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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8일 17시 34분 등록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삼국유사

고운기 글, 양진 사진, 현암사

2014. 5. 18 정수일


1. 저자에 대하여


#1 일연(1206~1289)


스님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과 무신정권의 엄혹한 세월을 온몸으로 겪으며 관통했다. 만년에 국사가 곧바로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로 은거하여 삼국유사를 완성하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고인들의 열정과 희생 덕분에 그 복락은 온전히 후인들이 대대손손 누린다. 

스님은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김견명, 어머니가 자신에게 환히 해가 비추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해서 붙이 이름이다. 14세에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에서 출가하였고 이때 이름은 회연이었다. 22세에 승과에 합격하였으며 전란의 혼란한 가운데서도 올곧은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가 당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44세가 되어서였다. 경상도 남해의 정림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바야흐로 불교계의 지도자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55세에 남해에서 <중편조동오위>를 저술하였다. 78세에 국사가 되었지만 이듬해 군위 인각사로 은퇴하여 주석한지 5년 만인 1289년 84세의 일기로 입적하였다. 삼국유사 전문가이 이 책의 저자 고운기는 스님에 대하여 그 생애의 화려한 경력 때문에 높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무신 정권기와 몽고 전란기를 헤쳐가면서 스님이 보여준 삶의 궤적 때문이라고 갈파하였다. 변방 작은 나라의 힘없는 설움에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민족의 자존을 염두에 두고 삼국유사를 펴내게 된 것은 온전히 스님의 공헌이다. 불교국가 고려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던 승려 일연, 그의 옹골찬 기개가 느껴진다.


#2 고운기


"내 학문은 이 책에서 나와 이 책으로 또한 이룰 것이다."(余之學問 出於是書 而成於亦是書)저자 고운기가 1980년대 초 산 영인본 <삼국유사> 맨 앞장에 직접 적어 넣은 글귀다. 자타가 공인하는 삼국유사 최고의 전문가로 1961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한양대와 연세대에서 국문학을 공부했다. 중고교 시절 필사본 시집을 직접 만들 만큼 문재를 가졌던 그가 문단의 말석이 명함을 들이민 것은 대학 3학년 말 신춘문예에 당선되어서다. 지금은 작고하신 최철 교수의 권유로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한문공부 하러 다니던 민족문화추진회의에서 <삼국유사>를 만났고, 시 창작 교수직까지 버리면서 일본 게이오 대학에 방문연구원으로 가서 한일 고시가 비교 연구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삼국유사>에 매달려 20여년 세월을 보내고 있다. <나는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등 3권의 시집을 낸 중견시인이지만 여전히 고전시가 연구에 매달려 있다. 현재 한양대학교 문화콘테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3 양진


“칠백 쪽을 넘나드는 책의 맨 끄트머리에 있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 책에 깊은 감명을 받은 사람이거나, 나를 개인적으로 아는 누군가일 게다. 그도 저도 아니면 책 뒤의 ISBN 코드까지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흔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일 것이고 어쨌거나 그간의 내력을 조금 풀어놔야겠다.”

