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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23일 10시 00분 등록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1 저자에 대하여-고병권


1971년 전남 담양 출생.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수유연구소+

연구공간 '너머'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현장 인문학자이다. 대중 강연과 집필 외에도 우리 사회에서 소외 받는 사람들

과 함께하는 인문학 강좌를 꾸준히 해왔으며 그는 철학을 공부하는 목적이 ‘박식함’에 있지 않고 ‘일깨움’에 있다고 말한

. 철학하기란, 불가능과 무능력, 궁핍과 빈곤을 양산하고 규정하는 모든 조건에 맞서 분투하는 것이다. ‘철학하기’란,

불가능과 무능력, 궁핍과 빈곤을 양산하고 규정하는 모든 조건에 맞서 분투하는 것이다. 그는 절망을 느끼는 곳에서도

철학은 가능하며 오히려 그곳이야말로 철학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삶을 바꾸고 우리가 속한 세계를

바꾸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현장 인문학자라는 표현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저서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 『고추

,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생각한다는 것』(너머학교, 2010),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그린비, 2011), 『점거, 새로운 거

번먼트』(그린비, 2012), 『언더그라운드 니체』(천년의상상, 2014)등이 있고,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

이』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1844.10.15~1900.08.25)>

니체.jpg 현장 인문학자. 대중 강연과 집필 외에도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인문학 강좌를 꾸준히 해왔다. 저자는 철학을 공부하는 목적이 ‘박식함’에 있지 않고 ‘일깨움’에 있다고 말한다. 철학하기란, 불가능과 무능력, 궁핍과 빈곤을 양산하고 규정하는 모든 조건에 맞서 분투하는 것이다. ‘철학하기’란, 불가능과 무능력, 궁핍과 빈곤을 양산하고 규정하는 모든 조건에 맞서 분투하는 것이다. 그는 절망을 느끼는 곳에서도 철학은 가능하며 오히려 그곳이야말로 철학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삶을 바꾸고 우리가 속한 세계를 바꾸는 일은 거기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십여 년간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강의를 해왔다. 마르크스, 니체, 스피노자 등을 공부했고,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글을 써왔다. 지금은 해방촌에 자리 잡은 ‘수유너머R’에서 연구자로 살아가고 있다
.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언더그라운드 니체》《“살아가겠다”》《점거, 새로운 거번먼트》《민주주의란 무엇인가》《생각한다는 것》《추방과 탈주》 등이 있다
.


접기

니체는 19세기의 독일철학자, 음악가, 시인이라고 표현된다.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독일의 작센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2

1녀 중 장남이다. 니체가 4세 되던 해에 아버지 카를 빌헬름 루트비히 니체가 뇌질환으로 죽었으며, 같은 해에 막내

동생 루드비히 요셉도 사망하게 된다. 갑작스런 가장의 죽음은 가족들의 생계를 망막하게 하였을 것은 뻔한 일이었고,

23세에 과부가 된 니체의 엄마 프란치스카 또한 암담한 세상을 맞이했을 것이 분명한데, 여자보다 강한 엄마의 이름으

로 재혼하지 않고 아이들을 위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면서 나움부르크로 이사하게 된다. 할머니, 엄마, 두 명의 고모,

동생 엘리자베스와 그곳에서 1850~1858년까지 성장하게 된다.

1854: 김나지움에서 음악, 언어의 재능을 발휘

★1858~1864: 슐포르타에 입학하여 고대 그리스와 로마문학을 이수.

★1864년 이후: 신학과 고대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그러나 바디드 슈트라우스가 쓴 <예수의 탄생>의 영향으로 신학을

 중단하게 되었고 그 후 철학에 몰두함.

★1869~1879: 바젤 대학에서 고전 문헌학을 가르쳤으며, 1869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시험과 논문 없이 출판된 저

술들만으로 박사학위를 받음.

★1879~1888: 독립철학자 생활, 건강상의 이유로 교수직과 강의를 그만두고 유럽 각지에서 집필활동을 하게 됨.

★1889: 이탈리아에서 졸도 후 정신병원에 수감됨.

★1900: 어머님이 사망한 1897년에 여동생 엘리지베스에 의해 바이마르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1900년 사망함.

그의 저서: 1878<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881 <서광>, 1882 <즐거운 지식>, 1884<차라투스트라>,

 1886 <선악을 넘어서>, 1888 <도덕의 계보학>, <우상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 1889 <바그너의 경우>, <

디오니소스 찬가>

니체를 표현하는 수식어는 너무도 많이 있다. 내가 느끼는 느낌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여행자, 방랑자라는 표현이다.

 니체만큼 삶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사람이 있을까? 섬뜩하리만치 비판적인 시선으로 종교, 도덕, 문학, 철학,

, 과학 등에 칼날을 서슴없이 휘두른 사람이기에 살아 생전에는 엄청난 비판과 비난의 소리를 감수했으며, 사후에 더

 많이 인정받은 사람 중에 한 명이 되었다. 현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 3인방 중에 한 명으로 니체가 꼽힌다.

이유는 지금의 세계와 달랐던 신의 존재를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면서 많은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고, 초인, 아이,

, 강자, 거인 등을 불러옴으로써 미래의 인간상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은 변화와 넓이가 같이 하기에 한 번

에 파악할 수 없으며, 그의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읽는 자로 하여금 새로운 창조를 요구하므로 1번 읽었다고 해서 안다

고 말할 수 없는 경지이다. 현대가 그의 영향력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었는지 시간을 두고 알아봐야 한다는 생

각이 들었다.

<왜 니체인가?>

고병권씨가 니체를 사랑한 이유는 우리 삶을 바꾸고 우리가 속한 세계를 바꾸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현장 인문학자이기

에 그의 이상과 가장 잘 맞는 철학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무엇을 바꾼다는 것은 파괴가 선행이 되어야 하는데 그 도구

인 망치의 역할로서 훌륭했고, 세상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무쏘의 뿔처럼 혼자 걸어간 니체의 걸음걸이를 뒤쫓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는 시대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시대의 목소리가 가리고 있는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니체가 동경이었을 것이다.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도

실천이 필요하다라고 쓰인 그의 글에서 진정성이 느껴졌으며 니체를 사모하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017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

018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길은 찾는 자에게 보이고, 떠나는 자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치열하게 찾아 나서지 않는 자에게 길이 보일 리 만무하다. 길을 나서는 두려움을 떨쳐버려야 곳곳에 숨겨진 즐거움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018 지혜로운 탐사자라면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지나친 많은 것들 속에서도 파편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천 겹의 주름 속에 숨겨진 사건들이 햇빛 속에 놓이게 될 때 신성한 것들의 거짓이 떨어져 나가리라.

>나에게 이런 지혜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많은 양들이 진실과 역사라는 커튼 속에 숨어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속적으로 공부를 한다면 이런 능력이 생길까?

