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어니언
  • 조회 수 1975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4년 5월 10일 01시 14분 등록

 

성지순례에 와있다. 이 여행은 말하자면 신과 깊게 관련된 지역이라는 아주 확고한 테마가 있는 여행이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여행지를 한가지 테마를 좇아 다니다 보니 여정이 아주 고되다. 몇 시간에 걸쳐 이동한 뒤 가이드 뒤를 헐레벌떡 따라다니며 10분 정도 감상한다. 그런 면에서 이 여행은 1초라도 유산을 더 보고 싶다는 욕망과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부드러운 풀밭과 올리브 나무들, 이름 모를 꽃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싶다는 여행의 자유로움을 꽁꽁 싸서 깊숙히 넣어두어야 했다. 그러나 한번 본 것 만으로도 인류를 지탱해온 거대한 바다를 항해하는 것처럼 여정 내내 나를 감동시킨다.

 우리 팀은 이탈리아의 아씨씨와 란치아노, 산 조반니 로톤도, 로마를, 이스라엘에서는 카이사리아, 나자렛, 갈릴래아, 사해 등을 갔다. 오늘은 팔레스타인의 베들레헴을 돌아볼 참이다. 로마나 아씨씨를 제외하면 솔직히 이런 종류의 여행을 마음먹고 오지 않는 한 가기 어려운 장소들이다. 아주 오래된 성당에 있다 오면 고요한 정신이 침투되는 것이 느껴졌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아네모네와 민들레 등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보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갔건만, 유적과 성당과 성지들은 신비한 기운 같은 것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았다. 책으로만 읽었던 장소들을 직접 보는 것으로 나는 종교의 뿌리가 되었던 신적 존재를 한 명의 인간으로 그려볼 수 있게 된다. 그는 갈릴레아 호숫가에서, 겟세마나의 바위 위에서 순식간에 나를 데리고 이천년 전으로 돌아간다. 싱싱하게 살아있는 팔과 다리, 호탕하고 건강한 웃음 같은 것들이 그려진다. 유적의 힘이다.

중요한 장소마다 세워져 있는 성당은 성지에 얽힌 이야기와 그 의미를 바탕으로 정교하고 아름답게 고안되었다. 이 거대하면서도 소박함을 잃지 않는 건물 속에서 방문객들은 각자의 가슴 속에 담겨 있는 온갖 것들을 느낀다. 손으로 울퉁불퉁한 돌의 표면을 쓰다듬듯이 본인도 몰랐던 모난 상처와 번민이 만져졌다. 창조자의 사랑으로 우리가 만들어졌다. 인간 하나 하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신의 계획 속에 쓰여 있던 존재다. 우리가 방문했던 모든 곳에서 이 두 가지 메시지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커다란 샘의 수원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우리는 문명의 근원으로 신들을 만나러 갔고 그곳에서 깊은 위로와 감동을 받았다. 덕분에 성지를 찾은 사람들 중에는 유독 우는 사람이 많다.

몇 가지 특별한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첫 번째는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보면서 받았던 벅찬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성당 벽화가 그려진 방에 들어갔을 때 날이 흐리고 비가 왔다. 희미하고 축축한 공기 너머로 천장과 벽에 그려진 벽화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성당을 나서면서 뒤를 돌아보니 날이 점점 개고 있었다. 그때 놀랍게도 그림으로 그려져 있던 신과 성인들의 팔과 얼굴에 화사한 생기가 돌더니 아우라가 퍼지듯 빛나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천장에 그려진 천지창조를 바라보면서 인간과 신의 관계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전혀 수동적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의지와 정신이 담겨있는 인간. 그리고 그것을 만든 신.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신뢰로 엮어진 관계다. 인간은 신의 의지를 실현해내기만 하는 기계가 아니며, 자신의 의지로 신을 따라 가야 하는 능동성을 내재하고 있다. 또한 신은 인간을 사랑에서부터 태어나게 했고, 삶을 미로로 설계해두어 인간이 자신의 삶 동안 성장하고 커지도록 만들어두었다. 신학을 오랫동안 깊게 공부한 건 아니라 어떤 말로 표현해야 적절할지 잘 모르겠지만, 인간과 신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공생하는 관계다.

