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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2일 10시 56분 등록

 

피그말리온의 신화

 

이것은 파포스 섬사람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다. 그는 신성 모독으로 아프로디테의 저주를 받아 영원토록 몸을 팔아 살아간 키프로스섬의 여자들을 목격하고는 여성을 혐오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독신으로 살아온 그는 자신이 아는 여성의 온갖 허물과 약점이 없는 완전무결한 여성을 꿈꿨다. 그리하여 조각가였던 피그말리온은 가장 귀하고 빛나는 소재, 상아를 써서 완벽한 처녀를 조각했다. 자신의 온 힘과 열정을 다해 빚어낸 상아 처녀는 아름다웠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흰 피부와 그윽한 눈매, 지금이라도 그의 이름을 불러줄 듯 생기있는 입술, 유연하고 날씬한 팔과 다리를 보고 있으면 살아있는 여인을 옆에 둔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피그말리온은 집안에 고이 모셔둔 상아 처녀를 매일 다듬고 산 사람처럼 아꼈다. 보석을 선물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편안한 잠자리에 눕혀 사랑하는 배우자를 대하듯 하였다. 그러다 상아 처녀가 살아있는 여성이 아님을 확인하고 더욱 쓸쓸해지는 피그말리온이었다. 매일 보는 상아 처녀가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금단의 사랑을 고민하다가 베누스 여신의 축일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소원을 빌었다. “만물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사랑을 이뤄주는 여신이시여, 내게 상아 처녀와 같은 여인을 보내주소서.”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은 상아 처녀뿐이었지만,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그녀를 닮은 여인을 보내달라 기도하였다. 베누스는 피그말리온의 떨리는 기도를 듣고 그 간절함에 감복하여 축복을 내려주었다. 집에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여느 때처럼 상아 처녀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상아 처녀는 예전의 매끄러운 차가움 대신 따뜻한 홍조로 그에 화답했다. 상아 처녀는 온 마음으로 그녀를 원했던 피그말리온에게 마침내 온전한 여인으로 다가와 주었다. 피그말리온은 그녀에게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선물하고 청혼했다. 베누스 여신은 자신의 축복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결혼식에 친히 참석하였고, 축복받은 부부는 아홉 달 만에 아들을 낳았다.

 

절망에서 염원으로, 염원에서 기적으로, 그리고 다시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진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아주 드물게 순수한 해피 엔딩의 신화다. 이야기는 꼬인 부분도 없고, 별다른 운명의 장난도 없어서 주인공의 고난이 눈에 띄거나 하지 않는다.

 

어릴 적 가장 좋아했던 피그말리온의 신화는 기적 같은 사랑 이야기, 달달한 할리퀸 로맨스 소설 같은 매력으로 내게 어필했다. 지금도 그 매력은 유효하다. 그러나 전과 달리 이 기적 같은, 아니 기적 그 자체인 사랑 이야기의 시작이 절망과 혐오였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짧은 피그말리온의 신화에는 그가 여성을 혐오하게 된 이유가 아주 짧게, 한 문장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악한 삶은 사는 여성들은 본 피그말리온은 자연이 여성들에게 지워놓은 수많은 약점이 지겨워 오랫동안 여자를 집안으로 들이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80p. 변신 이야기 2, 오비디우스)

 

여기서 여성을 있는 그대로, 생물학적인 여성으로 바라보면 이 이야기는 마초 감성의 덕후를 위한 성적 판타지로 전락하고 만다. 그보다는 여기서 여성을 인생의 반려, 함께 해야만 완전해지는 존재, 또는 일생을 바쳐 추구할 어떤 대상, 즉 예술이나 또 다른 업으로 바라볼 때, 피그말리온의 신화는 훨씬 의미심장하다. 피그말리온이 조각가였다는 점을 주목하여 여성을 예술이라 해석한다면, 여기서 여성에 대한 혐오 혹은 절망은 자신의 일생을 바칠 예술에 대한 깊은 좌절, 그로 인한 예술과의 결별로 바라볼 수 있다. 외부적으로 볼 때 그는 붓을 꺾은 것, 즉 철저한 독신이다. 고로 이제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다.