019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019 벌써부터 평균을 구하지 말라. (중략) 자유 정신의 소유자들이여 또 한 번의 주사위를 던져라. 세계는 너희를 위해 천 개의 섬을 준비해두었다.

>안정 된 길을 가지 말고 모험을 떠나라.

020 “아포리즘과 화살그 것들은 읽혀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쏘아지기를 바란다.

1

1장 아모르 파티: 삶을 사랑하는 철학

025 “운명애,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운명애, 이것이 나의 가장 내적인 본성이다.”

026 철학자가 철학의 가치를 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한 철학자는 신의 가치를 묻는 신앙인보다도 훨씬 큰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그는 기도와 신앙이라는 방패도 없이 제 자신의 질문과 대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026 모험가들은 어떤 곳을 뒤지지만 철학가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모험가들에게 모든 곳에 있는 것은 무가치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떤 곳에만 있는 것이 무가치하다. 만약 모험가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특정한 곳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개개의 요소들에 전체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027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삼는다. 왜 철학자들은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가? 왜 그들은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니체는 진리를 찾는 철학 자체를 하나의 문제로 삼았다.

028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는 잘못된 사상만큼 건강에 해로운 것도 없다.

>맞는 말이다. 정신은 육체를 지배하는 힘을 갖고 있다.

029 건강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니체는 분명히 삶의 철학자이고 생의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을 삶의 철학, 생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건강과 생명을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건강이나 생명에 대해 철학이 맺는 관계, 혹은 철학 자체의 건강과 생명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바라보는 철학,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진단하는 철학. 그래서 니체 철학이 주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 그에게서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 구도 속에 놓여 있다. (중략) 니체가 철학자들을 죽음의 설교자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이 세계 속에서의 삶을 평가절하하고, 어떤 생성도 없는 영원불멸의 세계를 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030~031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죽음 이후에 벌어질 처벌을 환기한다. 이들 역시 삶을 죽음을 위한 준비에 쓰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의 부조리한 삶을 고발한다. 삶이 그토록 추악한 것이라면 삶을 살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이들은 삶을 배신하는 삶을 살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조롱한다. “그들 역시 삶의 지푸라기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삶의 지푸라기에 매달려 있음을 비웃고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소망한다. 그렇게 죽음이 좋은 것이라면 제발 빨리 그들이 원하는 세계, 천국의 세계로 사라져 버리기를….

031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라는 두 스승의 죽음. 보편적 진리를 위한 죽음과 보편적 구원을 위한 죽음. 서구 사유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리고 있다.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니체의 말에 토를 달기에는 내가 너무 초라하고 작아 보인다. 입에서 많은 말들이 맴맴도나 끄집어 내지질 않는다.

033 신학자들이 유일신의 영광을 찬미할 때, 그리고 철학자들이 보편적 진리가 발하는 빛에 눈부셔할 때, 니체는 그들의 왜소증을 걱정한다. 신이 위대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왜소해진 것은 아닌가? 진리가 밝아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아닌가? 더 이상 신과 진리의 공과를 묻지 못하고 신과 진리에 대한 자신의 공과를 묻는 인간의 왜소증! 진리의 위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의 완전성을 찬미하기 위해 자신의 불완전성을 끊임없이 고백하는 것.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이다. 이 세계와 자기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

>니체의 힘이 느껴진다.

034 차라투스트라를 따라 다니는 독수리가 가진 드높은 긍지. 거인족은 거대한 상승의 벡터로 나타난다. 거인족이 상승 벡터라면 난쟁이는 거대한 하강의 벡터다. 니체의 저서 속에서 난쟁이는 중력의 영으로서 거인족들의 가벼운 걸음걸이를 무겁게 만드는 존재, 산정 높은 곳으로 상승하는 거인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존재, 높이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날개를 피곤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중략) 난쟁이의 왜소증은 중력에 대한 굴복에 대한 결과다.

>나는 무엇에 굴복하고 사는가? 나를 점점 작아지게 만드는 중력의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한 번이라도 거인 족으로 살았던 적이 있는가?

034~035 “내가 (문을 지나다니기 위해) 몸을 굽히지 않아도 되는 곳, 소인들 앞에서 내가 더 이상 몸을 굽히지 않아도 되는 나의 고향으로 나는 언제 돌아갈 것인가?”

036 그렇다면 기독교인들과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비극성의 크기가 아니라 그 비극성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리스인들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공포를 고유한 명랑성으로 극복한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거인들이라고 부른다.

037 그리스인들이 고통을 받았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이지 결코 생의 결핍 때문이 아니다.(중략) 우리가 그리스의 비극을 보고 놀라는 것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비극을 활용하는 기술 때문이다.

038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039 디오니소스의 찢겨짐은 세계의 분화와 개별화된 사물들의 탄생을 의미하고, 그가 겪는 고통은 개별화된 사물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상징한다.

040 니체의 분석에 따른다면 주신 찬가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화해와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041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긍정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과 대비시킨다. 디오니소스 대 그리스도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자, 삶에 대한 근본적 가르침을 제공한 자, 이 반기독교적 스승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042 차이는 최의식과 관계된다. 디오니소스의 갈기갈기 찢겨진 죽음에는 어떤 죄도 수반되지 않으며 그 죽음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재생의 약속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식을 길러냈다. 그리고는 그는 무서운 심판과 함께 돌아온다.

043 “, 크리토! 인생은 질병이다.” 소크라테스는 삶에 가장 모욕적인 말을 내뱉었다. 바로 죽음을 의사로 받아들였으므로.

>삶은 왜 질병이고 죽음을 왜 의사라고 표현했을까? 소크라테스도 살아 있다는 것이 고통스러웠을까? 모든 것에 초연해 보이고 무관심해 보이는 그도 말이다. 삶에 대한 최고의 복수로 일컫는 이 말은 아직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삶에 복수를 하기 위한 나의 복수법은 더 열심히 살아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으로써 삶을 치환하고 싶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레테의 강을 건넜을 때, 그때의 삶에 충실하면 되는 것 아닐까?

044 니체의 저서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 비극의 타락이 일어난 두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극장과 법원이다. 극장은 삶을 연극으로 만드는 장소이고, 법원은 삶의 죄를 추궁하는 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극장과 법원이 삶과 이런 개연성을 갖고 있는지 몰랐네. 역시 한 발자국 물러서서 보는 것이 중요해.

050 항상 인간은 시대의 목적을 향해 훈련받아야 한다.” 어떤 사상이 자신에 부합하는 삶을 생산해내는 과정은 폭력과 훈련을 동반하고 있다.

>훈련 받는 것과 세뇌 받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말이 좋아 훈련이지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주입식인 것을.

