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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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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9일 10시 05분 등록

Ⅰ. 저자에 대하여

1) 일연 

일연은 1206년에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신라시대 대승, 원효의 고향이었던 ‘밤골’ 인근 마을이다. 세속의 김견명(見明)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다가 공부를 위하여 9살 때 전라도 광주의 무량사로 취학하였으며, 결국 14살에 스님이 되었다.

 

승려로서 첫 이름은 회연(晦然)이었다. 스물두 살에 승과에 합격하였고, 몽고 전란기 혼란한 사회 상황 속에서도 수도 생활을 계속하여, 삼중대사 선사 대선사 등의 직급에 차례차례 올랐다. 이러한 모습에서 나는 그가 매우 성실하고 본분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4살이 되어, 당대의 실력자 정안이 남해의 개인 집을 내놓고 정림사를 만들었는데, 그 곳의 주지로 부임하면서 드디어 불교계의 지도자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왕명을 받들어 불교행사를 주관하고, 불교 관계 저서 충편조동오위를 집필하여 세상에 내어 놓기도 했다.

  

50대에는 3년간 강화도로 옮긴 왕궁 가까운 곳에서 왕을 모시기도 하였다. 1281, 그의 나이 78세 때 충렬왕은 일연을 불러 그를 가까이에 있게 하였다. 이 때 일연은 뇌물로써 승직(僧職)을 구하는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고의 병화로 불타버린 황룡사의 황량한 모습을 목격한다. 1281, 그의 나이 78세에 국사로 책봉되었다. 명실상부한 한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된 것이다. 1290년경, 일연은 국사의 자리를 버리고 고향 근처로 내려와 어머니를 모신다. 효심이 지극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의 어머니도 그 당시 상황을 반영할 시 매우 장수하신 것으로 보여진다. 79,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후 87세 일연은 입적한다. 

 

그는 평생 동안 머물러 살지 않고 옮겨 다니는 생활을 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는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모았다. 1277년부터는 충렬왕의 명에 따라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1281년까지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일연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혼구(混丘)와 죽허(竹虛)가 있다. 그의 저서로는 <화록 話錄> 2, <게송잡저 偈頌雜著> 3, <중편조동오위> 2, <조파도 祖派圖> 2, <대장수지록 大藏須知錄> 3, <제승법수 諸乘法數>7, <조정사원 祖庭事苑> 30, <선문염송사원 禪門拈頌事苑> 30, <삼국유사> 5권 등이 있다.


일연은 장수하는 삶을 살았고 밑에서 부터 차근차근히 올라가 국사에 이르는 등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 얼핏 순조로웠던 삶이라고 보이나 나는 그가 매우 세상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한편 애정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끊임없이 노력하는 노력파였다고도 느껴진다. 항상 떠돌아야만 하는 승려의 인생을 살면서, 더불어 몽고의 침략을 받아 어지러워진 세상을 살면서, 그는 항상 주변에서 들리는 설화들을 수집하고 또 그 설화의 장소를 직접 발로 방문해보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니 말이다. 그리고 삼국유사를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우리나라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역사 속 사람들과 그 배경이 되는 토지를 사랑하는지도 온전히 느낄 수가 있다. 더불어 작은 나라에 태어나 힘없는 자의 설움 속에서도 민족의 자존감을 잊지 않았던, 그들의 위대함을 남기려고 했던 일연은 진정 우리 민족을 밝힌 등불이었다고 보여진다.


일연이 없었더라면, 그가 정성껏 편찬한 삼국 유사가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과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었을까? 그의 위대한 작업에 다시 한 번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그처럼 내 주변의 모든 것들에 애정을 담고, 그것을 또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2) 고운기

1961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저자 고운기는 한양대 교수이자 시인으로 단연 국내 최고의 삼국유사 전문가이다. 국문학도였던 저자는 특히 일연의 세계인식과 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우리의 역사, 그 중에서도 일연이 저술한삼국유사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이 후 수년간 삼국 유사와 관련된 자료 수집을 위해 현장을 답사해왔다. 그리고 1999년부터는 약 3년간 일본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체류하면서 한문학 비교연구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현장 조사와 연구를 통해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2002), ‘길 위의 삼국유사’ (2006), ‘일연을 묻는다’ (2006)을 등 삼국유사와 관련된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2007년 메이지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한국고전문학과 삼국유사를 강의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논문 도쿠가와 장서 목록에 나타난 삼국유사 전승의 연구’ (2008)를 발표하고, 이 논문과 거기에 얽힌 이야기를 중심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2009)을 펴냈다. 이 책은 그가 필생의 작업으로 삼은스토리텔링 삼국유사시리즈의 첫 권이라고 한다. 그리고 2012년에는 삼국유사의 주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한신화 리더십을 말하라라는 책을 출간했으며, 삼국유사 분석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이외 특이한 점은 저자가 시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는 1983〈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등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삶을 보며, 일견 부러운 마음이 가득했다. 삼국유사라는 테마를 가지고 국내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전문가가 된 점도 그러하고, 또 삼국유사라는 바다에 빠져 풍덩 수영을 하고 또 우리가 할 내용들을 쏙쏙 뽑아 내어 이렇게 책으로 엮었으니 말이다.

일연처럼 직접 현장을 답사하며, 삼국유사와 관련된 모든 문헌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비교/분석 하고 부지런히 유추하는 그의 자세 또한 본받을 만 하다.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3.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논의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둘은 분명한 차이가 사()와 사()에 있다는 점

 

5. 단군신화가 처음으로 문서상에 기록되었다는 데에서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7. 일연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설정된 부분이 더 많다는 사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8.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삼국사기 같은 역사서로만, 고승전 같은 불교서로만 만족하지 않았던 듯 하다. 그것들이 어우러지면서 우리 고대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어떤 틀을 만들어냈다고 보아야 옳지 않을까 

 

9. 이 책을 쓰면서 내가 유념한 몇 가지 점을 미리 밝혀둔다.

1) 본문을 읽어나가며 설명하는 방식이다……(중략) 

2) 삼국유사에 실린 전체 조목 수는 약 140여 개, 그것을 삼국유사의 순서대로 40대의 제목으로 분류하여 기술했다….(중략) 

3) 배경을 설명하면서 삼국사기와 면밀히 비교해보았고, 뒤는 승전 등을 많이 참고하였다. ……(중략)

4)  그런 점에서 사는 그의 생애와 관련된 사실을 군데군데 설명하였다. 삼국유사는 분명 10세기까지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이나, 13세기의 일연이라는 인물에 의해 재구성되었다는 점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최종적인 책임은 어디까지나 나에게 있다. 그런 사실을 명백히 해 두고, 삼국유사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자.

- 본인이 기술한 방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통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어 흥미로웠다. 작가의 의도를 명쾌하게 이해하고 나니 책에 대한 흥미가 더욱 배가되는 느낌이기도 하다.

 

12-14.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13세기의 일연 같은 이는 그 점을 간파했던 사람이다. 한편 비애스러운 그러나 풍부한 이야기의 세계가 거기서 만들어 진다. 상징으로 그리는 역사를 옳게 읽자면 독자는 상상력을 써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다른 한편 즐겁기도 하다.

  

18. 곰은 뜻한 바 목적을 달성했다. 그런데 단군을 낳게 되는 과정까지 유심히 읽다 보면 재미있게도 곰이 세운 치밀한 계획에 환웅이 한 발 한 발 말려들더니, 드디어 빠져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곰은 여자가 되는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최후의 주인공 단군의 출생까지 커다란 하나의 각본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것을 움직여 나간 주체는 바로 어머니 곰이다. 단군은 그렇듯 현명한 곰 부족 출신의 어머니를 두고 태어나 이 땅의 첫 왕이 되었다.

