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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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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21일 01시 39분 등록

니체, 천 개의 눈, 천개의 길

고병권 저, 소명출판

2014. 6. 17      


저자에 대하여 


#1. 고병권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 대해서 관심과 호감이 생겼다. 1971년 생이니 또래다. 학부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다소 이색적인 이력의 소유자다. 나는 인문학을 공학의 영역으로 끌어와 그 접점에서 새로운 영역을 만들고 싶다. 저자는 이러한 시도 즉 서로 다른 영역에서 공부하고 이러한 것들을 멋들어지게 버무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책에서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 다각도로 접근하고자 했듯이 저자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현실을 새롭게 사유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현재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의 추장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도 ‘고추장’이다.

그가 주로 활동하고 있는 수유너머는 그의 지적 작업의 구심점이다. 그는 그곳에서 공부하기, 산책하기, 사랑하기를 배우며 자신의 지적 토양을 다졌다고 말한다. 그를 아는 지인들은 그를 항상 웃는 얼굴로 긍정의 힘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웬만한 일로는 화를 내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분노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국가, 권력, 자본 무기력 같은 것에는 아낌없이 분노한다.

저자의 면면을 읽으면서 변경연을 생각했다. 비슷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로서는 비교적 모범적인 모델이 될 법한 사람이다.


#2. 니체 _ 1844. 4 ~1900. 8 / 철학자 / 독일

‘ 나는 그곳에 앉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다. 선과 악을 넘어서서 가끔은 빛을, 도 가끔은 어둠을 즐겼다. 오직 낮, 호수, 정오, 끝없는 시간만 있었다. 나의 친구여, 그때 갑자기 하나가 둘이 되었고 차라투스트라가 내 옆을 지나갔다.’


그는 1844년 프로이센의 뢰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왕의 생일에 태어난 우연을 기뻐하며 그에게 왕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목회자 집안의 후손답게 그의 친구들은 어린 니체에게 ‘작은목사’라고 불렀다. 머지않아 그는 조상들의 신에 대한 믿음을 잃고 새로운 신을 찾으며 남은 생을 보냈으며, 대학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관능적 방탕의 시기를 보냈다. 1865년 무렵 그는 쇼펜하우어에 매료 되었다.  23살에 입대하였으나 입대하자마자 입은 부상으로 제대하게 되었다. 이윽고 스물 다섯 살에 바젤 대학의 고전언어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이렇게 앉아서 하는 일, 영웅과는 거리가 먼 일을 택한 것을 후회했다. 1879년 그는 10여 년간의 교직 생활을 청산하였다. 이 때부터 긴 투병 생활과 함께 니체의 다양한 저작들이 쏟아졌다. <차라트수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선악을 넘어서> 등의 저작은 바로 이 시기의 주요한 작품들이다. 

그는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불규칙하게 살았다. 스위스, 베네치아, 제노바, 니스, 토리노를 전전하던 가운데  1889년 1월 토리노에서 졸중풍이라는 병을 얻었다. 그의 강렬한 생각은 틀림없이 그를 지나치게 빨리 소모하게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정신병원으로 보냈으나 곧 그의 늙은 어머니가 찾아와 그를 용서하고 돌보았다. 1897년 그의 어머니마저 죽자 누이는 니체를 바이마르에 데려갔다. 이제 그에게는 제 정신일 때는 누리지 못했던 평화와 고요가 찾아왔다. 자연은 그를 미치광이로 만들어 그에게 안락의 세계를 열어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위대한 천재는 1900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책머리에


3p.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 개의 주름을 본다. 철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제 시대의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 하기 위해 단순화의 폭력을 행사할 때도 그는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이질적인 파편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찾아낸 미세한 조각들을 찾아 넣고 보면 사건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4p.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 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 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5p. 

니체는 자신의 사상이 시대와 맞지 않는 때 아닌 것이며 미래 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자신의 철학을 미래의 철학이라고 간주할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오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 있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지만 감각 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은 시간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잘못 간주 되어진다. 왜냐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 변화의 기본적인 모습일 것이다.

->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서장 -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천 개의 길.

18p.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천 개의 기원

천 겹의 주름 속에 숨겨진 사건들이 햇빛 속에 놓이게 될 때 신성한 것들의 거짓이 떨어져 나가리라.


