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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23일 02시 58분 등록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고병권, 소명출판, 2001.


1. 저자에 대하여


■ 고병권 ■

출생/사

1971. 대한민국 전남 담양

•활동 분야

연구원, 학자

 

•발 자 취  

•저 서

서울대 화학과 졸업.

1997.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니체 논문으로 석사 학위 취득.

2005.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화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 취득

연구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 회원, 추장

부커진R의 편집인

대학 강사

(공저)

2002.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 Animation & Philosophy

2002.철학극장, 욕망하는 영화기계

2006.근대의 경계에서 독재를 읽다

2007.코뮨주의 선언 -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

2010.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2010. 맑스를 읽자

2010. 생각.탐구.기록한다는 것

2011.고전 톡톡 : 고전, 톡하면 통한다

2011.각교과서 세트 - 전5권

2012.생각해 봤어? - 인간답게 산다는 것

2001.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2003.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005.화폐, 마법의 사중주

2007.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2009.추방과 탈주

2010.생각한다는 것 - 고병권 선생님의 철학 이야기

2011.민주주의란 무엇인가

2012.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 월스트리트 점거운동 르포르타주

2014.“살아가겠다” - 고병권이 만난 삶, 사건, 사람

2014. 언더그라운드 니체 - 고병권과 함께 니체의 <서광>을 읽다

201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번역)

1999.마이크로소프트 파일-빌 게이츠 신화의 거짓과 진실

2001.한 권으로 읽는 니체

2001.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스 박사 학위 논문

2007.HOW TO READ 마르크스

2010.HOW TO READ 시리즈 - 전16권

……

“살아가겠다”

……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으며, 친구들과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

- 고 추장의 '행복론' -

고추장.jpg


■ 잘 살아가겠구나!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는 잘 살아가겠구나…. 그렇겠구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존재함을 과시하듯 좀 멀리 사는 이웃 사촌 덕분에 나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분명 그것은 질투와 부러움의 배아픔은 아니었다. 다만……좀 서글퍼졌을 뿐.

 삶의 온갖 어려움이 내게 기댈 때 우리는 철학자가 되어 간다. 그리고 철학은 진리를 찾는 것이라 말하는 만큼 삶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 주노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삶의 복잡성이 그에게는 명쾌한 논제로 풀리지 않을까.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그의 일상이 철학적이기에 또한 단순 이론적인 떠벌임으로 머물지 않기에, 아주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기에 비록 피상적으로 엿보는 그의 삶을 환하게 하고 있었다. 그의 글을 읽어 가면서 느낀 자기 연민이 나의 철학적 지식의 모자람에 대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지식이 삶을 더욱 더 명확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혼란을 명쾌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의 철학적 지식이 그의 삶을 보다 더 밝은 곳으로 이끌고 있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별로 흔들려 보지 않았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결코 선한 거짓말도 해보지 않았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조용하고 담백한 얼굴의 사진을 쳐다보며 나는 그에게 묻고 있었다.

 어떻게 세상을 살고 있으신가요.

 

 그에 관한 객관적인 자료는 그가 그동안 쓴 저서와 그의 학력이 전부였다. 그것이 그의 삶을 말해주는, 아니 이 세상에서 특히 우리나라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은 직업과 학력이란 것을 알기에 뭐, 이 정도면 다 알았지 싶다. 다시 보니 그는 철학 전공자가 아니었다. 학부는 화학이었고 대학원에서는 사회학을 공부했다. 그러니까, 철학은 그의 관심사였던가. 아니, 철학이라고 하기에도 그렇지 않은가. 그는 니체에 관한 논문을 썼고 니체에 관한 책들을 썼다. 사람들은 그를 니체 전문가라 말하고 그는, 자신을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쨌든 그는 수십년 동안을 재야연구소에 머물며 연구하고 강의해 왔다. 그가 오래 도록 활동하고 있는 연구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는 추장, 이른바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니체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스피노자, 들뢰즈 등의 철학을 공부했고,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글을 써서 공저와 번역서를 포함한 그의 저서는 25권이 넘는다.

    

 저자 고병권은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었다. 초3때 보이스카우트 캠프에 가고 싶었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거기에 내는 돈이 부담되기도 하고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지만, 어린 그는 길에서 구르며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그 캠프에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어릴 적 야구를 좋아했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우리나라에 처음 야구가 생겼고 전남 출신인 그는 해태 타이거즈 팬이었다. 그가 야구를 좋아하는 만큼 그는 야구와 관련된 모든 기록들을 찾아 읽었다. 친구들 앞에서 아는 척하기 위해 정말 공부를 많이 한 것인데,  초등학생임에도 어른들이 보는 신문, 잡지, 책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서른 넘어서는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웠다. 친구들과 한강시민공원에서 인라인을 타다 한남대교 근처에서 돌멩이에 바퀴가 걸리며 쓰러진 적이 있다. 머리에 피가 흐르고 얼굴이 부어 오른 채 공사용 철재 밑에서 기어 나왔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곳에 철재가 없었으면 한강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고 후 인라인을 그만뒀단. 같이 배운 그의 친구들은 지금 인라인에 고수가 되어 있다고.


 성인이 되어 대부분을 재야연구소에서 보낸 그는 학부 4년, 석사 2년, 박사 2년의 기간, 8년을 대학에 적을 두고 공부했고 15년 동안 대학 언저리를 맴돌았지만 대학이 싫단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대학 강의를 가급적 하지 않으려 한다. 이유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 그나마 그거라도 해야 할 것인데 줄이는 이유는 다행히 강의를 줄여도 먹고살 수 있는 공동체적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쾌한 기억 때문에 그는 강의를 줄이고 있다 한다. 6-7년 전쯤 교양과목 첫 시간에 강의 계획서를 나눠주며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는 시간에 맨 뒷줄에 앉은 세 명이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고 엎드렸다. 그는 첫 시간이고 강의 시작하기 전이라 무시할까하는 생각에 그대로 두었다가 강의 내내 신경이 쓰여 결국 바로 앉으라고 말했다. 그래더니 “이래도 다 들려요.” 그때 그는 화가 났고 그 자리에서 강의를 위해 서 있어야 하는 것이 서글펐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후로 강의를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 노력은 대학 강의를 말한다. 대학이라는 곳에 들어와 비싼 등록금을 내고서 공부하는 이들의 열정이나 태도에 대해 그는 실망하지만 결코 강의 자체에 대해 회의를 느낀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는 대학이 아닌 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수유너머, 교도소나 야학에서 강의를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느낌을 가진다.

 그가 강의를 하게 하는 토대인 연구소 수유너머는 연구하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그가 여기서 공동대표를 맡았기에 공동대표는 추장이라 부르기에 그는 ‘고추장’이라 불린다. 그는 이 공간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을 동료들에게 감사하며 행복해하고 있다. 결코 혼자서 행복할 수 없다는 친구들과 함께여서 행복하다는 그의 행복론은 공동체 연구공간인 수유너머의 삶에서 터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또한 자신에게 끊임없이 삶에 대한 철학과 정치와 앎의 가치를 되묻도록 해준 이들에게 감사하며 사유하고 행동하기 위해 여전히 연구하고 강의하며 살아가고 있다.


참고 자료


고병권, 생각한다는 것, 너머학교, 2010.

고병권, 살아가겠다, 삶창, 2014.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오마이뉴스, 2003.2.27

뉴 파워라이터, 수유너머R 연구원 고병권, 경향신문 인터뷰, 2014.2.17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54&contents_id=57437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책머리에


p3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 개의 주름을 본다.


p4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p4 위대한 철학자는 비명 속에서도 여러 개의 목소리를 구별해내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사람이다. 시대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시대의 목소리가 가리고 있는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숭고한 현미경을 가진 신”처럼 “선분이나 미세한 조각들”을 찾는 사람이어야 한다.

⇒ 시대의 눈이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들을 귀가 없는 시대.


p4 하나의 현실이 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면 다른 현실을 꿈꾸는 자의 사상은 광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학이 사람들의 두뇌를 훈련시키기 위해 국가의 시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을 때,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광기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고, 존경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 되었던가를 이해하는가? 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 현실은 이성적이지 않고 광기인데 이성이 광기로 인식되는 시대.


p6 당신이 지금 고통받고 있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인가 생의 빈곤 때문인가?”


p7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니체

⇒ 행복할 때는 철학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 행복할 때는 그저 행복이 철학이려니.


[서장] 천개의 눈, 천개의 길


p20 아포리즘들은 모두 화살이다. “아포리즘과 화살”. 그것들은 읽혀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쏘아지기를 바란다. 누구든 활을 들고 쏘아라.

⇒ 아포리즘Aphorism은 경구, 격언, 금언, 잠언 등을 일컫는 말이다. 인생의 깊은 체험과 깨달음을 통해 얻은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적으로 기록한 명상물로서 가장 짧은 말로 가장 긴 문장의 설교를 대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일반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발한 생각이나 기지를 짧은 글로 나타냄으로써 어떠한 원리나 인생의 교훈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일종의 충고나 처세훈을 주는 것은 격언이라고 하고, 주로 지혜와 교훈을 담은 말은 잠언이라고 한다.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작가 불명의 말들을 이언이나 속담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아포리즘은 이언이나 속담처럼 널리 유포되어 사용된다는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작가의 독자적인 창작이며 또한 교훈적 가치보다도 순수한 이론적 가치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이언이나 속담과는 구별된다.

   아포리즘을 최초로 사용한 이는 그리스의 명의 히포크라테스로 그는 "예술은 길고 인생을 짧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외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아포리즘으로는 세익스피어의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니라", 파스칼(의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한 줄기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등이 있다.

   -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1.30, 국학자료원, 네이버 지식백과


[1부]


1장. 아모르 파티 : 삶을 사랑하는 철학 -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 amor fati! 이것은 니체의 운명관을 대표하는 말이다. 운명애(運命愛). 운명을 사랑하라~. 니체는 운명은 필연적인 것으로 인간에게 닥쳐오지만, 이에 인종하는 것만으로는 창조성이 없고, 오히려 이 운명의 필연성을 긍정하고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1.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


p26 철학자가 철학의 가치를 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한 철학자는 신의 가치를 묻는 신앙인보다도 훨씬 큰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그는 기도와 신앙이라는 방패도 없이 제 자신의 질문과 대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 철학자가 철학의 가치를 묻는 일이 쉽지 않기에는, 그들은 이미 철학이란 가치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기도와 신앙이란 자신의 질문과 관점이 아니라 결국 타인의 관점이다.


p26 플라톤의 유명한 언급 “철학은 전체를 본다”는 이 말을 알튀세는 “철학에는 외부가 없다”는 선언으로 이해한다.

그러니까, 외부의 시선으로 보느냐 아니냐.


p27 철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포괄하는 질서를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알튀세


p27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는다.

⇒ 니체 철학이 철학 외부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체를 보려는 철학적 시각의 편협성과 보편성을 주장하는 철학적 의지의 특수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외부에서 철학 관계를 맺었고 이것이 그의 철학이 생리학, 병리학, 징후학, 자연학 등의 모습을 띠는 이유가 된다 한다.


p29 건강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체는 분명히 삶의 철학자이고 생의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을 삶의 철학, 생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건강과 생명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건강이나 생명에 대해 철학이 맺는 관계, 혹은 철학 자체의 건강과 생명력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바라보는 철학, 철학 외부에서 철학 진단하는 철학, 그래서 니체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 그에게서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 구도 속에 놓여있다.

⇒ 철학이란 삶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삶에 있는 것 아닌가?


p29 니체가 철학자들을 죽음의 설교자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이 세계 속에서의 삶을 평가절하하고, 어떤 생성도 없는 영원불멸의 세계를 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역동성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단순한 ’현상‘이나 ’가상‘으로 치부한다. 그리고는 ’실재계‘, 다시 말해 참된 세계가 따로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 ’물 자체의 세계‘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

⇒ 이 생의 삶을 평가절하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평가절상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기인된 절망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 마치 신을 창조하고 신의 계율에 갇혀 버린 것처럼.


p31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니체와 같은 입장이다.


p31 불행히도 서구 사유의 기원에는 두 사람의 시체가 놓여있다. 보편적 진리를 위한 죽음과 보편적 구원을 위한 죽음, 서구 사유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리고 있다.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 삶을 긍정하는 철학, 삶을 사랑하는 철학의 가능성에 제기된 과제이다.


2. 거인들의 웃음소리와 신들의 한탄


p33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이다. 이 세계와 자기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


p36 그리스인들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공포를 고유한 명랑성으로 극복한다.


p37 그리스인들이 고통을 받았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이지 결코 생의 결핍 때문이 아니다. 넘쳐나는 삶에 대한 사랑이 언젠가는 삶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과잉에서 나오는 고통과 결핍에서 나오는 고통은 질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그리스의 비극을 보고 놀라는 것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비극을 활용하는 기술 때문이다.

⇒ 그리스의 비극에는 삶의 종말과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그리스인들의 전략이 들어 있다.


p38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3. 세 개의 죽음 -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 소크라테스의 경우


p39 디오니소스의 찢겨짐은 세계의 분화와 개별화된 사물들의 탄생을 의미하고, 그가 겪는 고통은 개별화된 사물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상징한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 모든 유한한 존재들은 고유한 개별성과 유한성으로 고통받는다.

