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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1일 22시 47분 등록

그의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밖에 없던 세상에 나의 이야기가 생겨났다.

그리하여 나의 역사, 나의 문명이 존재하게 되었다.

나의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_ 구본형


2014. 6. 1


#1. 내 역사는 내가 쓴다.


삶은 오늘이 모인 덩어리다. 오늘 다 살아내지 못한 삶이라 해서 미뤄두었다가 다음날 꺼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기록되어야 한다. 기록되지 않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 나는 기록의 역사를 존중한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는 없다. 소소한 개인의 역사라 하여 위대한 인물들의 역사와 차별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사라진 문명이 되지 않는 것, 나아가 남은 시간을 찬란한 문명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개인사를 기록해야 할 절실한 이유다.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완성해 낸 사마천은 그의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 천한 노복이나 하녀조차도 능히 자결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저와 같은 사람이 어째서 자결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고통을 감내하고 구차하게 더러운 치욕 속에 있으면서도 마다지 않는 까닭은 제 마음 속에 다 드러내지 못한 바가 있어, 비루하게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경우에 후세에 문채(文彩)가 드러나지 않을 것을 한스러이 여겨서입니다.” 후세에 이름한자 남기지 못하고 비루하게 사라져버릴 자신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디게 했다. 


또 한분의 걸출한 인물의 흔적을 더듬어 보자. 다산은 긴 유배 생활동안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살얼음 같은 날들의 공포를 집요한 성실함으로 승화시켰다. 저술에 집중하느라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을 정도라고 하니 그의 성실함은 지독하리만큼 모질다. 그는 어째서 이렇듯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던 것일까! 아들들에게 공부와 독서를 권면하는 편지에서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은 단지 사헌부의 계문과 옥안만 믿고서 나를 평가할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취급받겠느냐?”라며 걱정했다. 직접적이고도 현실적인 그의 고뇌와 두려움이 녹아있는 대목이다. 당신의 존재가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스러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오히려 죽음 같은 공포를 넘게 했던 모양이다.


사마천과 다산은 역사의 중심에서 중심의 역사를 기록했다. 역사의 변두리 가장자리에 있는 평범한 개인들의 이야기는 누가 대신 기록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역사가 사라져야 할 이유는 없다. 변방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은 바로 이들의 이야기다. 


시처럼 살고 싶었던 변화경영 사상가 구본형은 변방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쓰게 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면서 그 책머리에 이렇게 남겼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과거를 넘어 미래를 향한 기록이다. 즉 내 인생의 다음 장면을 그려보기 위한 시도이다. 자신에 대해 쓰다 보면, 해보지 못한 안타까운 일들이 밝혀지고 절실해진다. 이때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은 그 일들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기회로 전환된다. 삶을 바꾸는 실천으로서의 자기 경영은 바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자신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그는 문하들과 함께 <나에 대한 이야기(me-story) 프로젝트>를 비중 있게 진행했다. 평범한 개인에게 있어 개인사의 편찬은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 본인들의 과업이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쓸 것을 독려했던 것이다.


나는 사마천의 치욕과 다산의 두려움 사이에서 벼락같은 공명을 느꼈다. 더불어 밀려오는 안타까움과 속수무책에 떨어야 했다. 이분들은 쓰고 싶어서 쓴 것이 아니라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쓴 것이다. 의지가 글을 밀고 나간 것이 아니라 글이 그들을 끌고 갔다. 그래서 속수무책이라고 한 것이다. 신화학자 조셉 켐벨은 이런 것을 두고 ‘천복’이라 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분들의 터럭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의 어깨너머로 동냥한 것을 시늉 정도는 해 보아도 좋지 않겠는가! 


나는 내가 쓴 역사가 ‘먹고 싸다가 죽었다.’ 라는 한 줄의 역사이길 바라지 않는다. 수단과 방편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를 쫓아 매일의 삶 그 자체로 실험하고 실증하며 그렇게 삶을 담아낼 것이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에 주목하여 성찰하고 이것을 삶 속으로 끌어와 소박하지만 빛나는 하루를 빚어낼 것이다. 그리고 이 삶을 기록하여 실천적 증거로 삼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 ‘나의 이야기’를 쓰겠다.



