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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9일 02시 11분 등록

1. 저자에 관하여

 일연은 스님인가? 그는 민속학자인가? 그는 역사가인가? 모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느 한 가지만 취하자니 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 일연이 어떤 사람인지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참 어렵다.

 

그는 1206년 원효대사와 동향인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3세기는 여러모로 격변의 시기였다. 위로 중국에서는 이미 1271년에 징기스칸의 대원제국이 한족의 송나라를 무너뜨렸고, 국내에서는 무신의 난이 일어났다. 거기에 고려 왕조 중에서도 13세기 중반은 몽고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진다. 고려인들의 중국중심 세계관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내 부서져 내린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로 대표되는 사대주의는 새로운 변화에 빛이 바랬다. 중국에 기대어서만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던 고려는 드디어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또한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이런 배경이 삼국유사의 집필 배경이었다.

 

또한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시국에 그 동안 국가를 지켜왔던 불교 또한 타락하고 권력과 검게 유착되었다. 누구도 믿고 의지할 수 없던 백성들은 밀교에 배경을 둔 불교, 혹은 밀교 자체를 더 찾게 된다. 1999년을 돌이켜보자. 찬란한 새천년과 대조적으로 어두웠던 세기말의 풍경 속에서 우리는 유난히 사이비 종교와 관련된 집단 자살 기사를 자주 마주쳤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대는 그 동안의 안정적인 카테고리 안에서 잘 설명되지 않는다. 옛 시대는 갔으나 아직 새로운 시대가 오지는 않은 그 사이. 과도기, 변태기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시간. 그 곳에서 일연은 붓이 되어 그 뿌리를 찾아 나선다.

 

글은 글쓴이의 모든 것을 드러낸 보인다. 삼국유사를 제대로 읽는 코드를 찾아내려면 일연의 일생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일연의 속세에서의 이름은 경주 김씨에 이름은 견명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는 홀어머니의 손에 양육되었는데,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전라도 광주의 무량사에서 공부를 배웠다. 공부하러 갔던 절과 인연이 되어 5년 뒤에 설악산의 진전사로 가서 대웅에 의하여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진전사는 신라 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아홉 선문의 하나였던 가지산문에 속해 있었으니, 그는 여기서 산문이 결정되었고, 왕명이 아니면 고칠 수 없다는 산문의 적이었기에 평생을 이 파에 속한 승려로 살다 갔다.

 

 승려로서 처음 이름은 회연이었다가 말년에 일연으로 바꾼다. 처음 부모에게서 받은 이름 견명과 부교의 이름 회연은 밝음과 어둠이 대조된다. 그러다가 만년에는 이 둘 곧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에 한 일자를 넣었다. 밝음이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은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깊은 진리가 일연스님의 이름변천사에 들어있다.

 

그는 스물두 살에 승과를 합격하고, 마흔 한 살에 선사, 쉰 네살에 대선사에 차근차근 올랐다. 인생의 격랑이 한 개인의 삶의 궤적을 저렇게 그림 그리듯이 평화롭게 가꿔주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이렇게 나이 들어서까지 세속의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성실함을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마흔네 살때 남해에 생긴 정림사의 주지로 부임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그의 스님으로서의 커리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되었다. 1277년에는 왕명으로 운문사 주지에 취임했고, 1283년에는 국존으로 추대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토지를 받아 경상도 군위에 인각사를 지었다. 전국을 누빈 궤적이다. 저작활동도 활발히 하여 조정사원, 선문염송사원 각각 30권씩을 지었으니, 스님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지위와 업적을 모두 남겼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을 쓰는 것이 꼭 백수가 된 다음에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반증으로 보여 나는 응원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2. 가슴을 무찔러 들어오는 구절


3-4. 문자에 대한 자신감, 이는 저술을 감발시키는 촉진제다. 첫번째 저술은 역사서로 정해졌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새로운 나라가 들어선 다음, 그 앞 시대를 정리한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에서 보편화되어 있었다. 한문이라는 문자 수단의 이입은 그 문화를 송두리째 가지고 들어왔고, 특히 중국에서 만들어져 하나의 전범을 이루고 있었던 사마천의 [사기]는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름마저 거기에 기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고려 인종 23(1145)의 일이다.

