가? 우선 안티고네의 입장은 신의 뜻이요 천륜이니 물러설 수 없는 문제이다. 나의 법과 같은 군주의 명령이지만 이는 개인의 문제로 이겨 낼 수 있는 문제이다. 그 선택은 죽음이었다. 결국 안티고네는 그 짐을 오롯이 혼자 질 수 있는 것이므로 그렇게 했다. 만약 그 죽음이 다른 죽음으로 연계된다면 어떤 것이었을까? 간혹 잔혹한 사람들은 안티고네 같은 사람을 좌절 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같이 처단하겠다고 한다. 그러면 안티고네는 더 큰 고뇌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나의 죽음을 넘어서 모두의 죽음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군주는 단순히 법의 집행이 아닌 폭군이요 악마의 입장을 갖게 되지만 말이다. 이 지점에서 안티고네의 결정이 또 무엇이겠는가?의 문제는 또 다른 비극이 될 수 있다. 그래도 계속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면 가족과 더불어 많은 사람이 더 죽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폭군은 이를 감당하고도 이후의 통치나 삶을 이어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 실행에 옮길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만약 실행할 수 없다면 그는 허언으로 사람을 얼른 꼴이 되니 무시당한 후 꼬리 내리는 연약한 군주요 바보소리를 들을 것이나 실행에 옮기면 폭군이 잔악함이 널리 알려져서 이후 통치에 백성의 원성을 사서 제대로 끌고 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 민심을 얻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더 큰 내기를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가서 안티고네는 개인 죽음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었다. 이 것은 선택을 통해 실제로 행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다. 본인이 선택했지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공허한 일이 되지만 인간이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이 목숨이다. 결국 안티고네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 놓고 자신의 가치를 지켰다. 반면 크레온은 자신의 가치는 무엇으로 지킬 것이냐의 문제에서 자신이 내어 놓을 것은 없다. 크레온이 제시한 가치는 국가라는 문제에서 법의 문제를 부각 시키지만 그 법이란 것이 통치자의 명령이지 법 자체는 아니었다. 법은 국민을 위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백성이 잘 살게 하기 위한 것이 법이지 통치를 잘하게 하기 위한 것이 법이어서는 백성이 떠나게 된다. 물론 떠날 수 없게 막고 있으니 공포 정치를 통해 백성을 못살게 굴면서 권

력층의 배만 불리는 국가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 정치는 오래 가지 못한다. 이를 통해 볼 때 크레온이 제시한 것은 타협 가능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백성을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못한다면 국가가 백성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겠는가? 크레온은 결국 자신이 내어줄 것은 자신의 탐욕이고 자신의 권위의식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형인 오이디푸스가 권좌에서 물러나서 어부지리로 얻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형의 자식에 대해 단호하지 못하면 모든 백성과 대신들이 그를 업신여길 것이라 불안해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배경을 볼 때 크레온은 겁에 질려 있는 것이요 불안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크레온은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안티고네를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이다. 법이라는 허울을 이용해 스스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법은 명령은 그 두려움의 실체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크레온은 그 왕위가 좋았고 그 것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이다. 결국 그는 어부지리로 얻은 왕위 때문에 아내, 아들, 좋은 며느리마저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후회하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러니 얻은 것이 있으면 내어줄 것이 뭔지 반드시 생각하여야 하며 공짜로 들어온 것이 있다면 그 대가가 무엇일지 생각하지 않으면 더 큰 불행으로 치달아 얻은 것이 얻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게 만드는 불행의 씨앗이 되는 것이다.

 

P200

어느 날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던 술 취한 방앗간 조수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시 100행을 그리스어로 줄줄 음송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감동했다. 소년은 술주정뱅이인 그에게 위스키를 사주며 다시 음송해줄 것을 부탁했다. 호메로스의 트로이는 그의 마음속에 다시 살아났다.

 

P202

모든 학자들이 시적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믿었던 트로이는 실재했다. 트로이는 독학으로 공부한 신출내기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기적으로 남게 되었다. 그에 의해 트로이 발굴은 세기의 로맨스가 되었다. 트로이만큼 감동적인 일생을 살아간 이 사람의 이름은 하인리히 슐리만이다. 호메로스의 이야기에 미쳐 살던 그는 자신의 일생을 고고학의 신화로 만들어버렸다.

 

가슴속에 살아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가슴에는 무엇이 살아날까? 무엇이 간절할까? 세상의 속마음을 들여다 보고 싶은 욕망? 마음 이면의 마음을 보고 싶은 관찰. 어떤 신비로운 대상이라도 있는가? 꼼지락거리며 요리조리 뜯어봐도 알 수 없는 나의 마음속 욕망은 무엇일까? 많은 부질 없는 일들을 해보았고 그 허무의 끝에서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 맹세한 것들은 이제 세월에 묻혔는데 정작 나의 이상은 어디에도 없다. 향수? 돌아가고 싶은 곳? 나의 꿈은 무엇? 가슴속 저 밑에 무엇이 있어서 나는 이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질문들 대화들 사람들 그것이 좋아 그 길로 가고는 있는데 왜라는 질문에 주저한다. 하인리히 슐리만처럼 미쳐볼 만한 자신만의 생의 간절한 무엇인가 이끌림이 없는가? 어쩌면 하인리히 슐리만과 같이 어릴적에 난 아무것도 부여 받지 못한 무지렁이라 이상도 꿈도 갖지 못한 것은 아닌가? 무엇이 되려고 하니라는 질문 조차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그저 앞에 있는 현실을 극복하는 데만 급급한 세월들 시간들 과거들.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인생의 전반기는 나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너의 꿈은 무엇인가? 남은 생은 무엇으로 살 것이냐?

 

P 208

틴다레오스는 그 많은 구혼자들 중에서 한 사람을 지명하면 지명되지 않은 사내들이 뭉쳐 불상사가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때 오디세우스가 꾀를 내어 헬레네의 남편이 누가 되든 그가 결혼 후 불행을 겪게 된다면 나머지 구혼자들이 모두 나서서 헬레네의 남편이 대의를 지킬 수 있게 돕겠다는 맹세를 하게 했다.

 

P209

파리스는 사랑을 선택했다. 그는 아프로디테에게 황금 사과를 건네주었다. 아프로디테는 파리스를 메넬라오스의 궁전으로 보냈다. 왜냐하면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속대로 헬레네가 파리스에게 걷잡을 수 없는 연정을 느끼도록 만들어주었다. 메넬라오스는 나그네 파리스를 환대해주었지만 결국 파리스는 헬레네를 데리고 몰래 트로이로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자신에게 음식을 주고 친절을 베풀었던 그 손을 배반하고 모욕한 것이다. 메넬라오스는 온 그리스에 자신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그리하여 전에 헬레네의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 힘을 합해 도와주자는 약속을 한 헬레네의 구혼자들이 다 모였다. 그리스 최고의 용사들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트로이 전쟁은 발발하게 되었다.

 

오디세우스는 왜 그런 약속을 하게 하였을까? 왜 이때 3명의 여신은 미모를 다투었을까? 그리고 파리스에게 왜 그 공을 돌렸을까? 그나 뭐라고? 아무튼, 여신들은 결국 자신들의 미모를 겨루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겨룬 꼴이 되고 말았다. 파리스는 자신에게 있어 좋은 선물을 준 여신의 편에 선 것이니 미모를 판단한 것이 아니게 된다. 애초에 미모를 겨루자고 했을 때 선물을 주는 것 자체가 판단을 흐리게 하는데 이를 허용한 것 자체가 문제이다. 기대할 것이 없을 때 선택을 하여야지만 공정하지 않을까? 아테네와 아프로디테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성격도 다르고 행태도 다르다. 생각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다. 아프로디테는 사랑을 아테네는 정절을 중요시 하였다. 따라서, 아프로디테에게 파리스가 최고의 미인의 공을 선사한 것은 그 또한 사랑에 눈이 먼 자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오디세우스의 약속에 따라 헬레네가 파리스와 같이 도망간 트로이는 곤경에 빠진다. 이는 트로이가 헬레네를 데려가면서 에게해의 주도권을 차지하고자 했을 것이다. 성장하는 트로이와 권력을 잠식 당하는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는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약속은 단순히 헬레네와 관련된 것이 아닌 그 당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동맹 체계를 빗대어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 도시국가인 트로이는 도시 국가 동맹 체계인 그리스 전체를 대적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어쩌면 트로이는 전략적으로 아테네만 무너뜨리면 에게해 무역의 주도권을 가져갈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고 그에 따라 아테네 공략을 하였으나 실패하고 그리스 동맹과 맞서야 되는 상황에 놓였는지도 모른다. 만약 헬레네를 다시 돌려주었으면 전쟁이 끝이 났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P215

