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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9일 10시 57분 등록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 현암사, 2006.


1. 저자에 대하여


■ 일연 ■


일연.jpg

 

•출    생

1206 경북 경산 출생 / 1289.7.8 입적. 속명 金見明, 자 희연, 자호 목암

 

•활동분야

고려 승려,

 

•발 자 취

9세. 광주 무량사에서 공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에게서 양육됨

 

 

14세. 설악산 진전사에서 계를 받고 정식 승려가 됨

 

 

22세. 승과에 나가 최우등 합격, 이후 몽고침입 피해 암자에서 수행

 


31세. ‘수행 중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짐. 현풍 비슬산에서 20년간 수행,

     남해 정림사에서 10여년 머무름

 

 

44세. 남해 정림사 주지로 부임. 불교계 지도자로 자리잡으며 왕명을 받들어 불교 행사를        주관하면서 불교관계 저서 중평조동오위 찬술

<사진:경북일보, 2013.11.13>

 

 

1259. 대선사 됨. 원종의 명으로 강화도 선월사에 주석하며 왕실과 관련을 맺음

……

밝음이 곧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라

……

 

 

1283. 국존에 봉해져 불교 교단 대표함. 군위 인각사에 머물며 선종교단 이끔

 

 

1284.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옴

 

 

1289. 입적. 충렬왕으로부터 보각 시호를 받고 보각국존비와 부도가 인각사에 세워짐

 

•저    서

중평조동오위, 삼국유사




■ 어린 아이, 김견명 


 어릴 적 재밌게 읽었던 이야기들의 출처가 삼국유사였다.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겠다던 곰과 호랑이 이야기, 암벽에 놓인 꽃을 꺾어 달라던 수로부인,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지만 나라를 구하겠다는 만파식적, 일찌감치 마누라를 점찍었던 서동이야기.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잠이 드는 어스름, 머리맡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 주는 모습이 생각난다.

 70이 넘어 삼국유사를 집필한 승려 일연. 그의 마음속에 어린 아이가 숨어 있지 않을까. 마음속에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함, 호기심,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있지 않을까. 어릴 적부터 떠나온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 평생을 선종 스님으로 살아간 그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맑고 고운 물의 흐름, 그러나 어지러운 세상과 분리하지 못한 그의 정신,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가기 전의 혼란스러운 모습들, 그리고 속세에 남겨둔 어머니. 평생 그의 마음 속에 있었을 아이가 보다 아름다운 세상에 대해 고민하고 보다 일상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쏟고, 보다 기이한 이야기들에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의 이야기들을 찾아낸다. 그리고 아이일때 그가 듣지 못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그리며 아주 초로의 아들이 그보다 더 초로의 어머니에게 그가 세상을 보며 찾아낸 이 이야기들을 들려 준다. 조곤조곤,

 

 일연 스님의 아이일 때 이름은 김견명. 아버지 김언필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벼슬을 한 적은 없었고 일연이 국사에 오른 뒤 벼슬을 추증받았고 어머니가 낙랑군부인으로 봉해졌다 하는데 그들이 지역의 향리층에 속했을 것이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일연의 어머니는 태양이 방에 들어와 자신의 몸을 비추고 난 후 임신하고 일연이 태어났다. 그리하여 광명의 상징인 태양에 인연해서 세상에 나왔다는 뜻으로 견명, 자는 희연이었다. 이름과 관련하여 일연은 만년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옛 사람들의 작명 관습으로 보아, 세속에서의 이름과 승려가 되어 처음 가진 이름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처음 이름 견명, 불교 이름 희연에서 밝음과 어둠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년에는 이 둘 곧 밝음과 어둠을 하나라 보겠다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 밝음이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은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일연의 개명 과정에 숨어 있는 것으로 본다.

 일연은 아버지가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에게서 자랐다. 9세에 전라도 광주 무량사로 취학하게 되는데, 아마도 이러한 가난하고 어려운 사정때문이었으리라 본다. 공부를 위해 가게 된 절에서 인연이 되어 14세에 정식 승려가 된다. 설악산 진전사였다. 이후로 일연은 여러 곳을 다니며 수도에 힘썼고 고종 6년 22세에 승과에 나가 합격하고 이후 몽고침입을 피해 암자(비슬산)에서 수행하였다. 그러나 고종 23년 또다시 몽고군이 또 쳐들어오고 국토가 전쟁에 휘말릴 때, 일연은 수행 중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오늘에야 삼계(三界)가 허깨비나 꿈같음을 알았고, 대지가 털끌만큼의 거리낌도 없음을 보았다”라고 전한다. 이후 삼중대사, 선사, 대선사 등의 직급에 차례로 오른다. 고종 36년 44세에 당대 실력자 정안이 남해의 개인 집을 내놓고 정림사를 만들었는데 그곳 주지로 부임하여 왕명을 받들어 불교 행사를 주관하고 길상암에서 불교관계 저서 중평조동오위 찬술하고 남해분사도감에서 대장경 간행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종 46년 대선사가 되어 왕의 부름을 받아 강화도 선월사에 머물며 지눌의 법을 계승한다 이후 오어사와 인흥사를 거쳐 왕의 명으로 운문사에 머물었고 삼국유사를 집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73세에 인흥사에서 역대연표 간행, 79세에 인각사에서 구산문도회를 개최, 84세에 7월 8일 제자들을 모은 후 “내가 오늘 갈 것이다”라고 말한 후 입적했다 한다.

 그의 입적 전의 행적이 하나 더 있다. 79세에 일연은 은퇴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의 어머니는 96세로 고행에 계셨다. 일연의 어머니는 열일곱에 낳은 아들을 스물 여섯에 품에서 떠나보내고 70여년을 홀로 살았다. 자신의 노년의 마지막, 노년의 어머니를 모시기 위한 이유가 그의 은퇴이유라고 한다. 

 1281년 78세에 국사에 책봉된 일연의 삶의 궤적을 보면 작은 나라로 힘없는 자의 설움을 당하면서도 민족의 자존을 염두에 두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을 불국토 사상으로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존이라는 지위에 올라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스스로는 선승으로 참선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선을 넘어 불교의 대장경 경전에도 해박했고 역사책이나 서책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일연의 문장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찬시, 불교신앙의 이적, 영험 등에 대한 찬탄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를 일연 개인이 편찬한 역사책으로 보고 있으나 일연은 삼국유사에 자신이 지었다고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한다. 또한 삼국유사는 일연의 제자들과 더불어 자료수집이나 필사 등의 작업 등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보고 있다.



■ 고운기 ■

고운기.jpg

 

•출    생

1961. 12.15. 전남 보성 벌교

 

•활동분야

교수, 시인 삼국유사 연구자

 

•발 자 취

한양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 취득

 

 

박사논문 「일연의 세계인식과 시문학 연구」를 쓰는 동안 10여 년 넘게 삼국유사 이야기의 현장을 찾아 직접 답사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이 당선돼 등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2007.4~2008.3 일본 메이지대 객원교수

 

 

현,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사진:매일신문, 20124.19.>

 

•저    서

시집 : 시힘, 배추에게도 마음이, 섬강 그늘,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

배움도 깨달음도 언제나 길 위에 있다

……

 

 

새로 읽는 한국 고시가,

 

 

일연,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삼국유사,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논어,

 

 

삼국사기열전, 길 위의 삼국유사,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듕귁과 오렌지:고운기의 유유자적 역사 산책, 삼국유사 글쓰기 감각 

 

 

신화 리더십을 말하다, 배움도 깨달음도 언제나 길 위에 있다 등


■ 고운기


 사마천의 사기열전의 역자 김원중은 자신의 번역 원칙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나름 일리 있는 말이었지만, 사기열전을 읽으면서 확실히 번역책임을 알 수 있었다. 뒤이은 삼국유사는, 저자에 일연을 내세우지 않았다. 아니, 책의 저자는 고운기다. 왜?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사기열전의 역자가 피력하듯이 번역책이 아니었다. 이념주의적 관점에서 번역한 것도 아니고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고 삼국사기와 비교하며 내용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그렇기에 단순히 넘어갔을 부분들,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했던 지점들에 작가의 생각과 자료들을 만나게 된다. 

 저자는38세에 나이에 도쿄행을 감행했다고 한다. 해보려던 공부가 있었고 그것을 실행하기에는 더 기다릴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백일 막 지난 둘째가 있었고 그의 세 식구를 떼어 놓고 가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도쿄의 연구실에서 혼자인 것처럼 3년을 지냈다고 한다. 

 고운기는 책의 머리말에서 손문의 글을 빌어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또한 묻고 있기도 하다.


편안함이나 위험이 어떤 날에는 서로 기대는 친구가 되고

즐거움이나 고통이 닥치거든 두루 맛보아야 하는 것

 

 손문이 광동성 궁벽진 어느 후원자의 집에서 며칠을 묵고 사례 대신 남긴 글이라 한다. 저자는 타국의 연구실에 이 글을 곱씹었다 했다. “그 글을 받은 어느 촌부가 되어, 그렇게 쓴 혁명가의 속내를 헤아리겠노라고. 거기에는 정녕 안위와 감고의 어느 한 쪽이 아닌, 슬픔과 기쁨의 정반합으로 이르게 되는 변증법적 합일의 세계가 있다. 벌써 이십년 가까이 나는 삼국유사를 맴돌았다. 이는 분명코 13세기 무렵 이 땅에 살았던 한 혁명가가 내게 던져 준 화두였다.”

 저자 자신 삼국유사를 위해 많은 시간을 이곳저곳을 여행하였고, 사실 그것은 여행이라기 보다는 많은 시간 안위와 감고의 세월이었으며 그로 인해 세상을 보는 눈이 열렸다고 말한다. 그렇게 본다면 스스로도 혁명가의 문터에 들어섰다고. 어떻게 보면 삼국유사 읽기의 방법은 그러한 토대에서 나온 것이라 말한다.

 삼국유사가 그 시대의 역사서로서는 혁신적이었음은 분명하다. 13세기의 역사서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저자의 눈은 아주 고즈넉하고 힘이 차 있다. 우리네 일상에 대한 연민도 느껴지고 나라를 인식하는 힘도 느껴진다. 저자는 그의 생에 삼국유사와 관련된 무수한 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만큼 삼국유사가 품고 있는 이야기가 많다는 얘기도 되겠지만, 저자 자신이 삼국유사를 통해 많은 것들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시인이었다. 역사서에서 느껴지는 건조하고 딱딱한 느낌보다는 여행기를 보는 듯한 방랑과 애틋함이 느껴지는 것은 그가 시인으로 등단하고 시를 지어내고 시인의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참고 자료

•신정일, 일연 스님의 자취 서린 고을, 네이버캐스트.

•고운기, 삼국유사를 쓴 뛰어난 이야기꾼 일연, 네이버캐스트.

•동서양 고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한겨레 신문, [에세이 사물 사전] 고운기 - 재떨이, 2013.12.24.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들어가며


p3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논의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둘은 분명한 차이가 사(史)와 사(事)에 있다는 점

⇒ 三國遺事는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 즉 저자가 사관(史官)이 아닌 일개 승려의 신분이었고, 그의 활동 범위가 주로 영남지방 일원이었다는 제약 때문에 불교 중심 또는 신라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북방계통의 기사가 소홀해졌으며, 간혹 인용 전적(典籍)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 뿐더러, 잘못 전해지는 사적을 그대로 모아서 수록한 것도 눈에 뜨이나, 그것은 《삼국유사》라는 책명(冊名)이 말해 주듯이 일사유문적(逸事遺聞的) 기록인 탓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겠다.

   三國史記는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 편찬에 있어 유교의 합리주의적 사고(思考) 또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누락시켰거나, 혹은 누락되었다고도 보여지는 고기(古記)의 기록들을 원형대로 온전히 수록한 데에 오히려 특색과 가치를 지니며, 실로 어느 의미에서는 정사(正史)인 《삼국사기》 이상의 가치를 지닌 민족사의 보전(寶典)이라 일컬을 만하다.


이 땅의 첫나라


p12 누구나 흔하게 생각하는 것이기에 자못 중요하게 쳐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 등재, 그것도 첫머리에 자리잡은 일이 그렇다.

10세기부터의 고려사회는 중국적 유교사관으로 무장한 김부식과 같은 지식인들이 주도권을 잡고 이끌어 나갔다. 그들은 단군과 단군조선의 존재는 역사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유려한 한문으로 집필된 삼국사기의 첫머리에 단군은 실리지 못했고 세월은 150여 년을 흘러야 했다. 그 사이 사회가 변했다. 정권 담당자도 바뀌고, 크나큰 나라 몽고와 20여 년에 걸친 전쟁도 겪었다. 곤고한 세월이었다. 그 쓰디쓴 경험이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꾼 것일까/ 그렇다면 값비싼 희생을 치렀지만 귀중한 결과물을 얻은 셈이다. 승려 출신의 일연 같은 이가 삼국사기와는 다른 책을 편찬하겠다고 나선 것이 그 결과물의 하나였다. 다만 거기에도 무한정한 자유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p12 글을 쓰는 것이 목숨과 바꿀 무게로 쳐지는 시대에서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적을 수 없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큰 나라야 제 일을 제 방식대로 쓰면 된다. 예나 이제나 작은 나라는 거기에 그다지 자유가 없다. 늘 큰 나라가 만든 규범을 좇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p12~13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13세기의 일연 같은 이는 그 점을 간파했던 사람이다. 한편 비애스러운 그러나 풍부한 이야기의 세계가 거기서 만들어 진다. 상징으로 그리는 역사를 옳게 읽자면 독자는 상상력을 써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다른 한편 즐겁기도 하다.

p16 그 때 곰과 호랑이가 굴에 같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늘 환웅 신에게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라고 빌었다. 환웅 신은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날을 주고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아라. 사람의 모습을 얻게 될게야”라고 말했다. 곰과 호랑이는 받아서 그것을 먹고 21일동안 꺼렸다.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제대로 꺼리지 못해 사람의 몸이 되지 못했다. 곰 아가씨는 누구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다. 잉태하고 싶어 늘 신단수 아래에서 빌었다. 이에 환웅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 혼인하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이라 불렀다.

⇒ 환웅은 처음에 100일을 꺼려라고 명령하나 그 다음에는 곰과 호랑이가 삼칠일을 꺼렸다고 나온다. 이를 번역하여 흔힌 21일을 꺼렸다고 하나 환웅이 처음 100일을 기약햇으므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해 고운기는 혹시 그 100일 동안 3과 7이 돌아오는 날짜를 꺼리라는 말은 아닐까? 아니면 3과 7 그리고 그 반복은 완전 숫자로, 곧 ‘온 날’을 의미하고, 그것은 100일이 요즈음과 같은 숫자가 아니라 ‘온 날’로 보았을 때 서로 통할 수 있다. 어쟀든 우리네 민간 신앙에서 3과 7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데서 자주 쓰이고, 꺼린다는 것은 민간 신앙적 의식에서 특별히 조심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환웅이 먹는 것, 생활하는 것 등에서 어떤 의식을 정해 놓고 그것의 준수를 요구했는데, 곰은 묵묵히 이행한 데 반해 호랑이는 그렇지 못했다. 여기서 곰과 호랑이가 단순한 동물이 아닌, 그것들로 상징되는 어느 부족이라는 인류학적 해석이 덧붙여진다.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고자 각고면려(刻苦勉勵)한 곰 부족에게서 새로운 인물이 나온다. 그가 바로 단군이다(p17).

p19 17세기에 쓰여졌다는 『규원사화』자체가 위서일 가능성이 높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이다. 다만 단군 한 사람이 1500년 동안 다스린 게 아니라 그의 계보가 이어져 나간 것이라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았고, 그래서 자료도 없이 궁색하나마 이런 이름들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한다.

