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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23일 11시 57분 등록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10기 김정은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고병권, 소명출판, 2001

 

1. 저자에 대하여

 

고병권

작가, 번역가,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 인문학자, 니체주의자

 

시골 아이 고병권은 어린 시절 흙을 밟으며 자랐다. 나무 해오고 장작불 떼고 풀피리 불고 등등 자연을 무대로 활보하던 유년시절의 추억이 많단다. 3 2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5학년 때 광주로 전학 가기 전까지 내내 반장을 도맡아 했단다. 처음으로 아스팔트를 처음 본 것도 바로 그 때다.

 

광주 입성과 동시에 새로운 전환기를 맞은 고병권은 신고식을 단단히 치르게 된다. 발야구 시합 도중 경기규칙에 관한 시비로 친구의 얼굴을 가격한 것! 그 일로 그의 아버지는 그 친구의 부모님에게 몸을 90도로 굽혀 사과해야만 했다. 고병권에게 아버지는 각별하다. “생애 첫 기억은 땀이 촉촉이 밴 아버지의 등에 업혀 있던 것이다. 정지영상으로 생생히 남아 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이장을 지냈지만 자식들 교육을 위해 광주로 옮기면서 궂은 일 마다 않고 헌신했다. 5남매 중 내가 유독 아버지를 좋아하고 많이 이해하는 자식이었다.” 라고 그는 말한다.

 

중학생이 된 고병권에게 광주는 시위의 함성이 들끓는 용광로였다. “스쿨버스가 시위대를 뚫고 지나가기 일쑤였으며, 학교도 3년 내내 학내 민주화 문제로 들끓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뛰어난 언변과 논리체계를 갖춘 덕에 학내 민주화운동 주도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공부와 투쟁이 일상적으로 공존하던 시절, 그의 꿈도 뜨거워졌다. 원래 문과성향이었으나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가 되고자 이과로 진로를 정했다. 서울대 화학과에 입학했다.  

 

민주화의 고장 광주에서 나고 자란 탓에 일가 친척은 거의운동권이었다. 대학 생활 역시 운동권 선후배들과 교정 어디에서나 읽고 토론했다. 그는 전공보다 사회구조에 관심이 더 많았고 책꽂이에는 전공서적 대신 사회과학서적으로 채워져 갔다. 그 즈음, 두 가지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하나는 지나가는 노동자에게 아주 세게 뺨을 맞은 일이다. “너희가 노동자를 알아!”하는 대사와 함께. 다른 하나는 어느 노동자가 연일 계속되는 철야로 잠 안 오는 약을 복용한 후 신체의 감각을 잃어버려 화상을 입은 사건을 목격한 것이다.

 

운동은 상처만 남겼고, 고병권은 세상 밖을 한참이나 떠돌다가 학교로 돌아왔다. 학부 졸업 후 그는 사회과학대학원에 들어갔다. 서울사회과학연구소를 가기 위해서다. 그 때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는 자연스럽게 니체를 만났다. “맑스 원전을 읽는 모임에서 누가 휴식 삼아 니체의도덕의 계보학을 읽자고 가져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발끝까지 맑시스트였던 고병권은 니체가 못마땅했다.

 

이런 책을 쓰는 나는 얼마나 훌륭한가!’ ‘내 책을 읽고 나면 다른 책은 읽지 못할 것이다와 같이 니체가 자기 자랑하는 글을 본 순간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고병권은웃음으로 니체를 받아들였다. 방학 내내 고향에서 니체 전집을 읽고 또 읽었다. 니체를 읽으면서 그는 잃었던 건강도 다시 찾을 수 있었고, 웃음도 많아졌다. ‘긍정의 화신이란 별명도 얻었다. 니체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니체와 베버를 혼합하여 논문을 작성했고, 예상대로 교수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으나 최저점으로 논문이 통과됐다. 무작정 좋아하는 걸 따라오다 보니 얻은 성공이었다. 교수들에게사회학의 지평을 넓혔다는 칭찬까지 들었다.

 

서른 즈음, 운명적으로 지식인공동체 수유+너머에 합류했다. 그곳이 생활공동체가 되어 밥을 해먹고 강의로 돈을 벌었다. 그는 권력과 자본이 자행하는 대중들의 폭력적 추방을 보면서, 또 그에 대응하는 대중들의 악착같은 투쟁을 보면서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절망만큼이나 큰 희망을 보았다. 그 때의 귀한 경험과 사유의 결과물들을 부지런히 글로, 책으로 엮어내고 있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대해 투쟁하는 방법이다. 새만금 사람들이 조개와 싸우듯이, 장애인이 거리를 온몸으로 기듯, 그는 펜으로 외치며 싸운다. 자기터전에서 살아가는 것이 존재론적으로 최고의 투쟁이다.

 

고병권은 이야기한다. “니체가 딛고 서야 할 마지막 계단은 자기머리라고 했다. 본디 나를 있게 해주는 게 나를 제약하고 짓누르는 법이다. 그러니 생은 고민을 넘어서면 그 다음 단계는 없는 게 아니라 매번 넘어서는 거, 즉 영원회귀의 시험에 드는 거다. “이 시험을 즐겨야 한다. 그래서 충분히 강하지 않으면 철학을 하지 말라고 했다. 똑 바로 보고, 그 안에서 힘을 발견하고 키워야 한다. 가장 슬픈 것에서 명랑성을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

 

참조

 

행복한 인터뷰 고병권 인문학자 - 니체적인, 너무나 니체적인 2008.11.30

 

 

2. 가슴을 무찔러드는 글귀

 

[책머리에]

 

6~7

진리의 식물은 토양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 그 토양이 희소성과 결핍, 적대와 착취를 생산하고 있다면 철학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부정하며 서로를 절멸시키려 할 것이다.” 사람들이 자연이나 본성과 대결하는 곳이라면 그 세계는 빈곤화되고 그들은 더 이상 나누어주지 않을 것이다.” 병든 토양에서 자라는 진리는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상처 입히는 데 사용될 것이다. 한 인간이 병들고 우울했을 때 생각해 낸 모든 진리들이 그 질병의 표현이듯이, 병든 시대가 자랑하는 진리들 역시 그 시대가 지닌 질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의 말처럼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먼저꿀을 많이 모은 꿀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우리는 먼저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압박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일당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그가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은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병들고 우울한 사람이 만들어낸 것은 병든 것이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전에 자신의 병부터 치유하여야 한다. 그것이 최우선이다.