050 어용철학자로 존재하는 것을 감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리 위에 더 높은 단계, 즉 국가가 있다는 것을 승인해야 할 것이다. 플라톤은 이상국가는 국가를 통치하는 철학자의 꿈이지만 현실에서 철학은 국가의 시녀였다.

051 철학이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가로막는 거대한 수렁이다. 새로운 가치의 탄생은 습속의 윤리의 압력에 굴복한다.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 새롭고 위험한 생각은 안된다! 하던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 나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 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052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인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052 아픈 광인은 병원에 갇힌 환자지만 건강한 광인은 자유 정신을 지닌 전사로 등장한다.

052 “너희는 너희의 사상을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 ‘인식의 전사’, 그는 철학을 하나의 전쟁터로 만들며, 세계를 내적으로 찢어버린다.

>이런 전쟁을 하려면 출혈이 있어야 할 텐데, 나는 그 출혈과 고통을 감수할 준비가 되었는가? 피를 흘리며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가?

053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와 있지만 항상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 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미래가 오로지 미래일 수 있을까? 미래는 과거와 현재가 항상 함께 존재하는 시간이다. 현재의 현상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한테 미래는 광인처럼 느껴질 수 있고, 광인이 되어야만 현재에 매몰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지 않을까?

054 니체가 철학을 위대한 용법으로 사용할 때는 미래의 철학자와 관련해서일 뿐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명령자이며 입법자이다.” 미래의 철학자들은 가치의 평가자이며 창조자이다. 이에 반해 철학적 노동자들은 가치를 내면화하는 자이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자료들을 정리하는 일이 고작이다. 입법자로서의 철학자들, 진정한 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개념들을 해석하고 정리할 뿐 철학적 노동자들은 창조를 모른다.

056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함은, 그럼 올바로 사랑은 하고 있는 것인가?

056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필로-소포스. ‘지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철학의 사랑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057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058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059 ‘삶을 바꿔 보라!’-철학을 떠난 철학자들이 철학의 목표로 제시하는 것.

059 그가 전하려 했던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던가?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나는 니체교에 다니고 싶다. 내가 교회를 가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들의 외침이 나의 마음에 울림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조할 수 없는 구석이 너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삶의 실천을 통해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니체의 생각을 들여다 보며, 내 안에 예전부터 니체가 있었구나 느낀다.

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062 도덕학자들에게 결여된 것은 역사 의식이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 자체가 생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도덕 역시 욕망을 표현하는 상징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이들의 도덕학이 결여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도덕 그 자체의 문제이다.

064 니체가 도덕을 연구하려는 사람에게 강조하는 용기와 박식함은 도덕학자들의 소심함과 어리석음에 선명하게 대비된다. 다른 지층을 탐험하는 탐사자는 자신의 시대를 떠날 수 있는 대단한 자유정신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탐사자는 용기 있는 것 못지 않게 박식해야 한다. 파편 하나도 세심하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쉽게 지나치는 것을 그는 꼼꼼하게 보아야 한다.

064~065 니체는 이러한 도덕에 대한 탐사 작업을 계보학이라고 불렀다. 계보학자는 돋보기나 현미경을 들고 있는 탐사자이다.

065 문제는 역사학이 뿌리나 열매를 신성화하기 위해서 차이들을 난폭하게 처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왜 이렇게 신성화 하려는 작업을 하려는 것일까? 그 작업 뒤에 숨으면 인류가 신성해 지는가? 자신이 신성해지는가? 눈만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신성화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065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의 유래와 발생을 묻는 작업이다.

068 니체는 도덕을 화폐위조에 비교하곤 했다. 성직자들은 곧잘 화폐위조자로 불렸으며 또한 마법사라고도 불렸다.

068~069 화폐와 도덕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 화폐란 도덕적 판단처럼 가치의 표시이다. 그것은 모든 차이들을 소통하는 매개자이며 기준이고 척도다. 가치 문제를 다루는 도덕의 성격을 화폐만큼 잘 표현해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도덕학자들이 가치를 다루기 위해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을 경제학자들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069 도덕학자들은 도덕을 자연스러운 것, 본능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싶겠지만 도덕이야말로 인위적인 조작 행위다. 니체의 말대로 모든 도덕은 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며, 자연에 대한어느 만큼의 억압이다.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의 한 장이 제목을 도덕의 자연사라고 붙였는데, 이 글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도덕의 부자연스러움이다.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의 역전. 자연과 비자연의 역전.

>도덕의 자연사라는 표현은 잘못된 듯 하다. 자연사가 아니고 김할머니와 같은 존엄사도 아니지만 의도된 죽음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075 지금 미덕들로 숭상되고 있는 가치들이 누구의 것인지’, ‘누가 만들어 낸 것인지말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076~077 노예는 자신과 대립되는 것,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 먼저 이라고 규정하고 그와 상반되는 자신을 이라고 정의한다. 이리하여 좋은 것/나쁜 것이라는 (윤리적)구분이 선한 것/ 악한 것이라는 도덕적 의미로 바뀐다.

>이렇게 규정하게 된 근원은 무엇인가? 본능인가? 교육의 차이인가?

078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은 차이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우월성에 대한 자부심이 아닌가?

080 양은 자신이 독수리보다 강하다고 위로한다. 양은 독수리보다도 하나의 힘을 더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바로 강함을 억제하는 힘, 즉 유혹에 견디는 힘이며, 독수리는 이 힘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약자는 자신의 약함을 하나의 공적이자 소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특히 나는 약자의 해석학의 지배를 받고 살았구나! 약자라서 편안했고, 약자라서 위안받았고, 약자라서 선하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피해의식과 보상심리로 나를 똘똘 감싸고 산 세월들이 눈에 스친다.

080~081 현실에서 복수할 수 없었던 약자들은 정신적으로 복수해 버린다. 그들은 마음속 정의의 신의 이름으로 심판을 행한다. 강자에 대한 원한에 찬 비난, 그것이 바로 그들의 복수다. 그들은 믿음사랑소망을 가지고 살며 서로 사랑하는 형제를 외치지만, 그것은 최후의 심판이라고 부르는 신의 왕국이 도래할 때 까지만이다.

>그것이 무슨 복수인가? 복수를 했다는 자기 위안이지. 복수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081 노예들, 약자들, 그들의 정신적 공격 본능이 밖으로 발산되지 못할 때, 그 본능은 안으로 투사된다. 귀족들, 강자들이 사라졌다면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그건 바로 너다!

083 “형벌은 오히려 양심의 가책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준다. 감옥에 들어온 자가 깨닫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지하는 조심성이다.”

081 ‘원죄는 채무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원죄의 채무를 지게 되면 그 누구도 빚을 다 갚을 수 없는 빚쟁이가 되고 만다.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불쌍한 동물인 인간은 제 자신을 한탄하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다.

