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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17일 11시 54분 등록

철학이야기

10기 김정은

 

철학이야기 윌 듀런트 지음, 정영목 옮김, 봄날의 책, 2013.

 

1. 저자에 대하여 

 

윌 듀런트(William James Durant, 1885~1981)

미국의 교육가이자 철학자, 20세기 최고의 문명사가

 

1885 11 5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났다.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 학교에 다니며 예수회 수도사로서 성직자의 길을 걸으려 했다. 그러나 10대 도서관에서 다윈, 헉슬러, 스펜서의 책을 접하면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가톨릭 교회와 사회주의를 결합하려는 꿈을 꾸게 되었다.

 

노스 애덤스와 뉴저지 주 커니의 가톨릭 부설 학교에서, 저지 시()의 세인트 피터스 칼리지와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한 후, 뉴저지 주 사우스 오렌지에 소재한 세튼홀 칼리지에 자리를 잡고 라틴어와 프랑스어, 영어, 기하학을 가르쳤다.

 

20대 중반에 이르러 신학교에 진학한 듀런트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접했는데, 스피노자는 철학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듀런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듀런트는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가톨릭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려는 꿈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신학교를 그만 둔 뒤, 그는 뉴욕의 가장 진보적인 자유주의 교육 실험 학교인 페레르 학교로 자리를 옮기는데, 이 학교에서 러시아 출신 제자 아이다 카우프만과 사랑에 빠져 교직을 사임하고 그녀와 결혼한다. 이후 4년간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물학과 철학을 전공했고, 1917 <철학과 사회적 문제>로 박사 학위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1년간 철학을 가르쳤다.

 

30대 중반이던 1921, 듀런트는 성인노동자들을 가르치는 레이버 템플 스쿨을 조직하여 그 곳에서 찰학, 문학, 과학, 음악, 예술을 가르쳤다. 듀런트의 강의를 듣고 감명받은 한 출판업자의 제안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팸플릿이 나왔다. 그것들이 인기를 끌면서 1926 <철학이야기>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 덕분에 듀런트는 평생 여행하며 글만 쓸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이루었다.

 

<철학 이야기>의 성공으로 1년 후 교직을 떠날 여력이 생긴 듀런트 부부는 가끔 평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작업 시간을 <문명 이야기(The Story of Civilization)>에 바쳤다. 이들 저작을 준비하는 데 있어 듀런트 여사의 역할은 매년 그 비중이 더욱 커져 갔으며, <문명이야기> 7이성의 시대가 시작되다(1961)’에서는 그 기여도가 너무나 커 책 표지에 두 사람의 이름이 공저자로 나란히 오르게 된다. 198196세를 일기로 윌 듀런트는 생을 마감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1장 플라톤

 

플라톤은 조밀하고 섬세한 논리와 시에 대해 아폴론과 같은 열망을 보기 드물게 결합하고 있다. 그의 시대의 광휘와 조화는 이 둘을 녹여서 음악적 인상이 강렬한 하나의 거침없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 물줄기는 숨 가쁘게 질주하듯 다급하게 앞으로 밀고 나가면서도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1. 플라톤의 등장 배경

 

34

한 학파는 루소처럼 본성이 선하고 문명이 약하다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지만, 오직 계급을 구분하는 제도 때문에 불평등해진다고 보았다. 법은 약자를 묶고 지배하기 위한 강자들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학파는 니체처럼 자연은 선악을 넘어선다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은 불평등하게 태어난다, 도덕은 강자를 제한하고 저지하려는 약자의 발명품이다. 권력은 인간의 최고의 미덕이자 최고의 욕망이다. 모든 통치 형태 가운데 가장 지혜롭고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귀족정치다.

 

루소의 주장도 맞고, 니체의 주장도 맞다. 난 원래 루소의 주장에 더 솔깃하는 사람이었는데 요즘엔 니체쪽으로 기울고 있다. 하지만 권력이 인간 최고의 미덕이자 최고의 욕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2. 소크라테스

 

36

소크라테스 주위에 모여들어 그가 유럽 철학을 창조하는 데 기여한 청년들은 잡다했다.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풍자적 분석을 좋아하던 플라톤과 알키비아데스 같은 부유한 청년도 있었다. 스승의 안빈을 좋아하여 그것으로 종교를 만든 안티스테네스 같은 사회주의자도 있었다. 주인과 노예가 따로 없고, 모든 사람이 소크라테스처럼 걱정 없이 자유롭게 사는 세상이 오기를 갈망하던 아리스티포스 같은 무정부주의자도 한두 명 있었다. 오늘날 인간 사회를 흥분시키고 젊은이들에게 끝없는 토론 자료를 제공하는 온갖 문제들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는 이 작은 무리를 그때도 흥분시켰다. 그들은 선생과 마찬가지로 담론 없는 삶은 인간에게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모임에는 모든 사회사상 학파의 대변인이 있었으며, 어쩌면 그 학파들이 실제로 여기에서 유래했는지도 모른다.

 

39

선이 지성을 의미하고 덕이 지혜를 의미한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이해관계를 명료하게 보고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멀리 내다볼 수 있다면, 자신의 욕망을 비판하고 조정하여 자멸적인 혼돈으로부터 목적성이 있는 창조적 조화로 들어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교육받은 고상한 사람들은 이런 조건에서 도덕을 몸에 익힐 수 있을 것이며, 이 도덕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와는 달리 반복되는 가르침과 외적 통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을 터였다. 혹시 죄란 오류, 불완전한 시야, 어리석음이 아닐까?

 

내가 요즘 고민하던 참교육의 정의를 이 문장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교육이란 자신의 욕망을 비판하고 조정하여 창조적 조화로 들어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교육받은 고상한 사람들은 도덕을 몸에 익힐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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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생각이 없는 곳에 혼돈이 있고, 군중이 무지한 상태에서 서둘러 결정을 내렸다가 숨을 돌리고 나면 쓸쓸하게 후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세월호 참사를 겪고 있는 현 대한민국 사회를 두고 하는 말 같다.

 

3. 플라톤의 준비 단계

 

47

플라톤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철학과 시, 학문과 예술이 매혹적으로 섞여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대화의 어떤 인물의 입장에서, 어떤 형식으로 말하는지 쉽게 분간이 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비유로 이야기하는 것인지, 농담을 하는 것인지 진지한 것인지도 쉽게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가 농담과 비꼼과 신화를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는 간혹 당황하게 된다. 플라톤은 오직 우화로만 가르쳤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플라톤은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 비유 속에서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고 농담과 진담을 구별 못하며 비꼰 것을 풀지 못하는 우매한 나는 플라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도대체 비유와 농담, 비꼼에서 진리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직설적으로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라고 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대화라는 방법, 찬성과 반대 사이의 활발한 전쟁, 모든 중요한 주장은 점진적 전개와 계속되는 반복 등은 이따금씩 사치를 즐기듯 철학을 맛보는 사람, 짧은 인생에서 어쩔 수 없이 뛰어가면서 철학을 읽어야 하는 사람에게 맞춘 것이 분명하다.

 

나는 한 쪽으로 치우친 시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넓게 보는 시야를 원한다. 내 시각도 말하면서 나와 다른 이의 시각도 담기에 적합한 글의 형식을 플라톤의 대화에서 배울 수 있다.

 

4. 윤리적 문제

 

49

케팔로스는 부 덕분에 관대하고 정직하고 정의로울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축복이라고 대답한다.

 

진짜? 아니다. 공자는 이익은 혼란의 원인이므로 입에 담기도 꺼렸다. 작게는 한 개인의 가정을 들여다봐도 부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를 수시로 볼 수 있다. 부로부터 관대하고 정직하고 정의로울 수 있다는 케팔로스의 주장은 틀렸다. 부로부터 누군가 관대해졌다면 이미 그 부자는 가난한 이들과 자신의 부를 나누어 부자가 아닐 것이다.

 

49~50

정의(定義)만큼 어려운 것이 없고, 또 정의만큼 가혹하게 정신적 명석함이나 기술을 시험하고 훈련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51

인간의 진정한 덕은 용기와 지성이다.

 

52

소크라테스-즉 플라톤-는 정의가 사회 조직에 따라 달라지는, 개인들 사이의 관계라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개인적 행위의 특징보다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서 연구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 그는 정의로운 국가를 그려볼 수 있다면, 정의로운 개인은 더 쉽게 묘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뒤집어야 하지 않나? 정의로운 개인들이 모여 정의로운 국가가 이루어진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5. 정치 문제

 

54

왜 내가 묘사한 그런 소박한 낙원은 결코 오지 않을까? 왜 이런 유토피아는 결코 지도에 나타나지 않을까?

탐욕과 사치 탓이다. 사람들은 소박한 삶에 만족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소유욕이 있고, 야망이 있고, 경쟁심이 있고, 질투심이 있다. 그들은 이미 가진 것에 곧 싫증을 내고, 가지지 못한 것을 갈망한다. 가만히 있다가도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으면 갖고 싶어 한다. 그 결과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영토를 잠식하고, 땅의 자원을 둘러싼 집단 간 경쟁이 벌어지고, 전쟁이 터진다. 교역과 재정이 발달하고, 새로운 계급 구분이 나타난다.

 

55

민주정치도 지나침 때문에, 지나친 민주주의 때문에 망한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관직을 맡고 공공정책을 결정하는 일에서 모두가 동등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뜻 보면 기분 좋은 합의 같다. 그러나 인민이 교육에 의해서 최고의 통치자를 뽑고 가장 지혜로운 방향을 선택할 준비를 갖추고 있지 못한 탓에 참담한 결과가 온다. 

 

56

국가 전체가 아플 때도 가장 지혜롭고 가장 훌륭한 사람의 봉사와 인내를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무능하고 부정한 사람이 공직에 진출하는 것을 마곡, 공동의 선을 위해 통치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사람을 선출하고 준비시키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정치철학의 과제다.

 

현 대한민국 정치의 문제가 플라톤 시대에 고대로 있었나 보다. 정치 철학의 과제는 언제쯤 해결될까. 정치 철학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6. 심리 문제 

 

57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은 욕망, 감정, 지식 등 세 가지 주요 원천에서 흘러나온다. 욕망, 욕구, 충동, 본능 같은 것들이 첫 번째다. 감정, 기백, 야망, 용기 같은 것들이 두 번째다. 지식, 생각, 지성, 이성 같은 것들이 세 번째다. 욕망은 허리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것은 터질 듯한 에너지 저장소이며, 근본적으로 성적이다. 감정은 심장에, 피의 흠과 힘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것은 경험과 욕망의 유기적 공명이다. 지식은 머리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것은 욕망의 눈이며, 영혼의 조타수가 될 수 있다.

 

58

감정에 의해 뜨거워진 욕망이 지혜의 인도는 발을 때 효과적인 인간 행동이 나오듯이, 완벽한 국가에서도 산업 세력은 생산을 하지만 통치는 하지 않는다. 군대는 보호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 이 국가에서는 지식과 학문과 철학을 관장하는 세력이 양육되고 보호받으며, 이들이 통치를 한다. 지혜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민중은 혼란에 빠진 욕망과 다름없는 무질서한 군중일 뿐이다.

58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이 세상의 왕이나 군주가 철학의 정신과 힘을 가지기 전에는, 즉 지혜와 정치적 지도력이 한 인간 안에서 만나기 전에는……도시, 나아가 인류에게도 결코 악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7. 심리적 해법

 

60

음악은 감정과 성격을 다듬을 뿐만 아니라 건강을 유지하고 회복하기에 귀중하다.

 

65

귀한 즐거움인 철학은 주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 명료하게 생각하는 것, 즉 형이상학이다. 그 다음에는 지혜롭게 다스리는 것, 즉 정치학이다.

66

이데아는 관념이자 법칙이자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감각이 맞이하는 표면적 현상이나 특수한 것들 이면에는 감각으로는 지각할 수 없지만 이성이나 사고로 파악할 수 있는 일반성, 규칙성, 발전 방향이 있다.

 

8. 정치적 해법

 

71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은 행동하는 교양이며, 삶의 구체적이고 분주한 면과 어우러진 지혜다. 그가 염두에 둔 사람은 골방에 갇힌 비실용적인 형이상학자가 아니다.

 

77

완벽한 사회란 각각의 계급과 단위가 자신의 본성과 적성에 가장 잘 맞는 일을 하는 사회다. 어떤 계급이나 개인도 다른 계급이나 사회에 개입하지 않고, 모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능률적이고 조화로운 전체를 만들어내기 위해 협력하는 사회다. 이것이 정의로운 국가일 것이다.

 

9. 윤리적 해법

 

77

정의란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플라톤

여기서의 정의란 모든 사람이 자신이 생산하는 것과 가치가 같은 것을 받고,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뜻일 뿐이다.

 

78

정의는 단순히 힘이 아니라 조화를 이룬 힘이다. 정의는 더 강한 자의 권리가 아니라 전체의 효과적인 조화다.

 

79

예수는 도덕이 약자에게 친절한 것이라고 말했다. 니체는 강한 자의 용기라고 말했다. 플라톤은 전체의 효과적인 조화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세 가지 신조가 결합하여 하나의 완벽한 윤리를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10. 비판

 

84

수호자의 경우, 그들의 욕구는 공산주의적 기질이라기보다는 명예감, 또 명예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그들을 지탱하는 것은 친절이 아니라 자부심이다. 모성 본능은 아이를 낳기 전에, 또는 심지어 아이가 성장하기 전에는 강하지 않다. 일반적인 어머니가 갓난아기를 받아들이는 심정은 기쁨보다는 체념이다. 아기에 대한 사랑은 갑작스러운 기적이 아니라 하나의 발달 과정이며, 아이가 성장하면서, 아이가 어머니의 수고와 돌볼 덕분에 꼴을 갖추면서 함께 커진다. 아이가 어머니의 예술의 구현체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아이는 어머니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차지하는 법이다.

 

87

플라톤은 자신의 유토피아가 실천적 영역 안에 다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덧붙이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그는 달성하기 어려운 이상을 묘사했다는 점을 인정하다. 그럼에도 우리의 욕망을 이렇게 그려놓는 일에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할 수 있고, 적어도 그 가운데 일부를 현실로 바꾸려 하는 데 인간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토피아를 만드는 동물이다.

 

2장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과학

 

다른 어떤 사상가도 세계의 계몽에 그렇게 기여한 적은 없다. 그 뒤의 모든 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의존하며, 진리를 보기 위해 그의 어깨에 올라선다. 다른 어떤 정신도 그렇게 오랜 시간 인류의 지성을 지배한 적은 없었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102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수백 권에 달한다. 고대의 어떤 사람은 그가 400권을 썼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1000권을 썼다고도 한다. 남은 것은 그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그 자체로 도서관 하나를 이룬다.

논리학-범주론, 토피카, 분석론 전서, 분석론 후서, 명제론, 소피스트적 논박

과학-물리학, 천체론, 성장과 쇠퇴, 기상학, 자연학, 영혼론, 동물부분론, 동물 운동론, 동물 발생론

미학-수사학, 시학

철학-윤리학, 정치학,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이 신화와 비유로 표현되는(그래서 모호해진) 위대한 문학을 제공하는 대신, 기술적이고 추상적이고 응축된 과학을 제공한다.

 

3. 논리학의 창시

 

104 논리학이란 간단히 말해 정확하게 사고하는 기술과 방법을 뜻한다. 이것은 모든 과학, 모든 학문, 모은 예술의 방법(logy)이다.

105 "나와 대화하고 싶으면 너의 용어를 정의해라.“ 볼테르는 그렇게 말했다. 논쟁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용어를 정의하려고 나섰다면 수많은 논쟁이 한 문단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진지한 담론의 중요한 용어는 모두 엄격한 정밀 조사를 거쳐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논리학의 알파요 오메가이며, 심장이요 영혼이다.

106~107 플라톤이 주관적 미래에 몰두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객관적 존재에만 관심을 갖기로 결심했다.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정의에 대한 요구에는 사물과 사실을 떠나 이론과 관념으로, 특수한 것을 떠나 일반적인 것으로, 과학을 떠나 스콜라 철학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었다. 플라톤의 경우는 일반성에 너무 몰두하는 바람에 마침내 일반성이 특수성을 결정하고, 관념에 너무 몰두하는 바람에 관념이 사실을 규정하거나 선택하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물로 돌아가라고, ‘시들지 않는 자연의 얼굴과 실재로 돌아가라고 가르쳤다. 그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것들, 살과 피로 이루어진 개인을 훨씬 좋아했다. 그러나 플라톤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국가>에서도 완벽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개인을 파괴해버렸다.

107 우리는 늘 우리가 비난하는 것을 우리 안에 상당히 갖고 있다. 비슷한 것들을 대조해야만 얻는 것이 있듯이, 오직 비슷한 사람들만 싸우고, 목적이나 믿음의 아주 작은 차이를 두고 가장 혹독한 전쟁이 벌어진다.

109 사람들이 논리학에서 느끼는 것은, 베르길리우스의 명령을 받은 단테가 색깔 없는 중립성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저 사람들에 관해서는 더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한번 보고 지나가자.”

 

4. 과학의 조직

 

1.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그리스 과학

111 만물은 영원히 흐르고 변한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고요해 보이는 물질에도 보이지 않는 흐름과 운동이 있다. 우주의 역사는 반복해서 순환하며, 그 각각은 불에서 시작하여 불로 끝난다(이것이 마지막 심판과 지옥이라는 스토아 학파의 학설과 기독교 교리의 한 원천을 이룬다).

2. 자연학자 아리스토텔레스

113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에는 공허나 진공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진공 속에서는 모든 물체가 같은 속도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이른바 공허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그 안에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개념임이 드러난다.”