 

천개의 눈, 천개의 길

1. 천개의 눈

2. 천개의 길

3. 천 개의 기원

4. 천 개의 젖가슴

5. 천 개의 주사위

6. 천 개의 화살

7. 천 개의 가면

8. 천 개의 이야기

[1]

1. 아모르 파티 : 삶을 사랑하는 철학 -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1.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

 

31

생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이 부딪힌 과제: 철학을 치료하는 철학, 삶으로부터 나쁜 기운을 덜어주는 철학, 삶으로부터 죄의식을 걷어내는 철학, 이런 것들이 가능할까? 삶을 긍정하는 철학,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가능할까? 불행히도 서구 사유의 기원에는 두 사람의 시체가 놓여 있다.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라는 두 스승의 죽음, 보편적 진리를 위한 죽음과 보편적 구원을 위한 죽음, 서구 사유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리고 있다.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어둠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울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2. 거인들의 웃음소리와 신들의 한탄

 

33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 짐으로써이다. 이 세계와 자기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

 

직장생활을 하며, 출장을 다니며, 나는 항상 기도를 했다. 내 불편함으로 공동으로 일을 함에 있어서 피해를 끼치지 않기를!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나를 만들어 낸 창조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으니 당신이 책임지시오!” 나를 부정함으로써 내 마음은 편해졌다. 모든 것을 신에게 맡겼다. 그렇게 사는 삶이 과연 내 삶일까?

 

37

그리스인들이 고통을 받았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이지 결코 생의 결핍 때문이 아니다. 넘쳐나는 삶에 대한 사랑이 언젠가는 삶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과잉에서 나오는 고통과 결핍에서 나오는 고통은 질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그리스의 비극을 보고 놀라는 것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비극을 활용하는 기술 때문이다.

 

3. 세 개의 죽음 -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 소크라테스의 경우

 

39

디오니소스의 찢겨짐은 세계의 분화와 개별화된 사물들의 탄생을 의미하고, 그가 겪는 고통은 개별화된 사물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상징한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 모든 유한한 존재들은 고유한 개별성과 유한성으로 고통 받는다.

 

40

디오니소스는 개별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거대한 충동을 나타내며 아폴론은 항상 절도와 자기 인식을 잃지 않는 이성을 나타낸다.

 

일상의 한계와 구속을 넘어서는 혼수상태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면 과도함을 막고 절제를 요구하는 것이 아폴론적인 것이다. 니체의 분석에 따른다면 주신 찬가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화해와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41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긍정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과 대비시킨다. 디오니소스 대 그리스도.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자, 삶에 대한 근본적 가르침을 제공한 자, 이 반 기독교적 스승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오른다.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자로서 나에게 삶에 대한 근본적 가르침을 제공한 자는 그리스인 조르바다.

 

42

차이는 죄의식과 관계된다. 디오니소스의 갈기갈기 찢겨진 죽음에는 어떤 죄도 수반되지 않으며 그 죽음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재생의 약속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식을 길러냈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심판과 함께 돌아온다.

 

43

세계와 인생은 아무런 참된 만족도 줄 수 없다. 따라서 세계와 인생은 우리가 집착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인식이 획득되는 것이다. 이것이 비극적 정신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비극적 정신은 체념으로 향한다.”(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디오니소스의 죽음 역시 염세성으로 읽혀지다) 니체는 「자기비판의 시도」라는 새로운 서문을 덧붙여 그리스비극과 디오니소스의 죽음에 들어 있는 긍정성이 쇼펜하우어 식의 염세주의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4. 비극이 상연되는 극장과 심판의 법정

 

5. 미래의 철학자

 

49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써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 받아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삶이 구원되어야 한다면 같은 이유에서 사유 역시 구원되어야 한다. 더구나 순수한 사유의 체계가 거짓 연극에 불과한 것처럼 순수한 생이라는 것도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

 

삶을 구속하는 사유, 사유를 속박하는 삶은 구원되어야 한다.

 

50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국가를 통치하는 철학자의 꿈이지만 현실에서 철학은 국가의 시녀였다. 니체가 볼 때 국가에 대한 철학의 양보는 너무 지나치다.

 

51

역사는 매번 습속이 지배하는 것을 깨뜨려왔다. 니체는 그것이습속의 윤리를 뚫고, 무서운 호위자들이 만들어 낸 대사건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무서운 호위자들이라고 부른 것은광기. 습속과 대결했던 많은 지혜로운 인간들은 광인으로 불렸고, 그들의 생각은 광기로 이해되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고, 존경 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되었던가를 이해하는가? … 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52

니체는 우리의 문명을아픈 것으로 진단하지만 사람들은 니체를미쳤다고 본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미쳤다는 것은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광인으로 불리는 저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정신은 일반적인 구속성과 대결한다.” "그러한 구속을) 참고 견딜 수 없는 정신이야말로 광기의 즐거움이 생겨나는 장소“, ‘탈주자의 장소다.

보편적 가치를 위해 길들여진 두뇌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진 것이 신앙이라면 명령하는 자, 새로운 가치의 발명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유의 정신이다.

 

6. '사랑'의 의미

 

56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필로-소포스. ’지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다.

 

56

철학이 지혜를 사랑하는 방식은 어떤 것인가? 혹시 철학은 그것을 숭배하거나 그것에 예속되어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사랑은 숭배하는 것도 아니고 예속되는 것도 아니다. 숭배나 예속은 잘못된 사랑일 뿐이다.

 

58

사랑을 희생과 연결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철학자들과 바그너가 공유하고 있는 사랑관이다. 그러나 희생은 사랑을 구속으로 만든다.

 

희생은 사랑이 아니다. 자기 만족이다. 상대방에게 무거운 마음의 짐을 주는 불편한 사랑의 표현이다. 희생이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그 희생을 기꺼이 원하고 받아들일 때뿐이다.

 

58~59

삶을 사랑한다는 것. 운명애(amor fati). 니체는 이것을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한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 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내 삶을 받아들이고, 남편이 선물한 아모르파티가 새겨진 반지를 끼고 다니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스스로 건강을 챙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구도 올라왔다.

 

2. 강한 자와 선한 자- 니체의 계보학

1. 계보학 1 - 비판

 

63

도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도덕은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진리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전쟁에 대한 공포나 공포 속에서 치러진 전쟁을 통해서 도덕은 일반성의 극대화를 요구한다. 도덕은 항상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

 

맞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본의 아니게 도덕성을 강조할 때가 많다. 하지만 곧 의문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왜 우리는 도덕적이어야 하나? 도대체 도덕이란 무엇인가?

 

2. 계보학 2 – 탐사

 

65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의 유래와 발생을 묻는 작업이다.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동원된 역사가 아니라, 그 종합의 과정에서 빠져나가거나 휘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계보학자의 일이다. 과거로부터 신성화되거나 현재로부터 정당화된 가치들은 계보학자들이 찾아낸 간극들이나 이질적 충돌, 파편들과 마주하게 된다. 푸코는 계보학자의 탐사 작업을잃어버린 사건들의 해방이라고 불렀다.

 

3. 도덕의 자연사

 

69

도덕학자들로서는 도덕을 자연스러운 것, 본능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싶겠지만 도덕이야말로 인위적인 조작 행위다. 니체의 말대로모든 도덕은 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며, 자연에 대한…… 어느 만큼의 억압이다.

 

동의한다. 도덕은 자연스럽지 않다.

