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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23일 10시 38분 등록

<니체-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2014.06.23 이동희

 

1. 저자에 대하여 : 고병권

 

서울대 화학과 졸업,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수유연구소 +연구공간 너머’> 회원

주요 논문으로는 <니체 사상의 정치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 <니체 혁명의 변이 혹은 변이의 혁명>, <들뢰즈의 니체 헤겔 제국을 침략하는 노마드> <노동거부의 정치학 새로운 구성을 향한 투쟁>,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등이 있으며,

 

저서는 다음과 같다.

<언더그라운드 니체>, 천년의 상상 2014

<살아가겠다>, 삶창 2014

<생각한다는 것>, 너머학교 2010

<찰학자와 하녀> 메디치미디어 2014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린비 2003

<생각해 봤어> 교육공동체벗 2012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린비 2011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그린비 2007

<화폐 마법의 사중주> 그린비 2005

<코뮨주의 선언> 교양인 2007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그린비 2012

<추방과 탈주> 그린비 2009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소명출판 2001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그린비 2008

 

번역서는 다음과 같다.

<한 권으로 읽는 니체> 푸른숲, 2001,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그린비, 2001.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P4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을 빠뜨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서장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1.   천 개의 눈

 

P17

눈처럼 쉽게 길들여지는 게 또 있을까? 광학의지 혹은 시각 체제 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 훈련,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보는 훈련, 두 개의 눈으로 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 그러나 여전히 많은 눈들이 있다. 진리를 묻는 자 스핑크스도 눈을 가졌고, “인간이라고 답하는 자 오이디푸스도 눈을 가졌다.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

 

진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애초에 시도해보지 못했다. 종교를 갖지 못했다. 진리에의 막연한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만 이 세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그리고 내가 부르는 단어들 이면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에 사로 잡힌 것이 기억의 전부이다. , 눈은 인식할 수 있는 것만 받아 들인다. 고로 인식할 수 없는 것 즉 알 수 없는 것은 눈에 보여도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사람마다 그 앎이 다르고 인식이 다르니 눈으로 보는 것이 같은 대상이라도 모두 다를 것이다. 다만 보편적인 인식의 공유가 있어 이를 통해 최소한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대화에 공유되는 인식은 최소한의 문맥과 상황과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극도의 단순화를 통해 탄생한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일상적인 대화는 매우 협소한 의미만을 전달하는데 급급할 것이다. 글이라는 것도 이러한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것을 해내는 사람도 있다. 작가들이다. 작가는 글로 정리하여 보여 줌으로써 상황과 문맥과 다양한 감정까지도 같이 전달해 낸다. 그 이면에는 공감이 있고 이해가 있을 것이다. 진리는 모른다.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진리가 주는 폭력성이 무섭기도 하다. 이는 배타성을 넘은 독보적인 존재때문인지도 모른다. 진리는 저 너머에 있겠지만 공감하는 마음과 머리를 가지면 좋겠다.

 

2.   천 개의 길

 

P18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한 사람의 건강 상태나 상황에 따라 세상은 다양하게 해석되며 그 생동도 다양하게 전개된다. 다양성이 내재되어 있다. 대학 때 후배가 나에 대해 생각이 아메바 같다고 하였다. 좋은 뜻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생각이 변하는 것 같다는 뜻이리라. 이 말은 그 이후 나를 따라다닌다. 아메바 같은 생각이라? 천 개의 길과 아메바를 겹쳐서 생각해 봐야겠다. 변덕이 아니라 다양성으로서 나의 생각들은 어떤 가 하는 것이다. 일관성에 대한 집착에 회의가 드는 요즘이다.

 

3.   천 개의 기원

 

P18

역사의 뿌리와 열매를 신성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묻혀져 있어야 했는가! 그러나 모든 사물의 기원은 천 겹이다.” 지혜로운 탐사자라면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지나친 많은 것들 속에서도 파편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천 겹의 주름 속에 숨겨진 사건들이 햇빛 속에 놓이게 될 때 신성한 것들의 거짓이 떨어져 나가리라.

 

다시 보기 다시 생각하기 다시 이해하기 그러다 보면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잘 알게 될 수 있을까? 작은 것들을 해석하는 데에는 진정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하지만 나의 역사에 대해 돋보기를 들이대고 그 주름들을 살펴보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나의 모습과 나의 생각들을 하나 하나 주워모아 보면 내 자신이 더 잘 보일 것이다. 나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나의 행동이지 나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때 그때 달랐다

 

4.   천 개의 젖가슴

 

P19

과학적 인식이라고? 가치 중립이라고?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고, 양성 공유자도 아니고, 다만 중성일 뿐인 인간들, 성적 불능자들.” 대낮같이 밝은 인식을 떠들면서도 밤만 되면 열린 창을 훔쳐보기 위해 지붕 위를 싸돌아다니는 수고양이들. 인식으로부터 욕망을 몰아내겠다고? 너희는 욕망의 창조성을 모른다. 너희는 왜 바다의 욕망이 태양을 향해서 천 개의 젖가슴으로 부풀어오르는지를 모른다. 너희는 왜 태양이 그것에 입 맞추고 애무하는지를 모른다.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욕망의 창조성. 창조성은 무엇일까? 욕망하는 것일까? 욕망은 무엇일까? 어떤 것일까? 바라여 얻으려고 하는 것인가? 무수한 욕망을 표출하라고? 그리하여 창조하라고? 무엇을 창조하는 것인가? 삶을 시간을 행복을? 즐거움을?

 

5.   천 개의 주사위

 

P19

벌써부터 평균을 구하지 말라. 우리들은 세계라는 도박대 위에서 판을 벌이는 도박사들. 우리에겐 매 번 던져지는 주사위가 다 소중하다. 겨우 천 번? 우리는 벌써 천 한 번째 주사위를 주시하고 있다. 여섯 개의 면밖에 없다고? 우리는 동전의 앞 뒤 면만 가지고도 무한한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자유 정신의 소유자들이여 또 한 번의 주사위를 던져라. 세계는 너희를 위해 천 개의 섬을 준비해두었다

 

반복에 의한 탁월함, 반복 자체보다는 행하는 것 자체의 즐거움? 주사위를 던진다. 그 한 순간의 즐거움에 기인하여 계속 주사위를 던진다. 도박판에서 던지는 주사위는 아니겠지만 즐거움의 주사위 그 행위에 집중한 주사위 던지기? 즐겁기 때문에 반복해도 좋은 그 주사위 던지기? 지금 무엇이 나의 주사위인가?

 

6.   천 개의 화살

 

P20

아포리즘들은 모두 화살이다. “아포리즘과 화살그 것들은 읽혀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쏘아지기를 바란다. 누구든 활을 들고 쏘아라. “급소를 맞춘 화살의 저 떨림을 보라, 저 흔들림을 보라아포리즘들만이 아니다. 모든 책들이 망치가 되거나 다이너마이트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저기 니체라는 화살통에 천 개의 화살이 들어 있다! 저기 니체라는 이름의 다이너마이트들이 널려 있다.

 

깨부술 나의 허상들 생각들 굳어진 생활들.

 

7.   천 개의 가면

 

P20

무릇 심오한 인간들은 가면을 좋아한다.” 가면 뒤의 얼굴?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호기심 많으신 분이시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주시려거든 부디…… 또 하나의 가면! 2의 가면을 주시오허락하신다면 제3의 가면도 …… 진정한 니체의 얼굴이 보고 싶다구요? 여기 니체의 가면이나 하나 받으시오.

 

맨 얼굴을 보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가? 가면이 유독 철학에 많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8.   천 개의 이야기

 

P21

아직도 천 개의 이야기가 남았다. 요리사 니체가 소개하는 우연을 냄비에 끓이는 법 나는 어떤 우연이든 나의 냄비로 끓인다. 낚시꾼 니체의 독자 낚는 법 나의 모든 작품은 낚시바늘이다. 우주 비행사 니체의 타임머신 타지 않고 시간 넘나드는 법 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 다이버 니체가 말하는 인간이 가보지 못한 심연으로 잠수하는 법 길게 숨을 쉬고 나서 잠수하라, 그래야만 깊은 바닥까지 볼 수 있으리라, …… 아직도 니체에 관한 천 일 밤낮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니체에 대해 제대로 읽고 싶어졌다. 니체의 책을 다로 골라봐야겠다. 어떻게 낚이는지 말이다.

 

1

 

1장 아모르 파티: 삶을 사랑하는 철학 :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1.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

 

P27

그렇다면 니체의 철학은 어떻게 철학의 외부에 설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전체를 보려는 철학적 시각의 편협성을 읽었기 때문이고, 보편성을 주장하는 철학적 의지의 특수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 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는다. 왜 철학자들은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가? 왜 그들은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니체는 진리를 찾는 철학 자체를 하나의 문제로 삼았다.