단군왕검이 1,500년 동안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단군이라 부르는 후손들이 그런 기간을 이어나갔다.

p19~20 건국 연대보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이 땅에 세워진 첫 나라의 이름이요, 이후 우리 역사에서 이만큼 자주 국호로 애용된 이름이 없다. 단군조선(일연은 고조선이라 썼지만), 위만조선 그리고 이씨조선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까지, 이렇듯 다양하므로 조선의 앞이나 뒤에 관형어를 붙여야 구분이 가능하다. 얼마 전 북한은 평양 부근에 단군 묘를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단군의 존재조차 애써 외면했던 김부식이 살아온다면 땅을 칠 노릇이지만, 오늘날 북한이 정식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정통성 시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그들의 몸부림을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p21 단군신화는 건국신화다. 이 땅에서 첫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일연이 ‘고조선’조를 시작하기 전에 서문을 붙였는데, 거기서 중국의 이러저러한 나라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만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음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이 아니라 ‘나라’다. 기독교 『성서』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비롯한 세상의 온갖 것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다르다.

p21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더러 단군의 자손도 있겠지만, 그 때 이미 한반도에 살고 있다가 단군을 왕으로 모신,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자손이다.

⇒ 환웅이 신단수에 내려왔을 때 그곳에 이미 사람 사는 세상이 존재했고 그들을 다스리는 제도가 없었을 뿐이다. 그가 첫 왕이 되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 단군이 곧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되었으므로.

p23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쓴 것이다. 이를 그대로 들여와 내용만 우리 것으로 채웠을 때, 내용은 형식에 가려 실상을 보여 주지 못했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 

p23 중국의 사고방식을 따르자니 [삼국사기]는 한반도 역사를 한나라가 세워진 한참 후인 기원전 57년에 와서야 떨렁 시작한다. 신라의 건국이다. 그 이전의 일들은 언급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삼국사기는 바로 그 첫 부분에 박혁거세가 신라를 세울 무렵,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과 골짜기에 나눠져 살고 있었다”고 적었다. 일연을 아쉽게 한 대목은 바로 거기였다. 김부식조차 언급한 그 조선은 어디로 갔을까?

p24 이 시기(삼국사기가 나온 12세기 중반과 삼국유사의 13세기 후반까지의 150년) 고려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두 사건을 겪었다. 첫째는 무신정권의 성립이고, 둘째는 몽고와의 전쟁이다. 대내외적으로 같은 시기에 겪은 이 사건은 고려 사회를 통째로 뒤흔들어 놓는데, 무엇보다 기존에 세워졌던 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자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삼국사기와 그 시대에 수놓아였던 중국 중심의 시대주의는 힘을 잃는 대신, 거기에 희미하게나마 민족의 주체성 같은 것이 자리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삼국유사는 그 변화의 끄트머리에 자리잡는다.

p25 당대의 문장가 이규보가 동명왕편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쓴 것은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고구려의 기개를 한껏 살리면서, 고주몽의 생애를 장황히 읊은 이규보의 동명와연은 기실 민족의 발견이었다. 또 다른 문장가 이승휴는 시로 쓰는 이 나라의 역사 제왕운기에서 단군 신화부터 시작하였다. 이승휴는 일연과 동시대 사람일뿐만 아니라, 함께 시를 지으며 즐긴 가까운 벗이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줄을 잇는 13세기였다.

p28 나는 ‘위만조선’ 조가 있기에야말로 ‘고조선’ 조가 빛을 낸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앞서 나는 고조선조와 위만조선 조를 나란히 두고 읽어야 한다 했다. 그럴 까닭이 충분하다. 기자조선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고, 죽은 자식 무엇 만지듯 있지도 않은 인용처를 대가면서 단군을 그려낸 일연의 의도를 알자면, 열쇠는 이 위만조선 조에 있다.

p29 두 가지 의문을 종합해 보면 위만이 조선 출신의 연나라 사람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일찍이 중국의 전국시대에 연나라는 기자가 다스리고 있던 조선 지역을 복속시켰다. 조선의 유민들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을 터인데, 위만처럼 연나라의 본토에 들어가 자리잡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연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그 틈을 타서 옛 땅을 회복해 조선인만의 나라를 재건했다고 보는 것이다.

⇒ 두가지 의문이란 조선왕 위만의 출신에 대한 가벼운 문장과 위만과 그가 이끈 무리들의 복장을 묘사한 ‘방망이 상투를 틀로 오랑캐 옷을 입었다’는 부분을 삭제한 것을 두고 위만이 조선인의 거주 지역으로 들어와 변장을 한 것인지, 아니면 본디 조선 출신인가 하는 의문을 말한다.

p29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은 일단 이 위만조선에서 끝난다. 위만조선이 세워진 것은 한나라 초기 곧 기원전 195년경이다. 그로부터 약 90년 정도 계속되는데, 그 동안은 상당히 강대한 세력으로 군림했던 듯하다. ‘위만조선’조에서 “진번과 진한이 위로 글을 내어 천자를 알현하고자 했으나, 사방이 막혀 전달하지 못했다”는 기록은, 한반도 남부엣 중국 본토를 연결하는 길목에 위만조선이 버티고 서서 상당한 힘을 행사했다는 증거가 된다.

p33~34 위만조선의 건국과 멸망, 그리고 한사군의 설치과정은 중국 쪽 사료 『전한서』에 의거해 있다. 이것이 앞서 고조선과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다. 신빙성을 높이자면 가급적 중국 쪽 사료를 내세워야 한다.

     '고조선‘조와 ’위만조선‘조가 중국의 사료를 내세웠다는 점이 같다. 그러나 고조선에 관한 중국 쪽의 사료는, 아직 찾지 못한 『위서』의 단군 관련 기록과, 고조선에 관해서는 직접 언급하지도 않은 「배구전」이 전부일 만큼 옹색하다. 그에 비해 위만조선에 관한 『전한서』 의 기록은 지금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것이 다른 점이다. 그런데 두 조를 잇대어 놓으니 단군조선 부분이 보완되면서, 조선이라는 국호의 공통성 아래 어떤 끈이 분명해 보인다.

⇒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실은 일연이 단군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고자 한 데 더 힘을 기울였다고 보아야 한다. … 오늘날 우리가 ‘고조선’조와 ‘위만조선’조를 나란히 두고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구려와 북방계


p35 조선의 시대, 곧 고조선과 위만조선이 끝나고 한반도에는 여러 나라가 군웅할거 하는 시대를 맞는다.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물리친 자리에 이른바 4군을 두는 때와 같이 하는 시기인데 나는 이것을 앞서 한반도판 전국시대라 부르기로 했다.

⇒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말하듯이 고대 왕권 국가란 곧 율령의 반포가 분명한 기준이 된다. 율령에는 국가 조직의 정비도 포함된다. 그런 면에서라면 한반도의 고대 왕권 국가가 위 세 나라 밖에 업음이 자명하다. 율령반포가 고대 왕권국가의 시작임. 자신의 율령을 갖는 것이 자기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이에게 중요한 일임. 그런 면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만의 역사가 충실한 이유가 있겠으나 여러 나라들의 이합집산 과정을 거쳐 세 나라로 접어들게 되니 이 두 흐름을 남방계와 북방계의 두 흐름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p37 전한서에서는 선제, 신작 3년은 임술년(기원전 59년)인데 4월 8일에 하늘님이 흘승골성에 내려와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도읍을 정한 다음 왕이라 불렀다. 나라의 이름은 북부여요, 스스로 해모수라고 불렀다. 아들을 낳아 부루라 하였는데 해라는 글자를 성으로 삼았다. 부루왕은 뒤에 기옥황상제 곧 하늘님 해모수의 명을 받들어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왕이 북부여를 이어 졸본주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라 하였으니 곧 고구려의 시초이다.

⇒ 북방계는 부여에서 고구려, 백제로 흘러간다. 기이편의 북부여 조에서의 내용인데 『고기』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 동명왕은 고구려 시조가 되는데 아버지는 동부여왕 금와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 유화.

p38 북부여 왕 해부루의 재상 아란불이 꿈을 꾸었는데 하늘님이 내려와 이렇게 말했다. “내 자손을 시켜서 이 곳에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너는 이 곳을 피하여라.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이라 이름 붙인 땅이 있는데 토양이 비옥하니 왕도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 아란불이 왕에게 권유하여 도읍을 그 곳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p87 부루는 아들이 없었다.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 후손을 얻고자 하였다.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는 마주서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부루가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 보라 하니, 금빛 나는 두꺼비 모양의 아이가 있었다. 부루는 기뻐하며 “이는 곧 하늘이 내게 주신 귀한 자식이 아니겠는가?” 하고 거두어 길렀다. 이름은 금와였다.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는데 부루가 죽자 금와가 자리를 이어받아 왕이 되었고 다음은 태자 대소에게 이어졌다. 그렇게 이어지기는 해도 왠지 부루의 후손들이 왜소해져 가는 느낌이다.

⇒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 해부루의 아들 금와.

p39 “나는 하백의 딸이요, 이름은 유화입니다. 여러 동생들과 나와 노닐 때에 한 남자가 자신은 하늘님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웅신산의 아래 압록강변에 있는 집안으로 꾀어 관계를 맺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절차도 없이 남자를 따라갔다 꾸짖으시고 이 곳에 가두었습니다.” 금와는 이를 기이히 여겨 방안에 깊이 가두었다. 그런데 햇빛이 비추자 몸을 움직여 피하게 했으나, 해 그림자가 또 좇아와 비추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거니와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왕은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는데 다들 먹지 않았고, 또 길거리에 버렸는데 소나 말이 피해 갔으며, 들판에 버렸더니 새와 짐승들이 덮어주었다.

     왕이 쪼개보려 했으나 깰 수도 없어 결국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물건으로 싸서 따듯한 데 두었더니 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었다. 골격과 겉모습이 헌걸차고 우뚝했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헌칠하여 비상했고,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이면 백 명중이었다. 세간에서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했으므로, 이를 가지고 이름을 지었다.   

⇒ 동명왕의 탄생 설화는 삼국사기 가운데 고구려본기의 ‘시조 동명성왕’ 조에 나타난다.

   삼국사기는 부여왕 해부루가 금와를 얻고 신하가 도읍을 옮기도록 권유하여 동부여로 이동한다. 빈 땅에 해모수가 나타나 하늘님 아들이라며 나라를 세운다. 해부루가 죽고 금와가 왕위를 계승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반면 일연은 하늘님 해모수가 북부여를 만들고 해부루를 낳아 왕위를 전승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차이는 왜인가?

   『고기』에서 해모수의 북부여 건설을 인용하였는데 『고기』는 『전한서』를 인용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고증이 어려웠다. 그러므로 『전한서』를 가져다 붙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고기』를 인용한 일연에게 해모수와 해부루의 부자 관계를 인정한 셈이 되니 ‘동부여’에서 ‘고구려’까지 삼국사기를 인용하면서도 부루가 옮겨 간 땅에 해모수가 나타나 나라를 세운 장면을 삭제해 버린 것이다.

p43 중요한 것은 『고기』를 받아들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차이를 극명하게 확인한다는 점이다. 삼국사기는 『고기』의 신이한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을 받아들인 일연의 삼국유사에 와서 주몽은 삼국사기에서보다 더 확실히 하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삼국사기에서 금기시하는 것들이 무너졌을 때, 그 존재를 회복한 것은 단군만이 아니다. 이렇듯 주몽에게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p43 주몽이 알에서 나왔다는 신화는 다음에 살펴볼 신라의 박혁거세 신화와 비슷하다. 다만 주몽은 하늘님으로 이어지는 부계와 신이한 존재로서 모계를 두로 갖추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이런 난생 설화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리라.

p44 주몽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영웅은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성장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 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이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p46 삼국유사가 신라 중심 기술..

p48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인데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주몽을 보더니 범상치 않다 여겨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 부여의 왕이 돌아가시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다름은 온조였다. 이들은 나중에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 마려 등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 때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 삼국사기의 백제본기를 인용한다.

p48 주몽이 북부여를 떠나기 전에 이미 아들을 하나 낳았었다. 아들은 신표를 남겨두고 떠난 아버지를 찾아오고, 그가 고구려의 2대 유리왕이 된다.

p49 비류와 온조가 드디어 한산에 이르렀다. 지금의 서울이다. 형제는 부아악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의견이 갈렸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자고 하자 열 명의 신하가 말하였다.

    “하남 땅은 북으로 한수를 두르고, 동으로 높은 산에 기대로 있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에 큰 바다가 막혀 있습니다. 이만큼 하늘이 내린 요새와 땅이 주는 이득이 큰 곳을 얻기 어렵지요.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하들의 이런 간청에도 비류는 듣지 않았다.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이다. 한편 동생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았다. 열 명의 신하가 보필을 하게 되어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이 때가 바로 신라로는 박혁거세왕 39년 (기원전 18년)이다.

⇒ 비류는 미추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되돌아왔는데 위례성의 도읍이 안정되고 편안한 것을 보고 뉘우치다 죽었고 그의 신하와 백성들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와 나라 이름을 백제라 하니 이것이 백제의 탄생이라 한다.


신라와 남방계


p56 삼국사기는 여섯 부족이 “조선의 유민으로 산과 골짝에 나눠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조선은 단군조선으로 시작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집단을 통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섯 부족도 결국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주요 구성원이었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러나 일연은 ‘진한’ 조를 실어 그 같은 가능성을 일단 차단해 놓고 있었다. 이것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다른 관점이다.

⇒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곧 오리지널의 출발을 의미할 것이다. 북방계 민족과 나라의 출발이 그랬던 것처럼 남쪽에도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이 있음은 남쪽도 북쪽과 계통을 달리하는 오리지널이 있음을 강조하자는 데 있는 것으로 고운기는 파악한다.


혁거세의 탄생과 신라 건국


p57 전한의 지절 원년은 임자년(기원전 69년)인데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족의 시조들이 각각 자세들을 거느리고, 알천의 강변 위에서 모여 논의하였다.

     “우리들은 위로 임금이 없어, 다스리려 하나 백성을 이끌지 못합니다. 백성들은 모두 제멋대로이고 하고 싶은 대로 하지요. 어찌 덕을 갖춘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두지 않습니까?”

     그런 다음 높은 곳에 올라 남쪽으로 양산을 바라보니, 그 아래 나정 곁에 이상스런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고, 흰 말 한 마리가 무릎 꿇어 절을 하는 모습을 나타났다. 찾아가 보니 자주색 알이 하나 있었고, 말은 사람들을 보고 하늘을 향해 길게 울었다. 알을 쪼개자 어린 사내 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놀랍고도 이상하게 여겨, 동천에서 몸을 씻어 주었다. 몸은 광채를 띠고, 날짐승 물짐승이 춤을 추었으며,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해와 달이 밝게 빛났다. 이 때문에 혁거세라 이름을 지었다. 왕 위에 올라서는 거슬한이라 하였다.

⇒ 일연의 혁거세 탄생신화. 삼국사기는 단 몇 줄로 내력담을 쓰고 있다.

p58 이 때 사람들이 다투어 경하 드리고는 “이제 천자가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을 갖춘 여자를 찾아 임금의 배필로 삼아야겠네”라고 말하였다. 이 날 사량리의 알영정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로 어린 계집아이를 낳았다. 몸매와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닭의 부리 같았다. 월성의 북천으로 데려가 씻겼더니 그 부리가 발락 곧 떨어져 나갔다. 이 때문에 그 냇물의 이름을 발천이라 하였다. 남산의 서쪽 기슭에 궁실을 짓고 이 두 성스런 아이를 받들어 모셨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생겼는데 알이 표주박과 같아, 마을 사람들이 표주박을 박이라고 한 데 따라 성을 박이라 하였다. 계집아이는 태어난 곳 우물의 이름으로 이름을 붙였다. 두 성인의 나이 열 세 살에 이르렀다. 오봉 원년은 갑자년 (기원전 57년)인데, 사내아이를 세워 왕으로 삼고 이어 계집아이는 왕후로 삼았다.

