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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9일 12시 03분 등록


Book Review


서양의 지혜


강종희


2014. 6.9


 


 


  1. 저자 만나기


수학자는 그를 동료이자 선구자로 여기며, 철학자는 그를 20세기의 대표적 철학자로 분류하고, 노벨위원회는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주어 금세기를 대표하는 문학가로서의 그를 인정하였다. 또한 90세가 넘어서도 현실 정치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던 사회운동가였으며, 교육을 통해 사회의 변혁을 꿈꾼 진보적 교육자이기도 했던 어마어마한 지식실천가. 버트란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 1872 5월 18~1970 2월 2)은 그런 사람이다. 위키백과의 분류를 보니, 그의 이름은 영국수학자, 철학자이자 수리논리학자, 역사가, 사회 비평가 5가지 카테고리에 걸친 팔방미인이자, 각각의 분야에서 모두 빛나는 업적을 남긴 20세기의 마지막 백과사전적 지식인이기도 하다.


그는 일생의 여러 부분에서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순으로 자신의 이상을 생각해왔으나, 자신이 이 중 어느 쪽도 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일생의 대부분을 잉글랜드에서 보냈으나, 그는 웨일스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러셀은 1900년대 초반 "관념론 반대운동(revolt against idealism)" 을 일으켰으며, 그의 선배 프레게, 제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분석철학의 창시자 중 하나로 꼽히며, 20세기의 선두 논리학자로 자리매김했다. 동료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저술했으며, 이는 수학을 이용해 논리학의 기틀을 닦고자 한 시도이다. 그의 저술은 논리학, 수학, 집합론, 언어학, 철학중에서도 언어철학, 인식론, 형이상학에 영향을 주었다.


러셀은 반전 운동가로서 크게 활약했다. 그는 자유 무역을 지지했으며, 반제국주의 운동가로도 활약했다. 러셀은 1차 세계대전 때 반전 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이후 아돌프 히틀러, 스탈린주의자, 전체주의,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과 반대 운동을 펼쳤다. 그는 핵무장 반대운동에도 열렬히 참가했다.


1950, 러셀은 "인본주의양심의 자유를 대표하는 다양하고 중요한 저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1872 5 18일 러셀은 영국의 총리를 지낸 러셀 백작의 손자로 태어났다. 러셀의 가문은 몇 세기 전 튜더 왕조가 세워지며 권력을 얻어 영국의 자유주의적인 휘그당을 세운 가문이었으며, 영국 정치사의 중요한 사건, 1536~1540년의 수도원 해체, 1688~1689명예 혁명, 1832영국선거법 개정에 참여하였다.


러셀의 부모는 당시 정치사상이 극단적인 쪽이었다. 러셀의 아버지 존 러셀은 무신론자였으며,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던 생물학자 더글러스 스펄딩과 자신의 아내간의 정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부모 양쪽 모두 당시 사회 분위기에 앞서가는 "산아제한"의 지지자였다. 아버지 존 러셀의 무신론은 철학자 스튜어트 에게 러셀의 대부가 되어줄 것을 부탁한 데서 명확히 드러난다. 밀은 러셀이 태어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지만, 그의 저술은 러셀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러셀에게는 프랭크와 레이첼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으며 이중 레이첼은 1874 어머니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난 뒤에 세상을 떠났다. 1876에는 아버지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프랭크와 버트런드 러셀은 조부모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할아버지 존 러셀은 1878 세상을 떠나 유년기의 러셀은 할머니 러셀 백작부인의 슬하에서 자랐다.


당시 러셀 백작부인은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었으나, 종교 이외의 부분에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여 다윈 사상을 지지했으며, 버트런드 러셀에게 사회정의에 대한 시각을 키워주었다.  할머니가 좋아하던 성서 이야기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며,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출애굽기 23:2)는 러셀의 좌우명이 되었다. 당시 러셀이 살던 펨브로크 롯지도 종교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인 분위기였는데, 러셀의 형 프랭크는 저항적이으며, 러셀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면서 생활했다. 할머니는 공교육에 반대해 손자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정교사를 초빙해 가르쳤으며 이 때문에 친구를 사귀지 못한 러셀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공포를 느꼈다.


러셀의 사춘기는 굉장히 고독했으며, 그는 몇 차례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러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자신의 주된 관심사는 종교와 수학이었으며, 수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자살을 하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그는 집에서 몇 명의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다. 그의 형 프랭크는 러셀에게 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르쳐, 러셀의 삶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또한, 이 기간 중에 러셀은 퍼시 비시 셸리의 저술을 찾게 되었다. 자서전에 그는 "나는 내 생각이나 기분을 말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서, 모든 여가 시간을 그의 저술을 읽으며, 마음 깊이 새기는 데 보냈다. 나는 셸리의 저술을 알게 된 것이 정말 환상적이라고 느꼈으며, 내가 인간으로서 그를 만났다면 큰 동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고 기록했다. 15세가 되며 러셀은 기독교의 교리가 합당한가에 대해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으며, 18세에 그는 완전한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러셀은 1890 케임브리지 대학교트리니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보다 어린 조지 에드워드 무어와 아는 사이가 되었으며, 화이트헤드에게 비밀 동아리 케임브리지 아포슬스를 추천받으며 영향을 받는다. 러셀은 수학과 철학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1893 학교를 최우등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1895 선임연구원이 된다.


러셀은 17세에 처음으로 퀘이커 교도였던 앨리스 페어살 스미스와 만났으며, 그녀의 가족과도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이후 그는 청교도적인 가치관을 가졌던 앨리스와 사랑에 빠져 할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1894 12 13일 결혼했다. 그러나 둘은 1901 함께 자전거를 타다가 러셀이 앨리스에게 자신이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며 파경에 빠진다. 러셀은 앨리스의 어머니가 잔인하게 그를 조종하려고 하였기에 싫어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1921까지 별거하며 형식적으로만 부부로 남아있다가 이혼했다. 이 기간동안 러셀은 오톨린 모렐과 배우 스턴스 말레슨 등 여러 사람들과 열애 관계에 빠졌다.[24]


러셀은 1896 자신의 전 생애에 걸친 정치, 사회학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출간하고, 이어서 같은 해에 런던 경제 대학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강의를 시작한다. 그는 1937년 이곳에서 다시 '권력의 과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1902 페이비언 협회시드니 웨브베아트리스 웨브가 세운 다이닝 클럽 코에피션츠 (Coefficients) 에서 사회 개혁 운동가로도 활동했다.


이후 그는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의 기초 원리를 연구하며, 집합론의 기초를 뒤흔드는 러셀의 역설을 발견한다. 1903 그는 수리논리학에 대한 첫 번째 저작인 The Principles of Mathematics를 발간하며, 여기서 수학은 매우 적은 수의 공리에서 유도될 수 있음을 보여 논리주의의 주장에 큰 근거를 실어준다.


1905에 그는 철학 저널 Mind에 에세이 ‘On Denoting’을 싣고, 1908 왕립 학회 회원이 된다 이후 1910수학 논리’ 1권을 화이트헤드와 함께 출간하며 수리철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게 된다.


1910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강사가 되었고, 여기서 오스트리아의 공학도였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만나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곧 그의 박사과정 학생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러셀은 그를 천재이자, 자신의 논리학의 후계를 이을 사람으로 평가했다. 비트겐슈타인에 매료된 러셀은 많은 시간을 비트겐슈타인의 다양한 공포증과 우울증을 돌봐주는데 보내게 되었다. 이것이 상당히 러셀의 기력을 소모했지만, 러셀은 굽히지 않고 비트겐슈타인에게 학문을 하도록 권유했으며, 1922 비트겐슈타인의 대표저작 중 하나인 논리철학논고를 출판하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1918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1차대전 전쟁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그의 철학적 아이디어를 재해석한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1차 세계대전 중 러셀은 반전 운동가로 활동하다 이로 인해 1916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해고되었고 100파운드의 벌금을 선고 받았다. 러셀은 감옥에 가기를 희망하여 벌금 내기를 거부했으나, 정부에서는 러셀의 책들을 압수해 경매에 부쳐 벌금을 징수하였다. 압수된 서적은 러셀의 친구들이 구매했으며, 러셀은 "케임브리지 경찰에 의해 압수됨" 이라는 낙인이 찍힌 킹 제임스판 성경을 기념품으로 간직했다.


