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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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기 김정은
조선조 문종은 한 마을의 향기를 잊을 수 없었다.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던 파주의 작은 마을, 그리하여 그는 ‘글이 피어 오르는 곳’이란 뜻의 ‘문발’이란 지명을 하사했다. 바로 파주 출판단지가 자리잡고 있는 파주시 문발동 지명의 유래이다. 이후 550여 년간 문발이라 불리며 ‘글이 피어 오르는 곳’의 명맥은 이어지고 있다.
몇 해 전, 나는 파주시의 프로젝트에 참여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책 향기와 글 읽는 소리가 가득한 파주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이런 마을에서 살고 싶다 막연히 생각만 하다가, 어느 날 아무런 연고 없이 이사까지 오게 되었다. 글이 피어 오르는 곳에서 책 향기를 맡고,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사는 맛은 정말이지 꿀맛이다.
서울에서 한참을 살다가, 그저 책 향기에 도취되어 파주로 이사온 나는, 친구 한 명 없는 이 곳 생활에 지쳐, 이 지역 여성들과 어떻게든 엮이고 싶었다. ‘꼬마 책갈피’는 60년대 생 여성으로 이루어진 책 읽는 동아리다. 10년 전통의 동아리 막내 기수로서, 나는 선배 언니들의 행보를 관찰하는 것으로, 이 지역 여성들과 관계 맺기를 시작했다.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또는 차녀로, 남자 형제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온 그녀들!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했던 그녀들은 못 배운 것이 한이었다. 그런 그녀들을 더욱 슬프게 한 것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녀들 부모 세대의 양육 방식을 그녀들 자녀에게 무의식 중에 고대로 적용하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들이 모여 동아리를 만들고, 같이 공부하고, 서로 의지하며, 삶을 바꾸어 나갔던 것이다. 그 변화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너무나 경이로웠던 나는, 그 동아리 언저리에서 그녀들과 계속 함께하고 싶었지만, 그 동아리는 나를 마지막 기수로 하여 문을 닫았다.
60년대 생, 언니들이 스.고.자.가 되어 동아리 활동을 할 수 없을 만큼 바빠진 이유였다. 그녀들은 나이 쉰이 다 되어 도서관 관장으로, 독서치료사로,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로 독립했다. 인생의 최전성기를 맞이한 그녀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하곤 했다.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과 대면해야 한다, 문제의 근원과 직면하여 그것과 화해해야 한다고. ‘대접받지 못한’ 세대의 여성들로서, 그녀들의 문제는 바로 원가정에 있었다. 그녀들이 자신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원가정과 화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받아들이고, 현재의 가정을 잘 꾸릴 수 있게 되었고, 더불어 자아실현까지 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더 이상 그녀들과 행보를 같이 할 수 없게 되자,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무언가에 목말라하는 70년대 생 여성 몇 명과 ‘그. 여행(그림책 여행가)’이라는 동아리를 결성했다. 올해 ‘그. 여행’은 3기를 받았다. 매년 새로운 기수를 받음으로써 동아리의 진화를 도모하고 있다. 60년대 생 언니들과 달리, 그. 여행의 멤버들은 공부는 할 만큼 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한 세대들이었다. IMF이후 여파, 또는 결혼과 육아로 집안의 붙박이 가구가 되어버린 여성들! 그녀들도 자신과 대면하기 위해 원가정과의 화해가 절실해 보였다. 현재의 가정을 잘 꾸리기 위해서 원가정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동아리 활동을 함께 하면서, 가정 폭력에 노출되었던 어린 시절을 통해 가정폭력 전문 상담사로, 힘든 시절 미술심리 치료를 받아 힘을 얻었던 것을 기억하여 미술심리 치료사로, 성폭력 경험을 바탕으로 성폭력 예방 강사로 ‘변신’해가는 그녀들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나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내 부모님의 사랑과 인정은 듬뿍 받고 자랐다. 나는 원가정과의 화해는 면제받은 셈이었다. 가난했지만 금슬 좋았던 나의 부모님, 아버지의 인정과 엄마의 사랑 그리고 언제나 나를 챙겨주었던 언니가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유연함을 지향하는 내 노력 때문인지, 나는 내가 꾸린 가정에서 엄마와 아내의 역할은 비교적 잘 해내고 있다. 하지만 나도 해결해야만 하는 엄청난 과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나 자신과 대면하기! 내 문제에 직면하기는 오랜 세월 나와 함께 한 내 문제이자, 내가 해결하기에 너무나 어려운 과제였다.
