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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9일 06시 54분 등록

<사기 열전>

2014.05.19 이동희

 

1. 저자에 대하여

1) 일현 (1206~1289)

 

그는 고려 희종 2년 경산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김견명(金見明), 어머니가 자신에게 환히 해가 비치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13세에 설악산 아래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로 가서 출가했고, 이때 이름은 회연(诲然)이었다. 여기서 회는 달이 없는 그믐을 뜻한다. 어릴 때 이름에는 밝음이 있고 불가에서 얻은 이름에는 어둠이 있다. 그래서 늘그막에 얻은 일연(一然)이라는 이름이 밝음과 어둠이 하나로 조화시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l  1206년 속성 김(). 이름 견명(見明). 자 회연(晦然)·일연(一然). 호 무극(無極)·목암(睦庵). 시호 보각(普覺). 탑호 정조(靜照). 경상북도 경산(慶山) 출생하였다.

l  1214(고종 1) 9세에 전라도 해양(海陽:현 광주)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대웅(大雄) 밑에서 학문을 닦다가 1219년 승려가 되었다.

l  1227년 승과(僧科)에 급제, 1237삼중대사(三重大師), 1246년 선사(禪師), 1259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1261(원종 2) 왕명으로 선월사(禪月寺) 주지가 되어 목우(牧牛)의 법을 이었다.
1268
년 운해사(
雲海寺)에서 대덕(大德) 100여 명을 모아 대장경 낙성회(大藏經落成會)를 조직, 그 맹주가 되었다.

l  1277(충렬왕 3) 운문사(雲門寺) 주지가 되어 왕에게 법을 강론, 12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의 호를 받았다.

l  1284년 경상북도 군위(軍威)인각사(麟角寺)를 중건하고 궁궐에서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열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79세 때,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나라에서 수리해 준 인각사로 다시 내려가 그곳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하게 된다.

l  1289년 그는 제자에게 북을 치게 하고 자기는 의자에 앉아 다른 승려와 태연하게 선문답을 하다가 손으로 금강인을 맺고 84세에 입적했다. 이때 나라에서는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탑과 비는 인각사에, 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저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한국 고대 신화와 설화 및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 《어록(語錄)》《계승잡저(界乘雜著)》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조도(祖圖)》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제승법수(諸僧法數)》 《조정사원(祖庭事苑)》 《선문점송사원(禪門拈頌事苑)》 등이 있다.

 

2) 고운기 (1961~)

 

저자 고운기는 「일연의 세계인식과 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 동안, 10여 년 넘게 삼국유사 이야기의 현장을 찾아 직접 답사하며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2001),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2002), 『일연을 묻는다』(2006)의 자료를 모으고 펴냈다. 한편 2007년에는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객원교수로 한국고전문학과 삼국유사를 강의하였다. 이 기간의 공부가 바탕이 되어 논문 「도쿠가와가(德川家) 장서 목록에 나타난 삼국유사 전승의 연구」(2008)를 썼고, 필생의 작업인스토리텔링 삼국유사시리즈를 계획하여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2009)과 『삼국유사 글쓰기 감각』(2010)을 펴냈다.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여,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내려 한다.

 

출생 : 1961 12 15 (전라남도 보성)

2008 ~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2007.04~2008.03 일본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객원교수

2004.11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2002.09~2004.08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연구원

1999.09~2002.08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교 문학부 방문연구원

1996.03~1999.03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학력사항

1986 ~ 1994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1984 ~ 1986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석사 

1980 ~ 1984 한양대학교 국문학 학사 

1977 ~ 1980 숭문고등학교

 

고운기 시인의 저서로는 1997년 ‘일연’, 1998년 ‘새로 읽는 한국고시가’, 2001년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2002년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2003년 ‘북경거지’, 2006년 ‘길 위의 삼국유사’, 2007년 ‘한국 고전시가의 근대’, 2010년 ‘삼국유사 글쓰기 감각’, 2011년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등이 있다.

 

시집으로는 1987년‘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1995년 ‘섬강 그늘’, 2001년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2008년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등을 발간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P12

글을 쓰는 것이 목숨과 바꿀 무게로 쳐지는 시대에서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적을 수 없다. …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 잡는다.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P14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를 가치 있게 만든, 그래서 그 저자인 일연을 일약 민족주의 사학자로 만든 데서 그 의미가 끝나지 않는다. 상징의 체계로 들여다 볼 때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즐거운 이야기 인 것이다. 그리고 저기에 오롯이 역사적 사실이 숨어 있다.

 

P16

그가 추구한 궁극의 이상은 한마디로 잘 나타나 있다. ‘널리 사람 사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곧 홍익인간이다. 그러므로 홍익인간은 단군이 나라를 세우기 전 곧 그의 아버지 환웅과 할아버지 환국의 생각을 보여 주는 말이다.

 

P17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고자 각고 면려한 곰 부족에게서 새로운 인물이 나온다. 그가 바로 단군이다.

 

P18

곰은 여자가 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최후의 주인공 단군의 출생까지 커다란 각본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것을 움직여 나간 주체는 바로 어머니 곰이다. 단군은 그렇듯 현명한 곰 부족 출신의 어머니를 두고 태어나 이 땅의 첫 왕이 되었다.

 

P19

사실 건국 연대보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이 땅에 세워진 첫 나라의 이름이요, 이후 우리 역사에서 이 만큼 자주 국호로 애용된 이름이 없다.

 

P21

P21

대개 책의 처음을 시작할 때 거기에 책 전체의 집필 의도를 함축할 어떤 상징적인 것을 내세우고 싶어 한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는 그러한 상징이다.

 

P21

처음 환웅이 신단수에 내려왔을 때 그 곳에서는 이미 사람 사는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을 묶어 나라를 이룩하고 다스리는 제도가 없었을 뿐이다. 비록 그가 첫 왕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단군이 나오고, 단군은 곧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더러 단군의 자손도 있겠지만, 그 때 이미 한반도에 살고 있다가 단군을 왕으로 모신,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자손이다.

 

22 그들을 제어하는 힘은 하늘에서 나온다고 믿어, 하늘의 힘이 구체적으로 이 땅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던가를 설명하면 그만이다. 단군 신화는 그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한다.

 

23 모방이 창조의 원동력이라고는 하나 지나치면 부작용이 따른다. 한껏 폼을 내 만들어 놓은 <삼국사기>라는 명약이 우리만의 고유한 정신과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는 바이러스로도 기능할 줄은 아마도 그 찬술자들조차 몰랐던 것 같다. 일연은 그 바이러스의 정체를 발견했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쓴 것이다. 이를 그대로 들여와 내용만 우리 것으로 채웠을 때, 내용은 형식에 가려 실상을 보여 주지 못했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 이었다.

 

P23

여기서 일연은 고기의 기록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을 터이다. 고기는 그런 이름을 가진 책이 실재했는지, 여러 가지 옛 기록의 총칭인지 분명하지 않다. 삼국사기에서도 더러 이 이름이 보이고, 삼국유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대목에서 여러 차례 실명처럼 쓰이고 있지만, 역시 그 실체를 확신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삼국사기가 외면한 이 책의 단군조선 부분을 일현이 관심 가진 것은 오직 여기서만 조선이 온전히 보였기 때문이다.

 

P24

이 시기에 고려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두 가지 사건을 겪었다. 첫째는 무신 정권의 성립이고, 둘째는 몽고와의 전쟁이다. 대 내외적으로 같은 시기에 겪은 이 사건은 고려 사회를 통째로 뒤흔들어 놓는데, 무엇보다 기존에 세워졌던 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자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삼국사기와 그 시대에 수놓아졌던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는 힘을 잃는 대신, 거기에 희미하게나마 민족의 주체성 같은 것이 자리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삼국유사는 그 변화의 끄트머리에 자리잡는다.

 

P29

일연은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위만조전을 단군조선의 후예로 여겼으리라 생각한다. 중국에서 직접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해버리고, 위만조선을 그 다음 조에 이어 놓은 일연의 생각은 여기서 조금씩 드러난다.

 

P33

'고조선'조와 '위만조선' 조가 중국의 사료를 내세웠다는 점이 같다. 그러나 고조선에 관한 중국 쪽의 사료는, 아직 찾지 못한 <위서>의 단군 관련 기록과, 고조선에 관해서는 직접 언급하지도 않은 <배구전>이 전부일 만큼 옹색하다. 그에 비해 위만조선에 관한 <전한서>의 기록은 지금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것이 다른 점이다. 그런데 두 조를 잇대어 놓으니 단군조선 부분이 보완되면서, 조선이라는 국호의 공통성 아래 어떤 끈이 분명해 보인다.

 

P34

실은 일연이 단군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고자 한 데 더 힘을 기울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중국 쪽 역사서에서 조선에 관한 기사를 모두 찾아보고, 그것을 일연 나름대로 정리해 크게 두 개의 제목을 써서 정리한 것인데, 일관성과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P36

고대 왕권 국가란 곧 율령의 반포가 분명한 기준이 된다. 율령에는 국가 조직의 정비도 포함됨.

 

P43

<고기>의 신이한 부분을 받아들인 일연의 <삼국유사>에 와서 주몽은 <삼국사기>에서보다 더 확실히 하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삼국사기>가 금기시하는 것들이 이미 무너졌을 때, 그 존재를 회복한 것은 단군만이 아니다. 이렇듯 주몽에게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P43

난생신화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리라.

 

P49

마지막에 일연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시 수정하고 있다. "백제는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를 성씨로 삼았다."고 했다. <삼국사기>에서는 '부루'라 한 부분이다. 일연의 끈질긴 고집을 읽을만하다.

 

P54

<삼국사기>가 여섯 부족을 '조선의 유민'이라 한 데 반해 일연은 "여섯 부족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되도록 이성적 판단에 맞아 들어가는 것을 추구했던 <삼국사기>의 세계와 일연 사이에 놓이는 차이점을 여기서도 확인한다.

 

P56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곧 오리지널의 출발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남쪽에도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이 있음을 말하는 일연의 의도란 북쪽과 계통을 달리하는 오리지널이 있음을 강조하자는 데 있지 않을까?

 

P64

서술 성모는 선도 성모의 다른 이름이다. 직접적인 연결은 하지 않았으나, 혁거세와 알영부인을 낳은 주체를 선도 성모로 보려는 의도가 그 속에 깔려 있다.

 

P74

왕의 사위까지 되었지만, 탈해로서는 서라벌이 아직도 남의 동네다. 뭔가 자신의 기반을 확실히 닦은 다음 굳건한 위치에서 왕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P78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로 자신의 신성성을 포장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 인간 대 인간의 투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정치적인 모습이 나온다. 신화가 설화로 돌아서는 지점이다.