#2. 가장 빛나는 삶의 기록


오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담아내고 싶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세상과 내가 만드는 역사를 사진으로 쓰고 있다. 내 방식으로 만나는 세상을 필름에 남기는 작업인 것이다. 글을 잘 썼더라면 펜을 들었지 카메라를 잡지 않았을 것이다. 사각의 프레임 안에 세상을 가두는 작업은 내겐 경이로운 작업이었다. 그 대상이 풍경이건 사람이건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순간 파인더 너머의 세상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파인더로 본 세상에 매료되어 카메라를 만지작한지도 어는 덧 강산이 두 번쯤 변할 만큼이나 되었다. 잘 만들어진 물건에 대한 기계적 관심과 주변의 소소함 들을 묶어두고자 시작한 것이니 예술 할 생각은 애시 당초 없었다. 내게 카메라는 그저 모양이 다른 기록의 도구다. 그래서 내게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이었다. 찍은 것이 아니라 쓴 사진은 글을 읽듯이 읽어야 한다. 잘 쓴 글이 잘 읽히듯 잘 쓴 사진은 읽기에 좋다. 화장과 조탁에 의존한 글이 조악하듯 기교와 보정이 심한 사진은 조악하고 힘이 없다.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글이 진솔하고 소박한 글에 비에 비해 빨리 물리고 씹는 맛이 덜하듯이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사진이 진솔하고 소박한 사진에 비해 빨리 물리고 씹는 맛이 덜하다. 글을 위한 글이 읽히지 않듯이 사진을 위한 사진은 뻑뻑해서 삼키기 힘들다. 글이 함부로 편집되면 안 되는 것처럼 사진 역시 사진 이외의 것으로 편집되거나 치장되면 안 된다. 나는 프레임 안에서 다루어지는 작업이 삶의 기록이길 바랬다. 글이 짧으니 사진으로 쓰고 모자란 것이 있으면 글로 보태고 내게 기록이란 이런 것이었다. 더불어 사진 찍기는 내게 더 없이 행복하고 즐거운 놀이였다. 사진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속수무책일 테지만 말이다.


나는 카메라를 들면서부터 특별한 책임과 함께 순간순간 쾌락의 절정을 경험하곤 했다. 대상의 일부, 삶의 일부가 될 수도 있겠는데 그것이 프레임 안으로 녹아들어 투영되는 순간 난 셔터를 끊는다. 순간이다. 길어야 30분의 1초! 그 짧은 순간은 마치 억겁의 무게로 필름이라는 플라스틱 조각에 맺힌다. 시간을 잡아 둘 수 있다는 허망한 소망은 이렇게 실현되는 것이다. 이로써 절대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그들 또는 그것의 시간은 24×36 mm의 조그만 플라스틱 조각에 영원히 갇혔다. 역사를 소유한다는 것에 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다른 것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내게 특별한 즐거움이었고 경이로움이었다.


나는 기록하는 인간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은 왜이토록 모질게 기록에 집착 하는 것일까! 기록은 유전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은 불멸의 영속을 위해 자신을 기록한 유전자를 다음세대에 전달한다. 이렇게 해서 나는 다음세대에 복기된다. 기록의 속성을 이토록 명징하게 증명하는 것이 또 있을까? 결국 인간은 기록의 도구로써 유전자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문화적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림을 그리고 문자를 만들었으며 종이를 만들고 드디어 카메라를 만들었다. 사진은 결국 기록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에 다름 아닌 것이다.