⇒ 디오니소스 축제, 즉 주신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디오니소스의 찢겨진 시체가 모아져 디오니소스가 부활하기를 바라는데, 이것이 개별성을 넘은 통일성이라고.


p40 디오니소스는 개별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거대한 충동을 나타내며 아폴론은 항상 절도와 자기 인식을 잃지 않는 이성을 나타낸다.

p40 일상의 한계와 구속을 넘어서는 혼수상태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면 과도함을 막고 절제를 요구하는 것이 아폴론적인 것이다. 니체의 분석에 따른다면 주신 찬가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화해와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와 같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변증법적 분석을 니체는 헤겔의 냄새가 풍겨나기 때문에 불쾌하게 생각하며 후회한다. “변증법적 무뚝뚝함”이 디오니소스의 참된 의미를 가리고 있다는 것인데 변증법 속에서 단순한 파괴와 혼돈의 힘으로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질서를 상징하는 아폴론과의 통일이 필요한데 ‘긍정’의 신인 디오니소스에게 파괴와 혼돈이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는 것이다. 개별적인 차이가 괴로워서 파괴와 혼돈을  불러온다면 디오니소스가 긍정의 신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p41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을 거쳐 니체가 디오니소스의 참된 의미를 발견했을 때, 디오니소스는 차이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는 신이 되어 있었다. 괴로워하기는커녕 차이가 만들어 내는 다수성을 즐기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 어떠한 차이냐에 따라.


p41 파괴와 혼돈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 그의 “높이뛰기와 넓이 뛰기”, “훌륭한 무용수”로서 추는 춤이었다. 하나의 파괴는 다른 생성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의 건너뜀은 다른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뛰는 이유는 차이들에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즐거움, 정력, 건강, 과도한 풍요” 때문이었다. 차이들 때문에 고통받는 것은 변증법이다.


p41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긍정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과 대비시킨다. 디오니소스 대 그리스도.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자, 삶에 대한 근본적 가르침을 제공한 자, 이 반 기독교적 스승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 디오니소스는 가장 혹독한 고뇌도 웃음으로 긍정한다면 그리스도는 삶을 저주하고 삶으로부터 구제되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낸다.


p42 차이는 죄의식과 관계된다. 디오니소스의 갈기갈기 찢겨진 죽음에는 어떤 죄도 수반되지 않으며 그 죽음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재생의 약속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식을 길러냈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심판과 함께 돌아온다.

⇒ 발라디에,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p42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만큼 비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삶의 염세성을 드러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독배를 들고 나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 크리토! 나는 아스클레피우스에게 닭 한 마리를 주어야 하네.”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위대함을 조금이라도 지키려 했다면 침묵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은 삶에 대한 자신의 복수심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 니체, 죽어가는 소크라테스에서. 아스클레피우스는 의술의 신으로 그에게 닭을 주어야 한다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 생이라는 질병이 치유되었다는 말로, 소크라테스는 “오, 크리토! 인생은 질병이다.”라는 삶에 가장 모욕적인 말을 내뱉었다. 바로 죽음을 의사로 받아들였으므로.


p43 “세계와 인생은 아무런 참된 만족도 줄 수 없다. 따라서 세계와 인생은 우리가 집착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인식이 획득되는 것이다. 이것이 비극적 정신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비극적 정신은 체념으로 향한다.”(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디오니소스의 죽음 역시 염세성으로 읽혀지다) 니체는 「자기비판의 시도」라는 새로운 서문을 덧붙여 그리스비극과 디오니소스의 죽음에 들어 있는 긍정성이 쇼펜하우어식의 염세주의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4. 비극이 상연되는 극장과 심판의 법정


p44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그리스 비극이 하나의 연극으로 전락해 버린 이유를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에 돌리고 있다.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이것 때문에 “그리스 비극은 너무나도 비참함 죽음을 맞이했다.” 가면을 쓴 소크라테스로 지목된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를 물리쳤다.

⇒ 그리스 비극의 타락이 일어난 두 장소는 극장과 법원이다. 극장은 삶을 연극으로 만드는 장소이고, 법원은 삶의 죄를 추궁하는 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3대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에 의해 비극이 음악에서 연극으로 이론적 세계관이 비극적 세계관을 이기는 것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니체는 비극은 연극이 아니라 합창이었다 말한다.


p45 철학자들이 삶을 개념으로 포착할 때 그것 역시 일종의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사유 공간은 극장이며 그들이 세운 체계는 무대이고 개념들은 장치들이다. 니체가 “체계를 세우려는 자들의 연극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일차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이론적 인간, 즉 철학자들이다. 플라톤의 동굴은 극장의 전형이다.

⇒ 플라톤의 동굴에서 철학자는 동굴 바깥에서 참다운 세계를 알려주기 위해 동굴로 돌아오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동굴 속에서 깨달은 풍요로운 지혜들을 나누기 위해 동굴 밖으로 나간다. 플라톤 동굴은 무지의 장소이고 철삭자의 눈을 멀게 한 장소,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은 깨달음의 장소이고, 치료와 회복의 장소이며 초인으로의 변신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p47 극장은 숨은 구조와 관계들을 구상화하면서 동시에 구조 자체를 등장시킬 수 있어 구조의 보편성을 드러내기에 알맞다. 극장이야말로 객관적 표상들을 되찾고 해석하는 데 편리한 모델인 것이다. 관객들은 연출자나 감독들이 적당히 숨겨놓은 구조를 발견하고는 마치 제 것이나 되는 양 강한 확신을 갖게 된다. 더구나 극장은 사람들의 감각을 평등화하고 보편화하는 마력을 지녔다. 그 속에서 철학은 자신들의 체계와 구조를 확인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선 극장에 있어선 안된다. 극장에서 사람은 집단으로만 정직하다. …… 극장에 갈 때 사람들은 그 자신들을 집에 놓고 간다. 스스로의 발언권과 선택권을 방기한다. 자기의 취미도 버린다…… 가장 개별적인 양심도 최대다수로 평등화하는 마력에 굴복한다.

p48 극장이 관객들을 바보로 만든다면 법정은 그들을 죄수로 만든다.

⇒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법정 옹호자였고 인류 전체를 법정에 올린 그리스도의 죽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복음의 메시아가 아니라 죄를 벌하고 죄인을 심판하러 온 것이다.


p48~49 심판은 삶을 완전히 암울한 것으로 만들었다. 심판만큼 삶에 적대적인 것은 없다. “나는 법을 죽였습니다. 시체가 생명 있는 자를 불안하게 하는 것처럼 법은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심판은 삶으로부터 사랑의 요소를 완전히 박탈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신 자신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신이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심판의 사상과 정의의 주장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심판자는 아무리 자비롭다고 해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5. 미래의 철학자


p49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삶이 구원되어야 한다면 같은 이유에서 사유 역시 구원되어야 한다. 더구나 순수한 사유의 체계가 거짓 연극에 불과한 것처럼 순수한 생이라는 것도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


p50 사상이 삶을 지배하는 장면도, 삶이 다른 사상을 구속하는 장면도 관념론자들의 믿음처럼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니체는 “도덕적 개념에서 피와 고문의 냄새가 완전히 씻겨진 적이 없다”는 점을 상기시키다. 항상 “인간은 시대의 목적을 향해 훈련받아야 한다.” 어떤 사상이 자신에 부합하는 삶을 생산해내는 과정은 폭력과 훈련을 동반하고 있다. 불행히도 지금까지 철학은 이 과정에 동원되어 왔다. 철학은 군대가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고 난 위에 사람들의 정신을 길들이고 길러내는 작업을 수행해왔다. 니체가 철학자를 “국가가 신하를 기르기 위해 베풀어주는 관직”이라고 비꼬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어용철학자로 존재하는 것을 감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리 위에 더 높은 단계, 즉 국가가 있다는 것을 승인해야 할 것이다.

⇒ 사상이, 철학이 삶을 지배하기 위해 ‘이용’되어 온 부분이 있다는 점을 분명하다.


p50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국가를 통치하는 철학자의 꿈이지만 현실에서 철학은 국가의 시녀였다. 니체가 볼 때 국가에 대한 철학의 양보는 너무 지나치다.

       항상 사상가를 뒤쫓는 사상가, 다른 사람에 관한 사상가, 그들이 바로 철학자들이다.


p51 철학이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가로막는 거대한 수렁이다.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 나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 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p51 역사는 매번 습속이 지배하는 것을 깨뜨려왔다. 니체는 그것이 “습속의 윤리를 뚫고, 무서운 호위자들이 만들어 낸 대사건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무서운 호위자들이라고 부른 것은 ‘광기’다. 습속과 대결했던 많은 지혜로운 인간들은 광인으로 불렸고, 그들의 생각은 광기로 이해되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고, 존경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되었던가를 이해하는가? … 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p52 니체는 우리의 문명을 ‘아픈 것’으로 진단하지만 사람들은 니체를 ‘미쳤다’고 본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되’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광인으로 불리는 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정신은 일반적인 구속성과 대결한다.” "그러한 구속을) 참고 견딜 수 없는 정신이야말로 광기의 즐거움이 생겨나는 장소“, ‘탈주자’의 장소다.

    보편적 가치를 위해 길들여진 두뇌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진 것이 신앙이라면 명령하는 자, 새로운 가치의 발명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유의 정신이다.

⇒ 보편적 가치를 공유는 하고 있지만 그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시대.


p53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 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 당시대에 수용되지 못했던 많은 사상이나 예술작품들이 그 시대를 벗어나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면 ‘시간’의 때를 알 수 있다.


p53 그 자신이 이해되고 있지 않다고 느낀 니체는 자신의 독자를 미래의 시간에 둔다. 그리고 스스로를 ‘미래의 철학자’로 부르고 싶어한다.

⇒ 니체는 미래의 철학자를 철학적 노동자와 대비시킨다. 미래의 철학자는 가치의 평가자이며 창조자임에 반해 철학적 노동자들은 가치를 내면화하는 자로 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개념들을 해석하고 정리할 뿐 철학적 노동자들은 창조를 모른다.


p55 비판은 법정에 세우는 것이지만 재판을 받는 것은 기존의 가치들이다. 니체에게 심판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정을 법정에 세우는 것, 심판을 심판하는 것, 가치들에 대해 가치 평가하는 것이다.

⇒ 심판은 죄에 대한 추궁이 아니라 가치 평가다. 그가 심판한 것은 죄가 아니라 병이다. ‘부패’이며 ‘타락’이다.


6. '사랑'의 의미


p56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필로-소포스. ’지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다.

⇒ 음....?


p56 철학이 지혜를 사랑하는 방식은 어떤 것인가? 혹시 철학은 그것을 숭배하거나 그것에 예속되어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사랑은 숭배하는 것도 아니고 예속되는 것도 아니다. 숭배나 예속은 잘못된 사랑일 뿐이다.


p57 니체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우려하는 까닭은 그가 가진 폭군적 본능 때문이다.

    그는 철학에 토너먼트식 칼싸움을 도입했다. 진리를 가리기 위한 칼싸움.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다. 아테네에서 그의 변증법이 문제가 되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것들 것 죄다 까발리는 점잖지 못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변증법은 상대방을 설득시킬 품성을 잃어버린 자가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움켜쥐는 마지막 필사의 무기다.“

⇒ 이런 식의 진리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추하다. 진리와 사랑에 빠진 철학자, 그는 ‘현인’이기보다는 ‘지혜의 친구’여야만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너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너는 폭군인가? 그러면 너는 친구를 가질 수 없다.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가치를 써넣을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


p57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 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 니체가 바그너를 떠나 비제에게 갔던 것은 사랑에 대한 바그너의 몰이해 때문이었다. 바그너의 친구가 되고 싶어했던 니체는 자신의 아랫사람을 필요로 했던 바그너의 사랑과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p58 사랑을 희생과 연결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철학자들과 바그너가 공유하고 있는 사랑관이다. 그러나 희생은 사랑을 구속으로 만든다.

⇒ 바그너는 사랑을 이타적인 어떤 것으로 보고 있다. 바그너 작품 ‘방랑하는 화란인’에서 여성은 방랑자를 숭배해서 그와 결혼하지만 그는 방랑하기를 멈춘다. 바그너는 그것을 구원이라 여겼지만 그는 파멸했다.


p58~59 삶을 사랑한다는 것. 운명애(amor fati). 니체는 이것을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한다.

    삶을 사랑하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 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p59  삶을 변화시키는 예술로서의 철학, 그것은 불가능한 과제일까? 철학은 철학을 떠난 사람들의 철학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철학의 지반을 떠난 맑스, 다 쓰고 난 인식의 사다리를 버린 비트멘슈타인이 말하고 있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실천’은 철학에게 보내는 어떤 신호가 아닐까? ‘삶을 바꿔 보라!’―철학을 떠난 철학자들이 철학의 목표로 제시하는 것.

⇒ 말년의 니체는 그리스도에서 이러한 신호를 발견하고 그리스도가 오해되어 왔다고 말한다. 니체는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턴‘을 통해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만 신앙이 아니다.”


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니체의 계보학


1. 계보학 1 - 비판


p60 도덕은 사물과 행동에 대한 인간의 가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니체는 이러한 도덕에 대해 다시 가치 평가하고자 한다. 사물이나 행동을 도덕적으로 가치 평가하는 것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이 점엣 니체의 기획은 가치의 가치를 묻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니체의 ‘가치의 가치’에서 두 번째 가치는 첫 번째 가치의 생존방식, 존재방식에 관한 것이다. 가치의 가치에 대한 물음은 가치가 표현하고 있는 기반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은 어떤 조건 하에서 선과 악이라는 가치판단을 생각해냈던가?


p61 도덕학자나 도덕철학자에 대한 니체의 불만은 그들이 도덕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데에 있다.

⇒ 도덕학자들이 선의 절대적 기초라고 부르는 것들 대부분 우리 시대의 가치를 과거에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들 각자에게 주는 행위를 선이라 했다가 그것이 일반적이고 보편적 유형으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결여된 것은 역사 의식으로 그들은 도덕적 가치 자체가 생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도덕 역시 욕망을 표현하는 상징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 도덕학의 결여된 가장 큰 문제는 “도덕 그 자체의 문제”다.


p63 도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도덕은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진리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전쟁에 대한 공포나 공포 속에서 치러진 전쟁을 통해서 도덕은 일반성의 극대화를 요구한다. 도덕은 항상 ‘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

⇒ 니체는 바로 도덕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즉 “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p63 겁에 질려 소심한 사람은 사물이나 사태를 단순화해서 쉽게 지나치는 경향이 있다.

