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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23일 11시 57분 등록

1.제목: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 출판사: 소명 출판

 

2.저자 : 고병권 (1971~)

 

고병권은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니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화폐'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니체가 말한 '긍정의 힘'이 그의 신체에 각인되어 있는지 그는 항상 웃고 있는다.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으며, 친구들과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게 그의 '행복론'이다.

 

현실에서 그는 자주 분노한다. 그의 분노의 대상은 주로 국가, 권력, 자본, 무기력 같은 것들이다. 친구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게 하고, 친구들을 ''에서 내모는 그것들에 그는 눈 감거나 고개를 돌린 적이 없다. 삶에서 그것들을 '추방' 시키기 위해 그는 오늘도 친구들과 함께 웃고, 공부하고, 투쟁한다.

 

최근의 운동 속에서 혁명이나 코뮨주의를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는, 연구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활동하고 있다

 

고병원에게 철학은 철학은 내가 어디까지 나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일깨워주는 앎이다.

앎에는 두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정보와 지식을 축적하는 정보차원의 앎과 다른 하나는 깨우침, 깨달음, 일깨움이다. 첫 번째 차원은 어떤 학문이나 다 해당된다, 두 번째 차원의 일깨움, 다르게 보는 경험이 철학이라면 철학은 내가 어디까지 나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지를 일깨워주는 앎이다.“

 

왜 고병권은 니체를 고집하는지 인터뷰 기사 중 고병권이 니체한테 배운 두가지를 얘기한 것이 있다.

 

니체한테 고마움을 갖고 있어요. '어떻게 그때 내가 그런 책을 읽게 됐을까.'라고요. 제가 대학생활을 그렇게 쾌활하게 하진 않았어요. 91년에 재수해서 대학을 갔는데 굉장히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래서 사회학과 대학원도 문제의 심층을 파고들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간 거고요. 그런데 딱 들어가자마자 첫 달에 변곡점이 된 니체를 만났어요. 그때 니체가 되게 소중한 걸 일깨워줬어요. 깊이하고 무게를 혼동하지 말라고. 너는 깊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거워지고 있다고.

 

그리고 이번에 10년 만에 니체를 내면서 다시 봤는데, 이 니체는 그때 니체하고는 또 달라요. 지난번엔 굉장히 경쾌하고 유쾌하다는 점에서 큰 도움을 줬는데, 이번에는 소박했어요. 예전에는 경쾌했지만 화려하게 보였거든요. '신은 죽었다.' 영원회귀, 권력의지, 힘의 의지. 이 어마어마한 말들이 너무너무 세고, 멋지고.

 

그런데 이번에 본 니체는 모든 스펙터클은 가짜라고 말해요. 제 식으로 표현하자면 '황금에는 도금할 필요가 없다, 도금한 것들은 황금이 아니다'. 그리고 <서광>에서는 그런 걸 알려줬어요, 수십 년 걸쳐서 잘못된 습관으로 어떤 병에 걸렸으면 치료할 때도 수십 년 쓸 생각을 하라고. 한방에 나으려고 하지 말라고. 위대한 것들도 무너질 때 처음에 잘게 잘게 균열이 생기고 잡초가 자라다가 무너진다고. 마지막 쓰러지는 게 스펙터클해서 사람들이 그것만 보는 거라고. 역으로 위대한 일을 하려면 천천히 소박한 것부터 하라고. 사소한 것들은 절대 사소하지 않다고요. “

 

그의 저서로는 다음과 같이 있다.

<<철학자와 하녀>>, <<언더그라운드 니체>> , << 살아가겠다>>, <<생각해봤어>> ,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생각한다는 것>>, <<추방과 탈주>>,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코뮨주의 선언>>,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 화페 마법의 사중주>>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54&contents_id=57437

http://greenbee.co.kr/blog/196

 

고병권1.jpg


 

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책 머리에 >>

 

-4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들을 빠뜨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 우리가 과연 길들여졌다고 생각이나 할까? 자신도 알게 모르게 몸에 밴 것들을 일일이 구별할 수 있을까? 이래서 외국이나 다른 문화를 접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낯선곳에 스스로들 던져서 다른 사람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5 니체는 자신의 사상이 시대와 맞지 않는 때 아닌 것(Unzeitst)'이며 미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자신의 철학을 미래의 철학이라고 간주할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 있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지만 감각 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시간이다.

 

>>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이미 도래했는데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하지만 어찌하리? 때가 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인간 아닌가. 그 때가 빨리 올 수 있도록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 서장 >> ------------------------------------------------------------------

2.천개의 길

 

-18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가지 방식이 있다. 갈 길을 못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 천개의 작은 길 중 과연 나는 몇 개의 길을 선택하며 여기까지 온것일까? 한 개의 길에서 막히면 안달하고 힘들어했는데 세상에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많은 길이 있음을 알고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4.천 개의 젖가슴

 

-19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5.천 개의 주사위

 

-19 자유 정신의 소유자들이여 또 한 번의 주사위를 던져라. 세계는 너희를 위해 천 개의 섬을 준비해 두었다.

 

>> 세계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해두었는데 나는 늘 없고, 나에게는 그 기회가 주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건 나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1장 아모르파티 : 삶을 사랑하는 철학 - 니체와 철학사이에서

 

-25 운명애(Amor fati) ,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운명애(Amor fati) , 이것이 나의 가장 내적인 본성이다

 

1. 아로트파티: 삶을 사랑하는 철학----------------------------------------

1.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

 

-27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는다. 왜 철학자들은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가? 왜 그들은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니체는 진리를 찾는 철학 자체를 하나의 문제로 삼았다.

 

>> 근본적인것에 대해서 의문을 던져보지 않았다. 왜 철학자들은 진리를 찾아야 하는지? 그런데 그들이 아니면 과연 누가 찾을 것인가? 각기 다른 영역으로 사람들이 이제는 흩어지다 보니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질문들을 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제 그 경계를 넘어서 보는 노력들이 필요하리라.

 

-29 니체가 철학자들을 죽음의 설교자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이 세계 속에서의 삶을 평가절하하고, 어떤 생성도 없는 영원 불멸의 세계를 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31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우리는 늘 죽음에 대비하느냐 현재의 삶에 집중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삶에 대해서 집중하고, 삶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다.

 

 

2.거인들의 웃음소리와 신들의 한탄

 

-33 더 이상 신과 진리의 공과를 묻지 못하고 신과 진리에 대한 자신의 공과를 묻는 인간의 왜소증! 진리의 위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의 완전성을 찬미하기 위해 자신의 불완전성을 끊임없이 고백 하는 것.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이다. 이 세계와 자기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냈다.

 

-36 미다스 왕이 디오니소스의 시종인 현자 실레노스를 잡았을 때, 그는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실레노스가 마지못해 답했다. “가련한 하루 살이여. 우연의 자식이여, 고통의 자식이여. 너는 내게서 무엇을 들으려 하는가? 가장 좋은 것은 네가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음으로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죽어버리는 것이다.” 얼마나 비극적인 인식인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고, 태어났으면 바로 죽어 버리는 것이 낫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과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비극성의 크기가 아니라 그 비극성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리스인들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공포를 고유한 명랑성으로 극복한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거인들이라 부른다. 그들은 소인족처럼 삶의 고통과 죄의 크기를 연계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소인들의 삶에 대한 부정을 삶에 대한 긍정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서 창안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실레노스의 지혜를 과감하게 바꾼다.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때문이 아니다. 고통은 오히려 삶으로부터의 이탈즉 죽음 때문에 오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나쁜 것은 곧 죽는것이고, 다음으로 나쁜 것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다.‘

 

-38 불을 훔친 범죄자 프로메테우스는 영웅으로 받들어 진다. ‘누가 오이디푸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라고 묻는 그리스인들은 이제 프로메테우스야말로 우리의 영웅이라고 말한다.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저으로 (신을)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

 

 

3.세 개의 죽음 -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 소크라테스의 경우

 

-42 발라디에는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박힌 자라는 글에서 두 죽음이 갖는 의미의 차이를 잘 포착했다. 디오니소스가 삶을 찬미하고 그리스도가 죽음을 찬미했다는 식으로 단순히 이해해서는 안된다. 차이는 순교한 것에 있지 않다. 차이는 죄의식과 관계된다. 디오니스소의 갈기갈기 찢겨진 죽음에는 어떤 죄도 수반되지 않으며 그 죽음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재생의 약속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식을 길러냈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심판과 함께 돌아온다.

 

>> 이로인해 인간은 늘 끝이지 않는 죄의식을 달고 사는 것이다. 내가 죄의식을 느끼는 것도 어렸을 때 교회를 다녀서 알게 모르게 몸에 밴 것일까?

 

-42 소크라테스 유언의 키워드는 아스클레피우스이다. 아스클레피우스는 의술이 신이다. 그에게 닭을 주어야 한다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 생이라는 질병이 치유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말은 이런 것이다.

, 크리토! 인생은 질병이다.‘ 소크라테스는 삶에 가장 모욕적인 말을 내뱉었다. 바로 죽음을 의사로 받아들였으므로.

 

>> ‘닭을 준다는 의미가 이렇게 심오한 뜻이 있는지 몰랐다. 이러니 고병권 같은 해석자가 없었다면 의미를 제대로 이해나 했을까?

 

 

4.비극이 상연되는 극장과 심판의 법정

 

-48 그러나 무엇보다 법정을 극장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죄에 대한 심판이다. 세련된 해석의 체계는 오로지 최종적인 심판을 준비하는 예비적 과정일 뿐이다

 

5.미래의 철학자

 

-52 분명히 광인은 미친 사람이다.그러나 우리는 미친 것아픈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니체는 우리의 문명을 아픈 것으로 진단하지만 사람들은 니체를 미쳤다고 본다. 니체는 미친 것의 반대가 건강함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보편적 신념이다.