천 개의 주사위

벌써부터 평균을 구하지 말라.


천 개의 가면

무릇 심오한 인간들은 가면을 좋아한다. 가면 뒤의 얼굴? 가면 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1부

제1장 아모르 파타 : 삶을 사랑하는 철학


27p. 

철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포괄하는 질서를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모험가들은 어떤 곳을 뒤지지만 철학자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모험가들에게 모든 곳에 있는 것은 무가치 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떤 곳에만 있는 것이 무가치하다. 만약 모험가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특정한 곳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개개의 요소들에 전체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왜 그들은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잘못된 사상 만큼 건강에 해로운 것도 없다.

-> 잘못된 종교나 사상 만큼 나쁜 것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지식도 마찬가지다. 


31p.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34p. 난쟁이의 왜소증은 중력에 대한 굴복의 결과다.


37p.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삶때문이 아니다. 고통은 오히려 삶으로부터의 이탈, 즉 죽음 때문에 오는 것이다...고통은 그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 필멸의 인간이 숙명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고통과 공포의 근원은 필멸이다.


39p. 디오니소스의 찢겨짐은 세계의 분화와 개별화된 사물들의 탄생을 의미하고 그가 겪는 고통은 개별화된 사물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상징한다.


40p. 일상의 한계와 구속을 넘어서는 혼수상태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면 과도함으로 막고 절제를 요구한 것이 아폴론적인 것이다.


52p. 

우리는 미친 것과 아픈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광인으로 불리는 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정신은 일반적인 구속성과 대결한다. 그러한 구속을 참고 견딜 수 없는 정신이야말로 광기의 즐거움이 생겨나는 장소, 탈주자의 장소다.

-> 불광불급,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일탈은 세상을 한발짝 진보시킨다. 기존질서와 기존의 문명에 질문을 던지는 겻, 변화의 시작이다.


53p.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 오해 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 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 그래서 미래는 현재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다. 미래를 이야기 하는 사람은 항상 빠르다. 고려시대 만적은 시간의 문제였지 건강상의 문제로 미친 놈은 아니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어느 시대건 미래는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선구자(선배)들이 열어놓은 미래는 다음 세대가 받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오늘 먼저 사는 사람들은 미래를 반드시 열어 놓아야 한다. 결국 우리 모두는 모두 미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56p.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57p.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시체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짐승의 무리나 신도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에 새로운 가치를 써넣을,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


58p. 삶을 사랑한다는 것, 운명애(amor fati)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제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62p. 이익을 다투는 어떤 전쟁도 가치들의 전쟁에 비한다면 사소한 것이 되고 만다.


63p. 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힜으며, 그 대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_ 니체


69p. 

화폐의 위조란 가치를 조작하는 행위다.


우리 안에 있는 자연, 즉 본성(nature)에 대해서도 본래적인 선과 악을 논한다.


77p. 선한 자들은 모두 약하다. 악인이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선한 자들인 것이다.


79p. 약자들은 “적의 상태를 살핌으로써 인위적으로 자신들의 행복을 꾸미거나, 혹은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거나 기만할 필요”가 있었다.


85p. 성직자들은 환자들이 병에서 회복되는 것을 막는 것, 다시 말해서 성직자라는 의사들은 의사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혀서 자신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 시킨다.


90p.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 내가 좀더 강했더라면 나쁜 음식이 아니었을지라고 그것은 나쁜 음식이다. 나에게만 나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나는 니체의 이 견해에 반대한다.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많은 도덕적 함의들이 저지르고 있다고는 하나 또한 단 하나의 원리로 세상이 돌 수 없다고 하나 진리는 하나다. 아쁜사람은 치료해 주고, 넘어진 사람은 일으켜 줘야 하며,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줘야 한다. 그것이 보편타당하다. 


선악을 넘어선 영역에서도 여전히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존재한다.


나의 철학은 위계를 향하고 있다.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니다.