    도덕에는 소심함말고도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지이다. 우리가 우리 시대, 우리 환경에서 나온 생각들을 쉽게 일반화하는 데는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도 이유가 된다.

⇒ 그래서 니체는 도덕을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이라 불렀다고.


2. 계보학2 - 탐사


p64~65 니체는 이러한 도덕에 대한 탐사 작업을 계보학(Genealogie)이라고 불렀다. 계보학자는 돋보기나 현미경을 들고 있는 탐사자이다. 도덕은 전체를 보고 싶어하지만 계보학자는 전체로 환원되지 않고 있는 부분들을 본다. 도덕의 과도한 일반화 형식 속에서 난폭하게 처넣어지고 날카로운 선의 일치를 위해 깎여나가고 휘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계보학자의 일이다.

⇒ 계보학은 보편화에 반대한다. 보편적 가치란 가치에 있어 차이의 상실을 의미한다.


p65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의 유래와 발생을 묻는 작업이다.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동원된 역사가 아니라, 그 종합의 과정에서 빠져나가거나 휘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계보학자의 일이다. 과거로부터 신성화되거나 현재로부터 정당화된 가치들은 계보학자들이 찾아낸 간극들이나 이질적 충돌, 파편들과 마주하게 된다. 푸코는 계보학자의 탐사 작업을 ‘잃어버린 사건들의 해방’이라고 불렀다.

⇒ 기원이라는 심층을 향해 파 내려가서 계보학자들이 확인하는 것은 이질성과 다양성이다. 계보학자들은 이질성 확인뿐만 아니라 그것을 같은 표면 위에 올려놓는 사람이다. 동일성의 평면 위에 나타난 이질성과 차이! 새로운 것들이 나타날 때, 사건이 일어나는 평면이 조용할리 없다. 푸코는 계보학을 전쟁과 같은 역동적 모델이라 말했다.


3. 도덕의 자연사(natural history)


p68 화폐란 도덕적 판단처럼 가치의 표시이다. 그것은 모든 차이들을 소통하는 공통의 매개자이며 기준이고 척도다. 가치 문제를 다루는 도덕의 성격을 화폐만큼 잘 표현해 w는 것도 없을 것이다.

⇒ 니체는 도덕을 화폐위조에 비교하곤 했다. 성직자들은 곧잘 화폐위조자로 불렸으며 또한 마법사라고도 불렸다.


p69 도덕학자들로서는 도덕을 자연스러운 것, 본능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싶겠지만 도덕이야말로 인위적인 조작 행위다. 니체의 말대로 “모든 도덕은 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며, 자연에 대한…… 어느 만큼의 억압이다.

⇒ 화폐의 위조가 가치를 조작하는 행위인 것처럼. 가치의 이계를 역전시켜 버리는 것, 그것이 도덕에서의 화폐 위조 행위다. 다. …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화폐 자체가 가치의 위조물이자 마법이며 ‘철저한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학자들이 떠받드는 화폐는 하나의 가치 척도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사물이나 활동이 성공적으로 교환되도록 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법이며 뛰어난 위조 행위인 것이다.


p69 도덕주의자들은 “모든 열대 괴물이나 생물들 중에서 가장 건강한 것들에게서조차……악마적 속성을 찾으려고 한다.”

  자연, 즉 본성에 대해서도 본래적인 선과 악을 논한다. 우리는 확실히 자연을 지나치게 도덕화했다. 자연에 가까워지는 것은 선인가, 악인가? “인간(과 자연)의 도덕화, 그것이 바로 문제다.”


p70~71 도덕은 그 사회의 건강 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된다.

    개인을 떼거지보다 위로 끌어올리고 이웃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악이 되는 반면, 정중하고 겸손하며 유순하고 순응적인 정신과 평범한 욕망은 도덕적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


p72 도덕의 자연사를 보면 한 시대의 도덕은 다른 시대의 악덕이며, “한 민족이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민족은 조롱거리, 치욕이라고 부른다.” "한 이웃은 다른 이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 이웃의 영혼은 언제나 다른 이웃의 광기와 악의를 괴이하게 생각했다.“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이 특정한 환경과 계급, 교회, 시대  정신, 풍토에서 나온 도덕적 가치 판단을 일반화하는 무모함을 가져온다.

⇒ 서로 다른 도덕적 가치들이 역사에 존재했다.


p72~73 니체는 자신의 ‘위대한 스승인 쇼펜하우어와 배타적 관계“에 들어선 이유가 도덕의 가치 문제에 있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진실로 모든 철학자들의 일치를 끌어낼 수 있는 근본적 원칙이나 명제“를 꿈꾸었던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적 열망도 문제였지만, 결별의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은 그의 도덕관에서 묻어나는 병적인 징후였다. 쇼펜하우어가 주장한 가치 중에서 니체가 특히 문제삼았던 것은 “비이기적 가치, 즉 연민이나 자기 희생, 자기 헌신과 같은 본능들의 가치”였는데,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미화하고 신성시해서 ‘가치 그 자체’로 만들어 버렸다. 니체는 “아주 근원적인 불신, 훨씬 더 깊이 파고드는 회의론”이 자신 안에서 고개를 쳐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도덕에서 “허무에로의 유혹, 종말의 발단, 죽음과 같은 정체, 회고적 권태, 삶을 부정하는 의지, 궁극적으로는 병의 우울한 징표”를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허무주의로 나아가는 유럽 문화의 무서운 징조’이기도 했다.


4. 강한 자와 선한 자


p74 니체는 토양이나 혈통에 있어서의 건강함의 차이를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으로 나눈다.

⇒ 니체는 기본적으로 좋은 토양에서 선이 나오고 부조리하고 불량하며 빈약하게 느껴지는 곳에서 사람들이 부정하고 절멸한다고 본다. 니체는 ‘좋음’의 판단은 ‘좋은 사람들’ 자신에게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고귀한 사람들은 비속한 자들과 달리 자신이 창조한 가치에 이름을 붙일 권리를 가진다. '좋은‘은 ’고귀한‘ 혹은 ’귀족적인‘ 개념을 기본으로 해서 변형되어 왔는데 ’평민적인‘ ’비속한‘ ’저급한‘의 개념이 ’나쁨‘의 개념으로 바뀌어 갔다.


p76 귀족들이 ‘좋은’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어떠한 선악의 판단도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우등한 것과 열등한 것, 혹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귀족들은 나쁜 것에 대한 어떤 적의나 원한도 품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안된 것’, ‘불쌍한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 이와는 달리 노예는 ‘외적인 것’, ‘다른 것’,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노예는 자신과 대립되는 것,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 먼저 ‘악’이라 규정하고 상반되는 자신을 ‘선’이라 정의한다. 이리하여 좋은 것/나쁜 것이라는 윤리적 구분이 선한 것/악한 것이라는 도덕적 의미로 바뀐다.

 

p77 귀족적 평가 양식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있다.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p77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압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선한 자야말로 약한 자이다. … ‘선한 자들은 모두 약하다. 악인이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선한 자들인 것이다.

⇒ 강자와 지배자를 혼동함으로 니체 철학을 지배자를 위한 철학이라 사람들은 불렀다. 소크라테스는 약자들이 뭉쳐서 강력한 힘을 형성한다면 우세한 것이 아니냐고 하고, 칼리클레스는 노예가 승리했다고 해서 그가 노예이기를 멈추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자신의 가치판단 능력을 법에 넘겨주고 있는 한, 그는 여전히 약자이며 노예라는 것이다.


5. 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p79 약자들은 “적의 상태를 살핌으로써 인위적으로 자신들의 행복을 꾸미거나, 혹은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거나 기만할 필요”가 있었다. “유태인들, 그들이 기적을 행했다면 그것은 도덕상의 노예의 반란”, 즉 가치의 전도를 이루어 낸 일이다. 그들은 세계를 죄와 악으로서 해석해냈고, 그들의 고통을 하나의 시험으로 받아들였다.


p79~80 약자의 해석학에 따르면 “양을 채가는 독수리는 나쁘다. 따라서 독수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양이야말로 선하다.”

⇒ 양은 독수리보다 하나의 힘을 더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바로 강함을 억제하는 힘, 즉 유혹에 견디는 힘이며 독수리는 이 힘을 갖지 못했다 생각한다. 약자는 자신의 약함을 하나의 공적이자 소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복수할 수 없었던 약자들은 정신적으로 복수해 버린다!는 것. 바로 언어의 유혹을 써가면서.


p81 노예들, 약자들, 그들의 정신적 공격 본능이 밖으로 발산되지 못할 때, 그 본능은 안으로 투사된다.


p82 인간은 인간 자신을 질병처럼 학대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관리한다.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도 사악한 것의 침투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생활을 체크하는 청교도가 근대인의 얼굴이 되고 말았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신이 보고 있다. 신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보고 있다! 더구나 이제 죄는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닌가. 인간은 이미 ‘원죄’를 타고났으므로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형벌도 이처럼 잔혹하지는 않을 것이다.


p83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질병은 건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질병의 어떤 적극성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자를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성 때문이다.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


p84 강자는 능동성이나 적극성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다. 강자의 운동은 긍정에서 시작하며 능동적(작용적)이다. 이에 반해 약자의 운동은 부정에서 시작하며 반동적(반작용적)이다.

⇒ 들뢰즈는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으로부터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빼앗는다.” 반동적 힘의 능동적 힘이 행사된 이후 그 힘을 상쇄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p84~85 약자는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었는가.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니체가 약자의 도덕을 “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명령하고 창조하는 자에 대한 떼거리의 혐오! 강자는 “능동성 개념을 박탈당하고……적응이라는 개념이 전면으로 나온다. …… 그것이 바로 반동성인 것이다.”

⇒ 스스로 약자라 생각하며 강자를 ‘분석’하고 ‘비판’하며 산 것 같다. 그러나, 약자와 강자에 대한 글을 보며 나 역시도 강자=악인이란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6. 도덕이라는 동물원


p85 금욕주의적 성직자들은 먼저 병든 자들의 방어자, 의사, 구원자로서 다가온다. 그러나 그들이 병든 자를 지켜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환자들이 병에서 회복되는 것을 막는 것, 다시 말해서 성직자라는 의사들은 “의사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혀서” 자신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시킨다.

⇒ 이들이 의사로서 하는 활동을 나눈 니체에 의하면 첫 번째, 진정제와 마취제의 투여다. 성직자들은 그들을 위로할 해석의 체계를 제공하고 방향을 전환시킨다. 두 번째, 기계적 활동의 도입. 생각 없는 반복적 활동을 통해 병을 내면화시킨다. 성직자들은 ‘노동의 축복’이라 부르는 것이다. 세 번째, 조그만 즐거움의 제공. 선을 행할 때 유용한 보답을 해 주는 것. 이때 생겨난 우월감은 약자들에게 큰 위안과 행복을 제공해 준다. 네 번째 가장 결정적인 수단은 삶에 죄의식을 심어 주는 것. 성직자들이 마법사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것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환자를 죄수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모든 고통을 죄에 대한 벌로 이해함으로써 환자들이 고통에 더 이상 항거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p87~88 “도덕은 하나의 동물원이다. 덫에 빠져 있을 때조차 자유보다는 철책이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거기에는 성직자라는 맹수 조련사가 있다는 것.” 성직자들은 인간들이 ‘개선’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과연 ‘개선’된 것인가?

⇒ 니체는 약자의 운동, 노예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을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라 말한다.


7. 선악을 넘어서


p88 니체는 자신이 인정한 덕은 “판단을 누구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 인정받는 것과 상관없이 평가하는 것, 가축떼적 입법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요컨대 르네상스의 덕”이라고 말한다. 르네상스적 덕이란 도덕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것은 하나의 힘이다.


p90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 스피노자는 건강을 생각한다면 풋과일은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한다. 아담의 무능력이 태초의 과일을 선악과로 만들었다. 다른 짐승에게는 좋은 과일일 수 있으나 아담에게는 맞지 않기에 나쁜 것이라 말한 것을 아담은 도덕적 금지로 이해했다고.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1. 헤르메스가 전하는 메세지


p93 해석학자들은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듣지 못하므로 결국 헤르메스의 해석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결국 해석학자가 신의 참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르메스의 해석(헤르메스가 이해한 바로소의 신의 목소리)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중의 해석’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중의 해석은 참뜻을 알고 싶어하는 해석학자들에게 부여된 가장 가혹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 해석학의 유래가 헤르메스라고~? 헤르메스는 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필요할 경우 주석을 달아 이해하기 쉽게 바꾸는 ‘해석자’였다. 또한 거짓말과 도둑질의 대가이기도.


2. 진리의 해석학


p95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존재론적 차이, 고대와 근대를 가르는 시간적 차이,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공간적 차이, 이슬람과 기독교를 가르는 문화적・종교적 차이. 해석학자들은 자신과 차이를 두고 있는 타자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해석학자들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타자와 벌어져 있는 차이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이 없다면 해석학자들은 우선 차이를 넘나들고 있는 헤르메스를 이해해야 한다.