 

P83

한반도에서 일본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신라로서는 그들의 잦은 침략에 시달렸을 것으로 보인다. 탈해가 일본과 우호조약을 맺는 것은 그들로부터 침략의 위협을 해소하고 자신의 후원자를 얻는 이중의 효과가 있는 일이었다.

 

P92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대목에 이르면 김일 선수 박치기를 보듯이 흥분하고, 흥분하다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며,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란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에 지나지 않아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다. 살아 있는 역사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다.

 

P96

일연은 승려다. 승려 생활을 구름이나 강물처럼 머물러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운수행각이라고 한다. (중략) 그런데 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은 남다른 일 하나를 했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승려라 해서 불교적인 데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미 앞서 단군 신화의 경우와, 앞으로 소개할 많은 이야기 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관심은 광범하게 퍼져있다. 오늘날의 민속학자가 따로 없다.

 

P100

정령을 잃은 사람은 눈 뜬 소경과 같다. 사회도 그렇다. 일연이 강조한 것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

 

P106

그렇게 비슷하게 들리는 두 나라 말 가운데서도 우리의 경상도 방언과 일본어는 더 닮았다. 발음이나 억양 그리고 특징적인 이미 처리 등이 그렇다.

 

P109

가까운 사이라고 함부로 대하다 보면 틀어지기 마련이다. 왜의 잦은 침략을 받는 신라로서는 더 이상 그들을 가까이 하기 힘든 존재로 굳혀 갔으리라 보인다.

 

P118

<삼국유사> <기이>편은 왕의 재위 순서대로 엮였다. 그러면서 그 왕대에 일어난 일이나 특이한 사람을 하나 소개하고, 그것이 제목을 만드는 재료가 되기도 한다. 자질구레한 여러 가지 일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특징적인 사건 하나로 한 왕대의 성격을 나타내 버리는 것이다. 일연의 특이한 기술 방법이다.

 

P119

전쟁은 적개심을 필요로 한다. 비록 고려가 자원하여 벌인 것이 아닌, 몽고의 눈치를 보며 '울며 겨자 먹기 식'이었다고는 하나, 전쟁은 전쟁이었다. 고려는 개국 이래 오랫동안 일본과 그다지 교류를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전쟁을 벌여야 하는 이 황당한 교류로 인해 새삼 그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떠올리게 하였고, 먼 옛날 신라와의 관계 속에서 그들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서, 임박한 전쟁에서 반드시 쳐부숴야 할 구원의 대상으로 그려야 하지 않았을까? 박제상의 이야기는 거기서 적절한 감이었을 것이다.

 

P120

승려의 신분을 벗어난 파격적인 내용으로 삼국시대 그 밑바닥의 정서를 전해 준 점, 우리는 지금 <삼국유사>의 편찬자 일연에게 크게 감사하고 있다.

 

P120

무릇 큰 강은 어느 지류도 마다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고, 그러기에 거꾸로 생각하면 큰 강이 된 것과 다르지 않게, 사람도 큰 사람이 있는 법이고, 큰 사람이 이룬 일에 대대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는다.

 

P126

늘 다섯 빛깔(오방을 상징) 의 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

 

P133

귀신은 사람을 돕는 존재이면서, 그것을 어겼을 경우 엄정한 벌을 받는다.

 

P134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 설화가 지닌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조화다. 조화를 부리는 것은 귀신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공포는 사라진다. 어쩌면 귀신의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듯한 이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다.

 

P137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P139.

원광은 곧 "중국에 들어가 도를 배우는 일은 본디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바다와 육지가 가로막혀 있어 제 힘으로 통과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P140

신라의 첫 공식 유학승 원광은 이렇게 탄생했다. 중국에 가서 11년을 머문 후 진평왕 22년 경신년 (600)년에 돌아왔다고 일연은 적고 있다.

 

P140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최소한 한반도에서 신라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한 나라였다.

 

P144

오늘날 우리가 본지수적 또는 불국토 사상이라 부르는, 토착화한 신라 불교의 모습은 이렇게 만들어져 갔다. 그것은 통일의 힘을 쌓는 일이기도 하였다. 신라 불교의 힘은 무엇보다 먼저 있었던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고 포용해 간 데서 더욱 커진다.

 

P147

진자가 미륵왕 앞에서 '부처님을 화랑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이것은 전형적인 미륵하생신앙인데, 화랑도에 자연스럽게 불교가 접맥되는 순간인 것이다.

 

P149

힌트는 어디선가 주어져 있는 법이다. 그것을 찾고 못 찾고는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렸다.

 

P150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늦었기에 오히려 선진적으로 나갈 수 있었다는 점만 적어 두기로 하자. 마치 오늘날 선진 기술을 받아들여 공업화를 이루려는 개발도상 국가들이 중간 과정을 생략한 채 첨단의 그것으로 건너뛰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까? 그러나 신라의 경우, 비록 수용이 늦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철저히 자기화 되어 정착되었으므로, 생경한 외래 사조에 휘둘리지 않았다.

 

P158

신하들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왕은 꽃을 그리면서 나비가 없으니 거기 향기가 나지 않음을 알지요. 이는 곧 당나라 황제께서 내가 배우자 없이 지냄을 놀린 것입니다. 고 답한다. 선덕왕이 여성이기에 좀더 부드럽게 당나라와의 교유를 이어 나갈 수 있었겠다 싶다. 그것은 진덕왕도 마찬가지였다.

 

P158

신라와 당나라의 밀월 관계는 여러모로 분위기를 잡아 나가는 모습이다. 거기에 외교의 달인 김춘추의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P159

주인공 여자배우의 포근한 듯 우수에 찬 듯 여린 얼굴은 오래도록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배우의 이름이 문희였던가? 영화의 내용에 상관없이 분명 내게 아름다운 여성의 근원은 거기서 만들어졌다.

 

P161

역사는 충신들이 만들어 낸 역사인지 모른다. 신라의 전반기가 박제상과 이차돈이라는 충신이 만들어 낸 역사라면, 그 중반기가 김유신이라는 충신이 만들어낸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 김유신의 이름은 더욱 크게 빛난다.

 

P170

그는 두 가지를 모두 이루고 싶었다. 왕이 될 만한 이로 춘추 밖에 없었고, 문희와의 결혼이 이뤄졌을 때라야 만이 신라와 가야는 진정한 한 나라가 된다는 생각이 그 밑에 깔려 있었다. 그것이 최재서가 말하는 '민족의 결혼'이었다.

 

P171

김춘추가 왕실 내에서 강력한 입지를 굳혀 가는 동안 김유신은 군부를 장악한다.

 

P172

그 때까지는 두 집안이 모두 왕족이어야만 왕이 되는 신라 왕실에서, 이제 한 쪽만이어도 가능하다는 새로운 규칙을 만든 것이다. 사실 진골은 편협한 신라 왕실이 한층 더 개방적으로 나가는 데 크게 공헌한 제도이기도 하다.

 

P173

힘으로 안되면 지략으로, 지략으로 모자르면 신술을 써서라도 주어진 일을 해내고야 마는 김유신 이었다.

P175

물론 이 여인은 문희다. 화려한 것을 받쳐줘야 하기에 속으로 인고하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P177

일은 제가 벌여놓고 길길이 날뛰는 유신의 노한 목소리에 묻혀 한 여자의 여린 일생이 가려있다

 

P179

문무왕 법민이 당나라에 머문 지 11년째 되던 해, 백제 원정에 나선 소정방의 군대를 따라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해 아버지가 죽고 법민은 이듬해 왕위에 오른다.

 

P179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벌인 통일 전쟁이 한민족의 영토를 축소한 결과만 초래했다고 비판 받지만, 기록을 자세히 살피자면 당나라에 전부 뺏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한반도 땅 전체를 집어삼키자는 것이 당나라의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문무왕 법민은, 좀 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런 당나라와 맞서 최대한의 땅을 지켜 낸 사람이다.

 

P181

문무왕이 보낸 답신은 지난 10년 동안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오랜 전쟁에서 신라와 당나라가 맺은 협약이며 합동 작전을 자세히 기술하고, 그 과정에서 당나라 군대가 무리하게 요구한 것들이며 위약을 자세히 들어, 문제의 책임은 결코 신라에 있지 않음을 완곡하나마 강하게 말하고 있다.

 

P184

당나라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반란군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싸움을 일으키되, 실제로 주적은 당나라 군사로 삼았던 것이다.

 

P186

금당 아래의 동쪽에 구멍을 낸 감은사, 용더러 다니라는 통로를 만들어 준 것이라니,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참으로 즐겁고 소중한 느낌이 가득해진다. 부자간의 짝짜꿍이 잘 맞아도 이렇게 잘 맞을 수 없다. 지금은 터만 남은 감은사에 다행히도 동서에 세운 두 탑은 건재해 있다. 아마도 한반도에 남은 절의 탑 가운데 이만큼 기품 있고 의젓한 것이 없으리라.

 

P187

일연은 다르다. 절이며 피리며,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그는 떳떳이 쓰고 있다. 다만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요즈음 말로 하면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터다.

 

P189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이었다고 해야 할까?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P194

신령스런 피리를 일컬어서는 만만파파식적이라 했다. 벼슬이 높아져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으면 한 글자씩 덧붙이는 신라의 관습이 있다.

 

P196

'토사구팽' 권력을 잡은 자의 마무리 과정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한마디에 쓸쓸한 제 인생을 깊은 한숨과 함께 무상한 세월로 돌려보냈다. 그것이 어찌 어제 오늘의 일이겠는가? 이미 사마천의 시대부터 변함없는, 비정의 극치를 달리는 원칙이다. 권불십년이라, 거기서 예외가 될 사람 또한 없다. 최소한 그 권력을 좋아하고, 함께 쫓아다닌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사냥개 신세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P202

내물왕이 들어서서 신라 말기 가까이까지 김씨 계승이 끊이지 않아, 어쨌거나 미추왕은 그같이 화려한 김씨 집안의 대부가 될 수 있었다.

 

P202

삼산은 신라의 종묘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제사 곧 대사를 올리는 세 곳, 내림, 골화, 혈례다.

 

P205

그 가운데 가장 걸리는 존재가 전쟁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전쟁 때에 절대적이면서 평화가 돌아오면 껄끄럽기만 하다. 토사구팽의 칼은 바로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P205

김유신 또한 전쟁 영웅이다. 다만 그의 집안이 1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왕실과 맺은 사돈 관계 덕분이었다.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영웅들에게 갈 길은 정해져 있었다.