이상은 이 책에서 사진을 담아낸 양진의 변이다. 책의 끄트머리에 곤궁하게 버팅기고 있는 이 글을 찾아내어 읽는 순간 나는 그와 공감하였다. 그의 사진은 훌륭하다. 글을 쓴 선배 고운기와 함께 삼국유사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꼬질꼬질한 두 남자의 이미지가 비로소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이 여정을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이들과 다르지 않은 경험을 수없이 겪어왔기 대문이다. 이른 새벽과 한밤에 떠난 수많은 날들이 뭉텅이 필름처럼 촤르르 펼쳐진다. 그의 고단한 수고 덕분에 우리는 훌륭한 사진을 감상할 수 있고 그는 이것으로 충분히 행복했을 것이다. 나는 아마추어를 좋아한다. 프로라는 이름 하에 밥벌이에 목메지 않아도 좋은 자유로운 영혼을 펼칠 수 있다. 아마와 프로의 차이는 단지 밥벌이의 차이일 뿐 그의 사진은 프로사진가에 비해 뒤쳐지지 않는다. 오히려 경제성을 고려하지 않은 순수함이 담보되어 더욱 사진의 질을 높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사진을 보면 인문학적 지식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인문학적 지식과 안목이 없이는 이런 사진들을 담아내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표지 안쪽을 장식하고 있는 눈 내린 경주의 모습은 그의 성실을 대변한다. 경주에서 눈 내린 풍광을 담아내기란 성실과 천운의 합작품이어야 가능하다. 더구나 수도권에 연고를 두고 있는 사진가의 형편이라면 이런 조합을 풀어내기란 더 어렵다. 성실 말고는 답이 없는 일이다. 그는 IMF의 태풍을 온몸으로 맞은 고달픈 생활인이다. 종일토록 컴퓨터 앞에서 꼬물거리며 밥을 벌어야 하지만 그는 늘 떠나고 또 떠나는 꿈을 꾼다. 그의 삶과 사진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그가 매우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진이라는 공감대로 인하여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사람에 대하여 장설을 풀어줄 수 있겠는가! 글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진의 곤궁함을 안타까워하는 모씨가 사진가 양진에게서 깊은 동질감을 얻어 여기 몇 자 글로써 그의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바이다.


그의 말대로 “사진 찍기는 참 재미있다.”




2.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머리말. 다만 한 가지 나는 삼국유사를 방금 따낸 과일이나 방금 캐낸 체소에다 비유해 본 적이 있다. 삼국사기가 사대주의라는 방부제를 친 통조림이라고 하나면 말이다. 그런데 요리를 하기에는 방부제 친 통조림보다 싱싱한 과일과 야채가 더 좋은 재료 아닌가? 그러므로 모름지기 삼국유사는 시대마다 좋은 요리사를 만나 좋은 요리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재료인지 모른다.


12. 누구나 흔하게 생각하는 것이기에 자못 중요하게 쳐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 등재, 그것도 첫머리에 잡은 일이 그렇다.


18. 단군 왕검은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불렀다.

-> 이 땅에 세워진 처음 나라 이름이 ‘조선’이라고 한다. 이 이름은 단군조선, 위만조선, 이씨조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북한의 공식 이름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대명사로 이어져 오고 있는 이름이다.


20.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 단군신화는 창세신화가 아니라 건국신화


29. 중국에서 직접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위만조선을 그 다음 조에 이어 놓은 일연의 생각은 여기서 조금씩 드러난다.

-> 주체적 역사를 서술하려는 일연의 의도였던 것일까?


36. 이런 여러 나라들이 어떻게 이합집산 하여 세 개의 나라 곧 삼국시대로 접어드는가? 일연은 거기까지 넉넉히 마음을 썼고 그것을 남방계와 북방계의 두 흐름으로 정리한다.


43. 그러나 일연도 수정을 하면서 한 가지는 놓쳤다. 유화가 하는 말 가운데 “여러 동생들과 나와 노닐 때에 한 남자가 자신은 하늘님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한 데서, 하늘님의 아들은 그냥 ‘하늘님’이라 했어야 했다.


43. 난생신화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


44. 왕은 주몽에게 말 기르는 일을 시켰다. 주몽은 그 가운데 좋은 말을 알아보고는 먹이를 줄여 비쩍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길러 살지게 하였다. 왕은 살진 말을 타고  마른 것은 주몽에게 주었다. 


52. 백제의 지배층이 우세한 세력을 형성한 끝에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는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음에 설명하겠거니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는 그 선조들의 경험을 그대로 살려 다시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었다. 나는 그것이 고구려에서 시작한 북방계 이동의 끝으로 보인다. 


56.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곧 오리지널의 출발을 의미할 것이다.


72. 탈해는 누구일까? 용성국은 어디일까? 박씨에 의해 대가 이어지는 초기 신라 왕실에서 갑자기 거기서 벗어나 탈해를 왕으로 세워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관한 이야기의 이면에서 우리는 아직 안정되지 못한 신라 왕실의 고민과 한 인간이 가진 본연의 욕망의 그림자를 읽게 된다. 온갖 신격화로 치장된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거둬내면 더욱 그렇다.



