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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9일 10시 59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일연의 생애>

일연(一然, 속명(본명) 김견명(金見明), 1206 ~ 1289)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승려로, 보각국사(普覺國師)라고도 한다. 속성은 (), 본관은 경주(慶州), 속명은 견명(見明)이며, 처음의 자는 회연(晦然), 나중에 일연(一然)으로 바꾸었다. 호는 무극(無極)·목암(睦庵), 시호는 보각(普覺)이며, 탑호는 정조(靜照)이다.

1206년 탄생 - 고려 희종 2, 7 25일 경북 경산에서 아버지 김언필, 어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남. 어릴 적 이름은 견명

1214 09 - 고종 1. 해양(지금의 전남 광주) 무량사에 의탁, 공부시작

1219 14고종6, 진전사에서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음. 법명의 회연

1227 22고종14년 겨울, 승려들의 과거시험이라 할 선불장에 나가 수석 합격. 포산(비슬산)의 보당암에 주석.

1236 31고종 23, 문수보살의 감을을 받고 포산 무주암에 거쳐.

1237 32고종 24, 여름부터 포산 묘문암에 주석. 삼중대사에 임명됨.

1246 41고종 33, 선사가 됨.

1249 44  - 고종 33, 상국 정안의 초청으로 남해 정림사에 주석

1256 51고종 43, 윤산(경남 남해) 길상암에 머뭄, 이때 <중편조동오위>지음

1259 54고종 46, 대선사가 됨.

1260 55원종 1, <주연조동오위>간행

1261 56원종 2, 임금의 부름을 받고 강화로 올라가 선월사에 주석.

1264 59원종 5, 영일 오어사, 포산 인홍사에 주석.

1268 63원종 9, 운해사에서 열린 대장낙성회에서 주맹을 맡음.

1277 72충렬왕 3, 운문사 주석.

1278 73충렬왕 4, 인흥사에서 <삼국유사> 연표의 저본이 되는 <연대연표>간행.

1281 76충렬왕 7, 여름, 왕의 부름을 받고 경주행재소로 감. <불일결사문> 찍음.

1282 77충렬왕 8, 왕이 일연스님을 개경 광명사에 들게 함.

1283 78충렬왕 9, 국사에 책봉됨, 호를 원경충조라 함. 이해 가을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옴.

1284 79충렬왕 10, 인각사에 주석. 인각사에 머물면서 구산문도회 두 번 개최.

1289 84충렬왕 15, 6월에 와병, 음력 7 8일 입적. 시호를 보각, 탑을 정조라 함.


그의 저서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의 신화와 민간설화를 수집하고, 특히 향가를 비롯한 불교 관계 기사를 수록, <삼국사기>와 함께 고대문학과 역사 연구에 귀중한 문헌이 된다. 이 밖에 <조정사원>30, <선문염송사원> 30권을 지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유사를 모아 고려 충렬왕 때의 명승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이 지은 책. 5 2.

1 왕력 기이(王歷紀異), 2 문호왕(文虎王) 내지 가락국기(駕洛國記): 고조선 이하 여러 고대국가의 흥폐·신화·전설·신앙 등과 신라 최후의 왕인 경순왕(敬順王)까지의 신라 왕조 및 백제·후백제·가락국에 관계되는 역사 등 62편의 글 수록.

3 흥법탑상(興法塔像): 37편의 글로 신라를 중심으로 불교에 관한 기사 수록.

4는 의해(義解):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설화 13편을 수록.

5는 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밀교의 승려들에 대한 행적 3편과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향찰문(鄕札文)으로 쓰인 향가 14수가 수록, 감통에서는 부처와의 영적 감응을 이룬 일반 신자들의 설화를 실었으며, 피은에서는 깊은 학문과 엄격한 도덕률을 지니고 있던 고승들의 이적에 대한 10편의 설화를 싣고, 효선에서는 뛰어나게 효행을 한 5사람의 이야기를 수록했다.


 현재 고려시대의 각본은 보이지 않고, 중종 7(1512)에 당시의 경주 부사 이계복에 의해 중간된 정덕본이 현재로는 최고본이며, 활자본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1908년에 된 도쿄 문과대학 사지총서본(東京文科大學史誌叢書本)이고, 그 뒤 1921년에 교토 제대 문학부총서(京都帝大文學部叢書) 6으로 정덕본을 영인했다. 이 밖에 조선사학회본·계명구락부본·삼중당본 등과 이병도의 역주본이 있다. 현재 전하는 책이나, 일연비문에는 적혀 있지 않다.

삼국유사는 기존의 역사서에서 간과한 고대의 사회 습속과 신앙, 특히 불교사의 많은 부분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보충해 삼국사기보다 역사 이해의 폭을 크게 확대시켜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지리 문학 언어 미술 고고 민속 사상 종교 등 고대의 역사와 문화의 총체적인 모습에 접근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한국의 고대사 체계는 고조선에서부터 삼국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국가와 정치세력을 잡다하게 나열하여 전체적으로 일정한 체계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그 시조 단군에 대한 인식이 확실하게 성립됐음을 나타내 준다.

