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종종
  • 조회 수 2011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4년 6월 23일 09시 04분 등록

Book Review

2014.6.22

강종희

 

  1. 저자에 대하여

저자 고병권은 연구·생활 공동체 수유너머로 치면 16, 서울사회과학연구소(서사연)까지 거슬러 포함하면 20년을 공부하고 강의한 제도권 밖 지식인의 대명사같은 존재라 한다. 2001년 첫 단독저서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소명출판)을 시작으로 최근 <철학자와 하녀>(메디치 미디어) 28권의 책을 냈다. 철학과 당대 사건을 아우르는 글쓰기와 함께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추방된 여러 현장에서 새로운 실천적·급진적 철학을 이끌어내는 사유 방식이 그를 이제껏 없었던 독특한 실천의 지식인으로 자리잡게 했다.


그래서인지 현장 인문학자라고도 불리우며, 대중 강연과 집필 외에도 우리 사회에서 소외 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인문학 강좌를 꾸준히 해왔다. 저자는 철학을 공부하는 목적이 ‘박식함’에 있지 않고 ‘일깨움’에 있다고 말한다. 철학하기란, 불가능과 무능력, 궁핍과 빈곤을 양산하고 규정하는 모든 조건에 맞서 분투하는 것이다. ‘철학하기’란, 불가능과 무능력, 궁핍과 빈곤을 양산하고 규정하는 모든 조건에 맞서 분투하는 것이다. 그는 절망을 느끼는 곳에서도 철학은 가능하며 오히려 그곳이야말로 철학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삶을 바꾸고 우리가 속한 세계를 바꾸는 일은 거기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십여 년간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강의를 해왔다. 마르크스, 니체, 스피노자 등을 공부했고,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글을 써왔다. 지금은 해방촌에 자리 잡은 ‘수유너머R’에서 연구자로 살아가고 있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철학자와 하녀>, <언더그라운드 니체>, <“살아가겠다”>,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생각한다는 것>, <추방과 탈주>,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등이 있다.


고병권의 한 마디 –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발췌

철학은 법이나 법칙이 목표가 아니라 성숙이 목표죠. 법을 다루지만 법보다 성숙해야 돼요.”

 

법은 정의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지만, 정의란 참 모호한 거예요. 법하고 정의가 똑같다면 지금까지 법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을 거예요. 근데 정의란 '사람이 저러면 안 되지 않나?' 이런 묘한 감각이에요. 그런 감각을 훌륭하게 키우고 가꾸는 게 철학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일깨우려는 사람을 철학자라고 불러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요.”

 

위대한 것을 하려면 사소한 것부터. 소박한 것부터. 사소한 것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황금에는 도금할 필요가 없다. 도금한 것은 다 가짜다.”

 

니체는 내게 깊이와 무게를 혼동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었다.”

 

자신의 삶과 행동과 일치하는 말이 사회를 중요하게 변화시킨다.”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진행한 고병권의 인터뷰, 필독 및 필청을 권유한다. 다 듣고 나니 고병권이 권한 책들을 꼭 읽고 싶어졌다. 

  • 에티카 스피노자 논리와 지성으로 무장한 세상에 대한 긍정.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게 하는 철학 

  • 이 사람을 보라 니체 사소한 것은 절대 사소하지 않다

  • 루쉰 전집 - 루쉰  - 당신의 심장에 내리 꽂히는 단도와 같은 문장, 스타일이란 무엇인가

  • 자본 마르크스 다르게 보는 시선이 학문의 시작, 실천의 시작

  • 나는 지금이 더 행복하다 박경석 - 배움과 운동이 함께 혼재하는 곳, 노들야학의 교장

 

감흥이 사라지기 전에 읽어봐야겠다. 고병권은 이제 마흔 넷. 아마도 인간으로서 가장 생산적인 나이이니 앞으로도 많은 저작을 남기고 활동을 하겠지. 기대된다.    


- ‘네이버 지식의 서재 고병권, ‘경향신문 뉴파워라이터인터뷰, ‘알라딘 저자 소개에서 발췌
  1. 내 맘에 들어온 글귀

책 머리에


3.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 개의 주름을 본다. 철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제 시대의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 하기 위해 단순화의 폭력을 행사할 때도 그는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이질적인 파편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찾아낸 미세한 조각들을 찾아 넣고 보면 사건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4.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 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 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5.  니체는 자신의 사상이 시대와 맞지 않는 때 아닌 것이며 미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자신의 철학을 미래의 철학이라고 간주할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오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 있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지만 감각 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은 시간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미래적인 것,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때가 아닌 것으로 여겨져 배척당하는 것, 이해 받지 못하는 것, 그러나 지금 현재에 발설해서는 위험해질 수도 있는 진실을 담은 시간일 수도 있는. 미래적인 시간이란 그런 것.