>나는 원죄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

081 어떻게 노예의 도덕이 지배적 도덕이 되었는가? 니체가 피에 독을 탄 사건이라고 부르는 일은 어떻게 일어났는가?(중략)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질병은 건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질병의 어떤 적극성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자를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성 때문이다.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

085 성직자라는 의사들은 의사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혀서자신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시킨다.

>성직자들은 니체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 구절을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하다.

086 가장 결정적인 수단. 삶에 대한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 성직자들이 마법사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것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환자를 죄수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모든 고통을 죄에 대한 벌로 이해함으로써 환자들이 고통에 더 이상 항거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오히려 죄수가 된 환자들은 고통을 갈구한다.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101 캐나다의 퀘백주 문제나 이슬람 문제를 언급하면서 테일러는 보편주의가 차이적 요소들을 오인하고 억압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자기 문화의 관점으로 다른 문화를 평가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무조건적 승인을 위한 토대로 모든 문화는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내세웠다. 그는 보편주의 자체는 거부하지만, 새로운 보편적 준거를 발견한다. “우리들 각자에 특수한 것을 (절대적으로-필자) 승인함으로써 우리는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103 진리의 해석학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보여주는 단어는 투시주의다. 개인이나 집단은 모두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중략)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잇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107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제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이런 현실이 두렵다. 내가 보지 못할까 봐, 내가 듣지 못할까 봐, 그런데 내가 듣고 보는 것이 또한 진실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때도 많다. 눈을 뜨고 있어도 장님이고, 귀를 열고 있어도 귀머거리가 될 때가 있다.

109 니체에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그것이 상대주의의 절대성이라고 해도-진리, 모든 해석을 수렴시킬 수 잇는 매듭은 없다. 그 이유는 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과잉은 진리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소멸은 부재나 결핍이 아니라 넘침과 과잉이다.

110 사실 어떤 것이 진리로 주장되는 것은 진리 자체가 힘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힘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진리는 더 이상 해석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기준이기는커녕 힘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할 때 소멸해 버리는 것이 진리이다.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

>슬픈 일이구나! 진리가 진리로서 힘을 갖지 못하고 힘있는 자의 뒤꽁무니를 따를 때 생명력을 유지한다니, 그렇다면 진리란 진정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일까?

115 “모든 단단한 것들은 녹아 사라진다고 하는 맑스와 엥겔스의 말처럼 니체는 새로운 견해의 태양이 새로운 열기와 더불어 인간위를 내리 쪼이자마자 고대의 모든 질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회 질서도 천천히 녹아 내린다고 말했다.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117 데리다는 단호하게 말한다. “니체의 스타일은 결정할 수 없다. 만약 니체에게 스타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120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매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21 지난 시대 많은 사상가와 운동가들이 사회주의의 실패에 그토록 예민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체체자체를 문제 삼는 거대한 비판과 새로운 체제에 대한 소중한 꿈이 깨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체제에 대한 실험의 실패로 받아들여졌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사회든, 국가든 꿈의 상실은 비극이다.

122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23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정치의 목표를 잘 실현하는 사회가 있는가? 40년을 넘게 살면서 정치가 이런 목표를 갖고 있다는 느낌을 한 번도 가져본 일이 없다. 그들만의 리그고 그들만의 싸움에 미래 사회에 대한 구상이 자리할 수 있겠는가?

124 니체식으로 보자면 순응주의 사회, 즉 사람들이 한 무리의 가축떼로 전락한 사회는 오래 지속되어온 서구의 형이상학과 기독교, 그리고 그것이 습속화된 삶이 도달한 곳이다. 근대성이란 허무주의 운동의 귀결점이다. (중략) 근대란 정치의 쇠퇴 형식’, 혹은 정치의 소멸이다.

124~125 ‘허무주의의 극복이 철학이나 도덕의 과제인 것 이상으로 정치적 과제일 수 있는 이유는 허무주의가 바로 정치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영역의 위축’, ‘ 정치의 쇠퇴야말로 근대 사회를 표현해 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근대 정치 비판에서 비판이라는 말이 향하고 있는 곳은 정치라기보다는 정치의 상실, 즉 근대성이다.

125 니체의 근대 정치에 대한 비판을 두 가지 측면 (중략) 첫째는 정치의 형이상학화이다.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이 보여준 폭력성이 정치적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차이를 억압하는 동일성의 정치가 된다.

>보편적 진리가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보편적 진리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이 얼마나 많을까? 과연 보편적 진리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정의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가 보편적 진리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소수를 위해 만들어졌으리라는 추측 때문에.

126 공동의 가치, 공동의 선을 찾아 나서는 근대 정치는 형이상학적인 물음의 방식,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위에서 말한 보편적 가치들이다. 그러나 디오니소스는 다른 방식으로 묻는다. “어던 것인가?” 혹은 누구의 것인가” (중략) 좋은 것과 나쁜 것, 친구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해내는 기술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다. 여기에는 가치의 창조와 평가,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세력에 대한 물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근대 정치는 이러한 창조와 평가, 세력들 및 권력에 대한 물음을 봉쇄하려 한다. 그러한 물음이 커다란 혼란을 불러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을 봉쇄하는 것은 근대뿐만이 아니다. 요즘을 보면 다시 근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27 “예속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다만 타인들이 평가하는 대로 존재하는 인간들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인정되었던 것, 또는 그들로 하여금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가치도 찾아내지 못한다.”

127 두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적인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는 잔인한 길들이기길러내기가 개입한다. 니체가 저작의 이곳 저속에서 산발적으로 쓰고 있는 길들이기길러내기라는 표현은 가치의 습속화를 통한 근대적 정치 주체의 생산을 분석함에 있어 매우 유용하다.

>내가 가끔 사기 당한 기분이 드는 이유, 길러내기와 길들이기가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매한 대중을 교육, 자유, 복지라는 것으로 눈을 가리고 틀에 가두기 때문이다.

128 니체는 국가라는 잔인한 도구가 전쟁에서 왔다고 말한다. “패자의 것은 부인, 자식, 재산과 핏줄을 포함하여 모두 승자에게 속한다. 폭력은 최초의 권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국가의 원형은 전쟁을 통해, 그리고 군사 계급 속에서 제시되고 있다.” 전쟁은 혼돈 상태의 대중들을 군사적 카스트 계급들로 분리시켜 전사적 사회구조를 만들어 내는 효과가 있다. 이 운동은 각 개인들을 굴복시키고 그 특성을 화학적으로 변화시켜서 운동의 목적에 친화력을 갖도록 만든다. 군사적 원시 국가는 군사적 수호신을 생산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129 니체가 말하는 국가는 전쟁의 종식이 아니라 전쟁의 지속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군사적 수호신의 끊임없는 재생산을 목표로 하는 국가와 전쟁의 종식을 목표로 하는 국가는 전혀 상반된 성격을 갖는다. 결국 근대의 정치에서 나타나고 있는 국가는 전쟁 공포의 확산에서 생겨난 후자의 국가다.