제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93p. 이 이중의 해석은 참뜻을 알고 싶어하는 해석학자들에게 부여된 가장 가혹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94p. 어떤 그럴듯한 변명을 갖다 붙인다고 해도 재산이란 결국 도둑질의 결과 _ 프루동


95p. 자신과 거리를 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보다 차이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단적으로 말해 다른 해석학과 니체의 구분선은 제우스의 의중에 있기보다는 헤르메스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104p. 사실은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해석뿐이라고.


105p. 우리가 의식하는 모든 것은 철두철미하게 조정되고 단순화되고 도식화되고 해석되어 있다.


108p. 니체는 논리학을 참된 것을 인식하라는 명법이 아니라 우리가 참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세계를 정립하고 조정하라는 명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 인간이 발견한 모든 진리는 결국 인간의 관점에서 주관적으로 정해진 것에 관한 강요란 것이다. 


109p. 우리가 해석을 진리를 이해하는 문제로 두는 한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석이 진리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 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개의 작은 길이 있다.”

-> 진리도 결국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이 바탕위에서 진리는 수 만 가지 갈래의 해방구가 열리게 된다. 관점의 문제인 것이다. 어떤 눈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어떤 길이 열리느냐가 결정된다. 그래서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이었던 모양이다.


110p. 모든 해석이 생장의 징후이거나 몰락의 징후이다. 통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타성의 욕구이며, 다수성이야말로 힘의 징후이다. 세계의 불안정하고 혼미한 성격을 부인하고 싶어해서는 안된다.

-> 다양성은 다양성을 인정함으로 잉태된다. 세상을 하나의 원칙과 기준에 갖다 붙히려고 하는 것은 오만이고 만용이다. 


113p. 니체에게 해석은 지배적 가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다. 그것은 인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자유정신이기도 하다.


114p.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119p. 공공영역에서 차이들이 생성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치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던 그리스인들의 태도는 아직도 우리에게 이해되고 있지 않다. 다양성이 건강을 증명한다는 자연의 생태주의적 가르침도 우리에게는 이해되고 있지 않다.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제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127p.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는 잔인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개입한다.


128p. 니체는 국가라는 잔인한 도구가 전쟁에서 왔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로 안전을 위해 인위적인 계약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 계약은 다시 국가에 의해 보증된다. 이것이 자연상테에서 사회상태로의 이동이며, 정의와 법의 탄생이다.


139p. 다이어트 diet

우리는 다이어트를 체중감량을 위한 식이요법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나, 원래 이 말은 그리스어 ‘diaita’에서 온 것으로 그 의미는 ‘삶의 총제척인 양식 tatal mode of life’이었다. 그리스 의학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는 크게 네 가지의 체액의 균형체제인데, 다이어트는 이것들의 균형을 맞추라는 의학적 처방이었다. 네 가지 체액은 각각 운동, 섹스, 수면, 사회적 관계에 관여하는 것.


141p. 비윤리적이라고 비난받는 것들은 개인적인 것, 자유로운 것, 제멋 대로인 것, 길들여지지 않은 것, 예측되지 않는 것, 계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제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159p. 힘의 속성

그 자체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 힘의 차이와 거리를 통해서만 존재

표현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점.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정지되어 있는 양이 아니라는 것. 멈추어 있는 힘은 없다. 변화는 힘의 앞지를 수 없는 본질.


179p. 권력의지는 새로운 힘들과 마주칠 때마다 항상 촉수를 내민다. 그것을 느끼고 평가하는 것, 육체는 감각과 평가를 통해 권력의지를 경험한다. 사회든 개인이든 나쁜 권력의지는 이러한 감각 능력과 관계되어 있다. 강자들이 창피하고 비참하게 여기는 것을 약자들은 선하고 좋은 것으로 느낀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감각방식인 것이다.


제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192p. 이제 존재하는 것에 대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은 것, 의욕하지 않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전적으로 긍정의 의지 편에서 서서 부정의 의지와 대결한다.


196p.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 그것은 죽음까지도 살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 번!’ 이렇게 외치기 때문이다.


198p. 생성이 반복될수록 양산되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201p. 끔찍한 고통조차 긍정될 수 있는가? 그러나 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 그랬다. 이렇게 느껴야 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권력의지가 느낌방식이라는 것은 받아들이는 자세, 태도 또는 관점과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202p. 긍정에 대한 두가지 오해

긍정을 고통을 인내하는 정신으로 착각하는 낙타의 긍정을 들 수 있다. 낙타는 아니오를 모르기 때문에 예라고만 답한다. 주인이 어떤 짐을 싣더라도 낙타는 예라고 답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은 사막이 되고 만다.

