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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5일 11시 59분 등록


Column 3


마흔의 바다에서 신화 읽기


강종희


2014. 5.4


 


천천히, 언덕의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길. 누군가 마흔 이후의 삶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그 길은 꼭대기를 정복한 개운함으로 한결 수월해지는 하산 길이 아니다. 멋모르고 오르던 첫 산행의 의욕과 에너지는 고갈되고, 올랐던 그 길보다 훨씬 험난하고 수많은 함정이 숨은 위태로운 길을 꼭대기가 아닌 바닥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고단함.         


그녀의 전화를 받고 우리가 이제 반환점을 돌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 직장의 오랜 동료이자 선배였던 그녀. ‘공부는 나의 힘을 외치며 어떤 부서에 가던 어떤 지점에 가던 늘 최고의 팀을 만들던, 20년 회사 생활 내내 top talent로 분류되던 그녀가 회사에서 해고된 지 벌써 10개월 째였다. 본인의 실적과 아무런 상관없는, 글로벌 본사 차원의 보여주기식 구조조정과 아태 지역 내 정치적 알력다툼의 여파로 그녀의 부서가 통째로 날아간 결과였다.


그랬던 그녀가 새로운 채용 면접을 앞두고 내게 조언을 구한다며 전화를 했다. 늘 헤드헌터의 구애를 받던 그녀가 여태 자리를 못 찾았다는 소식은 충격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면접을 앞둔 그 자리는 최근 내게도 제안이 들어왔던, 그녀의 전문 분야와는 거리가 있는 포지션이었다. 내가 아는 한 가장 탄탄한 경력과 성실함을 갖춘 영업마케팅통인 그녀가 적절한 자리를, 회사를 찾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사장들이 너무 젊어진 것이다. 부침이 심하고, 조로현상이 심한 외국계기업에서는 이제 마흔 후반의 그녀를 들이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늘 최고의 회사에서, 최고의 인재로 대접받던 그녀를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무게가 따라잡기 시작한 것이다. 몇 가지 내가 아는 직무에 대한 조언을 전해주고 나서,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커리어에 있어서는 실패나 중단, 자발적인 휴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주변의 수많은 열혈 여성, 소위 멈추지 못하는 여자의 전형이다. 남성으로 주어를 바꿔도 큰 차이는 없다. 어려서부터 자식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좋은 부모님 밑에서 자라 기대 만큼 공부를 잘 했고, 학교를 졸업하고는 바로 일을 시작하여 지독한 성실함과 열정으로 남부럽지 않게 승승장구하며 커리어를 쌓았으며, 고객을 제외하고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일도 없었고 어디서나 당당한 사회인으로 살아온 그와 그녀들.


그런 그들을 세월이 따라잡을 때, 중년의 저주가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할 때,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취약한 자신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어떻게든 오르는 것, 더 열심히 채찍질하는 것 밖에 모르는 나의 성실한 친구들아, 우린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대책 없는 성년의 사춘기를 맞게 될 줄, 넌 알았니? 진정 난 몰랐었다. 에고 에고.


멈추지 못하는 그와 그녀들의 써클에서, 자의든 타의든 궤도를 벗어난 (또는 그런 것처럼 보이는) 거의 유일한 인간이 된 내게 가끔 전화가 걸려온다. 너는 괜찮니? 어떻게 하면 괜찮니?를 묻기 위함이다. 책으로 살림을 배우고 책으로 고난을 헤쳐나갈 방법을 묻는 이 범생들에게 몇 가지 책을 권해주었다. 책쓰기 강의와 변경연 과정 등을 통해 만났던 좋은 책들을 알려주고, 이 남아도는 시간을 어째야 할지, 어찌 놀아야 할 지 모르겠다며 울부짖는그녀들에게 혼자 놀기의 비법도 몇 가지 귀뜸해줬다. 오로지 마케팅불변의 법칙’, ‘포지셔닝같은 비즈니스 서적만 끼고 살았던 그녀들에게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 ‘마흔 이후 인생 작동법’, ‘죽음의 수용소에서’, ‘행복의 정복을 리스트로 적어 보내주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를 읽고 생각했던 몇 가지 끔찍한 진실들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초딩 시절부터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신화의 텍스트가 왜 이 책에서 그리 낯설게 느껴졌는지, 그 전과는 다른 인물과 신들이 내게 말을 거는 것인지. 어찌 보면 다 아는 옛날 이야기, 그리스 신화를 가지고 구본형 선생은 마흔을 지나는 성인, 또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은 성인을 위한 가차없는 인생의 진리, 그걸 받아들일 줄 아는 중년의 지혜를 전한다.   