⇒ 니체의 해석학을 다른 해석학과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는 지점이 자신과 거리를 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보다 ‘차이(거리)’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니체의 구분선은 헤르메스를 대하는 태도에 있으나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3. 스핑크스의 눈


p103 진리의 해석학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보여주는 단어는 투시주의다. ……마치 풍경화의 원근법처럼 하나의 소실점을 정한 개인이나 집단은 거기에 맞추어 사물의 크기를 다르게 본다.


p103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음으로 해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니체


p105 니체는 필연성을 갖는 사실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주체’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연쇄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물자체니 실재계니 하는 것이 하나의 허구라면 이제 현상계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허구가 된다.


p107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Wille zu einer Optik)”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제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 그 조작과 훈련이 하나를 향해 일관되게 수렴되고 있다는 것이..


p108 모든 것들이 동등해지는 시대에 논리학은 번성한다. "논리학은 ‘몇 가지 동일한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이라는 전제 조건과 결부되어 있다. 논리적 사고나 추리가 진행되려면 이 조건이 먼저 충족된다고 전제해야 한다. 사건의 근본적 위조가 상정된 후에야 논리학이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4. 가치의 발명


p109~110 진리의 과잉은 진리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소멸은 부재나 결핍이 아니라 넘침과 과잉이다. 카오스나 미로야말로 니체에겐 즐거움의 대상이다.

      “모든 해석이 생장의 징후이거나 몰락의 징후이다. 통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타성의 욕구임, 다수성이야말로 힘의 징후이다. 세계의 불안정하고 혼미한 성격을 부인하고 싶어해서는 안된다.”

⇒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진리로 주장되는 것은 진리 자체가 힘이기 때문이 아니라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힘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p112 니체에게 해석은 무엇보다도 창조와 생성의 문제다. 해석 행위는 모든 차이를 아우르는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일도 아니고, 그것이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떠드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래를 만들려는 자가 벌이는 가치 평가 행위인 것이다.


p112 사람들이 사실들을 해석이라는 행위를 통해 받아들일 때 그것은 매우 능동적인 행위가 된다. 그들은 해석을 통해 하나의 가치를 창조하고 생성한다. 니체가 절대주의나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창조와 생성의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 거 없다고 설득한다.

⇒ 어쩌면 끊임없이 생각한다는 것, 철학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 좀더 나은 생을 위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생이 보다 의미있어 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에 실패하더라도.

 

P113 니체에게 해석은 지배적 가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다. 그것은 인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자유정신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많이 배운 자들의 해석은 너무 노쇠하다. “많이 배운 자들은 모든 격렬한 욕망을 잊어 버렸다.”

     “창조하는 자”를 그들은 가장 증오한다. 표들과 낡은 가치들을 부셔 버리는 자, 파괴자를 그들은 범법자라고 부른다. 선한 자들은 말하자면 창조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 어쩌면 해석에는 늘 비판이 따랐던 것 같다. 다른 것에 굳이 해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그 해석이란 게 비판이란 게 지배적 가치에 보다 치우쳐져 있었다는 점에서.


P114 니체의 해석학은 과거의 참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가 긍정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을 때, 해석은 이 문제를 ‘생성’으로 돌파한다.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의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P115 니체의 해석이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5. 니체에 대한 해석학 - 방법과 스타일의 문제


P115 해석자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와 생성이다.

     들뢰즈는 아주 흥미로운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직업은 철학에 있어 일종의 계간을 통해 사생아를 만들어 버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 해석된 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해석.


P116~117 코프만은 니체의 스타일, 특히 경구나 은유가 ‘저속한 무리를 내쫓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보면 니체는 자신의 이야기를 포착할 수 있는 독자를 선택하기 위해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셈이 된다. 경구나 은유는 단일하고 결정적인 해석을 쉽게 무너뜨린다. 해석은 항상 무한하게 열리기 때문이다.

⇒ 그것이 아마 우리가 아포리즘을 찾는 이유가 아닐까.


P117 다양한 스타일의 문제를 글쓰기의 문제와 관련해서 더 깊게 파고 든 철학자는 데리다였다. 그는 스타일이란 뾰족한 형태의 물체, 즉 펜이나 남침을 의미한다고 지적하고, 그것은 일종의 박차(spurs)라고 말했다. 박차의 갈라진 틈, 펜의 갈라진 틈에서 나오는 잉크는 형이상학적인 축 사이를 자유롭게 춤추는 ‘갇히지 않은’ 글쓰기이다. 데리다는 단호하게 말한다. “니체의 스타일은 결정할 수 없다. 만약 니체에게 스타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 박차를 안타봐서 그런가. 자꾸 갇힌 글쓰기로 가고 있다.


p118 들뢰즈는 더 이상 니체의 텍스트를 분석 수준에서 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니체 사상의 특징이 방법에 있다고 말한다. 즉 니체의 텍스트들을 파시스트적인 것, 부르주아적인 것, 혁명적인 것으로 규정짓기보다 그런 힘이 만나는 하나의 장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니체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가로지르고 있는 혁명적 힘들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것과 만나는 일이다.


6. 헤르메스는 해석자였다


p119 걱정스러운 일은 해석학이 정치의 장에 개입할 때 생겨난다. 현실의 정치는 해석학적 고통을 금방 치유하려고 달려든다. 차이를 고통으로 느끼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검진 없이 정치가들은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운동에 돌입한다.


p120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 작은 정치의 시대


p121 지난 시대 많은 사상가와 운동가들이 사회주의의 실패에 그토록 예민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체제’ 자체를 문제 삼는 거대한 비판과 새로운 체제에 대한 소중한 꿈이 깨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체제에 대한 실험의 실패로 받아들여졌다. 그 후로 급진적인 사회 운동과 정치사상은 급속히 퇴장해 버렸다.

⇒ 시장을 능가할 효과적 경제체제의 대의제를 넘어설 수 있는 정치 체제를 꿈꾸는 일이 불가능 할 때 운동이나 사상의 목표가 좀더 공정한 시장, 좀더 충실한 대의제로 전락하게 될 때, 급진적 운동과 사상은 퇴조한다.


p122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아니 정지하지 않았다. 역사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


p123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어이다.


p123 니체는 우리 시대를 ‘정치적 영역이 위축된 시대’라고 부른다.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국민들의 ‘군주적 본능’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더 이상 군주적 본능을 가지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주권자, 입법자, 가치의 창안자이기를 그칠 때, 정치 영역은 위축되고 만다.


p124 근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것은 ‘정치’가 아니라 ‘사회’이다. ‘사회’는 공통성의 영역이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영역이다. 그리스에서 정치적 영역이 갖추어야 할 필요불가결한 조건이 다원성이었다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은 ‘표준화’다.

⇒ 아렌트의 해석이다.


p124 니체식으로 보자면 순응주의 사회, 즉 사람들이 한 무리의 가축떼로 전락한 사회는 오래 지속되어온 서구의 형이상학과 기독교, 그리고 그것이 습속화된 삶이 도달한 곳이다. 근대성이란 허무주의 운동의 귀결점이다. 니체는 ‘근대성(현대성)에 대한 비판‘에서 그것을 하나의 ’쇠퇴 형식‘이며 ’소멸해가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정치는 그 앞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근대란 ’정치의 쇠퇴 형식‘, 혹은 ’정치의 소멸‘이다.


2.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 1 - 근대 국가와 전쟁


p125 니체의 근대 정치에 대한 비판 1 : 가치 창조와 평가 봉쇄

     정치의 형이상화이다.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이 보여준 폭력성이 정치적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차이’를 억압하는 ‘동일성의 정치’가 된다.

⇒ 정치학자들은 보편적 가치의 토대가 없는 차이들은 혼란만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p126~127 자유주의 정치학자 롤스는 정치의 과제를 안정성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위해 “정치의 영역에서 갈등을 몰아내자”고 했다. 정치의 과제를 가치의 창조와 평가가 아니라 안정성의 유지로 설정하면, 정치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거나 평가하기보다는 기존에 설립되어 있던 가치를 내면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아니면 내면화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가치의 발생과 유래에 대한 물음을 철저히 단속하려 할 것이다.


p127 니체는 사람들이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그것의 획득을 고려하는 자(그것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자)가 누구인지를 묻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예속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다만 타인들이 평가하는 대로 존재하는 인간들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인정되었던 것, 또는 그들로 하여금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가치도 찾아내지 못한다.

⇒ 이 세상에서 과연 예속적 계층에 머물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p127 니체의 근대 정치에 대한 비판 2 : 허무주의적 인간형 산출

     허무주의적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는 잔인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개입한다. 니체가 저작의 이곳 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쓰고 있는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라는 표현은 가치의 습속화를 통한 근대적 정치 주체의 생산을 분석함에 있어 매우 유용하다.

⇒ 나, 니체가 말한 인간형인가.


p127·128 니체의 근대 정치에 대한 비판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빠져서는 안될 하나의 요소가 더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두 측면을 매개해 주는 새로운 우상, 즉 국가에 대한 설명이다. 국가는 근대의 정치적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 니체는 국가라는 잔인한 도구가 전쟁에서 왔다고 말한다. 패자의 것은 모조리 승자의 것이 되며 폭력은 최초의 권리를 제공한다. 국가의 원형은 전쟁과 군사 계급 속에서 제시되고 있다. 전쟁은 혼돈 상태의 대중들을 군사적 카스트 계급들로 분리시켜 “전사적 사회”구조를 만들어 내는 효과가 있다.


p129 국가는 바로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공통의 힘”으로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실체다.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로 안전을 위해 인위적인 계약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 계약은 다시 국가에 의해 보증된다. 이것이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의 이동이며, 정의와 법의 탄생이다.


p129 니체가 말하는 국가는 전쟁의 종식이 아니라 전쟁의 지속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군사적 수호신의 끊임없는 재생산을 목표로 하는 국가와 전쟁의 종식을 목표로 하는 국가는 전혀 상반된 성격을 갖는다. 결국 근대의 정치에서 나타나고 있는 국가는 ‘전쟁 공포의 확산’에서 생겨난 후자의 국가다. 칼을 든 무시무시한 국가를 외치는 홉스에게서 전쟁에 대한 공포를 읽어 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 국가의 필요성을 각인시켜주는 전쟁. 그리하여 끊임없이 전쟁의 공포를 확산시킨다. 더구나 분단 국가라면 그 공포감은 더욱 확산될 터이니.


p131 추상화되고 균질화된 사회에서 전쟁의 힘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칼을 든 군주는 전쟁을 막으면서도 그 흔적을 지니고 있지만, 일반의지는 칼 없이도 전쟁을 막아낸다.  모두에게 주어진 한 표가 전쟁의 힘을 흡수해 버렸다. 민주주의는 가장 효과적인 전쟁 억제 수단이다.

⇒ 흠, 민주주의는 가장 효과적인 전쟁 억제 수단이라고? 민주주의야말로 가장 효과적으로 전쟁을 부추길 줄 안다. 그 한 표가 어떻게 행해지는지를 보라. 어디에 머무르는지를 보라.


p131 고대의 국가가 전쟁에서 기원한다면 근대의 국가는 전쟁에 대한 피로감에서 등장한다. 모두가 지쳐 더 이상의 전쟁을 포기할 때, 새로운 우상인 국가가 등장한다.

⇒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가 음독자가 되는 곳,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


3.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2 -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p132~133 니체는 우선 자유주의자들이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하는 기본 원리에 대해 비판한다. ‘자유로운 개인’이란 하나의 형이상학적 실체일 따름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선험적인 개별화된 자아라는 개념에 동의하며, 사회적 관계에 우선한 완전한 인간들을 단위로 삼는다. 니체는 “철학자들이 종래 생각해 온 바의 개인, 즉 ‘단일인’이라는 것은 하나의 오류이며, 개인은 개별의 실체, 하나의 원자, 사슬 안의 고리, 그냥 과거로부터 내려온 존재 등이 아니며, 개인은 그에게까지 이르는, 그를 포함한 ‘인간’이라는 하나의 연속적 전체를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p133 ‘자유로운 개인’을 떠드는 자유주의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니체는 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운 인격은 볼 수가 없으며,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비겁하게 정체를 숨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뿐이다. 개성은 내면적인 것으로 움츠려 들어가, 밖에서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로운 개인’이란 특이성을 갖추지 못하고 보편성 아래서 단지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개별자들인 셈이다.


p135~136 니체는 사회주의를 루소와 관련시킨다.

     니체는 루소의 사상에서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발견하는데 이것은 사회주의 비판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 두 가지 특징이란 바로 인간의 자연적인 선한 본성을 찾아 나서는 형이상학적 태도와 사회에 대한 원한의 정신이다.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지금까지의 ‘질서’가 폐지되어 ‘자연적 충동’이 해방되었으면 하고 기대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사회의 토대를 세우는 데 어떤 영감을 주는 진정성이나 자연적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혁명이 성공하면 아름다운 인간성의 자랑스런 신전이 솟을 것”이라는 ‘위험스런 꿈’은 적대적 변증법을 통해 유토피아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망에 다름 아니다. 니체는 이것을 ‘선량한 원시인의 권리 찾기 운동’이라고 말하고 형이상학적 운동이 그렇듯이 이 운동도 종국에는 ‘기진맥진한’ 사회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p136 사회주의자들은 문화나 제도, 도덕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그들은 오직 소유물의 분배만을 본다. "사회주의자들은 소유물의 분배가 과다한 불종정과 폭력의 결과임을 지적하고 부당한 기반 위의 구축물에 대한 의무를 전체적으로 거부하는데, 이때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개개의 것만을 보고 있다“

⇒ 게다가 사회주의자들은 반동적인 운동을 통해 국가 속에서 최고의 이상을 발견한다.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사회주의는 전제주의를 닮아간다.


p137 니체는 “사회주의가 원하는 국가가 달성된다면 생성의 강한 에너지는 파괴될 것”이라고 말하고 그때 국가는 새로운 생성적 힘을 상실하고 허무주의적 형태를 띠게 될 것이라고 하였따. 그래서 니체는 현대민주주의를 ‘국가의 몰락에서 나온 역사적 형태’라고 말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나태함과 피로, 약함의 해방’이다. 그렇다고 해서 니체가 국가의 부흥을 외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아마도 나치즘처럼) 수동적 허무주의인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에 대항하여 국가나 민족의 이름을 강화하려는 시도들도 나타나지만, 니체에게는 국가란 항상 ‘거짓 신일 뿐’이다.


p138 어떻게 보면 유럽의 민주주의는 허무주의의 변증법이 도달한 필연적 현상이다.


p138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의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4. 길들이기와 길러내기


p140 다이어트라는 말과 관련해서 우리는 두 가지 측면을 주목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비율’이라는 단어와 ‘합리성’이라는 단어 사이에 존재하는 친화성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성’의 중시이다.