 


이후 미국이 영국편으로 참전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강연을 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것에 대해서는 브릭스튼 감옥에서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1918 9월 석방되었다.


러셀은 1919 대학교에서 복직되었으나 1920 강사직에서 물러났고, 1926 특강 'Tarner Lecture'의 강사를 잠시 맡았다. 이후 1944부터 1949까지는 선임 연구원(Fellow)으로 활동하였다.


1920 8월 러셀은 1917 러시아 혁명이 미친 영향을 조사하기 위한 1920년 영국 대표단에 뽑혀 갔다. 그는 블라디미르 레닌 1시간에 걸친 토론을 했으며, 회고록에서 레닌의 "악마적인 잔인성"을 발견했고, 레닌의 성품을 "독선적인 교수"에 비교하며, 실망감을 표시했다. 이후 증기선을 타고 볼가 을 내려가기도 했다.


당시 러셀의 연인이었던 도라 블랙도 러셀과는 별개로 러시아를 같은 시기에 방문했는데, 그녀는 러시아 혁명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하지만 러셀의 경험은 이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자신의 지지를 철회하게 했고, 자신의 경험을 ‘The Practice and Theory of Bolshevism’에서 회고하며, 영국으로 돌아갈 때 동료 24명이 러시아 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대해 반대 의견으로 설득하려고 한 이야기를 싣는다. 일례로, 러셀은 오밤중에 들은 총성을 이야기하며 이것이 비밀경찰의 총살이라고 주장하지만, 동료들은 자동차 엔진 소리였을 거라고 흘려 듣는 장면이 있다.


이후 러셀은 베이징에서 1년간 도라와 함께 철학 강의를 했다. 러셀은 그곳에 희망을 품고, 중국이 새로운 궤도에 올랐다고 보았다. 당시 그곳에 있던 학자들 중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는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고르가 있다. 중국에 머무르는 동안, 러셀은 천식으로 심하게 고통 받았는데, 일본 신문에는 그의 사망설이 돌았다. 이 커플이 일본을 방문할 때, 도라는 "일본 신문에서는 죽은 버트런드 러셀씨는 일본 기자들께 인터뷰를 하실 수 없답니다."라고 응답했는데, 당시 일본 언론은 이 응답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1921 8 26일 귀국 당시 도라가 임신 6개월 차였기에, 러셀은 이혼을 서두르고 1921 11 27일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1921년 훗날의 제4대 러셀 백작이 되는 아들 콘라드와 딸 캐서린이 태어났다. 러셀은 일반인을 위한 물리학, 윤리학, 교육학 서적을 출판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러셀은 처음에는 히틀러를 패배시키는 것보다 전 세계에 걸친 전쟁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아 나치 독일에 대한 재무장을 반대했으나, 아돌프 히틀러가 전 유럽을 장악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영구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보았기에 1940에는 시각을 바꾸게 되었다. 1943 그는 "정치적으로 상대적인 평화주의 (Relative Political Pacifism)"를 제창한다. 전쟁은 언제나 거대한 악행이지만, 히틀러의 나치 독일 체제와 같은 특정하고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것 중 덜 나쁜 악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1944 귀국하여 모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선임연구원(Fellow)으로서 강의를 하였다. 1945 원자폭탄이 발명되자, 그는 수소 폭탄의 발명을 예언하고 핵무기 반대 운동과 함께 세계 평화 운동을 벌였다. ‘러셀 서양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기독교 비평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비롯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50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러셀은 분석철학의 창시자 중 한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선구자적 업적을 이뤘다고 평가 받는다. 러셀은 근대 수리 논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또한 1+1을 증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러셀의 인생 역정은 그가 남긴 다음과 같은 문장에 잘 요약되어 있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주요 저작


  • 1912. 철학이란 무엇인가(권오석 역, 2008) / 철학의 문제들(박영태 역, 2000)The Problems of Philosophy. London: Williams and Norgate.
  • 1916.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이순희 역, 2010) Principles of Social Reconstruction. London: George Allen & Unwin.
  • 1919. 수리철학의 기초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Philosophy. London: George Allen & Unwin. (ISBN 0-415-09604-9 for Routledge paperback) (Copy at Archive.org).
  • 1922. 러셀 북경에 가다(이순희 역, 2009) The Problem of China. London: George Allen & Unwin.
  • 1925. 상대성 이론의 참뜻(김영대 역, 1997) The ABC of Relativity. London: Kegan Paul, Trench, Trubner.
  • 1925. 나는 믿는다(What I Believe. London: Kegan Paul, Trench, Trubner.
  • 1926. 러셀의 자녀교육론 On Education, Especially in Early Childhood. London: George Allen & Unwin.
  • 1927. An Outline of Philosophy. London: George Allen & Unwin.
  • 1927.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이재황 역, 1996) Why I Am Not a Christian. London: Watts.
  • 1927. Selected Papers of Bertrand Russell. New York: Modern Library.
  • 1928.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김경숙 역, 2008) Sceptical Essays. London: George Allen & Unwin.
  • 1929. 결혼과 도덕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김영철 역, 1997) Marriage and Morals. London: George Allen & Unwin.
  • 1930. 행복의 정복 / 러셀의 행복론(황문수 역, 2001) The Conquest of Happiness. London: George Allen & Unwin.
  • 1935. 게으름에 대한 찬양(송은경 역, 1997) In Praise of Idleness. London: George Allen & Unwin.
  • 1935. 종교와 과학(김이선 역, 2011) Religion and Science. London: Thornton Butterworth.
  • _. 런던 통신 1931-35(송은경 역) Mortals and Others: American Essays 1931-1935
  • 1938. 권력 (안정효 역, 2003) Power: A New Social Analysis. London: George Allen & Unwin.
  • 1940. 의미와 진리의 탐구(임병수 역, 1990) An Inquiry into Meaning and Truth.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 1945. 러셀 서양철학사(서상복 역)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and Its Connection with Political and Social Circumstances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Present Day. New York: Simon and Schuster.
  • 1948. 인간과 그 밖의 것들(송은경 역, 2005) Human Knowledge: Its Scope and Limits. London: George Allen & Unwin.
  • 1949. 권위와 개인(이종익 역, 1997) Authority and the Individual]. London: George Allen & Unwin.
  • 1950. 반속적 에세이 Unpopular Essays. London: George Allen & Unwin.
  • 1959. 나는 이렇게 철학을 하였다(곽강제역, 2008) My Philosophical Development. London: George Allen & Unwin.
  • 1959. 서양의 지혜 Wisdom of the West, edited by Paul Foulkes. London: Macdonald. George Allen & Unwin.
  • 1961. 사실과 허구의 교차로(고정식 역, 1993) Fact and Fiction. London: George Allen & Unwin.
  • 1961. 인류에게 내일은 있는가(고정식 역, 1991) Has Man a Future?, London: George Allen & Unwin.
  • 1951–1969. 러셀 자서전(송은경 역, 2003) The Autobiography of Bertrand Russell, 3 vols.. London: George Allen & Unwin. Vol 2 1956
  • 1969. 러셀의 철학노트(최혁순 역, 1990) Dear Bertrand Russell... A Selection of his Correspondence with the General Public 1950–1968, edited by Barry Feinberg and Ronald Kasrils. London: George Allen and Unwin.
  • 소중한 삶을 여는 인생노트 / 러셀 인생노트
  • 파이의 역사
  • 일반인을 위한 철학
  •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Bertrand Russell's Best edited by R.E. Egner


  1. 마음에 들어온 글귀


머리말


10. 체계적 지식의 부분을 이루는 명확한 지식은 모두 이런저런 과학에 속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학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미지의 영역과 접하고 있다. 누군가 이 접경지대에 이르러 그 경계선을 넘어간다면 그는 바야흐로 과학의 세계를 지나 사변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이 사변적 사고 활동 역시 일종의 탐구활동인데,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철학이란 학문이다.


