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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9일 04시 13분 등록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_구달리뷰#6 (2014.5.19)

일연

고운기 글, 양진 사진

현암사

 

1. 저자에 대하여

 

1) 일연 (1206~1289)

 

일연은 국사에 오른 승려인 동시에 뛰어난 문인이요 시인이다. 일연은 1206 6 11일에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신라시대 대승, 원효의 고향이었던 ‘밤골’ 인근 마을이다. 세속의 성은 김이었고, 이름은 견명(見明)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다가 공부를 위하여 9살 때 전라도 광주의 무량사로 취학하였다. 공부를 위해 갔던 무량사에서 인연이 되어 14살에 강원도 양양에 있는 진전사에서 머리를 깍고 스님이 되었다.

 

승려로서 첫 이름은 회연(晦然)이었다. 1227 22세때 승과에 장원급제한 후 비슬산 보당앞에 머물며 20년 동안 수도에 정진했다. 44세때, 남해의 정림사의 주지로 초빙되어 6년 동안 머물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왕명에 의해 주요한 불사를 주관했다.

 

50 3년간 강화도로 옮긴 왕궁 가까운 곳에서 왕을 모시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 동안 머물러 살지 않고 옮겨 다니는 생활을 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는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모았다. 1277년부터는 충렬왕의 명에 따라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1281년까지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79세 때,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나라에서 수리해 준 인각사로 내려가 그곳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하게 된다. 그는 제자에게 북을 치게 하고 자기는 의자에 앉아 다른 승려와 태연하게 선문답을 하다가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1289 일연은 87세의 나이로 인각사에서 입적했다. 이때 나라에서는 보각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경북 군위군 인각사에는 그의 이름을 기리려고 충렬왕 21년에 새운 사리탑과 비석이 남아 있다.

 

인각사 입구 시비에는 아래와 같은 일연스님의 시가 새겨있다.

“즐겁던 한 시절이 자취 없이 가 버리고 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어라. 한 끼 밥짓는 동안 더 기다려 무엇하리. 인간사 꿈결인줄 내 이제 알았노라.

일연 스님

 

2) 고운기 (1961~)

1961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한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이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등 세 권의 시집을 냈다. 일본 게이오 대학 문학부 방문 연구원으로 한국과 일본의 고시가를 비교 연구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삼국유사는 방금 따낸 과일이나 방금 캐낸 채소다. 시대마다 좋은 요리사를 만나 좋은 요리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재료인지 모른다.

그는 ‘좋은 재료’인 일연의 삼국유사를 맛깔스럽게 요리하여 우리에게 제공하는 이 시대의 요리사다. 일연이 뒷사람인 그에게 피와 살이 되는 책을 넘겨주었듯이 그 역시 현재의 사람들이게 그 만의 읽기 방법을 내놓는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모든 세상 속 이야기 속에서 깨달음의 길을 찾아가라고 한다.

 

고운기는 <삼국사기> 또한 대단히 중요한 역사책이며 <삼국유사>와 가치의 경중을 따질 성질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기능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면서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이 <삼국사기>이며, <삼국사기>에 안 나오는 얘기를 중심으로 썼기 때문에 <삼국유사> <삼국사기>를 보충하거나 극복한 책이라는 것. 그래서 둘이 함께 있어야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고 했다.

 

고운기, 그는 시인이다. 일연도 시인이고, 고운기도 시인이다. 시인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이는 역시 시인인가 보다. 그는 이십 년을 ‘삼국유사’ 연구에 매달렸다.

 

 

2. 내가 저자라면

 

나는 고운기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를 읽으면서 내내 행복했다. 마치 한편의 여행기를 읽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연의 삼국유사를 들고 그 현장을 일일이 답사하며 사진가 후배의 사진과의 찰떡 궁합 속에서 정말 값진 보물을 세상에 내 놓았다.

 

고운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탑이나 절터, 해안가. 왕릉, 장소를 일일이 찾아 다녔다. 삼국유사를 소리 내서 읽어보고 그 장소에 가서는 천여 년 전의 옛 선인들의 음성을 들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그들과 교감하고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으려고 했다

 

후배 양진에게 사진을 찍게 하고, 그 사진과 더불어 답사 현장에서 느꼈던 저자의 생각과 느낌을 고스란히 들려준다. 독자가 사진을 보면서, 이 책을 들고 그 장소로 달려가 그들의 이야기를 느껴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고 있다. 시를 인용하면서도 시인답게 시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 책에는 저자의 숨결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진다. 삼국유사에 대한 저자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으면 20년을 한결같이..  저자가 발품을 팔며 달렸던 수많은 이야기의 현장에서 솔바람을 타고 저자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 같다. 주제가 있는 사진의 힘도 알게 되었다. 글과 사진이 이렇게 잘 어우러져 책을 빛내고 있었다.