두 번째는 변모의 성당이라는 곳에서 받았던 아주 특별한 기분이다. 이 성당은 이스라엘 이즈르엘 평야 북동쪽에 있는 다볼산 꼭대기에 있다. 그날 우리는 성당 왼편의 네모난 공터에 둘러앉아 여러 갈래의 줄기가 서로 촘촘히 얽혀 자란, 비스름한 올리브 나무 그늘에서 기도를 했다. 그러고 나서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그때 우리는 운 좋게도 성당의 메인 제단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었는데, 그곳의 구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2단으로 되어 있는 아랫층에 제대가 꾸며져 있고, 그 바로 위에는 동그란 전등에 구멍이 뚫려 있어 빛이 뿜어져 나왔고 거기서부터 크게 네 방향으로 금색 모자이크가 찬란하게 빛났다. 천장의 둥근 지붕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몸에서 빛이 나면서 흰 옷 입은 신의 아들로 변모한 예수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아랫단 벽에는 세명의 천사가 각각 아기 예수, 성체, 희생된 어린양, 관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것은 각각 신의 아들, 성체 성사의 시작, 예수의 희생, 부활을 의미했다. 그 곳에 들어서는 데 기분이 약간 들떠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각각 성지에는 그 성지와 관련된 일화를 바탕으로 지은 성당이 있었는데, 이 변모 이야기가 숨막히도록 쌓여있는 고통을 일격에 무너뜨리는 통쾌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못 박히는 장소로 가는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따라 가던 장면이었다. 천주교에서는 이 십자가의 길 중에 몇 가지 일화가 있는 장소 열 네 군데를 선별해 각 단계에서 묵상하면서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는다. 그 중에서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의 땀을 닦아주는 장소를 지나는데, 작년에 병원에서 마주했던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갑자기 가슴께를 세게 얻어맞은 듯이 숨을 쉬기 힘들었다. 마지막 미사에서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어떤 절실함으로 신부님 손을 꼭 쥐고 있던 장면, 제자들이 와서 길게 줄을 서서 하나씩 인사했던 장면, 머리맡에 앉아있던 엄마에게 작게 뭐라고 속삭이는 장면, 언니가 몸을 씻겨주는 장면 같은 것들이 지나갔다. 죽음이 임박한 과정은 누구나 닮아있다.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귀한 죽음은 자신의 십자가가 무거움을 스스로 감내하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죽음으로 다가간다. 내가 알고 있는 죽음의 과정을 직접 목격한 것이 한 번밖에 없지만, 그 경험은 내가 어디에 있든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으로 데려다 준다.

이번 여행은 나에게 세상을 만든 더 큰 존재에 대한 인지와 신뢰를 회복시키고, 인간을 만들면서 세웠던 운명의 계획 속에 서 있는 나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고, 지속적인 지금의 자신을 죽여 새로운 나로 거듭남을 체험했다. 말 그대로 여행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신화를 따라 걸어갔다.

이곳에서 나는 힘들다고 생각했던 일상의 과제들이 사실은 신의 숙제를 해결하는 좁은 문이었음을 깨닫는다. 나를 위해 준비된, 내가 바라는 언젠가가 보장되어 있고 내가 나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것만이 그곳에 다다를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태어난 시대도, 문화도, 언어도 전혀 달랐지만,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오랜 문명들과 마주했다. 인류의 기억창고, 문명의 보고는 하나의 거대한 전당이다. 전세계 각지에 흩어져있는 문명의 조각조각들이 사실은 몇 천 년에 걸친 하나의 거대한 유산인 셈이다. 인간으로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 인간이기에 만나는 가슴 속의 고향. 나는 그 곳을 얻은 것이다.

IP *.128.229.3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