11. 원래 철학이 시작된 건 인생의 고민거리를 풀어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철학은 일찍이 그리스 사람들이 그랬듯이 순전히 가보고 싶어서 하는 탐험 여행처럼 오직 알고 싶어서 시도하는 지적 모험이다. 이런 까닭에 어떤 철학자가 개인적으로 완강하게 교조주의적 독단을 고지한 사실이 밝혀지는 수는 물론 있지만, 철학 자체에는 원칙적으로 어떠한 종류의 교조적 신조도 신비로운 의식도 신성불가침한 것도 발붙일 여지가 없다. 


그러니까 철학이 참 어따 써먹을 지 모르는, 불가사의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오직 알고 싶어서 가는 지적 모험이라.


12. 서양 철학은 모두가 그리스 철학이다.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와 우리를 맺어주는 유대를 단절하면서 철학 사상을 즐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15. 실제로 미지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책을 바탕으로 신비적이거나 다른 근원적인 영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물러서서 스스로를 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과학적, 사색적 방법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19. 그리스인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지식을 후에 인계 받았다. 그러나 양쪽 모두 과학과 철학은 쓸모가 없었다. 타고난 재능이 없기 때문인지 사회적 조건 때문인지 여기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종교의 기능이 지적 모험심을 자극하는 데 쓸모가 없었다는 점이다


20. 그리스 정신은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마구 날뛰는 본능적인 다른 면이 있다. 전자는 철학과 예술과 과학을 일으켰다. 후자는 생산력을 숭배하는 의식에서 연유하는 매우 원시적인 종교로 나타나고 있다.


….


그러나 순화된 것보다 더 많은 원시적 요소가 올페우스교의 전통 속에서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 요소들이 참으로 그리스 비극의 원천이다. 언제나 공감이란 격렬한 감정과 정열에 들뜨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법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본질은 카타르시스, 즉 감정을 정화시키는 일이라고 설명한 건 정곡을 찌른 말이다. 어쨌든 그리스 정신이 이 세계를 단호하게 변혁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 정신의 이 양면성 덕분이었다. 니체는 그리스 정신의 이 두 요소를 아폴로적 원리와 디오니스소스적 원리라고 불렀다.


….


그렇지만 학문을 하는 침착한 정신만으로는 신비에 사로잡힌 정신이 그럴 수 없는과 꼭 마찬가지로 어떠한 지적 혁명도 일으킬 수 없다. 지적 혁명에는 진리와 아름다움을 열정적으로 탐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론이라는 말의 그리스어 어원이 애초에는 오늘날의 관광과 비슷한 것을 의미했다는 사실은 기억해 둘 만한 가치가 있다. 헤로도투스는 이론이란 말을 이런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격렬하면서도 순수한 호기심 즉 열정적으로 공평무사한 탐구에 몰두하는 마음 이것이 고대 그리스 사람들로 하여금 인류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지성과 열정,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그리스 정신의 양 축을 이루는 두 요소의 결합은 참으로 멋지구나. 격렬하면서도 순수한 호기심. 그것만큼 사람을 자극하고 고양하는 것이 또 있을까?  


21. 그리스 철학 전체를 지도하면서 이끌고 있는 생각은 로고스(logos)라는 개념이다. 이 말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도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연유로 해서 철학적 논의와 과학적 탐구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적 논의와 과학적 탐구를 아울러 하는 사람은 지식이 좋은 것이라는 윤리적 신조를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데, 이 지식의 좋은 점 즉 인류를 행복하게 해주는 능력 은 공평무사하게 탐구하였기 때문에 얻어지는 결과다.


22. 마법이란 일정하게 정해진 약간의 의식을 바탕으로 특이한 결과를 얻으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행 조건이 같으면 결과도 같을 것이라는 인과성을 바탕으로 한다. 이와 같이 마법은 원시 과학이다. 반면, 종교는 이와는 다른 근원에서 나온다. 종교는 규칙적으로 잇달아 일어나는 것을 거슬러, 또는 규칙적으로 잇달아 일어나는 중에도 결과를 얻으려 한다. 그것은 인과성의 폐기를 수반하는 기적적인 영역에서 기능을 발휘한다


25. 우주의 만물은 물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한 사람은 밀레토스의 탈레스라고 기록에 전해 오고 있다. 이렇게 해서 철학과 과학이 함께 시작되었다.


28. 아낙시만드로스는 이 논증에 만족하여 멈추지 않는다. 그는 더 나아가 인간이 어류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고, 이를 화석을 관찰한 증거와 상어가 새끼를 기르는 과정을 관찰한 증거에 의해서 뒷받침하고 있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사람들에게 물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 이유는 이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바다 속의 우리 동족들도 우리처럼 애틋한 동포애를 소중히 여기는지에 대해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말이 남아 있지 않다.


이 어려운 책에서도 기회만 있으면 은근슬쩍 블랙유머를 구사하는 러셀 경. 크크크    


29. 모든 물질이 같은 원소로 이루어졌다는 견해는 아주 휼륭한 하나의 과학적 가정이다.


….하나의 물질이 여러 가지 집합 상태에서도 여전히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은 훌륭한 업적이다.


 


30. 만약 인간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원래의 인간은 오늘날의 인간과 달랐을 것이며, 보다 민첩하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던 동물에서 진화했음이 틀림없다고 보았다..


32. 신비주의가 감내하기 어려운 압력으로 사회를 내리누르지 않는 곳에서는 학문적 사색이 시작될 가능성이 한층 높은 법이다.  


다시 말해 신비주의가, 즉 종교가 사회를 지배할 때 사회는 어떤 의미에서든 진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34. 밀레토스의 사람들에게 철학은 매우 실천적이었으며, 철학자는 행동하는 사람일 수 있었고 또 실제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피타고라스의 전통 내부에서 이외는 반대되는 개념이 대두되었다. 여기에서 철학은 세계에 대한 초연한 관조였다.


35. 올림픽 경기를 보러 오는 사람에는 세 부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인에도 세 부류의 인간이 있다. 최하위층에는 물건을 매매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다음은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들, 마지막에는 경기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 즉 문자 그대로의 이론가들이 있다. 이 마지막 층의 인간이 철학자에 해당한다.


36. 이와 같이 우리 주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에서 수를 찾아내야 한다. 일단 수적 구조만 파악하면, 우리는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41. 이와 같이 다툼이야말로 세계를 움직이는 추진 원리이다. “다툼이 신과 인간 사이에서 사라지면 좋겠다는 호머의 말은 잘못이다. 그는 자기의 기도가 우주의 멸망을 기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만약 그의 기도가 이루어진다면 만물은 죽기 때문이다헤라클레이토스의전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다라는 말을 이와 같은 논리적인 뜻에서 해석해야지, 군사적인 격언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다툼, 긴장, 갈등, 끊임없이 움직이는 운동의 상태. 그게 삶인가? 그게 세계인가? 그러니까 사는 게 이리 피곤한가 싶다


42. 내리막길이 없는 오르막길은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의 관념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선의 관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어둠의 왼손은 빛. 빛의 오른 손은 어둠. 악과 선은 하나의 길 위에 놓여있는 상호보완적 개념인가.


49. 철학자들의 생각으 상호연관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연대에만 얽매이지 말고 넘어서야만 한다. 모든 역사적 탐구에는 이러한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역사란 원래 후세의 기록자의 편의 같은 건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나기 때문이다.


러셀 경도 이런 푸념을 다 하는구나. 귀여운 양반.


58. 민주제를 택하고 있는 도시 국가처럼 정치권력에 한계가 있는 곳에서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공적인 일의 진행에 참여하였다. 이런 도시에서는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을 언짢은 얼굴로 대하면서 ‘idiot’ 즉 바보라고 불렀는데 그리스어에서는 이 말이 사사로운 이익에 사로잡힌 자를 뜻한다.