나는 선천적으로 시력에 문제가 있다. 시세포가 정상인에 비해 많이 부족한 것이다. 이 짧은 문장을 받아들이는 데 거의 사십 년이 걸렸다. 문제가 외부에 있다면, 그것이 내 부모나 자녀, 배우자라 하더라도, 그들을 대하기에 내가 죽을 만큼 힘들다면, 안 보고 살면 그만일 것이다. 일단 나부터 살고 볼일이다. 하지만 문제가 나에게 있다면, 그것도 평생 해결이 안 될 문제라면,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어릴 땐 나한테 문제가 있는지 몰랐다. 커갈수록 불편함을 느꼈지만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것 같아 일부러 괜찮은 척 했다. 성인이 된 직후에는, 연애를 못하면 어쩌나 하는 얄팍한 계산으로 모른 척 했고, 한창 취업을 준비했을 시기에는 나쁜 시력이 약점이 되어 혹시라도 취업을 못하게 될까 봐 아닌 척 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같은 이유로 불이익을 받을까 봐 알리지 않았다. 결혼할 땐 시댁에서 문제 삼을까 봐 숨겼고, 엄마가 된 후엔 나로 인해 내 아이가 놀림 받게 될까 봐 나 스스로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사십 년이 지난 것이다.
어린 시절 가정 폭력의 경험으로 ‘상담 교사’가 된 그녀와, 성폭력의 상처를 이기고 ‘성폭력 운동가’가 된 또 다른 그녀! 그녀들은 여느 상담 교사나 성폭력 운동가와는 차원적으로 달라 보였다. 그저 배운 것으로 직업을 얻은 경우와 공감의 깊이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배우기만 하고 겪지 않았다면 그렇게 얻은 직업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앵무새의 지껄임 그 이상을 넘어서기 어렵다. 그녀들과 함께 하면서 나도 점점 커밍아웃하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 사랑 받지 못했고, 인정받지 못했던 그녀들이 스스로를 받아들여 ‘아름답게 변신’하는 과정을 지켜 보면서, 나도 그녀들처럼 ‘변신’하고 싶어진 것이다. 꿈은 곧 삶으로부터 오며, 미래는 곧 과거로부터 온다.
이씨 부인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하늘에 떠 있는 해가 갑자기 지붕을 뚫고 들어와, 부인의 몸을 환하게 비추는 것이었다. 부인은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똑 같은 꿈을 4일 동안이나 반복해서 꿨다. 아무래도 보통 꿈이 아니라고 여긴 부인은 남편에게 이야기 했다.
“태양이 부인의 몸을 비췄다면 필시 큰 인물이 태어날 징조요. 장차 우리 아이가 태어난다면 태양을 보고 태어났다 하여 견명이라고 지읍시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의 태몽이다. 태양 태몽을 꾸고 태어난 견명은 가난한 집안에서 아버지를 일찍 잃고 홀어머니 아래 힘들게 자랐다. 허나, 깨친 마음과 높은 심미안, 뛰어난 식견으로 견명은 일연으로 새로 태어난다. 13세기, 무신정권, 송나라의 멸망과 원나라의 성립으로 인한 시대적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연은 자신과 대면하고, 시대의 문제에 직면하여 <삼국유사>를 집필했다. 혼란의 시기, 보다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역사관을 확립하기 위해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단군신화를 실은 것이다.
엄마는 언니를 안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꿈에 그 당시 살았던 아파트의 베란다에 엄마와 언니는 앉아 있다. 갑자기 하늘에서 거대한 봉황 한 마리가 날아와 엄마와 언니 사이로 파고들었다. 잿빛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봉황이었다.
나의 태몽이야기이다. 엄마는 잿빛 눈동자로 인해 나의 선천적인 시각 장애를 직감했지만, 크고 아름다운 봉황에 초점을 맞춰 내가 귀하게 잘 자랄 것이란 기대를 한 순간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셨다. 근래 커밍아웃을 한 이후,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뿌듯하기도 하고 반면, 시는 데 큰 불편 없었는데 그냥 예전처럼 살걸 괜한 짓 했나 싶을 때도 있다. 나에게 혼란의 시기가 온 것이다. 앞으로 나의 내부에서는 여러 차례 ‘무신 정변’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또 외부에서 여러 차례 오랑캐가 침입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일연 못지 않게 멋진 태몽을 꾸고 태어난 나는, 일연이 그의 역작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단군신화를 실어서 힘을 얻었듯이, 나의 멋진 태몽으로 힘을 얻을 수 밖에 없다.
“새 중의 왕은 봉황새’라는 말처럼 봉황은 모든 새의 우두머리로 여겨지며, 한국인의 의식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민속 상상 동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새가 한 번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고 하여 봉황은 곧 ‘천자(天子)를 상징하게 되었다. 천자의 궁문에 봉황을 장식하여 ‘봉궐(鳳闕)’, ‘봉문(鳳門)’이라 하였고, 천자의 수레를 장식하여 ‘봉거(鳳車)’나 ‘봉련(鳳輦)’, ‘봉여(鳳輿)’라 했다. 좋은 벗을 ‘봉려(鳳侶)’, 아름다운 누각을 ‘봉대(鳳臺)’,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봉음(鳳音)’이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예로부터 봉황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잘 드러난다.” (출처: 네이버케스트)
커밍아웃 이후 내게 찾아온 혼란의 시기에 나는 잿빛 눈동자의 봉황 태몽을 떠올린다. 그저 잿빛 눈동자를 가진 여인으로 살아갈 것 인가. 아니면 ‘봉황’이 되어 훨훨 날 것 인가.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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