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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12일 17시 22분 등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 이윤기 역, 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1) 저자 조사

 

이 책은 읽을 때마다 길을 잃는 미궁이다. 타이핑을 하면서 내용을 이해했다가 보담은 그냥 베껴쓰기, 말 그대로 필사를 하고 있는 것에 만족했다. 독서백편의자현, 여러 번 읽다보면 언젠가는 더 이해하게 되겠지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용납한다. 그는 비교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였다. 어떻게 이런 방대한 것들, 세계를 넘나드는 것들을 다룰 수 있는 걸까? 경외심의 표현으로 징글징글하다단어를 바친다.

 

캠벨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캠벨의 책을 몇 권 읽었다. 캠벨이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한 부분을 찾아서 연결해보고 싶다. 하지만 이건 다음 읽기의 과제로 넘긴다. 두 가지 추적의 단서를 기록해둔다. 하나는 <신화와 인생> 86쪽부터 101쪽의 것이다. 다른 책에서 한 번은 읽었음직한 이야기가 캠벨의 1인칭 주어나는으로 시작해 나온다. 우드스탁에 들어가 5년간 책만 들이 팠고, 마치자마자 8개월간 횡단여행을 갔다고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는 내용이다. 나는 <신화와 인생>에서 이 부분을 가장 좋아한다. 구본형 <깊은 인생> 조셉 캠벨 부분이 이 부분과 아주아주 유사하다. 내 관심의 초점은 그가 썰을 풀었던 천복을 따라 사는 삶을 그의 삶으로 증거할 수 있느냐다. 나도 천복을 따라 살아보려고 하는데 그의 말이 거짓이거나 삶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이면 아주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건 일과 사랑 두 가지 중에서 그의 일에 대한 부분이다.

 

또 하나의 관심사는 그의 사랑에 있다. 그가나는을 주어로 해서 아내를이라고 부르면서 아내와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할 때 내 눈은 반짝인다. 제대로 된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세상의 번듯한 것을 사랑과 결혼, 성과 집안일이라는 대롱으로 투과시켜 보는 것은 여성지적 관점을 가진 나의 관심사다. 요 부분은 짧으니 몇 가지 인용구를 베껴다놓을 수 있겠다.  

 

진과 결혼할 당시 나는 그것이 십자가형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신랑이 신부에게 가는 것은 십자가로 가는 것과 같다. 그리고 신부 역시 신랑에게 자기 자신을 똑같이 내어놓는다. 결국 이것은 호혜적인 십자가형이나 마찬가지다. - 73

 

나는 젊은 여성들을 가르친 바 있기 때문에 만약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할 경우, 여성이 남편의 직업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유능한지를 깨닫고 놀란 바 있다. 물론 본인은 남편의 직업을 공부한 바 없지만 누구 하나라도 실패하면 한 쌍을 모두 파괴하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내가 쓴 것을 모두 진에게 읽어주고 그러면 아내는 내게 필요한 비판과 지원을 해주었다. 남성은 가끔 협동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듯 생각할 때가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배후의 여성과 협동하는 남성은 그렇지 못하고 혼자인 남성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 – 334

 

신혼 때에 진은 내가 아무리 운전을 못해도 그냥 묵인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어떤 심리적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은 순간이 찾아왔다. 즉 그 이후에 한동안 아내가 내 운전 방식에 대해 비판을 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내가 방향을 지시하는 단계가 찾아왔다….결국 나에 대해 아내가 어느 정도 알게 된 다음부터는 아내가 나를 주도하게 되었다집 사람은 무척이나 방향 지시를 잘했다. 나하고는 달랐고 그저 그뿐이다. 이것이 바로 위험한 침대다. – 335

 

내 삶은 한 가지 직업, 한 명의 아내, 한 명의 이미지였다. 바로 성배다. 이것은 보수주의라고도 알려져 있다. – 364

 

왜 진과 결혼을 하게 되었냐고 묻는 장면이 있었다. <신화의 힘>에서 그는 가슴이 제대로 된 상대를 말해줄거라고 말했다. 결혼에 대해영혼의 동질성을 가진 이와의 재회라고 한 건 얼마나 삐까번쩍 멋진 말인지. 캠벨이 말하는 사랑 또는 소울메이트 감별법, 그리고 제대로 된 결혼에 관심이 있다. 이런 주제에 대해 레포트 또는 자술서를 써보고 싶다. 이전 저자 조사에서도 굼금했었는데 아직 실행하지 못했다. 언제나 틀린 문제를 또 틀리는 수학시험 같다. 하지만 그는 매력적이다. 다 읽지 못한 책, 뭔 소린지 하나도 못알아 들었지만 다시 보고 싶은 영화 같다. 나는 인용문을 타이핑 하는데 너무 지쳐서 저자의 삶을 음미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캠벨 옹은 거대한 산처럼 내 앞에 버티어 서서 내게 메롱한다. 나는 이번에도 헥헥대다가 죽을 똥을 쌌다. 이런 식의 독서를 계속 해도 좋을 지 난감하다.

 

(2) 저자에 대한 개인적 평가

 

힝힝 거리면서 속으로는 사냥개처럼 킁킁거리며 이 사람이 자기가 말한 대로 사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고 염탐하고 의심하고 있다. 그는 follow your bliss 하는 사람이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2.   내가 저자라면

 

(1) 뼈대와 목차

 

서문에서 책을 쓴 의도를 간략히 밝힌다. 이건 산을 점화하는 성냥 같은 거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프롤로그, 본문, 에필로그다. 프롤로그에서 책 전체 구조를 밝힌다. 우선 원질신화를 설명한다. 원질신화는 아파트 모델하우스, 빵집 앞에 잘라놓은 시식용 빵접시, 농부가 쌀, 사과, 소고기를 납품했을 때 무작위로 찔러서 한 개를 까본 후 전체에 등급을 매기는 견본 같은 의미다. 원질신화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웅의 모험 과정이고 하나는 세계는 어떠한가에 대한 설명이다. 본론 1부에서 영웅 모험을 2부에서 세계에 대한 걸 이러저러한 순서로 쓰겠다, 순서는 영웅모험의 단계도다. 요점정리 하려면 하시라 안내하고 있다.

이번이 세번째 읽기인데 역시나 2부가 이해하기 어렵다.     

 

(2) 보완점

 

프롤로그가 너무 어려웠다. 본문은 오히려 흥미로왔다. 예로 든 신화들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지끈거리는 프롤로그는 발 앞이 가시덤불이어서 발을 어디 디딜지 잘 진도가 안나가는데, 옆에서마저 원시림이 자라고 있어 무섬증을 일으키는 숲 같았다. 프롤로그를 좀더 쉽게, 짧게 다룬 후 에필로그에서 이런 것을 좌르륵 정리하는 것이 읽기에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니면프롤로그의 썸머리처럼 이런 내용인데 좀 어려우니까 독자는 이 부분을 한꺼번에 이해하려고 뎀비면 좌절해서 산에는 안올라가고 산 아래 막걸리집에 주저앉을 위험이 있다. 일단 산에 풍덩풍덩 가라. 한 번 읽은 후 다시 돌아와 읽으면 좋겠다. 나도 요기가 좀 어렵더라이런 저자의 귀뜸이나 역자 후기가 있으면 좋았겠다. 그럼 어렵다는 예고를 미리 들었으니, 나는 프롤로그 읽는데 진땀 내며 한숨을 덜 쉬었을 것 같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처럼 독서력이 미천한 사람에 한해서다. 근데 많은 이들이 읽으려면 이런 무식한 사람이 기준이 되어도 좋을 것 같다. 나의 독서력은 그래도 정상분포 곡선의 평균 범위에 들기 때문이다. 

 

 

(3) 감동적인 장절

 

1 이 책의 주제는 세계의 상이성 보담은 상사성에 대해서라는 번역자의 말, 그 말이 풍기는 애정

 

나는 처음부터 종교다원주의의 관점을 가지고 이 책에 달겨 들고 있었다. ‘한 산을 오르는 여러 갈래 길이 있다. 자기한테 잘 맞는 길을 통해 가라. 자기 종교에(길에) 진실하기 어렵다. 진실해라. 정상에서 만나자는 게 내 안에 녹아있는 종교다원주의의 정의다. 가치관의 척추가 형성되던 대학 때 들어왔다. 그 후로 여러 종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혼란스럽지 않았던 건 이 개론 덕분이었다. 그런데 스무 살은 20년 전이었고, 90년대 초반이었다. 나에게 이런 가치관이 근원하는 샘은 종교학 수업과 기독교문학 수업을 가르치던 두 분 교수님이다. 이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한국에 번역된 것이 1985년이니, 외국에서 공부를 했던 그 교수님들을 통해 대학 신입생인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조셉캠벨의 저서, 그리고 우리 사회 전체의 의식변화를 꿈꾼 번역자, 출판자의 노고가 깔려 있을 것이다. 고맙다. 그리고 세계 종교와 신화는 그의 말대로 매우 비슷했다. 

 

그이 책이 다루는 것은 상사성이지 상이성이 아니다. 일단 이런 상사성을 이해하면 상이성은 일반적으로(그리고 정치적으로) 믿어지는 정도만큼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리라 믿는다. 저자가 바라기로는 이러한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성을 결실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 경은진리는 하나다. 현자는 이를 여러 이름으로 드러낸다고 했다. – 7 (역자 서문)

 

그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신화는 꿈과 동일한 문법을 갖는다. 가령 프로이트의 이른바 <꿈의 작업>, 죽 응축, 치환, 형상화 작업은 대부분의 영웅이 공유하는 경험인 비정상적인 탄생, 어린 시절의 고난, 방황, 조력자와의 만남, 기적적인 권능의 획득, 귀환의 도식이 캠벨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캠벨은 무대가 다르고 사건이 다르고 의상이 다르지만, 인간의 무의식이 투사된 영웅, 말하자면 인간의 집단이 그려낸 영웅 신화는 거의 일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서로 접촉이 없는 세계 각 문화권의 무수한 영웅 신화와 심층 심리학의 꿈 해석에서 재발견되는 영웅의 상징 체계를 분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 가운데 하나의 영웅, 그러니까 모든 영웅 신화의 본(원형)이 되는 하나의 영웅을 떠올린다. 491

 

이 책을 우리 글로 옮긴 뜻은 그러므로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믿음, 다른 이들의 종교라면 듣도 보도 않고 흰 눈을 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체로운 종교 정신을 곧추세우는 데 밑바탕 삼을 수 있다면 남의 집(종교)도 좀 기웃거려 보는데 인색해서야 되겠느냐는 뜻에서다. 492 (역자 후기)

 

 

2 제의, 신화를 잃어버린 현대인에 대한 염려, 현대의 영웅이 갈 방향에 대한 제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지구 전체가 사회이고, 한 동아리여서, 입문의례에 의해 내 종족, 내 인종, 내 종교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현대의 사람들은 과학기술이 밝혀낸 여러 가지 발견에게 쫒기어 소독, 박멸당하는 신화영역에서 삶의 본이 되는 지도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을 도구로 삼더라고,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을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설명체계(신화)가 필요하다. 창조해야 한다.  

 

오늘날의 사회는 지구지, 경계선에 갇힌 국가가 아니다. – 485

 

사람들은 비교적 무의식적으로 시민 및 종족으로서의 정례를 따름으로써 대부분 위험 부담이 적은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 역시 구원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대속자들에 의해 아득한 옛날 인류에게 주어져 수천 년간 계승되어 온 사회의 상징적 도움이라는 미덕, 통과 제의, 은총으로 입은 성사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다.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일 수 밖에 없는 사람이란 내부의 소명도 외부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다. – 37

 

우리 선조들이 신화적 종교적 유산의 상징적 정신적 의식에 힘입어 극복해왔던 심리학적 위험들을 오늘날 우리가(비신자인 경우 아니면 신자라고 하더라도 계승받은 믿음으로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납득할 수 없을 경우) 혼자서 혹은 시험적, 즉흥적으로 더러는 도움이 도리만한 지침도 없이맞서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모든 신들과 악마들의 존재를 이성의 이름으로 부정한 개회된 현재인인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다. – 139

 

현대 영웅의 위업은 영혼이 균형을 이루고 있던 잃어버린 아틀라스 대륙의 불을 다시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위업이 현대의 혁명이 성취시켜 놓은 것으로부터 등을 돌려서 이룩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 485

 

감히 소명에 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화해시켜야 하는 존재의 거처를 찾아내는 인간인 현대적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 던지기를 기다릴 수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된다.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 488

 

3 예로 읽은 신화나 민담 중 매력적인 것을 그림책으로 읽고 싶다.

 

러시아의 숲에 산다는 wild woman. 물에 사는 돌 하르방, 입문과정에서 납작 엎드리게 하는 시험, 영웅의 귀환과정에서 몸을 바꾸어 탈출하는 이야기가 특히 재미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세계와 미지의 세계 경계선에 선 존재에 대한 부분이다. 마녀나 도깨비쯤 되려나? 아주 넋을 빼놓고 홀렸다. 서남 아프리카나 태평양 어느 섬의 이야기라는 식으로 출처가 영 엉뚱할 때 더 즐거웠다. 이미 이런 그림책이 많이 나와있을 것 같다. 찾기 귀찮으니까 한 출판사에서 이걸 다 내어주었으면 좋겠다 생각만 해본다. 한 번 찾아서 쌓아놓고 야금야금 쪽쪽 먹고 싶다. 아이들도 이런 이야기를 즐겁게 읽을 것 같다. 

 

4 미노스왕의 예를 들어서 영웅은 이전 세대를 극복하며 온다는 말

 

그 자신이 변한다면 외부에서 변환의 힘이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읽었다. 예수님, 부처님처럼 인류 범위의 문제를 고민하지는 못하지만 내 개인사에 있어서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어떤 과제를 가지고 있을까?  

 

세계 전역의 신화와 민화는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제 이득으로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미노스 왕은 그가 속한 사회의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의미로 희생을 드려야 하는 수소를 사유물로 취했다. 그는 자기 상상력보다는 경제적 이득을 앞세웠다. 때문에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생의 역할을 감당하는데 실패했고, 우리가 보았듯이 엄청난 불운을 겪어야 했다. 신성이 그 자신의 적이 된 것이다.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즉 자신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 82

 

괴룡과 압제자는 그 전세대, 즉 구세주를 맞던 그 이전 세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용 시험자, 무섭고 잔인한 왕)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원이 될 생명 에너지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441

 

어제의 영웅은 오늘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폭군이 된다. 442

 

5. 영웅의 모험 지도를 얻다. 이걸 연구원 과정이나 개인적인 과제를 풀어가는 본으로 삼으리라.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는 <신화와 영화>가 있는데 이 책의 의도는 영화 스토리를 영웅 여정과 비교해보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인 이야기>에 나오는 인간 영웅들, 페르세우스, 테세우스, 오이디푸스, 오디세우스, 아이네이아스, 헤라클레스, 아킬레우스, 헥토르를 이 과정에 적용할 수 있을까? 또는 실패한 영웅들 특히 남성영웅의 조력자 역할을 했던 아리아드네나 메데이아는 어디서 좌초했는 지 알 수 있을까? 이 질문, 숙제가 생겼다.

 

지금부터 개개인의 운명을 담은 세계의 상징적 그릇인 수많은 이야기를 복합적인 모험의 형태로 소개해보겠다.

 

<분리> 혹은 <출발>의 단계는 제1, 1장에서 다섯 개의 소제목으로 나뉜다.

(1)   <모험에의 소명> 혹은 영웅 소명의 표적

(2)   <소명의 거부>, 혹은 신으로부터의 우매한 도주

(3)   <초자연적인 조력>, 즉 어느 순간까지의 모험에 도전한 사람에 대한 뜻밖의 도움

(4)   <첫 관문의 통과> 그리고

(5)   <고래의 배>, 혹은 밤의 영역으로의 여행이다.

 

<시련과 입문의 성공>은 제 2장에 6개의 소제목으로 소개된다.

(1)   <시련의 길>, 혹은 신들의 위험한 측면

(2)   <여신과의 만남>, 혹은 다시 찾은 유아기의 행복

(3)   <유혹자로서의 여성>, 오이디포스 고뇌의 체득

(4)   <아버지와의 화해>

(5)   <신격화>

(6)   <궁극에의 홍익>

 

<회귀와 사회와의 통합>

(1)   <회귀의 거부>, 혹은 버림받은 세계

(2)   <불가사의한 도주> 혹은 프로메테우스의 도주

(3)   <외부로부터의 원조>

(4)   <회귀 관문의 통과>, 혹은 일상의 세계로의 회귀

(5)   <두 세계의 주인>

(6)   <살기 위한 자유>, 즉 궁극적인 홍익의 성질과 기능이다.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구절

 

검정 글씨 : 처음 읽기 인상 깊은 구절

초록 글씨 : 두 번 읽기 인상 깊은 구절. 초록 밑줄1,2회 공통되는 부분

흙색 글씨 : 세 번 읽기 인상 깊은 구절. 1,2,3회 공통되는 부분은 노란 음영으로 표시

개인적 감상 : 파랑색

 

머리말

 

지그문트 프르이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종교 교의에 녹아 들어 있는 진리는 대개가 변형된 데다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로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아이를 상대로 갓난아기는 황새가 물어다 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황과 흡사하다….이 경우 우리는 상징으로 분식된 진리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우리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진리의 상징적 분식을 피하고 아이들의 지적 수준에 맞추어 사건의 진상을 알게 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5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옛 현자들은 말을 하되 언외의 뜻을 거기에 싣는데 소홀함이 없었다. 따라서 그분들의 상징적 언어를 거듭 읽되 그 가르침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고문집 편집자의 재주쯤은 가지고 있어야 할 듯 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징의 문법을 터득해야 할 터인데, 저자가 알기로는 이 문을 여는 열쇠로 정신분석만한 현대적 길잡이는 따로 없는 듯 하다. – 6

 

다음 단계는 세계 각처에서 채집된 신화와 민간 전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상징으로 하여금 스스로 입을 열게 하는 일인 듯 하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면 그 유사성이 한눈에 두드러져 보이고,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오랜 세월 삶의 길잡이로 삼아온, 방대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일정한 형태로 보존된, 바탕 되는 진리와 만나게 된다. – 6

 

이 책이 다루는 것은 상사성이지 상이성이 아니다. 일단 이런 상사성을 이해하면 상이성은 일반적으로(그리고 정치적으로) 믿어지는 정도만큼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리라 믿는다. 저자가 바라기로는 이러한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성을 결실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 경은진리는 하나다. 현자는 이를 여러 이름으로 드러낸다고 했다. – 7

 

프롤로그. 원질신화

 

1 신화와 꿈

 

 

의미나 내용 명세서는 별로 다른 것이 없다. 즉 변화무쌍한 듯 하지만 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야기의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 13

 

신화는 다함 없는 우주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종교, 철학, 예술, 선사 인류 및 유사 인류의 사회적 양식, 과학과 기술의 으뜸가는 발견, 바닥째 흔들어 수면을 엎어버리는 꿈, 신화의 불가사의한 고리….모두가 이 은밀한 통로를 지나 인류의 문화로 현현한 것들이다.

