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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9일 07시 43분 등록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10기 김정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 글, 양진 사진, 현암사

 

1. 저자에 대하여

 

일연 1206(희종 2)1289(충렬왕 15)

 

고려 시대 승려. 경주 김씨. 첫 법명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일연(一然), 호는 목암(睦庵). 법명은 일연(一然). 경상도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현재의 경산) 출신.

 

저서로는 『화록』 2, 『게송잡저』 3, 『중편조동오위』 2, 『조파도(祖派圖) 2, 『대장수지록』 3, 『제승법수』 7, 『조정사원』 30, 『선문염송사원』 30, 『삼국유사』 5권 등이 있다.

 

견명으로서의 삶

 

참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 문신들에 비해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던 무신들이 들고 일어났다. 무신들은 결국 난을 일으켰다. 정중부, 이의민이 차례로 권력을 잡고, 최중헌이 고려의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왕을 업신여기고 있었다.

 

이 무렵, 경산도 경상군의 김언필의 아내 이씨 부인은 이상한 꿈을 꾼다. 하늘에 떠 있는 해가 지붕을 뚫고 들어와 자신의 몸을 환히 비춘 것! 게다가 똑 같은 꿈을 4일이나 꾸게 된다. 그리하여 얻은 아들, 견명! 어릴적부터 책읽기를 좋아하는 견명은 벼슬을 하기에 어려운 신분이었다. 부모는 무관이 되기를 바랬지만, 생명을 죽이는 무관에 뜻이 없다는 뜻을 밝혀 승려가 되겠다는 꿈을 꾼다. 아홉 살 견명은 광주의 무량사에서 불교 공부를 시작한다.

 

일연으로서의 삶

 

견명에게 세상만사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불경을 공부하는 것은 너무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는 열네 살이 되던 1219년 정식스님이 되었다. 이때부터는 그는 일연이라 불리게 되었다.

 

불교는 크게 교종과 선종으로 나뉜다. 불교 경전을 중심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교종은 학식이 높은 왕족과 귀족에게 각광을 받았으며,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선종은 글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과 지방 호족들, 그리고 그 당시 권력을 잡고 있는 무신들이 좋아했다. 일연은 가지산문이라는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선종의 한 유파의 영향을 받았다.

 

일연은 22살이 되던 해, 승과(승려에게 법과를 주기 위해 보는 과거)를 보고,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전쟁을 겪은 후 깨달은 역사의 소중함

 

최중헌의 무신 정권이 권력을 잡고 있는 1231, 중국 대륙을 평정한 몽고군이 고려를 침략해왔다. 최씨 무신 정권은 강화도로 피신했고, 백성들은 몽고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죽임을 당하는 기간이 무려 30년이나 지속되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일연은 역사의 소중함을 깨닫고 후에 <삼국유사>를 쓰는 계기가 된다.

 

몽고의 지배를 당하던 때, 민족의 역사를 바로 알고 지켜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역사서를 편찬하기로 한다. 유리 역사의 시초를 고조선으로 잡고, 민간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도 많이 담는다. 그래야 먼 훗날에도 우리의 땅과 역사를 보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상권

(사진 해설)

삼국유사는 역사책보다는 이야기책에 가깝다. 거기 적힌 이야기들이 더욱 흥미로운 것은 지금까지도 이야기의 현장에 남아 있다는 법이다. 이제 그 곳으로 찾아가 본다. 아쉽게도 대부분은 그 옛날의 모습이 아니라 탑 하나만 덩그러니 있거나 주춧돌 몇 개만이 밟힐 뿐이지만,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상상하며 천 년을 넘나드는 재미는 쏠쏠하다. (경주 미탄사 터)

 

삼국유사는 역사책이라기 보다 이야기책이다. 전래 동화를 모아 놓은 듯하다. 그래서 천 년의 시공을 달리해도 친근함이 느껴졌다. 저자의 따뜻한 감성이 느껴졌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세력을 잡은 고구려의 흔적을 남한에서 찾는 것은 그리 쉽지 않지만 한강을 따라서 더러 남아 있다. 한강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단양의 온달산성은 한때 중원을 차지했던 고구려가 1,500년 전에 쌓은 대표적인 고구려 식 산성이다. (단양 온달산성)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의 이야기의 주인공 고구려의 장수 온달의 이름을 붙인 산성이다. 고구려에 온달(?590)이라는 장군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 워낙 파리하고 어리석어 남들이 바보 온달이라고 놀렸다. 한 편, 고구려의 평강왕(평원왕의 다른 이름)에게는 공주가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워낙 잘 울어 “자꾸 울면 나중에 온달에게 시집 보낸다.”고 했다. 그 후 왕이 공주를 고씨 귀족과 결혼시키려 하자 “어찌 왕으로서 다른 말을 하느냐”며 궁을 나와 온달에게 갔다. 그리고 궁전에서 가지고 나온 패물을 팔아 그 돈으로 온달을 공부시키고 무예까지 배우게 했다. 나중에 동맹 잔치 때 사냥 대회에서 온달이 우승하자 왕은 그가 바보 온달에, 자신의 사위임을 알고 크게 놀랐으며, 그 뒤 전쟁에서 온달은 큰 공을 세워 대형의 벼슬을 했고,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자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며 내려갔지만 아차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백제를 세운 사람들은 고구려의 유민이었다. 이 사실은 무덤의 생긴 모양에서도 나타난다. 돌을 층층 쌓아 만든 백제 초기의 무덤은 고구려의 무덤 양식과 같고, 온달 산성의 돌 쌓기 방식과도 닮았다. (서울 석촌동 백제고분)

 

지금의 경주 땅에 살았던 여석 부족의 왕으로 열세 살짜리 꼬마가 추대된다. 신라의 첫 왕 박혁거세다. 박혁거세는 남산 근처 나정 곁에서 발견된 알에서 나왔다고 하며, 왕비 또한 동갑내기로 계룡의 옆구리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57년의 일이다. (경주 나정)

 

태종무열 왕은 김유신과 더불어 백제를 무너뜨리고 삼국 통일의 초석을 놓는다. 경주 선도산 남쪽 아래에 무열왕릉이 있다. 금방이라도 머리를 쑥 내밀 것 같은 이 거북은 무열왕릉 비석을 세웠던 받침돌인데, 비석은 없어지고 무열왕릉임이 적힌 비석 머리와 이것만 남았다 (경주 무열왕릉)

 

삼국통일의 선봉에 섰던 김유신은 죽어서 흥무대왕이라는 시호를 얻었다. 살아서의 그의 업적만큼 김유신의 무덤은 여느 왕릉보다 크고 화려하다. 김유신의 무덤에는 아름답게 조각된 십이지신이 아직까지 잘 남아있다. (경주 김유신의 무덤)

 

토함산으로 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우람한 석탑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위로 길게 솟은 날카로운 철주가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는 모습, 해질녘 감은사 터에서만 즐길 수 있다. (경주 감은사 터)

 

달도 해처럼 동쪽으로 뜬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동해에서 떠오르는 달은 황금빛이다. 달은 점점 솟아오르면서 은빛이 된다. 은빛 달과 검푸른 바닷물이 만나서 푸르스름한 달빛이 대왕암을 감싸는 순간, 문무왕이 죽은 다음 되었다는 동해 용이 보이는 듯하다. (경주 대왕암)

 

24

문자에 대한 자신감, 이는 저술을 감발시키는 촉진제다. 첫번째 저술은 역사서로 정해졌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새로운 나라가 들어선 다음, 그 앞 시대를 정리한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에서 보편화되어 있었다. 한문이라는 문자수단의 이입은 그 문화를 송두리째 가지고 들어왔고, 특히 중국에서 만들어져 하나의 전범을 이루고 있었던 사마천의 사기는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름마저 거기에 기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고려 인종 23 (1145) 의 일이다.

 

새로운 삶을 맞이하기 위해, 그 이전 삶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100여 년이 흘렀다. 그 사이 고려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문신 귀족들의 차별에 불만을 품은 무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잡은 것이다. 무인들의 집권은 단순히 집권 자체로 끝나지 않았고 세계관에 변화를 주었다. 도저히 일어나리라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고정관념이 깨진 새로운 세계를 맛보게 된다. 무인 정권 이후 고려는 전반기와는 아주 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다.

 

새로운 분위기란 다름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로 대표되는 고려 전기 지식인들의 세계 인식은 사대(事大)로 요약된다. 본격적으로 중국의 문화에 압도당하기 시작한 사회에서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념의 틀은 우리에게서 다시 만들어져야 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다는 말인가.

 

혼란의 시기, 성찰하기에 적기이다. 성찰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장애를 숨기는 삶에서 장애를 내어놓은 삶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했다. 내가 나무로서 제대로 서기 위해, 내 뿌리를 단단히 하는 작업과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 모든 질문은 엄마가 꾼 나의 태몽으로 귀결되곤 했다. 나는 잿빛 눈빛을 가진 봉황 꿈을 꾸고 태어난 사람이다. 잿빛이라 눈빛이 좀 흐리긴 해도 봉황은 봉황이다. 새로 태어난 이후, 봉황 태몽이 자주 떠오른다. 이제, 날아보자, 봉황처럼!

