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녕이~
  • 조회 수 2504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4년 6월 23일 01시 10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1) 고병권

고병권은 1971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였다. 저자는 특이하게도 서울대 화학과 졸업 후, 대학원은 사회학과로 진학하여 박사까지 수료하였다. 석사학위는 니체 사상의 정치 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 박사학위는 서유럽에서 근대적 화폐구성체의 성립에 관한 연구로 받았다. 자연과학을 공부하다가 어떻게 사회학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고 철학공부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가 못내 궁금하다. 그는 정식으로 철학을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그저 삶과 연관된 책을 읽어왔고 본인의 힘으로 소화하여 책들을 펴냈다. 그리고 이제는 철학자 고병권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추방과 탈주' 등을 썼고, 함께 쓴 책으로는 '코뮨주의 선언', '리영희 프리즘'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가 있다. 최근에는 철학자와 하녀를 펴내기도 했다.

 

그는 현재 거리의 철학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실제 다양한 장소에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늘 현장에서 철학의 눈으로 우리 사회와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사람들의 삶은 어떠한지 공부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장애인, 해고노동자, 밀양송전탑 현장 활동가 등과 만나고 대화하고 사유한 결과물로살아가겠다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으며, 최근 펴낸 철학자와 하녀에서도 철학은 관념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대, 이곳과 끊임없이 맞닥뜨려야 한다는 신념을 펼친다. 수유너머의 초창기 멤버로서 이제는 수유너머 R에서 여전히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고 책을 쓰는 그의 행보가 앞으로도 기대 된다. .

 

2)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는 1844년 독일 레켄에서 태어났다. 니체의 할아버지는 카톨릭교의 주교에 해당하는 루터 교회의 감독관이었으며, 아버지 칼 루드비히 니체는 작은 마을의 목사였다. 어머니 프란치스카 윌러는 루터 교회 목사의 딸이었다. 이에 그의 집안은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앙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어린 나이인5세 때 사별하게 된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그 다음 해 막내 동생도 잃게 된다. 그렇게 그는 할머니댁에서 어머니와 누이동생들과 자라나게 된다.

 

니체는 1864년 본(Bonn)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 문헌학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한 학기를 보내면서 신학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어머니와 갈등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기독교와 결별하고 예배도 참석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는 본대학에서 만난 저명한 문헌학자인 리츨(F. W. Ritschl)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학교를 옮긴다. 1865 8 17일에 본을 떠난 니체는 라이프치히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어느 길로 갈 지 몰라 방황한다. 리츨 교수를 따라 문헌학자의 꿈을 키우기도 했었지만, 결국 20대의 니체가 진정한 스승을 발견한 것은 어느 헌책방에서였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읽고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고 그의 사상에 대해 공부한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랑게의 저서를 읽고 영향을 받게 된다. 1866년의 여름 기간 동안 니체는 랑게의 <유물론의 역사와 그 현재적 의미>를 탐독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랑게를 읽어보라고 권유하곤 했다. 그 이후로 니체는 작곡가 바그너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된다. 1868년의 10 28,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전주곡을 듣고, 또 그를 실제 만나 교류하며 그와 소울메이트 관계가 된 것이다. 하지만 수년간의 시간이 흐른 후 결국 바그너가 점점 기독교화되고, 국수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빠지자 그와 결별했다. 단순한 천재일 것만 같은 니체가 이렇게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취할 것은 취하되 본인만의 사상을 쌓아간 행보가 흥미롭게 느껴진다. 

 

1869년 스물네 살의 니체는 바젤 대학의 고전어와 고전문학의 촉탁교수로 위촉된다. 리츨의 강력한 천거 덕분이기도 했고, 미망인이었던 어머니의 생활을 돕기 위해서라도 니체가 이 자리를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1870년에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지원, 위생병으로 종군했다가 건강을 해치고 바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이후 그는 평생 편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하였다.

 

1872년에는 처녀작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odie(1872)을 간행하였다. 1873~1876년에 에는 《반시대적 고찰 Unzeitgemasse Betrachtungen》을, 1876년에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을 선보였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우상이던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철학에서 이탈하여 그만의 생각을 개진하기 시작한다.

 

심리적인 것도 있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교직 생활을 하기 힘들어진 니체는 1879, 그의 나이 35세에 적은 교수 자리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이때부터 긴 투병 생활과 함께 니체의 다양한 저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도덕에 객관적인 기초가 있다는 생각을 비판한 <아침놀>(1880), 처음으로 신의 죽음을 선언한 <즐거운 학문>(188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5), 니체의 철학적 윤곽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선악을 넘어서>(1886)가 이 시기의 주요한 작품이다.