⇒ 왕이 알영부인의 이야기. 사국사기는 부인이 태어난 해를 혁거세가 왕에 오른 지 5년 뒤로 파악하나, 일연은 같은 날로 보고 있다.

p59~62 박혁거세가 열세 살 때인 기원전 57년에 신라가 섰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일연이 모두 같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신라는 삼국시대를 열었던 세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다. 고구려의 동명왕이 그보다 20년 뒤인 기원전 37년, 백자의 온조왕은 40년 뒤진 기원전 18년에 출발하였다. 중국의 한나라 때였다.

p62 혁거세 탄생에 대하여 일연은 같은 삼국유사 안에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적어놓았다. 감통 편의 첫 이야기인 ‘선도성모가 불사를 즐기다’ 조에서다. 이 이야기는 본디 지혜라는 비구니가 불사를 일으켰다가 힘에 부쳐 끝까지 못하고 있는데, 꿈에 선도산의 신모(神母)가 나타나 도와주어 일을 마쳤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다. 그래서 일연은 이 신모를 제목에서는 성모라고 고쳐 불렀다. 이 조가「감통」편에 들어간 것도 비구니 지혜의 정성스런 불심을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본디 목적과 달리 신라 건국에 얽힌 다른 이야기를 대하게 된다. 일연은 신모의 정체를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로 이 땅의 신선이 된 서연산이라고 하고 있다. 서연산은 지금 경주 서쪽에 자리잡은 나지막한 선도산의 다른 이름이다. 신모는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게 하였으니 혁거세와 알영 두 성인을 낳았다고 하고 있다.

p66 선도산 성모는 누구이며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는 이 대답을 위해 우리들의 민간신앙에 묻어 있는 신모 신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리산의 여신 신화 성모천왕 전승과 성거산의 여신정승이다.

    먼저 지리산의 성모천왕 이야기다. 갑자기 산 개울이 배도 오지 않는데 넘쳐흘렀다. 한 스님이 이상히 여겨 천왕봉 꼭대기에 올라가 보자 그곳에 키가 크고 힘센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스스로 성모천왕이라 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고 딸 여덟 명을 낳았는데 그들은 전국팔도에 흩어져 무당이 되었다. 이 같은 지리산 성모천왕 전승은 무당이 처음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알려주는 이야기다. 이를 무조신화라 한다.

   성거산의 여신은 고려 왕족을 성화(聖化)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호경이 성거산에 가서 여신의 도움으로 왕이 되는데 이는 혁거세가 선도산 신모에게서 태어나 왕위에 오르는 과정과 무척이나 닮았다. 한 쪽이 부부관계라면 한쪽이 모자관계라는 것이 다르면 다른 점이다. 선도산 신모는 어머니인 대신 다른 여자를 만들어 짝지어 준다. 그 여자가 곧 자신의 분신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p68 무당의 탄생이야기는 고대 국가의 건국 신화와 사촌간처럼 가깝다. 그것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지 않았던 데서 연유한다. 삼국의 건국 신화 가운데 신라 쪽이 유독 무조 신화나, 민간 전승의 신모 신화에 가까운 것은 왕실의 성격이 곧 거기에 기반을 두었다는 강한 증거다. 물론 고구려나 백제의 초기 왕실 또한 제정일치적인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그것에 비하면 약하다. 게다가 선도산 신모는 불사를 도운 일로 자연스럽게 불교와 습합되고 있다.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p70 탈해가 신라의 제2대 남해왕의 사위가 된 것은 기원후 8년, 대보(大輔)가 된 것은 10년이었다. 제3대 노례왕까지 두 대를 섬긴 끝에 57년에 드디어 신라 제4대 왕이 되고, 왕위를 잇는 3대 성 박・석・김의 한 자리를 굳혀나갔다. 50년에 걸친 끈질긴 싸움의 결말은 그렇게 찬란했다.

p72 탈해는 누구일까? 용성국은 어디일까? 박씨에 의해 다가 이어지는 초기 신라 왕실에서, 갑자기 거기서 벗어나 탈해를 왕으로 세워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관한 이야기의 이면에서 우리는 아직 안정되지 못한 신라 왕실의 고민과, 한 인간이 가진 본연의 욕망의 그림자를 읽게 된다. 온갖 신격화로 치장된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거둬내면 더욱 그렇다.

p73 박노례 닛금은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 매부인 탈해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하였다. 탈해가 “무릇 덕 잇는 자는 이가 많으니 마땅히 이를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하고 떡을 물어 살펴보았다. 노례왕의 이가 많으므로 먼저 자리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닛금이라 이름을 지었다. 닛금이라 부르는 것이 이 왕에서 비롯되었다. - 「기이」편, 제3대 노례왕

⇒ 노례왕은 유리(儒理)왕이라고도 부른다. 고구려의 2대왕도 유리(琉璃)왕이다. 아버지 남해왕을 이어 제 3대 왕이 되었다. 기원전 24년의 일이다. 노례왕은 못내 그자리가 불편한 모양이다 매부인 탈해 때문이다. 어느 모로 보나 자신보다 낫다는 생각에다 매부에게 왕위가 간다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았던 듯하다. 누가 왕이 될 것인가? 여기서 저 유명한 떡을 물어 치아의 숫자를 세 보는 사건이 벌어졌다. 치아가 많은 이가 왕이 되어 왕도 닛금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이것은 남해왕이 유언 때문이기도 했다. 왕은 아들과 사위를 불러 나이순으로 왕을 하라고 했으니 나이가 많은 탈해가 왕이 될 차례다. 그러나 탈해가 위와 같은 제안을 한 것이다. ‘무릇 덕 있는 자가 이가 많다’는 논리다. 이는 탈해가 왕의 자리에 욕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반을 확실히 닦은 뒤 굳건한 위치에서 왕이 되고 싶었던 꾀를 낸 것으로 보인다. 다만, 노례왕이 왕으로 34년을 살았으니 너무 오래 기다려야 했다.

p78 탈해가 호공에게 “우리 집이 본디 대장간을 했다”는 말을 가지고 풀어본다면, 탈해의 출신지가 야철술 곧 철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한 곳이고, 선진된 문물을 가진 이 집단이 신라 중심지로 이동했다는 증거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앞서 탈해가 일본 출신인가 의문으로 남겨 둔 바 있다. 어떤 이는 일본의 설화들을 들어 일본 동해안의 시마네 반도 쪽이 곧 탈해의 고향이라고까지 주장한ㄷ. 어쨌든 문물의 발달이 신화시대를 거둬내고, 실질적인 힘으로 정복과 지배를 영위해 나가는 시기가 이 한반도에도 도래한 셈이다.

p81 어째서 탈해가 못난 인물로 그려지고 있을까?

⇒ 삼국유사 수로왕의 가락국 건설을 쓰고 있는 기이편의 마지막 ‘가락국기’조에서 수로와 탈해가 만나는 부분에서 탈해는 용렬하게 그려진다. 「가락국기」는 고려조에 들어 금관주, 지금의 김해 지방에 사는 문인이 가락국의 옛일을 적어 둔 것을 일연이 삼국유사로 옮긴 것으로, 수로를 추켜세우려 수로의 입장에서 전해져 온 이야기가 조금 과장되게 발전했을 수 있는 것으로 본다.

p82~83 탈해는 여섯 부족의 신임을 얻기에 그 근본이 너무 약했다. 그런 어려움을 물리치는데 5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그나마 그가 타고난 재주에다 출중한 지략을 갖추었기에 가능했다.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신라와 일본이 맺은 우호조약이 그같은 사정을 말해 준다.

⇒ 신라가 여섯 부족의 합의 아래 혁거세를 왕위에 올리고, 그 뒤를 아들과 손자가 차례로 올랐다. 이런 과정은 분명 여섯 부족의 입기 아래 이루어졌으리라 보이며 점차 왕의 권력이 강해져 간다고는 하나, 남해왕의 유언과 노례왕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탈해가 바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사정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p86 “마치 혁거세의 옛일과 같았다”는 대목이 주목을 끈다. 일연이 김알지의 탄생을 혁거세에 비견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장차 신라의 왕위를 이어 나가는 세력의 탄생을 암시하면서, 결국 그가 잠시 탈해에 의해 끊어진 박씨 계열을 이어나가는 적통자로 본다는 것일까? 알지가 성을 김으로 삼았다지만 성이 무언가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머나 먼 이역, 아니 어느 시골 마을에서 올라 와 입신양명한 탈해. 우리는 여기서 탈해가 비록 왕위에 오르고 그 후손들이 석씨 성으로 몇 차례 더 왕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기존의 서력에 둘러싸여 늘 불안해했던 것 같은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권력의 자리란 차지하기도 이어 나가기도 어려운 것인가? 탈해의 고민이 깊었음은 분명하다.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p90 신라본기의 아달라왕 조 20년(서기 173년)에 ‘왜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와 인사했다’는 짤막한 기록이다. 여기서 비미호는 하자가 조금 다를 뿐 히미코다.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가운데 위지의 왜인전에서 풀린다. 그 무렵 일본은 성무왕의 시대지만 지방에는 30여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서 있었다. 히미코가 다스리는 나라는 야마일국이다. 그는 여왕이었다. 비록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였으나 가장 강성했다고 하고, 238년에는 위나라에까지 사신을보낼 정도였다. 신라에 사신을 보낸 지 60여년 뒤의 일이다. 같은 히미코인지 아니면 히미코가 왕을 일컫는 일반명사인지는 의문이어도 실재하는 나라요 왕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겠다.

⇒ 연오랑과 세오녀 조의 이야기에 의하면 세오녀가 일본으로 갔다는 아달라왕 4년에서 16년 뒤 히미코가 사신을 보낸 것이 된다. 일본에서 자리잡은 세오녀가 히미코가 되어 본국에 사람을 보냈다고 추정할 만한 이야기가 된다.

p91 일본에서 히미코 신드롬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도 소개했다.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오래도록 남성에 복종하며 살아온 일본의 여성들이 자신의 일을 찾고 자기의 삶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데 그들이 내세우는 상징적인 인물이 여왕 히미코라는 것이었다. 프로레슬러 히미코도 그 무렵에 이 같은 분위기를 타고 생겼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 1993년에 일본을 방문한 불가리아의 어떤 여성 초능력 치료사가 ‘히미코의 조상은 한반도에서 건너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지금 학계에서는 거의 수용되지 않고 있다. 대체로 그가 내세우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p96 일연은 승려다. 승려생활을 구름이나 강물처럼 머물러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운수행각이라고 한다. 일연 또한 거기서 예외일 수 없었고, 그래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지만, 13세기의 혼란스런 고려 사회가 그 삶을 더욱 모질게 했다.

⇒  이렇게 오랫동안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은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은다. 불교적인 이야기만이 아니라 광범위하다. 오늘날의 민속학자가 따로 없다.

p97~98 연오와 세오가 일본 땅으로 가 버린 다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고 했다. 나는 이것을 일식이나 월식 같은 자연 현상으로 보지 않는다. 삼국사기의 전반부에 일식을 알리는 기사가 빈번히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중국의 역사서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일식이 곧 오늘날의 일식인지 분명하지 않거니와, 그나마 한반도 내에서 관찰된 현상이라고 볼 수도 없다.

p98~100 신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해와 달이 아니라 해와 달을 해와 달로 볼 수 있는 그 정령이었다. 연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정령이었다. 그들이 일본으로 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정치적 의미로만 풀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일연도 주석을 통해 “『일본제기』를 살펴보면 앞뒤로 신라 사람이 왕이 된 적이 없다. 이는 곧 변방의 작은 왕이요 진짜 왕은 아니다“고 붙여 놓았다. 정치적으로만, 자연 현상의 사실로만 보지 말라는 주문일 것이다.

     정령을 잃은 사람은 눈 뜬 소경과 같다. 사회도 그렇다. 일연이 강조한 것은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p101 정령의 의인화야말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사람이 사는 세상의 사람으로 바뀐 아 같은 이야기 구조는 삼국유사 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곰이 사람으로 바뀌는 단군신화에서 시작하여 호랑이가 아름다운 처녀로 바뀌는 김현의 전설까지 다양하게 퍼져있지만 여기 해와 달의 정령을 사람으로 설정한 데서 아름다움은 극치를 달린다.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p107 실제 일본열도에 단일국가로서 고대 왕조가 성립된 때를 대개 4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그 이전은 각 지역마다 작은 부족으로 이루어진 크고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삼국사기와 같은 우리쪽 역사서는 이를 통칭하여 왜라고 불렀던 것 같다. 신라를 괴롭혔던 왜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일 가능성이 있다. 어떤 왜는 친교를 하고 어떤 왜는 침공을 했다.

p109 내물왕 37년(392년)에 왕은 나중 실성왕이 되는 조카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다. 실성은 10년 만에 돌아오게 되지만 이로 인해 삼촌인 내물왕에게 앙심을 품는다. 이듬해 내물왕이 죽고 실성왕이 등극하였다. 실성왕은 그 해에 왜와 우호조약을 맺고 내물왕의 둘째 아들 곧 사촌 동생인 미사흔을 볼모로 보낸다. 내물왕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었다. 또 11년에는 고구려에 내물왕의 셋째 아들 복호마저 볼모로 보내고 만다. 그런데 내물왕의 큰 아들인 눌지왕이 실성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동생들이 그리웠다. 지하에서 눈감지 못하고 있을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동생들을 데려와야 했다. 2년 (418년) 봄, 드디어 박세상이 고구려에 들어가 복호를 데리고 돌아오고, 가을에는 왜에 들어가 미사흔을 도망가게 한다. 제상 자신은 돌아오지 못하고 거기서 죽었다.

⇒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와 「열전」의 박제상조. 그러나 일연의 박제상은 이름이 김제상이며 미사흔과 복호가 볼모로 가는 장면도 다르다. 미사흔은 이름이 미해라 하였고 내물왕 3년에 왜왕이 보낸 사신을 따라갔으며, 복ㅎ는 이름이 보해라 하였고, 눌지왕 3년에 이르러 고구려 장수왕이 보낸 사신을 따라갔다고 한다. 내물왕과 눌지왕 사이에 있는 실성왕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p118 일연이 일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신라가 왜 일본과 앙숙이 되어야 했던가 설명해 보이는 데도 유용하다. 신라 왕실 내부의 갈등이 아닌 왜의 비인도적인 처사 쪽에 더 치중한 일연의 기술에서 우리는 어떤 해석을 내릴 수 있을까? 고구려 사람들은 화살촉을 뽑아내고 쏘는 시늉만 한 데 비해, 발바닥 거죽을 벗기고 갈대 위를 걷게 하는 왜왕의 고문은 처참하기만 하다. 이렇듯 처참한 장면을 집어넣는 일연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시점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고와 고려 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나섰던 때와 시기를 같이 하고 있다. 연합군의 1차 정벌이 충렬왕 즉위년(1274년)이고 2차 정벌이 5년 (1279년)이다. 일연은 충렬왕이 즉위한 해부터 왕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 2차 정벌 때는 경주 행재소에 와 있는 왕을 곁에서 모셨고, 두 차례의 정벌 사업이 끝날 즈음, 개성으로 돌아가는 왕을 따라가서 국사의 자리에 오른다. 그의 나이 77세 때의 일이다. 삼국유사는 이 무렵을 전후로 씌어졌다.

     전쟁은 적개심을 필요로 한다. 비록 고려가 자원하여 벌인 것이 아닌, 몽고의 눈치를 보며 ‘울며 겨자 먹기 식’이었다고는 하나, 전쟁은 전쟁이었다. 고려는 개국 이래 오랫동안 일본과 그다지 교류를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전쟁을 벌려야 하는 이 황당한 교류로 인하여 새삼 그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떠올리게 하였고, 먼 옛날 신라와의 관계 속에서 그들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서 임박한 전쟁에서 반드시 쳐부숴야 할 구원의 대상으로 그려야하지 않을까? 박제상의 이야기는 거기 적절한 감이었을 거다.

  

밤에 찾아오는 손님


p120 설화문학에서 말하는 밤에 찾아오는 손님이 소재가 되는 야래자 설화가 있다. 그 밤손님은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남녀 관계에서 남자 쪽을 가리킨다. 남자는 당대의 영웅이거나 기이한 인물이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를 밤에만 남몰래 찾아들어야 할 운명이다.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을 받아들인 여자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야래자 곧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하는데 서 일차 역할이 끝난다.