 

P31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한 니체의 입장은 저 유명한 <에티카>의 저자의 입장과도 같은 것이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그러나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을 반박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반박되어야 할 존재라기보다는 치료받아야 할 존재다. 죽음의 설교, ‘몰락에의 의지’, 삶을 경멸하고 영원한 부정의 무게 아래 두는 것은 삶에 있어 가장 깊이 든 질병일 뿐이다

 

공감가지 않는 대목이다. 죽음이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곧 죽음과 일치된 삶의 모습일 것이다. 죽음을 전제 하지 않은 삶이 어떠한 아름다움과 영웅적 여정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죽음이란 절대 비교 우위의 가치를 갖고 사는 사람으로서는 그 가치에 비견되는 삶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죽음을 위한 준비로서 철학이었다고 이해되지 않는다. 죽음 위에 둔 가치로 인해 삶이 최우선이 아닌 보편적 진리에 대비한 하위 가치로서 죽음이 놓인다. 그래서 죽음이 어떠한 가치로 치환되지 않고 삶으로서 더 큰 가치를 만드는 것인가?

 

P31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2. 거인들의 웃음소리와 신들의 한탄

 

P33

진리의 위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의 완전성을 찬미하기 위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의 완전성을 찬미하기 위해 자신의 불완전성을 끊임없이 고백하는 것,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이다. 이 세계와 자기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

 

P34

중력은 또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상징한다. 그것은 모든 우연들을 필연에 종속시키는 강제적 이다. “우연이 갖는 귀족성은 필연의 힘 아래에 예속된 노예로 전락한다. 모든 순진무구한 삶, 모든 우연의 세계는 하나의 필연적인 해석 아래서 전체화된 체계, 거대한 질서로 굳어진다.

 

우연이 갖는 귀족성은 무엇인가? 귀족성은 무엇인가? 보편적이지 않으며 우월한 것을 귀족성이라 하는가? 우연은 보편의 위에 있는 특수성인가?

 

P36

그리스인들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공포를 고유한 명랑성으로 극복한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거인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소인족처럼 삶의 고통과 죄의 크기를 연계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소인들의 삶에 대한 부정을 삶에 대한 긍정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P38

누가 오이디푸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라고 묻는 그리스인들은 이제 프로메테우스야말로 우리의 영웅이라고 말한다.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3. 세 개의 죽음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 소크라테스의 경우

 

P40

주신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의 구속을 넘어서기 위해 일종의 혼수상태에 빠져든다. 그들은 자신들을 얽매던 과거의 모든 체험과 일상을 잊어버린다. 이때 무시무시한 충동에 자신을 내맡기는 거인족에게 하나의 충고가 던져진다. “결코 너무 많이 하지 말라일상의 한계와 구속을 넘어서는 혼수상태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면 과도함을 막고 절제를 요구한 것이 아폴론적인 것이다. 니체의 분석에 따른다면 주신 찬가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화해와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P41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디오니소스가 가장 혹독한 고뇌도 웃음으로서 긍정한다면, 십자가에 못박힌 자(그리스도)는 삶을 저주하고 삶으로부터 구제되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낸다. “십자가에 달린 신이 삶의 저주라면 …… 디오니소스는 토막토막 자리었으면서도 삶을 약속하고, 영원히 다시 살아나며 파괴로부터도 돌아온다.

 

4. 비극이 상연되는 극장과 심판의 법정

 

P44

니체에 따르면 원래 비극은 합창이었지, 연극이 아니었다.” 조잡하고 흉측한 가면을 쓴 디오니소스가 등장한다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연극으로 보지 않는다. 열광적인 합창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사람들이 본 것은 가면을 쓴 배우가 아니라 자신들 앞에 나타난 거대한 환영으로서의 디오니소스였다. 오늘날 극장에 앉아 있는 관객으로서의 대중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참여하는 자들이었고, 모두가 변신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비극은 연극으로 전락했고 사람들은 관객으로 전락했다. “근대인들은 화의도 힘도 모르는 비평가가 되었으며, 결국은 도서관원이나 인쇄교정자 정도로 되고 말았다.

 

P46

삶을 통해 충분히 비극과 희극을 발견하는 자라면 극장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P47

극장은 숨은 구조와 관계들을 구상화하면서 동시에 구조 자체를 등장 시킬 수 있어 구조의 보편성을 드러내기에 알맞기 때문이다.

 

P47

니체의 철학처럼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은 연극의 반대편에 자리한다. “네가 이해하는 것처럼 나는 본질적으로 반연극적이다.”

 

P48

심판은 삶을 완전히 암울한 것으로 만들었다. 심판만큼 삶에 적대적인 것은 없다. “나는 법을 죽였습니다. 시체가 생명 있는 자를 불안하게 하는 것처럼 법은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심판은 삶으로부터 사랑의 요소를 완전히 박탈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신 자신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신이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심판의 사상과 정의의 주장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심판자는 아무리 자비롭다고 해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5. 미래의 철학자

 

P49

삶이 구원되어야 한다면 같은 이유에서 사유 역시 구원되어야 한다. 더구나 순수한 사유의 체계가 거짓 연극에 불과한 것처럼 순수한 생이라는 것도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

 

P50

니체는 도덕적 개념에서는 피와 고문의 냄새가 완전히 씻겨진 적이 없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항상 인간은 시대의 목적을 향해 훈련받아야 한다.” 어떤 사상이 자신에 부합하는 삶을 생산해내는 과정은 폭력과 훈련을 동반하고 있다.

 

P51

그러나 역사는 매번 습속이 지배하는 것을 깨뜨려왔다. 니체는 그것이 습속의 윤리를 뚫고, 무서운 호위자들이 만들어 낸 대사건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무서운 호위자들이라고 부른 것은 광기. 습속과 대결했던 많은 지혜로운 인간들은 광인으로 불렸고, 그들의 생각은 광기로 이해되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고, 존경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되었던가를 이해하는가? …… 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P52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광인으로 불리는 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정신은 일반적인 구속성과 대결한다.” “(그러한 구속을) 참고 견딜 수 없는 정신이야말로 광기의 즐거움이 생겨나는 장소”, ‘탈주자의 장소다.

 

P53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와 있지만 항상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 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P54

니체가 철학을 위대한 요법으로 사용할 때는 미래의 철학자와 관련해서일 뿐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명령자이며 입법자이다.” 미래의 철학자들은 가치의 평가자이며 창조자이다. 이에 반해 철학적 노동자들은 가치를 내면화하는 자이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자료들을 정리하는 일이 고작이다. 입법자로서의 철학자들, 진정한 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개념들을 해석하고 정리할 뿐 철학적 노동자들은 창조를 모른다.

 

P55

들뢰즈는 칸트가 말하는 입법이란 결국 복종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명령을 주는 것은 바로 그대들이다.” “법은 우리의 이성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복종하는 것이 이성적이다.” 결국 복종의 행위가 우리를 합리적인 존재로 만들어준다. 칸트의 비판에서는 입법권이 우리 스스로에게 넘겨지는 만큼 더더욱 위선적인 복종 같은 그런 장치들이 나타난다.

 

P56

바로 가치 평가다. “우리는 그 숙명적 불행이 시작된 재수 없는 날을 기점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다. 왜 기독교 최후의 날로부터 계산하지 않는가? 오늘부터, 모든 가치의 재평가가 이루어진 오늘부터 따져서 말이다.”

 

6. ‘사랑의 의미

 

P56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P57

너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너의 친구가 될 수 없다. 너는 폭군인가? 그러면 너는 친구를 가질 수 없다.”

 

P57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시체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짐승의 무리나 신도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에 새로운 가치를 써넣음, 함께 차옺하는 자를 구한다.

 

P57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 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P58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바그너가 사랑을 이타적인 어떤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랑을 희생과 연결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철학자들과 바그너가 공유하고 있는 사랑관이다. 그러나 희생은 사랑을 구속으로 만든다.

 

P58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P59

삶을 바꿔 보라!’ – 철학을 떠난 철학자들이 철학의 목표로 제시하는 것

 

P59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 니체의 계보학

 

1. 계보학 1 – 비판

 

P61

니체가 가치의 가치라고 말했을 때, 첫 번째의 가치와 두 번째의 가치는 전혀 다른 지위를 갖는다. 두 번째 항은 첫 번째 항의 생존방식, 존재방식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치의 가치에 대한 물음은 가치가 표현하고 있는 기반에 대한 물음이다. 니체의 질문은 도덕적 열매가 성장한 토양을 겨냥하고 있다. “나의 질문은 변형되었다. 즉 인간은 어떤 조건 하에서 선과 악이라는 가치판단을 생각해냈던가? 그리고 그 가치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그것은 고난과 타락의 징조인가, 아니면 삶의 풍부한 힘과 의지. 용기. 미래를 나타내고 있는가?

 

P62

도덕학자들에게 결여된 것은 역사 의식이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 자체가 생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도덕 역시 욕망을 표현하는 상징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이들의 도덕학이 결여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도덕 그 자체의 문제이다.