 

그 이후 그는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건강을 챙겼고, 생의 마지막 10년은 정신병원에서 보낸다.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간병을 받으며 결국 1900년 바이마르에서 그의 아버지 옆에 묻히며 생을 마감하게 된다. 위대한 사상을 남긴 철학자의 마지막으로서는 다소 씁쓸해지는 모습이다. 왠지 니체를 떠올리면 애틋해지는 느낌이 있다. 아마 병약한 몸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했고, 또 그를 인정해주기에는 뒤떨어져있었던 시대로 인해 광인일 수 밖에 없었던 점이 안타깝게 여겨지기 때문인 것 같다.

니체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책은 일종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사람을 보라>였다. 그는 자신의 생이 좀 더 가벼워지기를 갈망하면서,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써 내려갔다. “나를 이해했는가?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2. 가슴을 무찔러드는 글귀

책머리에

 

3.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고.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담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도 이해한다. 그런 시도에 대해 삶은 존재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로 답할 것이다.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 개의 주름을 본다. 철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제 시대의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단순화의 폭력을 행사할 때도 그는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이질적인 파편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찾아낸 미세한 조각들을 집어넣고 보면 사건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4.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들을 빠뜨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위대한 철학자는 하나의 비명 속에서도 여러 개의 목소리를 구별해내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사람이다. 시대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시대의 목소리가 가리고 있는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숭고한 현미경을 가진 신처럼 선분이나 미세한 조각들을 찾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또한 얼음 덮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하는 사람으로, 괴이하고 의심스러우며 금지되어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어 자신의 생존을 위한 식량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5. 그는 스스로를 예외자’, ‘탈주자’, ‘위험 인물’, 무엇보다 미래의 아들로 간주한다. 모든 철학자들이 시대의 아들로 규정된다면 그 어떤 사상도 시간의 감옥을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가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기가 심오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만이 모호함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6. 걱정해야 할 것은 과잉이 아니라 결핍이다. 니체는 이렇게 묻는다. “과잉이 원인인가 결핍이 원인인가?” 당신이 천 개의 손을 내밀 때, 그것은 베푸는 것인가 구걸하는 것인가? 당신이 지금 고통 받고 있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인가 생의 빈곤 때문인가?

 

7. 니체의 말처럼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8. 철학을 하려거든 맛보는 혀부터, 냄새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그리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부터 바꾸어야 한다. 조금만 어두워지면 색맹이 되고 마는 철학의 시력을 우리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9. 모든 책들은 동료를 구하는 몸짓이다. 이 책의 동료가 되어 줄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전하고 싶다.

 

1

1장 아모르 파티; 삶을 사랑하는 철학 -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26. 누구도 머리카락을 잡고 제 무게를 달아볼 수 없으며, 누구도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의 무게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철학의 가치, 철학의 공과를 달아보고자 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철학의 지반을 떠나야 한다.

 

신이 도달하지 못한 세계가 없는 것처럼 철학은 자신이 사유하지 못할 영토를 남겨두지 않는다.

 

27. 모험가들은 어떤 곳을 뒤지지만 철학자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모험가들에게 모든 곳에 있는 것은 무가치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떤 곳에만 있는 것은 무가치하다

 

니체의 철학은 어떻게 철학의 외부에 설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전체를 보려는 철학적 시각의 편협성을 읽었기 때문이고, 보편성을 주장하는 철학적 의지의 특수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진리를 찾는 철학 자체를 하나의 문제로 삼았다.

 

29. 건강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니체는 분명히 삶의 철학자이고 생의 철학자이다.

 

니체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 그에게서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 구도 속에 높여 있다.

 

31.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36. 그리스인들은 삶에 죄가 있다는 죽음의 설교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삶이야말로 무구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도 분명히 삶의 고통을 발견하며, 그것의 공포와 전율을 경험한다. 다만 그들은 그 비극성이 죄로부터 기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스인들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공포를 고유한 명랑성으로 극복한다.

 

37.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그리스인들이 고통을 받았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이지 결코 생의 결핍 때문이 아니다. 넘쳐 나는 삶에 대한 사랑이 언젠가는 삶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리스인들은 고통이 극대화되는 순간에도 가장 무서운 파괴가 일어나는 순간에도 삶은 죄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38. 소포클레스가 그리고 있는 오이디푸스는 지혜롭고도 고상한 인물이다. 그가 만약 죄를 지었다면 그것은 운명에 의한 것이다.

 

39. 디오니소스의 찢겨짐은 세계의 분화와 개별화된 사물들의 탄생을 의미하고, 그가 겪는 고통은 개별화된 사물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상징한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 모든 유한한 존재들은 고유한 개별성과 유한성으로 고통 받는다.

 

40. 주신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의 구속을 넘어서기 위해 일종의 혼수상태에 빠져든다. 그들은 자신들을 얽매던 과거의 모든 체험과 일상을 잊어버린다.