 

>> 우리는 아픈것일까 미친것일까? 둘 다 해당되는 것 같다. 때로는 미치고, 때로는 아프고. 그러가 광기의 반대가 길들여진 두뇌보편적 신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는 아픈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어느정도 내가 길들여져 있는지 조차 모르기에 그것에 대한 식별이 필요하다

 

-53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와 있지만 항상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 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unzeit)'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 미래에 대한 이렇게 멋진 정의가 있을까! 항상 와 있지만 항상 오해되고 있는 시간이다.

언제나 와 있는 것을 늘 나중에 멀게 나타날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문제인 것 같다

 

-56 판결문의 마지막 문장은 무엇인가? 바로 가치 평가이다. 우리는 그 숙명적 불행이 시작된 재수 없는 날을 기점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다. 왜 기독교 최후의 날로부터 계산하지 않는가? 오늘부터, 모든 가치의 재평가가 이루어진 오늘부터 따져서 말이.

 

 

6.‘사랑의 의미

 

-56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57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 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 사랑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가 될 수 있고, 지지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59 삶을 변화시키는 예술로서의 철학, 그것은 불가능한 과제일까? 철학은 철학을 떠난 사람들의 철학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철학의 지반을 떠난 맑스(Marx), 다 쓰고 난 인식의 사다리를 버린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 있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실천은 철학에게 보내는 어떤 신호가 아닐까? ‘삶을 바꿔 보라! -철학을 떠난 철학자들이 철학의 목표로 제시하는 것.

 

-59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니체의 계보학 ----------------------------------------

 

2.계보학 2 - 탐사

 

-64 니체가 도덕을 연구하려는 사람에게 강조하는 용기와 박식함은 도덕학자들의 소심함과 어리석음에 선명하게 대비된다. 다른 지층을 탐험하는 탐사자는 자신의 시대를 떠날 수 있는 대단한 자유 정신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탐사자는 용기 있는 것 못지 않게 박식해야 한다. 파편 하나도 세심하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쉽게 지나치는 것을 그는 꼼꼼하게 보아야 한다.

 

-66 계보학자는 반듯해 보이는 평면의 굴곡들을 보는 사람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평면에 주름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3.도덕의 자연사 (natural history)

 

-72 도덕의 자연사를 보면 한 시대의 도덕은 다른 시대의 악덕이며, “한 민족이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민족은 조롱거리, 치욕이라고 부른다.”

 

>> 이렇게 시대와 장소가 다르면 다르게 해석되는 것을 우리는 왜 그렇게 속박하면서 살아갔는지...

 

 

4.강한 자와 선한 자

 

-74 ‘무엇을 선이라 부르는가?’ 즉 선의 항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선을 규정하는가?’, 다시 말해 가치 평가 양식이다. 가치 평가 양식 때문에 은 그 질을 전혀 달리하게 된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좋음(Gut/Good)'누가판단하느냐이다. 우리는 보통 무언가를 받는 사람이 그것의 좋음여부를 판단한다고 생각하지만, 니체는 좋음의 판단은 좋은 사람들자신에게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76 귀족들이 좋음이라고 부르는데에는 어떠한 선악의 판단도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우등한 것과 열등한 것, 혹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귀족들은 나쁜 것에 대한 어떤 적의나 원한도 품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안된 것’, ‘불쌍한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노예의 도덕은 귀족의 도덕과는 판이하다. 귀족이 좋음을 스스로 낳고, 그로부터 나쁨’, ‘열등함을 끌어낸 것과 달리, 노예는 외적인 것’, ‘다른 것’,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노예는 자신과 대립되는 것,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 먼저 (Evil)이라고 규정하고 그와 상반되는 자기 자신을 (Good)'이라고 정의 한다. 이리하여 좋은 것 / 나쁜 것(우등한 것 /열등한 것)’이라는 (윤리적) 구분이 선한 것/악한 것이라는 도덕적 의미로 바뀐다.

>> 하나의 의미를 접근하더라도 이 얼마다 큰 차이인가. 그래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제대로 된 사고 라는 것이 있을까? 잠재의식속에 숨겨진 피해의식등은 이제 자발적으로 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고, 그것을 극복해가는 것이 필요하다.

 

-78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pathos of distance)"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5.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81 노예들, 약자들, 그들의 정신적 공격 본능이 밖으로 발산되지 못할 때,그 본능은 안으로 투사된다. 귀족들, 강자들이 사라졌다면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그건 바로 너다!

 

외부의 적이 사라지자 관습의 억누르는 듯한 협소함과 꼼꼼함에 처박혀진 인간은 참을 수 업어 자신을 찢조, 책망하고, 괴롭히고, 학대했다. .……. 황야에의 향수에 지쳐 스스로 고문대와 위험한 황야에 자신을 내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이 가련한 동물, 이 바보, 그리움에 지치고 절망해 버린 이 죄수야말로 양심의 가책의 발명자가 된 것이다.

 

>> 사라져 버린 공격본능. 그건은 착하고 선한 것이 아니라,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그거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하는데 스스로 자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기에 이제는 자각을 하면서 해봐야겠다.

 

-83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일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누가 강자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약자가 자신을 방어했던 수단이 본능이 되고, 인간성이 되고, 제도가 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84 이제 약자는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니체가 약자의 도덕을 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명령하고 창조하는자에 대한 떼거리적 혐오! 강자는 능동성 개념을 박탈당하고 …… 적응이라는 개념이 전면으로 나온다. 그것이 바로 반동성인 것이다.

 

 

6.도덕이라는 동물원

 

-86 어떤 야성도 잃어버리고 오로지 창살에 몸을 비비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 도덕의 가장 이상적인 장소는 동물원이다. “도덕은 하나의 동물원이다.덫에 빠져 있을 때조차 자유보다는 철책이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거기에는 성직자라는 맹수 조련사가 있다는 것. 성직자들은 인간들이 개선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과연 개선된 것인가? 짐승은 단지 덜 위허한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공포감과 고통, 상처, 굶주림이 야수를 병약한 짐승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 나 또한 동물원에서 있으면서 그런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무엇이 개선이고 무엇이 개악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 더 고려를 해봐야 하리라.

 

 

7.선악을 넘어서

 

-90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스피노자에게 선과 악은 사실상 니체가 말하는 좋음나쁨의 의미만을 갖고 있다. 그의 선/악은 개념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자연학적인 것이다

 

-90 니체는 <<에티카(윤리학>>의 저자처럼 인류의 건강에 대해 권유를 하고 있는 것이다.“선악을 넘어선 영역에서도 여전히 좋은 것나쁜 것은 존재한다. 그의 철학이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가치 평가를 포기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귀족과 노예, 거인과 난쟁이, 덕과 도덕, 건강과 질병, 오히려 그는 계속해서 가치 평가한다.

나의 철학은 위계를 향하고 있다.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니다.”

 

>> 선악에 대한 가치 판단의 주체, 무조건 이 좋다는 몰가치적 판단이 얼마나 무서운 일일가? 그런데 나는 그렇게 동물원에 살고 있었던 것일까?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2.진리의 해석학

 

-95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존재론적 차이, 고대와 근대를 가르는 시간적 차이,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공간적 차이, 이슬람과 기독료를 가르는 문화적, 종교적 차이. 해석학자들은 자신과 차이를 두고 있는 타자를 이해하려고 한다.

 

-95 우리가 니체의 해석학을 다른 해석학과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과 거리를 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보다 차이(거리)’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단적으로 말해 다른 해석학과 니체의 구분선은 제우스의 의중에 있기보다는 헤르메스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 해석을 위해서는 헤르메스의 중요성이 더 부각되는데 그동안 제우스 위주의 구성이나 편집 에j 헤르메스에 대해서 재조명해봐야 겠다

 

 

3.스핑크스의 눈

 

-104 니체는 객관성을 믿지 않고 있다.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베타에게서도 보았듯이, 대상의 자율성고 독립성을 중시한다. 주체로부터 독립된 대상으로서의 사실들

 

우리의 습관화된 관찰은 여러 현상들을 단일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사실들(Factum)이라고 부른다. 또 이 사실들과 다른 사실들 사이에는 텅빈 공간이 있다고 생각해서 각각의 사실들을 고립시킨다. 그러나 현상에 머물러서 있는 것은 오직 사실뿐을 외치는 실증주의자들에 반대해서, 나는 말하리라. 사실은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해석뿐이라고

 

>> 사실 자체보다 사실을 해석하면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4.가치의 발명

 

-110 사실 어떤 것이 진리로 주장되는 것은 진리 자체가 힘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힘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진리는 더 이상 해석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기준이기는커녕 힘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할 때 소멸해 버리는 것이 진리이다.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

 

-111 니체의 투시주의는 나의 해석은 이렇다. 그렇다면 당신의 해석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독자들은 자신의 해석을 말하도록 요구받는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보자.“ 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 신도들이란 다 그런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

 

>> 때가 되면 자립해서 스스로 찾아야 하리라.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도 나로부터 떠나 너 자신을 찾으라고 얘기한 것이리라.

 

-112 니체는 진리성을 경쟁하기 위해 하나의 견해를 제출한 것이 아니다. 니체에게 해석은 무엇보다 창조와 생성의 문제다. 해석 행위는 모든 차이를 아우르는 진리를 찾아나서는 일도 아니, 그것이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떠드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래를 만들려는 자가 벌이는 가치 평가 행위인 것이다.