78. 달리 생각하면 이만큼 인간 냄새가 나는 이야기도 없다.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로 자신의 신성성을 포장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 인간 대 인간의 투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정치적인 모습이 나온다. 신화가 설화로 돌아서는 지점이다.

-> 숯과 숫돌로 남의 짐을 빼앗은 탈해의 설화.


92.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

->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이야기만큼이나 좋아하는 이야기다. 연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정령이었을까!


101 정령의 의인화야말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사람이 사는 세상의 사람으로 바뀐 이 같은 이야기 구조는 삼국유사 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 해와 달의 정령을 사람으로 설정한 데서 아름다움은 극치를 달린다.


107. 신라를 괴롭혔던 왜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일 가능성이 있다.


110. 그 죽음은 신라와 일본의 오랜 갈등 속에 빚어진 가장 비극적이며 상징적인 사건이다.


120 설화문학에서 말하는 밤에 찾아오는 손님이 소재가 되는 야래자 설화가 있다. 그 밤손님은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남녀 관계에서 남자 쪽을 가리킨다. 남자는 당대의 영웅이거나 기이한 인물이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를 밤에만 남몰래 찾아들어야 하는 운명이다.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을 받아들인 여자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야래자 곧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하는데 서 일차 역할이 끝난다.

-> 진지왕과 도화녀 그리고 이들의 아들 비형랑의 이야기는 야래자 설화의 백미다. 


137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162 이에 쥐 한 마리를 상자 속에 숨겨 두고 이것이 어떤 물건이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이는 틀림없이 쥐이려니와 그 숨쉬는 것이 여덟이라 하자, 이를 가지고 헛소리라 하여 참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 사람은 죽은 다음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곧 참형에 처하고 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 일곱 마리를 배고 있었다. 그래서 앞서 한 말이 맞았음을 알았다. 그 날 밤에 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추남이 신라 서현공 부인의 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164. 김유신은 호국신이 지켜 주는 존재이고, 삼국 통일의 선봉에 설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음을 암시하자는 것일까?

-> 고구려 첩자 백석의 설화를 통해서 보여준 호국신을 통해 김유신의 신성을 일깨우고자 한 것인가!


173. 사실 김유신의 나라에 대한 충성은 누구에게도 견줄 바 아니다. 힘으로 안 되면 지략으로, 지략으로 모자라면 신술을 써서라도 주어진 일을 해내고야 마는 그였다. 그만큼 삼국 통일의 역사에서 김유신의 활약은 눈부시다.

-> 나는 늘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부상한 것에 의문과 안타까움이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언제나 안타까운 부분이다.


189.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치료되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홍수 때는 맑아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지는 것이었다.

-> 시대를 불문하고 국가적 재앙은 전쟁과 천재지변이었다. 왕은 국가적 재앙을 막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요량이다.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194. 신령스런 피리를 일컬어서는 만만파파식적이라 했다. 벼슬이 높아져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으면 한 글자씩 덧붙이는 신라의 관습이 있다. 


196. 권력의 끝. 권불십년이라, 거기서 예외가 될 사람 또한 없다. 최소한 그 권력을 좋아하고, 함께 쫓아다닌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사냥개 신세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197 김유신은 문무왕 13년(673년)에 죽었다. 삼국 통일의 위업이 달성된 5년 뒤의 일이다. 그로부터 100년 뒤에 이 사건이 벌어졌다. 죽어서도 100년 동안 김유신의 자손들은 그 영화를 누렸으되 언제나 가시방석이었다.


204. 전쟁이 끝나 시대가 안정되자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다른 데로 흘러갔다. 그 가운데 가장 걸리는 존재가 전쟁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전쟁 때에 절대적이면서 평화가 돌아오면 껄끄럽기만 하다. 토사구팽의 칼은 바로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김유신 또한 전쟁 영웅이다. 다만 그의 집안이 1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황실과 맺은 사돈 관계 덕분이었다.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영웅들에게 갈 길은 정해져 있었다.


212. 가 버린 봄을 그리워하자니 모든 것이 울어야 할 슬픔. 아름답게 빛나시던 그 모습 갈수록 스러져 가도다. 눈 돌릴 사이 만나보기 어찌 이루랴 님 그리는 마임으 가는 길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224. 

