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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5일 11시 55분 등록

나의 시인들

10기 김정은

 

 

되돌아보면, 삶 속의 어두운 시절에 내게 시인이 있었고, 시가 있었다. 여고 시절에 장정일이 있었고, 미국에서 랭스턴 휴즈가 있었다. 파업 중, 브레히트가 찾아왔고, 바로 지금, 변화경영시인 구본형이 있다.

 

십대, 소녀의 시인, 장정일

 

교복과 여관, 또는 여관과 교복, 그야말로 어울릴래야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다. 하지만 나는 여고 3년 내내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과 함께 했다. 내가 다녔던 여고는 부산에서도 팔학군이라 불릴 만큼 교육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심이 되는 지역에 있었다. 반면에 우리집은 그 학교에서 버스로 한 시간을 가고도 또 삼십 분은 걸어야 하는 부산의 변두리에 있었다. 우리 가족은 외진 동네의 낡은 여관 건물 한 귀퉁이에 세 들어 살았던 것이다. 운 좋게도 늘 좋은 성적을 유지했던 나는 그 지역에서 색다른 개념의 엄친딸이 되기도 했다. 동네 약국 아줌마, 목욕탕 아줌마, 그리고 문방구 아저씨 등, 어른들은 우리집 사정을 빤히 알았기에, 입이 마르도록 칭찬해 주시곤 했다. “정은이 좀 보라고! 이런 집에 살면서도 저렇게 공부를 잘 하는데…… 우리 아들은 왜 저 모양일까!”

 

왜 하필 여관이었을까? 80년대 노동 운동을 하셨던 아버지는 이후 마땅히 일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우리 가족이 살 만한 곳도 없었다. 죽어가는 동료를 위해 최소한의 신의를 지킨 것에 대한 일종의 대가였다. 우리 가족은 이사에 이사를 거듭하다가, 도시에서의 마지막 거주지로 여관을 선택한 것이었다. 일찍 시골로 들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공부 잘 하는 둘째 딸을 위해 도시에서의 삶을 조금 더 연장했던 것이다. 그 당시, 감옥에 갔거나, 야밤 도주했던 친구 아버지도 몇 분 계셨는데, 그분들에 비하면, 여관방에서라도 가족 곁에 남아 가족을 끝까지 지켜주신 아버지께 한 없이 감사한 일이었다. 어찌됐건, 가장 민감했던 시기, 이른 아침 여관 건물에서 나와, 늦은 밤 여관 건물로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 그것도 교복을 입은 채!

 

<햄버거에 대한 명상>, 장정일의 이 첫 시집은 87 12월 판이다. 표지엔 '7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이라 써 있다. 소년원 출신, 중졸의 학력, 여호와의 증인 신도 등 그의 이력은 시인이라 하기에 너무나 독특했다. 마치 교복과 여관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하지만 나는 살아있는 자신의 체험을 고스란히 담아낸 그의 시가 그 어느 누구의 시보다 좋았다장정일은 혹독한 삶을 살아냈다. 그리고 시인이 되었다. 나도 시인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만약 시인이 된다면, 아마도 십대, ‘교복과 여관의 성찰의 시기를 관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난관을 모면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시도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내일 굶주린다 해도, 겨울에 따뜻해지는 일은

꿈꾸는 일보다 중요하다.

처음보다 질긴 채찍으로 바람은 내 등을 후려치지만

난로가 있어 기름통을 가지고

밤 늦게 걸을 수 있는 자는 또 얼마나 행복한가?

어느 틈에서인지 한 방울씩의 석유가 세고

몇 개 전주 너머의 너의 방이 별보다 밝게 반짝일 때

그때인가. 나는 끝없이 걷고 싶어졌다.

끝없이 걸어,

 

동쪽에서 떠오르고 싶었다.

대지를 무르게 녹이는 붉은 해로 솟아나고 싶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복숭아 씨 같은 입을 딱딱 벌리며

무서운 대머리다, 불타는 기름통이다.

아아 매일 아침 내 가슴에 새겨지는 희망의 시간들을

무어라고 부를까.


- 장정일 '석유를 사러' 중에서'-

 

시가 삶으로 이어져 삶을 위로하고, 따뜻하게 데워주는 난로가 될 수 있다. 사소하고 하찮은 것에서, 한 줌의 희망을 가꾸는 일이 바로 어린 소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장정일, 그가 십대를 삼중당 문고와 함께 보냈던 것처럼, 나도 가장 민감했던 여고 시절 내내 장정일 시집과 함께 했다. 그는 매일 아침을 붉은 해로 솟아나는희망으로 시작할 수 있도록 속삭여주는 나의 시인이었다.