그러니까. 이번 선거에서 idiot을 입증한 사람 많다. 아 놔, 이거 참. 세월호 같은 사건이 터졌는데도 다시


58. 문제의 요점은 정치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스스로 자부하는 만큼 현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국민에게 일깨워주는 것보다 더 성나게 하는 골칫거리가 없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비정통으로 지목된 학파의 학교에 불을 지르는 짓이나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는 짓은 이상하게도 비정통적 견해를 근절시키는 일에는 언제나 전혀 쓸모가 없었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그렇기는 한데, 일단 많이 죽어나가지 않나. 그리고 그 나쁜 권력층 놈들은     본인들이 살아있을 동안 부귀영화 다 누릴거고. 새로운 사상이 사람들에게 모두 퍼질 때쯤이면 희생의 무게가 너무 커져있을 거고.


61. 기원전 5세기의 가장 놀라운 사건은 지적인 실험과 발명이 둑이 터진 것처럼 갑자기 쏟아졌다는 점이다. … 모든 것은 확대되어 갔고,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목표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놀라운 자신감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것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의 유명한 코러스(합창)에 나오는 불가사의한 것은 많이 있으나, 인간 이상의 불가사의는 없을 것이다라는 대목이다. 이런 정감은 후세에 이르면 없어지지만, 근대의 르네상스에 다시 소생한다.


61. 활력에 찬 시대는 자기를 따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신념에 대해서는 자칫 오만해지기가 쉽다. 사람들에게 선의 형상을 상기시킨 사람은 이 세기 말엽에 출현한 소크라테스였다.


아테네의 철학


79. 그리스어 ‘symposium’은 향연이란 뜻이다.


그러게. 심포지엄이 그립다. 지적인 향연. 축제. 수업에 참여하고 워크샵을 리드하고 이런 일들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독고다이가 되고나니 사무치네.


79. 그리스인의 원자론이 관찰에 입각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철학적인 추리 외에 아무런 근거도 없이 우연한 행운에 불과한 것인지 하는 문제가 이따금씩 제기된다. ….원자론은 상식과 엘레아 학설의 진정한 타협이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80. 근대에 와서 돌턴이 원자론을 부활시켰을 때, 그는 이 문제에 관한 그리스인들의 견해를 잘 알고 있었으며, 화학 물질이 일정한 비율로 결합한다는 자신의 관찰을 원자론이 설명해 준다는 것을 알았다.


, 이것도 그리스인의 원작품? 이 사람들이 안 한 게 대체 뭐야?


81. 소크라테스. 그러니까 사람이 저지르는 악행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지이다. 따라서 최고선 즉 사람의 가장 훌륭한 상태인 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반드시 지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니 덕은 곧 지식이다. 최고선으로서의 덕과 지식을 연결시키는 건 그리스 철학 전체에 걸쳐 보이는 특징이다. 기독교 윤리는 이와 정반대이다. 기독교 윤리에서 중요한 것은 순수한 사랑인데, 이 사랑의 감정은 아무래도 무지한 사람에게서 더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러셀역시 기독교에 대한 그의 언급은 대체로 sarcastic 하다. 18세에 종교란 것을 완전히 버리기로 했다니까.


83. 궤변론자들은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지식은 시시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중요한 것은 쓸모 있는 의견이었다. 여기에는 물론 그 어떤 진리가 있다. 실제적인 문제를 처리할 때, 우선 고려해야 할 것은 성공이다.


83. 그러나 여기에서도 소크라테스의 견해는 정반대이다. 궤변론자들이 견실한 습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에 반해, 소크라테스는 그것만으로 충분치 못하며, 자기 성찰이 없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84. 논쟁술과 변증법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논쟁을 일삼는 사람은 이기려고 기를 쓰는 반면, 변증가는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논쟁과 토론의 차이가 생긴다.


90. 페리클레스는 성장해서 당시의 통속적 미신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성격은 신중하고 온화했으며, 민중을 멸시하는 성향이 조금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 아래에서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완전히 꽃피었다.


….


페리클레스는 지도자가 될 자질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고, 그가 웅변가로서도 힘차고 정치가로서도 유능하고 동료들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거의 독재자처럼 지배했다.


페리클레스가 만화가 신일숙 선생이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 그린 것처럼 꽃미남이었다면 그의 인기를 설명하고도 남겠다. 민중을 멸시하는 경향은 있었으나 민주주의를 꽃피운 남자. , 옴므 파탈의 향기가


92. 소크라테스의 가장 큰 관심은 선이었다.


93. 소크라테스는 확실히 그리스의 사상가, 작가, 예술가의 모든 업적에 정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으며, 아는 것은 무한한 세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일단 우리가 이런 점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95. 그들의 무지를 폭로하면서 그는 많은 적을 만들었다.


소크라테스는 현대에 살았어도 오래 못 살았을 것 같다특히 우리나라에선.


96. 죽음은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꿈을 꾸지 않는 잠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내세의 삶으로, 거기에서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르페우스나 무사이오스나 헤시오도스나 호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며, 그들은 질문을 했다고 해서 걸로 사람을 죽이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97.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들은 각 시대를 통해 사람들의 상상력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서양에서 사변적인 추리가 번창했던 곳에서는 어디서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림자가 배경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99. 피타고라스 학파와 깊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수학이 크게 강조되었다. 학교 입구에는 이 과목이 싫은 사람은 누구나 입학을 삼가라는 글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들 과정의 교육에는 10년이 걸렸다.


, 그러니까 수학과 철학은 세트로다가 전공하는 내 남편 같은 인간이 있는가 하면 수학과 철학이라면 동시에 멀미를 느끼는 나 같은 인간도 있는 것이다.


102. 학문의 본산으로서 대학은 학생에게 자립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을 길러주고, 지금까지 그가 지녀온 편견과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는 탐구정신을 함양시켜줄 때에만 본래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용기가 없어서든 아니면 자립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사라져 버린 곳에서는 어김없이 선전과 권위주의라는 사악한 잡초가 끊임없이 자라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판을 억누르는 처사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잘못이다.  


그러니까 가만 있으라는 사회는 스스로가 얼마나 취약하고 부패한 사회인가를 입증하는 셈이다. 에라 이 썩은….


112. 음악 교육 또는 교양 교육을 하는 이유는, 신사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영국에서 이해하고 있는 신사의 개념은 플라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청년은 위엄 있고 우아하고 용기 있게 행동하라고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118. 마음 속에 그리고 있었던 정치 생활은 정적이었던 데에 비해, 그들 주위의 세계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었다. 이것이 그리스 정치 사상의 최대약점이었다.


122. 대화 방식은 다른 그 어떤 형태의 저술보다도 문학적인 훈련을 저자에게 요구한다.


, 그러니까 희곡의 매력이 여기에 있는 것인가 보다. 셰익스피어가 달리 천재가 아니다.


124. 이성적인 원과 동물적인 원이 교차하는 부분이 인간을 의미한다.


148. 비물질적인 실체라고 말해도 조금도 우습지 않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한 예가 영혼으로, 이것은 육체에 형상을 부여하는 실체지만, 물질적이지는 않다.


149. 변화는 실체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이 실체는 차례로 현실이 되어 가는 일련의 성질을 잠재적으로 품고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164. 만물은 공간 안에 있지만 우주는 그렇지 않다. 우주는 의자나 테이블처럼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177. 비극은 보는 사람을 수긍하게 할 만한 출발점을 갖추어야 하고, 합리적으로 발전해서 결정적인 결말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 … 길이도 중요하다. 작품이 너무 길면 정신이 둔해지고, 너무 짧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177. 비극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감을 세탁해서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데 있다. 이것은 그리스어로 카타르시스를 뜻하는데, 자기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대리 경험하면 영혼은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비극에는 치료적인 의도가 있다. 이 용어는 의학에서 빌려온 것이다.


178. 운명의 급반전, 플롯과 관련된 뜻하지 않은 사태, 악덕이 아니라 판단 부족으로 실패하게 된다. 그 때문에 그는 높은 지위와 권세에서 끌려내려와 버림받은 인간이 된다.


178. 시는 보편적인 장면을 다루는 데 반해서, 역사는 특수한 것을 그린다.