 

4. 새로운 분위기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로 대표되는 고려 전기 지식인들의 세계 인식은 사대로 요약된다. 본격적으로 중국의 문화에 압도당하기 시작한 사회에서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념의 틀은 우리에게서 다시 만들어져야 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다는 말인가.

>> 정체성과 개성에 대한 고민은 기존의 사회 틀이 잘 변화하지 않는 과거 왕조시대에는 잘 일어나지 않았다. 고미숙 선생님의 박지원을 소개할 때 존재에 대한 고민이 없던 왕조시대에 우울증을 앓았던 천재라고 말했다. 시대가 변화한다는 것은 사람도 자기자신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을 반영한다. 


4. 세계관의 변화는 곧 역사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모든 것을 중국 중심으로 해석했던 [삼국사기]의 역사 기술은 이쯤 와서 힘을 잃게 된다.

>> 결국 믿을 것은 나밖에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나의 현실과 놀랄만큼 닮아있다. 평생직장을 보장해주던 회사가 개인을 내쳤다. 돈이 그냥 나오지 않는다. 나는 일해야 한다. 그것도 나의 존재를 놓고 일과 밀당을 해야한다. 

 

5. 이 같은 역사 인식의 변화를 놓고 볼 때 일연이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단군조선을 실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0. [삼국유사] 1290년경 일연에 의해 쓰여졌고, 곧이어 그의 제자들에 의해 출판된 것으로 보인다.

 

12. 큰 나라야 제 일을 제 방식으로 쓰면 된다. 예나 이제나 작은 나라는 거기에 그다지 자유가 없다. 늘 큰 나라가 만든 규범을 좇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 우리나라는 특히 더 그렇다. 주변에 워낙 강대국밖에 없다. 만만한 놈은 다 나가떨어지고 한국 하나만 남은 셈이다. 

 

23. 일연은 그 바이러스의 정체를 발견했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해 따라 만들고 쓴 것이다. 이를 그대로 들여와 내용만 우리 것으로 채웠을 때, 내용은 형식에 가려 실상을 보여 주지 못했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우리의 실종이었다.

 

24-25. 왜 민족의 주체성이었던가? 어떻게 민족이라는 각성이 가능했던가?

잘 알려져 있듯이 몽고는 중국의 변방에서 일어나 중국 본토를 삼키고, 거기에 나라를 세운 최초의 민족이다. 중국이 자주 변방의 침입을 받자 그 근심을 덜려고 만리장성도 쌓았지만, 전체를 송두리째 내놓은 적은 없었다. 북위가 안방을 차지한 기간이 200여 년이라고 해도, 한족의 중국은 남쪽에서 근근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천자의 나라며 그러기에 모든 변방은 중국에 복속해야 한다는 생각은 중국인에게 아니 우리 나라 같은 옆 민족에게까지 강고하기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전체가 무너졌다. 아니 하늘이 무너진 것이다.

중국의 자존심을 하루아침에 땅바닥에 떨어뜨린 몽고의 원 건국, 남의 불행한 일에 잘됐다고 박수칠 일은 아니지만, 한편 변방의 나라들로서는 숨통이 트일 일도 되었다.

이 때 고려는 무신 정권 기간이었다. 무신란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강력한 통치 체계를 구축한 최충헌은 이후 4대에 걸친 최씨 정권을 이어가게 하는데, 몽고의 원나라 건국은 그들에게 하나의 복음이었을 것이다. 비록 새로운 질서를 세우자는 대의명분이 정권을 뒤집게 했지만, 그것만으로 정통성이 보장되지 않는 법이다. 더욱이 사대 외교로 송나라와의 관계가 밀접했던 문인 정권의 담당자들에 비해 그들은 이 방면에 무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송나라가 망하고 오랑캐족에 의해 원나라가 섰다. 천자의 나라를 넘보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눈치는 보지 않아도 되었고, 무인 정권이 내세웠던새로운 질서라는 대의명분에 상당한 힘이 실렸다.