 

새 중의 왕은 봉황새’라는 말처럼 봉황은 모든 새의 우두머리로 여겨지며, 한국인의 의식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민속 상상 동물이라 할 수 있다. ‘봉황은 새 중의 으뜸으로,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왔다. 이 새가 한 번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고 하여 봉황은 곧 ‘천자(天子)를 상징하게 되었다. 천자의 궁문에 봉황을 장식하여 ‘봉궐(鳳闕), ‘봉문(鳳門)’이라 하였고, 천자의 수레를 장식하여 ‘봉거(鳳車)’나 ‘봉련(鳳輦), ‘봉여(鳳輿)’라 했다. 좋은 벗을 ‘봉려(鳳侶), 아름다운 누각을 ‘봉대(鳳臺),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봉음(鳳音)’이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예로부터 봉황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잘 드러난다.” (출처: 네이버케스트)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송나라의 멸망과 원나라의 성립이었다. 당에서 송으로 이어지며 높아질 대로 높아진 한족의 자존심을 일거에 무너뜨린 이 일은, 그렇지 않아도 우리 중심의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해 보려던 고려의 정권 담당자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암시를 함께 주었다. 하늘처럼 알았던 한족의 중국도 변방의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가. 당대의 관념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세계관의 변화는 곧 역사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모든 것을 중국 중심으로 해석했던 <삼국사기>의 역사 기술은 이쯤 와서 힘을 잃게 된다.

 

고려의 정권 담당자들이 한자와 중국 한족의 자존심에 그 세계관을 두었다면, 공교육에서 영어를 그토록 중시하는 현 정권은 아메리칸의 자존심에 그 세계관을 두었나? 하늘처럼 알았던 한족이 무너지자, 고려 당대의 관념이 무너졌다. 우리 민족의 외부에 의한 가치관 형성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씁쓸하다.

 

지난 대통령 선거 이후, 우리 나라 역사에서 세계관의 변화, 역사관의 변화가 있었던 시기가 있기는 했었나 궁금했다. 역사 선생님께 여쭤 보았더니, 고려의 무신 정권 말고는 전무후무하다는 답을 주셨다.

 

25

삼국유사 탄생의 배경은 아무래도 이 두 가지 당대의 세계사적 사건으로 잡아야 할 것 같다. 1206년에 태어나 13세기를 온전히 살다간 일연은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시대의 변화를 겪었던 사람이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그가 승려였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이었다. 유학을 기본으로 하는 선비들이야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고 한들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 주는 데 반해, 승려들은 처음부터 중국 중심에 서 있지 않았으므로 보다 빨리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신라 말부터 유입된 선종은 사고의 혁신을 불교 안에서 먼저 이루어 사회로 퍼져나가게 했다.

 

이 같은 역사 인식의 변화를 놓고 볼 때 일연이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단군조선을 실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같은 시기의 지식인 이승휴가 그의 책 제왕운기에 비슷한 내용을 실었고, 이보다 조금 앞서 이규보가 동명왕의 사적을 발굴하여 서사시로 그렸던 점과 맥을 같이한다. 삼국유사는 이 시기에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일연이 찾아낸 인식의 변화의 중심에 단군조선이 있다. 내 인식 변화의 중심엔 봉황 태몽이 있다. 엄마는 태몽 한번 잘 꿔 주셨다.

 

37

그 때 곰과 호랑이가 굴에 같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늘 환웅 신에게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하고 빌었다. 환웅 신은 신령스러운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낱을 주고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아라. 사람의 모습을 얻게 될 게야하고 말했다. 곰과 호랑이는 받아서 그것을 먹고 21일을 꺼렸다.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제대로 꺼리지 못해 사람의 몸이 되지 못했다.

 

곰 아가씨는 누구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다. 잉태하고 싶어 늘 신단수 아래에서 빌었다. 이에 환웅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 혼인하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이라 불렀다.

 

왜 하필 곰과 호랑이였을까. 곰을 숭배하는 부족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의 결합이라 들은 적이 있다. 하긴, 21세기 미국에서 인형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47

약간의 추측이 가능하다면 일연은,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위만조선을 단군조선의 후계로 여겼으리라 생각한다. 중국에서 직접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위만조선을 그 다음 조에 이어 놓은 일연의 생각은 여기서 조금씩 드러난다.

 

중국에서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한 일연이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쓴다면 역대 대통령들을 어떻게 구분하여 기록할지 궁금하다.

 

53

기이 편의 북부여 조를 보자.

전한서 에서는 선제 신작 3년은 임술년(기원전 59)인데, 4 8일에 하늘님이 흘승골성에 내려와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도읍을 정한 다음 왕이라 불렀다. 나라의 이름은 북부여요 스스로 해모수라고 불렀다. 아들을 낳아 부루라 하였는데, 해라는 글자를 성으로 삼았다. 부루왕은 뒤에 옥황상제 곧 하늘님 해모수의 명을 받들어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동영명이 북부여를 이어 졸본주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라 하였으니, 곧 고구려의 시초이다.

 

54-55

동부여 조 다음에 이어지는 고구려 조에 와서 밝혀진다.

시조 동명성제는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이다. 이와 앞서 북부여의 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자리를 피한 다음, 부루가 죽고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나는 하백의 딸이요, 이름은 유화입니다. 여러 동생들과 나와 노닐 때에 한 남자가 자신은 하늘님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웅신상의 아래 압록강변에 있는 집안으로 꾀어 관계를 맺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절차도 없이 남자를 따라갔다 꾸짖으시고 이 곳에 가두었습니다.

금와는 이를 기이하게 여겨 방안에 깊이 가두었다. 그런데 햇빛이 비추자 몸을 움직여 피하게 했으나, 해 그림자가 또 좇아와 비추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거니와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왕은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는데 다들 먹지 않았고, 또 길거리에 버렸는데 소나 말이 피해 갔으며, 들판에 버렸는데 새와 짐승들이 덮어 주었다.

왕이 쪼개보려 했으나 깰 수도 없어 결국 어미에게 돌려 주었다. 어미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데 두었더니, 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었다. 골격과 겉모습이 헌걸차고 우뚝했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헌칠하여 비상했고,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이면 백 명중이었다. 세간에서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이를 가지고 이름을 지었다.

 

58-59

왕은 주몽에게 말 기르는 일을 시켰다. 주몽은 그 가운데 좋은 말을 알아보고는 먹이를 줄여 삐쩍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길러 살지게 하였다. 왕은 살진 말을 타고, 마른 것은 주몽에게 주었다.

왕의 아들들이 여러 신하와 함께 해코지를 하려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이를 알고서 일러 주었다.

이 나라 사람들이 너에게 해코지를 하려 하는구나. 네 재주로 친다면 어디 가든 되지 않겠느냐? 빨리 대처하려무나.”

이에 주몽은 오이 등 세 사람을 친구로 삼아 길을 떠났다. 엄수에 이르러 물을 바라보고, ‘나는 하늘님의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이다. 오늘 멀리 달아나고자 하는데, 쫓아오는 자는 다가오니 어찌하리라고 말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다 건넌 다음에는 다리를 풀어버려 추격하던 말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59

주몽의 이 같은 고난의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영웅은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 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이 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영웅 소설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대체로 이 같은 유형으로 지어지는데, 아마도 그 원조는 주몽의 이 이야기가 아닐까?

 

졸본주에 이르러 비로소 도읍을 정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은 없어, 다만 비류수 웃편에 띠집을 짓고 머물렀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 때문에 고를 성씨로 삼았다. 이 때 나이 열두 살. 한나라 효원황제 건소 2년은 갑신년(기원전 37)인데, 이 해에 즉위하여 왕이라 불렀다.

 

고구려 시조는 동명성왕 고주몽

 

61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인데,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주몽을 보더니 범상치 않다 여겨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 부여의 왕이 돌아가시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요, 다음은 온조였다. 이들은 나중에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 마려 등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 때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61-62

주몽이 북부여를 떠나기 전에 이미 아들을 하나 낳았다. 아들은 신표를 남겨두고 떠난 아버지를 찾아오고, 그가 고구려의 제2대 유리왕이 된다. 태자란 바로 이 유리왕이다.

 

62

비류와 온조가 드디어 한산에 이르렀다. 지금의 서울이다. 형제는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의견이 갈렸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자고 하자 열 명의 신하가 말했다.

하남 땅은 북으로 한수를 두르고, 동으로 높은 산에 기대고 있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에 큰 바다가 막혀 있습니다. 이만큼 하늘이 내린 요새와 땅이 주는 이득이 큰 곳을 얻기 어렵지요.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하들의 이런 간청에도 비류는 듣지 않았다.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이다. 한편 동생인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지금의 서울 송파구 풍납동이며 풍납토성에서 백제유물이 발굴되었다)을 도읍으로 삼았다. 열명의 시하가 보필을 하게 되어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이 때가 바로 신라로는 박혁거세왕 39(기원전 18)이었다.