 

디오니소스는 개별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거대한 충동을 나타내며 아폴론은 항상 절도와 자기 인식을 잃지 않는 이성을 나타낸다. 일상의 한계와 구속을 넘어서는 혼수 상태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면 과도함을 막고 절제를 요구한 것이 아폴론적인 것이다. 니체의 분석에 따르면 주신 찬가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화해와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41.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하나의 파괴는 다른 생성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의 건너뜀은 다른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뛰는 이유는 차이들에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즐거움, 정력, 건강, 과도한 풍요” 때문이었다.

 

49. “신이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심판의 사상과 정의의 주장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심판자는 아무리 자비롭다고 해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51. 철학이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 “ 새롭고 위험한 생각은 안된다! 하던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 나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 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다. 이 과정이 지속된다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역사느 매번 습속이 지배하는 것을 깨뜨려왔다. 니체는 그것이 숲속의 윤리를 뚫고, 무서운 호위자들이 만들어 낸 대사건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고, 존경 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 되었던가를 이해하는가?......... 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52.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53.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 오해 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 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어느 시대건 미래는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

 

니체 역시 자신의 시간을 미래에 두었다. “미래라는 나무에 우리의 둥지를 튼다.” “나의 출현도 그 시기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56.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57. 진리와 사랑에 빠진 철학자, 그는 현인이기 보다는 지혜의 친구여야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 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58.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59. ‘삶의 방식을 바꾸는 실천은 철학에게 보내는 어떤 신호가 아닐까? ‘삶을 바꿔보라!- 철학을 떠난 철학자들이 철학의 목표로 제시하는 것.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 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 니체의 계보학

 

64. 니체는 도덕을 가리켜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이라고 불렀다.

 

다른 지층을 탐험하는 탐사자는 자신의 시대를 떠날 수 있는 대단한 자유 정신의 소유자다. 그러나 탐사자는 용기 있는 것 못지 않게 박식해야 한다. 파편 하나도 세심하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쉽게 지나치는 것을 그는 꼼꼼하게 보아야 한다.

  

66. 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모든 사물의 기원은 천겹이다.” 가치들도, 가치를 판단했던 인간들도 더 이상 동질적이지 않다. 출신과 혈통, 건강과 영양 상태에 따라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존재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가치 판단들이 존재했는가.

 

67. 계보학자는 덮여 있던 이질성을 확인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같은 표면 위에 올려 놓는 사람이다.

 

68. 계보학자의 현미경은 미래 철학자의 망치만큼이나 강력한 전쟁 무기이다. 그 작은 렌즈는 동일자의 세계에 거대한 지진을 만들어내는 다이너마이트가 될지도 모른다.

 

69. 화폐의 위조란 가치를 조장하는 행위다. 가치의 위계를 역전시켜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도덕에서의 화폐 위조 행위다.

 

경제학자들이 떠받드는 화폐는 하나의 가치 척도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사물이나 활동이 성공적으로 교환되도록 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법이며 뛰어난 위조 행위인 것이다.

 

72. 도덕의 자연사를 보면 한 시대의 도덕은 다른 시대의 악덕이며, “한 민족이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민족은 조롱거리, 치욕이라고 부른다.” “한 이웃은 다른 이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 이웃의 영혼은 언제나 다른 이웃의 광기와 악의를 괴이하게 생각했다.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이 특정한 환경과 계급, 교회, 시대 정신, 풍토에서 나온 도덕적 가치 판단을 일반화하는 무모함을 가져온다.

 

 

76. ‘좋음’이라는 규정에는 귀족적 인간들의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가 들어 있다. 이들은 ‘좋음’을 우월한 자, 명령하는 자, 지배하는 자인 자신들에게 부여했다. 귀족들이 ‘좋음’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어떠한 선악의 판단도 들어있지 않다. 그것은 우등한 것과 열등한 것, 혹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을 뿐이다.

 

노예의 도덕은 귀족의 도덕과 판이하다. 노예는 ‘외적인 것’,’다른 것’,’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노예는 자신과 대립되는 것,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 먼저 ‘악’이라고 규정하고 그와 상반되는 자기 자신을 ‘선’이라고 정의한다.

 

77. 귀족적 평가 양식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있다.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압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선한 자야말로 약한 자이다.

 

78.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83. 감옥에 들어온 자가 깨닫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지하는 조심성이다. 그러나 원죄는 채무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불쌍한 동물인 인간은 제 자신을 한탄하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다.

 

84. 이제 약자가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니체가 약자의 도덕을 “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87. 칸트에서 헤겔로, 그리고 쇼펜하우어에 이르기까지, 또한 초기 기독교적 원한의 정신에서 불교의 ‘모든 것은 헛되다’는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부정의 운동은 무()를 향해서만 나아간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의 마지막 장을 허무에의 의지로 맺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약자의 운동, 노예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지 밝힌 것이다. 그것은 바로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이다.