 

 

이십대, 할렘의 시인, 랭스턴 휴즈

 

운명에 이끌려, 나는 알바를 서너 개씩 해야 하는 고학생으로 나의 이십대 가장 팔팔했던 시기를 미국에서 보냈다. 지금도 경제적 지원이 뒷받침이 되어야 유학이란 것은 가능한 일이다. 십수년전엔 오죽했으랴. 어쩌다 마주친 한국인 유학생을 만나면 그 반가움과 기쁨도 잠시, 나는 그와 혹은 그녀와 마음 편히 밥 한끼 같이 먹을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수업과 과제, 알바를 하려면 잠 잘 시간도 없었으니. 그래도 내겐 꿈이 있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가난 때문에 오래도록 미루어 온 꿈! 더 이상 그 꿈을 연기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시인이 바로 랭스턴 휴즈였다.

 

연기된 꿈, 그것은 어떻게 되었나?

땡볕 아래 건포도처럼 말라 비틀어졌나?

아니면 오래된 상처처럼 곪아서

흘러내렸나?

 

썩은 고기처럼 악취를 풍기나?

아니면 시럽으로 만든 과자처럼

굳어져 버릴 건가?

 

아마도 무거운 짐짝처럼

폭삭 무너져 내릴 수도.

 

아니면 폭발할 것인가?

 

- 랭스턴 휴즈 '할렘(연기된 꿈)'-


나는 미국에서 내 미루어 온 꿈이 폭발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가난했지만, 꿈 꿀 수 있는 삶은 참으로 행복했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나 또 운명에 이끌려 미국에 가게 되었다. 이번엔 장기 출장이었다. 출장을 가면 의례 조심해야 할 사항들을 전달받곤 한다. 가장 먼저 전달받은 사항은 다름 아닌 흑인 조심!’이었다. 흑인 거주구역인 뉴욕 맨해튼 북부 지역은 근처도 가지 말라고 했다. 흑인들 대부분은 총을 가지고 다니며, 또 흑인들 중에는 강도가 많아서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흑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아서 그들이 위협적이 된 것인지, 아니면 흑인들이 먼저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피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인종차별이었다. 단 한 방울의 피라도 섞이게 되면 그때부터 천한흑인으로 귀결되고 마는 합중국의 정신에도 맞지 않아 보였다.

 

뉴저지에서 일하는 동안, 한국에 비하면 상당히 편안한 미국의 근무 환경이 참 좋았다. 한국 대기업의 미주법인에서 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피부색의 다름에서 오는 인종차별을 직접적으로 겪지는 않았던 것이다. 나는 남편도 미국의 편안한 근무 환경에서 일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고, 곧 알아보았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경력을 가진 극소수를 제외하고, 미국의 금융업계에 유색인종의 유입은 원천적으로 막혀 있다는 정보만 얻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유색인종들의 꿈은 연기된다. 1600년대부터 남북전쟁을 거쳐 지금까지 그 꿈은 미루어지고 있다. 흑인이 대통령이 된 현재의 미국 사회에서도 역시 연기된 꿈은 현재진행형이다. 내게 꿈을 연기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던 랭스턴 휴즈의 시들을 찾아서 읽고, 또 읽어 보았다. 그는 미국의 흑인으로서 흑인 르네상스 운동을 수립해 나간 작가였다. 하지만 그는 저항시인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을 때에도 울거나 고함을 지르는 문학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문학에 있어서도 인종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늘 웃음을 잃지 않는 문학을 해왔던 것이다. 그는 흑인의 흑인다움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찬 감동적인 시들을 썼다.

 

좋은 시란 우리의 삶 그 자체로부터 이루어진다고 랭스턴 휴즈는 믿었다. 미국에서 가난한 고학생으로, 유색인종의 노동자로서 만난 나의 시인, 랭스턴 휴즈! 그는 내게 말한다. 어떠한 제약 조건에도 꿈을 연기하지 말라고!

 

 

삼십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브레히트

 

2012, 오랫동안 묵혔던 내 몸의 질병들이 줄줄이 터져 퇴사를 하지 않고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해에 남편이 다니는 회사는 파업 투쟁에 들어갔다. 수입이 전무한 상태로, 어린 두 자녀를 키우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파업 투쟁 도중에 노조원임을 철회하고 사측에 복귀하는 것은, 평생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 부부는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은 의리가 있어야 한다.”, “쪽 팔리게 사는 거보다 죽는 게 낫다.” 내 아버지 말씀이 자주 떠올랐던 시기였다. 이 때, 독일의 시인 브레히트를 만났다.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 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 히틀러를 지칭

 

-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1939년 초에 쓴 시이다. 브레히트는 학살과 전쟁의 주범이자, 젊은 시절 화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를칠쟁이’, ‘엉터리 화가라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아름다운 사과나무의 감동보다는 이엉터리 화가에 대한 분노가 그에게 시를 쓰게 하는 힘이었다. 사랑 받고 있는 행복한 자, 해협의 산뜻한 보트와 돛단배, 따뜻한 처녀들의 젖가슴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서정시 대신,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 40대인 소작인의 처의 구부러진 허리로 상징되는 현실에 대해서 쓰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의 시대, 나치즘의 광기가 휩쓸고 있는 시대는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였다.

 

꿈은 이루었으나, 몸은 망가졌고, 몸담고 있는 회사를 정체불명의 자본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어린 자녀들을 굶겨야 하는, 우리 시대 역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임이 분명하다. 남편의 파업 현장을 지켜보면서 나는 브레히트의 시를 떠올렸다.