⇒ 도화녀와 비형랑은 전형적 야래자 유형의 설화인데 이러한 이야기들이 삼국시대의 비극적 영웅들이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실감나게 전해 준다. 여기서 당대 사람들이 기이한 인물의 탄생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였는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p133 비형의 추천을 받은 길달도 그 못지 않게 활약했다는 것인데, 길달은 끝내 사람 사는 세상에는 적응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반이나마 사람 몸으로 이루어진 비형과는 달랐던 것일까? 그런데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달아나는 길달을 비형이 죽였다는 마지막 대목에서 우리는 또다시 귀신 세계를 보는 당시 사람들의 태도를 알 수 있다. 귀신은 사람을 돕는 존재이면서, 그것을 어겼을 경우 엄정한 벌을 받는다는 데까지 나가 있는 것이다.

p134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 설화가 지닌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조화(造化)다. 조화를 부리는 것은 귀신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공포는 사라진다. 어쩌면 귀신의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듯한 이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듯하다.

p134 옛날 광주 북촌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얼굴이 단정했다. 하루는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내가 잠자리에 들어 정을 통하곤 한답니다.”

   “그러면 네가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의 옷에다 꽂아 두어라”

   딸이 그 말대로 했다. 다음날 북쪽 담장 아래에서 그 실을 찾았다. 바늘은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뒤에 임신을 하고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살에 스스로 견훤이라 불렀다.

⇒ 기이 편의 후백제와 견훤조의 견훤탄생 설화. 백제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서울 연못가에서 집을 짓고 살다가 못의 용과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는 설화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커다란 지렁이와 연못의 용의 유사성을 말이다. 

p137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p139 신라는 나라를 세운 시기로는 삼국 가운데 가장 앞섰지만, 문명의 개화는 가장 뒤쳐졌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한반도에서 신라가 위치한 지리상의 여건, 즉 문명의 고장이라 할 중국과의 통로가 쉽지 않은 구석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p143 내전의 분수승으로 대표되는 불교에 대한 고위 관료들의 적대감이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편지를 바친 노인의 존재가 전통적인 세력을 대표한다고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법흥왕을 이은 진흥왕대의 꾸준한 노력이 차차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해 간다. 특히 진흥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15세여서 태후가 대신 정치하였는데, 태후는 곧 법흥왕의 외손자 입종갈문왕의 부인으로, 세상을 마칠 때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고 일연은 진흥왕 조에 적고 있다.

⇒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기 전, 불교가 신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 보여주는 이야기로 기이편의 ‘거문고의 갑을 쏘라’조에는 소지왕 10년에 일어난 사건이 있다. 표면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승려와 구우를 처단한 슬기로운 왕의 이야기이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위와 같이 나타난다.

p144 신라 불교의 힘은 먼저 있었던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고 포용해 간 데서 더욱 커진다. 불교가 먼 나라에서 전래된 이방 종교가 아니라, 이미 전세에 인연을 마련한 우리 종교라고 생각한 신라인들의 본지수적・불국토 사상은 바로 토착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밑바탕이었다.

p145 풍월도를 앞세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좋은 집안 남자 가운데 행실이 바른 자를 뽑고 화랑이라 하도록 했다. 거기 처음 추대된 국선이 설원랑이다. 무리의 우두머리를 여자에서 남자로 바꾼 점이 눈에 띠지만, 기본적인 취지나 수련 방법은 원화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불교가 스며들어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연이 보이고자 했던 부분은 이것이다.

⇒ 원화는 불교적인 제도라기보다는 유교적이거나 도교적인 데 더 가깝다고.

p149 일연은 어떤 이의 말이라 하면서, “미(未)는 소(弰)와 소리가 서로 가깝고 시(尸주검시)는 력(力)가 모양이 서로 가깝다. 그렇게 매우 닮은 것을 응용을 헤매게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만 감은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땅에 인연이 있기에 자주 나타나 보이셨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는 미시를 분명히 불교적 존재로서 미륵으로 보려는 뜻일 것이다. 그런 한편, ”지금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미륵선화’라고 부른다“는 말도 함께 붙여 놓아, 도교적 민간 신앙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미시는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존재다. 그만큼 신라의 화랑이, 더 나아가 신라의 불교 수용 후의 역사가 복합적임을 말해 준다.

p150 나는 앞서 불국토 사상, 본지수적 등의 용어로 신라 불교의 성격을 설명했다. 이 같은 성격은 자연스레 호국불교 쪽으로 흘러간다.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p162 이에 여자들과 함께 들어가니 문득 신의 형상으로 나타나 말하였다. “우리는 나림, 헐레, 골화 등 세 군데의 호국신이다. 지금 적국 사람이 그대를 꾀어 이끌었으나, 그대가 모르고 나아감으로 우리가 그대를 머물게 하도록 여기에 이르렀노라”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유신은 이를 듣고 놀라 엎드려 두 번 절하고 나와 골화관에서 잤다.

p162~164 이에 쥐 한 마리를 상자 속에 숨겨 두고 이것이 어떤 물건이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이는 틀림없이 쥐이려니와 그 숨쉬는 것이 여덟이라 하자, 이를 가지고 헛소리라 하여 참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 사람은 죽은 다음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곧 참형에 처하고 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 일곱 마리를 배고 있었다. 그래서 앞서 한 말이 맞았음을 알았다. 그 날 밤에 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추남이 신라 서현공 부인의 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 이는 김유신의 탄생 설화로 매듭되는다. 환생 설화로 불교가 가진 인연의 법칙에 따른 구조인데, 김유신을 구해준 호국신은 민간 신앙과 관련된다.

p178 문무왕 법민은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앞서 잠시 그런 분위기를 비췄으나 문희 이전에 춘추에게 자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가야국 출신의 어머니에게 뿌리를 두고 태어난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법민은 줄곧 당나라에 머물며 외교적인 업무에 종사하는데, 이는 국내에서 당할 정치적 견제를 피하고 당나라 조정과의 친분을 쌓아 등극하는 데 도움을 받고자 하는 김춘추나 김유신의 뜻도 들어 있지 않았을까 한다.

p179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벌인 통일 전쟁이 한민족의 영토를 축소한 결과만 초래했다고 비판받지만, 기록을 자세히 살피자면 당나라에 전부 뺏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한반도 땅 전체를 집어삼키자는 것이 당나라의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문무왕 법민은,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런 당나라와 맞서 최대한의 땅을 지켜 낸 사람이다.

p183~184 왕위에 있었던 20년 동안 문무왕은 당나라와의 투쟁을 계속한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꾀어 신라를 괴롭히게 하고, 문무왕은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당나라 군사를 쳐부순다. 당나라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반란군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싸움을 일으키되, 실제로 주적은 당나라 군사로 삼았던 것이다. 문무왕의 이런 행적은 크게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p185 살아서는 사천왕사를 지어 나라를 지킨 문무왕은 죽어서는 용으로 태어나 그 일을 계속 하겠다고 한다. 용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축생도 곧 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곳에 떨어지는 일이다. 지의 법사가 이를 걱정해서는 한마디 거들지만, 왕의 신념은 비록 축생도에 떨어진들 변함없어 보인다.

p186 문무왕이 왜병을 무찌르고자 이 절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다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바다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개요 2년(682년)에 일을 마치고, 금당의 아래를 밀어 동쪽으로 구멍 하나를 뚫었거니와, 이는 용이 절에 들어와 돌아다니게 마련한 것이다. 유언대로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이라 이름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다. 뒤에 용이 나타난 모습을 본 곳을 이견대라 이름하였다.

p187~188 산의 모양새가 마치 거북의 머리 같은데 그 위의 대나무 한 그루가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신하가 와서 아뢰자 왕은 감은사에 가서 잤다. … 비유컨대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바닥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오므라진 다음에야 소리가 나지요. 휼륭한 임금이 이 소리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세상이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은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어 있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어서, 두 분 성인이 한 마음으로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내어 놓고, 날더러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 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 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을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거기 가세한다.

p189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어나고 병이 치료되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홍수 때는 맑아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지는 것이었다.

 


권력의 끝


p196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요리해 먹는 다는 말에서 유래한 권력의 비정한 뒤통수 치기를 나타내는 이 말은 이미 비유도 아니다. 권력을 잡은 자의 마무리 과정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한마디에 쓸쓸한 제 인생을 깊은 한숨과 함께 무상한 세월로 돌려보냈다.

p197~200 김유신은 문무왕 13년(673년)에 죽었다. 삼국 통일의 위업이 달성된 5년 뒤의 일이다. 그로부터 100년 뒤에 이 사건이 벌어졌다. 죽어서도 100년 동안 김유신의 자손들은 그 영화를 누렸으되 언제나 가시방석이었다. … 문제는 마지막 혜공왕대에서 일어났다. 혜공왕이 재임한 16년 동안 다섯 번의 반역 사건이 일어나고, 결국 그것으로 왕도 죽임을 당할 뿐만 아니라, 왕위 계승이 태종 무열왕 후손에서 떨어져 나간다. 왕실의 비극은 그 외척의 비극을 수반했을 것이다. 김유신이 죽현릉을 찾아 울분을 호소한 바로 다음 해의 일이다.

⇒ 죽현릉의 주인공은 미추왕이다. 미추왕은 김씨 성이 첫 왕이다.

p205 최근 학계에서 화랑세기라는 책의 진위 여부와 그 역사적 가치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이 책이 전해 주는 화랑의 모습이 부분적으로나마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라 통일 후의 화랑들이 걸어갔던 비참한 말로인데, 세간을 떠나 승려가 되는 경우는 차라리 점잖은 은거이기에 무상한 세상의 인정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었겠거니와, 한편에서는 그들이 지닌 재주를 파는 광대에 버금갈 예인이나, 급기야 귀족 부인들의 노리개감으로 전락한 남창이 되었다는 데에서, 우리들의 눈은 실상 당혹을 넘어 경악에 어지럽다. 그것이 정말일까? 너무나 어이없기에, 이는 분명코 위서며, 치 책의 출처인 일본 쪽의 어딘가에서 신라 화랑을 욕보이려고 조작한 것이라 주장하게도 된다.

p210 이 일화의 내면에는 한낱 종이호랑이로 변해 버린 화랑 출신들의 쓸쓸한 노년이 숨어 있다.

p211 육두품과 성골・진골이라는 귀족 계급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인,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육두품은 아무리 뛰어난 자라도 더 이상의 진급이 불가능하다. 성골・진골의 피를 타고나지 않으면 말이다. 더욱이 죽지랑은 성골, 진골 귀족 가운데서도 특별한 집안 출신일뿐만 아니라 삼국 통일의 전쟁터를 숱하게 누빈 역전의 영웅이다. 그런 그에게 아간 벼슬아치가 대들고 있다. 더욱이 은퇴한 노장군이 옛 부하를 찾아와 위문이나 하자는,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죽지랑의 나이 이 때 80세 어름으로 짐작된다.

⇒ 여기서 나타나는 비상식적인 일은 바로 화랑 출신들의 투사구팽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신라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과 그의 아들 신문왕을 거쳐 효소왕이 이르면 이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그런 단면을 죽지랑 사건으로 읽게 된다.

p212 득오의 모죽지랑가는 인생의 무상함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동시에 삼국 통일 후 당해야 했던 화랑 출신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가 버린 봄을 그리워하자니

       모든 것이 울어야 할 슬픔

       아름답게 빛나시던

      그 모습 갈수록 스러져 가도다.

      눈 돌릴 사이

      만나보기 어찌 이루랴

      님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p215 신문왕과 그의 아들 성덕왕 그리고 손자 경덕왕이다. 3대에 걸쳐 그들은 나란히 첫 왕비를 대궐에서 내보내고 있다. 출궁이라 표현된 이런 사건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혜공왕도 첫 왕비를 출궁시킨 것이라면, 그가 경덕왕의 아들이므로 이는 무려 4대에 걸친 사건이다.

⇒ 경덕왕은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형 효성왕이 아들이 없어 왕위를 받았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왕이 되기 전 이찬 순정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왕이 되고 나서 김의충의 딸을 왕비로 삼는다. 일연은 왕력편에 첫 왕비 삼모부인이 후사가 없었다, 기이편에 사량부인이 아들을 두지 못해 폐위하고 후비로 만월부인을 봉했고 시호고 경수태후이며, 의충 각각의 딸이라 기록하고 있다. 사량부인은 삼모부인의 다른 말이고, 의충은 같은 사람이다. 만월부인도 15년 만에야 혜공왕을 낳았는데 못난이 반편이이다. 「탑상」편에 ‘삼모부인이 시주하여 황룡사 종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신문왕은 태자일 때 소판 김흠돌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을 당했고 왕비 또한 그에 연루되어 궁을 떠났다. 2년 후 신문왕은 김흠운의 어린 딸을 부인으로 삼고 4년 뒤 효소왕을, 얼마 후에 둘째 아들 성덕왕을 낳았다. 성덕왕은 김원태의 딸을 왕비로 삼고 아들을 얻어 태자 책봉까지 하였으나 왕비를 출궁한다.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고 한해 지나 태자 또한 죽는다. 아마도 반역 사건 연루가 아닌가 생각할 뿐이다.

p219 신문왕에서 출발한 출궁 사건은 중간에 일찍 죽은 효소왕과 효성왕을 제외하고 3대에 걸쳐 내리 일어났다. 공을 다투는 이는 많고, 새로운 통일국가의 이념은 아직 잡히지 않은, 몸집만 비대해진 신라의 허둥대는 모습이다. 끝내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은 바로 그 반역의 칼날에 목숨마저 잃는다. 신문왕 즉위년에서 시작해 혜공왕 폐위에 이르는 동안 그치지 않는 반역의 칼날, 그것은 김춘추 직계 후손의 쓸쓸한 종말을 가져왔다.

⇒ 이러한 왕비 출궁사건은 진골 세력들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권력 투쟁이 배경일 것이다. 신라 진골은 진흥왕때부터이지만 본격적인 것은 김춘추의 태종 무열왕에 오르면서부터이다. 삼국 통일 전쟁 기간 전리품을 두고 다툼이 있었을 것이고 끊임없는 권력 투쟁은 반역과 반역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p220 성덕왕의 출궁 사건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기록을 하나 발견해 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성덕왕 조 15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서려있다.

    성정왕후를 내보내면서 비단 500필, 밭 200결, 조 1만 석, 집 한 채를 내려주었는데 집은 강신공의 옛 저택을 사서 주었다.

⇒ 반역사건이 출궁의 이유라 짐작하기엔 오히려 위자료가 이상한 부분이다. 다른 이유를 대기도 어려운 상황에 태자의 어머니에 대한 예우 정도이지 않을까 한다.

p224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수로부인이다. 그의 아름다운 용모는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이 조의 마지막에 수로부인의 자태와 얼굴이 너무도 뛰어나 매번 깊은 산과 큰 연못을 지날 때면 여러 차례 신물들에게 끌려갔다고 적은 데서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미색을 갖춘 여자였으니 혈기왕성한 청장년만이 그녀에게 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골에 사는 초라한 노인까지도 어떻게 하든 그에게 잘 보여 점수 좀 따려고 설친다.

p226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꽃을 꺾어 바치는 노인의 다음 행동이다. 자긍심을 가지고 부인 앞에선 노인은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노래를 함께 지어 바쳤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은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p228 다만 세상을 살며 경험해 터득한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는 점이 같다. 그가 알려준 방법은 여론의 힘이었다.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는 말은 원문에서 중구삭금이라 표현되어 있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그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일 거슬러 내어놓지 않는다면

    그물을 쳐서 끌어내 구워서 먹을 테다.

⇒ 일연은 이 제목을 「해가」라고 하고 있다. 수로왕 탄생담에 나오는 구지가와 흡사하다. 해가는 신가에서 민요로 넘어오는 증간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p233 어디인들 수로부인에게 이 여행은 아름다운 것이다. 예쁜 꽃과 함께 노래를 선물받았는가 하면, 용궁에 들어가 진기한 경험을 하고 나왔다. 수로부인처럼 아름답고 천연덕스럽게 살아가는, 거기서 세상의 지혜를 터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동해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첫 성전환증 환자



p235 경덕왕에게는 비원이 있었다. 아들을 얻어 자신의 뒤를 이를 일이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첫 왕비를 출궁시키고 두 번째 왕비까지 맞았건만 경덕왕은 10년이 넘도록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 이리하여 경덕왕은 표훈 대덕을 찾는다. 아들을 얻으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하지만 그래도 경덕왕은 아들을 바란다.

p239 오늘 여기서 산화가를 불러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미륵좌주 모셔 서 있어라.