<글쓴이 고운기>

1961년 전남 벌교 에서 태어나 한양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석사. 박사학위 받음. 삼국유사에 관련 연구로 <일연>,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삼국사기열전>등이 있다.


고운기 저자에게 감동스러운 부분은 삼국유사에 20년이라는 시간을 바쳤다는 대목이다. 한 가지 연구에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에서 많은 것이 읽혀진다. 또한 저자는 국사학자가 아니기에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겸손함을 보이지만, 어떤 사학자보다도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이는 부분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참 좋은 저자와 책을 만난 기분이다.


<사진작가 양진>

1966년에 태어나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재학시절부터 사진동아리에서 활동했고 주로 사람과 자연을 테마로 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1991년부터 고운기와 함께 <삼국유사>의 현장을 찾아 다니며 사진 작업을 했고, 지금은 우리 자연과 문화를 담아내는 일에 빠져 있다.


머리말에 이 책에서 자신 있게 내세울 특징이라면 바로 사진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책장을 넘길수록 공감할 수 있었다. 한 장의 사진을 담아내기 위해 수십 번을 왕래했을 그의 발걸음이 역사의 현장과 오버랩 되면서 많은 감동을 선사했다. 어떤 사진은 오래도록 시선을 머물게 했고, 어떤 사진은 마음에 불을 싸지르기도 했으며, 어떤 사진은 글보다 강했다. 이런 사진들을 담기 위해 수도 없이 새벽부터 한밤까지 카메라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을 작가의 노고에 내 어깨와 다리로 피곤함에 전해졌다. 이른 아침에 찍은 사진을 보면 나도 새벽 이슬을 밟았고, 해질녘 사진을 보면 일찍 도착해 어느 장소가 좋을 지 물색하는 수고로움을 즐기며 기다리는 곳에서 나도 함께 했다.


 사진은 한 마디로 이야기 하면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한다. 양진씨의 사진을 보면 기다림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표현해 낸 그의 사진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담담함과 진솔함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책을 읽으며 카메라 가방을 둘러매고 떠나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지만, 그 충동을 그의 사진으로 대신했다. 좋은 책과 사진집을 같이 만난 기분이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2~3 오히려 <삼국유사>에 대한 가치 부여와 중요성 제고와는 달리, 우리가 이 책을 실제대로 올바로 알고 있는지, 그 세계에 한번쯤은 깊이 빠져 본 경험이 있는지, 문제는 거기에 있다. (중략) 그것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제도적. 구조적인 결함에 원인이 있다는 데서 문제는 심각하다.

>마음이 부끄러워 머리를 들 수가 없다. 저자는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배운 기억과 시험에서 틀린 기억이라도 있지만 나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마치 외국어로 된 낯선 책을 펼치는 이 기분을 단지 사회의 제도적. 구조적 결함으로만 돌리기에는 내가 그 다지 뻔뻔하지 않다. 이런 금수강산과 찬란한 역사와 모국어를 갖고 있다는 식상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 실감하는데 30년이 넘게 걸렸다. 내 문제가 더 크다. 그래서 애정을 갖고 이 책을 들여다 보려고 한다.

5 유학을 기본으로 하는 선비들이야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고 한들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 주는 데 반해, 승려들은 처음부터 중국 중심에 서 있지 않으므로 보다 빨리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9 이렇듯 20세기에 들어서야 <삼국유사>가 전면적인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으니, 실로 빛을 보기까지 600여 년의 오랜 세월을 견딘 셈이다.

>이 책이 어둠 속에서 보낸 인고의 세월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책이든 사람이든 자신의 시대를 만나기 위해서는 감당해내야 하는 필요조건이 분명히 존재하는 듯 하다.


이 땅의 첫 나라

12 10세기부터의 고려 사회는 중국적 유교 사관으로 무장한 김부식과 같은 지식인들이 주도권을 잡고 이끌어 나갔다. 그들은 단군과 단군조선의 존재는 역사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유려한 한문으로 집필된 <삼국사기>의 첫머리에 단군은 실리지 못했고, 세월은 150여 년을 흘러야 했다.


12 글을 쓴다는 것이 목숨과 바꿀 무게로 져지는 시대에서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적을 수 없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큰 나라야 제 일을 제 방식으로 쓰면 된다. 예나 이제나 작은 나라는 거기에 그다지 자유가 없다. 늘 큰 나라가 만든 규범을 좇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일 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13세기의 일연 간은 이는 그 점을 간파했던 사람이다.

>일연의 현명함이 드러난다.


17 아니면 3 7 그리고 그 반복은 완전 숫자로, 온 날을 의미하고, 그것은 100일이 요즈음과 같은 숫자가 아니라 온 날로 보았을 때 서로 통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네 민간 신앙에서 3 7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데서 자주 쓰이고, 꺼린다는 것은 민간 신앙적 의식에서 특별히 조심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21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군 신화는 건국 신화다. 이 땅에서 첫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중략) 그러나 단군 신화를 놓고 건국 신화인가 창세 신화인가 따지는 일이 다소 부질없어 보인다. 우리에게 굳이 창세 신화가 없어서 서운하기 때문은 아니다. 건국이냐 창세냐 구분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네 관념의 소산이고, 그것은 특히 서양식 사고방식 아래서 그렇다.