 

P63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 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든지, ‘모든 사람을 도우라혹은  거짓을 행하지 말라’, ‘네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가하지 말라등등 모든 가르침은 어떤 인간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니체는 바로 도덕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P63

아무렇게나 임의로 추출해서 제멋대로 정리한 도덕적 사실들로부터 추론한 결론은 도덕의 굳건한 기초가 되기보다는 자신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게 된다. 도덕에는 소심함말고도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지이다. 우리가 우리 시대 우리 환경에서 나은생각들을 쉽게 일반화하는 데는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도 이유가 된다. 그래서 니체는 도덕을 가리켜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이라고 불렀다.

 

2. 계보학 2 – 탐사

 

P65

도덕은 전체를 보고 싶어하지만 계보학자는 전체로 환원되지 않고 있는 부분들을 본다. 도덕의 과도한 일반화 형식 속에서 난폭하게 처넣어지고 날카로운 선의 일치를 위해 깎여나가고 휘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계보학자의 말이다.

 

P65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의 유래와 발생을 묻는 작업이다.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동원된 역사가 아니라, 그 종합의 과정에서 빠져나가거나 휘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계보학자의 일이다. 과거로부터 신성화되거나 현재로부터 정당화된 가치들은 계보학자들이 찾아낸 간극들이나 이질적 충돌, 파편들과 마주하게 된다.

 

3. 도덕의 자연사 (natural history)

 

P68

화폐란 도덕적 판단처럼 가치의 표시이다. 그것은 모든 차이들을 소통하는 고통의 매개자이며 기준이고 척도다. 가치 문제를 다루는 도덕의 성격을 화폐만큼 잘 표현해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도덕학자들이 가치를 다루기 위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을 경제학자들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P69

도덕학자들로서는 도덕을 자연스러운 것, 본능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싶겠지만 도덕이야말로 인위적인 조작 행위다. 니체의 말대로 모든 도덕은 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며, 자연에 대한 …… 어느 만큼의 억압이다.”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의 한 장의 제목을 도덕의 자연사라고 붙였는데, 이 글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도덕의 부자연스러움이다.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의 역전, 자연과 비자연의 역전.

 

P70

모험 정신, 과감성, 복수심, 교활함, 탐욕, 지배욕 등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는 했지만 이 좀더 강하게 육성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되었던 시대도 있고 (공동체의 적들이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했으므로), 그런 충동들이 사회의 안정을 위해 부도덕한 것으로 되는 경우는 있다.” “(우리 시대에는) 독립적인 정신, 뛰어나게 되려는 의지, 강한 이성조차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개인을 떼거지보다 위로 끌어올리고 이웃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악이 되는 반면, 정중하고 겸손하며 유순하고 순응적인 정신과 평범한 욕망은 도덕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

 

P72

한 민족이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민족은 조롱거리, 치욕이라고 부른다.” “한 이웃은 다른 이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 이웃의 영혼은 언제나 다른 이웃의 광기와 악의를 괴이하게 생각했다.”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이 특정한 환경과 계급, 교회, 시대 정신, 풍토에서 나온 도덕적 가치 판단을 일반화하는 무모함을 가져온다.

 

P73

비이기적 가치, 즉 연민이나 자기 희생, 자기 헌신과 같은 본능들의 가치였는데,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미화라고 신성시해서 가치 그 자체로 만들어 버렸다. 니체는 아주 근원적인 불신, 훨씬 더 깊이 파고드는 회의론이 자신 안에서 고대를 쳐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도덕에서 허무에로의 유혹, 종말의 발단, 죽음과 같은 정체, 회고적 권태, 삶을 부정하는 의지, 궁극적으로 병의 우울한 징표를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허무주의로 나아가는 유럽 문화의 무서운 징조이기도 했다.

 

4. 강한 자와 선한 자

 

P74

무엇을 선이라고 부르는가?’ 즉 선의 항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선을 규정하는가?’, 다시 말해 가치 평가 양식이다. 가치 평가 양식 때문에 은 질을 전혀 달리하게 된다.

 

P75

항상 어떤 것에 대한 아레테인가?’, ‘누구의 아레테인가라는 식의 용법만이 가능했다는 것은 그들의 독특한 가치 판단 양식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의 질문이 묻고 있는 것은 그 덕의 주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런 질문방식이 낯설다. 지금 미덕들로 숭상되고 있는 가치들이 누구의 것인지’, ‘누가 만들어 낸 것인지말할 수 있는 자 있겠는가?

 

P78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제해 있다.

노예의 도덕에서 거리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타인의 가치를 부정해서 얻은 자신의 가치는 중세 철학자들이 애용했던 부정의 길이 그렇듯이 모호하기 그지없다. 노예들은 개별적인 차이를 부정해서 모호한 보편성을 도달한다. 노예들의 시신경 속에는 신이나 절대적 가치의 무한 거리가 들어온다. 신이 볼 때 인간들의 차이가 커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차이는 보편적 가치 앞에서, 신 앞에서 부정된다. 신 앞에 영혼은 평등하며, 법 앞에 인간은 평등하다!

 

5. 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P79

약자들은 적의 상태를 살핌으로써 인위적으로 자신들의 행복을 꾸미거나, 혹은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거나 기만할 필요가 있었다. “유태인들, 그들이 기적을 행했다며 그것은 도덕상의 노예의 반란즉 가치의 전도를 이루어 낸 일이다. 그들은 세계를 죄와 악으로서 해석해냈고, 그들의 고통을 하나의 시험으로 받아들였다.

 

P80

양은 자신이 독수리보다 강하다고 위로한다. 양은 독수리보다도 하나의 힘을 더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바로 강함을 억제하는 힘, 즉 유혹에 견디는 힘이며, 독수리는 이 힘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약자는 자신의 약함을 하나의 공적이자 소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P80

차라니 활동의 활동이라고 말해야 할 것을 우리는 주체의 활동이라고 말함으로써 주체는 활동과 분리되고, 그 활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로 돌변한다. 마치 독수리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처럼, 이른바 강자에 대한 약자의 복수가 이렇게 시작된다.

 

P80

현실에서 복수할 수 없었던 약자들은 정신적으로 복수해 버린다! 그들은 마음속 정의의 신의 이름으로 심판을 행한다. 강자에 대한 원한에 찬 비난, 그것이 바로 그들의 복수다. 그들은 믿음사랑소망을 가지고 살며 서로 사랑하는 형제를 외치지만, 그것은 최후의 심판이라고 부르는 신의 왕국이 도래할 때까지만이다. 이 선량한 양들의 정신 세계는 잔혹함의 극치다.

 

P82

이제 매 맞고 있는 것은 강자나 귀족이 아니라 바로 약자 자신이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질병처럼 학대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관리한다.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도 사악한 거의 침투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생활을 체크하는 청교도가 근대인의 얼굴이 되고 말았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신이 보고 있다. 신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보고 있다! 더구나 이제 죄는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닌가. 인간은 이미 원죄를 타고났으므로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형벌도 이처럼 잔혹하지는 않을 것이다.

 

P82

채권자는 그가 부유할수록 관대해진다.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가 누릴 수 있는 고귀한 사치였다.

 

P83

자비야 말로 법을 넘어서는 강자의 특권이다.

 

P83

또한, 빚을 갚는 자는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양심의 가책과 이것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된다. “형벌을 오히려 양심의 가책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 준다. 감옥에 들어온 자가 깨닫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지하는 조심성이다.”

 

P83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질병은 건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질병의 어떤 적극성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자를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성 때문이다.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

 

6. 도덕이라는 동물원

 

P84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니체가 약자의 도덕을 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명령하고 창조하는 자에 대한 떼거리적 혐오! 강자는 능동성 개념을 박탈당하고 …… 적응이라는 개념이 전면으로 나온다. …… 바로 반동성인 것이다.”

 

P85

금욕주의적 성직자들은 먼저 병든 자들의 방어자 의사 구원자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들이 병든 자를 지켜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환자들이 병에서 회복되는 것을 막는 것, 다시 말해서 성직자라는 의사들은 의사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혀서자신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시킨다.

 

P85

첫 번째, 진정제와 마취제의 투여, 두 번째, 기계적 활동의 도입, 세 번째, 조그만 즐거움의 제공. 선을 행할 때 유용한 보답을 해주는 것, 네 번째 가장 결정적인 수단. 삶에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

 

P86

어떤 야성도 잃어버리고 오로지 창살에 몸을 비비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 도덕의 가장 이상적인 장소는 동물원이다. “도덕은 하나의 동물원이다. 덫에 빠져 있을 때조차 자유보다는 철책이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 그리고 거기에는 성직자라는 맹수 조련사가 있다는 것.”