⇒ 경덕왕 19년 경자년(760년) 4월 초 해가 둘이 나타나 열흘 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이때 월명사가 왕의 명으로 도솔가를 지었다. 이때는 태자가 책봉된 해인데 해가 둘 나타난 것을 과학적 사실로 볼 것인지 상징적 사건으로 볼 것인지는 다른 문제다. 삼국사기에는 혜공왕 2년에 해가 둘이 나타났다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간 10년의 차이다. 여기서 월명사가 화랑에서 승려가 된 것은 통일 후 화랑들의 신분 변화를 보이는 예라는 점, 산화공덕 노래로 향가를 지어 불렀다는 것은 화랑이 향가를 부르는 주 작가층이라는 점, 향가를 새로이 지어 부른다는 점에서 신라 불교의 주체적 면모를 여기서 엿본다.

p241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 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아,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 월명사, 제망매가

⇒ 서정시가로 신라 향가의 최고의 명편이다. 죽은 누이를 위해 재를 올리면서 쓴 시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내면의 속 깊은 울림이 있다. 마지막 구절에서 향가시의 특장을 내보인다. 바로 승려의 신분으로 구도하는 모습이다.

p249~250 혜공왕이 태자 시절 부녀자들의 놀이를 하였고, 비단 주머니를 차기 좋아하였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장성하자 음악과 여색에 빠져들어, 돌아다니며 노는 것을 절제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일연은 이를 해석하여, “여자 아이일 것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그렇게 되었다 했으나,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건대 이는 성전환증을 가진 사람의 증세다.

p250 혜공왕은 성전환증 환자였울 것이다. 그는 정식 왕비만 둘이었는데, 16년간 재위하였으므로 24세에 죽었지만, 아들을 두었다는 소식도 없다. 물론 재위 마지막 해의 바란 사건 때, 왕을 포함한 전 가족이 몰살당했을 가능성은 있다. 혜공왕이 성전환증은 신라 왕실이 오랫동안 근친혼을 했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도 있지만, 한 직계가 6대에 걸쳐 8명의 왕을 내었으니 할만큼 했다고도 하겠다. 이후 신라 왕실은 김양상과 김경신 등 내물왕계 후손이 다시 왕위에 오르고, 김춘추 직계는 어찌 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쓸쓸한 종막이다.

⇒ 일연은 혜공왕이 선덕왕과 김양상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고 있는데 선덕왕은 김양상, 김경신은 원성왕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저러한 기록으로 볼 때 혜공왕을 죽인 이를 선덕왕으로 일연은 파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왕이 되는 자



p252 선덕왕은 죽음을 앞두고, “내가 본래 덕이 얇고 가벼워 왕위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나, 여러 사람의 추대를 피하기 어려워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라고 회고한다. 비록 겸사로 볼 수 있으나, 그 이면에는 일정한 사실도 숨어 있다. 당시 김양상은 국무총리격인 상대등이었고, 김경신은 별다른 직책을 가지지 않은 이찬이었다. 양상은 왕이 되어서도 5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말리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결국 다음해 몸져눕고 만 것이다. 어쨌건 그는 늙은데다 그다지 패기만만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p253 왕은 진실로 잘 되고 변화를 잘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를 지었다. 왕의 아버지 효양 대각간은 조정의 만파식적을 전하여 왕에게 넘겨주었다. 왕이 이것을 얻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터이 받았고 그 덕이 멀리 빛났다.

⇒ 효양 대각간이 아들 원성왕에게 만파식적을 건네준 시점이 즉위 이전인지 이후인지 불분명하지만 일찍부터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꿈을 꾸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혼란의 시대 원성왕은 같은 집안 출신의 상대등 김양상을 부추겨 쿠테타를 유도했을 것이고 성공한 후 자신은 각간으로 승진하면서 상대등이 된다.

p256 일본의 문경왕이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물러갔다. 그러면서 사신을 시켜 금 50냥을 내고 그 피리를 보자고 했다. 왕이 말했다. 

    “짐도 웃대의 진평왕 때 있었다고 들었을 뿐이오.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오”

    다음해 7월 다시 일본 왕은 사신에게 금 1000냥을 보내며 청하였다.

    “과인이 신기한 물건을 보고 돌려주려 합니다. “

    원성왕은 저번처럼 사양하면서 은 3000냥을 그 사신에게 내려주었다.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신이 돌아가자 피리를 내황전에 보관하게 하였다.

⇒ 오랜 동안 그 자취를 알 수 없던 만파식적이 원성왕에게서 발견되다.

p261~262 원성왕 이후 신라 왕실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왕의 자리를 놓고 벌인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란 결국 정권을 잡고자 하는 진골 귀족 계급간의 골육상쟁이었는데 특히 소성왕부터 헌안왕까지 9대 60여년이 지나는 동안 세 명의 왕이 살해되면서 혼란은 극에 달한다. 여삼의 말대로 원성왕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왕이 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형제간에 죽고 죽이며 오른 왕위가 그 무슨 영화였을까? 그런 싸움 때문에라도 헌안왕은 자신의 대에서 비극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는 무엇보다도 덕을 갖춘 후사를 세우리라 결심했고, 그래서 왕이 된 이가 경문왕이었다.

p264 경문왕을 따르는 부하 가운데 범교사는 그에게 목숨을 건 제안을 하고 있다. 결국 그것이 경문왕의 즉위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겠다.

     “제가 말씀드린 좋은 일이 지금 모두 나타났습니다. 큰딸을 맞아 들였으므로 이제 왕위에 오른 것이 하나요, 예전에 미모에 끌렸던 동생을 이제 쉽게 얻을 수 있으니 둘째요, 언니를 맞아들였으므로 왕과 부인께서 기뻐하셨음이 셋째입니다.”

⇒ 경문왕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하며 그가 별다른 치적은 없으나 덕이 있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말하는데. 저런 내용 이해가 잘 안된다. 단지 부하의 말을 듣고 그를 따른다..그것이 덕이라는 말...

p266 유복해 보이는 경문왕에게도 겉으로 보아 뜻하지 않은 내면이 있었다. 왕의 침소에 저녁마다 뱀이 모여들었다. 궁인들이 놀랍고 두려워 쫒아내려 하자 왕이 말하길 “내가 뱀이 없이는 편안히 잠을 자지 못하는구나. 막지 말아라”라고 하였다. 매번 침상에선 혀를 날름거리며 가슴 가득 덮었다.

⇒ 경문왕은 그가 지닌 천부적 덕을 배경삼아 왕위에 올랐고, 선왕의 딸 둘을 왕비로 두었다. 그럼에도 징그럽고 기이한 이야기가 나온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와 같은 이야기도 경문왕이야기다. 경문왕이 겉보기와 달리 순탄치 않은 왕노릇을 했을 것이라 본다. 덕을 갖추었으나 시대가 급격한 소용돌이 속에 빠져 늘 행운만 따르기를 바랄 수 없다.

p267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서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 경문왕이야말로 그런 비극적 세계관의 주인공이다.

p267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뿐만 아니라 부인도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직 혼자 지고 가야 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나라가 망하는 징조



p271 제 40대 애장왕 마지막 해는 무자년(808년)인데 8월 15일에 눈이 내렸다. 제 41대 헌덕왕 원화 13년은 무술년(818)년인데 3월 14일에 눈이 많이 내렸다. 제 46대 문성왕 기미년 (839) 5월 19일에 눈이 많이 왔으며, 천지가 어둡고 깜깜해졌다.

     - 기이편 신라사 마감, 이른눈조.

⇒ 일연은 기이편 신라사를 마감하면서 이 혼란기의 신라 왕실을 이렇게 쓴다. 일연은 한 조로 묶어 전하고 있는 이 왕대는, 헌덕왕에게 살해된 애장왕,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위 올라 1년도 재위하지 못한 신무왕과 같이, 혼란의 극치를 달리는 때였다. 문성왕 기미년 5월이란 실은 신무왕이 재위하고 있는 시점이다. 시절은 봄이 오고 여름이 왔으나 어지러운 세상은 뜻밖에 펄펄 휘날리는 눈 속에 잠겨 간다.

p272 이는 어떤 메시지를 표면에 내세우기 보담 객관적 사실만 나열해놓고 읽는 이들에게 그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는 일종의 상징적 기술임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상징하는 가는 명약하다. 자연의 이상 변동을 기록하는 사관의 뜻은 그것이 사람의 잘못으로 구체적으로는 정치의 불안정이겠지만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어려움이 닥친다는 경고에 있을 것이다.

p276~277 염장은 한때 장보고와 같은 편으로 신무왕의 반란을 도운 사람이다. 그가 장보고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다. 거기에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의 야심 밖에는 아무런 목적도 보이지 않는다.

    장보고는 8~9세기에 걸쳐 청해진 지금의 완도, 진도, 신안 지방을 근거로 해상 왕국의 일으킨 사람이다. 대체적으로 이 지역이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 요충지였으므로 여기를 장악한다는 것은 바로 동지나해의 해상권을 갖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장보고의 죽음도 죽음이려니와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온 해상왕국의 붕괴는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그의 최후가 어이없게도 권력다툼의 일개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데서 더욱 안타깝다. 인재들이 죽어나가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p281 낯선 서울 땅에 와서 헤매다 제 처가 역신과 동침하는 현장을 목격해야 하는 불행한 사나이의 노래다. 처용은 정말로 용의 자식인가? 문명의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없어 갖가지 해석이 나왔는데, 앞서 말한 무속적인 것 외에도 지방 호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지방호족의 자식을 서울에 볼모로 잡아두는 기인제도가 신라에 있었거니와 왕이 울산에 간 것이 모종의 정치적 사건 때문이라면 일이 해결되고 난 다음 자식을 데리고 가는 것은 전형적인 기인제도의 볼모다. 한편 아라비아 상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p284 신라 헌강왕대는 사치가 극성했지만 바야흐로 기울어 가는 시기였다. 그같은 사회는 필연코 성적으로도 문란하기 마련, 엄연한 유부녀가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는 이 장면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처용의 노래와 춤은 그같은 비극 앞에서 체념한 것일까, 에둘러 꾸짖은 것일까? 일연은 역사적 사실로서 광란스런 왕들의 혈전을 쓰는 것보다,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으로 더 실감나게 당시 모습을 전해 준다. 그것이 삼국유사다.



지는 해 뜨는 해



p287 신라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백경화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피가 수혈되지도 못했다. 원성왕의 독서삼품과가 실패로 돌아간 데서 우리는 그 같은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수도인 경주가 통일된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던 것도 한 원인으로 들 수 있겠다.

p289 하늘이 감옥을 흔들었다는 대목은 사족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억울한 일을 당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단박에 하늘이라도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아무리 간절해도 끝내 가슴에 묻어야할 답답한 현실이 엄연하지 않던가? 사피귀정이요 새옹지마라 하니, 누구에게나 반드시 이르는 결과는 아니요, 다만 그 말대로 이뤄진 경험을 해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쪽이다.

p297 포석정이 단순한 연회의 장소인지, 그보다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장소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와서 춤을 춘 이야기는 후자에 가깝고, 여기서처럼 경명왕이 연회를 벌이다 견훤에게 혼찌검을 당하는 이야기는 전자에 가깝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아우르고 있지 않나 싶다. 고대 왕권 국가에서 왕의 연회 장소가 제사의 장소를 겸하고 있음을 일본의 경우에도 쉽게 발견된다.  포석정의 기묘한 굴곡은 거북을 닮아 있고, 거북은 영생불사의 신선 사상과 연결되며, 거기에 물을 흘려보내는 구조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세상의 어떤 순조로운 흐름을 기원하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p301 "나라가 서고 망하기는 반드시 하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마땅히 충신과 뜻있는 선비들과 더불어 민심을 거두고 힘을 다한 다음이라야 그만둘 것이오. 어찌 천 년 사직을 그다지 가벼이 남에게 준단 말입니까?“

     “위태롭기가 이 같으니 판세를 보아도 보전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미 강해지지도 못하거니와 약해질 것도 없어. 무고한 백성들의 살이 으깨지는 것만은 차마 할 수 없구나.”

     왕은 그러면서 시랑 김봉휴를 시켜 글로 갖추어 태조에게 항복하겠노라 전하였다. 태자는 크게 울며 왕에게 사직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을 뜯어먹으며 생애를 마쳤다.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귀의해 승려가 되었는데, 법명은 범공이었다.

⇒ 결과만 놓고 보면 경순왕의 결정이 옳다. 백성의 입장에서야 누구의 백성이 된들 무슨 상관이랴? 그러나 마의태자의 말에서 느껴지는 아쉬움...경순왕이 항복할 때 향기롭게 장식된 마차가 30여리를 가득채우고 태조는 바깥까지 나가 맞이하여 동쪽 한 구역의 궁을 내려주었으며 큰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두 아들의 출가는 한층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버지인 경순왕은 새 나라 고려의 부마가 되어 40여년을 더 살다가 죽었는데 말이다.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p309 정말 백제의 고도가 부여일까? 물론 백제가 부여를 도읍으로 삼아 120년이나 지냈고, 거기서 나라의 최후를 맞이했으니 중요하기는 하겠다. 웅진에서 도읍했던 63년까지 합한다면 그 183년의 백제 역사는 파란만장한 한 편의 드라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백제의 전 역사를 통틀어본다면 이 기간은 전체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 백제의 대표적 도읍은 한강 유역, 지금의 서울이다. 북부여로부터 출발한 북방계 민족에서 외교 관계의 중심점도 북쪽을 향해 있었다. 그러다 일본을 개척하면서 이동한다. 일본에 이르기 가까운 곳인 웅진, 부여로 옮긴 이유일 것이다.

p311 웅진, 부여 천도 뒤의 백제 역사는 특히 그것이 왕실과 관련된 것일수록 늘 일본과의 교섭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

p319 507년에 즉위하는 계체왕이 다름 아닌 무녕왕과 형제관임을 밝히는 유물이 나왔다. 바로 인물화상경이다. 청동으로 만든 이 거울은 1914년 일본의 오사카 근처 와카야마 현의 한 신사에서 발견되었는데 지금은 국보로 지정되어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기 503년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 거울에 새겨진 글자 가운데 남제왕과 사마가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사마가 남동생인 왕을 위해 만들어 보낸다는 내용이다.