 

89. 자신의 신체 상태를 잘 아는 일, 그리고 그것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90.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굳이 ‘악’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것은 내 신체에 해로운 존재-나쁜 음식이나 나를 슬프게 만드는 사람 따위-와의 마주침에 적합한 말일 것이다.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스피노자가 권유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건강을 생각한다면 그 풋과일은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 태초에 있었다는 어떤 과일이 선악과라고 불렸다는 사실은 인간의 유치함을 그대로 보여주다. 스피노자는 신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을 때, 그 과일이 원래 악한 존재라고 말했던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신은 아담의 능력에 맞추어 그 과일은 다른 짐승에게는 좋은 과일일 수 있지만 지금 아담의 몸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말한 셈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것을 도덕적 금지로 이해했던 것이다.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93. 이중의 해것은 참뜻을 알고 싶어하는 해석학자들에게 부여된 가장 가혹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94. ‘어떤 그럴 듯한 변명을 갖다 붙인다고 해도 재산이란 결국 도둑질의 결과라는 프루동의 말처럼, 상업과 부귀는 거짓말과 도둑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리스인들도 이해했던 걸까? ‘밑지고 판다는 장사꾼의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국 그와 거래해야 한다.

 

95.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존재론적 차이, 고대와 근대를 가르는 시간적 차이,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공간적 차이, 이슬람과 기독교를 가르는 문화적?종교적 차이. 해석학자들은 자신과 차이를 두고 있는 타자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해석학자들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타자와 벌어져 있는 차이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이 없다면 해석학자들은 우선 차이를 넘나들고 있는 헤르메스를 이해해야 한다.

 

96.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아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니체에게는 헤르메스가 메시지를 바꿀 수도 있는 배짱과 지혜를 갖춘 신인지도 모른다.

 

98. 과거는 그 자체로 인정되어야 한다. 과거를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고는 우리가 딛고 설 지반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과거와 지평 융합을 하지만 그 방식은 우리의 유한성을 깨닫는 것을 통해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전통의 우위를 인정함으로써만 융합할 수 있다

 

103. 진리의 해석학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보여주는 단어는 투시주의다. 개인이나 집단은 모두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을 크게 보기도 하고 어떤 것을 작게 보기도 한다. 마치 풍경화의 원근법처럼 하나의 소실점을 정한 개인이나 집단은 거기에 맞추어 사물의 크기를 다르게 본다.

그런데 니체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불쑥 내던졌다.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104. “’모든 것은 주관적이다라고 그대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벌써 해석이다

 

105. “주관의 영역은 계속 증대하거나 계속 감소하며, 체계의 중심점은 계속 변동한다.”

 

니체의 해석학은 해석 대상이나 해석자 어느 쪽도 절대화하지 않는다. 니체는 필연성을 갖는 사실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주체’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연쇄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107.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제(regime)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109. 카오스나 미로야말로 니체에겐 즐거움의 대상이다. 길의 과잉이 카오스이며, 끝없는 길이 미로가 아니겠는가. 세계의 카오스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몰락의 징후이다.

  

111.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보자. “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 신도들이란 다 그런 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

 

112. 개인은 무언가 전혀 새로운 존재이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존재, 무언가 절대적인 존재이다..... 개개인은 전통적 용어도 역시 개인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식을 개인이 창조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개인이다. 즉 해설자로서 개인은 한결같이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114.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해석의 비밀은 바로 이것이다. 생성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차이는 계속해서 생성된다. 생성된 차이는 괴로운 것이기는커녕 하나의 멜로디다.

 

115.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116. 내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내적 상태의 다양성이 아주 크기 때문에 아주 많은 스타일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이제까지 한 인간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가장 다양한 종류의 스타일이다.

 

120.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22.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 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33. 니체는 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운 인격은 볼 수가 없으며, 볼 수 있는 인간은 단지 비겁하게 정체를 숨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뿐이다. 개성은 내면적인 것으로 움츠려 들어가, 밖에서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로운 개인’이란 특이성을 갖추지 못하고 보편성 아래서 단지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개별자들인 셈이다

 

138.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 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의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140. 그리스 의학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는 크게 네 가지의 체액의 균형 체제인데, 다이어트는 이것들의 균형을 맞추라는 의학적 처방이었다. 네 가지 체액은 각각 운동, 섹스, 수면, 사회적 관계에 관여하는 것으로 ,병이 생기는 것은 운동이나 섹스, 수면, 사회적 관계가 과도하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이어트의 라틴어 어원은 ‘dies’인데 이것은 영어의 ‘day’에 해당한다. 이는 다이어트가 시간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142. 체제는 자신의 안정을 위해 “인간을 가능한 한 재빨리 시대의 목적을 향하여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니체는 이 ‘훈련’의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우선 “사회나 국가 같은 개체가 개개인을 굴복케 하여 고립에서 끌어내고 하나의 단체에 정렬시킬 때,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기초가 정비”되고, 이것이 익숙해지면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하여 그것이 본능이 되도록 한다.” 하나의 도덕이 자연스러운 지배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전사적인 작업이 있어야 하고, 그 이후에 본능적으로 ‘미덕’으로 숭상되어야 한다. 첫 번째의 작업이 ‘길들이기’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 작업은 ‘길러내기’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147. 그리스인들은 인간들을 서로 적대적인 파멸의 전쟁 속으로 몰아넣는 여신은 악하다고 보았지만, 질투와 증오와 시기의 여신이라고 해도 인간들로 하여금 파괴적 행동이 아니라 경쟁의 행동(아곤적 행동)을 하도록 자극하는 신은 선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신이 지나치게 성공하는 것을,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발전하지 못하고 자신과 경쟁할 만한 존재가 사라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스 사회는 지나친 천재의 출현이 경쟁 자체를 방해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도편 추방이라고 하는 제도를 두었다.