131추상화되고 균질화된 사회에서 전쟁의 힘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칼을 든 군주는 전쟁을 막으면서도 그 흔적을 지니고 있지만, 일반의지는 칼 없이도 전쟁을 막아낸다. 모두에게 주어진 한 표가 전쟁의 힘을 흡수해 버렸다. 민주주의는 가장 효과적인 전쟁억제 수단이다.

131 고대의 국가가 전쟁에서 기원한다면 근대의 국가는 전쟁에 대한 피로감에서 등장한다. (중략) “너희는 전쟁에서 지쳤고 이제 너희의 피곤함이 이 새로운 거짓 신에게 봉사한다….. 너희가 국가, 그 새로운 거짓 신을 숭배할 때 국가는 너희에게 모든 것을 주려고 하리라. 그렇게 해서 국가는 두 눈의 심안을 매수하는 것이다….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가 음독자가 되는 곳,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니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근원이 궁금하다. 맞는다는 생각도 들지만 섬뜩하기도 하다.

133 더구나 자유로운 개인을 떠드는 자유주의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니체는 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운 인격은 볼 수가 없으며, 볼 수 잇는 것은 단지 비겁하게 정체를 숨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뿐이다. 개성은 내면적인 것으로 움츠려 들어가, 밖에서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로운 개인이란 특이성을 갖추지 못하고 보편성 아래서 단지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개별자들인 셈이다.

135 (앤셀-피어슨) 자유는 체제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들이 강조하는 자유에는 경찰들이 그어놓은 청색 선 있다. 그곳을 넘는 순간 곤봉 세례가 퍼부어진다.

>진정한 자유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런 나라가 있을까? 그런 체제가 존재 가능할까?

136 사회주의자들은 문화나 제도, 도덕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그들은 오직 소유물의 분배만을 본다. “사회주의자들은 소유물의 분배가 과다한 불공정과 폭력의 결과임을 지적하고 부당한 기반 위의 구축물에 대한 의무를 전체적으로 거부하는데, 이때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개개의 것만을 보고 있다.

137 니체는 사회주의 운동이 과거 전제주의만이 소유했던 것과 같은 커다란 권력을 갈망할 뿐 아니라 개인의 명백한 근절을 기도함으로써 과거를 뛰어넘는다고 말하고, 시회 주의를 전제주의의 공상적 동생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사회주의는 전례가 없을 정도의 예속을 필요로 한다.”

137 민주주의는 나태함과 피로, 약함의 해방이다.

139 ‘체제라는 말은 한자풀이 그대로 신체를 통제한다라는 뜻이다.

141 니체는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고도의 권위를 윤리라고 보았는데, 윤리는관습에 의하여 규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니체는 비윤리적이라고 비난받는 것들에 주목했는데, “비윤리적이라고 비난받는 것들은 개인적인 것, 자유로운 것, 제멋 대로인 것, 길들여지지 않은 것, 예측되지 않은 것, 계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니체에 대해서 읽다 보니 모든 체제에 의심이 가고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 니체가 말하는 천개의 눈이 바로 이런 것인가?

142 니체는 이러한 비윤리적인 힘들을 다스리는 훌륭한 수단 중의 하나가 노동이라고 말한다.

142 우선 사회나 국가 같은 개체가 개개인을 굴복케 하여 고립에서 끌어내고 하나의 단체에 정렬시킬 때,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기초가 정비되고, 이것이 익숙해지면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하여 그것이 본능이 되도록 한다.” 하나의 도덕이 자연스러운 지배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전사적인 작업이 있어야 하고, 그 이후의 본능적으로 미덕으로 숭상되어야 한다. 첫 번째의 작업이 길들이기에 해당된다면, 두 번째 작업은 길러내기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을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니체에 대한 글을 읽으니 책이(다른 사람의 정신세계) 때로는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비판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위험해 보인다.

143 잔인한 형벌은 기억술을 위해 동원된다. (중략) 니체는 이 작업을 기억할 수 있는 동물기르기라고 명명한다. ‘기억할 수 있는 동물은 또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된다. 그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동물이 되는 것이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그 사회에서 규칙적이고 필연적인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의 행동은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만큼의 계산 가능성을 높여준다. (중략) 강제된 덕목들은 이제 자연스러운 본능이 되어야 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그 잔인한 장면들을 왜 대중들 앞에서 시행하나? 너무 잔인하고 폭력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이 곧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144 동등하교 규칙적이 되도록 길들여지며 지배적 도덕을 본능화하게 될 때, 니체가 말하는 습속의 도덕이 완성된다. 지배적 도덕이 습속화되면 통치는 사람들의 살갗을 뚫고 들어온다. 이제 사람들은 능동적으로 자기를 검열하고 통제한다.

146 특히 니체가 아곤이라고 부르는 그리스의 독특한 정치문화는 정치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소재들을 제공한다. 아곤은 보편화나 전체화에 빠지지 않는 다양성의 정치가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적대가 아닌 경쟁을 위해 어떤 정치적 기술들이 동원되었는지를 보여준다.

152 니체가 자주 말하듯이 좋은 전쟁은 화약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전쟁은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다.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우리 정치적 운동의 과제, 그것은 전쟁이다.

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154 ‘에서 시작한 기독교의 창조론이 창조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에서 시작한 원자론은 세계의 목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161 이제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이 확고한 양을 가졌으면서도….여러 힘과 힘의 파랑의 유희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그 자체이다.

162 클리나멘이란 직선으로 날아가던 원자가 그로부터 이탈해서 편위하는 운동이다.

164 ‘무거운 정신은 중력의 상징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힘들의 모든 우발적 운동을 잠재우는 족쇄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드높은 하늘에 던져진 주사위영원한 이성의 거미줄로 묶어 버린다. 던져진 모든 주사위들은 지구의 중심을 향해서만 떨어지고, 모든 반응들은 평형 상태를 향해서만 돌진한다.

166 그렇다면 니체에게 강함은 어떤 것이었는가? 강함은 무엇보다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166 “역사는 가장 초췌한 자를 가장 풍만한 자로, 그리고 가장 풍만한 자를 가장 유해한 자로 혼동하고 있다.

>의도된 혼동과 의도되지 않은 혼동이 있을 것이다. 역사라는 것이 진실함만을 이야기해야 함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가슴 아프다. 역사는 언제쯤 진실의 옷을 입을 수 있을까?

167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이 작동했을 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며, 그 방향은 능동적 힘의 작동을 상쇄시키는 방향이다.

169 니체는 힘들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내면의지가 바로 권력의지라고 말하고 있다.