 

72~73

니체는 자신의위대한 스승인 쇼펜하우어와 배타적 관계에 들어선 이유가 도덕의 가치 문제에 있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진실로 모든 철학자들의 일치를 끌어낼 수 있는 근본적 원칙이나 명제를 꿈꾸었던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적 열망도 문제였지만, 결별의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은 그의 도덕관에서 묻어나는 병적인 징후였다. 쇼펜하우어가 주장한 가치 중에서 니체가 특히 문제 삼았던 것은비이기적 가치, 즉 연민이나 자기 희생, 자기 헌신과 같은 본능들의 가치였는데,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미화하고 신성시해서가치 그 자체로 만들어 버렸다. 니체는아주 근원적인 불신, 훨씬 더 깊이 파고드는 회의론이 자신 안에서 고개를 쳐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도덕에서허무에로의 유혹, 종말의 발단, 죽음과 같은 정체, 회고적 권태, 삶을 부정하는 의지, 궁극적으로는 병의 우울한 징표를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허무주의로 나아가는 유럽 문화의 무서운 징조이기도 했다.

 

그렇다. 나도 쇼펜하우어처럼 비이기적 가치, 즉 연민이나 자기 희생, 자기 헌신을 꿈 꾼 적이 있다. 나 어릴 적 최고의 장래 희망은 마더데레사 같은 수녀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춘기를 겪고 성인이 되면서 나는 희생은 곧 원망을 낳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공동체를 통해 봉사 활동을 하고 있지만 비이기적 가치, 즉 연민이나 자기 희생, 자기 헌신의 가치는 추구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즐기며 하려고 한다.

 

4. 강한 자와 선한 자

 

77

귀족적 평가 양식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있다.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억압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선한 자야말로 약한 자이다. … ‘선한 자들은 모두 약하다. 악인이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선한 자들인 것이다.

 

5. 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83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질병은 건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질병의 어떤 적극성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자를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성 때문이다.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

 

84

강자는 능동성이나 적극성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다. 강자의 운동은 긍정에서 시작하며 능동적(작용적)이다. 이에 반해 약자의 운동은 부정에서 시작하며 반동적(반작용적)이다.

 

84~85

약자는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었는가.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니체가 약자의 도덕을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명령하고 창조하는 자에 대한 떼거리의 혐오! 강자는능동성 개념을 박탈당하고……적응이라는 개념이 전면으로 나온다. …… 그것이 바로 반동성인 것이다.”

 

니체가 귀족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을 나누어, 귀족적 도덕은 긍정적이며 노예의 도덕은 부정적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이 처음에는 불편했다. 내 내면에 귀족보다 노예가 낫다라는 비판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귀족, 노예를 벗어나 긍정의 도덕, 부정의 도덕으로 단어를 바꾸어 생각해 보니 니체의 설명이 이해가 갔다.

 

6. 도덕이라는 동물원

 

85

금욕주의적 성직자들은 먼저 병든 자들의 방어자, 의사, 구원자로서 다가온다. 그러나 그들이 병든 자를 지켜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환자들이 병에서 회복되는 것을 막는 것, 다시 말해서 성직자라는 의사들은의사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혀서자신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시킨다.

 

이 말에 화들짝 놀랐다. 진짜 그런가?

 

7. 선악을 넘어서

 

90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3.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1. 헤르메스가 전하는 메세지

2. 진리의 해석학

3. 스핑크스의 눈

 

103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음으로 해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니체

 

107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광학의지(Wille zu einer Optik)”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 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제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4. 가치의 발명

 

113

니체에게 해석은 지배적 가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다. 그것은 인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자유정신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많이 배운 자들의 해석은 너무 노쇠하다. “많이 배운 자들은 모든 격렬한 욕망을 잊어 버렸다.”

창조하는 자를 그들은 가장 증오한다. 표들과 낡은 가치들을 부셔 버리는 자, 파괴자를 그들은 범법자라고 부른다. 선한 자들은 말하자면 창조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115

니체의 해석이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5. 니체에 대한 해석학 - 방법과 스타일의 문제

 

115

해석자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와 생성이다.

들뢰즈는 아주 흥미로운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직업은 철학에 있어 일종의 계간을 통해 사생아를 만들어 버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118

들뢰즈는 더 이상 니체의 텍스트를 분석 수준에서 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니체 사상의 특징이 방법에 있다고 말한다. 즉 니체의 텍스트들을 파시스트적인 것, 부르주아적인 것, 혁명적인 것으로 규정짓기보다 그런 힘이 만나는 하나의 장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니체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가로지르고 있는 혁명적 힘들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것과 만나는 일이다.

 

6. 헤르메스는 해석자였다

 

119

걱정스러운 일은 해석학이 정치의 장에 개입할 때 생겨난다. 현실의 정치는 해석학적 고통을 금방 치유하려고 달려든다. 차이를 고통으로 느끼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검진 없이 정치가들은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운동에 돌입한다.

 

120

우리는 아직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4.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 작은 정치의 시대

 

123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허무주의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어이다.

 

니체는 우리 시대를정치적 영역이 위축된 시대라고 부른다.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국민들의군주적 본능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더 이상 군주적 본능을 가지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주권자, 입법자, 가치의 창안자이기를 그칠 때, 정치 영역은 위축되고 만다.

 

2.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

 

127

니체는 사람들이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그것의 획득을 고려하는 자(그것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자)가 누구인지를 묻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예속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다만 타인들이 평가하는 대로 존재하는 인간들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인정되었던 것, 또는 그들로 하여금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가치도 찾아내지 못한다.”

 

3.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2

 

127

허무주의적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는 잔인한길들이기길러내기가 개입한다. 니체가 저작의 이곳 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쓰고 있는길들이기길러내기라는 표현은 가치의 습속화를 통한 근대적 정치 주체의 생산을 분석함에 있어 매우 유용하다.

 

127~128

니체의 근대 정치에 대한 비판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빠져서는 안될 하나의 요소가 더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두 측면을 매개해 주는 새로운 우상, 즉 국가에 대한 설명이다. 국가는 근대의 정치적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129

국가는 바로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공통의 힘으로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실체다.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로 안전을 위해 인위적인 계약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 계약은 다시 국가에 의해 보증된다. 이것이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의 이동이며, 정의와 법의 탄생이다.

 

니체가 말하는 국가는 전쟁의 종식이 아니라 전쟁의 지속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군사적 수호신의 끊임없는 재생산을 목표로 하는 국가와 전쟁의 종식을 목표로 하는 국가는 전혀 상반된 성격을 갖는다. 결국 근대의 정치에서 나타나고 있는 국가는전쟁 공포의 확산에서 생겨난 후자의 국가다. 칼을 든 무시무시한 국가를 외치는 홉스에게서 전쟁에 대한 공포를 읽어 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133

자유로운 개인을 떠드는 자유주의에 진정으로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니체는 자유주의에서자유로운 인격은 볼 수가 없으며,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비겁하게 정체를 숨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뿐이다. 개성은 내면적인 것으로 움츠려 들어가, 밖에서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자유로운 개인이란 특이성을 갖추지 못하고 보편성 아래서 단지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개별자들인 셈이다.

 

135~136

니체는 사회주의를 루소와 관련시킨다.

