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에달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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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장_구달칼럼#9 (2014.6.9)
“오래 함께 부대끼니 우리 가족도 고슴도치 같애. 서로 찔러 상처를 주고 받으니.” 연휴 3일째 느닷없이 아내가 한마디 한다. 나는 사흘 연짱으로 쉬고, 아들은 선거일에다 개교기념일이 끼어 닷새간 휴가다. 보통 때 같았으면 어디 가족 나들이를 계획하거나 자전거를 끌고 여행을 떠났을 텐데, 연구원을 하고부터는 ‘꼼짝마라’가 되어 버렸다. 오백 페이지에 육박하는 철학 책을 붙들고 비지땀을 흘려보나 오뉴월 연후 이 놀기 좋은 시절에 능률이 오를 리 만무하다. 그래도 과제는 과제인지라 다른 일은 모두 철폐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책과 씨름하고 있으니 자연스레 삼식이가 되어 버렸다. 아들은 아들대로 중간고사를 망쳐 부족한 과목 보충한다고 집에서 얼쩡대고 있으니 아내가 답답해 하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어제 저녁에는 학원에 갔다가 8시가 다 되어 들어온 아들 녀석이 배고파 죽겠는데 식구들이 밥 먹을 생각을 안 한다며 한바탕 성질을 부렸다. 나는 시간을 잊고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고, 아내는 반신욕을 즐기고 있었는데 아들 놈이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내가 아들에게 “너 부모가 차려주는 밥 얻어먹을 군번이냐? 너도 차제에 다 되어있는 밥, 네 손으로 좀 차려서 엄마아빠 대접 좀 해 봐라.” 한 마디 하자, 아들은 아들대로 골이 났다. 제 딴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고픈 배를 움켜지고 들어왔는데 부모가 밥 차려줄 생각을 안 하니 성질이 날 만도 했다.
옥신각신하는 소리에 출몰한 아내, 입을 꼭 다문 채 말 한마디 없이 식탁을 차린다. 뭐라 말을 건네도 반응이 없다. 아내가 뿔났을 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삽시간에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 오죽하면 아내 별명이 새벽서리이겠는가. 올해 들어 연구원인가 뭔가 공부한다는 핑계로 집안 일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사흘씩이나 집에 들어앉아 차려주는 밥 받아먹기만 하더니, 다 되어있는 밥 차리는 것 가지고 아들이랑 실랑이를 벌이니 아내의 울화통이 터질 만도 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수습해 보고자 집안 정리정돈과 설거지를 하는 등 액션을 취해보지만 아내의 심기는 돌이킬 수 없었다. 소심한 A형인 아내는 이럴 때 참 오래간다. 꽁 다문 입을 열기 위하여 앞으로 내가 들여야 할 처절한 노력을 생각하니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난 참으로 이러는 아내가 싫다. 아니, 억울하다. 도대체 화가 나면 왜 입을 다무는지 모르겠다. 전혀 상대를 안하고 서릿발만 피운다. 젊었을 땐 별명이 ‘땡벌’이었다. 하도 사람의 약점을 잘 찔러서 붙은 별명이다. 그 땐, 내가 사흘이 멀다 하고 술 퍼먹고 돌아다녔으니 쏘여도 아프긴 했지만 별로 억울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요즈음은 내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범생이가 되었는데도 아내의 형벌은 더욱 가혹해 졌다. 내가 뭐 놀면서 집안일 나 몰라라 하는가. 늦게나마 철들어 제대로 한번 살아 보려고 그 어렵다던 연구원 고시에 패스하여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오뉴월에 땀 흘리며 공부하는 남편에게 시원한 보리차 한 잔 못 올릴 망정, 치사하게 삼식이 문제로 공포의 서릿발 작전을 구사해서야 되겠는가? 물론 보통 때의 아내가 이렇게 속 좁은 여자는 아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 남자들 처럼 나 또한 그 동안 아내에게 입은 하해와 같은 신세를 갚을 길이 막연하다. 수천 그릇의 따스한 밥을 얻어 먹고도 몇 그릇을 보답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그래서 사실 아내 앞에 서면 할 말이 별로 없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뭔가 좀 생각할 문제가 있다. 사흘 간의 연휴 동안에 우리 가족이 졸지에 고슴도치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작은 조직생활 20년 동안 협소한 사무실에서 늘 같은 보스와 얼굴을 맞대고 일을 하다 보니 간혹 보스가 휴가나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그 날이 내게 소풍 가는 날이나 다름 없었다. 왜 그렇게 홀가분해 할까? 보스는 관계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늘 함께 있으면 존재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아무리 가까운 가족일지라도 며칠 식 집안에서 서로 복닥거리며 부딪치다 보면 고슴도치가 되기 쉬울 것이다. 특히 누군가 일방적으로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입장이 되고 보면, 그 스트레스의 압력으로 뚜껑이 열릴 수도 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바로 아내의 기압 낮추기 작전에 돌입했다.