171 니체는 힘의 내면의지를 권력의지라는 말로 바꾸었는데, 그때 의지란 사실상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

173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통해 힘을 주고받으며, 힘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니체는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모든 것을 권력의지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권력의지가 아닌 존재라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 더사 말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

174 “허무주의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무의 의미혹은 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무화하려는 의지이다. 허무주의가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할 때, 그때의 권력의지는 모든 창조적이고 생성적인 힘들의 능력을 박탈함으로써 허무주의를 지배적인 것으로 관철시킨다.

178~179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은 오히려 감각과 정신이야말로 육체의 도구이며 노리개임을 모른다. 육체는 자아보다도 큰 자기 자신이며, “제압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그것은 힘센 명령자이다.” 같은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육체에 대해 느끼는 육체가 뛰어나다. 그것은 자신이 느끼는 능력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그 능력으로 지배한다.

>육체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자진짜 강한 자. 하지만 존재하기 힘든 자.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180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가 이해하는 세계의 존재방식-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의 생성방식-이다.

180~181 긍정의 권력의지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새로움과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고귀한 운동으로 느낀다. 하지만 부정의 권력의지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유한자들에게 부여된 고통이나 불완전한 감각 기관에 비친 가상쯤으로 생각한다. 전자에게는 반복이 기쁨일 테지만 후자에게는 큰 고통일 것이다.

182 “장례식의 비가 속에는 언제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 아닌가.”

183 니체에게 세계란 어떤 손실도 없이 정말 긴 세월을 거듭 회구하는 힘의 대양이었다.

186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189 세계란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놀이다. 니체는 이것을 주사위 놀이를 하는 세계로 그리기도 한다. 주사위 놀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의 의미를 이해할 때도 등장하는 놀이다. 항상 자기로 귀환하는 놀이 주사위 던지기! 우리는 학자들에게 영원회귀가 왜 어려운 개념인지를 안다. 그들은 주사위는 잘 알고 있지만 놀이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89 차라투스트라는 학자들에 대하여’ ‘가짜 주사위 놀이를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191 영원회귀는 동일한 반복을 확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성을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192~193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하지 않는 것이다.

196~197 그는 두 개의 길이 만나는 출입구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순간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다. 순간이라는 입구에서 하나의 기나긴 길은 뒤로 달리고, 다른 길은 앞으로 달린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모든 순간들에는 이 세 개의 시간들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 공존의 공간인 순간들은 흘러간다’. 순간들의 생성, 그리고 소멸. 순간들을 통해 볼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순간들 속에 다른 시간과 공존하며 경쟁하고 잇는 시간이다.

197 많이 알려져 있는 것처럼 니체는 반시대적인 사상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때에 맞지 않는 사상가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에 살았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고,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는 시간과는 동시대적이다. 바로 그 자신이 새로운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멀리 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그리하여 내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보라! 시간만이 나의 유일한 동시대인이다.”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를 같이 산다는 것은 크나큰 능력이고 힘이지만, 거기에 수반되는 외로움과 공포스러움은 오롯이 혼자만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시간만이 유일한 동시대인이라는 표현에 니체가 짊어진 고뇌, 무게, 외로움, 공포가 느껴진다. 앞서간다는 것은 철저하게 이런 것들을 동반해야 함을 의미한다.

198 생성이 반복될수록 양산되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영원회귀를 가장해서 삶을 무겁게 짓누르던 질문이 더 이상 그 무게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난쟁이는 차라투스트라의 어깨에서 내려와 도망친다.

200 해석자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동안 차라투스트라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이다.

201 끔찍한 고통조차 긍정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고통이 긍정으로 될 수 있는가? 될 수 있다. 시간이 지나서 과거를 돌이켰을 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일은 없다. 존재의 이유는 부여하기 나름이며 저 마다 그 이유를 다 가지고 있다.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고통보다 더 비루한 과거를 갖게 된다. 그러나 현재에 고통 속에 살면서 이 고통을 객관화 하기 위해서는 나는 미래로 가는 타임머신을 탄다. 그러면 지금의 고통이 단순한 괴로움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를 함께 느껴지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새로운 시선을 갖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4~205 우선 첫 번째 긍정은 파괴하는 기쁨이며, “망치 휘두르기이다. 그러나 그 긍정은 바로 다음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긍정은 새로운 입법자의 등장이며, 새로운 건축가의 등장이다. 첫 번째 긍정을 단순한 파괴와 부정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은 두 번째 긍정이다.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이 첫 번째 긍정이 비로소 긍정된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망치가 파괴의 도구인지 창조의 도구인지는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 결정된다. 하나의 긍정은 자신을 긍정해 줄 다음의 긍정을 기다린다.

>먼저 파괴가 선행되어야 창조할 수 있도록 만드는 망치의 역할이 참 소중하구나!

206 주사위 놀이야말로 영원회귀에 대한 최고의 비유이다. 주사위가 던져질 하늘은 우연의 하늘, 순진무구함의 하늘, 우발성의 하늘이다. “’우발적인 것이야말로 세계의 가장 오래된 귀족이며….모든 사물들을 목적에 예속된 노예 신세로부터 구원해 주는 것이다.” 하늘에 던진 주사위를 가로막을 이성의 거미줄은 없다. 주사위 던지기는 하나의 춤추기이며 놀이이다. “하늘은 주사위 놀이를 위한 신들의 도박대이다. 하나의 수는 다음의 수를 부른다. 하나의 주사위는 다음의 주사위를 기다린다. 그것은 긍정을 다시 부르는 긍정이다.

7장 인간

211 니체는 모든 것을, 심지어 이 혹성 전체가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믿는 인간들의 오만과 허영심을 꼬집는다. 그에게 인간 중심주의는 한 편의 코미디에 가깝다. 자신을 세계 모든 존재들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개미나 모기와 다를 바 없다. 개미나 모기도 자기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볼 것이다. 인간은 마치 신이 자신들을 위해 세계를 창조한 것처럼 믿고 있지만 만약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인간은 신의 원숭이로 창조되었을 것이다.

>인간이 신의 원숭이로 창조되었다면, 그것을 모르고 있는 동안 모든 것을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한 수 많은 오류를 범할지는 모르나 유아기적 행복에 빠져 살 수 있는 시간을 제공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211 모든 별들에 있어서도 그 존재했던 시기를 측정해 보면 생명이란 한 순간에 확 타오르고 만 존재였다는 것, 그리고 그 후에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생명이라는 것이 별들의 존재 목적이나 궁극적 의도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그래서 인간에게 불꽃처럼 정열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당위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리.

216 인간이란 결국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하다. “저 쪽으로 건너가기도 위험하고, 가는 중에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다.”