놀라운 것은, 심원한 창조적 중심을 촉발하고 고무하는 특징적인 효과가 아이들 놀이방에서 굴러다니는 하찮은 동화책에도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한 방울의 바닷물이 바다의 본질을 고스란히 대표하고, 하나의 벼룩 알에 생명의 신비가 두루 깃들여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이는 신화학의 상징은 꾸며낸 것도 아니고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을 수도, 발명될 수도, 억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시간을 초월한 이 환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어느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신화는 왜 어느 곳에서 채집된 것이든 그 다양한 의상 아래로는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신화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 14

 

오늘날 많은 분야의 과학은 이 수수께끼의 분석에 공헌하고 있다. – 14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정신 의학에서 떠오른 뜻밖의 새로운 사실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의 대담하고도 획기적인 저술은 신화학도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자료다. 왜냐하면 세부적인 데에 이르면 견해가 다소 다를 수 있고, 특정 사례나 문제에 대한 해석이 서로 상반되는 경우도 있지만, 프로이트와 융과 그 후계자들은 영웅과 신화의 해석이 현대로 계승되었음을 여지없이 증명해 내었기 때문이다. – 15

 

제대로 된 일반신화학은 없어도, 사사롭고 드러내어 인정받지 못한 미성숙 단계에 있다 뿐이지, 그래도 우리 내부에는 속으로 알찬 꿈의 판테온이 있다. 최신형 오이디포스의 화신, 미녀와 야수의 속편이 오늘 오후에도 뉴욕의 42번가와 50번가 모퉁이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15

 

얘야 너무 상심 마라, 저 양반은 갔어도 너는 나를 잘 보살펴 줄거다나는 내 어머니가 내 뺨에 입술을 대는 순간 잠을 깼습니다. 나는 우리 집 장남으로 나이는 스물셋입니다. 지금 한 일년째 아내와 별거 중입니다….아버지가 날더러 아내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을 때 딱 한 번 부딪혔을 뿐입니다. 나는 아내와 잘 지낼 수 없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16

 

여기에 소개한 가장은 놀라우리만치 순진하게도 자신의 정신적 에너지를 사랑이나 결혼생활에 쏟는 대신 최초이자 유일한 정서적 곤욕의,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극단적인 상태, 즉 유아기의 희비극적 삼각관계(어머니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아들 대 아버지의 대치상태)에 얽힌 채 자기 상상 속의 은밀한 구석자리에 은거하고 있다. – 16

 

16 인간이 가진 심성 중에 가장 끈질기게 남는 성향은 동물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어머니 젖가슴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16 어머니의 보호 아래 자궁 내 체재기간은 연장된다. 그래서 보호가 필요한 유아와 어머니는 출산이라는 대격변을 치르고도 육체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몇 개월 간이라는 이원일체 상황을 형성한다.

 

유아가 최초로 적의를 갖는 대상은 최초로 애정을 투사하는 대상과 일치하고, 유아가 최초로 갖는 이상은 (이때부터 유아는 축복, 진리, 아름다움, 완전함이라는 이미지를 무의식 기저에 간직한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라는 이원일체 상황이다. 불행한 아버지는 다른 현실로부터 자궁 안에서와 똑 같은 상태로 재현된 이 지상의 천국을 침범한 최초의 틈입자이다. – 17

 

유아는 아버지를 적으로 체험한다. 유아는 좋은 것, 혹은 어머니의 정상적인 속성인 옆에 있고, 먹여주고, 보호해주는 대상에게 애정을 쏟는 한편 원래 나쁜 것, 혹은 어머니가 없는 상태에 다 쏟던 공격의 화살을 아버지에게로 돌린다. – 17

 

유아가 죽음(thanatos : destrudo)과 사랑(eros : libido)의 충동을 구분하는 숙명적인 행위는 지금은 널리 알려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바탕을 형성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50년 전에 성인이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를 오이디포스 콤플렉스로 지적한 바 있다. – 17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오이디포스 왕은 우리들 자신의 유아기 원망 願望을 대신해서 충족시키고 있을 뿐이다. -18

 

그는 또 이렇게 쓰고 있다. 성생활의 병리학적인 모든 혼란은 발육이 억압당했기 때문에 야기된 것으로 보아도 좋다. – 18

 

성숙은 커녕 감정이 유아기의 로맨스에 머물러 있는 연인의 아내가 되는 딱한 사정은 또 하나의 현대인의 엉뚱한 꿈 이야기를 들어보면 짐작이 될 듯 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기묘하게도 고대 신화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 19

 

무의식은 꿈을 통해서, 혹은 벌건 대낮에, 아니면 정신 착란을 이용하여 갖가지 부질없는 몽상과 기이한 상념과 공포와 정신을 어지럽히는 허상을 마음으로 올려 보낸다. 인간이라는 왕국에서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비교적 깔끔하고 비좁은 처소의 바닥 밑으로는 뜻밖에도 알리딘의 동굴이 뚫려 있다. 여기에는 보물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꼬마 정령, 그리고 우리로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거나 감히 우리 일상의 삶으로 통합하지 못했던, 불편한 혹은 억압당한 심리적 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감지되지 않은 채 그대로 눌려 있지만 혹 한 마디 말, 주위의 냄새, 차 한 잔의 맛, 또는 어느 사람의 시선에 촉발되면 무서운 사신 使臣으로 우리 머리 속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무섭다고 하는 까닭은 이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 질서의 바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 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 21

 

꿈을 읽는 현대 과학인 정신분석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이 같은 비현실적 이미지에 유념하라고 했다. 분만 아니라 정신분석학은 이런 이미지가 스스로 기능하게 하는 방법도 발견했다. 자아 발달의 위기는 민간 전승이나 꿈의 언어에 노련한 전문가의 감시안 앞에서 저질러진다. – 21

 

이 전문가가 시험과 비전 秘典 (책 전)을 관장하는 원시림 성소의 주의, 적 고대 비법 전수자나 영혼의 안내자로서의 역할과 성격을 떠맡게 된다. 의사는 신화 영역에 관한 현대의 명인이며, 그 비방과 영험이 있는 주문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의사의 역할은 신화나 동화에서 주문으로 무서운 모험의 시련과 위기에 몰린 영웅을 도와주는 노현자 old wise man(woman은 내가 넣었다)의 역할과 같다. – 21

 

이런 이미지에 유념하고 원시 종족 사회나 과거에 융성했던 문명 세계로부터 보고된 갖가지 제의를 검토해보면, 우리는 이러한 제의의 목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적인 삶의 패턴은 물론 무의식적인 삶의 패턴까지 변화를 요구하는 변형의 문턱을 넘게 하려는 데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그런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 22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제의적 시련과 이미지가, 정신분석을 의뢰한 환자가 유아기 고착 상태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하는 순간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 22

 

내 환자 중 하나는 뱀이 동굴에서 나와 자기 사타구니를 깨무는 꿈을 꾸었다. 그가 이 꿈을 꾼 것은 분석을 믿고 자신을 친모 복합(mother complex)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23

 

신화와 제의의 중요한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있는 타락의 길을 버리고, 영험적인 정신의 길을 따르게 하는 우리 내부의 고차원적인 신경증인지도 모르겠다. – 23

 

우리는 아직도 남아 있는 유아기의 이미지에 발목이 잡혀 있고, 따라서 어른으로 가는 길을 애써 좆으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전후가 도착된 슬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삶의 목표가 어른이 되는데 있지 않고 청년으로 머물러 있는 데 있으며,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오는데 있지 않고, 어미니와 유착되는데 있다고 믿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남편들은 소년 시절이라는 이름의 신전에서, 아들에 대한 부모의 소원이었던 법률가, 실업가, 혹은 지도자를 섬기고 있는가 하면, 아내들은 결혼한 지 14, 두 아이를 낳아 길러놓고도 여전히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다. 이러한 사랑은 켄타우로스, 실레노스, 사튀로스, 아니면 판과 흡사한 탐욕스러운 이쿠부스 (잠자는 부인을 범한다고 믿어지는 악마)나 줄 수 있는 것인데, 아내는 위의 신화적 모티프가 등장하는 2차적인 꿈으로 이것을 경험하거나 최근 영화를 통해서 본 영웅의 모습으로, 성욕의 여신이 기거하는 바닐라 지붕의 신전에서 경험하려 하는 것이다. – 24

이 구절과 통하는 부분이 <신화의 힘>에 있었다.

 

24 이 비의적 이미지는 우리 심성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만일 이 이미지들이 신화와 제의를 통해 외부에서 들어오지 않으면 꿈을 통해 내부에 나타나게 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저작에서 인간이 사는 삶의 순환 주기 중 전반부의 통과와 그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의 태양이 천정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시기인 유아기와 사춘기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C.G.융은 후반부의 위기를 강조했다. 즉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 빛나는 태양이 마침내 그 고도를 떨어뜨리고 무덤이라고 하는 밤의 자궁 속으로 사라지기 위해 기를 꺾어야 하는 시기를 말한다. 우리의 욕망과 공포의 정상적인 상징이 인생의 오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는 반대되는 것으로 전화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 도전해 오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 25

 

우리는 자궁이라는 이름의 무덤 tomb of the womb에서 무덤이라는 이름의 자궁 womb of the tomb까지 완전한 순환주기를 산다. – 25

 

나 개인을 괴롭혔던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모험에의 두려움을 돌이켜볼 때 결국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유사 이래 이 세계 방방 곡곡, 그리고 문명의 갖가지 위장 아래서 남녀가 더불어 경험한 일련의 상투적인 변신이야기일 뿐이다. – 25

 

사회에서는 왕비를 몹시 비난했다. 그러나 왕은 자기에게도 자기 몫의 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문제의 수소는 옛날 미노스가 형제들과 왕위를 겨룰 당시 해신 포세이돈이 보내준 것이었다. 미노스는 왕위가 자신의 천부적 권리라고 선언하고 신에게 그 징표로 바다에서 한 마리 수소를 보내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는 제물과 예배의 상징으로 그 동물을 즉석에서 희생시키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그러나 그는 해신이 보내준 위풍당당한 괴수를 자기 소유로 하고 그런 걸물을 한 마리 갖는 것을 큰 복으로 여기는 한편 신이 크게 괘념치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괴수를 위해서라면 무역이권의 포기도 불사할 결심을 굳혔다….국내에서 왕비는 포세이돈의 계시에 이끌려 그 수소에 대핸 억누를 수 없는 욕정을 느끼고 있었다고대 전설에 따르면 더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왕비가 아니라 왕이었다. 그는 자기 허물을 알고 있던 참이어서 왕비를 비난할 수 없었다. 왕이 된 이상 한 개인일 수 없는데도 그는 공적인 사건을 개인적인 이익으로 취했던 터였다. 수소의 재등장은 맡은 역할의 기능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상징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이를 자기 소유로 하는 행위는 이기적인 자기 정화에의 충동을 나타낸다. 이렇게 해서 신의 은총을 입고 즉위한 왕은 자기 자신으로도 어쩔 수 없는 위험한 폭군이 되었다. – 27

 

권력 망자(세습에 의하지 않고 힘으로 정권을 잡은 참주)는 세계 신화, 민간 전승, 전설, 심지어 악몽에도 익히 등장하는데 그 특징은 어디에서건 동일하다. 그는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이다. 그는내 것이라는 탐욕스러운 권리에 걸신들린 괴물이다. 그가 저지른 황폐의 참상은 그의 세력권 안에 두루 널려 있는 것으로 신화와 동화는 한결같이 그리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집안,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심성, 우정과 도움을 빌미로 내민 그의 손길에 시들어버린 생명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가 구축한 문명의 넓이를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만에 빠진 폭군의 자아는 그의 사업이 제 아무리 번창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 그의 말에 저주를 내린다. 대개는 제어하기 어려운 자신의 충동적 소유욕의 그림자인 예상했던 주위의 공격에 스스로 놀라고 겁을 집어 먹고 만나는 족족 싸우고 격퇴시키는 이 입지전적인 독재자의 에고는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을 거두었을지라도 사실은 자신과 이 세계에 종말을 고하는 사자다. 그의 손길이 미치는 곳에는 절규가 있다. (담 너머로 들리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서 들리는 비참한 절규다). 빛나는 칼을 든, 일격으로, 일거수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땅을 자유롭게 할 대속자인 영웅을 부르는 절규다….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이 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어야 하는 문제다. – 29

자수성가한 이들의 자손 대에서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탐욕을 억제할 수가 없다. 힘이 들어도 쉴 수가 없다. 왕이 되기 위해 형제의 피를 묻힌 태종이 아니라 세종의 손에서 문화가 꽃 피었다. 다윗이 아니라 솔로몬 왕에게서 성대한 시대가 온 것과도 비슷하리라. 드라마의 주된 소재가 되는 졸부와 재벌 집안의 복잡한 이야기도 이 연장선의 이야기가 아닐까? 어떻게 다음 세대가 창조적으로 변화할 건지가 가장 큰 숙제인 듯. 이걸 해내지 못하면 희생과 아픔이 일어나는 것 같다. 

29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이 <탄생의 재현 palingenesia>(우리가 이 땅에서 오래 잔존하게 되어 있다면)이 있어야 한다.

죽음이 승리하는 날이 오면 죽음이 다가온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는 길 뿐,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길 뿐이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테세우스는 융성하는 그리스 문명의 상징과 권화로 외부에서 크레타로 들어왔다. 그 상징은 새롭고도 싱싱하게 살아있는 존재였다. - 29        

 

그러나 그것은 재생의 원리를 통해서 폭군의 제국 안에서도 찾아질 수 있는 존재다. 창조작업의 회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을 위한 위기가 따르는데 토인비 교수는 이 위기를 묘사하는데 해탈, 변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 단계, 즉 해탈 혹은 물러섬의 과정은 외적인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옮김으로써 황무지의 절망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히 평화로운 영역으로 물러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이 영역이 바로 유아기의 무의식이다. 우리가 잠잘 때 들어가는 곳이 바로 이 영역인 것이다. 우리는 이 영역을 평생토록 우리 내부에 간직한다. - 30   

신화를 통해서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것과 정신분석을 통해서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게 모두 가능하다는 이야기인가?

 

요컨데 영웅이 첫 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나가되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즉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유아기 악마에게 싸움을 걸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G융의 소위 원형심상과의 동화 작용을 시도한다. 힌두와 불교 철학에서는 이 과정을 비베카, 즉 분리의 과정이라고 한다. – 32

 

18) 융박사가 자신이 지적하고 있듯이 원형 이론은 그의 독창적인 개념이 아니다. 니체의 다음 글과 비교해 보자 (잠잘 때 꿈속에서 우리는 인간성의 사고를 꿰뚫어 체험한다. 내 말은 수천 년 전에 인간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꿈속에서 사유한다는 것이다….꿈은 우리를 인류 문화의 이런 상태로 데려가고 그때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 것이다.) - 32 

 

우리가 찾고 동화해 나아가야 할 원형은 인류 문화의 일대기를 통해서 제의, 신화, 그리고 상상력의 기본적인 이미지를 촉발해온 기폭제다. 이러한 영원한 꿈들은 악몽이나 고통 받는 개인의 광기에서 나타나는, 마구잡이 상징적 형태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 보아 그렇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 33

 

따라서 영웅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간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그런 사람의 상상력과 이상과 영감은 태고 적부터 인간의 생명과 사상의 원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두번 째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해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 33

 

꿈을 꾼 사람은 유명한 오페라 여가수인데, 이정표가 있는 대낮의 고속도로뿐만 아니라 귀가 안팎으로 열린 사람에게만 들리는 의미한 소명의 모험길로도 들어설 뜻을 세운 사람답게, 예사롭지 않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초라하고 질척거리는 거리를 홀로 가야 했다. 이 여가수는 영혼의 어두운 밤, 단테의우릴 삶의 도정에 도사린 어두운 숲그리고 지옥과 같은 구렁텅이의 비애도 알고 있었다.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

나를 지나면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길

나를 지나면 길 잃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 – 36

 

판도라 상자의 일종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듯하다. 이 판도라의 상자는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신들의 선물인데, 이 안에는 존재의 고통과 축복의 씨앗뿐만 아니라 미덕과 희망까지도 들어있다. 이 상자의 도움을 꿈꾸는 사람은 강을 건너 반대편 강 언덕에 이른다. 그리고 이 기적 같은 일을 통하여 극히 어렵고 위험한 작업인 자아 발견과 자아 발전을 꾀하는 모든 사람들은 생명의 바다 건너편에 정박할 수 있게 된다. – 37

 

사람들은 비교적 무의식적으로 시민 및 종족으로서의 정례를 따름으로써 대부분 위험 부담이 적은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 역시 구원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대속자들에 의해 아득한 옛날 인류에게 주어져 수천 년간 계승되어 온 사회의 상징적 도움이라는 미덕, 통과 제의, 은총으로 입은 성사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다.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일 수 밖에 없는 사람이란 내부의 소명도 외부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다- 37

자기한테 적합한 방식을 선택해서 가면 될 듯하다. 자신이 정례를 따라 가는 게 적합한 사람인지 새 길을 선택해 가기에 적합한 사람인지를 알면 좋겠지. 그래도 일정 부분 안전하고 신뢰로운 울타리에서 보호받고 교육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 자신의 길, 길 가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다.

 

오늘날의 우리 대부분은 가슴 안팎으로 이 미궁을 안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미노타우로스와 맞설 용기를 심어주는 미궁 탈출 단서와 괴물을 만나 도륙한 다음 우리를 자유의 길로 이끌어줄 안내자, 저 아름다운 처녀 아리아드네는 어디에 있을까? … 아리아드네는 어찌어찌해서 테세우스에게 접근하고, 크레타에서 자기를 데리고 나가 아내로 삼아준다면 미궁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을 일러주겠다고 말했다….아리아드네는 장인 다이달로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다이달로스는 미궁을 만든 장본인이고, 이 미궁에 사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은 여자는 바로 아리아드네의 어머니다...다이달로스는 아리아드네에게 실을 한 타래 준다. 미궁으로 들어가는 영웅이 한 끝을 미궁의 입구에다 매어놓고 들어가면서 풀어야 하는 실타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이 얼마나 하찮은 물건인가? 그러나 이나마 없으면 미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 모험과 다름 없는 것이 아닌가?..재미있는 것은 저 죄 많은 왕을 섬기는 바로 이 장인이 미궁의 공포를 연출한 장본인인 동시에 자유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웅은 우리로부터 먼 데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수세기 동안 다이달로스는 장인 및 과학자, 기이할 정도로 냉담하고 거의 악마적인 현상의 상징, 사회정의의 정상적인 경계를 넘어 자기 시대의 도덕률이 아닌, 자기 예술의 도덕률에만 봉사하는 인간유형을 대표해 왔다. 그는 단순하고 용기에 차 있으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영웅이다. 아리아드네가 그랬듯이 우리도 이 사람에게로 달려가 보자. 그는 실타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아마를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들판에서 거두었다. 수세기에 걸친 경작, 수십 년에 걸친 채집, 수많은 가슴과 손의 힘겨운 작업이 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마를 훑고, 간추리고 헝클어진 실무더기에서 실을 자아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혼자서는 모험 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 39

왕비에게 자기 이름을 알아 맞추는 100일간의 기회를 주고 하루 3번 말하게 하면서 아마 5타래를 갖다 주는 괴물 이야기를 다룬 그림책이 있었다. 왕비는 사냥 나간 길에 우연히 왕이 얻어들은 이름을 불러주고 그 괴물을 퇴치했다. 괴물의 소망은 그 왕비와 결혼하는 것이었지. 그것과 이 문단이 관련이 있나? 나는 항상 그 왕비 편에서 그 그림책을 읽었는데 오늘 문득 그 괴물이 가엾어지네.

 

2. 비극과 희극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레오 톨스토이) – 39

 

39 미궁에 있던 괴수인 반인반우를 기쁘게 해 주지 않았던가? 파괴적이며 광기어린 바로 이 분노에 찬 괴수의 측면도 온화할 때엔 세계를 소생하게 하는 원리가 된다. 그리스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소설도 의절의 비의를 찬양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 속에 있는 인생이다.

 

연민이란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고통 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보이지 안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제임스 조이스) – 40

 

비극적 카타르시스 즉 연민과 공포의 체험을 통한 비극 관람자의 감정의 순화 혹은 정화는 손발이 잘린 우두신 디오뉘소스를 위한 축제와 비의적 연극의 기능이었던 초기의 제의적 카타르시스 (과거의 오점과 독소, 죄악과 죽음의 오염으로부터의 사회적 순화)에 상응한다. – 40 

 

41 <운명에의 사랑, 아모르 파티 amor fati>, 즉 필멸의 운명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비극적 예술의 체험을 구성한다. 그 기쁨, 구원의 황홀은 바로 그 안에 있다.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던 비극은 신들이 파국을 맞는 대신전에서는 물론, 채찍에 찢긴 얼굴들이 들어앉은 평범한 가정에서까지 십자가에 매달리는 현실적이고 본질적이며 흥미 본위인 민주주의의 비극이다. – 42

 

42 하늘의 신화가 삶의 발자국을 뒤로 남기고 밤의 문턱에 설 준비가 된 노인의 것이듯, 동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나라의 것이며, 현실로부터 보호받고 이기는 하나 조만간에 거덜날 운명에 놓여있다.