초기 기독교 철학


 


186. 서양의 문명을 지배한 기독교는 그리스 문화와 동방 문화가 약간씩 섞여 있는 유태교에서 파생된 종교이다.  기독교와 유태교는 신의 선민이 있다는 교리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의 선민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이 두 종교는 이 세계가 신의 창조에 의해 시작되어 신의 마지막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똑같은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는 해도 정말 구세주가 누구이고, 구세주가 이루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약간씩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태교도는 구세주가 앞으로 이 세상에 와서 그들이 이 세상에서 승리하게 해주리라고 믿고 있는 반면에, 기독교도는 구세주가 나자렛에 태어난 예수이며 그의 왕국은 이 세상에 세워지는 왕국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게다가 기독교는 유태교도가 가지고 있던 이웃을 돕는다는 지도 원리로서의 의로움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였으며, 또 이를 교조적 신조로 신봉하는 것도 이어받았다. 후세의 유태교와 기독교는 둘 다 본질적으로 신플라톤주의에서 유래하는 내세관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의 이론은 철학적이어서 누구에게나 금장 이해되지 못한 반면에, 유태교와 기독교의 견해는 의로운 사람은 천국에 가고 악한 사람은 지옥의 불에 타 죽을 거라고 풀이되자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이후로는 정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내세에 관한 이론을 아무나 이해할 수 있게 해준 것은 그 속에 있는 바로 이 보복의 요소였다.


 


불에 타죽을 거라니까 이해하기가 쉽긴 하다. 그러나 불에 타 죽지 않기 위해 믿어야 한다니, 뭐 이런 굴욕이 다 있는가? 더러워서 못 믿겠다. “닥치고 믿으라며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신념이 옳은 적은 별로 없었다.


 


189. 원시 기독교는 사실은 수정된 유태교이며, 이는 개신교가 처음에는 가톨릭 개혁운동이었던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195. 암브로시우스는 이 새로운 상황에서 황제가 이교도를 편드는 쪽으로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 시민이 병사로서 황제에게 충성해야 할 의무가 있는 만큼 황제는 신에게 봉사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글을 써 보냈다. 이 말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을 음미해 보면, 암브로시우스의 이 말은 신의 것은 신에게 돌리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라는 예수의 요구보다 더 큰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에서 세상의 복종을 요구하는 신의 명령의 전달 매체인 교회가 국가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요구를 간파할 수 있다.


 


198. 아우구스티누스의 근본적 목적은 성서의 가르침과 플라톤 학파의 철학적 유산을 조화시키는 데 있었다. 이 점에서 그는 호교론 전통의 선구자다.


 


199. 범신론은 신비주의에 강하게 기울어진 사람들이 언제나 매력을 느껴 온 사상인데, 철학자들 중에서 이 견해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은 스피노자이다.


 


202. 역사를 보면, 미신의 전통은 미신을 벗어난 사상을 산출하지 못했었고, 또 금욕주의를 진취적 정신보다 더 높이 평가했던 전통은 시대의 도전에 맞설 수 있는 건설적인 정책을 마련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는 철학적 물음을 그 배경에 있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모든 지식과 관계없이 잘 이해할 수 있다.


 


스콜라 철학


 


215. 실재주의는 보편자들이 사물이며, 보편자가 개별자보다 앞선다는 주장이다. 이와 반대되는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입장은 유명주의라 하는데, 보편자들은 단지 이름일 뿐이며, 따라서 개별자가 보편자보다 앞선다고 주장한다.


 


224. 종교적 열정은 십자군 운동을 일으킨 원동력의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운동에는 강렬한 경제적 동기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동방 세계는 손에 넣을 수 있는 전리품, 그것도 덕스럽고 신성한 동기에서 얻게 되는 전리품이라는 입맛 당기는 약속이었고, 한편 손 가까이 있는 유럽의 유태인들은 그들의 종교적 분노를 화풀이할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이었던 셈이다. 회교 세계에 들어간 기독교 국가의 기사들은 자기네 문화보다 한없이 우월한 문화와 자기들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명확하게 깨닫지 못했었다.


이 무쉭한그리고 교활한 종교집단아. 내부로 쏠릴 수 있는 비난을 외부의 적으로 돌리는 이런 전략이 펼쳐질 때 내부는 썩을 대로 썩어있는 법이다.


 


225. 스콜라 철학에서 가장 큰 이론적 문제는 철학계를 서로 대립하는 두 진영으로 분열시킨 보편자 문제였다. 실재주의 진영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플라톤의 권위와 그의 형상론을 근거로 삼고 보편자는 사물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유명주의 진영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빌려 보편자는 그저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뭔 소리고…. 아이고머리에 쥐만 나고 이해는 안 되는거라.


 


229.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 손상을 입히고 있는 것은 탐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기독교의 독단적 교리가 결론을 냉혹하게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르다.


 


233. 아퀴나스 철학에서 사용되는 본질과 실존이란 용어는 잠재성과 현실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의 지지를 받고 있다. 본질은 순수하게 잠재적인 것이고, 실존은 순수하게 현실적인 것이다. 따라서 유한한 사물에게는 항상 이 두 가지가 섞여 있게 마련이다.


 


234. 신플라톤주의의 신은 어떻게 해서든 이 세계와 공존하는 신인데 반해서, 아퀴나스의 신은 이 창조된 세계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일종의 영적인 사제장 같은 것이다.


높다는 형용사도 싫어질라 한다.


 


237. 지식이란 본질에 관한 지식이며, 따라서 이 본질은 신의 마음속에 있는 관념과 다를 수밖에 없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신을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체에서 본질과 실존일 일치하므로, 아퀴나스의 생각과는 반대로 개체를 개체이게 만드는 것을 물질일 수는 없으며, 오히려 반드시 형상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239. 오캄은 개체 즉 개개의 사물이 실재성을 갖는 것이고, 이 개체만이 직접적인 지식과 확실한 지식을 형성시킬 수 있는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적은 것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더 많은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은 헛된 짓이다." "필요 이상으로 있는 것을 증가시켜서는 안 된다." 이는 곧 후세에 '오캄의 면도날'이라고 불리우는 그의 사상이다. 오캄은 철저한 유명주의자였다.


 


경제논리로서 오캄의 면도날을 들어본 적이 있고 공감하였는는데, 그것과는 사뭇 다른 원 뜻에는 그러지 못하겠다.


 


241. 단테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나라의 일상 언어를 문학의 보편적 도구로 다듬었는데, 이로써 지방의 잡다한 사투리를 넘어선 표준어가 최초로 설정될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라틴어만이 문학의 표현 수단으로 쓰일 수 있었던 데 반하여, 이제는 이탈리아어가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243. 각 민족마다 자기 나라 말을 사용하게 되자, 교회는 철학과 과학의 분야에서 전개되는 지적 활동을 지배하는 힘을 상당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니 루터가 독일어 성서를 번역하였을 때 종교개혁의 씨앗이 된 거로구만.


 


246. 그리스 사상과 중세 사상의 가장 중요한 차이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누구나 당연히 그리스 사상에는 죄의식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의 눈에는 사람이란 저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죄 때문에 고민해야 하는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의 생활을 신들의 변덕으로 인해 구겨져버릴 수 있는 불안정한 것으로 보았음에 틀림없을 것 같다.


 


247.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덕은 그 자체가 보상이었음에 비해서, 기독교 신자들은 신이 덕을 행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중세가 암흑시대(우울한 시대)로 묘사되는 데 다 이유가 있다. 남이 하라면 하기 싫다…. 신이 됐던 뭐건 간에자유의지를 상실한 사람들이 뭐 제대로 된 걸 만드는 거 본 적이 있나?


 


248. 철학과 신학의 이 결합은 이성이 어느 정도라도 신앙을 튼튼하게 해주는 동안에만 지속될 수 있었다. 14세기의 프란치스코 학자들이 이 가능성을 부정하고, 이성과 신앙은 서로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나서자 상황이 바뀌어 중세의 세계관은 점점 시들기 시작하였다. 철학이 신학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것이다. 오캄은 신앙과 이성적 탐구를 연결하고 있던 온갖 고리를 다 풀어 버리고 신앙을 이성적 탐구로부터 해방시켰지만, 이 일은 반대편에서 보면 실은 철학을 원래의 이 세상의 학문으로 되돌아가도록 풀어준 셈이었다. 교회는 16세기 이후로는 철학의 분야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였다.