두려움 때문에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과 혼동했던 보다 높은 인가 자신들의 경우다. 보다 높은 인간은 모든 가치의 파괴가 일어나는 지점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가치 판단에서 나타날 수 있는 위험을 피하고자 한다. 최후의 인간도 새로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스스로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새로운 자기를 만들려는 자는 기존의 자기를 버려야 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204p. 부정은 긍정에 대립되지만 긍정은 부정과는 다르다. 우리는 긍정을 부정에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긍정 그 자체 내에 부정을 위치시키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부정은 긍정을 부정하지만 긍정은 부정을 긍정하므로, 부정에는 긍정이 포함되지 않고 긍정에는 부정이 포함된다. 긍정은 부정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니체는 긍정의 질을 획득하지 못한 채 부정하고 파괴하는 자들을 “창백한 범죄자”로 불렀다. 창백한 범죄자의 파괴는 생성이 없는 무로의 되돌아 감이다.


망치가 파괴의 도구인지 창조의 도구인지는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 결정된다. 하나의 긍정은 자신을 긍정해 줄 다음의 긍정을 기다린다.


206p. 하늘에 던진 주사위를 가로막을 이성의 거미줄은 없다. 주사위 던지기는 하나의 춤추기이며 놀이이다. 하늘은 주사위 놀이를 위한 신들의 도박대이다. 


209p.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제7장 인간


212p.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측량하면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이 발견하고 싶었던 것을 발견할 뿐이다.

내가 포유동물을 정의하고, 낙타 한 마리를 보고 난 뒤 ‘봐라 포유동물이다’고 마한다면 이는 매우 제한된 가치만이 있는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본 진리일 뿐이다. 그것은 진리 자체와는 상관없으며, 세계를 인간과 같은 종류의 사물로 이해하려고 하는 기껏해야 동화의 감정을 챙취하는 것일 뿐이다. 


215p. 사실 인간은 자연을 잘못 이해하므로 자기 자신도 잘못 이해한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하지만 모든 것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 해도 남아 있는 게 하나 있다. 니체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과’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났기 때문이다.


231p.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232p. 그들은 초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잇는 세가지, 즉 놀이와 웃음과 춤을 몰랐다. (......) 그들은 아이들의 놀이를 모른다. (......) 어린아이의 놀이는 즐거움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놀이의 반복을 가져온다. 놀이는 다음의 놀이를 게속해서 부른다.

-> 즐겁지 않으면 내것이 아니다. 즐겁지 아니면 계속할 수 없다. 즐겁지 않으면 잘 할 수 없고 즐겁지 않으면 그것은 불안과 공포다.


그들은 웃는 법을 모른다. 웃음은 초인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중력의 영과 신을 확실히 죽이는 무기이며 금욕주의 이상의 단 하나의 적이고 뱀의 목을 물어뜯은 목동이 초인으로 변신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구토가 인간에게 속하는 질병이라면 웃음은 초인의 건강을 의미한다. 


그들은 춤추는 법도 모른다. (......)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초인을 의욕하는 자인 차라투스트라가 디오니소스를 만나면서 변신을 경험한다. 그는 불평하는 곰에서 춤추는 곰으로 바뀐다. 그의 춤은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옮겨가고 웃음은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주고 주사위 놀이는 낮음에서 높음으로 변이된다.


234p. 긍정의 권력의지만이 여원회귀한다. 영원회귀하는 긍정의 권력의지는 변화된 신체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초인은 신체의 변신이며 새로운 느낌 방식이다. 신체가 즐거움을 경험하면 “한 번 더”라고 말한다. 신체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그것이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다.


제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239p.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247p. 긍정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자 부정 역시 새롭게 이해되었다. 니체의 보복은 선사하는 것이다. “나는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안 듣기 위해서 과자 한 상자를 보내는 것이다. 나에게 나쁜 짓을 한 번 더 해보라. 그러면 나는 그렇게 보복할 것이다.”