3. 생물학의 창시

117 무엇을 물을지 아는 것은 이미 반은 아는 것.

 

5. 형이상학과 신의 본질

 

118 만물은 그 질료 또는 원료였던 것으로부터 성장한 형상 또는 실체다. 동시에 이 형상은 더 높은 형상이 자라나는 질료가 될 수 있다.

118 세상은 자기 나름의 완성을 위해 저절로 움직인다. 하나의 사건을 결정하는 다양한 1원인들 가운데 목적을 결정하는 최종원인이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하다.

119 우리가 문제를 한 걸음씩 무한히 뒤로 밀고 가 비참하게 무한한 퇴행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반드시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최초로 다른 것을 움직인 존재를 상정해야 한다. 이 존재는 실체가 없고, 눈에 보이지 않고,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성도 없고, 감정도 없고, 변화도 없고, 완전하고, 영원하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인다. 기계적인 힘으로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작용의 포괄적 동인으로서 움직인다. “신은 사랑받는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을 움직이듯이 세계를 움직인다.” 신은 사랑받는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을 움직이듯이 세계를 움직인다. 신은 자연의 최종원인이며, 사물의 추동력이자 목적이며, 세계의 형상이다.

120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워낙 순수한 활동력이기에 전혀 활동하지 않는다. 그는 절대적으로 완벽하다. 따라서 어떤 것도 바랄 수 없다. 따라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사물의 본질을 생각하는 것이다. 불쌍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그는아무것도 하지 않는 왕이다.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

 

6. 심리학과 예술의 본질

 

121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은 흥미로운 정의에서 출발한다. 영혼은 모든 유기체의 전체적인 생명 원리이며, 그 힘과 과정의 총화라는 것이다. 식물에서 영혼은 그저 영양을 공급하고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힘일 분이다. 그러나 동물에서 영혼은 감각과 운동 능력을 갖춘 힘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영혼은 또 이성과 사고의 힘이기도 하다.

122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 불멸성을 부여하기 위해 영혼을 파괴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이 행동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활동성인 것처럼, 불멸의 영혼은 현실에 더럽혀지지 않은순수한 사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이 신화에서 위안을 받도록 하라. 하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형이상학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를 다 자기 것으로 챙기려는 모순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반마케도니아파와 독배로부터 자신을 구하는 교묘한 술책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다.

123 예술의 기능은 카타르시스, 즉 정화다. 사회적 제약의 압박으로 우리 안에 축적된 감정이 터져 나와 극적 흥분이라는 무해한 형식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그래서 비극은동정과 공포를 통하여 이런 감정의 적절한 정화를 낳는다.’(윤리학)

 

7. 윤리학과 행복의 본질

 

*(윤리학)

125 용기는 겁과 무모함 사이에 있다. 관대함은 인색함과 사치 사이에 있다. 야망은 나태와 탐욕 사이에 있다. 겸손은 비굴과 오만 사이에 있다. 정적은 과묵과 다변 사이에 있다. 명랑은 우울과 익살 사이에 있다. 우정은 다툼과 아첨 사이에 있다. 자제는 햄릿의 우유부단과 돈키호테의 충동적 행동 사이에 있다*. 따라서 윤리학이나 행동에서옳음은 수학이나 공학의옳음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정확하고, 적합하고, 최선으로 작용하여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

125 우리는 우리가 되풀이하는 행동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수월성은 하나의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 “인간의 선은 완전한 삶의 수월성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이 이루는 것이다. …… 제비 한 마리나 화창한 날 하루로 봄이 오지 않듯이, 인간 또한 하루나 짧은 시간에 축복받은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없다*.

127 우리의 현실적인 철학자는 중용만이 행복의 비결은 아니라고 말한다. 상당한 수준의 재화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난은 사람을 인색하고 탐욕스럽게 만든다. 반면 소유가 있으면 근심과 탐욕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으며, 이것이 귀족적인 여유와 매력의 원천이 된다. 이렇게 외부에서 행복을 지원하는 것 가운데 우정이 가장 고귀하다. 사실 우정은 불행한 사람보다는 행복한 사람에게 더 필요하다. 행복은 나눌수록 늘어나기 때문이다. 또 우정은 정의보다 중요하다. “사람들이 친구 사이라면 정의는 불필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정의롭다 해도 우정은 여전히 은혜가 된다.”

 

8. 정치학

 

1. 공산주의와 보수주의

130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인 것과 관련해서는 플라톤의 실재론과 싸우고, 정부와 관련해서는 플라톤의 이상주의와 싸운다. 그는 선생이 그린 그림에서 어두운 지점들을 많이 찾아낸다. 그는 플라톤이 막사 같은 곳에서 계속 서로 접촉하며 사는 것을 나라를 다스리는 철학자들의 운명으로 규정했다며 못마땅해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보수적인 사람이지만, 사회적 능률보다는 개인적 특질, 사생활, 자유를 높이 평가한다.

130 어쩌면 가족이 유일한 국가이고, 목축이나 단순한 경작이 유일한 삶의 형태이던 머나먼 과거에는 공산주의 사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사회가 더 분화된 상태’, 즉 중요성의 면에서 평등하지 않은 기능들로 노동 분업이 일어나 인간의 타고난 불평등을 이끌어내고 확장하는 상태에서는 공산주의가 무너진다. 공산주의는 우월한 능력을 행사할 만한 적절한 유인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힘든 일에는 이익이라는 자극이 필요하다. 제대로 경영하고 관리하고 돌보려면 소유라는 자극이 필요하다. 모두가 모든 것을 소유하면 아무도 어떤 것도 돌보지 않을 것이다.

130~131 평균적인 수준에서 인간의 본성은 신보다는 짐승에 가깝다. 대다수 인간은 날 때부터 바보이고 게으름뱅이다. 어떤 체제에서건 어떤 사람들은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지원금으로 돕는 것은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들은 정치에서는 지배를 받고, 경제에서는 감독을 받아야 한다. 가능하다면 그들의 동의를 받아야겠지만, 필요하다면 동의가 없어도 그렇게 해야 한다.

 

2. 결혼과 교육

133~134 남성은 본디 우월하고 여성은 열등하다. 남성은 지배하고 여성은 지배당한다. 이 원칙은 필연적이며, 모든 인류에게로 확장된다. 여자는 의지가 약하며, 따라서 인격이나 지위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다. 여자의 가장 좋은 조건은 조용한 가정생활이며, 외적 관계에서는 남자의 지배를 받지만 가사에서는 최고가 될 수 있다. 여자는 플라톤의 공화국에서와는 달리 남자를 닮도록 바뀌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비슷하지 않은 점이 늘어야 한다. 다른 것만큼 매력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남자의 용기와 여자의 용기는 똑같지 않다. 남자의 용기는 명령하는 데서 나타난다. 여자의 용기는 복종하는 데서 나타난다. …… 시인이 말하듯침묵이 여자의 명예다.’*

136 혁명은 거의 언제나 지혜롭지 못하다. 몇 가지 선을 이룰지도 모르나, 많은 악을 대가로 치러야 하며, 그 가운데 주된 것은 모든 정치적 선의 기초를 이루는 사회 질서와 구조의 교란, 나아가서 해체다. 혁명적 변혁의 직접적 결과는 예측 가능하고 유익할 수도 있지만, 간접적 결과는 일반적으로 예측 불가능하고, 참담한 경우도 드물지 않다. “몇 가지만 고려하는 사람들은 판단을 쉽게 여긴다.” 또 결정할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은 결심이 빠를 수 있다.

 

3. 민주정치와 귀족정치

137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는 법이 없다그들 자신이 법이다.“ 그런 사람을 위하여 법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우스운 짓이다. 이 사람은 안티스테네스의 우와에 나오는 토끼 작이 날 것이다. 그 우화를 보면, 동물들의 회의에서 토끼가 모든 동물의 평등을 주장하며 열변을 토하자, 사자가네 발톱은 어디 있는데?“ 하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9. 비판

 

140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열광하기는 어렵다. 무언가에 열광하는 것이 그에게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울기를 바란다면, 네가 먼저 울어야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좌우명은어떤 것에도 감탄하거나 놀라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좌우명을 어기기가 망설여진다. 우리는 그에게서 플라톤의 개혁적 정열, 이 위대한 이상주의자가 동포를 비난하게 만들었던 인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아쉬워진다. 우리는 그의 스승의 대담한 독창성, 고상한 상상력, 편하게 망상에 빠져드는 능력이 아쉬워진다. 그러나 플라톤을 읽은 뒤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회의적인 냉정함만큼 우리에게 유익한 것도 없다.

140~141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을 정리해보자. 우리는 우선 그의 논리에 대한 고집에 마음이 쓰인다. 그는 삼단논법이 인간의 추론 방식을 묘사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인간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추론을 장식하는 방법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사고가 전제에서 출발하여 결혼을 찾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사고는 가정된 결론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정당화하는 전제를 찾아간다. 그리고 실험이라는 통제되고 고립된 조건에서 특정한 사건을 관찰할 때 그것을 가장 잘 찾을 수 있다. 그러나 2000년이 흘렀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에서 부수적인 것만 바뀌었다는 사실, 오컴과 베이컨과 휴얼과 밀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태양에서 흑점밖에 찾아내지 못했다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조한 이 새로운 학문 분과, 그가 탄탄하게 확정한 그 기본 방향은 인간 정신의 영원한 성취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면, 아무도 우리는 바보이리라.

143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한 그리스인은 아니었다. 그는 아테네에 가기 전에 이미 생각이 형성되고 정리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아테네적인 것이 전혀 없었다. 아테네를 정치적 열정으로 가슴 두근거리게 하고, 마침내 통일 제국의 군주에게 굴복하도록 이끈 성급하고 자극적인 실험주의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그는 지나침을 피하라는 델포이의 명령을 너무 완벽하게 이행했다. 극단을 깎아내려 너무 안달하느라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무질서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노예제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불확실한 변화 앞에서 너무 주춤거린 나머지 죽음과도 같은 변화 없는 상태를 선호했다. 그에게는 모든 영원한 변화는 점진적이라는 보수주의자의 믿음을 정당화해주고, 동시에 변화없는 상태는 영원하지 않다는 급진주의자의 믿음도 정당화해주는 헤라클레이스토싀 만물유전에 대한 안목이 결여되어 있다. 그는 플라톤의 공산주의가 엘리트, 즉 이기적이지 않고 탐욕이 없는 소수만을 염두에 둔 것임을 잊었다. 그래서 그는 우회로를 거쳐 플라톤과 같은 결론에 이르러, 소유는 서적이어야 하지만 그 사용은 가능한 한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생산수단의 개인적 통제가 자극을 주고 유익한 기능을 하는 때는 오직 이런 수단이 누구다로 살 수 있을 만큼 단순할 때뿐이며, 생산수단이 점점 복잡해지고 비싸지면서 소유와 권력의 위험한 집중, 나아가 인위적인 마침내 파괴적인 불평등이 생긴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어쩌면 젊은 시절의 그가 그러한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10. 말년과 죽음

 

146 대사제였던 에우리메돈은 기도와 제사가 소용없다고 가르쳤다는 혐의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기소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를 살해한 배심원이나 군중보다 훨씬 적대적인 사람들이 자신을 재판에 넘길 수도 있는 상황임을 알았다. 그는 지혜롭게도 아테네가 철학에 두 번 죄를 지을 기회를 주지 않겠다고 말하며 그 도시를 떠났다. 이것은 겁쟁이의 행동이 아니었다. 아테네에서 고발당한 사람은 언제나 망명을 택할 권리가 있었다. 칼키스에 도착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병이 들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말에 따르면, 모든 일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에 완전히 실망한 늙은 철학자는 헴록을 마시고 자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어떻게 생긴 병이든 그의 병은 치명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나고 나서 불과 몇 달 뒤, 외롭게 죽었다.

 

3장 프랜시스 베이컨

 

 내 영혼은 신에게 물려주겠다. ……

몸은 눈에 띄지 않게 묻어라. 내 이름은 다음 시대와 외국에 물려주겠다.”

 

1.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르네상스까지

 

153 "네가 가친 것이 불충분해 보인다면, 세상을 다 가진다 해도 여전히 비참할 것이다.“ - 세네카

154 에피쿠로스는 에피쿠로스주의자가 아닌 셈이다. 그는 감각의 기쁨보다는 지성의 기쁨을 찬양한다. 영혼을 흥분시키고 어지럽히는 쾌락을 버리고, 영혼을 잠잠하게 달래는 쾌락을 구하라고 말한다. 결국 그는 일반적인 감각의 쾌락이 아니라 아타락시아정신의 고요, 평정, 안정를 찾으라고 제안한다. 이것은 사실 제논의무관심과 거의 맞닿아 있다.

155 로마 사람들에게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는 종교가 퍼져나갈 때 루크레티우스는 거기에 맞서 냉엄한 유물론을 제시했다. 영혼과 정신은 몸과 함께 발전하며, 몸이 자라면서 함께 자라고, 몸이 아프면 함께 아프고, 몸이 죽으면 함께 죽는다. 원자, 공허, 법칙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법칙 가운데 최고 법익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진화와 소멸의 법칙이다.

157~158 실제로 자기 부정이라는 기독교 윤리, 인간의 거의 공산주의적인 형제애를 바라는 기독교의 정치적 이상, 온 세상이 마지막에 다 타버린다는 기독교 종말론은 사상의 흐름 위를 둥둥 떠다니던 스토아학파 학설의 조각들이 아니었을까?

159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지혜와 정신은 어떤 대상에 작용할 때는 그 대상에 따라 움직이고 거기에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그 자신에게 작용할 때는 거미가 거미줄을 잣듯이 끝을 모르고 학문의 거미줄을 뽑아낸다. 이것은 그 실이나 작업이 훌륭하다는 면에서는 감탄할 만하지만, 사실 아무런 내용도 이득도 없다.“ 조만간 유럽의 지성은 이 껍질을 깨고 나오게 된다.

 

2. 프랜시스 베이컨의 정치인생

166 베이컨은 채워지지 않는 야망으로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는 만족할 줄 몰랐으며, 늘 수입보다 1년 정도 미리 지출했다. 그는 지출에 아낌이 없었다. 과시는 그에게 정책의 일부였다. 그는 마흔다섯 살에 결혼했는데, 화려하고 값비싼 결혼식 때문에 부인의 매력 가운데 하나였던 지참금을 많이 헐어야 했다. 베이컨은 1598년 빚 때문에 체포당했다. 그럼에도 계속 출세했다. 그는 다양한 능력과 거의 무한한 지식 덕에 온갖 중요한 위원회의 핵심 위원의 되었다. 점차 그에게 높은 자리가 열렸다. 그리고 1618년에는 쉰일곱 살의 나이에 마침내 대법관이 되었다.

⇒ 베이컨은 아버지 니콜라스 베이컨 경의 저택에서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았으나 아버지가 1579년 갑자기 세상을 뜨며 재산을 물려주지 못하고 죽게 되면서1 8세에 돈이 없는 신세가 된다. 사치에 익숙했던 베이컨은 경제적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정치적 자리로 밀어달라고 영향력 있는 친척들을 졸랐고 그 스스로의 능력으로 올라갔다.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바람에 미움을 사게 된 미남자 에식스 백작의 호의를 받은 베이컨은 에식스 백작으로부터 땅을 선물받기도(1595) 했지만 여왕의 편에 서서 에식스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여왕을 옥에 가두고 후계자를 뽑으려던 에식스의 계획이 실패한 뒤에는 여왕에게 에식스에 대한 끝없는 탄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3. 수상록

167 그는 정치적 권력의 계단을 한 칸씩 올라갈 때마다 철학의 정상도 하나씩 밟아 올라갔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사람의 엄청난 학문과 문학적 성취는 시끌벅적한 정치적 인생에서 기분 전환 삼아 벌인 부수적인 일이었다. ‘드러나지 않은 삶이 최선의 삶이 그의 좌우명이었다. 그는 사색적인 삶과 활동적인 삶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좋을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의 희망은 세네카처럼 철학자이자 정치가가 되는 것이었다.

169 “어떤 책은 맛을 보아야 한다.” 그의 유명한 말은 그렇게 시작한다, “어떤 책은 삼켜야 하고, 소수의 책은 씹고 소화해야 한다. 물론 이런 책들은 세상이 매일 목욕하고 중독되고 익사하는 잉크의 대양과 폭포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169 베이컨은 불필요한 말을 혐오하고, 단어를 낭비하는 것을 경멸한다. 그는 작은 구절로 무한한 풍요를 제공한다. 이 수상 하나하나는 삶의 주요한 문제에 관하여 대가의 정신을 증류한 통찰을 담아낸다. 내용이 더 나은지 형식이 더 나은지는 말하기 어렵다. 운문에서 셰익스피어의 언어가 최고이듯이, 산문에서는 베이컨의 언어가 최고이기 때문이다. 강인한 타키투스 같은 문체이면서도, 압축되고 다듬어져 있다. 물론 그런 간결함 가운데 일부는 라틴어 숙어와 구절을 능숙하게 번안한 덕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풍요로운 비유는 엘리자베스 시대 특유의 것이며, 르네상스의 충일함을 반영하고 있다. 영문학의 누구도 베이컨만큼 의미심장하고 함축적인 비유를 생산해내지 못했다. 그런 비유를 아낌없이 배치해놓은 점이 오히려 베이컨의 문제에서 한 가지 한 가지 결함이라고 할 수 있다. 끝도 없는 은유와 알레고리와 인유가 채찍처럼 우리의 신경을 내리쳐 마침내 우리는 지쳐버리기 때문이다. 《수상록》은 기름지고 영양이 좋은 음식과 같아, 한 번에 많이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 하지만 한번에 4, 5번씩만 읽으면 영어로 기록된 가장 훌륭한 지적 자양분이 될 것이다.