 

그러나 집안 깊숙한 곳, 즉 피그말리온의 내면에는 꺼지지 않는 완전한 여성, 예술에 대한 염원이 숨어 있다. 남에게 들킬까 두려워 꼭꼭 숨겨둔 그의 욕망은 실은 여성(예술)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완전함을 추구하는 지독한 갈망이다. 그러므로 물러설 공간이 없는 집안(내면)으로 들어오면, 그는 자신이 만든 상아 처녀를 놓고 비밀스런 구애를 한다. 피그말리온이 왕으로 묘사된 신화도 있고, 조각가로 묘사된 신화도 있는데, 여튼 상아 처녀는 그의 재능을 다 쏟아 부은 필생의 작품이다. 다시 말하지만 상아 처녀를 예술이라 하든, 왕국이라 하든, 회사 또는 자기 사업이라 하든 별 차이는 없다. 그는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 최선의 것을 다 쏟아 필생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이 작품을 세상에 공개할 수 없다. 인정받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인정할 수가 없다. 그는 조직에 배신당하고 구조조정 당해 운둔 중인 가장일 수도, 세상의 평가에 상처받은 예술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이 알아차릴 때까지, 그는 자신의 작품, 또는 기술을 다듬고 아끼며 더 철저히 연마한다. 남들이 알던 모르던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로서 피그말리온의 간절함을 신만이 알아준다.

 

결국,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랑, 즉 예술가로서 세상과 공유하고픈 작품을 완성한 그는 더 이상 솔직할 수 없는 기도를 한다. 절필 선언을 한 작가가 수년 동안 좌절과 시도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로 오랜 침묵을 깨고 아예 다른 필명으로, 신인으로 복귀하는 모양새랄까? 피그말리온의 신화에서 나는 끝을 본 자의 절망과 간절함을 본다. 그리고 그 깊은 좌절을 이겨낼 만큼 지독한 프로페셔널로서의 열정과 치열함이 결국은 자신도 세상도 인정할만한 결실로 맺어진 것이다.   

 

종종의 신화

 

오척 단신의 그녀는 안타깝도록 짧은 다리의 소유자임에도 불구, 쉬지 않는 부단함으로 동종 최강의 속도를 유지하며 장시간 걷는 경보신공을 구사, ‘종종걸음이란 이름으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한시도 가만 있지 못하는 그녀의 노심초사하는 성격과도 일맥상통하는 별칭이었다. 종종걸음은 이제 종종이라는 중간단계를 거쳐 종횡무진이 되는 그 날을 상상하며 그녀만의 진화과정을 그린 신화를 쓴다.

 

본디 종종의 생가는 이북 5도민의 집결지였던 충무로 일대였다. 하여 삼시 세때를 족발과 냉면으

로 때워도 무탈한 선육후면의 지역정신을 일찍부터 온 몸으로 체험하였다. 또한 밥값이 제아무리 비싸 봐야 약값보다 싸다는 조모의 가르침과 식당에서 메뉴는 내 밑으로 통일따위의 횡포를 저지르는 자와는 상종도 하지 말라던 부친의 가르침을 가슴에 깊이 품고 자라났다. 취향이 곧 그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고 가르치던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든 그 끝은 어떤 형태로든 에 닿아야만 하는 그녀의 성취의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종종은 일찍부터 글을 깨우치기는커녕, 국민학교 입학 당시 제 이름 석자만 아는 무식쟁이였으나 그림으로 내용을 때려 맞추는 눈치가 비상하였고, 어마무지하게 엄한 담임샘의 회초리 공세에 힘입어 한달 내에 한글을 깨치는 괴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종종의 천재성과 집념이 처음 드러난 곳은 교실이 아닌 동네 분식집에서였다. 그녀는 다른 초딩들이 떡볶이와 뽑기에 만족하는 초보적 분식 취향에 빠져있을 때에도 이미 용돈을 모아 모든 분식점의 국수 메뉴를 섭렵하는 집요함을 보여주었다.