6. 걱정해야 될 것은 과잉이 아니라 결핍이다. 니체는 이렇게 묻는다. “과잉이 원인인가? 결핍이 원인인가?” 당신이 천 개의 손을 내밀 때 그것은 베푸는 것인가? 구걸하는 것인가? 당신이 지금 고통 받고 있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인가? 생의 빈곤 때문인가?” 당신은 지금 어떤 사막도 옥토로 바꿀 수 있을 만큼풍성한가, 아니면 어떤 옥토도 사막으로 바꾸어 버릴 만큼메말라 있는가? 


과잉의 문제와 결핍의 문제. 결핍을 정상으로 과잉을 광기로,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취급하는 사회. 그런 사회는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었고 끈덕지게 그 힘을 발휘한다.


7.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서는 자는 춤을 춘다. – 니체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구본형 선생의 책 한 귀퉁이에 인용된 이 말 한 마디 때문에 니체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 뭐가 더 중요할까. 웃는 것들의 매혹, 웃을 수 있는 자들의 선. 웃을 수 있어야 한다


8.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 니체


나는 병 들은 지 오래다. 삶을 바꾸는 결정, 삶을 바꾸는 사소한 행동 하나 맘대로 하지 못하는 무기력증에 온 몸과 정신이 감염되었다. 사소한 것을 사소하다 여기며 버린 시간이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왔다.


8. 사피엔스(sapience)라는 말의 어원 그대로 맛을 보는 사람에게는 진리가 얼마나 맛없는 음식인지를 별도로 강의할 필요가 없다. 진리란 머리 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반박될 수 있는 것이다철학을 하려거든 맛보는 혀부터, 냄새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그리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부터 바꾸어야 한다. 조그만 어두워지면 색맹이 되고 마는 철학의 시력을 우리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사피엔스의 어원이 맛보는 사람이라니! 호모 사피엔스의 뜻은 생각하는 사람이라 들었던 바 있다. 그러나 생각, 지혜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인가. 그것은 감별하는 것, 인지하는 것, 맛보는 것과 궁극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토록 의미심장한 어원!


서장 -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2. 천 개의 길.

18.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5. 천 개의 주사위

19. 벌써부터 평균을 구하지 말라. 우리들은 세계라는 도박대 위에서 판을 벌이는 도박사들. 우리에겐 매 번 던져지는 주사위가 다 소중하다자유 정신의 소유자들이여 또 한번의 주사위를 던져라. 세계는 너희들을 위해 천 개의 섬을 준비해두었다. 


6. 천 개의 화살

20. 아포리즘은 모두 화살이다. 그것들은 읽혀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쏘아지기를 바란다. 누구든 활을 들고 쏘아라. “급소를 맞춘 화살의 저 떨림을 보라, 저 흔들림을 보라. 아포리즘들만이 아니다. 모든 책들이 망치가 되거나 다이너마이트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저기 니체라는 화살통에 천 개의 화살이 들어있다!


1장 아모르 파티 : 삶을 사랑하는 철학


27. 철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포괄하는 질서를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모험가들은 어떤 곳을 뒤지지만 철학자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모험가들에게 모든 곳에 있는 것은 무가치 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떤 곳에만 있는 것이 무가치하다. 만약 모험가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특정한 곳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개개의 요소들에 전체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왜 그들은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글쎄 말이오. 아무도 부여하지 않은 이 오만한 사명감. 하나의 원리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는 것, 그 생각 자체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독단적인가?


28. 니체가 보기에 잘못된 사상만큼 건강에 해로운 것도청명한 날씨가 어쩌면 철학보다 가치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니체는 음식물이 철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영양 철학이라는 이상한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영양 철학! 허억, 니체가 그거 연구했으면 지금쯤 나는 그의 책을 섭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음식물이 철학에 미치는 행위, 먹는다는 행위가 인간의 삶에, 문화에, 사회에 미친 행위. 그것은 얼마나 방대하고 심오하고 필연적인가? 


29. 건강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니체는 분명히 삶의 철학자이고 생의 철학자이다.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바라보는 철학,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진단하는 철학. 그래서 니체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 그에게서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 구도 속에 놓여 있다.