13세기 이 나라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당대의 문장가인 이규보가 [동명왕편]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쓴 것은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고구려인의 기개를 한껏 살리면서, 고주몽의 생애를 장황히 읊은 이규보의 [동명왕편] 은 기실 민족의 발견이었다. 또 다른 문장가 이승휴는 시로 쓰는 이 나라의 역사 [제왕운기]에서 단군 신화부터 시작하였다. 이승휴는 일연과 동시대 사람일뿐만 아니라, 함께 시를 지으며 즐긴 가까운 벗이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줄을 잇는 13세기였다.

이 같은 분위기가 일연으로 하여금 우리 역사의 더 먼 곳에 관심을 갖게 했고, 거기서 단군이 발견되었음은 당연하다. 단군의 발견과 그 기록은 일연이 지닌 선각적 혜란만으로 이루어질 설질의 일은 아니었다.

 

33. 그러나 고조선에 관한 중국 쪽의 사료는, 아직 찾지 못한 [위서]의 단군 관련 기록과, 고조선에 관해서는 직접 언급하지도 않은 [배구전]이 전부일 만큼 옹색하다.

 

48.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인데,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주몽을 보더니 범상치 않다 여겨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 부여의 왕이 돌아가시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다음은 온조였다. 이들은 나중에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 마려 등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 때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57. 전한의 지절 원년은 임자년(기원전 69)인데, 3월 그믐에 여섯 부족의 시조들이 각각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의 강변 위에서 모여 논의하였다. “우리들은 위로 임금이 없어, 다스리려 하나 백성을 이끌지 못합니다. 백성들은 모두 재멋대로이도 하고 싶은 대로 하지요. 어찌 덕을 갖춘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두지 않겠습니까?”

그런 다음 높은 곳에 올라 남쪽으로 양산을 바라보니, 그 아래 나정 곁에 이상스런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고, 흰 말 한마리가 무릎 끓어 절을 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찾아가 살펴보니 자주색 알이 하나 있었고, 말은 사람들을 보고 하늘을 향해 길게 울었다. 알을 쪼개자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놀랍고도 이상하게 여겨, 동천에서 몸을 씻어 주었다. 몸은 광채를 띠고, 날짐승 물짐승이 춤을 추었으며,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게 빛났다. 이 때문에 혁거세라 이름을 지었다. 왕위에 올라서는 거슬한이라 하였다.

 

58. 이 때, 사람들이 다투어 경하 드리고는, “이제 천자가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을 갖춘 여자를 찾아 임금의 배필로 삼아야겠네라고 말하였다.

이 날 사량리의 알영정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로 어린 계집아이를 낳았다. 몸매와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닭의 부리 같았다. 월성의 북천으로 데려가 씻겼더니, 그 부리가 발락 곧 떨어져 나갔다. 이 때문에 그 냇물의 이름을 발천이라 하였다.

남산의 서쪽 기슭에 궁실을 짓고 이 두 성스런 아이를 받들어 모셨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생겼는데 알이 표주박과 같아, 마을 사람들이 표주박을 박이라고 한 데 따라, 성을 박이라 하였다. 계집아이는 태어난 곳 우물의 이름으로 이름을 붙였다.

두 성인의 나이 열세 살에 이르렀다. 오봉 원년은 갑자년(기원전 57)인데, 사내아이를 세워 왕으로 삼고 이어 계집아이는 왕후로 삼았다.

 

62. 일연은 혁거세왕의 최후를, “나라를 다스린지 61년 만에 하늘로 올라가고, 7일 뒤 몸만 남아 땅으로 흩어 떨어졌다. 왕후 또한 죽자 사람들이 합하여 장례를 치르려 하였다. 그런데 큰 뱀이 나타나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몸뚱이를 다섯으로 나누어 각각 묻고 오릉으로 만들고, 또한 사릉이라 이름지었다. 담엄사의 북쪽 능이 이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90. 히미코가 다스리는 나라는 야마일국이다. 그는 여왕이었다. 비록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였으나 가장 강성했다 하고, 238년에는 위나라에까지 사신을 보낼 정도였다.

 

96. 그런데 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은 남다른 일 하나를 했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승려라 해서 불교적인 데에만 머울지 않았다. 이미 앞서 단군 신화의 경우와, 앞으로 소개할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관심은 광범하게 퍼져 있다. 오늘날의 민속학자가 따로 없다.