 

23. 일연은 그 바이러스의 정체를 발견했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쓴 것이다. 이를 그대로 들여와 내용만 우리 것으로 채웠을 때, 내용은 형식에 가려 실상을 보여 주지 못했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

 

24. 왜 민족의 주체성이던가? 어떻게 민족이라는 각성이 가능했던가? 잘 알려져 있듯이 몽고는 중국의 변방에서 일어나 중국 본토를 삼키고, 거기에 나라를 세운 최초의 민족이다. 중국이 자주 변방의 침입을 받자 그 근심을 덜려고 만리장성도 쌓았지만 전체를 송두리째 내놓은 적은 없었다. 북위가 안방을 차지하는 기간이 200여 년이라 해도 한족의 중국은 남쪽에서 근근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천자의 나라며 그러기에 모든 변방은 중국에 복속해야 한다는 생각은 중국인에게 아니 우리나라 같은 옆 민족에게까지 강고하기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전체가 무너졌다. 아니 하늘이 무너진 것이다. 중국의 자존심을 하루아침에 땅바닥에 떨어뜨린 몽고의 원 건국, 남의 불행한 일에 잘됐다고 박수칠 일은 아니지만, 한편 변방의 나라들로서는 숨통이 트일 일도 되었다.

 

28. 앞서 나는 고조선조와 위만조선 조를 나란히 두고 읽어야 한다 했다. 그럴 까닭이 충분하다. 기자조선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고, 죽은 자식 무엇 만지듯 있지도 않은 인용처를 대가면서 단군을 그려낸 일연의 의도를 알자면, 열쇠는 이 위만조선 조에 있다.

 

29 두 가지 의문을 종합해 보면 위만이 조선 출신의 연나라 사람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일찍이 중국의 전국시대에 연나라는 기자가 다스리고 있던 조선 지역을 복속시켰다. 조선의 유민들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을 터인데, 위만처럼 연나라의 본토에 들어가 자리잡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연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그 틈을 타서 옛 땅을 회복해 조선인만의 나라를 재건했다고 보는 것이다.

 

약간의 추측이 가능하다면 일연은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위만조선을 단군조선의 후계로 여겼으리라 생각했다. 중국에서 직접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위만조선을 그 다음 조에 이어 놓은 일연의 생각은 여기서 조금씩 드러난다.

  

34.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실은 일연이 단군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고자 한 데 더 힘을 기울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중국 쪽 역사서에서 조선에 관한 기사를 모두 찾아보고, 그것을 일연 나름대로 정리해 크게 두 개의 제목을 써서 정리한 것인데, 일관성과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오늘날 우리가 고조선조와 위만조선조를 나란히 두고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5-36. 우리는 여기서 삼국사기가 단군조선부터 여러 부족국가를 무시한 것이 사대주의적 역사관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김부식과 관찬 사학자들의 관심은 책의 표제대로 신라, 고구려 백제 세나라만의 역사를 충실히 쓰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43. 주몽이 알에서 나왔다는 신화는 다음에 살펴볼 신라의 박혁거세 신화와 비슷하다. 다만 주몽은 하늘님으로 이어지는 부계와 신이한 존재로서 모계를 두로 갖추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이런 난생 설화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리라. 첫 출발의 의미를 문학적으로까지 보이게 하는 이 표현은 곧 그 옛날 왕을 맞이하는 어떤 의식과도 관련이 있을 듯 하다.

 

44. 주몽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영웅은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 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이 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영웅 소설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대체로 이 같은 유형으로 지어지는데, 아마도 그 원조는 주몽의 이 이야기가 아닐까?

  

49. 비류와 온조가 드디어 한산에 이르렀다. 지금의 서울이다. 형제는 부아악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의견이 갈렸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자고 하자 열 명의 신하가 말하였다.

하남 땅은 북으로 한수를 두르고, 동으로 높은 산에 기대로 있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에 큰 바다가 막혀 잇습니다 .이만큼 하늘이 내린 요새와 땅이 주는 이득이 큰 곳을 얻기 어렵지요.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하들의 이런 간청에도 비류는 듣지 않았다.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이다. 한편 동생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았다. 열 명의 신하가 보필을 하게 되어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52. 끝으로 일연은 시조 온조왕은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데, 몸이 크고 성품이 효성스러웠으며,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좋아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는 온조왕으로 대표되는 백제 건국 세력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대목이다.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좋아하는 북방계의 이주 집단이다.

 

백제의 지배층이 우세한 세력을 형성한 끝에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는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음에 설명하겠거니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는 그 선조들의 경험을 그대로 살려 다시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었다. 나는 그것이 고구려에서 시작한 북방계 이동의 끝으로 보인다.

- 그간 나에겐 백제가 매우 유약한 민족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아마 삼국통일의 승자가 되지 못한 탓이리라.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또한 편찬자의 시각에 따라 곡해된 것이 많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 쉬운 일이겠냐만은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남기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인 것 같다.

 

62. 혁거세 탄생에 대하여 일연은 같은 삼국유사 안에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적어놓았다. 감통 편의 첫 이야기인선도성모가 불사를 즐기다조에서다. 이 이야기는 본디 지혜라는 비구니가 불사를 일으켰다가 힘에 부쳐 끝까지 못하고 있는데, 꿈에 선도산의 신모가 나타나 도와주어 일을 마쳤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다.

 

66-68. 선도산 신모는 누구이며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는 이 대답을 위해 우리들의 민간신앙에 묻어 있는 신모 신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리산의 여신 신화 성모천왕 전승과 성거산의 여신정승이다.

먼저 지리산의 성모천왕 이야기다. 갑자기 산 개울이 배도 오지 않는데 넘쳐흘렀다. 한 스님이 이상히 여겨 천왕봉 꼭데기에 올라가 보자 그곳에 키가 크고 힘센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스스로 성모천왕이라 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고 딸 여덟 명을 낳았는데 그들은 전국팔도에 흩어져 무당이 되었다. 이 같은 지리산 성모천왕 전승은 무당이 처음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알려주는 이야기다 이를 무조신화라 한다.

 

한편 성거산의 여신 전승은 고려 왕족을 성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호경이 성거산에 갔다. 여신이 나타나, “나는 혼자서 이 산을 맡아보고 있는데, 다행히 성골 장군을 만났습니다. 부부가 되어 함께 신정을 다스리고 싶군요. 바라건데 이 산의 대왕이 되어 주세요.”라고 말하였다. 군인들이 호경을 왕으로 높였다.

 

성거산은 개성 근처의 우병현에 있다. 여기서 호경이 여신의 도움으로 산의 대왕이 되는 과정은 혁거세가 선도산 신모에게서 태어나 왕위에 오르는 과정과 무척이나 닮았다. 한 쪽이 부부관계라면 한쪽이 모자관계라는 것이 다르면 다른 점이다. 선도산 신모는 어머니인 대신 다른 여자를 만들어 짝지어 준다. 그 여자가 곧 자신의 분신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68. 무당의 탄생 내력을 담은 이야기는 고대 국가의 건국 신화와 사촌간처럼 가깝다. 그것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지 않았던 데서 연유한다. 삼국의 건국 신화 가운데 신라 쪽이 유독 무조 신화나 민간 전승의 신모 신화에 가까운 것은 왕실의 성격이 곧 거기에 기반을 두었다는 강한 증거다.