22 고려 왕조에 들어 이전 시대를 정리하는 처음 역사서는 <삼국사기>가 차지했다. 12세기 중반의 일이다. 사실 <삼국사기>는 한반도에 살았던 지식인층이 중국으로부터 문자와 그와 관련된 여러 문화를 전수 받은 다음, 이제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했음을 보여 주는 책이다.

23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모방이 창조의 원동력이라고는 하나 지나치면 부작용이 따른다. 한껏 폼을 내 만들어 놓은 <삼국사기>라는 명약이 우리만의 고유한 정신과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는 바이러스로도 기능할 줄은 아마도 그 찬술자들조차 몰랐던 것 같다. 일연은 그 바이러스의 정체를 발견했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쓴 것이다. 이를 그대로 들여와 내용만 우리 것으로 채웠을 때, 내용은 형식에 가려 실상을 보여 주지 못했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

>한 사람의 사고와 행동이 커다란 물줄기를 만들었다.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고구려와 북방계

52 백제의 지배층이 우세한 세력을 형성한 끝에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는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음에 설명하겠거니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는 그 선조들의 경험을 그대로 살려 다시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었다. 나는 그것이 고구려에서 시작한 북방계 이동의 끝으로 보인다.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92 히미코는 3세기에도 살았지만 오늘날에도 프로레슬러로 살고 있다. 프로레슬링은 재미로 본다. 그렇지 않으면 저 1970년대 우리 나라처럼 어느 날 프로레슬링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한다. 역사가 프로레슬링이라는 말은 아니다. 역사는 그런 쇼나 각본으로 비유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득한 옛 역사를 말하면서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너무 긴장하면 결론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기 쉽다. 프로레슬링을 진짜 격투기라고 생각한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은 재미요 남은 것은 공허감이지 않았던가? 역사 또한 그래서는 안 된다.


97 해와 달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우주의 그 어느 별보다 중요한 것임은 말할 나위 없지만 그것은 고대인에게 더욱 절실했다. 무당들이 모시는 가장 높은 신은 해와 달과 별 곧 일월성신이다. 고대 삶의 모습을 지금까지 충실히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서 우리는 고대인이 지녔을 사유방식의 틀을 읽는다.

100 정령을 잃은 사람은 눈 뜬 소경과 같다. 사회도 그렇다. 일연이 강조한 것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

밤에 찾아오는 손님

120 무릇 큰 강은 어느 지류도 마다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고, 그러기에 거꾸로 생각하면 큰 강이 된 것과 다르지 않게, 사람도 큰사람이 있는 법이고, 큰사람이 이룬 일에 대대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는다.


134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 설화가 지니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조화다. 조화를 부리는 것은 귀신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 만 있다면 공포는 사라진다. 어쩌면 귀신의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듯한 이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듯하다.

137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147 그러나 그 같은 정성에도 불구하고 진자의 첫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눈에 씌운 아상은 그토록 완고한 법이다.


149 힌트는 어디선가 주어져 있는 법이다. 그것을 찾고 못 찾고는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렸다.

150 그러나 신라의 경우, 비록 수용이 늦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철저히 자기화 되어 정착되었으므로, 생경한 외래 사조에 휘둘리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시작의 빠르고 늦음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언어로 만드는 것과 포기하지 않는 것이리라.


153 신라의 고승 세 사람이 모두 국가의 중대사에 참여하고 있다. 신라인의 사상적 무장은 이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것은 곧 국력의 신장으로 이어졌다.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169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국민에다 이민 4세의 신분적 제약은 좀체 지워지지 않았던 것 같다. 유신에게는 치명적인 콤플렉스였다. 일제시대 때 최재서가 그린 김유신의 모습이란 바로 망국민의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는 번민에 찬 지식인이다. 그것은 곧 최재서 자신의 의식이 투영된 분신이었다.


172 사실 진골은 편협한 신라 왕실이 한층 더 개방적으로 나가는 데 크게 공헌한 제도이기도 하다.


177 동생의 처지가 처량해서만 그랬을까? 일은 제가 벌여 놓고 길길이 날뛰는 유신의 노한 목소리에 묻혀 한 여자의 여린 일생이 가려 있다.

>옛날 여자의 일생을 접할 때 마다 끔찍해 진다.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렇게 이용된 뒤에는 무대의 뒤안길에서 인내와 고통의 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가엾어라. 난 몇 번의 환생 끝에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일까? 얼마의 열망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 주었을까?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179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벌인 통일 전쟁이 한민족의 영토를 축소한 결과만 초래했다고 비판 받지만, 기록을 자세히 살피자면 당나라에 전부 빼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한반도 땅 전체를 집어삼키자는 것이 당나라의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문무왕 법민은,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런 당나라와 맞서 최대한의 땅을 지켜낸 사람이다.