 

고대에 이러한 동화나 신화나 신곡은 비극 이상의 고급스러운 이야기, 심오한 진리, 난삽한 깨달음, 건전한 구성물, 완벽한 계시로 받아들여졌다. 동화, 신화, 그리고 영혼의 신곡에 나오는 해피엔딩은 모순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비극의 초절성으로 읽히어야 한다.- 42

이게 무슨 말인가?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인 것이다. – 43

 

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신화나 동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환상적이며 비실재적이기 때문에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심리적인 승리지 육체적 승리는 아니다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 땅 위에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기 전에 보다 중요하고 보다 본질적인 것이, 우리가 알고 있고 더러 꿈 속에서 찾아가기도 하는 미궁 안에서 일어나야 했다는 것이다.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일 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 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이다.  – 44

 

3. 영웅과 신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즉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 45

 

영웅 과업의 어려움, 계획이 원대하고 수행이 신성할 경우 이 영웅 과업의 숭고한 의미를 장엄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부처의 고행에 대한 전설에 잘 나타나 있다. – 45

 

46 무시무시한 신은 코끼리를 탄 채 1천 개의 손에 각기 무기를 들고 나타났다많은 공격무기들은 고타마의 성도의 법력에 의해 천상의 꽃과 티끌로 화했다. 이렇게 되자 마라는 세 딸, 즉 욕망과 괴로움과 욕정을, 관능적인 시녀와 함께 풀었으나 존자의 마음은 흐트러지지 아니했다.  

공포와 욕망, 이것이 모든 것들을 이루는 과정의 시험이라고 <신화의 힘>에서 말했다.

 

37) 이것은 서양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상태에 대응하는 동양신화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정각수(보리수) 아래의 부처와 십자가 나무(구원의 나무) 위의 그리스도는 유사한 것으로, 원형적인 세계의 구원자와 태고의 유물인 세계수 모티프를 통합한다. 이 테마의 변형은 앞으로 소개하는 이야기에서 자주 발견될 것이다. 부동의 자리와 갈보리 산은 세계의 배꼽, 혹은 세계 축의 이미지다. 대지의 여신에게 자신의 권리를 확인시키는 모습은 전통적인 불교 예술의 불상에 나타나 있다.  고전적인 부처의 좌상은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손가락은 가볍게 땅에다 대고 있다. – 47

 

땅의 여신은 수백, 수천, 수십만이 포효하는 소리로 이를 확인하니 적대자는 미래의 부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어 군대가 물러갔고, 세계의 모든 신들은 꽃가지를 뿌렸다. 해지기 전에 이 사움에서 승리를 거둔 정복자는 초저녁에 자기의 전생을 알았고, 한밤중에는 사물을 두로 꿰뚫는 혜안을 얻었으며 새벽녘에는 인과를 깨쳤다. 그는 날샐 무렵에 완전한 정각을 얻었던 것이다. - 47

 

구약성서는 이와 비교가 될 만한 행적을 모세의 이야기에다 기록하고 있다. 모세는 이집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온 지 석달 째 되는 초하룻날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산을 등지고 진을 쳤다. 모세는 하느님 계신 곳으로 올라갔고 하느님은 산에서 그를 불렀다. 하느님은 그에게 십계명 석판을 주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가라고 했다. 유태인의 민간 전설은 하느님의 계시가 내리던 날 하루 종일 시나이 산에서는 우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 49

 

섬광과 우렁찬 나팔소리에 백성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전율했다. 하느님은 하늘을 구부리고 딸을 움직이고 세계의 경계를 뒤흔드시어 궁창이 요동하고 하늘이 두려움에 떨었다. 하느님의 광희는 불과 지진과 폭풍과 우박의 네 가지 문을 지나셨으니 이 땅의 왕들은 각기 제 궁전에서 떨었다. 대지는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줄 알고, 제가 마신 도륙 당한 자들의 피 값과 제 품에 묻은 살해당한 자들의 몸 값 물 걱정을 하더라. 땅은 십계명의 첫 마디를 듣기까지는 두려움을 가누지 못했다. – 49

아름답다. 조셉캠벨도 우드스탁의 오두막집에서 인용문을 베껴적었겠지. 대신 노트에 적었을 테니 이 책을 쓰던 1948년에는 책을 쓰기 위해 옛 노트를 꺼내 다시 베끼거나 수동 타자기로 타이핑을 했겠구나. 그것에 비하면 요즘 사람들은 글을 쓰기가 훨씬 쉬워졌겠다.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게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동양 전체는 고타마 부처가 깨친 은총(참 법의 놀라운 가르침)의 축복을 받았듯이 서양은 모세의 십계명의 축복을 받아왔다. – 50

50 장소가 어디건, 그들의 관심(종교적, 정치적, 혹은 개인적)이 어디에 있건 진정한 창조 행위는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세상으로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행위로 표현되며, 영웅의 부재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가 거듭난 자, 위대한 자, 창조력을 얻어 돌아오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류 역시 한 목소리가 된다.

이러한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모험의 고전적인 단계를 두로 꿰는 수많은 영웅적인 인물을 따라가 보아야 할 듯 하다. 이러한 작업은 당대의 삶과 관련된 이미지의 의미분만 아니라 야망, 권력, 영고성쇠, 그리고 지혜로서의 인류 정신의 단일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 기대한다. - 51

지금부터 개개인의 운명을 담은 세계의 상징적 그릇인 수많은 이야기를 복합적인 모험의 형태로 소개해보겠다.

 

<분리> 혹은 <출발>의 단계는 제1, 1장에서 다섯 개의 소제목으로 나뉜다.

(1)   <모험에의 소명> 혹은 영웅 소명의 표적

(2)   <소명의 거부>, 혹은 신으로부터의 우매한 도주

(3)   <초자연적인 조력>, 즉 어느 순간까지의 모험에 도전한 사람에 대한 뜻밖의 도움

(4)   <첫 관문의 통과> 그리고

(5)   <고래의 배>, 혹은 밤의 영역으로의 여행이다.

 

<시련과 입문의 성공>은 제 2장에 6개의 소제목으로 소개된다.

(1)   <시련의 길>, 혹은 신들의 위험한 측면

(2)   <여신과의 만남>, 혹은 다시 찾은 유아기의 행복

(3)   <유혹자로서의 여성>, 오이디포스 고뇌의 체득

(4)   <아버지와의 화해>

(5)   <신격화>

(6)   <궁극에의 홍익>

 

<회귀와 사회와의 통합>

(1)   <회귀의 거부>, 혹은 버림받은 세계

(2)   <불가사의한 도주> 혹은 프로메테우스의 도주

(3)   <외부로부터의 원조>

(4)   <회귀 관문의 통과>, 혹은 일상의 세계로의 회귀

(5)   <두 세계의 주인>

(6)   <살기 위한 자유>, 즉 궁극적인 홍익의 성질과 기능이다.

원질신화에서 영웅의 모험에 대한 지도의 간략본이다. 만약 연구원 과정을 진정으로 진지하게 임한다면 이런 과정이 그대로 일어나리라.(이건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고 정직하게 대하는 게 아닐까? 네 가지를 살피는 것) 지도는 있고 이미 주어졌다. 지도독법으로 이용할 지 말지는 나의 몫이리라.

 

51 <회귀와 사회와의 재통합>은 정신 에너지가 세계로 흘러 들어오는 연속적인 순환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과정이고, 영웅이 속한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영웅의 오랜 후퇴에 대한 변명이 되나, 영웅 자신에게는 가장 어려운 필요조건이 될 지도 모른다.

 

51영웅이 입문의 모든 시련을 향해 차례로 올라가는 대신 프로메테우스처럼 단도직입적으로 목표를 향해 돌진하고(폭력이나 기지로써, 혹은 운에 힘입어) 그가 의도하던 세상을 위한 홍익을 손에 넣어버린다면 그가 지닌 힘의 불균형이 부작용을 일으켜 프로메테우스가 자기의 불경스러운 무의식이라는 바위에 갇혔듯이 내 외적인 시련을 당하게 된다. 또 한편 영웅이 자신의 뜻으로 안전하게 사회에 귀환하면 그가 도우려던 사람으로부터 오해받고 무시당하게 되어 결국 그의 행적은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

 

52 원질신화의 복합적인 영웅은 예외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이 영웅은 사회의 존경을 받기도 하고, 무시당하거나 경멸을 당하기도 한다. 영웅과 혹은 그가 속한 세계는 상징적인 어떤 장애로 고통을 받는다.

 

대개 동화의 영웅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소우주적 승리를 거두고 신화의 영웅은 세계사적 승리를 거두는 게 보통이다. 또 전자(젊은이, 아니면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경멸 당하는 아이)는 자신을 압제하던 상대를 이겨내는 데 그치는 반면, 후자는 모험을 통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 전체의 소생에 필요한 수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황제, 모세, 혹은 아즈텍의 테가틀리포카 같은 종족적, 혹은 국지적 영웅은 한 종족에게만 그 선물의 은혜를 베풀지만 모하멧, 예수, 부처 같은 우주적 영웅은 전세계에 넉넉히 한 소식을 전해준다. – 53

 

2 <우주 발생적 순환>은 성공한 영웅에게 계시로 하사된 세상의 창조와 멸망의 엄청난 환상을 펼쳐 보인다. 1유출은 무에서 비롯되어 나오는 우주의 형상을 다룬다. 2처녀 잉태 혹은 단성생식에서 여성적인 힘의 창조적, 보상적 성격을 일별하되, 먼저 만유의 어머니로서의 우주적 스케일, 이어서 영웅의 어머니로서의 인간적인 단계를 다룬다. 3영웅의 변모는 인간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 갖가지 형태로 영웅이 등장하는 전형적 단계를 통해 인류의 선사적 역사과정을 추적한다. 그리고 제 4소멸은 처음에는 영웅의 예언된 종말, 이어서는 드러난 세계의 예언된 종말을 그린다.

 

우주발생적 순환은 모든 나라의 신성한 문헌에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고, 그것은 영웅의 모험에 새롭고 흥미로운 전기를 부여한다. 돌이켜보면, 모험적인 여행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 하다. 영웅이 애써 찾아 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왕의 아들>이고 그는 이로써 자기의 실제적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신의 아들>은 이 이름이 얼마나 의미심장한지를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 54

 

비슷한 환상은 묵시적인 <이브의 복음>에도 등장한다.

나는 높은 산 위에 서서 거인과 난장이를 보았다. 천둥소리 같은 음성이 들려 나는 자세히 들으려고 다가갔다. 그분은 나에게 이르셨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네가 어디로 가건 나는 거기에 있다. 나는 없는 곳이 없으니, 원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으라. 나를 찾는 것은 곧 너를 찾음이다

이 둘(영웅과 그의 궁극적인 신, 찾는 자와 찾아지는 자)은 결국 이 세계의 신화에 다름 아닌 단일한 유형적 신비의 표리로 받아들여진다. 위대한 영웅은 위대한 행적을 통해, 이 다양한 얼굴이 사실은 하나임을 알고, 또 남들에게 알리게 된다. – 55

 

4. 세계의 배꼽

 

영웅의 성공적인 모험의 의미는 생명의 흐름을 풀어 다시 한번 세계의 몸 속으로 흘러 들게 하는 데 있다. 이 흐름의 기적은 물리적으로는 음식물의 순환, 역학적으로는 에너지의 흐름, 영적으로는 은총의 현현을 나타내는 듯 하다. - 55

 

58 이 분류(奔流)는 보이지 않는 힘의 원천, 우주라는 상징적 원의 중심인 입구, 불교에서 말하는 부동의 자리에서 흘러나오는데, 세계는 이곳을 중심으로 순환한다고 일컬어진다. 이 자리 밑에는 심연의 물을 상징하는 용, 즉 우주적인 뱀의 머리가 있는데, 심연의 물은 생명을 창조하는 신적인 에너지이며, 불멸하는 존재의 세계 형성자인 데미우르고스다. 생명나무, 즉 우주 자체는 바로 이 곳에서 자라난다.

 

어쩌면 이것은 이 지점에 앉거나 서거나 나무에 매달린(가령 아티스, 예수, 오딘처럼) 우주적인 남성이나 여성(가령 부처 자신이거나 힌두의 춤추는 여신 칼리 같은)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신의 화신으로서의 영웅은 영원의 에너지가 시간성 안으로 흘러 드는 배꼽, 즉 세계의 배꼽이기 때문이다. – 58

 

가정의 난로, 신전의 제단은 땅이라는 바퀴의 중심이며, 만유의 어머니의 자궁인바, 이 어머니의 불이 곧 생명의 불이다. – 60

제목 : 자신의 원형, 우주의 구조를 집 가구배치에 반영하기

이 구절을 읽으며 내가 가지고 싶은 가구의 디자인을 떠올린다. 우주의 구조와 그 구조를 형상화했던 이들의 상상을 내가 사는 공간에 반영하고 싶다. 나는 주방겸 거실에 아직 식탁을 갖지 못했다. 식탁은 가족이 모이는 자리를 의미한다. 가족? 남녀가 만나 이루는 그 가족일 수도 있고, 다른 형태의 공동체일 수도 있다. 지금은 어떤 공동체도 이룰 준비가 되어 있지가 않다. 이왕이면 이곳이 가족이 모이는 중심이 되면서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의 원리를 반영한 디자인이었으면 좋겠다. 나무의 결이 보이는 것이면 좋겠다. 나는 자꾸 스타벅스 창가 테이블과 단단한 의자를 상상한다. 내가 본 테이블과 의자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다. 또 다른 하나는 국립중앙도서관의 것이다. 한 편에는 편안한 소파도 있으면 좋겠다. 바쁜 새벽 일정을 마친 후 거기 기대어 20분쯤 자고 갈수 있도록 머리를 기댈 꽁지가 나와 있는 기차 의자 높이에 내 발바닥이 땅에 닿는 높이였으면 좋겠다. 데메테르 여신 원형은 내 안에서 가장 넓은 영지를 지녔다. 대신 헤스티아 여신은 넓지 않고 존재도 안보이지만 내 정체성의 중심에 해당한다. 그럼 내 집의 중심은 밥을 먹는 식탁테이블과 의자일 수 밖에 없다. 이제 저물어 가려는 데도 여성성 개발이 덜 된 나는 한번도 화장대를 갖지 못한 채 아직도 책상만 갖고 있다. 책상은 아버지의 과업을 의미한다. 지금 내가 연구원 책을 읽는 것도 아버지의 책상, 아버지의 서가 대신에 내 책상, 내 서가를 갖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내 방에서 책상을 덜어내고 화장대를 둘 거다. 하나씩 장만하려고 한다. 만들어도 좋겠지. 지금 둥근 것으로 할 지 네모난 것으로 할 지 궁리한다. 또 책장을 덜어내어 다른 작업하는 방에 옮길 거다.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 책을 읽을 때도 생각은 했는데 행동을 하지 않았지. 그래도 또 떠오르네. 내 살림살이를 만들 때까지 계속할 건가? 

 

산과 숲은 저마다 초자연적인 보호자를 거느리고 있는데, 이러한 보호자들은 세계 창조에 관한 그곳 역사의 유명한 에피소드와 관련을 맺고 있다. 영웅이 태어났고, 역사했고, 무로 돌아간 곳이면 어디든 표지가 서 있고 성역화되어 있다. 완전한 중심을 나타내고 고취시키기 위해 거기에 사원이 세워지기도 한다. 까닭인즉, 이런 곳은 풍요를 향한 돌파지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어떤 사람은 영원을 깨닫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곳은 보람 있는 명상의 촉매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사원은 대체로 중심에 있는 성역이나 제단을 영원한 자리의 상징으로 삼고, 세계의 지평선의 네 방향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설계한다. 그래서 사원의 경내로 들어가 성역에 접근하는 사람은 거기에 사원이 있게 한 영웅의 행적을 모방하게 된다. 이 참배자의 목표는 생명 지향, 생명 부흥 양식의 기억을 내부로부터 환기시키는 한 수단으로서의 보편적인 패턴을 연습하는 것이다 61

공지영씨 수도원기행 같은 책이 계속 나오는 이유다

 

고대 도시는 사원같이 건설되어 있다. 네 방향으로 네 개의 문이 있고, 맨 중앙에는 이 도시 건설자의 성역이 자리잡는 것이다. 시민들은 이 상징에 갇힌 채 살고 일한다. …이와 같은 정신에서 국가적, 세계적 종교의 판도도 모체인 도시의 바퀴살 주위로 밀집되어 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구의 기독교가 그렇고, 메카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교가 그러하다. – 61

이런 도시에 한 번 가보고 싶다. 가서는 도시의 방사형을 내려다 보는 높은 곳에서 보고 싶다. 일단 로마, 메카 찜이다. 또 워디가 있을까? 바티칸시티가 그럴 것 같다.   

 

신화에서는 한 자락 풀잎도 구제자의 모습을 가릴 수 있고, 이 방랑하는 구도자를 구도자 사신의 가슴에 있는 지성소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부연하거니와 큰 사원은 어디에든 세워질 수 있다. 결국 <전체>는 도처에 있으며, 도처가 권능의 자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화에서는 한 자락 풀잎도 구제자의 모습을 가릴 수 있고, 이 방랑하는 구도자를 구도자 자신의 가슴에 있는 지성소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세상의 하고 많은 선과 악을 두루 산출한다. – 62

 

62 세계의 사원에서 섬김을 받는 대상은 늘 아름다운 것도, 늘 자비로운 것도 아니며, 덕이 높을 필요도 없다. 욥기에 나오는 신처럼 그들은 인간의 가치척도를 저만치 앞지른다. 

 

어느 날 에드슈(서 아프리카의 익살스러운 신)는 양쪽 밭에서 일하고 있는 두 사람의 농부를 보고 이 둘을 좀 골려 주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한쪽은 붉은 색 다른 한쪽은 흰색, 앞은 초록색, 뒤는 검은색인 모자를 썼다. 이 네 가지 빛깔은 세계의 네 방향을 나타내는 빛깔이다. 즉 에드슈는 중심 즉 세계의 축, 혹은 세계의 배꼽의 화신이었다추장이 어떤 농부의 말이 맞는지 몰라 전전긍긍하자 이 익살스러운 노인은 정체를 드러내고는 자기가 장난을 좀 쳤음을 시인한 다음 모자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둘은 싸울 수 밖에 없지.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 64

에드슈의 모자를 한 번 그리고 색칠하고 싶구나. 이런 모자 한 개 갖고 싶네. 재미있겠다. 이게 오방색과는 어떻게 다를까?

 

도덕 군자가 의분을 금치 못할 대목에서, 비극 서사시인이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느낄 대목에서, 신화는 장엄하고 무시무시한 신곡을 향해 온전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신화의 제신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 즉 창조자의 무자비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 하다. - 64 

 

1부 영웅의 모험

 

1 출발

 

1.영웅에의 소명

 

옛날 옛적에 직심스럽게 빌면 더러 이루어지는 것도 있던 시절에 예쁜 딸을 여럿 둔 왕이 살았는데 왕의 딸 중에서도 막내딸은 하도 예뻐서 세상 구경이라면 할 만큼 한 태양도 이 막내딸의 얼굴을 비출 때면 오히려 제 얼굴을 붉혔을 정도였다. -69

옛날 옛적 이렇게 시작하는 구절을 들으면 나는 곧바로 이야기 속의 상상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신기한 일이다.