종교가 지적인 탐구의 배경으로 깔려야 하는 사회는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썩는다.  나 외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마. 아니, 그냥 너희들은 생각하지 마, 이런 사회, 또 뭔가 생각나려 한다, 젠장.


 


248. 이성과 신앙의 분리는 그와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적 활동과 종교적 활동을 엄밀하게 분리하여 제각각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진작 그랬어야지.


 


249. 스콜라 철학이 빠져 있었던 잘못은 경험적 탐구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결함에 대해 최초로 주의를 기울인 사람들은 프란치스코회 학자들이었다. 경험에 의해 발견된 사실들이 이처럼 경시되었던 것은 이 세계의 문제보다는 신과 저 세상의 문제에 훨씬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시대에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예부흥 시대의 사상가들은 다시 한번 인간을 모든 문제의 중심에 세웠다.


 


근대 철학의 발흥


 


254. 기존 질서에 젖은 통치자들은 과감하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려는 사람에게 기존 질서가 파괴된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야만적 형벌을 언도하였다.


 


263. 에라스무스는 사람은 누구나 신과 직접 접촉할 수 있으므로 신학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개신교의 견해이다.


 


264.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공동의 소유를 크게 강조하고 있는데, 그 이유도 플라톤의 이유와 비슷하다. 개인이 사물들을 사유 재산으로 삼는 사회에서는 공동의 복지가 철저하게 존중될 수 없다는 것이다.


 


291. 스피노자는 성서에 나오는 모든 저주를 받고 유태인 사회에서 추방당했다.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렌즈를 갈아주는 일 이외에는 온통 철학적 사색에 몰두하면서 지냈다.


 


291. 신과 종교에 관한 스피노자의 견해는 너무나 시대를 앞선 것이어서 그가 매우 품위 있는 윤리 이론을 제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전에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1백 년 동안이나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생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스피노자의 가장 위대한 저작인 윤리학도 폭발적 충격을 줄 것으로 여겨져서 그의 사후에야 출판되었다.


스피노자가 이런 선구자였을 줄이야. 사과나무 심는다는 말만 알고 있어서, 시대를 앞서간 생태론자인가 싶었구만.


 


293. 스피노자는 실체라는 건 완벽하게 제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그 다음에 실체는 무한하다는 게 증명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실체의 한계들이 실체와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실체는 오직 하나만 있을 수 있다는 게 증명되고 나서, 이 실체는 우주 전체이며 또한 신과도 일치한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러므로 신과 우주는 둘 다 모든 사물의 총합체이므로 이 둘은 다른 게 아니라 그게 그것이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그 유명한 범신론이다. 범신론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 속에는 신비주의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걸 강조해 두어야 하겠다.


범신론자, 스피노자. 라임 맞는데? 신과 우주는 같다. I get it.


 


294. 사람이 외부의 여러 가지 영향력과 원인에 얽매여 있는 한 노예 상태에 있다고 본다. 실제로 이 상태는 모든 유한한 것이 처해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사람은 신과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한 더 이상 그러한 영향력에 지배되지 않게 되는데, 그 까닭은 우주 전체는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사람은 점점 전체와 동조를 이루어 감에 따라 그 정도에 맞는 자유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자유라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독립 즉 자기 결정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오직 신에게만 옳은 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방도는 이러한 신과의 동화이다.


그런가…?


 


295. "자유로운 사람은 죽음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법인데, 자유로운 사람의 지혜는 죽음에 관한 성찰이 아니라 삶에 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한편 스피노자는 악을 소극적인 것 즉 결핍의 상태로 여기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전혀 없는 전체로서의 신 즉 자연은 악일 수 없다고 보았다. 스피노자에게는 모든 것이 이 유일하게 가능하고 또 실재하는 우주 속에서 최선의 상태로 존재하는 셈이다. 따라서 유일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가능한 한 더 많이 우주와 접촉하기 위해 일상의 실제 생활에서 자기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301. 라이프니츠는 오직 신만이 완전 과학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신은 우주의 모든 것을 필연성의 맥락에서 이해한다고 보았다.


 


라이프니츠의 예정 조화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테레키 이론 즉 잠재성이 현실성으로 나타나려고 분투한다는 이론에 의해서 고무 받은 것처럼 보인다. 라이프니츠는 이 이론에서 모든 잠재성이 동시에 실현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언젠가 한 번은 최대한 많은 양의 현실성을 갖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쨌거나 신이 인간사에 개입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본다.


 


304. 실행이 우리의 지식을 향상시켜 줄 수 있다는 건 옳은 말이다. 어떤 행동을 이지적으로 수행하는 일이 그 행동에 대한 이해를 촉진시킨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일이 인간의 행동이나 실행의 영역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건 명백하다.


그러니까 성인의 머리 속에 뭔가를 집어넣으려면, 일방형의 강의가 아닌 쌍방향의 워크샵을 통해서 티끌만치라도 일어날 수 있다.


 


306. 과학과 철학의 임무는 일상 언어를 가지고 출발하여 새로운 탐구 과제를 풀어 낼 수 있도록 더욱 날카로워진 언어적 도구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명하고 분명한 관념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는 데카르트의 철학적 주당이 함축하고 있는 가치 있는 근본 취지이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


 


308.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개신교의 성격을 지녔지만, 칼빈주의 식의 편협한 테두리 안에 머물지는 않았다. 자유주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식으로 신과 교섭해야 한다는 개신교의 생각을 약간 더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 밖에도 편협한 신앙은 사업을 하는 데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자유주의는 그 당시에 상업과 공업을 발달시키면서 부상하고 있던 중산층 사람들이 만들어 낸 생활 태도였기 때문에, 귀족층과 군주가 똑같이 특권을 누리고 있던 기존의 견고한 전통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유주의의 요지는 관용이다.


자유주의의 요지는 관용. 좋은데. 왜 이게 자리잡지 못 했을까.


 


312. 개인주의 신조는 주로 이성주의자의 이론이었으므로, 이성이 최고로 중요하다고 주장되었다. 열정의 지배를 받는 건 문명화되지 못한 탓이라고 여기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지만 19세기에는 개인주의 신조가 정열에까지 확장되었는데, 특히 낭만주의 운동의 물결을 타고 강자의 외고집을 찬양하는 여러 가지 '힘의 철학'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이 결말은 실은 자유주의와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론들은 자기기만에 빠져 있다고 하겠는데, 그 이유는 성공한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큼 야심만만한 다른 사람의 도전이 두려워서 성공에 이르는 사다리를 파괴해 버리기 때문이다.


다 같이 잘 사는 세상, 행복한 세상이 무서운 놈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이 모양이다.


 


319. 뉴턴의 물리학은 단번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철저히 일소해 버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로크의 정치 이론은 거의 새로운 내용이 없는데도 왕권신수설을 깨끗이 논박해 버렸고, 스콜라 철학의 자연법 사상을 근대의 상황에 알맞도록 변경시켜 기초로 삼고 국가에 대한 새로운 기본 신조를 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왜 그랬을까. 로크의 이론이 새로울 것이 없는데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온 이유는 뭘까. 시대의 흐름을 타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다.


 


320. 이성주의가 꼭지점을 땅에 대고 서 있는 피라미드라면 경험주의는 밑면으로 버티고 선 피라미드다.


 


325. 정신이 실존한다는 말은 '지각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지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326. 버클리는 "대체로 나는 이제까지 철학자들의 흥미를 끌었고 또 지식에 도달하는 길을 가로 막고 있던 난점들은 그 전부는 아닐지라도 아주 많은 난점이 전적으로 우리 자신 탓에 생겨났다고 말하고 싶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먼지를 일으켜 놓고는 그 먼지 때문에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불평한다."