니체는 루소의 사상에서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발견하는데 이것은 사회주의 비판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 두 가지 특징이란 바로 인간의 자연적인 선한 본성을 찾아 나서는 형이상학적 태도와 사회에 대한 원한의 정신이다. 그는사회주의자들이 지금까지의질서가 폐지되어자연적 충동이 해방되었으면 하고 기대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사회의 토대를 세우는 데 어떤 영감을 주는 진정성이나 자연적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혁명이 성공하면 아름다운 인간성의 자랑스런 신전이 솟을 것이라는위험스런 꿈은 적대적 변증법을 통해 유토피아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망에 다름 아니다. 니체는 이것을선량한 원시인의 권리 찾기 운동이라고 말하고 형이상학적 운동이 그렇듯이 이 운동도 종국에는기진맥진한사회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136

사회주의자들은 문화나 제도, 도덕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그들은 오직 소유물의 분배만을 본다. "사회주의자들은 소유물의 분배가 과다한 불종정과 폭력의 결과임을 지적하고 부당한 기반 위의 구축물에 대한 의무를 전체적으로 거부하는데, 이때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개개의 것만을 보고 있다

 

137

니체는사회주의가 원하는 국가가 달성된다면 생성의 강한 에너지는 파괴될 것이라고 말하고 그때 국가는 새로운 생성적 힘을 상실하고 허무주의적 형태를 띠게 될 것이라고 하였따. 그래서 니체는 현대민주주의를국가의 몰락에서 나온 역사적 형태라고 말한 것이다.

민주주의는나태함과 피로, 약함의 해방이다. 그렇다고 해서 니체가 국가의 부흥을 외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아마도 나치즘처럼) 수동적 허무주의인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에 대항하여 국가나 민족의 이름을 강화하려는 시도들도 나타나지만, 니체에게는 국가란 항상거짓 신일 뿐이다.

 

138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능동성의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4. 길들이기

 

141~142

니체는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고도의 권위를윤리라고 보았는데, 윤리는 관습에 의하여 규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니체는 비윤리적이라고 비난 받는 것들에 주목했는데, “비윤리적이라고 비난 받는 것들은 개인적인 것, 자유로운 것, 제멋대로인 것, 길들여지지 않은 것, 예측되지 않은 것, 계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런 점에서 훈육의 대상으로 삼았던 비합리적 힘으로서의 신체는 단순히(flesh)'의 의미로 제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충동이나 욕망처럼 잘 길들여지지 않고, 예측되지 않으며, 계산을 방해하는 힘을 가리키는 것이며, 사회체 안에 존재하는 계산되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은 세력들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142

체제는 자신의 안정을 위해인간을 가능한 한 재빨리…… 시대의 목적을 향하여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니체는 이훈련의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우선사회나 국가 같은 개체가 개개인을 굴복케 하여 고립에서 끌어내고 하나의 단체에 정렬시킬 때,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기초가 정비되고, 이것이 익숙해지면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하여 그것이 본능이 되도록 한다.” 하나의 작업이 있어야 하고, 그 이후에 본능적으로 ‘미덕’으로 숭상되어야 한다. 첫 번째의 작업이길들이기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 작업은길러내기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143~144

길들임의 작업이 끝나면 길러내기의 작업, 즉 재생산의 작업이 시작된다. 강제된 덕목들은 이제 자연스러운 본능이 되어야 한다. 길들이기의 주요한 수단이 군대였다면, 길러내기의 주요한 수단은 학교이다.

 

144~145

길들임과 길러냄의 작업은 형이상학적 가치의 변증법적 운동과 함께 허무주의 운동의 지배사를 이룬 양 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각 체제에서 선언된 가치들을 능동적으로 가치 평가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보다는, 그것들을 허위적 능동성으로 내면화시키고 그것에 무의식적으로 복종하도록 함으로써 허무주의는 하나의 지배를 이룰 수가 있었다.

 

5. 아곤의 정치

 

147~148

그리스 사회는 지나친 천재의 출현이 경쟁 자체를 방해한다는 것을 이해하고도편 추방이라고 하는 제도를 두었다. 그러나 우리는 도편 추방을 사회의 조절장치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도편 추방은 자극의 수단이고 천재에 대한 보호의 수단이라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이것은 일인의 지배를 혐오하며 그것이 지닌 위험을 경계하는 제도이지만, 천재를 죽이는 제도가 아니라 오히려 천재를 보호하고 더 자극하기 위해서 제2의 천재를 만들어 내는 수단이다. 다시 말해 이 제도의 핵심은 천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천재를 여럿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

 

5.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1 - 자연학 + 윤리학

1. 초월적인 것의 죽음과 우주론 - 원자론의 경우

 

154~155

원자론은 세계에 대한 초월적인 것의 침투를 막는다.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초월적인 영역에만, 그것도 이 세계에는 무관심한 채로 있어야 한다. 원자론자들은 세계가원자와 허공뿐이라고 말한다. 이 세계는 원자들의 영역이므로 신이 이 세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원자로 구성되든지, 아니면 허공으로 있든지 (실존하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이다. 따라서 원자론은 신의 죽음에 대한 실질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2. 왜 원자가 아니라 힘인가

 

159

니체는 원자를 힘으로 대체한다. 힘의 첫 번째 속성은 그 자체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다른 힘이 없다면 힘은 존재하지 못한다. 하나의 힘이 정의되기 위해서도 복수의 힘이 전제되어야 한다.

 

159

힘의 두 번째 속성은표현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161

힘의 세 번째 속성은 정지되어 있는 양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멈추어 있는 힘은 없다.

 

3. 힘의 질 - 능동과 반동

 

168~169

'부정의 의도아래서 반동적 질을 가졌던 힘들이강화의 의도아래서는 능동적 힘으로 전화된다. 금욕이나 단식도 부정의 의도 아래서는 욕망을 억누르는 도덕적 통제의 수단이지만, 강화의 의도 아래서는 신체를 건강하게 만들고 맛을 음미하는 능력을 배가 시켜 주는 수단이 된다. 결국 우리는 힘들의 질적인 차이가 그 내면에 있는 의지나 의도, 다시 말해서권력의지의 차이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문제는 권력의지의 차이이다.

 

4. 권력의지에 대한 오해

 

172~173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욕망에 대한 또 다른 정의가 있는데, 그것은 욕망을생산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때 욕망은결핍이 아니라넘침이다. 욕망을 그 자신이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즐거움과 관계시키는 것이다. 결핍된 자의 초조함과 넘치는 자의 즐거움은 너무도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항상 이렇게 물었다. “나는 개개의 경우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여기 만들어져 있는 것은 기아가 원인인가, 과잉이 원인인가?”

 

174

니체는의지명령이므로 본래 주인과 관계되는 것이지만, 어떻게 노예나 약자에게도 관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그는 이제 허무주의 역시 하나의 권력의지이며 지배의지라고 말한다. 허무주의자들은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 말을 믿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실제로 무언가를 원하지 않을 때조차도 그 권력의지는 무언가를 원하고 있으며 상황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이다. “허무주의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는무의 의미혹은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무화하려는 의지이다.