개인은 무언가 전혀 새로운 존재이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존재, 무언가 절대적인 존재이다.... 개개인은 전통적 용어도 역시 개인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식을 개인이 창조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개인이다. 즉 해석자로서 개인은 한결같이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5. 니체에 대한 해석학-방법과 스타일의 문제

 

-119 누가 니체주의자인가? 누가 니체의 해석자인가? 어떤 니체인가? 니체가 놀랄만한 니체를 만들어 내는 사람, 혁명적 니체를 만드는 사람, 니체로 혁명하는 사람, 바로 그가 니체주의자다.

 

>> 저자 자신의 얘기같다. 니체를 이렇게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한 것을 보면 그의 내공이 실로 놀랍다. 혁명적 니체를 만들고, 니체로 혁명하는 사람같다.

 

 

6.헤르메스는 해석자였다.

 

-119 공공영역에서 차이들이 생성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치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던 그리스인들의 태도는 아직도 우리에게 이해되고 있지 않다. 다양성이 건강을 증명한다는 자연의 생태주의적 가르침도 우리에게는 이해되고 있지 않다.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 차이, 새로움, 다양성, 특이성에 대해서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빠른 속도로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세상에서는 이것은 소수의 예외적인 자들의 모습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변하고 있고, 이제 개인적인 차이와 다양성이 새로운 가치들을 더욱 더 크게 만들어 내리라.

 

 

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니체의 근대정치제제에 대한 비판--------------------

 

1.작은 정치의 시대

 

-122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23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nihilism)’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어이다.“

 

>> 교육과 정치의 두 개의 날로 한 국가의 미래가 좌지우지될만큼 중요한 일인데, 교육이 현실감없이 입시로만 국한된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이의 미래를 쉽게 단도질 할 수 없지만 아직도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보다는 좀 더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123 정치란 행위(프락시스, praxis)'의 영역인데, 행위란 자신의 어떤 것을 시작하는 것‘, ’주도하는 것이며, 타자와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거이다. 그러나 근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것은 정치가 아니라 사회이다. ’사회는 공통성의 영역이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영역이다. 그리스에서 정치적 영역이 갖추어야 할 필요불가결한 조건이 다원성이었다면, 공공선을 추구하는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은 표준화.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의 특성을 부각시키고자 했고, 독특한 행위와 업적을 통해 자신이 최고임을 보여주고자 했으나근대 사회에서 이러한 독특한 행위나 사건들은 통계학이 예외들을 다룰 때 보여주는 것처럼 , “하나의 일탈이자 동요일 뿐이다.

 

>> 고대 그리스와 근대 사회에서 추구할 것이 다르다. ‘표준화라는 미명하에 얼마나 많은 개인들의 몰가치적으로 취급되어졌는지 알 것 같다. 시대적 흐름, 국가적 흐름을 큰 틀에서 이해하는 것이 그 속에 있는 개인들에게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면 세상살이가 조금은 더 이해가 될 것이다.

 

 

2.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 1- 근대 국가와 전쟁

 

-127 가치 창조와 평가를 봉쇄했던 것이 근대 정치의 첫 번째 문제였다면, 두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적인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는 잔인한 길들이기길러내기가 개입한다. 니체가 저작의 이곳 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쓰고 있는 길들이기길러내기라는 표현은 가치의 습속화를 통한 근대적 정치 주체의 생산을 분석함에 있어 매우 유용하다

 

>> 과연 나는 어떻게 길들여졌고, 어떻게 길러내진것일까?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는 어느새 길들여졌고, 길러낸 진 사실이 더 무서운 것 같다. 나중에 그것에 대한 책임은 결국엔 개인이 다 책임져야 하기에 이제 나의 고유성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리라.

 

-131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들어보자. “너희는 전쟁에서 지쳤고 이제 너희의 피곤함이 이 새로운 거짓 신에게 봉사한다. ... 너희가 국가, 그 새로운 거짓 신을 숭배 할 때 국가는 너희에게 모든 것을 주려고 하리라. 그렇게 해서 국가는 두 눈의 심안을 매수하는 것이다... 선한 자나 악한자나 모두가 음독자가 되는 곳,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곳, 그것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

 

>> 국가라는 거짓 신 앞에서 선한 자난 악한자 모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현실앞에서 자신의 주체성, 고유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야 하리라.

3.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 2 -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 그리고 민주주의

 

-133 더구나 자유로운 개인을 떠드는 자유주의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니체는 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운 인격은 볼 수가 없으며,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비겁하게 정체를 숨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뿐이다. 개성은 내면적인 것으로 움츠려 들어가, 밖에서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로운 개인이란 특이성을 갖추지 못하고 보편성 아래서 단지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개별자들인 셈이다.

 

-135 이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자들은 법률 속에 있는 폭력, 모든 종류의 속에 있는 냉혹함과 이기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제도는 그것이 이룩되자마자 자유주의적이기를 그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제도보다도 더 철저하게 자유에 해가 되는 것은 없다. …… 자유주의 그것은 쉽게 말하면 가축으로의 몰락이다.

 

-137 니체는 사회주의가 원하는 국가가 달성된다면 생성의 강한 에너지는 파괴될것이라고 말하고 그때 국가는 새로운 생성적 힘을 상실하고 허무주의적 형태를 띠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니체는 현대민주주의를 국가의 몰락에서 나온 역사적 형태라고 말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나태함과 피로, 약함의 해방이다.

니체에게는 국가란 항상 거짓 신일 뿐이다.

 

-138 우리는 오늘날 민주주의를 새 말을 갈아탔다는 이유로 중세로부터 발전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신적인 것이다. “길은 여전히 노후하고, 수레 역시 낡은 것이다. 민주주의는 여전히 신이 부여한 삶을 살면서 어떤 믿음도 갖지 못한 허무주의 운동의 종착역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허무주의 운동의 본질이 실현된 체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38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 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의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142 니체는 이러한 비윤리적인 힘들을 다스리는 훌륭한 수단 중의 하나가 노동이라고 말한다.

노동이 칭찬받고 노동의 축복에 관하여 지치는 일도 없이 이야기되는 경우..... 나는 저의를 본다.....노동을 바라볼 때, 현재 실제로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노동이 최고의 경찰이라는 것, 노동은 각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방해할 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노동을 통해 보다 안전해질 것이다.

 

 

4.길들이기와 길러내기

 

-142 첫 번째 작업이 길들이기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 작업은 길러내기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은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문명(길들임)의 과정은 무시무시한 맹수 같은 본성에 철퇴와 고문을 필요로 한다.

 

>> 문명의 힘이 맹수를 얼마나 쉽게 길들이는지, 그리고 얼마나 쉽게 도전을 못하게 하는지 알기에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

 

-143 니체는 이 작업을 기억할 수 있는 동물 기르기라고 명명한다. ‘기억할 수 있는 동물은 또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된다. 그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동물이 되는 것이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그 사회에서 규칙적이고 필연적인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의 행동은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만큼의 계산 가능성을 높여준다.

 

-144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재갈 물린 이들을 매개로 하여 그 나라의 모든 청년층은 국가에 유익한 것을 교육받는다. 무엇보다도 국가에 의해 승인되고 인정된 생활진로만이 사회적 영에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그러한 성향이 모든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전염된다.

 

 

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자연학 + 윤리학 --------------------------------------

 

3.힘의 질 - 능동과 반동

 

-166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 강함의 새로운 정의들.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도 강함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다르게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4.권력의지에 대한 오해

 

-173 니체는 항상 이렇게 물었다.“나는 개개의 경우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여기 만들어져 있는 것은 기아가 원인인가, 과잉이 원인인가?

 

-173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통해 힘을 주고 받으며, 힘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니체는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모든 것을 권력의지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권력의지가 아닌 존재라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다시 말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자체는 권력의지다.”

권력의지가 하나의 명령이라는 것은 노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노예는 복종함으로써 명령한다.“나는 또한 봉사하는 자의 의지 속에서도 주인이 되려는 의지를 발견했다. 약자가 강자에게 봉사하도록 약자를 설득함은 약자의 의지가 그보다 한층 더 약한 자들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나 적절히 지적했듯이 여기서 주인이 되고자 하는 약자들의 의지는 하인의 역할에서 벗어나 주인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섬기고 봉사하는 것은 그 자체에 있어서 자신에게 명령하는 것, 즉 권력이다. 섬김으로서의 권력이 하인이나 약한자들을 예속시켜 자신의 명령을 집행한다. 하인들이나 약자들은 그 권력의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자신들도 지배에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를 예속시킴으로써 자신들이 대단한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 대단히 착하고 커다란 인내심과 자제력을 갖춘 성실한 사람들인 듯이-상상한다.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자연학+윤리학 ----------------------------------------

 

1.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그리스적 사유로부터

 

-185 니체는 헤겔조차 보지 못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놀라운 생각을 소개한다. 그것은 세계를 놀이로서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물리적으로 표현하자면 불이 자기 자신과 벌이는 유희이다.”