 

P211

육두품은 아무리 뛰어난 자라도 더 이상의 진급이 불가능하다. 성골,진골의 피를 타고나지 않으면 말이다.

 

P212

익선은 바로 6부소감전 가운데 하나인 모량부의 관리 책임자였다. 그의 거만한 행동의 배후에는 상층 귀족 사회의 묘한 힘겨루기가 깔려 있는 듯하다.

 

P212

이미 사회에 흐르는 분위기는 저만치 먼저 가고 있고, 조정의 권력자 또한 그것을 암암리에 조장하면서, 슬슬 여론의 눈치나 보려는 계산된 엄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212

득오의 <모죽지랑가>는 인생의 무상함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동시에 삼국 통일 후 당해야 했던 화랑 출신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P219

전쟁을 수행하다 보면 거기 공로자가 나오게 마련이고, 승리한 다음에 전리품을 놓고 다툼을 벌이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P223

수로부인, 약간공주병에 걸린 듯한 푼수 끼가 보이면서도 왠지 미워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강한 개성 때문이다

 

P224

수로부인의 자태와 얼굴이 너무도 뛰어나, 매번 깊은 산과 큰 연못을 지날 때면, 여러 차례 神物들에게 끌려갔다. 이처럼 미색을 갖춘 여자였으니 혈기왕성한 청장년만이 그녀에게 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골에 사는 초라한 노인까지도 어떻게 하든 그에게 잘 보여 점수 좀 따려고 설친다.

 

P226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꺽어 바치오리다.

 

P226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꽃을 탐내는 여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았겠는가?

 

P228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 , 사람들의 일치된 생각과 거기서 나오는 힘이 저 신물의 가공할 위세를 쳐부술 수 있다는 것이

 

P228

너무 아름다운 여자와 살아도 억울하다. 아름다운 이의 자태는 언제나눈 도둑들에게 노출되어 있어서, 훔쳐가도 잃은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감춰 놓고 있겠는가? 훔쳐간들 닳지 않는 것이라면 적선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P231

수로부인은 얼마나 다른 여자인지 모른다. 속 태우고 있었을 남편은 아랑곳 않고, 용에게 받은 극진한 대접을 능청스럽게 늘어놓는 수로부인

 

P232

꽃을 사랑하는 여자 수로부인, 그리고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천연덕스럽게 요구하던 여자 수로부인, 그가 잡혀 들어간 바다 속은 바닷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아우성 치며 발을 굴러야 할 위험한 곳이 아니었다. 아니 정반대였다. 용이 데라고 나오지 않았으면 부인이 자원해서 살겠다고도 했을 법하다.

 

P233

수로부인은 한 번 산 쪽으로 눈을 돌려 꽃을 보았고, 한 번 바다 쪽으로 눈을 돌려 용궁을 보았다. 어디인들 수로부인에게 이 여행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예쁜 꽃과 함께 노래를 선물 받았는가 하면, 용궁에 들어가 진기한 경험을 하고 나왔다. 수로부인처럼 아름답고 천연덕스럽게 살아가는, 거기서 세상의 지혜를 터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동해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P235 경덕왕에게는 아들은 커녕 왕위를 물려줄 마땅한 동생도 없었다.

 

P242

다만 삶의 고통은 죽음이라는 운명적 환경이 만들어 준 것, 도 닦는 사람이라고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한 잎에도 속절없는 인간의 생애를 비유한 솜씨가 비상하기만 하다. 바람은 다름 아닌 '이른 바람'이다. 아마도 이 대목이 시의 핵심이리라.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어 형 아우가 정해지지만, 죽는 데는 순서가 없는 것이고, 언젠가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한들, 이다지 이르게 찾아온 죽음이 비록 생사를 넘어서려는 구도자에게라 할지라도 심금을 울릴 일 아니겠는가?

 

P242 다시 만날 것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이야말로 구도자이면서 시인으로서 월명사가 택할 최선의 길이다. 그 지점이 곧 한 편의 시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P242

향가가 종종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켰다.

 

P249

장성하자 음악과 여색에 빠져들어, 돌아다니는 것을 절제하지 않았다.

 

P250

양성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해 불법적으로 수술을 감행하는 숫자가 한국에서도 암 수술 환자 다음으로 많다.

 

왕이 되는 자

 

P253

일찍부터 아버지는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꿈을 꾸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혼란이 겹치는 시대에 그 때가 점점 다가온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P253

그러나 가벼이 움직일 수 없다. 성공하면 충신이요 실패하면 역적인 것이 쿠데타다.

 

P254

왕이 두건을 벗고(직위를 잃을 조짐/사람 가운데 아무도 없음이요. 즉 왕이된다.)  흰 갓을 쓰고 (면류관을 쓸 징조) 십이현금을 끼고(형틀을 차는 징조/열두 손대까지 이어질 징조) 천관사의 우물 안으로 들어가는 꿈(옥에 갇히는 징조/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움)을 꾸었다.

 

P254

어차피 왕위를 다투는 마당에 결과는 왕이 되거나 죽거나 어느 하나로 맺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는 길을 찾는 수밖에, 여삼의 해몽이란 결국 살길을 찾으라는 말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P256

자신을 포함해 8대에 걸쳐 15명의 왕이 나왔다. 여삼의 해몽이 틀린 것은 12대까지 이어진다는 그 하나뿐이었다.

 

P261

체제가 기득권층의 자기 이익에 따라 흘러가다 보니, 관직에 있는 자들은 갈수록 무능해질 뿐이어서, 왕은 제도의 혁신 없이 나라가 바로 설 수 없으리라 생각한 것 같다.

 

P261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란 차라리 새로운 나라를 열기보다 더 힘든 일이다.

 

P262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사람들보다 겸손하게 사는 이가 첫째요, 큰 부자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는 이가 둘째요, 본디 귀하고 힘이 있으면서 그 위세를 쓰지 않는 이가 셋째이옵니다.

 

P264

"큰딸을 맞아 들였으므로 이제 왕위에 오른 것이 하나요. 예전에 미모에 끌렸던 동생을 이제 쉽게 얻을 수 있으니 둘째요, 언니를 맞아들였으므로 왕과 부인께서 기뻐하였음이 셋째입니다."

 

P267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서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

 

P268

왕으로서 큰 정치를 하라는 뜻에서 <대도곡>, 여러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 보며 정치를 하라는 뜻에서 <문군곡>이리라.

 

P269

한 집안이 그렇고 사회가 그렇듯이, 나라도 흥하고 망하는데 절대적 시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을지언정, 한번 일어나면 한번 사그라지는 불꽃처럼  대체로 흥망성쇠를 유전하기 마련이다. 팔레르모에서도 보았고, 기업도 흥망성쇠와 부침이 있기 마련이다.

 

P269

"둥근 달은 가득 찬 것입니다. 찼으니 이지러지지요. 새로 돋는 달이라는 것은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았으니 점점 차 오르지요." 둥근 달은 번성한 것이요 새로 돋는 달은 미미합니다. 아마도 우리나라(백제)는 번성하고, 신라는 매우 미미하다는 뜻이겠지요. “

 

P270

무엇이 올바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자에게 옳은 충고란 쇠귀에 경 읽기도 아니다.

 

P275

배반과 배반, 속임과 속임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말년이다.

 

P277

장보고는 8~9세기에 걸쳐 청해진 곧 지금의 진도, 완도, 신안 지방을 근거로 해상 왕국을 일으킨 사람이다.

 

P277

(장보고)의 최후가 어이없게도 권력다툼의 일개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데에서 더욱 안타깝다. 인재들이 죽어가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P281

내가 그대의 처를 탐내서 지금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도 그대가 화를 내지 않으시니, 감복하고 탄복할 일입니다. 맹서컨대, 지금부터 이후로는 그대의 얼굴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P284

우리는 일연의 기술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신라 헌강왕대는 사치가 극성했지만 바야흐로 기울어 가는 시기였다. 그 같은 사회는 필연코 성적으로도 문란하기 마련, 엄연한 유부녀가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는 이 장면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처용의 노래와 춤은 그 같은 비극 앞에서 체념한 것일까? 에둘러 꾸짖은 것일까? 일연은 역사적 사실로서 광란스런 왕들의 혈전을 쓰는 것보다,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으로 더 실감나게 당시 모습을 전해 준다. 그것이 <삼국유사>.

 

P286

<삼국사기>가 지키려는 합리적 사고방식의 한 단면을 읽게 되는데, 기왕의 기이한 사건을 한층 극적으로 전하려는 데서 일연의 태도에 더 매력을 느낀다. 살아 있는 것 같은 실감 말이다. 짖는 정도가 아니라 뜨락으로 뛰쳐나와 달리기까지 했다는 것 아닌가?

 

P286

기미를 보아 사리를 판단하는 법이다. 시절은 바뀌었어도 사람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든 잘 되고 잘못되는 징조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거기서 기미를 읽어내라는 간절한 충정으로 보인다.

 

P288

돌이켜 보며 아쉬워한들 무엇하랴.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있는 인재마저 죽이는 상황이 반복될 때, 거기서 우리는 한 나라의 멸망을 명확하게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다.

 

P288

" 51대 진성여왕이 조정에 나간 지 몇 년 되었을 때였다. 유모 부호부인과 그 남편 위홍 잡간 등 서너 사람이 신하로서 총애를 받고 권세를 마구 휘둘러 정치가 어지러워졌다. 도적까지 들끓자, 백성들이 이를 걱정하여 <다라니>로 은밀한 문장을 지어 길거리에 내붙였다. 왕과 못된 신하들이 이를 얻어 보고는 말했다. "왕거인이 아니면 누가 이런 문장을 지었겠느냐?" 그러고는 왕거인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가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하였더니, 하늘이 감옥을 뒤흔들었다. 이 때문에 그를 풀어주었다.

 

P301

태자가 말했다. "나라가 서고 망하기는 반드시 하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마땅히 충신과 뜻있는 선비들과 더불어 민심을 거두고 힘을 다한 다음이라야 그만둘 것이오. 어찌 천 년 사직을 그다지 가벼이 남에게 준단 말입니까?

 

P302

백성의 입장에서야 누구의 백성이 된들 무슨 상관이랴? 더욱이 넘쳐나는 새로운 힘으로 나라를 잘 이끌어 백성의 삶이 더욱 윤택해질 교체라면, 어느 개인의 사유물처럼 정권을 휘둘러 무고한 희생만 초래하는 것에 비길 수 없다.