, 좀 그렇긴 하지


 


329. 흄이 말하는 경험은 지각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지각들 사이에서는 이 연속 이외의 어떠한 결합 관계도 지각될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데카르트 식의 이성주의와 로크 및 그 추종자들의 경험주의의 근본적 차이점이다. 이성주의자들은 사물들이 밀착하여 딱 들어맞게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이 결합 관계가 우리에게 알려질 수 있다고 단언한다. 이에 반해서 흄은 사물들 사이에 그러한 결합 관계가 있다는 걸 거부하며, 오히려 혹시 그런 결합관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결합 관계를 결코 확실하게 알 수 없다고 암시하고 있다.


 


330. . 혹시 어떤 사람이 진지하게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반성을 해본 끝에 앞에서 내가 말한 것과 다른 ‘자아’개념을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와 더불어 더 이상 논의를 계속할 수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올바를지 모른다는 것과, 따라서 우리는 이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계몽운동과 낭만주의 철학


 


337. 낭만주의 운동은 계몽 운동의 아폴로적 심성에 상반되는 디오니소스적 심성을 상기시킨다.


 


338. 계몽운동은 본질적으로 자립된 지적 활동의 가치를 더 높이는 일이었으며, 참으로 글자 뜻 그대로 이제까지 암흑이 지배해 오던 곳에 광명의 빛을 비추는 걸 목표로 삼았었다. 이 운동은 집념과 열의를 다해 추구할 수는 있었지만, 이 때문에 이 운동이 강렬한 감정들을 소중히 여기는 삶의 방식은 아니었다. 세월이 가면서 어쨌든 계몽 운동과 반대되는 영향을 끼치는 힘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건 낭만주의라는 훨씬 더 격렬한 힘이었다.


낭만주의 운동은 계몽운동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점에서 아폴로적 심성에 상반되는 디오니소스적 심성을 연상시키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340. 낭만주의는 이성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경향도 똑같이 보여주고 있다. 이 비이성주의적 태도는-이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가장 잘 알려진 실례는 실존주의라고 하겠는데-여러 가지 점에서 산업사회가 개인의 생활을 잠식하는 일이 확대일로에 있는 현실에 대한 반발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47. 칸트는 평생 한 번도 고향을 멀리 떠난 적이 없었다. 또한 그는 지나친 금욕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매우 규칙적이고 부지런한 생활을 하였다. 그의 습관은 아주 규칙적이었으므로 그가 지나가는 걸 보고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시간을 맞추었다고 한다. 그는 튼튼한 편은 아니었으나 차분한 생활방식 때문에 질병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화술이 뛰어나고 사교 모임에 참석하면 항상 환영을 받았다. 칸트는 정치적 문제에 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하게 계몽 사상의 전통에 따르는 자유주의자였으며, 종교에 관해서는 비정통 개신교의 한 입장을 주장하였다.


 


348.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의 목표는 선천적 종합판단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351. 지성과 이성의 구별을 후세의 헤겔은 자신의 관점에서 이성은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것인데 반해서, 지성은 사람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칸트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이성적이거나 이성을 타고났다는 점에서는 평등하지만, 지성에 관해서는 모든 사람이 불평등하다. 왜냐하면 지성은 참으로 사람마다 현격하게 활용의 정도가 실제로 다른 지능이기 때문이다.


 


353. 실천 이성의 근본적 물음은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 물음에 대해서도 상당히 혁명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칸트 이전의 모든 윤리학이 의지는 외부의 영향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항상 가정했었음에 반해서, 칸트는 의지가 제 자신을 다스린다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지는 자율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칸트가 도덕 법칙으로 간주했던 것을 찾으려면 우리는 오히려 반대로 자신의 내부를 살펴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이 도덕 법칙은 특정한 명령들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도덕 법칙은 어떤 특정한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알려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의지의 자율성을 인정한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우리가 피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의 도덕 법칙은 결국 경험적 내용이 전혀 없는 순수하게 형식적인 원리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는 이 도덕 법칙을 정언 명령이라 불렀다.


 


368. 역사적 상황에 관한 헤겔의 인식을 보면, 그는 절대자가 언제나 우리의 눈앞에 전개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철학적 체계를 세우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인 셈인데, 그의 견해에 의하면 철학적 체계는 항상 사건이 일어난 뒤에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서 헤겔은 <법철학>의 머리말에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땅거미가 졌을 때만 날기 시작한다”는 말로 아주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371. 관념주의자의 견해는 사람들에게 자칫하면 배타심과 잔인성과 포악한 행동을 일으키기 쉽다. 이에 비해서 자유주의의 원리는 사람들에게 관용심과 이해심과 타협심을 길러 놓는다.


러셀은 관념주의 진짜 안 좋아하는구나. 나도 별로.


 


372. 계몽 사상가들은 정열을 불안스런 마음으로 방관하는 경향이 있는데, 키에르케고르는 정열이 다시 철학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게 하고 싶어 했다. 이 성향은 시인들이 전개한 낭만주의 노선이며, 선은 지식에서 그리고 악은 무지에서 나온다고 보는 윤리관과 대립하고 있다. 실존주의는 오캄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의지를 이성으로부터 단절함으로써 사람은 철학적 반성의 결론이 아니라 의지의 자발적 기능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 일은 아주 쉬운 방식으로 신앙이 다시 한 번 사람의 정신생활에 들어설 가능성을 만들어준다.


 


373. 키에르케고르는 의지가 이성보다 선행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간에 관해서 사람은 지나치게 과학적이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폈다.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은 한 사람의 영혼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종교는 실존적 사고로 접근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374. 이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이성을 과대평가 하는 일만큼 위험하다는 걸 명심하는 게 좋은 일이다. 헤겔은 이성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이성이 우주를 만들어 낸다고 주장하는 과오에 떨어졌다. 키에르케고르는 반대편의 극단으로 치달아 결국 이성은 우리가 참으로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 즉 구체적인 것을 파악하는 데에는 쓸모가 없다고 단언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과학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낭만주의를 지탱하는 최고의 원리들과 일치하고 있다.


 


376.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철저히 악한 것으로 보며, 누구나 살아가면서 겪지 않을 수 없는 모든 고통을 이 의지 탓으로 돌린다. 게다가 그는 헤겔이 그랬던 것처럼 지식을 자유의 원천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의 근원으로 간주한다. 이리하여 쇼펜하우어는 이성주의자들의 낙관주의 대신에 행복이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는 우울한 인생관을 보여주고 있다.


의지가 악한 것? 뭔 소리냐, 이건.


 


379. 니체의 주장에 따르면 자유인은 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루려고 분투노력해야 할 목표는 신이 아니라 최고 수준의 인간이다.


 


공리주의 철학과 그 이후


 


383. 모든 혁신적 기계의 발명은 그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그렇지만 대체로 보아 인간은 보수적 동물인 것 같다. 그래서 인간의 기술적 재능의 발달이 정치적 지혜의 터득을 앞질러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로 인해 생긴 불균형을 인류는 아직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놈의 스마트폰….


 


385. 선은 쾌락이고 악은 고통이라는 것, 따라서 사람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상태는 고통을 상쇄하고 남는 쾌락의 양이 가장 많은 상태라는 것, 이 견해는 벤담에 의해 채택된 후 공리주의로 알려지게 되었다.


쾌락이 나쁘지 않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을 듯. 역사적으로 쪼끔만 더 일찍 등장했으면 좋았을 사상.


 


387. 사회 개혁에 헌신한 사상 운동으로서 공리주의는 모든 관념주의 철학이 이루어 놓은 것을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확실하게 성취하였으며, 게다가 그런 성과를 공연한 소란을 별로 일으키지도 않으면서 성취하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리는 다른 해석을 끌어낼 수 있는 소지를 가지고 있다. 지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이 원리를 경제 활동의 자유 방임과 자유 무역을 정당화시키는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391 공리주의 윤리학은 민주주의 사회에 알맞은 이론이다


그런 듯.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대충 배운 듯 한데, 다시 보니 새롭다.


 


398. 이상의 모든 사실은 마르크스가 정치 이론가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선동가이자 혁명을 선전하는 논객이었음을 알려 준다. 그의 글들은 흔히 일종의 의분과 강직한 윤리적 어조를 띠고 있는데, 이런 어조로 말하는 것은 그의 말대로 모든 상황에서 변증적 과정이 필연적 진로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면 앞뒤 조리가 맞지 않는 일이다.