 

생성과 소멸, 건축과 파괴는 아무런 도덕적 책임도 없이 영원히 동일한 무구의 상태에 있으며,이 세계에는 오직 예술가와 어린아이의 유희만이 있을 뿐이다. 어린아이와 예술가가 놀이를 하듯 영원히 생동하는 불은 놀이를 하며, 무구하게 세웠다가 부순다. 영겁의 에온(Aeon)은 자신과 놀이를 한다. 마치 아이가 바닷가 모래성을 쌓았다가 부수듯이.... 이따금 그는 놀이를 새롭게 시작한다.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 어떤 목적성을 갖는것도 아니고 생성과 소멸을 반복할 뿐이다. 그 속에 사람들도 생성과 소멸이 있을 뿐이다. 어린아이처럼 놀이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3.반복의 두 경우 -병에 걸린 차라투스트라와 회복된 차라투스트라

 

-195 생성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만큼이나 시간 역시 생성을 필요로 한다. 깨달음의 시간은 차라투스트라의 새로운 생성, 새로운 변신을 필요로 한다. <<차라투스트라>>에서 깨달음의 과정과 변신의 과정은 똑같이 진행된다.

생성 즉 시간을 긍정하기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무엇보다도 과거와 대면해야 한다. 아직 오직 않은 시간을 의욕하고 있다면 그는 먼저 이미 지나간 시간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하지만 과거는 의지하는(will) 자들에겐 가장 큰 난관이다. 어느 누구도 과거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의지는 이미 행해진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력하다. “의지는 되돌아가 의욕할 수 없다..... 시간은 뒤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의지의 통한이다. ‘그러했던 것’, 그것이 의지가 굴릴 수 없는 돌이라는 것이다.” 과거를 대하고 나면 의지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며 형벌이다.” 과거는 이미 결정된 시간이고, 하나의 영원한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시간의 법칙이 영원한 정의라면 구제라고 하는 것이 존재할 수나 있겠는가?”

 

>> 과거를 회피하지 않고 과거를 대면할 수 있어야 삶의 시간들을 긍정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새로운 것을 생성할 수 있다. 깨달음의 과정과 변신의 과정은 그래서 똑같이 진행될 수 있는 것이리라.

 

 

-196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 그것은 죽음까지도 살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번! ’ 이렇게 외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과거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 과거를 생성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개의 길이 만나는 출입구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순간이라는 이름이 쓰여있다. 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다. 순간이라는 입구에서 하나의 기나긴 길을 뒤로 달리고, 다른 길은 앞으로 달린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모든 순간들에는 이 세 개의 공간들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 공존의 공간이 순간들은 흘러간다.’ 순간들의 생성, 그리고 소멸.

순간들을 통해 볼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순간들속에 다른 시간과 공존하며 경쟁하고 있는 시간이다. 미래를 찾기 위해 과거로 향하는 계보학자들이 이해하듯이 미래란 지나가 버린 순간들 속에도 들어 있다. 들뢰즈는 사유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유는 스스로의 역사를 생각하지만(과거), 그것은 사유가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현재), 마침내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기 위해서(미래)이다. 계보학자들이 과거의 지층에 숨겨져 있던 복수의 힘들을 찾아내는 이유는 그 힘들이 미래를 건설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과거를 축복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과거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미래를, 그리고 미래의 건출물로 변경된 과거를 보았기 때문이다,

 

>> 미래를 단순히 지금보다는 나주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의 관념조차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과거의 지층에 숨겨있던 복수의 (plural) 힘들을 찾아내는 이유는 그 힘들이 미래를 건설하는 힘이기 때문에 과거의 시간이 우리에게 더 의미있는 것 같다.

 

-197 시간만이 나의 유일한 동시대인이다.

비로소 차라투스트라는 시간의 부담을 이겨내기 시작한다. 이제 그는 회복기의 환자이다. 그에게 반복은 두 번째 의미, 바로 생성의 반복으로서 다가왔다. 시간은 부담스럽기는커녕 유일한 동시대인이다. 생성이 반복될수록 양산되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5.차이의 놀이와 회귀의 비밀

 

-206 “‘우발적인 것이야 말로 세계의 가장 오래된 귀족이며.... 모든 사물들을 목적에 예속된 노예 신세로부터 구원해주는 것이다.” 하늘에 던진 주사위를 가로막을 이성의 거미줄은 없다.

 

-208 니체가 운명애(Armo fati)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자기 자신의 생성이었다. 새로운 자신을 만들라!

세 번째 차원은 우연이다. 우연이란 차이가 모든 것 속에 분포된 상황이다. 필연적인 법칙으로부터 일탈하는 흐름이 우발적 사건을 만들어낸다. 우연은 창조적 힘이다. 우연은 카오스와 미로를 즐기는 정신이다. 미로나 카오스는 길이 없음이 아니라 길의 넘침이다. 이로써 생성의 공간이 열린다.

다수성과 운명애, 우발성은 긍정의 권력의지의 특징이며 영원회귀의 방식이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부정의 권력의지보다 위계가 높다. 세계는 자신을 다수성으로, 운명애로, 우발성으로 드러낸다.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만을 돌아오게 하고, 긍정의 권력의지만의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를 선택하고, 긍정의 권력의지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이제 모두에게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바로 선택의 문제, 실천의 문제다. 너는 너 자신을 영원회귀의 원인들의 일부로 만들 수 있는가?” 너 자신은 영원회귀를 의욕하는가? 너 자신은 영원회귀의 원인이고 싶어하는가? 긍정의 권력의지는 항상 회귀하지만 너 자신이 회귀할지는 선택의 문제. 권력의지에서 제기된 바 있던 윤리적 선택의 문제가 영원회귀에서 반복된다. 두 문제는 사실상 동일하다. 긍정의 권력의지를 택한다는 것은 영원회귀를 의욕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209 모든 즐거움들은 계속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어떤 피로도 모르고 생성으로서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의 영원한 자기 파괴의 세계.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중의 정욕의 비밀의 세계. 영원회귀의 유혹- 즐거움 .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이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나는 그들에게 지금은 소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바로 즐거움이라는 것을

 

 

7장 인간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1.‘(...und....)'

-212 인간은 세계를 인식한다고 말하지만, 그때의 인식이란 사실상 사물들의 등을 더듬는 놀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세계를 측량하기 위해 자신의 잣대를 들이미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참으로 인간은 측량하는 동물이다. “인간(Mensh)이라는 말은 ... 측량자(Mensende)를 뜻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측량하면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이 발견하고 싶었던 것을 발견할 뿐이다.

어떤 사람이 물건 하나를 덤불 뒤에 숨겨 놓은 다음 그것을 바로 그 자리에서 찾아낸다면, 이것을 칭찬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포유동물을 정의하고, 낙타 한 마리를 보고 난 뒤 봐라, 포유동물이다고 말한다면 이는 매우 제한된 가치만이 있는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본 진리일 뿐이다. 그것은 진리 자체와는 상관없으며, 세계를 인간과 같은 종류의 사물로 이해하려고 하는, 기껏해야 동화의 감정을 쟁취하는 것일 뿐이다.

>> 인간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진리이기에 하나의 오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것이 베이컨이 얘기한 종족의 우상이 아닐까 싶다. 이제는 이런 우상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215 사실 인간은 자연을 잘못 이해하므로 자기 자신도 잘못 이해한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하지만 모든 것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 대호 남아 있는게 하나 있다. 니체는 인간자연’, ‘인간세계사이에 께어 있는 (und)'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떠뜨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났기 때문이다.

 

세계 대 인간의 모든 태도...., 사물의 가치 척도로서의 인간, 마침내는 존재 자체를 자기의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는 그것을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는 세계 심판자로서의 인간-이러한 태도의 정상을 벗어난 어처구니없음은 그 정체를 드러내어 우리에게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인간과 세계가 서로 병립되어 있고, 따라서 라는 귀여운 단어의 숭고한 뻔뻔함에 의해 분리되어져 있음을 발견할 때 웃지 않을 수 없다.

 

>> ‘라는 글자 하나가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게 될 줄 몰랐는데, 그 속에 인간의 모든 오만한 욕망이 다 들어가있는 것이 되었다.

 

 

2.진화와 변신

 

-216 인간이란 결국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하다. ”저 쪽으로 건너가기도 위험하고, 가는 중에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다.“ <<차라투스트라>>에 등장하는 시장에서 만난 줄을 타는 광대의 위험이 바로 인간의 위험이다. 어떻게 할것인가? 자연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초극할 것인가? ”위대한 조수의 썰물이 되길 원하는가?“ 밀물이 되길 원하는가?

 

>> 짐승과 초인 사이에 있는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한 작은 존재임을 알기에 좀 더 겸손해질 필요성이 있다.

 

-217 인간은 모든 생물들의 시간을 인간을 향한 양의 축적질의 변화로서 이해한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벌레로부터 혹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면 인간이란 결국 발전된 벌레, 발전된 원숭이가 아닌가? 비로소 자기를 실현할 벌레, 자기를 실현할 원숭이!

너희는 벌레로부터 인간으로 이르는 길을 걸어 왔으되 아직도 너희 내부의 많은 것들이 여전히 벌레다. 예전에 너희는 원숭이였고, 지금도 너희는 여전히 어느 원숭이보다도 더 원숭이인 것이다.

 

>> 진화론의 모순이 아닐까 한다. 또 다른 하나의 종이 도래한 것이지 무엇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19 낙타는 잘 견디는 정신의 표상이다. 낙타는 모든 무거운 것들을 맡아 진다. 주어진 가치를 묵묵히 수행하기만 하는 낙타는 선악에 있어 창조자가 되고 싶은 자는 먼저 파괴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는 -(l-a)’라고 우는 나귀와 같은 족속으로 , ‘(Ja, 긍정)’에 대한 잘못된 발음 즉 긍정의 정신에 대한 오해를 상징한다.

이에 비해 사자는 거대한 부정의 정신이다. 낙타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사자는 이해한다.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 자신의 터전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거대한 용이 나타나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모든 가치는 내 몸에서 빛난다...... ‘너는 해야만 한다 (당위와 의무)’만 존재한다고 말할 때, 사자는 으르렁거리며 나는 하고 싶다를 외친다.