 

5. 권력의지의 윤리학과 권력 느낌

 

175~176

니체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표현하는 용어들은 다양하다. …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은긍정과 부정이다. 긍정은 디오니소스의 정신이며, 그리스 예술의 정수이고, 예수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이기도 하다. 반대로 부정은 삶을 비난하는 노예의 것이고, 심판을 불러오는 사제의 것이며,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포섭하려는 변증법의 것이다.

 

176

부정의 권력의지는 행위에 대한 금지나 부정, 단념을 조장한다. 부정의 권력의지는 법이나 제도, 관습과 도덕에서 자신의 훌륭한 도구를 발견한다. 긍정의 권력 의지는 행위 자체를 촉진시키며, 더욱이 지속적 행동을 강조한다.

 

177

마주침의 순간에 작동하는 권력의지가 어떤 것이냐의 문제는강하게 되느냐(강자의 생성)’, ‘약하게 되느냐(약자의 생성)’를 결정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곧바로 윤리 문제를 발생시킨다. 어떤 것은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것인가? 선악이라는 도덕의 문제를 넘어서좋음나쁨이라는 윤리의 문제로 한 힘은 성장하기 위해 다른 힘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사실상 해석은무엇인가를 지배하여 주인이 되기 위한 수단이다. 어느 것이 해석하는가? “권력의지가 해석한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해석이고 평가이다. 그러나 니체는 여기에 다시 하나의 해석과 평가를 제시한다. 해석에 대한 해석, 가치 평가에 대한 가치 평가.

 

6.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2 - 자연학 + 윤리학

1.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

 

184

니체는 생성의 세계를 도덕적 해석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한다. 생성의 세계는 무구(innocence)하다! 생성을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186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2.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188

세계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이며,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고, 전체로서는 그 크기를 바꾸는 일이 없는 청동처럼 확고한 양이면서도 계속해서 변화한다. …영원히 회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서, 어떤 포만이나 권태, 피로도 모르는 생성으로서, 자기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와 영원한 자기 파괴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191

영원회귀는 동일한 반복을 확인하는 문제가 아니라생성을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생성의 반복은 죄지은 자들의 운명이기는커녕 삶의 경이로움이며 그 자체로 삶의 구원이다. 생성을 긍정하는 것은 권력의지의 최고의 표현이다.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 이것이 최고의 권력의지다.” 존재하는 것은 생성뿐이다. 그리고 생성만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영원회귀는 이러한 생성의 반복을 의지하는 것이다.

생성의 반복을 의지한다는 점에서 영원회귀는 또한 시간을 구성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시간이란 생성들을 통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192~193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하지 않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전적으로 긍정의 의지 편에서 서서 부정의 의지와 대결한다.

 

3. 반복의 두 경우

 

195

생성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만큼이나 시간 역시 생성을 필요로 한다. 깨달음의 시간은 차라투스트라의 새로운 생성, 새로운 변신을 필요로 한다.

생성 즉 시간을 긍정하기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무엇보다도 과거와 대면해야 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의욕하고 있다면 그는 먼저 이미 지나간 시간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하지만 과거는 의지하는 자들에겐 가장 큰 난관이다. 어느 누구도 과거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의지는 이미 행해진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력하다.

 

4. 긍정을 부르는 긍정

 

203

'보다 높은 인간'은 모든 가치의 파괴가 일어나는 지점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가치 판단에서 나타날 수 있는 위험을 피하고자 했다. ‘최후의 인간도 새로 태어나기를 원한다면자신을 스스로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새로운 자기를 만들려는 자는 기존의 자기를 버려야 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205

긍정에 들어 있는 영원회귀의 원리가 나타난다. 긍정은 적극적으로 다음의 긍정을 의지한다. 긍정이 멈추는 순간에 부정은 승리한다.

 

5. 차이의 놀이와 회귀의 비밀

 

208

우연이란 차이가 모든 것 속에 분포된 상황이다. 필연적인 법칙으로부터 일탈하는 흐름이 우발적 사건을 만들어 낸다. 우연은 창조적 힘이다. 우연은 카오스와 미로를 즐기는 정신이다. 미로나 카오스는 길이 없음이 아니라 길의 넘침이다. 이로써 생성의 공간이 열린다.

다수성과 운명애, 우발성은 긍정의 권력의지의 특징이며 영원회귀의 방식이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부정의 권력의지보다 위계가 높다.

 

이제 모두에게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바로 선택의 문제, 실천의 문제다. … 긍정의 권력의지는 항상 회귀하지만 너 자신이 회귀할지는선택의 문제.

 

7. 인간 -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1. ''

 

211

니체는 모든 것을, 심지어 이 혹성 전체가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믿는 인간들의 오만과 허영심을 꼬집는다. 그에게 인간 중심주의는 한 편의 코미디에 가깝다. 자신을 세계 모든 존재들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개미나 모기와 다를 바 없다. 개미나 모기도 자기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볼 것이다. 인간은 마치 신이 자신들을 위해 세계를 창조한 것처럼 믿고 있지만만약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인간은신의 원숭이로 창조되었을 것이다.”

 

2. 진화와 변신

 

216

니체는 그 운명의 날에 등장하게 될 존재의 이름도 정해두었다. 바로 초인이다. 초인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 인간의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다.

 

221

만약 초인이 생성(변신)의 힘이라면 그것은 긍정의 권력의지를 내면적 질로 가지고 있으며 영원회귀를 통해서 존재한다.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무엇이 인간 종족을 계승해야 하는가가 아니다. 인간이야말로 하나의종국적 존재이다.

 

3. 진희 죽음과 인간의 몰락

 

211

인간이 몰락하고 초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신이 죽었다는 복음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복음을 전하는 자는 광인이다.

 

223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제야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성시킨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광인은 신이 죽은 후에도 새로운 삶을 목격하지 못한다. 그는 신의 죽음이라는 이 기쁜 소식에 춤추는 단 한 명이 인간도 만나지 못한다.

 

224

신이 시체로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도 새로운 삶의 생성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니체는 이런 유의 인간을최후의 인간이라고 불렀다. 최후의 인간은 신앙이 사라진 시대에무신앙을 신앙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다. 그들은지배하는 것도 복종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둘 다 너무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4. 보다 높은 인간들

 

230~231

나귀제는 모든 인간적인 것의 본질을 폭로해 버렸다. 낮은 인간이든 보다 높은 인간이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이다. 그들은 신의 죽음이 만들어준 생성의 공간에서 반동적으로 뒷걸음질친다. 신앙을 가진 자는 다른 신이라도 찾기를 바라고, 여행에 지친 자는 그만하기를 바라며, 확실성을 찾는 자는 그것을 신으로 생각함에 주저함이 없다. 그들은 모두 신앙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초인과 인간이 갈라진다. 삶을 진정으로 긍정하는 것은 보존하는 것인가, 극복하는 것인가? 자기 보존과 자기 극복, 보다 높은 인간들은 모든 가치 파괴가 일어나는 점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은 미래로 가는 여행을 멈추고 싶어 한다. 그들은 과거를 되살리고 싶어한다. 차라투스트라의 탄식을 들어보자.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231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5. 높이와 웃음, 그리고 춤

 

231~232

왜 보다 높은 인간들은 변신에 실패했을까? 그들에게는 초인과 영원회귀가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에게 의존하려 했다. 그들은 초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가지, 즉 놀이와 웃음과 춤을 몰랐다.