170 "본성은 종종 감추어진다. 가끔 극복되기도 한다. 그러나 없앨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억지로 없애려 하면 본성은 더 거세게 돌아온다. 학설과 담론은 본성을 덜 끈덕지게 만들지만, 본성을 바꾸거나 굴복시키는 것은 습관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본성에 대한 승리를 지나치게 과신해서는 안 된다. 본성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도, 기회나 유혹을 통해 소생하기 때문이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자로 변한 고양이와 같다. 식탁에 얌전하게 앉아 있다가도 쥐가 앞을 달려가면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럴 기회를 아예 주지 말거나, 아니면 잘 흔들리지 않도록 그런 기회를 자주 주어야 한다.“

172 종교적 무관심은 종파가 많기 때문이다. “종교가 나뉘어 여럿으로 갈라져 있는 것이 무신론의 원인이다. 한 번만 나뉘면 양쪽 다 더 열성을 보이지만, 여럿으로 나뉘면 무신론이 들어온다. ……마지막으로 학식이 높은 시대, 특히 평화와 번영이 깃든 시대도 무신론의 원인이 된다. 보통 고통과 역경이 인간 정신을 종교 쪽으로 더 강하게 구부리기 때문이다.”

173 그는 사랑보다 우정을 높이 치지만, 우정에 대해서도 회의적일 때가 있다. “세상에 우정이란 거의 없으며, 특히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주 드문데, 그럼에도 흔히 고장되어 이야기되곤 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우정은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 사이의 우정이며, 이 경우에는 어느 한쪽의 운이 다른 쪽의 운을 삼킬 수도 있다. ……우정의 주요한 효과는 온갖 종류의 뜨거운 감정으로 잔뜩 부풀어 오른 가슴을 열고 속에 든 것을 방출하여 편하게 해주는 것이다.

173 그는 <젊음과 노년>이라는 에세이에서는 책 한 권을 한 문단으로 줄여놓는다.“젊은 사람은 판단보다는 만들어내는 데 적합하고, 의논보다는 실행에 적합하고, 안정된 일보다는 새로운 기획에 적합하다. 어떤 일에서 오랜 세월 쌓인 경험은 그 경험의 범위 내에서는 사람을 인도하지만, 새로운 일에서는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은 행동이나 행동의 관리에서 자신이 담을 수 있는 것 이상을 끌어안으며, 가만히 있을 수 있을 때에도 흥분한다. 수단이나 정도를 고려하지 않고 목적으로 날아가려 한다. 우연히 발견한 몇 가지 원리를 어설프게 따르려 한다. 혁신을 이루는 방법에는 관심이 없는 탓에 예상치 못한 부련을 겪는다.”

174~175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혁명을 피하는 방법을 몇 가지 조언한다. “폭동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재료를 없애는 것이다. 연료가 준비되어 있으면 어디에서 불꽃이 튀어 불이 붙을지 모른다. ……또 소문을” (즉 토론을) 심하게 억누르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은 아니다. 그냥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이 그것을 막는 최선의 방법이며, 그것을 없애겠다고 돌아다니면 궁금증이 더 오래갈 뿐이다. …… 폭동의 재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심한 가난과 심한 불만이다. …… 폭동의 원인과 동기는 종교의 개혁, 세금, 법과 관습의 변화, 특권 타파, 전반적 억압, 형편없는 사람이나 이름 없는 사람의 출세, 기근, 제대한 병사, 필사적인 당파 등을 비롯하여 민중을 자극하는 공동의 대의로 묶는 모든 것이다.“ 물론 모든 지도자의 역할은 적을 나누고 친구는 합치는 것이다.

 

4. 위대한 재건

1. 학문의 진보

179 심리학에서 베이컨은 거의행동주의자이다. 그는 인간 행동에서 인과관계의 엄격한 연구를 요구하며, 과학의 어휘에서 우연이라는 말을 제거하려 한다.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 것의 이름이다.” 또한우주에서 우연이란, 인간에게서 의지와 같다.” 이 짧은 한 줄 안에는 넓디넓은 의미와 선전포고가 담겨 있다. 스콜라 철학의 자유의지 학설은 논의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지성과 구분되는의지라는 보편적 가정은 폐기된다. 그러나 베이컨은 이 실마리를 더 따라가지 않는다. 그가 책 한권을 한 구절에 집어넣은 다음, 유쾌하게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경우는 이번만이 아니다.

181 베이컨에게 친구는 주로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그는 마키아벨리와 어떤 관점을 공유하는데, 처음에는 이런 관점이 르네상스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와 카발리에리, 몽테뉴와 라보에티, 필립 시드니 경과 위베르 랑게의 계산 없는 훌륭한 우정이 금방 떠오른다. 어쩌면 우정에 대한 이러 매우 실용적인 평가가 권력의 자리에서 베이컨이 추락한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182 과학에 필요한 것은 철학이다즉 과학의 방법론을 분석하고, 과학의 목적과 결과를 종합하는 것이다. 철학이 없으면 어떤 과학이든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평지에서는 땅 전체를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처럼 과학의 높이에서 더 올라가지 않고 그대로 서서 과학의 멀고 깊은 곳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는 맥락에서 벗어나 자연의 통일성을 고려하지 않고 고립된 사실을 보는 습관을 비난한다. 한가운데서 불이 환하게 빛나는 방에서 작은 초를 들고 구석을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2. 신기관

186 베이컨의 말에 따르면, 철학은 아주 오랫동안 불임 상태였는데, 그것은 그녀가 생산을 할 수 있게 해줄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의 큰 잘못은 이론에는 많은 시간을 쓴 반면, 관찰에는 거의 시간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는 관찰을 대신할 것이 아니라 지원해야 한다.

188 "신에게 서약을 했건만, 죽은 자들의 초상은 어디 있는가?“ 점성술이건 꿈이건 징조건 인과응보의 심판이건, 모든 미신은 똑같다. 미신을 믿는 미망에 빠진 자들은 이루어진 일은 볼지언정 이루어지지 않은 일은, 설사 이루어진 일보다 훨씬 많다 해도, 무시하거나 넘겨버린다.

189 베이컨은 두 번째 오류의 범주를 동굴의 우성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개인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동굴이나 굴이 있는데, 이것이 자연의 빛을 굴절시키거나 변색시킬 수 있다.” 이것은 본성과 양육, 그리고 신체와 정신의 조건이나 분위기에 의해 형성된 그 사람의 성격이다. 예를 들어 어떤 정신은 분석적으로 타고나, 어디에서나 차이를 본다. 어떤 정신은 종합적으로 타고나 어디에서나 닮은 점을 본다. 그래서 과학자와 화가도 있고, 시인과 철학자도 잇는 것이다. 또한어떤 기질은 오래된 것에 무한한 찬사를 보내며, 어떤 기질은 새로운 것을 열심히 끌어안는다. 공정하게 중간을 유지하여, 고대인이 올바르게 확립한 것을 부수지도 않고 요즘 사람들이 정당하게 혁신한 것을 경멸하지도 않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진리는 당파를 모른다.

 

3. 과학의 유토피아

 

5. 비판

203 베이컨은 그가 쓴 가장 훌륭한 글로 꼽을 만한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류의 야망을 세 종류, 말하자면 세 등급으로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닐 것이다. 첫째는 자신의 힘을 자신의 조국에 사용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야망인데, 이것은 천박하고 타락한 것이다. 둘째는 자신의 조국과 사람들 사이에서 그 지배력을 확대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의 욕망인데, 이것은 첫 번째보다는 확실히 위엄이 있지만 탐욕이 덜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류 자체의 힘과 지배력을 우주에 확립하고 확대하려고 노력한다면, 그의 야망은 의심의 여지없이 앞의 두 가지보다 건전하고 고상하다. 사실 그의 영혼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이 적대적인 야망들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이 베이컨의 운명이었다.

 

6. 에필로그

205 그는 자신의 수입을 몇 년이나 앞서서 써 버리는 경향이 있었기에 그에게 양심의 가책은 사치였다. 만일 그가 에식스 사건에서 적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리고 자신의 말로 적을 베는 경험이 없었다면, 그런 과실은 아무도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다. 한 친구는 그에게궁정에서는 ……네 혀가 어떤 사람들에게 면도날이었듯이, 그들의 혀가 너에게 면도날이 될 날도 올 것이라는 말이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경고를 무시했다. 왕이 그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베이컨은 1618년에 베룰럼 남작이 되었고, 1621년에 세인트 올번스 자작이 되었다. 그리고 3년째 대법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206 베이컨은 유언장에 특유의 당당한 말을 남겼다. “네 영혼은 신에게 물려주겠다. ……몸은 눈에 띄지 않게 묻어라. 내 이름은 다음 시대와 외국에 물려주겠다.” 다음 시대와 많은 나라들이 그를 받아들였다.

 

 

4장 스피노자

 

그는 어떤 것, 그 거처는 석양의 빛이며, 둥근 바다며, 살아 있는 공기며, 파란 하늘이며, 인간의 정신 속이다. 어떤 움직임과 어떤 영, 이것이 모든 생각하는 것들, 모든 생각의 모든 대상을 밀고 나가며, 모든 것을 통과하여 나아간다.

 

1. 역사적이고 전기적인 사실들

 

1. 유대인의 오디세이아

211~212 다른 일부 유대인과 마차나지로 르네상스 회의주의의 영향을 받은 뜨거운 청년, 우리엘 아 코스타는 내세에 대한 믿음을 힘차게 공격하는 논문을 썼다. 이런 부정적 태도가 반드시 오래된 유대교 학설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회당은 기독교 공동체유대인을 너그럽게 받아주었지만 기독교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내용과 날카롭게 부딪히는 이단에는 가차없이 적대적이었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그에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라고 강요했다. 자존심이 강한 이 저자는 철회와 회개의 공식에 따라 회당 문지방에 엎드려야 했고 회중이 그의 몸을 밟고 지나갔다. 우리엘은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가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글을 쓰고는 총으로 자살했다.

 

2. 스피노자가 받은 교육

214 프랑스의 추종자와 영국의 적들이 보기에 데카르트의 중심 사상은 의식의 일차적 지위였다. 데카르트는 정신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즉시 또 직접적으로 알 수 있고, 정신은 세계가 감각과 지각을 거쳐 전해주는 인상을 통해서만외적 세계를 알며, 모든 철학은 결과적으로 (다른 모은 것은 의심해야 하지만) 개인의 정신과 자아에서 시작하여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첫 주장을 한다는, 외견상 분명해 보이는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이 출발점에는 르네상스의 개인주의적 요소가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3. 파문

216 1656년 이단 혐의로 회당 장로들 앞에 불려갔던, 외적으로는 평온하나 내적으로는 혼란에 빠져있던 젊은이의 정신 속에서 벌어졌던 일들이다. 장로들은 그에게 물었다. 자네가 친구한테 하느님에게도 몸이, 물질의 세계가 있을지 모른다고, 천사는 환각일지도 모른다고, 영혼은 그저 생명일지도 모른다고, 《구약》은 불멸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우리는 스피노자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른다. 최소한 겉으로라도 회당과 자신의 종교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는 데 동의한다면 500달러의 연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고, 그가 그 제안을 거부했으며, 1656 7 27일 히브리 제의의 모든 엄숙한 형식적 절차를 거쳐 파문당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저주를 읽는 동안 흐느끼는 소리와 커다란 뿔피리를 길게 부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의식이 시작될 때 환하게 밝혀져 있던 불이 의식이 진행되면서 하나씩 꺼져 마지막에는 다 꺼졌다. 파문당한 사람의 영적 삶이 소멸되었다는 상상이었다. 회중은 완전한 어둠에 파묻혔다.”

 

4. 은거와 죽음

219 스피노자는 용기 있는 태도로 조용히 파문을 받아들였다. “그것 때문에 내가 어떤 경우에도 하지 않았을 일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부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젊은 학자는 이제 무자비하고 가혹한 고독을 맛보게 되었다. 고독만큼 끔찍한 것은 없지만, 고독 가운데서도 유대인이 자기 민족에게서 고립되는 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은 드물다. 스피노자는 이미 옛 신앙이 사라지는 바람에 고통을 겪었다. 그런 식으로 정신의 내용을 뿌리째 뽑아내는 것은 큰 수술이며, 상처를 깊이 남긴다. 사람들이 온기를 찾기 위해 함께 웅크리는 소 떼처럼 모여 있는 다른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다른 정통파를 끌어안았다면, 스피노자는 저명한 개종자라는 역할 속에서 가족과 종족으로부터 완전히 추방당하면서 잃었던 삶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종파에 들어가지 않고 혼자 살아갔다.

223 어떤 사람은 스피노자를지상에 살았던 가장 불경한 무신론자라고 불렀다. 콜레루스는 또 다른 논박에 관해서무한한 가치가 있는 모물로, 결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의 이 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스피노자는 이런 공적인 질책 외에도 그를 교정해주려는 편지를 수없이 받았다.

225~226 스피노자는 전통적으로 생각되던 것과는 달리 궁핍하고 고립된 삶을 살지 않았다. 그는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얻었고, 영향력을 가진 다정한 친구들이 있었으며, 당대의 정치적 쟁점에 관심을 가졌고, 생사가 엇갈리는 상황에 맞닥뜨리는 모험도 없지 않았다. 그가 파문과 제명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것은 167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 교수 자리를 제안받은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찬사로 뒤덮인 이 제안은철학을 할 가장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다. 이 자유를 남용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계십니다.“

 

2. 신학정치론

 

228 성서는 이차적 원인들로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특히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헌신하게 하는 데 가장 잘 힘을 발휘하는 체제와 문체로 이야기한다. …… 그 목적은 이성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잡아끌어 장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기적이 많고 신이 자꾸 출현하는 것이다. “대중은 신의 힘과 섭리가 특별한 사건들, 자신들이 형성해온 자연관에 어긋나는 사건들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228~229 꾸미지 않고 말 그대로 이야기하면 영혼을 움직일 수 없다. 만일 모세가 홍해를 가로지르는 길을 내준 일이 (뒤에 나오는 구절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동풍에 불과하다고 말했다면 자신이 이끄는 대중의 정신에 별 인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사도들도 우화에 의존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기적 이야기에 의존했다. 대중의 정신에 맞추는 불가피한 과정이었던 셈이다. 철학자나 과학자와 비교할 때 그런 사람들의 영향력이 더 큰 데에는 종교의 창건자들이 사명의 성격과 자신의 뜨거운 감정 때문에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생생하고 비유적인 형태의 언어가 큰 몫을 차지할 것이다.

229 철학적 해석이 풍부해질수록 알레고리와 시의 안개를 뚫고 위대한 사상가들과 지도자들의 심오한 사랑이 드러나며, 《성경》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사람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주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두 가지 해석 모두 적절한 자기 관리와 기능이 있다. 사람들은 늘, 비유로 표현되고 신앙 하나가 무너진다 해도 또 다른 신앙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신과 자연이 하나라는 것, 필연성에 의해 활동하고 변함없는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철학자가 숭배하고 복종하는 것은 이 장엄한 법칙이다. 《성경》에서는단지 민중의 이해나 그들의 불완전한 지식에 양보하여 신이 법을 주는 존재나 군주로 묘사되고 정의롭거나 자비롭다고 일컬어지지만, 실제로는 그의 본성의 필연성에 다라 ……행동하며, 그의 포고는 ……영원한 진리임을철학자는 잘 알고 있다.

230 유대인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에 대한 기독교도의 증오 때문이었다. 유대인은 박해 때문에 종족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통일성과 연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박해가 없었다면 그들은 유럽의 여러 민족과 결혼하여 섞이고, 어디에서나 그들을 둘러싸는 다수자에게 삼켜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치워버린다면, 철학적인 유대인과 철학적인 기독교인이 교의에 동의하고 평화롭게 협동하며 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3. 지성 정화론

 

231 스피노자는 왜 자신이 철학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들려준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일어나는 모든 일이 헛되고 무익하다는 것을 경험이 내게 가르쳐준 뒤, 내가 두려워하는 모든 대상과 내가 두려워하게 되는 모든 이유는 정신이 그것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한, 그 자체로서 선하거나 악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마침내 진정으로 선하고 그 선함을 전달할 수 있는 것, 다른 모든 것을 버리게 할 만큼 정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혹시 있을까 하는 문제를 살펴보기로 결심했다. 영원히 지속되는 지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혹시 발견하고 얻을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명예와 부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많다는 것, 그러나 s가 새로운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싶다면 부와 명예를 얻는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명예와 부를 많이 소유할수록 쾌락도 늘어나고, 그 결과 그것들을 더 늘리려는 마음도 강해진다. 반면 언제라도 그런 희망이 좌절되면, 속에서 깊디 깊은 고통이 생겨난다. 명성도 이런 큰 약점이 있어, 그것을 추구하려면 삶의 방향이 사람들의 변덕에 맞추는 쪽으로 가야 한다. …… 영원하고 무한한 것을 향한 사랑만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안전한 쾌락을 정신에게 줄 수 있다. …… 최대의 선은 정신이 자연 전체와 이루는 합일을 아는 것이다……

 

4. 윤리학

 

235 질서는 우리 정신의 결을 거스른다. 우리는 공상의 무질서한 선들을 따르고, 위태롭다 해도 우리의 꿈에서 철학을 자 나아가는 쪽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는 단 하나의 강박적인 욕망밖에 없었다. 세상의 견딜 수 없는 혼돈을 통일과 질서로 환원하고 싶다는 것. 그에게는 남방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보다는 북방인의 진리에 대한 굶주림이 강했다. 그에게 예술가적인 면이 있다면 순수하게 건축가적인 면으로, 완벽한 대칭과 형식을 갖춘 사고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235 당시에는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언어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라면 실재나 본질이라고 쓸 자리에 실체라는 말을 쓰고, 온전하다는 말을 쓸 자리에 완벽하다를, 대상이라고 쓸 자리에 이상을, 주관적으로라고 쓸 자리에 객관적으로를, 객관적으로라고 쓸 자리에 형식적으로라고 쓴다. 이것은 경주의 장애물로, 약한 사람들은 단념하겠지만, 강한 사람들은 자극을 받을 것이다.