그러나 사자 역시 긍정을 알지 못했다. 사자는 부정조차 긍정하는 정신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나는 하고 싶다보다 위에 있는 것은 나는 존재한다이다. 사자가 할 수 없는 일을 어린아이가 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사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린아이는 존재 자체로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한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이고,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다.

 

>>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망각,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처럼 마구 굴러갈 수 있어야 하리라.

 

-221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무엇인 인간 종속을 계승해야 하는가가 아니다. 인간이야말로 하나의 종국적 존재이다.

 

 

3.신의 죽음과 인간의 몰락

-223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제야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성시킨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광인은 신이 죽은 후에도 새로운 삶을 목격하지 못한다. 그는 신의 죽음이라는 이 기쁜 소식에 춤추는 단 한명의 인간도 만나지 못한다.

 

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번개와 뇌성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 신은 죽었지만 인간은 또 다른 신을 만들어낸다. 끊임없는 되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다가가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225 차라투스트라는 신들의 죽음에 웃음지는 자를 보기 전에 웃음 지으며 죽어간 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말한다. “한 신이 나타나 신에 대해 가장 무식한 말을 했을 때 신들의 죽음이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신은 하나다. 너는 나말고 다른 신을 섬겨선느 안된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모든 신들은 웃었고 의자에 앉은 채 몸을 흔들었다... 그들은 웃다가 죽은 것이다.

정말로 신을 철저히 죽이고자 하는 자는 웃는다. 그는 신을 분노로써가 아니라 웃음으로써 죽이는 것이다. 신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존재가 웃음거린 것을...

 

 

5.놀이와 웃음, 그리고 춤

 

-231 왜 보다 높은 인간들은 변신에 실패했을까? 그들에게는 초인과 영원회귀가 두려움이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에게 의존하려 했다. 그들은 초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가지, 즉 놀이와 웃음과 춤을 몰랐다.

 

>> 나는 과연 이 세가지 중에서 무엇을 가졌는가? 웃음은 있지만 놀이와 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제대로 놀줄을 모르는 것 같다. 그동안 무조건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속에서 살아왔기에 그것을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그것에서 벗어나서 제대로 놀줄을 알아야 하리라. 인생의 깊은 맛을 알아야 하리라.

 

-232 “차라투스트라는 춤추는 자이고 가벼운 자이다. 보다 높은 인간들은 춤출 줄 모른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서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은 중력의 정신에 대한 승리의 표시이다. 그것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높이 뛰기와 넓이 뛰기, 그리고 옆으로 뛰기 이다.

 

 

 

8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1.가면의 철학

-236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저자를 잘 알아야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걸까? 우리는 습관처럼 작품들 밑에 있는 동일한 저자를 떠올리거나 저자의 생애에서 작품들의 근거를 찾아보곤 한다. 그러나 활동의 순간마다 표현되는 자아를 항상 동일한 이름 아래 가두어 둠으로써 그 변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단일 주체에 대한 환상처럼, 다양한 여러 작품들을 단일한 저자의 이름아래 위치시키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 저자를 알아야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시간의 축에 따른 변화까지는 왠만해서는 쫓아가는 것이 쉬지 않다. 니체같이 많이 변하는 사람이 또 많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작가는 이해하되, 많은 작품을 남겼거나 변화가 심한 작가들은 다르게 접근하는 방식이 필요해 보인다.

 

-237 <<즐거운 지식>>의 제 2판 서문에서 니체는 니체씨를 떠나자고 말한다. 그는 곧이어 변화하는 건강 상태만큼이나 많은 철학이 존재함을 주장한다. 얼마나 다른 철학들이 같은 이름 아래 불리고 있는가? 그는 자신의 작품과 자신을 혼동하지 말라고 말한다.

나와 내 작품은 별개의 문제다..... 나를 다른 사람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나를 나 자신과 혼동해서도 안된다.

 

 

-238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부활을 맞이하게 된다

 

-239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니체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섬세한 손가락과 용감한 주먹이다. 세세한 차이를 읽어낼 줄 알고 어떤 위험한 주장도 그대로 들어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소화 불량증을 가져서도 안되므로 강한 위장도 있어야 한다. 즐거운 소화작용이 필요하다. 복수심이나 원한은 금물이다. 이러한 독자라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의 괴물일 것이다. 추론하기 보다는 제 방식대로 소화시키는 괴물!

 

완벽한 독자를 상상해보면 그 완벽한 독자란 항상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하나의 괴물로 변하곤 한다. 게다가 그는 순종적이면서도 교활하고 조심스럽다. 그는 또한 하나의 타고난 모험가요 발견자이다.

 

>> 섬세한 손가락과 용감한 주먹을 가지고 있는가?강한 위장도 가지고 있는가? 즐겁게 소화할 수 있는가?

아직 책에 대해서 이렇게 자유롭지 못해서 더 시간이 필요하지만, 책으로 자유자재로 춤추고 싶다. 모험가이자 발견자가 되어야 한다.

 

 

2.비극의 시대에서 냉소의 시대로

 

-244 그는 떠나야 할 곳을 알지만 도달할 곳을 모르는배를 타고 있다. “새로 쟁취한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낡은 것으로 되돌아 갈 수 는 없다. 우리는 이미 배를 불태워 버렸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용감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3.화약 냄새가 사라진 전투

 

-246 바그너는 제국에 대한 복종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의 메시지도 분명하다. 제국적인것에 대한 반대, 국가와 교회라는 우상에 대한 반대!

 

바그너의 등장과 제국의 등장이 시간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두 사태는 동일한 것, 즉 복종과 성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어떤 국가도 더 잘 복종받고 더 잘 명령하지 않습니다.

 

-247 “디오니스소의 신호를 듣는 아리아드네. ” “망치를 든 파괴자이자 춤추는 무희이며,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자, 차라투스트라!

 

 

4.모든 가치의 전환

 

-247 병균속에서도 치료의 백신을 찾아내듯 니체는 상처로부터 치료의 힘을 발견한다. “치료하는 힘이란 우리가 입는 상처에도 있는 법이다. 호기심이 강한 식자들을 위해 출처를 밝히지는 않지만 다음은 나의 오랜 좌우명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 결국 자신의 상처를 다시한번 봐야 하리라.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힘이 회복됨을 알게 되리라.

 

-248 <<선악을 넘어서>>의 부제는 미래 철학을 위한 서곡이다. 미래의 철학자와 정치가는 하나의 전쟁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모든 가치의 전환’, 이것이 인류에 있어 최고의 자기 성찰의 행동을 위한 정식이고, 이것이 나의 살이 되고 천재성이 된다.... 나는 전에 아무도 나만큼 거역하지 못하였을 정도로 거역한다. 그럼에도 나는 부정적 정신의 소유자와는 반대자다. 나는 기쁜 소식을 전달해주는 복음의 사자이다. ..... 모든 것이 허위였으므로 지상에는 미증유의 전쟁이 있게 된다. 나의 출현과 함께 세상은 위대한 정치를 펼치게 될 것이다.

 

>> 모든 가치의 전환.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기존에 당연시 보던것에서 이제는 조금 더 새로운 마음으로 봐야 하리라.

 

 

5.다시 떠나는 여행자

 

-250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아라. 너희가 나를 완전하게 부정하였을 대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 프리드리히 니체

 

>> ‘라고 하는 것은 없었다. 그냥 겉 껍데기에 불과한 것을 나인양 마냥 찾고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순간에 깨어있는 그 자체가 나 이기에 그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252 확실히 유목민의 기질이 니체를 이끌고 있다. 니체의 사상은 유목적 사상(nomad thought)'이다. 유목민이란 여행자이며 외부자이다. 그러나 니체의 여행자가 떠난다고 했을 때, 그는 공간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다. 그가 떠나는 것은 지배적인 질서이며 지배자의 코드이다. 외부자가 차지하고 있는 외부라는 영토는 더 이상 공간적인 외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외부란 계산되지 않은 힘들의 영역, 지배의 그물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힘들의 영역이다.그 힘들은 지배적 가치의 외부에서 지배적 가치 속으로 파고든다. 내부이지만 잡히지 않는 내부, 그것이 내재하는 외부이다. 헤겔을 뚫고 들어온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를 깨뜨리는 차라투스트라, 바그너를 깨뜨리는 비제. 여행과 탐사는 그치지 않는다. 가면 놀이는 멈출 줄 모르고, 변신은 영원성을 획득한다.

 

-253 이제 이 책의 첫장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Nitimur in vetitum!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 ‘철학이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정의가 재미있다. 그래서 해보고 철학을 더 알고 싶은 생각이 더 많이 드는 것 같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

베버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1.근대라는 탈주술화된 주술

-256 어떤 점에서 근대는 제 발로 설 수 있는시대가 아니라 제 발로 서야 하는시대다. 절대적 가치가 붕괴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 항상 새것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근대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2.근대인의 탄생

-260 베버가 보기에 자본주의적인 인간(근대인)은 전혀 새로운 종의 인간이다. 우리는 그 독특함의 전형을 벤자민 프랭클린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시간이 돈임을 잊지 말라. 매일 노동을 통해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반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가 오락을 위해 6펜스만 지출했다고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된다. 그는 그 외에도 5실링을 더 지출한 것이다. 아니 갖다 버린 것이다. ...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재산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따라 살려고 하지 말라. 신용을 가진 많은 사람이 이러한 착각에 빠져 있다. 이런 점에 주의 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지출과 소득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일단 세부적인 것까지 주의하는노력을 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61 같은 돈이라 해도 프랭클린의 말에서는 다른 것이 느껴진다. 소명의식에 기초한 철두철미한 자기 관리, 바로 그것이다.