30. 서구 사상의 또 다른 뿌리인 기독교도 죽음의 설교인 것은 마찬가지다…. 기독교인들은 삶을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며, 그 괴로운 이유를 우리의 와 연관시킨다. 삶이 불행하다는 느낌이 클수록 우리가 지은 죄는 커진다. “불행의 크기에 맞추어 죄의 크기는 역산된다.”…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죽음 이후에 벌어질 처벌을 환기한다.….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의 부조리한 삶을 고발한다. 삶이 그토록 추악한 것이라면 삶을 살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이들은 삶을 배신하는 삶을 살고 있다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소망한다. 그렇게 죽음이 좋은 것이라면 제발 빨리 그들이 원하는 세계, 천국의 세계로 사라져 버리기를


더 이상 공감할 수 없겠구만요. 제 말이 바로 그거라구요. 차라투스투라, 당신과 나는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군요. 이토록 암울하고 파괴적이며 해로운 종교는 일찍이 없었고 이후에는 제발 없길 바랄 뿐입니다.


31.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설교자에 대한 니체의 입장은 저 유명한 에티카의 저자의 입장과도 같은 것이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31. 불행히도 서구 사유의 기원에는 두 사람의 시체가 놓여 있다.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라는 두 스승의 죽음, 보편적 진리를 위한 죽음과 보편적 구원을 위한 죽음. 서구 사유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리고 있다.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39. 디오니소스의 찢겨짐은 세계의 분화와 개별화된 사물들의 탄생을 의미하고 그가 겪는 고통은 개별화된 사물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상징한다.


40. 일상의 한계와 구속을 넘어서는 혼수상태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면 과도함으로 막고 절제를 요구한 것이 아폴론적인 것이다.


41.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긍정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과 대비시킨다. 디오니소스 대 그리스도.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자. 삶에 대한 근본적인 가르침을 제공한 자, 이 반기독교적 스승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의 죽음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디오니소스가 가장 혹독한 고뇌도 웃음으로서 긍정한다면, 십자가에 못박힌 자는 삶을 저주하고 삶으로부터 구제되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낸다. “십자가에 달린 신이 삶의 저주라면디오니소스는 토막토막 잘리었으면서도 삶을 약속하고, 영원히 다시 살아나며 파괴로부터도 돌아온다.”


말라디메의 해석.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의 죽음의 차이는 순교가 아니라, 죄의식에 있다. Got it! 기독교는 분명 순교와 부활의 이미지를 디오니스소의 신화에서 훔쳐왔으나, 그 해석과 적용에 있어 죄의식이라는 독약을 들고 돌아왔다. 죄의식은 사람들을 서서히 예정된 죽음으로 몰아가며 다른 생각과 삶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삶은 거대한 회개의 장으로서 오로지 죽음을 향해가는 고통스런 감옥이 된다.


51. 철학이 하나의 통치수단으로 전락할 때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가로막는 거대란 수렁이다. 새로운 가치의 탄생은 습속의 윤리의 압력에 굴복한다.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 새롭고 위험한 생각은 안 된다. 하던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 나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 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이거 무섭네. 심지어 지금 정부가 갖가지 사건을 통해 시키는 대로만 해라, 가만히 있으라는 압력을 계속해서 행사하고 있음을 알고 말하는 것 같은. 가만히 있음, 시키는 대로 함의 결과가 더 이상 그 사회를 구원할 미래 가치의 생산 불능으로 이어진다니. , 진짜 우리는 지금 위기에 처한 거 맞구나.


52. 우리는 미친 것과 아픈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광인으로 불리는 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정신은 일반적인 구속성과 대결한다. 그러한 구속을 참고 견딜 수 없는 정신이야말로 광기의 즐거움이 생겨나는 장소, 탈주자의 장소다.


53.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 오해 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 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56.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필로-소포스(Philo-sophos). ‘지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다.


57.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시체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짐승의 무리나 신도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에 새로운 가치를 써넣을,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


함께 창조하는 자. 적어도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눌 동지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기쁘다. 만나기가 쉽지는 않지만 


58.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58. 삶을 사랑한다는 것, 운명애(amor fati). 니체는 이것을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59.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63. 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힜으며, 그 대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 니체


79. 약자들은 “적의 상태를 살핌으로써 인위적으로 자신들의 행복을 꾸미거나, 혹은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거나 기만할 필요”가 있었다.


85. 성직자들은 환자들이 병에서 회복되는 것을 막는 것, 다시 말해서 성직자라는 의사들은 의사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혀서 자신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 시킨다.