⇒ 사마가 누구인지에 대한 수수께끼는 1971년에 와서야 풀렸다. 사마는 무녕왕의 이름이었다. 공주에서 발굴된 무녕왕릉에서 이 이름을 적은 묘지석이 나왔다. 무녕왕이 아우를 배려한 데는 무녕왕 자신이 일본왕실에서 아우와 함께 살다가, 아버지 동성왕의 뒤를 이으려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를 여의고 멀리 떨어져 보내야 할 형제였기에 우의가 두터웠다.

p325 왕실로만 놓고 본다면 일본은 분명히 백제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7세기 후반에 들어 종주국 백제가 멸망했다. 어느 정도 힘이 쌓이면 내심 독립할 요량이었던 일본 왕실로는 어쩌면 복음과 같은 소식이었을지 모른다. 백제가 망할 무렵, 일본의 구원군은 적시에 도착하지 않았고 그렇게 늦장 부리다가 싸우려는 시늉만 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 여기에 그치지 않고 종주국 백제의 멸망 후 7년 국호를 변경하나. 그것은 백제에 대한 일본 왕실의 독립선언으로 보인다. 더 이상 도움받을 수 없고 받아도 이로울 것 없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이후로 일본 왕실은 백제의 흔적 지우기를 끈질기게 계속 한다. 14세기에는 신황정통기에서는 8세기 말 환무왕이 일본과 삼한은 같은 종족이라고 적은 책들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는 일본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독립의 비원으로 본다.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p329 일연이 적고 있는 남쪽 연못가의 용이 사실을 비유한 것이라면 용은 왕위에 오르기 전의 법왕일 것이다. 왕족이긴 하나 장래가 보장된 것도 아닌 남자에게 몸을 허락한 여자는 떳떳이 자신을 드러내 놓고 살지 못했으리라. 더욱이 과부의 신분으로 말이다.

p335 일연이 쓴 무왕조를 사실로 보아 무왕의 출생이나 왕위 등극의 과정을 설명하자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법왕이 아직 왕자일 때 그것도 등극과는 서열이 먼 상태에서 만난 여염집 여자 더욱이 과부에게서 얻은 아들을 떳떳이 자기 집 안으로 거두지 않았을 것이고, 왕위계승은 큰아들이 아니라 누구든 뛰어든 왕자가 차지하는 당시 관례로 보아, 어떻든 왕족인데다 비범한 서동의 발군으로 곧 그것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점 인정된다.

p338 실제 무왕은 설화 속에서는 장인인 진평왕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며 백제를 지켜낸 왕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의자왕대로 늦추어진 것도 무왕의 강고한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p342~343 미래불로 오시는 미륵보살의 세상이 이렇기에 시대가 혼란해질수록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가 빨리 오기를 바라는 신앙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에서 남북조시대의 혼란한 시기에 먼저 생겼고, 후백제의 견훤이 자신을 ‘미륵의 하생’이라 선전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대체적으로 미륵불은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미륵이 본디 남자였지만 이렇게 바뀌는 것은, 미륵불이 자비와 영원불멸의 생산을 의미하는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데다 남성인 석가불에 대응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미륵은 자비의 부처이다.

p345 백제에 주재하던 미륵보살을 신라에 빼앗기는 사건이 벌어진다. 나는 그 부분을 앞서 신라의 화랑 제도 성립과 관련해 소개한 바 있다. 바로 '미륵선화와 미시랑 그리고 진자사' 조의 미륵선화다.

⇒ 진지왕 때, 흥륜사 진자 스님이 공주 근처의 수원사에서 만나고 온 미륵선화는 경주의 영묘사 가까운 곳에 사는 미시랑으로 나타났다. 이것을 신라에 의한 백제 미륵보살의 탈취로 해석한 사람은 최완수 선생이다. 그에 따르면 선하는 진평왕이 자신의 딸들을 미륵의 현신으로 보고 키운 세 공주 중 한사람이다. 미륵은 다시 백제로 갔고, 서동은 그 덕분에 왕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견휜, 비운의 영웅



p353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편으로 만드는데 능했다. 아마도 그 결정적인 사건은 견훤의 경애왕 살해일 것이다.

⇒ 이 일로 신라의 여론이 견훤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나 왕건이 고려를 세운지 10년이 지난 즈음에도 여전히 형세는 견훤이 압도하고 있었다.

p353 왕건이 연패하는 중인데도 신라에서는 고려와 화친하고 더 나아가 나라를 맡기자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었다. 됨됨이가 견훤처럼 사나운 사람보다 온순하고 정이 많기로 왕건이 그들의 뒤를 잘 봐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북한이 중국과 남한 어디에 붙을 건가 결정하는 것도 북한 지배권력이 어느 쪽이 자기네 뒤를 잘 봐줄 건지를 보고 결정할 수 있다.

p359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략이 많아, 견훤은 그를 특별히 사랑해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렇다면 어쨌건 큰아들 신검에게 왕위가 가지 않을 것임은 분명했다. 여기서 큰아들이 아버지를 절간에 가두는 반역사건이 일어났다. 밑의 두 동생과 합작한 것이었는데 모든 일의 계략은 이찬 능환이 했다. 청태 2년 을미년 (935년)의 일이었다. 견훤은 금산사 불당에 위리안치 되었고 금강은 죽임을 당했으며,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

p361 반역을 당한 자는 비참하지만, 반역자가 아들인 경우엔 슬픔은 이중으로 겹쳐오고, 급기야 천륜을 팽개친 불구대천의 원수 삼기가 어디에도 없을 지경을 만들어 낸다.

p361 견훤은 후궁과 나이 어린 남녀 2명 그리고 시비 고비녀, 나인 능예남 등과 함께 갇혀 있었다. 술을 빚어 마시다가 감시하던 군사 30명을 취하게 만들고는 도망쳤다. 그리고 오랫동안 적이었던 왕건에게 더러운 목숨을 부지하러 갔다. 왕건은 그가 지닌 성품대로 부하들을 보내 맞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자식에게 당한 배신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온 이 노장이 도착하자 자기보다 10년 위라고 해서 그를 높여 상보라고 했다. 상보는 경순왕에게도 주었던 직함이었다. 이 와중에도 살길을 찾은 이는 용케 그 길을 간다.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견훤의 사위 영규다.

p363 왕건은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다만 능환만은 “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네 꾀다. 신하된 도리에 마땅히 이래야 한단 말이냐” 하고 목을 쳤다.

     견훤이 울화가 나서 등창이 생긴 것이 바로 그때였는지 잘 모르겠다. 흔히들 아들을 죽이지 못한 울분에 등창이 났다고 말하는데, 일연의 기록에 의하면 그 나이라면 신검이 항복하여 명실공히 고려의 천하가 시작되고도 10여 년이 지난 다음이다. 그 때가 언제인들 무슨 상관이랴? 따지고 보면 자식을 원수로 여겨 죽이지 못하는 것을 분통해 하고, 치사한 목숨 부지하다 등창이 나서 제 명을 재촉한 사람의 생애다. 실제로 그 지경까지 되었을까 의아스러운 점이 없지 않지만 말이다.   



신비의 왕조, 가야



p364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려 있기에 오늘날 소중한 자료로 남게 된 베스트 3을 꼽으라고 한다면 무엇을 들겠는가? 내가 존경하는 어떤 선생님은 단군신화, 향가, 가락국기 이 세가지에다 점을 찍었다. … 그런데 왜 가락국기일까? 일단 표면적으로는 지금까지 전하는 가야사에 관한 유일한 사료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400년 가까이 존속된 나라의 역사치고는 철저히 외면되어 있다.  

p365 가야를 그냥 건너뛸 수 없는 이유가 일연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허황옥이라는 불교의 발상지 인도로부터 멀리 시집온 여자, 이 땅에 불국토의 신성함이 서려 있다고 믿는 일연으로서는 이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소홀히 대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찾아든 좋은 자료가 바로 가락국기다.

⇒ 가야는 고대 한반도의 남부를 설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이곳은 완충지였다. 신라와 백제로 그로 인해 힘이 균형을 일었고, 일본열도에서 몰려온 또는 몰려갈 다수의 사람들에게 생활 거점이 되기도 했다. 그런 가야의 역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일연의 손에 의해 거둬들인 짧은 기록 하나가 전부다.

p375 왕이 처음 신부를 맞으러 나간 날이 7월 27일 나흘을 보낸 다음 8월 1일에 궁궐로 돌아왔다고 가락국기는 전한다. 두 사람의 꿈같은 밀월여행은 짧기만 하다.

p382 김춘추와 문희의 ‘민족의 결혼’이 낳은 아들 문무왕. 삼국통일을 완성한 그는 신라와 가야 두 민족 간의 결합으로 태어났다. 그러기에 민족간 결합에 의욕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민족간은 결합해야 하고 결합할 수 있다는 신념과 경험을 가진 그라면 나아가 신라 백제 고구려의 세 나라를 한 나라로 만드는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가야를 한반도의 고대사를 구성하는 주요 나라로 치지 않았던 것 같다. 신라의 변방으로 있다가 결국 신라에 병합된 지방 정도로 보자는 것이었으리라.



불교로 보는 역사



p385 삼국유사의 후반부를 여는 첫 편은 흥법이다. 세 나라가 솟발처럼 선 다음 처음 불교가 어떻게 들어왔는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를 설명한 부분이다. 전반부와 달리 여기서부터 후반부의 삼국유사는 완전히 불교적 성격을 띤다.

p385 이 조는 모두 여섯 개의 조로 이루어져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경위를 설명하는 조 세 개, 그리고 그 이후의 전개과정 가운데 특이한 사례를 하나씩 들어 놓은 세개의 조가 그것이다.

p386 흥법은 곧 흥국이었다. 처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도교에 빠져 불교를 배척한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고, 우여곡절 끝에 불교의 세계에 접했으면서도 날로 번창한 신라는 그에 따라 나라도 번창해갔다. 물론 일연은 이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흥법 편의 여섯 가지 이야기에 숨어 있는 메시지야말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일단 이것을 일연이 지닌 ‘불교역사주의’라고 명명해 본다.

p389 고구려는 불교를 그다지 거부감없이 받아들인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고구려가 지닌 대륙적 기질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가 한다. 고구려라고 해서 민간 신앙이 없었을 리 없고, 4세기 후반에 이르면 그것이 나름대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대륙과 연결된 큰 나라를 경영하는 고구려라면 어떤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굳이 막거나 감시할 만큼 자잘하지는 않았으리라.

p392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

      배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노 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멀리 날으네

      어느 곳 고깃밴지 안개 속에 이른 손님

⇒ 7언 절구로 쓰여진 찬. 고구려에 처음 불교가 전래된 것을 삼국사기에 인용하고 난 다음에 쓴 것

p399 금교에 눈 덮여 아니 녹으니

      계림의 봄빛은 아직도 먼데

      영리한 봄의 신 재주도 많아

      모례네 집 매화꽃에 먼저 피었네

⇒ 매화꽃과 같은 존재로 모례는 등장한다. 신불이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스런 상황에서 꿋꿋한 믿음을 지킨 그녀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에서 볼 수 없는 신라 불교의 독특한 면이면서, 완고한 신라 사회에 뿌린 불교의 첫 씨앗이었다.



순교의 흰 꽃 이차돈



p401 비처왕 다음은 지증왕이고 그 다음이 법흥왕이다. 그러나 비처왕과 법흥왕 사이가 불과 15년이다. 아마도 법흥왕의 불교 공인은 전적으로 그 개인의 신심에서 나온 것만은 아닐 터였다. 공인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가도 한몫 거들지 않았을까?

p407 어떤 자료를 받아들였는가의 차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차돈의 머리를 베었더니 흰 젖이 솟아나 한 길이나 되었다는 대목은 어디에나 있다 붉은 피가 아니라 흰 젖이었다는 이 이야기의 절정 부분이며 흰 젖은 부처님의 감응을 말하는 것이었다.

p411 의에 죽고 삶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하늘의 꽃과 흰 젖이여, 놀란 가슴을 치는구나

      어느덧 한 칼에 몸은 사라진 뒤

      절마다 쇠북소리는 서울을 흔든다.

⇒ 일연이 이차돈의 죽음을 노래한 찬. 시인은 결연히 노래한다. 사라진 것은 오직 몸일 뿐이요, 쇠북소리에 실린 그의 자취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

p413 백제에 비한다면 고구려에 대한 일연의 태도는 노골적으로 비판적이다. 도교를 신봉하면서 상대적으로 불교가 쇠퇴해진 데 대한 아쉬움이 컸겠지만, 굳이 그것만으로 이유를 댈 수야 없다. 보덕이라는 큰스님이 제 나라에 있지 못하고 피신해야 했던 것을, 일연은 나라가 기우는 혼란스런 상황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다.

⇒ 대각국사 의천과 마찬가지로 일연은 불교역사주의적 관점에서 고구려의 멸망이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를 가까이 했음이라 결론짓고 있다.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p417 황룡사는 경주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아니 신라의 한가운데였고, 지리상으로만 아닌 마음 속에서는 신라인이 상상하는 세계의 한가운데였다. 그러기에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은 비록 지금은 허허벌판일지라도 황룡사 터에 한번쯤은 서 보아야 한다. 거기서 남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능선이나, 명활산성으로 구획된 동족의 방벽이나, 천마총으로부터 시작하는 서쪽의 고분군을 한눈에 넣어 보아야 한다. 그 분지에 지상의 낙원을 이루고 살았던 서라벌 천 년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p424 인도의 아육왕도 이루지 못했던 일, 그것은 힘만으로 공덕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태자의 말에 함축된 의미에다, 오직 인연 있는 땅에서만 가능하다면 신라는 바로 그런 인연을 갖춘 곳이라는 자부심이 은근히 배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신라가 가진 불국토사상 또는 본지수적사상이라 부른ㄷ. 일연은 이같은 의식을 고스란히 반영해 이 불상의 건립 과정을 쓴 것이다.

p425 아쇼카왕이 어쩌다 불교신자가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아쇼카왕은 지독히 못생겼다. 그의 형 수사마 태자가 준수한 용모로 아버지의 뒤를 이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아쇼카는 행여 질투심에 딴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아버지의 노파심 때문에 차라리 죽기를 바라고 전쟁터에 내보내지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략이 있었다. 싸움에 이기면서 백성들의 신임까지 듬뿍 받았다. 반면 태자는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 점점 여론은 아쇼카 쪽으로 기울고, 드디어 아쇼카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부왕에 이어 왕이 된다. 그러나 아쇼카는 콤플렉스가 많은 왕이었다. 못생긴 얼굴에 형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마저 가득했다. 그것은 이상한 형태로 뻗어나 와 결국 가상 지옥을 만들어 놓고 잘생긴 사람을 들여보내 죽이는 해괴한 짓을 저질렀다. 그가 자신의 죄를 뉘우진 것은 독실한 불교신자인 한 신하를 만나면서다.

⇒ 신하는 부처님의 예언서라 불리는 잠아함경의 한 대목을 들려 준다.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p440 문수보살을 흔히 출가의 보살이라고 한다. 화엄경의 이야기에서, 문수 스스로 남쪽을 두루 돌며 깨닫고 동쪽으로 오는데, 거기서 만난 선재동자에게 남쪽으로 갈 것을 권하는 대복이 있다. 곧 선재의 출가를 뜻할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길에 동기를 부여하는 상징으로 읽힌다. 누구든 수행의 첫 길은 문수보살로부터 시작한다. 또는 문수보살을 비유해서 세상의 어린 아이에게 부모가 있는 것처럼 문수는 불도를 닦아나가는데 부모라고도 했다. 부모는 자식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자다. 문수도 성불의 그 같은 절대적 조력자라는 뜻이다. 나아가 문수 신앙은 대체로 이런 문수 보살의 성격에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p452 들에서 학 다섯 마리를 보고 쏘았다. 그 중 한 마리가 깃털 하나를 떨어뜨리고 가 버렸다. 거사가 깃털을 집어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니 사람이 모두 짐승들로 보였다. 그런 까닭에 고기를 얻지 못하고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 어머니께 드렸다.

⇒ 신효거사, 충청도 공주 사람인 그는 유동보살의 화신이라 불리웠는데 세속에서는 어머니를 정성스레 모시는 효자였던가 보다. 어머니는 고기가 아니면 먹지를 않았으므로 고기를 구하러 나가는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출가를 하고 자신의 집을 내놓아 절로 만들었다.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p456 마음의 정처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 누구도 한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할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단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p458 무릎이 헐도록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빌고 빌어 두노라

      일천 개 손 일천 개 눈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덜어

      둘 없는 내라

      한 개사 적이 헐어 주시려는가

      아 나에게 끼치신다면

      어디에 쓸 자비라고 클고

⇒ 천수대비가 분황사 천수대비 맹인 아이가 눈을 뜨다 조.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p472 만약 삼국유사에 실린 150여 가지가 넘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뜻 깊은 것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여기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를 대는데 주저하지 않겠다. 탑상 편의 남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조다. 백월산 연기 설화로 시작하는 이 조는 부득과 박박이 각각 미타불과 미륵불을 근실히 구하다 함께 왕생하는 이여기다.

p476 부처를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는다.

p481 중생의 뜻을 따르자고 박절히 내쫒지 못한 것, 맑은 마음을 지키며 벽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염불을 외운 것, 아이를 낳으려는 여자 옆에 애처로운 마음으로 가만히 등불을 피워 놓은 것, 두려운 마음 한편 가득했으나 새로 물을 끓여 산후의 여인을 씻긴 것 등 부득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비록 관음보살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이미 도를 이룬 자의 마음씀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그의 행동 하나하나 그 자체가 관음보살의 헌신인지도 모른다.