⇒ 시간성의 의미는 다이어트의 라틴어 어원이 ‘dies', 영어의 ’day'라는 점에서 추론된다. 정치와 관련된 행사들이 특정한 날들, 달력을 통해서 배치되고 통제되었다.


p141~142 니체는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고도의 권위를 ‘윤리’라고 보았는데, 윤리는 관습에 의하여 규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니체는 비윤리적이라고 비난받는 것들에 주목했는데, “비윤리적이라고 비난받는 것들은 개인적인 것, 자유로운 것, 제멋대로인 것, 길들여지지 않은 것, 예측되지 않은 것, 계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런 점에서 훈육의 대상으로 삼았던 비합리적 힘으로서의 신체는 단순히 ‘살(flesh)'의 의미로 제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충동이나 욕망처럼 잘 길들여지지 않고, 예측되지 않으며, 계산을 방해하는 힘을 가리키는 것이며, 사회체 안에 존재하는 계산되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은 세력들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 나도 나를 복종시키는 고도의 윤리 아래 늘 죄인처럼 살고 있다.


p142 체제는 자신의 안정을 위해 “인간을 가능한 한 재빨리…… 시대의 목적을 향하여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니체는 이 ‘훈련’의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우선 “사회나 국가 같은 개체가 개개인을 굴복케 하여 고립에서 끌어내고 하나의 단체에 정렬시킬 때,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기초가 정비”되고, 이것이 익숙해지면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하여 그것이 본능이 되도록 한다.” 하나의 작업이 있어야 하고, 그 이후에 본능적으로 ‘미덕’으로 숭상되어야 한다. 첫 번째의 작업이 ‘길들이기’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 작업은 ‘길러내기’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 길들이기가 지쳤을 때쯤 길러내기를 하지. 지금은 길러내기의 사회인가.


p143 잔인한 형벌은 ‘기억술’을 위해 동원된다. 니체가 예로 들고 있는 17세기 독일 형벌의 잔혹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니체는 이 작업을 ‘기억할 수 있는 동물 기르기’라고 명명한다. ‘기억할 수 있는 동물’은 또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된다. 그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동물이 되는 것이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그 사회에서 규칙적이고 필연적인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p143~144 길들임의 작업이 끝나면 길러내기의 작업, 즉 재생산의 작업이 시작된다. 강제된 덕목들은 이제 자연스러운 본능이 되어야 한다. 길들이기의 주요한 수단이 군대였다면, 길러내기의 주요한 수단은 학교이다.

p144~145 길들임과 길러냄의 작업은 형이상학적 가치의 변증법적 운동과 함께 허무주의 운동의 지배사를 이룬 양 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각 체제에서 선언된 가치들을 능동적으로 가치 평가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보다는, 그것들을 허위적 능동성으로 내면화시키고 그것에 무의식적으로 복종하도록 함으로써 허무주의는 하나의 지배를 이룰 수가 있었다.


5. 아곤의 정치


p146 니체가 아곤(agon)이라고 부르는 그리스의 독특한 정치 문화는 정치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소재들을 제공한다. 아곤은 보편화나 전체화에 빠지지 않는 다양성의 정치가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적대가 아닌 경쟁을 위해 어떤 정치적 기술들이 동원되었는지를 보여준다.

⇒ 아곤은 고대 그리스의 경품이 걸린 경기, 경연을 말하고 연극에서는 인물 간의 갈등과 대결을 말한다.


p147~148 그리스 사회는 지나친 천재의 출현이 경쟁 자체를 방해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도편 추방’이라고 하는 제도를 두었다. 그러나 우리는 도편 추방을 사회의 조절장치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도편 추방은 자극의 수단이고 천재에 대한 보호의 수단이라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이것은 일인의 지배를 혐오하며 그것이 지닌 위험을 경계하는 제도이지만, 천재를 죽이는 제도가 아니라 오히려 천재를 보호하고 더 자극하기 위해서 제2의 천재를 만들어 내는 수단이다. 다시 말해 이 제도의 핵심은 천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천재를 여럿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


p149 스트롱은 그리스의 폴리스를 “시민들은 도시 국가 안에 존재하지만, 그것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았다. 사회는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의 선택형태가 자신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기반을 제공할 뿐이었다”고 표현하였다.


p151 니체가 오늘날의 국가에 대한 ‘유일한 저항 수단’이라고 말했던 것을 다시 떠올려 보자. 그것은 바로 ‘전쟁’이었다.

⇒ 그리스 위대한 정치가들은 아곤적 상태를 유지시키려 노력했고 국가의 목적을 전쟁의 끊임없는 재생산에 두었다.


p152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리를 초월적 기구에 양도하면 양도할수록, 가장 평균적인 자들의 그리고 마지막에는 최대 다수자들의 지배에 만족하게 된다.” 우리는 권리를 양도하는만큼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니체가 법과 관습, 문화에 대한 적대를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권리를 양도함에 있어 양도받는 자에 대한 검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실 검열을 해봤자 양도받는 자의 습성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


p152 니체가 자주 말하듯이 좋은 전쟁은 화약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 허무주의, 니힐리즘(nihilism)은 라틴어의 ‘무(無)’를 의미하는 니힐(nihil)이 어원이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가 원래 의미라는 주장이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을 니힐리스트라고 하였다. 현대에서 니힐리즘은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가치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 그러한 입장에 따른 생활태도 등을 총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도 일종의 니힐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사회의 진보란 모든 사회적 제도를 해소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는 무정부주의도 니힐리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1 - 자연학 + 윤리학


1. 초월적인 것의 죽음과 우주론 - 원자론의 경우


p154 기독교의 창조론이 ‘무’에서 시작한다면 그리스인들의 출발점은 ‘유’이다. 세계의 기원이나 운동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사고 방식을 잘 보여주는 주장 중의 하나가 원자론이다.

⇒ 유에서 시작한 원자론은 세계의 목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는 어떤 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p154~155 원자론은 세계에 대한 초월적인 것의 침투를 막는다.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초월적인 영역에만, 그것도 이 세계에는 무관심한 채로 있어야 한다. 원자론자들은 세계가 ‘원자와 허공뿐’이라고 말한다. 이 세계는 원자들의 영역이므로 신이 이 세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원자로 구성되든지, 아니면 허공으로 있든지 (실존하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이다. 따라서 원자론은 신의 죽음에 대한 실질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 니체 역시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였다는 점에서는 원자론들과 통하는 면이 있다.


2. 왜 원자가 아니라 힘인가


p159 니체는 원자를 힘으로 대체한다. 힘의 첫 번째 속성은 그 자체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다른 힘이 없다면 힘은 존재하지 못한다. 하나의 힘이 정의되기 위해서도 복수의 힘이 전제되어야 한다.


p159 힘의 두 번째 속성은 ‘표현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p161 힘의 세 번째 속성은 정지되어 있는 양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멈추어 있는 힘은 없다.


3. 힘의 질 - 능동과 반동


p165 니체의 ‘의지’라는 용어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신적 능력이 아니다. 니체가 말하는 ‘의지’는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모든 힘 안에 내재하는 그야말로 ‘어떤 것’이다.

⇒ 니체가 힘을 분석함에 있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질적인 차이를 통해 드러나는 의지이다. 니체에게 강약의 문제는 양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p168~169 '부정의 의도‘ 아래서 반동적 질을 가졌던 힘들이 ’강화의 의도‘ 아래서는 능동적 힘으로 전화된다. 금욕이나 단식도 부정의 의도 아래서는 욕망을 억누르는 도덕적 통제의 수단이지만, 강화의 의도 아래서는 신체를 건강하게 만들고 맛을 음미하는 능력을 배가 시켜 주는 수단이 된다. 결국 우리는 힘들의 질적인 차이가 그 내면에 있는 의지나 의도, 다시 말해서 ‘권력의지’의 차이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문제는 권력의지의 차이이다.


4. 권력의지에 대한 오해


p169 니체는 힘들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내면의지가 바로 권력의지라고 말하고 있다.

p170 니체가 힘의 내면의지로서 권력의지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정신적인 작용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힘의 내면의지의 본질은 명령에 있으니 권력의지는 모든 힘에 내재한 명령 자체이다.


p171 의지의 명령적 속성 때문에 “의지란 본래 주인으로서 욕망을 다룬다. 즉 그것에 방향과 한도를 지시하는 것이다.”


p172~173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욕망에 대한 또 다른 정의가 있는데, 그것은 욕망을 ‘생산’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때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넘침’이다. 욕망을 그 자신이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즐거움과 관계시키는 것이다. 결핍된 자의 초조함과 넘치는 자의 즐거움은 너무도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항상 이렇게 물었다. “나는 개개의 경우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여기 만들어져 있는 것은 기아가 원인인가, 과잉이 원인인가?”


p174 니체는 ‘의지’란 ‘명령’이므로 본래 주인과 관계되는 것이지만, 어떻게 노예나 약자에게도 관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그는 이제 허무주의 역시 하나의 권력의지이며 지배의지라고 말한다. 허무주의자들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 말을 믿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실제로 무언가를 원하지 않을 때조차도 그 권력의지는 무언가를 원하고 있으며 상황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이다. “허무주의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무의 의미’ 혹은 ‘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무화하려는 의지’이다.


5. 권력의지의 윤리학과 권력 느낌


p175~176 니체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표현하는 용어들은 다양하다. …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은 ‘긍정과 부정’이다. 긍정은 디오니소스의 정신이며, 그리스 예술의 정수이고, 예수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이기도 하다. 반대로 부정은 삶을 비난하는 노예의 것이고, 심판을 불러오는 사제의 것이며,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포섭하려는 변증법의 것이다.


p176 부정의 권력의지는 행위에 대한 금지나 부정, 단념을 조장한다. 부정의 권력의지는 법이나 제도, 관습과 도덕에서 자신의 훌륭한 도구를 발견한다. 긍정의 권력 의지는 행위 자체를 촉진시키며, 더욱이 지속적 행동을 강조한다.


p177 마주침의 순간에 작동하는 권력의지가 어떤 것이냐의 문제는 ‘강하게 되느냐(강자의 생성)’, ‘약하게 되느냐(약자의 생성)’를 결정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곧바로 윤리 문제를 발생시킨다. 어떤 것은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것인가? 선악이라는 도덕의 문제를 넘어서 ‘좋음’과 ‘나쁨’이라는 윤리의 문제로 한 힘은 성장하기 위해 다른 힘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사실상 해석은 “무엇인가를 지배하여 주인이 되기 위한 수단”이다. 어느 것이 해석하는가? “권력의지가 해석한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해석이고 평가이다. 그러나 니체는 여기에 다시 하나의 해석과 평가를 제시한다. 해석에 대한 해석, 가치 평가에 대한 가치 평가.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2 - 자연학 + 윤리학


1.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


p180~181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가 이해하는 세계의 존재방식―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의 생성방식―이다. 이미 우리는 권력의지가 힘들을 감각하고 평가하는 권력 느낌(감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새로움과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고귀한 운동으로 느낀다. 하지만 부정의 권력의지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유한자들에게 부여된 고통이나 불완전한 감각 기관에 비친 가상쯤으로 생각한다.


p181 원자론자들은 세계를 조성과 해체를 반복하는 원자들의 놀이로서 이해했다. 원자들은 “영원한 투쟁과 전투”를 벌이며, “계속해서 만나고 계속해서 헤어진다. 영원불멸하는 존재란 미신 속에서나 존재할 뿐 이 세계 안에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한 존재는 원자들이 용납하지 않았다.


p182 죽음은 항상 새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멸할 수 없는 존재는 태어날 수도 없다. 원자들의 해체가 죽음을 의미했다면 그것들의 조성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 니체는 여전히 ‘불멸하는 존재’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원자 개념이 못마땅해 그것을 힘으로 바꾸었다. 에피쿠로스나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론적 세계관은 니체의 영원회귀를 이해하게 해주는 중요 전통 중의 하나다. 니체에게 세계란 “어떤 손실도 없이 정말 긴 세월을 거듭 회귀 (반복)하는 힘의 대양”이었다.


p183 “한 번 생성된 것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슬프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사물들은 그들이 생성되어 나온 바로 그곳에서 필연적으로 소멸한다.

⇒ 아낙시만드로스는 세계에 대한 정반대의 해석을 한다.


p184 니체는 생성의 세계를 도덕적 해석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한다. 생성의 세계는 무구(innocence)하다! 생성을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p186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2.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 익숙한 오해


p188 니체는 기계론자들의 해석에 반대하면서 “무한히 반복되는 그 놀이라는 ‘순환 운동’을 즐기고 있는 세계’로서 영원회귀를 묘사했다.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언급에서 보았던 것처럼 니체는 아주 일찍부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를 하나의 ‘놀이’로서 이해해 왔다.


p188 세계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이며,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고, 전체로서는 그 크기를 바꾸는 일이 없는 청동처럼 확고한 양이면서도 계속해서 변화한다. …영원히 회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서, 어떤 포만이나 권태, 피로도 모르는 생성으로서, 자기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와 영원한 자기 파괴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p191 영원회귀는 동일한 반복을 확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성을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생성의 반복은 죄지은 자들의 운명이기는커녕 삶의 경이로움이며 그 자체로 삶의 구원이다. 생성을 긍정하는 것은 권력의지의 최고의 표현이다.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 이것이 최고의 권력의지다.” 존재하는 것은 생성뿐이다. 그리고 생성만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영원회귀는 이러한 생성의 반복을 의지하는 것이다.