236 철학책은 대충 훑으면 반드시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모든 부분이 앞부분에 의존하고 있다. 뻔해 보이고 언뜻 불필요해 보이는 명제가 당당한 논리 전개의 초석으로 드러난다. 전체를 읽고 생각해보기 전에는 어떤 중요한 대목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1. 자연과 신

237 윌리엄 제임스가 말했듯이, 형이상학이란 궁극적 의미에 이를 때까지 사물을 끝까지 명료하게 생각하고, 현실의 구도 속에서 그 실체적 본질, 아니,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그 본질적 실체를 찾아내고, 그럼으로써 모든 진실을 통합하여최고 수준의 일반화’―이것은 실용적인 영국인에게도 철학의 내용을 이룬다에 이르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그렇게 거만하게도 형이상학을 경멸하는 과학조차 생각을 전개할 때마다 형이상학을 가정하는데, 공교롭게도 과학이 가정하는 형이상학의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이다.

237 스피노자의 체계에는 세 가지 축을 이루는 용어가 있는데, 그것은 실체, 속성, 양태다. 단순하게 가기 위해 속성은 잠시 밀어두자. 양태는 실재를 일시적으로 표현하는 개별적인 사물이나 사건, 어떤 특정한 형태나 모양이다. 당신, 당신의 몸, 당신의 생각, 당신의 집단, 당신의 종(), 당신의 행성이 양태다. 이 모든 것은 그 뒤와 밑에 놓여 있는 어떤 영원하고 변함없는 실재의 형태, 양태, 또는 말 그대로 최신 유행이다.

238 스피노자는 실체를 자연이나 신과 동일시한다. 그는 스콜라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두 가지 면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능동적이고 생명이 넘치는 과정으로, 스피노자는 이것을낳는 자연이라고 부른다. 베르그송의생의 약진창조적 진화인 셈이다. 이것은 자연의 물질과 내용으로, 숲과 바람과 물, 산과 들과 수많은 외적 형태를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자연과 실체와 신의 동일성을 이런 의미에서는 부정하고, 앞서 말했던 의미에서는 긍정한다. 실체와 양태, 영원한 질서와 일시적 질서, 능동적 자연과 수동적 자연, 신과 세계이 모두가 스피노자에게는 서로 일치하여 동의어로 사용할 수 있는 이분법의 두 항인 것이다.

239~240 신과 세계의 관계는 원의 법칙과 모든 원의 관계와 같다. 실체와 마찬가지로 신은 인과의 연쇄 또는 과정이며, 만물의 바탕이 되는 조건이며, 세계의 법칙과 구조다. 이런 양태와 사물의 구체적 우주와 신의 관계는 다리와 그 설계, 구조, 다리를 짓는 원칙을 이루는 수학이나 역학 법칙의 관계와 같다.

240 신의 뜻과 자연법칙은 다양하게 표현되지만 결국 하나의 실재다. 따라서 모든 사건은 변하지 않는 법칙의 기계적 작용에서 나오는 것이지, 별들 속에 앉아 있는 무책임한 독재자의 변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가 물질과 신체에서만 본 메커니즘을 스피노자는 신과 정신에서도 본 것이다. 이것은 설계의 세계가 아니라 결정론의 세계다. 우리는 의식적인 목적을 향해 행동하기에 모든 과정이 그런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가 인간이기에 모든 사건이 결국 인간에게 이르고, 인간의 요구를 돕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다른 많은 생각과 마찬가지로 인간 중심적 망상이다. 철학에서 가장 큰 오류의 뿌리는 우리 인간의 목적기준선호를 개관적 우주에 투사하는 데 있다. 여기에서악의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욥이 배운 교훈, 즉 신은 우리의 작은 선과 악을 넘어서 있다는 교훈을 잊고 삶의 불행을 신의 선과 조화시키려고 애쓴다. 그러나 선과 악은 인간과 관련되어 있고, 종종 개인적 기호와 목적에 따라 달라지며, 개인들이 하루살이에 불과한 우주, ‘움직이는 손가락이 종족의 역사마저 물에 써서 흘려버리는 우주에서는 아무런 유효성이 없다.

241 신은 인격적 존재인가? 인간이 이 말을 사용하는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는여전히 신을 여성이 아니라 남성으로 그리는 일반적인 믿음에 주목하여,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지상의 상황을 반영한 개념을 용감하게 거부한다.

 

2. 물질과 정신

243 정신과 몸은 서로 작용하지 않는다. 둘은 서로 다르지 않고 하나이기 때문이다. “몸은 정신이 생각하도록 결정할 수 없다. 또 정신은 몸이 계속 움직이거나 쉬라고, 또는 다른 어떤 상태에 있으라고 결정할 수 없다.” “정신의 결정, 몸의 욕망과 결정은 …… 하나이자 같기때문이다. 온 세상은 이런 식으로 이중적인 동시에 통일되어 있다. 외적인물질적과정이 있다 해도, 이것은 반드시 진짜 과정의 한 면 또는 측면일 뿐이며, 이 진짜 과정은 더 크게 보면 우리가 우리 내부에서 보는 정신적 과정과 상관관계가 있는정도의 차이는 있지만내적 과정도 포함하고 있다. 내적이고정신적인과정은 모든 단계에서 외적이고물질적인과정에 상응한다. “관념의 질서나 관련은 사물의 질서나 관련과 똑같다.” “생각하는 실체와 물질적으로 확장된 실체는 하나이며 같은 것이고, 이것은 이번에는 이런 속성, 다음에는 저런 속성”. 즉 측면을통하여 파악된다.”

245 의식에서 관념의 지속 시간을 결정하는 충동적인 힘은 종종 의지라고 부르지만, 사실 욕망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며, 이것은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질이다.” 욕망이란 우리가 의식하는 욕구 또는 본능이다. 그러나 본능이 늘 의식적인 욕망을 통해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본능 뒤에는 모호하고 다양한자기보존 노력이 있다. 나중에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어디에서나 살고자 하는 의지와 권력을 향한 의지를 보았듯이, 스피노자는 모든 인간 활동, 심지어 인간보다 하위의 활동에서도 자기보존을 위한 노력을 본다. 이 문제에 관한 철학자들의 생각은 다 비슷한 셈이다.

245~246 하나의 사물이 스스로 존속하는 힘은 그 존재의 핵심이자 본질이다. 모든 본능은 개체(이 외로운 독신자는 덧붙이지 못했지만, 종이나 집단도 마찬가지다)를 유지하려고 자연이 계발한 장치다. 쾌감과 통증은 본능의 만족 또는 방해다. 그것은 욕망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다. 우리는 어떤 것이 쾌감을 주어서 그것에 욕망을 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욕망을 품기 때문에 그것이 쾌감을 주는 것이다. 또 우리는 욕망을 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에 욕망을 품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의지란 없다.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 본능을 결정하고, 본능이 욕망을 결정하며, 욕망은 사고와 행동을 결정한다. “정신의 결정은 오로지 욕망에서 나오며, 이 욕망은 기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정신에는 절대의지나 자유의지가 없으며, 정신은 하나의 원인에 의해 이것이나 저것을 원하도록 결정된다. 이 원인은 또 다른 원인에 의해 결정되며, 이 원인은 또 다른 원인에 의해 결정되는 식으로 무한히 나아간다.

 

3. 지성과 도덕

247~248 스피노자는 우선 행동을 행동의 목표로 설정한다. 그러면서 행복이란 쾌락의 존재이고 고통의 부재라고 아주 단순하게 정의한다. 그러나 쾌락과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또 쾌락과 고통은 상태가 아니라 이행 과정이다. “쾌락은 인간이 덜 완벽한(즉 온전함이나 완료를 말한다) 상태에서 더 완벽한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249 스피노자는 유토피아적 개혁가들과 달리 이타주의나 인간의 타고난 선에 기초하여 윤리학을 세우지 않는다. 냉소적인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이기심이나 인간의 타고난 악에 기초하여 세우지도 않는다. 그는 자기중심주의가 불가피하고 또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고 여기에 기초하여 윤리학을 세운다. 인간에게 약해지라고 가르치는 도덕 체계는 가치가 없다. “덕의 기초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노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행복은 그렇게 하는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249 스피노자는 니체와 마찬가지로 겸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겸손은 음모가의 위선이거나 노예의 소심함이다. 겸손은 능력의 부재를 뜻한다. 스피노자에게 덕이란 재능과 능력의 형식이다. 따라서 양식의 가책도 덕이라기보다는 결함이다. “회개하는 사람은 두 배로 불행하고, 이중으로 약하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니체처럼 겸손을 비난하느라 긴 시간을 소비하지는 않는다. ‘겸손은 아주 드물기때문이다. 키케로가 말했듯이, 겸손을 찬양하는 책을 쓰는 철학자들도 잊지 않고 속표지에 자기 이름을 적어놓지 않는가. “자신을 경멸하는 사람은 오만한 사람에 가장 가깝다.”

250 증오한다는 것은 자신의 열등감과 두려움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적을 증오하지는 않는다. “똑같은 증오로 상처입은 것을 복수하고자 하는 사람은 비참하게 살 것이다. 그러나 사랑으로 증오를 몰아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기쁨과 자신감에 넘쳐 싸운다. 그는 한 사람에게든 여러 사람에게든 똑같이 저항하며, 행운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그에게 지는 사람들은 기쁘게 그에게 굴복한다.” “정신을 정복하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영혼의 위대함이다.” 이런 대목에서 스피노자는 갈릴리 언덕들에 비추는 빛과 같은 것을 본다.

251~252 스피노자는 중요한 점에서 소크라테스나 스토아학파보다 한 걸음 나아간다. 그는 이성 없는 열정이 장님이듯, 열정 없는  이성은 죽은 것임을 알고 있다. “감정은 대조를 이루는 감정이나 더 강한 감정이 아니라면 방해받지도 제거되지도 않는다. 스피노자는 쓸데없이 이성과 열정을 대립시키는 것이 시합에서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아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요소가 대체로 승리를 거둔다이 아니라, 이성 없는 열정과 이성으로 조율되는 열정, 즉 상황을 전체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제자리를 잡은 열정을 대립시킨다. 사고에 욕망의 열기가 부족해서는 안 되며, 욕망에도 사고의 빛이 부족해서는 안 된다. ”열정은 우리가 열정에 관한 명료하고 분명한 관념을 만들어내는 순간 열정이 아니게 되며, 정신은 불충분한 관념이 많을수록 열정에 종속된다.“ 모든 욕구는 불충분한 관념에서 생길 때에만 열정이 된다. 충분한 관념에 의해 생겨날 때는 …… 덕이 된다.” 모든 지적인 행동즉 전체 상황에 대응하는 모든 반응은 덕이 있는 행동이다. 결국 지성이 없으면 덕이 없는 것이다.

253 우리는 인간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자유를 성취한다. 감정의 수동성은인간의 굴레이며, 이성의 적극성은 인간의 자유다. 자유란 과정의 인과법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 감정이나 충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유는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조정되지 않고 완전하지 않은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만큼만 자유롭다. 초인이 되는 것은 사회적 정의와 편의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본능의 개인주의적 성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런 완전성이나 성실성에서 지혜로운 자의 평정이 나온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영웅의 귀족적 자족이 아니며, 하물며 니체가 이상으로 삼는 거만한 우월감도 아니다. 그런 것들보다는 동지적 관계에서의 평형이나 마음의 평화에 가깝다. “이성으로 선한 자들, 이성의 안내를 받아 자신들에게 유용한 것을 구하는 자들은 인류에게 바라지 않는 것을 자신에게도 바라지 않는다.” 위대해지는 것은 인간 위에 올라서서 남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불균등한 욕망의 편파성과 무용성 위에 올라서서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보다 고귀한 자유다. 의지는 자유롭지 않고, 어쩌면의지란 것은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자유롭지않으니 행동이나 삶의 구조에 도덕적으로 책임질 일도 없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인간의 행동은 기억에 의해 결정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회는 자신을 보호하고자 사람들의 희망과 공포를 이용하여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질서와 협동을 끌어내야 한다.

 

4. 종교와 불멸성

255 스피노자의 철학은 추방당해 홀로 살아가고 있는 세계조차 사랑하려는 시도다.

256 소로는 말했다. “이따금씩 월든 호수에서 느긋하게 둥둥 떠다닐 때면, 나는 살아 있는 것에서 벗어나 존재하기 시작한다.”

257~258 스피노자 책의 마지막 명제는 이런 내용이다. “덕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덕 자체가 축복이다.” 어쩌면 이와 마찬가지로, 명료한 사고에 대한 보답이 불멸이 아니라, 명료한 생각 자체가 불멸인지도 모른다. 명료한 생각은 과거를 현재로 실어 나르고 미래로 뻗어나가면서 시간의 한계와 비좁음 너머 변화의 만화경 뒤에 영원히 존재하는 시야를 포착한다. 그런 생각은 불멸이다. 모든 진리는 영구적인 창조물이자 인간이 영원히 획득한 것의 일부로서 인간에게 영원히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5. 정치론

 

260~261 대부분의 인간은 속으로는 법이나 관습에 대항하는 개인주의적 반역자다. 사회적 본능은 개인주의적 본능보다 늦게 그리고 약하게 찾아와 필요에 의해 강화된다. 훗날 루소가 처참한 심정으로 생각했듯이, 인간은천성적으로 선하지않다. 그러나 제휴를 통하여 가족 안에서나마 공감, 동질감, 그리고 마침내 인정이 나타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했던 것에 연민을 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과 비슷하다고 판단하는 것에 연민을 품는다.” 여기에서감정의 모방이 생기고, 마침내 양심도 약간 생긴다. 그러나 양심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획득하는 것으로,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 양심은 성장하는 개인의 정신에 집단의 도덕적 전통이 저장되는 것이다. 사회는 양심을 통하여 적태생적으로 개인주의적인 영혼의 마음에 자신을 위한 동맹자를 창조한다.

 

6. 스피노자의 영향

 

 

                                                                                     5장 볼테르

공기와 물로 빚어진 피조물로서, 그는 지금까지 살았던 누구보다 더 쉽게 흥분한다. 그에게는 이 세상 것이 아닌, 고동치는 원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다. 정신적 기제가 그보다 섬세한 사람은 없으며, 그 정신의 평형은 누구보다 빨리 바뀌면서도 동시에 누구보다 정확하다.

 

1. 파리 :《오이디푸스》

 

273 호감을 주지 못하고, 추하고, 허영심 많고, 경솔하고, 외설적이고, 비양심적이고, 심지어 때로는 부정직하기도 했던 볼테르는 그 시대와 장소의 결함을 거의 빠짐없이 갖춘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볼테르는 변함없이 친절하고, 사려 깊고, 자신의 에너지와 돈을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고, 적을 무너뜨리는 일만큼이나 친구를 돕는 데 정성을 다하고, 펜을 한번 휘둘러 죽일 수도 있으면서 화해를 청해오면 바로 무장을 해제했다. 그렇게 모순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274 써놓은 글은 남지만 입으로 한 말은 날아가 버린다. 볼테르의 날개 달린 언어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에게 볼테르의 육신은 너무 많이 남았고, 그의 정신의 거룩한 불길은 너무 적게 남아 있다. 그러나 비록 시대의 유리창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지만, 일 얼마나 대단한 정신인가! “순수한 지성의 힘 덕분에 분노는 재미로, 불은 빛으로 변한다.”

274~275 그는 당대 다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많은 것을 성취했다. “일에 몰두하지 않은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똑같은 것이다.” 볼테르는 말했다. “게으른 사람만 빼면 모든 사람은 선하다.” 그의 비서는 그가 오직 시간 문제에서만 구두쇠였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삶을 지탱하려면 최대한 몰두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일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삶의 환각들을 대신하여 가장 큰 기쁨이 되는 것은 일이다.” “자살하지 않으려면 늘 뭔가 할 일이 있어야 한다.”

     볼테르가 늘 일을 했던 것을 보면 계속 자살의 유혹을 느꼈던 것이 틀림없다. “그가 한 시기 전체를 그의 삶으로 채운 것은 그가 철저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280 그는 그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수입을 얻는 기술만이 아니라 그 수입을 계속 굴리는 기술을 잃지 않았다. 그는 철학을 하기 전에 우선 살고 봐야 한다는 고전적 격언을 존중했다. 그는 1729년 정부가 되는대로 발행한 복권을 몽땅 사들여 큰돈을 벌었으며, 정부는 약이 올라 씩씩거렸다. 그러나 그는 돈을 모을수록 관대해졌다. 그의 삶이 오후로 접어들면서 그의 주위에 모여드는 피보호자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2. 런던 : 《영국 통신》

282 볼테르는 용기를 내어 새 언어를 익히는 일에 나섰다. 그는 역병이라는 단어는 한 음절이고 학질이라는 단어는 두 음절인 점에 기분이 상해, 영어의 반이 역명에 걸리고 나머지 반은 학질에 걸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곧 영어를 잘 읽게 되었다. 그리고 1년이 안 되어 당대 최고의 영문학을 섭렵했다.