184 옛날 만사를 아우르던 영우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더미가 되고 말아, 꼴 베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영우와 토끼가 그 옆에서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서에서 비방만 남길 것이요,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게 하면서도 죽은 혼령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을 금치 못하겠으되,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즐겨하는 바가 아니다.

문무왕의 고뇌와 왕이라는 자리의 무거움과 인생의 허무를 느끼게 해주어 마음이 아프다.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을 하고 산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186 금당 아래의 동쪽에 구멍을 낸 감은사. 용더러 다니라는 통로를 만들어 준 것이라니,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참으로 즐겁고 소중한 느낌이 가득해진다. 부자간의 짝짜꿍이 잘 맞아도 이렇게 잘 맞을 수 없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189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인지 모른다.

권력의 끝

196 사마천의 <사기>교토사주구팽곧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요리해 먹는다는 말에서 유래한, 권력의 비정한 뒤통수치기를 나타내는 이 말은 이미 비유도 아니다. 권력을 잡은 자의 마무리 과정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한마디에 쓸쓸한 제 인생을 깊은 한숨과 함께 무상한 세월로 돌려보냈다. 그것이 어찌 어제오늘의 일이겠는가? 이미 사마천의 시대부터 변함없는, 비정의 극치를 달리는 원칙이다. 권불십년이라, 거기서 예외가 될 사람 또한 없다. 최소한 그 권력을 좋아하고, 함께 쫓아다닌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사냥개 신세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토사구팽이라는 말 자체가 별 의미가 없는 말처럼 일상이 되는 권력의 장을 볼 때마다, 구역질이 난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 나도 그 안에 있게 된다면 같은 사람이 될까?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존재하며 몸 따로, 생각 따로 일까? 후자가 더 나쁘다.


204 전쟁이 끝나 시대가 안정되자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다른 데로 흘러갔다. 그 가운데 가장 걸리는 존재가 전쟁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전쟁 때에 절대적이면서 평화가 돌아오면 껄끄럽기만 하다. 토사구팽의 칼은 바로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205 그것은 신라 통일 후의 화랑들이 걸어갔던 비참한 말로인데, 세간을 떠나 승려가 되는 경우는 차라리 점잖은 은거이기에 무상한 세상의 인정을 훌훌 털어 벌릴 수 있었거니와, 한편에서는 그들이 지닌 재주를 파는 광대에 버금갈 예인이나, 급기야 귀족 부인들의 노리개 감으로 전락한 남창이 되었다는 데에서, 우리들의 눈은 실상 당혹을 넘어 경악에 어지럽다. (중략) 화랑은 바로 전쟁 영웅 그들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신라 통일의 8은 화랑이 차지해 마땅하다. 그런 그들이 예인이며 남창이라니? 믿지 못할 일이지만 통일 이후 화랑 출신들이 걸어갔던 쇠락의 길을 하나하나 찾아보면 한편 수긍이 가기도 한다.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는 실권을 잃은 종이 호랑이로, 무리들은 주인을 잃은 처량한 신세로 이리저리 내쳐졌다. 철저한 토사구팽이다.

>꽃도 피지 못하고 죽어간 이들.


211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을 설명하지니 이면을 더듬게 된다. 그것은 바로 화랑 출신들의 토사구팽이다. 신라 통일을 환성한 문무왕과 그의 아들 신문왕을 지나 효소왕에 이르면 이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 한 단면을 죽지랑의 이 사건으로 읽게 되는 것이다.

212 그러니 이 또한 김유신의 경우처럼 사후약방문에 불과할 뿐이다. 이미 사회에 이르는 분위기는 저만치 먼저 가고 있고, 조정의 권력자 또한 그것을 암암리에 조장하면서, 슬슬 여론의 눈치나 보려는 계산된 엄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후약방문의 유래가 이때부터라니 참 쓸쓸하다. 시대가 변하고 과학과 산업이 발전해 삶의 질과 교육의 질이 높아져도 이런 것은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인간의 본성 중에 한 부분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213 가 버린 봄을 돌이키자니 울고 싶을 따름이다. 더불어 심신을 수련하고, 죽을 각오로 누비고 다니던 전장의 피비린내와 말없는 산천이 떠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님 그리는 마음은 다북쑥 구렁에서 잠을 자야하는 현실의 고단함, 또는 이 생을 마치고 돌아가면 한 줌 흙 위에 피어날 풀과 꽃들만도 못한 무상함 앞에서 슬픔만 더할 뿐이다.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228 그가 알려 준 방법은 강원도의 힘이 아니라 한마디로 여론의 힘이었다.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는 말은 원문에서 중구삭금이라 표현되어 있다.


첫 성전환증 환자

234 실명한 딸을 위해 향가를 지어 간곡히 기도하는 희명, 자기 손바닥을 뚫어 새끼줄에 꿰고는 필사적으로 염불하는 욱면이 그 시대 사람인가하면, 땅 속에서 사방불을 캐내고, 황룡사에 종을 만들어 건 이가 경덕왕이다.