 

70 “왜 그러셔요 공주님, 무슨 사연이 있어 그리 슬피 우십니까? 돌멩이라도 공주님을 가엾게 여기겠습니다.”

 

지지리도 못생긴, 큼지막한 대가리를 물 밖으로 내밀고 있는 개구리 한 마리를 발견했다. – 70

 

공주님 옷, 공주님 진주와 보석, 공주님 금관은 나는 싫어요. 공주님, 저를 보살펴주시고, 저를 친구나 짝꿍으로 삼아주시고, 공주님의 예쁜 식탁 옆에 앉게 해주시고, 공주님의 황금 접시로 먹고, 공주님의 예쁜 그릇으로 마시게 해주시고, 공주님의 예쁜 침대에 함께 자게 해 주시면이것만 약속하시면 내려가서 공주님의 황금 공을 가져다 드리지요. – 70

에로틱 & 어구 징그러워

 

71 “잠깐만요 공주님, 저도 데리고 가셔야죠. 저는 그렇게 빨리는 못 뛰어요.”

 

이 동화는 모험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다.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것이긴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이 동화에서 황금 공이 사라진 사건은 공주에게 닥칠 어떤 운명의 첫번 째 조짐이고, 개구리는 두번 째, 무심결에 한 약속은 세 번째 조짐이다. – 71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이 실수 또한 그러하리라. 욕망과 갈등을 억압해 놓아서 더 이상 누를 수 없게 되어서 이리 되었으리라. 왜 그럴까?

 

개구리의 존재는 <전령관>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개구리가 등장하는 운명의 갈림길이 곧 <모험에의 소명>인 것이다. 전령관의 부름은 여기 이 예화에서 보이듯이 구원에 이르는 길일 수도 있으나 당사자 일대기의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죽음일수도 있다. 전령관은 귀한 역사적 사명의 수행을 촉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전령관의 등장은 <자아의 각성>이라고 불리는 단계를 암시하고 있다. 화에 나오는 공주의 경우, 전령관의 등장은 사춘기의 도래를 뜻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크든 작든, 삶의 단계나 정도가 어디에 이르러 있든, 이러한 소명은 언제나 변용의 신비, 완성되면 곧 죽음과 탄생에 이르는, 정신적 통과 의례 혹은 순간을 개막한다. – 72

 

이러한 소명을 받는 장소로 전형적인 곳은, 깊은 숲 속, 큰 나무 아래, 샘가운명의 힘을 전하는 전령관은 혐오감을 주는, 참으로 하찮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세계의 배꼽에 대한 상징으로 인식한다. – 72

 

프로이트는 불안한 순간은 어머니로부터 분리될 때의 고통(탄생하는 순간의 숨이 막히고, 피가 응어리지는 등의)을 상기시킨다고 지적한 바 있다. 거꾸로 말하면 분리와 탄생의 순간은 불안을 야기한다. – 73

 

동화에 나오는 징그럽고 욕지기 나는 개구리나 용은, 태양을 입에 물고 솟아오른다. 이 징그러운 뱀이나 개구리, 즉 징그러운 동물은 무의식 심층(하도 깊어서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을 상징한다. 여기엔 징그럽고, 사랑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미지의 혹은 지진한 요소, 원리, 그리고 생존의 본질이 우글거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수정이며, 트리톤이며, 물의 수호신들이 사는 우화에 나오는 용궁의 진주며, 지하의 도깨비 나라를 밝히는 보석이며, 뱀처럼 땅을 괴고 땅을 감싸는 불사의 바다에 있는 불씨며, 불멸의 밤을 꽃피우는 별이다. 용이 지키는 금덩어리며, 헤스페리데스가 지키는 금단의 능금이며, 황금 양털의 보풀이다.  – 73

 

따라서 모험에의 소명을 알리는 전령관, 혹은 고지자는 어둡고, 징그럽고, 무섭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존재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길을 따르면 길은 낮의 벽을 통해 보석의 빛나는 밤으로 열린다. 73

 

75혹 전령관은 우리 내부의 억압된 본능적 다산성의 상징인 야수(동화에서처럼) , 미지의 베일에 가려진 신비스러운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75 왕은 샘가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때 그는 자기 앞으로 오는 괴상한 야수를 보았다. 듣도 보도 못한 야수였다. 야수는 샘가로 와서 물을 마셨다. (영국 아더왕 전설)

 

고슴도치를 잡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는데도 땅에서 너무 높이 올라간 게 무서워 소녀는 내려올 생각을 못하고 자꾸만 올라갔다. 아래서 보면 조그만 점 하나로 보일 만한 높이까지 올라간 소녀는 고슴도치와 함께 마침내 하늘에 이르렀다. (북아메리카 평원 아라파호 소녀) – 76

 

변형의 때가 무르익은 정신은 끊임없이 이런 전령관을 산출하는데 아래에 소개하는 두 사람의 꿈이 이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76

 

꿈에서든, 신화에서든 갑자기 한 사람의 생애에 새로운 시대,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면서 이런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주인공이 필연적으로 맞서야 하는, 무의식적으로는 상당히 익숙해져 있는(의식적으로는 알지도 못할 뿐 더러 놀랍고 무서운 존재로 여겨지는) 이 인물은 자기 정체를 밝힌다. 그리고 이때, 주인공은 이전에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던 사물이 이제 무가치하게 되어버리는 상황을 경험한다. 막내공주의 세계에서처럼 황금 공이 샘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 77

 

77 미래의 부처인 젊은 고타마 샤캬무니 완자는 노, , , 혹은 승려 생활에 대한 지식과 단절된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아들이 행여 속세를 버리고 사문이 될까봐 부왕이 아들을 극구 이러한 지식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생각보다 빨리 이 젊은 왕자는 육체적 쾌락에 진력을 내고, 다른 경험에 목말라했다. 왕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찾아 나설 준비가 되는 순간, 적당한 전령관이 때맞추어 나타났다. 

 

이 신화적 여행의 첫 단계는(우리는 이를 <모험에의 소명>이라고 불렀다) 운명이 영웅을 불렀고, 영웅의 영적 중심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낙원일 수도 있고, 위험의 도가니일 수도 잇는 이 운명적인 영역은 여러 가지 형태로 다양하게 표시된다. – 80

 

80 테세우스가 아버지의 도시 아테네에 도착하여 미노타우로스의 놀라운 역사를 듣게 되는 상황이 이에 해당한다.

 

2. 소명의 거부

 

현실생활에서 자주, 신화나 민간 전승에서도 드물지 않게 소명에 응하지 않는 조금은 답답한 경우를 우리는 만난다. 다른 데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소명에 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명에의 거부는 모험을 부정적이게 한다.  – 81

 

召命에의 거부는 모험을 부정적이게 한다. 타성이나, 힘에 겨운 일, 혹은 <문화>의 장벽 때문에, 모험의 주체는 의미심장한 긍정적 행동력을 잃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험의 주체가 누리던 화려한 세계는 메마른 돌멩이가 구를 뿐인 황무지가 되고, 그의 삶은 무의미해진다. 그렇긴 하나 미노스 왕처럼 이 모험의 주인공 역시 초인적인 노력으로 예사롭지 않은 제국을 건설하는데 성공할 지 모른다. 그러나 무슨 집을 짓건, 그가 짓는 집은 죽음의 집이다. 자기의 미노타우로스를 심기는 퀴클롭스 식 미궁일 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면서 파멸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 81

 

세계 전역의 신화와 민화는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제 이득으로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미노스 왕은 그가 속한 사회의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의미로 희생을 드려야 하는 수소를 사유물로 취했다. 그는 자기 상상력보다는 경제적 이득을 앞세웠다. 때문에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생의 역할을 감당하는데 실패했고, 우리가 보았듯이 엄청난 불운을 겪어야 했다. 신성이 그 자신의 적이 된 것이다.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즉 자신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 82

제목 : 기도의 끝

언제나 기도의 마무리는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좀 더 약식으로는 사방을 향해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절하면서성불하십시오라고 인사한다. 해탈주를 외우면서 생명없는 이들, 이미 돌아간 조상들, 이미 죽은 이들에게도 나누고, 어려움 겪는 이들에게도 나눈다. 나의 기도가 이런 식이어야 하리라. 그런데 나는 이걸 사유하려고 한다. 만약 3시기도 이분정근의 틀이 완성된다면 그것도 사유하지 않는 태도로 해야하리. 그런데 나는 이걸로 나의 이익을 취하려고 한다. 특히 결혼이나 사랑하는 이를 만나는 것, 직업에서 당면한 일들을 해결하고, 올해 세운 목표를 성취하고 가족이 건강하고 화목하길 빈다. 동생의 취직을 빈다. 이건 다 소원성취에 해당한다. 개인은 정성을 다하고 신명을 바쳐야 하지만 제 이득을 취하는 걸 거부하는 나눔의 태도가 반드시 동반되어야한다. 이걸 놓치면 기도로 능력이 늘어도 스스로를 괴물로 만들거나, 내가 져야할 짐을 남에게 지우게 될 지 모른다. 미노스왕을 보면 드는 생각이다.

 

걸음을 멈추고 그대를 사랑하는 이 몸의 정체를 물어봐 주시오. – 83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처녀는 부모의 상으로 후퇴하여 거기에서 보호를 받았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꿈 덕분에 아내와의 생활을 청산하게 된 어느 불운한 가장의 경우와 같다. 정신분석학 보고서에는 이런 위험한 유아기 고착의 사례가 얼마든지 나온다. 이러한 사례들은 당사자가 유아기적 자아, 그리고 유아기적 정서관계 및 이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당사자는 유아기의 벽에 갖혀 있다. 이 경우 아버지나 어머니는 문턱을 지키는 사람으로 버티고 있어서, 그들의 징벌을 두려워하는 소심한 영혼은 문을 열고 외부 세계로 나오는, 재생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 85

다프네 신화를 이렇게 해석하는구나. 나 역시 이런 면이 있다. 그렇다면 부모님 집으로부터 축출당한다고 느꼈던 그것은 나에게는 진정 내 삶의 시작이구나. 내가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게 순리에 맞는 게 맞다. 그런데도 나는 왜 자꾸 원망을 갖는걸까?  

 

여기서 중간 정리, 소명에의 거부의 예 :

(1) 미노스 왕

(2) 다프네

(3)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넝쿨장미

(4) 뒤를 돌아다 보아 소금기둥. 돌기둥이 된 이야기

(5)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던 결혼하지 않겠다고 부왕에게 대들다 탑에 갇힌 왕자와 공주

 

85 어린 덩굴장미(잠자는 미녀에 나오는)는 질투심 많은 마귀할멈(무의식적인 악모 이미지)에 의해 긴 잠에 든다.

 

86 마악 집으로 돌아와 현관으로 들어가던 왕과 왕비(의식적인 선한 부모의 이미지)도 잠을 자기 시작했다.

 

86옛날에 페르시아의 한 도시가 그대로 석화되어 버린 적이 있었다. 백성이 알라의 부르심을 거절했기 때문에 왕과 왕비는 물론 군대와 그 주민들까지 석화되어 버린 것이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 야훼에 의해 소돔에서 불려 나올 때의 일이다.

 

87 희생자의 일부는 (우리가 들은 대로) 영원한 저주에 묶이지만 일부는 구원을 받게 되어 있다. 브린힐트는 적절한 영웅의 출현으로 보호를 받았고, 덩굴장미 아가씨는 왕자의 구원을 받았다.   

 

주저한다고 다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많은 비밀을 여축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비밀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명의 거부에 따르는 부정적인 상태가 뜻밖의 해방의 원리에 대한 행운의 계시일 수도 있다. 실제로 고의적인 내향성은 창조적인 정신의 고전적인 방편 중의 하나이고, 이를 효율적인 장치로 응용할 수도 있다. 이 방편은 심적 에너지를 심층으로 몰아 무의식적 유아기의 이미지 및 원형적 심상이라는 잃어버린 대륙을 활성화시킨다. 그 결과 의식의 분열이 다소간 일어날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신경증, 정신병, 겁을 집어먹은 다프네의 혼비백산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격이 이 새로운 힘을 흡수하고 통합할 수 있으면 당사자는 자기 의식의 초인간적인 단계 및 완전한 통제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87

 

신경증적 유형과 생산적인 유형을 비교해보면 자신의 충동적인 삶에 대한 과도한 관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양자는 평균적인 유형과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자기를 현재 그대로 받아들이는 평균적인 유형은, 의지력으로써 자기 자신을 새로운 형태로 다듬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 88

 

창조적 예술가 역시 자신의 재창조 작업에서 시작, 이념적으로 자아를 구축한다. 그러나 이 경우 이 자아는 자기 속의 창조적인 의지력을 그 자신의 이념적인 추상으로 변화시켜, 객관화시키는 입장에 서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의 내적인 문제에 국한되며 건설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파괴적인 측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생산적인 작품치고 <신경증적> 성격의 병리적 위기가 없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 88

 

89 사내의 머리가 희어지고, 주머니가 빌 때면

사내에겐 나누어줄 사랑의 몫도 없다더라.  

 

부정적인 길을 따르는 영웅이나 여걸, 그리고 아시아 대륙의 이 두 예화에서 운명 지워진 이 한쌍의 결합을 완성시키는 데 기적이 필요하다. 얼마를 기다려야 삶을 부정하는 마법을 깨울 힘이 생기고 두 아버지의 분노를 삭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한 대답은 세계 전역의 모든 신화에서도 두루 통용된다. <코란>에는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알라 신뿐>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문제는 어떤 기적의 힘이 이를 가능케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비밀은 바로 이 아라비안 나이트의 다음 단계에서 드러난다. - 92 

 

3. 초자연적인 조력 

 

소명을 거부하지 않은 모험 당사자는 영웅적인 편력 도중 첫번 째 보호자를 만난다. 노파나 노인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 보호자는 모험 당사자가 곧 만나게 되는 용과 맞설 호부를 준다. – 93

 

초자연적인 조력자를 만난 예 요점 정리

(1)   동아프리카 키아짐바를 돕는 노파 – 자기 옷 걸쳐주고 추장 도와주라 함. 소를 잡아먹임

(2)   서남 아메리카 인디언 민담의 인정 많은 지주녀, 지하에 사는 거미노파

(3)   유럽민담의 노파와 요정

(4)   괴퇴 파우스트 – 그레헨, 트로이안 헬렌, 보호령

(5)   기독교 – 성모 마리아

(6)   아리아드네 실타래

(7)   단테 – 베아트리체, 성모

 

93 키아짐바(동 아프리카 탕가니카의 와차가 족)는 해뜨는 나라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났다.

 

너희들 아버지를 찾아가는가 보구나. 그렇구나 너희 아버지 태양의 집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도중에는 괴물도 많이 있을뿐더러 너희가 가도 너희 아버지는 달가워하지 않을 게야, 어쩌면 찾아왔다고 너희를 벌할 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너희는 위험한 네 고비를 넘겨야 한다. 여행자들을 덮치는 바위, 여행자를 베어버리는 갈대, 여행자를 갈가리 찢는 선인장, 여행자를 괴롭히는 끓는 모래밭을 지나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 너희에게 이러한 장애를 이기고 능히 목숨을 보전할 선물을 주마. 노파는 말을 마치고 이방 신들의 깃털이라고 불리어지는 호부를 주었는데 이 호부란 두 개의 산 깃털(살아있는 독수리에게서 뽑아낸 깃털)을 붙인 굴렁쇠 하나와 두 사람의 생명을 보전케 할 산 깃털 하나였다. 지주녀는 또 마법의 주문도 한 마디 가르쳐주었다. 이 주문을 거듭 외면 적의 분노가 가라앉는다는 것이었다.  – 95

 

영웅을 도와주는 노파나 요정 노파는 유럽의 민담에 자주 등장한다. 기독교의 성인전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이 역할을 맡는다. 성모의 주선으로 성자는 천주의 자비를 얻는 것이다. – 95

 

96 이러한 존재는 자비로운 힘, 즉 숙명적인 보호세력을 표상하고 있다.

 

삶을 자각하면서 무산의 위기를 겪지만 보호 세력은 항상 영혼의 지성소에 심지어는 이 세상의 낯선 사건에 내재하거나 그 배후에 존재한다.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대자연은 항상 위대한 임무를 지원한다. 영웅의 행동이 그 사회가 예비하고 있는 것과 일치될 때 그는 흡사 역사적 변화의 리듬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 97

 

드물지 않게 초자연적인 외부 조력자는 형태상 남성으로 나타난다. 동화에서 영웅에게 나타나 영웅에게 필요한 호부(액막이)를 주거나 충고를 해주는 것은 숲 속의 난장이, 마법사, 은자, 목동, 혹은 대장장이 인 거이 보통이다. 고급 신화에서는 이 역할을 맡는 조력자는 스승, 나룻배 사공, 영혼을 내세로 안내하는 안내자로 발견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이러한 안내자는 헤르메스와 메르쿠리우스이고, 에집트에서는 토트(따오기 비슷한 신)이며,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성령이다. – 97

 

보호자인 동시에 위험한 적이기도 하고 부성적이기도 한 이 후견과 방향 제시의 초자연적 원리는 그 내부에서 무의식의 모든 다의성을 통합한다. 따라서 의식적인 개성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체계 및 우리가 따르는 안내자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한 후원은 우리의 이성이 헤아리지 못하는 영역에 이르기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조력자를 맞은 영웅은, 소명에 응답한 영웅일 경우가 보통이다. 실제로 소명은 통과 제의의 사제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는 첫 번째 통고다. 그러나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알라 신뿐>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영혼을 닫은 자들에게도 초자연적인 안내자가 오는 예가 있다. - 101

 

33) 샘은 무의식의 상징이다. – 101

 

34) 이 요정을 동화에 나오는 개구리와 비교해보자. (남성은 진, 여성은 지니)은 마호멧 이전 아라비아의 사막과 광야를 누비던 무서운 도깨비였다회교도들이 믿기로는 대부분의 진은 마호멧 교의 참 믿음을 받아들였는데, 받아들인 진은 선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진은 악하다는 것이다. 악한 진은 타락한 천사와 손을 잡고 있는데 이 타락한 천사의 두목이 이블리스(절망한 자) 인 것이다. – 101

 

다나시가 응수했다. ”공주님, 알라신께 맹세코 공주님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 이승의 남성과 저승의 여성은 유별합니다. 일라 신의 은덕으로 공주님의 이 분은 아름다움으로 보나, 사랑스러움으로 보나, 기품으로 보나 완전성으로 보나 제가 사랑하는 분과 가장 잘 어울립니다. 두 분 다 왕실에서 쫒겨난 처지이지만요.” 이 말을 들은 마이무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마이무나는 날개로 다나시를 몹시 쳤다. 어찌나 세게 쳤던지 다나시로서는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었다. “이 저주받은 것아, 내 너에게 사랑하는 분의 더없이 준수하신 모습에 기대어 명하노니, 이 길로 날아가서 네가 그처럼 어리석게 사랑한다는 그 공주를 데려오너라. 서둘러 데려와 둘을 나란히 눕혀놓고 보자. 어디 쪽이 아름다운 지 곧 알게 되리라이렇게 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삶을 거부하던 카마르 알 자만의 운명은 의식적인 의지의 협력 없이도 완성되기 시작했다.

   

4. 첫 관문의 통과

 

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수호자는 영웅의 현재 상황, 혹은 삶의 지평의 한계를 상징하면서 사방에서(위 아래까지)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수호자 뒤로는 어둠이며, 미지의 세계이며, 위험이다. 부모의 감시 밖이 아이들에겐 위험 지역이고, 사회의 보호 밖이 구성원들에게는 위험 지역인 것과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들이면 여기에서 만족한다. 심지어는 표시된 경계선 안에 안주하는데 만족하기까지 한다. 집단의 보편적 믿음이 미지의 땅으로 첫 발을 내딛으려 하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 105

 

세계 각 종족의 신화에는 집단이 거주하는 지역 한적한 곳에서 만나면 집단의 구성원을 협잡하는 위험한 존재가 많이 등장한다. – 106

 

여기서 관문수호자 예 요약 정리

(1)   호텐토트족 도깨비 눈이 발등에 있다.