 

3. 사례 : 《로망스》

285 볼테르도 그녀의 사랑에 뜨거운 찬사로 보답하여, 그녀를여자라는 점이 유일한 결함인 위대한 인간이라고 묘사했다.

⇒ 볼테르는 마흔에 스물 여덟의 샤틀레 후작 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프랑스 아카데미가 불의 물리학에 관한 논문을 공모했을 때 볼테르보다 높은 평가를 받은, 절대 사랑의 도피 같은 것을 할 여자가 아니었으나 후작은 너무 둔했고, 볼테르는 너무 흥미로웠고. 그리하여 그녀는 볼테르를프랑스의 가장 훌륭한 장식품이라 불렀다고.

286 볼테르는 부패하고 찬란한 세상의 중심에 있는 것이 행복했다. 어떤 일ㄹ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한동안웃고 웃겨라가 그의 좌우명이 되었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는 그를명랑의 신이라고 불렀다. 볼테르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이 우리를 약간 경박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무척 비참하게 살아갈 것이다. 사람은 경박해질 수 있기에 목을 매달지 않는 것이다.” 그에게는 까칠한 칼라일 같은 면이 전혀 없었다. “때로는 멍청해지는 것이 좋습니다. 웃음으로 주름살을 피지 못하는 철학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나는 엄숙을 병으로 봅니다.”

287 이 작품들은 장편소설이 아니라 짧고 해학적인 중편이다.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관념이고, 악당은 미신이고, 사건은 생각이다.

자디그 캉디드 미크로메가스 어수룩한 사나이 세상 돌아가는 대로

 

4. 포츠담과 프리드리히

 

 

 

5. 레델리스 : 《도덕론》

300 "나는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사회의 역사를 쓰고 싶으며, 인간이 가족 안에서 살아온 방법을 확인하고, 그들이 공동으로 계발한 예술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다. …… 나의 목표는 작은 사실들을 세세하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역사를 쓰는 것이다. 나는 또 위대한 영주들의 역사에도 관심이 없다. …… 나는 야만에서 문명까지 인간이 밟아간 단계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6. 페르네 : 《캉디드》

305 박해와 환멸 때문에 삶에 대한 그의 믿음은 바닥이 났다. 베를린과 프랑크루프트에서 겪은 일로 희망이 무디어졌다. 그러나 믿음과 희망이 결정적으로 무너진 것은 1755 11월 리스본에서 끔찍한 지진이 일어나 3만 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지진은 만성절에 일어났다. 교회는 신도로 가득했다. 죽음은 밀집대형으로 모여 있는 적을 발견하고 최대의 수확을 거두어들였다. 볼테르는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프랑스 성직자들이 이 재난을 리스본 사람들에게 대한 단죄라고 설명한다는 뜨거운 시를 썼다. 신이 악을 막을 수 있는데 막지 않은 것이냐, 아니면 막고 싶은데 막지 못한 것이냐 하는 딜레마였다. 그는 선과 악은 우주에는 적용할 수 없는, 인간의 용어이며 우리의 비극은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하찮은 것이라는 스피노자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다.

 

7. 《백과전서》와 《철학 사전》

 

 

8. 파렴치를 박살 내라

316 무엇 때문에 그가 불가지론자의 예의 바른 조롱에서 벗어나, 교회 만능주의라는비행을 분쇄하는 신랄하고 타협의 여지가 없는 반교권주의로 돌아선 것일까?

321 "유일하게 좋은 종교임이 분명한 우리 자신의 거룩한 종교를 빼면 가장 덜 불쾌한 종교가 무엇일까?“ 그러면서 자신의 시대 가톨릭과 완전히 반대되는 신앙과 예배를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는 가장 강렬한 경구로 꼽히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악행과 말도 안되는 소리로 가득함에도 17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니, 기독교는 신성한 것이 틀림없다.“

322 볼테르에게 종교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그는 무신론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이런 태도가 하도 확고해서 백과전서파 몇 명은 그에게 등을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볼테르는 괴팍한 사람이다. 그는 신을 믿는다.” 볼테르는무지한 철학자에서 스피노자식 범심론으로 나아가지만, 그것이 거의 무신론에 가깝다고 여겨 물러선다.

323 그는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도 부정한다. 영혼에 관해서는 불가지론자다. “형이상학 책 4000권도 우리에게 영혼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노인이라서 불멸을 믿고 싶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324 볼테르는 훗날 마음이 바뀐다. 신에 대한 믿음은 벌과 보상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이 따르지 않는 한 도덕적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쩌면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상하고 복수하는 하느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벨은 물었다. 무신론자들의 사회가 존속 가능할까? 볼테르는 대답한다. “가능하다. 그 무신론자들이 철학자들이기도 하다면.”

 

9. 볼테르와 루소

326 볼테르는 인생의 후반 몇 십 년 동안 교회의 압제에 대항한 투쟁에 몰두하느라 정치적 부패나 억압과 싸우는 전쟁에서는 거의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정치는 내 분야가 아니다. 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줄이고 명예를 높이는 일에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는 데 내 역할을 국한해왔다.” 그는 정치철학이 얼마나 복잡해질 수 있는지 알고 있었으며, 나이가 들면서 기존의 여러 확신을 버렸다. “구석진 밀실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이 모든 사람들에게 짜증이 납니다.” 싸구려 글을 써대며 세상을 다스리는 이 입법자들은……

329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법에만 복종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주의자의 논조로, 평화혁명을 이루고자 했던 튀르고, 콩도르세, 미라보 등 볼테르 추종자들의 논조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유만이 아니라 평등, 심지어 자유를 희생해서라도 평등을 원하는 억압받는 자들은 만족시킬 수 없었다. 대신 보통 사람들의 대변자, 루소는 어디에서나 만나게 되는 계급적 차이에 예민하게 반응하여 평등화를 요구했다. 혁명이 루소 추종자들인 마리와 로베스피에르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평등이 앞으로 나서고 자유는 단두대로 갔다.

331 볼테르는 늘 이성을 믿었다. “우리는 말과 펜으로 인간을 계몽시킬 수 있고 더 낫게 만들 수 있다.” 루소는 이성을 거의 믿지 않았다. 그는 행동을 바랐다. 혁명의 위험에 겁먹지 않았다. 낡은 습관이 뿌리 뽑히고 혼란 속에서 뿔뿔이 흩어진 사회적 요소들을 형제애라는 감정이 재결합해줄 거라고 믿었다. 법을 제거하라. 그러면 인간은 평등과 정의의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다. 루소가 문명, 문자, 과학에 반대하고 야만인이나 동물에게서 볼 수 있는 자연상태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보냈을 때 볼테르는 이렇게 답했다. “인간 종에 반대하는 선생의 새로운 책 잘 받았고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짐승으로 돌리려고 하는 일에서 선생만큼 재치 있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선생의 책을 읽다보면 네 발로 기는 것을 갈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습관을 버린 지 어언 60년이 넘으니, 안타깝게도 이제 다시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333 인간은 제도를 만들고, 제도는 인간을 만든다. 어디에서 변화가 일어나 이 고리를 깰 수 있을까? 볼테르와 자유주의자들은 사람을 교육하고 변화시킴으로써 지성이 천천히 평화롭게 이 고리를 깰 수 있다고 생각했다.

 

10. 대단원

 

 

6장 이마누엘 칸트

"나는 이미 지키고자 결심한 노선에 마음을 고정시켰다. 나는 나의 길로 들어설 것이며, 무엇도 내가 이 길을 좇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그래서 그는 가난과 무명의 세월을 살며 거의 15년 동안 자신의 걸작을 스케치하고 쓰고 다시 썼다. 이렇게 느리게 성숙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이 이렇게 철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적도 없었다.

 

1. 칸트로 가는 길

 

342 그는 전문적 철학자들만 자신을 읽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사람들이라면 예증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칸트가《순수이성비판》의 원고를 친구 헤르츠에게 주었을 때, 헤르츠는 사변에 꽤 능통한 사람이었음에도 반쯤 읽다 돌려주면서 계속 읽다가는 미쳐버릴까 두렵다고 말했다. 이런 철학자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1. 볼테르에서 칸트로

2. 로크에서 칸트로

3. 루소에서 칸트로

348 분명히 가끔은특히 도시 생활의 새로운 복잡성이나 인공성 속에서는이성이 더 나은 안내가자 된다. 그러나 인생의 큰 위기에서, 행동과 믿음이라는 큰 문제에서, 우리는 도식보다는 느낌을 신뢰한다. 만일 이성이 종교에 반다핸다면, 바로 그 점이 이성을 더욱더 신뢰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2. 칸트 자신

 

354 칸트는 몸이 아주 약해서 스스로 철저한 섭생을 해야 했다. 그는 의사 없이 이렇게 하는 쪽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으며, 결국 여든 살까지 살았다. 그가 좋아하던 원칙 가운데는 특히 야외에서 코로만 숨을 쉬는 것도 있었다. 그는 양말 신는 법에도 철학을 적용하여, 양말 끈을 바지 주머니 안으로 끌어올려, 그 끝에 용수철을 달고, 용수철은 작은 상자에 담았다. 그는 모든 것을 신중하게 생각한 다음 행동에 옮겼으며, 그 결과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청혼할 생각을 두 번 했지만, 너무 생각을 길게 하는 바람에 한 번은 여자가 더 과감한 남자와 결혼했고, 또 한 번은 철학자가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이사를 가버렸다.

 

3. 순수이성비판

 

1. 선험적 감성론

356 《순수이성비판》은 즉시 핵심으로 들어간다. “우리의 오성은 결코 경험의 영역에만 한정될 수 없다. 경험은 무엇이라는 말은 해주지만, 반드시 다른 것이 아니라 무엇이어야 한다는 말은 해주지 않는다. 진정으로 일반적인 진리는 절대 주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범주의 지식을 특히 갈망하는 우리의 이성은 만족하기보다는 자극을 받는다.

358 감각과 지각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정신이 어떻게 감각을 지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감각은 그 자체로는 자극의 인식에 불과하다. 우리는 혀로 맛을 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귀로 소리를 듣고, 피부로 온도를 느끼고, 망막으로 빛이 번쩍임을 느끼고, 손가락으로 압력을 느낀다. 이것은 날것 그대로인 조잡한 상태이지만 여기에서 경험이 시작된다.

 

2. 선험적 분석론

362 감각 경험은 조직되지 않은 자극이고, 지각은 조직된 감각 경험이며, 개념은 조직된 지각이고, 과학은 조직된 지식이며, 지혜는 조직된 삶이다. 뒤로 갈수록 질서, 순서, 통일성의 등급이 높다. 이 질서, 순서, 통일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물 자체에서 오지는 않는다. 사물은 무질서한 무리를 이루어 수많은 통로를 통해 즉시 다가오는 감각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지기 때문이다. 이 끈질긴 무업 상태에 질서와 순서와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목적이다. 이 바다에 빛을 비추는 것은 우리 자신 우리의 인격, 우리의 정신이다.

 

3. 선험적 변증론

 

4. 실천이성비판

 

368 "우리 행위의 준칙이 의지에 따라 보편적인 자연법이 되도록 행위하라는 우리 내부의 정언적 명령, 우리 양심의 무조건적 명령이다. 우리는 추론이 아니라 생생하고 직접적인 느낌으로, 만일 모든 인간이 하게 되면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질 만한 행동은 v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내가 거짓말로 궁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가? 하지만내가 의지로 거짓말을 할 수는 있지만, 결코 의지로 거짓말을 보편적인 법칙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런 법칙이 있다면 약속은 전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사 나에게 이익이 되더라도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의식이 내 안에 생겨난다. 신중함은 이런저런 경우를 가정하는 태도다. 그 좌우명은 정직이 최선의 정책일 경우에는 정직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도덕법칙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다.

369 그런 원리에 따라 살도록 하자. 그러면 우리는 곧 이성적 인간들의 이성적 공동체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공동체를 창조하려면 우리가 이미 거기에 속한 것처럼 행동하기만 하면 된다. 불완전한 상태에 완전한 법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움 위에 의무를 두고, 행복 위에 도덕을 두는 것이 어려운 윤리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짐승이 되기를 그치고 신이 되기를 시작할 수 있다.

370 만일 세속적 공리와 편의만이 덕을 정당화한다면, 너무 선한 것은 지혜롭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알고, 이것이 매일 우리 면전에서 잔인하게 되풀이됨에도, 우리는 여전히 외로워야 한다는 명령을 느낀다. 불편하지만 선한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이 삶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 이 지상의 꿈이 새로운 탄생, 새로운 깨어남을 향한 맹아적 서곡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중에 더 긴 삶에서 균형이 회복되어 관대하게 건네준 물 한 컵을 반드시 백 배로 보답받으리라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알지 못한다면, 의를 느끼는 이런 감각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370 마지막으로, 같은 이유로, 신은 존재한다. 의무에 대한 의식이 다가올 보상에 대한 믿음과 관련되고 그것을 정당화한다면, “불멸에 대한 가정은…… 이런 결과에 어울리는 원인의 존재를 상정하는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말을 바꾸면 신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다.”

 

5. 종교와 이성에 관하여

 

374 칸트는 모든 학자는 종교적 문제에 관하여 독립적 판단을 하고 자신의 견해를 알릴 권리를 가져야 하지만, 현왕의 치세 동안에는 침묵을 지키겠다고 대답했다.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용감할 수 있었던 일부 전기 작가들은 이런 양보를 두고 그를 비난했지만, 이때 칸트는 일흔 살이었고, 몸이 몹시 약했으며, 싸움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 또 그는 이미 할 말을 세상에 다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6. 정치와 영구 평화에 관하여

 

375 칸트는 우선 홉스에게 그렇게 충격을 주었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 자연이 생명의 감추어진 능력을 계발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투쟁은 진보의 불가결한 동반자다. 만일 사람들이 완전히 사회적이라면 인간은 정체할 것이다. 인간 종이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개인주의와 경쟁이 어느 정도 섞여야 한다. “비사회적 특징이 없다면…… 사람들은 완전한 조화, 만족, 서로에 대한 사랑 속에서 전원적인 목자 생활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경우 그들의 모든 재능은 영원히 맹아 상태로 감추어질 것이다.” (결국 칸트는 루소를 노예처럼 추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런 비사회적인 면, 이런 질투심과 허영심, 소유와 권력에 대한 이런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준 자연에게 감사해야 한다. ……인간은 일치를 바란다. 하지만 자연은 인간 종에게 무엇이 좋은지 더 잘 알며,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힘을 새롭게 발휘하고, 타고난 능력을 더 계발할 수 있도록 불화를 일으킨다.”

377 "우리 통치자들은 모든 자원을 이미 다음 전쟁 준비로 돌려놓았기 때문에……공공교육에 쓸 돈이 없다는 불평을 한 적이 있다. 국가는 상비군을 모두 철폐하기 전까지는 진정한 문명국이 될 수 없을 것이다.”

378 1795년 혁명이 반동적인 군대를 누르고 승리한 듯이 보이자 칸트는 이제 유럽 전역에 공화국들이 생겨나고, 노예제와 착취가 없는 민주주의에 기초하여 평화를 서약한 국제 실서가 생길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결국 정부의 기능은 인간을 이용하고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돕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가 절대적 목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인간을 어떤 외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존엄을 위반하는 범죄다.”

 

7. 비판과 평가

 

381 칸트의 위대한 업적은, 외적 세계는 오직 감각의 결과로만 우리에게 알려진다는 것, 정신은 단순히 무력한 백지, 감각 경험의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힘, 경험이 도달하는 대로 선별하고 재구성하는 경험임을 최종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이 접적에서 핵심적인 위대성을 손상하지 않고 몇 가지를 빼버릴 수 있다. .....나아가 이런 범주들, 또는 사고의 해석 형식들이 타고난 것인지, 그러니까 감각이나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것인지 물어볼 수도 있다. 스펜서가 인정하듯이, 어쩌면 개인에게도 후천적일 수 있다. 범주란 자동적으로 배열되는 감각이나 지각이 점진적으로 만들어낸 사고의 패턴, 지각과 개념의 습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질서하지만, 말하자면 배열 형식의 자연선택에 따라 점차 질서 잡히고 적응력 있고 계몽적인 방식으로 나아간다고 불 수 있다는 뜻이다.

383 칸트의 철학에서 놀라운 점은 첫 번째비판에서 파괴된 것으로 보였던 신, 자유, 불멸 같은 종교적 관념들이 두 번째비판에서 힘차게 소생한다는 사실이다. 니체의 비판적인 친구, 파울 레는 말한다. “칸트의 저작은 마치 시골 장터같은 느낌이다. 칸트에게서는 의지의 자유와 속박, 관념론과 반관념론, 무신론과 선한 주님에 이르기까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살 수 있다. 텅 빈 모자에서 뭔가를 꺼내는 마법사처럼 칸트는 의무의 개념으로부터 신, 불멸, 자유를 꺼내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한다.

 

8. 헤겔에 관한 메모

 

390 모든 관념은 관계들의 집단이다. 우리는 뭔가를 생각할 때는 그것을 반드시 다른 것과 관련지으며,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지각한다. 어떤 관계도 없는 관념은 공허하다. 이것이순수한 존재와 무는 같은 것이라는 말의 완전한 의미다. 관계나 질이 전혀 없는 존재는 없으며, 그런 존재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 이 명제는 끝없이 재담의 새끼를 치는데, 지금도 이런 재담은 번식해 나가면서 이것이 헤겔 사상 연구의 장애이자 미끼임을 보여주고 있다.