 

232. 동해 바다를 끼고 올라가는 국도는 7호선이라고 번호가 매겨져 있다. 번호는 홀수선이 남북을, 짝수선이 동서를 잇는 국도에 붙여진다. 여기서 1,3,5,7호선이 남북을 잇는 가장 중요한 국도인데, 1호선이 목포에서 서울을 지나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서쪽선이고, 7호선은 부산을 출발해 원산까지 이어지는 동쪽선이다. 3 5는 그 중간에 놓인다. 7호선은 1,3,5호선이 모두 태백산맥의 서쪽에 놓인 데 비해, 오직 관동 지방의 유일한 길이라는 점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233. 어디인들 수로부인에게 이 여행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예쁜 꽃과 함께 노래를 선물 받았는가 하면, 용궁에 들어가 진기한 경험을 하고 나왔다. 수로부인처럼 아름답고 천연덕스럽게 살아가는, 거기서 세상의 지혜를 터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동해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246. 경덕왕이 처음에 신하들이 데려온위엄 있게 잘 차려 입은 스님을 물리는 데에는 어떤 기준이 있었을 것이다. 왕의 뇌리에는 월명사의 이미지가 선명히 남아 있었다.

 

262.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사람들보다 겸손하게 사는 이가 첫째요, 큰 부자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는 이가 둘째요, 본디 귀하고 힘이 있으면서 그 위세를 쓰지 않는 이가 셋째이옵니다.”

 

267.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서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

 

288. 그러나 돌이켜 보며 아쉬워한들 무엇하랴.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있는 인재마저 죽이는 상황이 반복될 때, 거기서 우리는 한 나라의 멸망을 명확하게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다. -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가장 중대한 것들은 연습게임이 없다.

 

303-304. 김부식의 사론으로 넘어가 보자. 조선조에 들어 김부식은 사대주의에서도 민족석 주체성에서도 모두 공격을 받았다. 완벽한 중국 중심에 빠져든 한편의 유학자들은 그를 얼치기 사대주의자 정도로 보았고, 실학의 바탕에서 우리 고대사를 새롭게 보려 했던 다른 한편의 유학자들은 민족의 주체성을 모르는 지식인 정도로 보았다. 살아있다면 김부식의 처지는 참으로 난처하겠다. 특히 이런 사론에서 밝힌 자신의 견해가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니, 차라리 쓰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 왕조를 마감하는 김부식의 사론은 그가 감당하고자 했던 시대적 사명과 자신의 논리가 잘 들어가 있는 문장이다. 그에게는 그만의 고민이 있었다. 대체적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관점에서 내리는 평가란 또 하나의 주관적 주장이 될 뿐이다.

그런 면에서 일연은 오히려 올바른 김부식 팬이었다. 좋은 부분을 인용하면 그만이라는 태도가 엿보이고, 좋지 않은 부분을 놓고 비판한다거나 굳이 자기 관점에서 해석하지도 않았다. 김부식의 이 사론에서도 일연은 필요한 곳에 적절히 옮겨다 쓰고 있다.

 

327.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누구도 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

 

332. 서동은 비범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지만 귀하고 중요한 것의 가치를 아직 모른다. 공주를 꾀어내는 꾀도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동물적 감각에서 나왔을 것이다. 후천적인 교육의 중요성은 여기서 발휘된다. 공주는 가치를 발견하는 눈을 키워주었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의 결합은 완전한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다.

 

469. 일연에게서 평생의 화두를 하나 들자면 어머니다. 세속의 인연에 너무 연연해한다고 탓하지 말라. 일연의 어머니는 열아홉 살 아직 꽃 피지 않을 나이에 아들 하나를 낳고, 아흔 살 넘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혼자 산 사람이다. 그 어머니에 대한 어떤 향념이 [삼국유사]에 더러더러 묻어 잠겨 있음을 찾아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앞서 장춘과 그의 어머니 보개를 통해서도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진 아들을 찾고자, 애끊는 마음을 부처님 앞에 가 발고 비는 어머니는, 다름 아닌 일연과 그 어머니의 대역들이다. 이런 관계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복하고자 한다.