(2)   중앙아프리카 반인반수 괴물

(3)   러시아 농민들 wild woman

(4)   러시아 물속의 노인, 물 하르방

(5)   아르카디아의 신 판

(6)   피그미족 오코주무

(7)   뉴 헤브라이즈 뱅크스 제도 메 Mae

(8)   본생담 – 도깨비 꾐에 빠져 물을 버린 대상 우두머리 이야기, 왕자와 끈끈이 터럭 도깨비

(9)   무사 니콜라스 낙원을 지키는 <극도로 이성적인 정령>

 

중앙 아프리카에서는 이런 반인반수 괴물이 조우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네가 나를 만났으니 마땅히 싸워야 한다 만약 사람에게 지면 이 괴물은나를 죽이지 마십시오. 의술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하고 애원한다. 이렇게 되면 이 괴물과 싸워 이긴 사람은 용한 의사가 된다. 그러나 이 반인반수 괴물이 이기면, 진 사람은 죽임을 당한다. – 106

 

미지의 땅(황야, 밀림, 심해, 타향 등)은 무의식의 내용물이 자유롭게 투사되는 무대다. 근친 상간 리비도와 부친살해의 데스트루도는 거기에서 폭력의 위협과 가공의 위험한 환희를 암시하는 형태로 도깨비는 물론 신비스러운 정도로 매혹적이고 향수를 유발할 정도로 아름다운 세이레네스(사이렌)으로 개인과 사회에 다시 투사된다. – 107

나는 돛대에 묶여서 사이렌의 노래를 들으며 지나며 고통 받되 그것을 궁금히 여긴 그를 언제나 동경했다. 한편 귀를 막은 채 나의 배를 난파시키지 않고 배를 저어갈 이들(내 안의 강점, 또는 협력자)들이 무엇일까 찾아서 같이 다니고 싶었다.

 

러시아 농민들이면 숲 속에 사는 야성녀 wild woman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들은 산 속의 동굴에 사는데 가재 도구를 갖추고 사는 품이 인간과 다르지 않다. 이들은 외모가 뛰어난 여성들로 머리가 크고 머리숱이 많으며 온몸이 털로 덮여있다. 이들은 달리거나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면 젖을 아예 어깨 너머로 넘겨버린다. 다닐 때는 떼로 지어 다닌다. 숲 속의 나무 뿌리에서 추출한 고약으로 이들은 몸을 가꾸기도 하고,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기도 한다. 이들은 춤을 좋아한다. 혼자서 숲 속을 방황하는 사람을 간질러 죽이는 것도 좋아한다. 우연히 이들의 보이지 않는 춤판에 끼어든 사람도 죽는다. 그러나 이들에게 음식을 준 사람에 대해서는 곡식을 거두거니 베를 짜주거나 아이를 보아주거나 집을 청소해주는 등의 호의를 베푼다. 김쌈을 도와준 소녀에게 금으로 변하는 나뭇잎을 주기도 한다. 인간을 애인으로 삼는 것도 좋아해서 종종 마을 총각들과 결혼한 적도 있는데 살림을 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신부가 다 그렇듯이 남편이 혹 부부간에 마땅히 지켜야 하는 예절을 무시하고 변덕을 부리면 종적을 감추어 버린다. – 108

또 이 장면에서 넋이 빠지네. 이런 여자들이 나오면 환장을 해서 눈을 반짝이며 반복 읽는다.   

 

위험하고 장난기가 있는 도깨비와 유혹의 원리가 선정적으로 결합된 또 하나의 실례가 바로 러시아의 물 속 노인, 물하르방이다. 그는 둔갑술에 능한 변환자재자로 한밤이나 정오에 수영하는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물에 빠져 죽은 처녀나 폐적 당한 처녀와 결혼한다. 그에겐 불행한 여자를 꾀는 아주 특별한 재능이 있다. 그는 달밤에 춤추길 좋아한다. 어느 때건 자기 아내가 아기를 낳으려 하면 산파를 찾으러 마을에 나타난다.그는 대머리에다 배는 장구배, 뺌은 불룩 튀어 나와 있고, 초록색 옷과 갈대 모자차림으로 나타난다. 이 물의 수호자는 뭍에서는 맥을 쓰지 못하지만 일단 자기 무대로 돌아가면 천하 무적이다. 그는 깊은 강, 시내, 그리고 연못에 살지만 물레방아 가까이 오는 것도 좋아한다. 낮 동안에는 송어나 연어처럼 숨어 있지만 밤이 되면 물고기처럼 찰방거리며 수면으로 나와 강변에서 자기 물 속 가축, , 말 따위에게 풀을 뜯게 하거나 물레방아 위에 앉아 치렁치렁하는 초록색 머리카락이나 수염을 빗는다. 봄에 긴 동면을 마감하고 일어나면 강의 얼음을 깨뜨려 쌓아 둑을 만든다. 그는 물레방아 부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기분이 좋을 때면 어부의 그물로 고기를 몰아주거나 홍수를 예보해주기도 한다. 자기가 데려가는 산파에게는 금은으로 두둑하게 사례할 줄 도 안다. 그이 아름다운 딸들은 모두 초록색의 투명한 옷을 입은 키가 크고 창백하고 어딘가 슬퍼 보이는 처녀들인데 주로 물에 빠진 사람을 괴롭히거나 고문한다. 그들은 나무 위에 앉아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한다. – 109

나는 산파로 달이 뜬 밤에 이 사람 한 번 따라가고 싶네. 이런 것을 다룬 그림책이 이미 나와 있을 지 모른다. 역삼동 국립어린이도서관에 가면 있을래나? , 이 생각 자체가 나를 미지의 세계로 부르는 소리다. 콩닥콩닥두근두근 하는 소리다. Follow your bliss 콩두씨!

 

아카르디아의 신 판은 마을 경계 밖의 무방비 구역에서 사는 위험한 존재 중 가장 유명한 고전적 실례로 알려져 있다. 실바누스와 파우누스는 이 판의 라틴 형태라고 할 수 있다인판은 뿔피리를 불어 요정들을 춤추게 했다. 사튀로스는 이 판의 남성적인 동반자이다. 판은 실수로 자기 영역을 침범한 인간을 괴롭히는데 이 때 인간이 판에 대해 갖는 감정은 당황, 패닉, 공포, 그리고 엄청난 경악 같은 것이다.  하찮은 실수 (나뭇가지를 꺽는다든지 잎을 나부끼게 하는 따위의) 때문에 침입자의 마음 속에는 가상적인 위험에 대한 자각이 싹튼다. ..그러나 판은 자기를 섬기는 인간에게 자비를, 즉 자연의 건강법이란 은혜를 베풀기도 한다. 첫 소득을 바치는 농부, 목동, 어부에겐 풍요를, 자기의 성역에 제대로 접근한 인간에겐 불로장생의 은혜를 베풀기도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옴팔로스, 즉 세계의 배꼽에 대한 지혜를 내리기도 한다. 이 관문을 지나면 우주적 근원이라는 서역에 한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다. – 109

 

모험 당사자는 특정 구역의 수호자에게 도전하지 안는 게 좋다. 그러나 살아서든 죽어서든 새로운 경험역을 지나려면 같은 세력의 파괴적 측면을 극복하고 이 특정 구역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된다.  안다만 제도의 피그미 족 언어에서 오코주무 (꿈꾸는 자, 꿈을 통해서 말하는 자)라는 단어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동류들과는 달리 대단한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를 일컫는다. 이들이 가진 초자연적인 능력은 정글에서나 꿈속에서 정령을 만나거나 죽음과 재생의 체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모험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다.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 – 112

나의 어둠을 통과해서 과정을 마쳐야 질잡이가 될 수 있다. 세르파든 뭐든

 

112 자기 생활권이라는 벽에서 한 발이라도 밖으로 나가는 영웅은 반드시 이런 괴물(몹시 위험하면서도 때로는 마법의 권능을 베푸는)과 만나야 한다.

 

동양의 이야기 두 개를 더 들어보자. 이 두 이야기는 영웅이 겪는 복잡한 관문 통과의 다의성과 영웅의 공포는 완전한 정신적 무장 앞에서 사라지겠지만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무모한 영웅이 이 관문 통과에는 실패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113

 

오무기 태자는 활에다 독 바른 화살을 먹이고는 도깨비를 향해 시위를 한 차례 당겼다. 그러나 화살은 도깨비의 털에 가 붙어버렸다. 태자는 차례로 50개의 화살을 날렸으나 화살은 모두 도깨비의 터럭에 가 붙었다. 이윽고 도깨비가 몸을 흔들자 화살은 후두둑 도깨비 발 밑으로 떨어져버렸다. 도깨비는 태자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 116

공포스런 장면. 목과 사지를 자르고 철컥철컥 되 붙는 괴물과 싸우는 느낌, 땅 속 도둑괴물과 지네를 죽이는 비법은 재를 잘린 자리에 아내, 처녀가 뿌리는 거였다.

 

오무기 태자는 다섯 차례의 공격에 실패 다섯 군데가 붙은 채 도깨비의 몸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런데도 태자는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한편 도깨비는 도깨비대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는 필시 인간이라기 보다는 사자, 아니 귀인임에 분명하다. 어쨎든 범인은 아니다. 나 같은 도깨비에게 붙잡힌 신세가 되었는데도 떨기는커녕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구나. 내가 이 길목을 지킨 지 오랜 데도 이 같은 자와 대적하기는 처음이다. 왜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도깨비여 내가 왜 두려워하겠는가? 태어나면 어차피 한 번은 죽게 되어 있는데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더구나 내 뱃속에는 벼락이라는 무기가 하나 더 있다. 그대가 나를 먹는다고 해도 벼락은 삭이지 못할 것이다. 벼락은 그대 뱃속에서 그대를 갈가리 찢어 그대 목숨을 빼앗을 것이다.”…그가 자기 뱃 속에 있다고 한 무기는 다름 아닌 <지혜>라는 무기였다. 118

 

51) 벼락은 속세의 허망한 진실을 분쇄하는 부처의 영적인 힘(불멸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불화에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상징의 하나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전해져 오는 신상도 금강고와 같은 형태의 벼락을 쥔 모습이 보인다. ..원시적인 종족의 전사들도 종종 자기 무기를 벼락이라고 일컫는다.다섯 가지 무기를 가진 왕자의 비유는 이러한 주제를 예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자신의 경험적, 육체적 성격에 의존하거나 이를 과신하는 자는 실패한다는 교훈도 덧불여주고 있다. 쿠마라스와미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감각적인 경험, 즉 다섯 가지 감각의 다섯 가지 무기의 와중에 휘말릴 수 있으면서도 고유의 도덕적 힘으로 이를 제압하고는 자기 자신과 남을 해방시키는 영웅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 118

 

우리가 오감으로 집착하고 있는 세계의 상징, 그리고 육체적인 어느 기관에 의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상징인 그 도깨비는 미래의 부처가 덧없는 이름과 물리적인 성격의 다섯 가지 무기로 더 이상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름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여섯번째 무기로 바꾸어 대항하자 조복한 것이다. 이 여섯번 째 무기가 명 과 형 이라는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원리의 지혜라는 천상적 벼락인 것이다. -119

 

쿠사의 니콜라사는 인간의 시야로부터 하느님을 가리는 <낙원의 벽> <짝짝이의 대립물의 일치>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문에는 <극도로 이성적인 정령>이 지키고 있어서 <이 이성적인 정령이 정복당할 경우에만 빗장이 풀린다>고 쓴 바 있다. 한 짝을 이루는 대립물(즉 존재와 비존재, 생과 사, 미와 추, 선과 악, 희망과 공포의 기능을 통합하고 방어와 습득 행위를 일으키는 기관을 연계시키는 그 밖의 양극성)은 여행자를 향해 서로 부딪혀 오는 바위이며 영웅은 항상 이 길을 지난다. 이것은 세계 전역을 통해 익히 알려진 모티프다. – 120

 

태양문을 통과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게 붙여두고 영웅을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 120

 

5. 고래의 배

 

마법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이 곧 재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관념은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고래의 배라는 자궁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영웅은 그 관문을 지키는 세력을 정복하거나 그 세력과 화해하는 대신에 그 미지의 힘에 빨려 들어 겉보기엔 죽은 것으로 나타나곤 한다. – 121

연구원 과정에 충실하려면 다른 활동을 정리를 해야한다. 이런 과정이 남들 보기에는 죽은 것처럼 보인다. 내게도 그렇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재생할 수 없다

 

고래의 배의 예 요약 정리

(1)   몰고기왕 미쉬나마에 삼켜진 히아와타

(2)   에스키모 장난꾸러기 까마귀 라벤이 해우에 삼켜지다

(3)   줄루족 코끼리에 삼키운 두 아이

(4)   아일랜드 영웅 맥쿨, 캘트지역에서 파이스트라 알려진 것과 형태가 같은 괴물에 삼켜짐

(5)   독일 소녀 <붉은 두건>은 늑대

(6)   제우스를 제외한 모든 신들은 크로노스에게 삼켜졌다.

(7)   헤라클레스 해신 포세이돈이 보낸 괴물의 뱃 속으로 들어가 난자해서 죽임

 

세계 도처에서 채집되는 이러한 모티프는 관문의 통과가 자기 적멸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여기서는 영웅이 외부로의 관문, 즉 가시적 세계의 한계를 뛰어넘는 대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이 들어감은 신도가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일치한다. 신도는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신전 안, 고래의 배, 세계라는 한정된 공간 건너 위, 아래로 보이는 천상적 공간은 결국 하나이다. 모두가 같은 것이다. 신전에 접근하거나 들어가는 자들이 기괴한 괴수, 즉 용, 사자, 마검을 든 괴물 살해자, 욕지기 나는 난장이, 날개 달린 속에 의해 보호를 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괴수들은 한 차원 심화된 내적 침묵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을 지켜주는 관문의 수호자들이다. 이들은 인습 세계를 특징짓는 신화적 도깨비, 혹은 두 줄로 난 고래의 이빨과 일치하는 존재들로서 존재의 위험한 측면을 보여주는 예비적인 경고의 화신이다. 이들은 신자가 신전으로 들어가는 순간 변형을 체험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인다신전 안에서 신도는 시간적으로는 이미 죽어 세계의 자궁, 세계의 배꼽, 지상의 낙원으로 돌아갔다는 암시는 받는 수도 있다. …그런데 비유적으로 보아,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고래의 입을 향한 영웅의 돌진은 같은 모험인 셈이다. 즉 회화적 언어로 말하면 둘 다생의 구심화 행위, 거듭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123

정통적인 종교의 의례를 그대로 하면서 얻는 게 많겠다. 초파일에 등을 제대로 달고, 영가등도 잘 달아야 겠다. 그리고 아침기도의 형식을 딱 지켜서 해야겠다. 나무가 많은 절에 가고 싶다.

 

124 자아에의 집착을 끊은 영웅은 왕이 자기 궁궐을 방방이 드나들 듯이 삶의 지평을 넘나들거나 용의 뱃속을 드나들 수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은 여기에 있다. 그의 죽음과 회귀는 모든 현상계의 대립물이 창조되지 않은 불멸의 존재임을 들어내는데 여기에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124세계 전역에서 용을 죽임으로써 삶을 비옥하게 하는, 신비스러운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들은 오시리스처럼 그 몸을 난자당하는 등 세계를 개혁하는 위대한 상징적 행위까지 그 몸으로 짊어졌다. 

 

125 수도사들은 자기네들이 섬기는 신의 죽음과 부활을 본따 스스로를 거세하고는 혼절한다. (프뤼기아)

 

125 왕이 20년 치세를 마무리짓는 해에 날을 잡아 엄숙한 제삿날로 삼는다. (인도 킬라카레) ..그는 베어낸 살점을 던지며 노천무대를 도는데 이런 행위는 출혈이 지나쳐 혼절할 때까지 계속된다. 혼절하기 직전, 그는 즉석에서 자기 목을 딴다.

이것은 미노스 왕이 포세이돈의 소를 자기 것으로 만들 당시에 치르기를 거부했던 희생제의다. 프레이저가 지적했듯이 의식으로서의 국왕 가해는 고대 사회의 일반적인 관례였다. – 125

 

그리스에서는 왕의 운명은 매 8년 주기의 마지막 해에 달린 것으로 보인다우리는 매 8년마다 미노스 왕에게 바쳐지기로 되어 있는 아테네의 일곱 청년과 일곱 처녀는 다음 8년 주기를 위한 왕의 재생과 관련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미노스 왕이 지내기로 되어 있는 수소의 희생제의는 8년 주기의 마지막 해에 전통에 따라 미노스 왕 자기 자신이 희생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대용물로 아테네의 선남선녀를 바친 듯 하다. 미노스가 괴수 미토타오로스가 되고 자기를 희생시켜야 하는 왕이 폭군이 되고, 모두가 왕의 역할을 수행하던 제정일치 국가가 사리 사욕만 아는 상업 국가가 된 것도 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126

 

2. 입문

 

1시련의 길

 

128 영웅은 이 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된다.

 

128 영웅은 거듭나는 데 필요한 충고와 호부(액막이), 그리고 이 영영에 이르기 전에 만났던 초자연적인 조력자의 밀사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어쩌면 모험 당사자가 자신의 초인간적 여행 도정의 도처에 자비로운 권능이 있어서 자기를 도와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일지도 모른다.

 

129 <어려운 임무> 라는 모티프 실례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가장 매력적인 것은 잃어버린 애인 쿠피도(에로스)를 찾는 프쉬케의 경우일 것이다.

 

130 프쉬케의 저승 여행은 동화나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이 겪었던 수많은 모험 중에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북극지방 사람들의 샤먼들이 잃어버린 사물을 찾거나 병든 영혼을 치료할 때 하는 모험이다.

 

131 샤면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 신들이 사는 성산을 둘러보고 있다.

 

132 이윽고 명계의 왕인 에를릭을 만난다. 에를릭은 호령하면서 샤면에게 달려든다. 그러나 샤먼에게 그만한 수완만 있으면 귀한 제물을 바치겠다는 약속으로 이 괴물의 화를 가라앉힐 수도 있다. 샤먼이 에를릭과 대화를 나누는 순간은 이 의식의 절정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원시 종족에서 주술사가 사회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주술사가 신경증적, 혹은 정신병적이거나 아니면 그의 주술이 신경증이나 정신병과 같은 메커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확인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132

 

133 유아기 상태란 성장의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수정되고 역전되다가 현실에 적용될 필요가 있을 때 재수정된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 충동의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이 유대가 없다면 인간의 집단은 존재할 수가 없다.

 

주술사는 그 사회 성인들의 심성에 내재하고 있는 상징적 환상 체계를 출몰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주술사는 유아적 놀이를 주도하고, 공통의 근심거리를 밝혀내는 지도자인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방에서 성공하고 현실적인 어려움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잡기와 대리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 133

 

어떤 사회에 속하는 사람이든지 고의적으로든 타의에 의해서든 자기 정신의 미궁이라는 미로에 내려가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저 시베리아의 푸닥과 성산에 못지 않는 상징적인 것들(능히 여행자를 삼켜버릴 수도 있는)에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신비주어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자기 정화에 이르는 두번 째 단계에 해당된다. 즉 감각이 정화되고 스스로를 낮추어 모든 관심이 초월적인 것에 집중될 때인 것이다. 굳이 현대적인 의미의 어휘를 쓰자면 우리 개인이 가진 과거의 유아적 심상이 분리, 초월, 변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 꿈에는 아직까지도 시대를 초월한 위험, 괴물, 시련, 정체불명의 조력자, 그리고 우리에게 유일한 인물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들의 형태에서 우리는 현재 상태의 모든 현상뿐만 아니라 그 현상을 이기기 이해 우리가 취할 행동의 단서도 굴절되고 있음을 본다. -133

 

우리 선조들이 신화적 종교적 유산의 상징적 정신적 의식에 힘입어 극복해왔던 심리학적 위험들을 오늘날 우리가(비신자인 경우 아니면 신자라고 하더라도 계승 받은 믿음으로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납득할 수 없을 경우) 혼자서 혹은 시험적, 즉흥적으로 더러는 도움이 될만한 지침도 없이 맞서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모든 신들과 악마들의 존재를 이성의 이름으로 부정한 개회된 현재인인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어받고 있고 세계 각처에서 수집된 신화와 전설에서 우리는 우리가 아직은 인감임을 보여주는 조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감청하기 위해서는 자기 정화를 감수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다.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의 낙원에 들어가려 하느냐 ?– 139

신화 그림책 총서 이런 시리즈를 낸 출판사가 있을까? 이런 것 한 출판사에서 나왔기를 바라면 욕심이고 이런 책 목록을 구해보고 싶구나. 그래서 읽어보고 소장하고 싶구나. 

