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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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1일
서울로 가는 기차 안, 내내 멀미에 시달렸다.
옆 자리의 남편은 다정이 지나쳐 나의 집중을 방해했고, 안 그래도 생각하기 힘든 나의 신화를 적다 말고 결국은 욕지기와 두통에 몸을 맡겼다. 미루고 미뤄도 도망갈 길은 없다. 이런, 장례식도 그러더니 신화까지. 나를 들여다 보는 일, 나의 욕구를 직면하는 일은 끔찍하게 괴롭다. 고문 중에 상 고문. 나는 진짜 원하는 것을 왜 들여다 볼 수 없을까. 그걸 인정하는 일은 왜 이리 괴로울까. 그녀 때문일까? 기억도 나지 않는 그녀 때문일까? 만나지 못한 그녀 때문일까? 살아있기는 할까? 나는 그녀를 만날 기회를 발로 걷어차고 가끔 후회하기를 지난 십여 년간 반복하였다. 모르겠다. 이것도 역시나 모르겠다. 나는 그녀를 만나고 싶기는 한가?
대연각 빌딩은 불사조인 듯 재 속에서 더욱 새끈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보다. 엘리베이터가 독특하게도 엘리베이터 외부에서만 조작이 가능한, 전 직장의 영국 본사 랑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최신형이었다. 정말 멋지게 멍청한 방식이라 생각했던 그 최첨단 바보 엘리베이터를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다니. 이것도 또 무슨 우연인가.
나는 회의를 좋아한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치열하게 주고 받으며 자신을 다듬고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내게 늘 즐거운 유희이고 에너지 충전 타임이다.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 아쉬운 부분은 그런 치열한 회의에 참여할 기회가 드물다는 거다. 성인이 뭔가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교육 방식이 회의라 했던 모 컨설턴트의 말에 동의한다. 열일곱 명의 유난히 자유로운 영혼들이 벌이는 생각의 축제가 못 견디게 기대된다.
가볍게 수업하기 편한 복장으로 온 동기와 선배들 앞에 나는 뻘쭘해진다. 신화에 맞게 분장하라는 말에 고민 고민하다 내가 가진 옷 중 가장 그리스식 ‘토가’에 가까운 원피스를 차려 입고 온 터였다. 그런 샬랄라한 원피스를 입다 보니 운동화를 신을 수도 없어서, 정장 구두까지 신고 왔다. 나는 이 검은 쉬폰 원피스를 밤과 어둠과 모든 짐승들의 여신 헤카테의 복장이라 우길 참이었으나 기회를 놓쳤다. 수업이 시작되고 나니 동기들의 신화 내용을 따라잡고 질문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 작은 용량의 뇌는 너무 바빴다.
구달님은 역시나 신선 같은 당신의 신화를 들려주어서 나는 또 즐거워졌다. 멋진 양반 같으니라구! 한편 가족을 동원하는 노마드의 욕심은 내 남편과 아버지를 생각나게 했다. 좋은 걸 나누고 싶은 구달님의 욕심은 사랑스러우면서도 가족에겐 힘들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멋있으셈~
참치는 왠지 모르게 우리 엄마를 생각나게 했다. 아버지만 아는 우리 엄마가 나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끔 안됐다. 나는 참치의 마음이 우리 엄마와 같을까 생각해보았다. 지금의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파되길 바라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 또한.
희동과 피울의 욕심은 나와 닮은 데가 있었다. 급 동질감이 생겨버렸다. 언젠가 희동과 지대로 상담을 한 번 해야겠다. 내 남편의 심리상태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데 그의 고백이 큰 도움이 되었다. 피울은 또한 나의 스토리를 닮은 꼴로 이해하기에 놀랐다. 근데 사실은 내심 알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글에서 냄새가 났다. 나랑 비슷한 뭔지 모를 그것을 숨기고 있는 비밀스런 맘이 슬쩍슬쩍 다가왔더랬다. 그 와중에 나는 콩두에게 사실은 너를 좋아한다고 커밍아웃해버렸다. 쩝… 역시 나는 숨기기를 잘 못한다. 피울도 콩두가 좋댄다. 그럼 그렇지.
해언은 나도 읽을 때마다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뭉클해지는 바우키스와 필레몬의 신화를 골랐다. 아름답지만 노년의 신화. 그녀의 속에는 이제 평화로운 최후를 누리고 싶은 노친네와 두근 두근 스무살 꽃처녀가 공존하는 건가.
