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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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의사선생님이 제일 싫어하는 나이는 40대라고 한다. 눈의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노안이 시작되셨군요.”라는 진단을 내리면 펄펄 뛰며 성질을 내고는 돌팔이 취급을 하며 간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6개월 정도되면 그 환자를 다시 볼 수 있다고 한다. 한 꺼풀 풀 죽은 모습으로 안경을 맞추러 온다는 것이다.
나의 신체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부분은 눈이다. 남들은 짙은 쌍꺼풀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의 자랑은 좋은 시력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좌우 모두 2.0이어서 한때는 별명이 ‘Miss eye’이기도 한 시절이 있었다. 길거리에서 내가 탈 버스의 번호를 제일 먼저 알아보는 사람도 나였고, 먼 거리에서도 작은 전화번호를 알아볼 수 있었기에 항상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눈이 불편하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병원에 가면 안약을 처방해주곤 했다.
연구원 1차 레이스를 준비할 무렵 눈이 너무 아프고 글씨가 겹쳐 보이는 증상이 나타났다. 그전과는 다른 증상에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얼마 전에 점쟁이가 눈 조심하라고 한 이야기도 번뜩 떠올랐다. ‘혹시 눈에 커다란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알베르토 망구엘처럼 장님이 되는 것은 아닌가? 나는 책도 몇 권 읽지 않았는데 억울하다.’ 등 오만 가지 잡스러운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괜찮겠지 위로하다가도 얼마 전까지 또렷하게 보였던 책의 제목이 보이지 않는 날이 계속되면서 불안은 가중이 되었다.
안과로 유명한 병원을 갔다.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나 또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걱정을 가득 안고 갈수밖에 없었다. 의사선생님한테 혼난 기억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가서 진찰을 받을 때마다 “왜 이제서 오셨어요? 일찍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라는 말을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다. 몸은 아주 예민한데 주인이 둔해서 이상을 알아차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란다. 한번은 열을 쟀을 때 39.4도가 나온 적이 있었다. 일주일전부터 계속 된 열이었는데 그렇게 높은지 나도 몰랐다. 의사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동안 많이 아팠을 텐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이런 일을 많이 겪어본 탓에 병원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나도 모르게 겁부터 덜컥 난다. 그 뒤 항상 몸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지만 인내심을 가장한 미련은 때때로 불안의 근원이 된다. 이번에도 그런 소리를 들을까 봐 내심 겁이 나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눈은 한쪽만 실명을 해도 장애율 50%로 인정을 받을 만큼 몸에서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하고 의사 앞에 앉았다.
“나이도 젊으신 분이 어쩌다가…” 의사의 이 말 한마디에 입이 바짝 마른다.
“선생님 왜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노안이시네요.”
“겨우 노안이에요? 그거면 괜찮아요.”
나는 활짝 웃었다. 백내장, 녹내장등 이상한 의학용어를 들을 줄 알았는데 겨우 노안이라니, 남들보다 일찍 온거려니 생각하면 되고, 나이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따르는 이치라고 생각을 하니 내 얼굴은 나팔꽃처럼 활짝 피었다. 나의 웃음에 의사의 당혹스러움이 스친다. 노안이라는 말에 이렇게 좋아하는 환자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 뒤 몇 개월 동안 병원에서 처방해준 안약을 넣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이것이 없으면 한 시간도 책을 보기가 힘들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 종종 깜박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날은 도서관과 집을 부지런히 왔다갔다 하는 횟수가 늘어난다. 운동할 시간도 없는데 이렇게라도 운동을 해야지 하며 기쁜 마음으로 오간다. 요즘은 날이 더워져 선풍기 바람을 쐴 일이 많이 있는데 눈이 건조한 사람들에게 바람이 천적이라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도저히 눈을 뜨고는 선풍기 바람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생활의 불편함은 이것 말고도 또 있다. 예전에는 밤 늦게 까지 앉아 있는 것이 힘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정신이 말똥말똥해도 눈이 아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억지로 잠을 청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하루를 보내고 밤처럼 맞이하는 눈의 피로는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것 같은 통증이 동반되는데, 이때는 약도 전혀 소용이 없게 된다.
이 덕에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명상을 하려고 눈을 감은 것은 아니지만 감은 김에 명상을 하면 시간의 효율도 좋아지고 일상 생활에 간간히 정리하는 시간을 끼워 넣을 수 있어 좋다. 그리고 저녁으로 일을 미루는 버릇을 고치고 있는 중이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이제는 24시간 중에 저녁은 온전히 쉬는 시간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내 몸의 지시를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하나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의 나를 기억하며 억지를 쓰고 속상해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한 시도 같은 사람으로 살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60조개에서 100조개정도 되는데 매일 일정한 양의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생겨난다고 하니 인간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은 창조될 때부터 내재된 프로그래밍인 것이다. 자연스럽게 나는 흰머리와 늘어나는 주름에 대해서도 인정하면 그 다음부터는 편안해 진다. 하지만 자신을 수용하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다. 예전의 모습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새로운 모습이 당혹스러움과 함께 찾아올 때가 있다. 자신에 대한 수용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심까지도 높여준다.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시간이 주는 선물이 아닐까? 수용을 잘하는 사람의 얼굴은 편안하다. 40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이제는 나를 넘어서 타인까지 수용해야하는 일임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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