 

140 네티는 에레쉬키갈로부터 이 하늘의 여왕에게 일곱 문을 열어주는 방법을 배운다. 그러나 들어가는 사람은 관례상 문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옷을 하나씩 벗어야 한다. 첫문을 지나매 아름다운 왕관인 슈구라가 벗어졌다. 두번째 문을 지나매 청금색 홀장이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세번째 문을 지날 때 목에 걸고 있던 청금색 목걸이가 벗겨져 나갔다. 네번째 문을 지나매 가슴의 반짝이는 보석이 벗겨져 나갔다. 다섯번째 문을 지나매 손가락의 금반지가 벗겨져 나갔다. 여섯번째 문을 지나매 가슴의 흉갑이 떨어져 나갔다. 일곱번째 문을 지나매 귀인의 옷은 모두 벗겨져 나갔다.

 

발가벗긴 채 이난나는 왕좌 앞으로 인도되었다. 아난나는 공손하게 절을 했다. – 142

 

수메르의 신화는 서구 세계에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수메르의 신화는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니키아 전통 및 성서 전통(회교와 기독교를 잉태시킨) 근원인 동시에 켈트인, 그리스인, 로마인, 슬라브인, 독일인의 이교적 종교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 143

 

고대의 상징 체계에 따르면 빛과 어둠을 표상하는 자매, 즉 이난나와 에레쉬키갈은 두 얼굴의 한 여신이다. 그리고 그들의 반목은 어려운 시련의 길을 의미한다신이든 여신이든 남자든 여자든 신화의 등장인물이든 꿈을 꾸는 사람이든, 영웅은 적대자를 발견하고 삼키거나 그에게 삼켜짐으로써 이 적대자(뜻밖에도 그 자신의 자아)를 동화시킨다. 하나씩 하나씩 장애는 차례로 사라진다.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 143

 

시련의 첫 관문의 문제를 심화시키고 질문은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자아가 스스로를 죽음에 내어 맡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주위에 있는 것은 머리가 많은 휘드라이기 때문이다. 절단한 곳마다 비방을 쓰지 않는 한 하나를 자르면 두 개의 머리가 나타난다. – 144

 

 

2. 여신과의 만남

 

모든 장애물이 극복되고 도깨비가 퇴치되었을 때 영웅이 치르는 마지막 모험은 승리한 영웅과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스러운 혼례로 포상된다. 이로써 영웅은 천저, 천정, 혹은 땅 끝, 우주의 중심점, 신전의 성소, 혹은 마음 속의 가장 어두운 방에서 위기를 맞는다. – 144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여신, 키르케의 침상에 오르는 것도 이런 의미였을까?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계속된다. 그의 여정은 이 영웅여정과 맞아떨어지나?

 

144 아일랜드 외로운 섬의 왕자와 투버 틴다이 여왕 이야기

 

144 에린 여왕의 병을 고치려는 외로운 섬의 왕자, 이 영웅적인 젊은이는 타로르는 요정의 샘인 투버 틴다이의 물 세 병을 구하러 떠난다. 왕자는 도중에 만난 초자연적인 아낙네의 충고에 따라, 그녀가 준 더럽고, 비루먹어 잔뜩 여읜 조그만 말을 타고 불을 강을 건너고, 독수가 자라는 숲을 지난다. 바람같이 달리는 이 말은 순식간에 투버 틴다이 성에 이른다. …엄청나게 넓은 성 안은 잠이 든 바다와 땅의 거인과 괴수로 가득했다. 거대한 고래, 길고 매끌매끌한 뱀장어, , 그리고 갖가지 종류와 갖가지 형태의 동물이 다 있었다.

 

145 여왕의 열두 하녀가 아름다웠다고 하더라도 여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어싿. 그 침대 밑에는 투버 틴타이, 즉 타오르는 샘이 있었다. 샘에는 황금 뚜껑이 덮여 있었다. 이 샘은 여왕이 누운 침대와 더불어 끊임없이 돌고 있었다.

 

145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이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 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혹과 약속은 이 세상의 도시나 숲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다가온다. 왜 찾아왔을까? 그녀의 존재가 바로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때 인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볼 은혜이기 때문이며 위안과 자양, 그리고 우리가 아득한 옛날에 그 사랑을 받던 좋은 어머니(젊고 아름다운)이기 때문이다. 세월은 우리와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았지만, 그녀는 영원한 잠에 빠져든 미녀처럼 아직 우리의 속 영원의 바다 밑바닥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 148

 

그러나 우리의 심상이 기억해낸 어머니가 항상 자비로운 것만은 아니다.

(1)   우리가 공격적인 환상을 투사하고 그러면서도 반격 받을까봐 두려워하는 무심하거나 이르기 어려운 어머니

(2)   구속하고 금지하고 벌주는 어머니

(3)   자기에게 묶어두기 위해 아이의 성장을 싫어하는 어머니

(4)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위험한 욕망을 일으키게 하는(거세 콤플렉스), 바라던 어머니이긴 하나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어머니도 있다(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어머니 중에는 성인의 유아기 기억이라는 은밀한 곳에 숨어 있다가 때로는 엄청난 힘을 행사하는 나쁜 어머니도 있다. 이런 어머니는 아르테미스처럼 우아하면서도 고약한 여신으로 존재한다. – 148

 

148 악타이온

 

그의 머리에서 사슴의 뿔이 돋았다. 목은 굵고 길어졌으면 귀는 뾰족하게 솟았다. 그뿐인가 두 팔은 길어져 다리 길이와 같아졌고, 손발은 굽으로 변했다. 질겁을 한 그는 한 차례 펄쩍 뛰어 보고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데 놀랐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린 다음 물을 먹으면서 맑은 호수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는 그만 기가 막혀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 149

이걸 컴퓨터 그래픽으로 보면 재미있겠다.

 

150 만유의 어머니의 신화적 표상은 우주에 대해, 그 우주의 존재를 윤택하게 하고, 지켜주는 최초의 여성적 속성을 부여한다. 환상이란 원래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에 대한 어린아이, 주위의 물질 세게에 대한 성인의 자세에는 밀접하고도 노골적인 상응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150 중세와 현대 인도의 탄트라 경전에서는 여신의 거처를 마니-드비파, 죽 보석의 섬이라고 부른다. 여신의 침상 겸 보좌는 소원을 이루어주는 숲 속에 놓여 있다.

칼립소의 침대 연상

 

150 31) 플뤼겔 교수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마음, 정신, 혹은 영혼의 개념과 아버지, 혹은 남성이라는 관념, 또 한편으로는 육체, 혹은 물질의 개념과 어머니 혹은 여성적 원리라는 관념은 극히 보편적인 관련을 갖는다. 이 관련성에 비추어 볼 때 어머니(우리 유대-기독교의 유일신교에 있어서)에 관련된 정서나 감정이 억압당하면 인간에 대한 것이든 일반적인 사상에 대한 것이든 영적 요소를 과대평가하거나 강조하는 경향과 더불어 인간의 육체, , 그리고 물질적 우주에 대한 혐오, 경멸, 염증, 혹은 호전적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경향을 창출하는 수가 있다. 모르긴 하나, 철학에 있어서의 지나친 이상주의적 경향은 어머니에 대한 이러한 반응의 이상화 현상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이며, 물질주의의 교조적이고 편협한 양식은 원래 어머니와 관련된 억압된 감정에의 회귀 방향 때문인 듯 하다.’

 

152 여신은 때가 되면 죽는 모든 것의 죽음이기도 하다.

 

152여신은 자궁이며, 무덤이며, 제 새끼를 먹는 돼지다. 이렇게 해서 여신은 개인적인 어머니는 물론 우주적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두 유형을 드러내면서 선과 악을 통합한다. 여신의 숭배자는 이 두 유형의 어머니를 똑같이 조용히 묵상해야 한다.  

 

152 지난 세기의 위대한 힌두 비법 전수자인 라마크리슈나는 우주의 어머니께 새로 지어 바친 캘커타 교외의 다크쉬네와르 신전의 사제였다. 이 신전에 모신 형상은 무섭고도 자비로운 이 여신의 양면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여신의 네 팔은 우주적 권능을 상징했다. 즉 위 왼손은 피 묻은 칼을 들고 있었고, 그 아래의 손은 참혹하게 잘린 인두의 머리터럭을 거머쥐고 있었으며, 위의 오른손으로는 두려워하지 마라고 손짓하고 있었고 그 아래 손으로는 은혜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 목에 걸린 목걸이는 인간의 머리를 꿴 것이었고, 치마는 인간의 팔을 짜맞춘 것이었다. 긴 혀는 피를 찾아 낼름거렸다. 이 여신은 다름아닌 절대 절멸의 공포와, 비인격적이지만 모성적인 평화를 하나로 조화시키는 우주적 권능, 우주의 전체성 대립물의 조화였다. 시간의 강이 사람의 흐름으로 바뀌면 여신은 순식간에 창조하고 보존하고, 파괴한다. 이 여신의 이름은 <검은 존재> 즉 칼리다. 별명은 존재의 바다를 건너주는 나룻배.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여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엄청난 재앙일 수 있다. 수사슴이 된 악타이온의 예– 153

 

신화학의 심상 언어에서 여자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알게 되는 존재가 곧 영웅이다. – 153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니라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 154

 

니알은 노파에게 말했다. “여인이여, 물을 떠가게 해주시오노파가 말했다. “물을 드리겠어요. 대신 나에게 입맞춰주세요” “입맞춤이 대수요? 그대를 껴안아줄 수도 있소”- 155

 

왕도가 그렇다니? 아니 인생이 그렇다는 뜻이다. 마르지 않는 샘을 지키는 수호 여신(퍼거스나 악타이온, 그리고 외로운 섬의 왕자도 이 여신을 발견한다) 영웅에게 저 중세의 음유시인이나 궁정가인이 말하던 이른바 온유한 마음을 요구한다. ..여신은 오직 니알의 부드러움에 의해서만 그 정체가 드러났다. 156

 

156 새들이 초록빛 숲 그늘에 깃들이듯

사랑은 온유한 마음 속에 깃들인다.

 

여신과의 만남은 사랑의 은혜(자비, 즉 운명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영웅이 맞는 마지막 재능의 시험 단계다. 이 사랑의 은혜는 바로 우리 삶이 누리는 영원성의 그릇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보면 모험 당사자가 청년이 아닌 처녀일 경우에는 그 재능이나 아름다움이나 욕망으로 보아 불사신의 배우자가 되기에 마땅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천상의 남편은 그녀에게 하강하여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를 자기와 동침하게 한다. 만일 여자가 이 배우자를 싫어하면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 그녀의 편견은 바로잡히게 되고 그녀가 바라던 존재라고 생각되는 경우 그녀의 욕망은 평화를 성취한다. 158

 

짜증이 몹시 났던 공주는 개구리를 집어서 벽에다 메치고 말았다. 158

 

프쉬케가 자기에게 맡겨진 어려운 문제를 모두 풀어내자 제우스는 프쉬케에게 불사의 영약을 내려 주었다. -158

 

 

3. 유혹자로서의 여성

 

세계의 여왕과의 신비적인 결혼은 영웅의 삶 자체가 완성되었음을 상징한다. 즉 여성이 곧 삶인데 영웅은 이 삶을 알게 되었고 이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웅의 궁극적인 체험과 행위의 예비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의 시련은 자각의 위기를 상징한다. 이 자각의 위기를 통해서 영웅의 의식은 증폭되고 어머니 상의 파괴자, 즉 천생연분의 신부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시련을 받는 당사자는 자기와 아버지가 동일하다는 사실과, 자기가 곧 아버지의 입장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159

 

삶의 상황을 수습하는 데 대한 실패는 결국 의식의 제약으로 나타나는 수밖에 없다. 싸움이나 짜증은 무식한 자들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후회는 때늦은 각성일 뿐이다. 세계도처에 널린 영웅 신화에 나오는 영웅의 모험은 일반적인 양식으로 어떤 계층에 속하는 사람에게나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여기에 광의의 술어로 공식화시켜 본 것이다. 우리는 이 일반적인 비교에서 우리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하고, 이것을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는 제약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데 필요한 길잡이로 잡아야 한다. 160

 

도깨비들이란 자기 인간성의 미해결 수수께끼가 투영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160

 

160 현대의 정신분석가 진료실에서는 영웅 모험의 각 단계가 환자의 꿈과 환각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정신분석가는 조력자, 즉 입문식의 사제가 되어 환자의 무의식의 바닥의 깊이를 잰다.

 

160참으로 까다롭고 재미있는 것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를 윤색하고 회칠을 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름에 빠진 파리, 우리가 먹을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누군가의 다른 불유쾌한 사람의 허물로 돌리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에는 어차피 육욕의 냄새가 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예외 없이 낭패의 순간을 경험한다. , 사는 행위, 삶의 구조, 특히 삶의 괄목할 만한 상징인 여성은 더없이 순수한 영혼을 차마 상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160

 

162 오이디포스-햄릿의 부정적 흥분 상태가 영혼을 유혹하고 있는 동안은 세계, 육체, 그리고 특히 여성은 더 이상 승리의 상징이 아닌 패배의 상징 노릇을 한다. 금욕적, 청교도적,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윤리 체제는 즉시 금단적인 모든 신화 이미지로 변용된다. 이렇게 되면 영웅은 육욕의 여신과 더 이상 순진한 평화에 안주할 수 없게 된다. 여신이 이 시점에 이르러 죄악의 여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62 성 베드로는 자기 딸 페트로닐라가 지나치게 아름답다는 걸 알고는 하느님께 딸을 열병으로 앓아눕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이 기도는 그의 뜻대로 이루어졌다….그러나 젊은 처녀들이 당도하자 페트로닐라는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성체를 배령한 페트로닐라는 다시 자리에 누워 사흘 뒤 하느님 곁으로 갔다.

41) 다프네 이야기와 비교해 보라. 후일 교회에서는 성 베드로에게 자식이 있었다고 생각하기가 뭣해서 페트로닐라를 피후견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혼하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신에게 기도해서 죽어버린 페트로닐라와 다프네, 비슷하네.

 

165 정말 나는 도둑에게 당할 뻔했네. 안주인은 한 번 잃으면 다시 찾을 수 없는 내 보물을 노리더란 말일세

 

수도원의 두꺼운 벽 안이라고 해서, 외딴 광야라고 해서 여성이라는 존재로부터 온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은자의 살이 뼈에부터 있고 그 맥박이 고통 치는 한 삶의 이미지가 그의 마음에 폭풍을 일으키는 일을 막기 어렵다. …성 안토니우스는 그 당당한 풍모에 반한 여귀가 일으킨 관능적인 환각에 큰 시련을 당했다. 눈을 못 돌리게 하는 둔부와 손길을 기다리는 가슴을 가진 이런 유의 허깨비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은자들을 애먹이는 존재로 알려졌다. 165

 

우리는 마귀의 무대이며 마귀의 목표이기도 한 이 땅 시온을 향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마귀가 도둑 무리와 은거하고 있는 이 땅의 초라한 나그네다. 166

성적인 욕구를 일으키고 타락시키는 존재로서 여성인 나는 마귀인가? 그럼 나에게 남자들도 그렇겠군. 이건 뭐 어떨 때는 선물이고, 어떤 때는 마귀이고

 

 

4. 아버지와의 화해

 

168 죄인을 화살에서, 홍수에서, 불길에서 지켜주는 <하느님의 의지>는 전통적인 기독교 용어에 따르면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의 <은혜>인 심정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성령의 위대한 권능>이다. 대부분의 신화에서 자비와 은혜의 이미지는 정의와 분노로 표현된다. 이렇게 해서 이 정의와 분노 사이에 균형이 생기고, 인간은 파멸을 겪는 대신 어려움을 근근히 이겨나간다. 시바는 신도 앞에서 우주적 파멸의 춤을 추면서도 손으로는 <두려워 말라>는 시늉을 한다.

 

169 46),,,시바 신의 오른쪽 귀고리는 남자의 것이고, 왼쪽 귀고리는 여자의 것이다. 이는 신이란, 한 쌍의 대립물을 초월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시바의 표정에 떠올라 있는 것은 슬픔도 기쁨도 아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부동의 움직임을 주관하는 존재, 세상의 행복과 고통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이 양자를 품고 있는 존재의 모습이다. …시바의 팔찌, 팔고리, 발목고리, 그리고 브라만 사는 살아 있는 뱀이다. 이는 그가 뱀의 권능에 의지해서 아름다움을 얻었음을 뜻한다. 뱀의 권능은 신비스러운 신의 창조 에너지다. 

 

아버지의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피해자의 에고가 투영된 것이다. 즉 지난날 존재했던 예민한 유아기의 장면이 전면으로 투사됨으로서 나타난 것이다. 교육적으로 백해무익한 이러한 우상 숭배에 집착한다는 것은 당사자를 죄의식에 빠지게 하고 잠재적인 성인의 정신을 아버지,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세상에 대한 온전하고 현실적인 견해로부터 당사자를 봉쇄하게 한다. <화해> <하나되기>란 스스로 만들어낸 두 마리의 괴물((초자아)로 보이는 용과 죄악(억압된 이드))로 보이는 용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자면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이게 예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사자는 아버지가 자비로우며, 이 자비를 믿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믿음의 중심은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신의 족쇄 바깥으로 이동하고, 믿음의 중심이 이동하면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사라진다. 영웅이 조력자인 여성에게서 희망과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다. 여성의 마법(꽃가루라는 호부, 중재의 능력) 덕분에 영웅은 자아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하는 아버지의 무서운 입문 의식 경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영웅은 아버지의 끔찍한 얼굴을 믿을 수 없으며, 그 믿음을 다른 곳에다 기울인다. (즉 지주녀, 혹은 성모) 지원을 보장받은 영웅은 위기를 견디어 나가고, 결국에 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투영하고 있지만 사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71

 

172 “말을 너무 많이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오늘 두 젊은이가 아버지를 찾는답시고 이리로 왔어요. 당신은 출타 중에 어느 집에도 들르지 않았고 나 아닌 어떤 여자도 만나지 않았다고 했지요. 그럼 이 아이들은 누구의 아들이란 말인가요?”

여자는 시렁 위에 놓인 두 보퉁이를 가리켰고, 두 아이는 보퉁이 안에서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173 태양은 두 아들이 참 자랑스러웠다. 이제 만족한 것이다. 그는 두 아들에게

내 아들아,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왜 나를 찾아왔느냐?” 하고 물었다. 쌍둥이 영웅은 아버지 태양의 신뢰를 얻는데 성공한 것이다.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YES는 좋지 않구나!!!!! 입문, 시련은 필요하다. 그러니 뒷끝을 남기면서 네네 하는 것보다는 화끈히 밝히는 게 낫다.