얼마 후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었으므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위례성의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 깊이 뉘우치다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백성들이 매우 기뻐했다 하여, 나라 이름을 고쳐 백제라 했다 이것이 곧 백제의 탄생이다.

 

62-63

백제는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해()를 성씨로 삼았다.

 

시조 온조왕은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데, 몸이 크고 성품이 효성스러웠으며, 말을 타고 활쏘기를 좋아했다.

 

67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앞서 환웅과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가 직접 왕이 된다든지 왕이 될 아들을 낳은 것으로 북방계 민족과 나라의 출발을 보았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곧 오리지널의 출발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남쪽에도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이 있음을 말하는 일연의 의도란 곧 북쪽과 계통을 달리하는 오리지널이 있음을 강조하자는 데 있지 않을까?

 

67-68

전한의 지절 원년은 임자년(기원전 69)인데, 3월 그믐에 여섯 부족의 시조들이 각각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의 강변 위에서 모여 논의하였다.

우리들은 위로 임금이 없어, 다스리려 하나 백성을 이끌지 못합니다. 백성들은 모두 제멋대로이고 하고 싶은 대로 하지요. 어찌 덕을 갖춘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두지 않겠습니까?

그런 다음 높은 곳에 올라 남쪽으로 양산을 바라보니, 그 아래 나정 곁에 이상스런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고, 흰 말 한 마리가 무릎 꿇어 절을 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찾아가 살펴보니 자주색 알이 하나 있었고, 말은 사람들을 보고 하늘을 향해 길게 울었다. 알을 쪼개자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놀랍고도 이상하게 여겨 동천에서 몸을 씻어 주었다. 몸은 광채를 띠고, 날짐승 물짐슴이 춤을 추었으며,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게 빛났다. 이 때문에 혁거세라 이름을 지었다. 왕위에 올라서는 거슬한 이라 하였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알에서 태어났다. 백제의 시조 온조는 고주몽의 셋째 아들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도 알에서 태어났다. 삼국의 시조가 과 관련되어 있다.

 

68-69

이 때, 사람들이 다투어 경하 드리고는 이제 천자가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을 갖춘 여자를 찾아 임금의 베필로 삼아야겠네고 말하였다.

이 날 사량리의 알영정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로 어린 계집아이를 낳았다. 몸매와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닭의 부리 같았다. 월성의 북천으로 데려가 씻겼더니, 그 부리가 발락 곧 떨어져 나갔다. 이 때문에 그 냇물의 이름을 발천이라 하였다.

남산의 서쪽 기슭에 궁실을 짓고 이 두 성스런 아이를 받들어 모셨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생겼는데 알이 표주박과 같아 마을 사람들이 표주박을 박이라고 한 데 따라, 성을 박이라 하였다. 계집아이는 태어난 곳 우물의 이름으로 이름을 붙였다.

두 성인의 나이 열세 살에 이르렀다. 오봉 원년은 갑자년(기원전 57)인데, 사내 아이를 세워 왕으로 삼고 이어 계집아이는 왕후로 삼았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신라는 삼국시대를 열었던 세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다. 고구려의 동명왕이 그보다 20년 뒤진 기원전 37, 백제의 온조왕은 40년 뒤진 기원전 18년에 출발하였다. 중국의 한나라 때였다.

 

70

신모는 본디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였다. 어려서 신선의 술법을 익혀 동쪽 나라에 와서 살더니,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인 황제가 솔개의 발에다 편지를 부치면서, ‘솔개를 따라가 멈추는 곳에 집을 지어라고 하였다. 사소는 편지를 받고 솔개를 놓아주자, 이 산에 날아와 멈추었다. 그대로 따라와 집을 짓고, 이 땅의 신선이 되었기에, 이름을 서연산이라 했다.

 

신모가 처음에 진한에 왔을 때, 성스러운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게 하였으니, 혁거세와 알영 두 성인이 그렇게 나왔다. 그러므로 계룡, 계림, 백마 등으로 불렸으니, 닭은 곧 서쪽에 해당하는 까닭이다. 일찍이 여러 하늘의 선녀들을 시켜 비단을 짜고 붉은 색깔을 입혀 조정에서 입을 옷을 만들어 그 남편에게 주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비로소 신선임을 알았다.

 

72

선도산 신모는 누구이며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는 이 대답을 위해 우리들의 민간 신앙에 묻어 있는 신모 신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리산의 여신 신화 성모천왕 전승과 성거산의 여신 전승이다.

 

먼저 지리산의 성모천왕 이야기다. 갑자기 산 개울이 비도 오지 않는데 넘쳐 흘렀다. 한 스님이 이상히 여겨 천왕봉 꼭대기에 올라가 보자, 그곳에 키가 크고 힘센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스스로 성모천왕이라 했다. 인간 세상에 내려와 짝이 될 인연을 만나려 오줌을 눈 것이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고 딸 여덟 명을 낳았는데, 그들은 전국 팔도에 흩어져 무당이 되었다.

이 같은 지리산 성모천왕 전승은 무당이 처음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알려 주는 이야기다. 이를 무조 신화라 한다.

한편 성거산의 여신 전승은 고려 왕족을 성화 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오경이 성거산에 갔다. 여신이 나타나 나는 혼자서 이 산을 맡아 보고 있는데, 다행히 성골 장군을 만났습니다. 부부가 되어 함께 신정을 다스리고 싶군요. 바라건대 이 산의 대왕이 되어 주세요하고 말하였다. 군인들이 호경을 왕으로 높였다.

성거산은 개성 근처의 우봉현에 있다. 여기서 호경이 여신의 도움으로 산의 대왕이 되는 과정은 혁거세가 선도산 신모에게서 태어나 왕위에 오르는 과정과 무척 닮았다. 한쪽이 부부관계라며 다른 한 쪽이 모자 관계라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 선도산 신모는 어머니인 대신 다른 여자를 만들어 짝지어 준다. 그 여자가 곧 자신의 분신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78

즐거운 상상력에 민족적 쇼비니즘이 끼어들면 곤란하다.

 

85

정령의 의인화야 말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사람이 사는 세상의 사람으로 바뀐 이 같은 이야기 구조는 <삼국유사>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곰이 사람으로 바뀌는 단군신화에서 시작하여 호랑이가 아름다운 처녀로 바뀌는 김현의 전설까지 다양하게 퍼져 있지만, 여기 해와 달의 정령을 사람으로 설정한 데서 아름다움은 극치를 달린다.

 

102-103

진평대왕은 그가 매우 특이하다는 말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길렀다. 나이가 열다섯에 이르자 집사에 임명하였다.

비형랑은 날마다 밤에 멀리 나가 놀다 돌아왔다. 왕은 날쌘 군사 50명을 시켜 지키게 하였는데, 늘 월성을 훌쩍 뛰어넘어 황천의 언덕 위로 가 귀신들을 이끌고 놀았다. 용사들이 수풀 속에 엎드려 엿보았다. 귀신들은 여러 절에서 새벽 종소리가 들리자 각기 흩어졌고, 비형랑도 돌아갔다. 군사들이 이 일을 왕에게 알리자, 왕은 비형랑을 불러 물었다.

네가 귀신들과 논다는데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 북쪽 고랑에 다리를 만들어 보아라

비형랑은 왕의 명령을 받들어 그 무리들에게 하룻밤에 돌을 다듬어 다리를 만들게 했다. 그래서 다리 이름이 귀교다.

 

104-105

왕은 또 물었다.

귀신들 가운데 세상에 나와서 조정을 도울 만한 이가 있겠느냐?

길달이라는 자가 국정을 도울 만 합니다.

함께 와 보라

다음 날, 비형랑이 데려와 보이니 집사를 내려 주었는데, 과연 충직함이 견줄 데 없었다. 그 때 각간 임종이 아들이 없어, 왕은 양아들로 삼게 해주었다. 임종이 길달에게 흥륜사 남쪽에 정자를 짓게 했다. 매일 밤 그 문 위에 가서 자므로 길달문이라 했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변해 숨어 달아났다. 비형랑은 귀신을 시켜 잡아와 죽였으므로 그 무리들이 비형의 이름을 듣고 두려워하며 달아났다.

 

귀하신 왕의 혼으로 아들을 낳으니

비형랑 그 사람의 방이 여기네

날고 뛰는 가지가지 귀신들아

이 곳에 머물지는 말아라

 

도화녀와 비형랑 설화에 대한 의미는 무속과 불교의 융합과정을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곧 도화녀와 비형랑 설화의 상징 원형은 일체, 일심 이라고 본 것이다. 즉 대립된 무속과 불교의 융합을 통해 분열된 인간 마음의 통합이 이 설화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견해는 이 설화는 그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이야기로서 무열왕의 아버지 되는 비형랑이 장차 용이 될 과정을 그렸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종합적 해석 1 이범교 저 p 258)

 

105

후백제와 견훤

옛날 광주 북촌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얼굴이 단정했다. 하루는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내가 잠자리에 들어 정을 통하곤 한답니다. 그러면 네게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의 옷에다 꽂아 두어라

딸이 그 말대로 했다.

