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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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서점을 둘러보다가 버트런드 러셀의 자서전 <인생은 뜨겁게(Autobiography by Bertrand Russell)>와 만났습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 문장을 보고 나는 이 책을 사기로 결정했습니다. 책의 첫 문장에 감전(感電)되었으니까요. 내게 이런 경험을 준 자서전이 몇 권 있습니다. 두 권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칼 구스타프 융의 자서전 <회상, 꿈 그리고 사상(Erinnerungen Tra"ume, Gedanken von C. G. Jung)>입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
나를 감전시킨 두 번째 자서전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Report to greco)>입니다. 카잔차키스는 이 책의 ‘작가노트’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영혼의 자서전>은 자서전이 아니다. 나 한 개인의 삶은 오직 나에게만 지극히 상대적인 약간의 가치를 지닌다. 그 삶에서 내가 인정하는 가치라고는 그것이 지닌 힘과 끈질긴 인내심에 의존하여, 내 나름대로 ‘크레타의 경지(境地)’라고 이름지은 가장 높은 정상에 다다르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려는 노력이다.”
세 사람의 자서전은 첫 문장이 의미심장합니다. 러셀은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으로 자기 삶을 함축했고, 융은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로 자기 생애를 요약했으며,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고향으로 상징되는 ‘가장 높은 정상에 닿기 위한 투쟁’으로 스스로의 삶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이 자신의 삶을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생이 짧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쉬운 삶, 평범한 삶을 살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러셀과 융, 그리고 카잔차키스는 외모만큼이나 성격이 다르고 전문 분야도 제 각각입니다. 강한 개성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각자의 분야에서 누구와도 닮지 않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스타일적인 측면에서 첫 문장을 중시하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첫 문장이 첫 인상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첫 문장에서 매력을 발산하고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려고 합니다. 그에 비해 어떤 문장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문장은 대부분 글쓴이가 가장 하고 싶은 말,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 혹은 자기 삶과 사상의 핵심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런 첫 문장은 한 권의 책으로 다가옵니다. 한 문장이 한 권의 책으로 보입니다. 사과 씨에 사과 나무의 전체성이 온전히 들어 있듯이 한 문장 안에 한 사람의 본질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첫 문장은 책의 길잡이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문장을 보고 책을 구입해도 후회할 일이 없습니다. 책 한 권의 정수(精髓), 한 사람의 골수(骨髓)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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