  

74. 내기는 기실 이번 차례에 오르지 않으려는 꾀에 불과하다. 왕의 사위까지 되었지만 탈해로서는 서라벌이 아직도 남의 동네다. 뭔가 자신의 기반을 확실히 닦은 다음 굳건한 위치에서 왕이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노례왕은 왕위에 올라 34년을 살았다. 탈해로서는 차례를 너무 오래 기다려야 했다.

  

82-83. 탈해는 여섯 부족의 신임을 얻기에 그 근본이 너무 약했다. 그런 어려움을 물리치는데 5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그나마 그가 타고난 재주에다 출중한 지략을 갖추었기에 가능했다. 왕이 된 다음 그는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신라와 일본이 맺는 우호조약은 그 같은 사정을 말해 준다.

- 석탈해의 진실을 매우 알고 싶어진다. 그는 왠지 치졸해 보이지만 그 또한 인간적이기에 매력적인 인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도 오랜 세월을 기다려 그가 원하던 드림을 이루었기에 그 스토리가 더 궁금해지는 모양이다.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90. 히미코라는 이름을 삼국사기에서 다시본다. 신라본기의 아달라왕 조 20(서기 173)왜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와 인사했다는 짤막한 기록이다. 여기서 비미호는 하자가 조금 다를 뿐 히미코다.

 

히미코는 누구일까? ….. 그 의문은 일단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가운데 위지의 왜인전에서 풀린다. 그 무렵 일본은 성무왕의 시대지만 지방에는 30여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서 있었다. 히미코가 다스리는 나라는 야마일국이다. 그는 여왕이었다. 비록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였으나 가장 강성했다고 하고, 238년에는 위나라에까지 사신을 보낼 정도였다. 신라에 사신을 보낸 지 60여년 뒤의 일이므로, 같은 히미코인지 아니면 히미코가 왕을 일컫는 일반명사인지는 의문이어도, 실재하는 나라요 왕이었음은 부정하기 어렵겠다.

 

91. 일본에서 히미코 신드롬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도 이씨는 소개하였다.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오래도록 남성에 복종하며 살아온 일본의 여성들이 자신의 일을 찾고 자기의 삶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데 그들이 내세우는 상징적인 인물이 여왕 히미코라는 것이었다. 프로레슬러 히미코도 그 무렵에 이 같은 분위기를 타고 생겼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 1993년 일본을 방문한 불가리아의 어떤 여성 초능력 치료사가히미코의 조상은 한반도에서 건너왔다.”고 하였다.

 

96. 일연은 승려다. 승려 생활을 구름이나 강물처럼 머물러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운수행각이라고 한다. 일연 또한 거기서 예외일 수 없었고, 그래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지만, 13세기의 혼란스런 고려 사회가 그 삶을 더욱 모질게 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은 남다른 일 한가지를 했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승려라 해서 불교적인 데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미 앞서 단군 신화의 경우와, 앞으로 소개할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관심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오늘날의 민속학자가 따로 없다.

- 다른 승려들과 달리, 일연의 차별화된 노력 하나가 이러한 역사서를 만들었고, 몇천년 전의 이야기를 통해 감동을 준다는 것은 위대하게 다가온다. 나 또한 작지만 다른 이들과 차별화되는, 그리고 꾸준히 노력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96. 일연이 영일에서 가까운 오어사라는 자그마한 절을 찾아든 것은 환갑을 바라보던 때였다. 그에 앞서 그는 강화도로 옮긴 오아궁 가까운 절에서 왕을 모시고 있었다. 그 곳에서의 생활은 분주했다. 그러기에 낙향은 본연의 승려 생활로 돌아가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96-97. 영일은 한자어로 뜻을 풀었을 때 해를 맞는 고장이다. 동네 이름에서부터 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을 법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신라와 일본의 교통에서 영일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연히 일본과 관련된 이야기도 많을 것이다. 그 두 가지가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나온 것이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다.

 

97. 해와 달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우주의 그 어느 별보다 중요한 것임은 말할 나위 없지만 그것은 고대인에게 더욱 절실했다. 무당들이 모시는 가장 높은 신은 해와 달 별 곧 일월성신이다. 고대 삶의 모습을 지금까지 충실히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서 우리는 고대인이 지녔을 사유방식의 틀을 읽는다.

 

98. 본다는 것은 그 정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해와 달이 아니라 해와 달을 해와 달로 볼 수 있는 그 정령이었다.

 

100. 정령을 잃은 사람은 눈 뜬 소경과 같다. 사회도 그렇다. 일연이 강조한 것은 거기에 잊지 않았을까?

 

101. 정령의 의인화야말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사람이 사는 세상의 사람으로 바뀐 아 같은 이야기 구조는 삼국유사 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곰이 사람으로 바뀌는 단군신화에서 시작하여 호랑이가 아름다운 처녀로 바뀌는 김현의 전설까지 다양하게 퍼져있지만 여기 해와 달의 정령을 사람으로 설정한 데서 아름다움은 극치를 달린다.

 

102. 문득 그 정령은 먼 다른 나라로 갔다. 그런데 정령의 존재를 알고 서둘러 따라온 신라 사람들을 우리의 아리따운 정량들은 맨손 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런 것이 우리 설화의 기본적인 구조다. 그리고 그것은 누천 년을 이 땅에 자리잡고 살아온 우리네 사람들의 심성이기도 하다.

 

눈여겨보면 알겠지만, 이는 일연 자신이 직접 답사한 곳의 이야기를 적을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종결법이다.

- 단순히 있는 이야기를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답사까지 한 일연의 열정이 대단하다.

 

107 실제 일본열도에 단일국가로서 고대 왕조가 성립된 때를 대개 4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그 이전은 각 지역마다 작은 부족으로 이루어진 크고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삼국사기와 같은 우리쪽 역사서는 이를 통칭하여 왜라고 불렀던 것 같다. 신라를 괴롭혔던 왜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일 가능성이 있다. 어떤 왜는 친교를 하고 어떤 왜는 침공을 했다.

  

118. 신라 왕실 내부의 갈등이 아닌 왜의 비인도적인 처사 쪽에 더 치중한 일연의 기술에서 우리는 어떤 해석을 내릴 수 있을까? 고구려 사람들은 화살촉을 뽑아 내고 쏘는 시늉만 한 데 비해 발바닥 거죽을 벗기고 갈대 위를 걷게 하는 왜왕의 고문은 처참하기만 하다. 이렇듯 처참한 장면을 집어넣는 일연의 의도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시점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고와 고려 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나섰던 때와 시기를 같이 하고 있다. 연합군의 1차 정벌이 충렬왕 즉위년(1274)이고 2차 정벌이 5 (1279)이다. 일연은 충렬왕이 즉위한 해부터 왕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 2차 정벌 때는 경주 행재소에 와 있는 왕을 곁에서 모셨고, 두 차례의 정벌 사업이 끝날 즈음, 개성으로 돌아가는 왕을 따라가서 국사의 자리에 오른다. 그의 나이 77세 때의 일이다. 삼국유사는 이 무렵을 전후로 씌어졌다.

전쟁은 적개심을 필요로 한다. 비록 고려가 자원하여 벌인 것이 아닌, 몽고의 눈치를 보며울며 겨자 먹기 식이었다고는 하나, 전쟁은 전쟁이었다. 고려는 개국이래 오랫동안 일본과 그다지 교류를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전쟁을 벌려야 하는 이 황당한 교류로 인하여 새삼 그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떠올리게 하였고, 먼 옛날 신라와의 관계 속에서 그들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서 임박한 전쟁에서 반드시 쳐부숴야 할 구원의 대상으로 그려야 하지 않았을까? 박제상의 이야기는 거기 적절한 감이었을 거다.