250p.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253p.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2부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258p. 어떤 점에서 근대는 제 발로 설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제 발로 서야 하는 시대다. 절대적 가치가 붕괴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 항상 새것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근대일 수도 잇다는 이야기다.


259p. 베베는 근대인들이 주술로부터 벗어나 과학의 시대로 이행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탈주술화야말로 무덤에서 나온 또 다른 신의 주술이라는 것을 포착했던 것이다.


260p. 베버는 자본주의를 자본이나 기술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인간의 탄생과 관련시켜 이해했다.


261p. 서양의 수도원에서는 도를 닦는 데 방해가 되는 충동이나 잡념을 억제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시간표가 이용되었다. 하루 동안 할 일을 시간 순서에 맞추어 적어 놓고 모든 행동을 그것에 맞춘다면 잡념이 들어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 동양적 사고나 행동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런 수련방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네 생활이란게 어쨌든 분단위, 시간단위로 쪼개서 나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시간표에 얽매여 있었던 것이다. 이제보니 이것은 서양의 방법이었던 모양이다. 난 시간표 따위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268p. 처음엔 시간표든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271p. 그는 이른바 과학적 경영이라고 불리는 것이 수도원과 군대의 합리적 훈육이 발전된 형태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272p. 훈육

그는 훈육이 일어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를 들고 있다. ... 하지만 이 과정은 항상 가혹한 폭력을 수반한다.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가 분리되고 그들의 신체에 잔인한 기억이 심어지면 훈육의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된다. 잔인한 기억술로 심어진 행동방식이 반복되어 습속의 도덕으로 자리하면 이른바 능동적 자제라는 게 생겨난다. 처음엔 공포로 시작된 자기 검열이 이제는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검열로 대체된다.

-> 순치된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훈육이란 말은 완곡하다. 눈치보다가 이것이 천성이 되어 버린다. 현대인들 특히 시시포스의 짐을 진자들의 보이는 대표적인 특질이라고 생각된다. 오늘 날 언론의 행태를 보면 이것은 실증된다 할 것이다. 


274p. 원래 일기는 교회 지도자들이 여신도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하루 동안 행한 일들을 적어오게 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하루의 일들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약속을 하는 수단이 되었다.


280p. 베버는 근대 정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책임 윤리를 갖춘 정치인, 그리고 도구적 합리성에 종속되지 않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자의 출현이 낳은 것은 수동적 대중들뿐이었다.


287p. 확실히 근대인들은 절대신의 무덤 속에서 절대신을 장사지냈는지는 모르겟지만 신앙까지 장사를 지낸 것은 아니었다.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289p. 그러나 우파들에게 68혁명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하나의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 대학개혁, 가부장적 권위주의, 권위적 민족주의, 성에 대한 억압, 여성문제, 환경 문제, 권위적인 노동조합 등 이때까지 볼 수 없었던 문제에 대한 혁명.


296p. 평화를 추구하고 따르라. ->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네가 너를 위해 바라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도 요구하지 말라.


304p. 서로 갈등하고 심지어 불가공약적인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교리에 의해 파편화되어 있는 자유로운 시민들이 어떻게 안정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가?

-> 그것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교리들을 회피하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나는 이 책을 읽고 아직 니체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느낌은 남았다. 알겠는데 말하지 못하는 단계, 아직은 그런 단계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니체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미래에 살았고 언제나 미래에 있었다. 때문에 언제나 그는 편입되지 못한 주변인이었고 경계인이었다. 미래는 언제나 오지 않은 내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꺼이 미래인을 자처했다. 현실의 배척과 고독과 외로움은 마치 자신의 몫인 냥 온전히 수용하였다. 


철학을 읽고 있는 지금 다시 읽고 싶고 읽어야 할 책들이 자꾸 쌓여만 간다. 이 책 역시 다시 읽어야 할 책이다. 권력의지와 영원회귀에 대해서 다시 곱씹어 보아야 겠다. 그리고 삶에서 체득하거나 실증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적어도 적당한 나만의 예를 찾아내던가 해야 할 것이다. 인용하거나 강의에 써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하려면 적어도 녹여내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아는 것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알겠는데 말하지는 못하겠다.’ 이 정도가 내가 인식한 정도의 전부다.