     생성의 반복을 의지한다는 점에서 영원회귀는 또한 시간을 구성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시간이란 생성들을 통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생성을 긍정하는 것은 시간을 긍정하는 것이다.


p192~193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하지 않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전적으로 긍정의 의지 편에서 서서 부정의 의지와 대결한다.


3. 반복의 두 경우 - 병에 걸린 차라투스트라와 회복된 차라투스트라


p195 생성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만큼이나 시간 역시 생성을 필요로 한다. 깨달음의 시간은 차라투스트라의 새로운 생성, 새로운 변신을 필요로 한다.

     생성 즉 시간을 긍정하기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무엇보다도 과거와 대면해야 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의욕하고 있다면 그는 먼저 이미 지나간 시간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하지만 과거는 의지하는 자들에겐 가장 큰 난관이다. 어느 누구도 과거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의지는 이미 행해진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력하다.


p197 순간들을 통해 볼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순간들 속에 다른 시간과 공존하며 경쟁하고 있는 시간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과거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 ‘순간’이다. 니체는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미래를 사유함으로써, 그리고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p200 해석자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동안 차라투스트라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이다. -맑스


4. 긍정을 부르는 긍정


p203 '보다 높은 인간'은 모든 가치의 파괴가 일어나는 지점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가치 판단에서 나타날 수 있는 위험을 피하고자 했다. ‘최후의 인간’도 새로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스스로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새로운 자기를 만들려는 자는 기존의 자기를 버려야 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p203 긍정에는 부정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긍정과 부정의 위계가 나타난다. 긍정은 부정보다 강력하다.

⇒ 들뢰즈는 이렇게 표현한다. 부정은 긍정에 대립되지만 긍정은 부정과는 다르다. 우리는 긍정을 부정에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긍정 그 자체 내에 부정을 위치시키는 문제이다.


p205 긍정에 들어 있는 영원회귀의 원리가 나타난다. 긍정은 적극적으로 다음의 긍정을 의지한다. 긍정이 멈추는 순간에 부정은 승리한다.


5. 차이의 놀이와 회귀의 비밀


p207 차이에서 긴장을 느끼고 대립감을 느끼는 것은 부정의 권력의지다. 그래서 부정은 생성의 놀이, 차이의 놀이를 멈추고 싶어 한다.

⇒ 긍정의 권력 의지가 벌이는 차이의 놀이를 우리는 다수성, 자신의 생성, 우연의 차원에서 이야기 할 수 있다.


p208 우연이란 차이가 모든 것 속에 분포된 상황이다. 필연적인 법칙으로부터 일탈하는 흐름이 우발적 사건을 만들어 낸다. 우연은 창조적 힘이다. 우연은 카오스와 미로를 즐기는 정신이다. 미로나 카오스는 길이 없음이 아니라 길의 넘침이다. 이로써 생성의 공간이 열린다.

     다수성과 운명애, 우발성은 긍정의 권력의지의 특징이며 영원회귀의 방식이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부정의 권력의지보다 위계가 높다.


p208 이제 모두에게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바로 선택의 문제, 실천의 문제다. … 긍정의 권력의지는 항상 회귀하지만 너 자신이 회귀할지는 ‘선택의 문제’다.

⇒ 항상 모든 것의 마지막에는 ‘선택’과 ‘실천’이란 것이 남는다.


7장. 인간 -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1. '과'


p211 니체는 모든 것을, 심지어 이 혹성 전체가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믿는 인간들의 오만과 허영심을 꼬집는다. 그에게 인간 중심주의는 한 편의 코미디에 가깝다. 자신을 세계 모든 존재들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개미나 모기와 다를 바 없다. 개미나 모기도 자기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볼 것이다. 인간은 마치 신이 자신들을 위해 세계를 창조한 것처럼 믿고 있지만 “만약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인간은 ‘신의 원숭이’로 창조되었을 것이다.”


p214 니체는 17세기를 “인간을 발견하고 질서를 세우고 발굴하려고 노력한 세기”라고 말한다.

 인간이 자연에서 분리되어 자연에 자기 잣대를 들이댄 것, 자연이나 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드러내는 것이 이 이후이다.


p215 자연은 “인간이 자연의 이름을 부를 때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인간이 제 자신의 척도에 자연을 끼워 맞추고, 제 스스로 생각하는 자연과 다른 자연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한 인간은 영원히 자연과 화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인간은 자연을 잘못 이해하므로 자기 자신도 잘못 이해한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하지만 모든 것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 해도 남아 있는 게 하나 있다. 니체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과’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났기 때문이다.


2. 진화와 변신


p216 니체는 그 운명의 날에 등장하게 될 존재의 이름도 정해두었다. 바로 초인이다. 초인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 인간의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다.

⇒ 제 주검에 깜짝 놀라 되돌아가면 그 길목에는 원숭이가 서 있고, 앞으로 돌아서면 초인이 서 있다. 인간이란 결국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하다.


p218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한 결과라면, 초인은 인간의 철저한 몰락으로부터만 출현한다. 초인은 결코 인간이 진화한 종이 아니다. 니체는 초인에 대한 ‘진화론적’ 이해를 경멸했고, 반다윈주의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 니체가 보기에 인간의 역사는 약자들이 승리한 역사이므로 진화라고 말할 게 아니라 퇴화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


p218 인간이 진화를 주장한다면 초인은 변신과 변용을 주장한다. 변신이나 변용은 진화가 아니다.

⇒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서 ‘변용’에 대해 이렇게 그르친다. “내가 너희에게 세 가지 변용을 들겠다.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마침내 아이가 되는 변용을.”  낙타는 잘 견디는 정신의 표상이다. 주어진 가치를 묵묵히 수행하기만 하는 낙타는 “선악에 있어 창조자가 되고 싶은 자는 먼저 파괴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에 비해 사자는 거대한 부정의 정신이다. 낙타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사자는 이해한다.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 자신의 터전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사자 역시 긍정을 알지 못했다.  ‘나는 하고 싶다’보다 위에 있는 것은 ‘나는 존재한다’이다. 사자가 할 수 없는 일을 어린아이가 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사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린아이는 존재 자체로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한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이고,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다.


p221 만약 초인이 생성(변신)의 힘이라면 그것은 긍정의 권력의지를 내면적 질로 가지고 있으며 영원회귀를 통해서 존재한다.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무엇이 인간 종족을 계승해야 하는가가 아니다. 인간이야말로 하나의 ‘종국적 존재’이다.


3. 진희 죽음과 인간의 몰락


p211 인간이 몰락하고 초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신이 죽었다”는 복음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복음을 전하는 자는 광인이다.

⇒ 니체가 신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p222 니체는 신이 죽은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신은 시체로서도 살 수 있다! 신앙의 대상이 죽으면 신앙이 소멸할 것이라는 기대는 완전한 오판이었다. 왜냐하면 신앙으로 존재하는 자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신의 죽음이 신앙으로 존재하는 자, 즉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면 신의 죽음은 없는 것과 같다.


p223 인간이라는 종이 존재하는 한 여전히 동굴 벽에는 신의 그림자가 움직인다. 신은 인간이라는 종의 존재방식이다. 신은 인간 이전에 존재해서 인간을 창조한 게 아니라 인간과 동시에 탄생한 것, 혹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 인간보다도 늦게 창조된 것인지도 모른다.

⇒ 음. 신의 창조에 대한 기분좋은 통찰.


p223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제야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성시킨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광인은 신이 죽은 후에도 새로운 삶을 목격하지 못한다. 그는 신의 죽음이라는 이 기쁜 소식에 춤추는 단 한 명이 인간도 만나지 못한다.


p224 신이 시체로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도 새로운 삶의 생성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니체는 이런 유의 인간을 ‘최후의 인간’이라고 불렀다. 최후의 인간은 신앙이 사라진 시대에 ‘무신앙’을 신앙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배하는 것도 복종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둘 다 너무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 신이 시체로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도 시체처럼 살아갈 수 있다.


p225 과연 인간의 몰락과 신의 죽음을 복음으로 이해하는 자는 없는가? 신에게 항변하고 신에게 사과를 요구할 수 있는 자는 없는가? 마이스터 에카르트처럼. “나는 나로부터 신을 제거해 줄것을 신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스탕달처럼. “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p225 정말로 신을 철저히 죽이고자 하는 자는 웃는다. 그는 신을 분노로써가 아니라 웃음으로써 죽이는 것이다. 신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존재가 웃음거리인 것을…….


4. 보다 높은 인간들


p229 신의 죽음과 초인의 탄생! 밤은 거대한 변신의 시간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 밤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탄생한 것은 초인이 아니라 새로운 신이었다. 보다 높은 인간들이 모두 모여 나귀를 새로운 신으로 숭배하는 제의를 올린 것이다. 낡은 신은 나귀의 모습으로 부활했고, 사라진 줄 알았던 신앙심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p230 차라투스트라는 신의 살해자인 가장 추악한 인간에게도 물었다. 그대는 신의 살해자인데 어떻게 신을 다시 깨워냈단 말인가? 그러나 추악한 인간은 웃음으로써 신을 살해한 차라투스트라야말로 신의 살해자, 악당이라고 욕한다.


p230~231 나귀제는 모든 인간적인 것의 본질을 폭로해 버렸다. 낮은 인간이든 보다 높은 인간이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이다. 그들은 신의 죽음이 만들어준 생성의 공간에서 반동적으로 뒷걸음질친다. 신앙을 가진 자는 다른 신이라도 찾기를 바라고, 여행에 지친 자는 그만하기를 바라며, 확실성을 찾는 자는 그것을 신으로 생각함에 주저함이 없다. 그들은 모두 신앙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초인과 인간이 갈라진다. 삶을 진정으로 긍정하는 것은 보존하는 것인가, 극복하는 것인가? 자기 보존과 자기 극복, 보다 높은 인간들은 모든 가치 파괴가 일어나는 점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은 미래로 가는 여행을 멈추고 싶어 한다. 그들은 과거를 되살리고 싶어한다. 차라투스트라의 탄식을 들어보자.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p231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5. 높이와 웃음, 그리고 춤


p231~232 왜 보다 높은 인간들은 변신에 실패했을까? 그들에게는 초인과 영원회귀가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에게 의존하려 했다. 그들은 초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가지, 즉 놀이와 웃음과 춤을 몰랐다.


p232 보다 높은 인간들에게 차라투스트라가 권유하는 것도 그것이다. “그대들 자신을 넘어서 웃는 법을 배우라!


p23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춤추는 것을 이해하는 신만을 믿겠다.” 차라투스트라의 신은 디오니소스다. 초인을 ‘의욕하는 자’ 차라투스트라가 영웅의 모델이라면, 초인으로 ‘존재하는 자’ 디오니소스는 생성의 신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놀고 싶어하는 자이고, 웃고 싶어하는 자이고, 춤추고 싶어하는 자라면, 디오니소스는 놀이 속에 존재하는 자이고, 웃음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춤으로 존재하는 자이다. 디오니소스는 “생성 속으로 뛰어든 존재의 혼”이다.


p234 디오니소스는 긍정의 신이며 영원회귀하는 신이다. 차라투스트라에게는 디오니소스를 만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 디오니소소는 항상 회귀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그를 선택적으로만 만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에게는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하다! “우리는 귀를 구한다” 보다 높은 인간들에게는 이 신호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귀가 없다. 『차라투스트라』의 마지막은 “신호”로써 끝난다. 디오니소스가 비로서 신호를 보낸 것이 아니라 차라투스트라가 비로소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민감한 신체를 얻는 데 성공한 것이다.


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1. 가면의 철학


p236 사실 이름은 신체의 변신을 이해함에 있어 큰 방해물이다. 이름은 사람들을 개별화시키고 고착화시킨다. ‘이름 부르기(호명)’를 통해 계급이 재생산된다는 알튀세의 지적처럼 이름은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서 그 사회의 주체로 거듭나게 만드는 핵심적인 기제이다. 사실 이름이야말로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가장 오해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른다.

⇒ 『즐거운 지식』제 2판 서문에서 니체는 “니체씨를 떠나자”고 말한다. 자신의 작품과 자신을 혼동하지 말라고 말한다. “나를 다른 사람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나를 나 자신과 혼동해서도 안 된다." 니체의 이름 안에는 서로 다른 수많은 니체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니체라는 이름 바깥에도 니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p238 그는 하나의 정체성을 쉽게 내던져 버렸다. “사람은 불멸하기 위해서 여러 번 죽어야 한다.” 니체의 여러 이름들은 다음과 같은 영원회귀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2. 비극의 시대에서 냉소의 시대로


p243 헤겔을 버리면서 니체가 집어든 가면이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였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자신의 “교육자이며 형성자”라고 불렀다. 헤겔이 당대의 독일에 만족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 했다면 쇼펜하우어는 당대의 흉측한 측면을 이해했고, 따라서 “현존에 지독한 부정을 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1876년 바이로이트에서의 첫 번째 축제 공연 중에 그는 바그너와 내적으로 결별한다. 바그너는 반유태주의로 흘러갔으며, 점차 독일 정신의 대변자로 바뀌었다. 니체는 바그너 음악이 사람들을 하나의 무리들로, 아무런 개성도 없는 평준화된 무리들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 니체는 바그너에 몰입했던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참을 수 없는 압박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마약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바그너를 필요로 했다. 바그너는 탁월하다고 하는 모든 독일적인 것에 대한 해독제였다. 나는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도 하나의 독이다.”