 

향가의 발견! 저자가 시인이어서 그랬는지 시편이 많이 수록된 점은 참으로 다행이다. 전해오는 향가 24편 중 삼국유사에는 향가 14편이 수록되어 있다. 향가는 신라에서 성행했던 우리나라 고유의 시가로 그 멋스러움과 리듬, 운율이 책을 읽는 맛을 더해준다.

 

저자는 글과 사진뿐 아니라 편집과 디자인에도 공을 들였다. 잘 만들려고 작정하고 만든 책이며 덩달아 현암사라는 출판사도 좋은 이미지로 와 닿았다.

 

고운기는 삼국유사 전문가다. 700년 전에 쓰인 역사책 한 권으로, 2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한 분야를 통달하고, 책을 쓰니 쉽고, 단순하다.  고운기는 시인이다. 사료를 근간으로 시인의 상상력을 펼친다.

 

일연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현실만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또 다른 세계가 현실 너머에 엄연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배제되었던 비현실적인 사실들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여 ‘세계의 진실’을 새롭게 되살리고자 했다.

 

 ‘삼국사기’에 ‘빠뜨린 것을 수습한다(遺事)’는 의미로 신이(神異)한 이야기를 광범하게 거두고 체계적으로 배치하여 김부식의 사대주의적 편협한 역사 인식에 맞서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삼국사기가 있음에도 ’삼국유사‘를 새롭게 썼던 진정한 이유.

 

삼국유사는 역사책이 아니라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에 대해 자주적 관점에서 쓴 이야기다. 그러므로 야사, 설화, 향가 등의 문학적 자료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 삼국유사는 일연의 자유스러운 사고와 개성 있는 문체로 쓴 역사를 기반으로 한 설화문학이다.

 

<아쉬운 점들>
지나치게 교훈적이고 설법적인 내용들이 많았다.

신라 중심의 기술 방식이다.
불교 중심의 서술이 지나치다.

 

<구성>

일연의 <삼국유사>는 전체가 9개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연대기로서 ‘왕력’, 준 역사서로서 ‘기이’,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한 ‘흥법’ 이하의 여러 편으로 크게 세 덩어리로 나눌 수 있다.

 

고운기의 책은 <삼국유사>의 전반부라 할 수 있는 '기이' 편의 총 20개의 꼭지를 역사적 흐름을 따라 정리한다.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을 같이 놓고 읽어야 하는 이유, 남방계와 북방계의 차이 등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삼국 가운데서도 중심이 되는 신라사와 함께 백제와 가야사도 빠뜨리지 않고 해설한다. 또한 <삼국유사>의 후반부라 할 수 있는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 편은 민초들의 삶의 현장과 연결하여 정리한 20개의 꼭지로 구성하고 있다. 특히, 이 꼭지들은 불교로 역사의 흥망을 비춰보며 일반 백성들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이 밖에 향가를 그 배경 설화와 함께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감동적인 장과 절>

73

탈해가,“무릇 덕 있는 자는 이가 많으니, 마땅히 이를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하고, 떡을 물어 살펴보았다. 노례왕의 이가 많았으므로 먼저 자리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닛금이라 이름을 지었다. 닛금이라 부르는 것이 이 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참고해 보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남해와의 유언 때문이기도 했다. 왕은 아들과 사위를 불러 나이 순으로 왕을 하라고 일렀었다. 나이로 치자면 탈해가 더 위다. 그런데 탈해가 먼저 기이한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탈해는 왕의 자리에 욕심이 없었다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았으리라. 사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결과를 뻔히 알고 하는 듯한 내기처럼 보이지 않는가? '무릇 덕 있는 자는 이가 많다'는 논리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덕 있는 이가 왕위에 오른다는 생각이야 좋겠지만 말이다. 지금 우리가 모르는, 그 때 사람들에게만 통용되는 신체적 조건과 인품의 상관 관계가 있다면 몰라도, 우리는 탈해의 이러한 제안에 왠지 무언가 숨은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왕이 되어서는 안 될 사정?

 

96

일연은 승려다. 승려 생활을 구름이나 강물처럼 머물러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운수행각雲水行脚 이라고 한다. 일연 또한 거기서 예외일 수 없고, 그래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지만, 13세기의 혼란스런 고려 사회가 내 삶을 더욱 모질게 했다. 일연은 그가 머문 지역에 전해 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 불교적인 것 외에 단군 신화와 같이 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닥치는 대로 모았다. 그는 현대에서 말하면 민속학자였다.

 

226.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죽은 누이를 위해 부르는 노래 <제망매가>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고구려에 처음 불교가 전래된 것을,[삼국사기]에서 인용하고 난 다음에 쓴 찬을 보자.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

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노 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멀리 날으네

어느 곳 고깃밴지, 안개 속에 이른 손님

 

신라 불교는 처음부터 순교자를 부르고 있었다.

 

금교에 눈 덮여 아니 녹으니

계림의 봄빛은 아직도 먼데

영리한 봄의 신神 재주도 많아

모례네 집 매화꽃에 먼저 피었네

 

 

3. 마음의 장절 (첨부문서 참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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