- 꽃을 꺾어 바칠 사람 누구 없어요?

- 사람의 발로는 다가갈 수 없는 곳입니다요.

이때 한 노인이 나타나 그 꽃을 꺽어 바치면서 노래까지 지어 바쳤다.

-> 수로부인의 미모가 도대체 어떠했길래 유부녀 한명의 요청에 지나가는 노친네까지 꽃을 꺾어 바치면서 노래까지 지어 바쳤겠는가!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그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일 거슬러 내어놓지 않는다면 그 물을 쳐서 끌어내 구워서 먹을 테다.


241 제망매가.

생사의 갈림길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 말도 못 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아,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247. 구물거리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삶이 보잘 것 없는 백성이로되, 다스리는 자의 따사로움을 알고 믿고 따른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또한 백성이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이것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261.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란 차라리 새로운 나라를 열기보다 더 힘든 일이다. 우리는 그 같은 예를 고려조에 와서 공민왕, 조선조에 와서 영.정조 같은 이에게서 다시 확인한다. 신라의 원성왕은 그들과 비슷한 처지의 왕이었다.


262. "좋은 일 세 가지를 보았나이다." ... "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사람들보다 겸손하게 사는 이가 첫째요, 큰 부자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는 이가 둘째요, 본디 귀하고 힘이 있으면서 그 위세를 쓰지 않는 이가 셋째이옵니다."


267.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조차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 그것은 곧 자신이 고민을 오직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271. 백성이야 어차피 어떤 나라가 서도 백성, 제 정권 지키자고 혈안이 된 자들에게 당하는 백성의 희생을 우리는 진정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 둥근 달은 가득 찬 것입니다. 찼으니 이지러지지요. 새로 돋는 달이라는 것은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았으니 점점 차오르지요.


271. 원성왕 이후 신라가 망하기까지 150년이다. 그 사이에 19명의 왕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 이것은 나라가 아니다. 소꿉장난 같은 차라리 코메디다. 아!!! 이 때 당한 백성들의 고단함의 크기가 도대체 어떠했을까 싶어 애잔하다. 


273. 신무대왕이 왕자였을 때. 궁파에게 말했다.

- 내겐 함께 하늘을 같이하지 못할 원수가 있소. 그대가 나를 위해 제거해 주고 내가 왕위에 오르면 그대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겠소.

-> 왕과 궁파의 계약은 성사되었다. 궁파는 약속대로 일을 처리해 주었다.


- 궁파는 미미한 사람입니다. 왕께서 그 딸을 왕비에 앉게 하시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왕은 그 말에 따랐다.

-> 당연히 궁파는 열 받았다. 왕은 성장하는 궁파를 견제해야 했을 것이고 배반과 배반, 속임과 속임은 결국 어지러운 죽음을 낳을 뿐이다. 한 때 궁파의 수하였던 염장은 궁파를 배신하여 그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다. 결국 해상왕 장보고는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실낱같은 회생의 불씨는 이로써 사그라지고 말았다.


278. 서울의 밝은 달밤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인가 본디 내 것이었던 것을 빼앗아 감을 어찌하리.

-> 처용의 노래는 처연하다. 객지에 올라와서 이 무슨 개망신인가. 아름다운 마누라는 귀신이랑 바람이 나고 처용은 그것을 보면서 노래를 불러야 했다. 젠장 할! 서울 살이 참 엿 같구나. 일연이 용왕의 아들을 서울까지 데려와 사랑과 전쟁의 주인공을 삼은 이유가 사뭇 궁금하다. 시대 말의 암울함과 타락이 만연해 있음을 꼬집은 것을 아니었을런지...


288.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도적까지 들끓자. 백성들이 이를 걱정하여 다라니로 은밀한 문장을 지어 길거리에 내붙였다.

-> 고금을 막론하고 혹독한 세상에 항거하는 백성들의 행태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294. 귀국한 다음 거타지는 꽃가지를 꺼내 여자로 변하게 하고 함께 살았다.

-> 오만가지 풍상을 겪은 다음 이야기는 해피 엔딩이다. 스스로 꽃가지를 꺾어 여자로 만들어 살았단다. 고난과 역경은 언제나 희망을 배태하고 있다는 것은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이야기 구조다. 