 

P304

일연은 오히려 올바른 김부식의 팬이었다. 좋은 부분을 인용하면 그만이라는 태도가 엿보이고, 좋지 않은 부분을 놓고 비판 한다거나 그만이라는 태도가 엿보이고, 좋지 않은 부분을 놓고 비판한다거나 굳이 자기 관점에서 해석하지도 않았다. 김부식의 이 사론에서도 일연은 필요한 곳에 적절히 옮겨다 쓰고 있다.

 

P304

"마을마다 탑이 즐비하게 서고, 여러 백성들이 중의 옷을 입고 숨자, 군대와 농업은 점차 줄어들어 나라가 나날이 쇠약해졌다. 어찌 어지러워 망하지 않으리요."

 

P305

망한 주나라의 신하가 옛 서울을 지나다 그 곳이 메기장 밭으로 변해 버린 것을 보고 탄식하였다는  것인데, 신회의 노래는 그마저 없어졌으니, 천년 사직은 말 뿐이오 무상하기만 하다.

 

P307

고구려의 전성기만큼이나 우리 역사가 중국에 떳떳한 적이 드물었으며, 일본의 초기 왕실이 백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상정했을 때 그 아쉬움은 커진다.

 

P311

한강을 끼고 북으로는 양주에서부터 가운데는 위례성 그리고 남으로 광주까지가 500여 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였다. 백제의 대표적인 도읍은 한강 유역 곧 지금의 서울이다.

 

P314

백제의 풍속이 왕에서부터 민간의 그것에 이르기까지 '소박하고 따뜻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왕이 절을 하는 널찍한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다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P315

한반도니 일본열도니 하는 말은 모두 후세가 만들어 낸 관념이다. 그들은 먹고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했던 당대의 생활인일 뿐이었다. 그 무렵 사람이 지금 살아온다면 그는 한반도라는 말도 일본열도라는 말도 모를 것이다.

 

P321

백제 왕실뿐만 아니라 일본에서조차 왕실의 권력을 한 손에 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을, 홍 교수는 곤지왕자로 보고 있다. 아들을 보내 동성왕으로 손자를 보내 무녕왕으로 올리고, 그로부터 백제가 멸망하는 마지막 의자왕까지 후손들이 차례로 왕위에 앉을 수 있는 길을 연 사람이다.

 

P322

백제를 세운 주축 세력이 북쪽에서 이주해 왔고, 그들은 이주의 달인이었음을 나는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P323

코앞의 한반도 국가 가운데 왕실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일본을 개척한 백제야말로 일본열도에서 우위를 잡는 데 적임자였다.

 

P324

8세기경 일본열도의 인구를 560만명. 그러나 200명도 채 안되는 집권층이라면, 탁월한 문화를 지닌 소수가 가서 단번에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소수가 바로 백제였다.

 

P325

일본의 천지왕의 당나라에 보낸 서신(670)-  "고구려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그 뒤 차츰 중국의 말을 익히더니, 왜라는 명칭을 실행해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 그 나라 사신의 설명으로는, 나라가 해 뜨는 곳에 가까운 까닭에 일본으로 이름하였다고 한다.

 

P327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누구도 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라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

 

P331

서동으로서는 공주가 천애고아나 다름없게 된 후에야 자신 있었다. 그 때는 인물 하나 보고 따라올 것이 아닌가?

 

P332

서동은 비범한 재주를 타고 난 사람이지만 귀하고 중요한 것의 가치를 아직 모른다. 공주를 꾀어내는 꾀도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동물적 감각에서 나왔을 것이다. 후천적인 교육의 중요성은 여기서 발휘된다. 공주는 가치를 발견하는 눈을 키워주었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의 결합은 완전한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다.

 

P336

버림받은 처지였건만 바리공주는 병든 어버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약을 구해 온다. 선화공주가 좋은 남편을 만나 그에게서 많은 보물을 받고, 그것을 친정 어버이에게 보낸다는 이야기도 모티브 면에서는 닮았다.

 

P337

재미있는 이야기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나 전파되기 마련이고,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야기가 서로 비슷한 경우마저 있기도 하다.

 

P338

실제 무왕은, 설화 속에서는 장인인 진평왕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며 백제를 지켜 낸 왕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의자왕대로 늦추어진 것도 무왕의 강고한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P343

대체적으로 미륵불은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미륵이 본디 남자였지만 이렇게 바뀌는 것은, 미륵불이 자비와 영원불멸의 생산을 의미하는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데다 남성인 석가불에 대응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미륵은 자비의 부처다.

 

P348

백제는 견훤으로 모든 것이 깨끗이 끝나고 말았다. 그런 마지막 왕으로서 백제 사나이의 한평생은 파란만장하기만 하다. 출생의 비밀은 복잡한데다, 후백제라 이름한 새로운 나라를 이끌어 가는 데에는 장애가 많았고, 결국 아들에게 몰려 뒷방 노인 신세로 몰락한 다음 그 아들을 원수로 삼아 이를 갈다가 등창에 걸려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P352

918, 왕건이 철원경에서 고려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견훤은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축하하였으며, 공작부채와 지리산의 대살을 바치기도 했다.

 

P353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 담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능했다. 아마도 그 결정적인 사건은 견훤의 경애왕 살해일 것이다.

 

P354

됨됨이가 견훤처럼 사나운 사람보다 온순하고 정이 많기로, 왕건이 그들의 뒤를 잘 봐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P361

왕건은 그가 지닌 성품대로 부하들을 보내 맞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자식에게 당한 배신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온 이 노장이 도착하자, 자기보다 10년 위라고 해서 그를 높여 상보라고 했다.

 

P363

왕건은 자기에게 오는 이를 누구도 말리지 않는 사람이다. 형님으로 섬기고 누이로 높이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365

<고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어산은 옛 자성산이다. 또 아야사산이라고도 한다. 그 곁에는 가라국이 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해변으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거니와, 그이가 바로 수로왕이다."

 

P365

가야를 그냥 건너뛸 수 없는 이유가 일연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허황옥이라는, 불교의 발상지 인도로부터 멀리 시집온 여자, 이 땅에 불국토의 신성함이 서려 있다고 믿는 일연으로서 이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소홀히 대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찾아든 좋은 자료가 바로 '가락국기'.

 

P369

가야는 고대 한반도의 남부를 설명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이곳은 완충지였다. 신라와 백제가 그로 인해 힘의 균형을 이루었고, 일본열도에서 몰려온 또는 몰려갈 다수의 사람들에게 생활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P372

존대보다는 위협을 가하면서, 심지어 구워먹겠다는 불경스런 표현을 서슴지 않는 데에서 우리 옛 노래의 특이성을 발견한다. 이것은 삶을 개척하는 매우 강한 의지나 다름없다.

 

P372

백성들에게 부담을 지우는 무리한 토목 사업은 애초에 벌이지 않았다.

 

P376

그러자 아버지는 이 탑을 싣고 가라 하였다. 과연 제대로 건너 남쪽 언덕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비단 돛에 붉은 깃발 그리고 붉은 구슬 같은 아름다운 물건이 함께 있었다. 지금 그곳을 주포라 한다.

 

P378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한다. 바람과 파도 속에서, 또 때로 찬란한 태양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인도를 받으며 건너는 고해가 있다.

 

P382

문무왕 : 민족간은 결합해야 하고 결합할 수 있다는 신념과 경험을 가진 그라면, 나아가 신라-백제-고구려의 세 나라를 한 나라로 만드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P384

다만 그것으로 식민지 운운은 난센스다. 제 땅에 아직 제대로 된 나라도 갖추지 못하던 때에 무슨 식민지 경영이란 말인가? 사료가 부족한 쪽만 억울할 일이다. 거기서 우리는 김부식이 원망스러운 것이고, 일연에게 감사한 것이다.

 

P385

이야기도 다채로울 뿐만 아니라 인용한 책도 다양하다. <삼국유사>의 본령이 여기로구나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일각에서 <삼국유사>를 불교문화사라 저의 내리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P385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것을 다루는 일연의 태도는 뭔가 자신감에 차 있다. 보고 들은 것과 몸소 체험한 것이 일체를 이루는 부분이기에 그랬으리라.

 

P386

일연은 고대 삼국의 역사를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불교를 받아들여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가 나라의 흥망성쇠와 곧바로 연결된다는 생각이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록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운 신라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춘 나라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불교의 전래 경위만이 아니라 일연이 가진 역사의식의 일단을 읽게 된다.

 

P390

백제에는 바다를 건너 중국 남방계의 불교가 이어지는데, 특히 법화 신앙의 흐름은 이것을 타고 한층 뚜렷해진다.

 

P392

그는 <삼국사기>가 전해주는 역사적 사실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다. 사실 이상의 것이란 물론 상상이다. 그러기에 시의 형식을 택했다. 그러나 상상은 시간이라든가 구조라든가 어떤 기제에 실릴 경우 사실 이상의 사실이 된다. 한 덩어리의 이야기는 사실 이상의 사실이 넘어간 그 어디쯤에서 완성된다. 이런 생각을 <삼국유사> 전체로 확대시켜도 좋다.

 

P394

시적 상상은 그 선연한 형상력의 도움을 받아 우리를 사실 이상의 사실 어디로 데려가고 있다.

 

P399

추운 겨울은 언제까지 지속되는 것은 아니며, 자연의 이치에 따라 봄이 오듯이.

 

P399

봄빛이 아직 두루 돌지 못했을 때 매화는 핀다. 이런 자연의 섭리는 곧 인간 세계의 그것으로 원용되고 있다.

 

P402

순교는 어떤 의미를 따지기에 앞서 순교 자체로 성스럽다.

 

P402

'원종은 불교를 일으키고 염촉은 몸을 바치다' : 원종은 법흥왕을 가리키고, 염촉은 이차돈의 다른 이름이다.

 

P404

나라를 위해 몸을 버림이 큰 절개요, 임금을 위해 목숨을 다함이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그릇되게 말씀을 전했다 하여 신에게 목을 베는 형벌을 주시면, 온 백성이 모두 복종하고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중략) 뭐라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시리다.

 

P405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솟구칠 마음을 가지고,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나면서도 파도를 헤쳐 나갈 기세를 품는다 했지

 

P406

왕이 절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차돈은 이 명령을 잘못 전달했다는 것이 된다. 왕은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려고 이차돈의 목을 베라 하는데, 이 서슬 푸른 모습에 다른 신하들도 꼼짝하지 못한다는 시나리오다.

 

P407

이차돈의 머리를 베었더니 흰 젖이 솟아나 한 길이나 되었다.