 

도편 추방은 자극의 수단이고 천재에 대한 보호의 수간이라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이 제도의 핵심은 천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천재를 여럿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

 

148.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 스스로 가치를 평가하고, 그에 기초한 목표를 세우고 경쟁하였으므로 목표는 항상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나 현대인은 제논의 비유에서 발빠른 아킬레스처럼 무한성의 장애에 부딪힌다. 그는 무한성의 방해를 받아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리스인들은 여러 진리들이 공존하고 경쟁하기를 바랬다. 경쟁이 없는 진리는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리스인들에게 이것은 ‘덕’의 문제였고, 자유는 덕에 기초한 강함의 표시였다

 

149. 그리스인들이 아곤이라는 경쟁을 벌인 곳을 아레나라고 하는데, 이들은 자신의 덕에 기초하여 이곳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경쟁하였다. 폴리스는 이들 위에 초월적으로 군림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로 구성됨으로써만 전체일 수 있었다.

151. 고대인들은 왜 군사적 수호신을 계속해서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했을까? 그것은 바로 전쟁을 멈추는 곳에서 하나의 우상이 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아곤이라는 치열한 경쟁이 멈추는 곳에서 법과 제도의 초월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 자연학 + 윤리학

154. 그리스인들은 “무로부터는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기독교의 창조론이 ‘무’에서 시작한다면 그리스인들의 출발점은 ‘유’이다.

 

156.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들의 영속성과 통일성을 비판했던 인물로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유명하다. 그는 모든 사물들이 변화한다는 것, 변화야말로 세계의 본질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161.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론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이 확고한 양을 가졌으면서도..... 여러 힘과 힘의 파랑의 유회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 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그 자체”이다.

 

165. 니체가 말하는 의지는 정시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모든 힘 안에 내재하는 그야말로 어떤 것이다.

 

니체가 힘을 분석함에 있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질적인 차이를 통해 드러나는 의지이다. 니체에게 강약의 문제는 양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166.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167. 능동적인 힘은 ‘시작하는 힘’이며 ‘공격하는 힘’이다. 반동적인 힘은 ‘비난하는 힘’이며 ‘상쇄시키고 흡수하는 힘’이다. 모든 방향(가치)은 능동적인 힘이 결정한다.

 

169. 니체는 힘들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내면의지가 바로 권력의지라고 말하고 있다.

 

171. 의지의 명령적 속성 때문에 의지란 본래 주인으로서 욕망을 다룬다. 즉 그것에 방향과 한도를 지시하는 것이다.”

 

권력의지는 사실상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이자, 능력을 실현하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권력의지’가 개념들의 조합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라는 점이다.

 

172. 무언가를 획득하려고하는 노력이 욕망이라는 것, 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고, 우리는 그 결여되어 있는 것을 획득하려고 노력하는데 이 노력이 욕망이다.

 

173. 욕망을 그 자신이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즐거움과 관계시키는 것이다. 결핍된 자와 초조함과 넘치는 자의 즐거움은 너무도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항상 이렇게 물었다. “나는 개개의 경우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여기 만들어져 있는 것은 기아가 원인인가, 과잉이 원인인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

 

174. 하인들이나 약자들은 그 권력의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자신들도 지배에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를 예속시킴으로써 자신들이 대단한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대단히 착하고 커다란 인내심과 자제력을 갖춘 성실한 사람들인 듯이- 상상한다.

 

175.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은 ‘긍정’과 ‘부정’이다. 긍정은 디오니소스적 정신이며, 그리스 예술의 정수이고 예수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이기도하다. 반대로 부정은 삶을 비난하는 노예의 것이고, 심판을 불러오는 사제의 것이며,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포섭하려는 변증법의 것이다.