391 사고만 이런변증법적 운동에 따라 발전하고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도 그렇게 발전하고 진화하기 때문이다. 일의 모든 조건에는 모순이 포함되어 있으며, 진화가 이루어지면서 그 둘을 화해시키는 통일에 의해 모순을 해결한다. 따라서 우리의 현재 사회 체제는 자신을 좀먹는 모순을 감추고 있음이 틀림없다. 경제적 사춘기와 자원이 착취되지 않던 시기에 요구되던 자극적인 개인주의는 시간이 흐르면서 협동조합식 국가에 대한 갈망을 일으킨다. 미래에는 현재의 현실도 아니고 비전 속의 이상도 아닌, 그 둘의 뭔가가 합쳐져 더 높은 수준의 삶을 낳는 종합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높은 단계 또한 생산적 모순으로 분화하여, 더 높은 수준의 조직, 복잡성, 통일성을 낳을 것이다. 따라서 생각의 운동은 사물의 운동과 똑같다. 양쪽 모두 다양성을 통한 통일에서 통일 속의 다양성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진전이 이루어진다. 생각과 존재는 똑같은 법칙을 따른다. 논리학과 형이상학은 하나다.

394~395 그러나 그 행복한 시절에 헤겔은 급속히 늙어갔다. 그는 이야기 책의 천재처럼 멍해지곤 했다. 한번은 구두 한 짝이 진흙탕에 빠진 것도 모르고 한 짝만 신고 강의실에 들어가기도 했다. 1813년 베를린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그의 약한 몸은 금세 병에 전염되었다. 그는 불과 하루를 앓고 자다가 갑자기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7장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덕분에 우리의 은밀한 심장이 드러났다. 그는 욕망이 철학의 원리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사고가 비인격적 사건들의 추상적 계산이 아니라 행동과 욕망의 유연한 도구라는 것을 이해하는 길을 닦아 놓았다. 그는 천재의 필요성과 예술의 가치를 우리에게 다시 가르쳐주었다. 모든 위대한 것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그는 다시 한번 영웅을 고귀하게 섬기라고 설교했다.

 

1. 시대

 

399 쇼펜하우어가 의지를 신격화한 데에는 그 자그마한 코르시카인(나폴레옹)에게 육화된 의지가 웅장하고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도 어느 정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인트헬레나가 애처로울 정도로 외떨어진 곳이라는 사실도 그가 삶에 절망한 한 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마침내 의지는 패배하고 어두운 죽음만이 모든 정쟁의 승자가 되었던 것이다. 부르봉 왕조는 돌아왔고, 봉건 귀족들은 자기 땅을 되찾으려 했으며, 알렉산드르(신성동맹을 주도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이 평화적 이상주의는 그 자신도 모르는 새에 도처에서 진보를 억압하는 동맹을 낳았다. 위대한 시대는 끝났다. 괴테는 말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끝장난 세계에서 내가 젊지 않다는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

400 그래, 혁명은 죽었다. 그와 더불어 유럽의 영혼에서는 생명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광채로 신들의 황혼을 밝혔던 유토피아라고 부르는 새 하늘은 오직 젊은이들 눈에만 보이는 침침한 미래로 물러났다. 나이 든 축은 이미 오랫동안 그 매력을 좇아왔기에 이제 그것이 인간의 희망을 조롱한다고 여기며 등을 돌렸다. 미래에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젊은이들뿐이고, 과거에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노인들뿐이다. 대부분은 현재에 살 수밖에 없는데, 그 현재는 폐허였다. 얼마나 많은 영웅과 신념을 가진 자들이 혁명을 위해 싸웠던가!

401 이 환멸과 고난의 시기에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종교적 희망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상층 계급의 다수는 신앙을 잃었으며, 최후에 추한 악들이 해소되면서 정의와 아름다움이 지배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위로받지 못한 채 폐허가 된 세계를 바라보았다.

 

2. 인간

 

402 성격이나 의지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는다. 지성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는다. -쇼펜하우어

404 그는 소음을 참지 못햇다. “나는 오래전부터 어떤 사람이 방해받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소음의 양은 그의 정신적 능력과 반비례하며, 따라서 정신적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잣대로 사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소음은 모든 지적인 사람들에게는 고문이다. …… 활력이 지나쳐 사물을 두드리고 때려대고 쓰러뜨리는 것은 평생 나에게 가해진 끝없는 고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위대성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거의 편집증적으로 의식했다. 성공과 명성을 놓치자, 그는 안으로 파고 들어 자신의 영혼을 물어뜯었다.

 

3. 표상으로서의 세계

 

408~409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즉시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그 문체다. 여기에는 칸트의 수수께끼 같은 용어도 없고, 헤겔의 불명료함도 없고, 스피노자의 기하학도 없다. 모든 것이 명로하고 질서가 잡혀 있다. 모든 것이 의지로서의 사계라는 중심 개념, 따라서 투쟁의 세계이고, 따라서 비참한 세계라는 중심적 개념으로 감탄할 만하게 집중되어 있다. 단도직입적일 정도로 정직하고, 기분이 상쾌할 정도로 힘차고, 비타협적일 만큼 직접적이다!

410 “겸손이란 위선적 자기비하에 불과하며, 질투로 가득 찬 세상에서 탁월함과 장점이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서 용서를 얻고자 하는 수단이다.”

 

4. 의지로서의 세계

 

1. 살려는 의지

412~413 “의식은 우리 정신의 표면에 불과하며, 지구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껍질만 알 뿐이지 속은 모른다.” 의식적 지성 밑에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의지, 노력하는 집요한 생명력, 자발적 행동, 오만한 욕망의 의지가 있다. 지성은 가끔 의지를 이끄는 듯하지만, 이것은 안내자가 주인을 이끄는 것에 불과하다. 의지는눈이 보이는 절름발이를 어깨에 태우고 다니는 힘센 맹인이다.” 우리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이유를 찾는다. 우리는 심지어 욕망을 덮어버리려고 철학이나 신학을 열심히 만들어내기도 한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을형이상학적 동물이라고 부른다.

413 전체적으로 지성은, 교활한 사람의 경우처럼 위험 때문에 발달하거나, 아니면 범죄자의 경우처럼 결핍 때문에 발달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지성은 욕망에 종속되며 그 도구가 된다. 지성이 의지를 대체하려 하면 혼란이 따른다. 오직 생각에만 기초해서 행동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실수하기 쉽다.

413~414 "사람은 겉으로 보면 앞에서 끄니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뒤에서 미니까 움직이는 것이다.“ 분에 보이는 것에 의해 이끌려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느끼는 것에 의해, 반은 그 작용을 의식하지도 못하는 본능에 의해 떠밀려간다는 것이다.

414 성격은 의지에 있지, 지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격 또한 목적과 태도의 연속이다. 이것이 의지다.

416 의지는 인간의 본질이다.

418 물론 이 의지는 살려는 의지, 또 삶을 최대화하려는 의지다. 모든 살아 있는 것에서 생명은 얼마나 귀중한다! 또 이들이 얼마나 소리없이 인내하며 따를 기다리는가!

     ....혹시 이 의지가 죽음조차 물리칠 수 있을까?

 

2. 재생산의 의지

418 재생산은 모든 유기체의 궁극적 목적이자 가장 강한 본능이다. 그렇게 해야만 의지가 죽음을 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재생산의 의지는 지식이나 사고가 거의 통제할 수 없는 곳에서 자리를 잡는다. 심지어 철학자도 가끔 자식을 둔다.

420 연애결혼만큼 불행한 결합은 없다. 결혼의 목적이 종의 번식에 있지, 개체의 쾌락에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사람은 슬픔 속에서 살아야 한다.”라는 스페인 격언이 있다. 결혼 문제를 다룬 문헌의 반이 무의미한 것은 결혼을 종족 보존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짝짓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421 사랑은 자연의 기만행위이므로 결혼은 사랑의 소모이며, 환멸을 낳을 수밖에 없다. 오직 철학자만이 결혼으로 행복할 수 있지만, 철학자들은 결혼하지 않는다.

 

5. 악으로서의 세계

 

424 그러나 세계가 의지라면, 그것은 고난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우선 의지 자체가 결핍이여, 의지는 늘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보다 큰 것을 쥐려 하기 때문이다. 충족되는 소망이 하나라면, 충족되지 않는 소망은 열이다. 욕망은 무한하며. 층족은 제한적이다. “우리 의식이 의지로 채워지는 한, 우리가 수많은 욕망에 굴복하면서 늘 희망과 공포에 시달리는 한, 우리가 의지에 종속되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지속적인 행복이나 평화를 누릴 수 없다.”

425 역시 인생은 악이다. 고통이 그 기본적 자극이고 현실이며, 쾌락은 고통이 멈춘 소극적 상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 지혜로운 사람은 쾌락을 구하려 하는 대신 걱정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426 만일 모든 악이 제거된다면, 다툼이 완전히 끝난다면, 권태가 고통만큼이나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427 심지어 기억과 선견지명도 인간을 더 비참하게 할 뿐이다. 우리의 고난 대부분은 돌이켜보거나 기대하는 데서 오기 때문이다. 사실 고통 자체는 짧다. 죽음 자체보다 죽음을 생각하는 데서 훨씬 더 큰 고통이 생기는 법이다!

428 삶은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유지된다.

428~429 우리는 결혼해서 불행하고, 결혼하지 않아서 불행하다. 우리는 혼자일 때 불행하고, 함께일 때 불행하다. 우리는 온기를 얻으려고 함께 웅크린 고슴도치들 같아서, 너무 빽빽하게 모여 있으면 불편하고 떨어져 있으면 비참하다. 아주 우스꽝스럽다. “모든 개인의 삶은 전체로서 살펴보면 …… 그리고 그 가장 중요한 특징만 강조하면 사실 늘 비극이다. 하지만 자세히 파고들면 희극의 특징이 있다.”

430 "모든 것이 겨우 한순간 미적거리다가 서둘러 죽음으로 간다.“ 죽음이 시간을 끄는 것은 그저 고양이가 무력한 쥐를 갖고 놀듯이 우리를 갖고 노는 것에 불과하다.

431 신학이 죽음에서 벗어나는 피난처이듯이, 광기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피난처다. 광기는 의식이라는 실을 끊어 구원을 얻는 것이다. 어떤 경험이나 두려움은 오직 그것을 잊을 때에만 살아남을 수 있다.

 

6. 삶의 지혜

 

1. 철학

433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는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행복에 더 기여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교양을 얻는 것보다는 부자가 되는 것에 훨씬 집중한다.

434 우리가 열정을 깊이 알면, 열정은 우리를 통제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에 대한 통제만큼 외적 강제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이성에 복종하라. 가장 경이로운 사람은 제상을 정복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정복한 사람이다.

 

2. 천재

436~437 천재는 이 의지없는 인식의 최고 형태다. 생명의 가장 낮은 형태는 온전히 의지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식은 없다. 일반적 인간은 대개 의지만 있고 인식은 거의 없다. 천재는 대개 인식만 있고 의지는 거의 없다. “천재란 인식 기능이 의지가 요구하는 수준보다 상당히 많이 발달한 존재이다.” 이것은 힘의 일부가 재생산활동으로부터 지적 활동으로 옮겨갔다는 뜻이다.

438 천재는 어쩔 수 없이 고립 상태로 들어가며, 가끔 광기에 빠지기도 한다. 상상력이나 직관과 더불어 고통도 안겨주는 극도의 감수성이 고독이나 부적응과 결합되어, 정신을 현실과 연결시켜주는 끈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철학, 정치, , 예술에서 뛰어난 사람들은 모두 기질이 우울한 것처럼 보인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역시 옳다.

 

3. 예술

439 인식을 의지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해주고, 이렇게 개인적 자아와 그 물질적 이해관계를 잊게 해주고, 이렇게 정신을 의지 없이 진리를 명상하는 수준으로 고양하는 것이 예술의 기능이다.

 

4. 종교

441 욕망은 결코 행복으로 인도하지 않고 환멸이나 더 큰 욕망으로 인도할 뿐인데, 금식은 이런 욕망을 누그러뜨리는 주목할 만한 방편이다.

442 불교는 기독교보다 심오하다. 의지의 파괴가 종교이 모든 것이며, 니라바나가 모든 개인 발달의 목표라고 설교하기 때문이다. 힌두교도는 유럽의 사상가들보다 생각이 깊다. 그들의 세계 해석이 외적이고 지적이지 않고 내적이고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지성은 모든 것을 나누는 반면, 직관은 모든 것을 통일한다.

 

7. 죽음의 지혜

 

445 여자를 숭배하는 것은 기독교의 산물이자 독일 감상주의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것은 느낌, 본능, 의지를 지성보다 찬양하는 낭만주의 운동의 원인이기도 하다.

446 여자는 상관하지 않을수록 좋다. 그들은 심지어필요악도 아니다. 여자가 없다면 인생은 더 안전하고 평탄해질 것이다. 남자가 여자의 아름다움에 놓인 덫을 인식한다면, 재생산이라는 터무니없는 희극은 끝날 것이다.

 

8. 비판

 

447 쇼펜하우어 개인에 대한 진단은 인간의 행복이 외적 환경보다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고 인정한 점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비관주의는 비관주의자에 대한 고발장이다. 병든 몸과 신경증적 정신, 공허한 여가와 우울한 권태의 삶을 고려하면 쇼펜하우어 철학 고유의 생리학이 드러난다. 비관주의자가 되려면 여자가 있어야 한다. 활동적인 생활은 거의 언제나 몸과 마음에 좋은 기분을 가져온다. 쇼펜하우어는 수수한 목표와 안정된 삶에서 오는 고요를 찬양하지만, 개인적 경험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이지, 한가할 때는 고요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쇼펜하우어에게는 계속 여가를 누릴 만한 돈이 있었으며, 그는 지속적인 여가가 지속적인 일보다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철학자들의 우울해지는 경향은 앉아 있는 직업의 부자연스러움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공격은 단순히 배설의 기술을 잃어버린 병의 증상에 불과한 경우가 너무 많다.

448 물론 비관주의에는 자기중심주의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세상이 나에게는 좋지 않으니, 나는 세상을 철학적으로 경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스피노자의 가르침, 즉 우리가 표현하는 도덕적 비난이나 승인은 그저 인간적인 판단일 뿐, 우주 전체에 적용할 때는 대부분 의미가 없다는 가르침을 잊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거만한 혐오는 어쩌면 우리 자신에 대한 은밀한 혐오의 위장인지도 모른다. 삶을 망치거나 실수를 해놓고 자신을 방어할 혀가 없는환경이나세상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은 삶의 자연스러운 한계를 기대하지 않는다.

449 비관주의는 낙관주의가 지나가고 난 뒤의 아침이다.

449 "세상은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지만,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다“ -호러스 월풀

449 "아마 감정적인 낭만주의자만큼 우울증을 많이 낳은 운동은 없을 것이다. ……낭만주의자는 행복에 대한 자신의 이상이 실제로는 불행을 낳는다는 사실을 알아채면 자신의 이상을 탓하지 않는다. 그냥 세상이 자신처럼 예민하게 타고난 사람을 받아들일 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해버린다.“ 변덕스러운 우주가 어떻게 변덕스러운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단 말인가?

450 볼테르는 시골 여자의 행복한 무지보다 브라만의불행한지혜를 선호했다. 우리는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강렬하고 심오하게 삶을 경험하고 싶어한다. 환멸이라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가장 깊은 비밀로 뛰어들고 싶어한다.

451 비관주의는 자의식이 강하고 자존심이 강한 젊음의 사치다.

453 쇼펜하우어가 철학을 악의 생생한 현실과 대면시킨 것, 생각의 방향을 고통의 완화라는 인간적 과제로 향하게 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의 시대 이후로 철학은 논리를 잘게 썰어나가는 형이상학의 비현실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생존이 어려워졌다. 사상가들은 행동 없는 사고가 병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8장 허버트 스펜서

 

그는 자신의 시대를 요약했는데, 단테 이래로 어떤 시대를 요약한 사람은 스펜서 외에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대가다운 솜씨로 방대한 지식 영역을 조정하는 일을 완수했기에 그 성취 앞에서는 비판하기가 부끄러워져서 입을 다물 지경이다. 우리는 지금 그의 노력과 노고가 밀어준 덕분에 높은 곳에 올라와 있다. 우리가 그보다 높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가 우리를 자신의 어께 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1. 콩트와 다윈

 

457 회의주의를 전공으로 삼은 프랑스인들이실증주의운동의 창건자를 배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59 실증주의에는 교조적 지성주의와 비슷한 면이 있는데, 이것은 어쩌면 환멸을 느끼고 고립된 이 철학자의 상황을 반영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콩트, 자살기도.

461 허버트 스펜서는 다윈 시대의 베스푸치였으며, 동시에 콜럼버스와 비슷한 면도 있었다.                                                                                                       

 

2. 스펜서의 발전

                                                                                                

464 스펜서는 어디에서 그의 수많은 주장을 뒷받침할 그 무수한 사실들을 찾아낸 것일까? 대부분 독서보다는 직접적인 관찰로손에 넣었다.” “그의 호기심은 늘 깨어 있었으며, 그는 늘 그때까지는 혼자만 관찰하고 있던 ……주목할 만한 현상을 이야기하여 함께 있는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467 헉슬리의 말에 따르면, 스펜서는 이론이 사실에 살해당하는 것은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스펜서의 정신에는 너무 많은 이론이 있었기에 하루나 이틀에 한 번씩 비극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3. 1원리들

 

1. 알 수 없는 것들

473 생각하는 것은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므로 어떤 생각도 관계 이상은 표현 할 수 없다. …… 지성은 현상에 의해, 현상과 대화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어서 현상 너머의 어떤 것에 사용하려고 하면 터무니없는 상황에 휘말린다.