다음 날 북쪽 담장 아래에서 그 실을 찾았다. 바늘은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뒤에 임신을 하고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 살에 스스로 견훤이라 불렀다.

 

113-114

황룡사가 지어진 것도 장륙존상이 만들어진 것도 진흥왕 때다. 일연은 탑상 편의 황룡사의 장륙 조에서 즉위한 지 14 2, 용궁의 남쪽에 자궁을 지으려 하는데 황룡이 그곳에 나타나, 이에 고쳐서 절을 삼고 황룡사라 이름 지었다고 하였다. 황룡사 건립은 17년이 걸린 역사였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큰 배 한 척이 울산이 이르러 정박하였다. 한 부처님 그리고 두 보살상과 함께 이런 편지가 실려 있었다.

 

서천축국의 아육왕이 황철 5 7,000근과 황금 3만 분을 모아 석가 삼존상을 만들려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로 띄워 보내노라. 인연 있는 나라, 거기 가서 장륙존상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한다.

 

아육왕은 아쇼카왕을 말한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다음 인도에 최고의 불교 국가를 세운 왕이다. 그런 그가 이루지 못할 일을 신라 사람들이 단번에 마치고 황룡사에 모셨다. 이는 신라가 불교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 최초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본지수적 또는 불국토 사상이라 부르는, 토착화된 신라 불교의 모습은 이렇게 만들어져 갔다. 그리고 그것은 통일의 힘을 쌓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라 불교의힘은 무엇보다 먼저 있었던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고 포용해 간 데서 더욱 커진다. 불교가 먼 나라에서 전래된 이방 종교가 아니라, 이미 전세에 인연을 마련한 우리 종교라고 생각한 신라인들의 본지수적, 불국토 사상은 바로 토착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밑바탕이었다.

 

116

진자가 찾아가는 부처님이 구체적으로 미륵선화다. 석가모니가 열반하고 647천만년 뒤에 오신다는 부처님이 미륵이다. 이른바 후세불을 기다리며, 때에 따라서 바로 지금 내려와 달라고 비는 하생신앙은 중국으로부터 무르익어, 이 때 이미 백제에서는 미륵반가사유상 같은 걸출한 불상이 만들어질 만큼 널리 퍼져 있었다.

 

119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늦었기에 오히려 선진적으로 나갈 수 있었다는 점만 적어 두기로 하자. 마치 오늘날 선진 기술을 받아들여 공업화를 이루려는 개발도상 국가들이 중간 과정을 생략한 채 첨단의 그것으로 건너뛰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까? 그러나 신라의 경우, 비록 수용이 늦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철저히 자기화 되어 정착되었으므로, 생경한 외래 사조에 휘둘리지 않았다.

나는 앞서 불국토 사상, 본지수적 등의 용어로 신라 불교의 성격을 설명했다. 이 같은 성격은 자연스럽게 호국 불교 쪽으로 흘러간다.

원광이 화랑들을 위해 지어준 세속오계는 이런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일연은 원광의 전기인 의해 편의 원광의 중국 유학조 가운데 이 부분을 삼국사기에서 인용해 실어 놓고 있다. 귀산과 추항이라는 화랑이 원광과 나눈 대화다.

 

저희들은 꽉 막혀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한 말씀 주셔서 죽기까지 계를 삼기를 바랍니다.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고 따로 열 가지가 있다. 자네들은 남의 신하가 된 몸으로 감당할 수 없을 듯싶다. 그래서 세속오계를 주노라. 첫째,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 할 것이요, 둘째, 부모를 섬기되 효성스럽게 할 것이요, 셋째, 친구와 사귀되 믿음으로 할 것이요, 넷째,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는 일이 없을 것이요, 다섯째, 산 것을 죽이되 가려 해야 할 것이다. 자네들은 이를 행하고 소홀히 하지 말라.

 

원광은 본디 귀족 출신이므로 유학에도 소양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가 만든 세속오계에서 유교의 오륜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 이지만, 승려의 입장으로 실생활에 필요한 인륜법칙을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본디 불교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신라 불교다.

 

120

원광 이후 신라 불교를 일으킨 삼총사라면 역시 자장, 원효, 의상이다. 이들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뒤로 미루자. 다만 여기서는 이들에게서 보이는 호국 불교적 면모를 간단히 소개한다.

자장은 황룡사 구층탑을 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중국의 오대산에서 만난 문수보살이 황룡사의 내 큰아들입니다. 석가모니의 명령을 받아 거기 가 절을 지키고 있지요. 본국에 돌아가거든 절 가운데 구층탑을 지으시오. 이웃 나라들이 항복해 오고, 구한이 조공을 바칠 것이며, 왕실이 영원히 평안 하리다. 하고 말했다. 한편 원효는 보다 직접적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전쟁에 참여한 듯하다.

 

또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사와 만나려고 김유신이 먼저 연기와 병천 두 사람을 보내 만날 기일을 물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종이에다 난새와 송아지를 그려 돌려보냈다. 신라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해 사람을 시켜 원효법사에게 물어 보았다. 원효는 빨리 군사를 돌려보내시오. 송아지와 난새를 그린 것은 둘이 끊어졌음을 말한 것이오하고 물었다. 이에 김유신이 군사를 돌려 대동강을 건너면서 뒤처진 자는 목을 베겠다고 군령을 내렸다. 그랬더니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건넜다.

절반쯤 건넜을 때에 고구려 군사가 공격해 와 미처 건너지 못한 자들을 죽였다. 이튿날 유신이 고구려 군사를 도로 추격해 몇 만 명을 잡아 죽였다.

 

기이 편 태종 춘추공조에서 고구려와의 전쟁 중 김유신이 원효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의상은 삼국 통일 후 계속되는 당나라의 신라 간섭기에 유학승으로 있다가, 당나라의 신라 침공 계획을 급히 알려 주기도 한다.

 

125

선덕왕이 절묘하게 알아차린 세 가지 일 조에서는 저 유명한 당 태종이 보낸 모란꽃 그림 이야기를 쓰고 있다.

 

처음에 당나라 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색깔로 된 모란을 그린 그림과, 그 씨앗을 세 되 보내 주었다. 왕이 꽃을 그린 그림을 보더니,

이 꽃은 분명 향기가 없을 것이오

하고, 뜰에 씨앗을 심어라 하였다. 꽃이 피고 열매 맺기 까지 기다려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신하들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왕은 꽃을 그리면서 나비가 없으니 거기 향기가 나지 않음을 알지요. 이는 곧 당나라 황제께서 내가 배우자 없이 지냄을 놀린 것입니다고 답한다. 꽃에 냄새가 있고 없음을 따지기 전에 이런 에피소드를 보고 있자면, 선덕왕이 여성이기에 좀더 부드럽게 당나라와의 교우를 이어 나갈 수 있었겠다 싶다.

 

역사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바에 의하면, 선덕여왕은 불임이었단다. 아이를 갖기 위해 남편을 세 번이나 바꿨지만 결국 아이를 갖는데 실패했다. 선덕여왕의 모란꽃에 대한 일화를 들으면서 나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자의 마음이 느껴졌다. 선덕여왕은 스스로 꽃은 꽃인데 향기나지 않는 꽃이라 자신을 비유하고 있다. 여성이 한번 아이를 낳으면 그 여성의 은 그야말로 민감해진다. 그렇지 않고서는 시행착오란 있어서는 안 되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거사를 제대로 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은 강하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성 왕으로서 신라의 문화적 황금기 중심에 있었다. 그녀가 아이를 낳은 엄마라면 그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불임인 것은 신라를 다스리는 것에 전력투구하기 위한 신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자로서 왕위에 올랐다. 왕권을 강화할 상징을 조작한다. 그 첫 번째는 지기삼사로서 모란꽃, 여근곡의 백제병사 일망타진, 선덕여왕의 도리천 신앙 유포 그리고 두 번째는 대형 건축물을 건립하였다. 황룡사 9층탑, 분황사 건립, 첨성대 축조가 예이다. 첨성대는 천기를 잘 아는 여왕으로 인식시키는 한편, 불교의 도리천을 상징한다.

 

127-128

(백석) 나는 본디 고구려 사람이오. 우리나라 여러 신하들이 이렇게 말하였소. 신라의 김유신은 우리나라의 점술가 추남이었다. 국경 부근에서 물이 거꾸로 흐르자 점을 치게 하였는데,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리를 거슬러서 그 단서가 이와 같다고 하였다. 대왕은 놀라고 괴이하였으나, 왕비는 크게 화를 내며 이는 요사스런 여우의 말이라고 하고, 왕에게 다시 다른 일을 가지고 시험 삼아 물어 보아, 헛소리를 하였다면 중형을 더하자 아뢰었다. 이에 쥐 한 마리를 상자 속에 숨겨 두고 이것이 어떤 물건이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이는 틀림없이 쥐이려니와 그 숨쉬는 것이 여덟이라고 하자, 이를 가지고 헛소리라 하여 참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 사람은 죽은 다음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곧 참형에 처하고 쥐의 배를 갈라 보니 새끼 일곱 마리를 배고 있었다. 그래서 앞서 한 말이 맞았음을 알았다. 그 날 밤에 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추남이 신라 서현공 부인의 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 일을 여러 신하에게 알리자, 모두들 추남이 마음에 다짐하고 죽어 과연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를 여기에 보내 일을 꾀하게 된 것이오.