그것은 인간 세계에선의 일만이 아니다. 미물이라는 짐승에게서도, 일연은 끊지 못할 어떤 인연과 정을 발견한다.

 

470. 굴정역의 동지 들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문득 한 사람이 매를 날려 꿩을 쫓게 하는 것을 보았다. 꿩은 금악향으로 날아 지나가더니 자취가 없었다. 매의 방울 소리를 듣고 찾아갔다. 굴정현의 관청 북쪽에 있는 우물가에 이르자, 매가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안에 있는데 온통 핏빛이었다.

꿩은 두 날개를 펼쳐 두 마리 새끼를 감싸고 있었다. 매도 불쌍히 여기는지 잡지 않는 모양이었다. 충원공이 이를 보고 측은히 여기면서 느낀 바 있어 이 땅을 살펴보라 하니, 절을 지을 만한 곳이라고 하였다.

 

?. 부득은 애처로운 마음 가눌 길 없어 등불을 가만히 피워 놓았다. 여자는 아이를 낳더니 목욕물을 부탁했다. 노힐부득은 두려운 마음이 엇갈렸으나, 어여삐 여기는 마음은 더할 나위 없었다. 항아리 욕조를 마련해 여자를 거기 앉히고, 새로 물을 끓여 씻겼다. 그러자 욕조 안의 물이 향기를 가득 피우면서, 금빛의 즙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노힐이 크게 놀라자 여자가 말했다. “우리 스님도 여기서 씻으시지요.”

노힐은 굳이 권하자 이에 따랐다. 문득 정신이 상쾌하고 맑아지면서, 피부가 금빛이 되었다. 그 곁을 보았더니 어느새 연대가 하나 나타났다. 여자는 거기 앉으라고 권하며 말했다. “나는 본디 관음보살이오. 스님이 대보리를 이루도록 와서 도운 것이라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482. 관음진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게다가 친구를 면박 주러 왔던 박박은 사실을 다 알게 되자 오히려 부탁하는 처지가 되었다. 부득은 남은 물에 목욕하라고 일러 주었다. 여기까지는 같다. 그런데 몸을 씻어내려 가던 박박이 물이 조금 모자라 엄지발가락 부분을 칠하지 못했다. 두 분 불상이 선 다음 마을 사람들이 와서 보니, 부득은 온 몸이 완벽한데 박박은 엄지발가락만 금빛이 아닌 채였다. 여기가 다른 부분이다.

 

484. 시로 완성되는 [삼국유사]

푸른 빛 떨어지는 바위 앞, 문 두드리는 소리

날 저문데 누가 구름 속 빗장 문을 당기는가

남쪽 암자 가까운데 그리로 갈 것이지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달달박박을 두고 쓴 시다. 여자를 암자에 들여놓지 않겠다는 것은 일편 계를 지키는 출가자의 바른 행동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속에는 이기적인 심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기심은 독선만 키울 뿐이요 자비심이란 찾을 수 없게 한다.

 

486. 편찬자로서 모아 놓은 시들, 곧 향가, 한시, 민요 등은 모두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486. [삼국유사]야말로 이러한 시로 인해 완성되는 책이 아닌가.

 

488. ‘담을 쌓다라고 말하면 흔히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인다. 뭔가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고립의 의미를 넘어, 제 주장에만 골똘한 고집쟁이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그러나 절 주변에 쌓은 담은 고집쟁이의 그것이 아니다. 속된 것으로부터 지키는 어떤 성스러움의 의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낙산사는 그렇게 성스러움의 정화를 느낄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담이 둘러쳐 있지 않은들, 그래서 세속의 시끄러움이 여지없이 몰아쳐 온들 결코 변함 없을 터이지만, 고요하고 아늑한 경내의 정원을 둘러보자면 더욱 그윽해지는 이야기들이다.

 

497.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거기서 우연히 스치는 수많은 만남이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다만 끝내 그 정체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와 어느 순간 깨닫는 경우로 갈라질 뿐.

나는 이것을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 명명하였다.

 

499. 이 여자는 표주박에 해가 담긴 물을 마시고 와서 잉태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범일이다. 처녀가 남자와 관계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이야기는 [신약성서]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508. 일연이 임종을 한, 지금 경상북도 군위군의 인각사 앞에 일연 시비를 세운 것은 지난 1985, 거기 이 시가 새겨졌다.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새 시들고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겠네.