 

그러나 일연의 이 같은 기술을, 단순히 일본을 적으로 만들자는 협소한 목적에 마감시켜서는 곤란하다…….

일연의 눈은 보다 더 크고 궁극적인 데로 향하여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도 걸리게 했다는 점만 유의하기로 하자.

  

120. 설화문학에서 말하는 유형 중 밤에 찾아오는 손님이 소재가 되는 야래자 설화가 있다. 그 밤손님은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남녀 관계에서 남자 쪽을 가리킨다. 남자는 당대의 영웅이거나 기이한 인물이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를 밤에만 남몰래 찾아 들어야 할 운명이다. 드러내 놓고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을 받아들인 여자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야래자 곧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하는 데서 일차 역할이 끝난다.

 

133. 귀신은 사람을 돕는 존재이면서, 그것을 어겼을 경우 엄정한 벌을 받는다는 데까지 나가 있는 것이다.

 

134.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 설화가 지닌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조화다. 조화를 부리는 것은 귀신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공포는 사라진다. 어쩌면 귀신의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듯한 이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듯하다.

 

137.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140.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최소한 한반도에서 신라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한 나라였다.

 

143. 그 가운데 하나가 내전의 분수승으로 대표되는 불교에 대한 고위 관료들의 적대감이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편지를 바친 노인의 존재가 전통적인 세력을 대표한다고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법흥왕을 이은 진흥왕대의 꾸준한 노력이 차차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해 간다. 특히 진흥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15세여서 태후가 대신 정치하였는데, 태후는 곧 법흥왕의 외손자 입종갈문왕의 부인으로, 세상을 마칠 때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었다고 일연은 진흥왕 조에 적고 있다.

 

144. 우리가 본지수적 또는 불국토사상이라 부르는, 토착화한 신라 불교의 모습은 이렇게 만들어져 갔다. 그리고 그것은 통일의 힘을 쌓는 일이기도 하였다.

 

신라 불교의 힘은 무엇보다 먼저 있었던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고 포용해 간 데서 더욱 커진다. 불교가 먼 나라에서 전래된 이방 종교가 아니라, 이미 전세에 인연을 마련한 우리 종교라고 생각한 신라인들의 본지수적. 불국토 사상은 바로 토착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밑바탕이었다.

 

149. 일연은 어떤 이의 말이라 하면서, “미는 미와 소리가 서로 가깝고 시는 력과 모양이 서로 가깝다. 그렇게 닮은 것을 응용해 헤매게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만 감은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땅에 인연이 있기에 자주 나타나 보이셨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는 미시를 분명히 불교적 존재로서 미륵으로 보려는 뜻일 것이다. 그런 한편, “지금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미륵선화라고 부른다.”는 말도 함께 붙여 놓아, 도교적 민간 신앙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150. 신라의 경우, 비록 수용이 늦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철저히 자기화 되어 정착되었으므로, 생경한 외래 사조에 휘둘리지 않았다.

나는 앞서 불국토 사상, 본지수적 등의 용어로 신라 불교의 성격을 설명했다. 이 같은 성격은 자연스레 호국불교 쪽으로 흘러간다. 원광이 화랑들을 위해 지어준 세속오계는 이런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152. 승려의 입장으로 실생활에 필요한 인륜 법칙을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본디 불교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신라 불교다

 

160. 역사는 충신들이 만들어 낸 역사인지 모른다.

 

185. 살아서는 사천왕사를 지어 나라를 지킨 문무왕은 죽어서는 용으로 태어나 그 일을 계속 하겠다고 한다. 용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축생도 곧 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곳에 떨어지는 일이다. 지의 법사가 이를 걱정해서는 한마디 거들지만, 왕의 신념은 비록 축생도에 떨어진들 변함없어 보인다.

 

186. 금당 알의 동쪽에 구멍을 낸 감은사. 용더러 다니라는 통로를 만들어 준 것이라니,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참으로 즐겁고 소중한 느낌이 가득해진다. 부자간의 짝짜꿍이 잘 맞아도 이렇게 잘 맞을 수 없다.  

지금은 터만 남은 감은사에 다행히도 동서에 세운 두 탑은 건재해 있다. 아마도 한반도에 남은 절의 탑 가운데 이만큼 기품 있고 의젓한 것은 업으리라.

 

187. 김부식은 피리 한 자루가 나라를 지킬 보배라고도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만파식적, 이 신기한 요술 피리에 대해서 그는 심히 믿지 못하겠다는 투다…….. 그러나 일연은 다르다. 절이며 피리며,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그는 떳떳이 쓰고 있다. 일연도 정말로 믿지 못할 구석이 없기야 했겠는가? 다만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요즈음 말로 하면,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터다.

 

189.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 이었다고 해야 할까?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 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 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을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거기 가세한다.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인지 모른다.

 

196. 사마천의 사기에 교토사주구팽곧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요리해 먹는 다는 말에서 유래한 권력의 비정한 뒤통수 치기를 나타내는 이 말은 이미 비유도 아니다. 권력을 잡은 자의 마무리 과정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한마디에 쓸쓸한 제 인생을 깊은 한숨과 함께 무상한 세월로 돌려보냈다.  

 

212. 득오의 모죽지랑가는 인생의 무상함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동시에 삼국 통일 후 당해야 했던 화랑 출신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 이 글을 잃고 갑자기 인생은 정말 무상한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달리고자 하는 걸까? 라며 허무해지는 마음에 인생무상의 뜻을 다시 한 번 찾아보았다. 사전적인 뜻에는 덧없고 의미없음. 이라고 쓰여 있었으나 법정 스님은 무상의 의미를 인생의 모든 존재가 생겨나고 없어지고 변화하면서 잠시도 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음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육신의 무상함을 알고 침울해할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지 말고 날마다 거듭나면서 후회 없이 알차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화랑들 또한 토사구팽을 당하고 얼마나 억울했을까만은, 남창이나 예인으로 전락하기 보다는 다른 수를 써서 자신만의 삶을 개척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219. 신문왕에서 출발한 출궁 사건은 중간에 일찍 죽은 효소왕과 효성왕을 제외하고 3대에 걸쳐 내리 일어났다. 공을 다투는 이는 많고, 새로운 통일국가의 이념은 아직 잡히지 않은, 몸집만 비대해진 신라의 허둥대는 모습이다.

 

226.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꽃을 꺾어 바치는 노인의 다음 행동이다. 자긍심을 가지고 부인 앞에선 노인은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노래를 함께 지어 바쳤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은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꽃을 탐내는 여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228. 다만 세상을 살며 경험해 터득한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는 점이 같다. 그가 알려준 방법은 강원도의 힘이 아니라 한마디로 여론의 힘이었다.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는 말은 원문에서 중구삭금이라 표현되어 있다. 중구란 곧 오늘날의 여론, 또는 민중의 소리라고나 할까? 사람들의 일치된 생각과 거기서 나오는 힘이 저 신물의 가공할 위세를 쳐부술 수 있다는 것이다. 노인은 그렇게 힘을 모을 방법으로 노래를 권하였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그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일 거슬러 내어놓지 않는다면

그물을 쳐서 끌어내 구워서 먹을 테다.