달콤한 처녀들의 사랑과 신들의 재미난 소동이 아니라쓰라린 운명에 짓밟혀도 그저 살아갈 뿐인 그녀들모험이 끝나도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치열히 싸워야 하는 가혹한 운명의 사내들을 응시하게 한다메데이아의 분노와 죄악을 연민으로 바라보게 하고아이아네스의 덧없이 짧은 3년간의 왕위를 끝이 아닌 시작으로 보게 한다.


용감한 아테네도빛나는 아르테미스도최고 신 제우스도 아닌어둠의 여신이자 교차로의 수호신인 헤카테와 경계의 신 헤르메스를 중심에 올려 본다우리는 매 순간 위태롭게 또는 자유롭게 경계에 서 있으며구름 한 조각으로 칠흑 같은 어둠과 휘황한 달빛은 한 밤에 공존함을 알아야 하는 그런 시기를 맞은 것이다변화가 곧 삶이고도전이 곧 살아 있음이며기나긴 항해 끝에 마침내 보이는 항구는곧 다가올 치열한 전쟁을 의미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위태로운 중년의 언덕, 격동의 마흔을 지나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안이 아니다.


승승장구하는 청년의 신화, 용서를 모르고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무자비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시대는 갔다. 그러나 우리는 항구에 배를 버리고 육지에 안주하기에는 너무 젊다. 다른 싸움, 다른 여행이 시작되려는 참이다. ‘성공과 실패가 하나의 물결처럼 서로를 교환하는 것,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모멸이 온몸을 휩싸는 일에 뛰어드는 것’, 그런 여행을 우리는 이제 진짜 여행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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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5 23:54:36 *.255.177.78

"기나긴 항해 끝에 마침내 보이는 항구는곧 다가올 치열한 전쟁을 의미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

"다른 싸움, 다른 여행이 시작되려는 참이다. ‘성공과 실패가 하나의 물결처럼 서로를 교환하는 것,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모멸이 온몸을 휩싸는 일에 뛰어드는 것’"

 

항구에 도착해도 치열한 전쟁만이 기다리는 것. 항구를 벗어날 수도 없고 전쟁을 피할 수도 없는 물러설 수 없는 우리의 여정을 위하여. 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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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7 09:50:23 *.198.29.159

마흔세살에 다시 시작하기, 맞아요. 우리에겐 건배가 필요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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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6 00:08:08 *.119.88.210

어렸을 때는 신화가 수퍼히어로로 다가오지만 40대가 되면 그 은유가 의미하는 바에 집착하게 됩니다. 젊어서 신화의 주인공 같이 산 사람이라면 신화가 주는 의미가 명료하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삶은 그저 계속 되어야 합니다. 영화 물랭루즈의 "Show must go on" 이라는 대사처럼 "Life must go on whatever happens"입니다. 영웅은, 농사를 지으며 한해의 예측가능한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생은, 아폴로의 화살이 괴물 파이썬(Python)을 없애버리듯 간단 명료하게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인은 척박한 땅에 농사지으며 돼지나 양을 치는 비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딛고 일어나는 사람이 결국 영웅의 이름에 걸맞는 존재가 됩니다. 물론 대부분은 영웅적인 일을 하기 전에 프로클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혀져 규격화된 길이에 맞추어진 사람이 되버리겠죠. 프로클루스테스의 규격화에 맞서려면 테세우스와 같은 힘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폴로의 화살처럼 거침없이 날아가 목표를 명중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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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7 09:53:04 *.198.29.159

읽은 것도 어려운데 써야 하고, 쓰는 것도 괴로운데 해야 하죠. 진정한 독서는 행하는데까지 나가야 한다는데 그 경지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합니다. 용기보다 더 필요한 게 인내인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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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9 14:54:45 *.153.23.18

헤카테와 경계선을 넘나드는 헤르메스가 중년의 신이로군요. ^^ 흥미로와요.

그리스신화는 진짜로 너무 젊은이 중심이에요. 힝

그녀의 사례가 마흔의 두려움을 배가시키는 듯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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