3. 화약 냄새가 사라진 전투


p245 시간은 단절된다. 1878년부터 1881년 사이에 그는 중요한 변신을 경험한다. 우리는 이제부터 확연히 달라진 니체를 만난다.

⇒ 그러니까 어느덧 으르렁거리던 사자는 자신의 장난감을 쥐고 있는 어린 아이가 되어 웃고 있다. 『서광』과 『즐거운 지식』이 대표적인 저서가 될 것이다.


p246 『차라투스트라』는 1883년부터 84년 사이에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니체의 변신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변신의 비밀을 담고 있다.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사도로서 니체를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책이다. 또한 “이제까지 ‘예’라고 말해진 모든 것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의 ‘아니오’를 말하고 그것을 ‘행동’하는 차라투스트라가 그럼에도 어떻게 부정의 정신의 반대일 수가 있는가”를 드러낸 책이다. 니체는 이 책이 완성된 시각이 바그너가 베니스에서 죽은 시각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공표했다. 바그너는 제국에 대한 복종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의 메시지도 분명하다. 제국적인 것에 대한 반대, 국가와 교회라는 우상에 대한 반대!


p246~247 그 책의 끝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이 ‘신호’를 알아차린다.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듣는 아리아드네”, “망치를 든 파괴자”이자, “춤추는 무희”이며,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자, 차라투스트라!

⇒ 낡은 가치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가치에 대한 창조의 메시지!


4. 모든 가치의 전환


p247 니체는 상처로부터 치료의 힘을 발견한다. “치료하는 힘이란 우리가 입는 상처에도 있는 법이다. 호기심이 강한 식자들을 의해 출처를 밝히지는 않지만 다음은 나의 오랜 좌우명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p248 ‘모든 가치의 전환’, 이것이 인류에 있어 최고의 자기 성찰의 행동을 위한 정식이고, 이것이 나의 살이 되고 나의 천재성이 된다.


5. 다시 떠나는 여행자


p250~251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 니체는 자신을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다이너마이트, 광대. 그러나 그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여행자이다. 그가 썼던 모든 가면들, 그를 대신했던 모든 인물들은 그가 벌인 “탐험”의 결과이다. “방랑자”는 바로 그 자신이다. "아주 희미하게라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자는 지상에서 스스로를 방랑자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느낄 수 없다"라고 그는 말한다.


p252 니체의 여행자가 “떠난다”고 했을 때, 그는 공간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다. 그가 떠나는 것은 지배적인 질서이며 지배자의 코드이다. 외부자가 차지하고 있는 ‘외부’라는 영토는 더 이상 공간적인 외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외부란 계산되지 않은 힘들의 영역, 지배의 그물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힘들이 영역이다. 그 힘들은 지배적 가치의 외부에서 지배적 가치 속으로 파고든다. 내부이지만 잡히지 않는 내부, 그것이 ‘내재하는 외부’이다. 헤겔을 뚫고 들어온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를 깨뜨리는 차라투스트라, 바그너를 깨뜨리는 비제. 여행과 탐사는 그치지 않는다. 가면 놀이는 멈출 줄 모르고, 변신은 영원성을 획득한다.


p252 여행자의 목소리는 전쟁을 시작하는 나팔수의 나팔처럼 시끄럽지 않다. “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가장 조용한 말이다.”


p253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2부]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1. 근대라는 탈주술화된 주술


p258 어떤 점에서 근대는 제 발로 ‘설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제 발로 ‘서야 하는 ‘시대다. 절대적 가치가 붕괴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 항상 세 것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근대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더 이상 유대-기독교라는 보편 종교가 모든 사건을 해명해 줄 수 없고, 더 이상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이 통일성을 유지할 수 없는 시대로서의 근대!


p258~259 우리가 막스베버를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물음들 속에서다. 그는 무덤으로부터 ‘새로운 시대’의 인간들, 다시 말해 근대인들이 탄생했음을 보았다. 그는 근대인들의 심리적 긴장을 이해했고 그것을 해소하는 그들의 독특한 생활방식을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근대인들이 그 절대적 신을 장사 지낸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마저 장사를 지낸 것 같지는 않다.

⇒ 베버는 근대인들이 주술로부터 벗어나 과학의 시대로 이행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탈주술화야말로 무덤에서 나온 또 다른 신의 주술이라는 것을 포착했던 것이다.


2. 근대인의 탄생


p260 확실히 베버는 자본주의를 자본이나 기술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인간의 탄생과 관련시켜 이해했다. 베버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인간(근대인)은 전해 새로운 종의 인간이다.


p262 중세인들은 교회에서만 기도를 했다. 그러나 근대인들은 가정에서도 그리고 혼자 있을 때도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


p263 즐기고 낭비하기 위해서 돈을 모으는 것과 신을 영광되게 하려는 소명에서 돈을 모으는 것의 차이가 분명해진다. 근대 이전에도 경제적 과정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부기방식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근대와 그 이전의 에토스는 완전히 달랐다.

⇒ 근대 프로테스탄트들에게는 선대업자들이 즐기는 시간은 낭비의 시간이었고 신을 욕되게 하는 시간이었다. 반대로 삶을 즐길 줄 모르고 금욕적 생활을 통해 재화만을 축적하는 근대인들이 태도는 선대업자들이 보기에 완전 또라이 짓이었다.


3. 관료제 기계


p264 근대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인간을 욕망과 충동에 휩쓸리는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관리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모색했다. 이들에게 욕망과 충동은 자신들의 소명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었던 것 같다.

⇒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의 삶에서 나타나는 가장 놀라운 변화는 계획표(시간표)의 도입이었다. 시간표는 사람들의 삶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주는데 프랭클린이 꿈꾸던 철저한 자기 관리의 가장 효과적 수단이 시간표였다.


p266 자신들의 의지로 행동을 통제하기보다는 의지를 포기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오히려 원하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확실히 중요한 전환이다.


p266 합리적인 시스템이 개인들의 일상생활의 수준을 넘어서 조직이나 제도의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 관료제다. 베버는 관료제를 기계라고 불렀다. 의지나 정신을 포기함으로써 본래의 의지나 정신이 원했던 것을 생산해내 주는 합리적인 시스템, 그것은 분명히 기계라 할 만하다. 관료제란 개인적 수준에서는 책상 앞에 붙여 놓은 계획표일 것이고, 사회적 수준에서는 거대한 행정 체계 및 사회제도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수행력을 보장하는 가장 효율적인 기구다. 그 어떤 기계도 근대의 복잡성과 대면해서 그토록 효과적인 처리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p267 우리는 기계로서의 관료제가 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은 사라진다. 생산하는 것은 관료제로 불리는 기계다. 인간 역시 기계의 생산 작업에 동원되는 부속품일 뿐이다. 소명 의식에 불타던 근대인은 언제부턴가 주어진 절차와 규정에 의거해서 수동적으로 일 처리에 동원되고 있는 암울한 근대인으로 돌변해 버렸다.


p268 처음엔 시간표든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4. 신체 길들이기, 신체 길러내기


p270 베버는 사람들의 생활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분할하고 그것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것을 훈육이라고 개념화했다. “훈육은 모든 것을 계산 가능하도록 그리고 공통의 명분과 합리적으로 의도된 목표에 헌신하도록, 대중들의 육체와 정신을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다.”

⇒ 베버는 종교과 전쟁을 목적으로 인간의 신체를 훈련시키고 길들이며 규율 아래 관리했던 수도원과 군대의 방법을 고대 플랜테이션이나 자본주의적 공장의 이상형으로 보는 것에 전혀 무리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른바 ‘과학적 경영’이라고 불리는 것이 수도원과 군대의 합리적 훈육이 발전된 형태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p271 신체의 자연적 리듬을 자본의 요구에 맞추어 새로운 리듬으로 대체하는 것! 신체는 새롭게 길들여진다. 그리고 길들여짐으로써 새로운 신체가 만들어진다. 이 새로운 신체는 통제나 관리가 훨씬 쉬워진 신체다.


p274 훈육의 최고 목적은 능동적 자제다. 특히 능동적 검열과 관련해서 일기가 수행한 기능은 놀랍기까지 하다. 원래 일기는 교회 지도자들이 여신도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하루동안 행한 일들을 적어오게 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하루의 일들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약속을 하는 수단이 되었다.

     약속하는 신체는 더욱 큰 계산 가능성을 보장하고 더 큰 사회적 안정을 가져온다. 약속은 미래 행위를 고정시키는 일이고 그 사이에 일어날 수 잇는 변동을 최소화시키는 일이다. 이제 통제는 소극적인 것에서 적극적인 것이 되고, 수동적인 것에서 능동적인 것이 된다. 베버가 말하는 철창이 왜 그렇게 강력한 것인지도 이로써 분명해진다. 그것은 제 스스로 걸어 들어간 내적인 감옥이기 때문이다.


5. 베버의 정치학


p277 베버는 바람직한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이러한 내적 거리라는 점을 주장했다. 정치인에게는 소명에 대한 열정과 함께 뛰어난 목측능력이 요구된다. 목측능력이란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고 그것에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 내적인 거리를 두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란 머릴 하는 것이니 신체나 정신의 다른 부분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이 불모의 흥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정신을 강하게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며 이것은 거리를 두는 습관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적 거리 두기의 능력을 갖춘 정치인은 일상 세계로부터도 자신을 분리해서 사고할 줄 안다.


p279 베버는 소명 의식과 거리 두기 능력, 책임감 등을 가진 정치인에게서 관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발견한다. 이러한 정치인이야말로 그가 보기엔 관료제 기계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6. 베버 전략의 딜레마


p282 근대가 맞닥뜨린 가장 큰 문제를 ‘영혼의 상실’로 보고 있는 베버는 그 해결책을 영혼의 회복에 두는 것 같다. 그러나 근대인의 재성신화의 작업은 관료제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피폐한 도시인이 꿈꾸는 원시적 자연에 대한 동경처럼 보인다.


p284 베버가 멈추어 선 곳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반성하는 합리성보다는 합리성 자체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 합리적 수단의 효율성을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삶에 대한 그것의 지배를 막아낼 수 있는가? 베버의 정치적 저작들을 보면 그 성공의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p285 스피노자는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이해했다. “자연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나 욕망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금지하지 않았다.” 초월적인 가치를 찾아 나설 것이 아니라, “아무리 작더라도 우리 자신이 원인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욕망과) 능력에서 시작해야 한다.


pp286 니체는 ‘내적인 거리’가 ‘거리의 열정 (pathos of distance)’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거리의 열정이란 신체에 내재하고 있는 힘과 능력을 긍정하고, 그 힘과 능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차이 (거리)를 생산해내는 열정이다. 거리의 열정을 가진 자들을 니체는 가치의 신봉자가 아니라 가치의 생산자라고 말했다. 초월적인 존재나 신성한 가치를 신봉하기 위해 제 자신을 합리적 기계 속에 던져 버리는 프로테스탄트들과 달리 ‘내적인 거리’를 ‘거리의 열정’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제 스스로가 이용할 가치를 생산해 낸다.


p287 확실히 근대인들은 절대신의 무덤 속에서 절대신을 장사지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앙까지 장사를 지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복종할 새로운 신들 (다이몬들, 종교적 신, 과학적 진리, 최대다수의 행복, 국가 등)을 찾아냈을 뿐이며 복종 자체를 폐기시키지는 못했다. 합리성이란 프로테스탄트로 대표되는 근대인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가치들을 으ㅟ해 제 안에 있는 욕망과 능력을 효과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이었다.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1. 문제제기


p288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사이에 서구 사회에서 일어난 일련의 혁명적 상황은 좌파와 우파에게 모두 큰 충격이었다.

⇒ 68 혁명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전통적인 영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대학개혁, 가부장적 권위주의, 권위적 민족주의, 성에 대한 억압, 여성 문제, 환경 문제, 권위적인 노동조합과 당에 대한 거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욕망과 가치의 투쟁을 불러 왔다. 그 공격을 단지 부당하게만 여겼던 구좌파들은 68혁명에 대한 어떤 이해나 대응도 취하지 못했고, 결국 68을 뒤집은 89년의 복수로 쇠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파들에게 68혁명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하나의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p292 자유주의자들이 위기를 차이들의 아나키적 전쟁상태에서 찾았다면, 공동체주의자들은 위기를 서구 자유주의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병리적 상태에서 찾았다. 니체가 허무주의라 명명했던 서구 사회의 현실, 바로 주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율적 능력을 소진하며, 그 동안 시민들을 키워왔던 전통적인 공동체들이 붕괴되는 현실이 위기의 원인이다. 위기는 전쟁이 아니라 질병에서 온다!

⇒ 1968년 이후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우파들의 생각을 우리는 자유주의자들과 공동체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 속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탈산업사회로의 변화 속에서 자유주의자들은 푸코나 데리다 등의 (신)니체주의자들의 공격에 전혀 성공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p293 68혁명 이후 케인즈주의의 위기가 가시화되자, 그것이 초래한 재정적자와 비효율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면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신자유주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자유주의에서처럼 약화되지 않는다. 군사적 지출의 확장이나 경제적 조정비용의 확장은 물론이고 가치와 도덕적 구조물에 대한 위기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현대 국가의 또 다른 중요한 얼굴이며, 헤겔로 대표되는 근대적 국가의 이상이기도 하다.