결국 그는 예언자 칼카스가 전하는 부조리한 신탁 자체에 대항하지 못하고 의무를 따라야 한다는 목소리에 지고 말았다. 부조리한 신탁을 거부해야 할 곳에서 이를 할 수 없이 받아들이고, 딸을 지키기 위해 당당해야 할 곳에서 사령관의 명예와 의무 속으로 숨어버렸다. 자신이 만들어낸 난폭하고 비정한 상황을 받아들임으로써 부조리에 복종해버렸다. 부조리에 맞서는 대신 애원하는 두 여자,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이피게네이아의 간청에 꼿꽃이 맞서 꼭 필요한 전쟁이라는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했다. 명예를 존중하나 사랑을 저버렸고, 왕의 체면을 지키느라 진실을 버렸다. 그리고 그 비정함을 왕의 용기로 포장했다.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는 영웅은 영웅이 아니라 한낱 비겁자에 불과할 뿐인데, 그는 비겁한 길을 선택했다.

 

아무튼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쓰려했던 아미 아가멤논의 결정은 다소 과한 면이 있다. 하지만 사령관으로서 헬레네의 남편 메넬라오스의 형으로서 그는 떠나온 아테네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계속 전진해야 했다. 아울리스에 갇혀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러한 해괴한 신탁을 받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만약 딸을 지키겠다고 하고 이 신탁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비겁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다른 대안이 있었다면 아예 신탁을 듣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나 신탁은 듣기 전에 예상할 수 없는 것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딸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신탁을 들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는 단지 헬레네 만을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보인다. ,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것이다. 만약 돌아간다면 아테네는 주변 도시국가들로부터 기득권이 상실될 것이며 지배적인 위치를 잃을 것이다. 자연적으로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할 것이고 이는 그리스 연합 내부 일 수도 있고 트로이가 다른 연합군을 형성하여 아테네를 칠 수도 있는 모양새이다. 따라서, 아가멤논은 조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다. 아가멤논의 입장에서 난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첫째, 사령관의 직을 놓는다. 자식도 지키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리스를 지키겠느냐는 것이다. 스스로 사령관 직을 내려 놓고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대신 제물이 되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다른 대안을 찾을 것이다. 그 대안에는 다른 도시 국가에서 제물을 내어 놓아야 할까? 중요한 문제는 아울리스에 바람이 불어 배가 뜨는 것이다. 둘째, 이야기 대로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내어 놓는 것이다. 그러면 이야기 대로 흐를 것이다. 나는 이대목에서 아울리스와 아르테미스 그리고 뒤에 타우리스라는 지명에 주목한다. 아울리스에 정박한 그리스 연합군은 군량과 그 곳에서의 군사 유지에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아울리스는 이를 그냥 내어 놓을 리 없다. 그러니 대가가 요구되었을 것이고 이것이 이피게네이아 였으며 아울리스의 수장은 타우리스로 이피게네이아를 보내었을 것이다. 이는 인질의 의미도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막대한 군자금 군량의 사용 등에 대한 대가로 전쟁에 이기면 돌려주기로 하고 거래를 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이는 그리스 연합군의 첫 장애물이었고 이피게네이아를 통해 해결이 된 것처럼 신화는 흘러간다. 아가멤논에 대한 나의 평가는 신화 그 자체에서 아가멤논은 이 시점에서 악역을 맡게 되었지만 사실은 그리스 연합군과 아울리스 지역의 요구가 있는 어쩌면 거래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결국 아가멤논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요구받아 어쩔 수 없이 내어줄 수 밖에 없는 실정이라는 것이었다. 그 과정을 신화적인 요소로 신전의 제물이라는 소재를 써서 미화시켜 그 거래를 드러나지 않게 한 것으로 보인다.  

 

P223

미래는 인간에게 늘 불안하며 궁금한 영역이었다. 알 수 없다는 것, 그러나 필연적으로 그 알 수 없음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늘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 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미래란 한때 운명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이미 정해진 운명이 무엇인지 신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르네상스 때가 되면 그것은 가능성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계몽주의를 거쳐 혁명의 시대에 이르게 되면 미래는 인간의 무한함에 대한 슬로건으로 바뀌다가 현대에 이르러서는 예측이 가능한 기술적 진보에 의해 설계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두 가지가 필요하다. 자연의 조화를 아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변화 무쌍하여 종잡을 수가 없다. 자연의 조화는 불규칙하지만 규칙이 있으므로 징조를 보이면 예측이 가능하다. 옛 사람들은 늘 그런 자연의 징조를 살펴서 자연의 조화를 어렴풋이나마 예측하고 대비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자연의 조화에 밝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자연의 변화에 대해 예측하고 이를 통해 대비하고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실로 어렵다. 우선 사람은 본인도 본인의 마음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떤 목적을 기준으로 여러 사람들의 입장과 행동은 예측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이는 사람마다 저마다의 입장이 있고 욕구가 있으며 사람들의 그간 행동과 주변 여건을 비추어보면 어느 정도 예측이 된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누구보다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대단히 많았을 것이다. 샤먼이나 제사장 또는 신부 등은 늘 사람들이 찾아와서 묻거나 자신의 죄를 고한다. 그러니 사람들에 대한 보편적인 특성에 대해 잘 알게 되고 더불어 현재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 시대의 신전은 신탁을 받기 위한 조직이 있었으니 동시대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여 이를 토대로 예측하는 것일 것이다. 어찌 보면 신탁이란 동시대인들의 바램을 수렴하여 신탁이라는 명목으로 내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든다. 그러니 예언자들도 이런 신탁과 같이 늘 세상의 소리를 듣고 살펴서 질문하면서 자신에게 올 질문에 대해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트로이 전쟁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 중 중요한 대목에서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예언을 한마디씩 던지지만 결국 이것들도 듣는 사람이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아무리 좋은 것도 제대로 받아 들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예언은 아닐지라도 누군가 한마디 해주면 실로 감사히 듣고 이를 따르지는 못할지라도 경계를 삼아야 할 일임은 분명하다. 괜히 그 말을 흘려 들었다가는 화를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P236

예언자 칼카스는 아킬레우스 없이는 트로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신탁을 받아 왔다. 영리하고 재치 있는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용사 아킬레우스를 찾아내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냈다. 그는 상인으로 변장하고 스키로스 궁전의 내실로 들어가 여인들에게 장신구를 보여주었다. 다른 소녀들은 여인들의 노리개에 정신을 팔았지만 붉은 머리 소녀만은 칼을 집어 들었다. 매같이 날카로운 눈은 피라를 주목하게 되었다. 그때 오디세우스는 갑자기 나팔을 꺼내 힘차게 불었다. 다른 소녀들은 다 질겁하여 도망치는데, 피라만은 도망치지 않고 당장 검을 꺼내 휘두르려 했다. 일이 이쯤 되자 테티스는 어 이상 전사로서 아킬레우스의 운명을 덮어줄 수 없었다.

 

바지 주머니 속 송곳은 언젠가 툭 하고 튀어나오게 마련이다. 아킬레우스 같은 인물이 본성을 숨기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난 오디세우스의 역할에 주목한다. 평범한 사람은 아무런 능력이 없을까? 그렇지 않다. 누구나 자신에 맞는 소질과 특질이 있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능력인데 이는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이 같이 따를 때 세상에 큰 공헌을 남기게 된다. 그럼 이와 같은 소질과 특질을 드러내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빠른 방법은 발견하는 것이다. 경험 많은 사람 눈에 보이는 그 소질과 특질은 누군가에 의해 드러나게 되는 시점이 반드시 있다. 이는 예술 분야의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이 이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공학도로서 살면서 누군가에 의해 이런 소질이 개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잘하니까 계속 시킨다는 느낌은 들었었다. 세상이 나의 소질을 보고 계속 관련된 일을 시키는 것 같았다. 대학과 대학원 시절 10년의 세월과 직장생활 10년의 세월은 나에게 이러한 기회가 되었다. 나의 소질과 특질을 알아본 교수, 연구소 연권분들, 회사 상사들은 나에게 지속적으로 관련 업무를 시켜왔다. 그러니 남들보다 더 잘하게 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있다. 소질과 특질은 스스로 드러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남들에게 가치가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들이 먼저 알아보게 되어 있다. 그러니 나의 소질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인생에서 크나큰 축복이고 기회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 찾아내어 결국 전장으로 데리고 간다. 그가 죽을 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이다.