 

129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화가 꿈을 꾸었다. 서쪽 산에 올라 오줌을 누었는데, 서울 성안을 가득 채웠다.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문희가 이를 듣고 말하였다.

내가 이 꿈을 살까?

어떤 선물을 줄래?

비단 치마를 팔면 되겠어요

좋아

동생은 옷깃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언니가 말했다.

어젯밤 꾼 꿈을 네게 붙여 주마

동생은 비단 치마로 값을 치렀다.

열흘쯤 지난 다음이었다. 김유신이 김춘추와 정월의 오기일에 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을 하였다. 춘추의 치마가 밟혀 옷깃 여민 곳이 찢어지자 유신이 우리 집에 들어가 꿰매자고 하였다. 춘추가 따라 들어가니, 유신이 보희에게 바느질을 하라고 시켰다.

어찌 자잘한 일로 귀공자에게 함부로 가까이 갈 수 있겠어요

보희는 극구 사양했다. 그러자 문희에게 시켰다. 춘추는 유신의 속뜻을 알아차리고 드디어 가까이 했는데, 그 후 자주 내왕을 하였다.

 

과연 꿈을 사서 행운을 얻은 것일까. 꿈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꿈을 사고 파는 것이 가능하나? 그리고, 태몽의 정체가 궁금하다.

 

131

김유신은 가야 출신이다. 가야가 구형왕을 마지막으로 신라에 복속된 것은 법흥왕 19(532)의 일이다. 김유신이 태어나기 60여 년 전, 유신의 증조부 구해는 수로왕의 후손이었는데,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경주에 와서 살았다. 그래서 유신은 신라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가 신분이 높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하고 관직에 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국민에다 이민 4세의 신분적 제약은 좀체 지워지지 않았던 것 같다. 유신에게는 치명적인 콤플렉스였다.

 

 

나는 김수로왕의 후손이다. 직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김유신도 내 조상으로 만날 수 있겠다.

 

132-133

유신은 동생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꾸짖었다.

네가 어찌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임신을 하였다는 말이냐?

그리고서 온 나라 안에 그 누이를 불태우리라고 말을 퍼뜨렸다. 하루는 선덕왕이 남산에 행차하여 노는 날을 기다렸다가, 뜨락에 나무를 쌓아 불을 피우니, 연기가 피워 올랐다. 왕이 멀리서 보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왠 연기인가?

아마도 유신이 누이를 불태우려는 것인가 합니다.

왜 그러지?

누이가 지아비도 없이 아이를 가졌다 합니다.

이게 누구 짓인고?

그 때 춘추가 곁에서 모시다 왕 앞에서 얼굴이 크게 변했다. 왕이 말했다.

이것이 네 짓이로구나. 급히 가서 구하여라.

춘추가 명을 받들어 말을 달려 왕의 명령을 전하면서 막았다. 그 후 혼례를 치렀다.

 

아이를 가진 여인을 구하는 선덕여왕! 자신은 불임이었음에도 혼전 임신이 수치 중에 수치였을 시기 임신한 여인을 구하는 그녀는 역시 왕답다.

 

143

(문무왕) 옛날 만사를 아우르던 영웅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더미가 되고 말아, 꼴 베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서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서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게 하면서도 죽은 혼령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을 금치 못하겠으되,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즐겨 하는 바가 아니다.

 

144

그러면서 화장을 하라고 유언한다. 이 대목은 다분히 김부식의 손에 의해 유교적으로 치장된 것이다. 결국은 불교식 장례를 명한 것인데, 일연은 문무왕의 최후를 이렇게 적고 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되던 영융 2년 신사년(681)에 돌아가셨다. 왕이 유언하신 말씀에 따라 동해 가운데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 왕이 평소 지의 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짐은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겠소. 그래서 불법을 높이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소.

용은 짐승인데 어찌 하시렵니까?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 되었소. 만약 악한 업보 때문에 짐승으로 태어나더라도 짐이 평소에 가진 생각과 맞는다오.

 

살아서는 사천왕사를 지어 나라를 지킨 문무왕은 죽어서는 용으로 태어나 그 일을 계속하겠다고 한다. 용으로 태어나는 것은 축생도 곧 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곳에 떨어지는 일이다. 지의 법사가 이를 걱정해서 한마디 거들지만, 왕의 신념은 비록 축생도에 떨어진 들 변함 없어 보인다.

문무왕의 이 같이 거룩한 생각은 그 아들 신문왕에게 이어져 더욱 아름답게 꽃 핀다. 문무왕의 이름이 법민인 데 비해 신문왕의 이름은 정명이다. 두 이름을 합쳐 보면 법정 法政 민명 敏明

두 왕에 걸쳐 정치와 법이 밝고도 바르게 이루어지기를 이름에 넣어 소망한 것이지만, 실제 신라 천년의 역사에서 두 왕대가 그 전성기를 구가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을 때, 이름은 이름값을 하고 있다.

아들 신문왕은 왕위에 오르자 부왕을 통해 동해 가에 감은사를 짓는다. 기이 편의 만파식적 조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다.

 

 145

문무왕이 왜병을 무찌르고자 이 절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다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바다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개요 2년에 일을 마치고 금당의 아래를 밀어 동쪽으로 구멍 하나를 뚫었거니와, 이는 용이 절에 들어와 돌아다니게 마련한 것이다. 유언대로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이라 이름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다. 뒤에 용이 나타난 모습을 본 곳을 이견대라 이름하였다.

 

147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치료되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홍수 때는 맑아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지는 것이었다.

 

158

왕의 시대에 멋진 여자가 하나 나타난다. 바로 수로부인이다. 수로부인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여느 여인과는 다른 특이한 매력을 풍긴다. 그것은 약간 공주병에 걸린 듯한 푼수 끼가 보이면서도, 왠지 미워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강한 개성 때문이다.

지방 관리로 부임해 가는 남편을 따라 수로부인은 길을 나섰다. 거기서 크게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다음은 그 첫번째 이야기다.

 

성덕왕 때였다.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해 가다가 해변에서 점심을 먹었다. 곁에 바위 절벽이 마치 병풍처럼 바다를 보고 서 있는데, 높이가 1,000 길이나 되었다.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어, 공의 부인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일렀다.

꽃을 꺾어 바칠 사람 누구 없니?

사람의 발로는 다가갈 수 없는 곳입니다요.

종들이 그렇게 말하고 모두들 손을 내저었다. 곁에 한 노인이 암소를 몰고 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서는 노래까지 지어 바쳤다. 그 노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160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160-161

이틀쯤 길을 간 다음이었다. 또 바다 가까이 있는 정자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바다 용이 잽싸게 부인을 끌어다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 공은 뒹굴며 땅을 쳤건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옛 사람의 말에,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 저 바다의 방자 한 놈이라도 어찌 뭇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다가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해안을 두드리면, 부인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이 그대로 따랐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와 바쳤다.

 

161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그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일 거슬러 내놓지 않는다면

그물을 쳐서 끌어내 구워서 먹을 테다

 

일연은 노래의 제목을 해가 라고 붙여 놓았다. 전체적인 구조는 수로왕의 탄생담에서 나오는 구지가와 흡사하다.

 

162

구지가로부터 해가까지 사이에는 이미 700여 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그렇듯 긴 세월을 두고도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게 불리는 노래가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구지가의 시대에 이 노래는 신이 중심인 신화에 속한 신가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삶 속에 노래가 자리한다. 전체적인 틀은 유지하면서도 700년의 세월이 가져다 준 주목할 만한 변화다.

 

노인은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면서 노래하라 하였다. 실제적으로 노래는 여러 사람의 행동을 일사분란하게 통일시키는 데도 필요했을 것이다. 다시 다음 시대, 본격적으로 인간의 삶이 노동을 통한 생산물로 유지하는 시대에 노래는 민요가 되었고, 민요가 노동 현장에서 불렀을 때 노래의 제의적 성격이 감소되는 대신 기능적 성격은 충분히 살아 있게 된다. 해가는 신가에서 민요로 넘어오는 중간 과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다.

 

신이 중심에 있는 신가를 부르던 사람들이 인간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감동이다.

 

162-163

나는 이 편을 성덕왕과 그 전후 시대의 답답한 정치 이야기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대개 <삼국사기>의 기록을 인용하여, 그 권력 투쟁의 와중에 애꿏게 희생된 왕비라는 이름의 가련한 여자들을 소개하였다. 정치란 예나 이제나 같은 모양이고, 그것이 핍진한 현실임을 누군들 부인하랴.

거기에 비해 수로부인은 얼마나 다른 여자인지 모른다. 이야기를 마무리 하는 마지막 장면은, 속 태우고 있었을 남편은 아랑곳 않고, 용에게 받은 극진한 대접을 능청스럽게 늘어놓는 수로부인을 클로즈업 시키고 있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에서 있었던 일을 물었다.