 

P411

시인은 결연히 노래한다. 사라진 것은 오직 몸일 뿐이요, 쇠북소리에 실린 그의 자취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

 

P416

월성과 안압지가 모여 있는 곳에서 분황사 사이의 허허벌판, 그 곳이 황룡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황룡사 터다. 그래서 대부분 그냥 지나치고 만다.

 

P417

황룡사는 옛 경주의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아니 신라의 한 가운데였고, 지리상으로만 아닌 마음 속에서는 신라인의 상상하는 세계의 한 가운데였다. 거기서 남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능선이나, 명활산성으로 구획된 동쪽의 방벽이나, 천마총으로부터 시작하는 서쪽의 고분군을 한눈에 넣어보아야 한다. 그 분지에 지상의 낙원을 이루고 살았던 서라벌 천 년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지금 겨우 남아 있는 황룡사 구층탑을 지탱했던 돌들이나, 금당과 회랑 등을 놓았을 돌들이 무어라 외치는지 들어 볼 만도 하다.

 

P417

하루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곤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너의 등을 덮어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년을 기다렸단다.

 

P424

인도의 아육왕도 이루지 못했던 일, 그것은 힘만으로 공덕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태자의 말에 함축된 의미에다, 오직 인연 있는 땅에서만 가능하다면 신라는 바로 그런 인연을 갖춘 곳이라는 자부심은 은근히 배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신라가 가진 불국토사상 또는 본지수석사상이라 부른다.

 

P425

아쇼카는 콤플렉스가 많은 왕이었다. 못생긴 얼굴에 형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마저 가득했다. 그것은 이상한 형태로 뻗어 나와 결국 가상 지옥을 만들어 놓고 잘생긴 사람을 들여보내 죽이는 해괴한 짓을 저질렀다.

 

P428

아쇼카왕은 참회하고 사자나 황소 또는 코끼리의 모습을 새긴 기둥을 세웠따. '아쇼카의 기념주'라 불리는 이 유명한 조각기둥은 불교 미술의 출발이라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P428

불교미술사학자들은 불상의 출현을 서기 1세기경의 쿠샨 왕조 때로 보고 있다.

 

P429

신라 땅에 이르렀다는 인도 배는 이 굽타 왕조의 불상 문화를 실어온 것이 아닐까? 아육왕은 인도의 불교를 키운 상징적인 인물이다.

 

P433

인도 모델의 불상 앞에 중국 모델의 탑이 서려는 순간이다. 절은 본디 왕궁으로 쓰려고 지었던 화려한 건물, 그야말로 신라 건축 문화의 총합이 여기 있다.

 

P435

싸움이나 싸움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천지가 평화로워지는 꿈, 그것은 일연이 구층탑을 보며 꾼 것이다. .

 

P438

일연이 깨달음을 경험한 때를, 비문은 1236년 그의 나이 31세였다고 알려주고 있다.

 

P440

문수보살을 흔히 출가의 보살이라고 한다. 저 유명한 화엄경의 이야기에서 문수 스스로 남쪽을 두루 돌며 깨닫고 동쪽으로 오는데, 거기서 만난 선재동자에게 남쪽으로 갈 것을 권하는 대목이 있다. 곧 선재의 출가를 뜻할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길에 동기를 부여하는 상징으로 읽힌다. 누구든 수행의 첫 길은 문수보살로부터 시작한다.

 

P444

성인이 성인인 줄 알고 만난다면 오죽 좋으련만, 우리는 본질을 두고도 늘 외곽만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리인 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나는 그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고 말한다.

 

P448

문수보살은 매일 아침 서른 여섯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P452

상진부에서 월정사로 들어가는 길도 길이려니와, 월정사의 전나무 숲은 세간에 널리 알려진 대로이고, 월정사 뒤편으로 상원사 가는 길은 더욱 호젓하고 아름답다. 오대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어찌 그리 맑고 차가운지. 그리고 다시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진고개를 넘어 주문진으로 가는 길이 마지막 코스다. 그렇게 태백산맥을 한 번 넘어서면 폐에 가득한 먼지가 깨끗이 씻어나가는 듯하다.

 

P454

이것은 하나의 인연이다. 도를 이루려고 해도 이루려는 자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를 이루려는 일만이 아니다. 무릇 의지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픈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렇게 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 인연은 그렇게 오는게 아닐까?

 

P455

나는 사실 불교신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교와 가까워진 것은 전적으로 <삼국유사> 연구 때문이었는데, 신자이건 아니건 오랜 전통 속에 우리들의 피와 살이 된 불교의 뿌리는 암암리에 깊다. 더욱이 절은 성소이면서도 낯익은 우리 건축의 한 틀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이라, 특히 조그만 암자에 들렀을 경우, 마치 고향 마을의 옛집에 찾아온 듯한 포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P456

시의 끝에 나는 이렇게 메모를 했다. " 마음이 찾아갈 정처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 누구도 한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할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진데,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 상처만 커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나에게 절은 그랬다.

 

P459

'어디에 쓰실 자비이기에 여기서 들어 주지 않으시려는가'

 

P469

불성은 대체로 마음에서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법이다. 그 불성은 어떤 지식보다 나으며, 대로 기적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니, 무엇이 값어치 있는가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P469

일연에게서 평생의 화두를 들자면 어머니다. 세속의 인연에 너무 연연해 한다고 탓하지 말라. 일연의 어머니는 열 아홉 살 아직 꽃 피지 않을 나이에 아들 하나 낳고, 아흔 살 넘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혼자 산 사람이다. 그 어머니에 대한 어떤 향념이 <삼국유사>에 더러더러 묻어 잠겨 있음을 찾아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P469

홀연히 사라진 아들을 찾고자, 애끓는 마음을 부처님 앞에 가 빌고 비는 어머니는, 다름 아닌 일연과 그 어머니의 대역들이다. 이런 관계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복하고자 한다.

 

P470

자신은 죽더라도 새끼들은 지키겠다는 어미 꿩의 애타는 모습이 충원공의 마음을 흔들었다. 더 이상 공격하지 않는 매의 모습이 더욱 감동적으로 겹쳐졌을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이 모두 놀라웠다. 인간으로도 깨우침의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이 어우러진 장면 장면들이다. 꿩이나 그 새끼 몇 마리를 살렸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살린 어떤 메커니즘이 중요한 것이다. 신라시대에 우리 조상들을 그런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자랑스럽다.

 

P471

그 두려운 눈빛을 보고도 총을 쏜 자들은 인간이 아니다. 짐승도 아니다. 정작 누가 총을 쏘았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지만, 양쪽 모두 열렬히 신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그 신은 무엇을 가르치길래 그토록 매몰찬 짓들을 하는 것인지, 나는 그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P473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P475

저 멀리 극락 세상에 대한 뜻이 커지면 커질수록 세상에서 한 몸이 얼마나 무성한 것인가를 보게 되었다.

 

P475

부처님을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아야지.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었으니, 세상에 묶인 끈을 벗어 버리고 더할 수 없는 도를 이루어야 하네. 먼지 날리는 세상에 코를 박고서야 어찌 세상의 무리들과 다름이 있겠는가?

 

P479

부득은 놀라며 말했다. "이곳은 여자가 와서 더럽힐 곳은 아니오. 그러나 중생을 따른 것도 보살행의 하나이지요. 하물며 깊은 산골에 날이 저물었으니 어떻게 소홀히 대하리요." 수행자의 초심을 흔들지 않으려는 박박의 태도도 뜻이 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상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부득의 태도는 차원이 달라 보인다. 박박의 교조적 외통수와 부득의 현실적 융통성이라고나 할까?

 

P481

"내가 눈에 씌운 것이 있어 대성을 만나고도 바로 모시지 못했구머. 그대는 지극히 인자하여 나보다 먼저 이루었네. 바라건대 옛날의 약속을 잊지만 말아주시게. 부디 함께 가야지?"

 

P485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다면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 참 보살행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참 보살행이란 중생의 곤고한 처지에 동참한다는 것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P486

일연이 쓴 찬시 속에서 이런 절묘한 표현을 얻는다. 또한 편찬자로서 모아 놓은 시들, 곧 향가, 한시, 민요 등은 모두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살이의 고통이 무엇이며 역사의 바른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고민하고, 그것은 뜻밖에도 그가 쓴 찬이나, 인용해 놓은 다른 시와 민요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삼국유사>야 말로 이러한 시로 인해 완성되는 책이 아닌가? 

 

P487

낙산사야말로 사람의 손때를 타기 쉬운 모든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본디 절이 지닌 고아한 품위를 잃지 않고 서 있다. 여간 다행이 아니다.

 

P495

의상은 이곳에 진신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직접 뵙고자 정성 들여 재를 올린다. 7일간의 첫 정성에 감은한 것은 부처님을 모시는 시종들과 동해 바다의 용이었다. 의상은 그들에게서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받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없다. 의상의 본디 목적은 진신을 직접 뵙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7일간 재를 올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진신을 뵙고, 그로부터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명령 받는다. 참으로 치밀하고 정성들인 노력 후에 얻은 만남이다. 그런 노력으로 얻지 못할 무엇이 있겠는가 웅변하는 듯하다. 나는 이것을 '치밀하고 정성스런 만남'이라고 명명한다.

 

P495

그 때서야 알 만했다. 앞서 만난 여자들이 바로 성녀이며 진신이라는 사실을.

 

P496

만났으면서도 만난 줄 몰랐을 뿐이다. 그런 뜻밖의 만남이 곧 보살과의 만남임을 영원히 모르고 지났다면 사정은 다르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 나중에 알게 되는 이 우연의 메커니즘, 사실 우리들의 만남은 대부분 이렇다.

 

P497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거기서 우연히 스치는 수많은 만남이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다만 끝내 그 정체를 모르고 지나쳐버리는 경우와 어느 순간 깨닫는 경우로 갈라질 뿐. 나는 이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 명명하였다.

 

P498

의상이건 원효이건 어떤 하나의 삶의 방식대로 살다 간 무수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모델일 뿐이다.

 

P499

처녀가 남자와 관계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이야기는 <신약성서>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P505

세상살이의 헛됨을 비유하는 말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단지몽, 중국의 한단이라는 동네에서 나온 이야기다. 밥이 끓는 솥단지 앞에서 따뜻한 불을 쬐다 잠깐 잠이 든 사이, 온갖 영화와 패배를 맛보는 꿈을 꾸고 깨어보니 밥이 되어 있었다는데, 한 세상 사는 온갖 영고성쇠가 한솥밥 끓는 사이에 불과하더라는 이 절묘한 비유.