 

229. 노인은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면서 노래하라 하였다. 실제적으로 노래는 여러 사람의 행동을 일사분란하게 통일시키는 데도 필요했을 것이다. 다시 다음 시대, 본격적으로 인간의 삶이 노동을 통한 생산물로 유지하는 시대에 노래는 민요가 되었고, 민요가 노동 현장에서 불렸을 때 노래의 제의적 성격이 감소되는 대신 기능적 성격은 충분히 살아 있게 된다.

 

239. 토함산은 예로부터 경주를 감싸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산 가운데 하나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보러 오는 이들이 많지만 그 안에는 감춰진 보물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토함산 동쪽 자락에 있는 장항리 절터다. 불국사나 석굴암처럼 번듯한 탑이나 불상이 남아있는 것도 아닌데 꼭꼭 숨겨두고 혼자만 보고 싶은 그런 곳이다. 반쯤 부서진 오층탑에 새겨진 인왕상, 내 사진으로는 이 인왕상의 아름다움을 다 담아낼 수 없다.

 

242. 삶의 고통은 죽음이라는 운명적 환경이 만들어 준 것, 도 닦는 사람이라고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한 잎에도 속절없는 인간의 생애를 비유한 솜씨가 비상하기만 하다. 바람은 다름 아닌 이른 바람이다. 아마도 이 대목이 시의 핵심이리라.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어 형 아우가 정해지지만, 죽는 데는 순서가 없는 것이고 언젠가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다시 만날 것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이야말로 구도자이면서 시인으로서 월명사가 택한 최선의 길이다. 그 지점이 곧 한 편의 시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247. 구물거리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삶이 보잘 것 없는 백성이로되, 다스리는 자의 따사로움을 알고 믿고 따른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또한 백성이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이것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267.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뿐만 아니라 부인도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직 혼자 지고 가야 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272. 이는 어떤 메시지를 표면에 내세우기 보담 객관적 사실만 나열해놓고 읽는 이들에게 그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는 일종의 상징적 기술임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상징하는가는 명약하다. 자연의 이상 변동을 기록하는 사관의 뜻은 그것이 사람의 잘못으로 구체적으로는 정치의 불안정이겠지만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어려움이 닥친다는 경고에 있을 것이다. 

 

276. 장보고의 죽음도 죽음이려니와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온 해상왕국의 붕괴는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그의 최후가 어이없게도 권력다툼의 일개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데서 더욱 안타깝다. 인재들이 죽어나가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286. 시절은 바뀌었어도 사람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든 잘 되고 잘못되는 징조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거기서 기미를 읽어내라는 간절한 충정으로 보인다.

 

287. 신라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맥경화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피가 수혈되지도 못했다. 원성왕의 독서삼품과가 실패로 돌아간 데서 우리는 그 같은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수도인 경주가 통일된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던 것도 한 원인으로 들 수 있겠다.

 

288. 돌이켜 보며 아쉬워한들 무엇하랴.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있는 인재마저 죽이는 상황이 반복될 때, 거기서 우리는 한 나라의 멸망을 명확하게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다.

 

289. 하늘이 감옥을 흔들었다는 대목은 사족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억울한 일을 당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단박에 하늘이라도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아무리 간절해도 끝내 가슴에 묻어야 할 답답한 현실이 엄연하지 않던가? 사필귀정이요 새옹지마라 하니, 누구에게나 반드시 이르는 결과는 아니요, 다만 그 말대로 이뤄진 경험을 해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쪽이다. 

 

294. 이야기의 끝은 늘 풍성한 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품속의 꽃가지를 꺼내 아내로 맞는 마지막 줄은 기막히게 아름답다. 끝없이 이어지는 비극의 낱낱을 쓰기에 지쳤을 즈음에, 그 자신에게나 읽는 이에게나 한 가닥 희망 곧 새 나라 탄생의 빛을 실어 주려는 일연의 붓끝이 보이는 듯하다.

 

304. 그런 면에서 일연은 오히려 올바른 김부식 팬이었다. 좋은 부분을 인용하면 그만이라는 태도가 엿보이고, 좋지 않은 부분을 인용하면 그만이라는 태도가 엿보이고, 좋지 않은 부분을 놓고 비판한다거나 굳이 자기 관점에서 해석하지도 않았다.

 

309. 정말 백제의 고도가 부여일까? 물론 백제가 부여를 도읍으로 삼아 120년이나 지냈고, 거기서 나라의 최후를 맞이했으니 중요하기는 하겠다. 웅진에서 도읍했던 63년까지 합한다면 그 183년의 백제 역사는 파란만장한 한 편의 드라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백제의 전 역사를 통틀어본다면 이 기간은 전체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311. 웅진, 부여 천도 뒤의 백제 역사는 특히 그것이 왕실과 관련된 것일수록 늘 일본과의 교섭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 

  

327. 서동은 허무맹랑하지는 않았다. 아무도 실현 가능성 없다는 이 일을 돌파할 꾀가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서동이 쓴 방법은 노래를 통한 여론의 조성이었다. 노래에는 그 같은 힘이 있다.

 

330. 영웅은 자기가 타고난 비범한 재주로 고난을 극복해 낸다. 서동은 이웃 나라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으로 그 첫발을 내딛고 있다. 첫발치고는 통도 크다.

 

337. 단지 다르다면 선화공주가 억울하게 버림 받았으면서도 끝내 어버이를 생각하는 착한 딸이라느 점, 그리고 그것은 바리공주 설화로 지금까지 전해오는, 한국인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잡은 한국인만의 특성을 반영한 점뿐이다.

 

338. 실제 무왕은, 설화 속에서는 장인인 진평왕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며 백제를 지켜 낸 왕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의자왕대로 늦추어진 것도 무왕의 강고한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353.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 편으로 만드는데 능했다. 아마도 그 결정적인 사건은 견휜의 경애왕 살해일 것이다.

 

353-354. 왕건이 연패하는 중인데도 신라에서는 고려와 화친하고 더 나아가 나라를 맡기자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었다. 됨됨이가 견훤처럼 사나운 사람보다 온순하고 정이 많기로 왕건이 그들의 뒤를 잘 봐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358. 그것은 마치 초 항우와 한 유방의 싸움을 보는 듯 하다. 역발산 기개세라 한 항우 앞에 유방은 언제나 꼬리 감춘 쥐였으나, 민심의 향배가 그들의 운명을 가르지 않았던가?

 

361. 왕건은 그가 지닌 성품대로 부하들을 보내 맞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자식에게 당한 배신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온 이 노장이 도착하자 자기보다 10년 위라고 해서 그를 높여 상보라고 했다. 상보는 경순왕에게도 주었던 직함이었다. 이 와중에도 살길을 찾은 이는 용케 그 길을 간다.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견훤의 사위 영규다.

 

363. 왕건은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다만 능환만은 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네 꾀다. 신하된 도리에 마땅히 이래야 한단 말이야 하고 목을 베었다.

 

(견훤이 등창이 생긴)그 때가 언제인들 무슨 상관이랴? 따지고 보면 자식을 원수로 여겨 죽이지 못하는 것을 분통해 하고, 치사한 목숨 부지하다 등창이 나서 제 명을 재촉한 사람의 생애다. 실제로 그 지경까지 되었을까 의아스러운 점이 없지 않지만 말이다.   

 

364.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려 있기에 오늘날 소중한 자료로 남게 된 베스트 3을 꼽으라고 한다면 무엇을 들겠는가? 내가 존경하는 어떤 선생님은 단군신화, 향가, 가락국기 이 세가지에다 점을 찍었다.