 

176.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어떤 행동이나 힘과 마주할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을 ‘부정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긍정으로 다루는가’ 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말해준다.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

  

178. (좋음)이란 무엇인가? 권력 느낌, 권력 의지, 권력 자체를 인간 안에서 강화시키는 모든 것. (나쁨)이란 무엇인가? 허약함에서 비롯하는 모든 것. 행복이란 무엇인가? 권력이 증가하는 느낌. 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은 오히려 감각과 정신이야말로 육체의 도구이며 노리개임을 모른다. 육체는 자아보다도 큰 자기자신이며, “제압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그것은 힘센 명령자이다.” 같은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육체에 대해 느끼는 육체가 뛰어나다. 그것은 자신이 느끼는 능력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그 능력으로 지배한다.  

 

권력의지는 새로운 힘들과 마주칠 때마다 항상 촉수를 내민다. 그것을 느끼고 평가하는 것, 육체는 감각과 평가를 통해 권력의지를 경험한다. 사회든 개인이든 나쁜 권력의지는 이러한 감각능력과 관계되어 있다. 강자들이 창피하고 비참하게 여기는 것을 약자는 선하고 좋은 것으로 느낀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감각 방식인 것이다.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 자연학 + 윤리학

182. 모든 불멸하는 존재의 죽음은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오히려 기쁜 일이다. “장례식의 비가 속에는 언제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 아닌가” 죽음은 항상 새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멸할 수 없는 존재는 태어날 수도 없다. 원자들의 해체가 죽음을 의미했다면 그것들의 조상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원자들의 놀이가 “하늘과 바다, 땅과 강, 그리고 나무와 동물들을 생성시켰다.” 그러면서도 반복은 “또 다른 것들로, 그리고 그 다른 것들은 또 다른 것들로 끊임없이 계속된다.”

 

183. 니체에게 세계란 “어떤 손실도 없이 정말 긴 세월을 거듭 회귀(반복)하는 힘의 대양”이었다.

 

한 번 생성된 것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슬프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186.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189. 세계란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놀이다. 니체는 이것을 ‘주사위놀이를 하는 세계’로 그리기도 한다. 주사위놀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의 의미를 이해할 때도 등장하는 놀이다. 항상 자기로 귀환하는 놀이 주사위 던지기!

 

191. 긍정의 권력의지는 회복기의 차라투스트라처럼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한 번 더!”라고 말한다…..생성의 반복은 죄지은 자들의 운명이기는커녕 삶의 경이로움이며 그 자체로 삶의 구원이다. 생성을 긍정하는 것은 권력의지의 최고 표현이다

 

192.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 하지 않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전적으로 긍정의 의지 편에서 서서 부정의 의지와 대결하나.

 

194. 차라투스트라는 묵묵히 기다린다. “심연의 사상에 떨지 않을 힘은 언제 찾아올 것인가?....너의 무게는 충분히 무겁다. 그러나 언젠가는 너를 불러 올릴 힘과 사자의 목소리를 찾아내겠다….아직 () 시간이 오지 않았다.” 생성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만큼 시간 역시 생성을 필요로 한다.

 

195. 생성 즉 시간을 긍정하기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무엇보다도 과거와 대면해야 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의욕하고 있다면 그는 먼저 이미 지나간 시간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하지만 과거는 의지하는 자들에겐 가장 큰 난관이다. 어느 누구도 과거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투라는 웃다가도 금새 비통하게 울었다.”

 

너 지혜의 돌이여! 너는 너 자신을 높이 던졌지만 그러나 던져진 모든 돌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차라투스트라여, 너는 정말로 멀리 돌을 던졌지만 그 돌은 네 위로 다시 떨어지지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한번 더를 외칠 수 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며 회복의 과정에 접어든다.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 그것은 죽음까지도 살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한 번 더!’를 외치기 때문이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모든 순간들에는 이 세 개의 시간들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 공존의 공간인 순간들은 ‘흘러간다.’ 순간들의 생성, 그리고 소멸.

 

197. 니체는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미래를 사유함으로써, 그리고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많이 알려져 있는 것처럼 니체는 반시대적인 사상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때에 맞지 않는’ 사상가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에 살았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고,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는 시간과는 동시대적이다. 바로 그 자신이 새로운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멀리 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그리하여 내 주의를 둘러보았을 때, 보라! 시간만이 나의 유일한 동시대인이다.

 

200. 해석자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동안 차라투스트라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이다.

 

201. 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초인이란 다른 느낌 방식을 갖는 신체로의 변신이기 때문이다.

 

202. 그의 금욕은 괴로운 수련의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즐겁게 향유하는 과정이다 긍정의 정신은 병에서조차 건강을 발견한다.

 

나는 병에서 나의 더 높은 건강을 얻었다. 이 건강이란 병이 말살시켜 버리지 못한 모든 것들에 의하여 오히려 더 강해지는 건강을 말한다. 나는 병에서 하나의 철학도 얻었다.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최후의 해방자다..... 그런 고통이 우리를 개선시키는지에 대해 의심스러울 때도 있으나 나는 고통이 우리를 심오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203. 니체는 부정과 파괴야말로 긍정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205.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긍정은 적극적으로 다음의 긍정을 의지한다. 긍정이 멈추는 순간에 부정은 승리한다.