 

P513

기록자가 자기 시대의 이념만을 고집해 당대의 생생한 자취를 남겨 주지 못한 점, <삼국사기>는 거기서도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P513

불교야말로 이성으로만 받아들이는 어떤 형식으로서가 아닌 우리들 심성 깊숙이 내린 독특한 뿌리다.

 

P517

기본 줄거리를 같되, 세세한 부분에서 서로 차이가 있다. 일연은 이런 점때문에 두 기록을 나란히 인용. 분명히 정할 수 없어 두가지를 다 둔다고 하였다. 일연다운 필법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P521

(원광) 이야기는 신라의 불교 신앙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민간 신앙과 어떻게 결합하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할 것이다.

 

P521

일연은 이미 13세기에 이 땅에 뿌리내린 불교의 모습을 주체적으로 인사한 이였다고 보아 무방하리라.

 

P527

운문은 구름의 문, 아마도 운수의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잠시 머무는 곳인가,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다.

 

P530

세상에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것과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원효는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P530

의상의 관형어가 화엄을 전한 분, 자장이 계율을 정한 분이라고 해석해도 좋다면 성사는 무슨 뜻?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불교의 최고 경지를 이룬 분이라 해야 할까?

 

P531

원효의 결정적인 흠이라면 파계요 그것은 인간적 고뇌라 말하는 춘원의 저변에는 사실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원효에게 파계라면 이광수에게는 변절이 있다.

 

P533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는 그것을 감당했고, 그 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준 사람이다.

 

P536

설총 : 삼국유사에서 "나면서 영리하고 밝아 경전과 역사에 널리 통해 신라의 열 분 현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말을 가지고 중국과 우리 나라의 세간 풍물과 이름을 통하게 하였으며, 육경과 문학을 뜻풀이하였다."

 

P537

원효는 스스로 파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를 부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극복되는 초월의 단계다. 원효가 오늘날의 원효가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변증법적 정반합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P538

일연이 발견한 원효는 이런 원효였다. 고고한 학승만으로 폐쇄적인 선승만으로 아닌 모두의 승려, 무엇에도 얽매지 않았던 인간 원효를 가장 잘 바라본 이는 아마도 일연이 처음 아니었을까?

 

P540

"자네는 똥인데 나는 물고기 그대로야"

 

P543

원효는 대체로 낮은 자리에 사는 사람들의 친구였고, 우리는 이런 장면들에서 바보 같은 원효가 진정 바보가 아님을 확인하는 것이다.

 

P545

그 태어난 마을의 이름이 '불지'이고, 절의 이름이 '초개'이며, 스스로 '원효'라 부른 것이 모두 부처님의 날을 처음 떨쳤다는 뜻이다. 원효 또한 이 지역 말이다. 그때 사람들이 모두 방언으로 그를 '첫 새벽'이라 불렀다. 원효는 이 나라 불교의 '첫 새벽'이다.

 

P548.

거추장스런 교의의 탈을 벗어 버리고, 하늘을 괼 아들을 얻으려 세속의 인연도 마다 않은 원효의 큰 뜻을 생각하는데, 아들 설총마저 아비 따라가 버린 분황사는 문만 굳게 닫았을 뿐 이젠 아무도 없다.

 

P551

"지난 밤 잘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

 

P552

의상은 한 그림자에 외로이 싸우며, 죽음을 무릅쓰고 물러나지 않았다.

 

P556

지엄이 전날 저녁 꿈을 꾸었다. 큰 나무 한 그루가 바다 동쪽에서 솟아나는데, 가지와 잎이 널리 온 땅을 덮었다. 그 위에 봉황의 둥지가 있었다. 올라가서 보니 마니보주 하나가 밝은 빛을 멀리서 비추었다. 깨어나 놀랍고 경이로워 깨끗이 치우고 기다렸더니, 곧 의상이 이르렀다. 특별히 예를 갖추어 맞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내 지난 밤의 꿈이 그대가 와서 내게 맡겨질 징조였구나." 그리고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P558

물론 그는 화엄의 진수를 배우고자 갔지만, 벌서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지상사의 그 엄격한 훈련이 의상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정도의 훈련은 저 궁벽한 신라 땅 산 속에서 경험할 대로 경험한 바였다. 원효가 그랬던 것처럼, 의상 또한 이미 의상이었다.

 

P563

의상은 김씨 집안의 귀족 출신이다. 김흠순이나 김양도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을 것이고, 조국의 위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자고 했을 것이다.

 

P563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으면, 비록 풀이 가득 덮인 언덕에 금을 그어 '이게 성곽이다'라고 하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함부로 넘지 못할 것이고, 재앙을 소멸시키며 복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지 못하면, 아무리 장성이 있더라도 재해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왕이 곧 성 쌓기를 중지했다. -의상

 

P564

솥 안의 국 맛은 한 점 고기로도 충분한 것이다.

 

P570

지금까지 나온 이러저러한 기행문보다 이 책이 더 매력적이었던 것은 바로 사진의 구체성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의 그 투박함으로 가급적 현장을 현장 그대로 잡아낸 한 장 한 장이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내게는 있다.

 

P571

나는 거기서 참으로 모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우리가 모진 것과 다르다. 우리가 자본주의적 욕심에 벼려져서 모질다면 그들은 원초적 자연 속에서 몸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적응하고 생존하려는 데서 생긴 모짐이다. 인류가 가장 인류다운 모습, 아마도 문명 이전에 인류는 저렇게 살았을 것 같은 모습을 그들은 지금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진실로 두려워 할 줄 알고, 진실로 견뎌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성스러워 보였다.

 

P573

두려운 마음을 때로 기도하며 때로 노래하며 풀어내고, 사막과 얼음 구덩이로 발걸음을 옮긴 그들에게 도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다는 것일까?

 

P574

가고서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결국 그 곳이 진정 돌아갈 곳이 아니겠는가.

 

P575

천축 사람들은 해동 사람들을 구구탁예설라 라 불렀다. 구구탁은 닭이라는 말이고, 예설라는 귀라는 말이다. 저들 나라에서 '그 나라는 닭의 신을 경배해 존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깃을 머리에 꽂고 장식을 한다'라고 전한다.

 

P580

인간의 강인한 의지와 용기도 엄청난 자연의 힘 앞에 맥없이 스러진다. 그러나 그것을 마다 않았던 순례자들을, 일연은 아름답고도 슬프게 추도하는 것이다.

 

P583

백제불교의 진수는 미륵신앙이다. 진표는 옛 백제 땅 김제 금산사에서 미륵 신앙을 다시 한번 일으킨다. 지금도 금산사는 미륵 신앙의 성지로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P586

지장보살은 누구인가? 지장은 대지의 태, 곧 땅 속에 묻어 있는 어떤 것이다. 땅이 지닌 덕을 의인화 하였다고도 하는데 지장보살은 현세의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과 함께, 죽은 이들의 구제자가 된다. 특히 죽은 이들을 천도하기 위해서는 이 보살에게 빌어야 한다. 지금도 절에 가면 명부전이라는 불당이 있는데 거기서 바로 이 지장보살을 주불로 삼는다.

 

P596

미륵 신앙이란 민중들의 삶에 더욱 밀착되는 법이다. 그들의 어려운 삶 속에 동참하는 데서 이 신앙의 진수가 드러난다.

 

P596

제 몸을 버리는 용맹스런 정진과 참회, 그것이야말로 진표가 한 수행의 핵심이 아니던가?

 

P604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바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 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통이라 했다.

 

P604

다만 더 극적이어서 가치가 높다는 말은 아니다. 평범한 속에서도 진리는 엄연히 존재하고, 그래서 깨달은 무상의 존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불교의 출가자들 속에 연면히 내려오는 출가의 동기를 소중히 여기자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그 동기 하나로 깨달음은 단박에 몰려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P607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삼국유사>의 가장 오래된 인쇄본은 조선조 정덕 연간에 나왔다.

 

P607

다만 여기 단 한번 나오는 지은이 이름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삼국유사>의 저자를 일연으로 비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P607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일은 이렇게 버림 받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후세의 눈 밝은 사람이 필요한지 모른다.

 

P612

신통력을 미끼로 헛된 이름을 팔거나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것은 밀교의 본령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 주자는 것이다.

 

P613

이에 혜통은 속에서 울컥했으나 말은 하지 못하고, 뜨락 앞에 서서 머리에 화로를 이었다. 잠깐 사이에 이미라 터지는 소리가 벼락처럼 났다. 삼장이 듣고 와서 이를 보더니, 화로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찢어진 곳을 만지며 주문을 외웠다. 상처가 이전처럼 아물었는데, 왕자 무늬 같은 자국이 남았다. 그래서 호를 왕 화상이라 했다.

 

P619

원원사 터에서 내려오는데 다람쥐 한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왔다 이 책에 실리고 싶었나 보다. <삼국유사> 어디에도 다람쥐 얘기는 나오지 않지만 내가 다시 그리는 <삼국유사>이니 다람쥐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P620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은 쪽이 밀교나 점찰법회 같은 것이었다. 이른바 사람들을 미혹시킨다는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되었던 것이다. 일연도 이 같은 부류로 나눠지고, 그에 따라 일연에 대한 관심이나 사적이 인멸되지 않았나 추측하는 것이다.

 

P623

나는 <삼국유사> 9개 편 가운데 여기를 가장 즐겨 읽는다. 이름 없이 살다간 평범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불교를 매개로 진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P625

정토 신앙은 번성기의 유복한 사람들에게 퍼지게 마련이다.

 

P627

거창하게 모임을 만들고 절을 짓고, 근엄한 예불을 올리는 이들에게 부처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제 육신을 잊고 끝내 버리고만 욱면이라는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의 계집종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에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과 격려를 받는다.

 

P633

역시 이 조에서 매력적인 인물은 엄장이다. 그가 우리와 닮아 있기 때문일까, 실수와 무지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느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P636

아마도 이 조의 본문과 찬은 결국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일 것이다. 절이 재산을 몰래 훔친 여자의 부모, 저승의 일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곧 욕심 가득한 우리 모두를 상징한다. 선율의 환생은 그런 그들에 대한 경계이지만 사실 살아 돌아와 저승의 일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욕심이 화를 부르는 줄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P641

불교가 토착화되면서 민간 신앙의 큰 줄이인 산신 신앙을 받아들였고, 자연스럽게 절 안에도 산신을 모신 산신각이 생기게 된다.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산신각에는 산신뿐만이 아니라 칠성신, 용왕신 등을 같이 모시기도 한다.