217 니체는 인간의 유일하게 위대한 점은 곧 몰락할 존재라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사랑 받을 수 있는 점은 그가 하나의 과도이며 몰락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인간은 원숭이가 그에게 넘겨준 유산조차 초인에게 넘겨줄 수 없다.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한 결과라면, 초인은 인간의 철저한 몰락으로부터만 출현한다. 초인은 결코 인간이 진화한 종이 아니다. 니체는 초인에 대한 진화론이해를 경멸했고, ‘반다윈주의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218 니체는 인간의 궁극적 도달 지점인 최후의 인간을 벼룩에 비유하기도 한다. “대지는 작아져 버렸고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작아지게 만든 최후의 인간들이 날뛴다. 이 종족은 벼룩처럼 근절시킬 수가 없다.

219 낙타는 잘 견디는 정신의 표상이다. 낙타는 모든 무거운 것들을 맡아 진다. 주어진 가치를 묵묵히 수행하기만 하는 낙타는 선악에 있어 창조자가 되고 싶은 자는 먼저 파괴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는 -라고 우는 나귀와 같은 족속으로, ‘에 대한 잘못된 발음 즉 긍정의 정신에 대한 오해를 상징한다.

>나에게는 낙타와 비슷한 면이 있다. 무거운 짐들을 기꺼이 불평 없이 맡는 편이다. 그러다가 한번에 쓰러진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된다. 건강도 마찬가지다. 잘 견디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상이 생기는 체질이라 항상 나의 컨디션을 체크하는 것이 일이다. 잘 견디도록 되어 있지만 한 번에 무너지는, 그래서 모든 것을 종종 잃는 낙타의 프로그램이 내 안에 존재한다. 그래서 스스로 파괴되고 창조되기도 한다. 그러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고 에너지의 방출이 심하게 생기는 것을 경험한 뒤로는 그런 싸이클 없이 내 삶의 창조를 유도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219 이에 비해 사자는 거대한 부정의 정신이다. 낙타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사자는 이해한다.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 자신의 터전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거대한 용이 나타나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모든 가치는 내 몸에서 빛난다….’너는 해야만 한다만 존재한다고 말할 때, 사자는 으르렁거리며 나는 하고 싶다를 외친다.

220 ’초인으로 번역된 위버멘쉬는 새로운 인간혹은 새로운 에 대한 표현이기보다는 넘어섬’, ‘지나감에 대한 표현이 아닐까? 아니면 변신의 순간에 등장하는 번개나 광기로 상징되는 생성의 힘의 이름이 아닐까?

221 니체에게 초인과 동일한 종족인 것처럼 표현되고 있는 것은 거인, 강자, 귀족, 주인, 어린아이다.

222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아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복음이 사실상 신의 죽음과 통한다고 본 것 같다. 더 이사 이 세계를 검열하는 심판이 사라졌으며, 저 세계에서 죄를 묻는 일은 없다는 것. 천국이란 믿음의 문제이기는커녕 새로운 삶의 방식이고 실천이라는 것.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그렇게 요약했다. 신들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창조할 초인이 살기를 기대한다.

223 신은 인간 이전에 존재해서 인간을 창조한 게 아니라 인간과 동시에 탄생한 것, 혹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 인간보다도 늦게 창조된 것인지도 모른다.

223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제야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성시킨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광인은 신이 죽은 후에도 새로운 삶을 목격하지 못한다. 그는 신의 죽음이라는 이 기쁜 소식에 춤추는 단 한 명의 인간도 만나지 못한다.

224 신이 시체로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도 새로운 삶의 생성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니체는 이런 유의 인간을 최후의 인간이라고 불렀다. 최후의 인간은 신앙이 사라진 시대에 무신앙을 신앙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배하는 것도 복종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둘 다 너무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안락한 죽음만을 기다린다. 차라투스트라는 최후의 인간들을 벼룩처럼 작아져서 아무리 근절시키려 해도 근절되지 않는 족속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들을 보면 측은하고 불쌍하다. 삶에서 어떻게 꿈이라는 산소를 공급받지 않고 살 수 있는가?

225 정말로 신을 철저히 죽이고자 하는 자는 웃는다. 그는 신을 분노로써가 아니라 웃음으로써 죽이는 것이다. 신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존재가 웃음거리인 것을

231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232 아이들에게는 주사위 던지기가 놀이이지만, 그들 보다 높은 인간들에게는 위험성과 확실성을 따져야 하는 과학이 된다. ‘정의의 양심가인 학자의 말대로 과학이 불안과 공포를 본질로 한다면, 어린아이의 놀이는 즐거움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놀이의 반복을 가져온다. 놀이는 다음의 놀이를 계속해서 부른다.

232 “그대들 자신을 넘어서 웃는 법을 배우라!....

232~233 그들은 춤추는 법도 모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춤추는 자이고 가벼운 자이다.” 보다 높은 간들을 출출 줄 모른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은 중력의 정신에 대한 승리의 표시이다. 그것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높이 뛰기와 넓이 뛰기, 그리고 옆으로 뛰기이다

233 차라투스트라가 놀고 싶어하는 자이고, 웃고 싶어하는 자이고, 춤추고 싶어하는 자라면, 디오니소스는 놀이 속에 존재하는 자이고, 웃음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춤으로 존재하는 자이다. 디오니소스는 생성 속으로 뛰어든 존재의 혼이다.

8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239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니체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섬세한 손가락과 용감한 주먹이다. 세세한 차이를 읽어 낼 줄 알고 어떤 위험한 주장도 그대로 들어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독서가 언제쯤 가능할까?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도대체 어떤 독서일까?

245~246 어느덧 으르렁거리던 사자는 자신의 장난감을 쥐고 있는 어린아이가 되어 웃고 있다. 프로방스의 자유분방한 무희가 이 책들을 휘젓고 다닌다. “이곳이 로도스 섬이다. 여기서 춤춰라!” 니체는 비로소 자신의 개념을 갖게 되었다. 철학자가 자기 개념을 창조하는 자라면 이 두 저서가 그것에 해당한다. 권력 느낌과 권력의지, 영원회귀, 습속의 도덕 등이 이 저서들 속에서 예비된다. 신의 죽음이 고지되는 것도 <즐거운 지식>을 통해서다.

246~247 <차라투스트라>에는 낡은 가치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가치에 대한 창조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부정과 창조는 과거를 구제하는 긍정의 정신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 책의 끝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알아차린다. “디오니소스의 무희이며,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자, 차라투스트라.

250~251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프리드리히 니체” (중략) 여행객은 항상 그 사회의 이방인이고 외부자이다. 니체는 그 자신을 독일 안에 있는 이방인이라고 소개한다.

>이방인으로서의 시각을 가져야 천 개의 눈이 생기고, 여행을 떠나야 천 개의 길이 보일 것이다.

252 확실히 유목민의 기질이 니체를 이끌고 있다. 니체의 사상은 유목적 사상이다. 유목민이란 여행자이며 외부자이다. 그러나 니체의 여행자가 떠난다고 했을 때, 그는 공간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다. 그가 떠나는 것은 지배적인 질서이며 지배자의 코드이다.