296.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종용을 받았고 왕비는 강제로 당했으며 첩들은 그 아랫것들에게 수난을 입었다.

-> 전쟁에서 진 나라의 백성은 치욕을 벗을 길이 없다. 경주 남산자락 배리에 가면 경애왕릉이 있다. 나는 늘 이 능 앞에서 견훤에게 치욕을 입은 그의 아내를 생각한다. 


300. 예전에 견훤이란 자가 왔을 때에는 마치 이리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왕공이 이르자 마치 부모를 만나 뵌 것 같구나.

-> 저물어 가는 나라의 비통함이야 말할 것이 있겠으랴만 새로운 국가의 탄생, 승자의 역사, 미래의 준비...어찌되었건 새로운 세상이 즈음했음은 때가 알려 줄 뿐이다.


301. 나라가 서고 망하기는 반드시 하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마땅히 충신과 뜻있는 선비들과 더불어 민심을 거두고 힘을 다한 다음이라야 그만둘 것이오. 어찌 천 년 사직을 그다지 가벼이 남에게 준단 말입니까?

-> 비운의 왕자 마의태자. 그는 슬픈 운명을 간직한 채 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풀을 뜯어먹으며 생을 마친 것은 나라와 백성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으리라. 아버지 경순왕의 새 나라의 부마가 되어 40여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이렇듯 삶은 세상은 역설과 모순으로 이루어졌다. 저물어 가는 시대를 살았던 것은 마의태자나 일연이나 마찬가지였다. 


330. 선화공주님은 남모르게 짝지어 놓고 서동 서방을 밤에 알을 품고 간다.

->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완벽한 환타지 로멘스다. 서동은 탄생과 선화공주를 얻는 과정, 그리고 임금이 되는 일련의 일대기가 전형적인 영웅이야기의 구조를 답습하고 있다. 발랄하고 맹랑한 서동의 이야기를 좀 더 보자. 서동은 기이한 출생, 특이한 능력을 소유하였으나 그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비범함은 고난을 기회로 만든다. 선화공주를 취하고 귀한 인연으로 금을 얻었으며 때마침 나타난 조력자 지명법사의 도움으로 처갓집의 신뢰를 얻는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결국 왕이 되는 것이다.


353. 그러나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 담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능했다.

-> 삼국 가운데 가장 약했던 신라가 패업을 이룬 것이나 견훤에 비해 보잘 것 없이 약했던 왕건이 최후의 승자가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인가? 항우와 유방의 예와 다르지 않다.


368. 어렵사리 찍은 만어산 사진을 한 장만 보여주기 아쉬워서 하나 더 싣는다. 11월에 내리는 찬비를 맞고 돌아다니려니 이빨 부딪히는 소리가 골짜기를 울릴 정도였는데. 만어산 너덜에 널린 바위 하나하나를 살펴보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이것도 그 가운데 하나로 여린 나무 한 그루가 고래만한 바위의 배를 갈라놓았다. 


376. 이 때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같이 해서, 그 교화가 엄하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위엄이 있고, 정치가 엄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게 되었다.


396. 미추왕이 세상을 뜨자 나라 안의 사람들이 아도를 해치려고 하였다. 스님은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손수 무덤을 만들고 문을 닫고 자결했다. 이 때문에 불교도 없어졌다.

->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는 처음부터 순교를 부르고 있었다. 


405. 뭐라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시리다.


422. 서천축국의 아육왕이 황철 오만 칠천근과 황금 삼만분을 모아 석가 삼존상을 만들려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로 띄워 보내노라. 인연이 있는 나라, 거기 가서 장륙존상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한다.

-> 인도의 아육왕도 이루지 못한 일은 신라는 단번에 해냈다. 황룡사와 장륙존상은 이렇게 신라의 랜드마크가 된 것이다.


436. 나는 들었네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번지는 불길 속에서 한 쪽은 무간지옥을 보여 주더라고.