 

530. 세상에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것과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534. 어느 성인이건 그 민중의 자리로부터 위대한 생애를 펼치지 않았던가?

 

534. 원효를 가질 때 그 어머니는 꿈에 유성이 품속으로 파고드는 모습을 보았단다. 밤나무 아래서 그가 태어난 해를 승전에서는 진평왕 39(617)으로 적고 있다. 부처님이 열반한 곳에 서 있었다는 나무가 사라수였는데, 원효는 부처님이 세상의 인연을 다한 곳에서 세상의 인연을 시작한 셈이다.

 

540. 늘그막에는 항사사로 옮겨 머물렀다. 그 때 원효가 여러 경소를 찬술하면서 매양 스님에게 와서 의심나는 곳을 물었다. 간혹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하였는데, 하루는 두 분이 시냇물을 따라가다 물고기를 잡아 구워 먹고는 돌 위에 똥을 누었다. 스님이 그것을 가리키며 희롱하듯이, “자네는 똥인데 나는 물고기 그대로야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오어사라 이름지었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원효의 이야기라기에는 외람되다고 하기도 한다.

 

551. “지난밤 잘 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

 

564. 의상은 이에 열 군데 사찰에 가르침을 전했다.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의 비마라사, 가야의 해인사, 비슬산의 옥천사. 금정의 범어사, 지리산의 화엄사 등이 그 곳이다.

 

568. 부석사 의상의 비문에서는장안 2년 임인년(702)에 돌아가시니 나이가 78세였다고 적고 있다. 일연이 그를 찬한 시에서무성한 꽃들 고국에 심었으니 / 종남산과 태백산 똑같은 봄이로다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무성한 꽃들이란 화엄의 세계를 말한다. 지상사가 있는 종남산이나 부석사가 있는 태백산이나, 의상의 전교로 인해 같은 화엄의 세계가 펼쳐 있음을 노래한 것이다.

 

604.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 하다가 깊이 탄식하여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통이라 했다.

 

617. 산 복숭아 시냇가 살구가 울타리에 비쳤는데

오솔길에 봄이 깊자 양쪽 언덕에 꽃이 피었네

그대가 우연히 수달을 잡았던 인연으로

나쁜 용은 서울 밖으로 멀리 쫓게 되었네

 

624. 귀진 아간의 집에서 일하는 여종 중에 욱면이라고 있었다. 자기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마당 가운데 선 채 승려들이 하는 대로 염불을 했다. 주인이 제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날마다 곡식 두 섬 씩 주고 하루 저녁에 찧도록 했다. 욱면은 밤 8시쯤 다 찧고 나서 절에 와 염불을 했는데, 하루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당 양쪽에 장대가 서 있었다. 욱면은 새끼줄로 양쪽 손을 뚫어 장대 위에 연결하고, 양쪽을 왔다갔다하며 있는 힘을 다했다. 그 때 천사가 공중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욱면 처자는 법당으로 올라가 염불하라.”

절에 모인 사람들이 이를 듣고 권하니, 욱면은 법당에 올라 순서에 따라 열심히 염불했다. 얼마 있다 하늘의 음악소리가 서쪽에서 울려오더니만, 욱면이 지붕을 뚫고 솟아올라 서쪽으로 향했다. 가다가 동네 밖에 이르러 몸을 버렸는데, 진신으로 변해서 연대에 앉아 밝디 밝은 빛을 뿜었다. 서서히 가는 동안 음악소리는 하늘에서 그치지 않았다.

 

710. 시는 현세의 문제 속에 있으면서, 현세에 안주하지 않는 초월성을 가진다.


 

3. 내가 저저라면

 

 시대가 다르면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전이 좋은 책임을 알고는 있으나, 읽어 정복하기가 쉽지않다. 이런 어려움을 생각하면 학자라는 직업은 시간 앞에 끊어진 건실한 다리를 놓는 작업을 위해서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고, 유실된 다리의 바위를 잘 다듬어 채워놓는 것. 나는 그것이 좋은 학자의 숙제라고 생각한다. 고전은 현대에도 가치 있다. 어느 시대를 살고 있든지 인간으로서 중요한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이라도 인간은 기원전 인류의 시초와 여전히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은 따라잡아야 하는 트렌드라기보다 발견해야 할 자연이다. 본질은 좁은 문에 들어서야만 도달할 수 있는 목적과 경지가 있다.