 

232

보다 높은 인간들에게 차라투스트라가 권유하는 것도 그것이다. “그대들 자신을 넘어서 웃는 법을 배우라!

 

23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춤추는 것을 이해하는 신만을 믿겠다.” 차라투스트라의 신은 디오니소스다. 초인을의욕하는 자차라투스트라가 영웅의 모델이라면, 초인으로존재하는 자디오니소스는 생성의 신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놀고 싶어하는 자이고, 웃고 싶어하는 자이고, 춤추고 싶어하는 자라면, 디오니소스는 놀이 속에 존재하는 자이고, 웃음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춤으로 존재하는 자이다. 디오니소스는생성 속으로 뛰어든 존재의 혼이다.

 

234

디오니소스는 긍정의 신이며 영원회귀하는 신이다. 차라투스트라에게는 디오니소스를 만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 디오니소소는 항상 회귀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그를 선택적으로만 만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에게는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하다! “우리는 귀를 구한다보다 높은 인간들에게는 이 신호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귀가 없다. 『차라투스트라』의 마지막은신호로써 끝난다. 디오니소스가 비로서 신호를 보낸 것이 아니라 차라투스트라가 비로소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민감한 신체를 얻는 데 성공한 것이다.

 

8.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1. 가면의 철학

 

238

그는 하나의 정체성을 쉽게 내던져 버렸다. “사람은 불멸하기 위해서 여러 번 죽어야 한다.” 니체의 여러 이름들은 다음과 같은 영원회귀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2. 비극의 시대에서 냉소의 시대로

3. 화약 냄새가 사라진 전투

 

246

<차라투스트라> 1883년부터 84년 사이에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니체의 변신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변신의 비밀을 담고 있다.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사도로서 니체를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책이다. 또한이제까지라고 말해진 모든 것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의아니오를 말하고 그것을행동하는 차라투스트라가 그럼에도 어떻게 부정의 정신의 반대일 수가 있는가를 드러낸 책이다. 니체는 이 책이 완성된 시각이 바그너가 베니스에서 죽은 시각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공표했다. 바그너는 제국에 대한 복종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의 메시지도 분명하다. 제국적인 것에 대한 반대, 국가와 교회라는 우상에 대한 반대!

 

246~247

그 책의 끝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의신호를 알아차린다.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듣는 아리아드네”, “망치를 든 파괴자이자, “춤추는 무희이며,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자, 차라투스트라!

 

4. 모든 가치의 전환

5. 다시 떠나는 여행자

 

252

니체의 여행자가떠난다고 했을 때, 그는 공간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다. 그가 떠나는 것은 지배적인 질서이며 지배자의 코드이다. 외부자가 차지하고 있는외부라는 영토는 더 이상 공간적인 외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외부란 계산되지 않은 힘들의 영역, 지배의 그물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힘들이 영역이다. 그 힘들은 지배적 가치의 외부에서 지배적 가치 속으로 파고든다. 내부이지만 잡히지 않는 내부, 그것이내재하는 외부이다. 헤겔을 뚫고 들어온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를 깨뜨리는 차라투스트라, 바그너를 깨뜨리는 비제. 여행과 탐사는 그치지 않는다. 가면 놀이는 멈출 줄 모르고, 변신은 영원성을 획득한다.

 

253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2]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1. 근대라는 탈주술화된 주술

2. 근대인의 탄생

 

260

확실히 베버는 자본주의를 자본이나 기술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인간의 탄생과 관련시켜 이해했다. 베버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인간(근대인)은 전해 새로운 종의 인간이다.

 

263

즐기고 낭비하기 위해서 돈을 모으는 것과 신을 영광되게 하려는 소명에서 돈을 모으는 것의 차이가 분명해진다. 근대 이전에도 경제적 과정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부기방식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근대와 그 이전의 에토스는 완전히 달랐다.

 

3. 관료제 기계

 

264

근대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인간을 욕망과 충동에 휩쓸리는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관리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모색했다. 이들에게 욕망과 충동은 자신들의 소명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었던 것 같다.

 

267

우리는 기계로서의 관료제가 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은 사라진다. 생산하는 것은 관료제로 불리는 기계다. 인간 역시 기계의 생산 작업에 동원되는 부속품일 뿐이다. 소명 의식에 불타던 근대인은 언제부턴가 주어진 절차와 규정에 의거해서 수동적으로 일 처리에 동원되고 있는 암울한 근대인으로 돌변해 버렸다.

 

268

처음엔 시간표든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4. 신체 길들이기, 신체 길러내기

 

270

베버는 사람들의 생활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분할하고 그것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것을 훈육이라고 개념화했다. “훈육은 모든 것을 계산 가능하도록 그리고 공통의 명분과 합리적으로 의도된 목표에 헌신하도록, 대중들의 육체와 정신을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다.”

 

274

훈육의 최고 목적은 능동적 자제다. 특히 능동적 검열과 관련해서 일기가 수행한 기능은 놀랍기까지 하다. 원래 일기는 교회 지도자들이 여신도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하루동안 행한 일들을 적어오게 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하루의 일들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반성하고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약속을 하는 수단이 되었다.

약속하는 신체는 더욱 큰 계산 가능성을 보장하고 더 큰 사회적 안정을 가져온다. 약속은 미래 행위를 고정시키는 일이고 그 사이에 일어날 수 잇는 변동을 최소화시키는 일이다. 이제 통제는 소극적인 것에서 적극적인 것이 되고, 수동적인 것에서 능동적인 것이 된다. 베버가 말하는 철창이 왜 그렇게 강력한 것인지도 이로써 분명해진다. 그것은 제 스스로 걸어 들어간 내적인 감옥이기 때문이다.

 

5. 베버의 정치학

 

277

베버는 바람직한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이러한 내적 거리라는 점을 주장했다. 정치인에게는 소명에 대한 열정과 함께 뛰어난 목측능력이 요구된다. 목측능력이란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고 그것에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 내적인 거리를 두는 것이다. 왜냐하면정치란 머릴 하는 것이니 신체나 정신의 다른 부분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이 불모의 흥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정신을 강하게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며 이것은 거리를 두는 습관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적 거리 두기의 능력을 갖춘 정치인은 일상 세계로부터도 자신을 분리해서 사고할 줄 안다.

 

6. 베버 전략의 딜레마

 

282

근대가 맞닥뜨린 가장 큰 문제를영혼의 상실로 보고 있는 베버는 그 해결책을 영혼의 회복에 두는 것 같다. 그러나 근대인의 재정신화의 작업은 관료제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피폐한 도시인이 꿈꾸는 원시적 자연에 대한 동경처럼 보인다.