일곱 가지 보물로 장식된 궁전에서 마련된 음식들은 달고 매끈하여 향기롭고 깨끗하여, 사람 사는 세상에서 지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인의 옷에 묻어 풍기는 향기가 특이하여, 세상에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168-169

월명사의 도솔가

 

오늘 여기서 산화가를 불러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미륵좌주 모셔 서 있어라

 

삼국유사의 종합적 해석 2, 이범교 저, p 450

용루에서 오늘 산화가를 불러

청운에 한 송이 꽃을 날려보낸다

은근하며 정중한 곧은 마음이 시킨 것이니

멀리 도솔천의 부처님을 맞이하라.

 

170-171

월명사는 죽은 누이를 위해 재를 올리면서 이 시를 썼지만, 일견 평범해 보이는 표현의 내면에 속 깊은 울림이 있다. 구태여 요란을 떨지 않는 것이 진정성에 가까운 법이다.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있으며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 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173-174

(경덕왕이 충담사에게 청해 들은 노래 안민가)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다사로운 어머니

백성은 어린 아이라고

하실진대, 백성이 다사로움을 알도다

구물구물 살아가는 물생

이들을 먹이고 다스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리

하실진대, 이 나라 보전될 것을 알도다

,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는 태평하리니

 

삼국유사의 종합적 해석 1, 이범교 저, p 384

우리 백성들은 임금을 아버지라 여기며

그 신하들은 우리를 사랑하실 어머니라 여깁니다.

우리들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이오나

임금과 그 신하들의 사랑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비록 구물대며 사는 중생이지만

우리를 먹여 다스리기만 한다면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렇게 하여야만 나라가 보전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아!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가 태평하여지게 됩니다.

 

삼국유사의 종합적 해석 1, 이범교 저, p 386

(찬기파랑가)

목 매여 기원하니

흰 구름 헤치며 휘영청 나타난 달 기파랑을 우러러본다

달빛 아래 떠가는 흰 구름속에서도

달빛 어린 파아란 시내물 속에서도

기랑의 얼굴 보는 듯 하는구나

일오의 시냇가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셨던

마음 속 깊은 뜻을 좇으리라

아아! 기랑의 높은 뜻 잣나무 가지만큼 높아,

눈도 덮지 못할 우뚝한 그 마음이여!

(온갖 시련 이겨낸 지조 높은 화랑이여!)

 

179-180

한 편의 아름다운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에서 거타지는 사실 새로운 나라가 준비되고 있음을 알리는 상징적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거타지는 고려사의 세계에 나오는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과 닮은 인물이다.

 

181

거타지는 홀로 섬에 남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 노인이 연못에서 솟아 나왔다.

나는 서해의 신이오. 매일 사미승 하나가 해 뜨는 시각에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를 암송하며 이 연못을 세 바퀴 도는데,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이오. 그러면 사미승이 우리 자손을 잡아 간장까지 모조리 먹어 치웠다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부부와 딸 하나뿐이오. 내일 아침 반드시 또 올 터이니, 그대가 쏴 주시기 바라오.

활 쏘는 일은 내가 잘 합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요.

거타지가 그렇게 말하자 노인은 인사를 하면서 사라졌다.

거타지는 숨어 엎드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해가 떠오르자 사미승이 과연 오는데, 이전처럼 주문을 외우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려고 하였다. 그 때 거타지가 정확히 활을 쏘자, 사미승은 곧 늙은 여우로 변해 땅에 떨어져 죽었다. 그러자 노인이 나와 감사하며 말했다.

그대의 은혜를 받아 내가 목숨을 부지하였으니, 내 딸로 아내를 삼기 바라오.

대가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것이라면 바라는 바이올시다.

노인은 자기 딸을 꽃가지 하나로 변하게 만들어 품속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두 마리 용에게 거타지를 모시고 사실들이 탄 배까지 가도록 하였다. 게다가 그 배를 호위하여 당나라 국경에 이르자, 당나라 사람들이 신라 배가 두 마리 용의 지킴을 받으며 오는 것을 보았다. 이 일을 갖추어 위에 보고하니 황제가 신라의 사신들은 반드시 비상한 사람들일 것이야하고, 여러 신하들의 윗자리에 앉혀 잔치를 베풀어 주고, 금과 비단으로 후하게 상을 주어 보냈다.

귀국한 다음 거타지는 꽃 가지를 꺼내 여자로 변하게 하고 함께 살았다.

 

하권

 

34

흥법은 곧 흥국이었다. 처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도교에 빠져 도교에 빠져 불교를 배척한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고, 우여곡절 끝에 불교의 세계에 접했으면서도 날로 번창한 신라는 그에 따라 나라도 번창해 갔다.

 

47

법흥왕과 이차돈의 대화(이차돈 나이 스물둘, 사인이라는 낮은 벼슬)

신은 듣건대, 옛 사람들은 나무꾼에게도 대책을 물었다 합니다. 바라건대 외람되어 죄를 무릅쓰고라도 말씀을 올릴까 합니다.

사인이 할 만한 일이 아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버림이 큰 절개요, 임금을 위해 목숨을 다함이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그릇되게 말씀을 전했다 하여 신에게 목을 베는 형벌을 주시면, 온 백성이 모두 복종하고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살을 베어 저울을 달아서라도 새 한 마리를 살릴 것이요. 피를 뿌려 목숨을 재촉할지라도 일곱 마리 짐승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내 뜻이 남을 이롭게 하는 데 있는데, 어찌 죄 없는 이를 죽이리오. 내가 비록 공덕을 쌓고자 하나 내가 죄를 피하는 게 낫지.

뭐라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 하시리다.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솟구칠 마음을 가지고, 기러기와 고니와 새끼는 나면서도 파도를 헤쳐 나갈 기세를 품는다 했지. 네가 이와 같구나. 큰 선비의 햇살이라 할 만하다.

 

50~51

아도의 본 마음을 이룬 성자. 바로 이차돈이 아도의 순교를 이었다고 본 일념의 해안에 일연은 손을 들어 준 것이다. 이는 앞서 잠깐 언급했다. 신라 불교가 뿌리 내리는 데에 치른 값진 희생의 전통, 그것은 아도와 이차돈의 순교다.

다시 한번 돌이켜 보자. <삼국사기>에서는 비처왕 때 신라에 온 아도가 몇 년 동안 살다가 아무 병도 없이 죽었다고 적었다. 그런 편찬자의 입장에서는 아도와 이차돈이 한 줄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비한다면 일연은 아도와 법흥왕 그리고 이차돈을 묶어 세 분 성인이라고까지 지칭하였다. 앞서 일연은 비처왕 때 아도가 신라에 이르렀다는 <삼국사기>의 이 대목을 부정한 바 있다. 그 부정에는 아도가 아무 병도 없이 죽었다는 대목도 포함된다. 일연은 아도가 자진했다는 <아도본비>의 기록을 채택하였는데, 거기에는 이차돈의 순교와 연결하려는 분명한 의도가 담겨있다.

<삼국사기>는 이와 반대로 <아도본비>의 기록을 믿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그러기에 이차돈의 순교를 기록하면서도 김대문을 인용했다. 이렇듯 한 가지 일을 두고 바라보는 차이는 뜻밖에 크다.

일연이 이차돈의 죽음을 노래한 찬에서 우리는 일연의 속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의에 죽고 삶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하늘의 꽃과 흰 젖이여, 놀란 가슴을 치는구나.

어느덧 한 칼에 몸은 사라진 뒤

절마다 쇠북소리는 서울을 흔든다.

 

시인은 결연히 노래한다. 사라진 것은 오직 물이요, 쇠북소리에 실린 그의 자취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받았던 감동이 전해온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목숨을 내놓고 하지 않으면 그것은 제대로 한 것이 아니다라는 여성독립운동가의 증언이 떠오른다. 목숨을 바쳐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염원을 생각해 본다.

 

57

황룡사 구층탑을 지탱했던 돌들

하루 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근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 할겁니다. 너의 등을 덮어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 년을 기다렸단다.

 

실제로 자연이 말을 걸어 올 때가 있다. ‘너에게 휴식을 주고 싶다고, 나와 함께 같이 쉬자라고 나에게 말해주는 꽃들이 있었다.

 

62

이 아쇼카왕이 어쩌다 불교신자가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아쇼카는 지독히도 못생겼다. 그의 형 수사마 태자가 준수한 용모로 아버지의 뒤를 이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야쇼카는 행여 질투심에 딴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아버지의 노파심 때문에 차라리 죽기를 바라고 전쟁터에 내보내지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략이 있었다. 싸움에 이기면서 백성들의 신임까지 듬뿍 받았다. 반면 태자는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 점점 여론은 아쇼캬 쪽으로 기울고, 드디어 아쇼카가 온갖 어려움을 무릎쓰고 부왕이 이어 왕이 된다.

 

그러나 아쇼카는 콤플렉스가 많은 왕이었다. 못생긴 얼굴에 형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마저 가득했다. 그것은 이상한 형태로 뻗어 나와 결국 가상 지옥을 만들어 놓고 잘생긴 사람을 들여보내 죽이는 해괴한 짓을 저질렀다.