 

P87

의기 양양한 노예들의 반란, 그 귀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병약한 짐승들의 출현이다. 타자의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시작한 변정법은 헤겔의 말처럼 주인에 대한 노예들의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노예들은 모두 병들어 그대로 죽어가기를 갈망한다. 노예적 가치 평가의 변증법, 그 귀결점은 허무주의다.

 

P87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의 마지막 장을 허무에의 의지로 맺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약자의 운동, 노에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지 밝힌 것이다. 그것은 바로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이다.

 

7. 선악을 넘어서

 

P88

니체는 자신이 인정한 덕은 판단을 누구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 인정받는 것과 상관없이 평가하는 것, 가축떼적 입법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요컨대 르네상스의 덕 (virtus)”이라고 말한다. 르네상스의 덕이란 도덕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것은 하나의 힘이다.

 

P90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스피노자에게 선과 악은 사실상 니체가 말하는 좋음나쁨의 의미만을 갖고 있다. 그의 선/악의 개념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자연학적인 것이다.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1. 헤르메스가 전하는 메시지

 

P92

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피룡할 경우 주석을 달아 이해하기 쉽게 바꾸는 해석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서로 떨어져 있는 존재자들의 소통자이자 매개자인 헤르메스 해석학이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서로 다른 사상들을 이해하는 기술이라고 한다면 헤르메스의 일은 분명히 해석학의 어떤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P94

헤르메스의 맹세! 문제는 그것을 믿을 수 있느냐이다. 사실 거짓말과 도둑질의 화려한 경력을 지닌 헤르메스의 맹세를 누군들 믿고 싶겠는가. 하지만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신의 뜻을 이해할 도리가 없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2. 진리의 해석학

 

P96

니체는 거리의 열정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니체에게는 헤르메스가 메시지를 바꿀 수도 있는 배짱과 지혜를 갖춘 신인지도 모른다.

 

P100

모든 조명이나 자기 계몽의 과정은 다른 측면들을 어둡게 하거나 모호하게 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인간 존재의 운동을 신화에서 계몽으로 이어지는 단선으로 파악하는 것은 오류이다. 오히려 인간의 삶과 문화는 드러냄과 숨김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다.”

 

P101

우리들 각자에 특수한 것을 (절대적으로 필자) 승인함으로써 우리는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P102

그러나 특수한 공동체들에 대한 보편주의의 억압을 지적했다고 해도, 그는 공동체 안에서 제기되는 문제, 즉 공동체 안에서의 차이의 억압이나 고정된 정체성이 가하는 폭력을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가령, 이슬람에서의 여성문제). 이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그는 공허한 열망을 가진 낭만주의자들정도로 간주한다.

 

P102

차이의 문제에 있어 하버마스의 입장에 대한 라이언의 비판은 설득력이 있다. 라이언의 주장처럼 하버마스의 합리적 토론이 목표하고 있는 바는 사회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안정성이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향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퍼스펙티브의 단일성이며, 그 방법은 통합과 안정화이다. 확실히 하버마스는 우발적이거나 가변적일 수 있는 대중적 욕망이 초래하는 불안 정보다는 합리적 대표자들이 권고를 위임받아 토론을 벌일 때 안정된 의사소통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기대를 걸고 있다.

 

3. 스핑크스의 눈

 

P104

연속적인 흐름들을 끊고 그것들을 고립시켜 사실들이라고 말하는 객관주의자들 못지 않게 주관주의자들도 니체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 “’모든 것은 주관적이다라고 그대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벌써 해석이다.” 대상을 절대화하는 것만큼이나 주체를 절대화하는 것도 허구다.

 

P104

우리의 외적 세계만큼이나 내적 세계도 현상성을 갖는다. 즉 우리가 의식하는 모든 것은 철두철미하게 조성되고 단순화되고, 도식화되고, 해석되어 있다.”

 

P106

어떤 신앙이 삶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이 그 신앙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을 없애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P107

니체는 해석의 문제에 있어 차이에 대한 동등화의 의지” (혹은 동일화의 의지)를 발견한다. 진리라고 불리는 것은 본래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은 이렇다고 나는 믿는다즉 진리란 하나의 신앙이며 가치 평가다.

 

P107

사고와 판단, 지각의 활동은 동등의 것으로 조작하는 활동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다. 모든 새로운 것들, 모든 차이적 존재들을 하나의 틀에 끼워 넣는 동일화의 의지. 그 동일화의 의지는 모든 사건의 근본적 위조가 행해지고, 시선에 대한 광학적 훈련이 수행된 뒤에 목표를 달성한다.

 

P108

모든 것들이 동등해지는 시대에 논리학은 번성한다. “논리학은 몇 가지 동일한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이라는 전제 조건과 결부되어 있다. 논리적 사고나 추리가 진행되려면 이 조건이 먼저 충족된다고 전제해야 한다. 사건의 근본적 위조가 상정된 후에야 논리학이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P108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이 때문에 니체는 논리학을 참된 것을 인식하라는 명법이 아니라 우리가 참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세계를 정립하고 조정하라는 명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4. 가치의 발명

 

P109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세계는 무한히 해석 가능하다.” 세계는 배후에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바로 그 점에서 필자) 도리어 무수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P111

니체의 투시주의는 나의 해석은 이렇다. 그렇다면 당신의 해석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자신의 해석을 말하도록 요구받는다.

 

P111

독자들은 니체의 생각을 평가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투시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 니체의 투시주의는 독단론에 반대해서 독자들의 생각도 인정하고 있으므로 참여하려는 모든 사람들은 니체의 투시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투시주의의 이러한 특권은 사람들이 일단 참여하게 된 후에는 사라진다. 그때부터 니체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것과 대등한 것이 된다.

 

P112

니체는 진리성을 경쟁하기 위해 하나의 견해를 제출한 것이 아니다. 니체에게 해석은 무엇보다도 창조와 생성의 문제다. 해석 행위는 모든 차이를 아우르는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일도 아니고, 그것이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떠드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래를 만들려는 자가 벌이는 가치 평가 행위인 것이다.

 

P112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 거 없다고 설득한다.

 

P112

모든 생성을 거부하고, 모든 새로운 것들은 과거의 아류에 불과하다는 생각, 요컨대 생래적 백발이라는 감정을 통해 보편적 도덕이 군림할 수 있게 된다.”

 

P113

니체에게 해석은 지배적 가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다. 그것은 인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자유정신이기도 한다.

 

P114

과거와 대립해서 자신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생각은 곤란한 욕망이다. 더구나 시간상으로 봐서 연회에가장 늦게 참석한 손님이 말석에 앉지 않고 먼저 온 사람들의 심판자가 되겠다는 것은 부당하다.

 

P114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P115

니체는 새로운 견해의 태양이 새로운 열기와 더불어 인간 위를 내리 쪼이자마자 고대의 모든 질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회 질서도 천천히 녹아 내린다.”고 말했다.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5. 니체에 대한 해석학 방법과 스타일의 문제

 

P119

누가 니체주의자인가? 누가 니체의 해석자인가? 어떤 니체인가? 니체가 놀랄만한 니체를 만들어 내는 사람, 혁명적 니체를 만드는 사람, 니체를 혁명하는 사람, 바로 그가 니체주의자다.

 

6. 헤르메스는 해석자였다.

 

P119

더욱 걱정스러운 일은 해석학이 정치의 장에 개입할 때 생겨난다. 현실의 정치는 해석학적 고통을 금방 치유하려고 달려든다. 차이를 고통으로 느끼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검진 없이 정치가들은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운동에 돌입한다. 어떤 때는 경찰과 군대의 직접적인 폭력으로 어떤 때는 숱한 대화와 설득을 통해서 차이를 해소하고자 한다. 차이의 보존을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그 차이를 유지하고자 하며, 그것을 훼손할 수 있는 생성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공공영역에서 차이들이 생성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치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던 그리스인들의 태도는 아직도 우리에게 이해되고 있지 않다. 다양성이 건강을 증명한다는 자연의 생태주의적 가르침도 우리에게는 이해되고 있지 않다.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 작은 정치의 시대

 

P122

아마도 니체라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P123

한 사회가 자시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어이다.

 

P123

정치란 행위의 영역인데, 행위란 항상 어떤 것을 시작하는 것’, ‘주도하는 것이며, 타자와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P124

근대 사회에서 이러한 독특한 행위나 사건들은 통계학이 예외들을 다룰 때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의 일탈이자 동요일 뿐이다. 요컨대 순응주의 사회에서 제일 먼저 죽어나가는 것이 정치다.

 

P125

니체는 근대의 정치를 작은 정치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시대가 끝나간다고 말한다. “이제 작은 정치의 시대는 끝났다. 새로운 세가의 도래와 더불어 지상의 지배를 위한 투쟁이 막을 열 것이고, 필연적으로 위대한 정치가 도래할 것이다.