 

284

베버가 멈추어 선 곳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반성하는 합리성보다는 합리성 자체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285

스피노자는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이해했다. “자연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나 욕망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금지하지 않았다.” 초월적인 가치를 찾아 나설 것이 아니라, “아무리 작더라도 우리 자신이 원인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욕망과) 능력에서 시작해야 한다.

 

286

니체는내적인 거리거리의 열정 (pathos of distance)’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거리의 열정이란 신체에 내재하고 있는 힘과 능력을 긍정하고, 그 힘과 능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차이 (거리)를 생산해내는 열정이다. 거리의 열정을 가진 자들을 니체는 가치의 신봉자가 아니라 가치의 생산자라고 말했다. 초월적인 존재나 신성한 가치를 신봉하기 위해 제 자신을 합리적 기계 속에 던져 버리는 프로테스탄트들과 달리내적인 거리거리의 열정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제 스스로가 이용할 가치를 생산해 낸다.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1. 문제제기

 

292

자유주의자들이 위기를 차이들의 아나키적 전쟁상태에서 찾았다면, 공동체주의자들은 위기를 서구 자유주의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병리적 상태에서 찾았다. 니체가 허무주의라 명명했던 서구 사회의 현실, 바로 주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율적 능력을 소진하며, 그 동안 시민들을 키워왔던 전통적인 공동체들이 붕괴되는 현실이 위기의 원인이다. 위기는 전쟁이 아니라 질병에서 온다!

 

2. 근대 국가의 두 얼굴

 

293

68혁명 이후 케인즈주의의 위기가 가시화되자, 그것이 초래한 재정적자와 비효율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면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신자유주의. 그러나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자유주의에서처럼 약화되지 않는다. 군사적 지출의 확장이나 경제적 조정비용의 확장은 물론이고 가치와 도덕적 구조물에 대한 위기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현대 국가의 또 다른 중요한 얼굴이며, 헤겔로 대표되는 근대적 국가의 이상이기도 하다.

 

295~296

아마도 근대 정치철학자들이 만들어 냈던 국가의 모습들은 다양하게 해체되어 현대적 맥락에서 재구성될 것이다. 그럼에도 가치들의 전쟁에 대한 공포로부터 도출한 홉스적 국가와 자유주의 국가론의 병폐를 지적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던 헤겔적 국가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사회상태 외에는 항상 모든 사람에 대한 모든 사람의 전쟁이 존재한다.” 이 무시무시한 선언은 모든 정치적 질문을그렇다면 어떻게 평화는 가능하나로 돌리게 만들었다. 홉스의 답은 분명하다. “전쟁은 위압적 힘이 없는 한 종식될 수 없다

 

299

전장생태, 가치들의 아나키 상태에 대한 공포로부터 그 역할을 핵심적인 것으로 축소하는 국가와 전혀 다른 얼굴은 한 국가는 헤겔의 인륜적 실체로서의 국가이다. 인륜이라는 말은 막연한 보편성을 가정하는 도덕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도덕이란 현존하지 않는 것을 실현해야만 하는 어떤 의무를 부여하는 반면 인륜성은 실정성을 갖는 것으로 그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구체적인 도덕적 의무를 갖게 하는 것이다.

 

303

헤겔에 따르면 우리는 가족(혼인의 신성함)과 시민사회(공동체의 소속감)에서 주어지는 긍지를 통해 실체적 보편자의 목적과 현실태도로서, 공공생활의 목적 및 국가의 체제와 헌법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차이의 문제에 대한 중요한 인식을 제공한다. 각 공동체들은 고유한 차이들을 갖지만 그 고유성은 국가의 분절로서 상대적인 것이다. 그때의 차이는 보편자로서의 국가의 한 계기에 불과하다. 국가는 두 계기를 내포하는 무한한 형식을 갖는다. 하나는 자기의식이 대자적으로 자기 내적 존재에까지 이르는 무한한 구별의 계기이며, 다른 하나는 교양 속에 깃들어 있는 보편성의 형식, 즉 정신이 그를 통하여 법률과 제도, 다시 말하면 사유가 뒷받침하는 의지 속에서 유기적 총체성으로 객관화되고 현실화되는 것이다.

 

3. 자유주의와 차이의 문제

 

305~306

차이들은 중첩의 체계 속에서 반성적 평형을 향해 나아간다. 롤스에게서 분배와 관련된 차이와 갈등은 기본적 자유의 원칙에 자리를 양보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분배와 관련된 평등의 문제가 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확인하기도 어렵고 중첩적 이해를 끄집어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본적 자유들(양심의 자유나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등)에 대해서 우리의공적 문화는 쉽게 동의를 끌어낼 수 있다.

 

4. 공동체주의와 차이의 문제

 

309

전쟁이 자유주의자들에게 공포스러운 것이었다면, 공동체주의자들에게 문제는병적 상태였다. 대중들의 소외, 문화적 다양성의 파괴, 전통적 가치관들의 해체와 같은 병리적 상태가 공동체주의자들이 인식하는 문제다. 서구의 자유주의는 가치들의 투쟁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없는 자유주의적 무능력 때문에 위기에 처한다는 것이다.

 

313

우리는 차이의 문제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동질화를 비판하고 차이의 소멸을 우려했던 공동체주의자들에게서 일종의 정치적 전체성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은 분명히 부분적이고 지역적인 공동체들을 활성화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그것만이 사회적 응집력을 확보하는 길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차이들은 도덕적으로 놀라운 응집력을 보인다. 차이에 대한 강조가 응집력을 갖춘 강한 국가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헤겔의 국가론에서 살펴본 바 있는국가의 윤리적 기초로서의 공동체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5. 차이의 아상블라주를 향한 전망

 

317

아렌트의 그리스 정치에 대한 분석은 죽은 것이차이가 아니라정치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그리스 사회에서 정치적 영역이라고 불리는 공적 영역은차이를 생산하는 영역이다. 차이가 배제된 중첩의 영역으로서 공적 영역을 바라보는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차이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고자 하는 공동체주의자들의 시각과도 전혀 다르게 공공 영역은 차이를 생산함으로써 유지되고, 생산된 차이가 만들어 낸 다양성에서 힘을 얻는다.

 

320

상식과 보편성을 발견하기보다 차이와 특이성을 발견해내는 것은 결코 정치에 생소한 것이 아니다. 낯선 것은 정치적이지 않은 것에 정치가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에겐 정치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멀리 떨어진 것도 없다.

 


3. 내가 저자라면

 

신은 죽었다.”

 

니체의 첫 인상은 불경스러웠다. 가톨릭이 모태 신앙인 여자와 남자가 만나 성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다. 게다가 나의 첫 장래 희망은 마더 데레사와 같은 수녀가 되는 것이었고, 남편의 장래 희망도 신부였다. 우리는 그렇게 같은 종교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랐고, 비슷한 꿈을 꾸었으나 그 꿈은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삶 속에서 사소하게 짧은 순간, 수녀로서 신부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아모르 파티

 

니체의 첫 인상은 말끔한 개인주의자였다. 공동체의 선보다는 개인의 취향을 우선시하는 신세대후배 대학생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고병권의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편협적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말로만 다양성을 내세울 뿐 난 세상을 한 개의 눈, 한 개의 길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니체는 한 개의 눈만 존재하는 내 얼굴을, 한 개의 길만 생각하는 내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하지만 어느덧 니체의 논리에 빠져들고 있었다. 내가 변경연의 문을 두드린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지 않나?