 

P243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모독하고 트로이 포로를 죽였다. 정염에 불타오른 그는 죽은 뒤에도 자신이 사랑했던 프리아모스의 딸 폴릭세네와 함께하고 싶어서 그녀를 제물로 바치라고 말할 만큼 이기적이고 잔인하기도 했다.그러나 그의 본성은 부드러웠고 케이론의 교육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리라와 노래로 근심을 가라앉히고, 파트로클로스와는 우정을 나누고, 브리세이스와는 사랑을 나누었다. 아킬레우스는 어머니 테티스를 공경했고, 신들의 뜻을 주저하지 않고 실행했다. 프리아모스가 찾아와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할 때는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의 핏줄 속에는 거친 남성이 가득했지만 또한 부드러운 슬픔으로 어루만져져 있었다.

 

햇빛이 꽝꽝 쏟아지는 날 전장에 서면 마주 봐야 하는 것은 무찔러야 할 적군보다 내 속의 두려움. 남을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징그러운 대국 고함을 지르고 악을 써서 잊으려 하네. 인간이 모여 할 수 있는 일이 전쟁만은 아닌데 서로가 죽이고 죽어 죽어가는 적의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는 구나. 통곡하는 이유는 적을 위해서도 아니고 나를 위해서도 아닌 전장으로 자신을 데려온 어리석음 때문.

 

잔인함이란 강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잔인함과 강함은 별개의 문제이다. 강한자가 수양이 깊으면 부드러운 자가 된다. 강하지만 부드러운 자는 많은 것을 품을 수 있고 이를 통해 큰 일을 행할 수 있다. 오로지 강함만을 쫓는 이는 결국 강함으로 인해 죽음을 맞을 수 밖에 없다. <일리아스>를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 상세한 사항을 모르고 그의 인간됨을 모르지만 드러나 사실로만 보자면 아킬레우스는 강함이 극대화된 인물이며 그 내면은 아직 그 강함을 지탱할 만큼 강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며 행동우선적인 인물로 보인다. 그런 아킬레우스가 존경되고 노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불굴의 의지인가? 싸움에서 보여준 투지인가? 트로이 전쟁에서 보여준 10년간의 싸움을 지나면서 보여준 그의 용기인가? 그리스 인들은 아킬레우스를 통해 무엇을 표상한 것일까? 그리고 그를 통해 무엇을 갖고자 한 것일까? 그리스 신화는 모드 은유적인 면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면 각 인물은 어떤 인물상이나 이상을 표현하고 있을 것이다. 일리아스를 통해 더 확인해 봐야겠다.

 

P247

오이오네뿐만 아니라 예언자 헬레노스와 카산드라도 파리스의 라케다이몬행을 적극적으로 말렸다. 하지만 결국 그는 헬레네를 만나러 떠나고 말았다. 헬레네의 남편 메넬라오스는 파리스 일행을 극진히 대접해주었다. 어느날 메넬라오스가 친척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크레타로 출타하게 되었다. 그는 아내 헬레네에게 손님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메넬라오스가 집을 비우자 준수한 용모의 파리스는 헬레네에게 접근했다. 동방적인 호사스러움과 잘생긴 용모, 거기에 아프로디테의 도움까지 더해져 헬레네는 격정적으로 파리스에게 빠져들었다. 그리고 당시 아홉 살이었던 딸 헤르미오네를 남겨두고 모든 장신구와 보물을 챙겨 파리스와 함께 트로이로 도주했다. 트로이에 도착한 그녀는 카산드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리아모스 왕의 환대를 받았다.

 

파르스는 헬레네를 만나기 위해서 라케다이몬으로 떠난 것인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다면 이미 메넬라오스의 아내이고 아이까지 있는 여인네를 탐하러 가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왜 제대로 말리지 못하였을까? 늦게 찾아온 왕자 파리스에게 선물이라도 해주고 싶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헬레네를 데리고 올 요량을 다른 사람들은 몰랐고 다른 이유로 라케다이몬으로 떠난다고 했을까? 나는 왜 이런 상황을 사실로서 뭔가 해석하려 드는지 모르겠다. 이런 저런 의문을 뒤로하고 직접적으로 묻고 싶은 것은 프리아모스 왕의 환대와 파리스가 저지른 행동에 대한 묵인이다. 왕으로서 파리스의 행동이 불러올 외교적인 문제가 적지 않을 것인데 이를 수용했다는 것은 이미 그도 그리스와 대적할 마음이 있다는 것이고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누구나 알듯이 이 전쟁은 범 그리스 세력과 트로이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간의 힘겨루기가 극에 달한 시점에 발발한 전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파리스는 프리아모스 왕의 전령이었을 것이라 보여진다. 이야기의 전개가 헬레네를 통한 사랑이야기로 보이지만 말이다. 트로이 전쟁의 핵심인 트로이 목마를 보아도 그렇다. 만약 트로이 목마를 성안으로 들이지만 않고 그냥 한 달간 밖에 두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굳이 성안으로 드려야 할 이유는 없지 않았을까? 그렇게 했다면 트로이는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트로이는 10년간 잘 방어했고 굳건하였다. 이를 보아도 트로이는 그리스에 대항해 싸울 힘을 이미 갖고 있었고 프리아모스는 이미 믿는 자신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파리스의 도발을 지켜보며 그리스의 움직임을 주시했을 것이다. 어쩌면 프리아모스는 에게해 전체를 지배할 야심을 갖고 파리스를 통해 그리스의 전력을 염탐하고 전쟁의 구실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P254

의기소침과 연전연패의 상황을 보다 못해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빌려 입고 대신 출전한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의 창에 죽고 무구를 빼앗긴 것이다.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보고 분노한 아킬레우스가 드디어 출정을 결심하게 되었다.

 

파트로클로스는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친구인 아킬레우스가 다시 전장에 나가게 하였다. 그는 그리스의 승리를 위해 스스로를 던졌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분노와 슬픔으로 다시 전자에 나가게 된다. 친구란 무엇인가? 파트로클로스는 어떤 마음으로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입고 출전하였던 것일까? 나는 파트로클로스와 같이 행할 수 있는가? 그런 친구는 있는가? 직장에서 많은 사정으로 인해 동료의 일을 대신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생긴다. 이때 이를 기꺼이 받아서 하게 되면 어느덧 자신의 능력이 훌쩍 커져있고 업무 범위도 넓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러기가 쉽지 않다. 당장 그 책임이 자신에 있지 않고 힘들고 어렵고 어느 수준을 맞춘 결과를 만들어 내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알고 밤을 새워가며 대처해 나가다 보면 짧은 시간에 그 일의 전체와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성장이란 자신의 주어진 일만 해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의 역할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넘어서는 결심을 하고 그 역할을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그리하여 아킬레우스의 더없는 친구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고 그리스 군의 승리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리아스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이렇듯 주어진 것이 아닌 자각한 자신의 역할은 어디든지 존재한다. 직장 생활이 대부분인 현대 사회에서도 직장 내에서 꼭 주어진 일만 하는 사람과 일을 찾아서 역할을 찾아서 점점 많은 일을 소화해 내는 사람은 큰 차이를 보인다. 후자는 늘 어려움에 봉착하지만 큰 일을 해내기 위해 앞에 있으면 주위 사람이 그를 돕게 마련인 것이 세상 이치이므로 그는 더 큰일을 하게 된다. 중요한 사람이란 누구인가? 개인의 욕심이 아닌 헌신으로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헌신을 위해서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데 헌신한다고 하면 자신을 혹사하는 것 밖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능력을 키우는 일과 도움을 주는 일은 늘 같이 노력해야 할 일이다.