 

평생에 걸쳐 40여 년간 1200여 편의 시를 남긴 브레히트, 아무도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침묵할 때 침묵해서는 안 되는 그는 시인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시기에 그의 시는 더욱 빛을 발하였다. 히틀러 시대는 패망했고, 브레히트 그 자신도 죽었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힘든 시기, 나는 비로소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사십대, 삶이 시가 되기를, 구본형

 

그렇게 시는 늘 내 곁에서 나와 함께 있었다. 시는 힘들 때 위로가 되었고, 추울 때 따뜻한 난로도 되었다. 시는 가난했기 때문에 연기했던 꿈들을 상기시켜 주었고, 또한 두려움으로 현실에 안주하려 했을 때, 용기를 주기도 했다. 내 삶이 시가 되기를, 시처럼 살아가기를 바라게 되었을 때, 변화경영시인 구본형을 만났다.

 

모든 영웅이여, 미궁으로 들어서라.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

나를 지나면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길

나를 지나면 길 잃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

그 길을 통과하라.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결코 잊지 마라.

희미한 소명의 길은 미궁과 같으나

어두운 내면을 통하지 않고는 내가 없으니

두려우리라 생각했던 곳에서 나를 발견하고

죽으리라 생각했던 곳에서 살게 되리라.


-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 중에서-

 

오직 어떻게라는 질문에만 몰두하며 살아온 삶은 힘들었다. 더 이상 어떻게가 통하지 않던 어느 날, ? 라는 질문을 해 보았다. 해답은 사랑이었다.

 

세상의 보물 딱 하나만 들라면 사랑이지

목숨을 건 것이 목숨을 살리는 법

그걸 잡으려면 온 삶을 다 걸어야지

 

삶이라는 미궁을 미워하지도 저주하지도 않고, 주어진 운명에 따라 삶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 소명이라는 실타래를 잡고 놓지 않는 것, 내가 나의 신화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시처럼 사는 것이다.

 

삶이 시가 되기 위해서, 삶이라는 모험에 기꺼이 뛰어들어야 한다. 시련과 고난을 겪는 과정을 통해 성공과 실패가 하나의 물결처럼 서로를 교환하는 것,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모멸이 온 몸을 휩싸는 순간을 느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그 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 그것이 삶이 시가 되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내 삶이 신화가 되는 모험, 삶이 시가 되는 모험에 기꺼이 뛰어 들 수 있게 되었다.



IP *.65.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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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5 23:45:44 *.255.177.78

"삶이라는 미궁을 미워하지도 저주하지도 않고, 주어진 운명에 따라 삶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 소명이라는 실타래를 잡고 놓지 않는 것, 내가 나의 신화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시처럼 사는 것이다."

 

시인이여 그대의 노래를 들려 주오

슬픔도 기쁨도 그대의 노래로 시가되리

시인이여 그대의 시를 들려 주오

사랑으로 불타오른 재마저도 노래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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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5 23:54:57 *.65.153.118
희동 시인님 시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십대, 삶이 시가 되기를, 구본형
이 부분은 마무리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신화읽기 급급해서 시를 충분히 음미하지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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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6 17:07:26 *.217.6.25

나의 핏빛 젊음은 노래로 되어 있습니다.

힘든 시절, 고단한 시기들에 노래는 나의 힘줄과 뼈대가 되었습니다.

당신에게 다가간 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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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7 18:46:56 *.65.153.149
힘줄과 뼈대가 된 시들.... 소개 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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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6 19:05:14 *.70.56.236
아~ 그랬군요, 앨리스님이 시인이 된 까닭을 이젠 알겠네요.
고난이 시인의 자궁이었음을...
"삶이 시가 되기를... " 이미 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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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7 18:55:51 *.65.153.149
시인이라 말씀해주시니... 몸둘바를^^;;;;;
시 같이 사는 삶~~ 같이 가 보실까요~~ 구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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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7 10:01:42 *.198.29.159

장정일에 흠뻑 빠지는 시기, 저도 있었어요. ^^

저는 시를 쓰지 못하지만, 앨리스님이나 희동님의 시를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따끈해지는 기분.

장정일의 시 중 저를 늘 위로하는 한 편을 공유합니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에는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안에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게 벨 것인데

한 켠에서 되게 낮잠 자 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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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7 18:54:01 *.65.153.149
저도 좋아하는 시예요~~ 종종언니랑 시 취향이 같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아지는데요~~ 왠지 저도 매력적인 여인이 된 느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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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7 23:33:38 *.144.167.98

왠지 무지개를 보고 있는 느낌이네요.


시가 사람의 마음과 이렇게 가까이 있는지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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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9 16:09:35 *.153.23.18

시를 어려워하는 저는 시에 주눅이 들어서요, 그냥 여러번 읽어 봤네요. ^^;;;;

시보다 더 강렬하게 남는 건 교복을 입고 여관에서 나와서, 1등을 하고,

여관으로 교복을 입고 들어가는 얼굴 하얀 여학생 실루엣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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