 

 

3.관료제 기계

 

-266 합리적인 시스템이 개인들의 일상 생활의 수준을 넘어서 조직이나 제도의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 관료제다. 베버는 관료제를 기계라고 불렀다. 의지나 정신을 포기함으로써 본래의 의지나 정신이 원했던 것을 생산해내 주는 합리적인 시스템, 그것은 분명히 기계라 할만하다. 관료제란 개인적 수준에서는 책상앞에 붙여 놓은 계획표일 것이고, 사회적 수준에서는 거대한 행정쳬계 및 사회제도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수행력을 보장하는 가장 효율적인 기구이다. 그 어떤 기계도 근대의 복잡성과 대면해서 그토록 효과적인 처리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266 맑스는 기계와 노동수단을 혼동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그는 이 글에서 기계가 노동자의노동수단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계는 더 이상 노동자의 활동을 대상에 전달하는 게 아니며, 오히려 노동자야말로 기계의 작업을 돕고 관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계는 단순히 낫이나 괭이처럼 노동하는 사람의 노동을 전달해서 무언가를 생산하는 수단이 아니다. 노동수단과 노동자의 관계에서의 생산자는 노동자이지만 기계와 노동자의 관계에서의 생산자는 기계다.

...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은 사라진다. 생산하는 것은 관료제로 불리는 기계다. 인간 역시 기계의 생산작업에 동원되는 부속품일 뿐이다. 소명의식에 불타던 근대인은 언제부턴가 주어진 절차와 규정에 의거해 수동적으로 일 처리에 동원되고 있는 암울한 근대인으로 돌변해 버렸다. 베버가 <<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마루 하고 있는 구절을 보자

 

박스터의 견해에 따르자면 외적인 재화에 대한 배려는 마치 언제든지 벗을 수 잇는 얇은 겉옷처럼 성도의 어깨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운명은 이 겉옷을 강철같은 겉껍질로 만들어 버렸다. 금욕이 세계를 변혁시키고 세속에 작용하기 시작하자 이 세상의 외적인 재화는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에 대한 힘을 증대시켜 갔고 마침내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되엇다. 오늘날 이 정신은 그 겉껍질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쨌든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는 그것이 기계적 도태에 입각하는 한 그와 같은 지지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처음에 시간표든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는 수단일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베버의 종교학이 끝나고 정치학이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근대가 도달한 허무주의와의 대결! 분명히 절대적 신, 보편 종교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근대인들에게 다양한 가치들에 대한 자율적 선택의 가능성을 부여했었고, 자기 자신의 반성적 힘과 내면적인 성찰에 의해 스스로의 행동을 지배하는 모습을 기대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은 다양한 의미들의 경쟁이기 보다는 의미의 실종이었으며, 신비주의가 아니라면 기계적 활동에 자신을 던져야 하는 막다른 길목이었다. 이 난국을 돌파할 길이 있는가? 베버 정치의 과제는 분명했다.

 

>>근대인이 되면서 이미 많이 길들어져 있고, 기계의 이미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는 세상에서 과연 구속복을 벗게 되는 나의 모습이 생각되다

 

 

4.신체 길들이기, 신체 길러내기

 

-269 훈육(disciplne)은 근대인들의 신체에 일어난 일련의 변화를 설명해줄 수 있는 개념이다. 베버는 영혼이 사라진 환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신체에 대한 진단만큼 중요한 것이 엇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270 그런데 의학적 처방을 정치적인 것으로 번역해내는 과정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대목은 비율(ration)'이라는 개념의 강조이다. 모든 신체에는 각 요소들이 가져야 할 적절한 비율이 있으며, 이 비율이 잘 유지될 때 건강하고 안정된 신체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철자상으로 보아도 비율(ration)과 합리성(rationality)이라는 단어 사이에는 근친성이 있어 보인다. 비율을 맞춘다는 것은 신체를 분할해서 조율하는 것이며, 그것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만드는 장치를 우리는 수도원에서 시작된 시간표의 도입을 통해서 살펴본 바 있다. 실제로 베버는 신체를 계획된 것, 계산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일의 발생지를 수도원과 군대로 본다. 위대한 수사나 장군은 시간과 공간을 분할하고 사람들을 그것에 맞추어 생활하도록 강제하면 자신들의 원하는 목적을 훨씬 쉽게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베버는 사람들의 생활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분할하고 그것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것을 훈육이라고 개념화 했다. “훈육은 모든 것을 계산 가능하도록 그리고 공통의 명분과 합리적으로 의도된 목표에 헌신하도록, 대중들의 육체와 정신을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다. ”

 

>> 시간표의 도입등이 수도원과 군대에서 이루어진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우린 도대체 무엇을 훈육 받으면서 길러내고,길들여진것일까?

 

-271 우리는 통계학이 말 그대로 국가학(state+ics)’으로 불렸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271 신체의 자연적 리듬을 자본의 요구에 맞추어 새로운 리듬으로 대체하는 것! 신체는 새롭게 길들여진다. 그리고 길들여짐으로써 새로운 신체가 만들어진다. 이 새로운 신체는 통제나 관리가 훨씬 쉬워진 신체다. 한편으로 관료제 기계는 새로운 리듬을 가진 신체들을 생산해내며, 다른 한편으로 이 새로운 리듬의 신체는 관료제 기계에 더욱 적합한 신체로 거듭난다. 그런데 하나의 기계만 해도 다양한 부품을 필요로 하듯이 이 과정에서는 금욕적 소명을 가진 가본가적인 인간형만 생산되는게 아니다. 재화를 모으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관리하는 사람말고도 그런 사람을 위해서 묵묵히 일하는 노동자도 생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훈련되지 않은 채 자유로운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을 노동자로 사용할 수 없으며, 프랭클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렴치한 행동을 보이는 사업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274 훈육의 최고 목적은 능동적 자재다. 특히 능동적 검열과 관련해서 일기가 수행한 기능은 놀랍기까지 하다. 원래 일기는 교회 지도자들이 여신도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하루동안 행한 일들을 적어오게 했던 것이지만, 이제를 하루의 일들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약속을 하는 수단이 되었다. ----- 약속은 미래 행위를 고정시키는 일이고 그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변동을 최소화시키는 일이다. 이제 통제는 소극적인 것에서 적극적인 것이 되고, 수동적인 것에서 능동적인 것이 된다. 베버가 말하는 철창이 왜 그렇게 강력한것인지도 이로써 분명해진다. 그것은 제 스스로 걸어들어간 내적인 감옥이기 때문이다. 더 열심히 움질일수록 감옥은 더 강력하게 조여온다. “

 

>> 일기가 나온 유래가 재미있다.

하지만 일기가 제 스스로 걸어들어간 내적인 감옥이 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러면 왜 일기를 써야 할까? 움직일수록 감옥은 더 강력하게 조여오는데…….

 

 

5.베버의 정치학

 

-276 베버의 정치학은 합리적 훈육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고, 개인의 도구화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형 창출을 목표로 한다. 그가 주목한 것은 소명을 가진 정치인, 강한 책임 윤리를 가진 정치인의 출현이다. 영혼이 사라진 강철 겉옷 속에 다시 영혼을 불어 넣어 줄 수 잇는 사람, 스스로 강철 감옥보다 더 강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277 베버는 바람직한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이러한 내적 거리(inner distance)라는 점을 주장했다. 정치인에게는 소명에 대한 열정과 함께 뛰어난 목축능력(AugenmaP)이 요구된다. 목측능력이란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고 그것에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 내적인 거리를 두는 것이다. 왜냐면 정치란 머리로 하는 것이지 신체나 정신의 다른 부분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이 불모의 흥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정신을 강하게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며 이것은 거리를 두는 습관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적 거리두기의 능력을 갖춘 정치인은 일상 세계로부터도 자신을 분리해서 사고할 줄 안다.

 

>> 내적 거리 두기의 능력은 굳이 정치인에게 뿐 아니라 그 외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279 베버는 소명 의식과 거리 두기 능력, 책임감등을 가진 정치인에게서 관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발견한다. 이러한 정치인이야 말로 그가 보기엔 관료제 기계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정치지도자의 행위는 관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바로 책임 원칙을 따르고 있다.” 그가 책임 윤리를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그는 책임 윤리신념 윤리를 구분했다. 이 둘을 나누는 기준은 소명이 있느냐의 여부보다는 거리 두기의 능력과 그것에 대한 책임문제다. 자신의 행동을 거리 두기를 통해서 올바르게 예측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책임 윤리.

 

 

6.베버 전략의 딜레마

 

-283 현재의 상황을 인정하면서 가능한 해결책이 있는가? 합리적 수단의 효율성을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삶에 대한 그것의 지배를 막아낼 수 있는가? 베버는 관료제의 수단적 가치를 반성적으로 성찰할 줄 아는, 거리 두기 능력을 갖춘 정치인에게 기대를 걸었다.