 

P254

그때 아킬레우스가 그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그의 창이 부드러운 그의 목덜미를 꿰뚫고 들어갔다. 그는 죽어가면서 아킬레우스에게 자신의 시신을 웨손하지 말고 아버지 프리아모스에게 돌려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거절했다. 그는 시신의 발목을 뚫어 가죽 끈으로 묶은 다음 자신의 마차 뒤에 매달았다. 그리고 모든 트로이인이 보도록 머리를 뒤로하여 끌고 다녔다. 그런 다음 시신을 그리스 진영에 팽개쳐두었다.

 

적수에 대한 존경이 없으면 싸움은 저급해지고 졸렬해진다. 싸움을 한다는 것은 상대가 나의 상대로서 부족함이 없기에 싸울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 쪽은 굴종하게 마련이다. 10년간의 싸움을 통해 서로에 대한 존경을 키워왔을 것인데 마지막 헥토르를 보내는 아킬레우스는 그 시신을 함부로 대한 것이다. 처참하게 마차로 끌고 다녔고 나중에 버려두었다. 아킬레우스의 성정이 그러한 면이 있지만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 이유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아킬레우스는 다스리는 자는 못 된다. 싸우는 전사는 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따르게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단연 오디세우스가 탁월한 것 같다. 아무튼, 싸움을 넘어서 통치를 해야 하는 것인데 그 당시에는 지배라는 개념보다 멸망을 시켜버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본다. 트로이 성이 점령된 후 오랜 역사가 지난 다음에 하인리히에 의해 발굴될 때까지 드러나지 않은 것은 이 때 멸망을 시켜버린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적으로 나오면 죽여 없애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전쟁의 방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배당한 쪽은 모두 노예가 되어 승자의 나라로 끌려가는 것이다.

 

P261

원수이자 남편인 네오프톨레모스가 죽은 후 안드로마케는 헬레노스와 함께 그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희망조차 없어 보였던 그녀의 만년은 평화로웠던 것 같다. 헬레노스가 죽은 후 안드로마케의 아들 페르가모스는 미시아 땅에 자신의 이름을 딴 식민지 페르가몬을 세웠다. 그녀는 이때 아들을 따라 그곳으로 간 것으로 전해진다.

 

운명을 사랑하라. 어떠한 운명의 파도가 몰아치더라도 그 삶을 끊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그리고 헤쳐나가라. 안드로마케를 보면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해가 되지 않는 수준이다. 정작 자신은 어떤 직접적인 고통을 당하지 않지만 무수히 많은 상실의 고통을 받게 되니 아버지, 형제, 남편, 자식, 그리고 네오프톨레모스까지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은 여인이다. 헥토르와의 대화를 보면 그녀의 심성은 대지와 같이 평화로워 보인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여인이라고 할까? 그러니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통해 평화를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P262

불행은 결코 혼자 오지 않아. 파도 쳐서 물결이 여울지듯 기다린 듯이 너도 나도 덮쳐오니 눈물은 눈물에 연하여 끝이 없고 상처는 상처로 덮이는구나. 복수는 달콤한 것. 생각만으로도 빨리 내달리는 피로 혈관이 뛰고 수 없는 상상 속 칼질로 원수를 죽인다. 그러나 인생을 온통 복수로 채울 수는 없는 법. 겨울에 죽은 것을 봄에 되살리니 그것은 칼 대신 꽃.

 

복수는 결국 자신을 망치는 것, 성현들은 용서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니니 수많은 복수가 점철되어 역사에 얼룩졌다. 복수는 단순하지 않다. 세상의 눈은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이다. 얻어 맞고 가만히 있으면 업신여기며 다시 쳐들어 온다. 결국 복수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해지는 면이 있다. 특히 나라 간에는 더욱 그렇다. 한 사람에 대해서 비슷한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다른 양상을 갖고 있다. 죽음에 대한 복수가 전형적인데 그 후손이나 관계자에 의해 복수가 이루어 진다. 잘못된 일의 결과이면 그 잘못된 일을 밝혀 앞서 간 분의 명예를 바로 세울 일이지만 대부분 그 일을 일으킨 사람에게 복수를 하게 마련이다. 용서란 인간의 삶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억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모든 억울한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은 아비규환이 될 것이다.

 

P279

칼자국 상처에서 피가 몹시 흘러 새빨간 핏줄기가 검붉게 내 몸을 물들이는데, 나는 그게 어찌나 기쁜지,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자비로운 비를 받아 기뻐하는 통통한 껍질 속의 보리알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기뻐하세요. 기뻐할 수 있다면 말이에요. 나로서는 큰 자랑이니까요. 이 사람은 수없이 많은 재앙의 저주를 술잔에 채워두고 귀국해서 자신이 마셔버렸으니까.

 

아가멤논은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고 이 전쟁에 출정하여 10년 만에 돌아왔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그 동안 아가멤논의 거짓말로 딸을 잃은 분풀이를 준비하며 10년을 기다리며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전쟁을 하는 사람과 그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람간에는 생각이 달랐다. 아가멤논은 생각했어야 한다. 10년의 세월이 변하게 한 것이 무엇인지? 예전과 달라진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스스로 소홀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잘못한 일이 있었다면 매년 그 일을 기리며 반성했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일이 눈앞에서 없어지면 다른 일에 빠져들고는 그 일을 잊어버리는 몽매함을 가져서 그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네. 아가멤논은 그 아내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어야 했다. 이피게네이아가 제물로 바쳐질 때 상황을 자신이 저질렀던 딸의 희생을 말이다.

 

P282

생각해보세요. 제 집에서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에게 신세를 져야 하는 나의 나날을 생각해보세요. 아이기스토스가 아버지의 왕좌에, 아버지의 옷을 입고 앉아 있고, 무엇보다 심한 것은 그 살인자가 아버지의 잠자리에 든다는 것이지요. 살인자와 함께 잠든 여인을 어머니라 불러야 하는 내 생활을…… 그 저주할 사내와 지낼 만큼 타락한 어머니, 자기가 하는 일에 의기양양하여 아버지를 꾀어서 죽인 그날을 택해 노래와 춤을 벌리고 신에게 양을 잡아 제물로 바치는 그 꼴을 집 안에서 보고 울다 지치지만…… 후련하게 울 수도 없는 나의 생활……”

 

엘렉트라의 이 신세 한탄을 보면 그 삶이 어떠한지 얼마나 비탄에 빠져 있고 늘 불안과 증오로 점철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그 상황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나의 아버지를 죽인 자는 나의 원수이다. 고대의 가치관을 직접적으로 알 수 없지만 아버지를 죽인 자를 같은 집에서 보고 산다는 것은 치욕적일 것이고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어머니와 같이 생활한다는 것은 모욕적인 일이다. 아이기스토스는 이런 엘렉트라를 호시탐탐 노렸을 것이다. 언제든지 죽일 요량으로 늘 함정을 펼쳐놓고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어쩌면 엘렉트라를 범하려 하였을지도 모른다.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눈치 때문에 저지르지 못했겠지만 아이기스토스는 언젠가 자신의 기반이 튼튼해진 후 클리타임네스트라도 제거하고 아가멤논 일가 모두를 제거하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그리스 신화에는 참으로 많다. 현대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다. 

 

P284

오레스테스가 정말 죽은 것은 아니었다. 화장한 뼈를 담은 단지를 들고 자신의 죽음을 위장하여 아이기스토스에게 소리 없이 접근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오레스테스가 자신의 정체를 알리자 엘렉트라는 동생을 안고 기쁨 속에서 춤을 췄다.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는 원수를 갚기 전에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 복수의 전의를 북돋는 의식을 행했다.

 

엘렉트라에게는 기다리던 그 때가 도래한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원수를 갚을 동생이 건장하게 성장하여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때 복수를 어떤 식으로 할지 궁리를 했을 터인데 어머니까지 죽일 것인지가 문제인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어머니가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다 손 치더라도 어머니까지 죽이지는 않았을 것인데 말이다.

 

P285

여자 아이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즉 여자 아이가 아버지에게 가지는 강한 소유욕적인 애정을 카를 융은 엘렉트라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P288

스스로 죄임을 알면서도 그 죄를 의무로 짊어지고 그 끔찍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도록 기계 장치에 걸려든 사람은 많지 않다. 안타깝게도 오르스테스는 평생 어머니를 죽인 죄악에 시달려야 했다. 죽이기 전에는 죽여야 된다는 책임에 시달렸고 죽인 후에는 살모의 죄의식에 시달렸다.