거듭 말하지만 이 책은 반드시 다시 읽고 챙겨서 다시 정리하여야 할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현실적인 여러가지 모순이나 고민들 그리고 이슈들을 관통할 수 있는 합리적 성철을 가능하게 하고 통찰과 직관의 살을 찌울 수 있는 몇 가지 모티프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면 먼저 읽었던 철학관련 책들에서 연결되는 부분들을 발췌하여 인용해 두면 더 좋을 것이다.


아울러 이 책에서 얻은 여러가지 철학적 통찰들을 변화와 혁신의 키워드로 인용하여 정리할 대목이 다수 보인다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고 고무적이다. 별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니체나 베버 보다는 저자 고병권을 더 올렸다. 그는 그가 하고 싶은 몇 가지 주제에 대하여 니체와 베버의 입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였다. 나는 이런 어법이 좋다. 


[책의 구성]


이 책은 크게 니체와 베버로 나누어진다. 1부는 니체의 입을 빌었고 2부는 베버의 입을 빌었다. 전반적으로 함께 사는 문제, 즉 정치, 사회, 경제(아주 조금)적인 문제들을 아우르고 있는데 일부 인간의 문제도 다루고 있다. 삭뚝 잘라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으리라 여겨지지만 ‘인간의 문제’ 즉 삶의 문제로 깊숙이 침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치, 사회, 경제적인 문제들이 인간의 깊숙하고 민감한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다. 인간의 내면 또는 개인의 문제로 철학적 사유의 끈을 이어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책머리에

서장 -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1부

제1장 아모르 파타 : 삶을 사랑하는 철학 :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제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 니체의 계보학

제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제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제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 자연학 +윤리학

제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 자연학 +윤리학

제7장 인간 :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제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2부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감동적이었던 장과 절]


천 개의 길.

18p.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53p.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 오해 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 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 그래서 미래는 현재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다. 미래를 이야기 하는 사람은 항상 빠르다. 고려시대 만적은 시간의 문제였지 건강상의 문제로 미친 놈은 아니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어느 시대건 미래는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선구자(선배)들이 열어놓은 미래는 다음 세대가 받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오늘 먼저 사는 사람들은 미래를 반드시 열어 놓아야 한다. 결국 우리 모두는 모두 미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109p. 우리가 해석을 진리를 이해하는 문제로 두는 한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석이 진리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 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개의 작은 길이 있다.”

-> 진리도 결국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이 바탕위에서 진리는 수 만 가지 갈래의 해방구가 열리게 된다. 관점의 문제인 것이다. 어떤 눈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어떤 길이 열리느냐가 결정된다. 그래서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이었던 모양이다.


204p. 부정은 긍정에 대립되지만 긍정은 부정과는 다르다. 우리는 긍정을 부정에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긍정 그 자체 내에 부정을 위치시키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부정은 긍정을 부정하지만 긍정은 부정을 긍정하므로, 부정에는 긍정이 포함되지 않고 긍정에는 부정이 포함된다. 긍정은 부정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보완점 또는]


논문스런 구성과 문체로 읽히는 장들이 다수 있다. 이런 단락은 읽기에 다소 뻑뻑하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인간들을 포괄해서 다루기엔 전개의 영역이 협소하다.

때문에 널어 놓았으나 얇다. 맛뵈기 시식코너 같다고나 할까.

반면 이런 저런 내용들이 개관 되었다는 측면에선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

더불어 사람사는 세상의 편린이나 단상들을 늘어 놓은 것이라고 설명해도 나쁘진 않을 듯 하다.

이 문제를 지적하는 이유는 이 책이 니체의 이름을 빌어 쓰고 있으나 저자는 니체와 베버의 사상을 이 책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 두 양반의 입을 빌어 하고 있다는데 있다. 

아울러 ‘정치’라는 대신 다른 단어를 선택할 수 없었는지 생각해 봐야 겠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라는 단어는 호감도가 그리 높은 단어는 아닌 것 같다. 깊은 사유의 대상도 아니다. 가쉽이고 감각적이며 술수적인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주제로 하나의 이야기로 펼쳐질 수 있다면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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