 

2.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 1 – 근대 국가와 전쟁

 

P126

디오니소스는 다른 방식으로 묻는다. “어떤 것인가?” 혹은 누구의 것인가?” 이처럼 추구하는 가치들의 질과 유형을 묻고, 그것의 소유자나 지지자를 묻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인 물음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친구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해내는 기술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다. 여기에는 가치의 창조와 평가,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세력에 대한 물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P127

예속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다만 타인들이 평가하는 대로 존재하는 인간들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인정되었던 것, 또는 그들로 하여금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가치도 찾아내지 못한다.”

 

P127

가치 창조와 평가를 봉쇄했던 것이 근대 정치의 첫 번째 문제였다면, 두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적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는 잔인한 길들이기길러내기가 개입한다.

 

P130

현실적으로 “’일반의지는 다수의 투표 속에 존재한다.” 어떤 개인이 자신의 뜻과 상반되는 법률이 통과되어서, 그 법에 의해 처벌을 받았다고 해도 그는 법률을 위반하면 처벌받는다는 법률에 동의했던 것이며, 이는 일반의지로부터 자명하다는 게 루소의 생각이다.

 

P130

루소의 일반의지는 사회에 대한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며, 동질적인 이해를 통해 도달한 개념이다. 그의 이론은 주권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에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근대 시민 사회에서 주권은 전체에게 있지만 어느 시민도 그 주권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다만 자신이 복종해야 할 법을 만드는 데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3.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 2 –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P135

이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자들은 법률 속에 있는 폭력, 모든 종류의 속에 있는 냉혹함과 이기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제도는 그것이 이룩되자마자 자유주의적이기를 그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제도보다도 철저하게 자유에 해가 되는 것은 없다. …… 자유주의 그것은 쉽게 말하면 가축으로의 몰락이다.

 

P137

니체는 사회주의가 원하는 국가가 달성된다면 생성의 강한 에너지는 파괴될 것이라고 말하고 그때 국가는 새로운 생성적 힘을 상실하고 허무주의적 형태를 띠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니체는 현대민주주의를 국가의 몰락에서 나온 역사적 형태라고 말한 것이다.

 

P138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의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P139

하나의 제도와 법은 폭력성과 잔인성을 가지며 주체들은 그 아래서 거기에 맞게 길들여지고’ ‘길러진다는 것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4. 길들이기와 길러내기

 

P141

니체는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고도의 권위를 윤리라고 보았는데, 윤리는 관습에 의하여 규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니체는 비윤리적이라고 비난받는 것들에 주목했는데, “비윤리적이라고 비난받는 것들은 개인적인 것, 자유로운 것, 제멋 대로인 것, 길들여지지 않는 것, 예측되지 않는 것, 계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P142

첫 번째의 작업이 길들이기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 작업은 길러내기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P143

니체는 이 작업을 기억할 수 있는 동물 기르기라고 명명한다. ‘기억할 수 있는 동물은 또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된다. 그는 다시는 지를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동물이 되는 것이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그 사회에서 규칙적이고 필연적인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의 행동은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만큼의 계산 가능성을 높여준다.

 

P14

이제 사람들은 능동적으로 자기를 검열하고 통제한다. 베버는 이것을 능동적 자제라고 불렀으며, ‘일기를 능동적 자기 검열의 대표적인 기제로 보았다.

 

5. 아곤의 정치

 

P146

아곤은 보편화나 전체화에 빠지지 않는 다양성의 정치가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적대가 아닌 경쟁을 위해 어떤 정치적 기술들이 동원되었는지를 보여준다.

 

P147

그리스인들은 인간들을 서로 적대적인 파멸의 전쟁속으로 몰아넣는 여신은 약하다고 보았지만, 질투와 증오와 시기의 여신이라고 해도 인간들로 하여금 파괴적 투쟁이 아니라 경쟁의 행동(아곤적 행동)을 하도록 자극하는 신은 선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P148

목표는 항상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나 현대인은 제논의 비유에서 발빠른 아킬레스처럼 무한성의 장애에 부딪힌다. 그는 무한성의 방해를 받아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P149

소크라테스적이고 기독교적인 도덕은 이러한 비루투스의 의미를 바꾸어 오히려 베이툼’, 금지된 것이라는 의미가 되게 했다. 이들에게 덕은 금지들의 모음이며, 그 위반에 대한 처벌들의 나열일 뿐이다.

 

P150

주변 국가들과 함께 경쟁하고 발전할 수 없게 되자마자 밖을 향했던 에너지는 안을 향하게 되고, 아곤은 무너지고 안타곤의 사회가 된 것이다. 니체는 이때부터 그리스 국가가 초월적으로 군림하기 시작하며 잔인해졌고, 그리스인들과 함께 타락했다고 주장한다.

 

P151

고대인들은 왜 군사적 수호신을 계속해서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했을까? 그것은 바로 전쟁을 멈추는 곳에서 하나의 우상이 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아곤이라는 치열한 경쟁이 멈추는 곳에서 법과 제도의 추월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P152

니체의 경고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리를 초월적 기구에 양도하면 양도할수록, 가장 평균적인 자들의 그리고 마지막에는 최대 다수자들의 지배에 만족하게 된다.” 우리는 권리를 양도하는 만큼을 상실하게 된다. 니체가 법과 관습, 문화에 대한 적대를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P152

니체가 자주 말하듯이 좋은 전쟁은 화약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전쟁은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다.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우리 정치적 운동의 과제, 그것은 전쟁이다.

 

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 자연학 + 윤리학

 

1. 초월적인 것의 죽음과 내재적 우주론 원자론의 경우

 

P158

데모크리토스가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원성의 세계만을 보았다면, 에피쿠로스에게 세계는 사건들의 사건’, ‘변화로서의 변화가 구성하는 시간이 흐르는 생성의 영역이었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파르메니데스보다는 헤라클레이토스에 훨씬 가깝다. 어쩌면 데모크리토스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혁신이야말로 니체가 세계를 설명하면서 더 이상 원자론에 머물 수 없었던 이유를 말해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 왜 원자가 아니라 힘인가

 

P159

힘은 니체의 철학적 태도를 대변하고 있다.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 존재하는 독단적인 표상이란 없으며” “부분이나 사건들은 깊은 연관성들을 지니고 있고, 이들 특성은 관계를 통해서 결정된다.

 

P159

힘이 그 작용과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은 니체가 자주 지적한 바 있다. “어떤 양의 힘이란 사실 그것과 같은 양의 충동, 의지,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충동 작용, 의지 작용, 활동 작용에 불과하다.

 

P161

이 해로운 원자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정신이 영역도 단일한 원인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에 단일한 주체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니체가 볼 때는 정신의 영역 자체가 수많은 힘들의 결과물일 뿐이다.

 

P161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힘은 정지불변과 항쟁하고 있으며, 그 양이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 본질은 유동적인 것이다.” 힘의 양이 고정된 것처럼 보일 때조차 그 성격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변화는 힘의 앞지를 수 없는 본질이다.

 

3. 힘의 질 능동과 반동 

 

P165

니체가 힘을 분석함에 있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질적인 차이를 통해 드러나는 의지이다. 니체에게 강약의 문제는 양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P166

그가 끊임없이 대비시키는 것은 행위 양식이고, 가치에 대한 평가방식이다. 그렇다면 니체에게 강함은 어떤 것이었는가?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P167

들뢰즈는 능동적인 것반동적인 것이야말로 힘의 질적인 구분이라고 말한다. 능동적인 힘은 시작하는 힘이며 공격하는 힘이다. 반동적인 힘은 비난하는 힘이며 상쇄시키고 흡수하는 힘이다. 모든 방향은 능동적인 힘이 결정한다.

 

P168

부정의 의도아래서 반동적 질을 가졌던 힘들이 강화의 의도아래서는 능동적 힘으로 진화된다. 금욕이나 단식도 부정의 의도 아래서는 욕망을 억누르는 도덕적 통제의 수단이지만, 강화의 의도 아래서는 신체를 건강하게 만들고 맛을 음미하는 능력을 배가시켜 주는 수단이 된다. 결국 우리는 힘들의 질적인 차이가 그 내면에 있는 의지나 의도, 다시 말해서 권력의지의 차이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문제는 권력의지의 차이이다.

 

4. 권력의지에 대한 오해

 

P171

힘이 다른 힘에 자신이 영향을 강제할 때 표현되는 것이 의지이다. … “의지란 본래 주인으로서 욕망을 다룬다. 즉 그것에 방향과 한도를 지시하는 것이다.”

 

P172

결핍된 대상을 얻는 수단으로 권력이 정의되고, 그 것을 의지하게 될 경우,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그러한 대상들이나 가치에 대한 종속이다. 한 사회에서 이 높이 평가되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결핍된 을 강하게 의욕한다면 대부분은 돈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P172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욕망에 대한 또 다른 정의가 있는데, 그것은 욕망을 생산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때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넘침이다. 욕망을 그 자신이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즐거움과 관계시키는 것이다. 결핍된 자의 초조함과 넘치는 자의 즐거움은 너무도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항상 이렇게 물었다. “나는 개개의 경우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여기 만들어져 있는 것은 기아가 원인가, 과잉이 원인가?