 

청소년이 된 종종은 글과 그림을 늘 가까이 하여, 둘의 조화가 관건인 만화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한때 만화가의 길을 심각하게 고민하였으나 맨날 사람 대가리만 그려서 뭘 할거냐는 모친의 추궁에 만화가의 꿈을 바로 접었다. 이후 예술가로서 종종의 기질은 호러와 SF, 추리와 판타지물로 점철된 온갖 영화와 만화, 드라마와 소설을 섭렵하는 것으로 발산할 뿐이었다.

 

성년이 된 종종은 삶을 오로지 ROI(Return of Investment)의 관점에서 직업을 선택하고 생활을 꾸려가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글을 쓰며 살고 싶은 은밀한 마음은 그 삶이 배고플까 염려하여 숨겨 두었고, ‘눈은 높은데 손은 무딘 자의 슬픔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웠던 그녀는 결국 든든한 회사의 벽 뒤로 숨을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였다.

 

물개처럼 잘 웃는 남자와 결혼하여 아기 물개처럼 귀여운 아들을 둘이나 낳으면서 십 수년간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 코스프레를 하며 살아온 종종은 본인의 삶에 대체로 만족하였다. 그녀는 일하는 동안 회사가 자신인지, 자신이 회사인지 모를 정도로 대상에 빠지는 ‘빙의 능력 최고치의 워커홀릭이었기에, 회사는 제 능력을 펼쳐 보일 멋진 캔버스였으며 동료와 선배, 팀원들은 즐거운 놀이친구와도 같았다. 그러다 목표하던 최고의 포지션으로 승진한 직후, 7만여 명이 근무하던 회사에서 2만 명을 잘라내는 구조조정팀에 차출되어 잔인한 경제논리를 인간적 호소로 둔갑시키는 고스트라이터가 되었다.

 

이 그럴싸한 승진의 대가는 잔혹하고 처절하여, 회사는 더 이상 그녀의 방패가 아니라 부상과 전사가 속출하는 전장이 되었다. 한 달의 절반을 해외에서 떠돌아야 하는, 피곤에 찌든 비자발적인 노마드가 된 그녀는 도무지 공감할 수 없게 비겁한 그들만의 리그를 위한 정치적 경호원으로 전락한 자신을 돌아보았다. 회사의 논리로 회사의 글만 쓰다 자신의 손에 흥건한 피를 묻히게 된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일이 이토록 비루하고 환멸에 찰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였다.

 

그 와중에 남편은 생각지도 못한 전근 소식을 알려왔고 가족이 서울과 부산과 캐나다로 흩어질 기로에 섰다. 현실로 다가온 가족의 해체앞에 종종은 오랫동안 알면서도 외면하던 사실을 똑바로 들여다 보았다. 멈출 수 없어 가는 길의 끝이 어딜지, 그 곳이 원하던 곳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일지, 어수선한 정신으로도 그 곳이 목적지일 수는 없다는 사실만은 명확해 보였다. 마침내 종종은 15년 간 멈추지 않고 달리던 열차에서 맨 땅으로 뛰어내리기로 했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너덜너덜해진 심신을 끌고 생면부지 낯선 부산에 정착한 그녀 하루 종일 아이들을 끼고 남편을 기다리며 책을 읽고 밥을 하고 청소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집안이 우주가 되고, 안방의 작은 책상이 치열한 글쓰기의 전장으로 변할 때까지 자신을 방치하고 도망치고 싶은 욕구를 인정하며 기다렸다.

 

그러다 사무실이 아닌 집안에서의 일상이 익숙해지고 자신이 사람인지, 붙박이 가구인지 헷갈리기 시작할 무렵, 종종은 오로지 마음의 소리를 좇아, 하루 한끼 반드시 면식 수행을 실천하며 첫 책쓰기 폴더에 그녀의 유일한 위안이자 취미로 남은 갖가지 국수 이야기를 채워 넣고 있었다. 그렇게 안동국시와 평양냉면과 기타 등등 다양한 국수의 전설을 지나 짬뽕의 유래에 대해 구라를 풀고 있던 어느 날, 종종은 귀인의 카톡을 받았다. 국수를 엄청 좋아하는 출판사 사장이 있으니 니 혼자 쓰기에서 나아가 책쓰기에 도전해보라는 신탁이었다.