앨리스는 안티코네를 살리겠다고 했다. 나도 기다릴 줄 아는 그녀, 결국은 살아남아 무엇이든 의미 있는 일을 해야지 다짐하는 그녀가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녀는 안티고네의 약해빠진 약혼남보다 훨씬 든든한 남편도 곁에 있지 않은가.
녕이는 지금 많이 힘들다. 나는 그녀가 왜 힘든지 알겠다. 힘들어도 되고, 울어도 되고, 뭘 해도 좋으니 이 시기를 그녀가 잘 버텨내고 자신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 부모님의 기대, 남편의 기대, 주변의 기대, 이런 거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 일단 나부터 살리고 보는 뻔뻔함과 당당함을 갖게 되기를.
그리고 현연. 나는 현연에 대한 공격이 좀 답답했다. 그것도 애정과 걱정에서 나온 반응이지만. 현연은 자꾸 내 안의 숨은 처녀신 아르테미스를 끄집어 낸다. 나는 그녀가 지금 아테네보다 아르테미스를 닮았다 싶었다. 그녀의 글은 있는 그대로 아주 멋진데. 그대로 쭈욱 밀고 나가시오, 아르테미스의 결연함과 아테네의 지혜와 비너스의 경쾌함과 헤라의 당당함을 아우르는 그날까지.
찰나는 역시 단순함의 힘을 안다. 나는 그녀가 1년의 휴식 끝에 어떤 선택을 하여 어떤 진화를 하게 될 지 궁금하다. 내게 없는 쿨함을 가진 그녀가 하는 선택은 어떠할까. 언젠가 그녀와 멈추지 못하는 여자들에 대한 깊고 넓은 인터뷰를 해보고 싶다.
콩두와 미스터리는 내가 쓰면서도 의식하지 못했던 상아 처녀의 의미를 끄집어내서 일으켜 세웠다. 피그말리온이면서 상아처녀인 나를 낯설게 바라보았다. 내 은밀한 밀실에 꼭꼭 감춰둔 상아 처녀의 의미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현장에서 그만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런… 이 쪽집개들…. 아무래도 나는 이 두 명의 시빌레를 가까이 두어야만 하겠다. 결국 여섯조각 이야기마저, 나의 욕구를 인정할 수 없어 도망다니는 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시작이 어찌 됐든 가족의 이야기로 끝을 맺어야만 하는 강박이 진정 건강한 것인가 되물어 봐야 했다.
10시간이 넘는 마라톤 수업이 끝나고 나니 진정한 수업이 2차에서 이루어질 것이란 예감에 안타까웠다. 아, 나는 언제나 맘 놓고 데카당스의 데카당트한 만남에 풍덩 함 빠져보려나. 기다리자. 앨리스의 안티고네처럼, 시간을 나의 편으로 만들리라.
올해 안에 그녀를 만날 것인지, 제대로 물으리라. 상아처녀를 만든 당신이 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확인하리라.
네 이년, 상아 처녀, 이리 나오지 못할까!
- If you gaze into the abyss, the abyss will gaze back into you. 당신이 심연을 들여다 보면, 심연도 당신을 본다(니체).
- 어렸을 때 생각한 어른의 나와 어른이 되버린 현실의 나와의 차이에 슬퍼하며 그것을 돌이킬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베갯잇을 적시며 울게 된다(알랭 드 보통)
40대의 어른이 되었을 때 마음의 심연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 보는 것은 더 두려운 일이 됩니다. 그 심연의 어둠속에서 울고 있는 어린 자기 자신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손을 내밀어 그것을 끄집어 내어 다시 40대 이후를 살아갈 힘의 원천으로 만드는 것은 정말 용기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앗! 종종언니 옷 보면서 딱 너무 이쁘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쉬 여신 스톼일이었군요!
옷이 날개라기엔..종종님 워낙 외모가 되니깐 그냥 전체적으로 이쁘다, 역시 홍보우먼의 센스란..이런 생각만 했었어요 ^^*
지금 힘든 것은 당연하다. 그저 버티는 것,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라는 말씀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몰라요~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왜 이렇게 힘들까? 하고 자꾸 힘듬의 이유를 찾으면서 자기 연민에 폭 빠져있었는데.. 힘을 내어 버틸 수 있을 때 까지 버텨보려고요.
지금 쓰러지면 너무 슬플 것 같으니까요 ^^ 대신 조금 더 현명하게...번아웃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죠...
멈춤을 모르는 여자들 화이튕 ^^!
ps: 저랑도 은근히 닮으신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해서 담에 더 많은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그냥 자꾸 공통점을 찾고싶은 저의 몸부림일까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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