478. 날 저문 산길에/ 가는 곳마다 사방이 막혀 있네/ 소나무 대나무 숲은 그늘이 짙어 가고/ 골짜기 시냇물 소리는 낯설기만 한데/ 자고 가기를 바라는 것은 길을 잃어서만 아니요/ 스님께 계율을 일러 주려 함이네/ 내 청을 들어만 주실 뿐/ 어떤 사람인가는 묻지 마오.

-> 부득과 박박에게 다가온 여인이 읊조린 시다. 여기엔 은유와 암시가 담겨져 있다. 박박은 박하게 여인을 물리쳤으나 부득은 여인의 딱한 사정을 가엾게 여겨 처소로 들였다. 급기야 한밤에 산기까지 있어 시중을 들어야 할 판이다. 이 모든 것들은 계를 어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득은 성실이 여인을 도왔다. 그 여인은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


508.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새 시들고/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겠네.

-> 수고로운 인생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연이나 나나 고승이나 범인이나 매한가지. 그 또한 일순간 꿈이라고 한다.


530.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사람. (......)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ㄱ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는 그것을 감당했고

->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려나 / 내가 하늘 괴는 기둥을 자를 터인데


557. 2001년 3월 28일 새벽 2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눈이 올 것을 예감하고 지난밤에 부석사로 달려왔고 나의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뜻하지 않은 봄눈 덕분에 더욱 아름다운 부석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 나는 이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반찬으로 빛난다.


572. 차디찬 눈은 얼음과 엉기어 붙었고/ 찬바람은 땅을 가르도록 매섭다/ 넓은 바다 얼어서 단을 이루고/ 강은 낭떠러지를 깎아만 간다. 

-> 혜초가 왕오천축국전에 실어놓은 노래다. 그들을 머나먼 땅 천축국으로 떠났다.


613. 이에 혜통은 속에서 울컥했으나 말은 하지 못하고, 뜨락 앞에 서서 머리에 화로를 이었다. 잠깐 사이에 이마가 터지는 소리가 벼락처럼 났다. 삼장이 듣고 와서 이를 보더니 화로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찢어진 곳을 만지며 주문을 외웠다. 상처가 이전처럼 아물었는데, 왕자 무늬 같은 자국이 남았다.

-> 배움을 얻는 노력이 이와 같았다. 


621. 승려 정수는 황룡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겨울철 어느 날 눈이 많이 왔다. 저물 무렵 삼랑사에서 돌아오다 천암사를 자나는데 문밖에 한 여가 거지가 아이를 낳고 언 채 누워서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스님이 보고 불쌍히 여겨 끌어안고 오랫동안 있었더니 숨을 쉬었다. 이에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벌거벗은 채 제 절로 달려갔다.


644. 산 속에서 세 오빠 악한 짓 견딜 수 없어/ 꽃다운 입에선 대신 죽겠노라 한마디/ 의리의 소중함 몇 가지로 들어 죽음도 가벼이/ 수풀 아래서 몸을 내놓았네, 떨어지는 꽃처럼.


660. 옛날 계빈에 큰스님이 한 분 있었다. 아란야법을 하며 일왕사에 이르렀다. 절에서는 큰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문지기가 그의 옷차라림이 초췌한 것을 보고 문을 닫으며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처럼 여러 차례 초라한 옷차림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자 다른 방법을 썼다. 좋은 옷을 빌려 입고 온 것이다. 문지기가 보더니 막지 않고 들여보냈다. 자리를 차지한 다음,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이 나오면 먼저 옷에게 주었다. 여러 사람이 물었다.

- 어째 그러시오?

- 내가 여러 차례 왔으나 그 때마다 들어오지 못했소, 이제 옷 때문에 이 자리를 차지했으니, 여러 가지 음식이 나오면 그것을 옷에게 주어야 마땅하지요.


671. 피은은 피세은거 즉 세상을 떠나 숨어 사는 것이라는 말.


689. 삼국유사의 마지막 편에 효선이 들어간 것은 일연의 개인사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비문에 나타난 대로 여든을 바라보던 일연은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국사의 자리를 버리고 고향 근처로 내려와 어머니를 모신다. 