 

죽여야 했을까? 아이기스토스를 죽이고 어머니에게 가서 이 상황을 설명하고 어머니를 이 복수의 구렁텅이에서 구할 방법은 없었을까? 모든 것이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아이기스토스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정리할 수는 없었을까?

죽이지 말아야 했을까? 아이기스토스와 같이 아버지를 죽이고 그를 아버지의 방으로 들여 나라를 지배하고 다스렸다. 결국,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나라를 찬탈한 것이다. 아가멤논의 권좌를 빼앗은 것이다. 그러니 왕위를 찬탈하였으니 이는 역적의 죄로 다스려야 한다. 하지만 그 동안 군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왜 그 동안 군신들은 그 모든 일들을 누감아 주었단 말인가? 아가멤논이 돌아왔을 때 이 사단이 벌어졌는데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단 말인가? 결국 그 나라는 아가멤논이 없는 10년 동안 권력이 이미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에게 넘어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죽음을 넘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나? 오레스테스는 무엇을 위해 단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이 일을 저질렀는가? 좀더 명분에 맞게 일을 처리할 방법은 없었을까? 이 일이 단지 집안일이 아닌 국가의 일로서 정당한 일로서 법으로써 처리할 방법은 없었을까? 사람을 규합하고 대응할 힘은 없었을까? 없었다면 정말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P293

아테네가 복수의 여신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별도로 평화롭게 거주할 수 있는 땅을 떼어주고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경배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제는 저주 대신 자비와 축복을 내리는 권한을 가질 수 있게 해주겠다고 회유했다. 대지로부터의 은총과 더불어 하늘로부터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게 하고 가축들의 풍요로움이 항상 찾아오게 하여 인간을 편안하게 하고, 불경한 자들을 징벌하고 모든 옳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축복을 맡게 했다.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는 이것을 받아들였다. 그 후부터 이들은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라는 이름 대신 자비의 여신 에우메니데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신도 그 역할을 바꾸는구나. 시대가 바뀌니 신의 역할도 바뀌는 구나. 하니 사람은 당연한 것 아닌가? 시대의 부름을 들어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약해빠진 우리들은 어떤 역사적 과업을 갖고 태어난 것인가? 세대간에 끼인 비겁자들로 평생을 살고 눈을 감아야 하는가? 왜 이런 말은 내가 뱉어내고 있을까? 무엇이 이런 말을 만들게 하였을까? 앞 세대의 민주화와 뒤 세대의 지나친 경쟁 사이에서 아무 생각 없이 너무도 편안하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 발전의 혜택이란 혜택을 모두 누리고 세상의 어려움은 모른 채 살아온 것은 아닌지. 새삼 요즘의 세상에 무엇이 나의 할 일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P297

그러자 오레스테스는 자신이 바로 오레스테스임을 밝히고 누나 이피게네이아를 덥석 안았다. 죽었다던 누나와 마음의 평안을 잃은 아우는 이렇게 서로를 안고 위로했다. 그들은 탈출 계획을 세웠다. 먼저 왕에게 두 사람을 정화시키기 위해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안고 두 죄인을 바닷가로 데려가서 깨끗이 씻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일은 사제 혼자 은밀하게 해야 하는 일이니 의식이 끝날 때까지 신전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녀는 미리 준비해둔 배에 두 사람을 태우고, 여신상을 품고 도망갔다. 그들은 아테네 외곽에 있는 브라우론으로 왔다. 그들이 가져온 여신상은 이곳에 있는 웅장한 아르테미스 신전에 봉안되었고 이곳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신전 중 하나가 되었다.

 

어쩌면 모든 불행의 단초인 이피게네이아의 생환은 이 모든 불행의 덧없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무엇을 위해 죽고 죽였는가? 이피게네이아는 이렇게 살아 있는데 말이다. 세상에는 모르는 이면 너머에 무수히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이 세상 이 순간에 우리의 바닥을 드러내고야 만다. 우리의 한계는 들이닥친 현실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우리 의식의 수준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다 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부정하게 된다. 그러면 막연한 망상에 휩싸여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고 환상 속에 살아갈 수 있다. 모든 것은 사욕에서 비롯된다. 그리스 신화 전체를 보게 되면 모든 것에 사욕이 끼어들면 틈이 생기고 그 틈으로 악마의 숨결이 깃들어 사단을 일으킨다. 사욕 나의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 이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지금 내가 나의 욕심을 내 새우고 있는지 아니면 모두를 위한 아니 상대방을 위한 진심을 말하고 있는지 스스로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진실 만이 이 모든 불경스러운 일들을 뚫고 모두를 신의 경지로 올릴 수 있는 결단을 내리게 할 것이다.

 

P301

여신은 뛰어난 사냥군인 오리온과 함께 사냥하는 것을 즐겼다. 오빠 아폴론은 동생 아르테미스가 사랑에 빠져 처녀성을 잃을까 봐 염려했다. 어느 날 오리온이 머리만 내놓고 물속에서 헤엄칠 때 아폴론이 아르테미스에게 저 멀리 보이는 둥근 물체를 쏘아 맞힐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아르테미스가 활을 들어 시위를 놓자 쏜살같이 화살이 통증도 없이 표적을 꿰뚫었다. 오리온이 죽은 후 자신이 저지른 비극적인 일을 알게 된 아르테미스는 비탄에 빠졌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한 번 더 부탁하여 그를 살려내고 싶었지만 제우스가 이를 막았다. 그래서 오리온의 시신을 하늘에 올려 별자리로 만들었는데 그 것이 바로 오리온 자리다.

 

신들의 장난에 죽어나는 인간이라. 참으로 운명이란 한 순간이다. 신들은 왜 이렇게 이기적이고 잔인한가? 자신의 관심사 밖의 것을 아무 가치도 없는 듯 이렇게 무참히 목숨을 뺏어버린다.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우리의 심성에 신이 깃들어 있다면 이런 이기적인 마음도 같이 들어 있는 것일까? 우리의 마음에 깃든 신성은 무엇일까?

 

P305

영악하고 치밀한 사기꾼이며, 거짓말쟁이인 오디세우스는 당시 가장 모범적인 인간이었다. 시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노래했고 아테나 여신조차 그를 좋아했다. 여신은 손으로 툭툭 그를 치고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신이라도 그대를 이기려면 교활한 망나니가 되어야 할 거야. 영악하고 치밀한 사기꾼인 그대는 고향에서도 마음속 깊이 품은 계략과 속임수를 멈추지 않겠지.”

 

오디세우스에 대한 이야기는 오랜 귀환의 여정에 불굴의 의지를 보이고 포기하지 않는 그의 역경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그는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을 활용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의 고향 이타카를 잊지 않고 나아간다. 이 오랜 여정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 그의 아네 페넬로페이아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것이 또 하나 놀라움이다. 위와 같이 영악하고 치밀한 사기꾼이지만 아내를 사랑했고 진실되었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인간성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인 문화가 그를 그렇게 행동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P312

내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네 생각이 고결하고 네 육신과 정신에 숭엄한 감동이 깃들면 그들은 네 길을 가로막지 못할지니 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 않고 네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라이스트리곤과 키크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그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네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 크나큰 즐거움과 크나큰 기쁨을 안고 미지의 항구로 들어설 때까지 네가 맞이할 여름날의 아침은 수없이 많으니 페니키아 시장에서 잠시 길을 멈춰 어여쁜 물건들을 사거라.

 

자개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관능적인 향수들을. 무엇보다도 향후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대한.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 현자들에게서 배우고 또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네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기를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P316

승리자에게 승리가 없는 전쟁, 몸은 가족을 떠나 진흙 위를 구르고 정신은 사람을 죽여 포악한 짐승이 되었구나. 그대로는 부드러운 아내 곁에서 사랑을 즐길 수 없어 돌아가는 길, 푸른 바닷물로 참혹한 전쟁의 마음을 씻어야지.

신들은 물을 휘몰아쳐 고초를 겪게 하여 전쟁이라는 어리석음을 자초한 자들에게 전쟁이 평화가 아님을, 승리가 곧 패배임을 알게 하네. 그리하여 알게 되지, 남에게 한 짓이 곧 내게 한 짓임을.