 

그게 무슨 상관이랴! 대체 내가 행복에 뜻을 두고는 있는가?”

  

208. 니체가 운명애(amor fati)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자기 자신의 생성이었다. 새로운 자신을 만들라!

 

우연은 창조적 힘이다. 우연은 카오스와 미로를 즐기는 정신이다. 미로나 카오스는 길이 없음이 아니라 길의 넘침이다. 이로써 생성의 공간이 열린다.

 

209.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나는 그들에게 지금은 소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바로 즐거움이라는 것을..

 

7장 인간 -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216. 초인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 인간의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다.

 

니체는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자랑스럽게 진화해 왔지만 곧이어 자신의 죽음인 초인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이란 결국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하다. “저 쪽으로 건너가기도 위험하고, 가는 중에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다.”….줄을 타는 광대의 위험이 바로 인간의 위험이다.  

 

218-219. “내가 너희에게 세 가지 변용을 들겠다.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마침내 아이가 되는 변용을.” 낙타는 잘 견디는 정신의 표상이다….사자는 거대한 부정의 정신이다..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 자신의 터전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거대한 용이 나타나 너는 해야만 한다.’만 존재한다고 말할 때, 사자는 으르렁거리며 나는 하고 싶다.’를 외친다….’나는 하고 싶다보다 위에 있는 것은 나는 존재한다이다. 사자가 할 수 없는 일을 어린아이가 한다.어린 아이는 존재 자체로 하나의 신선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한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이고, 스스로 글러가는 바퀴이다.

 

220. 인간이 진화를 통해서라면 초인은 변신을 통해서 태어난다.

 

그 놀라운 변신과 변용이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221. 인간이 몰락하고 초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신이 죽었다.”는 복음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복음을 전하는 자는 광인이다. 그는 밝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광장에 나와 “신을 찾고 있노라”고 외친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말이다. 우리 모두가 그의 살해자다.

 

222. 니체는 왜 신이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니체는 사실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복음이 사실상 신의 죽음과 통한다고 본 것 같다.

 

223. 인간의 모든 위대함이나 강함이 초인간적인 것으로서, 밖에서 온 것으로 포착되고 있는 한 인간은 스스로를 왜소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극히 가련하고 약한 면과 극히 강하고 놀라운 두 가지 면을, 두 가지 영역 가운데로 분열시키고, 전자를 ‘인간’, 후자를 ‘신’이라고 부른 것이다.

  

231. 여기서 초인과 인간이 갈라진다. 삶을 진정으로 긍정하는 것은 보존하는 것인가, 극복하는 것인가? 자기 보존과 자기 극복. 보다 높은 인간들은 모든 가치 파괴가 일어나는 점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은 미래로 가는 여행을 멈추고 싶어 한다. 그들은 과거를 되살리고 싶어한다. 차라투스트라의 탄식을 들어보자.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나의 죽음을 나는 너희에게 권장한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에게 오는 죽음을.” “너 자신을 네 스스로의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네가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232. “그대들 자신을 넘어서 웃는 법을 배우라!”

 

차라투스트라는 춤추는 자이고 가벼운 자이다.”

 

234. 초인은 신체의 변신이며 “새로운 느낌 방식”이다. 신체가 즐거움을 경험하면 “한번 더”라고 말한다. 신체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그것이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다.

 

8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238.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239.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247. “치료하는 힘이란 우리가 입는 상처에도 있는 법이다. 호기심이 강한 식자들을 위해 출처를 밝히지는 않지만 다음은 나의 오랜 좌우명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250. 니체는 자신을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어떤 때는 자신을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렀다가 “광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여행자이다. 그가 썼던 모든 가면들, 그를 대신했던 모든 인물들은 그가 벌인 “탐험”의 결과물이다.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돌아가리니- 프리드리히 니체

 

253.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철학은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2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258. 근대는 제 발로 설 수 있는시대가 아니라 제 발로 서야 하는시대다. 절대적 가치가 붕괴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 항상 새 것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근대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261. 시간이 돈임을 잊지 말라. 매일 노동을 통해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반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가 오락을 위해 6펜스만 지출했다고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 외에도 5실링을 더 지출 한 것이다. 아니 갖다 버린 것이다.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재산이라 생각하고 그에 따라 살려고 하지 말라. 신용을 가진 많은 사람이 이러한 착각에 빠져 있다. 이런 점에 주의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지출과 소득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일단 세부적인 것까지 주의하는 노력을 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돈 욕심이라 해도 프랭클린의 말에서는 다른 것이 느껴진다. 소명의식에 기초한 철두철미한 자기관리, 바로 그것이다.  