어마어마한 통찰력 아닌가. 도대체, 성직자란 존재의 이유란 무엇이냐 말이다. 비즈니스, 오직 비즈니스로만 남은 성직자의 역할


90.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새롭다. , 악이란 이렇게 상대적이고 관계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구나.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92.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말의 유래가 된 그리스의 신 헤르메스는 신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자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심부름꾼이 아니었다. 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필요할 경우 주석을 달아 이해하기 쉽게 바꾸는 해석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서로 떨어져 있는 존재자들의 소통자이자 매개자인 헤르메스 해석학이 시, 공간상으로 분리되어 있는 서로 다른 사상들을 이해하는 기술이라고 한다면 헤르메스의 일은 분명히 해석학의 어떤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역시, 하나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헤르메스의 행위들처럼,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경계의 신 헤르메스와 해석학. 너무 잘 어울린다 


95. 자신과 거리를 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보다 차이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단적으로 말해 다른 해석학과 니체의 구분선은 제우스의 의중에 있기보다는 헤르메스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106. “저 허구가 아무리 습관적이 되고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고 해도그것이 허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어떤 신앙이 삶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이 그 신앙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을 없애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107. 사고와 판단, 지각의 활동은 동등의 것으로 조작하는 활동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다. 모든 새로운 것들, 모든 차이적 존재들을 하나의 틀에 끼워 넣는 동일화의 의지. 그 동일화의 의지는 모든 사건의 근본적 위조가 행해지고, 시선에 대한 광학적 훈련이 수행된 뒤에 목표를 달성한다

.

동일화의 의지. 그것이 사고와 판단의 활동의 근본에 있다는 것,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맞다. 줄줄이 떠오르는 사건들과 오해들에서 동일화의 횡포를 목격한 바 있지 않은가.


108. 니체는 논리학을 참된 것을 인식하라는 명법이 아니라 우리가 참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세계를 정립하고 조정하라는 명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109. 우리가 해석을 진리로 이해하는 문제로 두는 한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석이 진리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 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110. 모든 해석이 생장의 징후이거나 몰락의 징후이다. 통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타성의 욕구이며, 다수성이야말로 힘의 징후이다. 세계의 불안정하고 혼미한 성격을 부인하고 싶어해서는 안 된다.


동일화, 통일성, 변하지 않는 하나를 원한 이들의 단순 무식한 횡포와 그로 인해 초래되는 공포의 정치들. 


112. 니체에게 해석은 무엇보다도 창조와 생성의 문제다. 해석행위는 모든 차이를 아우르는 진리를 찾아나서는 일도 아니고, 그것이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떠드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래를 만들려는 자가 벌이는 가치평가행위인 것이다.


113. 니체에게 해석은 지배적 가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다. 그것은 인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자유정신이기도 하다.


114.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공공영역에서 차이들이 생성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치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던 그리스인들의 태도는 아직도 우리에게 이해되고 있지 않다. 다양성이 건강을 증명한다는 자연의 생태주의적 가르침도 우리에게는 이해되고 있지 않다.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119. 헤르메스를 떠올려보자. 해석학자들은 제우스를 보고 싶어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보고 배워야 할 스승은 헤르메스다. 재치와 배짱의 신 헤르메스는 전령이기 전에 해석자다. 그는 메시지를 해석하는 자이고, 창조하는 자이다.


120.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127.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는 잔인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개입한다.


128. 니체는 국가라는 잔인한 도구가 전쟁에서 왔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로 안전을 위해 인위적인 계약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 계약은 다시 국가에 의해 보증된다. 이것이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의 이동이며, 정의와 법의 탄생이다.


129. 홉스는 국가의 기원을 전쟁에 둠으로써 국가의 도덕적 정당화를 포기했다. 국가는 칼로 신약을 지키는 자일 뿐이다.


139. 우리는 다이어트를 체중감량을 위한 식이요법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나, 원래 이 말은 그리스어 ‘diaita’에서 온 것으로 그 의미는 ‘삶의 총제척인 양식 tatal mode of life’이었다. 그리스 의학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는 크게 네 가지의 체액의 균형체제인데, 다이어트는 이것들의 균형을 맞추라는 의학적 처방이었다. 네 가지 체액은 각각 운동, 섹스, 수면, 사회적 관계에 관여하는 것으로, 병이 생기는 것은 운동이나 섹스, 수면, 사회적 관계가 과도하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41. 니체는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고도의 권위를 윤리라고 보았는데, 윤리는 관습에 의하여 규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니체는 비윤리적이라고 비난 받는 것들에 주목했는데,  비윤리적이라고 비난 받는 것들은 개인적인 것, 자유로운 것, 제멋대로인 것, 길들여지지 않은 것, 예측되지 않는 것, 계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142. 니체는 이런 비윤리적인 힘들을 다스리는 훌륭한 수단 중의 하나가 노동이라고 말한다.

노동이 칭찬받고 노동의 축복에 관하여 지치는 일도 업이 이야기되는 경우나는 저의를 본다…. 노동을 바라볼 때, 현재 실제로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노동이 최고의 경찰이라는 것, 노동은 각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방해할 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노동을 통해 보다 안전해질 것이다.  


그래서 노동의 가치를 그렇게 찬미해왔구나. 그렇게 좋음 니들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통치의 도구로서 노동이 갖는 마취적인 힘에 대해, 다시 들여다 보는 계기.