 

갖가지 시련을 다 치른 자를 집안으로 용납하는 아버지 입장이 얼마나 어려우며, 얼마나 주의를 요하는가는 그리스의 유명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파에톤의 불행한 행적이 잘 그려내 보이고 있다. 173

연구원과정을 마친 선배들에 대한 신뢰는 여기에서 왔다. 나도 이런 신뢰를 받고 싶다. 아슬아슬하군.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모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서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확인시켜 준다. 177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때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어머니가 그때까지 선과 악을 표상하고 있었듯이, 지금부터는 아버지가 그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이 경우는 좀더 복잡하다. 여기엔 새로운 경쟁자적 요소가 틈입한다. 아들은 세계를 섭렵하는데 있어서 아버지를 경쟁 상대로 삼고, 딸은 섭렵된 세계 자체가 되는데 있어서 어머니를 경쟁상대로 삼는 것이다.

 

입문에 대한 전통적인 의식은 부모의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관련성을 철저하게 바로잡아주면서 그가 살아갈 삶의 기술과 의무와 특권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수렴하고 있다. 비법 전수자 (아버지, 혹은 아버지를 대신하는 사람)는 유아기의 부적당한 카텍시스(리비도가 특수한 사람, 물건, 또는 관념을 향하여 집중 발현되는 현상)으로부터 놓여난 입문자에게만 의식의 상징을 베풀게 되어 있다. 이런 입문자라야 자기 강화라는 무의식적(혹은 의식적, 합리적일지도 모르나) 동기나 개인적인 선호나 혹은 증오 때문에 정당하고 비개인적인 힘을 오용할 가능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입문의 영광을 입은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의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이다. 그는 끊임없이 삶의 싸움판에 나서야 하고, 입문의 사제, 안내자, 태양을 향한 눔 노릇을 해야 한다. 요컨데 선악에 대한 유아기 환상을 떨치고, 희망과 공포에서 놓여나 평화롭게 존재의 계시를 이해하고 우주 법칙을 엄숙하게 경험하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입문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 178

 

180 이런 식으로 그들은 위대한 아버지 뱀의 몸 안에서 어머니를 잃는 대신에 그 보상으로 얻게 될 새로운 세상을 소개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기 상상의 중심(즉 세계의 축)에다 젖가슴 이미질 대신 남근을 세운다.

 

오스트리아 원주민의 신화를 보면, 초기 입문 의식에서는 모든 젊은이들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의식은 연장자 세대에 의한 오이디푸스적인 공격의 극단적인 표현을으로 비쳤다. 완화된 거세 의식인 할례 의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의식은 동시에 젊은 세대, 즉 세력 집단으로 발돋움하는 남성 집단에 의한 식인 및 살부 충동과 함께 원형적 아버지의 자기 희생적인 측면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즉 연장 세대가 상징적인 가르침을 베푸는 긴 기간 동안, 입문자는 연장 세대가 흘리는 신성한 피만을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 182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구절을 읽어보자 ‘원주민들은 기독교의 성찬식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선교사들로부터 성찬식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대뜸 자기네들의 흡혈의식과 비교하는 것이었다. -182

 

183 우리는 여기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먹는 의식적인 행사를 엿볼 수 있다.

 

183 벌거숭이 오스트레일리아 야만인들이 미개해 보일 지 몰라도, 이 유서깊은 정신적 유산의 체계를 오늘날까지 상속시킨 그들의 상징적인 의식과 그 의식의 광범위한 흔적이 인도양 저쪽 땅과 섬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특별히 우리 문화권으로 여기는 고대 문화 중심지의 유습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86 동아프리카의 바숨봐족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민간 전설에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만나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는 죽음의 가축을 몰고 그에게 나타나 넓은 굴 같은 땅 속으로 난 길로 아들을 인도했다. 이윽고 그들은 넒은 지역에 이러렀는데, 거기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숨기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대추장인 죽음이 나타났다. 그의 한쪽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한쪽은 썩어 있어서 구도기가 땅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추장의 수행원들은 그 구더기를 줍고 있었다. 수행원들은 물로 그 상처를 씻고 있었는데 그 일이 끝나자 죽음이 입을 열었다.

오늘 태어난 자는 장사하러 가면 강도를 만나 털릴 것이다. 오늘 아기를 배는 여자는 밴 아기와 함께 죽을 것이다. 오늘 밭을 가는 자가 있으면 그 곡식은 여물지 못할 것이다. 밀림으로 들어가는 자는 사자의 밥이 될 것이다.”

죽음은 이 우주적인 저주를 내리고는 휴식에 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나타났다. 수행원들이 아름다운 쪽을 씻고 향유를 바른 다음 기름으로 문질러 주었다. 이 일이 끝나자 죽음은 복을 내렸다.

오늘 태어나는 자는 재물의 복을 받을 것이다. 오늘 아기를 배는 여자는 천수를 누릴 아이를 낳을 것이다. 오늘 태어나는 아기는 시장으로 보내라. 장님과 상담을 벌일 듯하니 마땅히 봉을 잡을 것이다. 밀림으로 들어가는 자는 사냥이 순조로우리라. 내가 복을 내렸으니 코끼리가 걸릴 지도 모른다.”

이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일렀다.

네가 오늘 여기에 이르렀으면 큰 복을 받았을 것이다. 허나 네가 가난하게 살 팔자인 것을 어쩌랴. 내일은 여기에서 떠나도록 하여라아들은 이튿날 집으로 돌아왔다.

 

190 키아짐바와 에드슈는 무서운 형상을 한 같은 신의 다른 얼굴이다. 이 단일한 신은 모순되는 개념, 즉 선 악, 생과 사, 고통과 쾌락, 증여와 박탈을 두루 지니고 있다. 태양의 문이라는 사람이 그렇듯이, 이 신 역시 쌍쌍의 대립물의 원천이다.      

 

분명히 자기모순적인 아버지의 신비는 비라코챠라는 이름의 선사적인 페루의 신 이야기에도 나타나고 있다. 비라코차의 관은 곧 태양이다. 그는 양손에 벼락을 들고 있고, 그의 눈에서는 세게의 계곡에 사는 생명을 소생시키는 비가 눈물로 흘러내린다. 비라코차는 만유의 신이며 만물의 창조자다. 그런데도 지구에 내린 그의 모습을 전하는 전설에는 그가 누더기 차림에 손가락질이나 받는 거지로 등장한다. 이 이야기는 베들레헴 여관 문전을 기웃거리는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바우키스와 필레몬의 문전에서 걸식하던 제우스와 헤르메스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장난꾸러기 신 에드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것은 신화에서 우리가 자주 만나는 주제다. 코란은 어디로 돌아서든 거기엔 알라 신이 계시도다라는 말로 이를 암시하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물 속에 숨어서 그 영혼이 빛을 발하지 않으나, 뛰어난 지력을 가진 명민한 자의 눈에는 보인다> 그노시스 파의 격언에 따르면 <지팡이를 쪼개도 예수님이 거기 계신다> - 191

 

191 태양신과 폭풍신을 합친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두 신의 특징이 두루 보이는 (즉 폭풍의 신 야훼와 태양인 엘) 히브리의 야훼 신화를 통해 이미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나바호 족에 의한 쌍둥이 전사 아버지의 화신도 이에 다름 아니고, 벼락이나 불교 이미지의 후광을 진 제우스 역시 여기에서 멀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태양의 문을 통해 우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은혜는 다른 존재를 징벌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벼락의 에너지와 동일함을 뜻한다.  

 

페루판 만유의 신인 비라코차의 특징 가운데서도 가장 독특하고 감동적인 대목은 비라코차 고유의 것인 저 눈물이다…모든 생명은 슬프다는 어느 비관적인 수도승의 통찰은 과연 생명이라고 찬찬하는 아버지의 낙관적인 확신 속으로 수렴된다. 자기 손이 창조한 생명의 고뇌를 익히 자각하고, 혹심하 고통, 머리를 터뜨리는 듯한 미망의 불길, 자기가 창조한 자기참해적이고 쾌락적이고, 분노에 떨고 잇는 우주를 생생하게 의식하는 이 신은 삶이 삶을 점화시키는 행위를 승인한다. 정액의 사출을 보류하는 것은 멸망을 초래할 뿐이다. 그러나 이를 사출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세계를 창조하기 위함이다. 시간의 본질은 유동하며, 한 순간 존재하는 것의 흐름이다. 그리고 생명의 본질은 시간이다. 신의 자비, 시간이라는 양식에 대한 그의 애정을 통해, 이 데미우르고스(조물주)적 인간 중의 인간은 저 고해로 몸을 내맡긴다. 그러나 자기의 행위를 완전히 자각하고 있는 경우, 그가 사출하는 정액은 곧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다. 창조의 역설, 영원으로부터의 시간이라는 양식의 도래는 아버지가 지니는 근원적인 비밀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가 없다. 따라서 모든 신학 체계에서는 배꼽 즉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킬레우스 건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화하게 그곳을 뚫고 (그가 속한 세계와 함께)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영웅은 영혼의 문을 열어 공포를 극복하고 이 광대무변하고 무자비한 우주의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을 존재의 존엄성 속에서 완전하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영웅은 자기 몸에 박힌 가시(약점)을 통해 삶을 초월하여, 한 순간이나마 그 근원을 투사한다. 그는 여기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와 자기가 화해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는다. 192

자신이 낳는 생명의 말로를 알면서도 자식을 만드는 이()의 눈물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런데 늙고 병들어 죽고,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을 줄 알면서도 생명을 낳고 살게 하는 것, 최선을 다해 돕는 것이 바로 애정이다.

 

193 네가 나의 판결을 뒤엎을 셈이냐?

너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 작정이냐?

 

욥기에는 사탄과의 내기에 대해서는 설명이나 언급이 없고 오직 일어난 사실에 대한 청천벽력 같은 탄핵의 시위만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범주 밖에 있는 중심에서 비롯되는 하느님의 의지는 인간의 힘으로는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은 끔찍한 불가마 안에서 견디는 용기와 전지전능한 신의 성격에 대한 일반적 개념 앞에서 결코 파괴나 굴복당하지 않음으로써 친구들을 만족시키는 것 이상의 위대한 계시에도 맞설 수 있음을 증명한 영웅이었다. 우리는 그가 한 말을 그저 두려움에 떠는 자가 한 말로만 해석할 수가 없다. 그의 말은 자기 합리화의 한 방편으로 <예언된> 것을 능가하는 그 뭔가를 <목격한> 사람의 말이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위로하는 자들은 무색해진다. 욥은 새 집, 새 하인, 새 아들 딸을 상으로 받는다.

욥이 아버지와의 화해의 예로구나. 화해는 본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인 듯.

 

아들이 아버지를 알 나이가 되면 시련의 고뇌가 이미 그의 내부에 태동해 있다. 194

 

 

5. 신격화

 

196 인간에게 알려진 신들 가운데 관세음보살만큼 많은 기도를 가납하는 신도 없을 것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즉 그는 인간으로 이 땅에 살다가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는 순간(이 순간만 넘어서면, 이름 붙여지고 경계지어진 우주의 헛된 망상을 초월한 공의 무량 세계가 열린다.) 에 이를 작파해 버리고, 모든 중생을 정각에 이르게 한 연후에야 공에 들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그는 신의 은혜 안에서 중생을 돕는 존재로 중생의 존재 안으로 삼투한다.

 

197 중국과 일본에서 이 대자대비의 보살은 남성의 형상뿐만 아니라 여성의 형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중국의 콴인, 일본의 쿠안논(극동의 성모)는 바로 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대자대비한 보살이다.

 

198 시간(결코 끝나지 않는)이 끝나는 순간까지 앞서서 잔잔한 영원의 강으로 뛰어들겠다는 각오로 열반의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었다는 것은 겁과 찰나의 구별에 대한 자각을 표상한다.

 

여기서 먼저 주의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보살의 양성구유적 성격, 즉 남성인 관세음과 여성인 관음의 성격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신이 남성과 여성의 성격을 두루 갖추는 예는 신화의 세계에서는 그리 생소하지 않다. 이러한 신들은 마음을 객관적인 체험을 초월한 상징적 영역, 이원성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으로 인도한다. 만상의 창조자이며 그릇인 주니족의 아오나윌로나는 남성으로 지칭될 때도 있지만 하나 사실은 양성적인 신이다. 중국 역사의 시원인 성녀 타이유완은 남성적 원리인 양과 여성적 원리인 음을 두루 갖추고 있다. 198

요점정리 : 양성신

(1)   주니족 최고신

(2)    중국역사의 시원 성녀 타이유완

(3)   2세기 그노시스파 기독교인, 중세 유럽 신비주의자 – 육으로 된 말씀

(4)   그리스 신화 헤르마프로디토스, 사랑의 신 에로스

(5)   하느님, 당신의 모습대로(양성으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6)   눈먼 선견자 테이레시아스

(7)   시바

(8)   인류의 조상 어머니의 젖가슴과 아버지의 수염, 성기가 결합된 형태

 

203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할례 다음해에 완전한 남성이 되고자 하는 입문자는 두 번째의 제의적 수술을 받는다. ..이 흉터는 페니스 자궁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남성의 질을 상징한다. 영웅은 의식을 통하여 남성 이상의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와 누리던 유아기라는 아이의 낙원에 침입한 아버지는 원형적인 것이다. 이때부터 아이에게 있어서 평생토록 모든 적은 아버지(에 대한 무의식)을 상징한다. 그래서 살해당한 것은 모두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204

 

204 뿐만 아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싶은 충동도 여기서 비롯되고,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은 끊임없이 집단 폭력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이 낙원은 아직도 조직적인 공격계획이 세워지고 있는 전통적으로 적대하던 종족이나 인종은 끼워주지 않는다. 아버지 어머니적인 모든 선한 요소는 집단의 평화로 수렴되고, 약한 모든 것은 외부로 투사된다. 204

 

종족 및 인종적 토템과, 공격적인 집단 행위를 겨냥한 제의는 사랑으로 증오를 정복하는 심리적 문제의 부분적인 해결책만을 나타낸다. 여기에서는 부분적으로밖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에고는 이러한 토템과 제식으로 소멸되지 않는다. 오히려 강화된다. 무리의 구성원들은 자기 자신의 문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헌신할 길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이에 세계의 나머지 부분(그러니까 인류가 사는 세계의 대부분)은 그 구성원들의 동정과 보호와는 상관없는 세계로 밀려난다. 왜냐하면 나머지 세계는 그들이 믿는 신의 보호권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이어서 사랑과 증오의 두 원리가 서로 헤어지는 극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인류의 역사에는 이러한 예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 마음을 정화하는 대신 세계를 정화하고 싶어진다. 성도의 율법은 이제 구성원의 집단(종족, 교회, 국가, 계층)에만 적용되고, 이윽고 재수가 없어서 이웃이 된 할례받지 않은 자, 야만인, 이교도, 토인, 혹은 이방인에 대한 성전의 기치가 오른다. 양심에 거리끼기는 커녕 경건하게 예배라도 드리는 기분으로 기치를 올리는 것이다. 205

종교의 이름으로 성전, 죽임과 전생이 일어나는 이유구나. 악이라고 상대에게 투사하니까 여지가 없구나. 그래서 종교를 낀 전쟁이 가장 악랄하고 잔인했다.

 

우리가 일단 세계의 원형들에 대한 편협스런 교회적, 종족적, 국가적인 해석의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 던지게 되면 우리가 전수받아야 할 최상의 도리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서슴없이 이웃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만 자애스런 아버지의 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게 가능해진다. 207

 

전문 성직자들의 행동과는 상관없이 구세주의 십자가는 한 국가의 깃발이라기 보다는 민주적인 상징이다. 208

 

208 기독교 국가의 전통인 세계 구원의 말씀과 상징의 궁극적이고 비판적 의미에 대한 이해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악마의 도시에 대한 신의 도시의 성전을 선포한 이래 격동의 몇 세기 동안 몹시 어지러웠기 때문에 세계 종교(우주적 사랑의 교리)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현대인은 마땅히 다른 위대한 (그리고 훨씬 오래된) 우주적 친교로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안된다. 즉 근원적인 말씀이 평화, 모든 존재에 대한 평화를 지향하는 부처의 우주적 친교에 관심해야 하는 것이다.

 

211 우리는 모두 보살 이미지의 그림자다. 우리 내부의 고통은 바로 저 신적인 존재다. 우리와 저 보호자인 아버지는 한 몸이다. 이것은 구원의 통찰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우리 보호자인 아버지다. 그러니 이 무지하고 유한하고 자위적이고 고통받는 육신이 다른 육신()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에도 그 적 또한 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도깨비는 우리 기를 꺾지만 유능한 후보자인 영웅은 사나이답게 입문한다. 보라. 그 도깨비가 바로 아버지였다 우리는 그의 안에 있고, 그는 우리 안에 있다.

 

우리의 보호자인 사랑하는 어머니는 우리를 저 위대한 아버지 뱀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준 필멸의 현실적인 육체는 그의 무서운 힘 안으로 빨려들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새 생명, 새로운 탄생, 새로운 존재의 지식이(따라서 우리는 이 몸만으로 사는 게 아니고, 보살처럼 모든 몸, 세상의 모든 육신으로 산다) 우리에게 주어졌다. 저 아버지가 바로 어머니, 즉 재생의 자궁이었던 것이다.

 

양성적인 신의 요체가 바로 이것이다. 양성적 신은 입문 의식이라는 주제의 궁극적 요체다.

 

212 신이 종족적, 이종적, 국가적, 혹은 분파적 원형이라면 우리는 그 신에 의해 사역당하는 전사들이다. 그러나 신이 우주 자체의 주인이라면, 우리는 전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존재, 즉 모든 인간이 한 형제임을 깨달은 존재다. 어느 경우든 유아기의 부모 상과 선악에 대한 관념이 억압받기는 마찬가지다. 재생한 우리에겐 욕망도 공포고 없다. 우리 자체가 곧 욕망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거다. - 212

이해가 안되네

 

보살에 대한 첫 번째 경이로움은 바로 이것, 즉 보살의 양성구유적 성격이다. 이 보살과 만남으로써 분명히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 서로 만난다.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란 여신과의 만남, 그리고 아버지와의 화해다. 213

 

보살 신화에서 주목해야 할 두 번째 경이로움은 보살이 삶과 삶으로부터 해탈의 차이를 없애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보살이 열반을 단념한다는 사실로 상징되고 있다. 213

 

216 에고를 초월한 그를 통하여 공은 자체를 현현한다. 그것이 바로 그의 위대한 대자대비로운 행위다. 왜냐하면 이 행위로 인해 중생은 자신의 욕망과 적의와 미망이라는 세 겹의 불을 끄고 이 세상이 바로 열반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모든 이의 자유를 위해 선물의 물결을 쏟아낸다. 이러한 속세의 삶이 곧 열반이 겨냥하는 바다. 이 양자는 털끝만큼도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환자를 소생시키는 치료의 현대적인 목적은 고대의 종교적 수련을 통해서도 달성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216

왜 이게 결론이 되지?

 

정말 미안합니다. 원컨대 제 발을 들어 그런 성스러운 링감이 없는 곳에다 놓아주시겠습니까? 222

 

보살 신화의 세 번째 경이로움은 첫 번째 경이로움(양성적인 형상)이 두 번째 경이로움 (찰나와 영원의 동일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223

 

223 현명한 자는 그 자궁 속에서도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안다. 그보다 더 현명한 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으 ㅣ본체 안에 있다는 것까지 안다.

 

223 여성적 형상, 즉 티베트 어의 윰yum은 찰나로, , 즉 얍yab는 영원으로 보아야 한다. 이 양자의 결합은 이 세계를 창출한다.

 

223 어쩌면 남성상은 입문의 원리와 방법의 상징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경우 여성상은 입문 의식의 목적이 된다. 그러나 이 입문 의식의 목적은 열반(영원)이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 양자가 번갈아 찰나와 영원으로 마음 속에 그려져야 한다. 말하자면 이 양자는 같은 것이고, 각자가 그 둘이며, 이원적인 형상 yab, yum으로 보이는 것은 환상 때문이지만 이것이 또한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224 131) 힌두의 여신 칼리는 배우자 시바 신의 부복한 형상 위에 서 있는 것으로 자주 나타난다. 칼리는 정신의 수련을 뜻하는 죽음의 칼을 휘두른다.  