2. 근대 국가의 두 얼굴 - 리바이어던과 인륜적 실체


p295~296 아마도 근대 정치철학자들이 만들어 냈던 국가의 모습들은 다양하게 해체되어 현대적 맥락에서 재구성될 것이다. 그럼에도 가치들의 전쟁에 대한 공포로부터 도출한 홉스적 국가와 자유주의 국가론의 병폐를 지적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던 헤겔적 국가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사회상태 외에는 항상 모든 사람에 대한 모든 사람의 전쟁이 존재한다.” 이 무시무시한 선언은 모든 정치적 질문을 ‘그렇다면 어떻게 평화는 가능하나’로 돌리게 만들었다. 홉스의 답은 분명하다. “전쟁은 위압적 힘이 없는 한 종식될 수 없다”


p296 이런 상태에서 제일 먼저 요구되는 자연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평화를 추구하고 따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상태에서 제일 먼저 깨달아야 하는 정치적 정언명령은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네가 너를 위해 바라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도 요구하지 말라.’ 이 금기들을 어기는 것은 항상 전쟁을 발생시킨다.

⇒ 영속적 전쟁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계약이 보증, 공동의 권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국가, 리바이어던의 탄생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상호 계약에 의해 평화와 공동 방위를 위해 모든 힘과 수단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인격이다. 홉스적 국가는 개개인이 정치적 부담을 양도함으로써 경제적 자유를 확보하는 경제적 자유주의 국가관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p299 전장생태, 가치들의 아나키 상태에 대한 공포로부터 그 역할을 핵심적인 것으로 축소하는 국가와 전혀 다른 얼굴은 한 국가는 헤겔의 인륜적 실체로서의 국가이다. 인륜이라는 말은 막연한 보편성을 가정하는 도덕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도덕이란 현존하지 않는 것을 실현해야만 하는 어떤 의무를 부여하는 반면 인륜성은 실정성을 갖는 것으로 그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구체적인 도덕적 의무를 갖게 하는 것이다.


p303 헤겔에 따르면 우리는 가족(혼인의 신성함)과 시민사회(공동체의 소속감)에서 주어지는 긍지를 통해 실체적 보편자의 목적과 현실태도로서, 공공생활의 목적 및 국가의 체제와 헌법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차이의 문제에 대한 중요한 인식을 제공한다. 각 공동체들은 고유한 차이들을 갖지만 그 고유성은 국가의 분절로서 상대적인 것이다. 그때의 차이는 보편자로서의 국가의 한 계기에 불과하다. 국가는 두 계기를 내포하는 무한한 형식을 갖는다. 하나는 자기의식이 대자적으로 자기 내적 존재에까지 이르는 무한한 구별의 계기이며, 다른 하나는 교양 속에 깃들어 있는 보편성의 형식, 즉 정신이 그를 통하여 법률과 제도, 다시 말하면 사유가 뒷받침하는 의지 속에서 유기적 총체성으로 객관화되고 현실화되는 것이다.


3. 자유주의와 차이의 문제 - 아나키에 대한 공포


p304 자유주의는 명백히 아나키 상태의 공포를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평화의 문제’ 즉 안정성이다.


p305~306 차이들은 중첩의 체계 속에서 반성적 평형을 향해 나아간다. 롤스에게서 분배와 관련된 차이와 갈등은 기본적 자유의 원칙에 자리를 양보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분배와 관련된 평등의 문제가 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확인하기도 어렵고 중첩적 이해를 끄집어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본적 자유들(양심의 자유나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등)에 대해서 우리의 ‘공적 문화’는 쉽게 동의를 끌어낼 수 있다.


4. 공동체주의와 차이의 문제 - 가한 국가를 향한 유기적 결합


p309 ‘전쟁’이 자유주의자들에게 공포스러운 것이었다면, 공동체주의자들에게 문제는 ‘병적 상태’였다. 대중들의 소외, 문화적 다양성의 파괴, 전통적 가치관들의 해체와 같은 병리적 상태가 공동체주의자들이 인식하는 문제다. 서구의 자유주의는 가치들의 투쟁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없는 자유주의적 무능력 때문에 위기에 처한다는 것이다.


p311 서구 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의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어주던 수많은 공동체들이 점차 소멸하고 사람들은 점차 동질화되고 있다.


p313 우리는 차이의 문제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동질화를 비판하고 차이의 소멸을 우려했던 공동체주의자들에게서 일종의 정치적 전체성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은 분명히 부분적이고 지역적인 공동체들을 활성화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그것만이 사회적 응집력을 확보하는 길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차이들은 도덕적으로 놀라운 응집력을 보인다. 차이에 대한 강조가 응집력을 갖춘 강한 국가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헤겔의 국가론에서 살펴본 바 있는 ‘국가의 윤리적 기초로서의 공동체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5. 차이의 아상블라주를 향한 전망 - 정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p317 아렌트의 그리스 정치에 대한 분석은 죽은 것이 ‘차이’가 아니라 ‘정치’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그리스 사회에서 정치적 영역이라고 불리는 공적 영역은 ‘차이’를 생산하는 영역이다. 차이가 배제된 중첩의 영역으로서 공적 영역을 바라보는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차이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고자 하는 공동체주의자들의 시각과도 전혀 다르게 공공 영역은 차이를 생산함으로써 유지되고, 생산된 차이가 만들어 낸 다양성에서 힘을 얻는다.

⇒ 다양성이 파괴되고 동일성이 드러날 때 이러한 공동체는 파괴되고 만다.


p319 차이의 아상블라주에 대해 전망하는 것은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생태학과 미학은 그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생태계의 다양성과 차이를 파괴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다. 생태계의 어떤 것들도 자신의 특이성을 전개함에 있어 다른 것과 대립하지 않으며, 종들의 다양성과 특이성이야말로 생태계 건강이 징표다. 차이의 아상블라주로서의 생태학에 못지 않게, 여러 잡다한 것들이 모여 만든 예술품으로서의 아상블라주 또한 같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 아상블라주assemblage는 프랑스어로 집합·집적을 의미하며, 특히 조각 내지 3차원적 입체작품의 형태를 조형하는 미술상의 방법을 말한다. 종이나 베의 조각 등을 화면에 풀로 붙이는 큐비즘의 콜라주에서 비롯되었지만, 콜라주가 평면적인 데 대하여 아상블라주는 3차원적이다.


p320 상식과 보편성을 발견하기보다 차이와 특이성을 발견해내는 것은 결코 정치에 생소한 것이 아니다. 낯선 것은 정치적이지 않은 것에 정치가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에겐 정치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멀리 떨어진 것도 없다.

⇒ 정치의 중요성은 늘 인식하지만 확실히 정치에 환멸도 함께 가져다주며 정치의 중요성을 상쇄시키고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서장]

천개의 눈, 천개의 길

1. 천개의 눈

2. 천개의 길

3. 천 개의 기원

4. 천 개의 젖가슴

5. 천 개의 주사위

6. 천 개의 화살

7. 천 개의 가면

8. 천 개의 이야기

 

[1부]

1장. 아모르 파티 : 삶을 사랑하는 철학-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1.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

2. 거인들의 웃음소리와 신들의 한탄

3. 세 개의 죽음-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 소크라테스의 경우

4. 비극이 상연되는 극장과 심판의 법정

5. 미래의 철학자

6. '사랑'의 의미

 

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니체의 계보학

1. 계보학 1 - 비판

2. 계보학 2 - 탐사

3. 도덕의 자연사

4. 강한 자와 선한 자

5. 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6. 도덕이라는 동물원

7. 선악을 넘어서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1. 헤르메스가 전하는 메세지

2. 진리의 해석학

3. 스핑크스의 눈

4. 가치의 발명

5. 니체에 대한 해석학 - 방법과 스타일의 문제

6. 헤르메스는 해석자였다

 

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 작은 정치의 시대

2.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

3.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2

4. 길들이기

5. 아곤의 정치

 

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1 - 자연학 + 윤리학

1. 초월적인 것의 죽음과 우주론 - 원자론의 경우

2. 왜 원자가 아니라 힘인가

3. 힘의 질 - 능동과 반동

4. 권력의지에 대한 오해

5. 권력의지의 윤리학과 권력 느낌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2 - 자연학 + 윤리학

1.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

2.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3. 반복의 두 경우

4. 긍정을 부르는 긍정

5. 차이의 놀이와 회귀의 비밀

 

7장. 인간 -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1. '과'

2. 진화와 변신

3. 진희 죽음과 인간의 몰락

4. 보다 높은 인간들

5. 높이와 웃음, 그리고 춤

 

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1. 가면의 철학

2. 비극의 시대에서 냉소의 시대로

3. 화약 냄새가 사라진 전투

4. 모든 가치의 전환

5. 다시 떠나는 여행자

 

[2부]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1. 근대라는 탈주술화된 주술

2. 근대인의 탄생

3. 관료제 기계

4. 신체 길들이기, 신체 길러내기

5. 베버의 정치학

6. 베버 전략의 딜레마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1. 문제제기

2. 근대 국가의 두 얼굴

3. 자유주의와 차이의 문제

4. 공동체주의와 차이의 문제

5. 차이의 아상블라주를 향한 전망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은 니체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니체가 가진 사상을 헤르메스가 되어 해석해주고 있다.

 니체를 해석한다는 것은 니체가 천 개의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다양할 것이다. 니체를 해석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의도’이고 그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가 말한 그대로를 토스하여 주는 역할이 아니라 니체가 말한 것을 두고 니체를 재창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니체의 글을 해석하고 있지만 그 많은 니체의 글들 중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 내어 그것에 대한 설명과 해석을 하고 있으니 결국 니체의 이야기가 아니라 니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저자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이 책은 니체에 관한 해석을 담고 있는 1부와 논문 형태의 글을 추린 베버의 정치학과 차이의 정치학을 담고 있는 2부로 나뉜다. 일단 이 책의 핵심인 1부는 저자 자신이 니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정을 드러내듯 니체의 생각들을 잘 뽑아내어 전달하고 있다. 총8장으로 구성하여 1장 니체와 철학의 관계, 2장 니체의 계보학으로 도덕과 윤리의 문제, 3장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4장 니체의 근대 정치 비판을 다루고 있다. 5장과 6장은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7장은 초인 등의 니체 철학의 주요 개념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 8장은 니체 자신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니체의 저작을 토대로 말하고 있다.


■ 감동적이었던 장절

  

 니체에 관한 총8장의 내용 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2장이다. 니체의 계보학으로 도덕과 윤리에 관한 내용이다. 이 장에서는 특히 도덕과 관련하여 강자와 약자의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다. ‘도덕’에 대해 평소 갖고 있는 생각과 맞물려 성큼성큼 다가온 부분이다.

 이 시대의 가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마냥 필요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그 자체로서 중요한 도덕에 대한 비판적 시각, 그것이 어떻게 억압이 되는지를 볼 수 있는 장이다. 그리고 또한 그동안 강자는 위험하고 약자에 대해서는 이른바 선한 것이라 대비되던 이러한 관념들이 어떻게 ‘고정’관념이 되는지를 파악한다. 도덕이 노예가 되는 개념을 살펴보는 장, 그로 인해 약자들의 논리로 강한 자를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은 깊은 생각을 던져주기도 했다.


■ 보완점


 절판된 이 책을 찾기 위해 중고서점을 비롯하여 온-오프라인을 뒤져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당장 내 주위에선 1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변경연 사람들은 이 책들을 찾았을 텐데 소명출판사는 재판 작업의 욕구가 없을까 생각했다. 기사를 보니 소명출판사가 창립된 이후부터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이 책이라 한다. 우와, 놀랍지 않은가. 음, 역시 책이 잘 읽히더라니 생각했는데, 가장 많이 팔린 이 책의 부수는 6,000권이라고 한다.

 어떤 책으로의 인도는 철저한 전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렇게 절판되고 세상에 많이 퍼지지 않은 이 책으로 인도받은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확실히 니체가 이 세상에 미친 영향은 크다. 많은 이들이 니체를 ‘해석’하고 있고 다양한 니체 관련 저서들이 끊임없이 출간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확히 ‘그것’이었다고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심지어 니체의 초인은 히틀러의 철학 도구로 활용되기도 하였으니 어떠한 생각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읽혀지는지는 니체가 스스로 자신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시선을 따라 가다가 불편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건 ‘니 생각일 뿐이야’라거나 ‘어떻게 이것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하는 거리감을 느끼지 못할 만큼 충분히 자연스럽게 저자의 해석에 녹아들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천 개의 시선과 주름들이 있듯이 이 책도 니체에 관한 다양한 ‘관점’과 ‘해석’ 중의 하나이겠지만 니체의 입을 빌려 전하고 있는 저자의 생각들을 불편하지 않게 동조하게끔 하고 있다는 점이 일단 좋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또다른 철학자들을 중구난방으로 끌어들이고 있지 않다는 점, 핵심적인 부분들만을 추려서 개념과 철학의 전달이 간명해서 좋았다.

 원저자의 책을 해석하고 있다고 하기에 니체의 글의 ‘원문’들이 많이 인용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이것은 니체에 관한 해석이란 느낌보다는 저자의 생각들을 주장하는 것이란 느낌을 더 가진 듯도 하다. 

 다만, 읽고 나서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원체 니체가 써내려간 글들이 많기에 말 그대로 ‘모자라다’는 느낌의, 다른 부분도 필요하다는 점이 우선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책의 구성이 뭔가 다르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아직 어렴풋하다. 사실, 읽는 글에 대해서는 명료하게 받아들였는데 책의 구성적인 면에 대해서는 니체의 방대함 때문인지, 명료함은 덜 느꼈다. 니체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에서 구체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으로 파고들어가는 형태이든 개념을 잡고 전체적인 조망을 보는 형태이든 니체의 윤리학, 정치학, 니체의 해석학, 니체의 종교학, 니체의 자연학 등으로 그의 철학을 정리 요약하여 이해하고픈 욕구로 마치 리포트를 쓰듯이 니체의 사상과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이런 형태로 정리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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