144. 웨버는 이것을 능동적 자제라고 불렀으며 일기를 능동적 자기 검열의 대표적인 기제로 보았다.


일기에 이렇게 불온한 목적이 숨어 있었던가? 놀라운 발견.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161. 이제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고 같이 확고한 양을 가졌으면서도…. 여러 힘과 힘의 파랑의 유희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그 자체이다.


166. 니체에게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173. 권력의지(will to power). 살아있는 모든 것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   


176.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을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해라!’ 반대

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 니체


177.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


178. 선이란 무엇인가 권력 느낌, 권력 의지, 권력 자체를 인간 안에서 강화시키는 모든 것. (나쁨)이란 무엇인가? 허약함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 행복이란 무엇인가? 권력이 증가하는 느낌, 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 - 니체


179. 권력의지는 새로운 힘들과 마주칠 때마다 항상 촉수를 내민다. 그것을 느끼고 평가하는 것, 육체는 감각과 평가를 통해 권력의지를 경험한다. 사회든 개인이든 나쁜 권력의지는 이러한 감각 능력과 관계되어 있다. 강자들이 창피하고 비참하게 여기는 것을 약자들은 선하고 좋은 것으로 느낀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감각방식인 것이다.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183. 니체에게 세계란 어떤 손실도 없이 정말 긴 세월을 거듭회귀하는 힘의 대양이었다.


185. 니체는 헤겔조차 보지 못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놀라운 생각을 소개한다. 그것은 세계를 놀이로서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물리적으로 표현하자면 불이 자기 자신과 벌이는 유희이다.”


189. 세계란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놀이이다.


191. 긍정의 권력의지는 회복기의 차라투스투라처럼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한번 더!”라고 말한다. 생성의 반복은 죄지은 자의 운명이기는커녕 삶의 경이로움이며 그 자체로 삶의 구원이다.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 이것이 최고의 권력의지다.”  


192. 이제 존재하는 것에 대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은 것, 의욕하지 않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전적으로 긍정의 의지 편에서 서서 부정의 의지와 대결한다.

의욕하지 않는 것은 삶이 아니다. 의욕하는 것, 생성하는 것이 삶이라면 지금 나는 살아있는가. 죽어있는가.

194. “새로울 게 없어, 그래도 또 할래?” 악마의 속삭임에는 극도의 피로감이 응축되어 있다. 누군가 그의 속삭임을 한 번 듣는다면 그만 멈추고 싶어질 것이다….

모든 노고는 무익하게 되었고, 포도주는 독이 되었고, 사악한 눈이 우리의 밭과 심장을 누렇게 태웠다. …우리는 재처럼 흩날리리라. 그렇다, 우리는 불 까지도 지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모든 샘들이 말라붙었고, 바다도 물러났다.” “진실로 우린 이미 너무 지쳐 죽지도 못한다. 이제 우리는 여전히 깨어 있는 채로 살아나간다. 바로 무덤 속에서” - 차라투스투라

지쳐 죽지도 못 한다. 지쳐 떠나지도 못 한다. 지쳐 피하지도 못 한다. 진정 나는 지쳤구나. 모든 노고가 무익했음을 알고, 모든 전쟁이 의미 없었고 다시 반복되리라는 것을 알고 절망하고 지쳐서 나는 다시 의욕하지 못한다. 극도의 피로감. 그것이 문제다.

196.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 그것은 죽음까지도 살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 번!’ 이렇게 외치기 때문이다.

198. 생성이 반복될수록 양산되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200. 맑스의 말을 빌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해석자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동안 차라투스투라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praxis)이다.

201. 끔찍한 고통조차 긍정될 수 있는가? 그러나 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204. 부정은 긍정에 대립되지만 긍정은 부정과는 다르다. 우리는 긍정을 부정에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긍정 그 자체 내에 부정을 위치시키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부정은 긍정을 부정하지만 긍정은 부정을 긍정하므로, 부정에는 긍정이 포함되지 않고 긍정에는 부정이 포함된다. 긍정은 부정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니체는 긍정의 질을 획득하지 못한 채 부정하고 파괴하는 자들을 “창백한 범죄자”로 불렀다. 창백한 범죄자의 파괴는 생성이 없는 무로의 되돌아 감이다.

망치가 파괴의 도구인지 창조의 도구인지는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 결정된다. 하나의 긍정은 자신을 긍정해 줄 다음의 긍정을 기다린다.