 

-284 배버가 멈추어 선 곳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반성하는 합리성보다는 합리성 자체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베버의 말처럼 프로테스탄트가 테카르트의 코기토에 대한 변형이라면 필요한 것은 반성하는 코기토가 아니라 코기토 자체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베법는 문제를 좀 더 깊숙이 끌고 갔어야 했다. 근대의 합리성이 거리두기 일반이 아니라 하나의 특수한 거리두기 방식이었음을 이해했어야 했다. 필요한 것은 반성하는 개인이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반성하는지그리고 누가 반성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 반성하는 기준자체에 대해서 다시 고민을 해본적이 있는가? 기준 잣대가 잘못되었는지 보다는 그것의 준수여부만을 따졌다. 하지만 이제 기준 잣대에 대해서도 재고려가 필요하다

 

-285 베버가 바람직한 정치인의 덕목이라고 내세운 거리두기능력은 누구보다도 대중들 자신의 욕망과 능력에 기초해야 한다. 만약 거리두기가 제 자신의 욕망과 능력에 기초하지 않고 초월적인 존재나 신성한 가치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라고 불리든 또 그 사람이 어떤 다이몬을 선택했든, 그때의 거리두기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286 니체는 내적인 거리거리의 열정(pathos of distance)'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적이 있다. 거리의 열정이란 (사회 신체이든 개인 신체이든) 신체에 내재하고 있는 힘과 능력을 긍정하고, 그 힘과 능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차이(거리)를 생산해내는 열정이다. 거리의 열정을 가진 자들을 니체는 가치의 신봉자가 아니라 가치의 생산자라고 말했다. 초월적인 존재나 신성한 가치를 신봉하기 위해 제 자신을 합리적 기계속엣 던져 버리는 프로테스탄트들과 달리 내적인 거리거리의 열정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제 스스로가 이용할 가치를 생산해 낸다.

 

>> 거리의 열정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끊임없이 차이를 생산해 내는 열정. 꼭 그래야만 할까? 그것 없이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데... 무엇을 위해서일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다시 더 생각해보자.

 

-287 확실히 근대인들은 절대신의 무덤 속에서 절대신을 장사지냈는지도 모르겠지만 신앙까지 장사를 지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복종할 새로운 신들(다이몬들, 종교적 신, 과학적 진리,최대다수의 행복, 국가 등)을 찾아냈을 뿐이며 복종 자체를 폐기시키지는 못했다.

 

>> 끊임없이 신들이 태어났다가 죽기에 살아가는 동안은 그냥 그렇게 살다 가는 것일까? 뭔가 다른 것이 있는것일까? 이대로 나를 인정하면되는데 괜한 나의 허상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5.차이의 아상블라주를 향한 전망 -정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318 많은 질문들이 뒤에 답을 감추고 있다면 우리는 주어진 정치적 질문에서 답을 찾아보기보다는 다른 질문들을 구성함으로써 새로운 답을 찾아 나서는 일을 해야 할지 모른다.

 

-319 생태계의 다양성과 차이를 파괴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다. 생태계의 어떤것들도 자신의 특이성을 전개함에 있어 다른것과 대립하지 않으며, 종들의 다양성과 특이성이야말로 생태계 건강의 징표다.

 

>> 다양성과 특이성에 대한 존중이 중요하면서도 그렇게 길들여지지 않다보니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점점 더 노력해서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하리라.

 

-319 우리가 생태적이고 미적인 패러다임을 말한다면, 그것은 정치에 대한 어떤 생태적 신비화나 심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발견해야 할 정치적 주체들과 그들의 새로운 소통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상식과 보편성을 발견하기 보다 차이와 특이성을 발견해내는 것은 결코 정치에 생소한 것이 아니다. 낯선 것은 정치적이지 않은 것에 정치가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에겐 정치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멀리 떨어진것도 없다.

 

>> 정치가 사실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정치와 멀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깨어있는 민중이 되어야 하리라. 그래서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선택할 줄도 알아야 하고, 그것도 아니면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리라.

 

 

 

 

4. 내가 저자라면

니체는 나에게는 그저 먼발치에서만 바라볼 뿐 가깝게 갈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고병권같은 작가가 있어서 니체를 가까이에서 바라 볼 수 있게 되고, 니체를 더 좋아하게 된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그 첫 책이었고, 이번 책이 두 번째다.

제목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이 마음에 든다.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이라. 두 개의 눈, 한 개의 길만 있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세상은 천개 이상의 다양한 눈과 길이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것도 니체의 시선을 통해서.

마치 고병권은 고운기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삼국유사>>가 삼국유사를 일연이 요즘 태어나서 풀어서 쉽게 얘기해주듯이, 고병권이 니체가 아니지만 니체를 쉽게 현대적으로 다각도로 해석을 해주었다. 니체의 철학, 계보학, 해석학,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자연학과 윤리학, 인간에 대한 다른 생각, 가면의 철학을 통해 니체의 변신을 얘기해주었다.

니체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구속과 제제를 받으면 살아 움직이는지 생각하게 해준다. 우리가 받은 교육을 통해서 얼마나 많이 길러내고, 길들여진것일까? ‘국가라는 새로운 신이 탄생하면서 우리는 신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했던가? 그 속에서 개인이 취하는 행태는 너무나 미비하고, 안타까운 것은 왜 자기가 현재 이런 모습으로 와 있는지 조차 와 있을 수 있다는 경각심을 다시한번 알려주었다.

모르기에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국가, 사회, 회사라는 틀속에 있는 규율은 힘든 부분도 있지만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켜야 되는것에 앞서 why'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것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냥 해야 되는거 아니야?‘ ’그냥이라는 말이 너무 쉽게 나왔던 것인데 이제 그 부분에 대해서 다시한번 질문을 던져 봐야 겠다.

 

 

1) 전체적인 뼈대와 목차

 

1부에서는 니체의 철학, 계보학, 해석학, 근대 정치 비판, 권련의지와 영원회귀, 변신에 대해서 다각도로 다루었고, 2부에서는 베버의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와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에 대해서 다루었다.

 

-목차

서장 천개의 눈, 천개의 길

 

1.천 개의 눈

2.천 개의 길

3.천 개의 기원

4.천 개의 젖가슴

5.천 개의 주사위

6.천 개의 화살

7.천 개의 가면

8.천 개의 이야기

 

1-------------------------

1장 아모르파티 : 삶을 사랑하는 철학

- 니체와 철학사이에서

1.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

2.거인들의 웃음소리와 신들의 한탄

3.세 개의 죽음 -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 소크라테스의 경우

4.비극이 상연되는 극장과 심판의 법정

5.미래의 철학자

6.‘사랑의 의미

 

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니체의 계복학

1.계보학 1 - 비판

2.계보학 2 - 탐사

3.도덕의 자연사 (natural history)

4.강한 자와 선한 자

5.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6.도덕이라는 동물원

7.선악을 넘어서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1.헤르메스가 전하는 메시지

2.진리의 해석학

3.스핑크스의 눈

4.가치의 발명

5. 니체에 대한 해석학-방법과 스타일의 문제

6.헤르메스는 해석자였다.

 

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니체의 근대정치제제에 대한 비판

1.작은 정치의 시대

2.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 1- 근대 국가와 전쟁

3.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 2

-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 그리고 민주주의

4.길들이기와 길러내기

5.아곤의 정치

 

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자연학 + 윤리학

1.초월적인 것의 죽음과 내재적 우주론 - 원자론의 경우

2.왜 원자가 아니라 힘인가

3.힘의 질 - 능동과 반동

4.권력의지에 대한 오해

5.권력의지의 윤리학과 권력 느낌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자연학+윤리학

1.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그리스적 사유로부터

2.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 익숙한 오해

3.반복의 두 경우

-병에 걸린 차라투스트라와 회복된 차라투스트라

4.긍정을 부르는 긍정

5.차이의 놀이와 회귀의 비밀

 

7장 인간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1.‘(...und....)'

2.진화와 변신

3.신의 죽음과 인간의 몰락

4.보다 높은 인간들

5.놀이와 웃음, 그리고 춤

 

8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1.가면의 철학

2.비극의 시대에서 냉소의 시대로

3.화약 냄새가 사라진 전투

4.모든 가치의 전환

5.다시 떠나는 여행자

 

2

베버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1.근대라는 탈주술화된 주술

2.근대인의 탄생

3.관료제 기계

4.신체 길들이기, 신체 길러내기

5.베버의 정치학

6.베버 전략의 딜레마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1.문제제기

2.근대 국가의 두 얼굴-리바이어던과 인륜적 실체

3.자유주의의 차이의 문제 - 아나키에 대한 공포

4.공동체주의와 차이의 문제

-강한 국가를 향한 유기적 결합

5.차이의 아상블라주를 향한 전망

-정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2) 감동적인 장절

 

<< 책 머리에 >>

 

-4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들을 빠뜨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5 니체는 자신의 사상이 시대와 맞지 않는 때 아닌 것(Unzeitst)'이며 미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자신의 철학을 미래의 철학이라고 간주할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 있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지만 감각 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시간이다.

 

 

-18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가지 방식이 있다. 갈 길을 못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25 운명애(Amor fati) ,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운명애(Amor fati) , 이것이 나의 가장 내적인 본성이다

 

-31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53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와 있지만 항상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 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unzeit)'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56 판결문의 마지막 문장은 무엇인가? 바로 가치 평가이다. 우리는 그 숙명적 불행이 시작된 재수 없는 날을 기점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다. 왜 기독교 최후의 날로부터 계산하지 않는가? 오늘부터, 모든 가치의 재평가가 이루어진 오늘부터 따져서 말이.

 

-72 도덕의 자연사를 보면 한 시대의 도덕은 다른 시대의 악덕이며, “한 민족이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민족은 조롱거리, 치욕이라고 부른다.”

