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종
- 조회 수 1925
- 댓글 수 3
- 추천 수 0
Column 9
어쩌다 마주친 그녀들
강종희
2014. 6.30
2012년 겨울, 그녀들을 만났다. 멘붕의 겨울, 이 시기만 되면 찾아오는 동면의 욕구에 충실하며 최대한 무감무탈하게 건너고 싶었던 그 겨울에, 나는 그녀들과 예상도 못했던 내면의 여행을 감행했다. ‘행복한 가족심리학’이라는 제목을 단, 무료 강좌인 학부모수업.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은 아침 열 시, 구내 도서관 지하강의실에 모인 엄마들은 서른이 안 된 앳된 엄마부터 대학생 아들을 둔 오십 대 엄마까지 다양했다. 아직 전업주부의 한가한 아침이 불편했던 나는 내용과 관계없이 학부모로서 역할에 뭔가 투자를 한 적이 없었던 과거의 반성 차원에서, 이제라도 좀 보충을 해보자는 생각에 그 수업을 신청했더랬다.
첫 수업시간, 아직 어색한 분위기에서 ‘이 수업에 대한 나의 기대’를 돌아가며 말하는 자리였다. 이제 사춘기가 되는 큰 아이와 대화가 잘 안 되네요, 아이들과 보수적인 남편 사이에서 갈등을 중재할 방법이 있나 해서요, 아이에 대한 제 기대가 너무 커서 컨트롤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등등. 첫 수업 시간이었고 다들 처음 보는 사람들임에도, 엄마들은 과감하게 지금 절실한 이슈들을 꺼내 보였다. 나는 아직 동네에 커피 한 잔 함께 할 동지도 없는, 어설프게 나이만 많은 초보 전업 주부였고 학기 초 아이들의 학교에서 진행하는 학부모공개수업 외에 이토록 많은 엄마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자리에 있어본 적이 없었다. 쭈뼛쭈뼛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다른 엄마들의 이야기를 듣는데 식은 땀이 났다. 헉, 나도 이거 뭔가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겨? 뭘 이야기하지? 아무 생각도 없이 수업을 신청했던 터라 선생님의 눈이 나를 향할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이거 수업 신청 잘 못 했다!
그 어색한 세 시간 짜리 수업이 끝나기 전에, 세 명의 엄마들이 울었다. 그 중에 한 명은 나였다. ‘지금 당신이 이 곳에 온 이유’에 제대로 할 말이 없던 나는, 엉뚱한 이야기로 얼버무리려다 부채도사 같은 선생님의 질문에 딱 걸리고 말았다. 이 곳에 온 모든 엄마들은 자식 또는 남편과의 관계 문제, 또는 이해할 수 없는 자식의 문제를 풀어보고자 왔다가 결국은 본인의 심리적 상처를 발견하고 말았다. 나는 나대로,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굴려다 오히려 밥 차리고 설거지하고 아이를 맞는 일상에 숨어 도피하려던 내면의 현실부정욕구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일주일에 두 번, 여섯 차례에 걸친 수업에서 선생님은 주로 조용히 질문했고,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처음에는 힘들게, 나중에는 봇물 터진 듯 풀어 내었다. 아이를 학원과 학원 사이로 돌리다 이제 반항을 시작한 딸과 갈등을 빚던 엄마는, 정작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아무 기대도 받지 못해 방치되었던 어린 시절의 상처를 눈물로 쏟아 내었다. 큰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불편해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는 한 엄마는, 사고뭉치 형제들과 경제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를 막내임에도 뒷바라지해야 하며 자신의 욕구를 억눌렀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일을 하지 않는 나에게 존재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정체성 상실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줄곧 내밀던 명함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나니, 나는 나를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내게는 명함이 방패이자 벙커였던 것이다. 나는 나의 존재를 두 아이의 엄마이고 한 남자의 아내이며 마흔 하나의 여성인 것만으로는 정당화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상처받은 내면아이들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있는 것은 옳지 못하며 그들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을 때에만 의미있고 중요하다고 배웠다. 이것은 우리의 ‘나 됨’을 상실하게 만든다. (상처받은 내면 아이, 309P)
그 어색했던 첫 수업시간에 만나 함께 울었던 일곱 명의 그녀들과 나는 두 달간의 수업 과정이 끝나고 선생님과 별도의 그룹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다 생각했던 기억과 감정을 나누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상처받은 내면 아이를 보듬어 안고, 성처를 줬던 부모님과 화해하는 단계까지 나아갔고, 어떤 이는 어떤 문제도 없다며 외면해왔던 내면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무려 6개월이나 쉬었다며 인생이 끝나가는 것처럼 불안해하던 일중독에서 벗어나, 게으르고 뻔뻔하게 나의 halftime을 즐기게끔 되었다. 사실 아직도 나의 정체성과 씨름 중이지만, 이제는 전업주부와 프리랜서 사이에 헐겁게 걸쳐놓은 일상을 별 어려움 없이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바닷바람 가득한 해운대가 조금은 더 집처럼 느껴졌던 것은 그 해 겨울의 수업 탓이 크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4172 | #13 말하지 않아도 알아? 과연! [7] | 희동이 | 2014.07.07 | 1950 |
4171 | 붕어빵 속에 우정? [7] | 왕참치 | 2014.07.07 | 1928 |
4170 | 라면을 먹다 울었네 [10] | 에움길~ | 2014.07.07 | 1998 |
4169 | 바보 영길이_구달칼럼#13 [11] | 구름에달가듯이 | 2014.07.07 | 2017 |
4168 | 중세의 종결 [14] | 앨리스 | 2014.07.07 | 2116 |
4167 | ‘데카메론’을 통한 나의 숨은 그림 찾기_찰나칼럼#13 [8] | 찰나 | 2014.07.07 | 1981 |
4166 | #13 다시 혼란_정수일 [14] | 정수일 | 2014.07.07 | 2117 |
4165 |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라 [10] | 어니언 | 2014.07.06 | 1968 |
4164 | 흔들리는 세상, 중심에 서다 [2] | 유형선 | 2014.07.05 | 1991 |
4163 | 좋은 부모가 되려면 [2] | 정산...^^ | 2014.07.02 | 2059 |
4162 |
J에게 : 2편의 영화와 해피엔딩 ![]() | 타오 한정화 | 2014.07.01 | 1988 |
4161 | 3-12. 중독의 추억 [5] | 콩두 | 2014.07.01 | 2310 |
4160 | 3-11. 희동이 오디세우스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5] | 콩두 | 2014.07.01 | 2604 |
» | 어쩌다 마주친 그녀들 [3] | 종종 | 2014.06.30 | 1925 |
4158 | 오마이싼_구달칼럼#12 [3] | 구름에달가듯이 | 2014.06.30 | 1924 |
4157 | 푸른 수염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9] | 에움길~ | 2014.06.30 | 2210 |
4156 | 나만의 월드컵 [4] | 왕참치 | 2014.06.30 | 1898 |
4155 | 나의 내면아이를 만나다_찰나칼럼#12 [9] | 찰나 | 2014.06.30 | 2021 |
4154 | 그저 지금 이 자체로 아름다운 너 [5] | 녕이~ | 2014.06.30 | 2019 |
4153 | 바늘땀 들여다보기 [9] | 앨리스 | 2014.06.30 | 21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