206. 하늘에 던진 주사위를 가로막을 이성의 거미줄은 없다. 주사위 던지기는 하나의 춤추기이며 놀이이다. 하늘은 주사위 놀이를 위한 신들의 도박대이다

209. 왜 어린아이들은 영원회귀의 놀이를 멈추지 않는 것일까?... 영원회귀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유혹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즐거움은 계속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어떤 피로도 모르고 생성으로서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의 영원한 자기 파괴의 세계.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중의 정욕의 비밀의 세계.  영원회귀의 유혹, 즐거움.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즐거움이 모든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움직이게 한다. 순환하게 하고 생성하게 한다. 역시 즐거움이 답이었다. 기뻐 춤추는 발걸음, 웃는 얼굴은 모두 즐거움의 발현이다.

7장 인간

215. 사실 인간은 자연을 잘못 이해하므로 자기 자신도 잘못 이해한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하지만 모든 것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 해도 남아 있는 게 하나 있다. 니체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과’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났기 때문이다.

222. 천국이란 믿음의 문제이기는커녕 새로운 삶의 방식이고 실천이라는 것.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는 메시지를 그렇게 요약했다.

225. “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 스탕달

그럼 그렇지. 스탕달 쩐다!

231.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232. 그들은 초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잇는 세가지, 즉 놀이와 웃음과 춤을 몰랐다. 그들은 아이들의 놀이를 모른다. 어린아이의 놀이는 즐거움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놀이의 반복을 가져온다. 놀이는 다음의 놀이를 계속해서 부른다.

그들은 웃는 법을 모른다. 웃음은 초인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중력의 영과 신을 확실히 죽이는 무기이며 금욕주의 이상의 단 하나의 적이고 뱀의 목을 물어뜯은 목동이 초인으로 변신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구토가 인간에게 속하는 질병이라면 웃음은 초인의 건강을 의미한다

그들은 춤추는 법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초인을 의욕하는 자인 차라투스트라가 디오니소스를 만나면서 변신을 경험한다. 그는 불평하는 곰에서 춤추는 곰으로 바뀐다. 그의 춤은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옮겨가고 웃음은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주고 주사위 놀이는 낮음에서 높음으로 변이된다.


234. 긍정의 권력의지만이 영원회귀한다. 영원회귀하는 긍정의 권력의지는 변화된 신체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초인은 신체의 변신이며 새로운 느낌 방식이다. 신체가 즐거움을 경험하면 “한 번 더”라고 말한다. 신체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그것이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다.


8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238. “사람은 불멸하기 위해 여러 번 죽어야 한다.”…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계속되는 변화, 죽이고 살아나기, 생성과 소멸의 수레바퀴에 몸을 싣는 것. 어려워, 이렇게 사는 거. 하지만 해야 한다 이거지….


239.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244.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47. “치료하는 힘이란 우리가 입는 상처에도 있는 법이다. 호기심이 강한 식자들을 위해 출처를 밝히지는 않지만 다음은 나의 오랜 좌우명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250.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252. 니체의 사상은 유목적 사상(nomad thought)이다. 유목민이란 여행자이며 외부자이다. 그러나 니체의 여행자가 떠난다고 했을 때, 그는 공간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다. 그가 떠나는 것은 지배적인 질서이며 지배자의 코드이다. 외부란 계산되지 않은 힘들의 영역, 지배의 그물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힘들의 영역이다. 그 힘들은 지배적 가치의 외부에서 지배적 가치 속으로 파고든다, 내부이지만 잡히지 않는 내부, 그것이 내재하는 외부이다.  

253p.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모든 것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2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258. 어떤 점에서 근대는 제 발로 설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제 발로 서야 하는 시대다. 절대적 가치가 붕괴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 항상 새것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근대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260. 베버는 자본주의를 자본이나 기술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인간의 탄생과 관련시켜 이해했다.


261. 서양의 수도원에서는 도를 닦는 데 방해가 되는 충동이나 잡념을 억제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시간표가 이용되었다. 하루 동안 할 일을 시간 순서에 맞추어 적어 놓고 모든 행동을 그것에 맞춘다면 잡념이 들어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268. 처음엔 시간표든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271. 그는 이른바 과학적 경영이라고 불리는 것이 수도원과 군대의 합리적 훈육이 발전된 형태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272. 훈육

그는 훈육이 일어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를 들고 있다. ... 하지만 이 과정은 항상 가혹한 폭력을 수반한다.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가 분리되고 그들의 신체에 잔인한 기억이 심어지면 훈육의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된다. 잔인한 기억술로 심어진 행동방식이 반복되어 습속의 도덕으로 자리하면 이른바 능동적 자제라는 게 생겨난다. 처음엔 공포로 시작된 자기 검열이 이제는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검열로 대체된다.

274. 원래 일기는 교회 지도자들이 여신도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하루 동안 행한 일들을 적어오게 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하루의 일들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약속을 하는 수단이 되었다.