 

P173

권력의지가 존재라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다시 말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

 

 

P174

하인들이나 약자들은 그 권력의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자신들도 지배에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를 예속시킴으로써 자신들이 대단한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대단히 착하고 커다란 인내심과 자제력을 갖춘 성실한 사람들인 듯이 상상한다.

 

P174

허무주의자들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 말을 믿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실제로 무언가를 원하지 않을 때조차도 그 권력의지는 무언가를 원하고 있으며 상황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이다. “허무주의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무의 의지혹은 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무화하려는 의지이다. 허무주의가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할 때, 그때의 권력의지는 모든 창조적이고 생성적인 힘들의 능력을 박탈함으로써 허무주의의 지배적인 것으로 관철시킨다.

 

5. 권력의지의 윤리학과 권력 느낌

 

P175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은 긍정과 부정이다. 긍정은 디오니소스의 정신이며, 그리스 예술의 정수이고 예수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이기도 하다. 반대로 부정은 삶을 비난하는 노예의 것이고, 심판을 불러오는 사제의 것이며,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포섭하려는 변증법의 것이다.

 

P176

어떤 행동이나 힘과 마주할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을 부정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긍정으로 자극하는가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말해 준다.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 “나는 약화시키는 것, 초췌하게 만드는 것 모두에 대해 아니오를 가르친다. 나는 강화하는 것, 힘을 저축하는 것, 힘의 감정을 긍정하는 것 모두에 대해 예를 가르친다.

 

P177

마주침의 순간에 작동하는 권력의지가 어떤 것이냐의 문제는 강하게 되느냐’, ‘약하게 되느냐를 결정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곧바로 윤리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P177

좋은 해석이나 가치 평가란 긍정의 권력의지다. 긍정의 권력의지야말로 좋은 지배방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우리 육체는 긍정의 권력의지를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 니체는 그것이 권력 느낌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좋음)이란 무엇인가? 권력 느낌, 권력 의지, 권력 자체를 인간 안에서 강화시키는 모든 것. (나쁨)이란 무엇인가? 허약함에서 비롯하는 모든 것. 행복이란 무엇인가? 권력이 증가하는 느낌. 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

 

P178

권력 느낌이 권력의지보다 우선한다는 것은, 그것이 권력의지에 대한 단순한 수동적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육체가 권력의지를 경험하는 방식은 스스로의 권력의지를 행사함을 통해서이다.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는육체. 육체는 자신의 감수성, 민감성을 드러내고 행사한다.

 

P179

권력의지는 새로운 힘들과 마주칠 때마다 항상 촉수를 내민다. 그것을 느끼고 평가하는 것, 육체를 감각과 평가를 통해 권력의지를 경험한다. 사회든 개인이든 나쁜 권력의지는 이러한 감각 능력과 관계되어 있다. 강자들이 창피하고 비참하게 여기는 것을 약자들은 선하고 좋은 것으로 느낀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감각방식인 것이다.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 자연학 + 윤리학

 

1.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 그리스적 사유로부터

 

P185

생성과 소멸, 건축과 파괴는 아무런 도덕적 책임도 없이 영원히 동일한 무구의 상태에 있으며, 이 세계에는 오직 예술가와 어린아이의 유희만이 있을 뿐이다. 어린아이와 예술가가 놀이를 하듯 영원히 생동하는 불은 놀이를 하며, 무구하게 세웠다가 부순다. 영겁의 시간 에온은 자신과 놀이를 한다. 마치 아이가 바닷가 모래성을 쌓았다가 부수듯이 …… 이따금 그는 놀이를 새롭게 시작한다.

 

P186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2.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익숙한 오해

 

P187

니체는 사건들과 분리된 시간을 인정하지 않았던 원자론자들처럼 사물들의 운동과 분리된 시간을 인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생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새로운 생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데아의 세계처럼 영원 불멸하는 곳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유는 어떤 생성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사실상 사물들이 벌이는 생성에 다름 아니다.

 

P189

세계란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놀이다. 니체는 이것을 주사위 놀이를 하는 세계로 그리기도 한다. 주사위 놀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의 의미를 이해할 때도 등장하는 놀이다. 항상 자기로 귀환하는 놀이 주사위 던지기! 우리는 학자들에게 영원회귀가 왜 어려운 개념인지를 안다. 그들은 주사위는 잘 알고 있지만 놀이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P191

생성을 긍정하는 것은 권력의지의 최고의 표현이다.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 이것이 최고의 권력의지다.” 존재하는 것은 생성뿐이다. 그리고 생성만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영원회귀는 이러한 생성의 반복을 의지하는 것이다.

 

P192

영원회귀란 존재의 세계를 생성의 세계로 만드는, 혹은 그것들을 근접시켜이해하는 표현이다. “모든 것이 회귀한다는 것은 생성의 세계의, 존재의 세계에 대한 극한적 근접이다.” 이로부터 니체의 독특한 존재론, 즉 생성의 존재론이 나온다.

 

3. 반복의 두 경우 병에 걸린 차라투스트라와 회복된 차라투스트라

 

P195

생성 즉시간을 긍정하기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무엇보다도 과거와 대면해야 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의욕하고 있다면 그는 먼저 이미 지나간 시간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하지만 과거는 의지하는 자들에겐 가장 큰 난관이다. 어느 누구도 과거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의지는 이미 행해진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력하다. “의지는 되돌아가 의욕할 수 없다. …… 시간은 뒤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의지의 통한이다. ‘그러했던 것’, 그것이 의지가 굴릴 수 없는 돌이라는 것이다.”

 

P196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 그것은 죽음까지도 살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 번!’ 이렇게 외치기 때문이다.

 

P199

나는 나의 늙은 악마이며 불구대천의 원수인 중력의 영도, 그리고 그가 창조한 것들, 즉 강제와 규정, 필요와 귀결, 목적과 의지, 선과 악을 재발견 했다. 왜냐하면 춤춰 넘어야 할, 춤춰 건너야 할 대상이 존재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가벼운 자, 가장 가벼운 자를 위해서 두더지와 무거운 난쟁이들이 존재해야 되지 않겠는가?

 

P200

해석자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동안 차라투스트라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이다.

 

4. 긍정을 부르는 긍정

 

P201

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P202

나는 병에서 나의 더 높은 건강을 얻었다. 이 건강이란 병이 말살시켜 버리지 못한 모든 것들에 의하여 오히려 더 강해지는 건강을 말한다. 나는 병에서 하나의 철학도 얻었다.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최후의 해방자다. …… 그런 고통이 우리를 개선시키는지에 대해 의심스러울 때도 있으나 나는 고통이 우리를 심오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P203

니체는 부정과 파괴야마로 긍정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디오니소스의 사명에 대한 전제 조건은 망치의 단단함, 파괴에서 느끼는 기쁨이다.” 긍정에는 부정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긍정과 부정의 위계가 나타난다. 긍정은 부정보다 강력하다. 차라투스트라는 난쟁이보다 강력하다. “친구여! 그대들 속에 숨겨져 있는 저 긍정은 그대들의 시대적 병인 저 모든 부정보다 더 강력하다.

 

P204

첫 번째 긍정을 단순한 파괴와 부정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은 두 번째 긍정이다.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이 첫 번째 긍정이 비로소 긍정된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망치가 파괴의 도구인지 창조의 도구인지는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 결정된다. 하나의 긍정은 자신을 긍정해 줄 다음의 긍정을 기다린다.

 

P205

이로써 긍정에 들어 있는 영원회귀의 원리가 나타난다. 긍정은 적극적으로 다음의 긍정을 의지한다. 긍정이 멈추는 순간에 부정은 승리한다.

 

5. 차이의 놀이와 회귀의 비밀

 

P206

우연의 이론, 그것은 …… 끊임없이 창조적인 행동, 선택하여 스스로를 기르는 행동을 갖는 존재이다. 나는 우연적인 것의 한 가운데서도 능동적인 힘을, 창조작용을 영위하는 것을 인식하였다.

 

P207

떨어지는 주사위는 새로운 느낌을 만들고, 던져지는 주사위는 새로운 힘을 표현한다. 결국 주사위 놀이는 차이를 만들어 내는 놀이이다. 차이를 만들어 내는 놀이! 놀이가 만들어 내는 차이! 긍정은 차이의 생성을 멈추려하지 않는다. 차이를 해소하고 싶어하는 것은 부정이다. 변증법이 그렇듯이 부정은 차이를 적대로 발전시킨다. 차이에서 긴장을 느끼고 대립감을 느끼는 것은 부정의 권력의지다. 그래서 부정은 생성의 놀이, 차이의 놀이를 멈추고 싶어한다.