 

6. 홍익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 음식은 끊임없이 생명을 부여하고 형체를 만드는 우주적 근원의 권능을 상징한다. 이 음식의 모티프(유아기 환상에서 나온)는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벌이는 풍요한 잔치 이미지의 동화판 이야기다. 여신과의 만남, 불의 도둑질이라는 두 상징적 행위의 만남은 신화 영역에서의 신인 동형 동성의 능력을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상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불멸하는 생명의 술, , 양식, , 그리고 영광의 수호자, 권화, 혹은 시혜자까지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비유적 표현은 반드시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대체로 심리학적 관점에서 해석되어도 무방할 듯 하다. 유아의 초기 발전 단계에서는 세월의 흐름과 무관한 상태의 신화적인 징후가 관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징후는 어머니의 품을 떠날 즈음 아이를 괴롭히는 자기 육체가 파괴당할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대한 반작용과 끊임없는 저항으로 일어난다. 227

 

228 불가괴성에 관련되는 또 하나의 이미지는 신령한 생령에 대한 민간의 관념에도 나타나 있다. 외적인 영혼은 현재의 육신이 손상되더라도 시달림을 받지 않고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안전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느 도깨비는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죽음은 여기서 먼 곳에 있으므로 찾기가 어렵다. 아주 넓은 바다에 섬이 하나 있는데 그 섬에는 푸른 참나무가 자란다. 그 참나무 밑에는 쇠로 만든 궤짝이 하나 있고, 그 궤짝 안에는 작은 상자가 하나 있다. 그 상자 속에는 토끼가 한 마리 들어 있고, 그 토끼 안에는 오리가 한 마리 있으며, 그 오리 뱃속에는 알이 하나 들어 있다. 그 알을 찾아내어 깨뜨리면 나 역시 죽으리라

 

231 육체와 영혼의 양식, 마음의 평화는 다름아닌 만병 통치약, 즉 마르지 않는 젖꼭지가 내리는 은혜다.  

 

우리 모두가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는 유아기적 환상은 불멸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신화와 동화와 교회의 가르침에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현상은 마음이 이러한 이미지와 더불어 안식을 찾는다는 뜻에서 그리고 예부터 익히 알려져 있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의미에서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온통 경건하게 만들어 버리는 유치한 행복에 젖어있는 무리와 진정으로 자유로운 무리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존재한다. 여기서 상징은 무너지고 초월당한다. 232

 

233 상상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말로 다할 길 없는 천복의 가르침은 어린 시절에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옷으로 위장하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동화는 다분히 황당하다. 그리고 심리학에 대한 독서가 위험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235 문학적이고 감상적인 신학의 분위기에서와는 달리 익살은 철두철미 신화적이 것의 시금석이다.

241 메소포타미아 권에서 불로불사약을 구하는 이야기로 가장 유명한 것은 수메르의 에렉이란 성읍의 전설적인 왕 길가메쉬의 이야기일 것이다.

 

244 그러나 그가 잠들어 있을 동안 뱀이 그 풀의 향내를 맡고 다가와 풀을 물어가 버렸다. 이 풀을 먹은 뱀은 권능으로 허물을 벗고 젊음을 되찾았다.

 

248 육체의 불로불사를 구하는 것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다.  

 

248 만물은 나아가고 일어나고 되돌아온다. 나무는 꽃을 피우나 오직 부리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다. 뿌리로 되돌아감은 정일을 찾음이다. 정일을 찾음은 천명으로 합일함이다. 천명에 합일함은 영원에 합일함이다. 영원을 아는 것은 깨달음이요, 영원을 깨닫지 못하면 혼란과 마이다.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 아니다.

 

249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250 나는 비바람 몰아치는 나무에

꼬박 아흐레 밤을 걸려 있었던 듯하다.

나는 창에 상하여, 나 자신인 오딘에게 바쳐졌다.

뿌리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는 그 나무 위에서.

 

보리수 아래에서 얻었던 부처의 승리는 이러한 행위의 동양적인 일례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는 <인간이 제물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면 신들이 웃는다>는 속담이 있다. 신도에게 내리는 은혜는 그 신도의 처지와 그가 발원한 소망에 준하여 내려진다. 은총이란 특수한 경우의 발원에 내려지는 삶의 에너지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은총을 입고 있는 영웅이 완전한 깨달음의 은총을 구한다면 몰라도 그가 장수의 은혜와 이웃을 시해할 무기, 혹은 자식의 건강 등을 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249

 

 

3. 귀환

 

1.    귀환의 거부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원질신화의 규준인 완전한 순환 체계는 영웅에게 지혜의 시문, 황금 양털, 혹은 잠자는 미녀를 인간의 왕국으로 데리고 오는 또 한번의 수고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이 은혜가 사회, 국가, 그 전체,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시키는 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253

 

실제로 많은 영웅들이 불로 불사 여신의 축복받은 섬에서 아예 영원히 눌러 앉아 버린 것으로 전해진다.  254

 

257 무추쿤다는 회귀하는 대신 이 세상으로부터 한 차원 더 떨어진 곳으로 물러서기로 마음먹었다. 누가 감히 그의 결심이 무분별하다고 할 것인가?

 

 

2. 불가사의한 탈출

 

257 그가 속한 사회를 구원할 불사약을 가지고 원상 복귀할 대목이 되면 영웅 모험의 이 최종 단계에서 초자연적인 후원자에 의한 지원이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만일 전리품이 그 수호자의 의지에 반한 상태에서 영웅의 손에 들어갔거나 영웅의 귀환 의사가 신이나 악마의 찬성을 얻지 못하는 경우에는 이 신화 주기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격렬한 때로는 익살스러운 추격전이 벌어진다. 257

 

259 카리드웬은 달아나는 바크를 따라갔다. 카리드웬을 본 바크는 산토끼로 둔갑하여 도망쳤다. 그러나 카리드웬이 사냥개로 둔갑하여 따라가니 형제가 자못 급박했다. 강에 이르자 바크는 물고기로 둔갑했다. 그러나 카리드웬은 수달로 둔갑해서 뒤쫒았다. 절박하게 쫒기던 바크는 이번에는 새로 둔갑하여 물 위로 날아올랐다. 카리드웬도 지지 않고 매로 둥갑하여 추격하니 그에겐 숨돌릴 사이가 없었다. 매가 덮치는 순간 바크는 창고 앞의 타작 마당을 보고 그 밀 속으로 뛰어들어 한 알의 밀알로 둔갑했다. 카리드웬은 시커먼 수탉으로 변신, 발로 다른 밀알을 헤치고 변신한 케이온 바크를 찾아내어 쪼아먹어 버렸다. 그런데 계속되는 이야기인즉, 카리드웬은 그를 9개월 동안이나 몸속에 넣어두었다가 낳고 보니 그 용모가 하도 준수하여 죽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카리드웬은 바크를 가죽 부대에 넣어 바다로 던져 신의 자비에 맡겼다.

재미있네. 추격전

 

그는 마침내 무고를 타고 천상으로 올라갔다….꾀 많은 샤먼은 말벌로 둔갑했다. 말벌은 최고 신에게 다가가 있는 힘을 다해 이마를 쏘았다. 최고 신은 몹시 놀란 나머지 병 주둥이에서 손가락을 뽑았고 그 틈에 갖혀 있던 영혼은 빠져나왔다. - 261

 

영웅의 도망에서 흔히 사용되는 것은 뒤에 남은 다른 사물들이 영웅을 대신 대답하여 추격을 지연시키는 수법이다. 261

 

영웅이 도망치는 대목에서 또 하나 자주 등장하는 방법은 도망치는 영웅이 끊임없이 장애물을 던져 추격을 지연시키는 수법이다. 262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된다. 동양에서는 엄격한 지도와 감독 없이 심리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에서의 요가수련은 몹시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수련자의 명상은 그 발전단계에 따라 통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 수련자의 상상력은 테바타(수련자의 수준에 맞는 신성)에 의해 각급 단계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 교리적 상징의 유용한 기능은 개인이 무턱대고 나서지 않는 한 신의 직접적인 체험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집과 가족을 떠나 너무 오랫동안 혼자 방황하고 심연의 거울을 너무 깊이 들여다보면 이 무서운 만남 자체가 그에게 재앙일 수 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꽃 피어 왔던 전통적인 상징체계는 이때 영약으로 작용하여 살아있는 신의 치명적인 공격무대를 교회라는 신성한 공간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공포에 질려 혼비백산 도망치는 영웅이 추격자 쪽으로 던진 불가사의한 장애물 (자기 방어적 해석, 원리, 상징, 정당화 같은 것)은 공격해 오는 천상의 사양개의 속도를 지연시키거나 흡수하여 영웅을 그가 얻은 전리품과 함께 안전하게 고향으로 귀환시킬 수가 있다. 그러나 영웅이 물어야 하는 통과세가 늘 가벼운 것은 아니다. 264

전통적 종교의 어떤 구절을 암송하는 것도 좋겠다. 나는 이런 걸 정말 못한다. 

 

아자나기, 이자나미의 전설이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신화, 그리고 세계 전역에서 채집되는 수백 가지의 비유적 전설들은 영웅에게 실패의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무서운 관문 건너편에서 애인과 함께 귀환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 269

 

 

3. 외부로부터의 구조

 

영웅은 외부의 지원을 빌려 초자연적 모험에서 귀환하는 수가 있다. 말하자면 이 세계가 합세하여 그를 도울 수도 있는 것이다. 외부 세계가 이렇게 하는 것은 지칠 대로 지친 영웅에게 힘겹게 도달한 지복의 땅을 포기하는 것은 쉬운 노릇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 269

 

270 그가 어디에 있든지 그가 살아있는 한 생명은 그를 부른다. 그가 속해 잇던 모둠살이는 그 모듬살이를 떠나 있는 자를 질투하여 영웅이 안주하고 있는 집 문을 두드리기 마련이다. 만일 영웅이 거부하면 문을 두드린 무리는 영웅의 거부를 배신으로 여기고 반격하는 것도 사양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웅이 어떤 장애물 때문에 문을 두드리는 무리들의 요구에 응하지 못하는 경우(이 경우에도 죽음과 유사한 절대적인 상태의 행복을 누리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영웅은 이들의 행동을 통하여 원래 속해 있던 모듬살이로 귀환한다.

 

272 태양의 여신 아마데라스가 그 모습을 나타낼 당시의 이야기는 천복 상태에서 다시 세상에 나오기를 꺼리는 영웅의 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273 이들의 토론에서 강구한 대책은 바로 아마데라스 여신에게 거울과 칼과 옷을 바치는 것이다.

  

언젠가 세계로 널리 확산되었을 남신이 아닌 여신으로서의 태양 모티프는 고대 신화에서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275

 

276 거울과 칼과 나무의 의미는 분명하다. 여신의 모습을 반영시켜 비현현의 은거 상태에서 밖으로 이끌어낸 거울은 세계, 곧 반영된 형상의 장을 상징한다. 거울을 통하여 신은 자신의 영광을 보고 기뻐하는데, 이 기쁨은 현현 혹은 창조의 행위를 유발시키는 자극제가 된다. 칼은 벼락에 해당된다. 나무는 열매를 맺고 소원을 성취시킨다는 의미에서 세계의 축이다.

 

다시 나타난 여신 뒤에다 친 금줄 시메나와는 빛의 귀환이라는 기적의 자비로움을 상징한다. 이 시메나와는 일본 민간 종교의 전통적 상징 중 가장 중요하고 의미심장하고 또 웅변적인 상징이다. 사원이나 신사 입구에 걸리고 설날이면 거리에 내걸리는 이 시메나와는 귀환의 문턱에 있는 세계의 원기 회복을 의미한다. 277

 

277 아마데라스는 사원의 점토판에 설형문자로 기록된 고대 수메르의 최고 여신 이난나의 동양판이라고 할 수 있다….이난나, 이쉬타르, 아프로디테, 베누스이들은 서양 역사 태동기의 선진 문화에 아마데라스가 낳아놓은 판박이들의 이름이다.

 

280 외부로부터 구조를 받든, 내적 충동에 따라 살아나든, 신들의 안내를 받든, 영웅에게는 오래 잊고 있던 곳으로 애써 얻은 전리품(홍익)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단계가 남는다. 뿐만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재생의 영약을 가지고 골아가 원래 속해 잇던 사회와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신문과 서릿발 같은 증오와 맞서야 한다.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4. 귀환 문턱의 통과

귀환이 뭐 이렇게 어려워? 싫다는 사람에게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281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282 수많은 실패의 사례가 이 삶을 확정하는 관문의 통과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증하고 있다.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첫번째 과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이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왜 그런 세상으로 되돌아와야 할까?

 

282 립 반 윙클 이야기는 귀환하는 영웅이 처하는 미묘한 상황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이야기다.

 

284 야간에 근원적인 흑암의 세계 방문을 통해 우리는 원기를 얻고 정신을 충전시킨다고 해서 우리 삶 자체가 그로 인해 개혁되는 것은 아니다. 잘못하면 립 반 윙클처럼 그 경험을 증거할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수염만 텁수룩하게 길러 돌아오는 것이다.

 

287 저와 함께 이곳으로 오신 지 벌써 3백년이나 되었습니다. 꼭 에린에 가시겠다면 이 백마를 드릴 테니 타고 가십시오. 그러나 백마에서 내려 에린 땅을 밟는 순간 백마만 이리로 달려오고 당신은 초라한 노인으로 그곳에 남을 것입니다. (아일랜드 오이신 이야기-청춘의 나라 공주, 아름다운 여인의 몸에 돼지머리 모습, 오이신이 결혼해 주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감.)

나뭇군과 선녀와 비슷 

 

식인 도깨비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개인의 개성화 상실의 이 공포는 자격 미달인 개인에게는 초월적인 경험이라는 만만치 않은 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영웅에 값하는 인간은 대담하게 쳐들어가 마귀 할멈이 여신이 되고, 용이 신들의 번견이 되는 것을 목격한다. 281

 

밤에 꿈으로 꿀 때는 중요하게 보이다가도 밝은 대낮에 생각하면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시인이나 예언자는 맨 정신으로 전날 밤에 했던 기도를 후회한다 사회를 악마에게 넘겨버리고 저 자신은 천상의 바위 굴에서 문을 닫고 은거하는 편이 쉽기는 쉽다. 그러나 어느 정신적 산과의가 시메나와를 쳐놓고 퇴로를 차단한다 해도 시간 속에서 영원을 표상하고 시가 속에서 그 영원을 지각하는 작업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282

 

289 영웅과 땅의 직접적인 접촉을 차단함으로써 그 세상 사람들 사이로 돌아다닐 때 탈 수 있는 절연 수단으로서의 백마는 초자연적인 권능을 가진 자가 설정하는 금기의 생생한 실례라고 할 수 있다.

 

291 자기 모험을 완성하기 위해서 귀환한 영웅은 세계의 충격을 견디어야 한다. 립 반 윙클은 무엇을 체험하고 왔는지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의 귀환은 한낱 우스개로 끝나고 만다. 오이신은 자신의 저승 체험을 알고 있지만 자기의 중심이 저승에 있다는 걸 잊어버렸기 때문에 역시 전락하고 만다. 

 

기억 속에서 자기 영혼의 다른 부분을 만났음을 상기시키는 신비스러운 반지는 영웅이 그곳에 간 적이 있음을 시사한다…이 반지는 두 세계를 통합시키려는 영웅의 희망을 상징한다. 카마르 알 자만의 기나긴 이야기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운명이 일상의 삶으로 구체화되는 완만하면서도 놀라운 역사다. 그러나 이 운명이 모든 이에게 다 구체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체험하고, 반지를 얻어 다시 현실로 귀환한 영웅에게만 가능하다. 294

 

 

5. 두 세계의 스승

 

신화란 신화는 이 한 순간의 이야기 속에 다 들어있다. 예수는 안내자며 길이며 초월적이 세계, 귀환의 동반자이다. 제자들은 그의 비의 전수자들이다. 그러나 그 신비를 통달한 자들이 아니라 두 세계를 일거에 수렴하는 역설적 체험으로 안내 받는 자들이다. 298

 

299 우리가 관심갖는 것은 상징 체계이지, 역사성은 아닌 것이다.

 

지금 우리가 관심갖는 것은 상징 체계이지 역사성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립반윙클, 카마르알자만,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재했는지 여부에 대해 관심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다. 299

 

더구나 이런 이야기는 세계 도처(수많은 영웅과 함께)에 깔려 있기 때문에 보편적 테마인 이러저러한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는지 여부는 부수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서 역사성을 강조하면 혼란이 생길 뿐이다. 즉 암시적 메시지를 어지럽게 할 뿐인 것이다. 299

 

아르쥬나가 본 우주적 인간은 아르쥬나 자신처럼 귀족이고 또 힌두교도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팔레스티나에서는 우주적 인간은 유태인으로, 독일에서는 게르만족으로 바수토에서는 흑인으로, 일본에서는 일본인으로 등장하게 마련이다. 내재적이면서도 초월적인 우주를 상징하는 인물의 혈통 및 능력은 의미론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역사적인 요소에 따라 결정된다. 성 역시 마찬가지다. 자이나교의 성화에 등장하는 우주적 여성은 우주적 남성만큼이나 웅변적인 상징이다.

상징이란 의미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즉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해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성격, 혹은 일련의 성격(3차원적이든, 2차원적이든, 1차원적이든, 다신론적이든, 유일신론적이든, 단신론적이든, 회화적이든, 언어적이든, 문서로 기록된 사실이든, 묵시적 환상이든)을 최종적인 의미로 읽거나 해석하여 해서는 안된다.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는 하는 일이다. 305

 

305 의미를 실어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로 오해하면 헛된 잉크 뿐만 아니라 엇된 피까지 흘리게 한다.

 

305 그 다음에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예수의 변모는 개인적 의지를 소각시켜 버린 추종자들, 즉 스승에 대한 철저한 자기 부정에 의해, 인생, 개인적인 팔자, 숙명이 제거된 지 오래인 사람들에 의해 목격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똑 같은 것을 훨씬 간명하게 가르친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제 의미는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종교적 관행이 좆고 있는 바다.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즉 자기화해에 이를 수 있다는 거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마시킨 개인은 살려도 바둥거리는 거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법은 그 안에서 거침새가 없다. 306

 

 

6. 삶의 자유

 

307 영웅이 불가사의한 여행을 끝내고 귀환한 결과는 과연 무엇인가? 영웅이 지난 전장은 모든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의 희생으로 삶을 영위하는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

 

307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데 있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308 그러므로 애착을 떠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너의 모든 일을 나에게 맡기고, 네 생각을 가장 높은 자아에 모으고, 원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되 흐트러지지 말고 나가 싸우라.

 

이 시인의 노래 중 대부분은 자기에게 내재하는 불멸의 존재에다 바친 것이다. 자기의 개인적인 내력을 밝힌 것은 마지막 한 연에 지나지 않는다. 듣는 자들은 자기 내부에 있는 불멸의 존재에게 눈을 돌리고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313

 

영웅은 생성된 것의 투사가 아니다. 생성되는 것의 투사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존재하기 때문이다. 313

 

 

4. 열쇠

 

 

원래 이 승리는 자기 의식의 확장이며 존재와의 합일이다. (깨달음, 변모, 자유) 마지막 단계는 귀환이다. 영웅이 그 권능의 축복을 받는 경우 전리품은 영웅을 보호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영웅은 도망치고, 부정적인 세력의 추격을 받는다. (모습을 바꾸어 도주하기, 장애물을 피하여 도주하기), 귀환의 관문에서 초월적인 권능의 소유자는 뒤에 남아야 한다. 영웅은 혼자서 그 무서운 왕국에서 귀환한다. (귀환, 부활) 그가 가져온 전리품(홍익)은 세상을 구원한다. (불사약)

 

319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야 한다.

 

2부 우주 발생적 순환 : 첨부

 

 제 2부 우주 발생적 순환.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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