280. 베버는 근대 정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책임 윤리를 갖춘 정치인, 그리고 도구적 합리성에 종속되지 않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자의 출현이 낳은 것은 수동적 대중들뿐이었다.

281. 베버는 계급이나 분파의 이해관계에 사로잡혀있는 의회나 관료제적인 당 관료들을 넘어서기 위해 국민투표제를 통해 강력한 힘을 획득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자가 당을 이끌기 시작하며 추종자들은 넋을 잃게 되고, 정신적으로 프롤레타리아화된다고 말할 수 있다. 지도자에게 기구로서 쓸모 있기 위해서는 추종자들은 맹목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출현하려면 잘 훈육된 수동적 대중이 필요하고, 그러한 지도자가 정치를 하기 시작하면 대중들은 더욱 정신을 상실해 간다.


정신을 상실한 대중은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불행을 인자하지 못 할 것이다. 문제는 정신을 상실하지 못한 나머지 대중들이다. 이들은 불행하고, 멀쩡한 정신으로 카리스마적이지만 비윤리적이거나 폭압적일 수도 있는 지도자의 횡포를 지켜봐야 한다. 힘은 없고 보이는 것만 있는 불행한 비주류의 대중.  그래도 그들이 변화를 원하여 생성의 수레바퀴를 돌릴 것이다 


287. 확실히 근대인들은 절대신의 무덤 속에서 절대신을 장사지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앙까지 장사를 지낸 것은 아니었다


301. 사람들은 국가를 통해서만 파편화된 개별자로부터 훌륭한 시민으로 이행할 수 있다. 국가는 시민들의 합의체라기보다는 시민들을 길러내는 생산적 실체다.


믿기 힘들다. 이래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한 동의는 할 수 있겠다만.  


304. 서로 갈등하고 심지어 불가공약적인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교리에 의해 파편화되어 있는 자유로운 시민들이 어떻게 안정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가?

310. 산델 같은 공동체주의자들은 훌륭한 시민들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통해 길러지는 것이며, 따라서 필요한 것은 바로 주체를 형성해내는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313.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에 이르러 레이건과 부시가 모두 도덕과 가족의 가치에 초점을 맞춘 것은 국가가 이제 경제적 개입을 넘어서 도덕적 개입을 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신자유주의가 강력한 도덕과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효율성과 정의에 대한 가치 판단들이 전면에 내세워진 것은 윤리적 실체로서의 국가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차이의 문제과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동질화를 비판하고 차이의 소멸을 우려했던 공동체주의자들에게서 일종의 정치적 전체성(political totality)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레이건과 부시의 노선에 불편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 있다. 국가는 나의 윤리를 대신 정해줄 주체여선 안 된다. 그것은 마치 무뇌양들을 울타리에 넣고 기르는 목동과 같은 존재들로 그들을 인정하는 것이고 개개인은 양들로 전락하는 것과 같다.

316. 한편으로 정치학은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가 되는 상태에 대한 대처 방안, 즉 동물학에 가까웠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처방의 본래적 의미, 즉 병적 상태에 대한 진단과 치료로서 의학에 가까웠다. 그러나 동물학적 패러다임과 의학적 패러다임이 서로 치열한 논쟁을 전개해왔다고 해도 더 깊은 곳에서 이들은 어떤 동일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차이의 고유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다.

319. 생태계의 다양성과 차이를 파괴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다. 생태계의 어떤 것들도 자신의 특이성을 전개함에 있어 다른 것들과 대립하지 않으며, 종들의 다양성과 특이성이야말로 생태계 건강의 징표다…. 그것은 스피노자가 존재의 아상블라주(ASSEMBLAGE)로의, 프로젝트로의 성장에로 나아가는 길을 인지하고, 존재가 욕망으로부터 협력으로, 사랑으로, 그리고 존재의 살아있는 원천과의 결합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전개하는 인지적 공간을 구성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기도 하다. 

   

3. 내가 저자라면

니체를 알게 된 것은 구본형 선생의 여러 책에 인용된 아포리즘 때문이다. ‘모든 좋은 것은 웃는다라는 한 마디에 그야말로 완전히 뻑이 갔다’. 세상에, 이런 말을 하는 철학자는 누구인가? 대체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 것인가? 궁금은 하였으나 니체에 도전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리고 철학의 달로 명명된 변경연의 6월이 고군분투가 될 것임을 예감한 것도 바로 이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이라는 책 제목에서다. 이런 짐작도 가지 않게 심오한 제목아, 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게냐? 불안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책을 열었다. 그리고 책머리에서 고병관의 썰을 먼저 접했다. 흥미가 동했다. 뭔 소리인지 알 길은 없었으나, 확실히 이 고병관이라는 저자가 유명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유려한 문장. 적어도 이 재미없는 철학이라는 주제를 가지고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문장과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것은 알겠다. 그러므로 이 고병관이라는 저자를 통해 니체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리고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 다시 접한 책머리의 글들은 의미심장했다. 아 그래, 철학이라는 부류의 글을 읽고 일말의 감동을 느낀 적이 또 있었던가? 고병권이라는 저자를 디비기 위해 읽었던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인터뷰는 그의 육성을 함께 들을 수 있어 이해의 폭과 공감의 정도를 더 증폭시켰다. 니체의 입문서로서 천개의 길과 천개의 눈을 택한 변경연의 혜안에 감사한다.  