철학자는 필연적으로 초연, 냉철, 무심의 모드로 움직이는가. 말하다보니 이거 외계인 모드. 철학자는 학창시절 대체로 왕따였을 듯.


 


400. 콩트는 우리가 경험에 의해 직접 주어지는 것을 가지고 철학을 시작해야 하며, 현상의 배후로 넘어가는 일을 삼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므로, 자신의 철학을 실증 철학이라고 불렀다.


 


408. 제임스의 구별에 따르면 이성주의 이론은 물질적인 것을 희생시키고 정신적인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성주의 이론은 낙관적인 성향을 보이고 통일을 위해 노력하며 실험을 무시하고 내성을 중시한다. 이를 '유연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경험주의 이론이 있는데, 이 이론은 비관적 성향을 보이고 이 세계의 부분들이 분할되어 있음으로 인정하며 사변적 궁리보다는 실험을 더 좋아한다. 이를 '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415. 역설에 얽혀 있는 난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탐구되었으나, 이 난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반적 의견 일치에는 아직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러면서도 철학자들에게 다시 한 번 문장을 구성하는 방식과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철저히 음미할 필요가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현대철학


 


418. 전문화를 재촉하는 현실적 필요성과 압력은 젊은이들의 관심의 폭을 넓히고 또 그에 대해 이해력을 갖출 충분한 시간을 갖기도 전에 곧장 좁은 영역으로 밀어 넣어 버린다.


지나친 전문화가 개인을 무장해제시켜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 이거 지배층이 너무 조종하기 너무 쉬운 존재들이자, 구조 아닌가. 현대는 그래서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으로 위험한 시기다.


419. 지금까지 이 세계를 완전한 파멸로부터 구해온 것은 역설적인 말이지만 반복해서 나타난 통치자들의 무능이었다.


. 통치자들이 유능하기까지 했으면 정말 지상에서 영원한 지옥이 재현될 뻔?


 


427. 베르그송의 경우에는 논리 그 자체가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브래들리는 이성주의자라 할 수 있고, 베르그송은 비이성주의자라 할 수 있다.


 


428. 베르그송은 본능의 최고 형태를 직관으로 간주하는데, 이 직관은 이 세계와의 직접적 일치에 도달하는 일종의 정신 활동이다. 그는 지성은 경험을 왜곡하는 반면에 직관은 경험을 실제 그대로 파악한다고 본다.


 


440. 서양문명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서양의 기술 그 자체만이 아니라 기술을 개발하였던 과학적 전통과 철학적 전통이었다. 이 힘들은 그래야만 할 필연적인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443. 야스퍼스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일과 자유롭다는 느낌을 경험하는 일은 바로 이 수준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자유가 이성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에 자유에 관해서는 합리적 설명을 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그는 자유롭다는 느낌이 불안한 느낌 또는 그가 키에르케고르에게서 빌려 온 용어로 말하면 두려움과 동반하여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즉 객관적 존재의 수준은 이성의 지배를 받는 반면에, 자아-존재의 영역은 기분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할 수 있다.


 


444.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매 순간마다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고 있다. 그러니 인생에는 전통과의 연결이나 개인의 생활에 이미 일어난 사건과의 연결은 전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새로운 결단을 내릴 때마다 완전히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셈이다.


새로운 관점이다.  새로운 결단을 내릴 때마다 새 인생을 선택하는 것이라. 좀 멋진 듯.


 


맺음말


 


454.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문제로 삼으면서 주의를 기울였던 문제들 중의 하나는 이 세계의 일반적 특성들이 어떤 것인가에 관해서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이 세계의 일반적 특성을 설명하려는 노력. 그러니 과학과 철학이 같은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맞다.


 


455.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건 오직 사람일 뿐이며, 사람이 명제를 언어로 진술할 때에는 오류에 떨어질 가능성이 항상 있는 법이다.


 


456. 인간이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할 것들 중의 하나는 이 세계 속에서 행동하는 일이다. 인간이 기울이는 과학적 노력은 수단에 관련이 있는 반면에, 행동에 관한 관심을 목적을 다룬다.


 


459.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시도해 볼 수 있는 어떤 방법도 강압에 의해 금지되지 않도록 탐구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말이지 음미되지 않은 삶은 사람에겐 살 가치가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삶을 음미한다. 맛본다.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닌, 천천히 그 맛을 인식하고 즐기고 온전히 제 것으로 하는 삶. 그런 삶을 산다어떻게 하는 것이 음미하는 삶일까. 음미하며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나만 달라지면 되는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음미하는 삶을 위해. 풍덩!  


 


  1. 내가 저자라면

     


옮긴이의 말


지은이의 말


머리말


1.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2. 아테네의 철학


3.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4. 초기 기독교 철학


5. 스콜라 철학


6. 근대 철학의 발흥


7.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


8. 계몽 운동과 낭만주의 철학


9. 공리주의 철학과 그 이후


10. 현대철학


맺음말


 


, 이 단순한 목차에서 느껴지는 자신감이라니. 그렇지,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러셀인데. 러셀을 처음 만난 것은 행복의 정복에서다. 제목처럼 참으로 행복하게 정복당했던 전작의 기억을 더듬으며, ‘서양철학사에 도전했다가 역시나 그리스철학에서 주저앉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서양의 지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스 철학아, 너는 왜 자꾸 엉뚱한 수식을 들이대며 안 그래도 난해한 철학사를 수학사처럼 헤집어 놓는 것이냐수학과 철학을 전공하신 남편은 옆에서 잘난 척하며 묻지도 않은 배경 설명을 해대는데 아 놔나는 이래도 저래도 머리가 아플 뿐이었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한 가지 주제, 나의 깨침은 무엇이어야 하는 지 이런 저런 구절을 옮겨적은 뒤에도 뚜렷이 떠오르는 것은 없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설악산 대청봉을 오른 뒤 북한산 백운대에 도전하는 사람처럼 철학이 친근해질 줄 알았는데 그럴 기미는 없다…. 뜻을 지대로 음미하며 읽은 부분이 책의 절반도 안 될 것이다. 그래도 머리를 끄덕인 부분은 있었다.


   


444.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매 순간마다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고 있다. 그러니 인생에는 전통과의 연결이나 개인의 생활에 이미 일어난 사건과의 연결은 전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새로운 결단을 내릴 때마다 완전히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셈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내가 일할이라도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그의 주장 똰 제대로 이해했는지 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매 번의 선택이 곧 새로운 인생을 여는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 이것은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매 순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매우 편리한 문구다. 가져가야 하겠다.   


 


459. 언론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는 탐구자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시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를 성장시키는 위대한 촉진제이다. 자유로운 사회에 누구나 이 두 가지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정도까지는 지금 관심의 대상인 지식이라는 좋은 것에 이바지할 수 있다. 이 말은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누구나 똑 같은 의견을 갖데 된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시도해 볼 수 있는 어떤 방법도 강압에 의해 금지되지 않도록 탐구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말이지 음미되지 않은 삶은 사람에겐 살 가치가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철학사는 러셀의 오류를 바로 잡는 역사라 했다는데. 막상 러셀의 철학에  대한 공헌은 자세히 다뤄지지 않은 것이 이 책이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남의 철학들을 줄줄이 나열해 놓은 책이라 할지라도 러셀의 사상과 기질을 엿볼 수 있는 주옥 같은 해석이 군데군데 드러난다. 책의 대단원을 내리는 마지막 문단에서 러셀이 풀어놓은 사상의 자유와 자유로운 사회의 가치, 음미하는 삶의 의미에 대한 단상은 철학자로서의 러셀은 물론, 행동하는 사상가이자 교육자로서 러셀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소중하다. 


 


이 책의 아쉬운 점은, 제자인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부분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고 있건만 러셀 자신의 연구에 대한 분석이 미흡하다는 점이다. 독자로서 아쉬운 부분이지만, 고대에서 현대에 이른 철학의 역사를 분석하고 정리하는 저자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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