 

그런데 왜 가락국기일까? 일단 표면적으로는 지금까지 전하는 가야사에 관한 유일한 사료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단편적인 소식이 신라사에 섞여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요. 일본 쪽의 역사서에서 산견되는 자료는 일부 삼국사기와 중복되거나,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자는 의도에서 왜곡된 듯한 인상을 주는 것뿐이다. 도대체 400년 가까이 존속된 나라의 역사치고는 철저히 외면되어 있다.   

 

365. 가야를 그냥 건너뛸 수 없는 이유가 일연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허황옥이라는 불교의 발상지 인도로부터 멀리 시집온여자, 이 땅에 불국토의 신성함이 서려 있다고 믿는 일연으로서는 이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소홀히 대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찾아든 좋은 자료가 바로 가락국기다.

 

369. 일연이 수고한 김에 조금 더 넉넉히 마음을 써서, 간략히 줄이지 말고 모두 실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마지막에는 그런 생각까지 든다.

 

372. 가야 사람들은 질박하고 검소하게 살기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그만큼 작은 나라가 가진 능력의 한계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375. 왕이 처음 신부를 맞으러 나간 날이 7 27, 나흘을 보낸 다음 8 1일에 궁궐로 돌아왔다고 가락국기는 전한다. 두 사람의 꿈 같은 밀월여행은 짧기만 하다.

 

378. 먼 뱃길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의 석탑, 그것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한다. 바람과 파도 속에서, 또 때로 찬란한 태양과 밤하늘의 빛나는 별의 인도를 받으며 건너는 고해가 있다.

그 길을 지켜주는 석탑.

 

382. 김춘추와 문희 민족의 결혼이 낳은 아들 문무왕, 삼국통일을 완성한 그는 신라와 가야 두 민족 간의 결합으로 태어났다. 그러기에 민족간 결합에 의욕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민족간은 결합해야 하고 결합할 수 있다는 신념과 경험을 가진 그라면 나아가 신라 백제 고구려의 세 나라를 한 나라로 만드는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385.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것을 다루는 일연의 태도는 뭔가 자신감에 차 있다. 보고 들은 것과 몸소 체험한 것이 일체를 이루는 부분이기에 더 그랬으리라.

 

386. 흥법은 곧 흥국이었다. 처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도교에 빠져 불교를 배척한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고 우여곡절 끝에 불교의 세계에 접했으면서도 날로 번창한 신라는 그에 따라 나라도 번창해 갔다.  

 

399. 암울한 상황에서도 희망은 있다.


봄빛이 아직 두루 돌지 못했을 때 매화는 핀다. 이런 자연의 섭리는 곧 인간 세계의 그것으로 원용되고 있다. 눈 덮인 땅에 빛은 돌지 않았지만, 매화꽃과 같은 존재로 모례는 등장한다. 신불이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스런 상황에서 꿋꿋한 믿음을 지킨 그녀다.

 

417.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은, 비록 지금은 허허벌판일지라도, 황룡사 터에 한 번쯤은 서 보아야 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후배는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하루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근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너의 등을 덮여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 년을 기다렸단다. .

 

425. 아쇼카는 콤플렉스가 많은 왕이었다. 못생긴 얼굴에 형의 자리를 빼았았다는 죄책감마저 가득했다. 그것은 이상한 형태로 뻗어나와 결국 가상 지옥을 만들어 놓고 잘생긴 사람을 들여보내 죽이는 해괴한 짓을 저질렀다. 

 

430. 순도의 불상도 장륙존상도 모두 없어져 버린 지금, 한반도라는 작은 공간과 함께 머물렀던 세계 불교 문화의 두 중심을,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리워할 뿐이다.

 

434. 신라를 가운데 두고, 중국과 인도의 불교 문화 그리고 가까이는 백제로부터 들어온 기술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인 곳이 황룡사다.


435. 싸움이나 싸움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천지가 평화로워지는 꿈, 그것은 일연이 구층탑을 보며 꾼 것이다.


436. 선배 승려 무의자가 쓴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자신의 마음이라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한다.

나는 들었네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번지는 불길 속에서 한 쪽은 무간지옥을 보여 주더라고

  

440. 우리는 이 같은 기록을 통해, 일연의 불교 사상이 문수 신앙으로부터 시작한 것은 아닌가, 잠정적이 이정표를 세울 수 있다.  


문수보살을 흔히 출가의 보살이라고 한다.

곧 선재의 출가를 뜻할 뿐 아니라 깨달음의 길에 동기를 부여하는 상징으로 읽힌다. 누구든 수행의 첫 길은 문수보살로부터 시작한다.

또는 문수보살을 비유해서 세상의 어린 아이에게 부모가 있는 것처럼 문수는 불도를 닦아나가는데 부모라고도 했다. 부모는 자식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자다. 문수도 성불의 그 같은 절대적 조력자라는 뜻이다. 나아가 문수 신앙은 대체롤 이런 문수 보살의 성격에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출가를 통한 깨달음의 시작, 나 또한 문수 보살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448. 오늘날 우리가 오대산에 가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오대산의 오만 진신은 신비롭기만 하다.


456. (선배가 쓴 절이라는)시의 끝에 나는 이렇게 메모를 했다. 마음이 찾아갈 정처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 누구도 한 마음으로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할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은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간다. 그래. 찣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나에게 절은 그랬다. 금대암에 다녀온 후, 나이 드신 보살님이 차려준 정갈한 절 밥을 맛있게 먹던 아내와 아이들이, 가끔 그 암자를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즐거움이라니. 

 

459. 천 개의 눈에서 하나만이라도 내 주어 소원을 들어 주기 바라는 지극한 마음이 노래에 스며 있다. 그러면서 짐짓 희명은 엄포처럼 마지막 줄을 맺는다. '어디에 쓰일 자비이기에 여기서 들어 주지 않으시려는가'라고

 

466. 자신들이 믿어마지 않는 어떤 절대자에 대한 꾸밈없는 흠모는 이런 기적을 낳게 한다. 일연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 이 같은 세계 속에서 살았음을, 우리에게 조용히 전해 주고 있을 뿐이다.

 

469. 불성은 대체로 마음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법이다. 그 불성은 어떤 지식보다 나으며, 때로 기적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니, 무엇이 값어치 있는가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472. 만약 삼국유사에 실린 150여 가지가 넘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뜻 깊은 것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여기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를 대는데 주저하지 않겠다. 탑상 편의 남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조다. 학위 논문을 쓰면서 나는 이조가 일연과 일연의 문학 그리고 삼국유사를 이해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자료라고 주장한 바도 있다.


백월산 연기 신화로 시작하느 이 조는 부득과 박박이 각각 미타불과 미륵불을 근실히 구하다 함께 왕생하는 이야기다.

 

481. 중생의 뜻을 따르자고 박절히 내쫒지 못한 것, 맑은 마음을 지키며 벽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염불을 외운 것, 아이를 낳으려는 여자 옆에 애처러운 마음으로 가만히 등불을 피워 놓은 것, 두려운 마음 한편 가득했으나 새로 물을 끓여 산후의 여인을 씻긴 것 등 부득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비록 관음보살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이미 도를 이룬 자의 마음씀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그의 행동 하나하나 그 자체가 관음보살의 헌신인지도 모른다.

 

488. 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낙산사는 그렇게 성스러움의 정화를 느낄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담이 둘러쳐 있지 않은들, 그래서 세속의 시끄러움이 여지없이 몰아쳐 온들 결코 변함 없을 터이지만, 고요하고 아늑하 경내의 정원을 둘러보자면 더욱 그윽해지는 이야기들이다.