247 구물거리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삶이 보잘 것 없는 백성이로되, 다스리는 자의 따사로움을 알고 믿고 따른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또한 백성이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이것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250 오늘날 이런 증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법적으로 성전환을 시켜주자는 주장까지 대두되어 있다. 양성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해 불법적으로 수술을 감행하는 숫자가 한국에서도 암 수술 환자 다음으로 많다.

>불법적 수술을 감행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암 수술 환자 다음으로 많다니. 가히 충격적이다. 그렇다면 불법적이지만 수술대 위에 오르지 못하면서 양성화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다는 것인가? 참으로 가혹한 현실이다. 난 그래서 홍석천의 용기와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에 감탄의 박수를 보낸다.


왕이 되는 자

253 성공하면 충신이요 실패하면 역적인 것이 쿠데타다.

>성공과 실패의 모든 것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인 것 같다.


261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란 차라리 새로운 나라를 열기보다 더 힘든 일이다.

267 경문왕은 겉으로 보기와 다르게 결코 순탄치 않은 왕 노릇을 했는지 모른다. 그 자신 아무리 덕을 갖추었다 한들, 이미 시대가 급격한 소용돌이 속에 빠졌는데, 늘 행운만 따르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서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 경문왕이야말로 그런 비극적 세계관의 주인공이다.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조차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신 사람-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직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경문왕의 모습에서 두려움, 불안함, 극도의 초조함이 보인다.


나라가 망하는 징조

269 한 집안이 그렇고 사회가 그렇듯이, 나라도 흥하고 망하는 데 절대적 시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을지언정, 한번 일어나면 한번 사그러지는 불꽃처럼 대체로 흥망성쇠를 유전하기 마련이다. 과학적 증명이나 운수소관을 따지기가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270 무엇이 올바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자에게 옳은 충고란 쇠귀에 경 읽기도 아니다.

270~271 찼으니 이지러지는 달에서 우리가 읽는 역사의 유전이 감상적으로만 흘러서는 곤란하다 해도, 한 왕조가 들어서서 천 년 세월을 보냈다면 이제 끝을 보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럴 징조를 수없이 보여 주는 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권력자가 애꿎은 목숨만 앗아갈 때,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보다 실로 더 억울한 일은 따로 있다. 백성이야 어차피 어떤 나라가 서도 백성, 제 정권 지키자고 혈안이 된 자들에게 당하는 백성의 희생을 우리는 진정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272 시절은 봄이 오고 여름이 왔으되, 어지러운 세상은 뜻밖에 펄펄 휘날리는 눈 속에 잠겨 간다.

275 이제 효용 가치를 넘어 또 다른 위협세력으로 떠오른 장보고를 다른 신하들이 견제해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배반과 배반, 속임과 속임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말년이다. 그것은 곧 실제 상황으로 벌어진다.

276~277 염장은 한때 장보고와 같은 편으로 신무왕의 반란을 도운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장보고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다. 거기에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의 야심 밖에는 아무런 목적도 보이지 않는다.

284 신라 헌강왕대는 사치가 극성했지만 바야흐로 기울어 가는 시기였다. 그 같은 사회는 필연코 성적으로도 문란하기 마련, 엄연한 유부녀가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는 이 장면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처용의 노래와 춤은 그 같은 비극 앞에서 체념한 것일까, 에둘러 꾸짖은 것일까? 일연은 역사적 사실로서 광란스런 왕들의 혈전을 쓰는 것보다, 민간에 전해지는 한 토막으로 더 실감나게 당시 모습을 전해 준다. 그것이 <삼국유사>.


286 나라가 망하는 징조를 무슨 신나는 일이라고 장황히 적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기미를 보아 사리를 판단하는 법이다. 시절은 바뀌었어도 사람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든 잘 되고 잘못되는 징조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거기서 기미를 읽어내라는 간절한 충성으로 보인다.

지는 해 뜨는 해

287 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맥경화 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들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피가 수혈되지도 못했다. 원성왕의 독서삼품과가 실패로 돌아간 데서 우리는 그 같은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정치인이 정치를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말로는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위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다들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탄탄히 하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국민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리그, 하지만 명목은 국민. 그들의 욕망 때문에 정체되고 둔화되는 현상이 시간이 흘러도 계속되는 지금, 권력에 대한 욕망은 어쩌면 본능처럼 강한지도 모르겠다.

289 왕거인이 진범은 아닌 듯한데, 정작 노가바를 누가 지었는가 알려 하기보다, “그가 아니면 누가 이런 문장을이라고 단박에 지목하여 철창에 집어넣은 그 사회의 꽉 막힌 위정자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재주를 갖고 태어났어도 시대를 잘못 만났으니 이 운명 또한 슬프도다.


302 나 또한 앞서 비슷한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백성의 입장에서야 누구의 백성이 된들 무슨 상관이랴? 더욱이 넘쳐나는 새로운 힘으로 나라를 잘 이끌어 백성의 삶을 더욱 윤택해질 교체라면, 어느 개인의 사유물처럼 정권을 휘둘러 무고한 희생만 초래하는 것에 비길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하늘의 뜻이요, 왕조 사회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백성의 힘이다.