 

 이 책은 좋은 다리다. 길이 넓고 평평해 누구나 쉽게 시간의 강을 건너 삼국유사의 세계로 갈 수 있다. 삼국유사는 혼탁한 시대 속에서의 민족 정체성을 찾고, 정체성을 이기적 자아의 발현이 아닌 자비로 다른 사람과 함께 자리할 수 있게 이끄는 나침반으로 작용한다. 또한 이 방향성과 메시지를 문학성 높은 시 한 수로 표현해내니 가까이 두고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빠르게 변한 시대의 겉모습에 눈은 흐려지고, 글의 뜻을 깊이 깨우치지 못한 둔한 머리가 미처 닿지 못하자 중요한 메시지들이 자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나로서는 좋은 다리, 좋은 스승이 필요하다. 고전과 스승, 이 두 가지의 어깨동무가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광안대교이자 금문교이자 영종대교다. 우리는 강과 바다를 건너 신비가 남아있는 설화와 신화의 세계로 들어간다.

 

 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먼저 첫 번째는 정체성에 대한 확립이다. 시대가 혼란스러웠던 만큼, 당시 사람들은 중국인과 고려인의 차이가 무엇인지 고민을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만의 특징, 코리아니티가 어떤 특성들을 포함하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고민한다. 종으로 치면 같은 인간이나, 문화로 보면 우리는 다른 어떤 나라와도 같지 않다. 문화적 정체성뿐만 아니라, 개인의 입장에서도 정체성은 필요하다. 우리는 취향과 개성, 기질로 나와 남을 구분하지만, 껍질을 까면 깔수록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몇 년이 지나면 시들해지며, 옳다고 믿었던 것도 어떤 계기를 통해 바뀐다. 무엇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잘 대답할 수 없다. 현대는 특히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기를 종용한다. 우리는 종교의 보호를 받지도 못하고, 태어날 때부터 위치가 정해져 있지도 않다. 눈부시게 발전한 이성은 우리를 모두 평등하게 만들어주었지만, 거기에 존재를 기대기에는 너무 가냘프다. 그에 반해 우리의 존재는 스스로 모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다. 그 때 삼국유사가 말을 건다. 역사적 사건과 이야기를 한 가지 들려주면서 내 속에 있는 것들을 꺼내 보여준다. 십년 전 아직 교복을 입고 다닐 때 있었던 한 사건이 어떻게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들려준다. 나이가 들고 나서도 결정장애가 있던 나의 속내를 풀어낸다. 지금 당면해있는 문제들의 실마리가 사실은 내 안에 있는 지혜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야기는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해있던 것들을 이어주는 실과 같다. 지혜가 확장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조각난 기억들이 연결되면서 나의 정체성, 내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할 숙명과 호기심과 실마리를 얻는다

 

두 번째는 모성이다. 나는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모성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왼쪽 귀가 없는 사미승의 일화에서, 혜통을 인도했던 어미 수달의 일화에서, 모성에서 비롯된 사랑을 깊이 통감한다우리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엄격하고 뻣뻣한 달달박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불쌍함을 보고 도와주고 위로해준 노힐부득이었다. 우리는 그에게서 자비의 본모습을 본다. 그리고 자비는 모성으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사람이 어머니로부터 태어나듯이,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모성이 들어있다. 그리고 가장 연약하고 부드러운 이 심성으로부터 우리는 다른 사람을 공감하고, 어루만지고, 사랑한다. 인생은 혼자 남는 것이긴 해도 혼자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사소하고 약한 따뜻함이 인간을 구원한다.