 

P644

산 속에서 세 오빠 악한 짓 견딜 수 없어 꽃다운 입에선 대신 죽겠노란 한마디

의리의 소중함 몇 가지로 들어 죽음도 가벼이 수풀 아래서 몸을 내놓았네, 떨어지는 꽃처럼

아름다운 시다. 무슨 설명을 더 붙이랴.

 

P650

일연은 이 이야기를 끝내고 자신의 의견을 부친다. 두 이야기에서 호랑이가 여자로 변해 남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은 같지만 그 끝은 달라서, 김현의 호랑이가 비록 슬픈 결말이나 장렬한 죽음으로 맺는 것을 특별하게 보고 있다. 이러한 특별한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신도징의 이야기를 끌어왔을 것이다. 일연은 말한다. "호랑이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해쳤으나, 좋은 처방으로 잘 이끌어 주어서 그 사람들을 치료했다. 짐승이라도 인자한 마음 씀이 저와 같으니, 이제 사람이면서 짐승만 못한 이들은 어찌하라."

 

P653

"어디 가서 임금이 손수 베푼 음식을 먹었다 하지 말게." 그러자 초라한 스님에게서 나온 놀라운 한마디. "임금께서도 진신석가께 공양하였다고 말씀하지 마소서."

 

P656

우연히 스치는 듯한 성인 만남 정작 큰 스승들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법이 드물다. 진리는 단순한 법이기에 그런 것일까, 유독 진신과의 만남을 중요시 여기는 불교에서 그 만남은 곧 진리의 깨달음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겠는데, 단순하기만 한 진리를 전하는 진신은 이렇듯 슬며시 다가온다. 진신인지 알고 모르고는 찾는 이의 책임인 것이다. 기독교의 <성서>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도적같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P657.

그 만남을 뒤에라도 만남인 줄 알면 그렇다. 효소왕은 그것을 알았기에 부랴부랴 그 뒤를 쫓아갔다. 다시는 그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절을 짓고 공양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그런 만남이 우리에게는 더 많고, 또 소중하지 않은가?

 

P659

얼마 전, 프랑스의 사진작가 한 사람이 남산을 촬영하러 왔다가, 이런 재미있는 말을 남겼다. "세월의 탓도 있겠지만 흐릿한 선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아마도 나머지는 불상을 보러 온 사람이 완성시키라는 조각가의 배려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P664

지금 스님의 병은 근심과 수고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즐거운 웃음으로 고칠 수 있을 겁니다.

 

P668

그러나 불교의 법을 섬기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였다. 마을마다 탑이 즐비하게 서고, 여러 백성들이 중의 옷을 입고 숨자, 군대와 농업은 점차 줄어들어 나라가 나날이 쇠약해졌다. 어찌 어지러워 망하지 않으리요.

 

P670

헛된 권위만 살았을 뿐 책임 의식이 없으므로 자기에게 좋은 것만 택하고 힘든 일은 하지 않는다.

 

P670

문제가 생길 때는 신라가 그랬고 고려가 그랬듯이, 성인의 가르침도 소용없는 절망의 순간이 온다. 지금 우리 시대의 풍속은 거기서 얼마나 멀까? 성인조차 나타나지 않는,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으로 경계 삼을 사표를 세울까?

 

P672

세상과의 절연이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돼지우리 같은 시궁창에 뒹굴어도 살아 있음이 소중하고, 복마전 같은 세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아옹다옹 싸우며 한 세상 마치는 것이 모정의 세월이다. 누군들 거기서 벗어나 홀로 한 길을 가고 싶겠는가. 그런데도 그 길을 간 사람들에게는 뭔가 곡절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P672

공자는 "천하에 도가 있으면 드러나고, 없으면 숨는다"고 말했다. 여기서 숨음과 드러남의 매개체는 ''.

 

P672

불교에서의 숨음은 이와 다른 면이 있는 듯하다. 세상에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고만 해서 은거가 아니다. 또 드러냈다고 해서 드러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불교적 인식의 숨음과 드러남을 이해하자면 보다 복잡한 변증법적 사고가 필요하다.

 

P682

"내가 일찍이 포산에 머물며 그 분들의 남기신 아름다움을 적어 놓았었다. 이제 여기 함께 적는다."는 말을 남긴다. 일연은 아직 젊은 시절부터, 자기가 머문 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꼼꼼히 메모해 두었던 듯하다. 이것이 <삼국유사> 찬술의 재료가 되었는데, 여기서 그 결정적인 증거를 보게 된다. 여기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의 다른 많은 부분들도 이렇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유사>는 일연이 곳곳에서 머물 때마다 써 둔 메모들의 집합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684

숨는다는 것은 오히려 잘난 척 하는 데 불과하다. 연회는 거기서 자신도 모르는 제 속마음을 들켰기에 불쾌했는지 모른다.

 

P686

숨되 숨는 것이 아니요, 드러나되 드러난 것이 아니라는 불교의 변증법적 피은의 논리란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P688

어떤 책이거나 거기에는 그 책만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 <삼국유사>의 이념이 불교일 뿐이다.

 

P688

일연 개인이 가지고 있는 깊은 효심이다. 그의 생애에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무척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일연의 어머니에 대한 태도는 너무나 분명히 나타나 있어 췌언이 필요치 않다.

 

P689

삼국유사의 마지막 편에 효선이 들어간 것은 일연의 개인사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비문에 나타난 대로 여든을 바라보던 일연은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국사의 자리를 버리고 고향 근처로 내려와 어머니를 모신다.

 

P690

어머니에 대한 일연의 향념은 신앙 그 자체다.

 

P690

일연의 일생이 뜻 깊은 까닭 가운데 하나로 '신정한자애'를 들고 있는 비문을 보건대, 효심은 일연을 일연이게 한 주요한 요소다.

 

P691

흥덕왕 때였다. 손순이라는 이는 모량리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학산이다.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며, 곡식을 받아 늙은 어머니를 모셨다.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이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매번 할머니의 음식을 뺏어 먹는 것이었다. 손순이 이를 곤란하게 여기고 아내더러 말했다.

 

P692

다만 배불리 모시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 편하게 못해 드린 것이었습니다.

 

P693

부부가 놀라워하며, 잠시 숲 속의 나무 위에 걸어두고 시험삼아 쳐보니, 소리가 은은하기 그지없었다. 아내가 말했다."기이한 물건을 발견했으니, 아마도 아이의 복인가 합니다. 묻어선 안  되겠어요." 남편도 그렇다 여기고, 곧 아이와 종을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들보에다 종을 걸어두고 치니,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를 듣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서쪽 교외에서 기이한 종소리가 들리는구나. 맑게 퍼지는 것이 보통이 아니야. 빨리 찾아보라." 신하가 그 집에 와서 살펴보고 왕에게 사정을 자세히 아뢰었다. 왕이 말했다. "옛날 곽거가 아들을 묻어 하늘에서 금 솥을 내려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이 아이를 묻으니 땅이 돌 종을 솟아나게 했구나. 옛 효도와 지금의 효도를 하늘이 함께 살피셨도다." 이에 집 한 채를 내리고, 매년 메벼 50석식을 주어, 그 순수한 효도를 드높였다.

 

P695

이제 또 시주하지 않으면, 다음 세상에서 더욱 힘들어지겠지요? 작지만 저희가 가진 밭을 법회에 시주해서, 다음 세상에 갚아주시길 바라는 게 어떨까요?

 

P697

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석굴암)를 지었다고 한다. 왕이 아닌 사람이 이렇게 큰 규모의 불사를 다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서, 경덕왕이 아들을 낳기 위해 표훈을 통하여 토함산 상제에게 빌었다는 삼국유사 기록을 가지고 불국사의 창건 배경을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P699

석굴암에 가 보았자 유리벽 저편에 앉은 본존불만 볼 수 있다. 어쩌다가 운이 좋아, 석굴암 주지 스님과 친한 사람들이 구경 왔을 때, 그 틈에 끼여 잠깐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있었지만 말이다. 차라리 그보다는 입구에서 석굴암까지 오롯이 나 있는 이 길을 무심히 걷는 것이 좋다.

 

P701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는 어렵고 인생은 짧은데, 효도를 마친 다음이라니? 그건 너무 늦다. 내가 죽기 전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거라."

 

P702

진정은 침통한 생각으로 머리를 떨구고 있었다.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더니, 쌀독을 뒤집어 쌀 일곱 되를 털어 내, 그 자리에서 밥을 짓고는 말했다. "네가 밥을 지어 먹으면서 가느라 늦어질까 오히려 두렵다. 내 보는 눈앞에서 그 중 하나를 먹고, 나머지 여섯 개는 싸서 서둘러 가거라."

 

P703

어쩌면 참된 효도가 무엇이겠냐는 일연의 질문을 담고 있는 진정의 이야기는, 여덟 살에 어머니 곁을 떠나, 그 어머니가 70년을 홀로 사시도록 이 세상에서는 외롭게만 해 드렸던 자신의 삶에 대한 답변이지 않았을까?

 

P703

그러나 진정은 주먹밥 일곱 덩이 싸주며 호통치듯 자신을 떠나 보낸 어머니의 임종도 보지 못하였다. 세속의 인연을 가르기란 그렇게도 질긴 것이지만, 진정의 마음은 못내 아프기만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소식이 전해오자, 진정은 가부좌한 채 7일 동안 입정하더니 일어났다고, 일연은 쓰고 있다.

 

P703

진정의 어머니가 그의 꿈에 나타났다. "나는 이미 하늘나라에서 태어났구나"

 

P704

재래 신앙이 강하게 형성되었던 사회중심부에 외래의 불교가 파고들어 오는데, 신라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거기에 종속되지 않는 면을 보여 주었다.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이 조화하여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 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P706

표기 수단이 외연적 현상이라면 문제 안에 내포된 은밀한 논리가 있다. 무엇을 그토록 표현하고 싶었으며 어떤 내용을 담으려 하였는가?

 

P706

아마도 신라인들은 그들의 고유 정서, 이것을 담아 낼 그릇으로서 우리만의 표기 수단을 필요로 했던 것 같고, 찬기파랑가, 제망매가, 원왕생가 같은 절창의 노래를 얻어냈다. 향가는 그런 노래이기에, 일연조차도 이를 평가해 '천지간 귀신이 감동하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P707

이 자료가 없었다면 우리 시가의 한 시대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논의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니 아찔하기까지 하다. 좋은 시인은 좋은 시를 쓰기도 하지만 좋은 시를 알아볼 줄도 안다. 일연은 분명 그런 시인이었다.

 

P709

현존하는 향가의 작가는 화랑이거나 화랑 출신의 승려 또는 승려가 압도적으로 많다.