 

495. 참으로 치밀하고 정성을 들인 노력 후에 얻은 만남이다. 그런 노력으로 얻지 못할 무엇이 있겠는가 웅변하는 듯 하다. 나는 이것을 치밀하고 정성스런 만남이라고 명명한다.

 

498. 의상이건 원효이건 어떤 하나의 삶의 방식대로 살다 간 무수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모델일 뿐이다. 

 

508. 허망한 줄 모르면서 이전투구하고, 알면서도 뭔가 이뤄보려 악착을 부리는 게 우리네 평범한 사람이다.


513. 우리는 삼국사기의 열전에 승려가 단 한 사람도 채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그다지 거론하지 않는다. 원효도 의상도 없다. 아마 일연에게는 이것이 못내 아쉬운 한 가지였으리라. 삼국시대를 특히 신라 중심으로 기술한다고 했을 때 몇몇 승려들의 역할과 업적은 불교의 그것을 떠나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아쉬움은 크다. 기록자가 자기 시대의 이념만을 고집해 당대의 생생한 자취를 남겨주지 못한 점 삼국사기는 거기서도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의해' 편의 여러 기록들은 삼국사기의 이런 단점들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도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527. 운문은 구름의 문, 아마도 운수의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잠시 머무는 곳인가.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다.   

 

530.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사람이라고.

 

531.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537 원효가 이미 계를 범한 이후 속인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불렀다. 어느 날 우연히 배우들이 가지고 노는 커다란 박을 얻었는데 모양이 괴이하여 그 형상을 따라 도구를 만들었다. 화엄경에 모든 것에 거침없는 사람은 한 가기 길로 나고 죽는다는 대목을 가지고 무애라 이름 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시켰다. 일찍이 이것을 지니고 모든 마을 모든 부락을 돌며 노래하고 춤추며 다녔는데 노래로 불교에 귀의하게 하기를 뽕나무 농사짓는 늙은이며 독 짓는 옹이장이에다 원숭이 무리들까지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크다.


속과 성의 경계를 마음대로 드나들고자 했던 원효도 요석공주와의 사랑이며 설총을 낳은 일에 초연할 수만은 없었던가 보다. 스스로 파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를 부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극복되는 초월의 단계다. 원효가 오늘날의 원효가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변증법적 정반합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효아닌 원효는 무애의 원효였다.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 배우들이 노는 도구란 일반 민중들에게 익숙하고 재미있는 것이었으니, 거기에 빌려 어려운 불교의 교리를 쉽게 풀고, 누구나 가까이 하는 불교를 만들었다.


538. 일연이 발견한 원효는 이런 원효였다. 고고한 학승만으로, 폐쇄적인 선승만으로 아닌 모두의 승려, 무엇에도 얽매지 않았던 인간 원효를 가장 잘 바라본 이는 아마도 일연이 처음 아니었을까? 

 

543 감통 편의 광덕과 엄장조에서 광덕의 처에게 꾸지람을 들은 엄장이 대오각성하고 찾아가는 사람이 원효다.원효 는대체로 낮은 자리에 사는 사람들의 친구였고, 우리는 이런 장면들에서 바보같은 원효가 진정 바보가 아님을 확인하는 것이다.


545. 한 마디로 말하면 원효는 이 나라 불교의 '첫 새벽'이다. 그로 인해 한국의 불교가 만들어지고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571. 나는 거기서 참으로 모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우리가 모진 것과 다르다. 우리가 자본주의적 욕심에 버려져서 모질다면 그들은 원초적 자연 속에서 몸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적응하고 생존하려는 데서 생긴 모짐이다. 인류가 가장 인류다운 모습, 아마도 문명 이전에 인류는 저렇게 살았을 것 같은 모습을 그들은 지금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 준다. 진실로 두려워 할 줄 알고, 진실로 견뎌 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성스러워 보였다. (김수남의 변하지 않는 것은 보석이 된다..를 읽고)


그 성스러운 땅에 일찍이 우리 조상들이 발을 디뎠다는 사실을 삼국유사는 우리에게 고스란히전해준다. 바로 '의해' 편의 '인도로 간 여러 스님들' 조다.

 

574. 해동의 작은나라 신라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아리나발마처럼 처음에는 중국에까지만 가려다가 인도까지 가게 된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인도 여행을 목적으로 출발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한 번 가서 돌아오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아니 돌아오지 못해도 좋다는 각오가 서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일연이 제목에다 '귀축제사'라 한 귀는 깊은 의미를 지닌다. 가고서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결국 그 곳이 진정 돌아갈 곳이 아니겠는가.


576. 순례자의 마음인들 범임의 그것에 조금이나 가까운 것이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수구초심 하나일까? 

 

580. 인간의 강인한 의지와 용기도 엄청난 자연의 힘 앞에 맥없이 스러진다. 그러나 그것을 마다 않았던 순례자들을, 일연은 아름답고도 슬프게 추도하는 것이다.


596. 세 사람이 수행하는 방법은 스스의 그것과 방불하다. 제 몸을 버리는 용맹스런 정진과 참회 그것이야말로 진표가 한 수행의 핵심 아니던가?

 

623. 나는 삼국유사 9개 편 가운데 여기(감통)를 가장 즐겨 읽는다. 이름 없이 살다간 평범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불교를 매개로 진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624. 마당 양쪽에 장대가 서 있었다. 욱면은 새끼줄로 양쪽 손을 뚫어 장대위에 연결하고 양쪽을 왔다갔다하며 있는 힘을 다했다. 그 때 천사가 공중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욱면 처자는 법당으로 올라가 염불하라.” 절에 모인 사람들이 이를 듣고 권하니, 욱면은 법당에 올라 순서에 따라 열심히 염불했다.

 

625. 아랑곳 하지 않고 제 일을 마친다음 잠을 줄여가며 예불에 온 힘을 기울이는 욱면의 모습에서 이 이야기의 진수는 나온다. 일연은 욱면을 소재로 찬을 남겨놓고 있는데, 처음 두 줄이 이렇다.

 

서편 이웃 오랜 절엔 불들이 밝았는데

방아 찧고 오노라면 밤은 금새 이경


그것을 일연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하늘에서 내린 소리 부처를 이루게 했네

손바닥을 줄로 꿰어 육신을 잊었으니 

 

628. 계집종의 성불에 자극을 받은 귀진은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적어도 그것은 껍데기가 아닌 진짜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 아닌다. 신라 사회의 힘이다.

 

644 산 속에서 세 오빠 악한 짓 견딜 수 없어

꽃다운 입에선 대신 죽겠노라 한 마디

의리의 소중함 몇 가지로 들어 죽음도 가벼이

수풀 아래서 몸을 내놓았네. 떨어지는 꽃러럼

 

아름다운 시다. 무슨 설명을 더 붙이랴.

 

656. 정작 큰 스승들은 무엇을 가르쳐 주는 법이 드물다. 진리는 단순한 법이기에 그런 것일까. 유독 진신과의 만남을 중요시여기는 불교에서 그 만남은 곧 진리의 깨달음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겠는데, 단순하기만 한 진리를 전하는 진신은 이렇듯 슬며시 다가온다. 진신인지 알고 모르고는 찾는 이의 책임인 것이다. 기독교의 성서 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도적같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그 성인을 만나는가? 의상 스님과 같이 치밀하고 정성스런 사람이 만날 것이며 효소왕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은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은 만남이다. 그 만남을 뒤에라도 만남인 줄 알면 그렇다. 효소왕은 그것을 알았기에 부랴부랴 그 뒤를 쫒아갔다. 다시는 그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절을 짓고 공양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그런 만남이 우리에게는 더 많고, 또 소중하지 않은가

 

666. 한 거사가 차림새는 초라한데 손에 지팡이를 잡고 등에는 광주리를 지고 하마대에 와서 쉬고 있었다. 위에서 보니 광주리 안에 마른 물고기가 담겨 있었다. 시중 들던 이가 비아냥 거리면 말했다.