 

마지막으로 꼽는 것은 책의 형식에서 일화를 소개한 뒤 덧붙이는 시 한 수의 절묘함이다. 시가마무리 정리를 해줄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깊은 여운을 더한다. 저자 고운기 선생의 말처럼 시는 현세의 문제 속에 있으면서, 현세에 안주하지 않는 초월성을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P.710) 시는 고유의 힘이 있다. 맑고 깨끗해 정신을 깨어있게 하는 힘이다. 가슴에 직접 하는 말이다. 사건은 이야기를 통해 살을 얻고, 시를 통해 영혼을 얻는다. 그렇게 한 구절 한 구절이 시를 통해 사람에게 전해진다. 나는 이 형식이 삼국유사의 힘을 한층 더 강력하게 만들어 주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리는 많은 차량과 사람이 강을 안전하게 건네주는 역할을 맡는다. 허투르게 지은 다리는 무너진다. 기본을 지켜만든 건실한 다리만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튼튼한 교량을 건너 신비의 세계에 갔던 나는 마찬가지로 무사히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또한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역사를 통해 나의 뿌리를 만날 수 있었다. 책의 초중반은 조금 시시했다. 모든 사건이 일어날 듯 하다 끝난다든지 주인공의 결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설화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시시한 것이라는 것을 앞뒤로 열심히 설명해주는 글을 읽으며 곧 깨달았다. 또한 불교의 영향으로 짙게 드러난 자비의 이야기는 내가 잊을 수 없는 여러 이야기들을 가슴속에 남겼다. 특히 마음에 드는 장절은 범일 스님과 정취보살이 만나는 이야기이다. (P. 499)

 

[현실과 신이가 하나된 만남]

범일이 아직 중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왼쪽 귀가 잘린 한 사미승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명주의 개국사에서 만난 사미승은 자신 또한 스님과 같은 고향 사람이니, 뒷날 돌아가거든 자신의 집을 찾아달라 한다. 무슨 이유로 어린 나이에 귀까지 잘려 이 먼 곡까지 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소식이 없다.

 

고국으로 돌아온 어느 날 밤, 꿈에 사미승이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지난날 명주 개국사에서스님과 약속하였습니다. 기꺼이 응낙을 하시고도 어찌 이렇게 늦으십니까?” 깜짝 놀란 범일은 서둘러, 익령 근처, 일러 준 곳으로 가서 여자를 만난다. 여자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시냇가에서 금색동자와 함께 논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다시 발길을 옮겨 그 자리를 파보니, 왼쪽 귀가 잘린 석불이 나오는데, 모습은 정취보살의 상이나 그것으로 예전에 만난 사미승이 바로 정취보살임을 알게 된다.

 

여기서 본문의 기술 목적을 넘어 이 기록을 대하고 적는 일연의 또 다른 의중을 헤아려 본다. 이 때 일연은 지난날의 한 스님이 성인을 어떻게 만났는가를 곱씹는데 그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뇌리에 불현듯 고향이 다가오고, 아홉살에 떠난 고향 땅의 산천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드디어 어머니의 얼굴이 환하게 다가오며 사무치는 그리움에 떨었던 것 같다. 이국 땅 먼 하늘 아래서 고국의 승려를 만나 간절한 부탁을 하던, 그리하여 무심한 스님의 꿈속으로까지 찾아오던 한 쪽 귀가 잘린 소년 사미승과 그를 기다리는 어머니는 인생의 모진 인연의 실체이고 숙명이다. 거기에다 소년 일연은 자신과 어머니의 얼굴을 겹쳐보았을 터이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떠나 구도의 길을 걸어간 사람, 일연에게는 귀하나가 없는 사미승의 이야기가 그렇게 가슴 깊이 아로새겨졌다. 한 귀가 잘린 채 먼 이역에서 고국의 스님을 만나 고향에 돌아가거든 자기 어머니를 찾아가 달라고 말하는 소년은 정취보살이기에 앞서 일연 자신인지 모른다. 어머니를 떠나 머나 먼 강원도 산골에 와 있는 소년 일연의 마음이 그랬을 터이니 말이다. ‘, 어머니. 저 먼 나라를 아십니까?’

 

현실 속으로 꿈이 침투하는 과정에는 절실함이 필수이다. 우리의 절실함이란 결국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마음 속의 어느 조각을 건드려야지만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이야기 속에서는 따뜻한 자비의 마음, 일연과 같이 공감하는 마음으로 정취보살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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