265. 프로테스탄트의 삶에서 나타나는 가장 놀라운 변화는 계획표(시간표)의 도입이었다. 원래 시간표는 중세의 수도원에서 생겨난 것이다.

 

266. 시간표는 사람들의 삶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주었다. 가정은 물론이고 학교와 공장에서 시간표는 아이들과 노동자들의 생활을 가장 효과적으로 관리해 주는 수단이 되었다. 자신들의 의지로 행동을 통제하기보다는 의지를 포기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오히려 원하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확실히 중요한 전환이다.

 

267. 소명의식에 불타던 근대인은 언제부턴가 주어진 절차와 규정에 의거해서 수동적으로 일 처리에 동원되고 있는 암울한 근대인으로 돌변해 버렸다.

 

268. 처음엔 시간표는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든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274. 원래 일기는 교회 지도자들이 여신도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하루동안 행한 일들을 적어오게 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하루의 일들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약속을 하는 수단이 되었다.

 

베버가 말하는 철창이 왜 그렇게 강력한 것인지도 이로써 분명해진다. 그것은 제 스스로 걸어간 내적인 감옥이기 때문이다. 더 열심히 움직일수록 감옥은 더 강력하게 조여든다.

 

283. 현대의 정당들은 대중들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더 많은 규율들을 필요로 하고 더 많은 규율들은 더 많은 대중들을 수동적으로 만들 것이다. 정치가가 대중들의 의사를 더 잘 대표할수록 대중들은 그에게 더욱 복종한다.

 

286. 니체는 내적인 거리거리의 열정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거리의 열정이란(사회 신체이든 개인 신체이든) 신체에 내재하고 있는 힘과 능력을 긍정하고, 그 힘과 능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차이(거리)를 생산해내는 열정이다. 거리의 열정을 가진 자들을 니체는 가치의 신봉자가 아니라 가치의 생산자라고 말했다.

 

내적인 거리거리의 열정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제 스스로가 이용할 가치를 생산해 낸다.

 

287. 이전의 가치들과 새로 생산된 가치들 사이에 다양한 거리(차이)가 존재하며, 내 가치와 다른 사람의 가치 사이에 다양한 거리(차이)가 존재한다.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300. 각자의 존재는 그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부여되며 그것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갖추어야 할 도덕적 규범을 습속화하게 만든다. 그 습속화야말로 자신이 존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301. 사람들은 국가를 통해서만 파편화된 개별자로부터 훌륭한 시민으로 이행할 수 있다. 국가는 시민들의 합의체라기보다는 시민들을 길러내는 생산적 실체다.

 

3. 내가 저자라면

철학 이야기를 읽으며 스피노자와 볼테르, 그리고 니체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니체와 조금 더 친해져 볼 수 있겠구나 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펴들었지만 생각보다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저자는 친절하지 않았다. 니체의 사상과 관련된 많은 철학자들의 사상이 갑자기 등장했고 가끔은 이것이 누구의 이야기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니체의 말보다 더 어려운 단어로 설명 하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사실 저자의 의도가 궁금했다. 니체에 대한 해설서로 쓴 것일까? 혹은 니체를 공부한 내용들을 그저 본인의 언어로 총망라 하고자 했던 것일까? 하며 혼자 상상해 보기도 했다. 만약 전자라고 한다면, 이 책은 조금 더 쉬운 언어로 바뀌어야 하겠다.

 

2부도 내게는 약간 쌩뚱 맞은 구성이라고 느껴졌다. 아마 저자가 하고 싶었던 정치, 국가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 하나, 1부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니체의 사상을 발전시킨 철학자들의 이야기랄지, 현대의 우리가 그의 사상으로부터 중점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할 만한 부분 등을 정리해주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가슴을 울리는 장절]

책장을 덮고 혼돈스러운 기분을 어찌할 수 없었지만 밑줄 그은 글귀들을 다시 한번 타이핑하면서 나는 니체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바들을 더욱더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참으로 위대하게 느껴지면서 가슴이 뛰기도 했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며 끊임없이 긍정하고 변화하고 용기 내어 행동하는 것….자꾸 멈추려고 하고 고여있으려 하며 부정의 힘이 가득한 요즘의 나에게는 힘이 되는 내용이었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 아직 나는 삶의 목표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은 비틀비틀 거리고 가끔은 주저 앉는다. 하지만 진정 내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 길의 끝에 분명 내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즐거워하고 있기를 바래본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 Amor fati라는 말에 대해 내가 그동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나의 한계를 체념하라는 말이 섞여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나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아직 진정으로 내 삶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자그마한 일들 부터 나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일어설 것이다.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니체는 우리에게 계속하여 변화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용기를 내고 움직이고 실천하고 또 전진하라고 말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라는 변명 속에 갇혀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운명에 대한 원망으로 허송 세월을 보냈던 날들을 뒤로하고 더욱더 긍정적으로 변화 할 것이다.

 

 

IP *.124.78.132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