 

P319

몸에 켜켜이 묻은 풍랑의 고초를 닦아낸 후 넓은 어깨에 올리브유를 바르고 참으로 오랜만에 소녀들이 내어준 깨끗한 옷을 입으니 고수머리가 히아신스 꽃처럼 흘러내려 머리와 어깨 위에 우아함이 햇빛처럼 쏟아지는구나.

흰 팔의 소녀들아, 조금 전만 해도 그는 보잘것없고 볼품없더니 지금은 넓은 하늘을 다스리는 신과 같다. 아깝구나, 여기서 오래 함께 살지 못함이. 그러나 이제 그는 격정을 떠나 마음의 평화를 향해 항해하나니.

 

P324

배를 타고 떠나면서 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군가 왜 눈이 멀게 되었는지 묻거든 그대를 눈멀게 한 것은 이타카에 살고 있는 도시의 파괴자 오디세우스라고 말하시오라고 약을 올렸다. 소리 나는 곳을 향해 커다란 바위를 집어 던지던 폴리페모스는 분노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아버지인 포세이돈에게 큰 소리로 기도를 올렸다.

 

겸손하고 고마워해야 한다. 잘났다고 자랑하거나 허세를 부리면 안 된다. 오디세우스는 그 여정에서 보여주는 많은 상황을 통해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그곳은 지금 머물고 있는 이곳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P327

오디세우스가 자초지종을 말하고 다시 한번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화가 난 아이올로스는 단박에 거절했다. “이 섬에서 썩 거지시오. 살아 있는 자들 중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람이여! 내게는 신들로부터 미움받은 인간을 보살펴줄 권한이 없소. 어서 썩 사라져버리시오! 그대가 이리로 다시 항해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올로스가 모든 바람을 다 거두어가는 바람에 바다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부하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으면 이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렇게 고생하고도 아직 황금에 눈이 먼 부하들을 데리고 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들도 힘들었을 터인데 이 모든 것이 오디세이아의 부덕이다.

 

P331

키르케의 섬은 풍요로웠다. 키르케는 날마다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배불리 먹여주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자 병사들은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오디세우스도 키르케에게 자신들이 돌아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P334

그러니 앞으로 그대도 아내에게 너무 상냥하게 대하지 마시오. 잘 알고 있는 이야기라도 모든 것을 다 아내에게 말하지 마시오. 어떤 것은 말하고 어떤 것은 숨기시오. 한 가지를 그대에게 일러줄 테니 명심하시오. 고향 땅에 가면 타고 간 배를 몰래 숨기시오. 남들이 보지 못하게 하시오. 여인들은 믿을 수 없으니까.”

 

모든 비밀은 베개 머리에서 새어나간다고 늘 아내를 경계하라는 말은 고전에 늘 나오네요. 아내되는 여자들은 이 글을 읽고 어떻게 생각할지? 이 부분은 남녀의 문제라 해석이 분분할 것 같네요

 

P335

가득한 물속에 서 있었으나 한 방울의 물도 마실 수 없고, 즐비한 열매들 속에 서 있었으나 달콤한 과육을 한 입도 깨물 수 없는 그는 타는 목마름으로 고통스러워했고, 풍요로움 속에서 굶어야 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을까?

 

어쩌면 현대인은 이 탄탈로스의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먹을 것은 시장과 상점에 가득한데 정작 주머니에 돈이 없어 먹을 수 없고 세상의 풍요로움은 날로 더하는데 보이되 가질 수 없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가? 현대인은 이 탄탈로스의 형벌을 매일 매일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칫 마음을 빼앗기면 더 크나큰 형벌을 받을 죄를 지을 지도 모른다.

 

P339

호메로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했지만 신들이 보기에는 입이 싸고 교활하며 신들을 우습게 여기는 심히 마뜩잖은 인간이었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형벌을 받은 것이다. ‘무익하고 희망 없는 일의 반복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 신들의 생각은 일리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의미없는 일들의 무한 반복. 매일의 반복된 영혼 없는 일과들이 결국 시스포스의 형벌과 다르지 않다. 매일의 생활이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삶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그 과정에 있는 하루 하루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P344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에게 그 점을 환기시키고 얼른 이 섬을 지나쳐 가자고 말했다. 그것은 지치고 피곤한 뱃사람들에게는 저주와 같았다. 그러자 뱃사람 에우킬로코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무정한 오디세우스여, 그대의 힘은 절륜하고 그대의 사지는 지칠 줄을 모르오. 정말이지 무쇠와 같소. 그래서 지칠 대로 지친 우리를 몰아 안개 빛 바다 위를 떠돌라고 명령하는군요. 배들을 파멸로 끌어가는 역풍은 밤에 생기는 법입니다. 갑자기 폭풍이 불어닥치면 우리는 파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어두운 밤의 명령에 따라 이섬에 잠시 머물러 저녁을 먹고 아침에 넓은 바다로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다른 전우들도 다 찬성했다. 그러자 오디세우스는 그들의 파멸을 원하는 어떤 신이 그렇게 말하게 했다는 것을 알고는 그들을 단단히 주의시켰다. 배에서 멀리 떠나지 말고 키르케가 싸준 음식만 간단하게 먹으며 절대로 소나 양을 잡아먹는 못된 짓은 저지르지 말라고 말이다.

 

부하들은 부하들 나름의 고충이 있고 바램이 있다. 리더는 이들의 바램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들의 바램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배란 곳은 닫혀 있는 공간이고 그들의 힘이 없이는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말로 선원들을 독려하고 설득해야 할 것인가? 하루밤만 머물자고 했는데 날씨가 안좋아져서 우리의 식량이 다 떨어지면 결국 섬에 있는 가축을 먹게 될 것이 인지상정이므로 만에 하나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 섬에 정박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설득하면 설득이 될 것인가? 당신들의 목숨이 달린 문제라고 하면 설득이 될까?

 

P352

오디세우스는 노래하는 시인은 살려두었다. 텔레마코스 또한 그의 목숨을 살려주라고 탄원했다. 오디세우스는 시인의 목숨을 살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일을 잘 기억하여 잊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게. 선행이 악행보다 얼마나 더 나은 것인지를. 노래거리가 많은 그대는 살육을 피해 안마당에 나가 앉아 있도록 하게.”

 

P355

아가멤논의 혼백은 이렇게 탄식한다. “행복하도다. 지략이 뛰어난 오디세우스여. 그대야말로 부덕이 뛰어난 아내를 얻었구려! 나무랄 데 없는 페넬로페이아는 얼마나 착한 심성을 지녔던가! 그녀는 결혼한 남편을 진심으로 사모했구나! 그녀의 향기와 명성은 영원하리니 불사신들은 사려 깊은 페넬로페이아를 위해 모든 지상의 인간들에게 사랑스러운 노래를 지어줄 것이. 그런 여인도 있건만 틴다레오스의 딸은 악행을 궁리하여 결혼한 남편을 참살했으니 그 끔찍한 일은 인간들 사이에서 가증스러운 노래로 길이 남으리라. 그녀로 말미암아 모든 여인들이, 비록 행실이 올곧은 여인이라 하더라도, 비난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오.”

 

P356

젊음의 10년은 전쟁터에서 살았고 또 10년은 불운의 풍랑을 헤치며 살아왔다. 마지막 가장 위험한 고향에서 맨손으로 일어서니 비로소 한 사내는 홀로 설 수 있게 되었다. 머리와 어깨는 위엄과 젊음으로 오히려 10년 전보다 더욱 빛나니.

우리도 그렇게 젊은 날들은 공을 세우기 위해 전쟁처럼 바삐 살고, 또 그만큼은 칼립소에게 억류되어 날마다 바라들 보고, 한숨을 쉬듯 매너리즘에 젖어 산다. 그러나 인생은 모험, 날마다 새로운 파도와 겨뤄야 하니 알게 되리라. 삶은 이타카를 향하는 도중에 있음을.