303 김부식의 사론으로 넘어가 보자. 조선조에 들어 김부식은 사대주의에서도 민족적 주체성에서도 모두 공격을 받았다. 완벽한 중국 중심에 빠져든 한편의 유학자들은 그를 얼치기 사대주의자 정도로 보았고, 실학의 바탕에서 우리 고대사를 새롭게 보려 했던 다른 한편의 유학자들은 민족의 주체성을 모르는 지식인 정도로 보았다. 살아 있다면 김부식의 처지는 참으로 난처하겠다. 특히 이런 사론에서 밝힌 자신의 견해가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니, 차라리 쓰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쩌면 글을 쓴다는 것은 꼭 해야한다는 사명감이 전제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것이 없다면 작은 돌에도 큰 상처로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304 그러나 불교의 법을 섬기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였다. 마을마다 탑이 즐비하게 서고, 여러 백성들이 중의 옷을 입고 숨자, 군대와 농업은 점차 줄어들어 나라가 나날이 쇠약해졌다. 어찌 어지러워 망하지 않으리요.

>빛이 강하면 음지가 생기는 법이다. 항상 양면의 존재를 인정하고 살펴야 할 것이다.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307 사실 고구려의 전성기만큼이나 우리 역사가 중국에 떳떳한 적이 드물었으며, 일본의 초기 왕실이 백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성립되어다는 사실을 상정했을 때 그 아쉬움은 커진다.


311 그러므로 웅진, 부여 천도 뒤의 백제 역사는, 특히 그것이 왕실과 관련된 것일수록, 늘 일본과의 교섭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

325 한반도로부터 많은 문화를 받아들이고 드디어 자신들의 특성을 드러내는 시대, 이 때를 아스카문화라 한다.

325 종주국 백제의 멸망 후 7, 국호의 변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백제에 대한 일본 왕실의 독립 선언으로 보인다.

326 한일동족설을 연구한 홍 교수는 이 대목을 보고 놀랐다고 했지만, 흔적 지우기로 친다면야 이보다 더 한 일도 있었고, 지워질 것도 아닌 바에 저들이 줄기차게 되풀이하는 비슷한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나는 그것을 일본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 독립의 비원으로 본다. 수도를 교토로 옮기면서 헤이안 문화를 열었던 환무왕도 백제계였다고 한다. 200여 년 뒤, 지금은 일본의 중심인 관동 지방으로 처음 진출하여, 첫 막부 카마쿠라를 만들고 쇼군이 된 이도 백제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을 이제 모두 일본인이라고 말하지 백제인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327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기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누구도 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


견훤, 비운의 영웅

347~348 그런 마지막 왕으로서 백제 사나이의 한평생은 파란만장하기만 하다. 출생의 비밀은 복잡한데다, 후백제라 이름한 새로운 나라를 이끌어 가는 데에는 장애가 많았고, 결국 아들에게 몰려 뒷방 노인 신세로 몰락한 다음 그 아들을 원수로 삼아 이를 갈다가 등창에 걸려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한때 그의 라이벌이었던 왕건이 뒤를 돌봐주지 않았던들 그보다 더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인생이 참으로 허망하다. 한 나라를 호령했던 왕의 말로가 진실로 이렇단 말인가?


353 그러나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편으로 만드는데 능했다.

>예나 지금이나 민심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건만, 정치하는 사람들은 왜 모를까? 하기야 민중의 삶을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이가 어찌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으리오. 진심으로 낮추거나 섬기는 법을 배우는 이가 없는데.


356 “토끼와 사냥개가 둘 다 지치면 마침내 놀림을 받게 되고,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다 보면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신비의 왕조, 가야

369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고, 무너지지 않은 무덤이 있겠는가.”


378 먼 뱃길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 석탑, 그것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한다. 바람과 파도 속에서, 또 때로 찬란한 태양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인도를 받으며 건너는 고해가 있다. 그 길을 지켜 주는 석탑.

>이런 석탑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리오.


382 김춘추와 문희의 민족의 결혼이 낳은 아들 문무왕. 삼국 통일을 완성한 그는 신라와 가야 두 민족간의 결합으로 태어났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진정으로 준비된 자가 아니던가.


384 이른바 일본의 사학자들이 제기하는 임나일본부설이다. 이 시기에 가야 지방에는 왜의 식민지가 있었으며, 그 식민지의 이름이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전분부 40여 년 동안 한반도를 식민지 경영한 일본은 이 학설로 그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차라리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있다고 큰소리 치라지.


불교로 보는 역사

386 불교를 받아들여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가 나라의 흥망성쇠와 곧바로 연결된다는 생각이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록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운 신라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춘 나라라고 보는 것이다. (중략) 나는 일단 이것을 일연이 지닌 불교역사주의라고 명명해 본다.