#3. 일상 한 조각


그 동안 내가 카메라로 기록해온 몇 가지 작업 가운데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 온 것은 ‘일상 한 조각’이란 제목의 작업이다. 이 땅의 수많은 아빠사진가들 가운데 비교적 열심인 한명쯤 일 것이지만 이 작업은 내게 너무나 중요하고 일방적인 것이어서 마치 몸의 일부인 냥 곁에서 떠난 적이 없다. 감전된 듯 시작한 작업이었는데 벌써 십수 년이 훌러덩 지나버렸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늘 카메라를 끼고 살았다. 먹을 때도, 씻을 때도, TV를 볼 때도, 화장실에 있을 때도, 심지어 잠자리에 들 때조차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사람들이 산으로 들로 카메라를 메고 다닐 때 나는 생활과 아이들을 담았다. 부비고 깔깔대며 함께 뒹구는 이곳이 내겐 더 없이 좋은 우리들의 성소(聖所)였다. 옹알이를 하고 뒤집고 기어 다니고 작은 이가 뽀얗게 상아처럼 올라오는 모든 일들이 축제였다. 아이의 작은 변화에 촉각을 세우면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하룻저녁에 서너 통의 필름을 소모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주먹만 하던 녀석들이 그사이 자라서 유치원엘 가고 학교엘 가더니 어느새 제법 가슴과 엉덩이가 생겼다. 함께 목욕하고 뒹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애비는 마음이 초조하고 바쁘다.


1998년 한 여인을 만나 일생 가운데 가장 격정적인 시간을 보냈으며 2001년 그녀를 받들어 가정을 이루었다. 이윽고 토끼 같은 두 딸을 얻었으니 이 사건을 일컬어 스스로 저지른 일 가운데 유일하게 잘 한 일이라 뿌듯했다.

그 사이 큰 아이(다원)는 올해(2014년) 13살이 되었고 작은 아이(다윤)는 11살이 되었다. 

생긴 것이나 마음씀씀이가 엄마, 아빠의 장점을 고루 받은 큰 아이는 섬세하고 꼼꼼하지만 전체를 관조하는 눈을 가졌고 친구를 좋아한다. 활동적이고 관계 지향적이다. 리더기질까지 갖추었으니 이 녀석을 보면 제법 든든하다. 삼가고 배려하는 힘을 조금 더 키웠으면 좋겠다 싶긴 하지만 애비의 부질없는 욕심인 것을 안다.

속살이 날 많이 닮은 작은 아이는 섬세하고 꼼꼼하고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가 깊다. 이 아이 속에는 도대체 뭐가 얼마나 많은 게 들어있는지 언제나 다채롭고 호기심 가득 찬 세상이 넘친다. 사랑이 넘치는 아이다. 슬픈 동화를 읽고 몇 날을 울 수 있는 아이다. 특별한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남겨서 남은 가족들에게 먹여주는 아이다. 펑펑 울다가도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아이다. 몸과 마음의 힘을 조금 더 키웠으면 좋겠다 싶긴 하지만 역시나 애비의 부질없는 욕심이다.

녀석들을 물고 부비고 뒹굴며 키웠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기저귀 한번 갈아 채워주지 못했고 쓰레기 한번 버려주지 못했지만 아내는 불평한번 없었다. 평소 난 아내가 천사일 거라고 생각했다. 여직 나랑 살아 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천사 말고는 없을 것이었다. 빠듯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스스로 몸을 녹여 아이들을 반듯하게 키워 냈으며 살림을 일궈냈다. 사내놈들이 하는 이런 저런 호작질 따위에도 언제나 응원해 주었으며 함께 하려했다. 특히 사진재료만큼은 언제나 부족함이 없도록 배려해 주었고 작은 집에 암실을 마련하는 것 까지도 기꺼이 수용해 주었다. 고쳐 생각해 봐도 난 천사랑 사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쓴 이 기록들은 전몽각 선생의 <윤미네 집>이란 사진집의 오마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큰 아이가 태어났을 무렵(2002년) 즈음으로 기억되는데 한참 사진에 심취할 무렵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우연히 선생의 홈페이지를 발견하고 무릎을 쳤다. 내 안의 이야기를 미리 풀어 놓으셨던 것이다. 가족의 일상을 담는 작업은 카메라를 든 사람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한 세대 앞서 살면서 같은 이유로 사진을 찍고 그 기록들을 책으로 엮어 놓으신 그리고 사진 한 장 한 장에 남아있는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신뢰가 가득한 가족들의 눈동자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감동이었다. 모니터가 아닌 책으로 보고 싶었다. 1990년 1000부 밖에 발행되지 않은 사진집이 아직 서점에 남아있을 리 없었다. 전국의 헌책방을 수소문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해를 넘겨 지났을 즈음 서울의 한 헌책방에서 이 책을 찾게 되었고 지인의 도움으로 구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궁하면 통하는 모양이다. “김정옥 동문에게, 몽각이가” 라는 친필 사인이 오롯이 남아 있는 이 낡은 사진집엔 1964년 큰 딸 윤미가 태어나면서부터 1989년 시집가는 날까지 26년간 한 가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이 책은 2010년 복간되어 이제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사진이 가진 힘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이야기다. 사진을 보는 순간 까마득하게 물러나 있던 기억들이 마치 막힌 보가 터지듯 쏟아진다.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아무리 찰나지간 이었어도 사진은 그것을 또렷하게 재생해낸다. 나는 이 기록을 10년마다 새롭게 펴낼 것이다. 새롭게 펴낼 때는 이전의 기록을 다시 추리고 새로운 10년을 추가하는 형식이면 좋을 것이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개인의 역사를 내가 아니면 누가 써 주겠는가. 내 역사는 내가 쓸 것이다. 그 사이 아이들이 자라서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장소는 갤러리가 될 것이다. 양쪽으로 이 기록들을 걸어두고 그 가운데로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가는 상상을 하면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삶의 조각들을 이어주는 일상의 황홀한 기록들이 필름과 함께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찬란한 기록이 될 것이다.


