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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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은 때때로 피하고 싶은 일이다. 이상적인 모습이 확고한 경우에는 더욱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정확하게 보기 어렵다. 음악중심에 나오는 아이돌 몸매에 익숙해지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외면하게 된다. 예리하고 품격 있는 고전을 읽고 나면 내 글이 초라해 보인다. 채 다 피지 못했던 지나간 사랑도 상대 탓을 하면서 무용담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외면하고 싶었던 온갖 종류의 불운과 찌질함이 내게도 존재한다는 걸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성장한다.
자신에 대한 진솔함. 이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데카메론은 한 가지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당신이 내일 죽는다면, 오늘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이 질문은 죽음을 끌어와 삶의 길을 밝히는 등대로 쓰자는 의도다. 만일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알고 있다면, 미필적 고의로 못본 척 미루고 있는 여러 가지 후회와 소원들을 더 이상 옷장 속에 처박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오히려 이기적일 정도로 솔직해져야 할 것이다. 이 책은 1300년대 중세에 출간된 책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간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래서 신 중심의 중세시대에서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를 불러오는 세 권의 책 중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 위대한 질문의 힘이다.
조반니 보카치오가 이 책을 썼던 13세기는 흑사병의 창궐로 전 유럽 국가의 인구 3분의 1이 죽어나가는 시대였다. 세 명중 한 명은 반드시 죽는다. 책은 지독한 죽음의 손길을 피해 먼 교외로 열 명의 남녀가 피신하면서 시작한다. 그들은 하루에 개인당 한 가지의 이야기를 총 열흘간 나눈다. 서로 다른 백 개의 이야기가 책의 갈피마다 자리잡고 있다.
데카메론의 이야기 속에는 여러 인물들이 나온다. 그들은 하나 같이 엄청난 가십의 중심에 서있다. 정숙하기로 소문난 부인과 몰래 만나는 수도사나 벙어리 정원사와 부정한 짓을 일삼는 수녀원의 수녀들이나, 해적 두목에게 납치되어 전남편을 못 본 척하는 아름다운 부인이 나온다. 권선징악이라는 교훈을 버림으로써 모든 이야기들은 결말을 예측할 수 없다. 인물은 주어진 이상에 충실하지 않다. 속세를 등진 성직자의 순결함과 유부녀의 정숙함은 욕망 앞에 색이 바랜다.
책을 관통하는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은 오직 사랑만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욕망이자 동기라는 점이다.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을 쓰고 자신의 책을 무척 부끄러워했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신 중심 사고방식으로는 불경한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 낸다는 것이 당당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려낸 인물들이야 말로 살과 붉은 피를 가진 인간이다. 인간은 이상적이지 못하다. 신은 찬란하고 선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것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로지 인간적인 욕망만이 결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나는 부정에 찬동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욕망의 추진력을 내 편으로 삼고 싶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진솔함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변경연의 개인 대학이 시작된 지 이제 10년이 지났다. 연구원이 되고 첫 번째 관문은 경치 좋은 바닷가에서 열리는 나의 장례식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많은 눈물과 함께 자신의 삶이 어땠는지 진솔하게 돌아본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씩을 남기고, 안에 있는 가장 깊은 후회를 꺼내 든다. 용감하지 못했음을 슬퍼하고, 두 번째 삶이 주어졌을 때엔 남은 욕망을 아낌없이 쏟아내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우리는 두 번째 삶을 시작한다.
죽음을 곁에 둔 삶이야말로 아름답다. 그것은 끝나버리기에 찬란한 봄과도 같다. 언젠가 끝이 있다는 명백한 결말 덕분에 우리 또한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자신에게 털어놓자. 후회 없이 살자. 사랑한다고 말하자. 용서를 구하자. 더 아름다워지고 싶다면 오늘 당장 시작하자. 아직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일단 가장 끌리는 것을 시작하자. 춤을 시작해도 좋고, 악기를 하나 배우는 것도 좋다.
죽음을 염두에 둔 진솔함에 대해 이야기 하려니 나부터 책을 읽은 결과물을 털어놓아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을 느낀다. 그래서 여기에 아무도 궁금하지는 않겠지만 내 지나간 사랑 이야기를 하나 꺼내놓으려 한다. 23살에 타국에서 좋은 사람을 만났다. 어찌어찌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나를 사랑했다. 그러나 나에게 예쁘다는 이야기를 한번도 하지 않았다. 나의 고칠 점들을 잔뜩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나는 그게 가장 필요했기에 무척 서운했다. 원래 그런 사람인가 하다가도 어느 연예인이나 아이돌을 그 친구가 찬탄하듯이 이야기하면 속이 상했다.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예쁨 받기를 원한다고, 좋은 점도 말해달라고 난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자제했다. 서운함을 갖는 것 자체가 미숙해 보였다. 나는 나를 외면했다.
서운한 사람에게 말이 곱게 나가지 않는 법이다. 게다가 당시의 나는 내 미래에 대해 매우 불안하고 비관적인 상태였다. 나는 이 친구가 나에게 실망하여 곧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친구까지 매우 불안하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하지 않기 위해 많은 시간을 견뎠다. 최소한 그 친구는 나보다는 좀더 낙관적으로 이 관계를 보았던 것 같다. 상황을 바꿔보기 위해 잘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비교하면서 나는 더욱 지독한 자괴감에 빠졌다.
우리는 대화하지 않은 채 서로의 가장 힘들었을 시간을 모르고 지나가버렸고, 결국 이 관계는 내가 갈구한 관심의 표현을 다른 사람에게서 구하면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벌인 일이 어찌나 후회가 되던지 헤어지자고 전화하던 날 나는 많이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S오빠, 미안해. 내가
좀 많이, 어리고 치졸하고, 이상적인 나와 남친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었어. 옆에서 견디느라 진짜 힘들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를 사랑해주어서 참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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