 

P709

한마디로 말한다면 향가는 서정시다. 개인의 일상이 개인의 정서 속에서 부딪혀 형상화되어 있다.

 

P710

향가는 일상사의 개인이 부르는 곡진한 노래다.

 

P710

시는 현세의 문제 속에 있으면서, 현세에 안주하지 않는 초월성을 가진다.

 

P712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조화. 이것은 곧 신라 사회를 이룩한 미의 근본이다. 저 불국사 석굴암의 부처님이 남자로 보기에는 부드럽고 여자로 보기에는 위의가 넘친다는 평처럼, 이 나라를 일으키고 지킨 조상들은 두 가지를 조화시켜 깊은 미의식을 창조해 냈다.

 

P714

노동요는 일할 때 부르는 민요다. 힘든 일을 하다 지치고 괴로울 때 부르는 노래는 위안을 준다. 더욱이 함께 입을 모아 부르다 보면 박자에 맞추어 행동이 통일되니 힘이 덜 든다. 태어난 일 자체가 설움, 우리는 그 운명의 짐을 저버리지 못한다.

 

P718

신기루를 보고 왜군이 왔다고 호들갑들 떤다든지, 산행 오는 화랑을 맞으려는 달이 무심히 떠 있는데 사라진 혜성을 두고 뭐 그리 놀라느냐는 표현은 곧 변괴를 두려워 말라는 융천사의 차원 높은 응원이다. 출전하는 세 화랑에게 써준 격려의 노래였다.

 

P720

충성심과 이기심은 종이 한 장 차이다.

 

P720

세속의 명예와 권력이 좋다고는 하나 인생의 무상함을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으랴. 경덕왕 22, 신충은 두 친구와 더불어 벼슬을 그만두고, 산으로 들어가 절을 지어 그 곳에 거처하며, 임금을 위해 복을 빌었다.

 

P722

노래 한 곡에도 감동하는 도적들이나, 한 구비 너머 두 구비까지 내다보는 영재의 깨달음이나, 모두 놀라운 경지에 있다.

 

P724

신라 말 고려 초 선종의 여러 종파를 전래한 승려마다 수십 년 걸친 고행 끝에 스승으로부터 분명한 인정을 받아 돌아온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단순한 수입이 아닌 자기화한 어떤 사상의 고갱이를 발견한다.

 

P725

순수 불교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일연의 태도에서 우리는 괴승의 요소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선각자적 태도를 발견한다. 전쟁과 정치적 불안 속에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바졌고, 민족에 대한 각성이라는 더욱 큰 문제가 그들 앞에 닥쳤다. 한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일연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와 여러 부면에서 부딪혔던 것이다.

 

P728

개명에는 놀랍고도 중요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일연은 처음 이름이 견명이었고 불교 이름을 희연이라고 지어 밝음과 어둠을 대조시켰다. 옛 사람들이 이름 다음에 자를 지을 때 흔히 하는 방법이다. 그러다가 만년에는 이 둘 곧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에 일자를 넣었다. 밝음이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은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일연의 개명 과정에는 숨어 있다.

 

P733

새롭게 서야 할 질서, 그것을 일연은 불교 안에서부터 보았던 것은 아닐까?

 

P733

선종의 형성 과정에서 산문을 따지는 일은 중요했고, 일정한 규칙이 형성된 다음 그것은 관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혁신적 과업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에 불과할 뿐 본질은 아니다. 본질의 문제, 그 앞에서 일연은 기존의 방편을 주수고 있었다.

 

P733

일연의 원융적이고 포괄적인 태도의 소산

 

P733

새로운 시대상을 창출한다는 명제 앞에서 다른 산문의 경전을 해석하는 일이나 다른 산문의 고승을 스승으로 삼는 일이 무엇이 대수이겠는가. 오히려 거기에 가르침의 본질이 있다면 가서 배워야 하고, 그 업적을 널리 현창 하여야 하는 일이다.

 

P734

본질 앞에서 방편은 수정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멀리 목우화상을 이었다'는 말의 함의이다.

 

P734

일연에게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인식이 보다 구체화되는 것은 <삼국유사>의 편찬이다. 내외적으로 불어 닥쳤던 거대한 변화의 조류는 필연적으로 전통적 사고방식의 해체를 가져왔는데, <삼국유사>는 그 같이 변화된 모습을 담는 그릇이었다.

 

P735

여기서 말하는 민족의 개념은, 고대 국가의 초보적 형태를 벗어난 다음부터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근대적 개념의 민족이 성립하기 이전까지, 곧 중세의 단계를 말해야 옳을 듯하다. 그러기에 나는 13세기를 중세의 시작이라고 본다.

 

P736

표면적 전범은 중국이 민중을 다스리거나 변방민족에게 요구할 때 쓰던 형식적 전범이었다면, 이면적 전범은 권력의 질서를 세워나가는 데 유리한 내용적 전범이었다.

 

P738

중국에서 처음 나라가 설 때부터 한나라를 일으킨 유방에게까지 신이한 일로 점철된 건국의 역사를 낱낱이 대는 것도 우리도 이면의 전범을 하나쯤 마련하겠다는 일연의 논리적 전거 대기다. 그러기에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삼국의 시조가 신이한 데서 출발했음을 무엇이 괴이한 일이랴"고 반문한다. 자존심의 극치다.

 

P738

물론 향가는 이야기와 함께 엮어지므로 기술상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그런 사정이라면 더 많은 한시 작품도 있는데, 그것은 애써 외면한 채 향찰 곧 우리 표기법에 의한 시에 힘을 기울인 사실 의미심장하다. 이는 분명코 삼국의 건국 과정을 믿지 못할 괴이한 일로 쳐버리지 않은 태도와 관계가 있다.

 

P739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신라 문화의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P741

그 자존심은 재래 신앙에서 불교신앙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데서 나온 것이다. 다름 아닌 향가의 대표적인 시인에게서 보이는 이런 태도가 곧 향가의 성격을 결정짓는 요소다. 민족적 정서를 그 고유어로 가장 잘 드러낸 시 그것이 향가이고, 일연은 이 점을 가치 있게 보았던 것이다.

 

P741

13세기 혼미한 사회를 살다 간 일연은 종교와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한 혁신적인 승려였다. 그가 <삼국유사>에서 원효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음을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 자신이 원효 스타일의 원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삶의 모습으로 보였을 터다. 물론 승려이기에 그가 보여 준 행적은 일반적인 경우의 충격적인 것과 정도가 다르겠지만 승려의 신분 안에서는 분명 예외적이었다. 그러기에 누카리야와 같은 학자가 순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렸을 법한데, 이는 한마디로 사회사적 배경을 무시한 결론이다.

 

P742

비슷하게 맞닥뜨린 고난의 세월과 온몸으로 맞서면서도 <삼국유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누가 부탁한 일도 아니었고, 돈이 되는 일은 더욱 아니었지만, 우리에게 <삼국유사>는 깊은 밤 외딴 산길 멀리서 흔들리는 불빛 같은 그런 존재였다.

 

3. 내가 저자라면

 

삼국유사는 국사 수업에서 늘 배우는 제목만 아는 책인지도 모른다. 이는 고운기가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삼국유사가 갖고 있는 다양한 가치가 우리 시대에 큰 소용이 없었음을 반증하는지도 모른다. 잊고 있는 역사 속의 우리의 혼과 정서를 찾는 것은 우리만의 정체성 찾기에 가장 우선일 진데 그간 소홀한 면이 없지 않았다. 나의 경우만 해도 역사와 큰 연관이 없는 공학자로서 직업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만 사람으로서는 이 나라와 민족의 한 사람일진데 스스로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 왔던 것이다. 자신을 모르는 것은 질문을 받았을 때 스스로 입장과 태도를 정하기 어려울 수 있고 적절하지 못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나라를 저버리고 민족을 잊고 사는 것이 그런 것이다.

 

삼국사기의 내용은 여러 책을 통해 짧게 알고 있었지만 고운기의 삼국유사를 통해 전체적으로 삼국사기가 갖는 시대적 의의와 현재 우리 시대에서 삼국유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되살려야 할 지에 대한 좋은 지침을 준 것이라 반갑다. 21세기에 이렇듯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책들이 나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새로운 부흥이 도래하고 있는 서광은 아닐지 조심스럽게 전망해본다.

 

고운기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는 삼국 유사의 모든 내용을 한글로 번역한 책은 아니다. 주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권별로 중요한 내용을 소개하며 삼국유사의 의의와 그 시대의 중요한 점과 일현이 표현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여행 안내서이다. 역사서는 단순히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그 역사를 이끌어가는 맥락이 있고 그 맥락을 하나 하나 짚어 주는 역사서 저자의 의지와 감각에 따라 역사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특히, 삼국 사기와 대비하여 삼국 유사를 해석해 나가는 고운기의 설명은 삼국 유사가 전해주는 내용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이야기가 삼국 유사에 실리게 된 맥락을 잘 전해준다.

 

내가 저자라면 고운기의 우리가 알아야 할 삼국유사에 삽화를 채워 넣어 이해를 돕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설화가 있고 기연이 있는 삼국유사는 옛 자취를 고증하는 사진보다는 삽화를 통해 이야기를 살려내면 더 좋을 것같다. 자칫 동화책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한결 흥미롭고 읽는 재미가 남다를 것 같다. 최근에 만화를 이용한 역사 그리기가 활성화 되고 있다. 완전 만화책처럼은 아니더라도 삼화가 적절히 들어가 그 중요한 장면들을 표현해 준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리고, 지도가 추가되는 것이 필요하다. 저자 고운기는 이를 위해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두 책을 같이 보면 좋겠지만 삼국 유사의 이야기별로 지도를 하나씩 넣어서 그 이야기가 벌어진 지역을 표시해 준다면 한 결 이야기가 생생하게 이해되고 답사에 대한 욕구도 커질 것이다.

 

감동적인 장절

 

거창하게 모임을 만들고 절을 짓고, 근엄한 예불을 올리는 이들에게 부처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껍데기 미타 신앙이 가진 허위 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자는 목적이라기 보다, 제 육신을 잊고 끝내 버리고 만 욱면이라는, ‘평범한 시기의 부유한 층의 계집종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에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과 격려를 받는다.”

 

21세기 욱면으로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일상이 돈벌이로 채워지고 휴식은 그저 돈을 쓰는 것으로 채워져 결국 돈을 벌어 돈 쓰기에 인생을 바치는 일상에 길들여진 우리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욱면의 진실된 고행과 기도를 볼 때 누군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그를 통해 나도 욱면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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