⇒ 부득은 미타존상, 박박은 무량수 불상.



낙산사의 힘


p488 ‘담을 쌓다’라고 말하면 흔히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인다. 뭔가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고립의 의미를 넘어, 제 주장에만 골똘한 고집쟁이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그러나 절 주변에 쌓은 담은 고집쟁이의 그것이 아니다. 속된 것으로부터 지키는 어떤 성스러움의 의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낙산사는 그렇게 성스러움의 정화를 느낄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p495 참으로 치밀하고 정성을 들인 노력 후에 얻은 만남이다. 그런 노력으로 얻지 못할 무엇이 있겠는가 웅변하는 듯하다. 나는 이것을 치밀하고 정성스런 만남이라고 명명한다.

⇒ 의상은 7일간의 정성스런 재를 올리고 진신을 만난다.

p496~497 만났으면서도 만난 줄 몰랐을 뿐이다. 그런 뜻밖의 만남이 곧 보살과의 만남임을 영원히 모르고 지났다면 사정은 다르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 나중에 알게 되는 이 우연의 메커니즘. 사실 우리들의 만남은 대부분 이렇다.

      의상이 치밀하고 정성스럽게 전신을 만나는 과정은 하나의 전범을 보여 주지만, 세상에 사는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 같은 경지에 오르기도 어렵고, 그롤 계기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거기서 우연히 스치는 수많은 만남이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다만 끝내 그 정체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와 어느 순간 깨닫는 경우로 갈라질 뿐.

p502 이국 땅 먼 하늘 아래서 고국의 승려를 만나 간절한 부탁을 하던, 그리하여 무심한 스님의 꿈속으로까지 찾아오던 한 쪽  귀가 잘린 소년 사미승과 그를 기다리는 어머니는 인생의 모진 인연의 실체이고 숙명이다. 거기에다 소년 일연은 자신과 어머니의 얼굴을 겹쳐 보았을 터이다.

p506 고운 얼굴 아름다운 미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란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 꼴입니다. 당신은 내가 있어 걸림돌이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근심만 쌓일 뿐, 지난날의 기쁨은 적이 근심과 고통으로 자리를 내주었군요. 당신이나 나나 어찌 이다지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뭇 새가 함께 주리기보다 차라리 외짝 난새가 마주볼 거울을 가지는 게 낫겠지요. 별 볼일 없으면 버리고 됐다 싶으면 들러 붙는 것이 사람 마음으로 감당 못할 일, 그러나 가고 말고 사람의 뜻대로 안 될 일이요. 헤어짐과 만남 또한 운수가 있으니, 청컨대 이쯤에서 헤어지지 합니다.



운문사 이야기


p513 의해 편에다 들인 일연의 이 같은 노심초사가 승려로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결과만은 아니다. 우리는 삼국사기의 열전에 승려가 단 한 사람도 채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그다지 거론하지 않는다. 원효도 의상도 없다. 아마 일연에게는 이것이 못내 아쉬운 한 가지였으리라. 삼국시대를 특히 신라 중심으로 기술한다고 했을 때 몇몇 승려들의 역할과 업적은 불교의 그것을 떠나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아쉬움은 크다. 기록자가 자기 시대의 이념만을 고집해 당대의 생생한 자취를 남겨주지 못한 점 삼국사기는 거기서도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의해 편의 여러 기록들은 삼국사기의 이런 단점들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도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p514 진리의 집을 가장 먼저 지은 이는 누구인가? 일연은 그를 원광이라 생각한 것이다. 원광은 중국에 유학하여 불교의 진수를 체득해 온 해동의 처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p525 보양과 함께 왔다는 서해 용의 아들 이목은 누구일까? 용의 아들이라니 같은 용이겠지만 이목이라는 이름을 우린 발음대로 한다면 이무기처럼 들린다. 지금은 용이 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뱀을 이무기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아직 어린 용을 이무기라고 불렀던 것일까?

p527 운문은 구름의 문, 아마도 운수의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잠시 머무는 곳인가.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다.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p530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사람이라고.

p531~533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수비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는 그것을 감당했고, 그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 준 사람이다.

p534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려나 / 내가 하늘 괴는 기둥을 자를터인데

⇒ 원효의 이 말에 태종 임금은 말했다. 이것은 스님이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현명한 아들을 낳겠다는 말일 게야.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큰 이익이 있을라구. 임금은 요석궁에 과부로 지내는 공주가 있음을 알고 원효를 불렀고, 궁으로 가는 길 일부러 물에 빠진 원효는 옷을 갈아입는다는 명목으로 궁에 들어가고 설총을 낳았다.

p537 원효가 이미 계를 범한 이후 속인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불렀다. 어느 날 우연히 배우들이 가지고 노는 커다란 박을 얻었는데 모양이 괴이하여 그 형상을 따라 도구를 만들었다. 화엄경에 모든 것에 거침없는 사람은 한 가기 길로 나고 죽는다는 대목을 가지고 무애라 이름 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시켰다. 일찍이 이것을 지니고 모든 마을 모든 부락을 돌며 노래하고 춤추며 다녔는데 노래로 불교에 귀의하게 하기를 뽕나무 농사짓는 늙은이며 독 짓는 옹이장이에다 원숭이 무리들까지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크다.

속과 성의 경계를 마음대로 드나들고자 했던 원효도 요석공주와의 사랑이며 설총을 낳은 일에 초연할 수만은 없었던가 보다. 스스로 파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원효가 오늘 날의 원효가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변증법적 정반합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p537 원효 아닌 원효는 무애의 원효였다.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

p541 혜공은 미친 중이라고 하나 특이한 이적을 수없이 보인 바 있는 원효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이었다.

p546 스님이 입적하신 다음 설총은 유해를 잘게 부숴 얼굴 모양 그대로 만들어 ㅂㄴ황사에 안치하였다. 경모하여 생을 마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설총이 때로 예불을 드리러 오매 얼굴상이 홀연 돌아보아 지금도 바라보는 모습 그대로이다. 원효가 거처하던 토굴로 된 절 옆에는 설총이 살던 집의 터가 있었다고 한다.

⇒ 아들은 늙은 아버지를 끝까지 곁에서 지켰던 모양이다.



의상, 화엄의 마루


p552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p563 의상이 귀국한 해는 670년이다. 그러나 부석사의 의상 비문에서는 671년이라 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의상을 몰래 보내 소식을 전했다는 말은 없다. 일연이 어디서 참고하고 썼는지는 모르지만 의상의 귀국은 다분히 정치적으로 보인다. 본디 의상은 김씨 집안의 귀족 출신이다. 김흠순이나 김양도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을 것이고, 조국의 위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자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귀국한 다음 의상이 어떤 정치적 활동을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p565 산둥반도의 등주에 발을 디딘 의상은 생계를 꾸릴 탁발길에 선묘라는 아가씨를 만난다. 선묘는 수려한 의상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해 뜨거운 정을 품는다. 그러나 의상의 마음은 철석같다. 끝내 선묘는 의상이 불심으로 감동되고 불법에 귀의하기로 한다.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p571 나는 거기서 참으로 모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우리가 모진 것과 다르다. 우리가 자본주의적 욕심에 버려져서 모질다면 그들은 원초적 자연 속에서 몸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적응하고 생존하려는 데서 생긴 모짐이다. 인류가 가장 인류다운 모습, 아마도 문명 이전에 인류는 저렇게 살았을 것 같은 모습을 그들은 지금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진실로 두려워 할 줄 알고, 진실로 견뎌 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성스러워 보였다.

p574 해동의 작은 나라 신라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아리나발마처럼 처음에는 중국에까지만 가려다가 인도까지 가게 된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인도 여행을 목적으로 출발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한 번 가서 돌아오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아니 돌아오지 못해도 좋다는 각오가 서 있었을 것이다.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p582 진표로부터 시작하여 영심과 심지로 이어지는 사제간의 계보에 눈이 뜨인다. 일연은 이 세 사람을 그리는데 세 조나 할애하고 있다. 이 세 사람의 손으로 지금 전라북도를 대표할 금산사, 충청북도를 대표할 법주사, 경상북도를 대표할 동화사가 만들어지거나 커졌다.

p596 무릇 미륵 신앙이란 민중들의 삶에 더욱 밀착되는 법이다. 그들의 어려운 삶 속에 동참하는 데서 이 신앙의 진수가 드러난다.

p596 세 사람이 수행하는 방법은 스승의 그것과 방불하다. 제 몸을 버리는 용맹스런 정진과 참회 그것이야말로 진표가 한 수행의 핵심 아니던가?

⇒ 이들은 스승이 표시해 둔 길상초가 자란 곳을 찾아 절을 짓고, 스승을 짓고, 점찰법회를 열었고 절 이름을 길상사라 햇다. 지금의 법주사이다.



밀교의 한 자락


p603 삭발한 승려를 보면 뭔가 알 수 없는 슬픔부터 느껴진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었다...승려를 소재로 한 많은 작품들이 대체적으로 인생의 번뇌와 그 번뇌 속에 시달리는 세속의 인간을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가는 그 번뇌로부터의 떠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자체가 슬픔이다. 시구렁창 같은 세속일지라도 거기서 뒹구는 것이 세상살이의 즐거움일까, 그러기에 출가는 번뇌로부터의 결별이면서도 오히려 슬프게 다가오는 것일까? ‘출가한 이는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다’라는 선입견이 우리에게는 있다.

p603 출가의 동기를 밝히는 가운데서도 가장 내 마음을 치는 이야기가 다음의 경우다. 주인공은 신라의 승례 혜통.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통이라 하였다.

p604 혜통은 다름 아닌 밀교 승려다. 우리는 밀교에 대해 막연한 호기심과 경외로움을 가지고 있지만, 법통을 달리할 뿐 불승에서 다르지 않고, 어떤 면에서 그들이 민간의 생활 깊숙이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대중적이다. 운명적으로 인생의 신고를 겪었거나, 일부러라도 겪어서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거나, 사람이 이를 수 있는 무상의 경지를 추구해 가자는 데 더 철저하다면 철저한 것이 밀교다. 그러기에 출가담도 그만큼 더 극적인 것일까?

p605 밀본, 혜통, 명랑 세 사람의 밀교승들은 모두 주문을 외워 어떤 어려움을 물리치고 있다. 밀교는 같은 불교이면ㅅ도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 사실이다. 밀교의 기본 경전인 대일경에 따르면, 수행의 10단계가 있는데, 거기서 9단계까지를 현교의 세계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단계를 밀교의 세계로 규정한다. 현교는 드러난 불교, 밀교는 숨어있는 불교랄까. 누구나 쉽게 보이는 세계 속의 불교가 현교라면 깊이 숨어 있는 은미한 세계를 간직하고 있는 불교가 밀교일 것이다. 어쨌건 밀교는 현교 곧 일반적인 불교의 세계를 거쳐 최후에 이르는 세계라고 그들은 말한다. 일반적인 불교를 포함하면서 거기에 넘어선 자기들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말이 이 때문이다.

p613 혜통은 속에서 울컥했으나 말은 하지 못하고 뜨락 앞에 서서 머리에 화로를 이었다. 잠깐 사이에 이마가 터지는 소리가 벼락처럼 났다. 삼장이 듣고 와서 이를 보더니 화로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찢어진 곳을 만지며 주문을 외웠다. 상처가 이전처럼 아물었는데 왕자 무늬 같은 자국이 남았다. 그래서 호를 왕화상이라 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p621 제 40대 애장왕 때였다. 승려 정수는 황룡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겨울철 어느 날 눈이 많이 왔다. 저물 무렵 삼랑사에서 돌아오다 천암사를 지나는데 문밖에 한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 언 채 누워서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스님이 보고 불쌍히 여겨 끌어안고 오랫동안 있었더니 숨을 쉬었다. 이에 옷을 벗어주고 벌거벗은 채 제 절로 달려갔다. 거적대기로 몸을 덮고 밤을 지샜다.

p625 아랑곳 하지 않고 제 일을 마친다음 잠을 줄여가며 예불에 온 힘을 기울이는 욱면의 모습에서 이 이야기의 진수는 나온다. 일연은 욱면을 소재로 찬을 남겨놓고 있다.

        서편 이웃 오랜 절엔 불들이 밝았는데

          방아 찧고 오노라면 밤은 금새 이경

          하늘에서 내린 소리 부처를 이루게 했네

          손바닥을 줄로 꿰어 육신을 잊었으니

p627 거창하게 모임을 만들고 절을 짓고, 근엄한 예불을 올리는 이들에게 부처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껍데기 미타 신앙이 가진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자는 목적이라기보다, 제 육신을 잊고 끝내 버리고 만 욱면이라는,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의 계집종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에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과 격려를 받는다.

p633 그가 우리와 닮아 있기 때문일까, 실수와 무지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느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 모습이다.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p643 어쨌건 죽을 목숨, 사랑하는 이의 손으로 최후를 맞겠다는 것, 다소 유미주의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한 번 죽음으로 여러 이익이 돌아온다는 말에, 사랑하는 이의 주검을 팔아 한 세상 잘살아 보자 요행을 바라겠냐는 김현도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다. 처녀 호랑이의 바람은 단 하나 자신을 위해 절을 지어달라는 것인데 이로 인해 절에는 호원사라는 이름이 붙고, 그래서 이 이야기가 사철 연기 설화로 분류된다.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p653 자리가 파할 무렵 왕은 내심 거만하게 다짐해 두었다. 짐짓 놀라는 목소리였다고 일연은 적고 있다.

     “어디 가서 임금이 손수 베푼 음식을 먹었다 하지 말게.”

     그러자 이 초라한 스님에게서 나온 놀라운 한 마디

     “임금께서도 진신석가께 공양하였다고 말씀하지 마소서.”

⇒ 비파암, 불무사.

p656~657 단순하기만 한 진리를 전하는 진신은 이렇듯 슬며시 다가온다. 진신인지 알고 모르고는 찾는 이의 책임인 것이다. 기독교의 성서 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도적같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그 성인을 만나는가? 의상 스님과 같이 치밀하고 정성스런 사람이 만날 것이며 효소왕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은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은 만남이다. 그 만남을 뒤에라도 만남인 줄 알면 그렇다. 효소왕은 그것을 알았기에 부랴부랴 그 뒤를 쫒아갔다. 다시는 그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절을 짓고 공양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그런 만남이 우리에게는 더 많고, 또 소중하지 않은가?

p658 남산의 불상은 거의 마애불이다. 마애불은 바위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바위에 그림을 그리듯이 선으로 불상을 새긴 것은 초기 또는 초보적인 형태고, 약간 도드라지게 파내서 입체감을 살린 것은 좀더 세련된 형태다.

p668 그러나 불교의 법을 섬기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였다. 마을마다 탑이 즐비하게 서고, 여러 백성들이 중의 옷을 입고 숨자, 군대와 농업은 점차 줄어들어 나라가 나날이 쇠약해졌다. 어찌 어지러워 망하지 않으리요.

⇒ 신라의 멸망 원인.

p670 문제가 생길 때는 신라가 그랬고 고려가 그랬듯이, 성인의 가르침도 소용없는 절망의 순간이 온다. 지금 우리 시대의 풍속은 거기서 얼마나 멀까? 성인조차 나타나지 않는,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경계 삼을 사표로 세울까?



숨어 사는 이의 멋


p672 불교가 아직 사회의 전면에 있었을 때 승려들의 역할 또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쪽이었다. 그러므로 승려라면 누구나 피세은거하지 않느냐는 생각은 불교의 역할이 변한 오늘날의 관념이다.

p672~673 불교에서의 숨음은 이와 다른 면이 잇는 듯하다. 세상에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고만 해서 은거가 아니다. 또 드러냈다고 해서 드러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불교적 인식의 숨음과 드러남을 이해하자면 보다 복잡한 변증법적 사고가 필요하다.

p674 헛된 명성을 만들어서라도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자 하는 것이 세상인심이다. 혜현은 그가 이룬 높은 경지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는데도, 도리어 거기서 달아나 홀로 지냈으니, 정반대의 경우라고나 할까?