PS:

여기에 기록된 사진은 2002년 다원이가 태어나면서부터 20??년 결혼하기까지 ??년의 기록이며 모두 흑백필름으로 담겨진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로 보다 쉽고 빠르게 사진을 만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흑백필름을 고집한 것은 나름대로 ‘차별성’을 고려한 때문이다. 서툰 솜씨를 아날로그란 향수로 만회해 보고자 하는 얄팍한 의도와 함께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흑백필름으로 기록되는 아이들 가운데 하나일거라는 막연한 기대였다. 현상과 인화는 모두 개인작업실에서 직접 했으며 나는 이 과정을 몹시 즐겼다. 사진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내가 주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흑백작업을 고집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사용된 필름은 대부분 Tri-X 이고, D-76 표준데이터로 현상하였다. SLR 카메라가 있었지만 RF 카메라에 35mm 렌즈를 주로 사용하였다. 삼각대는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주) 언젠가 나올 책(가제: 일상 한 조각)의 머리말 초안이 되길 기대하며 이 칼럼을 썼다.


IP *.201.14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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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2 00:21:08 *.65.153.57

피울님과 앨리스의 공통점 발견!!

의미와 가치를 쫓아 시는 삶!!, 두 딸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아빠이자 엄마!!

피울님과 종종님의 공통점을 발견하며 은근 질투했었는데;;;; 드디어 발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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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2 13:30:41 *.94.41.89

오! 벌써부터 그 책이 기대가 됩니다 ^^* 예약주문 일빠요 ㅋㅋㅋ

저도 윤미네 집 같은 기록을 남겨보고 싶었는데 여기 진정 실행하시는 분을 만나고야 말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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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2 14:11:06 *.128.12.210

꼭 좋은 책일거라 생각합니다.

므흣한 순간 들이 가득한 좋은 책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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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2 16:22:52 *.196.54.42

음~ 무시무시한 칼럼! 매니아 다운....!!

뭐, 글 못쓴다더니 생판 내숭이네~


하여튼 <일상 한 조각>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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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2 18:27:21 *.113.77.122


흑백필름에 멋진 철학이 들어있네요

'서툰 솜씨를 아날로그란 향수로 만회해 보고자 하는 얄팍한 의도와 함께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흑백필름으로 기록되는 아이들 가운데 하나일거라는 막연한 기대였다. "


카메라로 쓴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일상 한 조각>이라는 책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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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4 16:58:44 *.219.222.75

진정 사진 매니아 이십니다.

삶과 사진이 분리되지 않고, 사진과 글이 매 마찬가지라는 피울님의 말씀이 감동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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