자네는 승복을 입고도 어찌 건드려선 안 될 물건을 지니고 있는가?”

산 고기를 가랑이 사이에 끼고도 있는데, 아무 장터에나 파는 마른 물고기 좀 등에 졌기로서니 뭐가 꺼릴 게 있다는 말이오?”

 

672. 세상과의 절연이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돼지우리 같은 시궁창에 뒹굴어도 살아 있음이 소중하고, 복마전 같은 세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아옹다옹 싸우며 한 세상 마치는 것이 모정의 세월이다. 누군들 거기서 벗어나 홀로 한 길을 가고 싶겠는가. 그런데도 그 길을 간 사람들에게는 뭔가 곡절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의 숨음은 이와 다른 면이 있는 듯하다. 세상에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고만 해서 은거가 아니다. 또 드러냈다고 해서 드러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불교적 인식의 숨음과 드러남을 이해하자면 보다 복잡한 변증법적 사고가 필요하다.


675. 산중에 고요히 앉아 생애를 마쳤는데(혜현) 석실에 갖다 둔 시신에서 오직 혀만 붉게 남아 있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숨어 산 이의 마지막이 그렇게 신이로웠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리라.

    

704. 일연이 삼국유사에 신라 향가 14수를 실어놓은 것에 대해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우리 고대 가요 중에 그 정형성을 최초로 획득했으며 지극히 높은 정신 세계를 구축한 이 시가 장르에 대해 비록 편린으로나마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오직 삼국유사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향가 하나에 머물지 않고 10세기 이전의 시가에 대해서 그렇다. 책 한 권에 실린 단 14수가 천 년의 시가사를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714. 서방 정토를 간절히 바라는 이생의 사람들에게 훌륭한 공덕을 쌓아 나가라는 메세지를 담은 것이다.

태어난 일 자체가 설움, 우리는 그 운명의 짐을 저버리지 못한다.


725. 순수 불교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일연의 태도에서 우리는 괴승의 요소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선각자적 태도를 발견한다.

  

729. 평소 꿈꾸어 오던 일 이라는 구절이 의미심장하다. 비록 선종사의 중요한 일면을 차지한다고 한들 자신의 산문과 상관없는 책을

편찬하고자 꿈꾼 그의 뜻은 무엇일까?


739. 신라 사회는 고대 삼국시대에서도 중국의 문물을 가장 늦게 받아들였지만 가장 훌륭히 소화해 내었다. 재래신앙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던 사회 중심부에 외래의 불교가 파고 들어오는데 신라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거기에 종속되지 않았다.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의 조화 아래 신라인들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 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신라 문화의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 삼국유사를 읽으며 신라의 매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장 늦지만, 모든 것을 포용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가장 잘 맞게 토착화시켜나가는 것의 힘...나 또한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고 나와 다름을 포용하지만 그것에 종속되지 않고 나에게 가장 알맞은 모양새로 새로운 나만의 스타일을 창조하고 싶다.

 

741. 민족적 정서를 그 고유어로 가장 잘 드러낸 시 그것이 향가이고, 일연은 이 점을 가치 있게 보았던 것이다.


13세기 혼미한 사회를 살다간 일연은 종교와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한 혁신적 승려였다. 그가 삼국유사에서 원효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음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 자신이 원효 스타일의 원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삶의 모습으로 보였을 터다. 물론 승려이기에 그가 보여 준 행적은 일반적인 경우의 충격적인 것과 정도가 다르겠지만 승려의 신분 안에서도 분명 예외적이었다. 그러기에 누카리야와 같은 학자가 순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렸을 법한데, 이는 한마디로 사회사적 배경을 무시한 결론이다.

 

742. 칠백쪽을 넘나드는 책의 맨 끄트머리에 있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 책에 깊이 감명받은 사람이거나, 나를 개인적으로 아는 누군가일 게다. 그도저도 아니면 책 뒤의 ISBN 코드까지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흔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일 것이고, 어쨌거나 그 간의 내력을 조금 풀어놔야겠다.

 

743. 다시 읽는 삼국유사에서 찾아낸 소중한 한 가지, '사랑'을 담아내고 싶었다.

황룡사 터를 배경으로 하얀 별빛과 노란 가로등 불빛에 처연히 빛나던 분황사 당간지주에 서린 원효의 고독한 사랑, 점점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서 있는 부석사 석등에 묻어 있는, 온갖 번뇌에도 흔들림없이 제자리를 지켜 내는 의상의 순결한 사랑, 몸통만 남은 깨진 불상을 위해 촛불을 밝히는 촌노의 손끝에 실린 욱면의 순박한 사랑, 낭산 너머로 지는 해를 아쉬워하며 먼발치에서 까치발로 서성대는 익모초에 담긴 지귀의 짝사랑..

이런 저런 사랑을 찾아 다니다 며칠 만에 집에 돌아오면 초롱초롱한 아이들과 아내는 내가 사진에 담으려고 했던 그 어떤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내가 찍어온 평범한 사진에도 무한대의 감동을 보이며 힘을 실어주는 것도 아내와 딸의 몫이었다.

 

744. 지금 나는 사진 찍기와는 조금 떨어진 일을 하며 지낸다. 그래도 사진 찍기는 참 재미있다. 내가 즐기는 것 가운데 가장 신나는 놀이다.  의상의 몇 편 되지 않는 저술을 평한 일연의 글처럼솥 안의 국 맛을 책임지는 특별한한 점 고기같은 사진 말들기, 희망사항이다.

드라마에 맨 날 나오던 사람이 어느 날 음반을 내고 크게 히트하면 그 날부터 가수가 되는 걸 종종 본다. 나라고 못하란 법 없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날보다 카메라 가방 매고 쏘다니는 시간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이 책이 히트치기만을 바랄 뿐이다.

- 굉장히 위트있는 저자의 말이다. 책의 마지막을 웃으며 덮을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나에게도 힘이 나는 말을 해준다. '나라고 못하란 법 없지!'

 

Ⅲ. 내가 저자라면

사실 그저 처음부터 삼국유사의 원본을 읽으라고 했다면 더욱 막막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은 고운기 교수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에 담겨 있는 속 뜻까지 풀어주는 형식이라 더욱 쉽게 읽혔던 것 같다. 두꺼움에도 불구, 간간히 들어가 있는 사진을 통해서 오히려 옛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라며 상상해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고 직접 답사까지 한 저자의 땀방울이 느껴져 더욱 함께 호흡하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방적인 해석을 들어 내가 더 나아가 상상해 보거나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을 읽고 삼국유사의 원본을 꼭 읽어보리라..라는 마음이 드는 거 보면 말이다.

 

내가 저자 였다면 조금은 더 원문 위주로 보여주면서 이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진행하지 않았을까 싶다. 삼국유사를 쉽게 읽도록 도와주고, 또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뜻은 전문가로서 안내하지만, 독자로서 숨쉴 수 있는 틈이나 독자가 여운을 즐길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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