 

그가 자신의 죄를 뉘우친 갓은 독실한 불교신자인 한 신하를 만나면서이다. 신하는 부처님의 예언서라 불리는 <잡아함경>의 한 대목을 들려준다. 부처님이 왕시성으로 들어가려는데, 길가에 어린 두 아이가 놀고 있었다. 부처님의 환한 모습에 반한 아이들은 자신들이 소꿉장난하면서 보릿가루하고 가지고 놀던 모래를 공양하였다. 부처님은 아이들의 귀여운 행동에 방긋이 미소지었다. 거기서 부처님은 내가 죽은 100년 후, 이 나라에 성은 마우리아요 아름은 아쇼카라는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그는 왕이 될 것이며, 온 세계에 8 4,000개의 탑을 세워 내 이름을 알릴 것이다고 예언하였다.

 

신하는 이 예언의 당사자가 바로 아쇼카왕 당신이라고 말해 주었다. 아쇼카왕은 참회하고 불교를 전파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사자나 황소 또는 코끼리의 모습을 새긴 기둥을 세우는 일이었다. ‘아쇼카의 기념주라 불리는 이 유명한 조각 기둥은 불교 미술의 출발이라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아무리 해괴한 짓을 일삼는 기이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알아주는 이의 한마디로 인해 멋진 인물로 바뀔 수 있다. 번대로 부정적인 코멘트를 받은 사람은 실제로 부정적인 인물이 되기도 한다.  긍정적인 코멘트는 주는 것, 이것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학생을 대하는 선생에게, 제자를 기르는 스승에게 꼭 필요한 행동 강령이다.

 

68

장륙존상과 구층탑은 신라를 지키는 세 가지 보배 중 두 가지에 해당된다.

특히 구층탑은 주변 아홉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을 비는 뜻에서 만들어졌으므로 더욱 신라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안홍의 <동도성립가>를 인용한 일연은, 아홉 외적이 1층으로부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이라고 하였다. 지금 잘 모르는 나라도 있지만 고구려와 백제가 빠져있는 것 또한 의아스럽다.

일연 자신은 탑을 건립한 이후 천지가 매우 태평하고, 한반도의 세 나라가 하나로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한 도우심이 아니겠는가하고 말하고, “옛날 주나라에 구정이 있어 초나라 사람들이 감히 북쪽을 넘보지 못했다는데, 바로 그런 종류의 일이라는 고사까지 원용한다. 그러나 일연은 구층탑의 의미를 그렇게 좁게만 보고 있지 않다. 구층탑을 찬한 시에서,

 

이에 올라보라. 어찌 구한만의 항복을 보겠는가

비로소 천지가 특별히 아름다움을 깨달았네

 

라고 노래한다. 싸움이나 싸움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천지가 평화로워지는 꿈, 그것이 일연이 구층탑을 보며 꾼 것이다.

 

71

마음이 찾아갈 정처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 누구도 한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할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83

기름진 밭에 풍년이 들어 무척 남는다 해도, 옷과 밥이 생각하는 대로 이르러 저절로 배부르고 따스함만 같지 못할 것이요, 부인과 집이 진정 좋다 하나, 연꽃 핀 연못가와 꽃밭에서 천성들과 함께 놀며 앵무새며 공작과 어울려 함께 즐김만 같지 못할 것이네. 하물며 부처님을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아야지.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니, 세상에 묶인 끈을 벗어버리고 더할 수 없는 도를 이루어야 하네. 먼지 날리는 세상에 코를 박고서야 어찌 세상의 무리들과 다름이 있겠는가?

 

85~89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흰 달이 비추는 산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라는 사람

저물 무렵에 나타난 아리따운 여인

밤부터 아침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발톱 하나 칠하지 못한 만큼의 차이

 

만약 삼국유사에 실린 150여 가지가 넘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뜻 깊은 것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여기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를 대는데 주저하지 않겠다. 탑상 편의 남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조다. 학위 논문을 쓰면서 나는 이조가 일연과 일연의 문학 그리고 삼국유사를 이해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자료라고 주장한 바도 있다.

 

여자의 정체는 여기 와서야 밝혀진다. 바로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시험삼아 두 사람을 방문했던 것이다. 거기에 박박은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지만 부득은 합격한 셈이다.

 

중생의 뜻을 따르자고 박절히 내쫓지 못한 것, 맑은 마음을 지키며 벽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염불을 외운 것, 아이를 낳으려는 여자 옆에 애처로운 마음으로 가만히 등불을 피워 놓은 것, 두려운 마음 한편 가득했으나 새로 물을 끓여 산후의 여인을 씻긴 것 등 부득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비록 관음보살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이미 도를 이룬 자의 마음 씀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그의 행동 하나하나 그 자체가 관음보살의 헌신인지도 모른다.

 

삼국유사를 통틀어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다. 달달박박은 자신이 수행중이라는 이유로 여자를 암자에 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이기심을 넘어 독선이며, 자비심이 없는 행동이다. 계율이 인간보다 앞서는 도의 낮은 차원이다. 반대로 여자를 암자로 들인 노힐부득의 행동은 참보살행이란 중생의 곤고한 처지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함을 보여준다.

 

92

사람살이의 고통이 무엇이며 역사의 바른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고민하고, 그것은 뜻밖에도 그가 쓴 천이나, 인용해 놓은 다른 시와 민요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삼국유사>야 말로 이러한 시로 인해 완성되는 책이 아닌가.

 

111 원광은 중국에 유학하여 불교의 진수를 체득해 온 해동의 처음 사람이었다.

 

119

보양과 함께 왔다는 서해 용의 아들 이목은 누구일까? 용의 아들이라니 같은 용이겠지만 이목이라는 이름을 우린 발음대로 한다면 이무기처럼 들린다. 지금은 용이 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뱀을 이무기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아직 어린 용을 이무기라고 불렀던 것일까?

 

121

운문은 구름의 문, 아마도 운수의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잠시 머무는 곳인가.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다.

 

122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사람이라고.

 

123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127

원효가 이미 계를 범한 이후 속인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불렀다. 어느 날 우연히 배우들이 가지고 노는 커다란 박을 얻었는데 모양이 괴이하여 그 형상을 따라 도구를 만들었다. 화엄경에 모든 것에 거침없는 사람은 한 가기 길로 나고 죽는다는 대목을 가지고 무애라 이름 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시켰다. 일찍이 이것을 지니고 모든 마을 모든 부락을 돌며 노래하고 춤추며 다녔는데 노래로 불교에 귀의하게 하기를 뽕나무 농사짓는 늙은이며 독 짓는 옹이장이에다 원숭이 무리들까지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크다.

 

134

아들은 늙은 아버지를 끝까지 곁에서 지켰던 모양이다.

 

151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통이라 하였다.

 

158

혜통은 속에서 울컥했으나 말은 하지 못하고 뜨락 앞에 서서 머리에 화로를 이었다. 잠깐 사이에 이마가 터지는 소리가 벼락처럼 났다. 삼장이 듣고 와서 이를 보더니 화로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찢어진 곳을 만지며 주문을 외웠다. 상처가 이전처럼 아물었는데 왕자 무늬 같은 자국이 남았다. 그래서 호를 왕화상이라 했다.

 

198

불교가 아직 사회의 전면에 있었을 때 승려들의 역할 또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쪽이었다. 그러므로 승려라면 누구나 피세은거하지 않느냐는 생각은 불교의 역할이 변한 오늘날의 관념이다.

 

불교적 인식의 숨음과 드러남을 이해하자면 보다 복잡한 변증법적 사고가 필요하다.

 

211

일연이 삼국유사에 신라 향가 14수를 실어놓은 것에 대해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우리 고대 가요 중에 그 정형성을 최초로 획득했으며 지극히 높은 정신 세계를 구축한 이 시가 장르에 대해 비록 편린으로나마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오직 삼국유사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향가 하나에 머물지 않고 10세기 이전의 시가에 대해서 그렇다. 책 한 권에 실린 단 14수가 천 년의 시가사를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3. 내가 저자라면

 

고운기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를 보면, 일연의 <삼국유사>는 역사책이라기보다는 이야기책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 고운기는 삼국유사의 줄거리를 다시 40개의 장으로 나누어 실었다. 시원한 사진과 주제에 따라 삼국유사를 관통하여 엮어낸 이야기는 드디어 읽기 쉬운 삼국유사를 만나게 해 주었다.

 

고운기의 삼국유사 해설서를 통한 삼국유사의 맛은 인간중심의 문학적, 서정적인 맛이라 할 수 있겠다. <삼국유사>는 시로 완성된 책이다. 사람살이의 고통이 무엇이며, 역사의 바른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고민하는 것이 일연이 인용해 놓은 다른 시와 민요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일연이 <삼국유사>에 신라 향가 14수를 실어놓은 것은 감사한 일이다. 14수가 천 년의 역사를 문학적으로, 서정적으로 전달하는 셈이다. 10세기 이전의 시가와 향가는 고대 가요 중에 그 정형성을 최초로 획득했으며 지극히 높은 정신 세계를 구축한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훌륭한 자료이다. 단군신화를 최초에 실은 것과 함께 14수의 신라 향가를 실은 것이 <삼국유사>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바는 그가 실은 안민가에 녹아있다.