741. 가치 있는 것과 나아갈 향방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실천한 일연의 생애가 막을 내리고 이어 조선의 건국이 다가오지만 그것은 견고한 중국 중심 보수주이로이 회귀였다. 결과론적이지만 조선 사회의 그런 성격이 결코 긍정적인 쪽으로 손을 들기 어렵게 한다.




3. 내가 저자라면


‘삼국유사를 왜 읽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고운기는 이 책의 특별보급판 서문에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 첫째, 이 책에서 한민족이 출발하기 때문이다. 단군을 우리 조상으로 받아들이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멀리 고구려가 차지했던 영토까지 바로 우리민족의 경계이며,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이 한민족이라 말한 첫 번째 책을 나는 <삼국유사>라고 생각한다. 실로 한민족의 정체는 여기서 잡혀있다. 둘째, 잘나고 못나고 할 것 없이 골고루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면면을 두루두루 보여주기 때문이다. 역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저 이름 없는 민중이라고 우리는 크게 외치기만 하는데, 일연 노스님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가만히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700년 전에 쓰인 이 책이 오늘날 그대로 읽혀지기엔 어쩔 수 없는 벽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삼국유사의 해설을 시도했다. 


<三國遺事>를 이야기 할 때 <三國史記>를 빼 놓을 수 없다. 한쪽은 정사이며 다른 한쪽은 야사라거나 한쪽은 사대적이며 또 다른 한쪽은 주체적이라거나 하며 경중을 논하고는 하는데 어느 한쪽에 편중된 관심은 어쨌든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삼국유사는 중국의 주인이 변방의 야만족으로 알았던 몽고족으로 바뀌고 내부적으로는 무인들에게 나라의 전권이 휘둘리는 시기를 지나며 탄생했다. 격동의 시대에 중국 중심의 세계관은 변화를 겪었으며 우리 역사를 자주적 관점에서 인식하려던 노력은 지식인들 사이에 두루 퍼졌다. 이승휴의 <제왕운기>, 이규보의 동명왕편 등과 함께 일연의 삼국유사 또한 이러한 조류에 다름 아니었다.



[책의 구성]


삼국유사는 전체가 왕력, 기이,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 등 9개 편으로 구성되었다. 왕력은 연대기 이며, 기이는 준 역사서다. 흥법은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하의 편에서 탑과 불상에 대한 이야기, 여러 스님들의 이야기, 밀교에 대한 이야기,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숨어사는 것의 맛에 대한 이야기, 효도와 선행에 관한 이야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이 책이 평가되는 중요한 것은 처음을 이 땅의 첫 나라 단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눈감아 버린 역사를 책의 첫 머리에 드러낸 것은 이 책의 온전한 힘이다. 이 이야기를 실었다는 것만으로도 삼국유사는 특별한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고 저자는 이야기 하고 있다.


고운기의 삼국유사와 삼국유사 원전은 사기 열전과 함께 다시 읽어야 할 책의 앞자리에 두겠다.



[보완점]


이 책을 읽기 전 또는 함께 삼국유사 원전을 읽으면 좋겠다. 먼저 원전에서 해당되는 내용을 읽고 이 책에서 대응되는 단락을 찾아 읽는 것이다. 이렇게 읽어 낼 수 있다면 삼국유사를 온전하게 읽는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해석이 차지하는 범위가 커 원전을 음미하는데 방해가 된다. 해석 또한 의미적 접근보다는 사료간의 차이와 시기의 차이 따위에 치중한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여기에 시간의 경과 따위가 무예 중요할 것인가?


내가 다시 삼국유사를 쓴다면 이 책에서와 같이 아름다운 사진으로 빛을 낼 것이다.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에서 강운구 선생은 사진을 실었다. 이 책에서는 양진이 또 그 일을 해 냈다. 두 책을 비교해 보면 사진이 말해주는 언어가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다만, 사진과 함께 간략하게 언급해 놓은 글은 이 책이 훌륭하다.


내가 다시 삼국유사를 쓴다면 ‘변화’와 ‘혁신’을 키워드로 삼국유사 원전에서 이야기만 가려 뽑아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나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과 같은 책을 오마주로 새롭게 엮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은유와 암시를 추려내서 변화와 혁신이란 키워드로 엮어 내려면 깊숙이 천착해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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