 

-78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pathos of distance)"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111 니체의 투시주의는 나의 해석은 이렇다. 그렇다면 당신의 해석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독자들은 자신의 해석을 말하도록 요구받는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보자.“ 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 신도들이란 다 그런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

 

-123 정치란 행위(프락시스, praxis)'의 영역인데, 행위란 자신의 어떤 것을 시작하는 것‘, ’주도하는 것이며, 타자와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거이다. 그러나 근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것은 정치가 아니라 사회이다. ’사회는 공통성의 영역이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영역이다. 그리스에서 정치적 영역이 갖추어야 할 필요불가결한 조건이 다원성이었다면, 공공선을 추구하는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은 표준화.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의 특성을 부각시키고자 했고, 독특한 행위와 업적을 통해 자신이 최고임을 보여주고자 했으나근대 사회에서 이러한 독특한 행위나 사건들은 통계학이 예외들을 다룰 때 보여주는 것처럼 , “하나의 일탈이자 동요일 뿐이다.

 

-127 가치 창조와 평가를 봉쇄했던 것이 근대 정치의 첫 번째 문제였다면, 두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적인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는 잔인한 길들이기길러내기가 개입한다. 니체가 저작의 이곳 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쓰고 있는 길들이기길러내기라는 표현은 가치의 습속화를 통한 근대적 정치 주체의 생산을 분석함에 있어 매우 유용하다

 

-142 첫 번째 작업이 길들이기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 작업은 길러내기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은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문명(길들임)의 과정은 무시무시한 맹수 같은 본성에 철퇴와 고문을 필요로 한다.

 

-195 생성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만큼이나 시간 역시 생성을 필요로 한다. 깨달음의 시간은 차라투스트라의 새로운 생성, 새로운 변신을 필요로 한다. <<차라투스트라>>에서 깨달음의 과정과 변신의 과정은 똑같이 진행된다.

생성 즉 시간을 긍정하기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무엇보다도 과거와 대면해야 한다.

 

 

-196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 그것은 죽음까지도 살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번! ’ 이렇게 외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과거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 과거를 생성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개의 길이 만나는 출입구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순간이라는 이름이 쓰여있다. 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다. 순간이라는 입구에서 하나의 기나긴 길을 뒤로 달리고, 다른 길은 앞으로 달린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모든 순간들에는 이 세 개의 공간들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 공존의 공간이 순간들은 흘러간다.’ 순간들의 생성, 그리고 소멸.

순간들을 통해 볼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순간들속에 다른 시간과 공존하며 경쟁하고 있는 시간이다. 미래를 찾기 위해 과거로 향하는 계보학자들이 이해하듯이 미래란 지나가 버린 순간들 속에도 들어 있다.

 

 

-208 니체가 운명애(Armo fati)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자기 자신의 생성이었다. 새로운 자신을 만들라!

 

-216 인간이란 결국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하다.

 

-219 낙타는 잘 견디는 정신의 표상이다. 낙타는 모든 무거운 것들을 맡아 진다. 주어진 가치를 묵묵히 수행하기만 하는 낙타는 선악에 있어 창조자가 되고 싶은 자는 먼저 파괴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는 -(l-a)’라고 우는 나귀와 같은 족속으로 , ‘(Ja, 긍정)’에 대한 잘못된 발음 즉 긍정의 정신에 대한 오해를 상징한다.

이에 비해 사자는 거대한 부정의 정신이다. 낙타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사자는 이해한다.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 자신의 터전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거대한 용이 나타나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모든 가치는 내 몸에서 빛난다...... ‘너는 해야만 한다 (당위와 의무)’만 존재한다고 말할 때, 사자는 으르렁거리며 나는 하고 싶다를 외친다.

그러나 사자 역시 긍정을 알지 못했다. 사자는 부정조차 긍정하는 정신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나는 하고 싶다보다 위에 있는 것은 나는 존재한다이다. 사자가 할 수 없는 일을 어린아이가 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사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린아이는 존재 자체로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한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이고,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다.

 

-239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니체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섬세한 손가락과 용감한 주먹이다. 세세한 차이를 읽어낼 줄 알고 어떤 위험한 주장도 그대로 들어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소화 불량증을 가져서도 안되므로 강한 위장도 있어야 한다. 즐거운 소화작용이 필요하다. 복수심이나 원한은 금물이다. 이러한 독자라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의 괴물일 것이다. 추론하기 보다는 제 방식대로 소화시키는 괴물!

 

완벽한 독자를 상상해보면 그 완벽한 독자란 항상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하나의 괴물로 변하곤 한다. 게다가 그는 순종적이면서도 교활하고 조심스럽다. 그는 또한 하나의 타고난 모험가요 발견자이다.

 

-247 병균속에서도 치료의 백신을 찾아내듯 니체는 상처로부터 치료의 힘을 발견한다. “치료하는 힘이란 우리가 입는 상처에도 있는 법이다. 호기심이 강한 식자들을 위해 출처를 밝히지는 않지만 다음은 나의 오랜 좌우명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248 <<선악을 넘어서>>의 부제는 미래 철학을 위한 서곡이다. 미래의 철학자와 정치가는 하나의 전쟁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모든 가치의 전환’, 이것이 인류에 있어 최고의 자기 성찰의 행동을 위한 정식이고, 이것이 나의 살이 되고 천재성이 된다.... 나는 전에 아무도 나만큼 거역하지 못하였을 정도로 거역한다. 그럼에도 나는 부정적 정신의 소유자와는 반대자다. 나는 기쁜 소식을 전달해주는 복음의 사자이다. ..... 모든 것이 허위였으므로 지상에는 미증유의 전쟁이 있게 된다. 나의 출현과 함께 세상은 위대한 정치를 펼치게 될 것이다.

 

 

-250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아라. 너희가 나를 완전하게 부정하였을 대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 프리드리히 니체

 

-253 이제 이 책의 첫장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Nitimur in vetitum!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266 맑스는 기계와 노동수단을 혼동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그는 이 글에서 기계가 노동자의노동수단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계는 더 이상 노동자의 활동을 대상에 전달하는 게 아니며, 오히려 노동자야말로 기계의 작업을 돕고 관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계는 단순히 낫이나 괭이처럼 노동하는 사람의 노동을 전달해서 무언가를 생산하는 수단이 아니다. 노동수단과 노동자의 관계에서의 생산자는 노동자이지만 기계와 노동자의 관계에서의 생산자는 기계다.

...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은 사라진다. 생산하는 것은 관료제로 불리는 기계다. 인간 역시 기계의 생산작업에 동원되는 부속품일 뿐이다. 소명의식에 불타던 근대인은 언제부턴가 주어진 절차와 규정에 의거해 수동적으로 일 처리에 동원되고 있는 암울한 근대인으로 돌변해 버렸다. 베버가 <<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마루 하고 있는 구절을 보자

 

-284 배버가 멈추어 선 곳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반성하는 합리성보다는 합리성 자체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베버의 말처럼 프로테스탄트가 테카르트의 코기토에 대한 변형이라면 필요한 것은 반성하는 코기토가 아니라 코기토 자체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베법는 문제를 좀 더 깊숙이 끌고 갔어야 했다. 근대의 합리성이 거리두기 일반이 아니라 하나의 특수한 거리두기 방식이었음을 이해했어야 했다. 필요한 것은 반성하는 개인이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반성하는지그리고 누가 반성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286 니체는 내적인 거리거리의 열정(pathos of distance)'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적이 있다. 거리의 열정이란 (사회 신체이든 개인 신체이든) 신체에 내재하고 있는 힘과 능력을 긍정하고, 그 힘과 능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차이(거리)를 생산해내는 열정이다. 거리의 열정을 가진 자들을 니체는 가치의 신봉자가 아니라 가치의 생산자라고 말했다. 초월적인 존재나 신성한 가치를 신봉하기 위해 제 자신을 합리적 기계속엣 던져 버리는 프로테스탄트들과 달리 내적인 거리거리의 열정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제 스스로가 이용할 가치를 생산해 낸다.

 

-287 확실히 근대인들은 절대신의 무덤 속에서 절대신을 장사지냈는지도 모르겠지만 신앙까지 장사를 지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복종할 새로운 신들(다이몬들, 종교적 신, 과학적 진리,최대다수의 행복, 국가 등)을 찾아냈을 뿐이며 복종 자체를 폐기시키지는 못했다.

 

-319 생태계의 다양성과 차이를 파괴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다. 생태계의 어떤것들도 자신의 특이성을 전개함에 있어 다른것과 대립하지 않으며, 종들의 다양성과 특이성이야말로 생태계 건강의 징표다.

 

 

-319 우리가 생태적이고 미적인 패러다임을 말한다면, 그것은 정치에 대한 어떤 생태적 신비화나 심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발견해야 할 정치적 주체들과 그들의 새로운 소통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상식과 보편성을 발견하기 보다 차이와 특이성을 발견해내는 것은 결코 정치에 생소한 것이 아니다. 낯선 것은 정치적이지 않은 것에 정치가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에겐 정치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멀리 떨어진것도 없다.

 

3) 보완점

제목이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이라고 해서 니체 얘기만 나올 줄 알았는데 2부에 베버의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에 대해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2부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도 니체를 다각도로 분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비버를 가볍게 다루면서 근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하다보니 전달하려는 키 메시지가 사라진 것 같다. 내용은 음미할 부분은 많이 있었지만, 오히려 다른 책에서 이 주제를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루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

 

4) 키워드

가치의 재평가, 철학, 사랑, 비판, 탐사, 용기, 박식함, 차이, 투시주의, 동물원, 길들이기, 길러내기, 자유, 개인, 아곤, 안타곤, 권력, 얼굴, 가면, 모든 가치의 전환, 복음의 사자, 미증유의 전쟁, 탐험가, 여행자, 가면놀이, 변신, 영원성, 가치 전환의 실험, 근대적 인간형, 자본주의적 인간, 철창, 내적인 감옥, 거리두기,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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