399 봄빛이 아직 두루 돌지 못했을 때 매화는 핀다. 이런 자연의 섭리는 곧 인간 세계의 그것으로 원용되고 있다. 눈 덮인 땅에 봄빛은 돌지 않았지만, 매화꽃과 같은 존재로 모례는 등장한다.

순교의 흰 꽃 이차돈

402 신라의 불교는 신라 한 나라에만 그치지 않는 한국 불교의 화두다. 한국 불교라는 강물은 신라에서 물꼬를 터서 흘러 나왔다. 일연은 그 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407 오늘 우리는 사실을 따지는 것이 중요할까, 사실이 무엇이건 거기 실린 순교한 자의 마음을 고이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할까?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455 나는 사실 불교신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교와 가까워진 것은 전적으로 <삼국유사> 연구 때문이었는데, 신자이건 아니건 오랜 전통 속에 우리들의 피와 살이 된 불교의 뿌리는 암암리에 깊다. 더욱이 절은 성소이면서도 낯익은 우리 건축의 한 틀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이라, 특히 조그만 암자에 들렀을 경우, 마치 고향 마을의 옛집에 찾아온 듯한 포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나도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저자의 느낌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사대천왕 때문에 무서울 때도 있지만, 그 곳만 지나면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해 진다.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440 또는 문수보살을 비유해서 세상의 어린 아이에게 부모가 있는 것처럼, 문수는 불도를 닦아나가는 데 부모라고도 한다. 부모는 자식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자다. 문수도 성불의 그 같은 절대적 조력자라는 뜻이리라. 나아가 문수 신앙은 대체로 이런 문수보살의 성격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44 성인을 성인인 줄 알고 만난다면 오죽 좋으련만, 우리는 본질을 두고도 늘 외곽만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리인 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나는 그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고 말한다.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직관과 현명함이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이 허락되지 않기에 최대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450 보천이 흘린 눈물은 서러움의 눈물이 아니리라. 도의 경지에 맛을 본 이가 세속으로 돌아가기 싫어했을 뿐이니, 신하들을 따라 왕궁으로 가야 하는 효명이 못대 아쉬운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왜 이 부분에서 1년 후의 나의 모습이 생각날까? 1년을 알차게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시간 후의 나의 삶이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삶이 광활한 대지를 지나는 것처럼, 나에게 큰 물음음표를 던질 것이고, 나는 그곳을 쏘다닐 것이다. 굶주린 이리처럼. 삶은 끊임없이 무엇을 던져주는구나!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456~458 “마음이 찾아갈 정처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 누구도 한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업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할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나도 이런 정처가 있었다. 한동안 마음이 힘들 때면 자주 찾아 가게 된 곳이다. 바로 용문사에 있는 은행나무이다. 천 년이 넘는 시간을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 얼마나 모진 풍파가 있었겠는가? 그 나무를 처음 보았을 때 나의 작은 설움이 부끄러워서 그리고 그의 인고가 헤아릴 수 없어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곳에서 종종 나의 마음을 씻기도 하고, 언약을 하기도 하고, 그저 넋 놓고 바라보고 오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곳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그곳에 발길을 돌리지 않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정처가 필요 없다는 것은 더 행복한 것일까?


471 그 두려운 눈빛을 보고도 총을 쏜 자들은 인간이 아니다, 짐승도 아니다. 정작 누가 총을 쏘았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지만, 양쪽 모두 열렬히 신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그 신은 무엇을 가르치길래 그토록 매몰찬 짓들을 하는 것인지, 나는 그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신의 이름을 빌리지나 말지. 그들의 욕망에 신이라는 이름으로 씌여진 가면이 불쌍하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475 하물며 부처님을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아야지.

485 그러나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다면 사람들이 눈이 두려워 참 보살행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참 보살행이란 중생의 곤고한 처지에 동참한다는 것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낙산사의 힘

504 밥이 끓는 솥단지 앞에서 따뜻한 불을 쬔다. 잠깐 잠이 든 사이, 온갖 영화와 패배를 맛보는 꿈을 꾸고 깨어보니 밥이 되어 있었다는데, 한 세상 사는 온갖 영고성쇠가 한솥밥 끓는 사이에 불과하더라는 이 절묘한 비유.

>그러게 인생이 찰나에 불과하거늘, 만년을 살 것처럼 고민을 안고 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530 세상에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것과 너무 커서 보이진 않는 것이 있다.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원효는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530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은 사람이라고.

531~533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근 그것을 감당했고, 그 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 준 사람이다.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574 그렇기에 일연이 제목에다 귀축제사라 한 귀는 깊은 의미를 지닌다. 가고서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결국 그 곳이 진정 돌아갈 곳이 아니겠는가.


밀교의 한 자락

603 시구렁창 같은 속세일지라도 거기서 뒹구는 것이 세상살이의 즐거움일까, 그러기에 출가는 번뇌로부터의 결별이면서도 오히려 슬프게 다가오는 것일까? ‘출가한 이는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다라는 선입견이 우리에게는 있다.