 

P362

지팡이는 우주의 축을 의미하며 헤르메스는 이 축을 타고 하늘과 땅을 왕래한다 손잡이 부분에 날개가 달려 있는 이 지팡이를 서로 마주 보는 두 마리의 뱀이 휘감고 있다. 두 마리의 뱀은 궁극적으로 통합되는 이원적 대립물을 상징한다. 뱀 한 마리는 독을 뜻하고 또 한 마리는 치료를 의미한다. 따라서 두 마리의 뱀은 질병과 건강을 상징한다. 이 것은 유사 요법, 자연은 자연으로 물리친다는 고대의 사유체계를 반영한 것이다. 우주에 작용하여 대립하는 두 가지 힘의 상호 보완적 성격을 보여준다. 두 마리의 뱀은 결합과 해체, 선과 악, 불과 물, 상승과 하강, 남성과 여성 등 대립적 요소를 상징한다. 그러니 헤르메스는 공간을 넘나들 뿐 아니라 대극적 가치의 쌍방을 넘나들어 조화를 이루게 하는 신이기도 한 셈이다. 특히 제우스의 의도를 담고 여기저기를 전령으로 다니면서 여러 갈등을 중재하기고 했다. 특히 그는 칼립소를 설득해 오디세우스를 놓아주게 했고, 오디세우스가 키르케의 마법을 방어할 수 있도록 약초를 주기도 했다.

 

P374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칼을 빼들고 그녀를 죽이려던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조차 처녀에 대한 동정심으로 그녀를 죽이는 일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그녀를 아버지의 무덤에 바쳐야 했기에 그는 단 한번에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그녀는 평온을 잃지 않았다.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가슴이 남자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옷깃을 여몄다. 그녀는 모욕을 당하고 죽어야 하는 패배의 순간에도 인간은 명예를 지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젊은이들은 마치 그녀가 운동 경기에서 우승일도 한 듯이 그녀에게 나뭇잎을 던져 몸을 가려주었다. 그것은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경의였다.

 

P279

아프로디테가 두 여신을 이기고 내가 파리스의 아내가 된 것이 그리스에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를 말이에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리스는 트로이인들에게 오히려 정복당했을 것이니까요. 나는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팔려 와서 이렇게 비참한 꼴을 당하게 되었어요. 화환을 받고 칭찬을 받아야 할 공을 세우고도 도리어 그로 인해 비방과 책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 당신은 이렇게 묻고 싶겠지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조국과 가정을 떠나 이방의 남자를 따라 짐을 나온 것이냐고 말이지요. 그러나 누가 제우스와 아프로디테의 뜻을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P390

인간은 이 운명에서 저 운명으로 부름을 받는 것, 부름이 끝나 한곳에 머무는 순간 삶은 저녁처럼 저문다. 그러니 풍랑과 폭우를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떨림의 기쁨으로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니.

풍랑이 내던져놓은 새로운 운명의 해변에서 폭우가 지나간 하늘은 다시 푸르게 살게 하나니 모든 죽음은 영원한 평화, 그러니 살면서 아무 일 없는 무풍의 권태를 참지 마라. 떠나지 못한 모험은 삶에 대한 쓰라린 모독이니.

 

P398

배신자여, 그대는 정말 말 한마디 없이 나를 떠날 셈인가요? 그대는 나에게서 도망치려는 것인가요? 나는 이 눈물과 그대의 서약과 막 시작한 우리의 결혼에 걸고 간청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어떤 호의를 베푼 적이 있다면, 나의 어떤 것을 그대가 사랑한 적이 있다면, 내 기도가 너무 늦지 않았다면 그대의 계획을 단념하세요.” 아이네아이스는 마음속의 괴로움을 애써 억제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그대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그대에게 신세를 졌다오. 여왕이여, 내 생명의 입김이 나의 사지를 지배하는 동안 결코 당신을 기억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오. 내 운명은 트로이와 아직도 살아 있는 내 동포를 돌보는 것이오. 신께서 내게 위대한 이탈리아를 차지하라 명령하셨소. 그 곳이 나의 사랑이며, 나의 조국이오. 이슬 젖은 그늘로 밤이 대지를 덮을 때마다, 불타는 별들이 떠오를 때마다 내 아버지 안키세스께서 괴로워하며 내게 다가와 어서 여기를 떠나 네 왕국을 세우라고 말한다오. 내 아들에게 운명 지워진 그의 왕국을 물려주지 못한다면 그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이오. 제우스께서 친히 사자를 보내 내게 경고하셨소. 그러니 나와 그대 자신을 괴롭히는 일일랑 그만하시오. 내가 그대를 떠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오.”

 

P399

그녀는 아이네이아스가 남기고 간 칼 위에 엎어졌다. 칼날 위로 피가 품어져 나오고 그녀의 두 손은 피로 얼룩졌다.

 

P400

사랑이 타오른다, 불처럼 빨갛게 날름이며 여자는 남자의 몸에서 머물 산을 찾고, 남자는 여자의 몸속에서 배를 찾는. 갈 곳을 잃은 밤의 한가운데에서 미지의 불안으로 가득한 신세계를 그리며.

미친 듯 더듬어 서로 찾아 타오르는 절정에서 사랑의 길을 갈린다. 남자의 사랑과 여자의 사랑으로. 세상 모든 남자의 사랑은 바닷가에 묶인 배, 세상 모든 여자의 사랑은 그 배를 묶어둔 밧줄. 천둥 치는 만남은 잠시, 이내 영원한 엇갈림의 운명이여.

 

P410

갈 곳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 난 길을 멋모르고 달리 듯이 걷다 보면 문득 길이 끊기고 어두운 숲, 거미줄이 얼굴에 걸릴 때쯤 알게 되리 인생은 달리는 속고가 아니라 가야 할 방향이라는 것을. 살면서 가장 큰 모험은 죽음을 미리 겪어보는 것. 황금 가지를 꺾어 손에 들고 700년을 산 시빌라의 안내를 받아 지난 삶을 건너 새로운 포구에 이르면 살아야 할 새 삶이 나타나는 법

 

P427

투르누스는 팔라스를 죽이고 전리품으로 그의 칼집을 빼앗아 자신의 어깨에 자랑스럽게 메고 다녔던 것이다. 인간은 한때의 행운이 떠받쳐주면 절제할 줄 모른다. 곧 따라 죽어야 할 운명인 것을 모르고 승리의 기쁨으로 빼앗아 과시한 전리품이 그가 한 짓을 증명하고 말았다. 팔라스의 유품을 보자 아이네이아스는 미칠 것 같은 잔인한 고통으로 분통이 터졌다. “지금 그대는 내 전우를 죽여 빼앗은 전리품을 기념으로 어깨에 두르고서 여기서 벗어나려고 하는가! 지금 이 칼을 내리치는 것은 팔라스이며, 팔라스가 그대를 죽이는 것이다. 팔라스가 자신을 죽인 살해자에 대해 피로 복수하는 것이다.”

 

P449

작가가 된 다음에야 나는 역사학자가 나에게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내가 외적 사건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매우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역사학은 사실에 기초한 해석이다. 그런데 나는 사실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그 일이 생겼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 일이 내게 어떤 감흥과 충격을 주었느냐는 것이다. 외적 사건보다는 그 사건이 내 마음속에 만들어낸 파장, 즉 내적 사건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나는 사실과 험구를 버무려 감동을 주는 작가는 될 수 있지만 사실을 집요하게 추적해야 하는 역사학자로서는 실격이었다. 사실을 떠날 수 없는 역사적 상상력보다는 아무 제한도 없는 시적 상상력이 내게는 훨씬 재미있었다. 우연히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책을 읽으면서 몇 년 전부터 신화라는 이야기와 상징체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사실에 주목하는 경향도 있고 감동에 주목하는 경향도 같이 갖고 있다. 하지만 좀더 사실적인 것에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매사에 말이 안되면 그 자체에 신뢰가 떨어져서 감흥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선 신뢰할 수 있는 영역으로 이야기가 전개된 후에야 감동이 일어나기 때문에 신화에서처럼 신들의 조화나 우연에 의한 다양한 이야기 전개는 사실 해석해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 첨의 얼굴을 가진 영웅, 변신 이야기를 읽고 나니 신화 이야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면이 있다. 그 이후에는 신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고 그 조화에 대해 다소나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P450

자기 경영의 요체는 왜곡되고 강요된 껍데기의 삶을 버리고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며 모색이다. 나의 세계를 찾아내 그 주인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자기 혁명인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분야에서 연구하고 책을 쓰는 저작 활동을 해왔다.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낸 변화의 개념을 나에게 적용하는 실험적인 삶을 살아왔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기업인 1인 기업을 만들었고, 30년 가까이 몸담아온 현장을 중심으로 변화이론을 만들어온 전문가이며, 일 년에 한 권의 책을 써내는 작가로 살아왔다. 자기 혁명을 꿈꾸는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대학원을 만들어 제자를 키우고 함께 공부하고 노는 기쁨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신화야말로 자기 경영의 요체를 담고 있는 거대한 상징체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화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가 어느 날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역할과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자각하고는 시련과 고난을 이기고 주어진 과업을 완수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내적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법을 수련하여 드디어 평범한 사람은 결코 해낼 수 없는 과업을 성취하고, 그 과정에서 얻게 된 힘을 가지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그 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게 되는 이야기다. 신화란 그 이야기 속에 자기 혁명의 진수와 핵심을 뼈와 살로 품고 있는 비서임을 알게 된 것이다.