 

2. 진화

475 만물의 성장과 쇠퇴의 공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화와 사멸의 공식임에 틀림없다. “어떤 것의 전체 역사는 그것이 지각할 수없는 것으로부터 나타나 지각할 수 없는 것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포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79 스펜서에게는 거의 쇼펜하우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인간 노력의 무용성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성공을 거둔 인생을 마감할 무렵, 스펜서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너무 멀리 내다보는 바람에 존재의 작고 유쾌한 색채가 깡그리 눈에 띄지 않고 지나가버리는 철학자의 병을 앓았던 것이다.

 

4. 생물학 : 생명의 진화

 

481 스펜서는 개체의 생명에서 내적 관계가 외적 관계에 적응하는 것을 보듯이 종의 생명에서는 생식 능력이 서식 조건에 주목할 만한 적응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본다.

482 철학자들은 부모가 되기를 기피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반면 여자의 경우 어머니가 되면 보통 지적 활동이 축소된다. 어쩌면 여자의 사춘기가 남자보다 짧은 것도 여자가 더 일찍 재생산에 희생되기 때문일지 모른다.

 

5. 심리학 : 정신의 진화

 

485 이성적인 행동이란 단지 어떤 상황에서 다른 본능적 반응들과 싸워서 살아남은 특정한 본능적 반응들에 불과하다. ‘숙고란 경쟁하는 충동들이 서로 죽이는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밑바닥에서는 이성과 본능, 정신과 생명이 하나다.

 

6. 사회학 : 사회의 진화

 

494 스펜서는 노동자 계급이 통치하는 세계를 떠올리자 역겨움을 느꼈다. 그는 <런던 타임스>라는 고집 센 매체를 통해 그들에 대해 알 수밖에 없었기에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파업은 실패하지 않는 한 쓸모없다고 지적했다. 노동자들 모두가 시시때때로 파업을 벌여 승리를 거두면 임금 인상에 따라 물가도 올라갈 것이고, 상황은 전과 똑같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7. 윤리학 : 도덕의 진화

 

495 스펜서는 자연선택과 생존 투쟁의 검증을 통과할 수 없는 도덕률은 처음부터 아무 의미 없는 것, 입에 발린 말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행위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삶의 목적에 잘 적응했느냐, 잘못 적응했느냐에 따라 선하거나 악하다고 규정해야 한다.

501 생명, 자유, 그리고 평등한 조건 속에서 만인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다. 이런 경제적 권리 외에 정치적 권리들은 중요하지도 않고 비현실적이다. 경제적 삶이 자유롭지 못한 곳에서 통치 형태의 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자유방임적 군주제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보다 훨씬 낫다.

503 사회적 유용성을 윟나 자연선택을 통하여 본능이 된 이타주의적 행동은 모든 본능적 작용과 마찬가지로 강제 없이, 기쁘게 수행될 것이다. 인간 사회의 자연적 진화는 우리를 완벽한 상태에 더 가까이 데려갈 것이다.

 

8. 비판

 

1. 1원리

503 논리적으로 엄격하게 말해 어떤 것을 알 수 없다는 주장에는 이미 그것에 대한 어떤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2. 생물학과 심리학

506 그의 생물학 이론의 주요한 결함은 그가 라마르크에게 의지하는 바람에 역동적인 생명 개념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3. 사회학과 윤리학

508 스펜서는 산업체제의 장점을 과장했다. 스펜서는 개인주의 역시 과장해야 했다.

 

9. 결론

 

510 어떤 사람도 그가 쓴 책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의 정신적 활동의 가장 좋은 결과물과 섞이지만 책에서는 분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

511 그는 대책 없을 정도로 진지했으며, 모든 주제에 관해 솔직히 이야기하여 모든 집단의 비위를 거슬렀다. 노동자들에게 고용주들로부터 피해를 보는 사람이라고 공감을 표명한 뒤, 지위가 역전되면 노동자들이 권력을 휘두를 거라고 덧붙였다. 남자에게 피해를 당한다고 여자에게 공감한 뒤, 여자는 기회가 생기면 남자에게 피해를 준다고 어김없이 덧붙였다. 그는 외롭게 늙어갔다.

512 그의 명성이 쇠퇴한 것은 실증주의에 대한 영국 헤겔 학파의 반동 때문이었다. 지유주의가 소생하면 그는 다시 그의 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국 철학자 자리에 올라갈 것이다. 그는 철학이 사물과 새로 만나게 했으며, 철학에 사실주의를 도입했다. 그 점 때문에 독일 철학은 그 옆에 있으면 허약할 정도로 창백해 보이고 소심할 정도로 추상적으로 보인다.

 

9장 프리드리히 니체

 

나는 그곳에 앉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다. 선과 악을 넘어서서 가끔은 빛을, 또 가끔은 어둠을 즐겼다. 오직 낮, 호수, 정오, 끝없는 시간만 있었다. 나의 친구여, 그때 갑자기 하나가 둘이 되었고, 차라투스트라가 내 옆을 지나갔다.

 

1. 니체의 혈통

 

516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 전투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이 아니라 힘이며, 겸손이 아니라 자부심이며, 이타주의가 아니라 단호한 지성이라는 것, 평등과 민주주의는 선택과 생존이라는 결을 거스른다는 것, 대중이 아니라 천재가 진화의 목표라는 것, ‘정의가 아니라 권력이 모든 차이와 모든 운명의 중재자라는 것,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렇게 보았다.

 

2. 청년 시절

 

518 니체는 열여덟 살에 조상들의 신에 대한 믿음을 잃고 새로운 신을 찾으며 남은 인생을 보냈으며, 초인에서 그것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중에 그런 변화를 쉽게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을 속이는 경향이 있으므로 자서전 작가로서는 신뢰할 만하지 못한 말이다. 사실 그는 단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잃은 사람처럼 냉소적으로 변했다.

 

3. 니체와 바그너

 

522~523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근대의 열광적인 찬양에서 만나는 모습과 달리, 명랑하고 낙관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삶의 아픈 면들을 깊이 알고 있었으며, 또 그 삶이 비극적으로 짧다는 점도 알았다. 미다스가 실레노스에게 인간에게 최선의 운명이 무엇이냐고 묻자, 실레노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루밖에 못 사는 애처로운 종족이여, 우연과 슬픔의 자식들이여, 듣지 않고 내버려두는 편이 나을 텐데 왜 말해달라고 강요하는가? 최선의 운명은 얻을 수 없는 것, 즉 태어나지 않는 것, 무의 상태로 잇는 것이다. 두 번째로 좋은 운명은 일찍 죽는 것이다.”

527~528 “낭만주의, 이상주의적 거짓말, 인간의 양심을 물렁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이 이곳에서 가장 용감한 영혼 가운데 하나를 정복해버렸으며, 나는 그 안에 담김 모든 여성성과 무질서한 광시곡이 혐오스럽고 지겨워달아났다.

바그너

528 니체는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아폴론적이었다. 난폭한 디오니소스적 힘도 아니고, 술과 노래와 사랑의 부드러움도 아니고, 은근하고 섬세하고 세련된 것을 사랑했다. “댁의 오빠는 그 섬세하고 기품 있는 분위기 때문에 아주 불편한 사람이오.” 바그너는 푀르스터-니체 부인에게 말했다.

 

4. 차라투스트라의 노래

 

534 차라투스트라는이제는 누구도 숭배하는 법을 모른다라고 불평하며, 자신이신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경건하다라고 말한다. 그는 믿음을 갈망하며, “옛 신은 죽었는데 새로운 신은 아직 기저귀를 차고 요람에 누워 있는 상황에서 나처럼 커다란 혐오감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536 니체는 자신의 형상대로 신을 창조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불멸로 만들어야 했다. 초인 다음에는 영겁회귀가 온다. 만물은 정확히 그대로 돌아올 것이다. 그것도 무한히 되풀이하여 돌아올 것이다. 심지어 니체도 돌아오고, 이 피와 쇠와 삼베옷과 재(앞의 피와 쇠는 철혈 정책을 듯하고, 뒤의 삼베옷과 재는 기이 뉘우친다는 뜻)의 독일도 돌아올 것이고, 무지에서 《차라투스트라》로 나아갔던 인간 정신의 노고도 돌아올 것이다.

 

5. 영웅 도덕

 

539 이 모든도덕뒤에는 은밀한 권력의지가 있다. 사랑도 소유의 욕망에 불과하다. 연에는 전투이고 짝짓기는 정복이다.

540 권력을 향한 이런 열정과 맞설 때 이성이나 도덕은 무력하다. 그것은 열정의 손에 쥐어진 무기, 그 게임에 놀아나는 봉에 불과하다. “철학 체계란 빛나는 신기루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오랫동안 구하던 진리가 아니라 우리자신의 욕망이 반영된 것이다.

540 강한 사람은 욕망을 이성으로 위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간단하게나는 원한다라고 주장한다.

542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강한 의지, 힘차게 지속되는 열정이다. 열정이 없으면 사람은 행동하지 못하는 유액에 지나지 않는다. 탐욕, 질투, 심지어 증오도 투쟁에서, 선택과 생존에서 불가결한 항목이다. 선에게 악은 유전의 변이와 같으며, 관습의 혁신이나 실험과 같다. 선례나질서를 범죄와 다름없이 침해하지 않으면 발전도 없다. 악이 선하지 않다면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선한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인간은 더 선해지고 더 악해져야 한다.”

 

6. 초인

 

543~544 도덕이 친절이 아니라 힘에 있듯이, 인간 노력의 목표도 만인의 고양이 아니라 더 훌륭하고 강한 개인의 계발이 되어야 한다. “인류가 아니라 초인이 목표다.” 분별력 있는 사람이 절대 떠맡지 말아야 할 일이 인류의 개선이다. 인류는 개선되지 않고,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는다인류는 추상일 뿐이다. 존재하는 것은 개인들이 모인 거대한 개밋둑일 뿐이다. 전체의 양상은 어느 시대에나 일부는 성공하지만 대부분은 실패하는 거대한 실험실과 흡사하다. 모든 실험의 목표는 대중의 행복이 아니라 유형의개선이다. 더 나은 유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사회는 끝나는 것이 낫다. 사회는 개인의 권력과 개성을 고양하는 도구다. 집단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 “모든 개인이 기계를 유지하는 데만 쓸모가 있다면 기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자체가 목적인 기계,”―또는 사회조직《이것은 인간 희극 아닌가?”

 

7. 퇴폐

 

549 “르네상스가 무엇이었는지 누가 이해하고 잇는가? 아니, 누가 이해하려 할까? 그것은 기독교적 가치의 재평가, 모든 수단, 모든 본능, 모든 천재성으로 그 반대의 가치, 즉 고귀한 가치들에게 승리를 안겨주려는 시도였다.”

 

8. 귀족주의

 

552 민주주의는 흐름에 맡긴다는 뜻이다. 그것은 유기체의 각 부분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응집과 상호 의존의 이완을 뜻하고, 자유와 혼돈이 왕좌에 앉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범용을 숭배하고, 수월성을 증오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위대한 인물의 출현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9. 비판

 

562 니체는 자신을 전혀 감추지 않으며, 곧바로 모든 페이지에 일인칭으로 달려든다. 그가 생각보다 본능, 사회보다 개인, ‘아폴론적인 것보다디오니소스적인 것’(즉 고전적 유형보다 낭만적 유형)을 찬양한 것은 그의 출생이나 사망 연도와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그의 시대를 드러낸다. 바그너가 그 시대의 음악에서 그랬듯이, 그는 그 시대의 철학에서 낭만주의 운동의 정점이자 낭만주의 물줄기에서 가장 높이 솟은 파도였다. 그는 바그너가 <비창 소나타>와 교향곡 5, 9번에서 고전적 굴레를 뜯어내려 하던 베토벤의 정열을 해방하고 찬양했듯이, 쇼펜하우어의의지천재를 모든 사회적 제약에서 해방하고 찬양했다. 그는 루소의 혈통을 이은 마지막 위대한 상속자였다.

565 혹시 권력과 운동에 대한 니체의 난폭한 강조는 열에 들뜨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반영한 것일까?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이권력의지는 힌두인의 본질, 중국인의 고요, 중세 농민의 만족스러운 일상을 표현하지 못한다. 권력은 우리 가운데 일부의 우상이며, 우리 대부분은 권력보다는 안정과 평화를 갈망한다.

565 전체적으로 니체는 사회적 본능의 자리와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이기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충동들이 철학으로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565~566 병과 신경과민으로 고독해지고 인간의 나태와 범용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니체는 모든 위대한 덕이 홀로 선 사람의 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쇼펜하우어식으로 개인이 종 안으로 가라앉는 데에 반발하여, 개인이 사회적 통제로부터 불안정한 상태로 해방을 얻는 쪽으로 나아갔다. 사랑을 탐색하다 좌절한 니체는 철학자답지 못한, 그리고 남자에게는 부자연스러운 원한에 사로잡혀 여자를 공격했다. 부모자식 관계를 놓치고 우정을 잃은 니체는 삶의 가장 좋은 순간들이 지배와 전쟁보다는 상호성과 동지애에서 온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그는 설익은 진실을 지혤 성숙시킬 만큼 오래, 또 폭넓게 살지 못했다. 더 오래 살았다면 그의 삐걱거리는 혼돈을 조화로운 철학으로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568 니체, 그는 수백 년 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제도와 의견을 건강하게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그리스 드라마와 철학을 보는 새로운 전망을 열었다는 사실, 바그너의 음악에서 처음부터 낭만적 퇴폐의 씨앗을 보았다는 사실, 외과의사의 메스만큼이나 날카롭고, 또 어쩌면 그만큼 유익할 수도 있는 섬세함으로 인간 본성을 분석했다는 사실, 다른 근대 사상가들은 따라오지 못할 수준에서 도덕의 어떤 감추어진 뿌리를 드러냈다는 사실, “이제까지는 윤리의 영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가치, 즉 귀족주의를 도입했다는 사실, 다윈주의의 윤리적 함의에 관해 솔직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그는 신랄하게 말했지만, 거기에는 귀중한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정화하는 번개와 몰아치는 바람처럼 근대 정신의 구름과 거미줄을 뚫고 지나갔다. 유럽 철학의 공기는 니체의 글 덕분에 맑아지고 신선해졌다.

 

10. 피날레

 

568 "나는 자신을 넘어선 어떤 것을 창조하려다가 죽는 사람을 사랑한다.“

569 “어쩌면 나는 인간이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인 이유를 가장 잘 알지도 모른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웃음을 발명한 것은 너무 괴로워서 달리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10장 현대 유렵 철학자들: 베르그송, 크로체, 버트란트 러셀

 

베르그송은 인간의 가슴에서 영원히 솟아오르는 희망을 방어하러 나섰기 때문에 일찌감치 크나큰 인기를 얻었다. 사람들은 철학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도 불멸과 신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기쁘고 감사했다. 베르그송의 강의실은 자신의 마음속의 욕망이 그런 박식한 웅변으로 뒷받침되는 것을 기뻐한 화려한 숙녀들의 살롱이 되었다.

 

1. 앙리 베르그송

 

1. 유물론에 대한 반발

576~577 유물론이라는 골리앗을 이길 운명을 타고난 다윗, 베르그송이 젊은 시절에는 열렬한 스펜서 지지자였다는 점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너무 많이 알면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젊은 시절 독실했던 사람은 배교자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젊은 시절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늙어서 성자가 된다.

 

2. 정신과 뇌

578 “의식적인 존재에게 존재하는 것은 변하는 것이며, 변하는 것은 성숙하는 것이고, 성숙하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끝없이 계속 창조하는 것이다.”

579 인간은 수동적인 적응 기계가 아니다. 인간은 방향이 바뀐 힘의 초점이며, 창조적 진화의 중심이다. 자유의지는 의식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안다는 뜻이다.

582 '활동사진 카메라가 현실의 생생한 흐름을 정적인 포즈들로 나누듯이, 인간 지성도 일련의 상태는 포착하지만 그것들을 생명으로 엮는 연속성은 놓친다. 물질은 보지만 에너지는 놓치는 것이다.

583 생명은 공간의 문제라기보다는 시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위치가 아니다. 변화다. 생명은 양이기보다는 질이다. 생명은 물질과 운동의 단순한 재분배가 아니라 유동적이고 집요한 창조다.

 

3. 창조적 진화

588~589 생명은 노력하는 것, 위로 밖으로 계속 밀고 나가는 것이다. “언제나 늘 변함없이, 세계의 다산 충동이다.” 생명은 타성의 대립물이며, 우연의 대립물이다. 성장에는 스스로 추진하는 방향이 있다. 이것에 저항하는 것이 물질의 저류, 이완과 휴식과 죽음을 향한 사물의 지체와 늘어짐이다. 생명은 매 단계마다 매체의 타성과 싸워야 한다. 재생산을 통해 죽음을 정복한다 해도 그 대가로 모든 요새를 내어주고, 마침내 모든 개별적인 몸을 타성과 쇠퇴에 내맡길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일어서는 일조차 물질과 그  법칙에 도전하는 것이다. 돌아다니는 것, 가서 찾는 것, 식물처럼 기다리지 않는 것은 매 순간 노력과 피로를 대가로 치르고 사는 승리다. 의식은 허락되기만 하면 곧장 본능, 습관, 잠이라는 편안한 자동성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590~591 신은 쉼없는 생명, 행동, 자유다. 이렇게 생각하면 창조는 신비가 아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할 때, 의식적으로 행동을 선택하고 삶을 계획할 때, 우리 내부에서 창조를 경험한다.