 

(경덕왕이 충담사에게 청해 들은 노래 안민가)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다사로운 어머니

백성은 어린 아이라고

하실진대, 백성이 다사로움을 알도다

구물구물 살아가는 물생

이들을 먹이고 다스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리

하실진대, 이 나라 보전될 것을 알도다

,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는 태평하리니

 

내가 저자가 된다면, <삼국유사>의 이러한 인간중심, 문학적, 서정적인 측면을 반영하고 싶다. 천 년의 역사 속,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진취성, 인간됨을 보여주는 일연의 <삼국유사>처럼, 나의 이야기도 이러한 자주성과 진취성, 인간됨이 문학적, 서정적인 방식으로 표현되기를 바란다.

 

목차의 구성

 

머리말

들어가며

기이(紀異)

이 땅의 첫 나라

고구려와 북방계

신라와 남방계

탈해황을 둘러싼 갈등

여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밤에 찾아오는 손님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권력의 끝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첫 성전환증 환자

왕이 되는 자

나라가 망하는 징조

지는 해 뜨는 해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가

견훤, 비운의 영웅

신비의 왕조, 가야

흥법(興法)

불교로 보는 역사

순교의 흰 꽃 이차돈

탑상(塔像)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낙산사의 힘

의해(義解)

운문사 이야기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의상, 화엄의 마루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신주(神呪)

밀교의 한 자락

감통(感通)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피은(避隱)

숨어 사는 이의 멋

효선(孝善)

불교가 보는 효도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일연, 혼미 속의 출구

사진 찍기는 참 재미있다 / 양진

찾아보기

 

목차를 보면, 기이à흥법à탑상à의해à신주à감통à피은à효선으로 이어진다. 서양의 문화가 크게 신화와 성경, 이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변화 발전해 왔다면, <삼국유사>의 목차에 의하면, 기이로 명명한 우리 민족의 고대 신화와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불교, 즉 신화와 불교가 <삼국유사>를 지지하는 양대 축으로 보인다.

 

감동적인 정절

 

상권

24

문자에 대한 자신감, 이는 저술을 감발시키는 촉진제다. 첫벌째 저술은 역사서로 정해졌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새로운 나라가 들어선 다음, 그 앞 시대를 정리한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에서 보편화되어 있었다. 한문이라는 문자수단의 이입은 그 문화를 송두리째 가지고 들어왔고, 특히 중국에서 만들어져 하나의 전범을 이루고 있었던 사마천의 사기는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름마저 거기에 기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고려 인종 23 (1145) 의 일이다.

 

그리고 100여 년이 흘렀다. 그 사이 고려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문신 귀족들의 차별에 불만을 품은 무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잡은 것이다. 무인들의 집권은 단순히 집권 자체로 끝나지 않았고 세계관에 변화를 주었다. 도저히 일어나리라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고정관념이 깨진 새로운 세계를 맛보게 된다. 무인 정권 이후 고려는 전반기와는 아주 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다.

 

새로운 분위기란 다름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로 대표되는 고려 전기 지식인들의 세계 인식은 사대(事大)로 요약된다. 본격적으로 중국의 문화에 압도당하기 시작한 사회에서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념의 틀은 우리에게서 다시 만들어져야 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다는 말인가.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송나라의 멸망과 원나라의 성립이었다. 당에서 송으로 이어지며 높아질 대로 높아진 한족의 자존심을 일거에 무너뜨린 이 일은, 그렇지 않아도 우리 중심의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해 보려던 고려의 정권 담당자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암시를 함께 주었다. 하늘처럼 알았던 한족의 중국도 변방의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가. 당대의 관념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세계관의 변화는 곧 역사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모든 것을 중국 중심으로 해석했던 <삼국사기>의 역사 기술은 이쯤 와서 힘을 잃게 된다.

 

67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앞서 환웅과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가 직접 왕이 된다든지 왕이 될 아들을 낳은 것으로 북방계 민족과 나라의 출발을 보았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곧 오리지널의 출발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남쪽에도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이 있음을 말하는 일연의 의도란 곧 북쪽과 계통을 달리하는 오리지널이 있음을 강조하자는 데 있지 않을까?

 

78

즐거운 상상력에 민족적 쇼비니즘이 끼어들면 곤란하다. 이런 주장들이 대체적으로 처음에는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찾는다는 그럴 듯하면서 거창한 명제 아래 시작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대목에 이르면 김일 선수 박치기를 보듯이 흥분하고, 흥분하다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며,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란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에 지나지 않아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다. 살아 있는 역사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다.

 

114

그러나 신라 불교의 힘은 무엇보다 먼저 있었던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고 포용해 간 데서 더욱 커진다. 불교가 먼 나라에서 전래된 이방 종교가 아니라, 이미 전세에 인연을 마련한 우리 종교라고 생각한 신라인들의 본지수적, 불국토 사상은 바로 토착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밑바탕이었다.

 

하권

50~51

아도의 본 마음을 이룬 성자. 바로 이차돈이 아도의 순교를 이었다고 본 일념의 해안에 일연은 손을 들어 준 것이다. 이는 앞서 잠깐 언급했다. 신라 불교가 뿌리 내리는 데에 치른 값진 희생의 전통, 그것은 아도와 이차돈의 순교다.

다시 한번 돌이켜 보자. <삼국사기>에서는 비처왕 때 신라에 온 아도가 몇 년동안 살다가 아무 병도 없이 죽었다고 적었다. 그런 편찬자의 입장에서는 아도와 이차돈이 한 줄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비한다면 일연은 아도와 법흥왕 그리고 이차돈을 묶어 세 분 성인이라고까지 지칭하였다. 앞서 일연은 비처왕 때 아도가 신라에 이르렀다는 <삼국사기>의 이 대목을 부정한 바 있다. 그 부정에는 아도가 아무 병도 없이 죽었다는 대목도 포함된다. 일연은 아도가 자진했다는 <아도본비>의 기록을 채택하였는데, 거기에는 이차돈의 순교와 연결하려는 분명한 의도가 담겨있다.

<삼국사기>는 이와 반대로 <아도본비>의 기록을 믿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그러기에 이차돈의 순교를 기록하면서도 김대문을 인용했다. 이렇듯 한 가지 일을 두고 바라보는 차이는 뜻밖에 크다.

일연이 이차돈의 죽음을 노래한 찬에서 우리는 일연의 속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의에 죽고 삶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하늘의 꽃과 흰 젖이여, 놀란 가슴을 치는구나.

어느덧 한 칼에 몸은 사라진 뒤

절마다 쇠북소리는 서울을 흔든다.

 

시인은 결연히 노래한다. 사라진 것은 오직 물이요, 쇠북소리에 실린 그의 자취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

 

57

황룡사 구층탑을 지탱했던 돌들

하루 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근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 할겁니다. 너의 등을 덮어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 년을 기다렸단다.

 

68

일연 자신은 탑을 건립한 이후 천지가 매우 태평하고, 한반도의 세 나라가 하나로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한 도우심이 아니겠는가하고 말하고, “옛날 주나라에 구정이 있어 초나라 사람들이 감히 북쪽을 넘보지 못했다는데, 바로 그런 종류의 일이라는 고사까지 원용한다. 그러나 일연은 구층탑의 의미를 그렇게 좁게만 보고 있지 않다. 구층탑을 찬한 시에서,

 

이에 올라보라. 어찌 구한만의 항복을 보겠는가

비로소 천지가 특별히 아름다움을 깨달았네

 

라고 노래한다. 싸움이나 싸움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천지가 평화로워지는 꿈, 그것이 일연이 구층탑을 보며 꾼 것이다.

 

71

마음이 찾아갈 정처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 누구도 한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할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보완점

 

일연의 <삼국유사> 원전을 보지 못하여 아쉽다. 언젠가 반드시 보고 싶은 책이다. 이런 마음을 들게 해준 고운기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는 이로써 저자의 의도와 책의 역할을 다 한 듯 하다.

 

고운기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는 원전 해설도 아니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유적을 답사하는 여행기의 형식도 아니면서,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향가를 음미해 볼 수 있도록 만든 시 해설서도 아니다. 이 세 가지 요소를 말씀 많은 할머니가 밤새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는 식으로 서술해 놓았다. , <삼국유사>를 음미하기는 좋았으나, 다 읽고 나서도 정리가 안 되는 다소 산만한 느낌이 든다.

 

원전 해설과 사진을 삽입한 유적지 답사, 그리고 향가 해설을 나누어 편집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 그렇게 재편집을 한다면 <삼국유사>를 오롯이 느끼고 싶을 때, 삼국유사와 관련한 유적지를 직접 찾아가고 싶을 때, 향가를 음미하고 싶을 때, 그때그때 활용하기 좋은 해설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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