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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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기 김정은
나는 나의 과거와 직면해야 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작업은 매우 힘들었지만 보람 있었고, 심지어 신나기까지 했다.
- 데이비드 스몰 -
“소년은 나이 여섯 살, 엄마는 툭하면 잔기침을 했고 방구석에 숨어 조용히 흐느끼거나 찬장 문짝을 후려치듯 닫곤 했다. 그것이 엄마의 언어였다. 아빠는 퇴근하기가 바쁘게 지하실로 내려가 샌드백을 두드렸다. 그것이 아빠의 언어였다. 소년의 형은 북을 두드렸다. 그것이 형의 언어였다. 그리고 여섯 살 소년의 언어는 '앓아 눕기' 였다.”
<바늘땀>의 도입은 이렇다. 평소 좋아했던 그림책 작가 데이비드 스몰의 자전적 카툰 <바늘땀>이 열린책들의 자회사인 미메시스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얼른 빌려서 동네 책 모임 멤버들과 돌려 읽었다. 한 번 읽고 충격이 가시지 않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었다. <리디아의 정원>처럼 아름다운 작품을 써 낸 작가의 어린 시절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바늘땀'은 어린 소년의 여린 목을 헤집고 장화 끈을 졸라매듯 얼기설기 떠놓은 수술의 흔적이기도 하며, 작가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상처이기도 하다.
독극물로 자살을 시도한 증조 외할아버지와 도벽이 심했던 증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지하실에 가둔 후 집에 불을 지르고 그 불길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정신 병원으로 실려가게 된 외할머니, 선천적으로 심장과 허파의 기능에 장애가 있었던 매정한 엄마와 엑스선 전문의, 하지만 아들에겐 무관심한 아버지. 그리고 선천적으로 호흡기와 소화기에 장애가 있었던 작가 자신인 어린 소년.
과학의 전사로서 ‘엑스선이 그의 무기, 무슨 병이든 말끔히 치료할 기적의 광선’이라며 어린 아들의 병을 낫게 할 목적으로 아버지는 수시로 아들에게 엑스선을 쏘아 주었다. 작가가 열한 살, 집을 방문한 아버지의 친구가 소년의 목에 큰 혹을 발견하고 진료를 받아보라고 당부하지만, “진료를 받으려면 돈이 드는데 이 놈의 집구석엔 돈이 남아나지 않거든!”이라는 엄마 아빠의 유례없는 소비에 밀려 소년은 진료를 받지 못하게 된다.
열네 살이 되어 소년은 겨우 수술을 받게 된다. 두 차례의 수술은 그의 목에 긴 장화의 끈처럼 얼기설기 꼬매 놓은 ‘바늘땀’을 남긴다. 소년은 혹과 함께 갑상선, 성대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목소리를 잃은 소년은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의 차를 몰고 어디론가 도주하다가 절도죄로 경찰서에서 지내는 신세가 된다. 이후 소년은 육체 노동을 중요시하는 남자기숙학교로 강제 전학을 가게 되지만, 학교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어린 소년을 전문가 상담을 요망하며 귀가 조치 한다.
"넌 말이 안 되는 세상에 갇혀 살아온 거다, 데이비드. 누구도 네게 사실을 얘기해 준 적이 없었지. 하지만 난 사실을 얘기해 주마. 네 어머니는 널 사랑하지 않아. 미안하다, 데이비드. 하지만 사실이야. 널 사랑하시지 않아."
흰토끼 선생님(신경정신과 전문의)의 고백! 뾰족한 창이 심장을 관통한 듯 아픔을 느끼며 소년은 바닥에 엎드려 정신 없이 울기 시작했다. 소년이 흰토끼 선생님의 다리를 붙잡고 우는 모습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갑자기 작아져 자기가 흘린 눈물의 계곡에 빠지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침묵만이 군림하며 자유로운 발언은 일절 금지됐던 집안에서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흰토끼 선생님과 함께 하면서 점차 이해되기 시작했다.
상태가 호전된 열다섯 살 소년은 어느 날 엄마의 동성애 정사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엄마는 레즈비언이었던 것이다. “네가 암에 걸린 건 나 때문이다.” 소년이 암에 걸렸던 것은 아버지의 과도한 엑스선 치료 때문이었다고 또 다른 날 아버지는 고백했다.
열여섯 살 소년은 이상한 가족과 결별한다. 외할머니, 엄마의 길을 가지 않을 것을 선언하며 집을 나온다. 흰토끼 선생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집시 생활을 하면서도 세계적 화가가 되고자 하는 꿈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소년은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
작가는 <바늘땀>을 통해 이토록 아픈 기억을 털어놓았다. 왜? <바늘땀>은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작이 되는 등 전세계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왜? 동네 책 모임 멤버들과 나는 여러 날을 <바늘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나는 어린 시절 행복했었나, 아니면 데이비드처럼 불행했었나. 부모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부모는 소년을 사랑하지 않았고, 소년은 그 사실과 직면해야 했다. 소년이 자라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아픔을 끄집어내는 순간, 끔찍한 기억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승화시키는 순간, 마음속 상처 입은 소년은 조금씩 치유되었다. 독자들은 작가가 고통을 치유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바늘땀>을 통해 지켜보며 카타르시스를 넘어 자신의 가려진 기억들을 들춰내고, 또 위로 받는다.
진리의 식물은 토양에 따라 달라지며, 한 인간이 병들고 우울했을 때 생각해 낸 모든 진리들은 그 질병의 표현이라고 했다. 무언가를 표현하기에 앞서 치유가 우선인 이유이다. <바늘땀>을 보며 또 한번 용기를 내어 본다.
“나는 나의 아픔과 직면하고 있다. 쉽지는 않지만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작업은 매우 힘들지만 보람 있고, 심지어 신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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