 

신은 듣고 있나? 불편한 몸으로 직장생활을 하며, 출장을 다니며, 나는 항상 기도를 했다. 내 불편함으로 공동으로 일을 함에 있어서 피해를 끼치지 않기를!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나를 만들어 낸 창조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으니 당신이 책임지시오!” 한 때는 나를 부정함으로써 내 마음은 편해진 적도 있었다. 모든 것을 신에게 맡겼다. 그렇게 사는 삶이 과연 내 삶일까?

 

그렇다. 나도 쇼펜하우어처럼 비이기적 가치, 즉 연민이나 자기 희생, 자기 헌신을 꿈 꾼 적이 있다. 나 어릴 적 최고의 장래 희망은 마더데레사 같은 수녀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춘기를 겪고 성인이 되면서 나는 희생은 곧 원망을 낳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공동체를 통해 봉사 활동을 하고 있지만 비이기적 가치, 즉 연민이나 자기 희생, 자기 헌신의 가치는 추구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즐기며 하려고 한다.

 

니체의 예상치도 않은 가격으로 아직도 멍하다. 하지만 곧 니체에게 빠져들 것이다.

 

구성과 목차

 

[책머리에]

천개의 눈, 천개의 길

1. 천개의 눈

2. 천개의 길

3. 천 개의 기원

4. 천 개의 젖가슴

5. 천 개의 주사위

6. 천 개의 화살

7. 천 개의 가면

8. 천 개의 이야기

[1]

1. 아모르 파티 : 삶을 사랑하는 철학 -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1.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

2. 거인들의 웃음소리와 신들의 한탄

3. 세 개의 죽음 -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 소크라테스의 경우

4. 비극이 상연되는 극장과 심판의 법정

5. 미래의 철학자

6. '사랑'의 의미

2. 강한 자와 선한 자- 니체의 계보학

1. 계보학 1 - 비판

2. 계보학 2 - 탐사

3. 도덕의 자연사

4. 강한 자와 선한 자

5. 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6. 도덕이라는 동물원

7. 선악을 넘어서

3.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1. 헤르메스가 전하는 메세지

2. 진리의 해석학

3. 스핑크스의 눈

4. 가치의 발명

5. 니체에 대한 해석학 - 방법과 스타일의 문제

6. 헤르메스는 해석자였다

4.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 작은 정치의 시대

2.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

3.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2

4. 길들이기

5. 아곤의 정치

5.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1 - 자연학 + 윤리학

1. 초월적인 것의 죽음과 우주론 - 원자론의 경우

2. 왜 원자가 아니라 힘인가

3. 힘의 질 - 능동과 반동

4. 권력의지에 대한 오해

5. 권력의지의 윤리학과 권력 느낌

6.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2 - 자연학 + 윤리학

1.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

2.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3. 반복의 두 경우

4. 긍정을 부르는 긍정

5. 차이의 놀이와 회귀의 비밀

7. 인간 -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1. ''

2. 진화와 변신

3. 진희 죽음과 인간의 몰락

4. 보다 높은 인간들

5. 높이와 웃음, 그리고 춤

8.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1. 가면의 철학

2. 비극의 시대에서 냉소의 시대로

3. 화약 냄새가 사라진 전투

4. 모든 가치의 전환

5. 다시 떠나는 여행자

[2]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1. 근대라는 탈주술화된 주술

2. 근대인의 탄생

3. 관료제 기계

4. 신체 길들이기, 신체 길러내기

5. 베버의 정치학

6. 베버 전략의 딜레마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1. 문제제기

2. 근대 국가의 두 얼굴

3. 자유주의와 차이의 문제

4. 공동체주의와 차이의 문제

5. 차이의 아상블라주를 향한 전망

 

목차를 조밀하게 짜여진 페르시안 산 카펫처럼 단단하면서도 아름답다. 저자 고병권이 왜 니체주의자인지 보여준다.

 

감동적인 장절

 

6~7

진리의 식물은 토양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 그 토양이 희소성과 결핍, 적대와 착취를 생산하고 있다면 철학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부정하며 서로를 절멸시키려 할 것이다.” 사람들이 자연이나 본성과 대결하는 곳이라면 그 세계는 빈곤화되고 그들은 더 이상 나누어주지 않을 것이다.” 병든 토양에서 자라는 진리는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상처 입히는 데 사용될 것이다. 한 인간이 병들고 우울했을 때 생각해 낸 모든 진리들이 그 질병의 표현이듯이, 병든 시대가 자랑하는 진리들 역시 그 시대가 지닌 질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의 말처럼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먼저꿀을 많이 모은 꿀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우리는 먼저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압박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일당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그가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은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58~59

삶을 사랑한다는 것. 운명애(amor fati). 니체는 이것을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한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 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63

도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도덕은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진리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전쟁에 대한 공포나 공포 속에서 치러진 전쟁을 통해서 도덕은 일반성의 극대화를 요구한다. 도덕은 항상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

 

69

도덕학자들로서는 도덕을 자연스러운 것, 본능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싶겠지만 도덕이야말로 인위적인 조작 행위다. 니체의 말대로모든 도덕은 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며, 자연에 대한…… 어느 만큼의 억압이다.

 

85

금욕주의적 성직자들은 먼저 병든 자들의 방어자, 의사, 구원자로서 다가온다. 그러나 그들이 병든 자를 지켜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환자들이 병에서 회복되는 것을 막는 것, 다시 말해서 성직자라는 의사들은의사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혀서자신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시킨다.

 

보완점

 

니체에게 가격 당한 나머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베버를 만났다. 왜 저자는 이 책의 2부에 베버- 근대 허무주의의 비판의 딜레마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을 삽입했을까? 니체 때문에 고민이 많아졌는데 또 베버라니.

 

저자 고병권은 김진균 교수의 격려와 도움 속에 니체와 베버를 혼합하여 논문을 작성했고, 예상대로 교수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으나 최저점으로 논문이 통과됐다. 무작정 좋아하는 걸 따라오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 같다. 학문적 사유의 계통 없음을 무기로 강단 있게 돌파하여 훗날 교수들에게사회학의 지평을 넓혔다는 칭찬까지 들었다.” 고 밝혔다.

 

교수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었다고 하니 나의 혼란은 당연한 듯 보인다. 사회학의 지평을 넓힌 그의 학문적 사유의 계통 없음에 박수를 치면서도, 좀 더 쉬운 언어로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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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5 09:57:37 *.144.167.148

우와~~~ 저자에 대해서 궁금했던 점이 있었는데 앨리스의 글에서 확 풀리는구먼.

이런 자료는 어디서 조사하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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