 

4. 비판

592 베르그송을 읽을 때 처음 눈에 띄는 것은 문체다. 니체 같은 역설의 불꽃놀이가 아니라 꾸준한 광채를 뿜어내는 그의 문체는 빛나는 프랑스 산문의 훌륭한 전통을 보여준다. 프랑스어로는 틀리기가 쉽지 않다. 프랑스 사람들은 모호함을 참지 못하며, 진실은 허구보다 분명하기 때문이다. 만일 베르그송이 이따금씩 모호하다면 그것은 그의 심상, 유추, 사례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처럼 비유를 뜨겁게 사랑하며, 이따금 끈질긴 증명을 기발한 비유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

583 베르그송에게서 가장 훌륭한 점은 유물론적 기계론에 대한 공격이다. 실험실에서 일하는 박식한 분들께서는 자신의 범주에 대해 지나치게 자신감을 갖는 바람에 온 우주를 시험관에 집어넣을 생각을 했다. 유물론은 오직 명사만 인정하는 문법과 같다. 그러나 현실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대상만이 아니라 행동도 있고, 명사만이 아니라 동사도 있으며, 물질만이 아니라 생명과 운동도 있다.

 

2. 베네테도 크로체

 

1. 인간

596 베르그송은 자신의 비전을 언뜻 명료해 보이는 언어로 번역해내는 신비주의자다. 반면 크로체는 거의 독일적인 모호함을 재능으로 타고난 회의주의자이다.

598 그는 평생 연구자로 살았고 글과 여가를 사랑했다.

 

2. 정신의 철학

600 크로체는 관념론자였고, 헤겔 철학 이후로는 어떤 철학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현실은 관념이다. 우리는 감각이나 사고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모든 철학은 논리로 환원할 수 있다. 진리는 우리 관념들 속의 완벽한 관계다. 어쩌면 크로체는 이런 결론을 지나치게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논리가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미학에 관한 책에서도 그는 논리학에 관한 장을 끼워넣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

601 그는 종교를 거부한다. 그는 의지의 자유를 믿지만, 영혼의 불멸은 믿지 않는다. 미의 숭배와 교양있는 삶이 그에게는 종교를 대신한다.

 

3.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603 예술은 우리를 특수한 인간과 유일무이한 사실로, 구체적 개별성이라는 형태로 직관된 철학적 보편성으로 곧바로 데려간다.

604 "예술은 오직 상상력의 지배만 받는다. 이미지가 그 유일한 재산이다. 예술은 대상을 분류하지 않고, 현실이나 가공이라고 선언하지 않고, 한정하지 않고, 규정하지 않는다. 예술은 대상을 느끼고 제시한다그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605 아름아움은 내적 이미지가 구현된 외적 형태보다는 내적인 이미지 자체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셰익스피어의 차이가 외적 표현 기술의 차이라고, 우리 생각이 너무 깊이 놓여 있어서 말을 찾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좋아한다. 그러나 이것은 분별없는 망상이다. 차이는 이미지를 외화하는 능력이 아니라 대상을 표현하는 이미지를 내적으로 형상하는 능력에 있다.

 

4. 비판

607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철학자들을 예술가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 흥미롭고, 또 틀림없이 당혹스러울 것이다.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그 질문에 답할 희망을 버렸다. “우리는 왜 어떤 것이 아름다운지 그 이유를 절대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다.”

 

3. 버트란트 러셀

 

1. 논리학자

609 세상에는 두 명의 러셀이 있다. 전쟁 중에 죽은 러셀과 그 수의를 벗고 일어난 또 한사람의 러셀, 즉 수학적 논리학자의 유해에서 태어난 신비주의적 공산주의자 느낌을 주는 러셀이다. 어쩌면 그의 안에는 늘 여리고 신비주의적인 기질이 있었는데, 이 경향이 처음에는 엄청난 대수 공식들로 표현되다가 나중에는 철학이라기보다는 종교의 특징을 띠는 사회주의에서 왜곡된 표현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610 러셀은자명한 진리에 도전하여 뻔한 것을 증명하라고 고집하는 사람들을 보며 즐거움을 느낀다.

611 다시 말하지만 러셀이 수학에 끌리는 것은 그 엄격한 비인격성과 객관성 때문이다.

 

2. 개혁가

614 러셀이 반역 뒤편에는 모든 유혈 대립에 대한 단순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었다. 순수 지성이 되고자 하던 버트란트 러셀은 사실 감정들로 이루어진 사람이었고, 제국의 이해관계가 젊은 생명을 대가로 치를 만큼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당당하게 행진한 뒤 결국 죽이고 죽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홀로코스트의 원인을 색출하는 작업에 착수한 그는 그 병의 원인을 밝혀주는 동시에 유일한 치료법을 암시하는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분석을 사회주의에서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 원인은 사적 소유였으며, 그 치료법은 공산주의였다.

 

3. 에필로그

618~619 영국에서 미국으로, 거기에서 러시아로, 거기에서 다시 인도와 중국으로 옮겨가면서도 사회철학을 변함없이 유지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세상은 자신의 공식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크다고, 또 어쩌면 그의 마음이 바라는 대로 빠르게 움직이기에는 너무 크고 너무 무겁다고 버트란트 러셀을 설득했다. 세상에는 아주 많은 마음이 있고, 서로 다른 욕망이 아주 많이 있으니까! 이제 그는 시간과 다양한 삶으로 완숙해진나이 들고 지혜로워진사람으로 보인다. 여전히 인간이 상속받고 있는 모든 재앙에 늘 눈을 크게 뜨고 있지만, 이제는 성숙ㅎ여 사회 변화의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온건해졌다. 그는 전체적으로 아주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심오한 형이상학과 아주 까다로운 수학을 주무를 수 있으면서도 늘 단순하게 말하여 오직 신실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명료함을 드러낸다. 감정의 샘을 마르게 하는 사고 분야에 중독되어 있으면서도, 동정심으로 따뜻하게 빛나고 인류를 향한 거의 신비한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긍정을 기웃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분명히 학자이고 신사이며,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볻 더 나은 기독교인이다.

 

11장 현대 미국 철학자들: 산타야나, 제임스, 듀이

 

이 영혼은 마치 고대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이교도 학자와 같은 억양으로 말하면서 침착하고 탁월한 안목으로 우리의 작은 체계를 살피고, 아주 차분한 추론과 가장 완벽한 산문으로 우리의 새롭고도 낡은 꿈들을 박살냈다. 플라톤 이후 철학이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된 적은 없었다. 산타야나, 그의 말은 새로운 풍미, 섬세한 질감이 느껴지는 구절로 가득했고, 섬세한 통찰로 향기를 풍겼으며, 풍자적인 위트로 가시가 박혀 있었다.

 

1. 조지 산타야냐

 

1. 전기적 사실

626 플라톤 이후 철학이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된 적은 거의 없었다. 그의 말은 새로운 풍미, 섬세한 질감이 느껴지는 구절로 가득했고, 섬세한 통찰로 향기를 풍겼으며, 풍자적인 위트로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의 시인적 기질은 풍부한 비유로, 그의 예술가적 기질을 끌로 다음은 문단으로 말했다. 기분 좋게도 미국은 아름다움의 유혹과 진리의 부름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2. 회의주의와 동물적 신념

627 그는 《이성의 삶》의 윤곽을 그리기 전에 전문적인 인식론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모든 전문적인 자잘한 장치들을 동원하여 인간 이성의 기원, 타당성, 한계를 기꺼이 토론하려 한다. 그는 전통적인 가정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고의 큰 덫임을 알고 있다. “비판은 관습의 품에 안긴 영혼을 놀라게 한다.”

 

3. 과학의 이성

629 이성의 삶은 솔직히 과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과학은 신뢰할만한 지식을 포함하기때문이다. 산타야나는 이성의 불안정성과 과학의 오류 가능성을 알고 있다. 그는 과학적 방법에 따른 현대적 분석이 세상을 지배하는 불변의법칙이기보다는 우리 경험에서 관찰되는 규칙성을 속기로 묘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631 "자연이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히 시적이다. 그 말은 내가 사는 세계의, 만들어내고 통제하는 기능, 끝없는 환력, 변화무쌍한 질서를 충분히 암시한다.“

 

4. 종교의 이성

635 《구악》에는 시와 은유가 가득하다. 《구약》을 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비유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상상력이 부족하고 곧이곧대로인 유럽 민족들이 이런 시를 과학으로 오해하면서 서양 신학이 태어났다. 기독교는 처음에는 그리스 신학과 유대 도덕의 결합이었다. 그것은 불안정한 결합으로, 그 가운데 어느 한쪽은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다.

637 신화 비판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화가 나서 신화를 미신으로 취급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웃음을 지으며 신화를 시로 취급한다. 종교는 인간의 상상력으로 해석된 인간 경험이다.

637~638 이상 속에서 살고 사회나 예술에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은 이중의 불멸을 누린다. 그는 사는 동안 영원한 것에 몰입했고, 죽으면 그의 영향으로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거기에 몰입하게 된다.

 

5. 사회의 이성

639 가족은 인간 영속화의 길이며, 따라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기본이 되는 제도다. 이 제도는 설사 다른 모든 제도가 무너지더라도 인류를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가족은 문명을 어떤 단순한 높이까지만 이끌고 간다. 그 이상의 발달은 더 크고 더 복잡한 체계를 요구하는데, 여기에서 가족은 생산적 단위가 될 수 없다. 가족은 그 구성원들의 경제적 관계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그 권위와 힘이 점점 국가에 전유되는 모습을 마주한다. 국가는 니체가 말한 대로 괴물, 불필요한 크기의 괴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중앙집권적 압제는 옛날부터 생명을 괴롭히고 제한하고 잡다하고 수많은 압제들을 제거하는 미덕도 있다. 조용히 공물을 받는 하나의 우두머리 해적이 예고도 없이, 정해진 액수도 없이 통행료를 받는 작은 해적 100명보다 낫다.

643 산타야나가 무엇보다도 경멸하는 것은 현대 생활의 혼돈과 품위 없는 성급함이다. 그는 자유가 아니라 지혜가 선이며, 자신의 타고난 한계에 만족하는 옛 귀족주의의 가르침 안에서 사람들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6. 논평

645 사변적 사고의 목표는 다름 아닌 최대한 영원한 것들 속에 살면서 진리 속에서 흡수하고 흡수되는 것이다.

645 지혜는 환멸에서 온다.

 

2. 윌리엄 제임스

 

1. 개인적인 이야기

649 그는 철학은 단지 가장 포괄적인 방식으로 사물에 관해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정의했다.

 

2. 실용주의

650 그의 사상은 늘 사물을 향한다. 그가 심리학에서 출발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천상의 모허한 것들에 빠져들고 싶은 형이상학자로서가 아니라 사고가 아무리 물질과 구별된다 해도 기본적으로 외적이고 물질적인 현실의 거울이라고 보는 실재론자로서다.

651 제임스는 직접적이고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것에 대한 이런 열정을 바탕으로 실용주의로 나아갔다. 명료함을 내세우는 프랑스 학파에서 성장한 제임스는 독일 형이상학의 모호함과 현학적 용어를 혐오했다.

652 진리는 과정이며하나의 관념에서 발생한다.”참은 증명이다. 실용주의는 하나의 관념이 어디에서 왔으며 그 전제가 무엇인지를 묻는 대신 그 결과를 살핀다. 실용주의는강조점을 옮겨서 앞을 본다.” “첫 번째 것들, 원리, 범주, 필수라고 여겨지는 것에서 벗어나 마지막 것들, 열매, 결과, 사실을 바라보는 태도.

 

3. 다원론

654 우리는 우리의 요구가 주장을 좌지우지하는 것이지, 주장이 우리 요구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654 철학을 선택하고 좌지우지하는 이런 기질은 부드러운 마음과 강인한 마음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부드러운 마음에 속하는 기질은 종교적이며, 분명하고 변함없는 교의와 선험적 진리를 손에 넣고 싶어 한다. 이 마음은 자연스럽게 자유의지, 관념론, 일원론, 낙관주의로 흐른다. 강인한 마음에 속하는 기질은 유물론적이고, 반종교적이고, 경험적이고(‘사실에만 집착하고), 감각적이고(모든 인식의 기원을 감각된 것에서만 찾고), 운명론적이고, 다원적이고, 비판적이고, 회의적이다.

658 그는 사회주의에 공감했지만 사회주의가 개인과 천재를 비난하는 것은 싫어했다. 모든 문화적 표현물을인종, 환경, 시간으로 환원하는 텐의 공식은 개인을 배제하는 시각이기에 미흡하다. 오직 개인만이 가치가 있다. 다른 모든 것은 수단이다.

 

3. 존 듀이

 

1. 교육

662

듀이는 교육에서 과학은 늘리고 문학은 줄이라는 스펜서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학도 책으로 배울 것이 아니라 쓸모 있는 작업의 실습을 통해 학생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는교양(liberal)' 교육을 존중하는 마음이 별로 없다. 이 말은 원래자유인‘, 즉 전혀 일하지 않는 사람을 길러낸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2. 도구주의

663

듀이의 특징은 진화론을 감추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몸만이 아니라 정신도 생존을 위한 투쟁을 거치며 저급한 형태에서 진화한 기관이다. 모든 분야에서 그의 출발점은 다윈주의적이다.

 

3. 과학과 정치

669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스스로 세속적이 되어야 한다. 지상에 머물며 삶을 해명해주면서 자립해야 한다.

 

맺음말

672

우리 영혼의 무질서는 이런 발전 속도 탓이다. 우리는 갑작스러운 성장과 사춘기 경험으로 한동안 혼란에 빠지고 균형을 잃은 젊은이들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곧 성숙할 것이다. 우리 정신이 우리 몸을 따라잡고 우리 문화가 우리 소유를 따라잡을 것이다. 어쩌면 세익스피어보다도 위대한 영혼, 플라톤의 정신보다 위대한 정신이 세상에 나올 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부만이 아니라 자유까지 숭배할 때, 우리 또한 우리의 르네상스를 누릴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윌 듀런트의 <철학이야기>는 나에게 남편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남편을 처음 만났던 20대 중반, 나는 경영학 전공의 사회 초년생이었고, 남편은 군 제대 후 복학을 준비하던 학생이었다. 내가 사회 초년생으로 힘들어 할 때마다 남편은 철학 전공을 살려 내 마음을 깨끗이 정화시켜 주었었다. 그 때 내 귀에 쏙 들어온 철학자가 스피노자이다.

 

그 뒤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당시 남친이었던 남편에게 철학이야기 좀 해 달라고 졸라댔었다. 그가 매번 들려주는 철학자이야기와 그 철학자의 철학이야기는 요즘 말로 안구정화저리가라 할 정도로 내 정신을 정화시켜 주었고, 나는 급기야 평생 그의 철학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결혼을 결심했었다.

 

듀런트의 <철학이야기>는 인류역사상 위대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재미있고 알기 쉽게 소개한 책이다. 내가 이십 대 중반 이 책을 만났다면, 이 책을 남편 삼아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철학자들과 결혼하지 않았을까. 현실에서 결혼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삶에서 철학을 만난다는 것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철학 입문서의 고전 <철학이야기>는 철학 사상을 일반 사람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게 구성하여 철학의 대중화를 시도하고 있다. 뛰어난 철학자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며, 그들의 사상을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 뛰어난 철학자들의 사상을 소개하며, 철학자들의 사상을 통해 '삶이란 무엇인가' '도덕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를 통해 인간생활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지혜로운 해설을 제시한다.

 

나는 철학을 사랑하는 남편을 둔 덕분에 나도 철학을 사랑하게 되었다. 밥보다 철학이 좋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듀런트 부부처럼 철학을 주제로 남편과 공저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인들에게 철학은 여전히 어렵다. 나에게도 남편에게도 철학은 여전히 어렵다. 그와 나의 저자로서의 몫은 혹시 듀런트의 <철학이야기>를 더욱 쉽게 쓰는 것, 더욱 한국 사회에 맞게 풀이하는 것이 아닌가 상상해 본다.

 

목차 및 전체적 뼈대

 

1장 플라톤

2장 아리스토텔레스

3장 프랜시스 베이컨

4장 스피노자

5장 볼테르

6장 이마누엘 칸트

7장 쇼펜하우어

8장 허버트 스펜서

9장 프리드리히 니체

10장 현대 유렵 철학자들: 앙리 베르그송 등

11장 현대 미국 철학자들: 조지 산타야나 등

 

러셀의 <서양의 지혜>가 시대순 목차라면 듀런트의 <철학이야기>는 시대적 인물 순의 목차를 따른다. 게다가 소제목도 일목요연하게 잘 달아두었다.

 

감동적이었던 장절

 

39

선이 지성을 의미하고 덕이 지혜를 의미한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이해관계를 명료하게 보고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멀리 내다볼 수 있다면, 자신의 욕망을 비판하고 조정하여 자멸적인 혼돈으로부터 목적성이 있는 창조적 조화로 들어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교육받은 고상한 사람들은 이런 조건에서 도덕을 몸에 익힐 수 있을 것이며, 이 도덕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와는 달리 반복되는 가르침과 외적 통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을 터였다. 혹시 죄란 오류, 불완전한 시야, 어리석음이 아닐까?

 

51

인간의 진정한 덕은 용기와 지성이다.

 

77

정의란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플라톤

 

78

정의는 단순히 힘이 아니라 조화를 이룬 힘이다. 정의는 더 강한 자의 권리가 아니라 전체의 효과적인 조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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