>속세에 살고 있는 우리만의 선입견이 아닐까? 출가한 이는 많은 번뇌를 지고 사는 우리를 불쌍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듯 하다.


604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 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혜통이라 했다.

>혜통의 마음이 느껴진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누군가의 죽음을 기초로 하고 있다. 삶은 잔인하다. 존재의 의미가 없는 삶이 있을까? 다 저마다 소명을 갖고 세상에 태어났으리라. 인간의 시각으로 보고 판단하는 편협함에 참 많은 죄를 짓고 사는 느낌이다.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656 사람들이 다니는 큰길가에서 외치듯이 기도하는 무리들을 보고 예수님은 말한다. “하늘 나라에 이르거든 하느님은 저들을 결코 모른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첨언하지 않았는가, 골방에 숨어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눈물 흘리는 자에게 하느님은 다가올 것이라고.


670 문제가 생길 때는 신라가 그랬고 고려가 그랬듯이, 성인의 가르침도 소용없는 절망의 순간이 온다. 지금 우리 시대의 풍속은 거기서 얼마나 멀까? 성인조차 나타나지 않는,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으로 경계 삼을 사표를 세울까?

일연, 혼미 속의 출구

728 밝음이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은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일연의 개명 과정에는 숨어있다.


728 그러나 우리는 일연을 그 생애의 화려한 경력 때문에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를 존경해 마지않는 것은 무신 정권기와 몽고전란기를 헤쳐가면서 그가 보여 준 삶의 궤적 때문이다. 비록 작은 나라로 힘없는 자의 설움을 당하면서도, 그는 민족의 자존을 염두에 두었던 사람이다.

>일연이야 말로 민족의 자존을 세운 사람이 아닌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말 한마디, 행동하나 선뜻 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을 비웃기라도 하는양 일연의 손끝에서 <삼국유사>는 보란 듯이 태어났다. 한방 제대로 날린 통쾌함이 아직도 짜릿하다. 현 시대에도 일연처럼 글로벌화 속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민족의 자존을 지킬 줄 아는 시선이 있었으면 좋겠다.


3 내가 저자라면

연구원이 된 이후 가장 기쁜 순간을 들라면 <삼국유사>를 만났을 때이다. 이 책 한 권을 읽음으로써 조금이나마 마음의 빚을 해결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무지에서 오는 부끄러움과 그 부끄러움을 줄이기 위해서는 읽어야 한다, 알아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인듯 하다. 겨우 책 한 권 읽음으로써 무엇이 달라질까 싶지만, 사실 오래도록 간직한 숙제를 하나 해결한 느낌에 가슴 한 구석이 후련해 진다.

<책의 목차와 전체적인 뼈대>

기이(紀異)

이 땅의 첫 나라/ 고구려와 북방계/ 신라와 남방계/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밤에 찾아오는 손님/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권력의 끝/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첫 성전환증 환자/ 왕이 되는 자/ 나라가 망하는 징조/ 지는 해 뜨는 해/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견훤, 비운의 영웅/ 신비의 왕조, 가야


흥법()불교로 보는 역사/ 순교의 흰 꽃 이차돈

탑상(塔象)산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낙산사의 힘

의해(義解)운문사 이야기/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의상, 화엄의 마루/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신주(神呪)밀교의 한 자락

감통(感通)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피은(避隱)숨어 사는 이의 멋

효선(孝善)불교가 보는 효도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일연, 혼미 속의 출구 


<감동적이었던 장과 절>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150 그러나 신라의 경우, 비록 수용이 늦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철저히 자기화 되어 정착되었으므로, 생경한 외래 사조에 휘둘리지 않았다.


견훤, 비운의 운명편을 보며 인생 무상을 느꼈다. 많은 것을 이루었고 누구보다도 용맹한 장수였지만, 결정적으로 민심을 얻을 수가 없었고, 아들한테까지 버림을 받다 시피한 한 장수이며 임금의 인생이 참으로 씁쓸하다. 어릴 때 위인전으로만 읽었던 견훤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었던 기회가 처음이라 더 감회가 남다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비의 왕조 가야에서 나오는 임나일본부설이 참 기가 막히다. 이런 엉터리 이론을 내세우는 근거를 우리나라에 정확히 반박할 수 있는 사료가 없다는 것이 더욱 안타깝다.

<보완점>

별다른 보완점을 찾지 못한 것이 흠일까? 나 같은 독자를 위해서 쉽게 표현해주고 거기에 담담한 침묵이 느껴지는 사진으로 많은 말을 해준 글쓴이와 사진작가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현하고 싶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많은 지식인의 특징은 말만하고 행동을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고운기 저자에게서 일연의 모습이 느껴졌다. 강인함과 집요함, 그리고 사명감까지. 오랜 시간을 지나 이 책이 나에게 들어오기까지 과정이 참으로 애 닳고 감사하다.


꼭 한 가지만이라도 고르라고 한다면 이것을 이야기 하고 싶다. 기이,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에서 이야기하는 소제목을 보면 쉬운 단어로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기 위해 애쓴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대중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한 노력이 살짝 가볍게 만든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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