 

P451

나는 삶을 시처럼 살다 가고 싶다. 책이 보고 싶으면 책을 즐기고, 비가 내리면 비를 즐기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걷고, 여인을 만나 사랑하고, 자식을 낳아 그들이 커가는 것을 보고, 내 세계 하나를 만들어 그 속에서 사람들과 삶의 기쁨을 나누고 싶을 뿐이다. 나에게는 살아 있음의 흥분과 떨림이 중요하다. 나에게 있는 특별한 장점은 이렇게 감흥이 도도하게 일어나는 삶의 체험들을 책 속의 지식들과 뒤섞어 그 속에서 무엇인지 진득한 스프를 끓여내는 것이다.

 

P451

꿈속 미풍에 실려 온 홀씨 하나 땅에 묻히더니 이내 종려나무 싹이 되었네. 우듬지가 쑥쑥 하늘을 향해 커가더니 어느새 머리가 별에 닿았네. 머리카락에 별을 잔뜩 달고 내려다보네

문득 내 속에 울리는 <파우스트> 속 외침, “저 문을 열어젖혀라, 사람마다 통화하기를 주저하는 저 문을.” 푸른 바다를 향한 열망이 나를 이미 선원으로 키웠으니 나는 독에 매어둔 배에 올라 묶어둔 줄을 풀고 두려움과 기쁨으로 가득 차 바다로 나서네, 나의 세상을 찾아서.

 

 

3. 내가 저자라면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는 저자의 말처럼 모험의 선동을 위해 쓰였다. 모험에로의 초대, 이것이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다. 생의 모험에로의 초대는 무엇일까? 죽어 있는 시간을 인식하고 가슴 뛰는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는 것이라고 이 책을 읽을 후 느낀 점이다. 수 많은 신화 속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과 생의 목적을 향해 돌진해 갔다. 물러서지 않았고 목숨을 아끼지 않았으며 운명을 피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생은 영혼의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영혼의 불을 피우는 일이 있는데 불쏘시개를 아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과연 이 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각종 보험과 제테트는 우리의 생명을 영원할 것처럼 말하며 현재를 담보하여 미래를 보장할 것처럼 세뇌를 시키고 있다. 암묵적으로 생명에 매달리게 만들고 그들의 시스템에 돈의 시스템에 부속품처럼 매달리게 만들어 놓고 있다. 부속품은 필요한 기계에서 떨어져 나가면 대부분 다른 기계에 쓸 수가 없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안고 현재의 기계 같은 시스템에 자리 잡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신화 속 모험과 여정 그리고 영혼의 열정을 불러 일으키려 시를 통해 신화 속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충동질하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그리스 신화를 연대기를 따져 잘 배열하고 중요한 사건과 인물 중심으로 배치하여 이해를 도운 점이 전체 이야기를 아우르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매 꼭지마다 시의 형식을 빌어 저자의 목소리를 담아 내어 감흥을 더했고 이야기를 다시 엮어서 그 감흥에 필요한 요소들을 잘 추려 정리하였다. 또한, 신들과 그 신들과 관련된 상징 물들에 대해 이야기 끝 부분에 따로 정리하여 요약해 줌으로써 이야기 흐름에 맞게 이 상징물들이 연상되도록 도와주고 있다. 이 책이 갖는 좋은 점은 이러한 친절함에 있다. 이 책을 읽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시 전체적으로 읽는 다면 그 단순히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으로서 신화를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감명 깊었던 글귀

 

나의 신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나의 세계가 없는 평범한 삶에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세계 하나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자주적 삶의 방식도 없고 정신적 독립성도 없는 대중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삶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마침내 세상에 자신의 작은 왕국 하나를 건설해나가는 이야기다. 성공과 실패가 하나의 물결처럼 서로를 교환하는 것,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모멸이 온몸을 휩싸는 일에 뛰어드는 것, 모든 신화는 바로 이 무수한 모험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신화 읽기를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그런 류의 책들은 너무도 많다. 이 책은 모험의 선동을 위해 쓰였다. 모험에의 초대,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인류의 모든 과거가 살아 숨 쉬고 있다가 어떤 야생의 순간에 원시의 순수한 힘으로 우주적 교감을 이루게 될 때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정신적 시선은 의식의 혁명을 겪게 된다.

 

모든 생명은 자신의 운명을 따를 것이니 단지 성패를 아직 모를 뿐

오만한 자들은 스스로 승리를 쟁취했다 여기겠지만 승리와 패배 모두 미리 예견된 것.

어려움이 닥치면 무너지지 마라. 환희가 가득한 기쁨 앞에서도 자만하지 마라.

인간이 해야 할 몫이 있고 하늘이 정해준 길이 있으니

오직 땅에 발을 댄 겸허함으로 온 힘을 다할 뿐

 

나는 삶을 시처럼 살다 가고 싶다. 책이 보고 싶으면 책을 즐기고, 비가 내리면 비를 즐기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걷고, 여인을 만나 사랑하고, 자식을 낳아 그들이 커가는 것을 보고, 내 세계 하나를 만들어 그 속에서 사람들과 삶의 기쁨을 나누고 싶을 뿐이다. 나에게는 살아 있음의 흥분과 떨림이 중요하다. 나에게 있는 특별한 장점은 이렇게 감흥이 도도하게 일어나는 삶의 체험들을 책 속의 지식들과 뒤섞어 그 속에서 무엇인지 진득한 스프를 끓여내는 것이다.

 

책의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프롤로그

1부 신화가 된 인간

1장  미케네: 모험의 시작

2장  크레타: 탐욕의 끝

3장  아테네: 문명의 꽃피다

4장  테베: 가장 비참하고 장엄한 자의 탄생

 

2부 트로이 전쟁, 겨루는 자들의 함성

5장  아테네 à 트로이 : 출항

6장  트로이: 격돌

 

3부 혹독한 귀환

7장  아테네: 운명의 굴레

8장  트로이 à 이타카: 승리한자의 고난

9장  트로이 à 로마: 위대한 로마의 탄생

에필로그

 

본 저작물은 위의 목차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 신화의 탄생에서부터 로마의 건설까지 모든 이야기를 한 꼭지씩 담아내고 있다. 모험에의 선동이라고 저자가 밝혔듯이 한 인간이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간 신들 결정과 농간에 어떻게 대응했느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 다루고 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 신화들이 현실에서의 모험으로서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시적인 영감과 신화 속의 모티프들을 들추어 이야기 해주고 있다.

 

모험에로의 선동과 초대에는 어떠한 유혹이 필요해 보인다. 신들이 내려준 고통과 고난은 누구나 감내하고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유약하고 연약한 현대인들은 이러한 고통과 고난에 익숙하지 않다. 다만 사고나 사건이 터진 후 감당해 나가는 인간적인 힘밖에 없어 보인다.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신화를 통해 모험에로의 선동과 초대를 위한 유혹적인 면이 전체 신화 이야기를 읽으면서 부족하지는 않은지 생각이 든다. 모험을 하게 되면 무엇을 얻게 되는지? 현실의 권태가 현실의 죽어 있음이 신화 속 어디에서 모험으로 박차고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좀더 명쾌한 지적이 있으면 요즘 같은 현대인들에게 좀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 본다. 책 전체적으로 울림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모험을 시작하고 모험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모험의 종류와 모험을 통해 얻게 되는 것과 이를 위해 어떤 마음이 필요한지 등을 구분해어 정리해보면 신화를 통해 빌려온 변화의 실천서로서 좀더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본 저작물은 신화를 통해 모험이 이런 것이다. 모험은 그 과정에 의의가 있다. 인간의 지평을 넓혀준다. 등 여러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지만 현대의 실 생활에서 살려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각자 개인의 상상력에 맡기고 있으니 곱씹어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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