 

P208

다수성과 운명애, 우발성은 긍정의 권력의지의 특징이며 영원회귀의 방식이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부정의 권력의지보다 위계가 높다. 세계는 자신을 다수성으로, 운명애로, 우발성으로 드러낸다.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만을 돌아오게 하고, 긍정의 권력의지를 선택하고, 긍정의 권력의지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P209

영원회귀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유혹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왜 그렇게 영원회귀를 멈추지 않는가? 그것은 즐겁기 때문이다. “모든 쾌락 안에서는 원환의 의지가 꿈틀거린다.” 모든 즐거움들은 계속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어떤 피로도 모르고 생성으로서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의 영원한 자기 파괴의 세계.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중의 정욕의 비밀의 세계영원회귀의 유혹 즐거움.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7장 인간 :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1. ‘(…… und ……)’

 

P215

자연은 인간이 자연의 이름을 부를 때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인간이 제 자신의 척도에 자연을 끼워 맞추고, 제 스스로 생각하는 자연과 다른 자연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한 인간은 영원히 자연과 화해하지 못할 것이다.

 

P215

세계 대 인간의 모든 태도……, 사물의 가치 척도로서의 인간, 마침내는 존재 자체를 자기의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는 그것을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는 세계 심판자로서의 인간 이러한 태도의 정상을 벗어난 어처구니없음은 그 정체를 드러내어 우리에게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인간과 세계가 서로 병립되어 있고, 따라서, ‘라는 귀여운 단어의 숭고한 뻔뻔함에 의해 분리되어져 있음을 발견할 때 웃지 않을 수 없다.

 

2. 진화와 변신

 

P218

인간이 진화를 주장한다면 초인은 변신과 변용을 주장한다. 변신이나 변용은 진화가 아니다. 인간적 경향의 발전이 초인을 가져올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P219

어린아이는 존재 자체로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한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이고,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다.

 

P22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그가 바로 그 번개이며, 그가 바로 그 광기이다.” 우리 신체는 지금 인간을 표현하고 있지만, 신체 어느 곳에서 튀어나오는 무서운 광기처럼, 우리 신체가 초인을 표현할 수는 없는가? 그 놀라운 변신과 변용이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가?

 

3. 신의 죽음과 인간의 몰락

 

P222

천국이란 믿음의 문제이기는커녕 새로운 삶의 방식이고 실천이라는 것.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그렇게 요약했다. 신들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창조할 초인이 살기를 기대한다.

 

P225

신들의 죽음도 즐겁고 유쾌했던 적이 있었다. “한 신이 나타나 신에 대해 가장 무식한 말을 했을 때 신들의 죽음이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신은 하나다. 너는 나말고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된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모든 다른 신들은 우었고 의자에 앉은 채 몸을 흔들었다. …… 그들은 웃다가 죽은 것이다.” 정말로 신을 철저히 죽이고자 하는 자는 웃는다. 그는 신을 분노로써가 아니라 웃음으로써 죽이는 것이다. 신이 살이 있든 죽어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존재가 웃음거리인 것을 ……

 

4. 보다 높은 인간들

 

P229

만찬이 열리고 신의 죽음과 초인의 출현에 대해 차라투스트라가 말한다. “이제 인간의 미래라는 진통을 겪고 있다.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원한다. 초인이 살게 되기를

P231

차라투스트라의 탄식을 들어보자.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무엇이었는가? “나의 죽음을 나는 너희에게 권장한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에게 오는 죽음을” “너 자신을 네 스스로의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네가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5. 놀이와 웃음, 그리고 춤

 

P231

왜 보다 높은 인가들은 변신에 실패했을까? 그들에게는 초인과 영원회귀가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에게 의존하려 했다. 그들은 초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가지, 즉 놀이와 웃음과 춤을 몰랐다.

 

P233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은 중력의 정신에 대한 승리의 표시이다. 그것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높이 뛰기와 넓이 뛰기, 그리고 옆으로 뛰기이다.

 

P234

영원회귀 하는 긍정의 권력의지는 변화된 신체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초인은 신체의 변신이며 새로운 느낌 방식이다. 신체가 즐거움을 경험하면 한 번 더라고 말한다. 신체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그것이 긍정의 권력의지다.

 

 

8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1. 가면의 철학

 

P238

니체의 이름은 하나의 가면이기도 하다. “무릇 심오한 인간은 가면을 좋아한다.” 그는 가면을 바꿔 쓰며 전투를 수행한다. 그러나 상형문자를 놓고 괴로워하는 이집트의 청년처럼 가면 뒤에 있는 진정한 얼굴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진정한 얼굴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가면 쓰기는 하나의 놀이이며 예술이다. 철학이 변모의 예술이라면, 철학은 가면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방랑자를 멈추려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 방랑자는 가면을 요구한다.

 

P240

완벽한 독자를 상상해 보면 그 완벽한 독자란 항상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하나의 귀물로 변하곤 한다. 게다가 그는 순종적이면서도 교활하고 조심스럽다. 그는 또한 하나의 타고난 모험가요 발견자이다.

 

2. 비극의 시대에서 냉소의 시대로

 

P240

이 힘 역시 니체라는 이름을 지녔다. 이 힘은 끊임없이 자기 발전과 변신을 감행한다. 니체, 그는 우리에게 변신의 힘, 그리고 변신하는 힘으로 불린다.

 

3. 화약 냄새가 사라진 전투

 

P246

<차라투스투라>에는 낡은 가치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가치에 대한 창조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부정과 창조는 과거를 구제하는 긍정의 정신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 책의 끝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알아차린다.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듣는 아리아드네
망치를 든 파괴자이자 춤추는 무희이며,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자, 차라투스트라!

 

4. 모든 가치의 전환

 

P248

나는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안 듣기 위해서 과자 한 상자를 보내는 것이다. 나에게 나쁜 짓을 한 번 더 해보라. 그러면 나는 그렇게 보복할 것이다.

 

P248

나의 사명 속에서 긍정의 부분이 해결되고 나면 그 다음 차례는 부정이다. ‘부정의 행동을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부정은 긍정 안에 놓여 있는 부정이다. 그렇기에 이 부정은 하나의 놀이가 된다.

 

P250

삶을 사랑하라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은 실천이라는 예수의 복음을 가장 잘 이해한 자. 그때부터 니체는 자신의 필명을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고 쓰기 시작했다.

 

5. 다시 떠나는 여행자

 

P250

아주 희미하게라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자는 지상에서 스스로를 방랑자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느낄 수 없다. 여행자는 하나의 최종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목표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P250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라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프리드리히 니체

 

P252

여행자의 목소리는 전쟁을 시작하는 나팔수의 나팔처럼 시끄럽지 않다. “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가장 조용한 말이다.” 돋보기를 든 계보학자는 작은 파편 하나를 슬쩍 던져 놓는다. 그 조용하고 작은 파편 하나가 다이너마이트다. 그리고 계보학자는 다시 길을 떠난다.

 

P253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2

 

베버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1. 근대라는 탈주술화된 주술

 

P257

새 것을 뜨하는 모데른이라는 말에는 자율을 둘러싼 강한 긴장이 응축되어 잇다. 한편으로 가치 판단의 기준을 더 이상 과거로부터 가져오지 않겠다는 선언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모데른은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전통에 기대고 있는 옛 것이라는 뜻의  앙시앵(ancient)’과 대립적이다.

 

P259

합리성이라고 불리는 이 탈주술화된 주술은 근대인의 모든 생활 질서 속에서 나타난다. “신들 상호 간의 영원한 투쟁, 그리고 삶에 대한 궁극적 불일치성과 중재 불가능성의 긴장 속에서 서구인들은 독특한 합리성을 자신들의 신으로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2. 근대인의 탄생

 

P263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는 것은 오히려 신앙심이 부족하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만약 자신이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면 신은 현세에서 자신이 하는 일도 돌볼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표지를 찾는 것이란 스스로 구원의 표지를 증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스스로 구원받았음을 믿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많은 재화를 벌어들인다면 그것은 신이 돕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전환이 부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명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은 뒤집어졌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재화를 쌓는 것이야말로 신을 영광되게 하는 일이다.

 

3. 관료제 기계

 

P266

시간표는 사람들의 삶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주었다. 벤자민 플랭클린이 꿈꾸던 철저한 자기 관리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시간표였던 것이다. 가정은 물론이고 학교와 공장에서 시간표는 아이들과 노동자들의 생활을 가장 효과적으로 관리해 주는 수단이 되었다. 자신들의 의지로 행동을 통제하기보다는 의지를 포기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오히려 원하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확실히 중요한 전환이다.

 

P267

우리는 기계로서의 관료제가 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은 사라진다. 생산하는 것은 관료제로 불리는 기계다. 인간 역시 기계의 생산 작업에 동원되는 부속품일 뿐이다. 소명 의식에 불타던 근대인은 언제부터인가 주어진 절차와 규정에 의거해서 수동적으로 일 처리에 동원되고 있는 암울한 근대인으로 돌변해 버렸다.