불교가 보는 효도


p690 흥덕왕 때였다. 손순이라는 이는 모량리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학산이다.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며, 곡식을 받아 늙은 어머니를 모셨따.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이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매번 할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것이었다. 손순이 이를 곤란하게 여기고 아내더러 말했다. “아이는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소. 잡수실 것을 뺏어버리니 어머니가 너무 배고파하시는구료. 이 아이를 묻어 어머니가 배부르도록 해야겠소.” 그러고서 아이를 업고 취산의 북쪽 교외로 나갔다.

⇒ 손순이 아이를 묻다..

p701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는 어렵고 인생은 짧은 데 효도를 마친 다음이라니? 그건 너무 늦다. 내가 죽기 전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거라.”

     “어머님은 많이 늙으셔서 오직 제가 옆에서 지켜야 합니다. 이 일을 놓고 출가라니요? 어찌 차마 그러겠어요?”

     “아니다. 나를 위한다고 출가를 못하다니. 그건 나를 지옥 구덩이에 빠뜨리는 일이야 비록 살아서 삼뢰칠정으로 나를 모신들 어찌 효도라 하겠느냐? 나는 남의 집 문 앞에서 옷과 밥을 빌어도 천수를 누릴 수 있다. 정말 내게 효도를 하려거든 그런 말은 하지 말아라.”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p704 일연이 삼국유사에 신라 향가 14수를 실어놓은 것에 대해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우리 고대 가요 중에 그 정형성을 최초로 획득했으며 지극히 높은 정신 세계를 구축한 이 시가 장르에 대해 비록 편린으로나마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오직 삼국유사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향가 하나에 머물지 않고 10세기 이전의 시가에 대해서 그렇다. 책 한 권에 실린 단 14수가 천 년의 시가사를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p711 열어제치자

         벗어나는 달이

         흰 구름 쫓아 떠간 자리에

         백사장 펼친 물가에

        기랑의 모습이 겹쳐져라

        일오천 자갈벌

        낭이 지니시오던

        마음의 끝을 쫓노라

       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못 덮을 화랑이여

        - 충담사, 찬기파랑가

⇒ 경덕왕을 감동시켰다고 하는 향가.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조화.

 


일연, 혼미 속의 출구


p725 순수 불교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일연의 태도에서 우리는 괴승의 요소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선각자적인 태도를 발견한다.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민족에 대한 각성이라는 더욱 큰 문제가 그들 앞에 닥쳤다. 한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일연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와 여러 부면에서 부딪혔던 것이다.

p739 신라 사회는 고대 삼국시대에서도 중국의 문물을 가장 늦게 받아들였지만 가장 훌륭히 소화해 내었다. 재래신앙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던 사회 중심부에 외래의 불교가 파고 들어오는데 신라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거기에 종속되지 않았다.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의 조화 아래 신라인들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 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신라 문화의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p741 13세기 혼미한 사회를 살다간 일연은 종교와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한 혁신적 승려였다. 그가 삼국유사에서 원효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음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 자신이 원효 스타일의 원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삶의 모습으로 보였을 터다. 물론 승려이기에 그가 보여 준 행적은 일반적인 경우의 충격적인 것과 정도가 다르겠지만 승려의 신분 안에서도 분명 예외적이었다. 그러기에 누카리야와 같은 학자가 순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렸을 법한데 이는 한마디로 사회사적 배경을 무시한 결론이다.



사진 찍기는 참 재미있다 – 양진


p742 칠백쪽을 넘나드는 책의 맨 끄트머리에 있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 책에 깊이 감명받은 사람이거나, 나를 개인적으로 아는 누군가일 게다. 그도저도 아니면 책 뒤의 ISBN 코드까지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흔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일 것이고, 어쨎거나 그 간의 내력을 조금 풀어놔야겠다.

p743 다시 읽는 삼국유사에서 찾아낸 소중한 한 가지, 사랑을 담아내고 싶었다. 황룡사 터를 배경으로 하얀 당간지주에 서린 원효의 고독한 사랑, 점점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서 있는 부석사 석등에 묻어 있는 사랑, 몸통만 남은 깨진 불상을 위해 촛불을 밝히는 촌노의 손끝에 실린 욱면의 순박한 사랑, 낭산 너머로 지는 해를 아쉬워하며 먼발치에서 까치발로 서성대는 익모초에 담긴 지귀의 짝사랑..이런 저런 사랑을 찾아다니다 며칠 만에 집에돌아오면 초롱롱한 아이들과 아내는 내가 사진에 담으려고 했던 그 어떤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내가 찍어온 평범한 사진에도 무한대의 감동을 보이며 힘을 실어주는 것도 아내와 딸의 몫이었다.

p744 지금 나는 사진 찍기와는 조금 떨어진 일을 하며 지낸다. 그래도 사진찍기는 참 재미있다. 내가 즐기는 것 가운데 가장 신나는 놀이다.  의상의 몇 편 되지 않는 저술을 평한 일연의 글처럼 ‘솥 안의 국 맛’을 책임지는 특별한 ‘한 점 고기’ 같은 사진 말들기, 희망사항이다.



3. ‘내가 저자라면’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들어가며

 

기이(紀異)

이 땅의 첫 나라

고구려와 북방계

신라와 남방게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밤에 찾아오는 손님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만파식적 

권력의 끝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첫 성전환증 환자

왕이 되는 자

나라가 망하는 징조

지는 해 뜨는 해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가

견훤, 비운의 영웅

신비의 왕조, 가야

 

흥법(興法)

불교로 보는 역사

순교의 흰 꽃 이차돈

 

 

 

탑상(塔像)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낙산사의 힘

 

의해(義解)

운문사 이야기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의상, 화엄의 마루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신주(神呪)

밀교의 한 자락

 

감통(感通)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피은(避隱)

숨어 사는 이의 멋

 

효선(孝善)

불교가 보는 효도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일연, 혼미 속의 출구

 


1) 삼국유사 이해

 

삼국유사를 언제, 왜 지었는가?


 유사(遺事)는 이전의 역사서와 기록에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말한다. 이 이름에서 보듯이 삼국유사는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등 기존 사사의 기록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연은 삼국사기를 국사(國史)라고 하여 정사로 인식하고 인용하고 있으며 해동고승전의 기사도 10여 군데 인용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삼국유사는 이러한 사서들에 빠져 있는 분의 사료들을 다방면에 걸쳐 수집하여 일연의 의도에 맞게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서문이 없고 동기를 보여 주는 글이 따로 전하지 않는다. 1278년 이후 일연이 73~76세 무렵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본격적으로 편찬한 것으로 알려짐. 그의 문도들도 다수 참여하였는데 민간에 전해지는 고기(古記)들을 비롯 사지, 금석문(金石文), 고문서, 문집과 승전류의 책 등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직접 답사하여 보고 들은 전승이나 설화들을 채록하여 서술하였다.

 또한 시기적으로 삼국유사는 원의 간섭을 받고 있던 시기에 서술된 책이다. 몽골의 30여 년에 걸친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굴복하게 된 상황에서 민족의 위기에 대응하여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 사관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기이편의 서문이다. 여기서 일연은 우리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긍심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고조선조에 천신의 자손이 최초의 국가를 세웠다는 단군왕검 신화에서 파악해 볼 수 있는데, 일연은 이를 기록하면서 중국의 요 임금과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사 중심의 삼국사기에서 누락되거나 고쳐서 기술된 사료들이 삼국유사에서 그대로 전하는 경우가 많다.


삼국유사 구성


 삼국유사는 전체가 왕력, 기이,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 5권 9개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인 구성을 본다면 연대기로서의 왕력, 준역사서로서의 기이,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한 흥법 이하의 여러 편으로 볼 수 있고 제1권은 왕력과 기이, 제2권은 기이의 계속, 제3권은 흥법, 탁상, 제4권은 의해, 제5권은 신주, 감통, 피은, 효선이다. 이러한 체제는 중국에서 편찬된 고승전류와 유사한 것으로 비교되나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왕력과 기이의 구성은 고승전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불교사 사적에 한정되지 않고 삼국 역사 전반에 관한 자료를 모아 엮고 있다.

 왕력편은 신라 시조 혁거세부터 고려 태조 통일에 이르기까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삼국과 가락, 후삼국의 왕력을 중국과 함께 도표로 낸 연표이다. 다섯 단으로 나누어 첫째 단에는 중국 역대 왕조와 왕의 연호, 왕의 연수를 싣고 네 단에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 순으로 각 광와 관련 사실을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연표가 삼국사기에 실려 있으나 여기에는 왕의 재위 연수만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삼국유사 왕력이 가락국을 포함하고 각 왕의 세계, 기년 및 치적이나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간략히 기록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두 번째 기이편은 고조선에서 후백제에 이르는 역사를 신이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기록하고 있다. 59개 항목으로 기이편 이하 전체 129개 항목 가운데 거의 절반이다. 기이편은 그 서문에서 밝힌 바 우리에게 뿌리가 되는 나라와 왕들의 비록 기이한 이야기처럼 들릴 지 모르나 굳이 수록하겠다는 것, 그래서 단군신화가 처음으로 문서상에 기록되었다는 데에서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기이 편에서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한 조를 한 왕과 그 왕대의 특징적인 사건 하나를 묶어서 기술해 나간 점이다. 이 편은 일연이 서문에서 밝히듯이 국가의 흥망에 신이한 힘이 크게 작용한다는 인식에서 ‘신이를 기록한다’는 뜻으로 이름붙인 것이다. 신이한 설화를 역사의 흔적으로 받아들여 채록함으로써 후세에도 신화가 지닌 상징적 의미를 돌아보게 하였다. 기이편에서 일연은 단군조선이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이며 위만조선과 마한이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삼한과 삼국의 연결은 지금의 견해와 다르나 일연이 고조선에서 삼한을 거쳐 삼국에 계승되는 체계를 기본으로 그 사이에 중국 기록들에 나타나는 여라 나라와 군현의 이름을 열거하여 기이편을 편찬하였음을 보여준다.

 흥법편 이하의 7편은 불교에 관한 기사이다. 일연은 선종 승려라는 입장에 한정되지 않고 불교 전래 사실부터 교종의 고승들의 전기, 절과 불상 및 불탑 조성, 민간의 신앙 영험담 등 불교사 관계의 사실을 폭넓게 수집하여 채록하고 있다. 흥법편은 7개 항목으로 삼국에 불교가 전래된 사적과 신라 법흥왕와 이차돈의 불교 수용, 백제 법왕의 살생 금지, 고구려 승려 보덕의 망명, 흥륜사의 열분 성인 기사를 수록하고 있다.

 탑상편은 30개 항목으로 불상, 불탑과 불전, 불경, 범종과 사리 등의 조성, 황룡사와 구층탑 등의 불교 문화 유산과 그에 관련된 기적적 영험담과 신앙을 기록하고 있다.

 의해편은 14개 항목으로 원광, 혜숙과 혜공, 자장, 원효, 의상, 진표 등 당대 고승들의 행적과 활동을 기록하고 있어 불교학 연구와 불교 사상의 정립, 교단확산 등 불교 사상사 연구에 기본 자료가 되고 있다.

 신주편은 불교 신앙 영험담을 다양하게 제시해 일반 민중들의 정토 신앙, 관음 신앙 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신주편 3개 항목은 밀본 혜통, 명랑 등 밀교 승려들의 영험한 이적을 서술하고 있으며 감통편 10항목은 선도 성모의 불사 후원 사실로부터 노비 욱면의 극락왕생, 월명사 도솔가, 김현 등 다양한 계층의 신앙과 관련한 영험한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피은편 10항목은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이적을 보였던 승려와 고사들의 일화를 모으고 있고 효선편 5항목은 부모에 대한 효와 불교적 선을 동시에 이루는 것이 참된 효라고 하는 입장에서 효와 관련된 신앙 사례를 서술하고 있다.


향가의 재조명


 삼국유사는 삼국의 역사와 문학을 담고 있으며 많은 설화와 신화들이 실려 있다. 단군신화, 삼국의 시조시가, 불교와 관련된 많은 신비로운 설화들이 실려 있다. 특히 향가 14수가 실려 있다. 향가는 이두와 고대 문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들 향가는 신비로운 사실이나 불교 신앙을 소개로 하고 있다. 이는 우리 고대 사회의 문화와 삶에 대한 원형을 전해주는 책으로 삼국사기와 비교된다. 고대 사회에 전하는 책으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중요한데 삼국사기는 고려 이정의 삼국 역사를 신라 중심으로 편찬한 정사이고 삼국유사는 일연이라는 승려가 개인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삼국사기에 빠진 부분들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담고 있다. 그리고 보다 자유로운 구성을 가지고 있다. 70세가 넘어 삼국유사를 집필했지만 이러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서는 그 이전부터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 지역을 답사하며 자료를 수집하고 설화를 채록한 것을 보면 외세의 압제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독자성과 불교를 바탕으로 한 고유한 문화 전통을 제시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이 책은 삼국유사 내용을 번역하고 있지 않다. 삼국유사를 해설하고 있다.  저자의 차례 역시 삼국유사가 쓰여진 순서를 밟고 있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발췌하며 그와 관련된 배경을 설명하고, 일연에 대한 설명이나 의도, 작가의 의견 등을 피력하고 있다. 그가 설명을 하고 있는 부분은 우리가 궁금해 하는 부분을 잘 찾아내어 잘 정리해 주고 있으며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생각하게끔 만들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글만큼이나 아름다운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역사서를 뒷받침하기 위한 객관적 자료로서의 사진이 아니라 그 하나하나라 아름다운 시로 보이는 사진이다. 더구나 그 사진은 저자가 직접 찍은 것이 아니라(저자가 찍은 사진도 드물게 있더라만), 사진가가 따로 있다. 그러니 이 책은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과 그 삼국유라를 현대적으로 풀어간 고운기, 그리고 삼국시대의 흔적과 현 시대의 접점을 찾안 양진, 이 세사람의 각각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감동적이었던 장절과 보완점


 아, 사진과 함께 만나는 삼국유사는 아주 옛날 삼국의, 신라의 모습을 현재 속에서 찾아보는 감흥을 배가시켜주었다. 잠시 잠시 글의 여운을 느끼게 해주는 사진이 너무나 아름답게 자리잡아 이 책이 더욱 빛났다고 책장을 덮으며 생각한다.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에 비해 좀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하지만, 마냥 옛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사실 현대에 사는 사람으로서 가지는 여러 의문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의문점들을 저자가 잘 이야기해주고 있어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러한 의문에 대해 풀어가는 방식이 논문에서 나타나는 딱딱하고 건조한 문체가 아니어서 좀더 편안하게 읽을 수있었다. 또한 곳곳에 보이는 저자의 시인의 향내가 감성적인 느낌에 젖어 들게 하면서 같이 여행을 떠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부분을 잊지 않되 지난 역사의 흔적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굳이 내가 보완할 점을 어찌 찾으리오. 오히려, 책이 이렇게 끝나버리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국유사가 이야기가 많은데 왜 여기서 끝나버리는지, 왜 이 이야기만 뽑아서 쓰고 있는지 등등, 그러한 점이 아쉽다고나 할까. 저자는 삼국유사를 시리즈로 엮어 내고 있으며 또한 다양한 버전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다. 그 수많은 이야기를 이 한권에서 나타내기는 어려웠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든 다른 저작물들을 읽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 그러다 보면 삼국유사를 매개로 쓴 또다른 책들과 이 책의 차별성 또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자신이 다양한 버전으로 정리하여 이미 삼국유사를 읽어 가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으니 보완할 부분으로 얘기하겠다고 하는 것이 이미 그가 새롭게 편찬한 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에 나타나고 있는 시와 관련된 부분만을 뽑는다거나, 설화만을 뽑는 것, 인물별로 정리하여 이야기 해보는 것, 논쟁적인 부분을 추려서 이야기 해보는 것 등. 하나의 원전이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을 때 거기에서 파장되는 이야기가 무수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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