감동적인 장절은 여러 군데서 만났다.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즐거움에 대한 니체의 설명들. 계속 갈 수 있는 힘으로서, 삶의 동력으로서 즐거움, 그 즐거움의 증표로서 웃을 수 있는 능력. 순환의 비밀을 쥐고 있는 즐거움의 힘을 만나는 대목들이 나의 평소 생각과 맞닿는 것을 느끼고 행복했다.

209. 왜 어린아이들은 영원회귀의 놀이를 멈추지 않는 것일까?... 영원회귀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유혹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즐거움은 계속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어떤 피로도 모르고 생성으로서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의 영원한 자기 파괴의 세계.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중의 정욕의 비밀의 세계.  영원회귀의 유혹, 즐거움.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232. 그들은 초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세가지, 즉 놀이와 웃음과 춤을 몰랐다. 그들은 아이들의 놀이를 모른다. 어린아이의 놀이는 즐거움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놀이의 반복을 가져온다. 놀이는 다음의 놀이를 계속해서 부른다.

그들은 웃는 법을 모른다. 웃음은 초인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중력의 영과 신을 확실히 죽이는 무기이며 금욕주의 이상의 단 하나의 적이고 뱀의 목을 물어뜯은 목동이 초인으로 변신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구토가 인간에게 속하는 질병이라면 웃음은 초인의 건강을 의미한다

그들은 춤추는 법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웃음과 춤과 즐거움의 의미심장함을 이렇게 제대로 풀어놓은 철학자를 만나다니. 기쁘다 


238. “사람은 불멸하기 위해 여러 번 죽어야 한다.”…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불멸하기 위해, 아니 계속 진정으로 살아있기 위해 죽어야 한다. 사는 동안은 계속 죽어야 한다. 간신히 부여잡은 정체성에 목을 메다가 서서히 죽어가는 나를 본다. 죽지 못해 말라 죽게 되었다. 생성하는 순환하는 일상, , 인생. 나는 이걸 또 반복해야 하다니하고 탄식하며 어느 순간 달리기를 멈추었다    


194. “새로울 게 없어, 그래도 또 할래?” 악마의 속삭임에는 극도의 피로감이 응축되어 있다. 누군가 그의 속삭임을 한 번 듣는다면 그만 멈추고 싶어질 것이다….


나의 변화에는 나를 죽이고 다시 살고 싶은 욕망과 동시에 새로울 게 없는데 왜 애써야 하니? 라는 악마의 속삭임이 동시에 작용하였다. 다시 시작하고자 뛰어내렸으나 사소한 것들을 다시 세우는 작업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다시 일어나야 하는 지금, 니체를 만난다는 것의 필연.

책머리에

서장 -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1

1장 아모르 파티 : 삶을 사랑하는 철학 :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 니체의 계보학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 자연학 +윤리학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 자연학 +윤리학

7장 인간 :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8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2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1부에서 니체를 이 잡듯 뒤지던 저자는 2부에서 조금은 생뚱맞은 정치철학자들을 내세운다. 니체라는 위대한 철학자, 그러나 시대적으로 조금은 멀리 떨어진 철학자의 원론을 듣고 다시 현대사회의 현실정치를 생각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서 2부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은 하였다. 분명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책 머리에서 이 책의 구성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면 더 친절했을 것이다. 갑자기 이 생뚱맞은 2부의 구성 덕택에 이 책은 갑자기 친절한 철학서에서 다소 투박한 철학 논문으로 보여지게 되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논픽션이자 설득하기 위한 글, 혹은 설명하기 위한 목적의 책들은 반전 영화의 구성을 따를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목적과 전개가 분명할 필요가 있다. 가다 헤멜 수 있는 이런 낯선 철학서에서는 더더욱. 본문에서 길을 잃고 헤메라도 다시 책 머리로 돌아와 저자의 서문을 읽으면 아, 왜 이렇게 구성했구나, 나는 어디까지 해석한 것이구나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잘 보이는 곳에 전시되어 있어야 한다.

IP *.104.212.108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