 

4. 신체 길들이기, 신체 길러내기

 

P270

베버는 사람들의 생활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분할하고 그것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전화하는 것을 훈육이라고 개념화 했다. “훈육은 모든 것을 계산 가능하도록 그리고 공통의 명분과 합리적으로 의도된 목표에 헌신하도록, 대중들의 육체와 정신을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다.”

 

P273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가 분리되고 그들의 신체에 잔인한 기억이 심어지면 훈육의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된다. 잔인한 기억술로 심어진 행동방식이 반복되어 습속의 도덕으로 자리하면 이른바 능동적 자제라는 게 생겨난다. 처음엔 공포로 시작된 검열이 이제는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검열로 대체된다.

 

P274

훈육의 최고 목적은 능동적 자세다. 특히 능동적 검열과 관련해서 일기가 수행한 기능은 놀랍기까지 하다.

 

P274

베버가 말하는 철창이 왜 그렇게 강력한 것인지도 이로써 분명해진다. 그것은 제 스스로 걸어 들어간 내적인 감옥이기 때문이다. 더 열심히 움직일수록 감옥은 더 강력하게 조여든다.

 

5. 베버의 청치학

 

P279

베버는 소명 의식과 거리 두기 능력, 책임감 등을 가진 정치인에게서 관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발견한다. 이러한 정치인이야말로 그가 보기엔 관료제 기계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정치지도자의 행위는 관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바로 책임 원칙을 따르고 있다.” 그가 책임 윤리를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6. 베버 전략의 딜레마

 

P283

도구적 합리성을 관리해 줄 또 다른 합리성의 창안! 이들은 근대인들에게 실질적인 합리성, 혹은 성찰적인 합리성이 있다고 믿는다. 이 새로운 합리성이 도구적 합리성의 규범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근대의 한계란 근대의 미성숙에서 오는 것 같다. 과연 이들 새로운 합리성의 창안자들, 이들 새로운 계몽주의자들은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베버의 정치적 저작들을 보면 그 성공의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현대 정당들은 대중들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더 많은 규율들을 필요로 하고 더 많은 규율들은 더 많은 대중들을 수동적으로 만들 것이다. 정치가가 대중들의 의사를 더 잘 대표할수록 대중들은 그에게 더욱 복종한다. 계몽은 계몽 대상의 계몽 필요성을 더욱 증대시킬 뿐이다.

 

P285

신체의 능력은 초월적인 가치를 지도 받거나 내면화시킴으로써 성장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신체는 제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긍정함으로써만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긍정해야 함을 여러 번 주장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거나 그들을 합리적 규칙의 틀 속에 밀어 넣어서, 자유보다는 복종을 받는데 익숙하도록 만들었다면 그들의 신체가 능력을 잃어 가는 것도 당연하다.

 

P286

니체는 내적인 거리거리의 열정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잇다. 거리의 열정이란 (사회 신체이든 개인 신체이든) 신체에 내재하고 있는 힘과 능력을 긍정하고, 그 힘과 능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차이(거리)를 생산해내는 열정이다. 거리의 열정을 가진 자들을 니체는 가치의 신봉자가 아니라 가치의 생산자라고 말했다.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1. 문제제기

 

P290

그것은 특히 포스트모던이나 탈산업사회혹은 다가치사회로 불리는 현대 사회에서 나름대로 합당함을 지니고 있는 다양한 가치들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포괄적인 해결책을 추구할 경우 새로운 형태의 가치들의 전쟁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P292

자유주의자들이 위기를 차이들의 아나키적 전쟁상태에서 찾았다면, 공동체주의자들은 위기를 서구 자유주의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병리적 상태에서 찾았다. 니체가 허무주의라 명명했던 서구 사회의 위기, 바로 주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율적 능력을 소진하며, 그동안 시민들을 키워왔던 전통적인 공동체들이 붕괴되는 현실이 위기의 원인이다. 위기는 전쟁이 아니라 질병에서 온다.

 

P292

시급한 것은 붕괴되고 있는 지역적 공동체들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사회적 응집력과 각 주체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동체에서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교육의 복원이 중요하다. 헤겔이 국가를 시민들의 이해의 조정이나 안전의 문제를 넘어서는 하나의 인륜성의 실체로 간주했던 것처럼 공동체주의자들은 국가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2. 근대 국가의 두 얼굴 리바이어던과 인륜적 실체

 

P295

정치적 질문이 제기되면 국가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모습으로 제시된다. 자유주의자들과 공동체주의자들의 논쟁에서 국가가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들 각각이 제기하는 정치적 질문들의 상이함에서 나온다.

 

P299

국가는 또한 평화를 해치는 자들,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에 대해서는 전쟁을 선포하기도 한다. ‘평화를 위한 폭력의 역설은 니체가 자유주의적 제도는 그것이 이룩되자마자 자유주의적이기를 그친다.”고 한 말이나, “자유주의자들은 법률 속에 있는 폭력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을 떠오르게 한다.

 

3. 자유주의와 차이의 문제 아나키에 대한 공포

 

P304

정치의 영역이란 갈등은 존재하는데 그것을 판단할 독립적 판단 근거가 부재한 조건을 갖는 것으로 본래 시끄러운 영역이라는 바버의 생각에 따른다면, 롤스의 정치철학이야말로 정치가 부재한 정치철학인 셈이다.

 

P309

국가는 넘어서는 안되는 약한 청색 선을 그어 놓고 그것을 관리하는 경찰이다. 자유주의의 정치 영영에서는 차이가 문제를 일으킬 수 없지만, 정치의 영역에 진입하려는 곳에서, 바로 그 경계선에서 정치적 갈등이 발생한다. 여기서 회피무관심은 자유주의 국가의 비자유주의적 얼굴이다. “국가의 본질은 경찰이다. 그것은 핵심적인 것으로의 축소이다. …… 경찰은 비록 그것이 그림자 속에서 남아 있고, 오직 최종 심급에서만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포스트모던의 자유주의 국가에서 질서를 보증하는 쐐기인 셈이다.

 

4. 공동체주의와 차이의 문제 강한 국가를 향한 유기적 결합

 

P313

이제 국가는 공동선과 정체성, 공동체에 실재성을 부여해 주는 실체가된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에 이르러 레이건과 부시가 모두 도덕과 가족의 가치에 초점을 맞춘 것은 국가가 이제 경제적 개입을 넘어서 도덕적 개입을 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신자유주의가 강력한 도덕과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효율성과 정의에 대한 가치 판단들이 전면에 내세워진 것은 윤리적 실체로서의 국가의 모습을 분명히 보연준다.

 

5. 차이의 아상블라주를 향한 전망 정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P 316

생명이 차이로부터 온다는 프리고진의 지적이 맞다면, 정치 영역에서 차이가 갈등이나 적대, 혹은 정지의 신호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올바른 것일까? 오히려 생태학은 다양성과 차이야말로 강함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P319

스피노자가 존재의 아상블라주로의, 프로젝트로의 성장에로 나아가는 길을 인지하고, 존재가 욕망으로부터 협력으로, 사랑으로, 그리고 존재의 살아 있는 원천과의 결합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전개하는 인지적 공간을 구성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기도 하다.

 

P320

상식과 보편성을 발견하기보다 차이와 특이성을 발견해내는 것은 결코 정치에 생소한 것이 아니다. 낮선 것은 정치적이지 않은 것에 정치가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에겐 정치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멀리 떨어진 것도 없다.

 

3. 내가 저자라면

 

니체의 철학의 전개 과정과 흐름을 조목 조목 잘 정리한 책으로서 니체의 사상을 따라가는데 좋은 안내서를 만나서 매우 좋았다. 어릴 적 몇 권 남아 있지 않은 아버님의 유품 중에 삼국지와 니체가 있었다. 이후 늘 니체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원 저작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니체의 사상에 대한 개괄을 보게 되었다. 니체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나와 맞는 사람이었다. 그의 생각과 저작에 대한 호기심이 매우 커졌다. 이것으로도 고병곤의 책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은 성공적이라 볼 수 있겠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니체 철학 전반에 대해 조목 조목 얘기해 주고 2부에서는근대와 그 이후 정치적 이슈와 방향에 대해 논하고 있다. 아직, 이해가 낮아 1부와 2부를 나누어 책을 저술한 의도를 잘 파악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니체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설명이 2부에서는 끊기고 새로운 관점의 글이 나오는 점에서 읽고 이해하는데 다소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저자 고병곤이 하고자 하는 책의 목적인 1부인지? 2부인지 명확하지 않은 점이라 하겠다. 2부의 현대 정치 방향의 모색을 촟점으로 한다면 1부에서 살펴본 바들이 2부의 내용에 기여할 수 있도록 내용 구성이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2부는 완전히 독립된 내용으로 저자의 근대 및 현대 정치에 대한 고찰을 다루고 있다. 이 부분이 본 책의 아쉬운 부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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