우선 사람의 기분 전환을 위해서는 운동만 한 게 없다.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안 친지 오래되었지만 배드민턴 장으로 아내를 인도했다. 아파트 단지 내 테니스장을 개조하여 만들었는데 하늘에 닿는 메타스퀘이어 나무가 병풍을 둘러치고 인조 잔디를 깔아 그냥 뒹굴어도 좋을 것 같은 멋진 곳이다. 옛날에는 둘이 곧잘 배드민턴을 치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내가 어깨가 아파 오른 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고부터는 이 운동은 우리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오늘은 왠 일인지 아내의 오른팔이 어깨 위로 올라갔다. 한 십 년 못 친 것 같은데 아내의 이전 실력이 살아 나오는 게 신기했다. 라켓이 닿자 노란 셔틀 콕이 푸른 하늘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 올랐다. 아내는 탄성을 질렀다. 자신의 오른팔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에 스스로 감동한 듯 했다. 땀이 온몸을 적시듯 우리들 마음도 하나로 젖어 들었다.
배드민턴으로 어깨동무가 된 우리는 옛날 기분을 되살려 일산 5일장에 함께 가기로 했다. 일산 5일장은 삼팔 광땡이, 매 3과 8이 들어가는 날마다 장이 선다. 아내는 원래 5일장 같은 재래시장 장보기를 취미처럼 즐겼다. 연구원 하기 전에는 매 장날 마다 우리는 함께 장에 갔다. 물론 나는 짐을 도맡아 드는 귀부인의 돌쇠 노릇뿐만 아니라 아내의 장날 주전부리 물주 노릇도 충실히 감당했기 때문에 아내는 장날을 특히 좋아했다. 채식을 선호하여 5일장에 나오면 할머니들이 여기 저기 좌판을 깔고 직접 재배한 여러 종류의 채소들의 전을 벌이는데 이런 채소들을 아주 좋아했다. 아직도 이만한 도시에 5일장이 선다는 것이 신기하다. 꼭 무슨 물건이 필요하기 보다는 그저 놀이 삼아 우리 부부는 장터 이곳 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마치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우리는 즐거웠다.
장터에 나오면 우리의 참새 방앗간이 있는데 그 곳을 나는 ‘불닭집’이라고 이름 지었다. 장보고 돌아 올 때면 해는 지고 파장이라 배가 출출하기도 하고 목도 마르다. 그 때면 장터 입구에 장작불로 구운 통닭에 생맥주를 파는 집이 있어 우리를 유혹한다. 이 집에는 정면에 수령을 알 수 없는 커다란 마로니에 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이 들이 이 집의 명물이다. 마로니에 나무 아래 나무대크를 깔고 고혹적인 등불을 켰다. 한쪽에서는 장작불로 통닭을 굽는다. 이런 풍경을 보고 혹하지 않을 장꾼들이 있을까? 거의 대부분 만원 사례를 빚고 있으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기다리는 것도 즐겁다. 어차피 놀러 나왔으니 마음은 한가하고 여유롭기 때문일 것이다.
사흘간의 고슴도치 부부는 불닭집의 생맥주 한 잔으로 순한 원앙으로 되돌아 왔다. 아무리 연구원으로 책 읽기가 중요하고 시급하다 해도 아내와 함께하는 5일장 나들이 같은 삶의 여백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린 고슴도치가 될 수 밖에 없나 보다. 이번 주 철학개론 같은 러셀의 ‘서양의 지혜’를 읽으면서도 철학이 결국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학문이라고 했다. 5일장 나들이는 우리 부부에게 철학 하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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