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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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오늘 어머니가 다녀가셨어.
"권서방! 며칠전에 다녀가면서 강이 엄마랑 싸웠단다."
며칠 전, 집사람도 이 이야기를 어머니께 듣고 내게 전해 주었다네.
고맙고 기쁜일일세.
든든하였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네.
“내가 가족들에게 제대로 이야길 하지 못했었구나.”
“가족들에게도 설명하지 못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나 보다.”
내 발로 회사를 나온 지 이번달이 지나면 꼬박 2년이 된다네.
누가 봐도 좀 희안하고 갑갑해 보일 법 하다는 것을 알고 있네.
걱정도 되고 염려도 될 테지.
나도 이런 점이 어렵고 버겁다네.
가족들이 걱정할 것을 알기 때문이지.
사실 나도 내가 좀 걱정스럽긴 해.^^
그런데 이런 걱정이 자네가 회사에서 동분서주 종종걸음 하는 만큼 더 할 것도 덜 할 것도 없을 만큼이지 않을까 싶어.
다만, 아직 안정적인 수입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저어 될 것이기에 부모님이나 자네를 포함한 가족들이 염려하는 바 깊이 느끼면서 상기하고 있다네.
대부분의 불안은 불안을 위한 불안인 경우가 많고
걱정 역시 걱정을 위한 걱정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한번 써 보기로 했어.
#1 요즘 밥은 먹고 사나?
안정적이진 않지만 간간히 특강이나 지도 그리고 심사가 있고 학교 강의가 있으니 수입이 끊기진 않았네.
물론 수입이 정기적이지도 않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직 여기저기 기웃 거릴 정도는 아니라네..
년 초에 몇 명이서 컨설팅회사를 차렸네.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고 있으니 그럭저럭 돌아는 가리라 생각하네.
그 동안 컨설팅 제안이 몇 건 있었네만 오락 가락 하기만 하고 아직 성과로는 연결이 되지는 않았다네.
새 삼 뭔가를 엮어 낸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바닥에서 이제 막 시작하는 것이니 당연히 거치고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하네.
더불어 자네를 포함하여 가족들에겐 반갑지 않은 말일 테지만 수입 문제는 앞으로 삶 동안 안정적일 수는 없을 듯 해.
왜냐면 특별한 기회가 아니라면 다시는 월급 생활을 할 생각이 없으니 말일세.
특별한 기회라는 건, 학교에 자리가 난다거나, 자유롭게 일할 기회가 생길 때를 말하는 거라네.
그렇다고 무리(?)를 해서 자리를 만들거나 할 생각은 없다네. 이런 건 내 체질이 아닌 것 같아.
물론 이런 재주도 없고...
#2 뭐하고 살거야?
지난 이년 동안 한 만큼 그렇게 그 동안 살았더라면 정말 뭐가 되어도 되었을 법 해.
난 지금 열심히 읽고 생각하고 쓰고 있다네.
내가 어떻게 살 것이며, 뭘 하며 살 것인지 내가 나로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탐구라고 하면 어떨지 모르겠구만.
그렇다고 황당하게 코끼리 다리나 만지고 살 생각은 아니니 걱정 마시게나.
먹고살 궁리도 움직임도 하고 있으니 말일세.
다만 겨우 마련한 삶의 변곡점에서 다시 그때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라고 이해해주면 좋겠네.
이번이야말로 뜻대로 원하는 대로 삶을 열어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아니겠는가!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지만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평소에도 조금은 남보다는 감정선이 예민한 편이지만 마흔이 넘어서면서 깊은 잠을 들 수 없는 날이 많았네.
근거도 없는 불안이 엄습해 왔으며 이유 없이 심장이 벌렁거리고 답답했었어.
잠든 것도 아니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흐릿한 밤들이 이어졌었지.
이렇게 헤매다 보면 어느새 푸른 새벽이 열리곤 했는데 이런 날은 몸도 마음도 쳐져서 자신 없는 하루가 되곤 했다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불안 덩어리가 신경을 건드렸고 예민하게 만들었던 모양이야.
내게 마흔은 이렇게 찾아왔었네.
이런 증상은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자네나 나나 그리고 모든 중년의 사내들이 겪게 되는 오춘기쯤 되려나.
어떤 이는 이 아픔을 이기기 위해서 산으로 들로 쏘다니거나 또 어떤 이는 삼삼오오 먹고 마시거나 그리고 또 다른 어떤 이는 일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네.
나는 책속으로 들어왔지.
불면의 밤이 이어질 수록 켜켜이 쌓였던 불안과 불만과 여러가지 질문들이 내 안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왔네.
그러나 그것은 목구멍을 넘어오지 못하고 걸려서 삼키지도 뱉을 수도 없는 것이었어.
전전긍긍 할 수밖에 없었네.
역설인 것은 이런 가운데 너무도 분명해 지는 것이 있었네.
이 때 나는 직장을 내 발로 걸어 나오게 된 것이지.
지금 나는 이 불면의 밤 동안 수련에 가까울 만큼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한다네.
이제 불면은 내가 나를 느끼고 불안과 고독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좋은 벗이 되었지.
그리고 불면의 밤이 끝났을 때 책을 쓸 것이네.
첫 책은 내년이 지나야 할 것이고, 계획대로 내가 움직여 진다면 매년 한권의 책을 쓸 작정이야.
읽고 생각하고 생각한 대로 살며 산대로 써서 그것으로 먹고 살 생각이야.
아~ 물론 지금 하고 있는 강연과 강의, 그리고 컨설팅을 병행 하면서 조금씩 발전시킬 것이네.
그러면 겨우 먹고 살 수는 있을 테지.
아직 경제적 안정과 명성에 닿지는 않았지만(그렇게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비로소 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네.
먹고 사는 문제도 이 가운데 서서히 나아질 것이라 믿네.
단 하나 맘 쓰이는 것은 여전히 아버지와 어머니라네.
당신들의 바램대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낼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당신들의 고단함을 조금 덜어줄 수 있었더라면 좋을 텐테...
아직은 여력이 미치지 못하니 늘 마음이 무겁고 아프다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가 아들 노릇을 해 주니 면목이 없기도 하고 고맙고 든든해.
이런 맘은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네.
지금, 회사 다닐 때 보다 백배쯤은 더 힘든 것 같지만 살아있는 느낌이 있다네.
걱정과 고민들이 회사 다닐 때 하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어서 참 다행이야.
걱정하고 염려해줘서 고마워.
06. 20
아직 두꺼운 새벽에 대구에서.
사족: 지난 밤 답장을 받았다. 그는 이제 내가 조금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나는 또 그의 편지를 보고 왈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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