 

책쓰기의 시작은 기대만발이었으나 귀가 얇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종종에게는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자는 귀인들이 자주 출몰하였고 그때마다 한눈을 판 결과 국수 이야기는 결국 짬뽕 이야기에서 한발도 못 나간 채 불어터지고 있었다. 그때 두 번째 신탁이 도착하였다. 영영 문 닫은 줄 알았던 변경연이 문을 열어 제자를 받아들인다는 소식에 종종은 무릎을 쳤다. 이것이다!

 

그간 타인의 글을 타인의 돈을 받아 쓰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종종은 변화경영연구원의 데카상스인들과 함께 조직에 부적합한 외롭고 자유로운 비주류의 영혼들이 주류가 되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낮술은 자유가 되고 주정이 시가 되고 나의 의지만이 나를 제어하는 그 곳에서 종종은 50권의 책을 읽고 50편의 리뷰와 칼럼을 쓰며 자신을 믿고 던지는 글쓰기의 위력에 행복하게 굴복하였다. ‘황야의 7보다 끈끈한 10인의 동지 데카상스인들과 함께 1년의 수련과 1년의 자기 탐색을 거쳐 종종은 면식진리의 세계를 펼친 국수책과 직장인을 위한 쓰기 강좌 프로그램을 완성하였다.

 

마흔 셋이 되던 해에 경력단절을 고민하는 여성과 멈출 수 없어 괴로운 여성 마흔 세명을 만나기 시작하여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나눈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하였다. 나의 변화와 조직의 변화를 고민하는 이들을 위한 변화 관리에 대한 저서를 출간하였고,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이자 칼럼니스트, 코치로서 강연 프로그램과 워크샵 프로그램을 만들어 배움에 목마른 직장인들과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픈 성인들에게 의미 있는 변화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또한 철저히 수학적인 남편과 한없이 문과적인 아내가 함께 두 아들에게 도움이 될 책을 만들고자 하는 목표로 부부가 함께 공부하고 글 쓰고 책 만들기에 도전하여 두 아들 뿐 아니라 많은 청소년들이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을 만들어냈다. 부부는 이제 아이들과 함께 책 만들기에 도전하여, 두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에 관련된 공부를 함께 하며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가족의 역사도 기록했다.

 

해마다 종종은 새로운 주제로 자신만의 대학원에서 새로운 공부를 진행하고 그에 관해 자신의 생각과 전문가들과 주고받은 의견을 정리하여 책으로 남겼다. 보고 듣고 탐구할 세계는 넓었고 배움은 끝이 없어서, 더 많은 사람들과 더 재미있게 배우고 놀 궁리를 하며 종종은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뜻 맞는 동지들과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도하였다. 각 분야의 고수들이 한 가지 목표로 만나 뜻을 이루고 배움과 성과를 이끌어내는 멋진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나면, 다들 한 뼘씩 자라난 자신에 뿌듯해졌다.      

 

제가 하고 싶은 일,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며 즐기는 아들들, 그리고 귀엽고 덩치 좋은 강아지들과 함께, 부부는 이제 공부하며 산책할 수 있는 마당과 전망 좋은 서재와 별 좋은 밤에 올라갈 납작한 지붕이 있는 2층집을 지어 꽃밭과 텃밭도 일구며 지냈다. 1년에 한번은, 집을 떠나 먼 이국의 땅에서 그 곳의 풍광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음식을 들며 그간 꺼내지 못한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 낯선 이국의 경험을 자양분 삼아 원하던 SF판타지스릴러액션 소설을 출간해 꽤 많은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또한 호러코미디와 감동의 로맨스를 담은 성장소설도 출간하여 후일 감독이 된 아들의 손으로 영화화 하였다.

 

배움이 놀이가 되고 놀이가 다시 다른 이에게 베푸는 나눔과 배움으로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삶. 그런 삶을 그녀는 원해서 노력했고 누렸고 다시 나누었다. 끝나지 않는 배움과 즐거움의 삶.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던가? 그렇지, 즐거움이 없다면 의미도 없을지니.

 

마침내 그 날이 와서, 신은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즐겼니?’

그럼요. 즐기는 법을 배우고 나니 삶이 곧 기쁨이었지요.’

종종, 나이스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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