252 여행과 탐사는 그치지 않는다. 가면 놀이는 멈출 줄 모르고, 변신은 영원성을 획득한다.

253 이제 이 책의 첫 장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어 살아간다.” 그것은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Nitimur in vetitum!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 놓은 여행자다.

2

베버-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259 모호함과 신비함을 통해 힘을 발휘했던 보편적 종교의 주술적 힘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이제는 구체적인 계산을 통해서 측정 가능한 힘들만이 적합한 형태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베버는 합리화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탈주술화계산가능성의 증대를 의미했다.

268 처음엔 시간표든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되고 말았다.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서에 해방되는 방법은 자율적으로 사는 것 아닐까?

273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가 분리되고 그들의 신체에 잔인한 기억이 심어지면 훈육의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된다. 잔인한 기억술로 심어진 행동방식이 반복되어 습속의 도덕으로 자리하면 이른바 능동적 자제라는 게 생겨난다. 처음에 공포로 시작된 검열이 이제는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검열로 대체된다.

277 정치인에게는 소명에 대한 열정과 함께 뛰어난 목측능력이 요구된다. 목측능력이란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고 그것에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 내적인 거리를 두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란 머리로 하는 것이지 신체나 정신의 다른 부분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이 불모의 흥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정신을 강하게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며 이것은 거리를 두는 습관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281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출현하려면 잘 훈육된 수동적 대중들이 필요하고, 그러한 지도자가 정치를 하기 시작하면 대중들은 더욱 정신을 상실해 간다. 관료제로 대표되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전략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만 것이다.

287 합리성이란 프로테스탄트로 대표되는 근대인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가치들을 위해 제 안에 있는 욕망과 능력을 효과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이었다.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294 답은 대개 질문들 뒤에 숨어 있다. 그것은 질문들과 동떨어진 채 답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이 그 답의 형식과 내용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297 이것이 바로 국가, 리바이어던의 탄생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상호 계약에 의해 평화와 공동 방위를 위해 모든 힘과 수단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인격이다.

308 그러나 차이를 회피하고 배제한 정치적 영역은 공허하고 주체들은 허약하다. 공동체주의자들이 자유주의의 허약한 주체들에 대해서 그토록 비판적인 것은 이 체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아무런 요소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309 서구의 자유주의는 가치들의 투쟁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없는 자유주의적 주체들의 무능력 때문에 위기에 처한다는 것이다.

315 “대규모 사회 내에서의 경제적. 종교적. 인종적 불평등에 반대하는 투쟁 역시 계급이나 신념공동체, 혹은 인종을 철폐한다고 해서 승리를 거둘 수는 없다. 계급 없는 사회에 대한 맑스주의 이상이 종종 종교와 인종에까지 일반화되고 있다. 사실 맑스주의 이상은 경제에서조차 올바른 것이 아니다. 평범한 노동자들에게는 계급 없는 사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신념보다는 노동 계급의 임금, 노동조건, 정치적 영향력, 사회적 지위를 집단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318 정치적인 것의 죽음은 사회적인 것의 탄생으로부터 나온다. 사회적인 것이라고 불리는 것은 통계의 영역이며, 동질성의 영역이다. 정치의 영역이 사적인 것의 이해의 조정에 매몰되거나 어떤 공통의 척도로 결합될 때 그것에서 정치는 사멸한다. 아렌트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인가, 사회적 동물인가에 대해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320 우리에겐 정치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멀리 떨어진 것도 없다.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이것만큼 큰 숙제가 있을까?

3 내가 저자라면의

말로만 듣던 니체에 대해 처음으로 접한 책은 유영만씨의 <니체는 나체다>였다. 간결하고 명료한 그의 니체에 매료되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겁 없이 집어 들기도 했었지만, 그것은 호기에 지나지 않았다. 고병권씨의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을 읽으니 다시 한번 도전욕구가 생긴다. 그전보다 몇 장 더 페이지를 넘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기는 것 또한 무지의 소치일까? 니체의 비판이 때로는 섬뜩해서 책장을 넘기기가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어떤 부분은 내 안에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니체를 확인할 수 있어서 기쁘고 반가웠다. 니체를 읽는 다는 것은 니체를 창조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두고두고 시간의 탑을 쌓아가며 만나야 할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방랑자의 시선,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부러웠다. 그와 더불어 너무 앞서간 그의 고독이 느껴지기도 했다.

<책 전체의 뼈대와 목차>

[서장]
천개의 눈, 천개의 길


[1
]
1
. 아모르 파티 : 삶을 사랑하는 철학 -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2
. 강한 자와 선한 자- 니체의 계보학
3
.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4
.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5
.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1 - 자연학 + 윤리학
6
.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2 - 자연학 + 윤리학
7
. 인간 -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8
.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2
]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니체의 중심 생각을 장마다 짚어 주어 좋았다. 이 책으로 니체 전체를 읽은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만 배제한다면 니체를 나의 방식으로 창조하는데 사다리로서는 아주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동적인 장과 절>

034 차라투스트라를 따라 다니는 독수리가 가진 드높은 긍지. 거인족은 거대한 상승의 벡터로 나타난다. 거인족이 상승 벡터라면 난쟁이는 거대한 하강의 벡터다. 니체의 저서 속에서 난쟁이는 중력의 영으로서 거인족들의 가벼운 걸음걸이를 무겁게 만드는 존재, 산정 높은 곳으로 상승하는 거인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존재, 높이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날개를 피곤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중략) 난쟁이의 왜소증은 중력에 대한 굴복에 대한 결과다.

>나는 무엇에 굴복하고 사는가? 나를 점점 작아지게 만드는 중력의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한 번이라도 거인 족으로 살았던 적이 있는가?

053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와 있지만 항상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 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미래가 오로지 미래일 수 있을까? 미래는 과거와 현재가 항상 함께 존재하는 시간이다. 현재의 현상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한테 미래는 광인처럼 느껴질 수 있고, 광인이 되어야만 현재에 매몰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지 않을까?

059 그가 전하려 했던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던가?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나는 니체교에 다니고 싶다. 내가 교회를 가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들의 외침이 나의 마음에 울림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조할 수 없는 구석이 너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삶의 실천을 통해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니체의 생각을 들여다 보며, 내 안에 예전부터 니체가 있었구나 느낀다.

<보완점>

각 장을 시작할 때마다 질문을 던지거나, 한 문장의 정리로 주위를 환기시키는 것은 그 이야기에 집중하게 해주어 나 같은 사람이 읽기에는 아주 좋았다. 그리고 고병권씨에 의해 창조된 니체를 만날 수 있어 반가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에필로그가 없었던 것이 아쉬웠고 제 2부는 니체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정확히 짚어지질 않았다. 2부를 시작함에 있어 그 의미와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으면 더 친절한 책이 되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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